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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el Prize
1. 개요2. 탄생 배경3. 수상 자격4. 시상 분야와 수상자5. 시상 장소 및 시간6.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
6.1. 문학상6.2. 물리/화학/생리의학상6.3. 경제학상
7. 수상 차별 논란8. 노벨상에 관한 기록
8.1. 노벨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사람 및 단체들8.2. 가족 수상8.3. 최고령/최연소 수상자8.4.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들8.5.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려고 했던 사람들8.6. 국가별 수상자 수 기록8.7. 남녀 구성
9. 예산10.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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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라면 한 번 쯤 꿈꿔보는 꿈의 무대.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스톡홀름 콘서트홀. 스웨덴 국왕이 직접 수여한다.

1. 개요[편집]

(유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다섯 등분하여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견이나 개발을 한 사람,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 분야에서 이상주의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국가간의 우호와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 회의의 개최 혹은 추진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매년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졌다.

2. 탄생 배경[편집]

1888년 노벨의 형 루드비그 노벨(Ludvig Emmanuel Nobel/Лю́двиг Эммануи́лович Нобе́ль)[1]이 사망했을 때 한 신문에서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고 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에 노벨을 '죽음의 상인'이라 지칭했다. 안 그래도 다이너마이트가 군사적으로 이용되는 걸 싫어했던 노벨은 후에 유언으로 유산의 94%(약 440만달러[2])를 기부, 노벨상을 설립하게 되었다.

어마어마한 알프레드 노벨의 재산을 대부분 기부하려하자 친척들[3]이 죽기살기로 반대하며 서로 먹으려고 발악했다. 게다가 노벨은 유언장에서 국적에 상관없이 이 상을 줄 것을 당부했는데, 이것 때문에 세기말의 국수주의에 휩싸여있던 스웨덴 내 여론과 스웨덴 국왕까지도 노벨을 비난했다고 한다. 게다가 평화상 수상을 당시 스웨덴 식민지인 노르웨이에 넘겼으니 더더욱 그럴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언 집행인 랑나르 솔만(Ragnar Sohlman,1870~1948)의 결단으로 노벨의 재산은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남게되었고, 지금의 노벨상의 위상을 봤을때 참 훈훈하게 탄생했을것 같은 상이지만 실제로는 참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상이다. 솔만은 상을 제정하며 가진 인터뷰에서 욕을 그리도 많이 먹어보는지 참 재미있더군요라며 노벨의 친척들이 벌인 온갖 방해공작이나 욕설,명예훼손을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노벨 수학상은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노벨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라는 수학자가 노벨 수학상을 받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설, 미타그레플레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가 워낙 수학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보니 수상의 공정성이 떨어질까봐 제외했다는 설, 흠모했던 여인이 수학자를 선택하는 바람에 사랑이 쫑나서라는 설 등등. 근데 다 별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관련 반론). 공학도 출신 실업가였던 노벨이 수학 배워서 어디다 써? 수학은 실용학문이 아니라서 노벨상의 취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수학자들이 위와 같은 소문을 꾸며냈다는 해석도 있다. 수학상은 필즈상아벨상이 존재한다.

지질학상과 기상학상 역시 노벨상에서 빠져 있는데, 이들 분야들은 수학의 필즈상이나 아벨상과 달리 해당 분야에 노벨상과 동급의 권위를 가진 상이 아예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이 심하다. 특히 지질학지구과학의 근본이자 지구의 기원과 역사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 & 의학 등과 수준을 같이하는 중요한 분야라서 권위있는 상을 신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오고 있다. 생태학의 경우에도 생물학의 일종이긴 한데 생리학에 포함되지 않아 생태학자는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 다만 동물행동학자의 경우에는 동물행동은 동물의 생리에 포함은 되기에 노벨상을 받을 순 있으며, 콘라트 로렌츠 등이 1973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었다.

노벨 경제학상의 경우 1968년, 즉 나중에 따로 생긴 상이다.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재단에서 수상하는 상이 아니므로 노벨 재단에서 상금을 주지는 않는다. 스웨덴 중앙은행 설립 30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상이라고 하며, 상의 정식 명칭도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것의 축약어를 노벨 경제학상이라고 하며 노벨이 제정한 것이 아니라, 진퉁배기 노벨상인지 좀 논란이 있다.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서 경제학상 수상자를 선정한다. 따라서 물리학상, 화학상을 선정하는 절차와 동일하게 진행되며, 수상식에 다른 분야의 수상자들과 함께 참석해 시상 받고 상금도 동일하다. 스웨덴에서 달리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노벨상 제정 당시에는 경제학이 체계적인 분과 학문으로 발전하기 전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19세기 기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시상 초기에는 지금처럼 권위있게 여겨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곧 세계적인 명성을 갖춘 상이 되었다. 상의 수준을 높여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지금의 노벨상을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노벨상은 평화상과 문학상을 제외하면 특정한 나라 출신이 더 받기 쉽다고 비판받는 경우가 있다. 사실 문학상이 그나마 낫고, 나머지는 과학 연구 시설, 자금 문제, 홍보 등 여러가지로 제1세계에 속한 출신 인물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냉전 기간이었던 1950~1990년 기간 사이에 제2세계(공산권) 인물이 수상한 노벨상과 제1세계 수상을 비교하면 제1세계가 수십 배 많다. 물론 제2세계가 일대일로 비교하면 밀렸던 건 맞겠지만 냉전기로 한정해서 과학기술이 수십 배 차이가 났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그나마 평화상이나 문학상은 지역 안배/배려를 하는 경향이 좀 있다. 실제로 동아시아 지역의 문학상의 경우 10년정도 주기로 준다는 속설도 있다. 과학 분야는 그런거 없다. 때문에 과학 분야는 미국이 독보적으로 앞서가고 있고, 서유럽이나 일본 정도에서 국적별로 몇년에 한 두명 정도씩 수상자가 나오는 수준이다.

3. 수상 자격[편집]

국적은 일체 불문하고 가장 적합한 수상자를 선정한다.

한 상에 대해서 최대 3명에게 수상하고,[4] 생존자만이 수상할 수 있다. 이걸 못 받고 사망한 대표적인 사례는 주기율표를 만드는 데 큰 공로를 한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갈리폴리 전투에서 사망한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예외로는 1961년 콩고 내전을 중재하러 가던 도중에 북로디지아(현재 잠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같은 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제2대 UN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가 있다.

예외적으로 사후 수상한 사례가 있는데 2011년 노벨의학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인 랠프 스타인먼 박사가 수상자 발표 3일 전에 사망한 걸 노벨위원회가 알지 못하고 명단에 올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으나 수상자 목록은 그대로 유지시키기로 했다. 이유는 수상자 명단에 올리고 내리고 하는 기준은 심사위원회가 수상자가 사망했음을 인지한 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심사가 끝나고 수상자가 결정된 이후 인지는 수상자 변동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판단.#

또한 수상자로 결정되고 나서 시상식까지 수상자가 사망한다고 해서 무효처리되진 않지만, 1년 이내에 상을 받지 않으면 수상을 거절한 걸로 간주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상자는 6개월 이내에 수락 강연을 해야 한다. 즉, 노벨상 시상일이 매년 12월 10일이므로 다음해 6월 10까지가 기한. 수락 강연을 하지 않으면 상금이 수여되지 않는다. 강연 형태는 정해진 게 없으므로 일반적인 형태의 강연은 물론이고, 연실, 동영상이나 녹음, 공연, 노래 등의 형태도 가능하다고 한다.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누가 후보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지만 노벨상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며, 노벨상 최종후보자가 공개되려면 무조건 50년이 지나야지만 가능하다. 흔히 언론에서 누가 후보라 카더라는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의 배당률을 참고한 것. 래드브록스는 2006년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와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맞힌 이력이 있다. 2011년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수상이 발표되기 직전 래드브록스에서 그의 배당률이 급격히 떨어져 수상자 정보가 유출됐다는 의혹도 있었으나, 의혹제기 직후 스웨덴 검찰이 수사에 나설 정도로 후보나 수상자 정보에 대해서는 철통보안이 이뤄지고 있다. 참고로 수상 과정에 대한 정보는 수상 이후 50년간 무조건 비공개이며, 50년이 경과했다 하더라도 적합한 심사를 거쳐야 공개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직전에는 수상자에게 연락해 알려 주는데, 상술한 바와 같이 철저히 비밀로 하다 보니 전화를 받고 장난 전화로 의심한 수상자도 있었다고 한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스웨덴에 노벨상이랑 이름이 비슷한 무슨 상이 있구나 하고 생각한 수상자도 있다. 한편 시차로 인해 새벽에 전화를 받고 왜 자는데 깨우냐고 역정을 낸 사람도 있다.

한국 입장에서 불편한 사례는 러일전쟁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잘 알다시피 러일전쟁에 뒤따른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을사조약의 조건이 사실상 완비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니 얽힐 건 없지만 이것도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 출처에 따르면 노벨상 수상자의 아이큐는 평균 145라고 한다. 관련 항목

한편 노벨상의 수상자의 공식 기록에선 수상자의 현재 국적 외에 출생지를 따로 기록한다. 이는 국적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국가마다 국적을 결정하는 원칙이 속지주의/속인주의부터 시작해서 제각기 다르고, 수상자가 활동 기간 동안 국적이 바뀌는 사례도 빈번하다. 이중국적, 미승인국 문제, 수상자 본인의 국가 정체성, 종주국-식민지 관계 문제까지 들어가면 정말 카오스가 따로 없다. 그래서 출생지로 구분을 하는 것.

아주 쉬운 예가 바로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이다. 마리가 노벨상을 수상할 당시(1903년 노벨물리학상, 1911년 노벨화학상) 국적은 프랑스였다. 프랑스 출신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을 하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 본인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고 마리 자신이 폴란드인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폴란드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제정 러시아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3자의 입장인 노벨위원회가 함부로 국적을 결정하기도 어렵다.

이 출생지의 원칙 때문에 재미있는 사례도 있다. 가령 198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찰스 존 피더슨은 공식 국적이 미국이지만 출생지가 한국으로 설정되어 있다. 피더슨은 아버지가 미국인이고 어머니가 일본계인데 부산에서 태어났다. 이후 부모의 직장인 평안도 운산군 금광 근처에서 생활했다.

1965년에 학술인용분석 및 과학계량학의 기초를 닦은 유진 가필드(E.Garfield)는 초기 노벨상 수상자들이 동료 연구자들에 비해 5배 더 많은 논문을 출판했고, 피인용수는 30~50배 가량 더 높으며, 그 분야에서의 피인용수 상위 0.1%에 속하는 걸작급의 논문을 한 편 이상 저술한 바 있음을 발견하였다. 오늘날에도 2,0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의 저자들을 중심으로 노벨상 수상을 예측하기 위한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

4. 시상 분야와 수상자[편집]



인구당 수상자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이름도 생소한 세인트 루시아. 그 다음은 룩셈부르크, 스위스, 오스트리아 순이다.

유럽의 라이벌인 영국프랑스의 경우 경제-과학분야 노벨상에서 영국이 거의 3배로 앞서고 있다. 반면 수학상인 필즈상은 프랑스가 인구비가 아닌 절대 수로도 2위.

한국 수상자는 2016년 기준으로 2000년 12월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여담으로 노벨상 상금은 대한민국 국적자가 받으면 소득세법 시행령 18조 2항에 따라 세금 없이 실수령할 수 있다. 그것도 법 조항 자체에 노벨상이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5]
#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상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으나 스웨덴 중앙은행이 외국 정부 내지는 기타 외국의 단체에 포함되기에 마찬가지다.

5. 시상 장소 및 시간[편집]

매년 12월 10일, 노벨의 기일에 수상한다. 수상자들은 수상식 몇달 전에 발표된다.
평화상만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수상식이 열리며, 나머지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다.[6]
수상식이 끝나면 기념 만찬이 열리며 스웨덴에선 TV로 중계된다.

6.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편집]

노벨상이 세계적으로도 높은 권위와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으니만큼 당연히 한국에서도 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래서인지 과기원이나 유명 대학에는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 동상을 위한 빈 좌대가 하나씩은 꼭 있다... 특히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참고로 노벨상 수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주아주 좁은 분야의 응용과학보다는 전 분야에 걸쳐 인류의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의 확장을 더 높게 쳐 주는데, 한국은 기초과학으로의 투자를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수준으로 그 역사가 아주 일천하다. 이런 연구일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투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누적 투자 총액이 크지 않고 결과물도 잘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과학 연구를 할 만한 상황이 된 지가 그나마 1990년대 중후반이고, 학문의 발전 양상을 보면 1세대는 교육 2세대는 연구를 3세대는 세계 수준의 연구를 하는데 한국은 주류 교수들이 2세대~ 2.5세대 정도다.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 힘들다. 한국은 정부가 수립된지 아직 70년 밖에 되지 않았고, 70년대까지만 해도 의식주의 해결 자체가 고민거리였던 나라이다. 따라서 초기의 한국의 과학자들은 아예 국가안보와 경제 건설에 즉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양성되고 동원되었다. 그런 기억들을 고스란히 가진 중노년층이 아직은 사회 전반에 있어 많은 영향력을 지니다 보니 당장의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전반적인 교육 방향도 그런 가시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학생 육성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노벨상을 받기 위해 필요한 가치관과는 아직 거리가 먼 셈. 한국이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좀 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여유로운 사고가 먼저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상술했듯 몇몇 경우에 있어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 다행이라면 다행.

6.1. 문학상[편집]

노벨상 받을 정도로 글잘쓰는 작가가 없다.

매년 문학상 후보로 언론에서 주도적으로 설레발만 치면서 고은을 거론하는데, 그 이유로 드는게 한국어권(수상자 없음)/비주류 언어권/동양-한자 문화권 출신자인 점, 그리고 그동안 시인 수상자가 많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 안배 차원에서 수상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2011년에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에게 상이 돌아갔고, 2012년에는 중국의 소설가 모옌이 수상하면서 향후 10년 안으로 다시 한자 문화권 작가에게 상이 돌아갈 가능성이 낮아진데다가 결정적으로 고은은 한국에서도 그리 높이 평가받거나 많이 읽히는 작가가 아니다. 문단에서는 원로로서 대접해주는 정도고 대중적으로 결코 많이 읽힌 작가가 아니다 [7]. 오히려 노벨상 후보로 유명한걸로 유명한 작가다. 작품성이 아니라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 또다른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가 여러 작가중에 사상적 동질성이 있는 그를 의도적으로 밀어줬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80년대 3S 정책 중 하나로 노벨문학상을 노려 군부 정권 독재에 대한 불만을 덮고 정권 찬양에 쓰고자 당시 한국소설들을 마구잡이로 번역하여 내놓던 적도 있었다. 이때 언론이 엄청 설레발을 떨었기에 김동리 작가는 살아 생전 자신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가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다느니 뭐니라는 말을 지겹게 듣어서 늘그막에 이걸 비판하기도 했다.

아예 처음부터 최대 수상언어인 영어로 쓰면 되지 않나? 재미교포도 넘쳐나는데... 노벨문학상문서를 참조하면 거기에 대한 답을 금방 얻을 수 있다...

6.2. 물리/화학/생리의학상[편집]

그나마 문학계는 고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추측성 기사를 내 보내는 반면에 과학 쪽은 언론도 별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해서 과학 전문지가 아니고서야 설레발 기사도 거의 없다는 점(...).

물리학계의 경우는 노벨상 수상 시즌때마다 언론들이 설레발을 치지만 적어도 향후 5~10년간은 받을 일이 없다고 봐야 하며 한국의 연구 문화 특성상 노벨상이 나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한 때 그래핀 분야의 권위자인 김필립 교수가 수상후보로 언급되었지만 2010년에 러시아 출신의 두 과학자가 김 교수가 업적을 남긴 그래핀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고, 상을 받은 업적에 노벨상을 다시 줄 가능성은 드물기 때문에 앞으로 새로운 업적을 발견하지 않는 한 현재로선 수상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8]

화학 분야 후보로는 2014년부터 톰슨로이터에서 노벨상 후보자로 예측한 기능성 메조나노다공성 탄소물질과 제올라이트 분야의 개척자인 유룡 카이스트 교수가 노벨화학상 후보로 오른 적이 있으며, 이 분야는 아직 연구중이고 해당 분야의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없어서 현재 수상 가능성이 있기는 있다.

생리의학 분야는 CT, MRI, PET 의 대가로 인정받는 조장희 교수가 양전자 단층촬영기(PET)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업적이 있어서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한국계 출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게 거의 확실시 되었던 물리학자는 핵물리학의 재규격화와 게이지 이론등을 연구한 벤자민. W. 리 (이휘소) 박사가 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이후 노벨상 후보로 강력하게 노미네이트 되던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그와 같은 연구를 함께 진행한 스티븐 와인버그셸던 그래쇼, 헤라드뤼스 엇호프트 같은 인물이 훗날 해당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보았을 때 리 박사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의 물리학 발전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 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었을것으로 보아 과학계의 많은 아쉬움을 자아냈다. 애당초 이휘소 박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기 때문에 수상했더라도 그게 한국에 있어서 별 의미는 없지만....[9]

그래도 수상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며 국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몇 년안에 수상이 가능한지 물어본 설문조사 결과, 6~10년 안에 수상할 것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 그리고 가장 유력한 한국인 후보로 김빛내리 서울대 석좌교수(IBS 연구단장)가 선정됐다. 다만, 김빛내리 교수의 주 연구 업적인 마이크로 RNA 연구는 해당 분야에서 훌륭한 선도적 업적을 남겼음은 분명하지만,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수상 업적인 RNA 간섭(interference) 연구와 관련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수상 대상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Clarivate Analytics·구 톰슨로이터) 에서는 2017년 노벨 화학상 분야에 성균관대 박남규 교수를 후보중에 한명으로 꼽았다. 페로브스카이트(perovskite)를 태양전지에 적용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관련기사

6.3. 경제학상[편집]

그나마 수상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고 서서히 수상 후보가 나오기 시작하는 과학계와는 달리 경제학계에서는 그나마 수상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후보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현재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 등 서방 선진 국가에서는 국가 발전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연구하게 되고 이것이 새로운 경제학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경제 성장을 통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했던 한국에서는 선진국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해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춰왔으며, 자연스럽게 서방 선진 국가들처럼 새로운 경제학을 연구할 만한 여건이 되기 어렵다.

2001년경 한 기사에 의하면, 한국 국적의 경제학자 중 가장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일리노이대 '조인구' 석좌교수를 뽑았다. 관련기사 2013년에도 꾸준히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관련기사

7. 수상 차별 논란[편집]

수상자의 국적, 인종, 종교 등으로 차별이 있다는 의혹도 존재한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유럽이나 북미에 몰려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유대인, 독일계, 앵글로색슨계가 유달리 많고, [10] 아시아계나 아프리카계, 이슬람인은 인구에 비해 수상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에 따라 교육수준 및 기초과학 육성 수준에 극단적인 차이가 나고 미국과 유럽, 일본이 그 부분에서 훨씬 앞서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억측이다. 예를들어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 이슬람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된 파키스탄의 아브두스 살람이 자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살펴보면 이슬람이 노벨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 못한건 자업자득 일 뿐이다. 과학, 과학자를 하람으로 몰아가서 박해하는데 언감생심 무슨 노벨상인가.

다만 문학상은 국적과 사용 언어에 따라 불리점이 있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가 있는 편이다. 문학작품의 주목도가 높은 나라에 살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서방 국가에서 인지도를 얻기 유리한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가 노벨상 수상 위원회의 인지에 들고 작품성을 평가받기 쉽다는 주장이다. 출판업계에서는 관심이 적은 나라의 작품보다는 많은 나라의 작품을 번역하여 소개하려 하고, 번역 작품의 작품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유능한 번역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 분야에는 적기 때문이다.

8. 노벨상에 관한 기록[편집]

8.1. 노벨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사람 및 단체들[편집]

  •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폴란드·프랑스):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
    사상 첫 2회 수상자. 남편 피에르 퀴리 역시 1903년에 그녀와 공동으로 물리학상을 받았고, 큰딸 이렌(Irène)과 맏사위 장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Jean Frédéric Joliot-Curie)는 1935년에 화학상을 받았다. 작은사위 헨리 리처드슨 라부아스(Henry Richardson Labouisse)도 1965년에 유니세프가 평화상을 받을 때 대표로 시상대에 올랐는데, 둘째 딸인 이브(Ève)는 이를 보고 "나는 (노벨 상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으니) 집안의 수치"라는 개드립을 쳤다(…). 이브도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다닌 먼치킨인데 이런 소리를 했다니 흠많무…….
  • 라이너스 폴링(미국): 1954년 화학상, 1962년 평화상
    유일하게 두 번 모두 단독으로 수상. 반핵 운동으로 당국으로부터 출국 금지 조치를 받았는데[11], 이 때문에 DNA의 X선 사진을 보지 못했고 DNA의 잘못된 구조를 내놓는 실수를 저질러 1962년의 생리·의학상을 왓슨·크릭 등에게 빼앗겼(?)다. 이 일만 아니었다면 최초의 3회 수상자에 최초의 2부문 동시 수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
  • 존 바딘(미국): 1956년, 1972년(모두 물리학상)
  • 프레더릭 생어(영국): 1958년, 1980년(모두 화학상)
  •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단체): 1954년, 1981년(모두 평화상)

8.2. 가족 수상[편집]

    • 피에르 퀴리·마리 퀴리 부부(1903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
    • 프레데리크 졸리오 퀴리·이렌 졸리오 퀴리 부부(1935년 화학상 공동 수상) - 위의 퀴리 부부의 사위·딸이다.
    • 칼 페르디난트 코리·거티 테리사 코리 부부 (1947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군다르 뮈르달(1974년 노벨 경제학상)와 알바 뮈르달(1982년 노벨 평화상) 부부
    • 에드바르드 모세르·마이브리트 모세르 부부(2014년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 조지프 존 톰슨 (아버지, 1906년 물리학상)과 조지 패짓 톰슨(아들, 1937년 물리학상)
    • 윌리엄 헨리 브래그(아버지)와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아들), 1915년 물리학상 공동 수상[12]
    • 닐스 보어(아버지, 1922년 물리학상)와 오게 닐스 보어(아들, 1975년 물리학상)
    • 칼 만네 예오리 시그반(아버지, 1924년 물리학상)과 카이 만네 뵈리에 시그반(아들, 1981년 물리학상)
    • 한스 폰 오일러켈핀 (아버지, 1929년 화학상)과 울프 폰 오일러(아들, 1970년 생리의학상)
    • 아서 콘버그(아버지, 1959년 생리의학상), 로저 콘버그(아들, 2006년 화학상)
    • 얀 틴베르헌(형, 1969년 경제학상), 니콜라스 틴베르헌(동생, 1973년 생리의학상)

8.3. 최고령/최연소 수상자[13][편집]

  • 최고령 수상자 : 레오니트 후르비치 (만 90세 3개월 21일, 2007년 노벨경제학상)
  • 최연소 수상자 : 말랄라 유사프자이 (만 17세 5개월 1일, 2014년 노벨평화상)

8.4.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들[편집]

  • 장 폴 사르트르 - 196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였다.
  • 레득토 - 북베트남 외교부장. 베트남 전쟁 종전에 기여한 공로로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1973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공동 선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였다.

8.5.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려고 했던 사람들[편집]

  • 조지 버나드 쇼 - 1925년 노벨문학상. 본인은 처음엔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받은 뒤 인간의 탈을 쓴 악마만이 노벨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고 매우 대차게 깠다고 한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1950년에 닥터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러시아 혁명을 비판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소련 정부와 작가 동맹으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자 수상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노벨상 주최측에서는 이를 거부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았으며, 수상 보류로 남겨 두었다. 결국, 그의 사후 소련에서도 닥터 지바고가 출판되는 등 그 업적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고 난 뒤, 그의 아들이 노벨 문학상을 대리수상하였다. 고로 받긴 받았다.
  • 리처드 파인만 - 유명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 수상을 거부하려 했으나 "그런 짓(=노벨상 수상을 거절하는 것)을 하면 더 유명해질걸요."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받기로 결정했다.
  • 밥 딜런 - 2016년 가수로써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수상자 발표가 난 이후로 한동안 밥 딜런은 전혀 이에 대해서 연락을 받지도 않고, 별다른 의견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수상을 거부하는 게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다. 그러다가, 침묵을 깨고 노벨상을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다만, 본인이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고, 대신 주스웨덴 미국 대사가 참석하여 밥 딜런의 수락 연설문을 대독하고 노벨상을 대리 수상하였다.

8.6. 국가별 수상자 수 기록[편집]

2016년 12월 기준
  • 총 수상자 수 수석: 미국, 1943년부터 매년 수상자를 배출하는 천조국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 인구 비례 수석: 영국. 인구에 비례해서 따진다면 미국의 두배 가까이 된다.
  • 문학상 최다 수상
  • 물리학상 최다 수상
  • 화학상 최다 수상
  • 생리의학상 최다 수상
  • 경제학상 최다 수상
  • 평화상 최다 수상

8.7. 남녀 구성[편집]

2015년 기준
분야
남자
여자
평화상
87
16
문학상
99
13
생리의학상
197
11
화학상
168
4
물리학상
199
2
경제학상
74
1

퀴리 부인이 물리학상 한번, 화학상 한번을 수상했다.

9. 예산[편집]

아무리 노벨이 많은 돈을 남겼다지만, 상금을 계속 지급하기에 그 예산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다. 노벨재단에서는 노벨의 유산을 토대로 여러 사업[14]을 진행하고 있다. 다행히도 노벨상 위원회는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여 지속적으로 상금을 줄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노벨상 위원회의 투자도 경기 불황을 비켜갈 수 없는지, 1949년에 인당 지급하는 상금을 한번 줄였다가 그 이후 지속적으로 상금을 높여서 인당 140만불(2015년 기준으로 약 16억원)까지 지급했으며 2012년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다시 인당 110만불(2015년 기준으로 약 13억원)로 줄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10. 패러디[편집]


[1]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이자 노벨상의 창시자인 동생에게 밀려서 그렇지 이 양반도 대단한 사람인데 젊은 시절 러시아로 건너가 공장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후에는 블루 오션인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 브라노벨(Branobel)이라는 석유 회사를 설립하였다. 브라노벨은 한 때 전세계 석유 생산량의 50%를 차지했다고 한다.[2] 19세기 말에는 엄청난 돈이었다. 2000년대 초반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당시, 국내 방송에서 현재 값어치를 원화로 추정했더니 약 2,215억 원이라고 한다.[3] 반평생 넘게 독신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기에 노벨의 직손은 없었다.[4] 어떨 때는 한 업적으로 4명의 수상자가 나오는 바람에 1명이 수상자에서 제외되었을 때 3명이 상금을 나눠서 그 1명에게 주었다고 한다.[5] 정확히는 소득세법시행령 제18조 2항 노벨상 또는 외국정부·국제기관·국제단체 기타 외국의 단체나 기금으로부터 받는 상의 수상자가 받는 상금과 부상, 국가법령정보센터 출처.[6] 노벨이 살던 당시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병합된 상태였기에 노벨 사후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분리되며 평화상만이 노르웨이에서 수상식을 열게 되었다.[7] 다만 노벨문학사 수상자 중에 자국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던 작가가 여럿 있기는 하다.[8] 이 당시 네이쳐에 김필립교수의 수상 실패문제를 비롯해, 보도자료의 허술함등을 신랄하게 디스하는 기고문이 올라왔었다. 한국에서만 논란이 아니다[9] 여담으로 벤자민 리 박사의 죽음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호사가들의 대화거리가 되곤 하는데, 한국에서도 다큐멘터리로 다뤄진 적이 있다. 궁금하다면 찾아볼 것.[10] 인종 구분에는 논란이 있어 공식적으로는 정확한 수를 산출하지 않는다.[11]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12] 수상 당시 아들 브래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였다. 말랄라 유사프자이가 노벨상을 딸 때까지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였다.[13] 날짜는 시상식이 진행되는 12월 10일 기준.[14] 근데 여기에는 무기회사도 있는데, 노벨이 무엇으로 돈을 벌었는지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