가비노 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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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비노 소사
(Gabino Sosa)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국적
출신지
포지션
공격수
신체조건
불명
등번호
소속팀
센트랄 코르도바 (1913-1919)
인스티튜토 코르도바 (1920)
센트랄 코르도바 (1921-1936)
국가대표
15경기 / 6골 (1921-1927)

센트랄 코르도바의 이름


1. 생애
1.1. 선수 생활
1.1.1. 클럽1.1.2. 국가대표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뒷이야기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

1. 생애[편집]

1.1. 선수 생활[편집]

1.1.1. 클럽[편집]

가비노 소사는 1913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 로사리오의 지역팀 중 하나인 센트랄 코르도바에서 데뷔하였다. 초기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레프트였고 당시의 계약은 그저 클럽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소사에게 이적 거부권이 있었다. 비록 센트랄 코르도바는 소사가 있을 시절에 단 한 번도 1부 리그에서 뛰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거의 모든 커리어를 센트랄 코르도바에서만 보냈고[2] 그러면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일한 선수였다.

그의 이런 헌신을 기려 소속팀 센트랄 코르도바는 홈구장의 이름을 가비노 소사로 명명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1.1.2. 국가대표[편집]

소사는 1921년 코파 아메리카의 개막전이었던 브라질전에서 센터 포워드로 첫 선을 보였다. 하지만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고 다음 경기부터는 사루포로 교체되었다. 이 대회에서의 우승이 유일한 소사의 우승 기록이었다. 하지만 1926년 대회에서는 소사가 주인공이었다. 비록 팀은 라이벌 우루과이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파라과이와의 시합에서 4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면서 8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소사는 이 대회에서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고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오버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그의 기술적 능력은 게임의 추를 가져오는데 효율적이었다. 또한 게임을 읽는 훌륭한 시야 역시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엘 그라피코의 저널리스트였던 프라스카라는 소사가 우아하게 공을 다루는 것과 그의 팀이 게임을 이끄는데 전술적인 지능이 좋았다고 강조했다.

3. 뒷이야기[편집]

  • 소속팀에게 그가 계약으로 받은 것은 돈 400 페소와 인형이었는데, 인형은 그의 딸 라룬차를 위한 것이었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 아드리안 베카 바렐라 컵 우승 1회: 1933(센트랄 코르도바)
  • 산티아고 피나스코 컵 우승 3회: 1923, 1927, 1928(센트랄 코르도바)
  • 루시아노 몰리나스 주지사 배 토너먼트 우승 2회: 1932, 1936(센트랄 코르도바)

4.2. 국가대표[편집]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1920년에만 군복무로 인해 인스티튜토 코르도바에서 뛴 것이 유일한 외부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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