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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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령
Stato della Chiesa
Status Pontificius
국기
국장
지도[1]
국가
우리는 하느님
동정 마리아를 원한다(-1857)
위대한 개선행진(1857–1870)
위치
정치체제
신권 군주제
선거 군주제
국가원수
주요사건
752년 성립
1309년∼1377년 아비뇽 유수
1798년 1차 해체
1870년 2차 해체
(1920년 바티칸 시국 건국)
통화
스쿠도(-1866)
리라(1866-1870)
성립 이전
멸망 이후

1. 개요2. 역사3. 참고 문서

1. 개요[편집]

敎皇領

중세시대부터 근대까지 가톨릭교황이 다스리던 영지로 바티칸 시국의 전신이다. 교회령(敎會領) 또는 베드로 세습령(世襲領)이라고도 부른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분포하고 있었으며, 의외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비뇽 유수로 유명한 프랑스의 아비뇽[2]도 교황령이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아비뇽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2. 역사[편집]

321년 로마 제국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회에 대한 규제를 철폐한 이후 신앙심이 깊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 교회의 사유 재산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 때 라테라노 궁전은 상당한 기증의 첫 번째로 콘스탄티누스 1세 자신이 교황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300년 동안 로마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확장된 영토가 시초가 되었는데 6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탈환했다. 하지만 롬바르디아 족들의 맹공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영향은 총독이 있는 로마 시(市)와 남쪽의 나폴리로 크게 한정되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이 약해지자 교황은 점점 로마 공국을 다스리는 한 독립 영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결국 롬바르디아족에 의해 함락되면서 로마 공국은 동로마 제국 본국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롬바르디아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면서 비밀리에 프랑크 왕국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피핀 3세는 754년과 756년에 프랑크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 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족을 무찌르고 교황에게 옛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를 교황에게 증여했다.

첫번째 기증이 754년인데, 2번째 기증이 756년으로 이 756년에 피핀은 2번째로 로마에 원정와서 롬바르드족을 쫓아낸 후 로마의 열쇠들을 모두 가져와 성 베드로의 무덤에 바쳐서 '교황령을 건국하게해주겠다는 자신의 754년 기존 언약(게약)'을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확정시켰다.

이것이 바로 '피핀의 기증'인데, 이때 공식적으로 교황령이 건국되었다. 교황령의 시작은 당시 교황인 스테파노 2세의 즉위년인 752년으로 볼 수도, 754년으로 볼 수도, 최종확정된 756년으로 볼 수도 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10~11세기 노르만족과의 충돌로 축소되기도 했으며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 때 최대의 면적을 확보하였다. 14세기 교황이 아비뇽 유수(1309~1377)를 당하면서 위상이 크게 실추되기도 했으나, 그 후 교황이 복귀함으로서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카를 5세사코 디 로마 사건으로 완전 초토화당하고 교황이 도시를 떠나 피난한 굴욕적 사태도 있었다(…).

그렇게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교황청이 맹렬히 반대한 대가로 나폴레옹에 의해 1799년 최초로 완전히 폐지당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몰락한 후 1815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에 모여 나폴레옹 전쟁 종전후 처리를 회의를 한 빈 회의애서 교황령을 부활시켰지만 1848년 이탈리아 통일론자[3]들의 혁명운동으로 다시 폐지당했다가, 1861년 신생 이탈리아 정부가 통일전쟁을 통해 로마냐 지방을 강제로 편입한다.

그래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라치오 지방만은 나폴레옹 3세(재위 1852~1871)가 보낸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아 건드리지 못하다가, 1870~71년의 보불전쟁으로 다급해진 프랑스가 군대를 철수시키자 1870년 잽싸게 이탈리아군이 진주해 점령하며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종결되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선포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령은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비공식적으로 설치되고 1400여 년 만에, 754년 피핀의 기증 이후로는 1100여 년 만에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 후 로마 교황들은 영토 없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사실상 갇혀 지내며 바티칸 포로를 자처했다. 바티칸 포로 시대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지속적인 마찰을 벌이다가 1929년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 최소의 미니국가인 바티칸 시국, 즉 현대의 교황령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교황령은 바티칸 시국과 동의어이며, 교황의 전제주권이 미치는 0.44㎢의 공간이 해당된다. 이 영토는 다른 주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타 국가의 간섭과 영향력이 배제되며 제2차 세계대전나치 독일군도 바티칸의 주권을 존중하여 이를 점령하지는 않았다.[4]

3. 참고 문서[편집]

[1] 우리는 이 시대의 독일 지도가 유난히 더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동유럽이 유난히 깨끗한 것도 특이할 만 하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정반대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현대 독일은 깔끔하게 하나의 나라로 정리된 상태지만(물론 같은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스위스, 리히텐슈타인이 있긴 하다), 동유럽소련 붕괴와 민족주의 대두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2] 위에 지도에서 프랑스 쪽에 작은 점 부분[3] 이들은 신생 이탈리아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구체제의 대표 격인 교황을 통일의 적으로 보았다. 또 교황령이 절묘하게 이탈리아 반도 한가운데를 차지해 북부와 남부를 분단시키는 점도 한몫햇다.[4] 다만 이탈리아가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독일군이 바티칸을 무력으로 포위하여 바티칸 근위병(스위스 용병)과 교전 직전까지 간 적은 있었으며, 연합군으로 가장한 독일군 폭격기가 바티칸을 폭격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유리가 깨진 사건도 있었다. 또 비오 12세 때 특히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갈등 국면이 여러차례 빚어지면서 바티칸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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