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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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1]
정변의 중심지, 우정총국의 모습.

1. 개요2. 정변 주도 세력의 인적 구성3. 정변 이전의 상황4. 전개
4.1. 갑신정변4.2.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4.3. 삼일천하
5. 결과6. 정변 이후7.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의 말로8. 갑신정변 참여자들이 밝힌 실패 이유
8.1.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평가8.2. 박영효의 평가8.3. 서재필의 평가8.4. 윤웅렬과 윤치호의 분석
9. 평가
9.1. 부정적9.2. 긍정적
10. 대중매체에서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KBS 역사저널 그날 중에서
갑신정변()은 1884년(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고종 부부의 신변도 확보했고 과단성 있는 숙청에 비해 허무하게도 삼일천하로 끝났다. 실패한 주요 이유는 민중의 지지가 없었고, 일본 제국이라는 외세를 이용하려 했지만 빠른 손절로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현재 조계사 자리인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2. 정변 주도 세력의 인적 구성[편집]

조선 후기에 봉건 체제의 틀을 깨트리고 자본주의 및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상을 가진 급진 개화파들(일부 중인 출신 지식인 및 양반들)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뭉치게 되었다. 급진 개화파들은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 정세에 맞추어 조선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들은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2],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박영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 서적을 통해서 실학 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균 나이 25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엘리트 열혈 청년들이었다. 김옥균이 유일하게 30대였으며, 서재필은 19세. 이들은 자신들을 개화당으로,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세력을 수구당이라고 불렀다. 유사한 표현으로 급진 개화파는 독립당, 일본당, 김씨당 등의 표현이 있고 온건 개화파는 사대당, 청국당, 혹은 민씨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상대에 대한 비칭이다. 이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당파성론 속에서 강화되었고, 이 때문에 급진 개화파에 대한 표현이 아주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온건파 거두인 김홍집, 김윤식은 정변 때 급진 개화당이 내각에 넣어주었고 어윤중은 급진파, 친일파들과 가깝게 지냈다. 또한 갑오개혁 때만 봐도 온건 개화파와 민씨 척족의 대립 역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개화파는 개항 후 전개되는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지를 모으는 한편, 개혁 운동의 수단으로써 당시 서구의 근대 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이의 결과물로 조선 정부의 일본 수신사 및 조사 시찰단에 적극 참여하였다.

3. 정변 이전의 상황[편집]

그러던 중 조선에서 발생한 1882년 임오군란은 중전 민씨(명성황후) 척족의 위기였고 개화파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다.

임오군란으로 청에 간 사신들[4]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공국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군을 움직였고, 청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한 민씨 세력은 청나라의 눈치를 보게 됐다. 청나라는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외교), 위안스카이(군사), 마젠창(재정) 등 고문을 파견하고[5], 영약삼단으로 조선의 독자적 외교를 금하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로 청국 상인의 조선 국내 무역이 가능하게끔 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해 갔다. 즉 그들이 영국 등의 서구 열강에 당했던 그대로, 기존의 책봉 - 조공 관계를 넘어선 근대식 종주국 - 종속국 관계를 만들려 했던 것.

이 시기에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급진 개화파의 두 갈래로 찢어진다. 위정척사는 답이 없고 개화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선 뜻을 같이 했으나, 그 속도와 구체제 인사 청산 범위를 놓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구신들과 민씨 척족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는 급진파와 이에 회의적이었던 온건파는 반목한다. 온건파는 힘을 기르기 전까진 청과의 사대외교를 중단하지 않길 바랐고, 급진파는 과의 신속한 사대교린 중단을 요구했다. 급진 개화파들은 아편전쟁, 영토 할양 등으로 청나라가 이미 기울었고, 청나라는 저물어가는 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종은 개화파들을 원래 아꼈는데, 김옥균과 고종의 매제 박영효 등은 왕의 총애를 믿고 서구식 정책들을 밀어붙이려 했다. 그래서 민씨 척족과 그에 손잡은 온건 개화파 및 청의 고문 묄렌도르프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개화당이면서도 동시에 민씨 척족이기도 했던 민영익 집에서 두 세력이 회담을 가졌다. 묄렌도르프는 새 화폐를 찍자고 주장했다. 개화파는 이미 흥선대원군당백전으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었고, 외채가 많은데 돈 가치가 떨어지면 헬조선이 될 거라 주장했다. 마침 일본이 정부 차관을 제공하겠다 약속해왔으니 차관으로 근대화에 충당하자는 의견을 냈다.[6]

고종은 일단 양쪽을 제지시키고 김옥균을 일본에 보내 차관을 받아오게 한다. 그러나 갓 부임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김옥균의 정치적 역량을 의심하고 조선정계에서 이들의 지위가 무력하다고 보아 급진 개화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에게 보고함으로써 차관 도입은 무산되고 말았다.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일본 정부도 자금 사정이 좋지만은 않았다는 것인데, 김옥균이 필요로 한 300만 원이라는 돈은 근대화 와중이던 일본 정부로서도 만만찮은 돈이었기 때문이다.[7] 일본은 17만 원의 돈을 지원해주었다. 김옥균은 미국무역상사를 통해 미국으로 직접 건너가 자금을 마련해보려는 시도를 하려 하나 이내 실패한다. 결국 자금 부족으로 급진 개화파가 추진하던 여러 근대화 정책이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에 책임을 지고 김옥균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현재 정독도서관 자리의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이후 온건 개화파들은 개화당 박영효가 저택을 팔아 마련한 병조 산하 훈련원을 뺏고, 해방영이라는 수도 방위 사령부 개념의 조직을 창설한다. 임오군란의 원흉(?) 민겸호의 아들 민영환의 주도였다.[8]

군사 관련으로도 급진 개화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883년 고종은 미국제 무기를 구입하고 푸트 미국 공사를 통해 미국에게서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했는데 회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민영익의 주도로 청나라에서 군사 고문을 받아오게 된다. 이는 청나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급진 개화파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마침 청나라는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전쟁을 치렀다. 그래서 한반도 주둔군 3천 명 중 절반이 동남아 전선에 투입된다.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들은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도와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거사를 서두른다.그런데 사실 이 병력 이동은 페이크였답니다!!![9]

4. 전개[편집]

4.1. 갑신정변[편집]

1884년 12월 4일(양력) 저녁 6시, 급진 개화파는 우정국 연회가 열릴 즈음 사전에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10]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사전에 포섭한 자객들로[11] 사대당 요인 암살을 시도했지만 정작 민영익[12]만 중상 입히는 수준으로 끝났다. 사실 민영익은 급진 개화파 핵심 멤버들과 절친한 사이였다. 죽동에 있던 민영익의 집은 개화파들이 모이던 곳이기도 했다. 민영익이 사대당으로 기울어지자 위기감을 느낀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결국 미국에 보빙사로 함께 가기까지 했던 홍영식은 사사로운 정을 저버릴 수 없어 부상 당한 민영익을 묄렌도르프와 함께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옮긴다. 그리고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한 미국인 의료 선교사의 집에 데리고 가는데... 그 의사가 바로 드라마 제중원에 나오는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당시 민영익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매고 있던 터라 알렌이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여하간 이후 민영익은 큰 배신감을 느껴 김옥균 등 개화파와 철천지 원수가 된다. 한편 알렌은 이 일로 고종의 눈에 띄어 이후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조선 땅에서 챙길 수 있는 이권이라는 이권은 전부 미국에 팔아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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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변의 전개 양상을 표현한 지도.[13]

급진 개화파들은 바로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왕을 경우궁[14]으로 옮긴 후 일본군 200명[15]과 前 광주유수 박영효가 이끄는 군대와 그들 휘하의 별기군 50명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한 다음, 본래 우정국 연회 장소에서 처리하려다 실패한 사대당 요인인 한규직·이조연·윤태준을 죽이고[16] 이어서 입궐하던 왕실 척족 세력인 민영목·민태호·조영하를 죽였다.[17]

4.2. 정강 14조와 내각 개편[편집]

이튿날인 12월 5일 개화파는 정강 14조와 새 인사를 발표했다.
1. 청에 잡혀 간 흥선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18]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19]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5.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20]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21]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22]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23]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흥선대원군 계열과도 일부 교섭하여 영의정에 이재원, 병조판서에 이재완, 평안도관찰사에 이재순종친을 임명[24]함과 동시에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을 의정부좌찬성 겸 우참찬에 임명했다.

그러나 핵심 요직은 개화파였다. 우의정에 홍영식·형조판서에 윤웅렬·전후양영사(前後兩營使) 겸 좌포도대장에 박영효·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신기선(申箕善)·좌우 양영사 겸 우포도대장 및 서리 외무 독판에 서광범·외무 아문 참의에 윤치호, 승정원 도승지에는 박영교 등이 임명되었다.[25]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운 서재필은 병조 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하여 정부의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헌종의 계비 효정 왕후의 조카이며 동시에 홍영식의 집안사람인 홍순형도 공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그 밖에 온건 개화파로 정변에 반대하지 않던 김홍집을 한성부 판윤으로, 김윤식을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다.

김옥균은 호조 참판[26]이 되어 국가의 재정을 책임졌다. 급진 개화파들은 각국에게 신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신 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대목은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킨다는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4.3. 삼일천하[편집]

그러나 개혁안을 공포도 하기 전에 김옥균을 필두로 하는 급진 개화파가 쿠데타의 주역임을 눈치챈 왕비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회궁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변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창덕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경우궁과 달리 창덕궁은 겨우 1~200명 남짓 되는 병력으로는 수비하기 너무 넓었다. 12월 6일 오후(2일차) 청군 1500명이 창덕궁을 공격하자[27]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가 사전 약속을 어기고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김옥균·박영효 등은 급히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28] 이렇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시간으로만 따지면 약 48시간+α 천하로 끝나게 된다.

이 와중에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 조선 정부는 훗날 배상금 문제로 한성 조약을 체결한다. 더 나아가서는 청의 간섭이 심해졌고 일본과의 알력 다툼이 심해져 훗날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5. 결과[편집]

개화 의지는 그렇다 쳐도, 갑신정변은 본질적으로 왕조 국가 조선에서 반역이었다. 그리고 개화파가 이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후 조선에서 개화는 곧 반역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건 후 조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개화 드라이브는 대부분 정지되고, 이후 대대적인 개혁은 1894년 갑오개혁에 가서야 그것도 불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개화를 이끌어가야 했을 엘리트 청년 관료들이 조선을 떠나야만 했으니, 그야말로 시계를 10년 뒤로 돌린 개화기 최악의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윤치호는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한성에서 개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없었다"고까지 표현했다. 원래 개화라고 하면 듣는 이들 중에서도 그다지 반발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갑신정변이 터지고 나니까 "개화하자는 사람들은 죄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반역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즉 갑신정변 때문에 개화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이다.

다행히 정변을 통한 전체적 개혁을 꾀한 이들 급진 개화파들 말고도 조선의 전반적 개혁을 추구한 온건 개화파도 통리기무아문을 중심으로 개화를 추진하기는 하였다. 김홍집 등을 필두로 하는 이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사이 10년 동안에도 전신, 전등 설치, 육영공원(근대적 교육 기관) 설치, 광혜원(1885년 제중원으로 개칭) 설치, 한성주보 발간 등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다.

덧붙여 갑신정변의 실패로 천연두의 퇴치도 늦춰지게 되었는데, 국내에 최초로 종두법을 들여온 지석영의 종두학교는 이때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고, 그는 도피해야만 했다.기사

이 사건은 일본 사상사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당시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해서 갑신정변 세력를 지원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프전쟁 상황에 따라 계획되었던 일본 자유당 민병대의 추가 지원이 이토 히로부미의 거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어도) 갑신정변의 실패와 그 뒤처리 과정의 조선의 연좌제같은 전근대성에 충격을 받고 탈아론 등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다. 정부가 아무것도 모르는 개화파의 가족들까지 몰살하고[29] 홍종우에게 암살된 김옥균의 시체를 사지절단하여 조선팔도에 전시하고 양화도에 그의 목을 효수하자, 크게 경악하며 조선을 야만스럽다고 비판했다.

6. 정변 이후[편집]

조선의 정변을 진압한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심화되며 일본과는 공사관 신축비와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정변 과정에서 대립하던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청•일 양군은 철수하고, 이후 조선에 파병할 때는 상대국에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은 이후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전제 정치 하에서 이들의 행위는 명백히 반역으로 인식되었고, 집안에서 역적이 나올 시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에서 빼어 버리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갑신정변 주동자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뀌었다.

7. 급진 개화파 지도자들의 말로[편집]

  • 홍영식: 고종의 "경들은 날 놔두고 어딜 가는가?"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끝까지 호위하였다. 위안스카이와도 안면이 있었고, 벼슬도 꽤 높은 사람이라서 "죽이진 않겠지" 했던 것 같지만 오조유가 이끈 청군이 고종을 데려가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과정에서 조선군에게 살해당했다. 덤으로 아버지 홍순목은 영의정이었음에도 그 일로 자결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하여 10여 년을 방랑하며 지낸다. 10여년 내내 고종이 보낸 자객을 잘 피해다니다, 상하이에서 결국 자객 홍종우에게 리볼버로 살해당한다. 이후 시신은 보존되어 조선으로 돌아오고, 이후 그의 시신은 오체분시를 당하고 머리는 한성에 효수되며 시신은 전국 팔도를 유람(...)한다. 참고로 양부 김병기는 갑신정변 이후 6~7년간 옥살이 하다가 죽었고, 생부와 동생도 옥사했으며, 어미와 여동생은 자결했으며, 아내와 딸은 노비가 되었다. 이는 연좌제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방식이었는데, 그 뿌리와 씨까지도 이 땅에서 영구히 없애겠다는 뜻이다.
  • 박영효: 이후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갑오개혁 중 2차 김홍집 내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의도로 귀국. 복권되어 정부에서 일하다가 고종을 몰아내려는 반란 음모를 꾸미던 중 발각되어 다시 일본으로 탈출한다. 이후 고종이 싫어하는 인물 순위권에 꼽히게 된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해서 독립 협회에서도 박정양, 윤치호와 더불어 세력이 강했고 '박영효 대통령 음모설'까진 나왔다. 독립협회 주도로 개설된 중추원의 첫 의제였던 대신 추천에서도 한 자리했다[30]. 경술국치 후에는 후작 작위를 받는 등 부유한 친일파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때 그의 형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홍영식과 함께 참살되었고, 공조판서였던 아버지 박원양도 열 살 난 어린 손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 서재필: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일가와 집안이 전부 몰락하고 가까스로 도망쳤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나중에 독립협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미국인 필립 제이슨 (Philip Jaisohn)으로 다시 등장한다. 한인 교포들을 위한 지원도 자주 했다.
  • 서광범: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냉대와 무관심 속에 미국에 호의를 갖게 되어 박영효, 서재필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조선인 최초로 학위를 획득한 뒤 시민권을 취득하고 연방 하급 관료로 일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잠시 귀국해 김홍집 내각에서 사법 개혁을 맡았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파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주미 공사로 파견되었지만[31] 아관파천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 파직되었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다.

8. 갑신정변 참여자들이 밝힌 실패 이유[편집]

8.1.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평가[편집]

일본 공사였던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어 원세개에게 당했다.'
요약하면, 내가 주도자인데 원세개에게 속았으니 당연히 실패한 것이다. 즉, 갑신정변의 몸통은 자신이란 이야기다.청나라에서 외교관 생활했다는 사람이 청나라 사정에 까막눈

8.2. 박영효의 평가[편집]

'(김)옥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내는 무능한 자야. 제멋대로 행동하는 방탕아지. 도쿄에서 조선인 일본인 할거 없이 닥치는대로 을 빌려 물쓰듯 하고 말이지. 결국 갑신년에 실패한 것도 그런 엉터리 때문이지. 그를 믿고 설익은 청년들이 성급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거지. 그렇다고 옥균이가 진짜 리더인가? 나랑 홍영식이 다했지' - 동경에서 윤치호를 만나서 한 이야기이다.
'그저 권력을 움켜쥐는 것이지오. 상감을 꽉 잡는 것이지오. 옥균이가 어름어름 하다가 상감을 놓쳐서 고만 실패했지요.'[32]
요약하면 '김옥균 때문에 망했다' 정도로 요약된다.광주유수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 군대를 양성하지도 못하였고, 그로 인하여서 정변에 실패했는데, 남탓하기는 최고봉

8.3. 서재필의 평가[편집]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을 너무 믿은 것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앞뒤 재지 않고 반대만 내세운 일반 민중의 무지몰락 때문이었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없고, 잘 훈련된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사람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한 로마 사람에게 처형되었으나 로마 사람이 그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그를 미워한 유대 사람이었다. 즉 그의 동포가 그를 알지 못한 탓이다.'

8.4. 윤웅렬과 윤치호의 분석[편집]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다. 원래 윤웅렬은 군대를 동원해서 갑신정변을 지원하려고 했으나, 일이 틀어지는 것 같자 발을 뺐다. 혹시나 성공할 수 있으니까 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윤웅렬은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아 자신이 엮이는 것을 대단히 경계했다. 그 윤웅렬의 말을 윤치호 일기에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제1. 임금을 위협한 것은 순(順)한 것이 아니고 역(逆)한 것이니, 실패하는 첫째 이유이다.
  • 제2.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 실패하는 둘째 이유이다.
  • 제3. 인심이 불복(不服)하여 변(變)이 안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할 셋째 이유이다.
  • 제4. 청군이 곁에 앉아있는데, 처음에는 비록 연유를 알지 못하여 가만히 있으나 한번 그 근본 연유를 알게 되면 반드시 병대(兵隊)를 몰아 들어갈 것이다. 적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사소한 일본병이 어찌 많은 청병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실패할 넷째 이유이다.
  • 제5, 설상 김옥균, 박영효 여러 사람이 능히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 이는 국왕과 왕비전(王妃殿)의 의향을 위배한 것이다. 군부모(君父母)의 뜻을 거스르고 능히 그 위세(位勢)를 지킬 수 있겠는가? 실패할 다섯째 이유이다.
  • 제6. 만약, 김옥균, 박영효 여러 사람의 당(黨)이 많아서 조정을 채울 수 있다면 혹은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두 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는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인(淸人)이 있고, 안으로 군부모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붕당(朋黨)의 도움이 없으니 능히 그 일이 순성(順成)함을 꾀할 수 있겠는가?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또 우리 부자(父子)를 끌어 들여 같은 무리로 삼으려 하니 두렵다. 그러나 이에 좇으면 역적이 되고 역적이 되면 망하게 되니 가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삼전(三殿: 임금, 왕비, 세자) 성위(聖位)께서는 바야흐로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어 혼자 힘으로라도 난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김씨(김옥균)의 당(黨)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형조판서에 제수된 원인이다. 그런 즉 지금의 형세로는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여 해치려고 하니 어찌 두렵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그러하니 우선 이리로 도망쳐 와서 다시 뒷일을 의논하려는 것이다.[33]

윤치호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국민 가운데 한 사람도 독립당의 사업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외다. 첫째로 임금님 몸에 손을 대이어 억지로 정사를 변혁하였다는 것. 둘째 일본과 공모하였다는 것으로 크게 오해를 사서 아주 역적으로 몰렸던 것입니다.'

참고로 갑신정변에 대한 윤치호의 의견은 굉장히 부정적이며, 훗날 조선의 독립에 냉소 및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아아. 김옥균 무리의 경망스러운 행동은 위로 나라 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했으며, 공적으로는 개화 등의 일을 완전히 탕패(蕩敗)시켰고, 사적으로는 자기네들의 가족을 몽땅 망하게 만들었다. 한 번 생각을 잘못해 모든 일이 실패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냐!

<윤치호 일기> 중에서.

사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이 부자의 이야기만으로도 대부분 다 나오고 있고, 실제로 현재의 연구도 저것과 별 차이가 없다.

9. 평가[편집]

9.1. 부정적[편집]

갑신정변은 청이라는 또 다른 기존의 외세를 제대로 의식하지 않은 실패한 정변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메이지 유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외세를 끌어들인 고전적인 반정에 가깝다. 본문에서는 백성과의 괴리만 들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자체적인 군사력이 없어서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하였다는 것. 한 마디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갈아치우면 일단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안일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일단 갑신정변은 백성의 지지를 얻기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왕조 국가였으며, 유교적 질서가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어서 근왕 이념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딱 여기서 얻은 교훈 만큼의 발전형을 보여준 것이 후반기의 독립협회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독립협회가 포섭한 백성은 자기들 영향력 범위에 닿는 서울 한정. 더구나 그 '지지'란 것도 근본적으로 '근왕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근대화 개혁을 백성의 단합된 지지를 업고 성공시킨 사례가 없다는 점을 볼 때, 본래 백성의 지지가 꼭 충족시켜야만 하는 요건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계획의 성공을 위한 충분한 무력과 그 무력을 사용하려는 강한 의지인데, 당시 갑신정변 세력의 무력이 되어줄 소규모의 일본 공사관 수비대는 청국의 조선 주둔군과 맞서 싸워 이길 능력이 없었고, 일본 공사는 10년 전 오쿠보 도시미치가 보여준 것처럼 청군에 대항할 의지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갑신정변을 옹호하는 입장은 3가지가 있다.
  • 갑신정변의 내용이 일부 갑오개혁에 이어진다.
  • 보수파를 제거한 공로가 있다.
  • 어차피 조정이 막장이었으니까 누군가는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선 갑오개혁 자체는 조선 관료들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그 시작을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으로 시작해 외세의 개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기에 갑오개혁에는 항상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 외세가 갑신정변 당시 손잡았던 그 일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은 비슷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더구나 그 비슷하다는 부분은 근대국가에서 일반적인 부분으로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만 비슷한게 아니다.

두번째는 수구파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민씨 세력은 외척이니 죽이고, 개화 반대파는 반대파니까 죽이고자 했고 일부 온건 개화파들도 죽이고자 했다. 상단에 기록된 윤웅렬의 이야기 가운데, '민씨와 임금께서 친애(親愛)하는 신하들을 죽이었으니'라고 했는데, 이 신하들이 바로 온건 개화파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이후에 갑오개혁과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며 그 이후에도 살아남은 이시영, 이상재, 민영익 등은 일제강점기에 독립 운동에도 참여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이들의 상당수를 제거하고 자기들도 제거되면서 조정 내의 개화파 상당수가 쓸려나갔다. 더구나 죽은 사람만 봐도 윤태준[34], 한규직[35], 이조연[36] 등 영선사 출신으로 새로운 군제 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개화에 비교적 적극적이었던 인물들이며 외척의 주요 인물이었던 민영목[37], 민태호[38], 민영익, 민응식[39]의 소위 4민 중에서 민영목과 민태호는 죽었고, 민영익은 부상당하면서 이들이 극렬 급진 개화파 배제론자가 되게 만들었고, 이외에도 조영하[40] 등도 같이 죽었는데 이들 주요 인물들 중에서 개혁에 근본적으로 방해가 되었을 인물은 없다고 봐야 한다. 애초에 갑신정변의 배경은 우정국 창립 축하 연회였고, 여기에 참석하려고 했던 이들이나 수호를 맡았던 이들이 죽은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윤치호의 언급처럼 갑신정변 실패 후 민심에 이반이 생겨 10년간 개화의 ㄱ자도 못 꺼내는 10년간의 후퇴가 일어난 최악의 형태로 실패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것은 조정이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급진 개화파의 입지가 막장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문제가 있다. 갑신정변의 트리거로 꼽히는 3가지로 일본에서 차관을 얻어오지 못한 것, 민영익이 온건 개화파로 선회한 것, 박영효가 이끌던 군대가 친군영에 흡수된 것 등을 꼽는데 이것은 모두 개화의 좌절이 아니라 급진 개화파의 입지 감소일 뿐이다. 급진 개화파는 개화가 진행되지 않는다거나 탐관오리가 있다거나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 아니라[41], 친일이 아니라 친청이고[42], 자신들이 아니라 온건 개화파 주도로 정국이 운영된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것이다. 절대 다수의 개화파들은 자기들이 배운 것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고, 그 개화를 자신들이 하려고 노력했다. 즉, 개화에 대한 제한적 지식과 외부와의 연줄에 의거해서 자신의 권력욕과 의지를 추구했다. 개화파의 진정한 한계는 여기에 있다. 김홍집 정도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몇 안되는 예외이고, 일제 시대에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이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키우기 시작한다. 사해당파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지만, 정작 관직 분배를 한 것은 온건 개화파가 아니라 종친 우대라는 명목으로 대원군 계파에게 분배한 것이다. 대원군계가 개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일이다.

만일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라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외세를 최초로 조직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급진 개화파이고, 그 목적이 정권 획득이라면 그 성공 가능성과 이후 상황을 모두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 급진 개화파가 보여준 시각은 독립 협회 시기까지 미뤄보아도 책상물림들의 망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걸 위해서 너무나도 큰 도박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최악급으로 나왔다. 미국의 독립 전쟁처럼 일단 일본의 지원을 받고 나중에 힘을 길러서 일본과의 독립 전쟁을 추진했을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까지 나가면 관심법의 경지므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이런 소리 하던 사람들[43]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면 고려할 대상이 못된다.

이들이 싹 제거된 덕분에 일본이 세력 확장을 꾀했을 때 기존의 친일파들이 배제되어서 외부의 친일파들을 파견하거나(박영효), 그나마 협상 가능한 온건 개화파들을 끌어들이는(김홍집, 박정양)[44] 우회적인 방법을 택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이후 일본의 침투는 조정과 고종에게 대단한 경계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학계를 중심으로 갑신정변을 봉건 체제를 전복하고자 했던 서양의 프랑스 혁명과 같은 부르주아 혁명에 비견된다고 평가했다[45].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여 갑신정변을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정변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 다음에는 청의 반발이 일어날 것이 확실한데, 애초에 일본군은 제대로 교전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후퇴했을 뿐이다.

이 음모에 한몫 거든 일본의 관점에서 평가하자면, 갑신정변 자체는 전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갑신정변은 그나마 조선 내부에서 일본에 순수하게 호의를 가지고 문명 개화의 파트너로서 협력하고자 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일본통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고, 조선 왕실에서도 정변을 후원한 일본 정부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철저하게 축출당하고 청의 영향력은 극적으로 확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 상황은 10년 뒤에 청일전쟁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에 큰 역할을 한 일본 공사 타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1842년~1917년)는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일본 정계를 떠나야 했다. 남의 나라에서 쿠데타를 주도한데다가, 실패해서 국익에 큰 해를 끼쳤으니 외교관으로서는 최악의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갑신정변을 고종과 민씨 세력이 이끄는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외환죄에 해당한다. 임오군란 당시 청군을 끌어들인 영선사 일행을 꼽을 수 있는데, 임오군란은 내부 반란에 대해서 기존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 군세를 끌어들여서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행해졌다. 이는 '외국과 내통하여 해당 정부에 대항한다'는 외환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이후 청국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당시 조선 왕실을 포함한 세력들은 청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으며 수긍했다.

반면, 갑신정변은? 일본 군대를 끌어들여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 탈취를 기도했다. 이들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인 것은 급박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을 빌려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이는 외환 유치죄에 해당한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온건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해서 개화가 늦어질 수도 있다 같은 것은 외환죄에 대한 범죄 조각 사유가 될 수 없다. 이들과 비교될 만한 비슷한 시기 인물이라면 황사영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9.2. 긍정적[편집]

급진개화파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게 반역을 일으킬 결정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 타고나길 명문가 자제이며 부자라 잃을게 많고 정변을 안해도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정변주동자들이 사명감 없이 실패할 위험도 큰 데다 실패하면 연좌제와 재산몰수 당하는 모험을 감행 하겠는가? 그리고 온건개화파가 모델로 삼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양무운동이 청일전쟁의 패배와 결국 조국 독립도 유지 못함에서 무능이 드러난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온건개혁의 한계를 느끼고 일본 권력구조의 근간인 봉건제와 신분제 폐지를 과감하게 이루었고 결국 부강하였다.

유교의 전제정적 신분구조를 유지하면서 자력갱생을 시도해보아야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서구식으로 국민교육 보급과 1차 산업위주구조에서 탈피를 시도 하도록 개혁을 하면, 결국 양반의 경제적 권력근간인 대지주로서 권위가 약화되고 양반의 권력은 약화되게 된다. 그래서 갑오개혁 때까지 끝끝내 토지개혁은 양보하지 않았음에서 기득권이 중요시 여긴 대상을 알 수 있다.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 바뀐 데에는 부르주아의 부상이 있으며 괜히 유럽에서 늦게까지 전제정을 유지했던 러시아 제국이 산업에서 서유럽보다 후진적이었던 게 아니다. 조선 조정의 무능 탓이 아니라고 하지만 무능에 초점을 두지 않고 정변일당의 권력욕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으며, 오늘날 갑신정변을 비판하는 사람은 있어도 14개조 정강 항목들에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또한 '갑신정변 실패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1885.3)' 이전의 일본개화파는 조선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례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 급진개화파인 박영효 등에게 대중계몽을 위해선 글의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국한문 혼용체를 추천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박문국에서 김윤식과 이노우에 가쿠고로 등에 의해 발간된 한성주보이다. 이러한 일은 적어도 유키치를 비롯한 일본개화파가 조선의 계몽과 개화를 바라지 않았다면 가능치 않은 일이었고, 간섭과 침략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면 더욱 해서는 안 되는 조언들이었다. 이러한 점들과 일본 내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마어마한 입지, 그리고 당시 조선조정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인 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더욱이, 임오군란 후 청에 의해 군사, 내정, 외교 등에 간섭이 심해지는 상태였다. 특히 군사적으로 청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주둔하던 청국 병사들의 약탈 및 강간 등의 횡포가 심하였으며 이를 비판한 한성순보를 청이 문제 삼은 사건도 있었다. 자력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해도 청나라의 개입을 막을 역량이 없었고, 이런 점에서도 일본을 끌어들인 건 불가피한 사항이었다.

덧붙여, 일본 내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등 민간 친 개화파 인사는 조선 정부의 형벌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사형 자체가 아니라 사형 방식의 잔혹함과 정변에 관련이 없는 가족들에게까지 벌을 내린 전근대성이었다. 급진개화파들의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조선 독립당의 처형'이라는 사설의 내용을 보면, 그도 주모자의 처형은 어쩔 수 없지만 죄가 없는 그들의 부모, 조부모, 처 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한 것에 대하여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 행위라 비판하였다(일본은 이미 참수형과 거열형 등 과거의 잔혹한 사형 방식을 폐지한지 오래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1885년 3월에 그는 탈아론을 기고하고 조선백성들을 해방하자며 정한론에 찬성하게 된다.

갑신정변이 단순한 반역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왕가, 위정자 입장에서 반역이지, 조선왕조가 망한 지 100년도 넘은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갑신정변이 단순 반역이라고 폄하될 이유는 없다. 루이 16세 입장에서는, 프랑스 혁명도 천인공노할 백성의 반역이었다. 단순히 갑신정변은 반역이라고 그 뿌리부터 부정적인 가치로 재단하는 게 아니라, 실패한 혁명 내지는 너무나 급진적인 정변, 실패한 개화추진이라는 평가가 옳을 것이다.

10. 대중매체에서[편집]

KBS 명성황후 85회[46]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에선 빠질 없는 소재인데, 단독 작품으론 1973년 신상옥 감독이 만든 영화 <삼일천하>가 있으며 제작은 안양영화가 맡았다. 같은 해 극작가 오영진이 희곡 <동천홍>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1981년 1월 8일자 KBS2 <TV문학관> '횃불'로 영상화된 바 있다.

이후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풍운> 43~45회, 1990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28~29회, 1996년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 85~86회, 2001년작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 85회 등지에서 다뤄졌는데, 특히 <명성황후>에선 갑신정변 자체가 고종과 개화파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식으로 그려졌다.

원세개와 청국의 무례한 태도에 질려버린 고종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에게 전권을 넘겨주고 개혁을 시행하라는 밀지를 내린다. 하지만 정변 도중 개화파들이 민태호조영하 등을 고종의 허락도 없이 살해함으로서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이후 경기 감사 심상훈의 밀서[47]를 전달받은 명성황후가 고종을 설득해 창덕궁으로 환궁하고 곧바로 이어진 청군의 공격으로 정변은 실패한다.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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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출 후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다.[2] 권세가인 남양 홍씨, 아버지는 영의정 홍순목대원군 시절에 잘나가던 사람, 본인은 종2품 병조 참판. 철종의 사위였던 박영효도 칭찬할 만큼의 인품을 소유했다. 신사 유람단(조사 시찰단)의 일원이기도 하였으며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도 건너갔던 인물. 우정국 사건도 사실 이 사람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우정국 총판이었으니까...(이것은 조선시대 병조에서 군사와 우편업무까지 담당했기 때문이다.)[3] 갑신정변 주도세력은 개화당, 반대파는 수구당 = 민씨 일족 이미지가 상당히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왕후의 영향력 자체가 의심스러운 데다, 온건 개화파를 통으로 수구당에 묶어서 민씨 세력으로 넣는 이 논리는 나중에 일제가 아주 잘 써먹었다.몇해 전에 있었던 임오군란에서 민씨척족의 거두 민겸호(당시 병조판서 겸 선혜청당상)가 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 제공과 군란을 일으킨 군민(軍民)들에게 살해되면서 기세가 약화되었는데, 더욱이 군란 중심세력들은 이러한 혼란이 중전의 책임이라고 소리 높이면서 명성황후는 지방으로 몰래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청과 친했던 온건 개화파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서 군란을 해결하였다. 비록 민씨들이 주요관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수구파라고 보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다.[4] 영선사로 파견되어 청에 머무르고 있었던 김윤식어윤중이다.[5] 그런데 이 고문들 중에서 묄렌도르프 같은 비청국 출신 고문들은 오히려 조선을 편들었다. 돈만 제대로 주면 누구나 도와주는 것이 당시 고문들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고문들도 외국에서는 조선 먹으라고 하더니 대한제국에서는 일본 막으라고 하였다.[6] 일본은 개화당을 꼬드겨 조선에의 영향력을 높이려 했고, 개화당도 이를 알고 반은 이용, 반은 경계하고 있었다.[7] 대략 조선 1년 세입의 2배, 일본 정부 1년 세입의 20분의 1 정도.[8] 이걸 개화에 대한 반발이라고 하는데 온건 개화파도 개화를 분명히 하려 했다. 박정양, 이상재 등이 그들이다. 이 대립의 핵심은 청의 양무 운동을 기준으로 삼은 온건 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롤모델로 삼은 급진 개화파의 방법론 싸움이다. 최익현 등의 척화파임오군란과 함께 정부에서 사라졌다.[9] 청불전쟁 당시 청나라의 군대는 직예에서 이홍장이 육성한 북양군/북양함대와 장지동등 강남지역 독무들이 양성한 남양군/남양함대로 나눠져 있었다.(북양군은 이홍장이 청나라 중앙과 직예에서 고위직에 있으면서 육성하여서 통일된 지휘체계를 구성한 것과는 달리 강남지역 독무들은 각 지방마다 중구난방식으로 서구문물로 무장된 남양군을 양성하였다.) 그런데 북양군벌과 남양군벌은 서로 간의 소통이 되지 않는 별도의 조직으로 구성되었기에 실제로 청불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프랑스와 싸운 청나라군은 양광지역의 남양군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프랑스군에게 개박살이 났음에도 북양군과 강남지역의 남양군들은 그다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군은 북양군 출신이기에 이동할 이유가 별다르게 없었음에도 급진개화파들은 이들이 빠져서 조선에 신경쓰지 못 할 것으로 예상하였다.[10] 궐의 고씨 성을 가진 궁녀를 포섭해 폭약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궁녀는 7척 장신에 웬만한 남자 뺨치게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서 수호지의 등장 인물인 고대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붙잡혀 조리돌림당한 끝에 무참히 살해당했다.[11] 그중에는 일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12] 보빙사 정사로 미국에 방문하여 프린스 민이라 불리고 대접받았다. 고종의 조카이자 명성황후의 조카이기도 하다. 본래 개화파였지만 임오군란 이후 민씨 척족들이 청에 사대하는 쪽으로 기울었기에 결국 친족들의 대세를 따라 급진 개화파와 대적한다. 그리고 이때 민영익의 친부 민태호는 목숨을 건진 아들과 달리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13] 사실 급진 개화파가 짧은 시간 내에 뛰어갔던 길을 측정하거나 실제로 걸어 보면 상당히 멀다. 축지법을 써도 기본 30분 ~ 40분(…). 자기들 목숨이 걸린 일이니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던 듯.[14]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46-2.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이다. 지금은 없어졌고 터만 남아있다.[15] 이때 고종이 '日使來衛'라는 쪽지를 써서 일본 공사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어필이 위조 아니냐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사건 당시 고종은 일본 공사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다고 발표했다.[16] 이들을 죽인 이유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중앙군은 4영(좌/우/전/후영)으로 개편되었는데, 피습된 민영익은 우영사였고, 한규직은 전영사, 이조연은 좌영사, 윤태준은 후영사였다. 즉, 이들이 당시 중앙군 지휘관이었으며, 이들을 관리 감독할 위치에 병조판서 민영묵도 난군의 총에 맞아서 사망했다.물론 병조참판이 홍영식이였으니 국방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완전히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홍영식은 개화당 사람이였고, 이때 나이가 29살로 민씨 척족이 장악한 4영을 통제할 위치가 아니였다.[17] 이때 김옥균 등이 황급히 창덕궁으로 와서 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기는 가운데, 뭔가 눈치챈 왕비가 "이것이 청군의 소행인가, 아님 일본의 소행인가?"라고 날카롭게 묻자 김옥균은 "청군..."이라고 얼버무렸다.[18] 한마디로 신분제 폐지.[19] 토지 제도 개혁이 아닌 조세 제도 개혁이다.[20] 규장각세도정치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21] 전근대적인 특정 상인의 특권 폐지.[22] 4영은 임오군란 이후 재편된 중앙군으로 민씨 척족과 청나라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에 개화당은 이들을 자신들의 군사 기반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23] 재정의 일원화.[24] 대부분의 종친들은 고종파와 흥선대원군파로 분류하자면 후자에 속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 초기부터 종친 우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25] 윤웅렬과 아들 윤치호는 개화당 사람으로 정변 이전까지는 준비에 동참하였으나, 정변 당시에는 발을 빼고 있었다.(정변은 사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있으면서 군대를 육성하고, 함경남병사 윤웅렬의 군대를 동원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사전에 눈치챈 반대파가 박영효를 사직시키고, 윤웅렬의 군대 남하를 막았다. 이에 윤웅렬은 개화당의 군사부족을 깨닫고 사실상 나 몰라라 했다.) 신기선은 정변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실질적인 활동을 한 바가 없기에 정변 이후 유배만 갔다.[26] 참고로 호조판서를 공석으로 두었다. 고로 김옥균이 호조의 수장 역할을 맡았다.[27] 청군 외에도 4영의 조선군 일부도 함께 하였다.[28] 이때 이들은 일본으로 가는 배에 숨어있었는데 고종의 명으로 그들을 체포하러 온 묄렌도르프가 그 배의 선장에게 반역자가 숨어있으니 체포에 협조해 달라고 했다. 이때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김옥균 등에게 하선을 요구했으나, 선장이 '내 배에 탄 사람은 건드릴 수 없다'는 의지로 없다고 거짓말하고 허공에 총을 한발 쏘면서 그들을 넘기지 않은 채 제물포를 떠났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게 사실은 훗날 김옥균을 찬양하는 일제강점기 전기에서 나온 이야기.(...) 심지어 공신력 있는(?) 역사 만화들에도 버젓히 나오지만 그냥 야사라고 한다. 결정적으로 당시 공사는 하나부사도 아니고 다케조에 신이치로였다. 게다가 일본 선장 한 사람이 권총 들었다고 그 많은 청나라 병사들이 아무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는건 그야말로 넌센스다.[29] 박영효와 홍영식 같은 경우는 집안이 매우 좋았는데,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이 고관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 가문의 영향이 컸다[30] 그런데 대신 추천 자체가 중추원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에 월권이고, 추천된 인물이 죄다 박영효, 서재필 등 고종에게 찍힌 사람들이었다. 결국 중추원 해산 → 독립 협회 강제 해산의 순서를 밟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덤으로 관료 추천은 필적 감정까지 해서 누가 누굴 추천했는지 모조리 색출했다고.[31] 당시 서광범은 이중국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인이 주미 조선 대사로 파견된 셈이다.[32] 일제 강점기인 동광에서 이광수와 인터뷰한 것을 다시 1934년 동아일보가 인용한 기록이다.[33] 사실 이 단락은 윤웅렬이 자신이 발을 뺀 것을 싹 제외하고 변명하고 있는 대목이므로 실패의 배경만을 언급할 때는 잘 인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실패 확률이 높다고 봐서 발을 제대로 빼려고 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한다. 그리고 윤웅렬과 이후의 윤치호가 어떻게 처세를 했는지도 잘 보여주고.. 실제로 윤웅렬과 윤치호는 만주로 도망쳤다.[34] 기기창 총판을 지냈으며 영선사로 청과 일본올 오갔다. 친군후영사.[35] 무관으로 이전의 어영대장, 이후에는 모든 신식 군인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군전영의 전영사를 지냈다. 군제 개편 과정에서 박영효가 이끌던 부대가 이 친군전영에 합병된 것 역시 급진 개화파의 한 가지 불만이었다. 만일 이 당시 합병되지 않았다면, 박영효의 이 병력이 정변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관학교 생도들이 이 정변에 동원되어서 칼질을 했다.) 한규직은 정변 당시 변장해서 몸을 피했다가도 고종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궁으로 가는 도중에 발각되어 참살되었다.[36] 역시 김윤식과 함께 영선사로 청에 방문했던 인물로 친군좌영사. 역시 기기국과 해상공국에 참여하였다.[37] 오경석, 박규수와 함께 흥선 대원군 집권기부터 개화의 필요를 강조했던 인물로 조미 통상 수호 조약을 포함한 외교 관계에 참여하였으며, 한성순보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사망시에는 해상 방어 사령관인 해방 총관이었다.[38]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의 제자이며 민영익의 친부.[39] 갑신정변 당시 유일하게 칼을 맞지 않은 인물답게 개화 쪽 역할은 적다. 방곡령 당시 일본에 크게 불만을 드러내었고,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데 노력한 인물.[40] 신정 왕후 조씨의 조카이며 조성하와는 6촌 관계이다. 곤궁했던 시기의 흥선 대원군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서 대원군 집권 시기에는 조 대비와 대원군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고종 친정 시기에는 고종의 친위 세력이 되어서 대원군의 실각에 조력했고, 이후 조영, 조미, 조독 통상 수호 조약 등 외교적으로 활약했다.[41] 민씨 척족에 대한 문제점을 적어두었는데, 정작 민영익이 이탈하기 전까지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의 집에 모여서 토론을 했다. 민영익은 민씨 척족이 아닌가, 아니면 민영익만 예외인가.[42]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는 원래 한 뿌리였다. 그런데 고위 관료와 민씨 세력의 상당수는 영선사로 청에 파견되면서 청과 연줄이 생겨서 청에서 진행하던 양무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온건 개화파가 되었고, 보다 세력이 작고 젊었던 이들은 수신사나 보빙사가 되어서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결과 일본과 미국에 연줄이 생겼고 당시 일본에서 진행하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서 급진 개화파가 되었다. 단적으로 민영익이 급진 개화파와 친하게 지낸 이유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의 정사였기 때문이다. 사상의 차이와 의식는 없었다.[43] 여기에는 갑신정변 때 안 죽은 박영효 등이 포함된다.[44] 이 둘은 모두 조사 시찰단 파견 경력이 있다.[45] 이런 평가를 하는 이유는 별 것 없다. 마르크스나 스탈린의 일선적 발전과 혁명 단계론에 의하면 부르주아 혁명이 있은 다음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다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공산주의인 김일성 이전에 부르주아 혁명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이다. 그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미지 상으로도 별로 안 좋고, 외세 그것도 일본을 끌어들인 갑신정변을 대입시키는 것이다.[46] KBS 홈페이지 제공. 모든 회차를 다시보기할 수 있다.[47] 밀서의 내용은 '개화파들의 진짜 목적은 명성황후를 폐위시키고 대원군을 청국에서 데려와 섭정으로 앉히는 것이다. 고종을 설득해 창덕궁으로 환궁하면 원세개가 청군을 이끌고 개화파들을 일망타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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