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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국 폰티펙스 막시무스
로마 공화국 집정관
로마 공화국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CAIVS IVLIVS CAESAR
파일:Julius_Caesar_Coustou_Louvre_MR1798.jpg
니콜라 쿠스투가 제작한 조각상 (1696)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재[1]
출생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 공화국 로마[A]
사망
기원전 44년 3월 15일 (향년 55세)
로마 공화국 로마[A]
1. 개요2. 상세

1. 개요[편집]

Vēnī. Vīdī. Vīcī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가 원로원에 보낸 편지의 전문.
고대 로마의 정치인. 군사, 정치, 종교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경지에 달했으며 저널리즘과 학술 면에서도 당대의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공격용 유머와 채무 불이행 및 유부녀 공략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졌던 사나이.

2. 상세[편집]

세계사상 진시황과 더불어 왕을 능가하는 황제의 개념을 창시한 양대 인물로, 본인은 황제가 된 적이 없으나 그의 이름은 양자이자 정치적 상속자 아우구스투스에게 그대로 전해진 데다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네로 이후 오토 때부터 로마 황제 제호 기본 틀로 정착되면서 황제라는 의미로 남게 되었다. 독일어권에서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와 슬라브어권에서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인 차르도 그의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오늘날에 제정 시대라고 하는 기원전 29년 이후 로마 시대 이래 로마인들에게 사실상 황제로 인식됐고, 티베리우스 ~ 클라우디우스 1세까지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 황제들에게는 직접 언급이 자제됨에도 그들의 정통성 기반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중시조로 인식됐다. 따라서 카이사르가 직접 황제가 되지 않았음에도, 3대 황제 가이우스 시대 일화의 예처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게 카이사르는 그들 일가의 실질적 시조이자 정통성의 근거로 인정받았고 그의 이름은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이용됐다.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으며, 갈리아를 정벌하고, 정적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자신에게 정치 권력을 집중시켰으나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미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 공화정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는 제정으로 변모해 로마 제국이 되었다.

카이사르가 황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이견이 있어 왔는데, 근대 이전까지는 카이사르를 최초의 로마 황제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으며, 그 이름은 후대의 유럽 국가에서 황제를 뜻하는 단어로 변형되었다. 그 뒤 19세기 이후 역사학계에서 카이사르의 정치 체제와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과의 차이를 들어 아우구스투스를 최초의 황제로 보는 시각이 주류가 되었다.
[1] 재미있게도 로마의 적으로 유명한 한니발 바르카의 조각상 옆에 세워놓았다.[A] 2.1 2.2이탈리아 라치오 주 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