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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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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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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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길


대한민국 제3대 공보처장
김활란[1]
金活蘭 | Kim Hwal-lan
출생
사망
1970년 2월 10일 (향년 70세)[3]
재임기간
제2대 공보처 차장 (이헌구와 공동 재임)
제3대 공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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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진연, 어머니 박도라
형제자매
3남 5녀 중 여덟째
학력
종교
약력
초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제2대 공보처 차장
제3대 공보처장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변호
3.1.1. 변호의 이유에 대한 한 가지 해석
3.2. 이화여대의 변호
4. 논쟁
4.1. 페미니즘과 군사주의4.2. 김활란과 위안부
5. 대중매체에서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대한민국교육인, 언론인. 이화학당 졸업생, 이화여자전문학교 7대 교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교장[4]이며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 총장[5], 학교법인 동구학원[6]의 설립자이다.[7] 교육받은 여성이 적었던 시대에 박사 학위까지 공부하고, 사람을 대할 때 진중하고 겸손한 자세를 보였던 김활란 박사는 당시 엄청난 명성을 가졌다. 현재도 많은 페미니스트에게 추앙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당대 여성들에게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다. 친일 활동을 한 것을 생각하면 과분하게도 당시 조선 최고의 지식인 여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내내 김활란의 명성은 높았고, 존경받았다.

아호는 '우월(又月)'이며 창씨개명한 이름은 아마기 가츠란(天城活蘭). '아마키'라고 잘못 읽는 인터넷 자료가 있지만 정확한 발음은 아마기(あまぎ)가 맞다. 아마도 현재 아마기라는 성씨가 겨우 99명뿐인 희귀한 성이라 착각했을 수 있다.

한국에서 적극 활동한 최초의 여서 박사는 맞지만, 한국인 여성 최초의 박사는 아니다. 김활란보다 2년 빠른 1929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공중보건학 박사를 받은 송복신 박사가 최초이다. 김활란이 박사 학위를 받았던 당시 신문들이 오보를 내기도 했고 귀국하여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한 김활란과 달리 송복신은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한 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편집]

1899년 2월 27일에 인천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우월(又月)로 기해년에 태어났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김기득(金己得)'이었다. 개신교 신앙이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았고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8] 학교에 입학하면서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활란'이라 했다. 그래서 이름이 '김활란'이 되었다.[9]

1907년 인천 영화학당에 입학했다가 1908년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 고등과로 옮겼으며 이때 유관순 열사가 후배였다고 한다. 1918년 3월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1922년 조선 감리회 감독이었던 웰치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 교육학, 웅변학 등을 공부하고 1925년 6월에 학사를 받았다. 1925년 10월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해 1926년 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고 1931년 10월 '조선의 부흥을 위한 농촌 계몽'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8년 덴마크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덴마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 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정말인'의 경제 부흥론"이라는 논문을 써서 1931년 6월에 발표했다.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찬송가 345장(개역 개정 기준, 통합찬송가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10]"가 3.1 운동 직후 그녀가 작사한 것이다. 1920년 6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 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이후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순종황제(융희)가 사망하자 조선총독부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체로 모여서 망곡(望哭)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화학당 학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활란은 미국인 선교사 출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과 부교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화학당의 전체 학생에게 깃광목으로 상복을 입히고 창덕궁 앞에서 망곡을 하게 하였는데 주모자로 잡혀서 종로경찰서감옥에 갇혔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 모임인 '망월 구락부'가 '직업 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 위원에 선정되었다. 1927년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11]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 준비 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 운동과 인권 운동에 힘쓴 동시에 오히려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사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 퇴치와 계몽 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이 되었고 1942년에 사위 조석봉 등과 함께 동구여학교를 세웠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독립운동가 수준의 대접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12]


1937년 애국금차회에서 친일 행각을 벌이는 김활란(1분 42초부터)
1936년 이후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는데 '아마기 가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 계몽 분야에서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 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했고 매일신보에 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 편 쓰는가 하면[13] 내선일체 찬양글도 많이 썼다. 1938년의 윤치호 일기를 보면 윤치호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석방을 위해 애쓰는 것에 대해서 김활란이 분노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만 봐도 김활란의 변절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김활란과 함께 친일 반민족 행위에 앞장섰던 여성계 지도자들이 박마리아[14], 모윤숙, 노천명 등이다.[15]
"동아 10억의 민족을 해방하고 광명으로 인도하려는 도의의 전쟁이다.
우리 총후의 반도 여성은 지금 이 도의 전쟁에 한 사람의 투사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광영(光榮)을 가졌다."
1942년 12월 -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중략)...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 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김활란,「매일신보」(1943.12.25)

8.15 광복 후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5년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복구하여 교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에는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가담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한국 YWCA를 다시 재건해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4월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전문학교에서 대학 기관으로 승격되며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한국 최초의 종합대학).[16] 1947년 3월 김구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세우자 강사를 맡았는데 건국실천원양성소는 우익 진영이 전국 각지의 애국 청년들을 건국 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 기관이다. 김활란 이외에도 이인, 조소앙, 김학규, 지청천, 안재홍, 신익희, 박순천, 이은상, 양주동, 정인보 등등 강사진이 대단히 화려했는데 매 기수마다 1개월 단기 교육 형태로 운영되던 건국실천원양성소는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자연스레 문을 닫았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홍보 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김도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0년 4월 중앙교육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으며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52년 1월부터 1954년까지 영자 신문 <코리아타임즈> 사장을 맡았는데 1953년 말에 경영권을 장기영 조선일보 사장에게 넘기고 1954년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립한 후 사장직도 넘겼다.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맡았고 1959년 1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1959년 한국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과 한국여학사협회 회장을 맡았고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정년 퇴직한 후 명예총장 겸 이화학당 이사장을 맡았으며 1961년 동구학원 이사장에서도 물러났다. 1961년 금란전도협회를 조직해 농촌 기독교 전도 활동을 전개했고 대한기독교교육자 협회 회장, 전국복음화운동 명예회장, 한국기독화운동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1961년 박정희에 의하여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목사 한경직 등과 더불어 도미하여 당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며 "한국의 군사 정변을 인정하며 군사 정권을 지원해달라"는 탄원을 하였다가 미국 정부에 의하여 자진 출국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강제 출국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963년 8월 교육 부문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의 공익 부문과 미국 감리회에서 주는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17] 1970년 2월 10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언은 “인간의 생명이란 불멸하여 육체가 없어지더라도 죽은 사람이 아니므로 장례식 대신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해 주는 환송 예배를 해주기 바란다.”는 이원론적이고 영혼 불멸적인 사상이 담긴 유언이었다.[18] 그리하여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로 음악회로 치루어졌다.

생전에 모윤숙이 주도하여 설립한 '낙랑클럽'의 총재를 맡았다. 문제는 낙랑클럽이 겉으로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민간 외교 단체지만 사실상 유사 매춘 그룹이라는 지적이 많다는 것. 김활란은 개신교인이자 여성 운동가의 핵심적 인물이고 더욱이 명문 여자대학교의 학장까지 지냈는데 그런 사람이 유사 매춘 그룹의 총재를 했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게다가 낙랑클럽의 여성들이 대부분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자기 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의 아름답기만 했던 영혼, 인생, 청춘을 미군성노리개로 넘겨주고 이승만 정권과 미군 상층부에게 을 받고서는 외교했다고 우기는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행각은 <월간중앙> 1995년 2월호에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3. 평가[편집]

김활란에 대한 평가는 매우 양분되어 있다. 여성 계몽 운동 및 인권 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및 친독재 인사라는 평가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관련지 월간 <신앙계>에선 2000년 20세기 한국의 개신교 위인 20인으로 김활란을 넣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더더욱 비판받을 만한 게 이 20인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고문을 받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를 넣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일본에 항거하다가 고문으로 순교하고 누구는 일본에게 알랑방귀끼면서 부귀영화를 누렸거늘 이 둘을 동일하게 보고 선정했으니, 다른 종파들에게까지 개신교에 먹칠을 했다느니 주기철 목사에 대한 모독이라느니 하고 욕먹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 직속기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순복음교회와 더불어 대한민국 양대 초대형 개신교 교회인 금란교회는 김활란이 1957년 조직한 금란 전도대에서 시작했으며, 금란이 의 이름 중 앞뒤의 2글자를 딴 교회이다. 김홍도 항목 참조. 1960년 4.19 혁명 당시 거리로 나가 투쟁하려던 이대생들을 가로막은 적이 있다.#

심지어 그녀가 설립에 참여한 동구학원도 전 이사장 조석봉과 이병도의 친일행적, 그리고 그간 쌓인 이사진의 교내 비리행위로 악명이 높다. 2012년에 교내 비리행위를 서울시교육청에 제보한 동구마케팅고등학교 교사가 이듬해 파면되었다. 그는 2015년에 복직되었지만 이듬해 또 파면되었다. 해당 사건 이후 2017년 3월부터 기존 이사진 대신 관선이사가 파견되었으나 11월 1심, 2018년 2심에서 각각 구 이사진이 승소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동구마케팅고 정상화 촉구 페이스북 참조.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시상하는 '김활란 여성 지도자상'도 있는데, 수상 대상자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 평등을 위해 헌신한 여성 지도자'다. 물론 김활란이 여성인권을 신장시키는 등 한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적극적이고 뚜렷한 친일 행적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서정주와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한다.[19]

사실 '페미니즘 = 진보, 좌파' 설의 명백한 반증 중 일례이기도 하다. 물론 주류 래디컬 페미니즘 단체인 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80년대 남성 운동권과 손 잡고 노동권, 독재타파 등을 위해 활동했고 2019년 현재까지도 민주당, 정의당 등과 계속 연결되기에 대중들이 흔히 오해할 수 있는 사항이지만, 사실 대한민국 최초의 페미니즘 단체는 바로 YWCA이고 이들과 다른 단체들이 연합해서 만든 단체가 현재의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이다.[20] 단지 이때 YWCA의 악명은 기독교계 보수주의 페미니즘[21]답게 만화, 음악 같은 서브컬쳐 억압등으로 유명했고 의외로 현대 주류 페미니즘의 문제점인 남성혐오나 젠더 권력 등의 래디컬 페미니즘적 요소는 없었기에 페미니즘 = 진보 좌파 설이 퍼진 듯 하다. 조선일보에서도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 2018년 3월 10일에 김동길 교수가 조선일보 'Why'코너에 김활란을 옹호하는 칼럼을 냈다.[22]

참고로 이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외국에도 역시 기독교계 페미니즘이나 보수주의 페미니즘이 존재하며, 이들은 낙태를 반대하거나 금욕적인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단 여성인권, 성소수자 인권 존중은 디폴트인 서유럽 등지에선 비주류이지만, 미국에선 엄연히 세력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바로 세라 페일린이 있다.

실제로 김활란은 이승만계 단체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담과 반탁 운동 전개, 1948년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위한 사절로 장면, 조병옥, 김우평, 모윤숙 등과 함께 유엔에 파견, 1950년 공보처 제3대 장관, 1959년 한국아시아반공연맹 부이사장 등등 완벽한 우파다. 그리고 김활란은 한국 페미니즘에서 제일 영향력이 높은 페미니즘 선구자고 RISS에서 검색해보면 지금도 페미니스트들은 김활란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즉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김활란을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밑의 논평과 같이 김활란의 친일반민족행위까지 옹호하는 경우이다.

3.1.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변호[편집]

김활란 본인은 래디컬 계열은 아니었지만 정작 옹호 세력들은 래디컬 페미니스트 세력(!)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튼 민족주의 때문에 단순하게 평가받거나 폄훼받는다는 주장이다.
본 연구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친일 청산’이 제기되는 방식과 시각을 여성주의 입장에서 문제 제기하고, 식민지 여성 지식인의 저항과 주체성을 새롭게 논하고자 하였다. 이는 ‘친일’ 청산론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가지는 다양한 정체성을 ‘민족’이라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담론 속으로 수렴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이러한 담론 지형 속에서 ‘민족’의 경험은 본질적인 것이 되고, ‘여성’들의 경험은 질문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은 ‘친일’에 연루된 여성들을 설명할 대안적 틀이 없으므로, 다시 ‘민족’의 눈으로 역사 속의 여성들을 바라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반복하여 민족에 부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에 본 연구는 ‘여성’의 눈으로 식민지 조선을 문제화하려는 시도로서, 김활란과 박인덕을 중심으로 두 여성의 삶을 가로지르는 기독교, 근대, 민족, 여성, 교육의 의미를 해체하고 맥락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김활란과 박인덕의 근대 교육 경험은 조선의 이교도 여성에게 기독교적 삶을 전파하고자 했던 서구의 여성 선교사,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던 기독교 민족주의 세력들이 개입하는 장이었다. 김활란과 박인덕의 정체성의 기반을 이루는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도덕과 규율이라는 근대적 통제의 내면화를 통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여성 주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한편, 자기 표현과 주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근대적 시민의 자질을 훈련시키는 근대 교육 기관이었다. 이는 또한 근본주의적 서구 헤게모니와 현실 개혁적 사회 복음주의 담론이 경합하면서 이원론적 신앙의 자세를 갖게 하는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식민주의의 억압과 더불어 조선 여성이 서구, 일본, 민족, 근대에 대해 복잡한 지형에 위치하게 한다.
둘째, 김활란과 박인덕에게 어머니의 삶은 기독교가 가부장적 조선 사회에서 여성을 해방시킨 전형이 되며, 어머니들은 다시 딸들에게 기독교를 통해 가부장적 사회를 뛰어넘는 힘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에게 기독교는 근대적 삶을 추진하는 강력한 힘으로 자리잡게 된다. 김활란과 박인덕은 자신의 삶에 개입한 갈등하는 사회적 담론들을 신앙 체험을 통해 연결하는데,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체험이 나타난 것이었다.
셋째, 식민지 여성 지식인의 위치는 가부장제, 식민주의, 서구 세력과 다층적으로 협상을 하면서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부장적 기독교 지식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여성’으로 의미화되었으며, 가부장적 여성성을 위반하지 않고, 계몽주의적 기획에 협력하는 범위에서만 지식인 공동체에서 성원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일본적인 주류 문화 속에서 미국으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은 이들은 주변적인 존재였고, 미국은 이들에게 저항의 대상임과 동시에 연대의 대상이었다. 가부장적 식민지적 주변성으로 인해 김활란과 박인덕의 위치는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 여성 공동체와 미국 기독교 단체의 지원과 남성 지식인들과의 연합과 제휴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와 공동체의 이익을 협상해 나갔다.
넷째, 김활란과 박인덕은 1930년대 조선 사회의 현실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립 가능성에 부심하였다. 김활란이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모색했다면, 박인덕은 여성의 경제적 주체를 주장하고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기독교 민족주의가 주력한 사회 운동이었던 농촌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박인덕은 농촌 여성에게 궁극적으로 직업 능력을 길러주기를 바랐고, 김활란은 농촌 전반을 문명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정신과 지식을 통해 개인을 근대적 주체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방법은 동일했으며, 여성 지식인으로서 이들은 농촌 여성들이 사회적 각성을 통해 전통적 가부장적 성별 관계를 극복하기를 도모했다.
다섯째, 김활란과 박인덕에게 일제 협력은 전향의 결과라기보다는 변화하는 사회 지형에 대한 다면적인 저항과 협상의 과정이었다. 이들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서구 여성과의 연대 사이에서 갈등하고, 가부장적 남성 지식인 사회로부터 주변화된 위치에 있었다. 재조선 일본 여성의 식민주의적 조선 개혁 운동과 제휴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주장을 개입시키고, 사회적 공간을 확보하면서, 여성 교육을 협상해 나갔다.

김활란과 박인덕을 중심으로 본 일제 시대 기독교 여성 지식인의 '친일적' 맥락 연구 #
본 연구는 민족주의를 기준으로 김활란의 일제 협력 행위를 평가해 왔던 기존 담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문제제기 중 하나이다. 본 연구에서는 그가 식민지 시기의 지식인 '여성'이었다는 점과 그에게 '성별화된 협력의 논리'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일제 협력 배경과 그 과정에서 구성한 내적 논리를 밝혔다.
1937년부터 시작된 김활란의 일제 협력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기독교계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지원 세력이 거의 없었던 그의 현실에서 기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내세웠던 일제의 전쟁 동원 논리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일제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 전쟁 말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이러한 희망은 실현불가능한 것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협력을 멈추지 못하였던 김활란은 자기모순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다.

일제 말기 김활란의 일제 협력 배경과 논리 #
한국이 일본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거의 7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협력은 한국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친일협력 문제를 청산하려 한 그간의 시도들은 친일협력 혐의자들로 하여금 반역적인 행위을 하게끔 한 환경과 그러한 선택을 낳은 의도와 같은 회색지대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친일협력자”의 반역 행위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신여성”이자 교육자인 김활란은 여성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그녀의 노력들은 후대에 친일협력자로써의 악명을 낳게 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친일협력자”를 반역자 또는 애국자의 양극단으로 범주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친일협력자의 생애를 보다 상세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대부분의 협력행위들이 보다 분명한 반역죄와 단순한 협력 사이의 회색지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활란의 생애는 민족주의 역사학으로는 친일협력 문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와 같은 회색지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자는 그녀의 삶을 통하여 “협력자”의 행위 주변에 있는 회색지대를 주목함으로써 친일협력 문제의 복합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이 친일협력 문제를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에 도전하면서, 보다 미묘한 이해를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여성 그리고 친일협력자로써의 김활란 : 일본 식민통치 하의 조선인 친일협력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위하여#

보면 다 래디컬 페미니즘 담론이거나 래디컬 페미니즘 세대(1990년대~2010년대 후반인 현재)에서 제기 된 담론들이다.[23][24] 김활란 본인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되나, 정작 일제의 침략전쟁에 참여했던 죄악은 정작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나 자신이 세운 YWCA이나 한국여성단체협의회등이 속한 보수주의 페미니즘[25]에서조차도 변호받지 못 하고 오히려 래디컬 페미니즘 담론에서 변호를 받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 시각으로 김활란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비판론과 페미니즘적 옹호론은 결국 각자의 입장에 적합한 일면적 측면만을 강조함(…) 페미니즘 입장에서 김활란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옹호론으로만 귀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 논쟁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지는 못하였다.

소현숙,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수행인문학 제 36집, 214

하지만 그들은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였다. 사실 저 수필이 나온 1990년대 중반엔 이미 래디컬 페미니즘이 이미 다수였기 때문에(= 자유주의,보수주의 페미니즘은 비주류로 전락했기에)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심지어 민족주의 계열에서도 이전에는 살인자인 권희로를 옹호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지만 2010년 전후에 들어서 일제강점기 한민족 중에도 민족반역자가 아니라도 가해자 일수도 있다는 점이 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고[26],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신사 참배나 독재정부와의 유착에 대하여 참회를 하는 등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앞의 둘을 탓하며 김활란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위의 논문들을 보면 정말로 이상한 점을 알 수 있는데 여성주의는 매우 다양하지만 민족주의는 어째 범위가 매우 좁다.(…), 즉 페미니즘은 다양하지만 민족주의 다양하지 않다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3.1.1. 변호의 이유에 대한 한 가지 해석[편집]

사실 언론의 메갈리아, 워마드 옹호 문서에서 보았듯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기반은 바로 신좌파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68운동이다.[27] 참고로 68운동에서 주로 주장되는 것이 뭐였냐면 바로 "민족주의, 기독교, 가부장제 등을 권위주의로 생각하고, 이를 부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해 나아가자"이였다. 언뜻 보면 이게 좋아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권위주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갑갑하게 생각하던 젊은 층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것 때문에 독일이 식민지에겐 사과를 안 했을지라도 유대인에게는 사과하고, 또한 나치 독일 협력자를 청산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왜냐하면 나치즘 자체가 독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일정부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걸 잘못 오용하면, "기독교, 민족주의"는 모두 권위주의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하여 반대하자가 되어버린다. 위의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이 민족주의나 기독교라는 단어를 써서, 김활란을 기독교, 민족주의에 억압당한 불쌍한 여자로 만드는 것도 사실 이런 것의 일원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3.2. 이화여대의 변호[편집]

이화여대도 역시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아직도 이런 인물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심지어 1999년엔(!) 학생들도 옹호했었다. 그것도 아주 터무니 없는 이유로 옹호한 것이다.
학교 측과 동창생들이 대체로 김활란상 제정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던 데 비해, 총학생회 측과 외부의 시민단체들이 이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김활란 상 제정 문제를 두고 개최되었던 토론에서 김활란 상 제정에 대한 찬성론과 반대론의 근거를 살펴보면(…) 먼저 찬성론을 살펴보면(…)김활란의 비판하는 논거는 민족주의적 감정인데, 민족주의는 가부장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 억압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 비판은 부당하다.(…) 김활란 상 제정을 반대하는 시각은 이화여대 또는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의 질시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고려대학교인촌 김성수 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유독 김활란 상에 대해서만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소현숙,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수행인문학 제 36집, 212
논쟁의 초점은 '김활란의 친일(협력)행위가 반민족적 행위였는가 아닌가'보다는 '김활란을 평가할 때, 여성 교육가·운동가로서의 그의 업적이 중요한가, 친일을 한 민족반역자로서의 그의 과오가 더 중요한가', '여성교육가·운동가로서 김활란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특히 여성으로서의 업적을 두둔하는 옹호론은 이른바 '탈민족주의' 이론을 근거로, 가부장제를 내재한 민족주의는 더이상 보편타당한 평가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논쟁은 표면적으로 '민족 대 여성'이라는 대결구도로 진행되었다.

소현숙,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수행인문학 제 36집, 213
'김활란상' 제정문제에 관한 토론회에서, 한 여학생은 "김활란 박사가 만약 친일을 하지 않고 은둔했다면 우리나라에 어떤 이익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친일한 것이 용감한 선택이라 생각한다"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은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에 협력하여 '학교를 지킴으로써' '여성교육을 살려냈고', 결국 '오늘날 여성들의 지위 향상에 이바지했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탈민족주의'적 시각이 보다 일반화된 요즘, 여성선각자의 협력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나 '반성을 필요로 하는 일'로부터 벗어나, 이제 '용감한 선택'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일제에 대한 협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소현숙,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수행인문학 제 36집, 216

요약을 하자면 김활란 비판 = 가부장적, 여성에 대한 억압적 속성,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의 백래시였다. 즉 김활란의 과오를 거론하는 건 남성이 만든 가부장제를 옹호한거나 마찬가지로 생각한 것이다.[28]

이대 총학생회는 반대하였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다. 반면에 역시 친일파인 송금선과 김활란이 세운 것으로 오해되어 욕 먹은 덕성여대는 뿌리 찾기에 성공했고, 결국 설립자가 독립운동가 차미리사인 것도 밝혀냈기에 여러모로 덕성여대와 비교되었다. 덕분에 덕성여대는 친일논란에서 벗어나고 독립운동가가 만든 학교라는 자부심을 얻게 되었다[29]

반면에 이화여대는 2000년대 중반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 있는 김활란의 동상을 철거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심지어# 노래도 만들었을 정도로 반발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위와 비슷한 이유로 묵살하고 있고, 이는 2010년대인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반발을 해서 김활란 동상을 철거하고 학교에서도 김활란의 과오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는 이상 이런 오명은 벗기 힘들 것이다.

그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2008년에 이명박의 영부인이자 동문 김윤옥(보건관리학과 졸업)의 '자랑스러운 이화인 상' 수상에 반대[30]한 바 있고, 2015년에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학교 방문에 반대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폭력적인 진압이 잇따랐지만, 많은 학생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며 맞서 시위했다.) 적어도 이런 문제에서 까이는 일이 덜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4. 논쟁[편집]

4.1. 페미니즘과 군사주의[편집]

페미위키는 꼬리자르기를 위해 군사주의가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날조를 서술했다.

2000년대 부터 진보언론계나 여성주의, 반전주의등 신좌파 계열 단체들에선 군사주의는 남성성이 만든 지옥이기에 남성성을 뒤집자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은 이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작을 하고 있다. #####

참고로 이는 경향신문에서 여성 징병제에 대한 반론을 했을 때도 쓰인 서술이다.경향신문 기사 이 기사의 논지는 전형적인 개소리다. 군대가 전통적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라고 "군대에서 여군에게 요구하는 군인정신은 성별과 무관하다는 틀린 전제를 심어주고 있다"는 논지인데, "그 전제는 틀렸다"는 기자의 전제 자체가 아무 근거도 없이, 여군 경험도 없는 제3자가 여군보다 군인이 뭔지 더 잘안다는 헛소리로부터 나온다. 군인정신이 남성성에 국한된 거라 여군이 되면 여성성을 잃어야한다는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이 논리라면 현재 대부분 직종도 과거에 99.99%는 남자들의 직업이었으니 의사, 판사, 과학자, 교사들의 직업정신 또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남성성에 굴복하는 것이다라는 개소리도 성립된다.

페미위키에서도 이런 서술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로 2019년 1월 30일페미위키의 서술만 봐도 김활란이 페미니즘에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었다.
사실 김활란은 조선의 농촌 계몽과 여성인권 개선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페미니즘에 반대되는 군사주의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징병에 대한 독려와 정신대 모집을 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같이 있다.

또한 심지어 페미니즘은 군사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도 나온 적 있다.#

하지만 실제 페미니즘을 파고들면 위에 나오는 진보언론계나 여성인권단체 등 신좌파 계열 단체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군사주의에 대하여 반대하는 쪽은 아래에 나온대로 급진주의 문화 페미니스트[31]등 일부 분파만 그렇지, 다른 쪽[32]에서는 오히려 여성도 남성처럼 전쟁 등 군사주의에 합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급진주의-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들이 했던 것처럼, 급진주의-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여자들이 남성적 성질이나 행태들과 여성적 성질이나 행태들을 모두 다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기는 커녕 여자들은 엄격하게 여성/여성적인 것이 더 좋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해서는 안 딘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와는 반대로 여자들 한층 더 여자다워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문화적으로 여자들과 연합된 가치들이나 덕목들("상호의존, 공동체, 연결, 나눔, 감성, 신체, 신용, 위계질서의 결여, 자연, 보편내재, 과정, 즐거움, 평화, 생명")을 강조하고 문화적으로 남자들과 연합된 가치들과 덕목들("독립, 자율, 지성, 의지, 신중함, 위계질서, 지배, 문화, 초월, 산물, 고행, 전쟁, 죽음")의 중요성을 경감시켜야한다.

로즈 마리 통, 『21세기 페미니즘 사상』, 한신문화사 2010, 70-71

실제로 자유의지론 래디컬 페미니즘의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j)같은 이론가들은 '남성=전쟁, 여성=평화'같은 구분을 거부한다. 에렌하이히는 고대 서양의 많은 여신들이 사냥의 여신이기도 하다는 점에 근거해서 여성이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고, 그런 신들은 희랍의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자 파괴적 속성을 잃어버리고 '상냥하고 자애로운 신으로 변했다고 주장하고 또한 "어느 시점에 이르면 여성이 사용하지 못할 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전쟁의 '탈-젠더화'를 주장했었다.[33]
『전쟁의 탈-젠더화는 "남성성"이 바람직한 속성이 되기를 그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소유할 수 있는 특질임을 의미할 뿐이다. 폄하하는 뉘앙스를 지닌 "겁쟁이"(wimp)라는 유행어는 이미 남성들과 여성들에게도 손쉽게 사용될 수 있는데, 이는 남성과 여성에게 적절한 입장이라는 것이 강인하고 언제든 전투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34]

물론 위에서 말한대로 여성을 본질적으로 평화적이라고 규정하는 학자도 존재하지만[35] 그렇지 않은 이론가들도 적잖게 있다. 즉 결론을 서술하자면 진보언론과 신좌파 단체들의 주장과 달리 모든 페미니즘은 군사주의를 반대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4.2. 김활란과 위안부[편집]

실제로 김활란을 자신들의 학생들을 위안부로 만든 원흉으로 주장해서 페미니즘 세력과 꼬리자르려는 시도가 있다.

일단 2019년 1월 30일 기준 페미위키 문서를 보면
또한 김활란은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넘긴 내력이 있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백명 처녀들로 '총후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었다. 나이가 많아봤자 20대 후반을 넘지 못했으며, 모두 김활란의 제자이자 이화의 여학생이었다.

애국자녀단은 김활란 휘하의(김활란이 최고 직급인 단장이었다.) 친일 단체로, 실상은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이화 여학생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일제의 말을 따르는 애국자녀단 단장 김활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 나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김활란은 죽을 때까지 일본군의 위안부에 팔려나간 그녀의 제자에게 사과는 커녕 일말의 안타까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김활란은 위안부를 양성했다는 주장은 이를 제외하고도 많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실제로 이런 내용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4 (2009)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다. 페미위키 문서에선 강정숙의 글을 인용했는데 정작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의 친일파 99인-2 (1993)에 수록된 강정숙의 글을 보면 김활란의 제자들이 '위안부'에 끌려갔다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강정숙의 글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인용했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에서도 확인되지 않는 내용이다.
한국사회에서 여자근로정신대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위안부’문제가 사 회적으로 이슈화되는 것과 맞물린다. ‘정신대(挺身隊)’란 용어는 ‘데이신타이’(挺身隊)로 잡아갔다’는 일종의 ‘처녀공출’로서 사회적 기억이 환기되면서, ‘위안부’와 동일한 것으 로 이해되기도 하다. 즉 당시에는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이해가 부족하고, 양자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조사책임자:김 미 현 조사3과 ), 2008년 11월 4일, 2
이케다의 증언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일본 총리의 방한(1992년 1월 16일~19일)을 앞두고 국내 언론에 활발히 보도되었다. 문제는 ‘위안부’와 ‘정신대’가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것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이케다는 “근로정신대로 갔던 제자들이 종군위안부 던 것처럼 비쳐져 걱정하고 있다”며 여자근로정신대는 군수공장으로 동원하는 것이 라고 증언하다. 그러나 한국의 미디어들은 ‘정신대=위안부’ 동원으로 보도하고, 학적부에 기재된 여자근로정신대 동원사실도 위안부 동원으로 인용한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조사책임자:김 미 현 조사3과 ), 2008년 11월 4일, 2-3
일련의 선행연구를 통해, 혼동되었던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가 성격이 다른 것임이 파악되기 시작하다. 여자근로정신대는 일제가 전쟁수 행을 위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여성들을 대(隊)단위로 구성하여 일본 군수공장에 동원한 것으로서 성동원을 위한 ‘위안부’ 동원과는 내용이 다른 것이다.(기존 위안부 피해자에는 여자근로정신로 동원되었다가 위안부로 동원되었다고 보고된 사례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위원회 신고건 에서 새로이 밝진 피해사례는 없었다. 조선 여자근로정신로 동원되었다가 안부로 동원된 사례에 해서는 앞으로 구체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재판을 통해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가시화되고 있고, 학술연구에서도 여자근로 정신대 단위의 동원방식이 구별되고 있으나, 아직도 미디어에서는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 동원을 혼동하여 보도하기도 하는 등 양자의 개념 혼동이 완전히 불식되지 않은 상태이다. >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조사책임자:김 미 현 조사3과 ), 2008년 11월 4일, 7
위원회 남성 신고건 중 후쿠오카현(福岡縣) 일본제철(日本製鐵) 야하타(八幡) 제련소로 동원되었다고 파악된 신고건 은 2008년 4월 현재 206건이다. 조선인 남성의 경우 연돌 제작, 특수강 등에 배 치되었다. 야하타제련소로 동원된 남성 생존자에게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대해 질문해보았으나, 의미있는 증언은 없었다.(…) 질문에 대해 일본인 여성들을 봤다고 대답하는 경우, 여자근로정신대를 ‘위안부’와 혼동하여 외출할 자유도 없었고 자신이 있던 곳엔 그런 것은 없었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 (조사책임자:김 미 현 조사3과 ), 2008년 11월 4일, 2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에선 위안부 문제와 정신대가 다른 문제라고 분명히 서술하며 사회적으로 혼동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심지어 강제징용 피해자들조차 위안부와 정신대 개념을 혼동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료를 봐도 그런 건 없다.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의 친일파 99인-2 (1993) 275-283 페이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709-71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4-4 (2009) 737~789 (라.판단 은 788-789)

http://m.dcinside.com/board/war/552307?headid=&recommend=&s_type=all&serval=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이 전문적인 서적들과 보고서에 의하면 김활란과 위안부를 연결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예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는 1차사료 위주로 나온거러 페이지수가 많은데 위안부 관련 내용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넷우익들과 새역모 세력의 역사왜곡을 막으려면 한국 측도 자료검증과 사실관계을 제대로 따져봐야한다. 오히려 잘못된 자료와 사실관계를 제시하면 역사왜곡에 오히려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보여준 것이 요시다 세이지 사건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서의 '운영과 관리 및 생활실태'에 의하면 일반적인 정설은 취업사기로 사기를 쳐서 피해자들을 인신매매했다는 것이다.

한때 정신대=위안부라는 공식과 김활란이 유사 매춘단체인 낙랑클럽에 활동한 과거로 생긴 오해로 보인다.

물론 성착취만 없었지 정신대 근무조건도 열악했던 것은 사실이며 김활란의 정신대 독려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별개로 김활란에게 동조했던 인물들이 완전 피해자인지도 따져보아야 문제다. 김활란에게 동조해서 협력했다면 그 인물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의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김활란이 자기 지지자들을 속인 게 아니라, 김활란과 지지자 양쪽 다 일제 침략전쟁에 참여한 가해자일 수 있다.[36]

결론은 위안부 문제는 거짓일지라도 김활란의 활동은 비열한 악당에 걸맞는 위선자인 건 분명하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김소원이 연기했다.

6. 관련 문서[편집]




[1]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으로 쓴 일본식 이름은 아마기 가츠란(天城活蘭(あまぎ かつらん).)[2] 음력 1월 18일[3] 71세 생일을 2주 앞두고 사망했다.[4]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메리 스크랜튼 부인)부터 6대 교장까지는 미국인 여성 선교사들이 맡았는데 이들도 학칙에 따라 모두 독신이었다.[5] 정확히 말하면 이화여자전문학교가 종합대학교인 이화여자대학교로 개편할 때의 총장.[6] 동구여자중학교동구마케팅고등학교를 운영중이다.[7] 김활란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자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냥 교장 겸 총장이었고 설립자는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다. 실제 김활란이 세운 사학 재단은 동구학원이다.[8] 이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사실 '헬렌'이라는 세례명은 김기득의 어머니가 전도받은 선교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례를 주는 선교사가 잘못 알아듣고 김기득에게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주고 김기득의 어머니에게는 '또라'라는 세례명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또라'는 아마도 '테오도라'(Theodora)의 약칭으로 보인다. 역시 현대식 외래어 표기법대로라면 '도라'가 되어야 하는데 아마 김활란처럼 이름으로 개명하면서 한자식으로 변환하여 어머니 이름이 '도라'로 나온 것으로 보인다.[9] 현재 개신교성공회 외에는 세례명을 쓰지 않지만 당시에는 감리회에서도 현지화된 세례명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에는 교파와 무관하게 필명이나 호처럼 세례명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10] 원제 : 풍랑서 구하심
심지어 이 찬송가는 '조선 백성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일제에 의해 금지된 곡이었다.
[11] 박헌영의 부인이자 조선공산당에 참여했던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12] 대한민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였는데다 조선시대 중반 이후에는 소외된 여성에 대한 교육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상 철거 시위도 안 벌어졌을 것이다.[13]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이 졸업한 이화여자전문학교(졸업 당시에는 이화학당 대학부) 학생들에게도 정신대 참여를 독려한 것이다.[14] 자유당 부통령 이기붕의 아내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랑 혼동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15] 이와 반대로 친구였던 나혜석은 이걸 거부했다.[16]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이던 김활란은 대학으로 승격된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아 1961년까지 재임했다.[17] 독신주의가 마치 래디컬 페미니즘의 전유물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자유주의 페미니즘부터 이미 독신주의 성향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들과의 대등한 경쟁을 위해서는 독신 생활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재생산 부담을 개인들에게 전가하는데 특히 선천적으로 모성을 타고난 여성들에게 그 부담을 짊어지운다. 즉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독신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경쟁에서 너프를 먹지 않기 위해서이다. 김활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지만 세속주의 성향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혼인 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로운 성관계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경우든 남성혐오적 동기는 없다는게 중요한 차이다.[18] 기독교에서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통과 의례가 아닌 극복의 대상이고 플라톤적 이원론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교리를 잘 모르고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신자가 적지 않다.[19] 심지어 카미카제를 미화하며 대놓고 내선일체를 강요했다. 참고로 서정주는 이후에도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20] 보수적인 성향인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1959년에 결성되었고, 진보적인 성향인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82년에 결성되었다.[21] 사실 김활란은 리버럴 페미니즘에 가까웠지만, 광복 후 이승만-박정희 정부를 거치면서 근간인 개신교가 우경화되었고, 결과적으로 YWCA한국여성단체협의회도 보수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된다.[22] 물론 페미니즘 자체를 옹호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문제는 분리주의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경우이다.[23]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고 여자들 모두가 "자매"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성생활과 출산 행위 그리고 여자들의 자아정체성, 자존심, 자부심을 모두 다 지배하는 것이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억압행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라고 주장했다.』 로즈 마리 통, 『21세기 페미니즘 사상』, 한신문화사 2010, 68;[24] 『급진적 여성주의 이론은 여성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경험으로 여성의 몸을 통한 여성성에 대한 것이고 과거 남성 중심적 시각에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것을 찬양하고 여성적인 힘의 원천으로 의식을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일상의 여성학 - 여성의 눈으로 세상읽기, 박영사, 2017, 22쪽[25] 실제로 소현숙이 쓴 "교육계 여성들의 '일제 협력에 대한 기억과 망각 담론"를 보면 한국여협 산하 단체들도 여협 탄생 40주년을 기념해서 김활란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김활란 여성지도자상에 반대하였다고 나왔다. 그런데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은 그러지도 않고, 김활란의 친일 매국 행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26] 대표적인 연구가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이다. 본 문서를 보면 관련 논문이 상당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27] 물론 68운동 자체가 래디컬 페미니즘으로 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68운동이 퇴보하고 변질된 결과물이 래디컬 페미니즘이다.[28] 참고로 이는 워마드 계열이 박근혜를 옹호하는 이유이기도 한다. 즉 박근혜를 까는 것 = 가부장제 옹호, 백래시로 여긴 것이다.[29] 차미리사는 페미니스트이며 (오늘날 덕성여중, 덕성여고,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세워 조선의 여성들에게 무상으로 교육해주고, 독립운동에 힘썼다.[30] 2008년 6월 5일자 한겨레신문 1면에 광고까지 냈다!![31] 컬처럴 페미니즘, 문화주의 급진적 페미니즘이라고도 한다.[32] 대표적으로 아래에서 말한 자유의지론 급진적 페미니즘이 있다.[33] 권석우, 여성은 평화적인가?, 인문언어 17-1, 2015, 109-110[34] 권석우, 여성은 평화적인가?, 인문언어 17-1, 2015, 110에서 재인용[35] 권석우, 여성은 평화적인가?, 인문언어 17-1, 2015[36] 이와 유사하게 포로감시원들의 가해자인 면에 주목한 연구가 있다. 허병식, 포로의 귀환과 식민지 조선청년의 아이덴티티 수행, 동악어문학회 63, 2014. 임지현도 유사하게 "전범으로 몰려 처벌받은 조선인 군무원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기억하려는 한국 사회 공식 기억의 논리는 자기방어적이다" "개별 가해자가 민족의 이름으로 희생자 집단에 숨어 희생자로 둔갑하는 기억의 마술은 위험한 속임수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 혹은 피점령 국가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개인의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국적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기억의 코드는 위험천만하다."면서 포로감시원들의 가해자인 면에 주목한 책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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