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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교에서 넘어옴
Nesto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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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종파
비 칼케돈파
서방교회
동방교회
가톨릭 (Ecclesia Catholica)
개신교(Ecclesia Reformata)
정교회(Ecclesia Orthodoxa)
1. 개요와 명칭2. 안티오크 학파와 네스토리우스
2.1.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논쟁2.2. 에페소 공의회
3. 중세
3.1. 페르시아, 중앙아시아3.2. 당나라로 전파3.3. 몽골 제국에서의 관계3.4. 탄압과 쇠퇴
4. 근세5. 현대
5.1. 현대의 네스토리우스 종파
6. 특징
6.1. 교리와 전례
7. 신라 전래 떡밥

1. 개요와 명칭[편집]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로 칼케돈 교파이다. 기독교 초창기에 나오고 5세기이후 심하게 탄압받아 주로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고, 현대까지 이교파는 존재한다. 지금은 소수만 남은 상태. 네스토리우스의 신학론이 중심인 교파이기에 구미권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라는 식으로 부른다. 이들은 기독교의 초대 공의회 중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만을 인정한다. '경교'라는 이름은 중국 당나라 시기 빛의 신앙이라는 뜻에서 경(景)이라고 불렀다. 경은 언덕 위에 건물이 있고 그 위에 해가 빛나는 모양. 물론 당나라 시기 중국에선 경교라고 부른 것은 조로아스터교를 중국에서 배화교로 부르기도 하는 것처럼 현지화된 명칭.

2. 안티오크 학파와 네스토리우스[편집]

'네스토리우스파'라고 불리는 주장은 네스토리우스의 독자적인 주장이라기보다는 초기 교회 시절부터 이어져 온 안티오크 지역 교회의 특성의 영향이 크다. 안티오크는 동방 무역의 중심지로 비록 지중해 헬라 문화권이긴 해도 근처 시리아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고, 교역의 중심지였기에 아시아 지역 언어를 쓰는 주민들도 상당했다. 그리하여 라틴과 그리스 문화권의 기독교 신학과는 다른 모습으로 신학이 발전했는데, 성경 해석에 대해서 역사적이며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를 주장하여 인정받으며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선고받았는데,[1]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다르며 동시에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아타나시우스 본인의 신학으로도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교회 인사들이 전전긍긍하며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며 설명해 나갔는데, 훗날 대적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적인 요소가 어떻게 섞일 수 있었는지 파악할 방법이 없다.
닛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안티오크 학파는 아타나시우스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고,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체와 혼을 모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성장의 과정도 겪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관계로 연합할 수 있었으며, 그 성장 과정은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완성되었다고 했다. 니케아 신조에 따라 안티오크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도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변형된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간직한 채 스스로 사람의 형체를 입고 자신을 사람의 본성에 연합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사람의 본성을 하나의 신체적 기관으로 사용하면서 그 기관을 통해 활동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렇듯 두 본성은 각기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만, 자신들의 활동과 목적의 일치에 의해서 연합될 수 있었다는 것이 안티오크 학파의 주장이다. 안티오크 학파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모두 손상됨이 없이 보존하는 방향으로 신학을 정립했다. 따라서 신성과 인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점차 융합되어 가는 방식으로는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적 본성을 가지신 분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육체와 혼을 가진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안티오크 학파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취임할 당시 안티오크 학파의 주요 인물은 안티오크 근처 현재의 터키 몹쉬스티아(Mopsuestia) 출신이었던 안티오크 총대주교 테오도투스(Theodotuse)였는데, 그는 본래 변호사가 되려고 수사학을 공부하다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로 10여 년간 수도 생활을 한 뒤 안티오크 학파의 창시자로 불린 디오도루스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여러 저작을 남기며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비판했는데,[2] 저작 <성육신에 대하여>를 통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을 논박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분인데 영원한 분만이 그를 낳을 수 있으며 마리아는 육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 예수 안에 거함이 마치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심과 같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일체됨은 부부에 비유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예수로 변형되었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에 내재했음이 맞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가 예수의 몸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말한 변형론은 이교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변형 또는 변질이라는 용어는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는 한 사람(prisopon)일지라도 두 속성(physeis)을 지녔다는 테오도투스의 주장에 반발했다. 그런 논리는 마치 그리스도가 머리 두 개 달린 괴물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빈정거렸다. 당시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수에 내재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의 본질의 문제냐 행위의 문제냐의 주제와 관련하여 열띤 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테오도투스는 "하나님은 아들과 더불어 한 위격이 되어 아들로 하여금 권위를 가진 자신의 동업자가 되게 만들었다. 아들은 하나님의 모든 언행을 아들을 통해 나오고, 최후의 시험과 심판도 아들을 통해 한다. 예수는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기에 성령으로 수태될 때 이미 그리스도인 하나님이 그에게 내재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선악을 구별할 나이엔 이미 다른 사람보다 더욱 지혜를 나타낼 수 있었고, 세례 전후에는 최고의 덕에 달하는 은혜로운 삶을 삶으로써 예수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분리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으며 그리스도와 일체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따랐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남다르며 하나님의 본질이나 행위도 아닌 휼륭한 즐거움(eudokia)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봤다. "이 훌륭한 즐거움은 하나님의 훌륭한 의지이며 그리스도의 내재한 사람이 하나님에 몰두하기에 하나님이 느끼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하나님에 멀어진 자는 불의한 사람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가치 있게 여기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한계가 없고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선택받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세기 후반 출생한 인물로 지금은 터키에 속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시리아 지방에 속한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크 근처 출신이다. 현재 그와 관련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알려지기로는 타고난 명설교가이며 수려한 외모에 매혹적인 음성, 뛰어난 사고력과 언변, 신학적으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있었고, 안티오크 교회에서는 그의 설교를 들으러 사람들이 몰려 교회당이 미어 터질 정도였으며 사람들이 툭하면 설교 시간에 아멘과 찬탄을 외쳐서 자주 끊길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의 명성을 듣고 서기 42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3]로 임명한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를 만난 자리에서 야심에 찬 발언을 하는데...
황제 폐하! 이단자들이 없는 세상을 제게 주십시오, 저는 폐하께 그 대가로 천국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단을 파멸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폐하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불과 3년 후 그가 도리어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하고 적국 사산조 페르시아로 도피하는 아이러니한 신세가 되었다. 발단의 원인은 그가 테오도코스 용어를 반대하는 데서 비롯되었지만, 그 연원은 앞서 서술한 대로 초기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 논쟁이 원인이었다.

2.1.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논쟁[편집]



니케아 공의회 때에 안티오키아 파벌과 알렉산드리아 파벌은 힘을 합쳐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하지만 이후 자신들의 단어 사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자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키아 파벌은 서로간의 간극이 너무나 큼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나무파일:external/pursuingveritasdotcom.files.wordpress.com/council-of-ephesus.jpg

이전까지 로마 제국과의 항쟁을 하던 그리스도교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인정을 받게 되자 이제 내부의 적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으며 최초의 항쟁은 아리우스 파벌과의 항쟁인 니케아 공의회였다. 아리우스 파벌을 제거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논쟁 즉 그리스도론을 논하기 시작하며 내부의 적들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수많은 항쟁중 큰 항쟁은 네스토리우스 파벌을 제거하는 에페소 공의회를 들 수 있으며, 이후 에페소 공의회의 승자들 간에 의견을 정리는 과정인 칼케돈 공의회를 들 수 있다.

4세기말 로마제국은 서기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이 동서로 제국을 분할 상속 받았으나 기독교 세계 자체가 분리 된 것은 아니었다.
5세기들어 서로마는 거의 망한거나 다름없는 상태고 로마는 410년 고트족의 알라리크, 455년 반달족의 약탈, 훈족의 침략에 탈탈 털리며 유지에도 급급한 상태라 신학적 논쟁은 동방에서 주도할수 밖에 없었다.
당시 총대주교구가 설치된 지역은 옛 수도 로마, 제국 제 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제 3의 도시 안티오크 였느데 로마가 맛이 가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위세가 강했고 신학자들 또한 많이 배출이 되었다. 안티오크 또한 동방 교역의 중심지였는데다가 시리아 출신 기독교들의 지지로 역시 위세가 대단했고 두 학파의 대결은 비록 헬라화 된 그리스어 문화권 학자들이긴 하지만 단순히 신학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지역적 문화적 충돌의 대리전 양상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알렉산드리아 파벌과 안티오크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비록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주교가 되었으나 콘스탄티노플 사제와 신학자들은 황제 낙하산 안티오크 출신이 자신들의 주교가 되었기에 이를 불만이 많았다.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 설을 주장했고, 반대로 네스토리우스가 속한 안티오크 학파에서는 단순히 인간 예수를 낳은 안트로포토코스(Anthropotokos) 혹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란 뜻의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설을 주장했다.[4]
몇 세대 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시점엔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은 15%정도였고, 4세기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정책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강제 개종(?)으로 이방신전들을 때려부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기존 풍습은 비록 개종자라 하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동안 동방의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 딸 페르세포네 숭배 풍습이 성했었고, 그리스 신화에서도 제우스가 바람펴서 인간에게 낳은 신 이야기가 많아서 예수를 낳은 마리아에게 신의 어머니라 부르는것은 당시 풍속에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란 어휘에는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안티오크 학파에선 이를 매우 경계했다.

발단은 네스토리우스의 발언 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미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용어를 쓸것을 주장해서 이미 반대파에게 욕을 퍼먹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젖먹이 어린아이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전해지자 반대파에선 그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며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된다. 사실 이 발언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왜곡 된것인데 실제 후일 발견된 저작에서 그가 남긴 말은 "하나님이 젖을 먹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였다.


알렉산드리아 파벌은 그리스 철학인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사상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의 정신인 로고스(요한 복음서 처음에 나오는 말씀)가 인간의 세상에 들어와 완벽한 대속물으로 죽임을 당하여 구원을 이루는 신학을 위주로 하였다

이와는 전혀 다르게 안티오키아 파벌은 유대주의에 근거를 하여 신학을 주장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부당한 사탄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복종의 아름다움을 보였으며, 죄 없는 예수가 사탄에 의해 죽음으로써 이전까지 사탄이 내세웠던 주장의 근거인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는 사탄의 주장이 허망한 것임을 예수는 증명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따라 모든 인간은 예수를 본받아 하느님께 다가감으로써 사탄의 주장인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복종의 구원론을 가르쳐 준 존재가 예수라는 안티오키아 신학의 대결이었다.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직에 취임한 안티오키아 출신의 수도원장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사고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한 그의 학문적 배경, 안티오키아 학파에서 등장한 것이었고, 신성(神性)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와 인간 예수 간의 두 위격이 느슨하게 연합된 것이었고, 때문에 하느님에게는 어머니가 없으며 단지 예수의 인성을 낳은 어머니였기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용어 자체가 네스토리우스 눈에는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시키는 용어처럼 보였고, 그는 당시 안티오키아 학파(사람의 어머니)와 알렉산드리아 학파(하느님의 어머니) 간의 대립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를 도출했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에페소 공의회의 각 파벌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 A.이성론(네스토리우스派, 안티오키아)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인성, 신성, two nature)를 가진 2개의 위격(two united hypostasis, two united qnome)이 서로 연합(union, united)하여 하나로서 작용함.
- B.양성론(키릴로스派 일부)[5]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인성, 신성 two nature)이 결합하여 하나의 위격을 형성함(one conjunct hypostasis, one conjuct qnoma) 이다.
- C.단성론(유티케스派 [6])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이 융합되었으며, 인성은 마치 포도주가 바다에 빠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인성도 신성에 흡수되어 하나의 본성(신성)만이 남은 하나의 위격(one hypostasis)
- D.합성론(키릴로스派 일부) : 하나의 인간 존재(one prosopon) 속에 2가지 본질이 어우러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하나의 본질 (신성과 인성이 혼합된 새로운 성격, two nature mixed into one new mixed nature, miaphysis)로 만들어진 하나의 위격(one hypostasis)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존재 내에 2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이 존재하며, 이 2개의 본성은 각기 다른 2개의 격(신격과 인격)을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2개의 격은 서로 연합하여 함께 작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하나의 존재 안에 2개의 위격이 서로 연합한 것이 그리스도로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주장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키릴로스[7]는 사상은 하나의 존재 내에 2개의 본성(신성/인성)이 서로 결합된 하나의 위격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발언은 단지 성모 마리아 문제가 아니라, 그 전까지도 계속해서 논쟁되어 왔던 그리스도론 문제로 이어졌다.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신학적 중심지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이 두 학파 간의 입장은 이전 아리우스파 논쟁과 삼위일체론을 통해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키릴로스요한 복음서에 있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라는 말을 인용하며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의 본성'이라는 것으로 설명된다. 즉, 하느님으로서의 예수와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분리되는 것이 아닌 총체적인 하나의 인격으로써 설명되어야 하며[8], 따라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으로 공존하는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합당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입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는데,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경을 역사적 문헌적으로 해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역사적 존재로서의 실체를 강조했다. 이 입장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와 그가 이끄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큰 반발을 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 비유적 의미를 고려할 것을 강조했다.[9] 또한 그들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 즉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내세웠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양 위격(인격과 신격)을 강조하며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반면 키릴로스는 예수 안에 두 본성이 한 위격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마리아론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론이다. 인간이자 동정녀인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았다는 명제를 예수 입장에서 풀면, 예수는 하느님이면서 사람(마리아의 아들)이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이러한 명제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훼손할 여지가 있으며, 마리아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를 막고자 동정녀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낳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마리아가 그리스도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페르소나(인격)만을 낳았다고 말하는 순간,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다고 주장할지언정, 그리스도가 가진 신으로서의 페르소나(신격)가 필연적으로 분리되는 논리적 약점이 있었다. 키릴로스는 이 약점을 파고들어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했다.

2.2. 에페소 공의회[편집]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3차 공의회를 431년 에페소에서 개최했다.
평생 수도자로 살았던 네스토리우스에 비해 정치적으로 좀 더 노련했던 키릴로스가 이 공의회의 주도권을 잡았다. 애초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누스 대주교로 임명하긴 했으나 제국내 종교 단일화를 위해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테오도시우스의 누이 풀케리아[10]도 하느님의 어머니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신학자들을 들들 볶아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황제가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서 최후까지 있었다는 에페소스의 성모마리아 교회에서 공의회가 열게 한것도 그 이유였다. 키릴로스와 네스토리우스에 적대적인 콘스탄티노플 신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 동지들인 안티오키아 학파와 시리아 에데사의 주교들이 악천후로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않은 상태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끝내버렸다. 키릴로스는 뛰어난 논변가이며 사상가이지만 동시에 히파티아라는 여인을 살해하는걸 승인한 냉혈한이었다.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몰아갔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배격하는것으로 공의회는 끝난다.
뒤늦게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도착하자 그의 주장을 따르는 학자들과 회의를 열어 키릴로스를 논박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입장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가 도리어 쫓겨나 유배에 처해진다. 뒤늦게 당시 로마주교의 사절은 찬성 의견을 표시했고[11]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들의 동의표를 얻어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임을 재확인하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이성론으로서 이단임을 천명했다.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이후에 에페소 공의회를 '키릴로스의 공의회'라며 씹었으며, 자신의 파벌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키릴로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계속되는 논쟁에 빡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키릴로스도 체포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와 달리 키릴로스는 탈출했고, 비상한 정치력과 막대한 뇌물로 무마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한다. 마침내 그는 이 기나긴 논쟁의 최종 승자가 된다. 2년 후 네스토리우스가 쫓겨난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무력하게 황제와 키릴로스의 의견에 굴복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

2.2.1. 번외편: 칼케돈 공의회오리엔트 정교회[편집]

참고로 그리스도론 논쟁에 대하여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네스토리우스파는 정통 교회 안에서 축출이 되었으나 이번엔 승자들 내부의 의견 정리가 남아있었다. 즉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격을 가진다'는 결론은 명백하게 내려졌지만, 그 하나의 위격이 어떤 본성으로 이루어져있는지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명확히 나오지 않았기에 의견을 정리해야 했다. 사실 양성론, 합성론, 단성론은 모두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에게 맞선 키릴로스의 사상에 그 근본을 두고 있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인 키릴로스 자신은 떡밥이 폭발하여 한참 키배가 벌어지는 이 시기에는 이미 사망하여 있었다(...) 결국 칼케돈 공의회가 소집되어 단성론은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양성론과 합성론은 단성론을 단죄한다는 데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정통교리를 정식화하는 데에서 잡음이 터졌고, 합성론은 오리엔트 정교회로 떨어져나갔다.

어쩌면 안티오크 교구의 전통은 네스토리우스파로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3. 중세[편집]

네스토리우스의 파벌은 이후 페르시아인도에 전파, 심지어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3.1. 페르시아, 중앙아시아[편집]

정통파 신학을 거부한 네스토리우스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제국 안에서는 거의 절멸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로마 제국 내부에서 쫓겨난 뒤에 동방 선교를 개시했고 페르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기독교인들은 1~2세기에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에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점차 많은 이들이 파르티아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교회를 형성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인 성 토마스와 성 아다이, 성 마리가 기독교를 전했다고 한다. 그외에도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무찌르고 7만에 달하는 로마군 포로와 시리아,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유린하며 잡아온 로마 시민들을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시아의 국경으로 보내 도시를 개발하고 살게 했는데 이들 페르시아령 메소포타미아(아수리수탄)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기독교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전파되는 원인이 되었다.

파르티아와 그 뒤를 이은 사산 왕조는 이들에게 특별히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나 270년대에 한 차례 박해를 가했고 샤푸르 2세부터 본격적으로 박해를 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에게 페르시아에 기독교도들이 있다니 기쁘고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뒤로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2세는 기독교도들을 로마의 간첩으로 의심했고 조로아스터의 사제들은 그 의심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샤푸르 2세는 318년부터 박해를 시작했고 339년부터는 더 크게 박해했다.(339 ~ 379) 샤푸르 2세는 먼저 기독교도들은 군역을 지지 않는 대신 세금을 2배로 내라는 칙령을 내렸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도 했다. 제국의 중심지 중 하나인 수사에서 시작한 박해는 2주 이상의 학살로 이어졌고 다른 도시들로도 퍼져나갔다. 어떤 교회 사가는 죽은 이들 중에 이름이 알려진 신자만 1만 6천이었다고 하니 많은 숫자가 기독교도란 이유로 학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샤푸르 2세의 박해가 끝난 뒤에 교회는 잠시 안정을 되찾았지만 바흐람 5세가 즉위하자 다시 박해를 받았다. 살갗을 벗기거나 몸을 묶은 뒤 쥐들이 들끓는 구덩이에 던지거나 신체를 절단해 죽이는 일들이 빈번했고 바흐람 5세 뒤에 즉위한 야즈데게르드 2세의 박해는 446년 카르카에서 10명의 주교[12]와 15만 3천명의 교인들이 학살당하는 최악의 박해였다. 지금도 그곳의 교인들은 9월 25일에 모여 순교자들을 위해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이렇게 심하게 박해를 받았지만 기독교는 사산 제국 내에서 살아남았고 이 박해를 피해서 5세기경 중앙 유목민 사회에 전파되고,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이 북상할 무렵 중요 도시에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특히 학교와 수도원이 결합된 제도로서 흩어져 있던 네스토리우스 신자들에게 어려운 환경에도 생존할 수 있는 지식과 신앙심을 부여하고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가지게 해 주었다고 한다.

페르시아 교회 사람들이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인 이유로는 페르시아 교회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네스토리우스를 동정했었다. 박해와 관용을 번갈아 하는 변덕스러운 페르시아 제국의 왕중왕들은 페르시아 교회의 기독교도들을 로마 제국의 간첩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이단시하는 네스토리우스파를 받아들이는 것은 왕중왕의 박해를 피할 좋은 기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에페소 공의회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동로마 제국 황제 제논의 칙령으로 네스토리우스파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에데사의 페르시아 신학교가 문을 닫고 추방령이 내려진 뒤에 로마 제국 내의 네스토리우스파가 페르시아의 니시비스로 이주하여 니시비스 신학교를 열자 페르시아 교회 사람들은 네스토리우스파와 연합했다. 그 결과가 497년의 셀레우키아-크테시폰 공의회로서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서방 교회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3.2. 당나라로 전파[편집]

7~8세기경 중국에 전래된 경교의 전례(성지주일을 묘사한 것)
당시 국제상인인 소그드인의 개종에 따라서 7세기 초반 당나라의 수도 장안까지 네스토리우스교가 전파되었다. 머리는 불교처럼 밀지만 수염은 기르는 방식의 현지화에 성공했다고 전한다. 또 경교는 의료 행위를 통해 중국인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으려했다. 원래가 그리스-로마와 페르시아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를 세운 지역에서는 아픈 이들에게 의학적 봉사[13] 를 하면서 지지를 얻어나갔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똑같이 한 것인데 대표적인 사례가 경교 선교사이자 의사인 숭인이 당현종의 맏형 이헌치의 난치병을 치료한 것이다. 또 경교의 의사가 의료 행위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로는 구당서 고종기에 시의 진명학이 당 고종의 실명 증상을 백회를 찔러 치료한 기록이 있는데 진명학의 이 방법이 히포크라테스의 방법과 유사하고 백회를 찔러 실명 증상을 치료하는 것은 당시 중국에는 없던 치료법[14]으로 그리스와 아랍에서 쓰던 치료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치료법을 알고 있던 진명학을 로마에서 온 경교도이며 성씨인 진이 로마를 뜻하는 대진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15] 그외에도 경교의 사원은 병을 치료하는 직책과 치료 역할을 맡은 승려가 있었고 사원은 배고픈 이들에게 식량을 주고 병든 이들은 치료하며 시신을 염하는 일을 했다. 이후로는 곽자의 등의 유력무장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8세기를 전후로 이슬람이 부흥하고 실크로드가 절단되면서 외부에서의 유입이 끊겨 점차 쇠퇴하였고, 삼무일종[16]의 법난에 휘말려 된서리를 맞은 후 황소의 난에서 다시한번 대거 학살[17]당하며 소멸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중앙아시아 일대에서는 국제상인인 소그드인의 도움으로 큰 세력을 펼치면서, 10세기 이후 중국 본토에서 경교는 멸하지만 중국 외곽에는 큰 영향을 펄치고 이는 중국에서 나온 경교인들의 영향도 있었다.

3.3. 몽골 제국에서의 관계[편집]

몽골 제국 시기 네스토리우스 유물
한편으로 소그드의 상인들은 투르크-몽골 유목민들에게도 전파, 수령의 결정에 따라서 집단적 개종을 하여, 케레이트메르키트, 나이만, 웅구트 같은 유목집단이 대거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이 서구에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가져오게도 하였다.

그 중 세력이 큰 것이 케레이트로서 13세기까지 그 세력이 남아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 지배자 옹칸에게 혼인 요청이 거부된 후 전쟁을 벌이나 처음에는 패배하고 이후 다시 승리하여 세 딸을 자신과 큰아들 주치, 막내아들 툴루이의 부인으로 삼았다. 이중 막내아들 툴루이의 부인은 소르칵타니 베키라는 이름을 가졌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에게 네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 몽케와 둘째 쿠빌라이 칸은 4대, 5대 대칸이 되었다. 소르칵타니 베키는 1252년 사망하지만, 그녀의 명성은 그치지 않고, 마침내 몽골인에게는 일종의 성녀로서 숭배와 제사의 대상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이렇게 몽골 제국은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인 면을 보는데 사실 몽골인들은 모든 종교에 다 관대했다.

중동의 상황을 보면 중동의 지배자 일 칸국의 창시자는 소르칵티나 베키의 셋째 훌라구로서 그는 케레이트 옹칸의 손녀 도쿠즈 카툰를 첫째 아내로 삼아 기독교에 관대한 면을 보였다. 그의 후계자 아바카는 동로마의 황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3.4. 탄압과 쇠퇴[편집]

하지만 아바카 사후 그의 동생 테구테르는 어머니의 영향에도 불구, 이슬람을 신봉하고 기독교를 탄압하였고[18], 이후 중동에서 네스토리우스교는 탄압의 나날을 겪게 된다. 특히 서구 교황과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중동의 지배자인 몽골인들에게 기독교가 멀어지게 되자 (또 이슬람에 가까워지자) 무슬림들의 극단성이 폭발하게 되고 이는 대학살을 가져오게 된다. 특히 1297년 이르빌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좋은 예로, 이는 시내의 쿠르드족 무슬림교회를 파괴하자 그곳에 주둔하던 몽골계 병사가 무슬림을 활로 쏴죽인 것이 발단으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포위하고 이르빌의 대주교와 사제들은 붙잡아 살해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총주교 야발라하가 1317년에 죽은 후 네스토리우스교는 최후의 보호막마저 잃어버리고 14세기 말까지 끝없는 쇠망과 추락의 연속의 역사를 겪고, 14세기 말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과 무차별적 주민 학살로 거의 끝장나게 된다.

즉, 네스토리우스교가 몰락한 근본적 원인은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경도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서 보호장치가 사라져 버린 것이라 볼 수가 있다. 16세기 중반이 되면 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4. 근세[편집]

티무르의 침공 이후, 14세기 말 티무르의 공격으로 힘들어진[19] 신도들은 현재 이란, 이라크, 터키 3개국 국경인 하카라 신지로 피했는데, 이들의 대다수는 쿠르드족[20]으로 주변이 온통 무슬림인 적대적인 환경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네스토리우스 교단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과제는 생존이었고, 교단에서는 결속력을 유지하고 구심점인 총대주교의 사도 전승을 보존하려는 의도로서 총대주교를 선출에서 특정 가문에서 세습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혼인이 불허된 자리였기 때문에 숙질 계승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계승을 둘러싼 암투를 야기했고 그 결과 교단은 분열의 운명에 처했다.[21]

16세기 초 교단은 총대주교직 계승 문제로 인하여 둘로 분열되어, 한쪽은 자파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고 로마로부터 총대주교 임명장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가톨릭과의 일치를 추진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교단의 독립성을 고수하는 구파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전반과 중반, 구파의 총대주교들은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가톨릭 교의를 받아들이고 그들 역시 교황의 임명장을 받게 되자 이번엔 신파가 다시 반가톨릭으로 선회했다. 이렇게 해서 구파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칼데아 가톨릭이 되었고 신파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로 이어지고 있다.

5. 현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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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치열한 내분으로 교단 지도층이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는 동안 교도들의 상황도 날로 악화되어 갔다. 특히 1843년 쿠르드족과 충돌이 벌어지면서 대학살극으로 10만으로 추정되던 전체 신도 중 2만이 사망했던 것이 가장 악영향을 미쳤다.

신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쿠르드족과 오스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4만의 신도들이 이라크 북부 모술평원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은 독립국 건설의 희망을 가지고 오스만 제국과 싸웠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933년 영국의 신탁통치가 끝난 후 독립한 이라크 역시 그들을 인정하지 않자, 일부 무장 신도가 시리아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거부당하고 귀환 도중 이라크 정부군, 쿠르드족, 베두인들의 공격으로 거의 몰살당하고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5.1. 현대의 네스토리우스 종파[편집]


다만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칼데아 가톨릭은 현재 교리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완전히 일치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다.
신자 수는 칼데아 가톨릭이 50만,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40~50만, 고(古)동방교회가 10만 정도로 추정된다. 해당 항목을 참조바람.

6. 특징[편집]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위의 근세사 단락에서 언급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십자고상을 포함한 성상이나 이콘을 쓰지 않고 십자가 도안만을 사용한다.(출처)[22] 다만 십자가 자체가 이콘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는게 개신교와의 차이점이다.(참조1, 참조2) 또한 전례에 쓰는 기도문오리엔트 정교회동방정교회 등 다른 동방 교회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성체성사때 쓰는 제병도 상당히 독특한데, '말카'라고 부르며 마치 두꺼운 호떡을 연상케 하는 형태이다. 오븐에 굽는 게 아니라 기름 두른 후라이팬에 지져서 만드는 것도 특징.

반면 칼데아 가톨릭 교회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관계로 성상 , 십자고상, 이콘을 모두 인정한다.

6.1. 교리와 전례[편집]


원죄와 예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죄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의 도움 없이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론의 핵심이다. 여기에서는 원죄를 주장한 학자들이 이단 딱지를 맞았다.
전례는 세례(침례에 가깝다), 성찬이 가장 중시된다. 이를 위해 성례전을 베풀고 십자가의 표지로 낙인 찍는 자격을 가진 성직자가 필요하다. 성직자의 자격은 서른 살이 넘은 기혼자로 도덕적 평판이 좋은 자이다. 고해는 개인적이 아닌 모두를 위한 공개적인 사도식으로 열리며 성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 오디쇼의 성례전은 이런 고해절차가 있지만 총대주교 디모데 2세의 성례전은 없다.[23] 아마 개인적 참회가 인정되는 듯하다.

7. 신라 전래 떡밥[편집]

초기 경교 유물로 '추정되는' 신라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1967년 경주시에서 십자가가 발견되고, 성모상과 비슷한 보살상이 발견되었다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그러나…숭실대기독교박물관에 소장중인 이 '유물'(동십자가 문양, 성모상)은 학술적 발굴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참조기사) 일단 발견자가 우연히도 기독교 목사 겸 숭실대사학과장 김양선 씨다. 그가 경주시불국사에서 땅 위에 드러난 십자가성모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1967년 당시에 이미 사학계와 기독교계로부터[24] 헛소리라는 욕을 들어먹었으며, 그 여파로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이 한동안 문을 닫기도 했다.

김 목사가 돌십자가를 발견(발굴이 아니다)한 장소도 어느 곳의 암석 위였다느니(당시 기사), (신라 불교의 상징이자 심장인) 불국사 대웅전 석등 밑이라니 하면서도 정작 정확한 발굴 위치나 출토 상황에 대한 공개는 전무했다. 즉 우연히도 기독교 목사우연히도 경주시에서 우연히도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1,500여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기독교의 유물을 우연히 발견했다는 기적의 결과가 신라시대 기독교 유물인 것이다.
우연히가 왜이리 많냐??

아울러 어쨌거나 신라시대 유물로 인정하여 네스토리우스교가 9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떡밥이 돌지만, 이것이 종교로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정말 기독교 계통 유물이라 해도 단순히 '외국의 장식품'으로서 생각해서 물건만 들여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주에서는 신라 황금보검이나 여러 유리공예품 등등 유럽에서 만들어 실크로드아라비아 상인의 바닷길을 따라 신라로 전래된 유물은 이미 많이 발굴된 바 있으며, 비슷한 예로 북유럽국가인 스웨덴에서도 불상이 발견된 전례가 있지만(링크), 바이킹이 교역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추측할 뿐 불교북유럽에 도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바이킹 불자설 게다가 십자가 '문양'이 곧 기독교 유물이고, 아이를 안은 어머니 상이 곧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상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불교에서도 모자(母子) 불상이 있으며 대지모신, 풍요, 다산, 자애를 의미하는 모자상은 고대에 특정 종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
[1]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인기는 상당했고, 특히 로마 군인들이 선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조차 죽기 전 아리우스파에 경도된 사제에게 세례받았고, 북방 게르만족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2] 테오도투스는 41권 분량의 저작을 남기며 성경 신학 수도원에 대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나, 이단으로 선언되어 지금은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문서에서 간접적으로 왜곡된 주장만이 남아 있다.[3] 콘스탄티노플이 총대주교구로 승격한 건 451년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서였다.[4] 개신교의 경우 네스토리우스의 주장과 유사하다. 테오토코스 용어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무리들에 대한 위격 강조의 결과로 본다. 이와 별개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완전한 하나라는 것은 인정한다.[5] 후에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으로 확정된다.[6] 키릴로스의 조카로 후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키릴로스 또한 숙질승계로 총대주교가 되었다[7] 가톨릭에서는 치릴로, 영어권에서는 시릴. 헬라화된 알렉산드리아인이라 그리스식인 키릴로스로 표기함.현재 정교회와 가톨릭에서 교회박사로 지정되었다. 의 축일은 6월 27일이다.[8] 그러나 이 주장은 후에 단성론 논쟁으로 이어지게 된다.[9] 이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큰 영향을 끼친 교부인 오리게네스의 영향이다. 오리게네스는 성경에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교부이다.[10] 테오도시우스 2세가 어릴 때 섭정을 했으며, 이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1] 사실 초기 공의회 시절은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들의 독무대였다. 그리스어를 사용치 않는 서방의 학자는 전혀 존중받지 못했는데 성서는 70인역이 그리스였고 신약은 아예 그리스어가 원본이었다. 그리스어를 모르는 야만인들은 동물처럼 꽥꽥 거리며 의사소통을 벌인다 말할정도로 동방의 문화적 자부심은 대단했고, 로마 전성기 시절에도 로마 지배층들은 아테네나 로도스로 그리스 유학을 왔었다.[12] 411년에 36명의 주교가 모인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교회를 구성하는 핵심 인사들의 상당수가 처형당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중동의 역사. 문명 탄생의 요람(스테판 버크) [13] 자그로스의 어느 기독교인 성자는 무슬림 토후의 말을 치료해주었다 수도원에 대한 특권을 받은 적도 있다. 출처 : 기독교 세계의 등장(피터 브라운)[14] 담빈록을 보면 백회와 뇌호 두 혈을 찔렀다고 나오는데, 상세한 내용을 보면 백회를 찔러 피를 내겠다는 진명학의 말을 듣고 측천무후가 격노하여 '저 자의 목을 베라! 천자의 머리 위가 어떻게 피가 나오는 곳이냐?!' 라고 말했는데 신성한 천자의 신체, 그것도 머리에 피를 내겠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아예 들어보지 못한 치료법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종이 고통을 호소하며 찌르라고 명했고 치료가 효과를 보이자 측천무후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고 진명학에게 큰 상을 내렸다.[15] 출처 : 중외의학문화교류사(마보영), 실크로드학 사전(정수일)[16] 987년의 어느 수도자가 한 보고에 따르면 중국 교회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845년에 황제가 가한 탄압이 원인이라고 한다.[17] 아부자이드의 동유기에 당희종 건부 5년에 황소가 광주를 공격, 함락했을 때에 12만의 무슬림, 유태인, 조로아스터, 마니교, 기독교도들이(상호(商胡)라고 하는 외국인 상인들이었다)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18] 이는 현지화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19]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으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의 기반이 파괴되었고 학문적 손실과 함께 수도원들도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시리아 정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처 : Oxfor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Asia[20]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쿠르드족들은 다수가 시리아 정교와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신자들이었고 일부가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출처 : 실크로드학 사전[21] 오스만 제국이 딤미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세금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이런 숙질 계승은 바꾸기가 어려웠다. 출처 : Oxford Handbook of Christianity in Asia[22] 19세기에 이들과 접촉한 유럽 선교사들은 깊은 산 중에 숨어 살고 성당은 매우 소박하고 안전을 위해 입구가 매우 낮고 내부에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십자가 외에 다른 장식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들을 성화상 파괴주의자들로 여겼다.[23] 크리스토프 바우머, 안경덕 옮김,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 》, 서울, 2016, 일조각. 참고로 저자가 예정론을 무지 싫어한다.[24] 감리신학대 유동식 교수와 조향록 목사조차도 강력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