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 때문에 민중들의 종교적인 욕구는 늘어났고, 기독교 세력은 크게 팽창하였다. 지역적으로도 북서 아라비아, 페르시아만 연안과 크림 반도, 중앙 아시아, 켈트 지방까지 교세가 뻗어나간다. 이와 더불어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더욱 가혹한 탄압을 시도하였는데, 황제 중엔 셉티무스 세베루스(202년~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발레리아누스(257년~260년)황제 등이 대표적으로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다.
이들이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망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국가적인 행사등 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로마인들이 3세기의 위기 때 신전에 가서 울고불고 했을 때도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군인 황제들은 이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해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이로 인해 다른 로마인들이 단결하길 바랐다.
또 이 시기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페르시아 지방의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 황실의 핍박으로 서기 230년과 287년 박해 때 3만 명이나 죽임당하는 등 고초가 심했다.
참고로 이 시기에
기독교도들이 로마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군인의 수가 감소하여서 서로마제국을 쇠퇴시킨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는데(대표적으로
시오노 나나미 등) 이는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다. 평화주의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도 있긴 했지만 동시대에 훨씬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군에 입대했고, 군대에서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던 기독교도들도 많았다.
군인황제 시대가 끝난 후에 정권을 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역시 전례없이 강경한 기독교 탄압을 시도하였다. 사실 전임 황제였던 데키우스나 발레리아누스 황제도 강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비슷했는데, 문제는 전임 두 황제는 일찍 비명횡사
[60]하는 바람에 탄압이 중단되었던 것.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래 살았으므로 오랫동안 강력한 탄압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적도 전임황제와 비슷하여 로마 사회의 단합 그리고 황제의 권위의 강화하기 위한 탄압이었다. 디로클레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처럼 "국가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 개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 자체"를 겨냥해서 파괴하려 하였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도에 퇴위하였고 그 결과 기독교 탄압도 애매하게 중단된다.
이어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드디어 사회,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합법 종교로 공인한다. 그가 공인한 목적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섬기게 하고 로마 황제를 그 유일신과 신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성인같은 위치로 공경받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신적인 위치로 숭배하는 것은 당시엔 낮선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정식 직함이 아니었고,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인 로마에서 특권을 부여받은 편법적인 존재였으므로 어느정도 신격화되긴 했지만 제국민들에게 신으로써 숭배받는 전통이 약했고 따라서 조금만 실책을 저지르면 즉시 암살당하고 내전이 발발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따라서 로마 황제를 아예 유일신인
하느님과 기독교 교회를 지키는 종교의 수호자로 만듦으로써 오리엔트에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군인황제 시대 때의 아우렐리아누스가 최초로 시도하였었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아닌 태양신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양신보다는 기독교의 유일 신앙이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에 더 걸맞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오랜 전통의 유대교와 사도 시대를 거치며 상당히 정교한
신학이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대해 꽤나 친숙하였고 따라서 기독교야말로 그의 목적에 걸맞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콘스탄티누스의 이 방식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대성공을 거두어 100년간 지속된 황제 암살 → 내전 → 승자의 황제계승의 패턴이 거짓말처럼 중단된다.
또 기독교를 공인한 경제적 이유로는 모라토리엄의 해결이 주 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 되어 가고 있다. 즉,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에 신전의 은닉금을 털수 있었고 그 금으로 재무장한 군대와 경제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이때의 금화를 솔리두스라고 하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독교를 공인했다는 것.
[61] 참고로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쯤 가서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고, 정적 살인 등의 죄를 지어야 하는 황제라는 점 때문이었다.
[62] 실제로 이런 이유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시절엔 세례를 죽기 직전에 받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현대에 저런 이유로 세례를 늦추는건 말이 안되는 소리다.
나무파일:external/www.creagdhu.net/The%20Spread%20of%20Christianity.png서기 4세기~7세기 기독교의 확장.
그 후 기독교는 4세기 중반 율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 로마 신앙을 부흥시키는 정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견제받기도 했으나 그 뒤를 이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해버렸다(392년).
[63] 이로 인해 기독교는 피탄압종교에서 순식간에 지배종교로 변모한다. 하지만 도리어 로마에 적대적인 국가들은 그 이전 관용을 배풀던 기독교를 더욱 탄압하게 된다. 특히 페르시아에서는 이슬람에게 멸망당하기 직전인 7세기 초까지도 중근동 기독교도들에게 빈번한 학살과 가혹한 탄압을 반복했고 이에
비잔틴 제국이 성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근동 그리스도인들의 수난은 이슬람 세력이 중근동을 장악한 이후로도 계속된다.
이에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기독교 교회와 종교지도층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 기독교에 적대적인 국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독실한 이교 신자였던
[64] 율리아누스 황제가 361년에 기독교의 입김을 정치에서 완전히 제거하려 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원정 중 병으로 죽고 만다. 근위병 중 친기독교 세력이 암살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율리아누스의 근위병은 갈리아에서 데려온 심복들이었기 때문에 이는 지나친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과, 기독교 국가로 온전히 남아 있던
비잔틴 제국을 중심으로 기독교는 번성하였고, 프랑크족이 정통파의 세례를 받아들이고, 그 프랑크족이 프랑크 왕국을 세움으로써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도 미선교지역에 대한 선교는 계속 이루어졌는데 스칸디나비아지방이나 중부 동부 유럽은 아직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14세기까지 이교도 국가로 남아있었고,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사미족은
19세기에 와서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