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19일, 38선에 도착한 김구 일행. | 김일성의 보고를 경청하고 있는 해방 직후 북 주석단 모습.[17] |
효창공원 내부에 자리한 묘역 |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 민족국가 편 中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편 中
자유와 자유 아님이 구분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 개인 또는 일 계급에서 나온다. 일 개인에서 나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 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 독재라 하고 일반적으로 파쇼라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백범일지 정치이념 편 中
지금,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것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이 두 가지에,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 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이라도 반대는 물론 비판하는 것도 철저하게 금지하여, 이것을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 조선의 사문난적을 대한 것 이상이다.
미군정 아래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시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내 나이 73세,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국 군정 아래에서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 2.) 中
법통이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하다. 무엇이 법통이며 법통을 주장하는 자가 누구인가. 김구 일파가 법통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하였으며, 더구나 임정 간부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 양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면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통해 이들의 무장투쟁을 도왔을 것이다.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일이다.
백범 사상의 뿌리는 유가, 도가, 도참가, 무가, 동학, 주자학, 불교 등 동양 사상을 망라한 위에 그리스도교와 계몽주의가 정착한 다원적이요, 중층적이요, 포괄적이라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변화는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가 보여준 지성적 고민의 단면으로 이해된다. 거기에 평민사상과 행동주의 생활 철학이 마지막 숨질 때까지 백범을 지켰다.— 백범 기념관 설명문 '백범 사상의 뿌리'(조동걸)
▲ 김구보다 1살 많은 이승만과 함께 찍은 사진. | ▲ 국내정진군 OSS소속 도노번 소장 옆에 서도 꿀리지 않는 큰 체격을 자랑한다. | ▲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왼쪽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
김구는 민왕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 상인을 군인으로 오인하여 살해하였고 복역중 탈출하였다….(중략) 3.1운동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28년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이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테러 활동을 시작하였다…(후략)—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129쪽
그리하여 침체한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한편으로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편지하여 금전의 후원을 부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혈남아들을 물색하여 테러(암살, 파괴)운동을 계획하던 때『백범일지』상권을 기술하였다.—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下, 돌베게
(오사마 빈 라덴의)투쟁의 방식이 테러라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민족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이해할 부분이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김구 선생도 테러 부대원이었다.— 오만한 나라 미국, 김승국
테러 전술이라고 판단한 김구는 특수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장제스를 만나 한중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 윤희진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도왜실기(屠倭實記)》는 원래 김구 선생이 1932년에 주도한 일련의 대(對)일본 폭탄테러 활동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중국어로 쓴 책이다.— 도왜실기 - 범우문고 86, 출판사 서문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함께 테러 활동을 많이 한 남화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맹렬히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서중석
윤봉길은 6월 21일,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 폭탄 테러로 독립군들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더더욱 불안에 떨었습니다.— (어린이용) 헐레벌떡 어제 오늘 근대 이야기 딱 22장면, 한정영
김구는 임시정부 활동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에서 벌이는 테러의 방법을 써서라도 침체된 항일의 기세를 높이고자 했다.— 한국사 이야기 21 - 해방 그 날이 오면, 이이화
목숨을 걸었던 윤봉길의 폭탄 테러는 독립 운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초등학생이 가장 궁금해 하는 한국사 100장면, 오주영
독립운동 선상에서 테러는 무정부주의자나 급진과격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과거 테러활동의 용사들이 노선전환을 한 이후인 1930년대 초반 백범 김구는 임시정부의 외곽에 애국단을 조직하여 세상을 진동시킨 두 차례의 테러활동을 감행했다.— 대한민국 사(史)2, 한홍구
이봉창 의사의 개인적 테러는 단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이끄는 산하조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중딩고딩을 위한 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김슬옹
김구 선생이 해방 이전에 일제에 대해 테러를 쓴 것은 구국의 혈성이 담긴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테러를 정치활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면 그것은 문제가고 봅니다.—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사문제연구소
…우리는 이러한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중심인물을 영수로 하고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정성단결 되는데서만 우리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서도 얼마던지 그 예를 찾을 수 있으니 의대리(意大利)의 무소리니, 독일(獨逸)의 히틀러, 토이기(土耳基)의 게말파샤, 중국의 장개석, 아라사(俄羅斯)의 스타린 등이 이 각기(各其) 유일무이한 영수가 되여 그의 지도하에 당세는 발전되고 국가운명을 보장하고 있다. 강적을 상대로 하여 일장혈전(一場血戰)을 경(經)하고 우리의 자유를 획득할 중임을 자부하는 우리는 일개 강유력(强有力)한 당과 정명강간(精明强幹)한 영수의 영도가 없어서는 될 수 없다.— 엄항섭[51], <한민> 창간호(1936년 3월 1일자), '아독립운동(我獨立運動)의 동향(動向)
연도 | 선거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6.7% | 낙선(2위) | 간접선거 | ||
1948 | 31.6% | 낙선(2위) | 간접선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