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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철종 이변
26대 고종 이희
칭호 변경
27대 순종 이척
칭제건원
초대 고종 이형
2대 순종 이척
고종(高宗)[1]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
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
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
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
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
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2]
익성군(翼成君)
만수성절(萬壽聖節)
개국(開國)[3], 건양(建陽)[4], 광무(光武)[5]
전주(全州)
홍유릉(洪陵)
이명복(李命福)[6] / 이재황(李載晃) / 이희(李㷩)
명부(明夫) / 성림(聖臨)
주연(珠淵)
사망지
장례식
배우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양아버지
조선 문조(조선 익종, 효명세자)
양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
어머니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생몰기간
1852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7]
재위
기간
현직 재위
1864년 1월 21일(음력 1863년 12월 13일) ~ 1907년 7월 20일
조선국 국왕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 태황제

1. 개요2. 고종황제/생애3. 평가
3.1. 비교론
3.1.1.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무능했다.3.1.2.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운이 없었던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
4. 개인사
4.1. 고종과 군밤떡밥4.2. 미국인 황후 에밀리 브라운 떡밥4.3. 숨겨진 딸 이문용 떡밥
5. 가족관계6. 어진과 사진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8. 고종이 등장한 대중매체9. 둘러보기(계보)

1. 개요[편집]

조선 왕조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연호광무. 대한제국을 제외하고 조선의 마지막 왕이다.[8]

안으로는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 바깥으로는 제국주의로부터의 국체 보존이라는 2가지 시대적 과제를 맡았으나 지나치게 자신의 권력유지에 집착한 나머지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한 군주. 달성하면 사실상 먼치킨이지만 고종이 보여준 행각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는 어두운 바보는 아니었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진 못했고, 큰 힘에 맞설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굴복할 만큼 나약하진 않았으나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결단력은 부족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과제를 해결할 비범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에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떠안은 보통 사람. 심지어 국내의 개혁세력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개혁을 하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정치술은 대단했지만 정작 외세에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만 보여줘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해악을 많이 끼쳤다. 그나마 일본에 사실상 합병된 후 죽기 전 비자금으로 독립운동을 도우려 했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고 실패했다(헐버트 문서 참조).

상명지통[9], 고분지통[10]은 물론, 망국지통[11]에 독살의혹까지 겪게 된 비운의 군주로도 유명하다. 혜경궁 홍씨를 능가한다.[12]

재위기간이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 영조(52년), 숙종(46년)에 이어 세 번째로 긴 임금이다. 게다가 태황제 3년을 더하면 숙종을 뛰어넘고, 이후 이태왕으로서의 기간을 더하면 56년(+ 15일)로 영조를 거뜬히 뛰어넘어 발해 문왕의 기록에 근접한다. 망국이 없었다면 살아있는 기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그의 치세에 조선이 개항부터 시작해 실질적으로 망했으므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는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잘 해보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 '운도 안 따라줬고 결과도 안 좋았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식의 동정론적 평가를 받거나, 제국 멸망 후 안습한 왕족들의 삶[13]등으로 인한 동정표도 많이 받으나, 그의 근대화 노력 자체는 민씨 일가의 부패와 그 자신의 권력욕과 두루뭉술한 행정, 서양 문화와 기술에 대한 불이해 등의 여러 실정으로 점철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며, 고종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고종이야말로 나라를 망친 매국노 중에서도 으뜸이라고도 볼 정도다. 한마디로 결론 내리기 어려운 왕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혼란한 시대였지만, 동시에 뚜렷한 능력을 보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14] 그의 재위 시기가 차라리 세도정치 시기였거나 단명했더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 고종황제/생애[편집]

3. 평가[편집]

그는 무능하지 않았지만 유능하지도 않았고, 약하지도 않았지만 강하지도 않았으며, 정치감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는 못하였으며, 일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핵심이 어디인지 혼동하였으며, 둔하지도 않았지만 민첩하지도 않았고, 인사를 알고 있음에도 인사를 몰랐으며, 자신의 시대가 근대라는 것을 알았지만 전근대적으로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수십 년 고종 재위기에 조선왕조가 사실상 망했으므로 평균 이상의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거의 없으며, 이태진 교수 류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는 것과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을 호평하여 나름대로 할 만큼은 했다는 우호적인 평가 vs.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개막한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구제불능암군 또는 처음에는 신하들에게 벼슬을 팔다가 나중에는 일본에 나라까지 팔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까는 쪽의 요지는 민씨 일파의 부패, 그의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는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내부의 민란인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인 청나라 군대를 부른 일[15]과 지나칠 정도로 권력에 집착하여 독립협회도 무너뜨려버린 일 등을 꼽는다. 그리고 양무호 구입을 비롯해서 기분으로 밀덕[16] 하다가 재정 파탄 내 버리고 사기까지 당한 일도 있었다. 이건 당시 대한제국 지도부가 근대전과 그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는 근거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운요호 사건이나 임오군란 등을 보면 소수의 구식군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했다. 일단 자기 몫(내탕금) 챙기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 군사예산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고종이 개혁면에서 실수를 저질렀다고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메이지유신을 보면 천황을 위시한 중앙집권화를 실시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는데, 조선은 상당부분 그러한 제도개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법이 전근대적일 거라 생각해 토지소유권을 재정하려 했으나 조사결과 이미 토지소유권이 있었던 게 대표적 예.

고종도 박문국,전환국,기기창을 설치했고 경복궁에 전구를 부설했으나 근대무기 제작에 실패하면서 일본 식민지의 그림자로 다가서게 된다. 국왕이 제도개혁을 게을리해서 나라가 망한 게 아니라, 이미 근대화되어있던 기존의 제도가 현실에서 개막장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부패해서 망했던 것. 고종의 실책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이미 있는 문제를 가속화한 것뿐이다. 그러니 더 비판받야 할 수도 있지만....

광무개혁 등의 개혁도 효과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성과를 따지면 변변찮았고 식민지화를 막아낼 근본적 개혁과는 안드로메다 급 차이가 있었다.

커피자동차로 대변되는 자기 취미를 가졌다는 것도 훌륭한 것이 아니다. 송휘종이나 명 4대 암군들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자기 취미에 너무 깊이 빠진 군주는 나라를 말아먹기가 쉽다.

게다가 고종은 명성황후처럼 직접 매관매직을 주도했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17] 그런데 대한제국군 항목의 해군 파트에서 볼 수 있듯이 돈을 모으는 데는 능숙했어도 돈을 제대로 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왕실 유지를 위해 걷는 내탕금도 과다해서 여러 개혁 이후에도 국가 세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물론 개혁핑계로 내탕금을 모으며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했기 때문에, 고종의 개혁정책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

물론 반박도 있다. 독립협회는 뚜렷한 권력기반도 없으면서 아예 전제군주제입헌군주제로 바꾸자 하였고 이를 자랑하며 고종과 유림의 경계를 자초했다. 결국엔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민중까지도 등을 돌려버릴 만큼 과격한 행보를 일삼았으니 독립협회는 고종때문에 몰락한 게 아니라 내부적인 모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세한 것은 독립협회, 중추원 항목 등을 참조.

동학 농민 운동도 결국 일본군이 아니라 신식무기를 갖춘 관군에게 동학군의 진격이 저지된 것이었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 도성으로 수십만 반군이 몰려드는 처지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톈진 조약으로 일본군이 꼽사리 낄 것이란 고려도 못 한 것이니 정신 나간 판단인 건 맞긴 하다.

사실 동학농민운동에서 농민군을 청군으로 진압하겠다는 발상과 이 때문에 일본군이 올 것을 예상했으면서 묵인한 것,[18] 그리고 실제로 동학운동을 진압하면서 일본군의 학살과 진압을 조선관군이 직접적으로 지원해주면서 진압한 것은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에서 할 발상이라고 이해해 줄 여지가 눈꼽 만큼은 있다. 하지만 더 정신나간 문제는 고종이 이런 정치적 문란, 민란이나 농민운동을 겪고서도 그에 대한 후속조치가 더 정신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례로 동학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사태가 종식된 후 1년간 유배형을 가나 곧 고종이 직접 사면하여 법무민사국장에 이어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승승장구하였다. 고등재판소 판사가 된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자 2대교주였던 최시형에 직접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동학군이 당시로서는 반군이라지만 탐관오리에게까지 이런 처우를 한 것은 유교적 왕도정치에도 맞지 않은 것이었다.

고종의 이런 용인술은 역시 같은 탐관오리인 조병식을 후에 황국협회에 가담하게 하여 신나게 민권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했다는 예에서, 그리고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홍종우의 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고종은 전제군주적인 권력을 위해서라면 민생을 도탄에 빠트린 탐관오리건 누구건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종의 비자금이 당시 독립운동 및 반외세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흘러들어가서 상당한 자금지원을 했다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에서 활약한 최익현, 이인영, 민종식, 정환직, 허위, 신돌석 등은 모조리 고종의 밀지나 자금지원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받고 활동했다. 이는 고종의 사망전후까지 이어져서 을미의병부터 1920년대까지의 국내외 대일본투쟁에는 직간접적으로 고종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전근대적일지언정 '국왕'이라는 매력적인 명분이 주어지고, 무엇보다 실제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고종의 비자금만한 자금줄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무렵은 아직 전근대라면 전근대인 시기였다.

또한 조약으로 광산 개발권 등 각종 이권을 외국에 힘없이 내준 점도 비난받는 부분이긴 하나,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이 표류하면서 스스로는 개발할 기술도 능력도 부족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권을 한 나라에게 몰아주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에게 흩뿌려 준 것도, 최대한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 발을 걸치게 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애당초 러시아, 청,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있어 조선에서 얻는 이득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수준이라, 청나라, 러시아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자, 열강들은 조선을 일본에게 넘기는 걸 쉽게 인정하고 말았다. 게다가 이권을 내주면서 얻은 자금이라도 제대로 쓴 거냐면 위에서 말했듯 그것도 아니었다.

고종은 이권을 통해서 당시 외교관들을 매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성공적 매수가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였고, 사실상 실패한 것이 미국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다. 이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는데, 베베르는 러일전쟁 전까지 주 활약시기였던 러시아 공사였고 정치적으로 영향력도 상당했기 때문에 효과가 아주 컸다. 반면에 알렌은 러일전쟁 패전 이후까지 남아 있었고, 실력에 비해서 욕심만 컸기 때문에 고종이 더 이상 이권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바로 등을 돌리고 배신해버렸다.

만일 러일전쟁이 벌어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미국이 승인하는 형태로 결론이 나왔다면, 고종의 매수외교는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뤼순을 점령하는 등의 러시아의 강경화와 무엇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로 이런 외교적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고종의 자금은 고종 본인이 앞장서면서 한 매관매직으로 인해 번 돈이었던 것이 매우 큰 문제였다. 매관매직으로 돈을 모으니 당연히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지는 건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민생의 파탄을 불러 와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 어떻게 보면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후에 조선에 미친 제일 확실한 영향으론, 왕비인 중전 민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망 시 국상일에 맞춰서 3.1 운동을 일으킬 기회나 주었다는 것 정도. 실제로 33인이라는 인물 중에는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거나 고종을 지지하였던 오세창, 이상설, 한용운과 같은 부류 외에도, 독립협회 문제나 동학 관련으로 고종에 불만이 많았던 손병희, 윤치호, 안창호와 같은 부류가 존재했다. 이들이 고종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고종의 영향력 자체는 존재했기 때문에 3월 1일이 된 것이다.[19] 이후 김구 등은 임시정부에서 왕정복고는 주장하지 않았어도 구황실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 기념 사업회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20]

그 외 업적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살려준 것 정도가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김구 선생의 명성황후 시해관련 일본인 살해 건은 백범일지의 기록과 달리 실제 불투명한 점이 많아 고종이 그를 살려줬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고종이 궁전 내에 최초로 설치된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서 살려줬다는데, 그 당시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영사관에서 살고 있었다.[21]

그 외에 중국으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 학설도 존재하는데, 만일 실제로 임시정부에 고종이라는 구심점(+자금줄)이 존재하였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그 수준을 달리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고종이 확실하게 고평가를 받을 만한 점은, 일본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 앞에서 벌벌 떨면서도, 뒤로는 일본 엿 먹일 궁리를 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 면전에서 그 점을 비꼬기도 했다. 일본이 뭐 자기네 힘 과시하려고 고종 끌어내린 게 아니다. 고종이 일본의 계획에 실질적으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끌어내린 것이다. 즉, 고종이 정말 일본에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면 일본이 굳이 순종에게 양위를 강요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을 비판했던 수많은 국내의 지식인들과 명사들 중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제에 굴복해서 변절의 길을 걸었다. 고종을 비판했던 사람들은 거의가 개화파를 잇는 인사들이었고, 이들에게 일본이란 물리쳐야 할 대상이면서 근대화의 교사라는 양면성이 존재했기 때문에...

고종 역시 일제에 타협하거나 적어도 용인하는 형태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는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 평가는 최악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세력이 과격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단적으로 베트남국이 이런 식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기 식민지의 이전 군주들은 이런 형태로 다루어진 사례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고종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일제의 조선병합은 한결 수월하였을 것이다. 순종은 비교적 온순한 식민지 군주였지만, 일제에 의해서 옹립되었다는 근원적 문제에 더해서 김홍륙 독다 사건으로 폐인이 되었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어서 큰 의미 부여는 안 되었다. 단적으로 고종이 죽은 이후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군주정(유교적인 전제군주정이든 근대적인 입헌군주정이든)이라는 정치체제를 주장한 단체는 거의 대부분 사라졌다. 다만 끝까지 저항했다는 그 자체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지, 그 저항은 전혀 유효하지 못한, 부실한 방식이었으므로, 국가원수로서 까방권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전에 이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독립조직인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를 자신의 전제권력에 반한다는 이유로 정치깡패를 동원해 해산시킨 시점에서 고종의 모든 저항관련 행위의 제1 목적은 결국 본인의 전제권력 복권이고, 민족의 해방은 결국 고종에게 이를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했다는 가설을 부정하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고종의 막장 행보가 아니었다면 개화파들이 친일로 넘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한일병합 이전 개화파의 행태는 전권을 요구하는 것이었고(입헌군주제) 이는 고종에겐 반역이나 다름 없는 요구였다. 사실 세계적인 추세로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전근대적인 것도 아니다. 당장 프랑스의 마지막 황제라고 불리는 나폴레옹 3세가 고종과 맞물리고, 독일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패전까진 무늬만 입헌군주국인 독일 제국이었다. 러시아 제국도 별반 다른 처지는 아니었고... 대영제국, 미국 같은 나라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다.

과학만 근대적이었지 정치적으로 '근대적인' 국가는 당시에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친청, 친러, 친일, 친미파등 개화세력도 중구난방으로 갈라져 정권 획득을 위한 연줄 만들기에 몰두했고, 자기들끼리 대립했다. 당시 중추원 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과욕이나 광무개혁 항목에서 설명하고 있는 부족한 현실 인식 등을 보면 고종의 레벨로는 무슨 짓을 해도 무리였다. 특히 급진개화파들의 국제 정세를 보는 눈은 위정척사를 외친 유생들보다도 더 이상주의적이라, 일본이 하는 제안은 속내도 의심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었다.

위태한 상황을 타개해 보겠다고 나름 나서던 엘리트 지식인층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다가 나중에 일방적으로 탄압해 버리는 왕에게 질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 세력을 키워준 건 고종이고 뒤통수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먼저 때렸다. 심지어 이때는 노선이 조금 온건하다고 다른 개화파 세력들까지 다 죽이려 했다.

갑신정변 이후로 개화파는 왕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라 팔아먹으려는 역적집단으로 몰렸기에 개화파가 고종을 까는 건 사실 자기들의 이런 삽질들을 고종에게 떠넘기려는 측면도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이후로도 개화파는 자기들끼리 반목했고,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 노선이 전혀 다른 대원군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등 이미 막장화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을미사변 때 뒤통수를 쳐댄 놈들인 건 마찬가지라 도긴개긴이다. 게다가 현대 시각으로 봐도 급진 개화파의 개혁 방안은 취지는 좋을지 모르나 방법론에서는 좋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고종이 권력에 집착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대원군은 고종이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물러나려 하지도 않아 민씨 일가와 힘을 합쳐 몰아내야 했고, 친정을 한 이후로도 계속해서 쿠데타 시도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대원군은 자신을 복권시킬 세력으론 노선이 완전히 다른 급진개화파, 청나라, 일본, 동학농민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이든 가리지 않고 손을 잡으려고 할 정도로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만큼 고종으로서는 자기 측근들 빼고는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른다고 여겼을 환경이 조성되어 있기는 했다. 물론 그것이 고종의 실정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망국에 면죄부를 주지는 못하지만.

고종은 전제군주국의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었다. 선진국가라는 유럽의 군주들 역시 대부분 전제군주국인 상황이거나 막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되어가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전제군주 했다고 일방적으로 욕먹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이 있던 국가 중 영국은 입헌군주국이고 미국은 공화국이었다. 그나마 독일, 러시아가 황제의 권력이 막강했고 이때문에 고종이 은근히 이들 국가에 친근감을 보여 친러적인 정책을 폈는데, 정작 그 러시아의 상황이 개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해 결국 낭패를 보았다. 괜히 러시아에 반감을 가진 서유럽 국가들에게 나쁜 이미지만 심어주는 결과를 자초했다.

그의 저항은 주로 아관파천, 의병 궐기 권유 같은 꼼수나 헤이그 특사, 이권 배분 같은 외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자존심과 목숨까지 버려가며 저항한 전왕조인 고려의 우왕이나 공양왕과 비교된다. 물론 고려 왕족들은 힘이 닫는 한 적극적으로 저항한 탓인지 결국 왕씨 몰살을 당하기도 했다.

고종의 능력치나 정치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통적 조선의 군주로서는 호포제, 사창제 유지, 유림 제지 등 최악은 아닌 수준이었고 독립협회 개발살내는 때의 꼼수는 혀를 내두를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청나라가 무너지고 일본이 개항되고 서양개항선이 몰려오는 이러한 현실 속에선 뭐... 서양인 하면 치를 떤 동시대 일본의 메이지 덴노와는 달리 나름 근대화에 관심은 보였지만, 기초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전무한 상황에서 잘 되면 그게 이상한 거고...

종합적으로 보면 좋게 표현해봐야 위기인 상황에서도 대원칙이 없이 임기응변만 한 인물이고, 꼼수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해도 자기도 그걸 타개하지 못 해 꼼수밖에 못 쓰게 된 인물로 볼 수 있겠다.

3.1. 비교론[편집]

3.1.1.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무능했다.[편집]

역사를 성찰의 학문이라는 데서 가치를 찾는 합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몇 안 되는 다른 사례에서 건설적인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지사들, 태국의 라마 5세,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근대적 과도기에서 나라를 이끌 책임을 맡은 전통적 지배층[22]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종과 달리 세계사적 흐름에 부합하는 시대적 과제를 이뤄냈고, 자신들의 나라를 누군가의 발 아래 종속되는 처지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일본의 유신지사들이야, 기본적으로 막부라는 주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2등 내지는 3등 권력인데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국가 원수인 천황의 실질적 권한이 미약했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패기있고 과단성 있는 개혁정책을 발빠르게 이뤄낼 수 있었다. 이는 전통적 군주로서의 가치관에서 기어코 벗어나지 못해 그 자신조차 썩 내키지 않아 했음에도 울며겨자먹기로 개혁을 추진했던 고종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태국의 라마 5세의 케이스를 보면 고종이 더 더욱 할말이 없어진다. 똑같이 전근대에 태어나 전통교육을 충실히 받고 자랐음에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정책에 대한 이해도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혜안이 고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준수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고종이 개혁을 빙자하여 전제군주식 교통정리를 하는 동안, 라마 5세는 계급 문제·봉건제도 하의 적폐 등 단기간에 전근대적 요소를 청산하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에 성공했다.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겁을 양껏 집어먹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러시아와 영미로 대표되는 선진 서구열강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본을 두고 답없는 친러 몰빵 외교를 시전할 동안[23] 라마 5세는 이미 태국이 완충지대로서 갖는 외교 전략상의 가치를 파악, 궁여지책이 아닌 장기적 안목에서 도출된 합리적 외교 플랜이 마련된 상태였다. 태국이 식민지화를 면하게 된 것에 운적 요소가 매우 큰 것도 사실이나, 군주 본인의 능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으며, 조선 또한 역사상 한결같이 대놓고 전략상 요충지였다는 점에서, 태국의 그것에 비해 불운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고종은 개혁 정책에 대한 이해, 국제정세에 대한 혜안 그리고 애민의식, 모든 면에서 라마 5세의 아래였다.

에티오피아의 메넬리크 2세 역시 고종과 비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개혁 정책, 특히 외교와 군사분야에서 매우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열강도 아니면서 국제연맹의 창설국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단기간에 괄목할 수준의 역량을 가진 근대군을 키워내 서구 열강 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침략을 저지하는 먼치킨급 업적을 달성했다! 이때 '근대군 그게 뭐에요, 먹는 건가요?' 수준의 고종은 열심히 밀덕질하면서 재정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있었다. 광무개혁으로 키워낸 병력이 고작 3만인데 이 3만을 유지하는 데 재정의 40%나 쓰였다. 반면 일본은 육군만 12만이었다.[24][25]

3.1.2.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운이 없었던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편집]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의 사례가 세계사에서도 매우 예외적이고 천운을 타고 난 사례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저 세 나라가 독립을 확실히 유지했다는 말은, 뒤집어서 보면 저 세 나라를 제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다른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은 죄다 남김없이 식민지 내지는 반식민지[26] 상태로 굴러떨어졌다는 뜻이다! 결국 다른 나라들은 바보라서 침략 당하고 주권을 잃은 게 아니고 대부분은 그저 지정학적 행운과 시대에 맞는 인재복을 타고나지 못한 것 뿐이다. 그리고 저세 나라 중에서도 독립 유지를 넘어 서구화에 제대로 성공해서 열강의 반열에 등극한 것은 일본 하나뿐이었다.

일본은 인구, 경제적으로는 꽤 큰 나라였다. 또 메이지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과 재정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5% 실제로는 관련 비용 부담이나 지방관 수탈을 포함해 10%이상 정도, 일본은 25~30%[27]가 기본이었다. 게다가 영토와 인구는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28] 그리고 일본은 조선과 달리 서구와의 교역을 한 경험이 풍부했던 나라이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개항한 역사가 얼마 되지도 않는 조선이 개항해서 일본처럼 성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보다 먼저 개항했던 다른 국가들도 식민지가 되어가는 판국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개항 이후에도 임오군란 이후 외세가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눈치를 보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일본과 비교하면 조선은 더더욱 불리한 위치였고, 개혁하라고 키운 개화파는 스폰서인 고종을 뒤통수치고 외세나 대원군과 손 잡고 일 벌리는 처지였다. 무엇보다 메이지 덴노도 아니고, 유신지사가 고종과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태국의 경우에도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정개혁도 내정개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의 완충지대라는 지리적 문제가 더 큰 이유였고, 추가적으로 태국은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 일부까지 떼어 줬고, 그렇게 떼준 영토 넓이는 한반도보다도 넓었다. 고종이 주권 유지하려고 영토를 떼 준다는 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29]

고종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경상도, 부산 등 조선 영토들을 일본에게 떼어주는 시나리오와 태국이 라오스/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더욱 열강들이 적극적으로 조선 식민지화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 넘겨준 곳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즉 구한말 당시 조선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같은 섬 지역 영토나 혹은 부산이나 울산 등 경상도 항구 도시 일부를 떼어 일본에게 할양했다해도(조차지 혹은 정식영토) 일본이 일부 조선 땅을 차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조선을 주권국으로 내버려뒀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 영토 전역을 병탄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에서의 세력을 확장,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 차라리 러시아에게 부동항을 내준다면 의미가 있을 수는 있겠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따져도 영국과 프랑스의 동남아 식민지와 한반도의 거리는 너무 멀다.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일대가 이미 유럽 국가들의 안마당이나 다름 없었을 정도로 입김이 센데 주변 지역이 전부 유럽 식민지들이라 이곳을 함부로 침범할 경우 본토에도 자칫 외교적 갈등이 퍼질까봐 쳐들아가지 않은 것이 더 크다. 아프리카는 188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가 나눠먹기 시작했고, 여기에 독일과 이탈리아, 벨기에, 포르투갈이 끼어서 난장판이었다. 이것을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당시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아프리카를 나눠먹고 있었고, 이 와중에 벌어진 것이 파쇼다 사건이었다. 이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 중이었고, 영국이 에티오피아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점령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오히려 에티오피아를 지원해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에 진출하려는 것을 막는 등 엄청난 운이 따랐다.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살아남은 곳이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밖에 없는데, 양국은 모두 프랑스와 영국이 완충지대로 남겨놓은 땅이었고 그나마도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통해서 점령해버렸다. 라이베리아 역시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괴뢰국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아두와 전투 당시 에티오피아는 내전으로 단련된 군대 10만[30]으로 이탈리아 식민지군 2만을 상대했고, 당시 에티오피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으며 고원지대라는 지형적 이점을 살렸다.

게다가 같은 지리적 요충지라도, 에티오피아와 태국은 열강들이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완충지대를 설정한 곳인 반면, 조선은 주변국 모두가 정면 충돌을 불사해서라도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애시당초 태국과 에티오피아는 저 멀리 떨어진 유럽 열강들이 이해당사자인 반면, 조선은 바로 이웃한 일본, 청, 러시아가 이해당사자였고, 자국 영향권에 넣지 않으면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는 점[31]에서 비교가 불가능하다.[32]

게다가 당시 조선은 이미 개항 이후 내정간섭과 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독립을 유지하던 상황이었고, 서구 열강은 만주와 부동항에 관심을 가진 러시아를 제외하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일본을 용병으로 내세우는 쪽을 택했던 상황이었다. 이러니 일본, 태국, 에티오피아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고, 심지어 식민지가 된 나라들 중에는 조선보다도 더 기회가 있었는데도 열강에게 삥 뜯긴 사례도 많다.

그리고 조선은 이미 쇄국하고 있던 대원군 시절이면 모를까, 강화도 조약 이후로는 임오군란에서 청나라의 간섭으로 정권이 다시 교체되는 등 내정에서도 외국의 간섭이 심해지고 있었다. 개화 과정에서 내정 간섭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일본도 개항 이후 유신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이후 입헌이 마무리 된 시기까지 또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내전도 몇 번 겪어야만 했다. 내정에서 자유로웠던 일본도 이리 개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미 내정에서 자율성이 크게 제약된 조선 조정이 톈진 조약 이후부터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 10여 년간 일본 같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까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급진개화파들은 자신들에게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반대파나 온건파들에게 칼을 들이대거나 상대의 요구도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상식적으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은, 유신지사들의 배후에 사쓰마, 조슈, 도사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진전쟁을 거쳐서 대정봉환이 이뤄지고, 그 결과물이 메이지유신인 것이다. 하지만 급진개화파는 메이지유신이라는 결과물이 급하다는 생각만 했지, 그 과정과 집도 절도 없던 자신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고종이나 지도층이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 처사였다.

그리고 저 시절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국력이 큰 차이가 나던 시기로 크기에 비해 나름 국력이 강한 국가들도 내부문제나 강대국들간의 외교 문제에 따라서는 아차 하는 순간 나라 하나가 사라지는 살벌한 시대였다. 조선의 국력이 신장되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국력차와 개항기간의 차이에서 오는 외교적, 기술적 차이의 역량은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조선 정계가 내정문제에 외세 끌어들이는 걸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만큼 오히려 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에 독립협회도 러시아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그 이외 열강의 이권개입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4. 개인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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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조선 사람들이 기피하였던 사진 찍기를 거리낌 없이 즐겼다. 초기의 사진기의 특성인 무지막지한 대기시간도 조금의 불평 없이 잘 넘어갔다고 한다[33]

또 낮에는 일을 하지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 아침이 되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머리는 명석했던지,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반면에 뒤에 자주 서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버리하게 생겼다고 좀 까고 있다.)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조롱하였다. 실제로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개인적일 뿐, 이미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기에는 그의 역량도, 뒤를 받쳐줄 만한 힘도 너무 부족했다.[34] 그리고 그 결과는 조선의 멸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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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여자가 고종이 총애한 귀비 엄씨. 저 귀비 엄씨가 훗날 양정고등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35] 숙명여자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36] 숙명여자대학교의 창립자다. 왼쪽의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은 귀비 엄씨 소생 왕자인 영친왕.

야사인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을미사변 이후 5일 만에 엄귀비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물론 야사이니 신빙성은 떨어진다.[37] [38]

그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의 사치가 심한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정작 이를 통제하려 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커피니 양식이니 자동차니 하는 것에 취미를 붙여 돈을 썼다고도 한다.

게다가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이 있으니,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을사조약을 체결할 때라든가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할 때라든가 강하게 나서야 할 시점에 초반부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저항하다가도 사태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하면 두손두발 다 들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종이 유일하게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건 퇴위당할 때뿐이었다.

자동차에도 취미가 있었는데, 고종은 캐딜락을 타고 다녔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일제강점기손병희가 캐딜락을 구입했는데, 자신의 차가 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과 캐딜락을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은 나중에 순종황제가 탔으며 순종황제가 타던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어차는 각각 등록문화재 318, 319호로 등록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한 다임러 리무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은 80여 년간 방치돼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어차를 꺼내 ‘복원’하려 했다. 당시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됐다. 고종 어차를 본 전문가는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일부 녹만 슬었을 뿐 차의 상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기 때문이다. 부품 손상도 없었다. 당시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전영선 소장은 “복원이라고 하기보다 보수라는 개념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말했다.

재규어 다임러에서 파견된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면서 “전 세계에 딱 1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며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본인들이 보수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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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고종 7년에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운 예술가이기도 했었으니 그런 아버지에게 글씨를 배운 자신감도 있었던 모양.

커피와 함께 냉면, 군밤 등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군밤은 후술할 떡밥과도 관련 될 정도로 매우 즐겼다고 한다. 고종이 좋아했던 냉면을 만드는 방법

한국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최초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궁중의사의 권유로 간단한 에스페란토를 배웠다고 한다.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集玉齋)가 2016년 민간에게 개방되었는데 도서관과 찻집 형태로 개조되어 친근하게 변했다. 보유 서적은 4만권.

최근 창덕궁에서 와플틀이 발굴되어 와플 매니아임을 인증했다(....) 여봐라. 짐이 와플을 먹고싶으니 가배와 함께 가져오너라!! 이와 동시에 카스테라틀도 발견되어 와플과 카스테라를 곁들여 우아한 커피타임을 즐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거 참 고상하시네

4.1. 고종과 군밤떡밥[편집]

특이하게도 고종은 군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버전에서는 군밤이 호떡으로 변한 버전도 있다.
  •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왕위에 오르자마자 군밤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은 것' 물론 이 군밤장수는 신하들의 반대로 사형은 면했다.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野談)이므로 승정원일기의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 바로 아래 문단 참조.#[39] 사실 고종의 서장자인 완친왕(완화군)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에 아들의 이야기가 잘못 와전되어서 나온 카더라일지도 모른다.아니면 부전자전이든지 현재로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호해서 사건의 진실여부를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고종에게 군밤 관련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빵 사건??
  • 위에서 나온 군밤이야기에서 일부 진실부분이 있다면 실제로 고종이 즉위 초기부터 최소 즉위 중반기까지는 을 좋아했던 건 사실로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왕 시절 기록보다 유독 고종시절의 기록에 밤에 대한 진상기록이 많았기 때문이다.[40] 다만 나중엔 커피로 갈아탔다 이 진상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41]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준 걸 보면 꽤 인자한 성격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생각해 보면 저런 군밤장수 사형 요구 루머가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인데, 고작 밤 따위로 죄를 족족 주었으면 민심이 엄청나게 흉흉해 졌을 것이고 고종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완친왕이 군밤을 좋아했다는 일화가 있는 걸 보면 완친왕의 이야기가 고종의 이야기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것일지도.
  • 경술국치 이후에는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42]을 손수 구워 다가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종이 군밤을 좋아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인 듯 싶다. 레알 군밤 왕

4.2. 미국인 황후 에밀리 브라운 떡밥[편집]

해당 항목으로.

4.3. 숨겨진 딸 이문용 떡밥[편집]

해당 항목으로.

5. 가족관계[편집]

6. 어진과 사진[편집]

근대의 황제답게 어진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촬영 시기 미상, 황제 일가 사진
1918년 영친왕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정실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단, 이 사진은 후대에 조작 및 합성되었다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촬영 시기가 불확실한데다가 인물의 비율과 광원의 위치가 어색해 사실상 조작 및 합성이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사 참고[43]) 오른쪽의 황제 일가 사진은 1918년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해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것으로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황실 가족이 단독 사진이 아니라 여러 황족과 함께 사진을 찍을 때는 오른쪽 사진과 같이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유사한 서열을 갖는 사람을 배치하며 각각의 인물들 또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른쪽 사진과 같은 서열 배치 및 거리 차이를 감안한다면 왼쪽 사진은 원래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만 찍힌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군복 차림의 고종
군복 차림의 고종
정장 차림의 고종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왼쪽 흑백 사진을 컬러화한 것이 오른쪽 사진이다[44].
석지 채용신의 고종 어진
작자 미상의 원유관 강사포본 고종 어진[45]
전신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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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승하한 해의 고종.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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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발견되었다.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제재단 보도자료

7. 현대 매체에서의 고종[편집]

조선이 근대화되는 시점의 군주였고 재위기간도 길었기 때문에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왕 중 한 명. 그런데 정작 고종 시대를 다룬 사극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나 부인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사극들이 많아서 고종 본인은 주역에서 한 발짝 벗어난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자신의 치세가 사극에서 자주 다뤄지나 정작 본인이 사극의 주역이 된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사극 속 취급은 어쩐지 조선 중종과 비슷하다.

고종은 즉위 전에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긴 했으나 아주 잠깐 동안 봉해졌다가 바로 즉위하였고, 따라서 특별한 벼슬이나 군호를 받지 못 했기 때문에 즉위 전 어린 시절의 고종이 등장하는 매체에서는 대부분 아명인 이명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부인 등쌀에 기를 못 펴는 우유부단한 군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마냥 무능하다기보다는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되곤 한다. 실제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사극 속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다(운이 없었다)'는 식의 평가에 맞춰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대표적인 예.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왕인데 이런 소설들에서도 아들 순종처럼 30%는 훌륭한 군주로 나머지 70%는 개 찌질이 왕고집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 한반도에서는 김상중이 분했다. 일본의 직접적인 침략을 대비해서 가짜 국새를 만들어놓고, 진짜 국새는 내관에게 맡겨서 봉인시켰다.
특히, 신하들이 일본 해군 간부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일본을 건드리면 큰일나니 청나라 야만족을 몰아내려면 일본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고종을 설득하는 장면에 명대사가 등장한다.[46]
내 나라에 들어온 외세를 물리치는 것도 일본이 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일본이 한다면 이 땅이 누구 것이며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일본의 힘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그대들은!!!! 대체 어느 나라의 신하이며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다는 말이냐!!!!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버지인 이하응과 함께 아명인 이명복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격적인 군왕의 모습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왕도의 개에서는 위안스카이의 위협에 벌벌 떨면서 아무 것도 못 하는 무능하고 한심한 인물로 나온다.[47]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름대로 머리도 좋았고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노회한 면모도 보였으며, 개화에 대한 생각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깔 부분은 제대로 깐다. 가령 전제적인 전제권(황제권) 강화에만 집착하는 면모도 묘사하고 있고 민씨 일족의 전횡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을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우유부단하고 황제에서 퇴위되기 직전 말고는 전혀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권 말미에는 망국 이후의 고종의 후일담을 짤막하게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고종에 대한 총평을 볼 수 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백윤식이 연기했고, 늦둥이 고명딸인 덕혜를 아끼는 딸바보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친일파 이완용, 한택수에게 일갈하는 모습이 나온다.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일제의 음모에 걸려 독이 든 수정과를 먹고 죽는다.[48]

8. 고종이 등장한 대중매체[편집]

영화
드라마
기타

9. 둘러보기(계보)[편집]

칭제건원
초대 고종태황제 이형
2대 순종효황제 이척
경술국치
이왕가(李王家)로 격하
1대 이태왕 희[49]
궁가 단절

[1] 꽤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묘호지만 이왕직에서 올린 묘호 망단자 고종(高宗), 신종(神宗), 경종(敬宗) 중에서 순종이 수망(首望)인 고종을 사왕(嗣王)의 자격으로 승인한 것이다.[2] 약칭 고종태황제. 광무제가 아니다. 남양주시 주민이라면 홍유릉에서 간혹가다 고종태황제라는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데, 홍유릉 권역에 고종의 후손인 의친왕, 덕혜옹주 등의 묘가 있기에 추모제향 때 현수막을 걸기 때문이다.[3] 조선 왕조가 성립된 1392년을 원년으로 하고 기년법. 흔히 1894년(개국 503년) 갑오개혁 때부터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갑오개혁 때의 조치는 '국내외 모든 공문서·사문서에 개국 기년을 사용토록' 한 것이며, 실제로는 1876년(개국 485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청나라를 제외한 외국과의 조약에는 개국 기년을 사용해 왔다. 1896년 건양 연호 사용 이후에도 칙령 등에서 혼용된 예가 많다.[4] 1896년(건양 원년) 1월 1일부터 1897년(건양 2년) 8월 16일까지 사용.[5] 1897년(광무 원년) 8월 17일부터 1907년(광무 11년) 8월 11일까지 사용.[6] 아명. 어릴 때 이름. 자식의 아명을 천하게 지어 불러 액운을 막고 장수하길 바라는 전통으로 비롯한다.[7] 국왕 즉위일로부터 정확히 55년 만에 승하.[8] 순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한제국의 황제였지, 조선의 왕은 아니었다.[9] 아들을 잃은 슬픔[10] 아내를 잃은 슬픔[11] 나라를 잃은 슬픔[12] 실정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동시대 니콜라이 2세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험난한 꼴을 당한 군주였다. 선통제와는 막상막하?[13] 일제강점기 때는 고위 귀족 대우는 받으며 구왕족들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았다. 삶이 안습해진 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대 이후. 그리고 그런 왕족들을 싫어한 것이 전주 이씨인 이승만이라는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느 정도 자업자득이기는 하다.[14] 그의 한계를 여실히 보이는 것이 바로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 때에 처신이다. 임오군란의 사태를 볼 때 자기 잘못으로 보지 않았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려고 외국 개입을 일으키는 오판을 했다는 점에서 사태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5]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해 위태위태한 동북아의 균형이 무너졌다.[16] 보급을 원활하게 하려면 무기의 규격과 탄약의 종류가 통일되어야 하는데 독일제 쪼금, 프랑스제 쪼금, 러시아제 쪼금, 일본제 쪼금 이런 식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대한제국군이 해산될 때까지 병사들이 서로 사용하는 총이 달라 탄약 보급과 무기수선에 어려움을 겪었다.[17] 매천야록에 따르면 관찰사의 경우 10만~20만 냥, 일등 수령이면 최소 5만 냥 선으로 벼슬의 구체적인 값까지 제시되어 있었다.[18] 예상하지 못했다면 이것도 큰 문제이고, 예상했다 하더라도 일본군에 대해 완전히 오판한 셈이 된다.[19] 실제로 고종의 장례는 3월 3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장례를 치루는 당일이 아니었던 이유는 장례를 치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라는 이유였다. 여담으로 3월 2일이 제외된 것은 일요일이어서. 농담 같지만 기독교 인사들의 반대이유였다.[20] 여기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자신의 배후로 지목한 대한의군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태진은 김두성을 고종 황제 자신으로 지목했지만 신운용은 이를 반박하고 김두성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남북문화예술연구》제11호, 2012). 이보다 한참 전인 1969년에 조동걸 춘천교육대 교수(현 국민대 명예교수)는 「안중근 의사 재판기록상의 인물 김두성고」(《춘천교대 논문집》7, 1969)에서 김두성은 유인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21]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은 러시아 영사관과 궁을 오갔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연성은 존재한다. 오히려 문제는 의외로 많이 문제점이 제기되는 백범일지 자체의 신뢰도에 있다.[22] 정확히 말하자면 유신지사의 경우 명분만 천황 옹위세력이지, 알맹이는 개혁세력이었다.[23] 이 주장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구애 작업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한국(고종)이 강대국들을 끌어들여 지역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고 하며 열강들에게 한국 강제 합병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와 관해서는 《고종의 대미외교》, 《고종은 외세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와 같은 서적을 참고하자.[24] 청일전쟁 직전의 수치. 러일전쟁 때 10만여 명이 증원된다. 러일전쟁일본군 항목 참조.[25] 일본군가 보병의 본령에서는 '군기를 지키는 군인들은 그 숫자 모두 합쳐 20만여' 운운하는 구절이 있다.[26] 청나라오스만 제국은 독립은 유지했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막대한 이권을 갈취당하고, 영토를 할양당했으며, 무거운 빚을 지게 되었다.[27] 공식적으로 세율은 4~50%, 경우에 따라 70%씩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과세기준 선정시 그만큼 깎아줬다.[28] 당장 도쿄 수도권 전체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 전체와 맞먹는다. 더군다나 에도시대의 경제력과 인구, 농업생산력은 조선보다 크게 앞서있었다.[29] 게다가 태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준 것과 당시 조선의 상황을 비교할 수도 없다. 일단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시암(태국)의 속국이었지 정식으로 편입된 영토가 아니었고, 이 3국은 같은 민족 의식도 딱히 없었다. 심지어 캄보디아의 경우 태국이나 프랑스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즉 태국 입장에선 내주기 훨씬 용이한 상황이었다. 당장 고종이 국토를 떼주는 행위를 했다면 현 평가는 더욱 나락에 떨어질 것은 물론이고 당시에도 엄청난 반대를 받았을 것이다.[30] 이중 8만은 소총으로 무장했고, 2만은 창과 방패로 무장했다.[31] 청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도 부동항과 만주를 지키려면 조선이 필요했다.[32] 또한 나중에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에티오피아는 잠시나마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했고 태국 역시 일본에게 점령당하진 않았지만 일본의 강압 아래에 억지로 추축국에 가담하며 반쯤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33] 많은 조선 사람들은 인물사진의 주인공은 1년 내에 죽고 풍경사진의 나무는 얼마 안 가 시들고 찍힌 성벽은 얼마 안 가 허물어진다는 미신을 믿었기 때문에 사진기만 들이댔다 하면 두려워하며 도망가곤 했다. 물론 1800년대 후반 이야기이긴 한데 조선 말고도 당시 대다수 아시아나 아프리카 멀리 중남미, 심지어 유럽 일부에서도 흔했던 일이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흡수한다는 미신은 워낙에 흔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개방되었다던 일본에서도 사진 찍다가 불길하다며 돌팔매질당한 이들의 기록이 20세기 초반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으니 무턱대고 사진 찍지 말라는 여행가들 충고가 많다.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고….[34] 하지만, 그 당시 조선의 상황이라든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역량, 당시 사대부들의 태도 등을 고려해 봤을 때 그 어떤 왕일지라도 조선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망하지 않았다 해도 태국처럼 막후에서 지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 당대 서구 열강 지도자들의 성향상 되든 안 되든 무장투쟁을 벌이는 게 외교전에서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35] 서울시 양천구 목동 소재. 진명여중도 있었지만 폐교되었다.[36]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소재.[37] 그리고 그 당시 왕비와 함께 고위급 상궁들이 죽어 내명부를 조율할 여인이 없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세자빈 민씨(순명효황후)가 있긴 했으나 을미사변의 충격과 시어머니 명성황후 민씨의 갈굼으로 인해 세력이 없다시피 했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명성황후의 투기로 다른 후궁도 없던 상황이었다.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명성황후의 죽음이 공인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38] 한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저자 박시백 등은 자신의 저서에서 임오군란 때처럼 고종이 명성황후가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39]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고종이 상당히 찌질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만 당시 고종 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이쪽도 기록의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던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단, 고종 실록에 대해서는 좀 의문인 게, 고종 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일본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 이전에 고종 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이어놨었는데, 고종 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포함되지 않는다.[40] 정확히는 황율(黃栗).[41] 대부분 경상도 관찰사[42]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43] 딱 봐도 의친왕영친왕의 모습은 빛과 그림자가 주변과 괴리가 큰 모습이다. 더불어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 및 영친왕의 일시 귀국 시점 등 시기적으로도 저 사진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44] 이전 왕들의 어진들에 비해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의 복장 간소화 조치로 인해 곤룡포의 용보와 머리에 쓰는 익선관의 크기까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이다.[45] 전통적인 어진과 달리 인물의 배경에 휘장을 드리운 것 때문에 일본의 화풍이 가미된 어진으로 추정된다. [46] 이 장면은 고종이 일본 간부들과 함께한 자리와 현재 시대의 대한민국 대통령과 일본 외상과 함께한 자리가 교차되어서 나온다.[47] 이 만화 자체는 제국주의 비판 만화다. 오해하지 말자. 오히려 명성황후가 여기선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이는 날카로운 인물로 나온다.[48] 상해임시정부는 3.1운동의 결과로 세워지기 때문에 고종 생전에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존재할 리가 없다. 고종이 망명시도를 한 흔적이 보이고, 망명을 준비해서 상해에 있는 독일 은행에 비자금을 마련했던 것은 호머 헐버트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상해임시정부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서술한대로 대사로 직접 고종이 상해로 망명할 생각이라고 김장한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49]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고종의 이름은 일본에서 쓰지 않는 '형(㷩)' 에서 사실상 같은 글자인 '희(熙)'로 쓰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