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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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국왕
고종 | 高宗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태황제 | 高宗 太皇帝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출생
사망
1919년 1월 21일 (향년 66세)
능묘
홍릉(洪陵)
재위기간
제26대 국왕 · 대조선국 대군주[1]
대한제국 초대 황제
대한제국 태황제
초대 덕수궁 이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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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명복(命福)[2] / 재황(載晃)[3]
형(㷩)[4] / 희(熙)[5]
부모
배우자
신체
명부(明夫) / 성림(聖臨)
주연(珠淵)
익성군(翼成君)[7]
효덕전(孝德殿)
묘호
고종(高宗)[8]
존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1. 개요2. 배경3. 생애4. 평가
4.1. 재위 기간 당시(1863-1907) 정세4.2. 권력 집착4.3. 재정 운영4.4. 외교와 내정
4.4.1. 임오군란4.4.2. 동학 농민 운동과 청군차병
4.4.2.1. 증거4.4.2.2. 학계 대다수의 정설
4.4.3. 기타4.4.4. 배경
5. 고종의 망명 시도6. 가족 관계7.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
7.1. 사진7.2. 어진7.3. 기타 그림
8. 고종과 서양문물
8.1. 사진8.2. 자동차8.3. 음식8.4. 에스페란토
9. 개인소사, 신변잡기, 성격
9.1. 글씨와 문장9.2. 외국인들이 본 고종9.3. 저녁형 인간9.4. 식성
10. 여담
10.1. 독살설10.2. 20만 미군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10.3. 청과의 영토 분쟁10.4. 평양천도계획10.5. 지맥을 끊어서 일본을 풍수로 공격한다?10.6. 상하이 독일은행 예치금 52만 마르크10.7. 망명 시도10.8. 집옥재10.9. 고려왕조의 고종과의 비교10.10. 고종의 군밤 야사
11. 대중매체에서12. 같이보기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초대 군주. 묘호는 고종(高宗),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휘는 재황(載晃), 형(㷩), 희(熙). 연호개국(開國),[9] 건양(建陽),[10] 광무(光武)[11] 절일은 만수성절(萬壽聖節).[12]

타민족과의 비교와 열등 의식에서부터 촉발된 다른 지역 및 국가에 대한 혐오, 정벌론 대두와 침략 전쟁, 식민지 개척, 제국주의의 광풍(狂風)이 몰아치던 19세기 말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해서 안으로는 부국강병, 바깥으로는 국체 보존(國體保存)이라는 2가지 시대적 대과업를 맡았으나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하고 외세에만 의존해 여러 이권을 여타 이유로 강탈당하고 결국 망국군주가 된 자. 두 목표를 전부 달성하면 명군의 대명사가 되었겠지만 고종이 보여준 행각은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한 모습이었으며[13]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 당시 스스로의 힘이 아닌 청나라군에게 파병을 요청하는[14] 등 조선의 멸망을 스스로 가속화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병합 야욕 의도를 간파하여 대한제국을 세우고 광무개혁을 단행하여 근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종국(終局)에는 일본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게 된 망국의 군주다.[15]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읽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바보는 아니었지만 밝다고 볼 수는 없었고 큰 힘에 맞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굴복할만큼 나약하지는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결단력은 무척이나 부족했다.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 과제를 해결할 비범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에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가지지 못한 보통 사람. 왕권 유지 등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정치술은 대단했지만 정작 외세에는 한없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여줘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악영향을 많이 끼쳤다.

재위 기간이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영조(52년), 숙종(46년) 부자에 이어 역대 3번째로 긴 군주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어 발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한다. 망국이 없었다면 한국사의 기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의 치세에 조선개항(開港)부터 시작해 실질적으로 망했으므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거침없이 고종을 망국의 원흉으로 까고, 고종을 그나마 후하게 평가하는 측도 '잘 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동정론적 평가, 혹은 대한제국 멸망 후 불우한 황족들의 삶[16] 등으로 인한 동정표들이 주를 이룬다.

고종을 박하게 평하는 측은 혼란한 시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고종이 군주로서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과 그나마 치적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조차 황후 민씨 일가의 부패[17]와 세도, 두루뭉술한 행정, 서양 문화와 기술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의 여러 실정으로 점철되어 있는 점을 들어 평온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별볼일 없는 군주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고종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고종을 범군(梵君)을 넘어 암군으로 보는데 대표적인 실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 때의 처신이다. 임오군란 때 앞에서 나서지도 뒤에서 수습하지도 못해서 일을 너무 크게 벌렸고 특히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스스로가 아닌 외국 군대의 개입을 허용하는 오판을 했다는 점[18]에서 군주의 정치에 가장 필요한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그 결과 조선 멸망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방증된다는 시각이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고종 이후의 식민지 시기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정치적 논란이 되기도 한다. 망국의 마지막 군주들은 새로운 권력에 비해 폄하되기 쉽고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면서 "이씨 조선은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인식을 심는데 노력했다.[19] 그래서 고종에 대한 폄하를 식민사관의 일종으로 보고 이를 멈추고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존재하며, 민족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1990년대에는 반짝 평가가 상승하기도 했다. 고종에 대한 단순한 폄하나 왜곡도 지양해야겠지만, 그가 실행한 정책이나 결정에 대한 결과를 보면 식민사관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운 비판점도 분명히 있었다.

2. 배경[편집]

고종은 선왕 철종과 즉위 전까지는 법적(양자제도)으로 9촌이었고[20][21], 실제 혈통상으로는 무려 17촌이다. 고종은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효종(인평대군의 형) 후손들로 이어진 왕실 직계와는 너무나도 멀고 먼 방계였다. 그러나 할아버지 남연군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양자로 입적하여 가까운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도 17촌이나 9촌이나 둘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흥선군의 로비로 철종과 가까운 다른 왕손을 제치고 고종이 왕이 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어차피 철종 다음 왕은 어떻게 따져봐도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후손 중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한 번 보자.

그 전에 알아둬야 할 것은, 왕위 계승의 법칙 상 후임 왕은 반드시 선왕의 아랫대에서 나와야했고, 저 당시 철종의 후계자가 될 종친들 중 핏줄상 가장 가까운 게 17촌이었단 것. 5촌 조카 이재성이 있긴 했지만 후계자는 될 수 없었다. 이유는 후술. 그리고 그를 제외하면 철종의 조카 뻘에 해당하는 효종의 실제 후손이 아예 없어서 효종 형제들의 후손들이 그나마 제일 가까웠기 때문이다.

철종 사망 당시 왕족들은 전부 족보 상 사도세자의 후손들, 정확하게는 3명의 서자인 은언군, 은신군[22], 은전군의 후손들이었다. 철종 승하 당시 철종의 조카뻘 왕족들은 은언군 계열인 이재덕, 이재성, 은신군 계열인 이재원, 이재긍, 이재면, 이명복, 이재선, 은전군 계열인 이재근이 있었다.[23][24]

먼저 은언군가를 보자. 이재덕과 이재성은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의 아들이다. 이 중 이재덕은 은언군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종손이었으며 양자였다. 실제로는 중종 때 갈라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었기에 혈통적으로 너무 멀었으며 입양 시기도 철종이 죽기 바로 직전이었다. 이재성은 익평군의 친아들로, 혈연 상으로는 철종과 가장 가까웠지만 고작 3살밖에 안 된 너무 어린 아이인데다 서출이었다. 애당초 이재덕의 입양도 이재성이 서자라 은언군 가문을 잇지 못했기 때문에 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은언군가에서는 왕이 될 사람이 없었다.

그 다음 은신군가를 보자. 은언군파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상황에 그 다음 서열인 은신군가에서 후계자를 찾는 것이 합당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바로 이 은신군의 양자인데 남연군과 그의 자손들은 실제로는 인조 아들(효종 바로 아랫 동생 인평대군)의 후손이기 때문에 혈통상으로도 그나마 왕통과 가장 가까웠다. 또한, 후손들도 나름 많이 있어 현실적으로도 가장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집안이었다.

은전군가의 경우는 서열상 은신군가보다 낮으며, 실제 혈통으로도 선조의 9남 경창군의 후손이라서 실제 왕통과의 거리가 위의 은신군가보다도 더 멀었다.[25] 즉, 법적 촌수로든 실제 혈통 상 촌수로든 은신군가에 계승권이 밀리면 밀렸지 결코 앞서지 못하는 처지였다.

어차피 실제 효종계가 끊겼고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들이 전부 양자이라면, 차라리 아예 인평대군파 종가에서 왕을 내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져도 남연군 집안이 제일 가까웠다. 왜냐하면 남연군은 인평대군 4대 종손 이진익의 차남 이병원의 차남이기 때문이다. 인평대군 종가 자체는 이진익의 장남 이병순(남연군의 큰아버지)의 후손으로 이어졌지만, 철종 승하 당시 이병순의 후손들 중 철종의 조카 뻘 항렬은 없었다.[26] 그러면 이병원의 후손들 중에서 골라야했는데, 이병원의 장남 이도중 계열은 3남 이과중의 후손이 나중에 양자로 들어가 이었다. 그래서 이병원의 차남 계열이 가장 적절했는데 그 차남이 바로 남연군이다.

즉, 혈연이든 종법이든 어떻게 따져봐도 남연군 후손들 중에서 왕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연군 후손들은 많았고 그 중에서 굳이 이명복이 왕으로 선택받은 것은 로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흥선군의 형인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에겐 모두 아들이 1명씩 있었기 때문이다. 흥녕군과 흥완군의 자식은 양자였지만 이들도 다 친동생들의 자식이었기에 혈통의 문제는 없었다. 흥녕군의 아들(양자)은 이재원[27]이었고 흥완군의 아들(양자)은 이재면[28], 흥인군의 아들은 이재긍이었다. 종법으로 따지면 저들이 이명복보다 서열이 높았지만 저들을 제치고 이하응은 자신의 친자를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더군다나 이재긍의 경우 생모가 안동 김씨였기 때문에 안동 김씨 세도를 경계하던 차기 왕위 지명권자 신정왕후(효유대왕대비)는 이재긍을 후계자로 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이었다.

아무리 형 흥완군에게 양자로 들었다지만 자신의 적장자인 이재면을 놔두고[29] 차남인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할 당시 이재면은 19살로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이었다. 따라서 이재면이 왕위에 오르면 흥선군이나 조 대비가 섭정하며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흥선군은 나이가 찬 이재면 대신 아직 어려 당분간은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이명복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혈통 문제 및 이하응의 사전 작업으로 이명복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高宗)으로 정식 즉위하였다.[30]

3. 생애[편집]

파일:alpha5.png   자세한 내용은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철종~고종기의 농민 봉기를 나타낸 지도.
대한제국 선포 전후 열강의 이권 침탈 상황을 나타낸 지도.

고종의 왕권은 강하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다소의 정치적 감각이 있긴 했지만 급변하는 19세기 말에 조선이 필요로 하는 수준은 되지 못했다. 본인의 능력에 따라 근대화에 일부 노력한 흔적도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전권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고,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 한마디로 격동기 속 바뀌어가는 세상을 파악하긴 했지만 변화하는 세태에 빠르게 탑승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잔재에 더 비중을 둔 왕이었다. 다만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의 군주였던 만큼 고종의 권력과 안위는 곧 대한제국의 주권이었다. 어찌보면 국운의 막바지에 폭탄을 넘겨 받은 불운한 왕으로도 볼 수 있다. 러일전쟁, 청일전쟁같이 개혁의 시도가 이뤄지던 시기마다 벌어진 외부에서 가해진 폭력과 폭압, 그리고 이웃 국가들의 대리 전쟁, 내부의 기회주의자와 사대주의자, 한계에 달한 부패와 결함, 그리고 수 없이 벌어진 기근들[31]로 인해서 고종이 시도한 개혁 가운데 상당 수는 실패하였으며, 일부는 오히려 외세의 개입과 공격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어 조선의 명을 단축시켰고 결국 고종은 식물인간 상태가 되버린 국가와 조선 왕조의 종말을 지켜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수 십 년의 고종 재위기의 끝은 조선 왕조의 종말이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明君)이라 보는 시각은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점 정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평가가 있고, 반대로 일제강점기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암군, 처음에는 신하들에게 벼슬을 팔다가 나중에는 일본에 나라까지 팔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여기에는 삼정의 문란의 재점화, 위정 척사 운동과 민중의 개혁에 대한 거센 반발 및 명성황후 일파 민씨 척족들의 세도, 부정부패가 이미 만연하여 세기의 책략가가 태어나지 않는 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으므로 고종에게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백성을 다스리는 일국의 군주로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것에 대하여 최선임자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32].

그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문제점은 여러가지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재위기에 외척인 민씨 척족 일파의 부패를 사실상 방조, 방관하거나 조장한 점,[33]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반란인 임오군란과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부른 것도 모자라[34] 아관파천을 저질러 나라의 주권을 외국에 넘겨줄 계기[35]를 제공한 점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를 무너뜨리고 만민 공동회를 탄압해버린 일 등이 꼽힌다[36]. 근대적인 재정학 지식이 결여된 상태로 국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재원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채로 황실의 각종 집기에서부터 양무호 등 외국산 무기, 전함 등을 산다거나[37] 무분별하게 돈을 썼고, 경제 정책은 엉망으로 수립하여 일본이 대한 제국에 억지로 차관을 도입, 거액의 빚을 지게했을 때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빚을 갚지도 못했으며, 민간 주도의 국채보상운동까지 일어났다[38]. 게다가 근대적 개혁이라고 실시한 광무개혁조차 결과적으로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본인과 순종은 강제 퇴위, 나라는 멸망, 자녀 둘은 일본과 정략 결혼으로 마무리.

고종은 재위한 45년차, 근 반세기 동안 조선왕조의 최종책임자를 넘어선 조선왕조 그 자체였다. 또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10년을 제해도 35년을 친정했는데, 이는 이승만(12년) 박정희(18년) 전두환(7년)의 재임기간을 합쳐야 맞먹는 기간이다. 고종의 실패는 조선왕조 전체 시스템의 총체적 실패로, 나약한 개인의 한계로 애증어리게 미화하여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4.1. 재위 기간 당시(1863-1907) 정세[편집]

  • 목표
    • 조선,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나라에 의해 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지도자로서의 목표)
    • 전주 이씨 왕통(황통)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황제로서의 목표)
  • 문제점과 상황
    • 전근대적 조선의 왕권은 기본적,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다.[39]
    • 고종은 근대적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국가도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일 기반이 없었다.[40]
    • 군사력은 형편없어 양과 질 모두 기대할 것이 못 된다.[41]
    • 흥선대원군종친들을 장악하고 있으며 권력욕이 강했다. 섭정에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물러나서도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이므로 죽일 수도 없다.
      • 실질적으로 직전대의 지도자인 흥선대원군은 자의적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된 고종에게 파워게임 과정에서 최익현의 탄핵 상소안으로 하야해 밀려났고, 고종에게 지도자로서의 인수인계도 거의 하지 않았다. [42]
    • 조선의 재정은 파탄 상황이다.
      • 오랜 세도정치로 인해 삼정의 문란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백성들은 빈곤해져 사회가 파탄의 직전까지 가는 등 몹시 불안정했다.
      • 원래 전근대적이고 농업국가인 조선의 세입은 적었고 재정은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갔다.
      • 직전 지도자인 흥선대원군경복궁을 중건했는데 이때 당시 세입의 12배 - 60배, 화폐 총액의 70%를 털어 먹었다.
      • 대원군의 당백전 병크에 이은, 청전 유통 때문에 고종 친정 시작시기 조선 조정의 금고에는 실질가치 1/2인 청전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걸 폐지하지 않으면 인플레이션 유지, 폐지하면 중앙정부 파산이다.[43]
      • 근대적 화폐 체제(금/은 본위제)로 들어가기에는 모아둔 귀금속이 없다.[44]
      • 화폐 발행권은 기득권자들에게 나뉘어 있으며, 외국(일제)이 사적으로 악화를 주조해 경제를 망치고 있다.
      • 지하자원, 예를 들어서 금광 하나를 개발하는 데는 조선중앙정부 1년 세입[45]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그래서 외국인들에게 광산이나 철도 개발권을 넘기고 중간에서 일부 수익을 얻은 것).
      • 조선의 세입 구조는 지방관과 향리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이들은 사익에 연연해서 중앙 정부의 명령도 무시한다.
    • 대부분의 신하는 믿을 수 없다.
      • 전근대적 인물들은 전근대적 시스템 유지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개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종친들의 대부분은 흥선대원군을 따른다.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종친 특별 우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46]
      • 급진적 개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표는 적어도 입헌 군주정이다. 그나마 조선 내에서는 세력이 가장 작다.
      • 개화를 추구하는 사람(개화파)들은 모두 외국과 연결고리가 있다. 청을 통해서 개화를 접한 사람은 친청파[47]가 되고, 일본을 통해서 개화를 접한 사람[48]은 친일파가 되고, 미국을 통해서 개화를 접한 사람은 친미파가 된다.
      • 이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고, 고종과 그 일가의 목숨을 위협했다.[49]
    • 외국도 믿을 수 없다.
      • 일본은 한국 자체를 먹으려 노렸고, 청나라 또한 한국을 직접 합병하거나 최소한 기존의 조공 체제를 넘어 조선을 완전한 속국으로 만든 채 이권을 장악하려 했다.
      • 일본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이미 메이지 유신을 경험했고, 인구와 재정, 군사력에서 비교가 안되는 위치가 되었다. 러일전쟁 시점 기준 일본의 1년 세입은 대한제국의 세입에 비해서 적어도 25배가 넘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청, 러시아 등)에 패배하거나, 한국이 강해지기 전에 한국을 완전히 잡아먹으려고 했다.
      • 외국 고문들은 돈을 주는 동안에는 도움이 된다. 설령 믿을 수 없는 나라가 파견했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월급을 줄 수 없게 되면 바로 배신한다.[50]
      •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이기 때문에 국제 정세가 복잡하다. 일본 - 영국 - 미국은 우호 관계가 성립되어 있고, 독일 - 러시아도 비슷하다. 이들은 상대의 확장을 바라지 않는다. 즉위 초기에는 청이라는 기존 외세도 존재한다.
      • 청나라는 조선을 먹는 것 보다는 속국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가운데 조선 내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확대시키겠다는 입장이 주류다. 대표적으로 이홍장위안스카이(원세개)가 이렇게 생각했다. 즉,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 노릇만 제대로 해준다면 그 이상의 내정 간섭은 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청나라 또한 심각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기에 외교적인 도움을 크게 기대할 수 없으며 청이 어떤 형태로든 조선에서 손을 떼는 순간 일본에게 그대로 위험이 노출된다.
      • 제정 러시아는 열강들 중에서 청과 더불어 그나마 조선에 호의적인 입장이라 차르가 건재한 동안에는 한반도의 이권을 넘겨주거나 정치적 협상을 통해 러시아의 물질적, 정치적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도 복잡한 국제 정세와 혼란한 국내 정세, 그리고 고종의 재위 중후반기부터는 니콜라이 2세라는 암군이 재위하게 된다.

이는 실제로 고종의 생애 동안에 있었던 일과 외부적으로 주어진 상황들을 대략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고종은 결국 이 극한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다. 해결하면 먼치킨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인 동시에, 결국 해결은 못하면서 대처 과정에서 다른 문제점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비판점. 사실 딱 봐도 국가 멸망 테크를 착착 밟아가는 와중인지라 세종, 정조와 같은 조선의 먼치킨이 집권해도 해결이 어렵다. 실제 예를 들자면 숭정제의 능력은 다른 시대 같았으면 전성기를 이끌 먼치킨이었지만 50여년동안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기엔 너무 역부족이었다. 애초부터 판 자체가 불리하게 짜인 데다가 왕(고종)마저 상태가 안 좋다.

그러나 상황이 나쁜 것과는 별개로, 고종이 그 상황에서도 정신못차리고 상황을 더 악화시킨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다못해 과거 망국의 군주였던 공양왕 수준으로라도 했었어도 이정도로 평가가 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조선멸망의 시발점이 된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때 외국군 파병은 고종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51] 임오군란 직전에도 군인들 월급도 없는 현실에 고종은 아들 혼수품이나 대거 사들였고,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원인을 알고있으면서도 대책을 세우지 않는 등 심각하게 개념이 부족한 인간이었다.[52]

4.2. 권력 집착[편집]

고종은 유독 권력에 집착하였는데,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영향이 컸었다는 추측이 많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성년이 되었음에도 섭정을 계속하였는데, 고종은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고생을 한 끝에야 비로소 친정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별도의 쿠데타,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53], 을미사변 등으로 정치 노선을 전혀 가리지 않고 다른 세력과 결탁하며 왕권을 위협하였고, 고종이 이를 방어하다보니 정권에 관한 집착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흥선대원군이 물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을미사변 이전까지는 사실상 민씨의 세도정치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종의 진짜 친정은 광무개혁때 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하여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후에도 독립 협회와 개화파 등과 친교를 유지하다가, 입헌 군주제를 요구하며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자 개화파와 갈등을 빚다가 독립 협회를 탄압하고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켰다. 물론 선진국인 유럽에도 전제 군주국이 많았고, 애초에 고종은 전제 군주국의 군주로 즉위했던 인물이므로 그가 단순히 전제 군주였다는 점이 비난 받을 거리는 아니다.[54] 더불어 개화파와 갈등을 빚었던 것도, 애초에 현실성이 떨어지는 집단이었던건 둘째치고 급진 개화파의 경우에는 갑신정변이나 기타 무리한 행동으로 지지기반인 백성들로부터 지지도 상실했고[55] 독립 협회도 고종이 탄압하기 전부터 내부 갈등[56]과 내부 모순으로 몰락했었다는 점 등 단순히 그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일방적으로 고종만 비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개화파가 현실에 어둡다고는 해도, 고종이 온건 개화파 이후로 국내의 지식인들로부터 어떠한 지지도 얻지 못하였고 광무 개혁을 통해 자기가 육성한 인재들 조차 친일이나 친미로 돌아서는[57] 등 자신의 지지 기반을 제대로 육성하는 것조차 버거워했으며 이들을 제어하지도 못했다. 인재를 등용하는 시각도 어딘가 나사가 풀려서 이용태를 광무개혁 당시 대한제국의 평리원 재판관으로 다시 기용하기도 했다. 그나마 만든 충직한 측근조차 이용익이나 홍종우같이 나라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있으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뿐이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측근으로 삼았던 사람이[58] 오히려 고종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했는데, 이는 고종의 권력과 생명에 대한 집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하여 고종은 단순히 특정 지식인 계층과의 갈등을 떠나서 거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한마음으로 외면 받았고,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권력에만 집착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고려 현종, 세종, 정조 정도의 학식, 언변 등 능력을 보유하였다면 모를까 고종은 실적이나 실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욕심만 많았던 것이기에 이러한 점에서 고종의 정권 집착이나 독재가 비판받는 편이다. 이는 고종이 '왕위 계승권'을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통과 멀다 보니 제왕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황현의 기록을 보면 고종은 신하들의 만류 때문에 자기가 대신(조희연) 한 명도 제대로 못 자른다고 짜증을 내며, "난 임금도 아니니 너네가 이거 가져라."라는 식으로 옥새를 집어던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때 대신인 어윤중이 "군주는 신하를 예로써 대하고, 신하는 군주를 충으로써 섬기는 법"이라며 이러시면 곤란하다고 도리어 차분히 설득했다고. 물론 황현의 기록은 구한말 야사집에 가까우므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겠으나, 고종이 입헌 군주적인 모습은커녕 언로에 귀 기울이는 전통적인 유교 문화권 군주의 모습에마저 한참 못 미쳤음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

4.3. 재정 운영[편집]

재정 운영은 탁지부 예산이 아닌 내장원이 관할한 황실 자금인 내탕금의 비중이 컸다.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예산이 아니라 청와대 자금으로 정책을 시행한 것인데 이 내탕금은 대한제국 선포 이전부터 벼슬을 돈주고 팔거나, 화폐 주조를 남발하거나. 원납전을 걷어들이면서 마련하거나, 국유 토지의 소작료 등으로 이뤄졌다. 당시 고종의 공식적 비자금 창고인 궁내부와 궁내부 산하 내장원 내탕금은 기존의 예산을 집행하는 탁지부를 훨씬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탁지부 예산보다 내탕금이 훨씬 컸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굳이 조세를 쓰지 않고 내탕금을 사용한 이유는 당시 조선의 해관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 때문인데, 갑오개혁 이후로는 해관이 독립적인 기관으로 변하고, 이 과정에서 상당히 강력한 권한을 받아낸 기관이 되었다.원래대로면 탁지부가 해관의 위에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해관이 탁지부의 위에 있었고, 이 때문에 실제예산의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못하여 맥리비 브라운이 원하는대로 자금이 융통되거나 혹은 지출이 잠겨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맥리비 브라운이 장악하고 있는 탁지부 예산이 아닌 마음대로 사용할수 있는 내탕금의 비중이 커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몇몇 학자들은 개화의 과정에서 많은 징세권이 일본 및 기타 열강에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일본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황제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내탕금에 주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59]
"...... 제 활동영역은 조금 확대되었지만 병원을 짓는 일은 엄두도 못 냅니다. 한국 정부는 그런 일에는 한 푼도 쓰지 않고 유치한 일에 수천 냥을 바치니 계산능력이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나라가 놀랍게 메말라버렸고, 남부 지방에서는 세금이 혹독하다고 폭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포대가 몇 개 달린 낡은 일본전함[60]을 사들일 수백만 마르크는 있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는 궁중에서 영사기를 샀는데, 신품이라고 4,000마르크를 주었다지 뭡니까. 몇년전 프랑스 파리에서 500프랑밖에 안 하던 낡은 것으로, 램프도 없는 망가진 기계였는데 말입니다. 거의 매일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는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기꾼에게 걸려듭니다."

리하르트 분쉬(Richard Wunsch)[61]의 서한 (1903년 2월 6일)

그나마 최근에는 이태진에 의해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갔음이 밝혀졌다. 특히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이 고종의 밀지나 자금 지원 등을 받았고, 고종 사망 이후까지 이어져서 국내외 대일본 투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62], 고종이 이렇게 항일 의병들에게 밀지를 보내며 비자금을 내주게 된 계기가, 결국은 독자적이 군사력을 양성할 기회와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의 예산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다 말아먹었기 때문이기에, 마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여전히 비판의 여지가 많다.

그 밖에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이나 삼림 채굴권 등을 외국에 내주던 상황 역시 당시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궁핍한 상황과 고종과 왕실의 부실한 협상 능력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운산 금광이다.[63] 운산금광은 일시금 25만원에 년간 2만 5천원으로 25년간 특허권을 주었는데#, 순수익은 30년간 1,500만 달러였다. 운산금광의 개발비가 당시 한해 예산을 훨씬 능가하는 금액[64]

4.4. 외교와 내정[편집]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이 친권을 잡은 이후 나라에 큰 반란이 2번 일어나는데 하나가 임오군란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동학 농민 운동이다.

4.4.1. 임오군란[편집]

임오군란은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세력을 결탁한 명성 황후의 친척인 민씨 척족, 즉 민씨 외척이 장악한 선혜청이 구식 군인들의 급여를 횡령하여 군인들의 급여가 13개월이나 밀린 것과 신식 군인과 비교하여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불만이 쌓여 폭발한 것이었다. 애초에 친정을 위해 민씨 척족을 키워주다보니 이들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질러 그들을 방조한 고종에게도 책임이 있거니와, 임오군란 이전에 구식 군인들이 창고지기를 폭행한 이후에도 그저 잘 타이르라고만 했을 뿐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않다가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이게 반란으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정확하게 임오군란으로부터 1년 전인 1881년 신사년에 고종이 무얼 했냐면, 민태호의 딸이자 황태자비인 순명효황후 민씨과 순종의 가례를 위한 혼수품으로 대량의 비단을 일본 회사로부터 구입하였다.링크 [65]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의 급여는 그전부터 체불되었는데 아들 혼수품 장만에는 거액의 돈을 들인 것이다. 구식 군인들의 상황을 알든 몰랐든, 이는 대단히 무능한 실책이었다.

어찌됐던 임오군란은 나중에 친정으로 몰아냈던 대원군을 복권시키고서야 겨우 진정했지만, 반란의 결과로 많은 일본인들이 죽어 일본 측에서도 책임을 요구하며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였고, 나라를 지켜야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덕택에 청나라를 통해 외국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 결과 청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조선은 주권에 타격을 입고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이중으로 외압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를 계기로 갑신정변이나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국내가 쑥대밭이 되어야만 했다.

4.4.2. 동학 농민 운동과 청군차병[편집]

청병차병에 대한 결정을 보지 못하자 고종은 비밀리에 성기운을 원세개에게 보내 상담하면서 청병차병을 암암리에 결정했다. 결국 청병차병은 왕권을 유지하려는 고종과 정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민씨세력의 실권자 민영준, 그리고 외압세력의 대표 원세개 사이에서 담합이 이루어져 결정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근대 편, 2018, 473쪽
동학농민군에 의한 전주 점령 직후부터 정부의 차병 논의는 본격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을 ‘미친벌떼와 궁한 개’로 비유한 선혜청 당상 민영준은 무기력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4월 28일 전주 함락의 보고를 듣고 민영준은 국왕(고종)의 내락을 받아 위안스카이에게 차병안을 제의하였다. 집권 민씨세력은 초토사 홍계훈의 청에 따라 청국 ‘천병’의 힘을 빌려 이들을 토벌토록 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이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봉기원인을 직시하고 있던 영돈령부사 김병시는 “수렴정치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이 기뇨한 것을, 바로 동학도에게 그 책임을 돌려서 수천명을 살상한 것도 참지 못하겠거니와, 여기서 청병을 청원한 것은 또 하나의 실책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우리 백성을 살해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민영준 등의 차병주장을 힐책했다.

그런데도 청국군을 부르는 것이 당시 집권세력층의 입장에서는 부득이 취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4월 30일 조선정부에서 청나라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다. 정부는 위안스카이를 통해 군사파견 요청서를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청국은 군함을 곧바로 조선에 파견하였다.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서울: 경인문화사, 2012, page 253~254

이후에 일어나는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발생 원인이 고종 친정 이후부터 매관매직 등이 성행했기 때문이었다. 민씨 척족도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고종도 이것을 통해 개인 비자금인 내탕금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이 백성들을 착취하고 중간 횡령을 일삼아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군을 들여와서 진압하려 들었는데, 앞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하려고 끌어들인 청군의 개입은 자연히 일본군의 개입도 불러오게 되었다. 특히 동학 농민 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군의 개입과 학살을 조선 관군이 아예 직접적으로 지원해주었는데, 결론적으로 한 나라의 국왕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군을 동원해 학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 하던데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이 반대하고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였던 것이다. 자세한건 동학 농민 운동 참조.[66]

후속 조치도 더욱 형편없는데, 동학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 민사 국장에 이어 고등 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 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 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고부 군민들을 학살하고 탄압한 이용태도 파면되어 유배가나 사면을 받고 고위직으로 승진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 정치 관점에서나 현대적인 관점에서나 옹호받을 여지가 전혀 없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 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4.2.1. 증거[편집]
고종이 청군차병을 자진했다는 증거는 조선측자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청의 문서 등 무려 세 국가에서 증거가 나오고 있다.
  • 조선정부측 자료: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교차검증
보은집회 당시 1893년 3월에 고종은 청군출병 의사를 보였고 신하들이 거부에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의사표명을 하며 반복적으로 의견을 구했다.
여(고종): 요충지가 모두 몇개나 됩니까?

심순택: 수원과 용인이 직로입니다. 심영과 기영의 병정들을 먼저 수원과 용인 등지에 파견하여 주둔케 하고 경군은 상황을 보면서 조용함이 좋을 듯 합니다.

여(고종): 경군은 절대 절대 파견할 수 없습니다. 타국의 군사를 차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나라에 전례들이 있습니다만 군을 차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심순택: 그것은 아니됩니다. 만약 타국 군사를 차용하면 군량을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에서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여(고종): 중국에서도 일찍이 영국군을 차용했던 일이 있습니다.

정범조: 어찌 중국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여(고종):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청병을 차용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정범조: 청병을 차용하는 것은 비록 여러 나라의 군사를 차용하는 것과 다르지만 처음부터 차용하지 않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

이런 대화 내용은 승정원 일기, 일성록, 고종실록 이라는 세가지 자료에 교차검증이 되고있다.[김명섭,1994,7][구선희,1999,219][강문호,2004,109][엄찬호,2006,5][신영우,2009,19~20,26][유바다,2017,336]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묻더니 신하들이 거절하니 끈질기게 동일 의견을 반복하였다. 이것을 오직 의견만 구했을 뿐이라고 해석하는 건 이태진 등 극소수이며 김명섭, 구선희, 강문호, 엄찬호, 신영우, 유바다 등 대부분의 학자는 고종이 청군차병을 원한 의지나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해석한다.
  •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요청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동학군을 실제보다 과대평가 하여) 청군차병을 요청하는 문건을 정부에 보냈고 그 사료가 남아있다.[김명섭,1994,5~6][강문호,2004,116][신영우,2009,26]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
홍계훈이 조선정부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한 사실이 주한일본공사관 측에 확실히 남아있다. 음력 4월 19일에 그 사실이 분명히 기록되어있다.[강문호,2004,120~121][유바다,2017,336]

일본임시대리공사가 조선 측 반응을 조사한 후 조선정부가 청병차병 방안을 채택할 것을 예상한 문서.[구선희,1999,222~223]

고종이 청군차병을 결정짓고 회의도 열지 않은 채 원세개 측에 비밀리에 파견을 하여 청병차병을 결정했다는 기록, 5월 1일 조선정부가 청국에게 공식적으로 청군차병을 요청한 상태라는 것. 조선정부가 원세개에게 출병 요청하자 다음날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가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에게 보고를 한 것. 청국이 조선의 차병안을 받아들여 군사를 출병한다는 전보를 일본정부가 받았고 휴가 중이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에게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였다는 사실들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문서에도 분명히 적혀있다.[김명섭,1994,12][구선희,1999,225][엄찬호,2006,13][신영우,2009,27][김경록,2018,37~39]
  • 청의 문서(이홍집 전집 포함)
1893년 보은집회 당시 고종의 청병차병안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음에도 고종이 “동학의 세가 창궐하여 충청병영의 병정으로는 진무할 힘이 없고, 경병 역시 파송할 수 없으므로 청병을 빌려서 뿌리 뽑고 자”한며 비밀리에 박제순을 파견하여 원세개에게 청 병력 파견을 의논한 사실이 기록된 문서도 있다.[구선희,1999,220~221][김보경,2004,95][엄찬호,2006,5]

1894년 4월 28일에 청병차병 공문이 완성됐음을 조선정부 측에서 사람을 보내 원세개에 알렸음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구선희,1999,226]

고종의 내명을 받은 민영준이 원세개와 교섭하여 4월 29일 출병동의를 얻은 것을 전하는 문서가 있다.[엄찬호,2006,7]

고종이 청병차병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것, 임오군란이나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도움으로 진압된 전례에 비추어 이번사태도 청국 군대가 대신 소멸시켜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한 것 이 문서에 남아있다.[*김명섭,1994,12~13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13[구선희,1999,227][강문호,2004,127~128][엄찬호,2006,7][신영우,2009,27][유바다,2017,337]

위와 같이 청의 문서에서도 고종이 청병차병을 요청했음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2008년 1월 중국 안휘교육출판사(安徽教育出版社)에서 총 39권에서 2,600여만자라는 분량으로 이홍장전집이 새로 출간했으나 여기서도 기존 사실을 뒤집는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예를 들면 유바다 박사는 “顧廷龍․戴逸 主編, 2007, 李鴻章全集 1~39, 安徽敎育出版社”라는 방대한 분량의 사료집을 참고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유바다,2017,411] 하지만 여기서도 고종이 청에게 청군차병을 요청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인 구선희 박사가 이홍장 전집에 대한 해제를 했었는데도 여기서도 청의 문서가 '고종의 청병차병의 증거'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홍장은 오히려 조선이 뒤처리하게 놓아두고 가능하면 빨리 조선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는 자료가 나온다고 설명하였다.[구선희,2017,33~35]

* 갑오실기
5월 1일[五月初一日]

(…) 먼저 순변사(巡邊使)를 차송(差送)한 뒤에 원임대신이 입시하여 사사로이 뵐 때, 임금께서 청병(淸兵)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시길, “총리 원세개(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조회(照會)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였다. 임금께서는 일본인이 인연(夤緣)하여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셨다. 판부사 김홍집(金弘集, 호는 道園)이 말하기를, “지금 우리 군대가 적도를 소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조치입니다. 일본은 우리가 처음부터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움직인단 말입니까?” 하였다.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보국(輔國, 보국숭록대부) 민영준(閔泳駿)이 영돈[영돈령부사] 김병시(金炳始, 호는 용엄(蓉庵))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사람까지 보내어 몰래 질문하길, “경연하는 자리에서 청병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일을 가지고 여러 대신이 충분한 논의가 있었는데, 합하(閤下)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구원을 요청하는 일이 어찌 어렵고 신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일본 군대도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김병시가 찾아온 사람에게 조용히 말하길, “대개 이 일은 이미 정론(定論)이 있다고 하니 억측으로 질문에 대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匪徒, 동학의 무리)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 일본의 문제도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관(淸館)의 조회(照會)가 지금 잠시 늦추어졌고 이미 우리 병사도 출발하였으니, 잠시 하회를 관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민대감[閔泳駿]께서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임금께서는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성기운(成岐運)이 청관에 가서 총리 원세개에게 조회의 건을 전달하니, ≪청관에서는≫ 곧장 천진(天津)으로 전보를 보내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청병의 전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도독(都督) 섭지초(葉志超)가 2천여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니, 이중하(李重夏)가 영접하여 머물렀다.

갑오실기, 갑오년 5월 음력 1894년 5월 http://www.e-donghak.or.kr/
이 자료는 저자가 미상이라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나 이 자료는 청과 일본 측 문서와 교차검증이 되며 논문에서도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근거로 사용된다.[신영우,2009,27]
4.4.2.2. 학계 대다수의 정설[편집]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에게 출병했다는 건 명백한 학계의 정설이다. 무슨 학계가 적폐라서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고 조선측,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문서, 청의 문서(이홍집전집 발간이후 포함) 등 증거까지 명확한 상태다.

다음은 고종이 자진해서 청군차병을 요청했다고 설명하는 논문, 학술서의 목록이다.

목록: [김창수,1981,42~50][김창수,1985,3~9][박종근,1995,8~17][구선희,1999,220~227][구선희,2006,94][김보경,2004,95~99][강문호,2004,109~110,116,117,127~128][차경애,2008,67][엄찬호,2006,7~13][육군본부육군군사연구소,2012,253~254][유바다,2017,336~337][학리리,2018,208~209][김경록,2018,37~39][장경호,2018,52~53][동북아역사재단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2018,473]

고종의 청군차병 자진 요청은 부정할 수 없이 학계정설이다.

4.4.3. 기타[편집]

고종이 아관파천 후 자원 채굴권 등을 열강에 판 것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어렵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성공한 것이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실패한 것이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 전쟁 전까지 주 활약 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 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으나,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 외교가 어느 정도 효과를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추진하며 영향력 확대를 꾀했는데, 이는 조선이 러시아의 괴뢰국이나 식민지 혹은 병합이 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고, 일본, 미국, 영국 그외 각국이 힘을 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상황에서 홀로 러시아와 친교를 도모했다는 점에서 단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자칫 늑대를 몰아내려다가 호랑이를 불러오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청이 사라지고 남은 외세가 러시아와 일본 뿐인 상황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실시하지만 이는 계획부터 실천까지 전부 형편없는 실패작으로 끝이 나게 되었고 오히려 악평만 더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천연 자원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 등을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외세에 팔아넘겨 어떻게든 힘의 균형을 유지하여 중립국이 되려 했으나 당시 한국은 그들을 축출해낼 힘이 없었다.

거기다 본래 외교는 의리나 도덕심이 아닌 철저한 실리와 국력에 따라 성사 여부가 갈리는 것이고 이미 열강들 입장에선 가난하고 근대화도 어설프게 된 대한 제국보단 근대화를 성공시키고 열강 반열에 들어간 일본을 돕는 게 자국의 이익에 여러 모로 유리했다. 당연히 이 열강들은 자력으로 나라를 보호하지 못해 열강에 도움을 호소하는 고종과 대한 제국을 비웃으며 거절했고 일본을 적극 지지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고종과 대한제국의 외교를 비웃으며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본인의 주먹을 휘두를 줄도 모른다. 자국 방위조차 알아서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런 나라를 이해득실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선의로 도와주는 나라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즉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를 도와주는 나라가 있다고 믿는 고종과 대한 제국의 순진함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112]

4.4.4. 배경[편집]

실질적으로 독립을 유지했던 비서구권 국가들의 공통적 특징은 뛰어난 상황 대처 능력과 외교적 상황, 천운이 따른 경우가 대다수이다. 전반적 실력이 열강과 대등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회피를 넘어 서구 열강과 맞먹는 세력으로 성장한 유일한 예외가 일본이다.[113]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 19세기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상황은 동시기 조선보다 훨씬 좋았다.[114] 더구나 일본을 압박해오던 미국이 남북전쟁에 빠지는 등 천운이 따라주면서 일본은 살아남아 열강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운이 따라줬을 지라도 적절한 시기에 메이지 유신 등 사회 자체를 바꾸는 개혁에 대한 의지가 있었기에 그 운을 근대화 성공으로 가능케 했다. 현실적으로 실력이 없는데 외교가 무슨 소용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조선은 말 그대로 청나라만 바라봤던 근시안적 닫힌 세계관이 오랫동안 유지했고, 막상 고종이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던 시기는 1890년대인데, 1890년대의 조선은 이미 청과 함께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다.[115] 즉, 이미 근대화 정책을 시행할 때는 안으로는 개혁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있었고 밖으로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계속해서 이권을 침탈 당하고 있었다. 고종 입장에서 보자면 운이 없다고 생각 할 수 있었던 시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 때문에, 이 외교독립론은 조선 멸망 이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이어진다. 고종을 극도로 비판했던 이승만[116] 가장 대표적인 외교독립론자였고, 임시정부가 해외 이주민이 많고 일본군과 전투가 가능했던 만주나 간도가 아니라 중국에서도 외국공사관들이 밀집해있었던 조계지 상해에 위치했다는 것부터가 외교 독립론의 발상이다. 하지만 엄연한 영토와 권력을 가진 국왕/황제이었던 고종도 실패했는데, 민간인들의 편지 보내기가 효과 있을 리가 없어서 자기네 식민지 확장하기에 바빴던 외국들이 단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기 때문에 외교독립론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게 된다.

요약하면, 고종이 잘했다, 잘못했다를 떠나서 당시 기준으로는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가 진실이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욕심이 있고, 지식의 한계가 있었을지언정, 바보라서 저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

광무개혁 문서에도 있지만, 조선은 굉장히 가난했고, 너무 늦었다. 바로 옆 나라 일본에서 조선보다 풍부한 자원[117] 을 바탕으로 백성들 쥐어짜서[118] 에도시대에 근대적 자본주의의 기틀[119]을 만들었다.

많은 대체역사소설들이 고종 시대를 다루지만, 일본 가공전기들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해결책[120]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 이 부분 때문이다. 조건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고, 알면 진짜로 1904 대한민국이나 천군처럼 사람 몇명으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121]

5. 고종의 망명 시도[편집]

고종은 망명을 해 국외에서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첫 망명시도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 러시아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1904년 러일전쟁의 위험이 커지자 고종은 러시아 측에 망명 가능성을 은밀히 타진했다. 이때는 국내의 러시아 공사관뿐만 아니라 국외 망명까지 고려한 것이었다.[박종효,2002,101]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대세여서 러일전쟁으로 이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사실상 떨어졌다. 두번째 망명시도는 1907년 강제퇴위당한 바로 그 다음해였다. 당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국외 망명을 시도했고[박종효,2002,73] 3번째 망명 시도는 1908년 11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측 대일협상파에 의해 저지당했다.[박종효,2002,74]4번째 망명시도는 고종은 1910년 6월경 다시 연해주 망명정부 수립을 기도 했었다.[외교통상부,2003,223~224] 즉 고종은 병탄전에만 4번의 망명시도를 했다가 모두 좌절됐고 한일합방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廉德仁·또는 염덕신)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印影·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金思濬)·김사홍(金思洪)·김승현(金勝鉉)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협력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마지막 망명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趙季珍)이 고종의 생질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밀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내적인 조건은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때는 마침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왕실 이방자 여사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종이 (이회영) 선생의 생각을 상주하자 뜻밖에 쾌히 승낙하셨다”고 전하는 대로 국혼(國婚) 문제였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왕세자 영친왕이 일본 여인과 혼인한다면 조선 왕실의 맥은 끊기는 것이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行宮)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圓)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李得年)·홍증식(洪增植)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경운궁을 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은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그리고 고종의 죽음이 독살이었음은 친일 성향의 윤치호 일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윤치호는 또 다른 친일파 한진창이 전하는 말이라면서 고종의 시신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혀가 닳아 없어지고 치아는 모두 빠져나왔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윤치호 일기』 1920.10.13.)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6. 가족 관계[편집]

파일:alpha5.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황실 문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7. 사진과 어진, 기타 그림[편집]

근대의 황제답게 사진어진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다른 조선의 군주와는 다르게 신문 삽화나 포스터 같은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7.1. 사진[편집]

미국인 퍼시벌 로웰이 창덕궁 농수정에서찍은 1884년의 고종 생애 첫 사진.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왼쪽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 오른쪽 사진이다.[128]
파일:attachment/고종(조선)/Gojong.png
군복 차림의 고종
군복 차림의 고종
정장 차림의 고종
파일:hBKZdp9.jpg
실크햇프록 코트를 입고 모피 망토를 두른 서양복식 차림의 고종.
1918년 1월 15일의 고종. 장소는 덕수궁. 이 때 당시는 이태왕.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129]

7.2. 어진[편집]

파일:attachment/gojongurjin22.jpg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1) #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2) #
187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고종 어진
파일:고종.jpg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3) #
작자 미상의 원유관 강사포본 고종 어진[130]
동강 권오창의 고종 전신 어진 #

7.3. 기타 그림[편집]

한국의 군주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어진을 제외하고도 신문삽화포스터같은 그림이 남아 있는 황제다. 그전에는 감히 함부로 그릴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신문의 만평이라는 것이 풍자적이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안타까운 그림이 많다.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호머 헐버트가 발행한 Korean Newspaper에 실린 을사조약을 그린 삽화[131]
일본에서 그린 고종 강제 퇴위 풍자화
러일전쟁 당시의 상황을 풍자한 프랑스 정치만평 그림엽서[132]
1894년 8월 12일 프랑스의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삽화로 조정의 모습을 그렸다.
1903년 11월 23일 미국의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면에 실린 에밀리 브라운 관련 가십성 기사
1906년 일본 도쿄에서 인쇄된 '세계 20대국 군주 어존영'이란 포스터메이지 천황 뒤편에 배치시켜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그 와중에 같이 중간에 낀 빌헬름 2세
1903년 5월의 그림으로 위의 그림과 거의 유사한 프로파간다 포스터[133]
1899년 10월 19일 배니티 페어라는 잡지에 실린 고종의 컬러 캐리커쳐, 원화작가인 프라이(Pry)[134]가 그린것을 석화 인쇄했다.

8. 고종과 서양문물[편집]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썼다고도 한다.

개화기에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적극적으로 애용했다. 사실 이것은 청나라의 광서제나 일본의 명치 등 다른 군주들도 비슷한 형편이었다.

8.1. 사진[편집]

사진 문단에 많은 사진들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 시절의 보통 조선 사람들이 기피하였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특히 초기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 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135]

8.2. 자동차[편집]

고종은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군주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 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 문화재 318호,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 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136]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뜬금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 고궁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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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음식[편집]

2017년, 창덕궁에서 '와플 틀'이 발굴되었다. 이와 동시에 '카스테라 틀'도 발견되어, 와플카스테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 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137] 음료로는 커피사이다를 마셨다고 한다.

특히 커피를 매우 좋아했다. 커피 애호가답게 커피 맛에도 굉장히 민감하여, 김홍륙 독다 사건 당시 아편을 탄 커피 맛이 이상한것을 알고 바로 뱉어내 위험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순종은 커피가 처음이다보니 맛의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다량을 들이켜 구토와 피설사를 반복하다 기절하고 이가 모두 빠지는 등 몸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아이스크림도 먹었다고 한다. 외국 문물이 마구 들어오던 시대에 왕으로서 모든 것을 첫번째로 접했기 때문에 다양한 식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138] 물론 이 모든 것들을 처음 맛 본 사람은 기미상궁[139]

8.4. 에스페란토[편집]

한국에서 에스페란토 (인공어)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 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한편으로 당시에 에스페란토가 얼마나 국제적으로 촉망받던 대상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단재 신채호도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도 했다.

9. 개인소사, 신변잡기, 성격[편집]

9.1. 글씨와 문장[편집]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9.2. 외국인들이 본 고종[편집]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140]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였다.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나 부족했다.[141] 그리고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멸망이었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 조약을 체결할 때라든가 일본군경복궁에 난입할 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뿐이었다.[142]

9.3. 저녁형 인간[편집]

또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었으며, 아침이 돼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이는 시도때도 없이 정변과 암살의 위협을 받은 탓으로 보인다.[143] 자연히 야식도 즐기게 되었다.

9.4. 식성[편집]

가장 유명한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 와플 등을 주로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다양한 야사가 나올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144]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매운 음식과 짠 음식을 잘 못 먹어서 담백하고 깔끔한 음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식혜사이다, 커피를 주로 즐겼던 이유도 술을 못 마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주로 칼국수, 잔치국수, 삼계탕, 추어탕 등이, 겨울에는 냉면아이스크림 등이 주로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현대인이 보면 반대로 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는데, 전통 사회의 냉면은 (여름철에도 안 먹은 건 아니었으나) 일반적으로 겨울철 별미였다. 전통 난방 온돌은 온도 조절이 어려워서 불조절을 잘못하여 땔감을 과하게 넣으면 방바닥이 무척 뜨거워진다는 단점이 있었던 탓에 그 더위를 식히기 위해 방 안에서 먹는 겨울 별미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겨울에도 온도 조절이 가능해지고 얼음이 널리 보급되면서 여름 별미로 바뀌었으나 예전의 관습이 남았던 것이다.

10. 여담[편집]

10.1. 독살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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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만 미군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편집]

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145]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중략)

황금은 귀신도 지배한다는데 200만달러의 거금을 흉중에 품고 나니 호장한 용기가 아니 날 수 없었다. 나는 돈을 물 쓰듯 뿌리며 발랄한 외교를 시작했다. 낮에 여는 연회에는 문무백관을 초청하고, 밤에 여는 연회에는 상하원 의원과 기자를 초대하여 동방예의지국을 선전하기에 분주했다. 결국 20만 병사를 원병으로 조선에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하원 표결에 부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왔다.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다는 의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고 만 것이다.

성공을 굳게 믿은 나는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간 비탄과 함께 커다란 걱정이 일어났다. 원병을 빌릴 것을 구실로 얻은 차관 중 이미 소비한 16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것이다. 백 가지 계책을 세워보아도 도무지 대책이 없어 파리 쫓으면서 낮잠만 자고 있노라니 하루는 외무대신(국무장관)이 관저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안색이 붉어졌다. 이를 어찌하리오. 가나마나 차관반환을 독촉하러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니 갈 수도 없는지라 떨리는 다리로 초청한 장소로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관저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 두취(대표이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황공히 앉아 외상의 입만 쳐다보며 최후의 처분을 기다렸다.

외상은 이것이 꿈이 아닌가 하리만치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위로 같기도 하고 사과 같기도 하고 회유 같기도 한 어조로 자국의 정책인 먼로주의를 자세히 설명한 끝에, 귀국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유감천만이라면서 결론으로는 차관 중 이미 소비된 금액은 미국 정부에서 대신 갚을 터이니 남은 금액은 즉시 상환하여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전액을 잃을까 우려하여 남은 돈이나마 돌려 받으려는 약은꾀를 미워할 짬도 없이, 불감청이나 고소원이라고 즉석에서 승낙했다. 나는 미국의 관대한 태도에 감복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존경할지언정 믿고 따를 나라는 못 되는 줄 깨닫게 되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신동아

구한말의 외교관 이하영은 자신의 회고에서 미국에 서기관으로 부임하기전 고종의 밀명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란것이 부산, 인천, 원산 세 항구를 담보로 하여 200만달러를 차관으로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미군 20만명을 빌려서 그 20만 미국 병사로 중국대륙을 정벌하려 한다는 것이 밀명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지위를 내리고 평양서경으로 삼고 천도할 계획 까지 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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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청과의 영토 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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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평양천도계획[편집]

고종은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한양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구상이 있었던듯 보인다. 실제로 이를 위해 어진을 평양으로 옮기고 수도이전을 위한 자금을 위해 세액을 증대하며 평양에 어느정도 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평양천도는 고종의 미군 20만 원병과 중국대륙 정벌 계획을 밝힌 이하영의 말에서도 고종의 의도로 확인 되는바이다. 풍경궁이 이 계획의 흔적이다. 고려 왕조에 이은 제2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 할 수있다. 고려 왕조의 서경천도 역시도 고구려를 계승하여 북벌을 이루려는것과 큰 연관이 있었다.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10.5. 지맥을 끊어서 일본을 풍수로 공격한다?[편집]

조선 말기의 시인이며 관리였던 황현은 1901년의 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해 남기고 있다. "지리산이 사흘을 우는데 그 소리가 수백 리까지 들렸다.그 당시 안영중이라는 사람이 운봉 경계에서 지리산 산맥을 끊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지리산 산맥은 바다를 건너 왜국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산맥을 끊어 눌러주면 일본은 자멸할 것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를 '양남도시찰'로 임명하여 그 공사를 맡겼다. 그 지역 관찰사가 이를 중단시켜달라고 정부에 청하였으니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였는데....

한국과학사상사 박성래 292p 中

야사[146]에 따르면 지리산의 맥을 끊어 풍수로 일본을 공격하려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얘기는 출처가 매천야록인데 당시 토목기술로는 산맥을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광산개발 등의 공사를 하다가 지진이 난 것을 민간에서 각색해 황현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천야록은 아무래도 야사집인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냥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0.6. 상하이 독일은행 예치금 52만 마르크[편집]

조선시대에 국고금과 별개로 운용되어 국가의 회계에도 잡히지 않아서 그 누구도 간섭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규모를 알 수 없었던 완전한 임금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은 고종의 시기에 내수사[147]가 내장원으로 승격되면서 급격히 증가하여 탁지부에서 관리하는 국고금에 비견될 정도로 어마어마 해졌다. 이렇게 된데는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도 한 몫 했다. 매관매직까지 하면서 긁어 모았다.[148]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사건이 상하이 독일 은행의 예치금 52만 마르크[149] 인데 당시 연금상태였던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통하여 활동자금으로 사용하려 한 돈이었고 친한파였던 호머 헐버트를 통해 예치금을 찾으려 했으나 일본이 가짜 증서로 털어가 버렸다.

10.7. 망명 시도[편집]

고종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여러차례 망명을 타진 한것으로 보인다. 총 5번의 시도가 있었던듯 보이며 1904년 러일전쟁의 시기에 러시아로 망명을 타진한 것이 첫 시도이고 폐위 후에도 4번 더 국외 탈출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 대부분 러시아로 망명하려던 것이고 마지막 한번의 시도만 러시아가 아닌 중국 베이징이었다.
고종 망명 추진 중 독살 … 3·1운동·임정 탄생 밑거름 돼

참고로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는 외국 대사관은 관습적으로 해당국의 영토로 간주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했고 현재도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그에 비등한 지역으로 여기고 있으니 아관파천이나 춘생문 사건까지 포함하면 총 7차례 시도를 했고 성공은 아관파천 한번이 된다.

10.8. 집옥재[편집]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가 2016년 민간에게 개방되었는데 도서관과 찻집 형태로 개조되어 변했다. 보유 서적은 4만권.

10.9. 고려왕조의 고종과의 비교[편집]

고종황제와 고려 고종 두 군주는 묘호고종(高宗)으로 같은데 우연의 일치로 능호까지 홍릉(洪陵)으로 서로 똑같았다.

이외에도 둘다 명군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안습한 생을 살다 갔으며, 실권을 갖지 못한 바지사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비슷하다. 그나마 대한제국의 고종은 성인이 된 후 친정을 할 수 있었지만, 고려 쪽의 고종은 집권기 내내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재위 기간 동안 외세에 시달린 것은 비슷하나 고려 고종의 경우는 아예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와 국토가 수십년 동안 전부 초토화되고 다음 대에 원나라의 속령으로 전락하여[150] 약 100년 동안 원의 속령으로서 원나라의 온갖 수탈과 지배를 받게되었는데 고종 황제는 그나마 전쟁으로 온 국토가 수십년 간 초토화되지는 않았지만 똑같이 다음 대에 나라가 외세에 의해서 망하고야 말았다.

심지어 재위기간도 양측이 비슷하다. 조선의 고종은 대한제국까지 합쳐서 44년이고 고려의 고종은 46년이다. 엄밀히는 고려의 고종이 재위기간이 2년 더 길다. 붕어 당시 나이도 세는 나이로는 둘 다 68세이기도 하다.

10.10. 고종의 군밤 야사[편집]

특이하게도 고종은 군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군밤이 호떡으로 변한 버전도 있다.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 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은 것' 물론 이 군밤 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151]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野談)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내와 문단 참조.#[152] 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현재로서는 사건의 진실 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일화가 나름 유명한 편이라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판 빵 사건??
  • 고종의 군밤 이야기는 1900년 즈음에 궁에 출입하던 무당인 정환덕이라는 사람이 쓴 남가몽에서 수록되어 있다. 궁에 출입하던 사람이 남긴 이야기고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내용이라 궁내에 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는 확인을 바란다. 각종 위키에만 나오는 주장.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 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다.[153] 그래서 실제로 고종이 을 좋아하긴 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 이 진상 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대부분 경상도 관찰사)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줬다고 한다.[154]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155]을 손수 구워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인 듯 싶다
  • 고종의 첫 아들이었던 완친왕이 죽자 조대비가 군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쩌면 아들인 완친왕도 아버지의 식성을 닮아 군밤을 좋아했던 듯 하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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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같이보기[편집]

13. 둘러보기[편집]


[1] 1894년 12월 17일부터는 대조선국 대군주로 격상됨[2] 아명. 어릴 때 이름이지만 '명복'으로 이름 붙이기 전에는 개똥으로 불렸다. 당시 그랬듯 자식의 아명을 천하게 지어 불러 액운(액땜)을 막고 장수하길 바라는 오랜 전통으로 비롯한다.[3] 왕이 되면서 임시로 개명한 초휘(初諱, 첫번째 휘)이다. '일단' 고종의 본가인 인평대군 8대손 '재(載)' 자 항렬에 맞춰 지었으며 오래 사용하진 않았다.[4] '희', '형' 두 개의 독음이 알려져 있으나 '형'이 바르다. '희'라는 음이 바르다면, '이희'라는 이름을 피휘해야 하기 때문에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이 '이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는 일 자체가 발생할 수 없다. 고종이 문조의 양자로 입적됨에 따라 익성군(翼成君)이라는 군호를 받으며 헌종의 (양)동생이 되었고, 헌종의 휘 '환(烉)'의 '火' 발을 따라 '형(㷩)'으로 개명하였다. 나중에 이재면이 '희(熹)'로 개명한 것도 연화발을 맞추기 위해서였다.[5] 1910년 8월 29일의 경술국치 이후 이태왕 시절의 이름. 정식 개명한 건 아니고, 일본에서는 '㷩' 자를 쓰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글자인 '熙' 자로 대체해서 쓴 것이다.[6] 73kg은 1914년 12월 31일에 측정된 체중이다.[7] 익종인 효명세자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고종은 추존 묘호(宗) 휘하로 양자 입적하여 종사 대통(宗嗣大統)의 계승 자격을 얻었으므로 '익(翼)' 자를 붙여 익성군이라는 군호가 된 것이다.[8] 고종의 붕어(崩御) 후 이왕직에서 올린 묘호 망단자 고종(高宗), 신종(神宗), 경종(敬宗) 중에서 순종이 수망(首望)인 고종을 사왕(嗣王)의 자격으로 승인했다.[9] 조선 왕조가 개창된 1392년을 원년(元年)으로 하므로, 엄밀히 말하면 연호가 아니라 기년법(祈年法)의 일종이다. 1894년(개국 503년) 갑오개혁 때부터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때의 조치는 '국내외 모든 공문서·사문서에 개국 기년을 사용토록' 한 것이며, 실제로는 1876년(개국 485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과의 조약에는 개국 기년을 사용해 왔다. 1896년 건양 연호 사용 이후에도 칙령 등에서 개국 기년이 혼용된 예가 있다.[10]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11] 1897년(광무 원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 이 때문에 고종을 '연호+(황)제'의 호칭으로 부를 경우 '광무황제(光武皇帝)' 혹은 '광무제(光武帝)'가 되나 실록에서도 용례가 나오지 않으며 현대 학계에서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냥 대한제국 고종시기 때의 연호는 光武(광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12] 이 외에도 흥경절(興慶節), 계천기원절(械天祈願節) 등 절일이 있다.[13] 고려고종과 유사한 면이 있다. 굉장히 길었던 재위 기간과 이도 저도 안됐던 치세, 당시 두 나라의 사직이 위태로웠다는 사실 등. 게다가 수명도 같고 생몰연도도 정확히 660년 차이가 난다.[14] 그리고 덩달아 일본군도 전에 맺었던 톈진 조약으로 동시에 조선으로 파병하게 된다.[15] 물론 경술국치 시점에 대한제국의 군주는 그의 아들 순종이었지만 순종은 처음부터 일제에 의해 반강제로 즉위당한 데다 실권이라 할만한 것은 아버지 고종 대에 이미 대부분 빼앗겼던 터였다. 이 때문인지 조선과 대한제국 '망국의 군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순종보다는 고종을 먼저 떠올린다.[16] 일제강점기까지는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왕공족(일본 황족보다 낮으면서 일본 귀족과 화족보다는 높은 대우)으로서 후대했기 때문에 황족들이 고위 귀족 대우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던 편이었다. 덕혜옹주처럼 행복하다 할 수 없는 삶을 산 비극적인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일제에게 붙어 방탕하게 살았던 경우도 있었다. 이런 세태를 직무 유기라고 생각하던 이승만(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왕실 방계였던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이 집권한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부터 황실의 후손들은 철저히 억압, 핍박받아 피폐해졌다.[17] 부정부패는 고종 본인도 한 뇌물 하셨던 터라 할 말이 없다. 갑신정변, 갑오개혁 등에서 재정의 재무부(탁지부 등) 일원화를 계속 시행했지만 뇌물로 채워진 고종의 재산은 조선 멸망 때가지 불어나기만 했다. 이 재산은 1926년 순종의 사망으로 주인을 찾지 못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따라 사실상 사라졌다.[18] 이때 들어온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는 한성에 주둔하면서 심각한 내정 간섭을 벌이고 궁궐을 불법적으로 포위하는 등 무력 시위에 악용된다.[19] 사실, 객관적으로, 모든 나라는 언젠가는 망한다.[20] 철종이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정조의 손자가 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의 양자였으므로, 법적으로 사도세자의 현손(4대손) 고종과 효장세자의 증손(3대손) 철종은 영조를 공통조상으로 한 9촌 간이다.[21] 고종이 순조의 손자(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되었으므로, 즉위 후에는 철종과 3촌 지간이다.[22]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奉嗣孫)이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명되었으며 항렬상 계보가 명확하지 않아서 당시에는 은신군을 그냥 사도세자의 친자로 인식하고 있었다.[23] 철종의 형 회평군은 자식없이 죽었고 영평군 또한 후사가 없었다. 영평군은 훗날 양자를 들이는데 고종 즉위 이후의 일이다.(어른의 사정 때문에 회평군의 후사는 두지 않았다.)[24] 은전군파의 이재근에겐 동생 3명이 있었지만 다 고종 즉위 이후에 태어났다.[25] 정확히는 은전군의 양손자로 입적한 완평군(이재근의 아버지)이 경창군의 9대손이다.[26] 이병순의 차남 이화중의 손자 이재하가 있긴 했지만 그는 원래 광평대군파 출신이다.[27] 흥완군의 친자.[28] 흥선군의 친자.[29] 심지어 고종 즉위 후 다시 불러들여 본인의 후사를 잇게 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사실상 흥완군의 양자로 들어갔다는건 배제할 이유는 아니었던 셈.[30] 고종의 즉위로 흥완군의 양자로 갔던 형 이재면은 본가로 돌아와 이하응의 대(운현궁)를 이었다.[31] 대부분 경신대기근이 조선의 대기근이라 알려지긴 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기근이 상당히 많이 벌어졌다. 한반도는 수 많은 기후풍들이 지나가는 지형의 지대였기 때문에 조금만 바뀌어도 참사에 가까운 기근으로 번지기 쉬웠고, 이러한 것들을 막기 위해서 현대 한국도 작은 강 하나에도 수 개의 저수지들을 만들 정도로 편집증적으로 변화하였다.[32] 흥선대원군은 그래도 세도정치를 타파하려거나 서원철폐 등 어느 정도 기득권 세력들 가운데 부정비리가 심한 것들을 없애려 단기간에 노력했지만(다만 대원군이 손댄 부분들도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기간에는 안 되는 일이었고, 방식도 전근대를 답습했다는 한계점은 있다.) 고종은 그러지 않거나 아예 방관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히려 나라를 빼앗기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당장 고종이 다시 즉위한 이후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부활했으니 이로 인해서 임오군란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조선을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든 간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한 것도 고종의 책임으로 볼 수 있다.[33] 이 부분은 그의 선왕들인 순조, 헌종, 철종과 대조되는 점이다. 세도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해 본 왕은 이 셋 중 헌종뿐이었다지만, 순조와 철종도 부패를 척결하려는 노력은 했다.[34] 결과적으로 이 사건들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해 위태위태한 동북아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게 참 어이가 없는 것이 당시 조선 정부에서는 제대로 진압 시도를 해 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고종과 같은 뜻이었냐면 그건 또 아니라서 청나라 개입을 적극 주장한건 고종 하나뿐이었다. 사실적으로 동학농민운동과는 격을 달리할 정도로 조선 정부에 위기감을 안겨준(함경도까지 일본군이 쳐들어가 왕자들을 잡아갔으니) 임진왜란 때도 해볼건 다 해보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걸 생각해 보면 고종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는 외침이라 체면이라도 덜 구기지 동학농민운동은 내란이라서 청나라에 개입을 요정하여 정부가 나라 안의 불만세력을 다스릴 능력도 없다고 시인하는 우스운 꼴을 만든 셈이다.[35] 이때 러시아를 포함한 열강이 각종 이권을 챙겨갔고 끝내 일본이 받아들었다. 조선 시절 청일전쟁으로 기세를 올린 일본이, 대한제국에서는 러시아마저 꺾으며 한반도 지배권을 사실상 공인받았다.[36] 다만 독립협회 역시 문명개화론에 천착하여 국제사정 판단이 고종보다 나았다고 할 수도 없고(일본과 친하게 지내자는 등) 그들 자신에게도 문제점이 많았다.[37] 보급을 원활하게 하려면 무기의 규격과 탄약의 종류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서울의 경군을 제외한 지방군은 마지막까지 총기가 따로 놀았다. 게다가 광무개혁 문서에도 나오지만 양무호는 일본이 영국으로부터 산 중고 석탄 화물선인데 이것을 더욱 비싼 값에 일본으로부터 사들여와 사실상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38]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 시기에 이르면 억지로 차관을 도입했다는 것에서 보듯 대한제국은 뭘 해도 일본의 영향력을 없애지 않는 이상은 빚쟁이 신세를 못 벗어난다. 고종이 어떤 방식으로든 돈을 마련해서 줘버린들 일본에서는 강제로 받은 돈보다 더 많은 차관을 도입하도록 강요하면 그만이었기 때문, 오히려 이 지경에 이르도록 상태를 악화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39] 전근대적 조선은 이론상으로는 왕은 무제한의 권력을 지니고 있어서 권신조차 왕에게 미움사면 사약을 먹든 처형당하든 그나마 곱게 끝나는게 유배일 정도다. 다만 그것이 유교적 시스템으로 많이 제약당하고 있었을 뿐[40] 이는 일본도 전자는 비슷했다. 다만 후자는 어느정도 충족되었고 또 전자가 비슷했어도 실권 쥔 사람들은 근대적 교육이 마쳐진 사람이라 별 문제가 안 되었다.[41]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승리했다고는 하나 전술적으로는 전자는 패배 후자는 참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두 사건 모두 조선을 정복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 망정이지 베트남이나 필리핀처럼 정복하러 왔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42] 흥선대원군은 엄밀하게 말하면 조정에서 나가서 직접 정치를 하는 위치도 아니었고, 법적으로 권한이 주어진 것도 아닌 이상한 위치였다. 고종의 법적 부친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였고, 모친은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직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고종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15세가 되고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끝낸 시점부터는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어야 했다. 20세까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한다는 것은 왕의 생부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법적 제도적 근거가 없는 행동이었다. 때문에 책임소재도 약했고, 중앙에 아들인 왕을 두고 비판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겉으로 드러난 비선실세에 의한 정치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흥선대원군은 사실상 상왕,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인세이(院政)의 위치를 노렸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 허나 조선은 일본과는 달리 그 당시에 어린 왕이 즉위하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짧으면 왕이 15세일 때까지 길어도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하는게 원칙이었던걸 감안하면 흥선대원군은 원칙까지 파괴한거다.[43] 당백전 때와 마찬가지로 유통을 늘린다는 이유로, 지방관아가 세금은 상평통보로 거두고 중앙 정부에는 청전만 공납으로 올려보냈다. 고종도 청전(淸錢)을 폐지한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이런 이유로 청전 폐지를 조선시대 최악의 정책실패로 본 논문도 있다(James Palais, Politics and Policy in Traditional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p.202.). 다만 이 덕분(?)에 조선 조정에 있던 청전의 폐해는 조선 조정이 다 떠안았는데, 이를 천천히 했다면 이 폐해를 민간에 떠넘기는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종 친정 2년은 정부 유지도 어려운 파산상태를 보냈다.[44] 금은을 채굴해도 조공으로 뜯길걸 우려하여 중국에 한반도엔 금광 은광이 없어요하고 뻥치고 500년 내내 채굴 자체를 안 했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게 옆나라 중국은 심지어 멀리 있는 영국의 은까지 빨아먹던 나라였다.[45] 순수익이 아니다. 중앙정부의 1년 총 세입보다 운산금광 개발 비용이 더 들었다.[46] 고종이 여흥 민씨들을 등용한 것이 이 때문이다. 아버지가 종친들을 휘어잡고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외척이라는 기둥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종도 조선이 500년 내내 외척과 환관을 경계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겠지만, 왕의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서 나라를 좌지우지 할 정도인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뼛속까지 무관인 이성계조차 양위 후에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47] 온건개화파, 온건주의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고자 했으며 실리적으로 개화하길 추구했다.[48] 대표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 개화파 등이 있다. 급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실리적이 아니라 급진적으로 입헌군주정, 내각총리대신이 있는 의원 내각제를 원했다.[49] 위협 안 하고 반란 안 일으켰어도 믿을 수 없는게 이완용만 해도 친미, 친러, 친일 수시로 갈아치웠다.[50] 물론 호머 헐버트어니스트 베델처럼 자기 조국보다 한국을 사랑하고 또 일부 한국인들보다도 더 한국을 위해 힘쓴 외국인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이 많을 리도 없을뿐더러 설사 많다고 치더라도 한 나라의 정부가 외국인만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51] 전자는 증거가 부족해 정황증거만 있지만 후자는 명백하게 고종의 요청이었다[52] 단 이는 조금 오류가 있다. 임오군란에 앞서서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밀린 13개월치 급료를 쌀로 받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별 희한한 것까지 섞어서 주는 바람에 군납비리가 발생해서 빡친 병사들이 선혜청 관료들을 두들겨 팼다. 이는 곧 고종에게도 전달되었지만 고종은 병사들이 빡칠만도 하다며 처벌을 안 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문제는 선혜청 제조 민겸호가 왕의 말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처벌했다. 즉 이 책임은 적절한 조치도 안 취한 고종과 멋대로 행동한 민겸호 둘이가 나눠서 책임져야 한다.[53] 단, 이 때는 바지사장이었기 때문에 금방 이탈했다[54] 그러나 전제군주라 하더라도 메넬리크 2세나 라마 5세처럼 나름대로 외세의 침입을 막아낸 명군도 존재하는 만큼, 전제군주라는 점은 비난받을 거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까임방지권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권력에 집착한다=폭군이다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매한 부분이다.[55] 급진 개화파의 가장 큰 실책은 외세에만 의존했다는 건데 외세에만 의존한 채 왕의 의사 등은 죄다 무시하니 백성들이 좋아할 턱이 없다.[56] 친중, 친일, 친러, 친영파같은 이미 한반도를 둘러싼 수 많은 열강 국가들과 연관된 진영들이 독립 협회 내부에 갈등을 빚고 있었다.[57] 흔히 아는 민족반역자들이 갑자기 1905년에 툭 튀어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고종이 마지막으로 힘을 갖고 있던 광무개혁 시기에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였던 사람들이다.[58] 김홍륙이 대표적인 예시다.[59] 실제로 일제가 러일전쟁 이후 취한 조치 중 하나가 고종의 돈줄을 끊기 위해 수세권을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정부로 환원하는 것이었다.[60] 양무호[61] 대한제국 궁내부 소속의 어의였던 독일인[62] 의병들에게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 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63] 명성황후가 넘겨 주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조선왕조실록 #호러스 뉴턴 알렌의 기록에 보면 평안북도 운산군의 금광 채굴권은 명성황후가 살해당하기 3달 전인 1895년 7월 15일에 허가났다가 바로 취소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채굴권을 가지고 있다가 명성황후 사후 다음 해인 1896년 4월 17일에 미국인 모스에게 넘어간다.[64] 미국의 개발사에서 투자한 돈이 미화로 500만 달러로, 대한제국의 1년 평균 세입보다 큰 금액이다. 채굴권 이양 계약은 25년 만기에 수익의 1/4, 25%를 왕실인 궁내부가 갖는 조건이었지만링크, 사측의 초기 투자비가 너무 많아 초기 7년간은 수익 배당이 전혀 이뤄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욱이 수익 배당이 이뤄진 1904년의 이듬해인 1905년에는 러일전쟁이 발발하는데, 궁내부에서는 러시아일본 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전쟁을 염려하여 수익 배당조차 못받고 1899년에 소유한 운산금광의 채권을 10만 달러에 매각했다.[65] 「고궁문화」, 국립 고궁 박물관, p. 27. "황태자비 민씨는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충문공(忠文公) 민태호(閔台鎬)의 딸이며 임오년(1882년) 왕세자 순종과 가례를 올렸다. 모후인 민비가 생존 시에 거행된 대혼(大婚)으로서 고종은 신사년(1881년)에 가례에 필요한 혼수 직물을 동경 직물 회사에 주문하였던 기록이 확인된다74). 상기한 바와 같이 당시의 가례는 임오년 『嘉禮都監儀軌』와 상당한 수량의 의대 기록이 있는 <궁중발기>로 남아있다."[66] 조선은 임오군란으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울병력을 빼기 힘들다는건 어찌보면 정확한 진단이었다. 실제로 중앙군이 동학을 진압하러 간 사이에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점령했다.[김명섭,1994,7]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7[구선희,1999,219]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19[강문호,2004,109]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09[엄찬호,2006,5] 70.1 70.2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No.25, 2006, page 5 (KCI)[신영우,2009,19~20,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19~20,26[유바다,2017,336] 72.1 72.2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6[김명섭,1994,5~6]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5~6[강문호,2004,116]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16[신영우,2009,26]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6[강문호,2004,120~121]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0~121[구선희,1999,222~223]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2~223[김명섭,1994,12] 김명섭, 제1차 갑오농민전쟁기의 차병론과 경장론, 학위논문(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단국대학교, 1994, page 12[구선희,1999,225]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5[엄찬호,2006,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13 (KCI)[신영우,2009,27] 82.1 82.2 82.3 신영우, 1894년 왕조정부의 동학농민군 인식과 대응,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51, 2009, page 27[김경록,2018,37~39] 83.1 83.2 김경록, 청일전쟁과 일제의 군사강점,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8, page 37~39[구선희,1999,220~221]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0~221[김보경,2004,95] 김보경, 청일전쟁전후 국제질서 인식의 변화 , 학위논문(박사)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2004, page 95[구선희,1999,226]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6[엄찬호,2006,7] 88.1 88.2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Vol.0 No.25, 2006, page 7 (KCI)[구선희,1999,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7[강문호,2004,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page 127~128[유바다,2017,337]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337[유바다,2017,411]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 서울 :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page 411[구선희,2017,33~35] 구선희의 해제, 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 9, 정읍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age 33~35[김창수,1981,42~50] 김창수, 동학농민혁명과 외병차입문제, 동국사학, Vol.16, 1981, page 42~50[김창수,1985,3~9] 淸日戰爭前後 日本의 韓半島 軍事侵略政策, 한국사연구회, 淸日戰爭과 韓日關係 : 日本의 對韓政策形成에 관한 硏究, 서울 : 一潮閣, 1985, page 3~9[박종근,1995,8~17] 박종근, 日淸戰爭と朝鮮, 東京 : 靑木書店, 1982. 번역: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외침과 저항, 서울 : 일조각, 1995, page 8~17[구선희,1999,220~227] 구선희, 韓國近代 對淸政策史 硏究, 서울 : 혜안, 1999, page 220~227[구선희,2006,94] 청일전쟁의 의미 : 조ㆍ청 ‘속방’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37, 2006, page 94[김보경,2004,95~99] 김보경, 청일전쟁전후 국제질서 인식의 변화 , 학위논문(박사) --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2004, page 95~99[강문호,2004,109~110,116,117,127~128] 강문호, 동학농민혁명과 청군, 동학연구, Vol.17, 2004, 109~110, 116, 117, 127~128[차경애,2008,67] 차경애, 청일전쟁 당시 조선 전쟁터의 실상, 한국문화연구 Vol.14, 2008, page 67[엄찬호,2006,7~13] 엄찬호, 淸日戰爭에 대한 조선의 대응, 한일관계사연구, No.25, 2006, page 7~13 (KCI)[육군본부육군군사연구소,2012,253~254]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9 근·현대 1, 계룡: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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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129]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보도자료 [130]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 [131] '일본이 한황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억지로 정함)'이라고 쓰여 있다. 가운데 황뎨라고 쓰인 옥좌에 앉아 식은 땀을 흘리며 분노하고 있는 고종 황제와 왼편의 을사오적 뒤편에서 일본도를 들고 협박하는 일본군과 오른편에서 비웃고 있는 일본인들이 그려져 있다.[132] 메이지 덴노니콜라이 2세 사이에 끼인 고종황제의 난처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중간에 끼어 있는 고종황제의 모자 형태가 익선관이 아닌 사모이긴 하나 중간에 엉뚱한 도승지이조판서, 영의정 등을 그려 넣었을 리는 없고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사무라이불곰같은 상징이 아닌 각각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구한국 역시도 동물이나 대표적 일반사람의 모습이 아닌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을 볼 때 고종 황제로 보인다.맞는 것도 서러운데 복제까지 격하당함 서양인의 무지이기도 할 테고 정밀묘사화가 아닌 풍자만평이기 때문에 중요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잘 묘사한 풍자이다. 물론 세 명을 개인으로서 짚어서 그린 그림은 아니고 각국 정부, 더 나아가 국가를 세 인물로 묘사한 것이다. 현대의 정치인 만평에 그려질 만한 수위의 그림. 과거 군주들 같으면 상상도 못할 그림으로 의금부에서 관계자를 색출할 만한 그림이다. 그래도 아예 물건에 비유당한 둘보다는 사람으로 묘사된 고종이 제일 정상적으로 그려졌다. 또한 이 그림은 다른 방면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고종황제가 한국 역사상 최고지도자이자 정치인이자 공인이자 특정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시사만평에 풍자된 사례 중 하나라는 것이다.[133] 가운데 서있는 16번이 메이지 천황이고 13번이 고종 황제다. 메이지천황 옆에는 한자로 '日本國皇帝'(일본국황제)라고 적혀있는 반면 고종 옆에는 '高麗國王'(고려국왕)이라고 적혀있다. 당시 정식 칭호인 황제라고 불러주기는커녕 국호조차 제대로 쓰지 않았으니 일부러 깎아내린 것.[134] 구석에 그의 사인이 있다.[135]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 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 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136] 1910년대 초에 10대밖에 만들지 않아 보관된 1대 외에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또 있었던 것.[137] 이 때문에 경복궁 내부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카페에서 와플을 팔면서 '고종이 즐겼던 와플'이라는 홍보문구를 걸고 있다.[138] 음식 문단의 출처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80308/89001446/1[139] 원래 황제 혹은 왕이 먹는 건 기미상궁이 먼저 맛본 후에 올린다. 암살의 위험 때문.[140] 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어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141]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당대 서구 열강 지도자들의 성향상 되든 안 되든 무장 투쟁을 벌이는 게 외교전에서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142] 위에 나온 권력에 대한 집착 문단의 내용을 고려해서 읽으면 왜 저리 퇴위에 격하게 저항했는지 좀 이해가 갈 듯.[143] 부인인 명성황후도 밤을 샌후 새벽 5시쯤 잠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한다.[144] 고종이 퇴위한 후 창덕궁에서 기거하게 된 순종이 손수 밤을 구워다가 부황이 기거하던 덕수궁에 보내준 일화도 있다.[145] 양쯔강의 지류[146] 황현매천야록 광무 5년 신축(1901) '33. 안영중의 방술' 편[147] 내시들이 관리한다.[148] 참고로 명나라의 말제였던 숭정제내탕금을 지나치게 모아서 비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할 때쯤엔 돈이 안 나와서 약탈을 했다고 하는 만큼 그 모은 내탕금을 알뜰하게 모두 국가를 위해 쓰였다고 보는 시각도 많은 반면 고종의 내탕금은 적재적소에 쓰일 새도 없이 나라가 망해버렸다.[149] 한화 3억 5천만원인데, 현재 가치는 더욱 높을것이다.[150] David O. Morgan(2007), 《The Mongols》;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 154~155; 森平雅彦(2008), "事元期高麗における在來王朝體制の保全問題", 《東北アジア硏究》 1;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4.[151] 그런데 당시 인심의 각박은 사형까지는 아닐지라도 죄는 죄였다. 수원 지역에서는 인심이 각박한 자들을 잡아들여 매로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고, 농부들끼리 돈이나 쌀을 빌려 줄 때 이자를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 관에서 나서서 반 강제로 깎는(...) 경우도 있었다.[152]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 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원체 맹꽁이 서당의 고종 묘사가 찌질하고 우유부단하긴 하다.) 다만 당시 고종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 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 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단, 고종 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 게, 고종 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 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 실록을 조선 왕조 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 실록과 순종 실록은 조선 왕조 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153] 정확히는 황율(黃栗).[154]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물었다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155]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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