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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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17대
18대
19대
제12대
박찬종 · 김정길
(중구·동구·영도구)
제13대
노무현
제14대
허삼수
제15대
이명박
제15대
노무현
제16대
정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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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기록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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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이름
노무현 (盧武鉉, Roh Moo-hyun)
출생일
출생지
사망일
사망지
묘소
본관
부모
아버지 노판석, 어머니 이순례
형제자매
3남 2녀 중 막내
배우자
자녀
노건호, 노정연
학력
종교
재임 기간
신장
168cm
혈액형
O형
별자리
사자자리
십이지
개띠 (병술년)
취미
독서, 등산
약칭
盧, MH[6]
서명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학창 시절2.3. 청년기2.4. 변호사 시절2.5. 국회의원 시절2.6. 국민의 정부 시절2.7. 대선 출마2.8.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시절2.9. 퇴임 후2.10. 사망
2.10.1. 타살 관련 의혹
3. 묘소4. 평가5. 국정원의 여론 공작6. 적이 많았던 대통령7. 국내 최초 정치인 팬클럽 보유자8.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9. 여담
9.1. 노무현 대통령이 부른 노래9.2. 고인 드립9.3. 최초 타이틀 9.4. 어록
10. 친노11. 가족 관계12. 약력13. 대중매체 속의 노무현14. 저서15. 선거 이력1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상고 출신의 인권 변호사부림사건 등의 변론을 맡으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입문하여, 5공 청문회 당시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았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참여정부를 출범시켰다. 재임 기간을 비롯하여 일평생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된다.[7] 또 사법개혁을 필두로 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에 경주했다. 국민의 정부햇볕정책을 이어받았고, 분단 후 처음으로 판문점을 육로로 걸어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선거 관련 발언 논란으로 인해 재임 중 헌정 사상 첫 탄핵 소추를 당하기도 했으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각이 되어 직무에 복귀하였다. 퇴임한 뒤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고향 봉하마을에 귀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친인척 비리로 조사를 받다가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의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였다. 당연히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지만[8] 결국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지지 세력인 친노는 폐족 위기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대통령의 국가 발전 기여도 여론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문재인을 필두로 친노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2017년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는 등, 아직까지도 노무현은 대한민국 정치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출생[편집]

1946년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때 어머니의 연세가 무려 45세였다고 하니 늦둥이다. 유년시절은 평전에 따르면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노판석은 일제 시대 사업가였으나 사기로 재산을 잃고 노무현이 태어난 때는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안 되어 어머니 이순례가 일을 하여 집안을 간수했다고 말한다. 그의 형 중 큰형은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떴고, 작은형이 노건평이다.

2.2. 학창 시절[편집]

1953년에 진영 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 전교 학생 회장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대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진영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돈이 없어 외상입학을 했다. 1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백지 동맹을 일으켜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2학년 때 부산에서 시험으로 부일장학생[9]으로 선정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중학교 졸업 후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시험을 준비했는데 첫째 형의 권유로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10]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도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공부만 하지 못하고 방황도 하고 숙소도 제대로 없었고, 졸업도 21살 즈음 했다. 이 때문에 대학교 진학은 하지 못한 채 학력이 고졸로 마무리됐다.[11]

2.3. 청년기[편집]

고등학교 졸업 즈음 농협 입사시험을 쳤고, 떨어졌다. 한 달 반쯤 개인 회사를 다녔으나, 너무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아 퇴사하고 고시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집 근처의 산자락에 토담집을 만들어 공부했지만 공부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이 없어 울산에가서 막노동을 했다. 이때 잠시 사고로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예비시험에 합격한 소식을 병상에서 듣게 된다.[12] 그 후에는 계속 고시에 매달렸다.

중간에 3년쯤 현역병으로 군 복무를 마쳤고[13][14] 전역 이후에는 사법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73년 즈음 약혼자가 결혼 적령기를 넘어 고시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고 아이도 낳았다.[15]

1973년부터 사법 시험을 보기 시작해 3번째인 1975년 30세의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7기 연수생으로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 상위권 성적을 기록하였고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변호사를 희망했지만 형과 어머니의 권유로 판사 임용을 신청한다.[16] 1977년에 대전 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17](그가 작성한 합격 수기)

2.4. 변호사 시절[편집]

사법 고시 합격 이후 8개월간의 판사 생활을 거쳐서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 전문 변호사로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18] 1981년 우연히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19] 이를 통해 노무현이 세무 회계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20]

이때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의 권유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두었는데, 재판에 들어가기 전까진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사고를 친 것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이 사건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재판에서도 변호인단 중 가장 서열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본인도 피고인인마냥 열성으로 나서서 변호를 했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도 재판 초반에는 변호사가 저렇게 흥분해서 변론을 해도 되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영상)

이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혹은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유명했던 표현 중 아스팔트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노무현이 당시 만든 말이라 한다. 그는 전경의 최루탄을 맞으며 마이크를 놓지 않고 시종일관 꾸짖는 연설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와 관련된 이미지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검찰은 그를 구속하였고, 안기부는 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불법으로 감시를 했지만 직후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의 모습

2.5. 국회의원 시절[편집]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민주정의당 허삼수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제5공화국 청문회 때 발의자로 등장해 증인으로 참석한 정주영을 상대로 질의에 앞서 한 말이 매우 유명해졌다.[21]


2분 18초쯤부터 나온다.

(3분 54초부터)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천만 원을 주느냐, 8천만 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 시절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 中에서.
전두환과의 청문회 이후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노무현 명패사건 참조하면 된다.

이 청문회에서 5공 시절 억눌려 지내던 국민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통쾌한 추궁으로 유명해지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유명세로 인해 시간이 흘러서 대통령 선거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를 받게 되는 큰 자산이 되었다.
(동영상의 6분 55초부터) 3당 합당을 반대하면서 항의하는 노무현 초선의원
"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22]
-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당시의 노무현 초선의원.
그리고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은 5공 비리 청문회와 더불어서 3당 합당을 야합이라면서 거부를 하고 정치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던 김영삼의 곁을 떠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이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재출마했으나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5년 민주당 부산 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역시 낙선했다. 또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또 다시 낙선을 하게 된다.

당시 서울 종로에서 당선된 이명박 의원이 1998년 초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자진 사퇴를 했고[23] 이에 따라 그해 7월의 보궐 선거에 다시 출마한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장직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였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고건 전 총리[24] 영입에 따라 출마를 포기하고 대신 종로구에 공천된 것이다.

그리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2년 뒤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 출마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아들딸까지 전부 반대했지만[25] 노무현의 고집은 이미 확고했고 결국 북구-강서구 을에서 한나라당 허태열[26]에게 밀려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낙선 후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낙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6. 국민의 정부 시절[편집]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현재보다 미래가 있는 부처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한국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노력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 있게 일하십시오.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십시오. 반대의견이 있으면 직을 걸고 반대하십시오. 현장에 가서 보고 판단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2000년 8월 7일, 노무현의 해양수산부 장관 취임사.
국회의원 낙선 이후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2000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 장관을 8개월 동안 역임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직원들과 같이 이메일로 대화를 하고 수평적 토론 문화를 정립했고 다면평가를 비롯한 인사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공무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탈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특유의 성격답게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 같은 의전도 모두 없앴다고 한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서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던 관행도 중단시켰다고 한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서 마중을 나오던 관행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1, #2)

2.7. 대선 출마[편집]

대선 후보 시절 유세하는 모습
대선 당시 포스터
2001년 12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초반에는 이인제[27]의 선출이 가장 높게 점쳐졌고, 노무현의 지지율은 정동영, 한화갑 등에게도 밀릴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았다.[28] 그러나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이회창 후보와 맞붙게 되었다. 노무현 측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회창 측은 부패 정권 심판, 정권교체 등의 공약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제기되었던 아들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재차 인터넷에 퍼져나가자, 그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후에 이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은 의혹에 불과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은 정치공세에 불과했던 셈.[29]

한편으로 노무현 후보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인기가 올라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기로 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대선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래서, 노무현 후보가 직접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분노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불러모으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있다.

결국,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를 얻으면서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8.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시절[편집]

나무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120414290420002010-001.jpg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출범되며 기대를 모았으며, 또한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미 FTA를 추진하였으며, 평양에서 김정일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재임 기간 내에 있던 업적과 실책 그리고 사건사고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참조하길 바란다.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이다. 정부 출범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로는 아래와 같다.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사고는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매우 큰 사건들만 서술한다.

2.9. 퇴임 후[편집]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2009년 4월 22일 개인 홈페이지에 올라온 게시물-
2008년 퇴임 후 전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장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 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거나 불법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 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가 일본 도요요카 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참조)

친환경 농법인 '오리 농법'을 도입하고자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초기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오리 농법이 성공을 거두자 현재는 거의 모든 봉하 마을의 가구들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차를 재배하여 마을의 특산물로 만들었고, 늘어나는 마을 방문객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 및 동물원의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방문객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마을 앞에 생태 공원을 조성하여 연꽃 등 각종 수생 식물을 심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이런저런 근황을 전하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열창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영상, 영상2, 영상3, 노래영상)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차별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임시절 친인척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할 정도로 친인척 비리를 경계했으나(링크),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먼저 검찰 측은 박연차가 노 전 대통령에게 건낸 15억 원에 대해 수사를 벌였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서 차용증을 제시하였고 사저신축비 용도로 빌린 개인 간의 금전 거래로 판단하여 무혐의 종결되었다. 이후 박연차가 권양숙 여사에게 건낸 100만 달러(약 10억~13억원 정도), 정상문에게 건낸 3억 원,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에 대해 수사가 이루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임기중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에게 100만 달러와 3억 원을 요구하여 (일부는 정상문을 통해) 돈을 받은 것을 시인하였는데, 이 돈은 권양숙 여사가 개인 빚 청산과 자녀 유학비로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박연차-권양숙 간 돈이 오간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차용증 등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검찰은 이 또한 개인 간의 금전 거래임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연차가 연철호에게 건낸 500만 달러는 노무현 대통령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개인 간의 투자 성격의 돈 거래라고 보아 막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64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의 공범으로 보아 형사처벌하고자 하였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가 돈을 받은 것을 인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수사 과정에서 입증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에 출두한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는 무려 몇 개월에 걸쳐서 장기간 진행되었다. 처음 1기 검찰 수사진은 당시에 검찰 내부에서 명망있는 검찰들로 구성되었다. 1기 검찰 수사진은 퇴임 이후 박연차와의 거래는 사적 거래라 수사할 내용이 없다고 보고 종결지었다.

그러나, 수 개월 후 검찰 수사진 진용이 다시 꾸려졌다. 2기 검찰 수사진이 꾸려질 당시 이인규, 홍만표 등이 합류하였다.[39][40] 이 당시부터 큰 일이 일어날 것이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인규는 이전 수사진의 수사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

주변 인물이 차례차례 소환당했다. 일가족 역시 차례차례 소환당했으며, 이런 소환은 한 번이 아니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여왔다. 일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이자 친구인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뇌졸중을 앓고 있었으나 구속되었고 병보석마저 불허되었다. 결국 강금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끓자, 병보석이 허락된다. 그러나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버렸고 결국 이로써 사망에 이르고 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글로 남겼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면서 더 이상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달라며 칩거에 들어갔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당시 국가정보원은 자신들의 임무를 등한시한 채 억대의 피아제 시계 뇌물 논란을 활용하여 연예기획사나 할 법한 대국민 망신주기 언론 플레이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대검 중수부는 구속 수사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국정원은 노 전 대통령을 불구속 기소하는 대신 명품 시계 등을 통한 언론플레이에 초점을 두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비난 여론을 극대화하자는 방안이었다. 국정원 측이 자신들의 뜻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하자 검찰은 "수사권 침해"라고 반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검찰은 국정원 직원의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알려졌다.(출처)

무죄 추정의 원칙과 피의사실 공표 금지원칙을 어겨가며 매일매일 언론을 통하여 수사 상황이 공공연히 흘러나왔고, 고가의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선정적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논두렁 운운은 진술 내용과 무관한, 국정원의 언론플레이를 위한 허위[41]였음을 당시 중수부장이었던 이인규 변호사는 2015년 주장하였다. 이인규는 당시 국정원의 행태는 공작 수준이라 밝혔다.[42]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상황이 방송과 언론을 통해서 매일 매일 브리핑되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검찰은 어떠한 액션도 하지 못한 채 3주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국내 모든 매체는 카메라를 봉하 마을에 경쟁적으로 설치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심지어 방송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하여 봉하 마을을 촬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의 구속을 반대했다.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70.6%의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하였고, 찬성한 국민들은 27%에 그쳤다.(기사) 예전 노태우 대통령의 구속에 찬성하는 여론이 70%에 달한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와는 확연한 여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2.10. 사망[편집]

사망 당시 MBC 뉴스데스크.
2009년 5월 23일 자택의 컴퓨터에 아래아 한글 파일로 유서를 미리 작성해두고 사저 뒷산(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근의 양산시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도중에 결국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시신은 화장하여 달라는 고인의 뜻에 따라 수원연화장에서 화장하여 봉하마을 내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때가 62세다.

사망 직후 법무부 장관 김수한은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시키지 않을 것으로 안다고 언론을 통해 발표하여, 검찰 수사가 통제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이 자진 사표를 내었다.[43] 사건은 추가적인 심문 및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피의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 발표하고 내사 종결로 마무리되었다.(기사)

죽음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각계각층에서 검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는 국정원 개입 부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여당인 당시 한나라당에서조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검사 출신으로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던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며 검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44] 심지어, 정적으로 분류되는 홍준표마저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주었다."고 검찰을 질타했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하고 6월 12일, 검찰은 6개월에 걸친 '박연차 리스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장장 6개월에 걸쳐 진행된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결과를 단 5분 만에 발표하고 종결지었다. 처음에는 중수부장실에서 사실상 비공개로 숨어서 진행하려고 하다가 언론의 반발을 받고 공개로 진행한 것이었다. 발표 현장에서 수사팀은 최대한 답변을 피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하였고, 홍만표는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인규는 발표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검찰, 결과 발표 '게눈 감추듯') 게다가 타살의혹들도 있다.

이 단 5분간의 발표에서 이 수사는 '뇌물수수 의혹' 때문이라 하였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언급하지 못했다.[45] 다만, 검찰은 법과 원칙에 따라 최선을 다했다며, 정당한 수사였다고 주장하면서 추후 역사적 평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변호인단은 어이없다는 입장과 함께 검찰의 자기변명과 책임회피를 비판하였다. 문재인 변호사는 자신을 방어하고자 고인을 두 번 욕보이는 행태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곧이어 검찰은 전직 대통령 구속 여부에 대해서, 검찰은 이미 불구속으로 내정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당시 박연차에게서 금품을 받은 사람은 모두 참고인으로서 다 불구속이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유독 금품을 받지 않은 노무현에게만 피의자로서 구속 여부를 심의하였으며, 또한 시간을 질질 끌며 모욕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이러한 검찰의 혼란스러운 행태에 대해 검찰은 또 다시 비난을 들었다.[46]

2.10.1. 타살 관련 의혹[편집]

현재 공식 사인이 자살로 판정난지는 벌써 몇년이 지났지만 수십m에서 투신했는데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노무현 타살설이 주장되어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8년 뒤인 2017년에도 가끔씩 넷상에서 노무현 타살설이 언급되고 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인한 사망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던 지지자들이 노무현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시신은 부검 없이 화장했기 때문에 정확히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원래는 자살 및 살해를 당했다면 부검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사인을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에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유가족 측에서 고인의 유서에 쓰여있는 ' 화장해라 '라는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 화장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만약 타살설이 맞을 경우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당시 이명박 정부나 노무현의 정적들이라 할 사람들에게도 노무현이 투신함으로서 얻는 이득은커녕 손해만 가득할 게 뻔했기 때문에 노무현이 타살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3. 묘소[편집]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위치해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 8월 5일 보건복지부 국가보존묘지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보존묘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해당 이의 유서엔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 달라”라는 부탁이 있었다. 유족들은 고민끝에 봉하마을 대통령 사저 뒷산에 묘역을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묘역 설계는 노무현 장례식 전날 모인 "작은 비석 위원회"의 일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가 맡았다. 이 묘지의 특성중 하나는 묘역 표면에 모인 1만 5000개의 박석에 적힌 글귀들인데, 국민모금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전할 어귀들이다.[47]

가끔씩,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부엉이바위에 테러하는 경우가 있다. 또, 노무현 대통령 묘소에 배설물을 투척한 아주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2010년대 초까지는 묘소 바위 앞까지 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묘소 근처에 가는 건 불가능하고, 좀 떨어진 곳까지만 접근 가능하다.

4. 평가[편집]

5. 국정원의 여론 공작[편집]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의 뇌물수수혐의 수사 도중 국정원의 모욕주기 언론플레이에 고통받았다. 사망 이후에도 인터넷 여론공작으로 고인 모독을 당하였다.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2015년 2월, 국정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포괄적 뇌물수수혐의에 대해 여론조작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일가가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등 허위 사실을 꾸며내어 언론에 흘린 주체가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라 주장한 것. 결과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수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이인규 전 중수부장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당시 국정원 행태는 공작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에서 이인규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고,(노컷 뉴스: "이인규는 왜 지금에서야 국정원 탓으로 돌리나?") 이인규는 훗날 자신이 자서전 또는 회고록으로 모든 것을 공개할 것이라 밝혀 2탄을 예고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직후, 국민장을 치루며 온 국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하하는 인터넷 게시물 수천 개를 유포시키며 추모 분위기를 방해했다.(뉴스)

이후에도 국정원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생산, 유포했다.(검찰의 국정원 댓글 여론조작 수사) 2013년 밝혀진 유명한 좌익효수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게시물을 지속적으로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한편, 좌익효수의 재판결과, 모욕죄만 인정되었고 국정원법 위반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국정원에서 국정원의 신뢰와 기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좌익효수 국정원 직원, 1심서 집행유예 선고...모욕죄 인정-국정원법 위반은 무죄") 이 판결은 여러 면에서 비난을 받았는데, 상당수 게시물은 증거부족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오직 10여 개의 게시물만 채택되었다. 좌익효수는 검찰에서도 죄질이 나쁘다고 말했지만, 국정원에 오래 근무했다. 국정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난 다음에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2016년 4.13 총선이 끝나고 여소야대 국면이 이루어지자 국정원은 그를 해임시켰다. 2013년 사건이 밝혀지고 해임에 이르는데 무려 3년의 세월이 걸렸다.

6. 적이 많았던 대통령[편집]

노무현은 생전에 적을 많이 뒀다. 보수 진영은 물론이었고,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도 노무현을 싫어했다. 가난한 고졸 변호사라는 편견과 그가 생전에 강조한 정치 철학 때문이다.[48] 하지만 노무현과 그를 지지하는 친노세력이 배타적인 태도와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거부감이라는 의견도 있다. 즉 노무현과 친노 참여정부가 기존 정치세력과 화합하지 못하여 어느 정도 자초한 면도 있다.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지만, 3당 야합 때문에 갈라섰다. 김영삼도 이 사건 때문에 노무현과는 사이가 극도로 비틀렸다. 군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은 대촉국, 김대중은 호남충청연합, 김영삼은 3당합당으로 얻은 영남충청의 넓은 인맥이 아군이었지만, 노무현은 완전 고립무원이었다.[49]

동류였던 민주당 진영에서도 노무현을 안좋게 보던 이들은 많았다. 노무현이 집권하자마자 한나라당과 보수일간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제일 먼저 문제 삼은 것이 대북송금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되자마자 제일 먼저 서명한 법안이 대북송금특검법이었고, 이로써 여당이었던 민주당과 척지게 된다, 여당의 전임 대통령의 행적에 제동을 거는 행위인데 민주당 쪽 DJ, 호남 계열 인사들이 좋아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전라도 정치인들과 정치 못 해먹겠다"(관련기사)는 발언이 논란이 될 만큼 호남인사들과 갈등이 존재했다. 민주당 내 여러 계파와 척을 지게 된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임명된 후 민주당 내 소장파와 함께 민주당 내 쇄신을 요구하였으나 호남 구주류는 쇄신을 부정하면서 민주당은 분당하였다.(출처) 이후 당적을 열린우리당[50]으로 옮겼다. 2004년 탄핵 때 국회가 사실상 대동단결해 노무현을 탄핵했던 것도 민주당-한나라당 연합이라는, 현 시점에선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연합이 나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51]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 등을 거치며 반미 성향의 진보 지지층들도 등돌리기 시작했고 그렇다고 중도층이나 보수층이 지지층으로 편입된 것도 아니어서 지지율은 추락을 거듭했다. 이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파동[52]으로 열린우리당[53]과의 관계마저 악화되고 2007년 초에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하게 된다. 이쯤에는 언론사들도 거의 대부분 노무현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2007년 1월 노무현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기사나 담합한다" 면서 당시 청와대 기자실통폐합안을 제출하여, 진보와 보수 매체 전체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했다.(당시 진보 매체 프레시안 비판기사, 기사2)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는 여당 측[54] 대선 후보인 정동영 의원마저도 의식적으로 거리감을 두었다.[55][56] 정동영은 여당의 대선후보이면서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편승해 노무현 대통령 심판론을 대통령 선거 의제로 설정하였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민주당의 고질병인 이합집산이 시작되면서 민주당 의원들마저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에 바빴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 강화와 권위주의를 허무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보았다. 그의 이러한 국정철학은 한국 정치 특유의 경직된 권위주의를 해소하려 했으나[57][58] 반대로 자신은 기자실 폐쇄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으며[59] 시종일관 강경 일변도의 대언론 정책을 폈고, 결국 언론도, 지지층도, 국민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 채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욕을 먹고 비하당하고 희화화되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대한 비난 수위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2003년 한나라당(당시 야당) 당직자 회의에서 홍보위원장 박주천은 노무현 대통령이 "생긴 게 개구리와 똑같다"라며 웃고 떠들었고,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자 "등신 외교"라고 하였다. 이에 문제가 되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은 "등신이라는 말이 뭐가 나쁘냐"라고 할 정도. 심지어는 2004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24명으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는 노무현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모욕하는 연극 "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이 연극에서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대놓고 욕을 해도 아무 일 없었다. 보수일간지 등은 "천격"이란 표현을 비롯해 다양한 비하 소재를 만들어 내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자신을 욕하여 국민들이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욕을 하라"고 하였다.[60]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인터넷에서 댓글 한번 작성한 것만으로 경찰서에 끌려갈 수도 있던 법이 만들어진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61]

7. 국내 최초 정치인 팬클럽 보유자[편집]

노무현과 함께하는 노사모.
국내 정치인 중 최초로 팬클럽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노사모 문서를 참조. 현재도 활발한 활동이 진행중이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8. 다른 정치인과의 사이[편집]

8.1. 친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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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한 때 폐족이라 자칭하며 몰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노무현 사망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현재 한국 정치의 지형을 담당하고 있다. 주로 진보 내지는 개혁세력으로 평가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파 세력들을 소위 '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보좌하던 인사들을 지칭하지만 범용적으로 그의 정치신념을 따르는 무리까지 포섭하기도 한다.[62] 일각에서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띈 친박 내지는 친이와는 다르게 이념집단의 성격을 띄고 있어 더 오래 간다는 평가도 있다.

주요 인사로는 원조 친노인 문재인, 이광재, 안희정, 이호철, 천호선, 서갑원과 참여정부 시기의 문희상, 김근태, 김두관, 김진표,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 등이 있다. 과거에는 친노였지만 현재는 아닌 인사로는 정동영, 김한길, 천정배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체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 이사나 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많다.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색채를 띈 문재인친문이나 안희정계 등으로 분화되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친노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8.2. 김영삼[편집]

https://goo.gl/images/sGUj3G

변호사인 그를 정치인으로 영입한 첫 정치적 스승

5공 시절 내내 인권변호사로써 명성을 얻어온 노무현을 알아본 김영삼은 그를 정치에 입문할 것을 제안했다.[63] 노무현은 김영삼의 제안을 받아들여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탈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당시 민주당은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이때는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64]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아직 앙심이 남아 있었는지,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며 해명했다.

8.3. 김대중[편집]

http://archives.knowhow.or.kr/m/record/all/view/7139?page=45

민주당계 정당의 쌍벽 중 하나

DJ와 노무현의 만남은 YS가 노무현을 만났을 때 즈음이었는데, 5공 청문회에서의 강직하고 논리적으로 전두환과 재벌들에게 질문하는 것을 보고는 노무현을 우연히 국회 본청의 의원 식당에서 만난 DJ가 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건넨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요."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접점이 없던 노무현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었다.

1990년에 일어난 3당 합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을 창당해 나왔던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주류였고, 정말로 김영삼이 하나회를 쫓아내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당시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게된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 세 아들들의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동교동계가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2003년 노무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자,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특검 요구를 들어주게 되고 DJ는 병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며, 측근들을 통해서 화병이 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양 측의 관계는 한순간에 냉랭해졌다. 노무현이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친DJ세력, 즉 호남 세력과 친노 세력의 분열의 씨앗이 생겼고, 이것이 훗날 무소속이 된 천정배가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호남형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한 뒤 호남인들이 "친노와 화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후 특검 연장을 거부하면서 둘 사이의 앙금은 일단락되었다.

2008년 노무현이 퇴임하고, 이듬해 과도한 검찰 수사로 인해 사망하자 김대중은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심지어, 장례식 때 자신이 직접 쓴 추도사를 낭독하려 했다. 정치적으로는 가깝고도 먼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노무현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8.4. 이명박[편집]

https://goo.gl/images/xWoqKV

종로에서 시작된 악연, 서로에게 깊어진 원한.

노무현과 이명박의 만남은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종로에서 맞붙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선거에서 이명박이 간신히 이겼지만,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실시된 재보궐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다.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라고 말했다.

이명박의 기사회생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뤄졌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2000년 8·15 광복절 대사면을 단행하면서 MB의 피선거권이 회복된 이후 2002년 제16대 대선 직전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사업과 버스노선 개편을 단행한 것도 이 재임 시기다. 같은 해 대선에서는 노란풍선 열풍을 일으킨 노 전 대통령이 민주 정부 2기 시대를 열었다. 종로에서 맞붙었던 경쟁자가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만난 셈이다. 이들은 이때부터 굵직굵직한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대표적인 게 행정수도 이전이다. 이는 노 전 대통령 핵심 공약이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충청권으로의 수도 이전과 관련,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했다. MB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 최전선에 섰다. MB는 당시 노무현 정부를 “잠시 왔다가는 5년 임기의 정권”이라고 폄훼한 뒤 “수도 이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국민투표를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 ‘신행정 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의 위헌확인 심판 소송에서 ‘관습 헌법’ 논리를 들면서 국민투표 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경제 문제를 놓고도 대립했다. 참여정부 시절 ‘버블세븐’(서울 강남·서초·송파·목동, 경기 분당·용인·평촌)을 중심으로 집값이 폭등하자 MB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서민경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강북 뉴타운을 내걸고 표심 잡기에 들어갔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최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는 MB 때문”이라고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보수진영의 ‘세금 폭탄론’에 휘청거린 노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부동산 원가공개 등의 요구를 받았지만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일축, 양측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임기 막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논란까지 덮치면서 노 전 대통령은 민주진보 10년 권력을 MB에게 내줬다. MB는 2007년 대선에서 48.7%의 득표율을 기록, 26.1%에 그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크게 앞섰다.

노 전 대통령과 MB의 관계가 앙숙관계로 치달은 것도 이때부터다. 2008년 퇴임 후 KTX를 타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한때 친환경 벼농사 농법 전도사를 자처했지만, 2009년 박연차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그(MB)는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 공기업 기관장들을 몰아냈다.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도 자서전 <운명>에서 “정치보복의 시작은 참여정부 사람들에 대한 치졸한 뒷조사였다”며 “노 전 대통령은 나와 친분 있는 많이 기업이,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선 MB가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우리들병원’, ‘토속촌’, ‘제피로스’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세무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의혹이 나오지 않자 ‘태광실업’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여권 내부에서 ‘박연차 게이트’를 놓고 표적 세무조사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그러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009년 5월 23일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했다. MB의 친노 궤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계속됐다. 국가정보원의 ‘논두렁 시계’나 ‘문성근 합성사진’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개입 등으로 친노에 타격을 가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예이자 친구인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에당선되고 점점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더니, 2018년 들어 검찰의 칼끝이 MB 턱 밑까지 왔으며, 3월 14일에 검찰 출석을 하고 급기야 23일에는 구속되었다. 9년만에 서로의 상황이 뒤바뀐 것.

8.5. 박근혜[편집]

10년만에 정치적 입지가 서로 뒤바뀐 상황.

8.6. 문재인[편집]

노무현의 후계자이자 희로애락을 함께한 친구

8.7. 유시민[편집]

직설적인 그가 극찬한 몇 안 되는 정치인


9. 여담[편집]

  • 휘호는 주로 한글을 많이 썼다.
  • 과거 박정희를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본인의 말로는 박정희의 리더쉽에 관한 것은 평가가 엇갈리기에, 딱 잘라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중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중 최저인 5.7%였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해럴드경제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보통'이라고 답한 응답을 부정 평가로 왜곡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이틀 뒤 CBS와 리얼미터에서 주최한 여론조사에는 14.4%로 나왔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12%의 지지율을 기록했다.(#1, #2)
  • 중학교 2학년엔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쓰기 행사가 교내에 열렸는데, 당시 반장이었던 본인은 불법선거 운동이라며 ‘백지동맹’을 주도했다. 그는 이 일로 반성문을 강요받았지만, 이를 시인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 여섯 살에 천자문을 독학해 동네 산골마을에서 천재로 알려졌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에서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부산상고 시절부터는 친구들과 수업을 빼먹고 술담배 등을 접하며 엇나갔다고 한다. 이는 가난이라는 콤플렉스가 반항기의 주된 이유였는데, 그의 자서전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릴 때 나는 상당히 반항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열등감이 심했던 것 같다. 가슴에 한과 적개심을 감추고 있기도 했고, 쉽게 좌절하기도 했다.”라 쓰여있다. 원래 인문고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가세가 기울며 원하지 않는 상고로 진학하게 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성적도 낮아지고 고교시절을 친구의 집에서 방황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고등학교 때 노 전 대통령의 단짝이 빵을 하나 사서 노 전 대통령한테 나눠 먹자고 했는데 ''반씩 먹으면 둘 다 배고프니 네가 다 먹어라. 나는 배고픈 거 잘 참는다"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였다.(http://m.nocutnews.co.kr/news/590868)
  • 지금의 높은 위상보다도 넘사벽으로 높았던 사법 시험의 합격자임에도 불구하고[65] 고졸/상고 출신이라며 법조계에서 심한 무시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법조계에는 "서울대 법대 미만 잡"으로 서울대 비법 출신들도 서러움을 느낄 정도이다.[66]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합격했을 시절에는 아예 사시 합격자가 서울 법대 출신으로 도배되었던 시절인데 이 때의 고졸/상고 출신이라면...
  • 노안으로 이마에 난 유난히 큰 주름살 한 줄은 이미 30살 되기 전에 생긴 주름살이다. 주름살 때문에 보톡스 시술까지 받았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확인바람.
  • 1993년 사법 연수생 자치회에서 발행하는 '사법연수'지에서 예비법조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조인’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뽑혔다고 한다.
  • 1997년 SBS 라디오 노무현 김자영[67]의 뉴스대행진의 진행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 1997년 3월 서울 역삼동에서 당시 낙선한 국회의원 동료들과 같이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고기집을 개업하였다. 김원기, 김원웅, 노무현, 박계동, 박석무, 원혜영, 유인태, 이철, 홍기훈 전 의원과 김홍신, 제정구 현직의원까지 돈을 보탰으며 2명씩 당번을 정해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식당명을 직역하면 여름 난로 겨울 부채인데 당장은 쓸모없지만 때가 되면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식당은 결국 1년을 못가서 문을 닫았지만 그 이름값을 제대로 했는지 다수가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정치일선에 복귀했고 대통령과 정무수석, 국회의장을 배출하게 되었다.
  • 일본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MC 비슷한 역할을 한 쿠사나기 츠요시"SMAP을 알고 계신가요?"라고 한 질문에 "그 애니메이션 말이죠?"[68](...)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럴 만한 게 SMAP의 일본식 발음은 스맙프(スマップ)여서 유사한 데다가 당시 쿠사나기의 발음이 스마프보다는 스머프에 가까웠다.
  • 회고록 및 봉하마을에서 행한 연설, 김경수 비서관의 인터뷰 등을 참조해보면 퇴임한 이후에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의 회고에 의하면 봉하마을의 방문객들과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즐거워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퇴임 대통령이 이렇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경우라 이례적으로 퇴임 이후의 대통령이 자주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이나 밀짚모자를 쓰고 방문객과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 등이 노출되었고 KBS 다큐멘터리 3일의 소재로 방영되기도 했다. 퇴임 후 고향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전직 대통령의 새로운 모델이 신선했던 측면도 크다.[69]
  • 한겨레에서 진행한 퇴임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70]
  • 리무진이 아닌 버스를 자주 애용한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리무진을 타면 고립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비서나 기자들과 가는 시간 동안 의논이나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애연가이자 상당한 골초였다고 전해진다. 가난했던 고시생 시절에도 하루 두 갑씩 피웠을 정도였고 생애 문단에도 담배가 몇 번 언급되었듯이 담배와 관련된 일화도 제법 전해질 정도. 사망하기 직전 경호원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담배 있나?"였다고...
  • 연설에 능숙한 전문가이다. 이는 변호사라는 이력이 큰 영향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연설문이 생기면 전날 밤까지 고심고심하며 수정을 거듭했다고 전해지며,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대국민 담화라도 해야할 일이 생기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더불어 달변가로도 유명한데, 수십 명 되는 평검사들과의 토론에서도 굽히지 않고 토론을 이어나갈 정도로 막힘이 없다. 노무현 스스로도 대중 앞에서 말하기를 즐겼다. 귀향 후 봉하마을 방문객들 앞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을 정도니. 이 이야기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 방식이 재조명받고 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 씨가 방송에 자주 노출되었다. 아울러 대통령의 글쓰기 책도 재조명받고 있다.[71]

  •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말이 상당히 유명하다. 2009년 5월 23일 사망 이후 회자되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그리고 국무위원 여러분!
    부산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입니다.
    국무위원 여러분, 저는 별로 성실한 답변을 요구 안 합니다. 성실한 답변을 요구해도 비슷하니까요.
    청년 학생들이 죽어가는 것은 감옥에 가서 참회해야 될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온갖 도둑질을 다 해 먹으면서 바른 말 하는 사람 데려다가
    고문하고 죽이는 바람에 생긴 일이니까 그 사람들이 임명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게 무슨 대책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물으면 제가 그르지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 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 조지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Easy man'으로 불리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한미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근데 이 양반 행보를 보면 진짜 몰라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김대중에게도 'This Man'이라고 부르는 결례를 저질렀던 사람이다.
  •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노무현 사후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 《DUTY》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나는 그가 반미성향(anti-American)을 가진 사람이며 아마 미친(crazy) 것 같다고 결론내렸다."이라고 평가하여 논란이 생겼다.
  • 백혈병으로 위독한 상태였던 한 학생이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나고 싶어했고, 담당교사가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이런 사연을 올리면서 결국 만남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학생에게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라는 자필사인을 건네주며 쾌유를 기원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악화되어가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여 2008년 10월 경 세상을 떠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8개월 뒤 사망한다. 그리고, 죽은 학생의 담당 교사들이 노 전 대통령과 이 학생의 만남을 담은 앨범을 고인의 영전에 바치면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기사)
  • 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진주의 어느 길가에서 한 남성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남성은 삶이 너무 힘들어 죽으려 한다는 얘기를 꺼냈고, 깜짝 놀란 노무현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굳세게 살겠다고 나와 약속해달라'는 말과 함께 "약속은 생명이다. 욕심 부리지 마라"란 말이 쓰인 액자를 이 생전 처음 보는 남성에게 선물한다. 1년 뒤 이 남성은 김대중 대통령 선거유세 중이던 노무현과 재회하게 되고, 그때 격려가 큰 힘이 돼 주었다며 감사를 건넸고 노무현 역시 살아줘서 고맙다며 화답했다. 그리고 이 남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분향소에 "자식들과 함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며 영정 앞에 과거 노 전 대통령에게 선물받았던 액자를 바쳤다.(기사)
  • 조선일보를 배달하던 신문 배달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도움을 건네줄 변호사들을 찾았지만, 서슬퍼런 조선 일보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서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때 노무현이 발벗고 나서며 이들을 도와준다. 직접 나서서 신문사 지국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3년간이나 이 일에 매달린 끝에 승소하여 그 결과 신문 배달원들의 근로 조건이 나아지게 됐다. 조선일보 기자가 노무현을 찾아와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을 했지만, 노무현은 기자면 기사나 잘 쓰라고 받아치면서, 이때부터 조선 일보와 노무현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에 나온 내용.
  • 노동 운동가인 김진숙의 회고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 변호사 시절 노동자들에게 법률 지식을 가르처주기 위한 소모임을 열거나, 노동 조합원들이 여는 강연에 강사로 나서기도 하였다. 무료법률 상담소를 운영하며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무료로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하였다. 전태일의 기일에는 김진숙을 비롯한 몇몇 노동자들을 초청하여 변호사 사무실에 간단한 제사상을 마련하여 추모 의식을 치르곤 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0년대 안기부에 의해 문제 변호사 4인 중 1명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다. 이때 감시 역할을 맡은 안기부 직원에게 노무현은 광주항쟁을 다룬 비디오나 기록집을 보여주고 노동·학생운동과 관련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안기부 직원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갔고, 노무현 변호사와는 서로 애환을 챙기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고 한다. 훗날 이 안기부 직원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경선, 대선 캠프에 정책특보로 합류한다.(기사,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만화)
  • 노무현이 세무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부림사건에서 체포된 학생들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미친듯이 이 사건의 변호에 매달렸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주 변호인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무현 변호사가 가장 열성적으로 변론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당시 판사였던 서석구 변호사도 본인의 블로그에 쓴 글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재판 중 부림사건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고,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변호사가 부림사건 당시 피해자들에게 고문이 있었음을 폭로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훗날 대법원은 부림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있었음을 인정하며 피해자들 전원에게 무죄로 최종판결을 내린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헌신적인 노력에 깊은 감사의 뜻을 밝혔다.(#) 고호석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격앙되어 판사와 싸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변호했다고 증언하면서[72] 그의 당시 헌신적인 변호 덕분에 33년이 지나 무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1, #2, #3) 박욱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차분하고 논리적이면서도 때로는 거칠게 판검사들을 밀어 부쳤다며 증언하였으며,(#) 최준영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편한 길을 갈 수 있었음에도 부림사건 피해자들을 변론하느라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윤연희 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자신들의 무료변론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당당하게 변호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 훗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며 고마움을 전했고,(영상) 2014년 2월 13일 부림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나온 뒤 "무엇보다 오늘의 이 무죄 선고는 33년 전 저희를 위해 헌신적으로 변호했던 노무현 변호사님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기사)
  •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장례식에 제 3자 개입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이 건과 관련한 구속 적부심에서 99명의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자청하였고, 이들 대부분이 재판에 참석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99명의 변호인단 중 대표변호사를 맡은 김광일 변호사가 판사에게 재판에 출석한 변호인단 모두를 일일이 호명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에 따라 자리가 모자라 방청석에까지 앉아있던 수많은 변호사들이 판사의 호명에 따라 한 명 한 명 자리에서 일어나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 장면은 영화 변호인에서 그대로 묘사되었다. 여담으로, 노무현의 변호를 맡아 도와줬던 변호사들 중에서는 박원순서울특별시장도 있었다.# 김광일 변호사의 평전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더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순간 김 변호사가 변호인석에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요구했다.
"출석한 변호인의 수가 많고 방청석에도 다수가 앉아 있어 변호인의 출석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재판장께서 직접 변호인을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여 주십시오."
결국 재판장은 장시간에 걸쳐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변호사가 선임되었을 뿐 아니라 직접 법정에 출석하여 노무현 변호사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판부가 직접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재판의 분위기를 유리하게 이끌고 재판부에도 압박을 가하는 일종의 시위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원로 변호사들까지 포함한 그 많은 변호사들이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나도 출석했소"하고 한 명 한 명 일어날 때의 감동과 그런 상황을 연출해낸 김 변호사의 순간적인 판단력은 그 후 오랫동안 변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디라' 143~144 페이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이때 노무현을 구속했던 검사가 주선회노무현 탄핵 심판때 주심을 맡은 헌법재판관이다. 이때 주선회 재판관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탄핵 기각을 선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철도청 파업에 관련하여 해고된 공무원들을 철도 노조에게 "뒤통수 맞았다"라는 이유로 복직시키겠다는 데 반대했다.(기사, 기사2)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이툰 부대를 방문하여 찍은 아래의 사진을 두고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간에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다.
    나무파일:노무현자이툰.jpg
    논란인 즉슨, 사진에 나온 병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하면서 달려들어 안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래, 아들아!"하면서 안아주었다는 설이 웹툰을 통해 확산되었는데, 노무현의 반대자들 중 일부는 이 사진이 연출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한 유명 격투기 카페에서 사진에 등장한 병사가 직접 인증하여 당시 상황을 밝히면서 논란은 종식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사진은 연출된 것이 아니며, 웹툰에 나온 대로 상황이 벌어진 것도 아니다. 당사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대통령의 부대 방문으로 반가운 마음에 대통령을 향해 달려가자 주변의 경호원 2명이 제지를 하였는데, 노 대통령이 괜찮다면서 경호원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병사는 노 대통령에게 걸어가서 "포옹 한 번 해주시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겠습니다."하고 말하자, 노 대통령은 두 팔을 쫙 벌렸고 병사는 기쁜 마음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번쩍 안아올리면서 위와 같은 사진이 나왔다고 한다.
  • 묘역 공사는 사망하고 나서 거의 딱 1년 후인 2010년 5월달에 마무리되었다.

  • 참모였던 안희정이 '담금질'이라는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연다고 참석을 요청했으나 참석이 어려워지자 대신 축하영상을 찍었는데 촬영 도중 너무 고생시켜서 자신이 빚을 많이 졌다고 울었다.
  • 학생들의 생활 기록부와 교무학사/행정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이 시스템은 추후 이명박 정권에서 차세대나이스라는 이름으로 개편되었다.
  • 국가 정보 기록물 시스템 이지원의 발명가 중 한명. 인문계의 성공 루트를 탄 인물이지만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이미지와 달리 컴퓨터 관련 지식이 상당했고 활용 능력도 뛰어났다고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정치계에서 인맥을 관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스스로 개발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유서조차도 보통 자살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기 방식이 아닌 한글 문서 타이핑으로 남겼다. 게다가 사후의 논란으로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퇴임 후 이지원 시스템의 사본을 자신의 봉하마을 사저 네트워크에 NAS를 이용해 제작하여 통합시킬 정도의 능력자. 그리고 사법시험을 공부할 시절에 독서대를 개량하여 실용신안을 따낸 실력도 있다.
  • 일본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 중 일본 사회자가 계속 남성 방청객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주자 "계속 남성 분들에게만 마이크가 가는 것 같네요, 여성 통역사를 통해서 들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질문이 여성의 질문으로 들리긴 합니다마는..."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성평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9.1. 노무현 대통령이 부른 노래[편집]

전 대통령들과 달리 노무현은 공식석상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 바 있다. 노래뿐만 아니라 기타를 직접 연주해보이기도 했다.

9.2. 고인 드립[편집]

보기 좋은 영상들이나 현재 저러한 영상은 고인 드립의 소재로 지속적 사용되고 있다. 현재 국내외 인터넷에서 쉽게 노무현 대통령 관련 고인드립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 고인드립을 유포하면서, 2003년 당선인 시절 SBS 생방송 '세븐데이즈'에서 노무현 대통령 화법을 다룬 방송을 언급하는 것도 단골 메뉴다. 저 방송을 언급하며 자신들의 고인드립 유포가 정당한 일이며 출처를 가진 일이라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고인을 희화화하여 두 번 죽이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74]

일베저장소 등에서 'MC무현'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의 생전의 음성을 합성하고 있는 일도 있다. 물론 주 목적은 고인드립, 비하의 연장. 이후 SBS에서 이 노래가 송출되는 방송사고까지 생기거나 MC무현 노래가 중학교 장기자랑에서 사용되는 일도 일어나 고인드립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다.[75][76]

또한, 생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하였던 발언을 합성하여 고인 드립의 이미지를 만들어 유포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노 대통령이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한 사실을 희화화하여 초등학생에게 유포시키는 일도 발생하였다.[77]

정말 고인 드립을 심하게 당하고 있다. 고인드립/사례/대한민국 대통령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78]

대통령 여부를 떠나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고인 모욕을 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정도로 도를 지나친지가 오래. 일부 모 싸이트의 이용자들은 표현의 자유라며 꾸준하게 고인드립과 희화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들의 논리는 아직까지도 히틀러를 빨아대는 네오나치들의 궤변과 다를 게 없다.

9.3. 최초 타이틀 [편집]

  •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최연소 대통령.[79]
  • 광복 이후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
  • 최초의 법조인 출신 대통령
  • 최초의 현역 일반병 출신 대통령[80]
  • 최초로 여당을 옮긴 대통령[81]
  • 최초로 탄핵 소추되었지만, 기각된 대통령
  • 최초로 퇴임 후 귀향한 대통령[82]
  • 최초로 시신이 화장된 대통령[83]
  • 최초로 자살한 대통령[84]

9.4. 어록[편집]

"야~기분좋다~"'
ㅡ2008.02.24 봉하마을 퇴임 연설 中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ㅡ2007.6.16 노사모 총회 축하 메시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 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 재임 중 자신에게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 남긴 말(시사저널 링크)
"사람은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기 바란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자와 국민이 소통해야 한다."
ㅡ2006.8.28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 中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있는 역사의 땅 입니다. (중략) 독도를 분쟁 지역화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우려하는 경해가 없지는 않으나,우리에게 독도는 단순히 조그만 섬에 대한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에서 잘못 된 역사의 청산과 완전한 주권확립을 상징하는 문제입니다.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대처해 나가야 할 일입니다. 독도문제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의식, 자주 독립의 역사와 주권수호차원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ㅡ2006.4.25 한일관계에 관한 특별담화문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ㅡ2006.4.3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겠습니다. 경호원 한두 명과 남대문 시장에, 자갈치 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은행동 거리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통령, 거기서 마주친 시민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대통령, 그런 친구같은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ㅡ2002.4.27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에 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ㅡ2002.4.6 새천년민주당 인천지역 국민경선 연설문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꾸어 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어요. 눈 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 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ㅡ2001.12.10 제16대 대통령 민주당후보 국민경선 출마 연설문(#)
"광주에서 콩이면 부산에서도 콩이고, 대구에서도 콩인 옳고 그름을 중심으로 해서 인물과 정책을 중심으로 해서 그렇게 정치를 해나갈 수 있는, 그래서 국민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열겠다."
ㅡ2000.4.1 16대 총선 거리유세 中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ㅡ 1995년 부산시장 선거 연설 中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생활고로 일가족이 집단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은 늘어만 갑니다. (중략)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있었을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온 돈으로 우리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을 속이려 했습니다. 이런 발상이야 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명 죽일 수 있다는 끔찍한 발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그런 발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파이를 크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니네들 자식 데려다가 죽이란 말이야! 춥고 배고프고 힘없는 노동자들 말고, 바로 당신들 자식 데려다가 현장에서 죽이면서 이 나라 경제를 발전시킵시다!
ㅡ1988.7.8 제 142회 임시국회 첫 대정부질의 中

10. 친노[편집]

나무파일:/news/200909/10/yonhap/20090910171612395.jpg

노무현을 따르는 인사들의 계파를 일컫는 말. 한 때 폐족이라 자칭하며 몰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구심축인 노무현이 사망한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의 지형을 담당하고 있다. 주로 진보 내지는 개혁세력으로 평가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파 세력들을 소위 '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보좌하던 인사들을 지칭하지만, 범용적으로 그의 정치신념을 따르는 무리까지 포섭하기도 한다.[85] 일각에서는 이익집단의 성격을 띈 친박 내지는 친이와는 다르게 이념집단의 성격을 띄고 있어 더 오래 간다는 평가도 있다.

주요 인사로는 원조 친노인 문재인, 이광재, 안희정, 이호철, 천호선, 서갑원과 참여정부 시기의 김근태, 김두관, 김진표, 유시민, 이해찬, 한명숙 등이 있다. 과거에는 친노였지만 현재는 아닌 인사로는 정동영, 김한길, 천정배 등을 꼽을 수 있다. 대체로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에 이사나 위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 많다.

최근 들어서는 새로운 색채를 띈 문재인친문이나 안희정계 등으로 분화되면서 사용빈도가 줄어들고 있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친노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11.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노판석 (1900년 ~ 1976년)
  • 어머니: 이순례 (1914년 ~ 1998년)
    • 누나: 노명자 (1928년 ~ 2013년)
    • 형: 노영현 (? ~ 1973년)[86]
    • 누나: 노영옥 (1938년 ~ )
    • 형: 노건평 (1942년 ~ )
    • 배우자: 권양숙 (1948년 ~ )
      • 아들: 노건호 (1973년 ~ )
        • 며느리: 배정민 (1976년 ~ )
      • 딸: 노정연 (1975년 ~ )

12. 약력[편집]

13. 대중매체 속의 노무현[편집]

송강호가 연기한 노무현 (영화 변호인)
2013년 그의 부림사건 시절 활약상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인 변호인이 개봉되었다. 송우석(노무현 모티브 캐릭터) 역할은 송강호가 연기했으며, 100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모으기도 했다.[92] 임시완이 연기한 진우는 부림사건 당시 고문받은 피해자 고모씨와 송모씨의 일화를 합쳐서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몇몇 장면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오마쥬라고 작가가 밝힌 바 있다.(참조)

이후, 두 영화는 노무현을 연상케 한다는 공공연한 이유로 박근혜정부 하에서 여러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각 영화 문서 내용을 참고할 것.

2016년 무현,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7년 노무현입니다의 주인공이 되었다.

2017년 오디오 드라마 그 사람 노무현에선 성우 홍진욱이 노무현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14. 저서[편집]

  •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학고재, 2001년 11월 30일 #
  • <노무현: 상식, 혹은 희망>, 행복한책읽기, 2002년 3월 5일, #
  • <여보, 나좀 도와줘>, 새터, 2002년 4월 17일 #, #개정판
  •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행정가와 CEO를 위한 리더십의 8가지 원리>, 행복한책읽기, 2002년 10월 15일 #, #개정판
  • 공저, <마음 먹었을 때 시작해라>, 고시계사, 2007년 6월 1일, #
  • <진보의 미래>, 동녘, 2009년 11월 27일 #, #개정판
  •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 다 쓴 회고록>, 학고재, 2009년 9월 22일 #
  • 노무현재단 엮음, 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돌베개, 2010년 4월 26일 #
  • 공저, 김경수 엮음,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부키, 2012년 1월 12일 #

1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53,075 (50.6%)
당선 (1위)
1992
30,397 (32.2%)
낙선 (2위)
1995
647,297 (37.6%)
낙선 (2위)
1996
17,330 (17.4%)
낙선 (3위)
1998
7월 재보궐선거 (서울 종로 국회의원)
26,251 (54.4%)
당선 (1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북·강서 을)
27,136 (35.3%)
낙선 (2위)
2002
12,014,277 (48.9%)
당선 (1위)

16. 관련 문서[편집]

[1] 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2] 본관의 현재 위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3] 같은 국민학교 소꿉친구다.[4] 공식적으로 무종교이나, 종교 이력이 다소 특이하다. 사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의 절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는 송기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당시 송기인 신부가 주임신부로 시무하였던 부산 당감성당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 때문인지 신앙 생활은커녕 성당도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해인사를 방문하는 등 불교적인 활동을 몇 번 한 적은 있었다. 참고로 사망하기 직전 근처에 있던 사시를 공부했던 사찰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으며 장례식 때 해인사의 스님들이 조문을 오기도 했다.[5] 2004헌나1에 의한직무 정지 기간: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6] 노태우 전 대통령과 구분하기 위해서 생겨났으나 잘 쓰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근하게 부르기 위함이건 비하하기 위함이건 노짱이나 노통이 자주 쓰인다.[7] 노무현에 대한 대표적인 아이덴티티 중 하나이지만,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평가에는 논란이 있다. 노무현/평가 문서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8] 처음에는 인근 김해병원, 두 번째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으로[9] 당시 부산일보의 사장 김지태가 만든 장학회[10] 당시 부산 상고는 명문 고등학교 중의 하나였다. 2004년 이후 개성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11]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둘뿐인 고졸 출신. 단. 김대중은 건국대학 합격 사실을 대선 프로필 등에 적을 때가 있었으므로 확실한 고졸 출신 대통령은 현 시점에선 노무현 1인뿐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12] 당시 고졸출신이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그런데 또 반전이 합격 후 사법고시 학력제한이 없어졌다. 예비시험 합격의 보람이 없어진 것.[13] 1968년 3월 ~ 1971년 1월. 2017년 현재 현역 일반병 출신 대통령은 노무현과 문재인 둘뿐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장군 출신이고, 다른 대통령들은 모두 면제.[14] 상병 전역으로 나오는데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병장이 많았기 때문인 데다가 노무현은 분대장을 하지 않아서이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주는 계급이었는데 파병 문제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특별 케이스로 병장 계급을 달아줬다.[15] 이때는 위의 두 형이 세무 공무원으로 취직해 경제적 사정이 나아졌다고 한다.[16] 이때는 성적순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임용되던 시기다.[17] 그의 판사 시절을 회상한 기록에 따르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18] 한마디로 돈 잘 벌었다는 이야기다.[19] 당시에도 김광일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는데 이 사건을 위해 그는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한다. 검사였던 최병국은 변호에 참가하면 공범으로 함께 기소하겠다는 협박으로 변호인단에 참여하지 못했고 사람이 모자랐기 때문에 노무현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한다. 당시 변호인단으로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총 5명이었다.[20] 문재인은 사법 연수원을 1982년 8월 수료함으로써 부림사건 변호엔 참여한 사실이 없다.[21] 뿐만 아니라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현대 그룹의 수장이면서 (지금도 그렇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였다. 게다가 특유의 뚝심있는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정치권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기 힘든 인물이었는데 그런 정 회장이 일개 초선 의원, 그것도 겨우 40대 초반의 정치 신인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뚝심 어디 안 가서 여타 증인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맞받아치긴 했지만.[22]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의 격렬한 이 항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바로 뒤에,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 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자화 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23] 1998년 서울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선 무효형 선고 전에 자진 사퇴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당선 무효형확정되면서 서울 시장 출마에도 실패했다.[24] 문민정부에서 총리를 지냈고, 이후 노무현 정부 첫 총리에 오른다.[25] 총선 이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노무현을 취재했는데, 권양숙 여사와 딸 노정연씨가 "종로에서 한 번만 더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부산에 내려가자고 얘기했다."는 언급을 했다.[26] 훗날 박근혜의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그 사람이 맞는다.[27] 이전에 15대 대선에 출마한 그 분이다. 또한 장관 및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면서 무난한 행정력을 선보인 경력도 있었다.[28] 사실 노무현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행정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던 데다가 인지도 역시 앞선 인물들에 비해 밀리는 편이었기에 어찌보면 당시로선 당연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29]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2002년 8월부터 10월까지 수사에 착수하였지만 혐의 없음으로 기소하지 않은 채 종결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나라당의 청구로 재판이 성사되어, 2005년 5월 대법원은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 사실무근이라 판결하였다. 2002가합40574 참조.[30]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4대 악법이라고 칭했다[31] 국민의 정부 정책을 계승하였다.[32] 수시 확대[33] 사실 노무현 임기 시작 정확히 1주일 전인 2002년 2월 18일 일어난 사건으로 노무현의 임기가 시작하기 전, 김대중과 노무현 임기가 절묘하게 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여론에서는 김대중뿐만 아닌 노무현까지 싸늘한 시선으로 대했으며, 공식석상으로 사과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이명박 시절의 숭례문 방화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34] 임기내내 농민 및 노동자들과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극렬 대립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 노동자들은 분신자살, 음독자살까지 택하면서 한미 FTA 반대를 외쳤으며 농민들은 해외 원정 시위에 나섰다. 시위로 인해 부산 APEC에선 명박산성의 원조인 무현산성이 등장하였으며 여의도 농민 집회에선 강제 해산 과정 중에 두 명의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협상 장소 중 하나였던 제주도에선 4.3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의 공권력이 투입되기도 했다.[35] 2003년 4월 23일 관계차관 대책회의를 열어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시키겠다고 보고 하였다. 보건원의 사스 전담 인력은 4~5명에 불과하였지만 현장 간호사에게 그 당시 국무총리인 고건 총리가 사무실 팩스로 직보하면 바로 처리하는 빠른대응책과 이 뿐만이 아니라 상위 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하고 사스방역도 국가방어하는일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로 군의관과 군 간호 인력이 공항 사스 방력에 투입되었으며 민간에도 협력을 구하여 대한병원협회장, 대한의사협회장,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장 등 민간 의료단체 대표를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그렇게 사스방역은 전쟁처럼 치뤄졌으며 의심 환자는 있었지만 확진 환자는 1명도 내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WHO는 우리나라가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내놨으며 2003년 7월 31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주례 오찬에서 '한국판 CDC(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가 필요하다는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의 건의를 전달했는데 받아들여져 다음 해인 2004년 1월 19일 질병관리본부가 정식 출범하였다.(링크)[36] 나무파일:전염병의 경제적 파급 효과.jpg[37] 이명박 재임 중 일어난 사건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2008년 2월 10일 발발한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 임기 종료날짜인 2월 25일 이전이다. 재임 직전이라서 그런지 언론에서도 이명박이 자주 언급되었으며 본인도 사고현장에 등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서울시장 시절에 숭례문 개방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명박도 관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후 처리도 대부분 이명박 재임 중에 진행되었다.[38] 노무현 정권 당시 비정규직 문제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 영화 카트와 웹툰 송곳의 소재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39] 이인규는 이명박과 오래전부터 인맥 관계가 있다는 말이 돌았다. 원래는 중수부에 들어갈 라인이 아니었다는 것.[40] 2016년 현재 뉴스에서 비리로 하루 건너 뉴스에 등장하시는 그 인간들이다.[41] 이인규 “국정원, 노무현 수사 내용 과장해 언론에 흘렸다”[42] 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태에서 이인규 변호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 [노컷 뉴스]"이인규는 왜 지금에서야 국정원 탓으로 돌리나?"[43] 법무부 장관 사표는 반려되었으며, 검찰총장은 받아들여졌다.[44] 특히 이 부분은 노무현이 사망하기 한 달 전인 4월의 상황이다. 물론 박희태 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편들었다기보다는 검찰이 하루가 멀다하고 노무현 수사 과정을 속속들이 언론에 뿌리고 이에 노무현 측에서 반박하는 것까지 공개되면서 정치권이 혼돈에 빠진데 대한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여권 인사들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마냥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던 것.[45] 훗날 문재인 대표 측에서 이인규를 비판하며 몇 가지 사실을 추가하자 검찰 측에서는 그러한 부분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46] 검찰은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다. 2015년 2월 당시 중수부장 이인규는 당시 어째서 일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그 진실의 일부분을 밝혔다. 국정원에서 망신주기 여론 플레이를 제안하였으며, 검찰의 권한을 무시하고 국정원이 주도하려고 하여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규는 심지어 국정원이 여론플레이의 주역이었으며 검찰은 관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했다.(국정원 검찰에도 노무현 시계 언론플레이 요구)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같이 수사한 현재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는 이인규의 발언에 긍정하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은 특검을 요구하였으나 국회에서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7] 글을 새기는 돌을 모집한다고 응모글을 올리자마자 마감될만큼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한다.(출처, 사진 블로그 출처)[48] 가난한 고학생 출신이었던 이명박과 비교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인들이 싫어하는 사람은 그들의 이익에 해가 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49] 영남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터전이었던 부산에서조차 한나라당의 영향력이 막강했고, 호남도 전남권은 전부 동교동계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 열린우리당의 텃밭이라 불릴 지역은 전북 밖에 없었기도 하다.[50]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탈당파와 민주당 탈당파를 포함해 2003년 11월 11일 창당하였다. 2004년 초대 당원 의장은 정동영 의원이며 김근태 의원이 원내대표를 맡았다.[51] 이 시기를 탄핵 정국이라고 하며, 여론은 기존 정당에 대한 비토로 들끓었으며 4월 총선에서 신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출처)[52] 당시 진보 언론지인 한겨레 21에서 사설로 노무현의 대연정론을 정면으로 비판했을 정도였다.[53] 당시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 계열과 민주당 계열 간의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책 방향이 모호할 뿐더러 참여 정부의 거수기 역할만 했다는 평이 높았다. 출처[54] 엄밀히 말하면 당시에는 여당이 없었다. 노무현이 열린우리당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55] 원래 여당 후보가 임기 말에 지지율이 지리멸렬해지는 현직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건 한국 정치의 전통이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팽당했고,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은 임기 말에 스스로 만든 당에서 쫓겨났다. 민주화 이후 당적을 유지한 채 임기를 마친 최초 대통령이 후임인 이명박이다.[56] 사실 정동영도 노무현 정권의 일등 공신으로서 중반까지는 사이가 무척 가까웠고, 노무현은 정동영을 장관으로 임명시키며 대권 주자로 밀어주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침을 두고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정동영도 노무현과 선을 긋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지지를 얻게 될 정도였다. 현재도 친노가 아닌, 소위 비노로 분류되며 국민의당 소속 국회의원이다.[57]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그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58] 국정원 독대를 받지 않았고, 검찰 권력을 휘두르려 하지 않았다.[59] 다만 기자실 폐쇄를 과연 언론 자유 축소 정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기자실이 출입 기자단에 속하는 기자들의 편의는 보장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자들의 언론 자유는 통제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당시 나왔던 기사로, 기자실 출입을 통제당했던 군소 언론 기자들의 사례를 몇 가지 정리해 놓았다.(기사)[60] 당시 노무현 대통령 공격에 앞장섰던 이상돈 교수는 저 정도면 잘못하면 사람이 죽고 임기를 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이후 이상돈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대위로 활동하며 이명박 정부 심판을 말하였다.[61] 하지만 뉴스에서 언급되는 '사이버모욕죄'라는 것은 본래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법으로 2008년, 즉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 후에 적용된 것으로 "단지 대통령을 욕했기에 체포되었다"며 편향적으로 바라보기는 힘들다. "대통령을 욕했다"는 것보다, "특정 인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소환된 셈이다.(참고1, 참고2)[62] 친노이자 청와대 참모진을 거치고 더불어민주당의 전 당대표를 거쳐 현직 대통령이 된 문재인을 따르는 소위 '친문재인'까지 포섭하는 경향도 보인다.[63] 당시 문재인에게도 제안했지만,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64] 김영삼이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65] 당시 사법 고시 합격자 수는 60명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 부산에 변호사 수가 3명에 불과했다.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패스한 경우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 지금도 3대 고시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6] 하물며 같은 사법고시 연수동기임에도 서울대 법대와 고려대 법대에서도 서열이 나뉘어지는데 하물며 고졸 출신은 어땠을지 상상이 안간다...[67] 김민석 전 국회의원의 전 부인[68] "스머프 무슨 그 만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뭐..."[69] 실제로 이 시기에 20대가 선택한 대중문화 전반의 핫 아이콘을 선발해 상을 주는 '제2회 Mnet 20's 초이스 컴백스타 부문'에서 노 전 대통령은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김국진·신애·박미선·박찬호 등 스타들을 누르고 1위에 오른 것이다.[70]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발언. 뱀발로 워낙 당시에 원더걸스가 절대적인 존재였던지라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같은 다른 대선후보도 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71] 노 전 대통령의 경우 상술했듯 본인이 직접 연설문을 쓴 경우도 꽤 되었으며, 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연설문 강의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언론에 자주 노출된 강원국 씨의 사례를 보면 하나같이 나오는 말이 "자기 생각을 자신의 말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다"이다.[72] 거의 공범 수준으로 변호했으며 피해자 가족들이 변호사가 저렇게 싸우듯이 변호해도 되나하고 우려할 정도였다고 한다.[73]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 사망 후에 노무현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했다.[74] 내용은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 SBS 생방송 '세븐데이즈'에서 노무현의 화법을 분석한 적이 있는데, 같은 말을 반복하는 화법이 랩이나 힙합의 리듬감과 일치하며, 남궁연 음악 프로듀서는 처음 시작한 템포를 끝까지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천성적으로 리듬감을 타고난 것이라고 평가했고, Hz 단위로 역대 대통령 음역과 비교해봐도 노무현의 음역폭이 가장 넓다고 한 내용이다. 물론, 이러한 방송은 대통령 당선인 시절 매번 반복되는 띄워주기로, 2013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당시는 무려 5개국어를 동시통역사 수준으로 구사하는 천재로 말하였다. 너무나 탁월한 외국어 표현에 우리나라 전문 외교관들도 놀라고 있다고 방송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고인드립을 유포하면서 과거 저러한 방송 사례를 언급하여 두 번 희화화하고 있다.[75] 이후 해당 학교의 어느 학생은 지식in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학교에 고소당할까요?")[76] 다만, 해당 학교에서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달랐는데, '노무현이 왔습니다 싱싱한 노무현이 왔습니다' 이 부분을 '명박이가 왔습니다 싱싱한 이명박이 왔습니다'라고 바꿔 불렀다.[77] 미래 세대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지우는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다.[78] 잘 알려진 대로 모 사이트가 주범이지만, 실제 고인드립의 시작은 디시인사이드이다. 합성 갤러리가 소스를 발굴하여 고인드립을 시전한 바 있었다.[79] 대통령 당선 및 취임 당시 만 56세. 참고로 대통령 전체를 통틀어 최연소는 취임 당시 만 46세였던 박정희 대통령.[80] 다만 병장이 아닌 상병에서 전역.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병사들이 병장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엔 병장도 TO가 있었다(!).[81]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은 그 이전에 여당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민자당은 노태우의 소속정당인 3당합당으로 만들어진 거다. 이에 비해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원래 여당이었던 민주당에서 탈당한 인사들과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진보적 개혁 성향의 인사들이 새로 만들어 낸 정당이다.[82] 이전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퇴임 후 낙향하지 않고 그대로 서울에 머물렀다.[83] 유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 어떤 한국의 대통령도 시신이 화장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신은 수원 연화장 8번 화장로에서 화장되어 고향 봉하마을에 안장되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현충원에, 윤보선 전 대통령은 충남 아산의 선산에,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만 역대 대통령 사상 최초로 유지에 따라서 수원 연화장 8번 화로에서 시신이 화장되었다.[84] 타살의혹 등이 있지만 현재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다.[85] 친노이자 더불어민주당의 전 당대표로 거물로 성장한 문재인을 따르는 소위 '친문재인'까지 포섭하는 경향도 보인다.[86] 노무현 대통령의 큰형이며, 부산상고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법관의 길로 가게 도와줬다. 출생연도가 미상인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들의 생년을 대충 끼워맞춰서 가정하면 1933년쯤으로 예상된다.[87] 두 사람의 합동법률사무소 내에 무료로 상담해주는 노동법률상담소도 있었다. 결국, 이 법률사무소는 대통령을 2명이나 배출하게 되었다.[88] 이른바 5공 청문회 활동이다.[89] 안희정이 연구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90] 보궐선거로 당선되었다. 전임자는 바로 이명박이다.[91] 퇴임 후 첫 직함으로, 낙동강 개선을 위한 지역 환경 단체의 고문직을 맡았다.[92] 게다가, 송강호는 경남 김해 진영읍에서 1년간 산 적이 있었다!! 진영읍은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이다.[93] 전임자 이명박1998년 의원직 사퇴로 보궐선거. 우리가 아는 그 이명박이 맞다.[94] 그냥 뜬금없이 '이기야!'라고 외친 건 아니고 국군을 비판하며 나온 발언이다. 사실, '이기야'가 아니라 입모양을 보면 '이게 지금'이 유력하다.[95] 노무현 대통령의 작은형이다. 큰형 노영현은 1973년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