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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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파일:나폴레옹1세.jpg
대관식 복장을 걸친 나폴레옹 1세, 프랑수아 제라르, 1805년
출생
사망
1821년 5월 5일 (향년 51년 263일)
통령 재임
재위
1차
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11일
(9년 328일)
1805년 3월 17일 ~ 1814년 4월 11일
(9년 25일)
2차
1815년 3월 20일 ~ 1815년 6월 22일
(94일)
1804년 12월 2일
1805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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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1세 (Napoleon I)
본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2]
(Napoleone di Buonaparte)
신체
168cm, O형(Rh-)[3]
장례식
1841년 12월
국적
배우자
학력
파리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irma_Napole%C3%B3n_Bonaparte.svg.png

1. 개요2. 상세3. 이름과 언어4. 생애5. 평가6. 신체적 특징
6.1. 용모6.2. 비만 등 각종 질병6.3. 결코 작지 않았던 키
7. 사생활8. 가족들과의 관계
8.1. 나폴레옹의 친가8.2. 나폴레옹의 연인 및 그 후손들
9. 나폴레옹의 26인 원수10. 기타
10.1.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10.2. 나폴레옹의 평상시 일상10.3. 나폴레옹의 식사 습관10.4. 나폴레옹의 미식10.5. 나폴레옹의 정리10.6. 벳시 발콤
11. 대중매체12. 어록1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정신을 - 나는 보았다.

나폴레옹의 생애는 1천 년 내 가장 비범한 생애였다. 나폴레옹은 분명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로서 생애만큼이나 자질도 비범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대단했고, 우리 세대에 살았던, 아니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간 중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정치가, 군인이다.

프랑스 왕국에서 변두리였던 코르시카 출신의 귀족으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 혁명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하였다. 이후 스스로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지만,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 혁명을 통해 수립된 자유주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시켰다. 이 때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통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어 당대 세계적 강대국들이 몰려 있던 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 제1제국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과도한 패권주의적 외교와,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를 반대한 유럽의 강대국들의 견제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2. 상세[편집]

그는 카를 3세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며 그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했기에 그의 몰락 이후 유럽의 외교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인물이 다시 유럽을 집어삼키는 걸 막는가를 기준으로 진행될 정도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선, 나폴레옹이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그 스스로가 갖춘 사상과 철학인 법치주의, 능력주의, 시민평등사상을 온 유럽에 퍼트렸고, 나폴레옹 법전 등 여러 업적을 남겨 세계사에 한 획을 그었다. 기본적으로 근대 세계는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끝난 정치 혁명 그리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야기한 경제구조의 대변혁이 어우러져 완성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로서 프랑스 육군의 모든 부분을 전반적으로 선진화시켜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역이었다. 이후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군제를 개편한 만큼 사실상 전쟁사의 근대를 완성시킨 인물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개인으로서 세계사의 변혁을 이끌어낸 인물이며 유럽이 18세기 시민혁명시대에서 19세기 제국주의적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유명세 덕에, 설령 프랑스 출신 인물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다.

3. 이름과 언어[편집]

프랑스어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나파르트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고, 나폴레옹이 이름이다.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전체 이름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다만 서적 등에서는 보나파르트로 적는다. 아마도 이름 + 성 구조의 서양식 작명을 몰라서 그랬거나 황제가 되면서 이름인 나폴레옹으로 불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유럽 군주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왕명이 되고 성은 왕조의 명칭이 되기 때문이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당대에 보나파르트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4] '나폴레오네'로 쓰든 프랑스어인 나폴레옹으로 쓰든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름을 코르시카 사투리로 발음하면 ‘라 파이유 오 네(La paille au nez. 코에 박힌 지푸라기)'로 들려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은 나름 멋지지만, 성 부오나파르테(보나파르트)는 게르만족 롬바르드족의 성씨 보니파르트가 어원으로써 영어로 하면 Good Part(좋은 부분)라는 뜻이다.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5] 이라고 표기한다.

프랑스 황제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옹 1세. 프랑스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나폴레옹 ~세' 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대대로 쓰고 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오네 왕인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여러 이탈리아계 국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나폴레오네였기 때문에, '나폴레오네 2세' 라는 이름의 군주가 배출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에서의 칭호가 '나폴레오네 1세' 가 되는 일은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부활하지 않는 한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 그는 이탈리아 가문 출신으로 그의 모어코르시카어였고 이탈리아어프랑스어는 자라면서 학교에서 배웠다. 프랑스 변방에 위치한 코르시카는 나폴레옹이 태어날 즈음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프랑스와 관계없는 이탈리아령(제노바 공화국)이였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프랑스어 철자법에 서툴렀다.

4.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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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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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신체적 특징[편집]

6.1. 용모[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avid_-_Napoleon_crossing_the_Alps_-_Malmaison1.jpg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franchissant le Grand-Saint-Bernard),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6] 1801년

나폴레옹과 함께 그야말로 전설이 된 그림이다. 타 버전이 몇 가지 더 존재하며 구도는 같지만 머리가 흰 백마와 망토가 붉은 색인 버전도 매우 유명하다. 왼쪽 아래의 바위들에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와 한니발카롤루스 대제가 새겨진 것은 덤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가 한니발카롤루스 대제보다 더 위에 있어 나폴레옹이 이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선전하는 것도 덤이다. 흔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 그림에는 멋있어 보이라고 백마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지구력이 뛰어난 노새사용했다고 한다.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성에 있는 원본 그림은 그야말로 신고전주의의 극한이라 칭할 만하며, 그야말로 크기와 포스 모든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들은 선전을 위해 미남 대역을 고용해 그려진 것들이 대다수라고도 하는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의 외모는 그린 화가에 관계없이 매우 일관된 편[7]이기 때문에 대역들은 얼굴보다는 포즈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드가 그린 얼굴이 본인과 닮은 편이라고 한다.

사실 나폴레옹은 수려한 미남이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어느 정도 보정이 들어갔다 치더라도, 정권을 잡기 이전의 초상화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사망 후에 남긴 데스 마스크를 봐도 얼굴은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잘생긴 편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6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참고로 우측의 초상화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고 막 프랑스로 돌아온 러시아 원정 후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고 극한의 상황에 몰린 퇴위 직전의 나폴레옹을 상상해 그린 상상화다. 당장 러시아에서 손실할 병력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야 할 판국에 태평하게 초상화를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돌게 된 이유는 영국의 풍자만화 때문인데, 프랑스 제국과 적대적이던 영국이 적대국가의 최종보스 나폴레옹을 당연히 잘생기게 그릴 리가 없었으니,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대개 키 작고 못생긴 난쟁이로 널리 퍼진 것이다. 사실은 나폴레옹에 대해 결코 좋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키는 좀 작았어도[8] 얼굴은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봐도 그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다.

파일:1280px-Jacques-Louis_David_-_The_Emperor_Napoleon_in_His_Study_at_the_Tuileries_-_Google_Art_Project.jpg

프랑스 제국 근위대 기병대 대령 복장을 하고 있는 나폴레옹. 역시 다비드의 작품이다. 가슴팍에 저렇게 손을 넣는 포즈는 '숨겨진 손'이라 하여 서양에서 유행하던 상류층, 근엄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9] 하지만 나폴레옹의 위장 건강이 나빴다는 게 널리 알려지면서 이 포즈는 '배가 아파 문지르는 포즈'로 잘못 알려졌다.

6.2. 비만 등 각종 질병[편집]

나폴레옹은 30대 중반까지의 초상화를 보면 '유황을 끼얹은 것 같다'라고까지 얘기될 만큼 창백한 안색에 대단히 여윈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서 브리엔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살이 붙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즉위 이후부터는 급격히 살집이 붙게 되고, 나중 가서는 심각한 비만이 되었는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말년을 묘사한 초상화를 보면 그야말로 펭귄의 모습이다. 사후 부검할 때 복부에서 엄청난 지방을 걷어냈다고 한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위장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는 평생 나폴레옹을 괴롭혔다. 위장이 좋지 않은데다 대식가라서 식사량이 많았으며, 식사를 지나칠정도로 빨리하며[10] 승마 등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고 함에도, 갑자기 비만체가 된 걸 보면 잘못된 식습관과 유전적인 요인이 같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한편, 그에겐 피부가 가려운 피부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간이 있으면 장시간의 목욕을 즐기고 목욕탕 안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목욕시에 시종 루스탐에게 피부를 세게 벅벅 밀게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원정 때 부인인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기침과 편두통, 발열이나 배뇨 곤란, 치질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중에 치질은 거머리 치료법으로 호전된 듯했다가 다시금 재발해서 결국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아편을 처방받은 날이 하필이면 워털루 전투 때였는데 당연히 전투지휘에 큰 지장을 주었다.

6.3. 결코 작지 않았던 키[편집]

작지만 사나운 인물을 뜻하는 나폴레옹 콤플렉스의 유래가 됐을 정도로 키가 작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설에서는 키가 155㎝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사후 부검 당시 측정한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8㎝였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164㎝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오히려 큰 편인 것이다.

나폴레옹이 단신으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일단 실제로 그가 속한 집단 중에서는 좀 작은 편이 맞긴 하다. 저 평균키 164㎝라는 수치는 당시 프랑스 남부에서 징집된 병사들의 평균키인데, 일주일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프랑스 하층민들의 키가 포함됨을 고려해야 한다. 반면 잘 먹고 잘 산 당시 유럽 귀족들의 평균키는 170㎝ 중반~180㎝ 까지도 달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하는 고참 근위대는 원래 178㎝ 이상으로 키가 큰 인원들을 차출해서 만든 부대인 데다가, 특유의 셰코 모자 때문에 그들과 같이 있으면 나폴레옹의 키가 더욱 작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성장기 때에도 빈곤하게 지낸 탓에 잘 먹고 발육상태가 좋던 귀족들과 같이 있다 보면 키가 좀 작다는 인식도 있었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삼각모를 넓게 쓰는 버릇도 있었고, 몸매가 약간 펑퍼짐한 면도 있는 데다 숏다리였던 것도 이러한 '작아 보이는' 인상에 한몫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인 스스로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그 외에 키가 150㎝ 로 하향 당한 원인에 대한 다른 설도 있는데, 그 당시 프랑스에서 썼던 피에(pied)라는 단위를 잘못 환산해서라고 보기도 한다. 원래 피에(pied)는 '발'이라는 뜻으로 정확히 영국의 피트(feet)에 해당되며, 보조 단위인 푸스(pouce)도 인치(inch)처럼 1/12 또는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도량형이 다 그러했듯이 18세기 말까지는 나라(또는 지방)마다 시기마다 그 크기가 조금씩 다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대략 17세기 말~18세기 말 기준으로 1피에가 약 32.5㎝, 1푸스(=1/12피에)가 약 2.71㎝였다.[11] 당시 나폴레옹의 키는 통상 '5피에 2푸스'라고 이야기되었으니, 이것을 18세기 말 단위를 적용해 환산하면 약 168㎝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드파운드법을 쓰던 영국에서는 1피트가 약 30.5㎝, 1인치가 약 2.54㎝로 약간 더 작았음에도 그대로 '5피트 2인치'라고 옮겨버렸다. 도량형의 차이를 감안하면 5피트 6인치 정도라고 해야 맞는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나폴레옹이 실제보다 10㎝나 작은 158㎝의 단신이라는 인식이 박혀버리게 된다.

단순한 도량형 환산 과정의 착각이었던 것으로 볼수도 있으나 적국의 지도자를 폄하하기 위해 당시 언론들이 일부러 그렇게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수법은 지금도 쓰인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공포와 동시에 위대한 존재이나, 한국에서는 그냥 뚱땡이일 뿐이다. 두 국가의 언론이 그렇게 만든다. 만만한 존재로 만들어야 싸울 때 군 사기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낭설엔 그의 조카[12]나폴레옹 3세가 진짜로 키가 작았던 게 한몫을 보탰다. 키가 불과 160cm 였다고 한다.

매체에서 쓰이는 우락부락한 거구들 사이에 있는 체구 왜소하고 제일 약해 보이는 인물이 알고보니 최고 지도자라는 클리셰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단신인 사람이 거구의 부하들을 부리고 다니는 모습은 반대의 경우와 다른, "저 사람은 얼마나 높으신 분이기에 저런 덩치들이 찍소리도 못 하고 복종하는가?" 하는 위엄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다.

7. 사생활[편집]

여러 가지 비범한 모습과 신화적인 전설들이 내려오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인간적으로서는 성격의 단점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면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으며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경향이 많았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과 실패는 무조건 덮으며 감추는데 급급했으면서, 정작 부하들이 실패할 경우엔 자신과는 관계없는 100% 부하의 잘못으로 매도해서 질책하고 몰락케 하는 모습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보잘것없는 시골 귀족 가문에 대한 콤플렉스랑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전쟁에 너무 많이 참여한 관계로 주변에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었다. 여성 문제에서는 조제핀과의 사랑으로 유명하지만, 서로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결국 이혼해버리고 오스트리아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조제핀을 거의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조제핀은 상황상 마지못해 넘어간 것에 가깝지만,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마음에 넘어가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폴레옹 쪽에서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죽는 순간 마지막에 말한 단어가 조제핀의 이름이었으니 진정한 사랑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세속의 권력과 영화에 찌들기 이전에는 상당히 순수한 면이 있고, 인간성도 털털하고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어린 시절부터 일진적인 면모가 있고 유럽 귀족들이 말했던 것처럼 야만적인 해적 귀족스러운 모습들도 있어서 당시에도 나폴레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실제로도 나폴레옹 본인이 미화하도록 요청한 것들을 제외하면 주변인들의 기록에서 나폴레옹이 주변인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는 기록들이 상당히 많아서 생각보다 평이 좋지 않다. 베르티에 원수가 나폴레옹의 무모한 전쟁에 반대하며 직언을 올렸을때 그의 머리를 잡아다가 벽에 찍어버리거나 말단 병사에게 주먹질을 해서 코피를 터뜨리기도 했으며 하인들에게도 폭력을 쓰기도 했고 말메종 궁전에서 번식기에 접어든 동물을 그냥 죽이고 싶어서 때려 죽이고는 말리는 조세핀에게조차 모욕을 주기도 했다. 여성들에게는 폭력은 덜 휘둘렀으나 역시나 무례하게 대하며 물건처럼 여기는 성향이 있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최후의 충신이었던 베르트랑의 회고록에서도 자신의 재미를 위해 그의 부인을 요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베르트랑 본인 앞에서도 그의 부인을 매춘부라고 비웃어 베르트랑을 모욕하기까지 한다. 앙또마르키 같은 주변인들에게도 비슷한 조롱을 하고 다녔다. 영국인들에게는 '차갑고 악마같은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그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달리보기도 했다.

조제핀과 헤어진 직후 한 배우가 나폴레옹의 이 역린(?)을 건드릴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프랑수아 조제프 탈마라는 연극배우가 있었다. 나폴레옹 본인도 그를 튈르리 궁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좋아했다. 탈마는 로마 제국을 무대로 한 연극 '브리타니쿠스'에서 네로 역을 맡았다. 물론 이 공연에는 나폴레옹도 직접 관람하러 참석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극의 내용 중 네로의 아내인 옥타비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전부터 브리타니쿠스의 내용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극을 계속 진행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과 궁정 관계자들이 한 행동은 '쿨쿨 잠이 든 척 하기'였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탈마의 행동이 비의도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괜히 사건 만들어서 유명한 배우를 족친다며 여론을 흔들기는 곤란하므로 잠이 들어서 문제의 장면을 못 본 척 하며 넘어간 것이다.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의 친지들은 나폴레옹에게 도움은 안되고 그저 배신 혹은 이용만 해먹었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아들인 외젠과 딸인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을 끝까지 따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친지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외젠과 오르탕스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하지만 혈연주의가 강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은 이 둘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제4차 대불(對佛)동맹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는 나름대로 훈훈한 일화도 남겼다. 베를린 총독 하츠펠트 대공이 간첩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증거인 편지를 입수한 나폴레옹이 하츠펠트 대공을 체포하자, 대공의 부인이 남편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 된다며 총살당할 처지가 된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러 왔다. 나폴레옹이 그녀의 눈앞에 편지를 들이대자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임신 중이었던 부인의 부른 배를 보자 마음이 약해진 나폴레옹은 지금 이 편지를 곁에 있는 난로에 던지면 아무 증거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그녀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결국 하츠펠트 대공은 목숨을 건졌다.

8. 가족들과의 관계[편집]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특유의 혈통에 대한 집착과 가족주의 때문에 낭패를 본 바가 많았다. 물론 권력자가 혈연에 의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고, 신분에 따라 재능을 단련할 기회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던 전근대 시대에는 권력자 주위의 혈연 집단이 의외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의 별볼일 없던 지방귀족이었고 자신의 출세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온전히 자신의 재능에 의지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의지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의 형제들은 가문 자체가 배경이 한미하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실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상당히 무능했고, 심지어 권력자가 자신의 혈족에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폴레옹의 동생들은 무능한 주제에 야망과 욕심은 엄청 많고 나폴레옹 덕분에 배부르게 호의호식했으면서, 그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온갖 문제를 일으키다가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일조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본인들도 왕과 왕비 자리에서 폐위되어 여기저기 망명 신세를 지는 와중에도 "이게 다 나폴레옹 때문이다!"라고 원망이나 하며 상황파악도 못하는 문자 그대로 답이 없는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도 스스로 "내 형제들 말만 들으면 처음부터 우리 아버지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정통 황제이시고 내가 그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계승서열을 무시하고, 쿠데타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아버지로부터 왕관을 혼자 꿀꺽하고는 형제들을 모두 내쫓고 나 혼자 호의호식한 줄 알겠다. 아주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친형제들보다 의붓자식인 외젠과 오르탕스와 훨씬 더 친하게 지냈으며 의붓자식들도 나폴레옹을 친아버지 만큼 따랐고 그가 몰락했을때도 나몰라라 도망치긴 커녕 그를 도우려 했다.[13]

8.1. 나폴레옹의 친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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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티치아 부오나파르테(Letizia Buonaparte, 1750~1836) : 나폴레옹의 어머니. 뛰어난 미인이고 기질이 거세, 평범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남편 샤를 보나파르트에 비해 보나파르트 형제들의 독특한 개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듣는다. 14살에 결혼하여 15살에 아들을 낳았으나 1살도 못돼 죽었다. 모두 자식들을 7남 6녀를 낳았는데 그중 2남 3녀는 2살도 안돼 일찍 죽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8명만 어른으로 자랐다.
    나폴레옹의 집권을 썩 반기지 않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며느리 조제핀과도 불화를 빚었다.(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보나파르트 집안에서 혼자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되지 말라고 조언했다.) 대신 금전에 대한 집착이 강해 여러 은행가들을 곁에 두고 치부에 힘썼다고 하는데, 입버릇처럼 '내가 낳은 이 여러 왕과 공주들이 나중에 다시 내게 빵을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실제로 나폴레옹 몰락 후 보나파르트 가의 재정을 상당부분 책임진 것은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가 열심히 치부했던 돈이었다. 아들의 유배와 죽음까지도 보고 아들보다 15년이나 더 살다가 당시에는 엄청난 장수를 누리고 86세에 죽었다. 그녀에 대한 책자도 세월이 지나 여러 권이 나오고 여장부로서 많이 재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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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를로 마리아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Buonaparte, 1746~1785)[14] : 나폴레옹의 아버지. 39살 나이로 요절했으며 죽을 당시 나폴레옹은 사관생도였으니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죽었다.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는 제법 명문 집안 출신이고 코르시카 독립전쟁에 열심히 나선 인물이었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파올리의 부관이었을 정도. 비록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친 프랑스파가 되었지만 그 덕에 코르시카 총독 빽으로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기에 나폴레옹 인생에 그도 큰 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 조제프 보나파르트 (1768~1844) : 나폴레옹의 형.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에서 그나마 좀 사람된 지식인에 정치적 재능이 뛰어나긴 했는데.. 동생인 나폴레옹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한 행동들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의 민심이 싹 쓸려나간 후라서 나폴레옹이 앉혀놓은 형제한테 당연히 존경이나 민심을 바랄 수 없었다. 스페인 국왕인 호세 1세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 뤼시앵 보나파르트(1775~1840) :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 형인 조제프와 함께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물. 재능보다는 열정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면서 일시적으로 패닉에 빠진 나폴레옹을 대신해 사태를 주도하여 나폴레옹 집권에 기여했지만, 문제는 내무장관과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며 금전적인 비리를 숱하게 저지른 데다정치를 잘한다는 놈이 뇌물을 먹으면 어떡해 나폴레옹이 반대한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과 사이가 나빠져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에는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영국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도움이 안되었으며 나폴레옹 제정 기간 동안의 존재감은 전무에 가깝다. 형이 몰락한 뒤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긴 했으나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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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 나폴레옹이 가장 끔찍하게 아낀 동생. 하지만 이렇게 아껴준 친형을 단칼에 배신했다.네덜란드 왕국의 왕을 지냈고, 나폴레옹의 양녀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비롯한 여러 아들을 보았다. 나폴레옹 2세 탄생 전에는 나폴레옹이 루이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만큼 총애했지만, 루이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데다 부인 오르탕스와의 사이도 좋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군사적 재능도 훌륭하지 못했고 군주로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다. 형이 몰락한 뒤로 이름을 숨기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살아갔다. 그래도 1840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여 형의 장례식을 보고 늘그막은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막내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15]
  • 제롬 보나파르트(1784~1860) :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을 지냈고, 워털루 전투에서도 사단장으로 참전했다. 보나파르트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는 것까지 보았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나폴레옹의 뜻에 충실히 따른 편이었지만, 베스트팔렌 왕으로 재위하던 중에는 지나치게 사치를 즐겨 주위의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폐하는 선대 나폴레옹 폐하와 하나도 닮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고. 제2제정 당시 상원 의장을 지내는 등 평안한 늘그막을 지냈다. 손자인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1851~1921)는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인이 되어 미국 법무장관까지 오른 바 있다. 1860년까지 살았기에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 중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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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롤린 뮈라 보나파르트 (1782~1839) :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조아킴 뮈라에게 시집갔다. 정치적 야심이 대단해서 남편 뮈라를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획책했다. 나폴레옹의 가족들 중에서도 그의 첫번째 아내 조제핀과 두번째 아내 마리 루이즈, 양녀 오르탕스에게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과 뮈라가 폴란드로 출정한 동안, 나폴레옹이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당시 파리 방위사령관이었던 앙도슈 쥐노를 정부로 삼아 남편 뮈라를 제위에 올릴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후 남편 뮈라가 나폴리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지만, 문제는 카롤린이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해방전쟁 당시 오빠를 배신하고 만 것이다. 이후 오빠와 뮈라 모두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남편과 오빠를 망친 인간으로 낙인찍힌 터라 무수한 문전박대를 당하며 고생하게 된다. 그래도 늘그막에 재혼하여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다가 갔지만 죽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자신은 왕비로서 유럽을 호령했다는 말을 남기며 지나간 영광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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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자 바초키 보나파르트(1777~1820) : 카롤린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질이 거세고 야심이 많아 나폴레옹이 토스카나 일대에 영지를 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남편 펠릭스 바초키(1762~1841)[16]가 자신의 눈에 차는 인물이 아니라고 하여, 당대의 유명한 문인 퐁탄과 연애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했고 오빠가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풀려나서 지방에서 작은 별장에서 연금을 받으며 남편과 같이 살며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죽을때 그녀 곁을 지킨 건 남편뿐이라서 그녀는 죽어갈 때, '나는 배신했지만 당신은 바보같이 나를 따르니 참 우습네요... 하지만 정말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남은 게 오로지 당신 뿐이니...'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 폴린 보나파르트(1780~1825) : 보나파르트 자매들 중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여인. 르클레르 장군과 1797년에 결혼하여 아이티에 파견되었지만, 부부가 나란히 사복을 채우는 바람에 평이 좋지 못했다. 1802년 황열병으로 르클레르가 30세 나이로 요절하자 다음해인 1803년에 보르게세 왕자(1775~1832)와 재혼하여 나폴레옹의 정략에 충실히 따랐다. 낭비가 심했고 연애행각이 잦아 언니들만큼이나 말썽이 많았지만, 사적으로 봤을때는 나폴레옹에게 가장 우호적인 여동생이었다. 나폴레옹도 폴린을 가장 총애했는데, 이를 두고 대불 동맹군은 둘이 서로 근친상간을 한다는 악의적인 흑색선전을 일삼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 되자 어머니와 함께 섬으로 와서 그를 위로하였고, 결국 오빠가 사망 했을 땐 형제 가운데 가장 슬퍼했었다. 아이티 바닷가에서 훌러덩 벗고 헤엄치길 즐기다 보니 현지인들에게 하얀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이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것은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폴린, 아내 조제핀이 데려온 외젠오르탕스였고, 외젠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지내면서 대체로 나폴레옹의 기대를 충족시킨 편이었다. 때문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체역사적 가정들도 종종 나오고 있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이 조제핀과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였던 적의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하고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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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가문은 현재 코르시카 지방 정부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샤를 나폴레옹 (Charles Napoléon. 위 사진 오른쪽의 백발 신사)과 그의 장남,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 (Jean-Christophe Napoléon. 샤를 왼쪽의 인물)이다. 샤를 나폴레옹은 1950년생으로 위에서 소개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후손이며, 코르시카의 시장을 역임했으며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은 1986년생으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뉴욕, 런던에서 금융 분야에 종사했으며, 가문의 차기 수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가문을 대표해서 참석했을 정도. 2019년에는 마리 루이즈 조카의 직계 후손인 올림피아 폰 운트 추 아르코지네베르크라는 오스트리아 여성과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아들과 아버지가 공동 당주인 이유는 선대 당주이자 샤를의 아버지, 장크리스토프의 할아버지인 루이 나폴레옹이 샤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이혼한 뒤[17] 평민과 재혼 (귀천상혼)하자 샤를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십대에 불과하던 손주, 장크리스토프에게 당주 직위를 물려주었기 때문. 따라서 현재 적통 당주는 루이 나폴레옹의 아들인 샤를 나폴레옹이 아니라 손자인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지만 샤를은 이에 반발하여 적통 당주는 여전히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부자의 관계는 원만한 편인데, 샤를이 자신의 사망 후 당주의 지위는 장남인 장크리스토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해서 장크리스토프가 단독 당주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 이렇다보니 장크리스토프 또한 아버지가 당주를 자칭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어 사실상 부자가 모두 공동 당주라고 할 수 있다.

8.2. 나폴레옹의 연인 및 그 후손들[편집]

위에 언급한 현대의 보나파르트 가문의 인물들은 나폴레옹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자손이다. 제롬이 꽤나 자유분방했고 그 덕분에 워낙 자손을 많이 두어서, 제롬의 후손들이 지금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겨서 자식복은 많았지만 죄다 사생아로써 마리 루이즈의 아들만 적자로 인정했다.

나폴레옹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두 명이 있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의 애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데 사생아들이라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르지도 못해서, 정식 황태자이자 적자인 나폴레옹 2세와 달리 역사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도 동생 제롬 못지 않은 바람둥이였는데, 그의 수많은 애인 중 잘 알려져 있는 두 명의 애인이 있는데, 첫째 애인이 엘레오노르 드누엘(Eleonore Denuelle)이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한 재력 있는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에서 이름난 가정교사를 들여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현숙하고 명망 있는 숙녀로 자라났다. 외모도 뛰어났기에 여러 고위층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18세에 장프랑수아 르벨오노르(Jean-Francois Revel-Honore)라는 장교와 결혼했지만 그가 공금 유용 및 사기죄로 2년형을 선고받자 그와 이혼하고 독신이 되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나폴레옹의 눈에 들었는데, 사실 그녀가 나폴레옹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의 공이 컸다. 엘레오노르가 카롤린과 사적으로 친했던 터라 그녀가 엘레오노르를 오라버니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나폴레옹은 그녀의 박식함과 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조제핀과 결혼중인 상태였으므로 애인으로 삼았다. 엘레오노르는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한 명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샤를 레옹(Charles Leon)으로 당시 애인의 자식은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인 드누엘을 따라 이름이 샤를 레옹 드누엘이 되었다. 샤를 레옹은 어머니를 닮아 유식하고 아버지를 닮아 잘 생겼으며, 아버지의 작위를 잇지 못하는 대신 군인이 되어 장교를 역임하고, 백작 작위를 받아 부유하게 살다가 죽었다. 샤를 레옹에게도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군인이 되었고 나폴레옹 3세 시절 일어난 여러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와중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대신 딸들은 살아서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두어 지금도 샤를 레옹의 딸들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둘째 애인은 마리아 발레프스카(Maria Walewska)이다. 마리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폴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엘레오노르처럼 유복한 삶을 살며 자라났다. 특히 그녀의 가정교사들 중 한 명이 바로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이다. 쇼팽이 폴란드의 음악가로 통하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 니콜라가 젊은 시절에 폴란드로 떠나서 폴란드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생활하다 폴란드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쇼팽이기 때문이다. 바로 폴란드에서 니콜라가 한창 음악가로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가르쳤던 소녀가 바로 마리아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당시 식민지나 다름이 없어 국가의 주권이 거의 박탈된 상태로,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시대였다. 마리아도 그중의 한 명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정복 전쟁을 할 때 폴란드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는데, 마리아가 사는 성이 있는 지역을 통과하다 우연히 나폴레옹이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고, 나폴레옹은 마리아가 마음에 들어 측근에게 일러 마리아를 데려오라 했다.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의 명운을 걸고 어떻게든 마리아를 찾아서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지만 큰 문제가 있었으니 마리아가 이미 아들 안토니 루돌프 바질리(Antoni Rudolf Bazyli)까지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이었다. 발레프스카는 마리아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 아테나시우스의 성이었던 것이다.[18]

마리아는 조국 폴란드에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물인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러 갔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지만 설마 자신이 모국의 공인 공녀로써 나폴레옹에 바쳐지는 신세가 될지는 몰랐고 당연히 이 성상납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거부했다. 당시에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해도 도덕적인 일은 절대 아니었고 전 유럽인들이 뒤에서 소곤거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니 마리아로서는 당연한 거부였다. 어떻게든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당시 폴란드인들은 물론 거물 중의 거물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직접 마리아에게 찾아가 애원하고, 심지어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까지 자신의 아내 앞에서 무릎 꿇고 제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애원했다.[19] 결국 남편까지 나서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요구하는 주위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리아는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를 만난 나폴레옹은 우격다짐과 협박 및 강압적으로 그녀를 취하였지만 그녀의 식견과 외모에 감탄했으며 그녀가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이 유럽을 평정하면 폴란드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폴란드 대중 앞에서도 그랬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서약을 신뢰하여 그의 애인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설립해주고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여 줌으로서 그 약속의 일부를 지켜주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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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궁정화가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가 그린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초상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다지 미인이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진 다른 초상화들도 있기 때문에 이는 제라르 화풍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진도 각도에 따라 외모가 다르게 나오는데 화풍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초상화야 말해 뭐하겠는가. 또 외모가 별로였다고 해도 마리아가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지적이었다는 주위의 평가를 보면 이런 지성과 발랄함에 나폴레옹이 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플로리앙 조제프(Alexandre Florian Joseph)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들 또한 애인 간의 사생아였으므로 아버지의 성과 작위를 잇지 못하고 성은 어머니의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의 성[21]을 따른 발레프스키(Walewski)를 따르고, 자신의 작위 이름인 콜로나 백작(Comte de Colonna)를 붙여 콜로나발레프스키(Colonna-Walewski)로 했다. 알렉상드르는 프랑스와 폴란드를 오고 가며 외교관을 역임했으며, 프랑스 의회의 장도 역임했다. 그는 위의 샤를 레옹과 달리 아들이 죽지 않아 대를 이어 지금까지 그 후손이 존재한다.

알렉상드르의 탄생은[22]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바로 나폴레옹이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결혼 뒤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전혀 없었는데 조제핀이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이가 없는 이유를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23] 때문에 엘레오노르 드누엘이 아들 샤를 레옹을 낳았을 때도 샤를 레옹이 진짜 자신의 아들이 맞는지 약간 의심하고 있었다.[24] 하지만 잘 노는 스타일이라 바람 피웠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던 엘레오노르와 달리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지극히 헌신적이라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자신까지 모두 공인하는 사실이라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가 나폴레옹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조제핀의 딸인 오르탕스와 자신의 동생 루이를 결혼시켜 두 사람 사이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자신의 후계자를 낳을 결심에[25] 조제핀과 이혼하고 유럽 왕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에게 혈통의 권위를 안겨줄 적절한 상대를 찾게 되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자신의 아내가 나폴레옹과 외도해서 낳은 알렉상드르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도 자신의 아들로 소개했으며 죽을 때는 상당한 유산도 물려주었다. 알렉상드르 본인도 자신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임을 치욕적으로 여겨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끝까지 자신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를 어필했다고 한다.[26] 마리아는 1816년에 나폴레옹의 6촌인 필립 앙투안 도르나노(Philippe Antoine d'Ornano)와 재혼하였다. 기병 장교 출신인 도르나노는 나폴레옹이 그녀를 데리고 다니던 울름 전역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그는 예전부터 마리아를 사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자 사촌의 연인에게 마음을 드러낼수는 없었던지라 그저 먼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만 보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발레프스키 백작이 늙어서 사망하여 그녀가 공식적인 미망인이 되자 마리아에게 수차례 청혼을 하였고, 그녀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둘은 벨기에 리에주의 저택에서 회고록등을 작성하며 살았으며, 마리아는 아들 루돌프오귀스트(Rodolphe-Auguste)를 낳고 이듬해,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상드르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영국의 6대 샌드위치 백작(Count of Sandwich)인 조지 몬터규(George Montagu)[27] 딸 캐서린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으나, 요절했다. 두 번째로는 교황청의 서기의 딸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으나 아들은 결혼하지 않고 죽었고 딸 한 명은 요절하고 나머지 두 명의 딸만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르는 앞서 결혼한 두 명의 여자와는 출신이 완전히 다른, 라셸 펠릭스(Rachel Felix)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는 다름 아닌 연극 배우였다. 라셸은 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알렉상드르 앙투안이었으며, 알렉상드르 앙투안은 결혼하여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Andre Alexandre Maurice)라는 아들을 낳고,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는 결혼하여 앙투안 레옹 샤를(Antoine Leon Charles)이라는 아들을 낳고 앙투안 레옹 샤를은 두 명의 아내를 두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의 가장 큰아들이 알렉상드르 콜로나 발레브스키라는 사람으로, 지금 프랑스에서 생존 중이다. 사진을 보아하니 80대는 되어 보이시는 듯. 링크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조상 알렉상드르의 마지막 부인이 당시 하찮은 직업 중의 하나였던 연극 배우인 라셸이었는데, 정말 현재 생존 중인 알렉상드르 옹(翁)이 그의 친 자손이자 곧 나폴레옹의 친 자손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의 후손인 샤를(위 장크리스토프의 아버지)의 DNA와 알렉상드르 옹의 DNA를 비교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일치했고, 알렉상드르 옹은 실제로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후손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제롬의 후손이 딱 잡고 있기 때문에 알렉상드르 옹은 가문 승계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나폴레옹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도 있는 것 같다.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에 참가한, 현재 로마노프 왕가의 수장인 드미트리 왕자(좌)와 알렉상드르 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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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그의 애인 마리아 발레브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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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콜로나발레브스키 나폴레옹 판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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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 캐롤린 몬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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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디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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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라셸 펠릭스

9. 나폴레옹의 26인 원수[편집]

10.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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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프랑 금화에 새겨진 나폴레옹.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 제 1통령 시절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 밑에는 혁명력 12년 (AN12,1803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이후 발행분에서 점점 머리숱이 적어지는 것도 도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탈리아어어로는 Napoleone di Buonaparte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 프랑스어로는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어로는 Nabulionu Bonaparte (나불리오누 보나파르테)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을 신으로 숭상한 니콜라 쇼뱅(Nicolas Chauvin)의 일화에서 맹목적인 애국심을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란 용어가 나왔다. 다만 쇼뱅은 가공인물로 여겨진다.

번외격인 이야기로,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잎이 네 개인 클로버를 발견하고 신기하여 고개를 숙였더니, 총알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는 에피소드 덕분에 네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되었고, 나폴레옹이 전장에 나설 때마다 늘 도서관 마차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애독가였다는 사실은 뭇 책벌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28] 다만 한 번 읽은 책은 보관하지 않고 길가에 내던져 버리는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지나가던 사람이 주워보고 똑같은 감동을 느끼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번외 격으로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피라미드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무서운 듯이 피라미드에서 뛰쳐나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앞으로 피라미드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마라!"였다고 한다. 이후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당한 뒤 친한 친구들이 나폴레옹에게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봤냐고 물어보자 뭔가를 말하려던 나폴레옹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손을 저으며 '됐어. 어차피 말해봤자 안 믿을게 뻔한데 뭐하러 말하겠냐'라고 했다고 한다.[29] 여러 주장들 중 하나를 말하자면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안에서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폴레옹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고 없으니까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기에 학자들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여하간 그냥 그런 떡밥이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수행비서였던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글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7월 14일, 나폴레옹은 피라미드를 둘러보기 위해 카이로를 떠났다. 원래는 멤피스의 네크로폴리스 고대 유적을 삼사일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갑자기 계획을 바꾸었다. 이때의 피라미드로의 여정은 전쟁과 맞물려 한 가지 로맨틱한 일화를 낳게 내게 되는데, 일부 원주민들이 나폴레옹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접견한 것과 연관 지었는지 이야기하고 다니길, 그가 피라미드 안에 들어서자 '알라께 영광을! 신은 오직 알라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에 들어간 적도 없다. 심지어는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막에서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났던 적이 없으므로 만약 그가 피라미드에 들어가 보았다면 나 역시 따라 들어갔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밖에 있는 동안 몇 사람을 시켜 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게 한 뒤 그들이 돌아오자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물었다. 그들이 보고하길 '아무 것도 볼 게 없었습니다!'라고 했다."[30]

수학과 과학에 상당한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듯, 이집트 원정 때도 아예 현지 학술원을 만들기 위해 명망있는 학자들을 끌어모아 동행시켰으며 현지에서 이 학자들과 여러 차례 학술적 토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단순한 토론 정도가 아니라 '이집트지'라는 이집트학 학술지까지 현지에서 만들게 하고 거기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이집트지'는 근대적 이집트 고고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개중엔 "내가 군인 말고 학자를 했으면 아이작 뉴턴[31] 정도로 대성하지 않았을까?"라고 던졌더니 학자들이 "님이 아무리 뛰어나도 뉴턴만큼은 아님"이라 대답해 빡쳤다는 일화도 있다. 단,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게 별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800년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수학과 과학에 정통했던 집단이 공병과 포병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한가락 했다 하는 프랑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 명단을 보면 죄다 에콜 폴리테크닉[32]에서 공부하고 군에서 공병이나 포병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군대에서 응용되는 공학기술(축성술, 탄도학, 대포 제조법 등)의 기초로 수학이나 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기관이 공병/포병 장교 사관학교뿐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됐듯이 나폴레옹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통 포병 장교 출신이다. 당연히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수학, 과학, 공학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저서들에 직접 주석을 달기도 했다고 한다.[33]이렇게 전문 학자 수준으로 수학, 과학 지식을 갖추고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탓에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해 프랑스 황제 자리에 복위했을때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나폴레옹의 황제 복위를 가장 지지했다는 말이 있다.

위의 '이집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과 재능은 수학-과학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관심과 교양 또한 뛰어났으며, 젊은시절 루소의 계몽주의적 작품에 심취하여 문학 공모전에도 출품을 시도하는 등 인문학적인 소양도 상당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다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인물이었다.

체스를 좋아했지만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폴레옹을 탈출시키려는 추종자들이 체스판에 탈출 계획을 숨겨서 보냈는데 그걸 얘기해줘야 되는 장교가 가는 도중 죽어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탈출 계획이 숨겨진 체스판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사망했다라는 말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세인트헬레나 시절 측근들의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탈출계획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 중 하나가 총독 허드슨 로를 죽이려고 계획한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대노하여 그 하인을 혼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탈출을 하는 등의 행위를 거부했다.

백년전쟁 당시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한 업적에 비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무명인 취급 받으며 잊혔고, 공화파로부터는 더욱 천시 당하던 잔 다르크를 다시 부각시켜 영웅시한 것도 나폴레옹의 집권 시대 때이다. 자신과 잔 다르크가 벽지 출신이고 대포를 주무기로 다뤘으며 영국과 맞섰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내세웠다. 잔 다르크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영웅이라는 일부 수정주의적 인식도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자세한 건 잔 다르크 항목 참조.

종교에 대해서 거의 이신론에 가까운 견해를 가졌다. 특히 가톨릭을 싫어했으며 비오 7세와의 불화도 그렇고, 종교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취급하였다. 일단 스스로도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필요성이 종교를 탄생시켰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34]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본 것과 달리, 이슬람교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군인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자리잡는데만 수백년이 걸린 기독교와 다르게, 단 몇십년만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이야 말로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아무것도 못 이룬 예수보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시작해서 왕에 준하는 자리에 오른 무함마드야 말로 훨씬 유능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35] 이집트 원정때도 개종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동방의 영토와 부를 손에 넣을수만 있다면 개종 따윈 몇번이고 할수 있다'고 발언하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는 거의 숙적 관계로 취급받지만 사실 꽤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다.

유배지에서의 공책이 경매에 올랐는데 영어 공부[36]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기사 그런데 잘하지는 못했다. run의 과거형은 ran인데 runned라고 우직하게 한 페이지를 채워놨다고 하며 프랑스어 je(나)에 의한 언어 간섭인지 I(나)는 반드시 j로 썼다고 한다. 영국 정복에 성공했으면 불규칙 변화를 모조리 없애 버리고 ran을 runned로 바꿔버리는 세계적 대업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37][38]영어 공부가 쉬워질 수 있었는데 아쉽다 영어 공부가 아니라 프랑스어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프랑스 프랑 지폐에 등장한 인물 중 하나다.

파리를 여행하다 보면 다리나 궁전 같은 건축물에 월계수 안에 N자가 있는 부조를 대단히 많이 볼 수 있는데 나폴레옹과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열심히 새겨준 덕분이다.

2014년 11월 16일에 모나코 왕실에서 보유중이던 나폴레옹의 이각모를 경매에 내놓았는데 하림 그룹의 김홍국 회장이 낙찰 받았다.# 세계에서 나폴레옹 모자를 소유한 민간인은 단 2명 뿐인데 그중 한명이 됐다. 일본인과 경매 배틀이 붙어 무려 26억원을 주고 샀는데 문제는 주가가 하락하던 중에 이런 것. 물론 회삿돈이 아닌 개인돈으로 샀으니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는 없지만 나폴레옹 모자 외에도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검에서부터 은잔, 훈장, 나폴레옹 초상화까지 경매로 11억원을 주고 사서 외화를 낭비한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다만 김홍국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 정신을 전파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사업목적에도 미술관 및 박물관 운영을 추가했다.

국제학술대회 등지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던 이 모자는 현재 판교테크로밸리 하림 계열사인 NS홈쇼핑 별관 1층 나폴레옹 갤러리에 나폴레옹의 검 등, 몇몇 전시품과 함께 무료로 상설 전시되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넥슨코리아, 네오위즈, NHN본사가 근방에 있으니 이곳에 들릴 방문객이 있다면 둘러봄직 하다.

러시아 요리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케이크가 있다. 하필 러시아 케이크 이름이 나폴레옹인 이유는 1912년, 바로 그 나폴레옹을 박살낸 조국전쟁의 승전 100주년을 기념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모자 모양을 따서 만든것이 시초라고 한다. 즉 승자의 여유.

유명한 야구선수 중에도 이름이 나폴레옹인 선수가 있다. 바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2루수 중 하나인 냅 라조이로, 본명이 나폴레옹 라조이다. 선수명은 나폴레옹의 Nap 부분만 따서 냅이라 붙인 것. 조상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캐나다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부모와 가족들이 실제 이 항목의 나폴레옹을 좋아해서 지었다고 하며, 이름에서 프랑스계인게 티가 나서, 선수시절 선수들 사이에서의 별명도 "프랑스인(The Frenchman)"이었다.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 정신을 - 나는 보았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란 개념을 만들었으며, 나폴레옹이 독일을 집어삼켰음에도 그를 절대 정신의 화신으로 보며 찬양했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절대 정신이 나폴레옹이 이룰 혁신들을 통해 구현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초상화에 셉터와 같이 등장하는 흰색 손가락 모양은 '정의의 손'이라는 것이다.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 나폴레옹 외의 초상에서도 가끔 보인다. 본래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내려온 상징으로서 보석으로 만들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분실되어 상아로 만들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덴마크 왕국에서는 그를 흠모하여 참전한 한 구두 수선공 출신 병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통에 신경 쇠약에 걸렸고, 고향에 돌아간 뒤 얼마 못 가 사망하고 만다. 이때 아버지의 죽음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에게 눈의 요정이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말했는데, 그 병사의 아들이 바로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한 이 말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눈의 여왕의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10.1.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편집]



사실 이 광고는 말도 안 되는 광고인 게, 아무리 코르시카가 깡촌이라지만 보나파르트 가는 엄연히 귀족에 속했던 지역 유지 가문이다. 귀족이 무슨 어부를 하나?
여담으로, 이 광고가 전파를 타자 나폴레옹을 비꼬는데에감정상한 프랑스 인들과 "그가 잠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코르시카 섬의 어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구를 생업에 대한 비하로 받아들인 한국 어민들이 격분해 항의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잠을 효율적으로 자는 자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한다. 3~4시간만 자고 부족하다 싶으면 위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는데, 사실 당시 장교들이 전쟁 중에 맘 놓고 자기 힘든 상황이었으니만큼, 좀 과장된 면도 없잖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항상 자기가 잔 것보다 적게 잤다고 생각했다는 식의 말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당대 기준에서 봐도 수면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 젊은 시절부터 마치 발작하듯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바로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고 하니...

그러나 나폴레옹은 잠을 결코 적게 자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관학생 시절, 다들 코르시카 촌놈이라고 무시했지만 브리엔이란 동기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부관이 되었던 브리엔이 남긴 기록을 봐도 불면증 때문에 못 잔다고 투덜거린 게 많았다고 한다. 브리엔은 나폴레옹빠였지만 늘그막까지 나폴레옹이 잠을 적게 잤다고 하면 왜곡하지 말라며 반론했다. 그 밖에도 프랑스 사학자 Roger Chartier의 연구에 의하면, 야간의 수면 시간이 2~3시간이었을 뿐, 1일 동안 토막잠을 잔 시간까지 합치면 최소한 6시간 이상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불규칙한 생활 덕분에 불면증까지 겹쳤기에 적게 잤을 뿐이지, 노력근성으로 졸음을 참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저렇게 수면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한번 잠이 들면 주변에서 깨우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연회 도중에 잠든 나폴레옹을 깨우려고 측근들이 그가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다 줬는데, 그 냄새를 맡던 나폴레옹이 돌연 '오늘은 피곤하니 안 되겠소 조세핀'이라 잠꼬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체취와 치즈 냄새도 구분 못할 만큼 넉다운 되었다는 이야기.[39]

그리고 저 광고가 아주 엄청나게 중대한 실수를 하나 하고 있는데, 보나파르트 가문은 코르시카의 귀족이다. 나폴레옹의 직계 조상인 자코보 부오나파르테는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메디치 가문의 친구이자 측근이었고, 15~16세기에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당히 힘 있는 명문가였다. 16세기 후반에 정권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로 망명을 갔으나, 코르시카에서도 지방 귀족 가문으로, 비록 섬 밖에서 크게 떵떵거릴 위세는 아니지만, 현지에서는 상류층에 속했으며, 경제적 사정도 아버지의 사치만 빼면 그럭저럭 잘 살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 혁명가 파스콸레 파올리의 동지였으며, 루이 16세의 궁정 내 코르시카 대변인이기도 했다. 가문이 살던 현지의 부오나파르테 저택은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며, 인근에는 나폴레옹의 조상들이 매년 사용하던 가문의 여름 별장도 따로 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덕분에, 나폴레옹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유년 시절은 결코 빈곤하지도, 처량하지도 않았다. 그가 활동한 프랑스 본토에서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외딴 섬 촌놈이라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거지, 나폴레옹의 배경을 현대로 치면, 한국에서는 차관급이나 중견기업 집안 출신인 사람이 미국에 좋은 사립대학에 유학갔는데 주변인들은 미국의 장관급이나 포춘 500대 기업의 집안 출신이라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던 셈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나폴레옹 잠(혹은 수면)'으로 검색하면 나폴레옹 수면법이라는 출처불명의 유사과학 같은 헛소리까지 나와서 마치 나폴레옹이 잠을 컨트롤해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며, 이 수면법을 자신에게 정착시키는 동안엔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규정해놓고는 하는데, 정작 이 중에선 나폴레옹이 즐겨 했던 목욕 역시 금지되어 있다고 하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요법이다. 일부 책에서는 나폴레옹이 바보는 6시간, 여자는 5시간, 남자는 4시간을 잔다는 말을 했다고 쓰기도 했다. 남녀노소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늦어도 10~12시에는 잠자리에 들어 6~10 시간 이상 자야 한다.[40]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런 불규칙적이고 부족한 수면으로 건강을 망쳐서 워털루 전투 같은 큰 전투에서 패인(敗因)이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긴다. 그리고 비교적 1년 정도 짧은 시간에 공부에 전력매진해야 되는 입시생이라면 모를까, 일반 성인이 이따위 짓을 하다가는 건강을 해칠 뿐더러 카오너에게는 졸음운전까지 유발하는 그야말로 자살, 민폐행위나 다름 없다.[41]

10.2. 나폴레옹의 평상시 일상[편집]

나폴레옹은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두 시간 동안 욕조에 푹 잠겨 있으면서 비서가 읽어 주는 영국독일 신문의 번역본을 듣거나, 비서에게 자기가 불러 주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그 후에는 아침을 먹을 때까지 탄원서를 처리하거나 종종 탄원자 본인과 면담을 했다. 하루는 기술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을 거부당한 한 유망한 젊은이가 겁도 없이 무작정 황궁으로 찾아와 나폴레옹을 알현하게 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나폴레옹은 즉석 면접을 본 뒤 교장은 이걸 읽는 즉시 이 청년을 입학시키라는 친서를 써 주었다.

아침 10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오후 5시에 저녁을 먹었다.

여가 시간에는 사냥의 명수였던 베르티에 원수와 함께 코르시카식 토끼 사냥을 즐겼다. 한 번은 담당관이 실수로 길들여진 토끼들을 사오는 바람에 토끼들이 나폴레옹에게 몰려드는 해프닝도 있었다.

부하들과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황제가 되고 나서는 종종 밑장을 빼곤 했다. 이젠 자기가 황제니 눈치채도 판을 엎기는커녕 티도 못 내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황제만 아니였어도 오함마로 손모가지 날아갔을 것이다.

연극 매니아라서 생클루와 말메종의 양쪽 황궁에 모두 황제 전용 극장을 지을 정도였으나 오페라 매니아였던 조제핀과는 영 취미가 맞지 않았다.

연회자리에서 흥겨우면 종종 친히 노래를 하곤 했는데 앙도슈 쥐노장군의 부인이었던 '로르 쥐노'가 회고하기를 나폴레옹이 노래를 불렀다 하면 연설을 할 때의 그 근사한 위엄있고 매혹적인 목소리는 대체 어디로 간건지 도축장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거려서 연회의 분위기가 백이면 백 싸해졌다고 한다.[42]

10.3. 나폴레옹의 식사 습관[편집]

잘 먹고 싶을 때는 캉바세르[43]의 집에 가서 먹어라.(식사 소요 2시간 30분)
못 먹으려면 르브룅[44] 의 집에 가서 먹으면 된다.(식사 소요 30~40분)
빨리 먹고 싶으면 내가 있는 궁전으로 오게나.(식사 소요 5~7분)

식사 습관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문제가 엄청 많은 편인데, 황제가 된 뒤에도 10분 이상 식사하는 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무척 빨리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현대 프랑스인의 평균 식사시간의 1/4 정도다.

게다가 귀족 출신이 맞기는 한 건지, 식사예절은 거의 무시하고 식탁에 앉아서도 꾸벅꾸벅 졸면서 대충대충 먹어치우고 곧바로 소파나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질 때도 자주 있었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나쁜 식생활로 인해 건강이 당연히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5]

세인트헬레나로 쫓겨났을 때 불과 46세였는데, 그로부터 6년밖에 못 살고 죽은 것도 이전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포로로서 유형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끌려가는 영국 군함 노섬버랜드호에서도 이 습관을 그대로 고집했다고 한다. 상대가 프랑스의 황제이니만큼 당연히 그 영국 군함 함장은 그를 식탁에 초대했고, 영국 해군의 전통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는 함장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허나 나폴레옹은 아무 말 없이 후다닥 음식을 집어먹고는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하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는 바람에, 동석했던 함장과 영국 해군 장교들이 모두 아연실색했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가 아직도 사무쳐서 우리하고 말도 섞기 싫은 게 아니냐고 오해를 산 적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수면 부족과 급히 먹는 식습관이 훗날 건강에 크게 악영향을 주고 몇몇 중요한 전투에서 패인으로 작용했다.

10.4. 나폴레옹의 미식[편집]

나폴레옹이 평상시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몇몇 기록들로 대략 알 수 있고, 그것이 부르봉 왕조 때와 어떻게 달랐는지도 알 수 있다. 음식 취향은 매우 소박해서 빵, 염장버터, 감자튀김, 물에 탄 와인을 곁들여 빠르고 간편하게 식사하기를 선호했다.

전속 주방장은 그냥 따뜻한 수프와 푹 익혀 삶은, 얇은 쇠고기 한조각을 더 좋아할 때가 있었다고 전했다. 아침으로 삶은 달걀이나 감자, 토끼고기나 닭고기로 만든 커틀릿, 삶은 토끼고기나 닭고기와 함께 렌틸콩을 넣은 샐러드 등을 간단히 먹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먹는 수프를 빼면 아침에 먹는 요리가 2가지를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식사를 담당했던 부서에 전달된 지침서를 보면 포타주, 세 가지 앙트레, 두 가지 앙트르메, 두 가지 빵을 준비해서 튈르리궁에 있던 조세핀 황후의 거처로 내와서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폴레옹이 생전까지 좋아했던 샹베르탱 와인 한 병을 내가면 끝이었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저녁은 부하들이나 다른 궁정 식구들과 함께 먹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라도 좀더 풍성한 저녁 식탁을 차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런 저녁 식탁에서도 나폴레옹 본인은 굽든지 삶든지 해서 아주 간소하게 요리된 고기와 채소 한 접시씩만을 먹었다.

채소라고 해봐야 콩이나 감자 같은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특히 감자를 매우 좋아해서 굽든 삶든 튀기든 감자라면 다 잘 먹었다. 식사의 마무리는 치즈 한조각을 먹었다. 주로 까망베르, 리코타, 로크포르(Roquefort) 또는 파마산(Parmesan) 치즈가루를 택했다.

나폴레옹은 끼니 때 갑자기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이때는 그저 있는 재료로 준비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한 종류의 포타주, 두 가지 를르베, 콜드 컷, 네 가지 앙트레, 두 가지 로스트 요리와 네 가지 앙트르메, 네 종류의 오르되브르, 두 종류의 샐러드, 6가지 빵, 나폴레옹이 즐기는 샹베르탱 와인 6병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연회를 열기는 했지만 그 규모가 몇몇 지방 시청 관료나 초대된 손님만이 참석하는 정도의 아주 작은 규모였던 점을 미루어 보면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의 공식 연회 만찬을 계승하거나 복원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은폐된 생활을 했고, 후일 세인트헬레나에서 그러한 생활을 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당연히 미식도 즐겼다. 그가 매우 아꼈던 막내 여동생 '폴린 보나파르트'는 오빠는 어렸을 적부터 감자와 토끼고기, 닭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로스트 치킨, 치킨소테, 닭고기 살 크넬, 볼로방 페이스트리 치킨파이, 프로방스식 치킨, 백포도주나 샴페인으로 디글레이즈한 닭고기나 토끼고기 볶음, 달걀물을 풀어서 빵가루를 입혀서 버터에 녹인 후라이팬에 요리한 토끼고기나 닭고기 커틀릿 등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특히 즐겼던 디저트는 바로 아몬드였다. 보통 한 접시를 거의 다 혼자서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 조제핀 황후가 아몬드를 너무 과식하지 말라고 자제시키기도 했다.

꿀이나 잼, 설탕 등의 단맛 자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드물게 과일을 먹을 때도 있었는데 새콤달콤한 과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사과나 배 1/4 조각 정도만 먹거나 포도 약간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또 둥글게 말아 리코타 치즈를 넣은 이탈리아식 카놀리(Cannoli)를 매우 좋아했다. 전통 카놀리는 다양한 종류의 달콤한 잼을 리코타 치즈와 같이 넣어서 먹는데 나폴레옹은 잼을 빼고 리코타 치즈만 넣은 카놀리를 더 선호했다.

또 당시 프랑스 신사들처럼 식사 후 입가심으로 코냑 같은 독한 증류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이나 샹베르탱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10.5. 나폴레옹의 정리[편집]

기하학 공식 중의 하나.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10.6. 벳시 발콤[편집]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벳시 발콤이라는 소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벳시와 황제"라는 소설이 유명한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거주한 롱우드 지역에 발콤이라는 가족이 살았고, 그 집의 자녀인 딸 두명이 나폴레옹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이다.[46]

11. 대중매체[편집]

11.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편집]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선악과를 가졌던 인물로 밝혀지며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장교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1.2. 그 외[편집]

일단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벌어진 전 유럽의 운명을 놓고 일어난 최후의 대규모 전쟁이므로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 소재로 쓰이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사실상 진주인공 포지션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도 나폴레옹이 언급된다. 나폴레옹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에드몽 당테스가 누명을 쓰고 인생이 망가지게 되는 배경이 나폴레옹의 심복 베르트랑 장군과 공화주의자 누아르티에가 사주한 나폴레옹의 편지를 외부로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짐 커비즐이 주연한 2002년 영화에는 초반 섬에 들른 에드몽에게 직접 자신의 명령이 담긴 편지를 부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코난 도일의 전설적인 추리 소설 시리즈인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인 셜록 홈즈가 존 왓슨에게 자신의 라이벌이자 영국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제임스 모리아티를 '범죄 세계의 나폴레옹'이라고 묘사했다.

현재까지 나온 나폴레옹이 주연인 영상매체로 가장 유명한 것은 1927년작 영화 '나폴레옹'과 70년작 워털루 및 2002년 제작된 프랑스의 TV 미니시리즈 Napoléon이 있다. 아벨 강스의 27년작 나폴레옹은 무성영화 시절 막바지 들어 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권한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1부부터 6부까지 연이어 만들어질 계획이었으나 1부만 해도 그 내용이 330분(!!)에 달했고, 거기에다가 후반부의 전투 장면은 1.33:1 화면 세 개를 붙여서 만들어진 4:1 화면으로 상영해야만 했다. 이런 엄청난 길이와 전례 없는 기술적인 난제 때문에 영화는 일부 공간에서만 제한적으로 상영되었고, 영국과 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할 때 즈음에는 유성 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묻혀버렸으며, 그나마도 4:1 시퀀스가 전부 1.33:1로 잘려나가고 러닝타임이 훨씬 더 짧아지는 등 수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간 뒤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당연히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나폴레옹 2~6부는 촬영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이 영화는 1980년에 가서야 완전하게 복원되었지만[47], 이나마도 VHS레이저디스크로 발매된 이후 한동안 홈미디어로 발매되지 않았으며[48], 오늘날에도 1~2년에 한 번씩 대형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와 함께 상영되어야만 운 좋게 볼 수 있다. 영화 자체는 후기 무성 대작들 중에서 최고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 사치로운 세트 구성과 기술적인 대담함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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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는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나폴레옹 역) , 제라르 드파르디유(푸셰 경시총감 역), 이사벨라 로셀리니(조세핀 역) 등등 당대 프랑스 최고의 배우와 존 말코비치(탈레랑 외무장관 역)가 출연한 걸로 화제를 모았다. 유투브에서도 나폴레옹 관련 검색어에서 빠지지 않은 작품. 특히 아스테릭스나 비지터 시리즈 등 코미디 연기로 그동안 알려젔던 크리스티앙 클라비에가 열연한 나폴레옹은 그간 나폴레옹을 맡은 배우 중 실제 인물과 가장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코비치 역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자 책략가로 유명했던 탈레랑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라 마르세예즈와 합성한 동영상도 유투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라 마르세예즈 그 외 콜드플레이Viva la vida와 합성한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이 곡은 샤를 10세몰락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지만 가사 내용이 나폴레옹의 삶과도 매치되는 부분도 있어서 종종 합성되는 듯. Viva la vida와 합성한 동영상

Commands & Colors Napoleonics, 줄여서 C&C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보드 게임이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다. 이외에도 나폴레오닉 워(The Napoleonic Wars), 나폴레옹의 승리(Napoleon's Triumph), Manoeuvre, 야전사령관-나폴레옹(Field Commander: Napoleon) 등등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보드게임은 정말 많다. 나폴레옹 전쟁 관련 보드게임만 모아놓은 자료

토탈워 시리즈나폴레옹: 토탈 워는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인지 플레이 도중 나폴레옹만은 부대가 전멸해도 죽지 않고 부상당해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메세지만 뜨고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부상당해서 본국 귀환하면 레벨이 떨어지니 조심해야 한다.[49] 캠페인하면서 경험치가 쌓여서 자동전투를 시키면 두 배 정도의 적은 간단히 이긴다.

코에이에도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게임으로 1990년에 발매한 랑펠로(정확한 독음은 랑페뢰)가 있다. 다만 모든 코에이 게임들 중 가장 어려운 데다[50] 후속작이 안 나온 관계로 삼국지 시리즈신장의 야망 시리즈에 비하면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확장팩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루트에 맞춰진 세계 정복 캠페인을 플레이할 수 있다.

문명 5에서는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온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도중에 이벤트로 등장한다. 군주로서의 능력치는 6/3/6으로 본 게임내 최고 수준. 원래 유럽 깡패인 게임 내의 프랑스와 혁명 효과, 나폴레옹의 능력치가 합쳐져 실제 역사대로 전 유럽 영토에 삼색기를 휘날릴 수 있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의 갤주로 인정받고있다.

근육맨2세에 따르면 실은 시간초인이었다고 한다.

진정남 나폴레옹이라는 만화도 있다.(원제는 '사자의 시대 - 나폴레옹'.)

#링크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자. 이게 나폴레옹인지, 켄시로인지 싶어질 거다.

참고로 이 만화의 작가는 문명 5 출시 기념으로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문명 홍보 만화를 그혔다.

한국만 해도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시리즈에 그가 나오지 않은 시리즈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1세대 판타지 소설 불멸의 기사 2부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당연히 등장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정체를 다름 아닌 루이 16세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충격과 공포다.

국내 웹툰 플린트 락 머스킷은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수인물이다. 주인공 로제타 듀베르는 용기병[51] 여성이지만 나폴레옹 본인도 수인화되어 출연한다.

역시 용을 다룬 대체역사소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당연히 등장했다. 간지폭풍 절대군주로 나온다.

포켓몬스터엠페르트는 나폴레옹이 모티브. 이름의 조합이 황제를 뜻하는 영단어 Emperor+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의 명성 때문에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대체역사소설계에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든지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대체역사적 가정이 단골 떡밥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학자들이 다룬 대체역사인 What if에서는 나폴레옹이 중간에 전쟁을 그만두고 정치와 외교로 해결을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만일 나폴레옹이 틸지트에서 승리하고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좀 더 너그러운 방향으로 조약을 맺었다면, 유럽은 나폴레옹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고, 결국 영국도 굴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챕터의 제목이 우주의 왕 나폴레옹이다.

해리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52] 프랑스 왕가가 1980년대까지 존속하게 된 영웅으로 묘사된다. 루이 16세의 목숨을 노리는 파리 민중들에게 대포 사격을 하는 바람에 소요를 진압한 장교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겁스 무한세계의 '보나파르트' 세계들은 나폴레옹이 승리한 평행세계들이다. 그 중에 하나인 보나파르트-6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 통일 이탈리아를 건국했다![53] 또한 레비아탄이라는 세계에서는 바다에서 아틀란티스인들이 갑툭튀해서 프랑스가 시망하자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지대에서 모래제국을 건국했다.

한국에서 나폴레옹 관련 영화를 하면 주로 양지운이 더빙을 맡는다.

코드 기어스 시리즈에서는 현실 역사와 달리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관광보내고 영국에 상륙[54],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신대륙으로 피난케 함으로써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래 설정으로는 전 유럽의 황제가 되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으나, 코드 기어스 망국의 아키토에선 황제가 되지 않고 공화정의 장군으로서 살았던 걸로 설정이 변경된 것 같다.

베르사유의 장미 6권(완전판 기준)에서 지나가는 포병장교로 잠시 등장한다. 스무 살의 라 페르 포병연대 소위로 나온다. 죄드폼의 맹세 사건이 터져서 심란해 하던 오스칼이 스쳐 지나가다 눈빛에 매우 놀라 식은 땀을 다 흘리며 나폴레옹을 불러세운 후 관등성명을 묻고 그 이름을 기억해둔다. 이후 다시 식은 땀을 흘리며 '사람의 몸을 얼어붙게 할 것 같은 그런 눈빛이야..! 보통 사람의 눈이 아냐'('앙드레, 저 눈빛 봤니? 저건 독수리의 눈빛이야. 제왕의 눈이야!'라고 말했다는 말도 있다.')이후 에필로그에서 황제에 즉위한 모습으로 한 컷 등장한다.

그리고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마친 후 '황제 나폴레옹'이라는 만화책을 냈다.

라이트노벨 악성소녀에서는 나폴레옹이 초능력을 지닌 마왕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는 하이든이 근육 떡대인 격투가다.

심지어 한국 고전문학에도 등장한다. 토끼전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에 등장하는데 둘 다 안습한 모습이다.

이원복은 그를 패러디한 '거지황제 나풀대용' 이라는 만화를 그렸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찍은 이후 나폴레옹에 관한 대작을 찍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1970년 작인 워털루가 쫄딱 망하면서 투자를 못 받아 계속 연기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으론 잭 니콜슨이 낙점된 상태였는데 잭 니콜슨은 큐브릭에게 나폴레옹 역을 제안받고 매우 기뻐했으며 큐브릭이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그 전에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되었지만 니콜슨은 이 인연으로 샤이닝의 잭 토렌스 역으로 출연하게 된다.[55]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없던 시절 나온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서는 우연히 타임머신에 타게 되어 현대 미국으로 오는데 현대 세계에서 바로 수영장[56]의 미끄럼틀에 반해 종일 그것만 타고 논다. 두 주인공이 친척 아이에게 부탁하여 맡기는데 나중에 그 아이가 "형, 저 바보 남잔 대체 누구야?"라고 질문한다. 주인공 둘이 나폴레옹이라고 답변하자 "웃기지마! 미끄럼틀만 종일 타고 아이스크림만 신나게 먹는 저런 띨띨이가 나폴레옹이라고?"라며 전혀 믿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위인들이 죄다 맛탱이가 가서 현대 미국에서 활약하긴 한다. 칭기즈 칸은 백화점에서 마네킹을 신나게 부수고 잔 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를 칭하며 신나게 에어로빅을 춤추듯 하다가 진짜 에어로빅 강사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며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에서 미치도록 총을 천장에 쏘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고 베토벤은 전자 키보드를 신나게 연주하며 프로이트는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정신분석학을 연설하는데 사람들은 어안이벙벙하게 바라보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무슨 미친 놈 바라보듯이 한다.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인 혼블로워에서는 주인공이 영국 해군이다보니 절대악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혼블로워의 활약은 나폴레옹에게 치명타를 준다.

199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뮤지컬 나폴레옹이 초연이 올라왔고 큰 인기를 끌었다. 2017년 7월, 라이센스 공연이 샤롯데시어터에서 올라왔다. 나폴레옹 역에는 한지상, 임태경, 마이클 리가 캐스팅됐다. 조세핀 역에는 정선아(뮤지컬 배우), 박혜나, 홍서영이 캐스팅 됐다. 여기서 특히 한지상의 광기 넘치는 나폴레옹 연기가 압권이다. 다만 여기에서의 나폴레옹은 전쟁광의 이미지만 보이고, 정치면에서는 시종 일관 탈레랑에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나와, 실제 나폴레옹보다 못한 모습으로 묘사돼 나폴레옹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고 파리로 진격할 때, 권력의 변화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던 대표적인 당시 신문이였던,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시민들과 혁명 정부를 지지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은 신문이였지만 나폴레옹 집권 후 변절해 철저한 친나폴레옹 신문을 표방하다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유배와 루이 18세의 등극 이후 철저한 반나폴레옹 신문으로 돌아섰다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후 다시 극적으로 입장을 바꾼 '모니퇴르'지를 비꼬는 유머가 있다. 버전은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호칭이 멸칭에서 점점 경칭으로 바뀐다는 것이 포인트다.

Fate 시리즈에서 아처 클래스로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나폴레옹(Fate 시리즈) 참조.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대한민국의 광고에서도 몇 번 활용되었는데 몇몇 광고들은 그냥 선전에만 관심을 두고 고증(따위는 쿨하게 씹어 버려서 역덕후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 단락에 제시된 광고는 영상 밑 주석에도 적혀 있듯이 보나파르트 집안이 아무리 깡촌 코르시카 출신이라 해도 엄연히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어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고 있다.

365mc병원 지면광고(지하철) 중 지방이가 나폴레옹 코스프레를 한 것이 있다. 빼볼래용이라는 광고문구가 압권이다.

중국 SRPG성녀전기에서는 주인공 폴린 보나파르트의 오빠로 등장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 사형을 면하고 혁명파와 거래를 한 세계관이라 폴린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성녀의 힘을 지닌 군인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작중 주인공을 돕는 오빠의 포지션으로 나오지만 초반에는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다. 아예 뮈라나 란 같은 캐릭터들은 폴린의 부하로 활동한다. 중간에 나오는 퀘스트에서는 조세핀과 데이트 계획을 짠다는게 군사 회의를 여는 것처럼 변하는 개그를 보여준다.[57] 그러나 여전히 유능한 군인인데다가 자코뱅 파에 속해 있어 동생을 돕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 및 이각모가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Deadliest Warrior란 프로그램에서 조지 워싱턴과 5:5로 싸웠으나 패배했다.해당 영상

이효석의 단편소설 중 나폴레옹의 최후를 묘사한 <황제>라는 작품이 있다.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임종을 맞이한 나폴레옹이 목사와 3명의 의사, 시녀, 시종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의 1인칭 소설. 화자인 나폴레옹이 죽음을 앞둔 상황에 처했다는 점을 반영해서인지 특이하게 작품의 모든 문장에 쉼표와 마침표 등의 문장 부호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58] 나폴레옹의 일생과 유럽 근대사를 아는 이라면 한번 읽어 보자. 동아시아식 영웅 소설을 연상케 하는 문장과 표현에서 색다른 장엄함과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예]

리들리 스콧이 연출, 호아킨 피닉스 주연을 맡은 나폴레옹 이야기를 그릴 킷백을 제작한다.# 애플 TV+가 제작 맡고, 2022년 촬영 가진다.#

12. 어록[편집]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Impossible» n'est pas français."[60]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61]
신은 가장 강한 포병대가 있는 군의 편이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 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나는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가 뿌려지길 원한다.[65]
당대 사상의 선두에서 나아가면, 사상이 당신을 따르고 지지할 것이다. 당대 사상을 뒤따라 가면, 사상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다. 당대 사상을 거슬러 가면, 사상이 당신을 전복시킬 것이다.[66]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67]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La mort n'est rien, mais vivre vaincu et sans gloire, c'est mourir tous les jours.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
"La victoire appartient au plus persévérant."
''승리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적과 합류하라."[69]
"내가 쓰러진들 혁명가들에게 프랑스를 넘겨주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내가 프랑스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대혁명은 끝났다. 내가 대혁명이다.
"내 가족은 매춘부 가족이란 말인가!"[70]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오."[71]
"나의 치세는 내가 더는 강력하지 못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멈추는 날 끝날 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 뼘의 땅도 넘겨주지 않겠다. 왕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 큰 마음 먹고 스무 번 패해도 되고 언제나 수도로 되돌아 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출세한 군인이기 때문이다."[72]
"그대는 군인의 정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오. 나는 전장에서 성장했소. 나 같은 사람은 백만 명의 목숨도 개의치 않소."[73]
"정복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잔인해야 한다. 내가 좀 더 잔인했더라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74]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75]
"내가 권력을 찬탈했다고?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왕권을 뺏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시궁창에 버려진 왕관을 주워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 것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왕관을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머리에 썼어. 나는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한 거야."[76]
"내가 종교를 갖는다면, 태양을 택하겠어. 태양은 모든 것을 잉태하는 지상의 진정한 신이야."

1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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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주 칭호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이다. 이는 다스리는 대상을 프랑스라는 국가가 아닌 프랑스인이라는 국민임을 강조했다. 왕정의 군주였던 "프랑스 국왕"의 칭호는 국왕이 프랑스라는 국가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를 시사했다. 반면 프랑스인의 황제는 명목상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봉건제도가 폐기되고 새로운 국민국가가 탄생했으며 황제는 그것을 계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3] 구글링을 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Rh-O형이 맞다. 나폴레옹의 사망원인이나 DNA 등에 대한 검사로서 시체 부검과 머리카락의 화학 성분 등을 조사하던 정밀검사 과정에서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4] 레 미제라블을 보면, 왕당파인 질노르망 노인(남주인공 마리우스 퐁메르시의 외조부)가 나폴레옹을 멸칭 조로 일부러 "부오나파르테"라고 부르는 묘사가 나온다.[5] 한국에는 나폴레옹의 음차가 '나륜'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破'는 한국어로 분명히 '파'라고 읽지 '팔'이라고 읽지는 않는다. 물론 '나팔륜'이라고 음차한 경우도 많지만 저 음차한 한자는 '나파륜'이라고 읽는 게 맞다. 어차피 음차라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6] 1748~1825/ 신고전주의 화가. 천재적인 그림 실력과 그에 맞먹는 처세술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나폴레옹 이후까지도 살아남아 천수를 다했다. 그러나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유럽 제패와 권력에 차츰 타락하는 나폴레옹을 직접 마주보면서, 말년에 저 그림을 그린 것을 자기 인생의 흑역사로 취급하게 된다.[7] 심지어 적국인 영국에서 그린 초상화도 마찬가지. 나폴레옹을 유배 보낸 후 그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을 깎아내리기 위해 작은 키에, 배가 나오고, 얼굴도 살찌고 머리숱도 적게 묘사했지만 미남인 본 바탕은 건드리지 않았다.[8] 그의 키는 당대 프랑스인 평균키였으나 당대 귀족 평균키에는 한참 못미치는 키였다. 대신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정말로 단신이었다.[9] 개화기 시절 한국이나 일본의 인물들도 사진을 찍을때 나중에 따라한다.사진[10] 당시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의 식사 시간은 평균 10분 이내, 오래해봤자 15분이었다고 한다. 현대 한국인 기준으로 봐도 급하게 먹는 편이고, 나폴레옹 당시나 지금이나 오랜 식사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인 관점으로 보자면 정말 말도 안되게 빨리 먹는 수준이다.[11]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 정부는 과학적인 미터법을 도입하며 표준화를 시도했으나, 오랜 관습에 젖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황제 즉위 이후인 1812년에 전통 단위들도 인정하되, 미터법을 기준으로 그 크기를 재정의하며 1미터 = 3피에 = 36푸스로 규정한다. 즉 19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1피에가 약 33.3㎝, 1푸스는 약 2.78㎝가 되었다.[12] 친조카임을 부정하는 일부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학계에서 공인된 주장은 아니다. 자세한 논란은 해당 항목을 참조.[13] 특히 의붓아들인 외젠은 인품은 물론 능력도 출충하여 나폴레옹도 그를 친아들처럼 무지 아꼈다.[14] 샤를 보나파르트[15] 친자가 아니라는 설이 있다만 학계에선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16] Felix Pasquale Baciocchi. 코르시카 아작시오 출신. 바초키 가문은 보나파르트와 같은 코르시카 귀족 가문으로, 16세기 중반에 보나파르트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일원 중 한 사람인 톰마조 바초키(Tommaso Baciocchi)가 가족을 데리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이주해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 정착했다. 펠릭스는 톰마소의 7대손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바초키(Francesco Maria Baciocchi, 1716~1779)의 15명의 자녀들(9남 6녀) 중 14번째 자식이다. 15~16세기부터 코르시카, 특히 중심 도시인 아작시오에 살기 시작한 가문들에는 대표적으로 아리기카사노바(Arrighi-Casanova), 도르나노(d'Ornano, 프랑스의 미용 회사인 시슬리(Sisley)의 전 회장이었던 위베르 도르나노와 같은 가문이다.), 라몰리노(Ramolino), 바초키(Baciocchi), 세바스티아니(Sebastiani) 등이 있는데, 이 가문들은 보나파르트 가문과 결혼 관계를 맺거나 각종 교류들을 하여 친밀했고 그래서 펠릭스는 어릴 적부터 근처에 살던 동생뻘인 나폴레옹과 친했다. 이런 둘의 친한 관계 더분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인 엘리자를 펠릭스에게 소개해주어 결혼한 것이다.[17] 전 아내는 부르봉-양 시칠리아의 베아트리스 공주로 그녀의 아버지는 부르봉-양시칠리아 가문의 당주, 카스트로 공작 페르디난도 공이었고 그녀의 동생은 현재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당주이다.[18] 발레프스카는 발레프스키의 여성형이다.[19]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이미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었는데 60대 노인과 지적이고 아름다운데다 집안까지 괜찮은 10대 소녀와의 결혼은 당시에도 드물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아들이 사실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가 10대의 소녀 시절 혼외임신한 것을 늙은 발레프스키 백작이 떠안는 형식으로 결혼한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다만 소문이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은 절대 아니다.[20] 하지만 바르샤바 공작은 폴란드인이 아닌 독일인이었다. 물론 생판 남을 공작에 임명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당시 폴란드 국왕에 단골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주 당선이 되었던 작센 국왕 (당시엔 작센 선제후)에게 공작위를 주었다.[21] 폴란드인은 남성의 성 끝에는 보통 -ski가 붙고, 여성의 성 끝에는 보통 -ska가 붙는다. -ski나 -ska 앞에는 같은 가족이면 같다.[22]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탄생이 아니라 임신[23] 현재는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이유를 조제핀이 둘째 오르탕스를 낳은 뒤 뭔가 알 수 없는 사고로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24] 현재는 샤를 레옹이 나폴레옹의 친자가 맞다는 게 통설이다.[25] 알렉상드르는 사생아라 당시 유럽의 관습으로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26] 하지만 마리아와 나폴레옹의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데다, 무엇보다 외모부터가 나폴레옹과 판박이라서 이런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래에 언급하듯이 나폴레옹의 아들이라는게 엄연한 사실이라......[27] 작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샌드위치의 유래로 유명한 4대 샌드위치 백작인 존 몬터규(John Montagu)의 손자이다.[28] 그 책들 중에 손자병법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프레데릭 맥슨이 나폴레옹에 관하여 연구한 프랑스의 고서 <나폴레옹과 그 가족>1에 의하면 그렇다.[29] 물론 세인트헬레나 동행인들의 기록들에는 이런 피라미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30] http://www.strangehistory.net/2013/12/02/napoleon-and-the-great-pyramid/, 왜 아무 것도 없었는지는 피라미드/이집트 문서 참조.[31] 천재적 수학-과학자로 더 알려져 있지만, 신학자이기도 했으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32] 프랑스 혁명기에 설립된 공병장교 교육기관이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제일의 이공계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다.[33] 이 사실은 헤럴드경제 2019년 1월 24일자 기사인 데스크 칼럼 '체리피킹' 리더쉽에 나온다. 정말로 인류 역대 국가원수들 중 가장 뛰어난 수학과 과학지식을 갖춘 사람 중 하나일듯.[34] 그가 벌였던 토론들중에는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언제부터 존재하는가?'등 상당히 추상적인 주제도 꽤 많았다.[35] 사실 무함마드는 왕을 칭하지 않았다.[36] 라스 카즈에게서 배웠다. 유배지에서는 불어 신문을 보는 게 금지되었기에, 영어 신문이 자신을 어떻게 보도하는지가 궁금했던 듯. 교습 후 얼마 되지도 않아 라스 카즈에게, 아직 어설픈 문법이 군데군데 존재하기는 했으나 영어 편지를 자주 쓸 정도로 실력이 그 나름대로 빠르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라스 카즈가 섬을 떠나게 되면서 교습은 중단되고 말았다.[37] 이 서술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라스 카즈의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어를 '완성되지 못한 언어'로 보았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불규칙 문법 요소들의 산재'. 그래서 자신의 권력이 좀 더 지속되었더라면 프랑스어는 완벽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runned를 고집한 것 역시 그가 그 정도의 간단한 과거형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법의 불규칙성'에 반대하는 자신의 언어학적 신념을 에둘러 드러낸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38] 사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처럼 변화무쌍한 동사 변화가 중요한 언어를 배울 때, 강사들이 흔히 하는 구라 말이 "변화 종류는 많아도 다 규칙이 있어서 쉬워요~"지만 막상 공부하다 보면 '먹다, 자다, 뛰다, 숨쉬다, 생각하다' 등과 같은 일상적인 동사들은 전부 다 일반 동사 변화 규칙에서 '예외'로 처리되어 외우기 힘든 동사 변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포병 장교로 시작해 산술적으로 모든 게 들어맞는 것을 선호하는, 합리적인 성격이었던 나폴레옹 관점에선 짜증날 법도 했다.[39] 나폴레옹은 조세핀의 체취를 좋아했는지, 도착한다는 편지를 보낼때 씼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말로 치즈 비슷한 체취가 났던 모양.[40] 수면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짧아지며, 수면량을 채우는 것보다 늘 규칙적으로 일정시간 자주는 것이 좋다.[41] 당연히 입시생이라도 6시간 정도의 충분한 잠을 자야 한다. 안 그러면 오히려 다음 수업에 지장을 초래하고 복습도 피로에 의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하루를 다 망치기 때문이다.[42] 출처는 리처드 홈즈 저 '나폴레옹의 영광'[43] 몽펠리에 출신의 정치가, 프랑스의 대서기관. 엄청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식가로 유명하다. 얼마나 입맛이 까다로운지 그가 저택에 고용한 수석주방장이 무려 17~19명이나 됐고, 매번 입맛이 맞지 않다고 해고시키고 갈아치운 주방장이 수두룩했다.[44] 정치가. 프랑스 공화국 제3집정관[45] 무엇보다 식사량이 적으면 그나마 낫지만 문제는 나폴레옹은 대식가라서 식사량이 많았다는 것이다. 식사량이 많은데 지나칠 정도로 빨리 먹으면 위장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46] 이 소녀들은 황제였던 나폴레옹에게 온갖 천진난만한 질문들을 하며 나폴레옹의 흥미를 끌었고, 나폴레옹도 그 아이들이 딱히 싫지는 않았는지 '마치 가면무도회에 온 것 같다'라는 긍정적인 심경을 남겼다.[47] 정확히는 완벽 복원은 아니고 2000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3시간 30분 판본으로 복원 완료되었다. 이 영화의 극렬빠로 케빈 브라운로라는 영국 영화 비평가가 있다. 어린 시절 접한 후 이 영화를 복원하고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때문에 이 사람 주 연구분야 역시 무성영화/고전 영화다.[48] 그러나 2016년 영국 영화 협회에서 드디어 블루레이 출시되었다. 3시간 30분 판본[49] 정확히 말해 당대의 5대 강국의 가장 유명한 지휘관 1명은 다 이런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고 영국은 아서 웰즐리, 오스트리아는 카를 대공, 러시아는 쿠투조프, 프로이센은 블뤼허.[50] 징병이 1년에 딱 한번만 가능하고(게다가 승리 후 남은 적군의 예비병도 흡수 불가능하다.) 스페인, 러시아의 경우는 완전 점령을 못할 경우 게릴라의 습격으로 물자, 병사를 잃게 된다. 숨겨진 시나리오인 엘바 섬 탈출은(PC판만 있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깰 수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이 시나리오를 깰 수준이면 코에이의 모든 게임을 깰 수 있다는 말까지 있으니(...).[51] 작품에선 용을 타는 기병. 본래 뜻은 용기병 항목 참조.[52] 조지 워싱턴과 영국왕 조지의 극적인 협상 타결로 미국 독립전쟁은 소요로 끝나고, 영국령 북미연방으로 남게 된 후 1980년대 찰스 2세 집권 시기를 다루고 있다.[53] 코르시카의 혁명가 파올리가 없어서 코르시카가 제노바령이었다.[54] 이 세계관의 호레이쇼 넬슨은 그냥 삼류 제독이 된 걸로 추정.[55] 샤이닝 촬영으로 두 사람은 상당히 안 좋은 사이가 된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촬영 일화들은 상당히 악명 높다. 같은 장면을 별 설명도 없이 다시 찍고 다시 찍고 해서 백번 넘게 찍었던(심지어 길거나 복잡하지도 않은 장면) 일화는 니콜슨을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큐브릭은 니콜슨을 놀리려고 쉬는 시간에 그에게 사진을 찍어준다면서 그 뒤쪽 거울에 비친 자신과 딸을 찍었던 적도 있다.[56] 이름이 Water loop다.[57] 나폴레옹이 폴린에게 조세핀이 좋아하는게 뭔지 물어보는게 "적의 약점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거나 말이다.[58] 현재 출판되는 작품집에 실린 버전에는 문장 부호가 포함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문장 부호가 없다.[예] "내 하는 수 없이 북국(北國) 정벌을 계교하고 오월 드레스덴에 사십만 병을 거느리고 니이멘 강(네만Neman 강)을 건넜을 때에는 육십만을 넘어 팔월 스몰렌스크를 떨어뜨리고 구월 노장 쿠소프보로디노에 깨뜨리고 일로 모스크바를 들어갔으나―실패는 여기서 왔다 그 북쪽의 호지(胡地, 오랑캐 땅) 눈과 추위와 거기다 화재는 나고 군량은 떨어지고 수십만 부하를 눈 속에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얻어 가지고 되땅(되놈의 땅, 즉 오랑캐 땅)을 벗어나온 것이 다음해 칠월―한번 기울기 시작하는 형세는 바로잡을 도리 없어 어리석은 자의 옥편(玉篇) 속에만 있던 '불가능'의 글자가 어느덧 내 마음속에도 살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60] " '불가능'은 프랑스어가 아니다."라는 뜻이다.[61] 실제로는 평균 이상으로 그리 작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당대 귀족들 중에는 작은 편이었고 항상 상당히 큰 키에 높은 곰털모자까지 쓰고 다니는 프랑스 제국 근위대와 다니다 보니 그런 인식이 생긴 듯.[62]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러시아 원정을 떠났단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100여년 후 한 장교가 이 말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형 참사를 일으킨다.[63] 물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시 보급의 중요성을 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병참장관에게 충분한 식량과 건초, 그리고 이를 나를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였고, 여기에 1만 2000프랑 한화로 1억 넘는 상금까지 걸면서 최초로 병조림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나폴레옹이 준비한 어떤 전역보다 방대한 보급체계가 갖춰졌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걸로 택도 없었다는 것이었다.[64]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러시아 원정 경우 무리하게 전선을 늘려서 러시아를 공격하다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참사가 일어난거다 즉 보급문제도 있지만 무리하게 전선을 늘리는게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였다 대표적으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이 무리하게 전선을 확대하다가 끝내 패배했다.[65] 자신이 정복한 유럽 각국들의 봉건적인 제도들을 폐지하면서 한 발언으로 나폴레옹 최고의 이타적인 명언. 이것이 나폴레옹이 후대에 그를 롤모델로 삼은 전 세계의 군사독재자들과 가장 다른 면모.[66] 이 말도 후대에 그를 모방하려고 했던 전 세계의 군사독재자들과 가장 다른 나폴레옹의 면모.[67]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 중 한 말로 유명하다.[68] 총재정부 시절 나폴레옹의 군사적 명성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공화정부가 군부에 대한 나폴레옹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공동 사령관을 임명하여 하루 간격으로 번갈아 지휘하도록 지시한 일이 있었는데, 이에 나폴레옹이 "차라리 내가 사령관을 그만두겠다"라고 반응하며 한 말이다. 결국 나폴레옹보다 나은 사령관을 찾을 자신이 없던 총재정부가 물러서야 했다. 이후 군사 부문에서 '지휘 체계의 통일성'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구 일본군의 실패가 대표적인 사례.[69] 운동화를 신은 마윈[70] 카롤린 뮈라와 조아킴 뮈라 부부의 배신에 열받아 외친 말이다.[71]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죽음에 한 말.[72] 1814년 6월 26일 메테르니히에게 한 말이다.[73] 위의 발언과 같은 상황에서 한 말이다.[74]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이후 한 말이다.[75] 세인트헬레나에서 자신의 삶을 회상하며, 16세의 나이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4세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으며, 34세만에 황제가 되는 소설 같은 삶이었다.[76] 역시 위와 같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며 했던 말이다. 참고로 영화 '워털루'에서도 똑같은 대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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