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유럽에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많은데 비슷하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로마 제국에서 국교화 된 4세기 이래 당시 지배층들이 교계로 편입되면서 이러한 비판은 꾸준했고, 이후 천여년간 르네상스 시기가 특별히 교회의 타락상이 심한 게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 시기 물론 그런 타락상도 비판 내용에 있지만 중요한 건 종교개혁자들은
면벌부나
사제,
수도원, 신자들의 타락상은
중세의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면죄부와 같은 현상은 부작용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의 순수했던 신학을 되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고 이러한 움직임이 점점 커지면서 개신교회가 탄생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적법한 남계 후계자를 낳기 위한 재혼을 위해서
[10] 성공회(영국 국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개혁의 기원은 발도파까지 기원이 올라가기도 하는데, 주요한 교리에서 지금의 개신교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개신교 내부에서도 위의 세력을 '
종교개혁의 불씨'라고 하지 '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11] 마르틴 루터 이전 성서중심 신앙을 강조한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또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중세
가톨릭에서 교회의 타락만으로 개신교가 설립되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는 어느정도 설명은 되어도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 없다. 16세기 독일 지역의 면죄부 판매로 인하여
마르틴 루터와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처음 성공한 것이지 그 이전부터 가톨릭 교회의 전례주의 중앙집권 성경중심의 신앙을 강조한 움직임은 계속 있어왔고 그 때마다 진압된것. 사실 초기 교부시대 이후 중세 가톨릭 교회의 타락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으며
[12]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와 식자층의 증가로
바티칸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조직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오로지
성경에 모든 가치관의 기준을 둔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주의, 칼뱅주의, 재세례파 등은 선구자 루터의 영향은 받았으나 각자 서로 다른 정체성과 다른 신학방향으로 분화되었으며 앞서 서술하다시피 그들은 가톨릭교회와의 종교갈등으로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13]현재는
성경에 대한 해석 차이 및 가톨릭 전통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
침례교 등의 많은 교파로 갈라졌으나 이들은 서로를 타교로 보지 않는다. 교회 제도나 강조하는 교리가 다를 뿐이지 다른 종교로 보지 않을뿐더러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다소 차이가 나는, 침례교/장로교에서 루터교/성공회로 교회를 옮겨도 개종이라 하지 않는다.
[14] 반면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기는 것을
개종으로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초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마르틴 루터 쪽에서 가장
성경의 원형에 맞게 살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개신교파끼리의
성만찬 논쟁인데,
마르틴 루터는 신약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빵을 나누어주며 이것이 자신의 살이라고 한 것,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이것이 자신의 피라고 한 것을 두고 '빵에
예수의 몸이 내려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이론은 가톨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 화체설(化體說)과는 차이가 있다. 빵은 빵일 뿐이며 그것이 신성한 육체로 변하지 않는 것이 큰 차이. 이에 반해
츠빙글리는 '상징적인 것'으로, 후기로 갈수록 종교개혁자들은 루터파와 개혁주의 계통에서도 활발한 논쟁이 이어졌으며 루터 생전에도 루터파의 필리프 멜란히톤, 개혁주의에선 마르틴 부처등이 둘 사이의 입장을 조절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한 세대 후 칼뱅주의에서는 둘 사이의 영적 임재설을 취한다. 현재까지도 루터주의와 칼뱅주의(개혁주의)의 차이점을 들자면
예정설과 더불어
성만찬 논쟁이다.
사제제도를 인정하는
성공회까지도
[15] 만인사제설을 받아들였고, 나머지 교파에도 성직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지위는 목회를 이끄는 목회자에 해당하며, 교육자와 설교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칼뱅주의 장로회에서의 목사는 평신도인 장로와 같으며 설교하는 장로일 뿐이다. 장로와 감독(주교)제에 반대하는 회중교회에서는 회중(대중)에 뽑힌 자가 설교자를 할 정도로 성직자 계급을 반대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수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16][17] 종교개혁자들은 소명(Vocatio)을 강조하여 세속적인 하찮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수도자와
성직자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신칭의에 따라 믿음 없는 수행과 수도행위는 우상숭배나 다름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또한
수도원들이 대부분 타락하여
[18] 특권 집단화 되었기 때문에 영국, 독일 북부와 북유럽 국가들은 상당수의
수도원들을 폐쇄 및 파괴했다.
종교개혁시기 가톨릭 교회와 가장 큰 차이점을 일으킨 것은 루터가 재발견한 로마서의
이신칭의 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는 것은 성서의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핵심 문구
[19][20]이며 반복되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의 통설은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으로 가톨릭교회에서도 정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슨 차이이냐 싶지만 로마교회에선 유럽이 가톨릭으로 일원화되어 세속권력을 얻자 점차 세상사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교회가 사회에 개입하여 성서에 나와있지 않은 많은 문제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면서
윤리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이신칭의 신학을 크게 내세울 수 없었다. 그리고 중세시기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약화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가들이 더욱 엄격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도들에게 행위구원론이라 공격받는 것을 억울해 하듯이, 가톨릭에서 루터주의와 개신교의 이신칭의를 선행이 필요 없는 이상한 믿음이라 주장하는 것도 역시 무지에서 비롯된다. 루터에 따르면 신자들이 복음을 믿어서 구원 받는것과 별개로 율법에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선행은 그 결과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이다. 중세 교회에서 행위를 중요시 하여 교회에서 정해 놓은 선행을 점수화 하여 사소한 일에도 수백년 수천년, 교회에서 정한 악행에 대해선 천문학적 시간 동안 연옥에 갇히는것으로 선전했고 그대신 교회에서 원하는 선행을 하면 (대부분 돈으로 면죄부 판매) 악행을 없애주는걸로 선전해왔기 때문에 중세인들은 선행을 구원론의 대가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중세시기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를 받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믿었고 벼라별 악행을 다 져지르고 면죄부사고 과거를 통째로 용서받고 하는 짓을 종교개혁자들은 용납하지 못 했다. 죄의 용서는 고해 성사같은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해야하는것이라 가르쳤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하여 세속적 윤리를 엄격하게 강조한다.
[21][22] 선행의 개념도 다르다 루터가 강조한 선행이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한 성지순례 고행 금식 같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선행으로 교회 전통의 성경적 근거가 불확실한 선행은 인정하지 않았다. 농부처럼 가난하고 자식이나 부양가족이 있는 자는 사실상 교회의 선행을 할 가망이 없고 사제계급을 독점한 유력계층의 독점물로 여겨졌는데 루터와 칼뱅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한낱 농부가 가족들을 부양하는것이나 농부의 아내가 그리스도인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사제들이 행위보다 더 가치가 높은 선행으로 여겼다.
이 처럼 중세
가톨릭의 선행 개념은 몇 가지 오류를 범하기 쉬웠다.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하는 선행은 실생활과 동떨어진것들이었고, 보속의 대가를 선행으로 여겼기에 그동안 여러성인들의 공덕이 축적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선행의 보고'를 교회에서 독점적으로 관리하며, 신자들에게 나눠줄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에 창설된 여러 특수
수도회가 서구사회에서 자선단체의 모태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교육을 하거나 의료활동을 하는 식으로 수도회 바깥에서 회칙에 따라 사도직 활동을 벌였다. 하늘나라에 가고는 싶으나 죄로 인한 보속은 받기 번거로운 귀족이나 부유한 평신도들이 이
수도회들을 돈으로 많이 후원하였는데, 선행처럼 어려운 일들을 사제계급에 위임하고, 때에 따라 선행에 동참하는것으로 만족했다. 특히
흑사병 이후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가톨릭 교회에서 점점 손쉬운 보속수단
[23]을 점차 제공하기 시작했고, 면죄부는 상설적으로 팔리면서 기존의 이러한 선행들 조차도 하려하지 않고, 죄와 구원에 대한 것이 선행이라는 삯으로 사고 파는것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았다.
마르틴 루터에 따르면 의인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산다. 이를 반대로 보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곧 의인이다. 의인은
성경에 따르면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이 의인은 믿음과 구원의 약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지상에서 실천한다. 즉
마르틴 루터에게 구원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었다.
진실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행과 구원이 약속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필연적으로 칭의전에 예정과 소명이 논리적으로 필요했기에
예정설 논란을 내포했다.)
그럼 '참된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어떻게 구분 가능한가?'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바라는 대중들의 열망을 따르지 않았다.
[24]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만이 안다 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성경에서
예수가 자신과 합한 자는 열매를 맺을 거라고 표현했기에,
마르틴 루터는 좋은 행위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닐지라도 '믿음의 증거'라는 논리를 폈다.
[25]하지만 후에 이것을 가지고
장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전 종교개혁가 선배들의 노고를 집대성하여 정리하며 답을 제시했다.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지 여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나은 구원이 예정된 사람에게 그 모습을 참된 믿음으로 발현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인간이 선을 행할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26],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오직 구원이 예정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장 칼뱅 본인마저도 모질게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할 정도. 이에 반대해서 아르미니우스나 존 웨슬리, 드와이트 요크 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이다'
[27] 성화(聖化, 믿음 이후 올바르게 사는 삶), 최종적인 구원이란 여정을 말하였다.
[28]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주장한 것들을 바탕으로 길거리에서 '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개신교 신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수 천국 불신지옥 문구 자체는 일단 모든 개신교에서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개신교의 구원론은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것이고, 믿지않으면 지옥불속에 다이빙 한다고 협박하여 강제개종하는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신칭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무슨 말이냐면 종교개혁 시기엔 전 유럽이 기독교 신자였고, 딱히 잘못된 믿음이라 생각하는 가톨릭에 맞서거나 신앙을 지키려는 측면이 강했지 비종교인을 세뇌하여 개종하려는 시도는 18세기 유럽 개신교 신학계에서도 이단 취급을 받았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문구는 사도시절에만 해당한다고 보는게 통설이었기 때문.
[29] 이 때문에 비교적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헤른후터(모라비아 형제회)와 감리교, 침례교가 선교활동을 먼저 시작했으며, 공식적으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1793년 인도에 파송된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라 보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개신교에 대한 부가 설명이 필요한데,
장로교가 다수이고,
[30][31] 장로회를 뺀 나머지 가운데도
감리교[32]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종파가 생각보다 다양하지는 않다. 이는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장로회와 감리회 외에 침례회와 성결교회, 하나님의 성회(순복음교회) 등이 있다. 유럽에서 세가 강한 개신교의 맏형인
루터교회는 1950년대에 제일 늦게 들어온데다 교회 수도 압도적으로 적어서 듣보잡 취급이고, 세계 개신교 최대 종파인
성공회도 역시 교세가 약하다. 루터교회와 성공회는 교리적으로는 이신칭의와 유일구원설을 믿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지만
성모승천, 무염시태설, 평생동정설 등 마리아 숭배적 교리들은 거부하며, 마리아가 성도들을 대신해 중보기도를 한다거나 중보자 노릇을 한다는 가톨릭 교리에는 반대한다. 그러나 예배 형태나 건축, 의복 등 하드웨어 상으로는 가톨릭과 유사하며 특히
대한성공회는 고교회파여서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하드웨어 상의 이질감이 루터교회나 성공회가 아무래도 따로 노는 듯 보이는 분위기 형성에 기여했다.
[33] 이 양대 종파가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헐뜯고 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개신교 종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이 잦은 상황에서 문제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밝힐 때에만 개신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특정 교회 및 인물의 잘못이 전 종파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것은 옳지 않으나, 또한 절대 다수의
장로회가 다른 개신교 교단들과 다른 점을 아는 신자들도 적다.
장로교는 개교회중심주의라 교회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34]개신교 종파에 따라
가톨릭의 '
성모 마리아 공경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개신교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단에서도 일단 이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이단취급하는 교회도 있으며(물론 에큐메니컬 진영은 가톨릭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단'으로 낙인찍기보다는 '오류가 있는 교회'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더 비판적인 교단(반 에큐메니컬)은 잘못된 전통을 넘어서 19세기에서 20세기에 선포된
[35] 가톨릭의 마리아론 교리를 심각하게 보며 "이단도 아니라 이제 이교다" 라며 더더욱 부정적으로 본다.
사실 이문제는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를 가로막는 커다른 장애물 까진 아니었다. 자세한것은 해당 문서
성모 마리아의 개신교 입장 문단 참조.
가톨릭의 개신교 비판 중에는
개신교가 가톨릭과는 달리 교리 해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교황과
교황청이 중심인 반면, 개신교는 읽는 이에 따라
성경의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종파가 갈리게 된다. 단일한 권위체계가 존재하는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해석의 권위가 없어 분열이 필연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성서해석과 역사를 잘 모르는 의견일 뿐이다. 일단 성서 해석에 있어서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도 나왔는데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한 신학박사과정을 나온 마르틴 루터는 물론이고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장 칼뱅 조차도 가톨릭 교회의 기존 성서해석이 명백히 틀리지 않은 이상 기존 해석을 인정했다. 당시 개혁자들의 성서 해석 문제 제기는 중세후기
스콜라 철학의 연구와 방법론은 물론, 14세기부터 제기된 인문주의의 연구성과를 이어 받은것이고 구체적으로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나 에라스무스등의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 연구가 뒷바침 된 것이지 당시에도 이미 여러 연구성과로 인하여 이의제기가 된 내용을 바탕으로 기존 가톨릭 교회의 정본
불가타판의 오역과 필사본 전수시 오류나 첨삭과 그로인한 잘못된 해석을 발견하여 원전연구를 재시도 한것이지 개인이 멋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비난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론 가톨릭 교회가 로마시대부터 현재까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비록 전승상은 그렇다고 주장하나)것은 대단히 무리이며 착각이다.
로마교회는 이미 종교개혁 이전 동방교회와 격렬한 신학적 논쟁끝에 분열했었다. 기독교의 역사 초기만 좁게봐서도 교리상으로만 봐도 로마시대부터 영지주의, 도나투스파
[36], 펠라기우스 주의
[37] 시작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니케아 공의회부터 아리우스파 단성론등 주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동서 분열 이후 서방교회에서 조차 교부시대때부터 다양한 의견들이 나뉘었고, 현재 가톨릭 교회에서(개신교에서도 인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대교부들의 입장이 통설로 정리되어 온 과정이 교회의 역사이다. 그리고 발도파처럼 개신교의 선구자급으로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을 주장하던 움직임과 목소리가 있으면 열심히 이단으로 사냥하여 태워 박멸한것이 성공한것이지
[38], 가톨릭 교회가 교황아래 한치의 의문점도 없이 2천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그것이 역사상 사실도 아니며, 꼭 옳은 점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39]개신교에서는 오히려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여 초기 기독교와 멀어진 근본 원인이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해석권한을 교황에 있다하여 (평신도에게 성경 금지, 성서 번역금지등) 지식을 독점하다 인문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에 공격을 받은것 처럼 권력있는이나많은이가 따르는것이 옳은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문주의 모토인
ad fontes(근본으로 돌아감)을 통하여 일반사제는 물론 평신도까지 성경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명백히 잘못된 가톨릭 전통주의와의 결별을 통해, '전통에 대한 맹종이 올바른 신앙인가'가 종교개혁시기 논제였고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의 권위로 대체하려는것이 당시 종교개혁 주의자들의 목표였다.
한국 개신교에 수백개의 교파들이 있음을 근거로 들면서 개신교의 분열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한국에 있는 수백개의 교단 중 인지도가 어느정도 있으며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는 교단은 일반적으로 10-20개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로회가 60% 이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데, 장로회 내부에서도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부르크 신앙고백등을 공통의 믿음으로 선언하는 교단만 같은 장로회 교단으로 인정하지 수백개의 교단이 나뉘어 삼국지 찍듯이 세력 다툼을 하는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타교로 볼지언정
[40] 같은 개신교인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은 서로를 타교로 보지 않으며, 교회제도(감독제 등), 강조하는 교리(침례 등)등이 조금씩 다를 뿐 같은 믿음의 형제로 본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나뉘어서 반목 타령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장로교,
침례교와 다르게 전통적인 전례에 부정적이지 않은(혹은 긍정적인)
루터교와
성공회도 타교로 보지 않는다.
[41][42] 이들 교파는 모두 개신교라는 이름 아래 연합하고 있다.
개신교 교파의 분열상 자체는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고 미국이나 영국, 서북유럽에서도 한참때 일어났던 현상이다.
[43]그리고 통일된 중앙권위가 없음을 아쉬워 하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중앙집권화 된 역사 이래 수많은 오류와 범죄들을 보면 꼭 좋은것만으로 보기 어려우며 개신교의 교회정치 시스템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를들어 나치시대 가톨릭 교회는 교황청과 나치정권의 정교협약에 침묵을 지킬것을 명령 받았으나 개신교는 일원화된 구조가 아니라 나치가 조직한 '독일인 교회'에 반발한 목사들이 고백교회를 만들어 반 나치 투쟁을 벌였고, 우리나라에선 선교사와 모국 교단 교회 내부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 끝에 신념에 따라 참배를 거부한 인물들이 현재까지 존경 받으나
[44] 한국 가톨릭 교회는 로마와 일본 가톨릭 교회의 명령에 순응하여 일찌감치 모두 신사참배에 굴복했고 저항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작용이 불거진 면도 없진 않으나 개신교는 의외로 기본이
민주주의와 자치주의이다. 장로제와 회중제가 바로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고 개교회주의는 루터의 (지방자치적) 지역교회론에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요소인데 이는 카톨릭의 권위주의, 중앙집권주의를 깡그리 부정하면서 나온 요소들이며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윗 문단처럼 일부 반가톨릭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교회론을 일종의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보편성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하기 쉬운 구조라는 점 역시 사실이다.
[45]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부터가 종교개혁 시기를 통해 나온 것이다. 한국, 미국처럼 헌법에서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나라들조차 개신교는 내셔널리즘과 결합하는 경우가 잦고 영국과 북유럽에서는 아예
국교회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한 나라/지역에서 자생하여 유독 그 지역에서만 교세가 강한 교파는 역사적으로도 민족주의/국가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가 흔히 있어왔다. 영국의 성공회,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독일의 루터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 현재의 성공회나 루터교회은 전세계에 퍼져 각 나라마다 관구 또는 교구를 두고 있고 각 관구가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이런 우려가 상대적으로 덜해진 상황이다. 비교적 최근에 분파되어 한 지역에서만 꽤 큰 교세를 유지하는 교파라면 위 사실을 항상 상기하여 다른 교파, 더 나아가 기독교 교단들의 연합 기구와의 교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의 금육 금식
[46]을 비판한 역사에, 오로지 성경만을 신조로 삼는 교리상 신약성서 바울의 서신에서 유대인의 율법중에 음식에 대한것은 지킬 이유가 없다고 명백히 밝혔기 때문에 현재 개신교는 전 세계 종교들을 통틀어서
시크교와 함께 육식에 매우 관대한 종교이기도 하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개신교 문화권은 고기 요리가 발달한 경우가 많다.
[47] 대표적으로
영국과 북유럽.
[48] 그리고
장 칼뱅의 청부(淸富)사상이나 막스 베버의 영향으로 다른 종교 입장에서는 현세적, 속물적이라고 까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교파마다 다르니 무조건적인 일반화는 하지 말자. 참고로 칼뱅은 루터를 우습게 여겼을 정도의 금욕주의자였다. 스위스 목사로 있을 때도 금욕주의를 설파했던 전력이 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기호품에 대해선 종파마다 달라서 애매한 편이지만 가급적 피하는 종파가 많다. 특히 미국이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술과 담배를 금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49] 현재는 구한말 시절 외국 선교사가 보기에 지나치게 술 담배 노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 거듭난 삶을 보여주길 바라는 측면에서 술담배를 금지했는데 현재에는 이전보단 많이 풀렸다. 적어도 술 담배 한다고 지옥간다고 하는 목사는 없다.
[50] 다만 장로회에선 목사들은 술 담배 금지 규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
[51]진보, 중도 성향의 교단 한정으로 성(性)에 관한 교리가 (이혼, 피임, 낙태를 절대 금지하는 등의) 가톨릭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편이다. 다만 동성애의 경우, 진보 교단은 가톨릭보다 유연하고(일부 교단에서는 동성애자가 목회자/성직자가 되는 것도 허용할 정도), 보수 교단은 가톨릭보다도 빡빡하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가 평신도로 입교하는 것도 금지.)
[52]개신교 교단 중 대부분은 성호긋기, 십자고상, 제단에 촛불 놓는 것,
[53] 성만찬의 화체설(성변화) 등을 가톨릭의 잔재 혹은 비성경적인 행위라 하여 배척한다.
[54] 또한 가톨릭의 교황 중심적 교회관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톨릭 신자에 대한 멸칭인 Papist(교황주의자, 교황숭배자)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
상술했듯 대체로 전통이나 인습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반면,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외관적인 면에서 당대의 최첨단 기술과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편이다. 아예
자유민주주의[55]나
산업 혁명 등을 비롯한 현대 문명이 만들어지는 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영향이 매우 강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즉, 철저하게 'Semper Reformanda' 정신에 의거하여 종교개혁자의 의견이라도 현대 기준에서 성경에 어긋난다고 증명되면 비판하고 폐할 정도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라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건물 크기가 가장 작은 교회는
크로스 아일랜드 채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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