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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인물은 니콜라이 예조프. 대숙청을 주도한 스탈린의 심복이었으나 그 역시 모함당하여 사형되고 기록이 지워졌다.
There will be no glory in your sacrifice.
I will erase even the memory of Sparta from the histories!
Every piece of Greek parchment shall be burned. Every Greek historian, and every scribe shall have their eyes pulled out, and their tongues cut from their mouths.
Why, uttering the very name of Sparta, or Leonidas, will be punishable by death!
The world will never know you existed at all!

네놈들의 희생에는 영광 따위는 없을 것이다.
내가 스파르타를 역사에서 한 치도 남김없이 지워버릴 것이니!
그리스의 모든 문서를 불태워버리고, 그리스의 모든 역사가들과 서기들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입에서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스파르타나 레오니다스 1세|레오니다스의 이름을 아주 조금이라도 언급하기만 해도 사형으로 다스릴 것이다!
세상은 너희가 존재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의 대사
1. 개요2. 고대, 중세 시대의 형벌3. 위키에서

1. 개요[편집]

모든 기록을 지워버림으로써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고대 로마의 형벌. 라틴어로는 Damnatio Memoriae.[1]

2. 고대, 중세 시대의 형벌[편집]

고대 로마에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고 불린 형벌로 로마 엘리트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처벌이었다. 로마에서 대역죄인이나 폭정을 일삼은 황제나 처형된 황후(클라우디우스 1세의 황후 메살리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황후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혹은 태후(율리아 마마이아), 이를테면 로마역사상 가장 파렴치한 간신으로 평가받는 세야누스, 폭군으로 규정된 네로, 도미티아누스[2], 콤모두스, 카리누스나, 공주 중 악행이 심해 이 형벌을 받은 리빌라 등의 인물들에게 내려지던 형벌의 하나였다. 현세에 세운 모든 공적들이 박탈됐고, 형벌이 통과될 당시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형벌에 처해져 당사자가 기소 전 자살하더라도 이 형벌로 기소되는 순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기록말살형은 현세와 명예를 소중히 하는 로마인에게는 조선의 부관참시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능가하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따라서 이 형벌에 처해지면, 대상자만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고 해도, 해당 가문까지 살아생전 명예와 사후 명예, 업적까지 모조리 부정되는 조치와 똑같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가족들에게도 그 내상이 심각했다. 왜냐하면 기록말살형 대상자의 이름은 사회에서 인간쓰레기,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운 자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욕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복권 자체가 무척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고르디아누스 3세 시대 당시, 황제의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일방적인 원로원 의원, 장군들에 대한 기록말살형 조치 결정처럼 논란의 여지가 심하거나 악감정으로 황제나 실권자들이 이 조치를 악용하는 것 역시 로마 사회 안에서 범죄로 인식됐다. 특히 황제가 이 형벌에 처해지는 경우, 조치가 통과된 순간 콤모두스 사례처럼 다음 황제가 이를 뒤집어 신원을 복구시켜주는 조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로마인들의 관습상 '집=모든 영혼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 형벌에 처해진 순간, 로마인들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은 파괴되고, 조상들의 조각상은 후손, 친척들의 집에서 강제 회수되고 파괴됐다. 따라서 바닥, 벽면에 설치된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억까지 지워지고 철거됐다. 황제, 원로원 의원, 선출직 공직자, 관료, 장교라면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대상자의 이름을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대상자의 초상 등을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버렸다. 이들의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들이 밞고 다니는 도로 재료 등으로 쓰여 모욕당하게 만들었고, 심할 경우에는 해당 인물이 살던 집도 완전히 철거됐다.

황제의 경우, 당사자와 그 자손 및 직계 친척들까지 특권이 박탈되고 황제는 개인이름(프라이노멘)으로 사용이 허락된 임페라토르까지 박탈됐다. 네로의 사례처럼 아예 동판을 통해 그 정통성이 철저히 무시됐으며, 이들의 조각상은 모든 공공건물에서 철거되고 발행주화는 회수됐다. 여자 황족이나 황후, 태후의 경우에도 비슷해 이 형벌에 처해지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똑같이 집행됐다. 때문에, 율리아 마마이아나 파우스타처럼 살아생전 명예는 공적으로 언급이 철저히 자제됐으며, 리빌라의 예처럼 추가 조사를 통해 원로원 의결로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황제와 황후, 태후, 황족 외의 원로원 의원, 장군, 장교 이상의 관료들, 세야누스 같은 극악무도한 반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로원 의원, 장군, 관료의 경우에는 세야누스처럼 국가 전복 시도와 함께 그 악행이 끔찍하지 않는 이상, "본인이 한 잘못만 처벌받는다"는 로마법 원칙에 따라 연좌제는 적용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 당사자에 한하여 원로원 회의록과 관보 안에서 기록된 공훈이 모조리 지워지고 조각상 등이 파괴됐다.

다만, 기록말살형이 완전히 이뤄지는 경우는 이 조치를 명령한 황제, 원로원이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기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여러 이해관계와 물리적 한계 때문에 소요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고 보상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네로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당시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 각 속주의 총독 관저 및 관청 외에서 네로가 새겨진 주화, 조각상이 모두 파괴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오늘날처럼 통신이 빠르지 않아 모든 명령이 동시 집행되는 것이 힘들 뿐더러, 제약조건도 많았기 때문이다. 화폐라면 보상 없이 회수해서 폐기해버린 터라 소유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존속살해하고 동생을 기록말살형 선고할 당시, 카라칼라는 몇년 동안 제국 전체를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동생의 주화를 온전히 폐기하지 못했다.[3]

더욱이 비텔리우스가 네로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콤모두스를 일부 철회, 완전 철회하는 경우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공문이 하달되더라도 모두 집행하지 않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당장 두 사례만 해도 이 조치 회복 조치로 인해 동상 복원 명령이 하달되거나, 일방적으로 파괴를 명한 이들이 징계를 받았으니, 더 큰 불똥이 튈 속주들의 경우에는 만약을 위해 그냥 치워두는 경우가 수두룩했던 것이다. 아울러 메살리나엘라가발루스 사례처럼 제위계승자와 황실이 피해자 내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통과 후에도 공문을 만들지 않고 몰래 집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한 인물의 이름과 명예를 지우는 것을 가혹한 형벌로 여긴 점은 한자문화권의 사고방식과는 대조적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유취만년(遺臭萬年)이라고 해서 반역이나 폭정 등의 악행은 기록으로 남겨져서 역사의 이름으로 두고두고 기억되는 것을 더욱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4] 다만 한자문화권에서도 공신녹권 문서나 해당 인물이 간행에 참여한 서적의 목판 같은 경우는 먹칠로 지워버리거나 목판을 파버리거나 불태우는 등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사례 역시 존재한다.

기록말살형은 후대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최악의 적이다. 아무래도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는 만큼, 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 기록마다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한 역사적 기록이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주제를 다룬 다른 기록들과 비교를 해 봐야 한다(=즉, 교차검증을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기록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말.

고대로 갈수록 당시의 기록 자체가 현재까지 오면서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유실되는 경우가 빈번하다.[5] 거기에 만약 그 시절 당시에 작정하고 기록을 없애버리게 된다면? 그 시절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이렇게 될 경우 자료를 얻는 것은 사실상 답이 없게 된다. 결국 남은 것은 유물이나 (사문서로나 남아 있을)[6] 당대의 평판, 혹은 추정 정도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파라오 아케나톤과 그 후계자 스멘크카레, 투탄카멘, 아이아문 대신 아톤을 섬겼던 까닭에 정권을 찬탈한 호렘헤브에 의해 비슷한 처분을 받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름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존재의 부정이지만 당대에는 존재의 소멸과도 비슷한 큰 충격을 준 형벌이었다. 벽화의 경우 도굴꾼에 의해서 훼손된 흔적과는 다르게 이름과 얼굴에 집중적으로 훼손이 일어난다.

조선시대의 경우 사대부들의 교육기관의 성균관의 재학기록을 영구적으로 지워버리는 영삭부황(永削付黃)이라는 명예형이 있었다. 이는 누런 종이에 죄목을 적고 재학기록에서 삭명하는 것이다. 또한 팽형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조선의 팽형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니, 상대적이긴 하지만 이 또한 산자를 죽은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잔인하다고 볼 수도 있다. (팽형은 실제 존재에 대해 논란이 있다.)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불에 타 없어졌는데[7] 방화범인 헤로스트라투스는 범죄 동기를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자로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때문에 에페소스에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나, 역사가 테오폼푸스가 이걸 책에 적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소원대로 그는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마치 '존재 자체를 없애는 형벌'로 묘사한 바 있는데 이것은 과장이다. 존재는 두되 그가 한 일을 기록에서 전부 뺀다는 것으로 이 자는 기억조차 되어선 안될 극악무도한 자이니 이름만 남기고 관련 기록을 없애버린다는 경고성 메세지에 가깝다. 네로나 도미티아누스도 이 형벌을 받았지만 후대 역사가들은 두고 두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심지어는 오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도 이 형벌을 받을 뻔했다.

3. 위키에서[편집]

  • 나무위키에서는 리그베다 위키와 달리 무기한 차단자의 기여 내역 삭제에 대한 관련 규정이 없어 기여된 내용에 명백한 문제가 있어야지만 삭제가 가능했으나, 2016년부터 규정이 변경되어 나무위키도 다중 계정을 남용한 차단 회피 사용자들의 흔적은 이유 불문하고 삭제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다만 규정 변경 이후 차단 회피자 기여분은 이유불문하고 완전 삭제하게[8] 되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 멀쩡한 내용조차도 삭제되어 문서가 토막글이 되거나, 차단자가 아닌 다른 이용자가 기여한 내역도 차단 회피자가 건드렸다는 이유로 통삭제되거나, 이러한 삭제들로 문서 내용 등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별다른 조치 없이 방치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차단 회피자의 기여 내역 삭제 규정을 남용하여 단순 영구 차단자의 기여를 기록말살형에 가깝게 전부 삭제하는 행태가 상당히 자주 보였는데, 이에 대해 사측 관리자가 2019년 10월에 단순 무기한 차단자의 기여 및 차단 회피자의 차단 회피 이전 기여는 삭제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규정이 바뀌었다. 이용자 관리 방침 규정상 차단 회피자의 기여가 아닌 영구 차단자의 기여 및 차단 회피자가 차단을 회피하기 전에 했었던 기여는 삭제 대상이 아니며 편집권 남용에 해당하는 규정 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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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나티오 메모리아이(교회 라틴어로는 담나치오 메모리에). 직역하면 '기록의 죽음'. damnatio(동사 으뜸꼴 damnare)는 우리가 아는 그 Damn의 어원이다.[2] 함께 언급된 네로, 콤모두스와 달리 폭군은 아니었지만, 암살 직전까지 개인우상화가 지나쳤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최악인데다 황제가 대놓고 고발인으로 정적을 기소 후 고문까지 벌여 원로원 의원 여럿을 죽인 탓에 만장일치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3]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난 뒤 후대 황제들에게 게타 기록말살형에 폐기되면서 결정이 뒤집어지는 촌극도 벌어졌다.[4] 대표적으로 황소의 난안록산의 난 등등이 있고, 연산군만행조선이 망한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것도 이 사상의 영향이다. 그러나 만적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 같이 기록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생겨났다.[5] 삼국유사가 불교 편향적이고 사대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고, 삼국사기가 마찬가지로 사대주의적이고 신라 편향적이라는 비판에 시달려도, 역사 교과서에 그 두 가지 역사서만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외의 역사서는 아예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까. 삼국시대 이전 한국사 연구의 진전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6] 다른 문명이면 모를까, 로마 공문서와 기록체계의 수준은 현대 기준에서도 철저했으니.[7] 사실 이 사원도 과거 홍수 때문에 쓸려가버린 원래 신전을 재건축한 것이다.[8] 차단 회피자의 기여분이 90%가 넘으면 휴지통 처리 된다.[9] 심각한 불쾌감을 주는 내용, 개인정보 및 국가 기밀 등 민감한 정보 유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