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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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칭호 문제3. 입헌군주국으로서의 왕국과 제국, 일왕과 천황4. 어원5. 관련 신화6. 역사 및 상징성7. 현재8. 한국과의 관계
8.1. 방한(訪韓) 여부?
9. 논란10. 기타11. 관련 항목

일본국 헌법(日本国憲法) 제1장 '천황'[2]
  • 제1조
天皇は、日本国の象徴であり日本国民統合の象徴であって、この地位は、主権の存する日本国民の総意に基く。
덴노(천황)는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1. 개요[편집]

天皇

일본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일본의 전통 종교신토의 중심을 구성하는 사람을 부르는 명칭.

일본국 헌법국가원수에 관한 규정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덴노가 실시한다고 정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덴노를 국가원수라고 본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늘황제라는 뜻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일본의 국교였던 국가신토에서는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식민사관'과 관련되어 일제 군국주의 시대의 대명사로도 쓰인다. 근세까지 동아시아의 중화질서를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발칙한 표현인데, 고대 이후로 중화 적통 황제는 모두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을 칭해왔으니 일본의 국가수반이 천황이라 하면 굉장한 설정충돌이 발생하는 것. 이는 물론 의도된 도발은 아니고, 고대로부터 중국의 영향권에서 가장 먼 동양국가이자 섬나라로서 전통이 끊기지 않고 살아남은 결과이다.

한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표현은 '천황'이다.[3] 그러나 나무위키의 이하 문서에서는 천황의 일본어 발음(てんのう)인 '덴노'로 표기하였다.[4] 이는 국내에서 천황이라는 어휘가 다소 '친일'적인 뉘앙스로 인식되는 것을 감안해 (구)러시아 제국의 황제를 차르, (구)독일 제국의 황제를 카이저라 표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일본의 군주를 '덴노'라 지칭하여 '일왕'과 '천황' 두 어휘의 중간점을 찾은 것이다. '덴노'라는 명칭은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관련 서적에서 자주 쓰이는 어휘이다.

2. 칭호 문제[편집]

일본어 발음은 天皇(천황)의 한자 음독인 てんのう(Tennō).[5] 영어로는 흔히 Emperor of Japan으로 옮긴다. 영미권 말고도 다른 국가에서도 황제 칭호를 붙이는데 특히 태국에서는 자국 국왕은 그냥 라자(왕)라고 부르면서도 일본 덴노에 대해서는 마하라자(황제)라고 칭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

현대의 일본에서 덴노를 부를 땐 대부분 존칭 폐하를 붙인 덴노 헤이카(天皇 陛下)를 사용한다, 또는 줄여서 헤이카(陛下). 간혹 옛날 명칭인 미카도(帝)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긴조(今上, 금상)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재위 중인 임금을 부르는 말로 군주정 시대의 한국의 주상 전하처럼 중국에서도 자국 임금에 대해 쓰던 말이다. 황족만이 아니라 보통 일본인들이나 일본 언론도 모두 '덴노 헤이카'라는 말을 쓰고 덴노와 그 일가에 대해 존칭을 사용한다.

외국에서도 외교 프로토콜에 따른 경칭은 Your Imperial Majesty다. 각각의 덴노는 여타 군주들처럼 칭호를 붙여 구분하며(진무 덴노, 텐무 덴노),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현재의 덴노는 홍무제, 영락제처럼 쇼와 덴노헤이세이 덴노로 연호를 붙여 지칭한다. 황실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긴 한데, 이미 황실이 사라져 입헌군주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인들이 보면 낯설다. 또 천황의 죽음은 붕어(崩御)라고 따로 부르며, 일본어 위키백과의 천황 사망일에도 사망일이 아닌 붕어일로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가끔 '왜왕'(倭王)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때는 주로 쇼군이랑 혼용하여 '일본 국왕'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의 다종다양한 명칭이 혼용되었다. 이는 명나라청나라에게서 독립성을 보장받은 제후국이라는 조선의 정치적 한계 때문이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중국에게서 시빗거리를 살 만한 문제였다.

조선시대에도 일본의 실권자는 쇼군이며 덴노는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이라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신숙주가 이미 해동제국기에서 일본 덴노가의 세계를 자세히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덴노는 아무 실권이 없었으며 일본의 외교 주체는 쇼군이었고, 쇼군이 중국이나 조선에 대해 자신을 일컫는 말은 '일본 국왕(무로마치 막부)'이나 '일본국 대군(도쿠가와 막부)'이었다. 이것이 수정된 것은 숙종 대의 일로, '일본국 대군'이라고 하던 쇼군의 칭호를 '일본 국왕'으로 상향시켰고 이후 조선에서도 덴노를 '왜황(倭皇)'이라고 부른 것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역사에서는 이 호칭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신단이 대놓고 "일본 덴노가 조선 국왕보다 서열이 높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에도 시대 말기부터 있었다. 일단 덴노의 위상은 황제와 동등하니까 조선의 왕은 덴노=황제 아래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논리적 문제는 없지만, 일본이 보인 외교적 행동을 보면 단적으로 일본은 막부가 존립해 있을 시절까지만 해도 막부가 대외 외교를 전담해 왔는데 이는 심지어 쿠로후네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서 총영사 해리스는 쇼군을 일본의 사실상 국가원수[6]로 간주하고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의 친서를 건냈다. 또한 미일화친조약이나 영일우호조약 등과 같은 각종 불평등조약에서 최종적으로 서명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사다였다. 어떤 의미로 미국 정부영국 정부가 한 행위는 일본 조정이 아니라 막부를 자기들 협상 대상으로 했다는 측면에서 조선 조정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 대통령이나 영국의 국왕이 자기들이 덴노보다 아래라고 보진 않았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덴노 호칭에 대해 성호 이익이 이 문제를 이미 예견한 바 있긴 하다. 관련 문서 참고.

조선이 봤을 때 일본과 동등한 관계에서 화친해야 마땅한데,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조선이 일본을 더 밑으로 봤으면 봤지 절대 동등하게 봤다고 볼 수 없다. 그러니 19세기 후반 들어 일본이 자기들이 높다고 하면서 밀고 들어오니 조선으로서는 어이상실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서양의 오랑캐들과 동급이 되기로 자처한 나라였다. 결국 조선 측에서 일본이 화친을 하고자 한다 하여 여기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 주었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서는 1871년에 이미 청일 수호 조규, 즉 '대청제국 황제'와 '일본제국 천황'의 대등한 관계로서 국교를 맺었던 적이 있긴 하다. 이는 청나라 건국 이후 일본을 당시 통치하고 있던 에도 막부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 근대화된 이후 대등한 관계에서 근대적인 조약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또 조선 입장에서는 청나라도 오랑캐였다.

이 문제 역시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대군주 칭호를 택하면서 사실상 해소되었고, 대한제국으로 국제가 바뀌면서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제국 천황'과 동등해짐으로서 이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해결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천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한창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서도 천황으로 불렀다. 또한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천황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참고로 인왕산, 의왕시 등 한국의 지명에 들어있는 '왕(旺)'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왕(王)'을 '왕(旺)(= 일(日)+왕(王)'으로 멋대로 바꾼 일제 잔재라면서 이를 '王'으로 환원하는 작업이 꾸준히 추진 중인데, 이는 지극히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한 편견이다. 과거 사료에도 '旺'이 꽤 쓰였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일본에서는 금기시되는 표현인 '일왕'을 당시 조선총독부가 앞장서서 사용했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덴노를 대놓고 깔아뭉개는 단어를 군국주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던 조선총독부가 그렇게 애써 사용하려고 했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일왕, 천황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1989년 재일동포 지문날인 파동 이후 반일감정이 격화되면서 언론에서는 일왕, 일황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고,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식석상에서 일본천황이라는 표현을 썼다. 2005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일본 왕'이라고 써야 하는지, '일본 천황'이라고 써야 하는지 미처 준비를 못했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일본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초기 '천황'이란 발언을 했었고 후기 '일왕 사죄 발언' 당시에는 '일본 왕'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이것은 1회성에 그쳤다. 이후 공공기관에서 기존의 천황 표기를 일왕으로 교체하는 등의 후속조치는 없었다.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후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이후에는 '천황' 호칭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단순한 외교적인 관례라고 치부할 만큼 천황과 다른 국내용 표기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바는 없다.

대신 국내 언론은 2000년대 중반부터 전부 일황, 일왕 호칭만 쓰고 있다. 만일 천황이란 단어를 한 번이라도 쓰면 그 기사 밑의 댓글에서는 헬게이트가 열리며 그 기사가 개제된 언론사는 물론 기사를 쓴 기자까지 각종 욕설을 얻어먹는다. 그러나 국내 언론사라도 영문기사에선 Emperor라고 표기한다.예제 1예제 2[7]

중국의 경우에는 그냥 천황 호칭을 쓰고 있으며, 난징대학살 연구자들조차도 쇼와 덴노를 깔 때도 쇼와 천황(天皇)이라 표기한다. # 이는 중국에서는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에 대해 황제라고 사용해 왔고, 왕은 황제의 혈족이나 공적이 높은 일부 권신들에게 부여하던 직책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위키러가 중국에선 한국 사극의 조선의 왕을 황제라고 번역한다고 했는데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다수 사극은 조선 국왕이라고 표기하지 조선 황제라고 하지 않는다. 중국에선 수준 미달 통역사가 한국 드라마 번역하는 사례는 흔하다

우리나라는 황제와 왕이 국가 최고 통수권자를 칭하는 말과 동시에 황제가 왕의 상위 개념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천황의 경우, '천황'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반명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심한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 '하늘의 황제'로 받아들이는 정서가 있어서 거부감이 생기는 것. 과거 일본제국 시절 국가신토의 최정점으로서, 현인신의 지위에까지 있었던 점을 보면 그 이유가 명확하다.

또한 황제가 '왕중왕'의 의미나 '신의 대리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천황은 대리자도 아닌 아예 '하늘의 황제'라는 뜻의 칭호에서부터 너무 오버가 심하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 거기다가 '황제'보다는 '왕'이 군주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폭넓게 쓰이는 이유도 있으며, 황제는 고대 로마중국이나 러시아 같이 영토가 매우 넓은 나라의 군주의 이미지가 있으며, 민족주의적 감정과 더불어 일본이 매우 넓은 영토를 갖는 나라가 아니기에[8]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덴노를 황제라 인식하지 않는다.

다른 식의 표기로는 이원복 교수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덴노'라는 표기를 주장했다. 이 주장은 덴노를 천황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파라오'나 '차르'처럼 일종의 고유명사로써 바라보자는 근거를 곁들였다.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채택된 동아시아사는 천황이라고 써서 논란이 일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를 다룰 때 '천황제의 확립'과 같은 표현은 일반적인 편이다. 물론 이쪽도 '일본의 고유명사', '일본식의 특이한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한반도 국가는 물론이고 중국조차 일본에게 '조공'했다는 일본서기 식의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물론 일본서기 자체가 가려볼 점이 많다는 전제가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일본 군주, 일본 임금 등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영국 여왕 등 현대에도 군주정이 남아 있을 경우 명칭은 군주나 임금이기 때문. 특히 '일왕'이라는 표현으로 덴노라는 존재를 대치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 극우파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친 사건이 일어나면 한국 언론들은 "일본 극우파들이 '일왕 만세'를 외쳤다"고 보도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용 주체가 한국인이 아닐 경우, 특히 일본인일 경우엔 일왕이란 표기는 영 어색해지게 된다.

또한 황실을 왕실로, 황태자를 왕세자로 일률적으로 고쳐버리는 등 일본 고유의 명사를 멋대로 왜곡해버리게 된다. 당연한 것이, 일본은 따로 친왕과 왕 작위가 있으며, 덴노를 지칭할 때 일왕이란 단어를 일본인들은 안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바꿔버리면 또 친왕/내친왕[9], 왕/여왕[10] 같은 일본 황실 용어들은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갸우뚱해 한다. 한국인에게 전달할 목적이라면 어느 정도 바꾸는 게 언어소통면에서 명확하다.

그리고 이미 '일왕'이라는 호칭 자체가 '일본국왕'의 줄임말이다. 엘리자베스 2세 영왕이라거나 루이 16세 불왕이라고 줄여부르지 않는데, 왜 일본의 군주만 호칭에 나라 이름을 붙여야 하냐는 비판도 있는데 격하시킨 것도 아니고 단순히 줄여 부르는 걸 비판할 명분은 없으며, 영국 여왕을 영여왕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못 믿겠으면 포털 사이트에 영여왕을 검색해 보자.

그러나 덴노에 대해서는 'Emperor'라고 쓰는 외국 언론들도, 오직 덴노에 대해서만 황제라고 쓰며, 덴노의 일가에 대해서는 일본 고유의 표기를 존중하지 않는다. 일본 내 공식적 칭호로는 후미히토나루히토 '친왕', 그리고 마코 '내친왕' 이지만, 국외에서 이들이 친, 내친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King Naruhito, King Fumihito, Queen Mako라고 부르지 않으며,[11] 단지 Prince/Princess라고 칭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Prince/Princess가 '왕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동시에 공작 정도에 해당하는 작위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두고 국외 언론이 일본의 공작이라고 격하시킨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각 언어나 지역별로 의미가 완전히 통일되어 사용되지 않기때문에 덴노라는 호칭과 어긋나는 공작(공녀)/왕자(왕녀)의 호칭이 어색하다고도 보지는 않는다.

현지에서 표기하는 방식과 다른 어휘를 쓰는 예시로, 황제도 있다. 중국에선 황제=최고 지배자이고 왕=황족이나 귀족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귀족 작위로서의 왕과 통치자로서의 왕은 중국에서도 달랐다고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조선 왕과 일본 왕(대개는 쇼군)마저 엄연히 중국 황제의 제후들이었다. 조선이나 (가끔) 일본에서 새로운 군주의 즉위를 중국에 보고하는 체제가 그 예다. 우리나라의 사극이 중국으로 넘어가서 방영되면 조선 왕이 조선 황제로 바뀔 때도 있다.

관련 기사들
戰後 평화노력 인정 '천황' 공식 사용키로
노무현 정부, 공식문서에서 '日王' 전환 추진역대 언론자료로 본 천황 사용 비율 역대 언론자료로 본 일왕 사용 비율 서구와 베트남 말레이시아에서 쓰는 사용 실태(오마이뉴스)

3. 입헌군주국으로서의 왕국과 제국, 일왕과 천황[편집]

현재 국제관계에서 일본이라는 나라가 영국처럼 다른 나라들을 연방제 형태로 거느린 제국은 아니다. 다만 1) 영연방은 번역어를 '연방'이라고 하고 있기는 해도 연방(federation)과는 무관하다. 대영제국으로서 식민지들을 거느렸던 것도 옛날 얘기고, 영연방 국가들 중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모시는 영국 이외의 15개 '영연방 왕국'에 대해서도, 영국이 그 나라들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주권국가들 사이의 관계이다. 2) 영국 그 자체도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그 반대인 단일국가(unitary state)로 분류된다. 현재 영국은 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가 연방 국가의 주처럼 변모하고는 있으나 아직 중앙 정부와 이들의 관계가 이런 연방제처럼 돼 있지 않다. 게다가 영국의 절대 다수 인구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와 같은 자치권이 있지도 않다. 그래서 현재의 영국은 기본적으로 단일 국가로 분류되되, 연방제와 유사한(quasi-federal) 측면이 첨가된 정도의 국가로 설명된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현대까지 황실이 존재했었던 에티오피아를 예로 들자면, 사실 이러한 칭호는 그냥 제국이든 아니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황실'을 유지한 것으로 보는게 옳다.

제국이라는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 군주가 황제인 나라를 가리킬 수도 있고, 2)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과 구성원에게까지 통치권을 확장하는 국가를 가리킬 수도 있다. 1)과 2)가 일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3공화국은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식민 제국(French colonial empire)으로 자주 표현된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기존에 쓰던 대일본 제국(大日本帝国, Empire of Japan)이라는 국호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일본 왕국(日本王国, Kingdom of Japan)을 새로운 국호로 하지는 않았다. 현재 일본의 정식 국호는 일본(日本, Japan), 내지는 일본국(日本国)이다. 일반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왕국(kingdom)이란 표기를 쓴다. 왕이 없는 나라는 물론 공화국(republic)이나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등을 쓰고 미국과 러시아처럼 여러 나라가 모인 체제는 연방(federation), 영국의 경우는 연합왕국(United Kingdom), 스위스는 동맹(confederation)이란 표현을 쓴다(역사적 이유 때문에). 하지만 일본은 1947년 이후 현재까지도 국제적으로 일본국(日本国, Japan)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활동하며, 정식 국호에 자신들의 국가체제를 표현하는 왕국이나 공화국 등을 붙이지 않고 아무 것도 안 붙인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추측하기로는 현대 일본의 헌법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패전 이후 히로히토는 더 이상 정치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다며 입헌군주로서의 최소한의 권한까지 전부 버리는 길을 택했는데, 이때부터 일본의 군주인 덴노는 단순한 입헌군주가 아닌 애매한 존재허수아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는 국가에서는 당연히 군주가 해당 국가의 상징이자 헌법상 국가원수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일본 헌법에서 덴노는 일본의 상징이라고만 명시되어 있을 뿐, 국가원수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즉 군주가 존재하긴 하나 아무런 권한도 없고 병풍 헌법상 국가원수라 명시되지도 않은 그저 상징적 존재로서 존재하며 스스로를 황제국이라고 칭하고 싶은 일본이 공식적으로 왕국(Kingdom)이라는 국호를 쓰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4. 어원[편집]

사실 덴노라는 명칭은 고대 일본 초기부터는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의 명칭은 오키미(大王,大君) 등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치천하대왕, 스메라미코토라는 명칭으로 올라갔는데 바로 이 스메라미코토의 의미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천황(天皇)이다. 따라서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지 덴노라고 읽지는 않았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속설로는 중국의 황제인 천자(天子)보다 높이려는 의도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천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주신인 옥황상제를 일컫는다. 일본서기쇼토쿠 태자오노노 이모코수나라에 파견했을때 당시의 서찰의 서두에 "동천왕이 서천황께 보냅니다.(東天王敬白西天皇)"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이라는 단어 자체를 원래 일본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황이 '천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원래부터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다.

도교에서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등 방위구분이 있었으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대신들로부터 모든 황의 가운데에 있는 태황(泰皇)이라는 명칭을 건의받았으나 황제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었다. 중국의 도교 신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면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본래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신의 계율사회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인 옥황상제를 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의 천황과 일본에서의 천황은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또한 이 '천황' 이라는 단어의 언급 문제는 중국 측과 일본 측의 자료가 확실하게 엇갈린다. 중국측에서는 위진남북조 시절에 중국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보낸 외교서찰이 시초라고 본다. 물론 물론 이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에서는 일본측의 자료보다는 중국측의 자료를 압도적으로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당고종측천무후당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일시적으로 황제를 천황, 자신을 천후(天后)라고 높였던 시대가 있는데 이때 일본이 당나라와 접촉하여 천황 칭호를 수입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천황대제(天皇大帝)라고 하는데 북극성은 천상의 궁궐인 자미원의 정점에 자리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군주도 이와 빗대어 군주는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면하며 궁궐도 북쪽에서 남면하여 남쪽으로 큰 주작대로를 낸다. 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를 북극성에 비기는 호칭이 퍼졌다는 것이다. 도교 영향을 받기 이전 덴노의 의례는 태양과 연계되는 동서축이 종교의례적으로 중요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미카도(帝)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스메라미코토'라는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자어를 발음대로 읽은 덴노보다 더 '정통적인' 호칭인 셈이다. 덴노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 황실이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밀려나면서 스메라미코토라는 의미가 잊혀져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흑선 사건 이후 일본의 군주를 부를때 이슬람권의 술탄, 독일어권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를 부르듯이 일본의 미카도(Mikado of Japan)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잘 그러지 않는 듯하다. 요즘에는 그냥 Emperor of Japan이라고 하는 추세.

메이지 유신 후 덴노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는 덴노는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지는 못했다. 미카도 등의 다른 명칭들을 제치고 덴노라는 명칭이 낙점된 이유는 바로 '천황'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상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의 일본에서는 쿠로사와 아키라를 영화계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를 학계의 천황이라 부르는 사례처럼 한 사람을 위한 신성한 호칭이 아닌 그저 왕의 대명사로서 쓰이기도 한다.

5. 관련 신화[편집]

역사가 오래된 나라라면 흔히 보이는 '군주를 신격화 하려는' 특성으로 인해서 덴노는 일본 신화의 신의 자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자나기(男神)와 이자나미(女神) 남매가 현관합체를 비롯한 각종 행위(코를 만지거나 귀를 씻거나 기타 등등)를 통해 일본의 무수한 신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미하시라노우즈노미코(三貴者, 삼귀자, 산키시)라 일컫는 아마테라스, 츠쿠요미, 스사노오가 가장 막강하다. 각각 하늘과 하늘에 있는 타카마가하라(아마테라스)와 달과 역법(츠쿠요미), 바다(스사노오)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 중 바다를 통치하는 스사노오야마타노오로치를 물리치고 야마타노오로치에게 잡혀있던 쿠시나다히메와 결혼해 자식을 두었는데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 옛 기록에서는 '오쿠니누시'는 스사노오와 친척이자 스사노오의 사위로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뒤 스사노오로부터 마지막 축복을 받았다. 그 뒤 이즈모에 거점을 두고 '나라 만들기'(나나기와 이자나미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나라/땅 만들기를 오쿠니누시가 계속 이었다는 의미)를 계속하여 땅 위를 다스렸으나 지상은 여러 신들이 혼란스럽게 구는 어지러운 나라에 불과했다.

이후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彦彦火瓊瓊杵尊)와 니기하야히노미코토(饒速日命) 형제를 각각 규슈와 야마토에 내려오면서 '원래 니들 거니까 뺏어와'라고 해서 따지고 보면 사촌인 오쿠니누시를 몰아냈고 그 후 니니기의 자손인 진무 덴노가 또 사촌을 몰아내고 야마토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란 이름에서 神名에 해당하는 부분)' 등을 내려보낸 주체가 전승에 따라 다르다. 일본서기는 여러 가지 전승을 취합했으며 본문이나 일서니 하는 식으로 다른 전승이 있음을 분명히 구분했다. 본문과 일서를 포함하여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는 니니키를 내려보낸 주체는 천계 타카마노하라가 열릴 때 처음으로 나타난 세 신들 중 하나라는 '다카미무스히'이다. 그보다 덜 오래됐으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판으로 간주한 본문의 기록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명을 내렸다. 그리고 일서에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은 '아마테라스'가 단독으로 명을 내려 손자 니니기 일행을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마테라스가 황씨조신(皇祖神)이자 천계 다카마노하라의 주신으로 자리매김함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카마노하라란 개념 자체가 민간층이 아니라 야마토 조정 내부에서 생긴 궁정신화이다. 야마토 조정의 초기 황조신이 아마테라스가 아니라는 데에는 거의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 초기 황조신은 다카미무스히였을 가능성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서기 중 일서에만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을 표준판인 양 정책적으로 퍼트리고 교육했다. 전후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마저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때의 덴노관을 일본 고대의 덴노관처럼 이해했다. 가장 후기의 전승을 메이지 정부가 표준판으로 간주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가장 후기의 전승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면서 '천양무궁의 신칙'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천양무궁의 신칙 내용은 요약하면 이러하다. "지상은 내 손자 니니기와 그 자손들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

덴노가 신이면서 죽음을 맞는 부분도 신화를 이용해 구색을 맞춰뒀는데, 니니기가 지상에 내려오면서 코노하나사쿠야히메를 보고 미모에 반해 청혼했더니 그 아버지가 언니인 이와나가히메도 데려가라고 했더랬다. 이와나가는 못생겨서 거절하고 봤다고한다. 사쿠야를 통해 왕실이 만발하는 꽃(はな・花)처럼 번성하라는 것이었고 이와나가를 통해 돌(いわ・岩)처럼 튼튼하게 유지하라(불사)는 뜻이었다. 니니기가 사쿠야를 취해 왕위도 얻고 만세일통하지만, 이와나가를 버렸기에 신의 자손이면서도 불사를 얻지 못해서 죽는다는 것이다.일본인의 선조는 목숨보다 모에를 소중히 했다

일본서기고사기 등 속칭 '기기신화'가 완성되기 전의 기록을 보면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무 덴노 자신이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 자신으로 간주되었다. 신화적, 종교적 의미에서 덴노의 계승식이란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이자 진무 덴노이자 역대의 덴노였던 바로 그 존재가 되는 의식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옛 신화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6. 역사 및 상징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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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여자들이 입은 옷은 쥬니히토에라는 옷이다. 남자들이 입은 옷은 소쿠타이, 머리에 쓴 관은 스이에이노칸이다.

일본 신화에 따르면 '세계 유일의 황제'이자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현신'이며 일본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덴노의 혈통이 끊어졌던 적이 없기 때문에 '만세일계의 수호신'으로도 불린다.

대정봉환 이전까지의 덴노는 명목상 일본 정부인 조정의 수장으로 수도인 교토나 직할 영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무사정권은 천황 자체를 쫓아낸다거나 찬탈하지는 않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대로 두었는데 일본 역사상 또라이가 없는 건 아니라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본인을 신황이라고 일컬으며 천황이 되길 시도한 적이 있다. 결국 조정에서 보낸 쇼군의 군대에 토벌당해서 죽었다. 또한 현대에는 옴진리교아사하라 쇼코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렇게 일본의 명목상 지배자이며 상징성을 가진 구심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권력을 지닌 시기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밖에 되지 않는 등 길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센코쿠 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적인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게 절정에 달했다.

이 탓인지 한때는 허름한 집에서 그림이나 글을 팔아먹고 살았다.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년~1557년)가 대표적이다. 고나라 덴노는 특히나 즉위식을 치를 돈도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고호조(後北条)나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헌금을 받아서 즉위한 지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덴노 자신도 자신의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고 한다. 또 궁내들이 매춘을 해대며, 동네 아이들이 텐노 본인을 무시하며 마구 돌을 던져, 그 돌에 맞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 말대로는 일본 최초의 국가로 생각되는 야마토(大和)로부터 신의 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내려오며 일본을 통치했다고 하여 '만세일통(萬世一統)의 덴노'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덴노'라는 명칭이 사용된 건 비교적 최근이며 피나 이름이 끊긴 듯한 애매한 시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4년 미즈노 유(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체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덴노 가문의 역사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15대 오진 덴노까지의 고왕조, 16대 닌토쿠 덴노에서 25대 부레쓰 덴노까지의 중왕조, 26대 게이타이 덴노 이후의 신왕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스진 덴노 이전의 덴노는 역사상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12]

이 학설은 많은 비판 혹은 보충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후 '기마민족 정복설'이나 '규슈 왕조의 야마토 지역 정복설' 등 다양한 왕조 교체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학설들이 주류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세일계'라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3왕조 교체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 일본 덴노의 역사는 1500여년이 넘어간다. 흠좀무.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덴노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거나 상황이 출가하여 법황으로 물러난 뒤에야 오히려 실권을 가지게 되고 덴노는 사실상 태자 정도의 지위에 불과한 시대도 있었다. 이를 인세이라고 한다.

특히 이른바 '남북조시대'라고 하여 덴노가 2명이나 있던 시대가 있었다. 하나는 원래 덴노, 다른 하나는 당시 막부가 추대한 새 덴노. 가끔은 남조가 우세하기도 했지만 점차 막부가 세력을 넓혀가고 규슈를 완전 복속하면서 결국 북조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알선으로 남북조 두 가문이 왕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천황 직속령인 "고쿠가레(국어령, 国衙領)"를 다이가쿠지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요시나리 친왕[13]이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3종 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이 해(1392)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기 고쿠가레의 토지는 거의 조금 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조 세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당초에 약속했던 교대 계승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남조의 혈통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시기의 남조 혈통을 후남조라고 부르는데, 약간 남은 기록이 있기는 하나 반란을 일으켰다가 횡사하는 정도로 매우 안습하다. 결국 '서진의 남조(가칭)'라는 한 왕자가 어느 절에 의탁하였다는 기록을 끝으로 남조의 계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의 정통을 인정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남조 2대를 정통 덴노로 인정하고 종래의 96대부터 100대까지의 덴노를 "북조"로 보고 정통에서 제외하였고 남조의 노리요시 친왕, 요시나리 친왕은 덴노가 아니었으나 즉위한 것으로 보고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했다.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이쇼 덴노[14]의 명으로 남조를 정통으로 한 이후에도 즉위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 유타나리 친왕에 대해서도 즉위한 것으로 보고 조케이 덴노로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남조의 후손으로 황위를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총합 약 50여명 정도가 나타났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모두 근거없는 주장으로 추정된다.

남북조 시대 혈통분쟁과 관련한 부분은 교고쿠도 시리즈 3권 <광골의 꿈>에서 소재로 사용된다. 그야말로 안습한 역사.

쇼군들이 권력이 있었다 하되 자기가 직접 덴노가 되지 않은 건 권력층에게 지니고 있던 상징성 때문이며 쇼군들도 덴노에게 위임받아서 다스렸다는 식으로 권력을 휘둘러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지만, 그것도 무로마치 막부 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에도 이미 그 명분상으로 쇼군이 권력을 위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도 이미 '관념상으로 (실제로는 아니지만) 원래 당연히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존재는 덴노가 아닌 쇼군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에도 막부대까지 오면 쇼군이 덴노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다. 즉 쇼군이 직접 덴노가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덴노의 상징성 때문이지만, 그 이후에는 쇼군이 직접 덴노가 되고 싶어할 이유도 당위성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덕일 같은 사람은 중세 일본의 덴노는 제사장 역할 그 이상도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들의 지배체제가 굳어지면서 덴노는 직접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닌 상징성만을 지닌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굳이 덴노 자리를 빼앗아서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일본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덴노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일본 제국 시절에도 덴노가 절대 군주였는지는 일본 근대사를 차분히 곱씹어야 할 일이다. 일본 제국 시절에 중요한 것은 덴노가 전 일본을 다스리는 신국의 계승자라는 '이미지', 즉 권위를 지닌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15]

메이지 덴노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였다. 보통 타인에 의해 군주가 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메이지 시대 초기에 덴노의 위치는 민중에게도 대단히 모호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쇼군다이묘, 사무라이들의 지배를 받았지 덴노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랬기에 덴노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인신(現人神, 아라히토가미)'이라는 개념조차도 민간의 생각과 지배층의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덴노가 행차할 지역에 사전 파견된 정탐꾼이 그 지역의 민심에 대해 기록한 점이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난다. '덴노께서 행차하시니 길을 닦으라고 명령해서 길을 청소했다. 덴노의 행차라는 것은 정말로 귀찮기 그지 없다.' 게다가 행차를 위해 뭘 만들라고 하면, 적당히 대충 만들고 끝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덴노의 행차에 을 집어던지는 레알 돈벼락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는데, 신에게 돈을 바쳐서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을 그대로 덴노에게 적용한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덴노의 행차가 지나가면 이나 노래 또는 음식을 바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것은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민간 신토의 방식으로 신이라고 하는 덴노에게 경의와 숭배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덴노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씌우려 했던 일본 정부는 이런 행동에 기겁하였고, 금지와 억압으로 이런 전통을 단절시켰다.[16] 같은 이유로 현인신인 천황이 존재하는데 신과 소통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기존 신토계의 무속인들도 탄압당했으며, 이는 현재 일본 신토에서 무녀가 아르바이트 직업화하고 신관은 사실상 신사 관리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메이지 정부는 덴노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덧칠하려 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 작업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폭력과 금지·억압이 덤으로 따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헌병경찰'도 일본에서 하던 짓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는 위처럼 메이지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신화를 사실로 가르쳤고, 덴노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덴노를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미담으로 그려지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뻘짓을 해서 화재유폭-굉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엔 궁성요배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실패와 몰락은 이미 여기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 권력이야 어쨌건 근대 일본에서 덴노의 상징성과 신성함은 대단한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잠시 묵었던 집에서는 그가 썼다는 물건과 자리에 투명 덮개를 덮어 박물관의 전시물 다루듯 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마시고 목욕했다는 우물물은 '신이 사용한 물이니 신령함이 깃든 만병통치약일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덴노가 잠시 머무는 집이더라도, 지역에서 유지 가문이어야 하고 가족 중 죽은 이가 없어야 하며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각별히 신경을 써 머물 집을 뽑았다.

대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덴노였던 히로히토는 단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나 얼굴마담이 아닌 꽤나 실권이 있었던 국가원수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히로히토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이스는 단 3차례가 있다. 첫째는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책해서 물러나게 한 사건, 둘째는 2.26 사건 당시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고 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반란 진압의 계기를 마련한 점, 셋째로, 패전 과정에서도 '성단'을 내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당시 히로히토는 육해군의 동향을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작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미국의 장군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매우 잘못했다는 떡밥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 외에도 메이지 덴노 역시 시기에 따라 나름 권력을 지녔다고도 한다. 사실 실권이 없어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 뭘 몰랐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히카루 겐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상적인 지도자 유형에 따라 신하들에게 다 맡기느라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지도자는 생각없이 인생을 즐기고 실제 일은 아랫것들이 다 하는 스타일. 이런 문화 때문에 일본은 굳이 덴노가 아니라도 막부나 번, 군부에서 유난히 중간층의 영향력이 강했다[17].

메이지 헌법 등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실제로는 일본의 국사 중에서는 덴노가 아니면 권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영역이 있었고, 메이지 6년의 정변이나 종전 당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답이 없으면 덴노가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또, 메이지 시대 말년에는 이토도 죽고 어지간한 신하들도 슬슬 나이를 먹고 은퇴했을 뿐더러 메이지 덴노 본인도 나이를 먹었을 무렵에는 그나마 활동을 좀 했다.

사실 히로히토는 서자였던 아버지할아버지와는 달리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에 흠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군주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가 덴노로 즉위했을 무렵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히로히토를 위협할 힘을 가진 것은 일본군뿐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견원지간이었고, 그 둘 모두 "내각의 통제는 거부하지만 최고 지휘관인 덴노에게만은 절대 복종한다"고 맹세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히로히토는 공공연하게 민간정부를 지지했으며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연구는 없다. 문제는 내각이 덴노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군부를 컨트롤하려고 하면 군부는 통수권이 덴노에게 있지 내각에 있는게 아니라면서 반발하는 것이었다. 군부는 이른바 통수권 간범이라는 논리로 내각과 정당정치를 역적도당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막으려는 궁중 중신들까지도 역적/간신배 딱지를 붙여 탄핵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덴노기관설 등 덴노를 현대적 정책결정과정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이치키 기토쿠로 등 히로히토 측근들의 시도를 격렬하게 공격, 축출시키고 메이지 시대의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극에 달한게 2.26 사건으로, 쿠데타군에게 총리대신이 살해당한 줄 알았던 히로히토는 쿠데타 당일 새벽에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육군에게 즉시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육군상 가와시마는 이를 무시하고 쿠데타군과 3일이나 지리한 대치전과 협상을 벌였으며[18] 심지어 반란을 진압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는 사태 마지막 날까지도 육상과 참모차장에게 덴노에게 대권을 쥐어주고 유신을 선언토록 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19] 결국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의 투항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히로히토의 통수권이 얼마나 유명무실하였는지를 입증해보였다. 더군다나 사이토 마코토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유력한 측근들이 살해당하고 권위를 실추당한 히로히토는, 쿠데타군이 자신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접선하여 황위 교체를 노렸다는 뜬소문까지 퍼지면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히로히토가 무력화되는 시기도 바로 이 2.26 이후이다. 히로히토가 1937년 우가키 가즈시게를 총리로 임명하자 육군이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하야시 센주로를 내세워 총리대신에 앉힌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육군에겐 덴노에게 대놓고 거역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현인신이라는 덴노조차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실제로 작전회의에서도 히로히토가 직접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군 수뇌부들이 낸 의견들을 듣고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승인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몇몇 개막장 작전에 관해서는 히로히토도 '이 작전이 실제로 가능하기나 한 건가?'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으나, 결국 수뇌부 다수가 찬성하면 본인의 의견은 접어버리고 '다수가 찬성했다면 짐 또한 반대하진 않겠소.'라며 결국 승인을 해주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의 개전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히로히토가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명시한 제3 제네바 협약과 전시 생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에 비준하는 것을 거부했다는[20] 말이 있으나 비준이 무산된것은 육군과 해군 즉 군부의 반대로 1934년에 무산된것이므로[21] 히로히토가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한다는 덴노의 권위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다. 섭정 시절인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1928년에 강화해서 반정부운동 탄압에 써먹었다고 주장되나 마찬가지로 히로히토가 섭정이었던 1922년 2월에 사법성에서 치안유지법의 전신인 '과격사회운동단속법안'을 제출했다가 기각된 사실과[22] 1925년 보통선거의 실시와 맞물려 내무성과 당시 보수양당이었던 헌정회와 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입법되고 강화되었던 사실[23] 이 어디에도 히로히토가 관여했다는 주장이 끼어들어갈 자리는 없다.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리로 지명되었다가 육군의 반대로 조각에 실패한 것을 아돌프 히틀러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2번이나 독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다가 육군의 반대로 실패한 사례로 비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일국의 재상인 총리대신을 임명하려다가 군부가 인정을 거부하여 무산된것과 군부인사문제를 손대려다가 군 내부의 반대로 실패한 것을 같은 격에 둘 수 없는 것이고 또한 히틀러의 외교정책에 독일군부가 쿠데타 음모까지 벌여가면서 반대하다가 결국 모두 숙청되고 예스맨만 남아 히틀러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과는 달리 일본군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했고 항복을 질질 끄는데 성공했던 걸 고려하면 독일 군부와 일본 군부의 권력 지위는 서로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중일전쟁 초반에 일본 육군은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을 고려했는데 히로히토는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확대시킨 고노에 후미마로를 지지했다고 하나, 협상을 파토낸 건 육군성(이타가키)과 내각(고노에)이었고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한 쪽은 지금까지 만주 침략활동을 주도해 온 참모본부(간인노미야)였는데, 사이온지 긴모치의 비서였던 하라다 구마오의 일기에 의하면 1938년 1월 14일 내각의 반대에 직면한 간인노미야가 협상 지속 문제를 놓고 어전회의를 열어서 내각의 결정을 뒤집으려고 하자 히로히토가 "그러면 애초에 중국에서 일을 안 벌였으면 될 것 아니냐"며 질타했던 것이다.[24]

히로히토의 평가는 매우 복잡한데, 자세한 것은 쇼와 덴노/전쟁 책임 문서 참조.

7. 현재[편집]

현재도 일본의 상징격인 존재.

영국 국왕과 비슷한, 비록 권력은 없지만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며 언론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모에선마저도 비껴나가는 절대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카메이도 악취사건 문건에도 기술돼있지만 일본의 사이비종교 화학테러집단 옴진리교가 이런 일본 덴노를 독극물로 암살하려다 발각돼 일본 전체에서 아예 옴진리교가 퇴출을 당한 것이다. 일본 만화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덴노 가문을 소재로 한 건 마코 공주를 제외하면 거의 보기가 힘들다. 윤간 장면이 나오는 동인지가 한때 웹에서 돌았다거나, 1990년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부부인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당시 가와시마 키코)의 결혼을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긴 하다.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을 뿐이지, 실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황실의 숨겨진 스캔들이나 소문, 치부에 대해서 소문이 상당히 많다. 예컨대 후미히토 친왕의 불미스런 사생활 문제와 같은 것들. 일본 생활을 해본 어떤 사람이 황실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일본인들이 피식하면서 "황실에 대해서 많은 소문들이 돌아다닌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상징이기 때문에 상징답게 처신해야 할 의무가 부과되어 있다.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까지 덴노의 규정과 덴노가 해야 할 의무, 권리가 적혀 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덴노는 상징이니까 국가 행사에는 무조건 참가해서 상징답게 굴어야 하고, 권력은 없으니 내각이 정하는 것에 군소리 말고 도장만 찍으면 됨'이다. 즉 헌법 레벨에서 '늬들은 꼭두각시니 내각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라고 못을 박아놓은 셈이다.

입헌군주제 국가 중에서도 이 정도로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든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에도 바쿠후(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한 덴노와 조정을 통제하기 위한 법률인 금중병 공가 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사실상 더 엄격하게 강화한 거나 다름없다.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의 국왕은 실제로 사용하긴 어렵겠지만 일단 법률거부권이나 인증거부권, 의회해산권 등의 권한을 지니고 있다. 태국 같은 경우엔 쿠데타 등의 비상상황에선 국왕이 제재를 가하거나 승인함으로서 실제로 개입할 수 있으며 2차대전영국 같은 군주제 국가에서 국왕이 한 행동처럼 필요에 따라 군주가 개입할수 있다.

외국의 입헌군주는 또한 정치적인 권한은 없더라도 정치권으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상당한 양의 사유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영국 왕실의 맨 섬과 채널 제도 등으로, 이 지역은 왕실의 사유지로서 영국이 공화국이 되더라도 현 윈저 왕조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이에 비해 덴노는 아무 것도 없다. 권력도 재산도. 국회에 얼마를 쓰고 싶다고 제출했는데 국회가 거부하면, 극단적인 경우 옷을 기워 입는 센코쿠 시대 수준의 덴노처럼 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국회도 바보는 아니라 대부분은 사전에 합의를 보고, 그 다음 제출한 총액에서 일부만 적당히 깎아 인준하기에, 그냥 부티 나는 중산층 정도 수준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아울러 덴노 일가의 생활을 돕고 관리하는 궁내청 직원들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월급을 준다.
제3조
덴노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요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25]
제4조
① 덴노는 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
② 덴노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위임할 수 있다.
제5조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섭정을 두는 때에는, 섭정은 덴노의 이름으로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한다. 이 경우에는 전조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제8조
황실에 재산을 양도하거나, 또는 황실이 재산을 양수 또는 사여(賜與)하는 것은 국회의 의결에 기초하여야 한다.

보다시피 국사행위에 거부권은 없는데 무조건 승인해줘야 한다는 조항도 없다. '덴노는 선하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다소 어처구니 없는 이유라고 한다. 물론 이건 의식적인 문제이고, 일본 정치인들이 대책도 다 세워뒀다. "덴노가 핑계를 대며 승인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무부에서는 "선한 덴노가 의회의 의결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정신병에 걸린 것이므로 섭정을 세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26] 더 골 때리는 건 중의원 해산(의회해산)에도 덴노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일본 총리가 각의(내각회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면 덴노는 반드시 승인해야 한다. 무조건 승인을 해줘야 한다는 조건은 없지만, 승인을 안 할 수가 없다. 총리가 각의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면, 덴노는 그냥 도장 찍은 문서를 주는 역할밖에 못 한다.

거기다 궁내청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아 일본 덴노와 그 가족의 일상생활 모든 것을 통제한다. 거부할 권리는 전혀 없다. 특히 무엇을 하건 간에 일단 궁내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한 10가지의 신청을 하면 그 중 9개는 인가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덴노라고 예외는 없다. 나루히토 황태자의 아내인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

- 책방 가는 것? 불가.
- 친정 가는 것? 불가.
- 커피 마시러 잠깐 나가는 거? 불가.
- 외국에 있는 대학교 동창들한테 전화하는 것? 불가.( 참고로 마사코 황태자비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유학파이며 외교관 출신이라, 외국인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다른 국가에서는 같은 입헌군주제라 해도 상상하기 힘든 조치다. 패전국의 군주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 셈이다.

재력의 경우, 물론 중상류층 정도 생활을 하면서 왕실의 위엄을 갖출 정도의 돈은 준다. 정부에서 국민이 내는 세금을 천황에게 떼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돈은 천황의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경비라서 단 1엔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자기 재산은 없으며 명색이 천황인데 정부한테 용돈을 받아 쓰는 꼴이다.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 나라 중에서는 정부가 군주에게 월급을 많이 바친다던지, 또는 군주가 직접 세금을 걷되 일부를 정부에게 주는 나라도 있지만 일본은 많이 다르다.

이것 외에도 할 수 없는 게 산더미 같다. 그러니까 의에 예로 든 몇 가지 사례는 그 일부이다. 워낙에 많아서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황실의 신붓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은, 서둘러 다른 남성과 결혼해 버리거나 혼담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황실에 시집 오지 않으려 한다고.[27] 반면 마사코 황태자비에게는 외교관이었던 전직을 살려서 충분히 일을 하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결혼시키긴 했는데,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니, 지킬 수조차 없었다. 애시당초 자유로운 행동을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징성을 넘어 일정한 권리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덴노가 일본 그 자체의 상징이란 이미지는 남아 있다. 애초에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까지가 덴노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덴노라는 의미가 일본인에게는 정말 크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쇼와 덴노의 죽음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덴노가 중병에 걸렸다고 일본 내 모든 행사가 전부 취소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물론 처음엔 야단법석에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해(1989년)를 넘어 질질 끌자 김이 샜는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당일에는 조용했다.

현임 덴노는 제125대 아키히토다. 아키히토가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에 따라 추존 시호로 '헤이세이 덴노'가 되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아키히토헤이세이 덴노라고 부르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인 '시호'를 아직 살아 있는 덴노에게 쓰는 셈이니, 제대로 된 건 아니다. 일본인들은 금상(今上)이나 덴노 헤이카(天皇 陛下) 등의 경칭으로 부른다.

아키히토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는 테러를 방지한답시고 도쿄도 경찰 전체가 동원되어 도쿄 시내 전체의 맨홀 뚜껑을 일일이 열어 확인한 후 봉인하는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를 "진저리나는 바보 짓"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또 당시 가이후 토시키 일본 총리가 즉위식에 참여해 축사를 하고 만세삼창을 불렀으며, 일본 국민의 대표인 일본 총리보다 덴노가 높은 단에 위치해 있었음을 들어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위 비용으로 소비된 약 400억원의 금액이 전액 국고 지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조차 문제가 제기되어, 가나가와 현의 시민단체가 흔히 만세소송이라 불리는 소송을 걸었으나, 14년을 질질 끈 끝에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이 시기 시의회에 참석했던 당시 나가사키 시장이던 모토시마 히토시(우익 성향의 자민당!)가 좌익계열 정당에서 당선된 시의원과 이야기하던 중, 전쟁 책임에 대한 집요한 추궁 질문에 "덴노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상식적으로 답변했다가 글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 시장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호위를 받으며 청사 안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집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사태가 좀 진정되어 다시 출근했다가, 1990년 차에 타던 중 우익 세력의 난동으로 등 뒤에서 발사된 총격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가 평소 극우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바른 소리 한 번 했다가 생명을 잃을 뻔한 것이다.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테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임으로 당선된 시장 이토 잇초는 전임자와는 달리 중도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 극우 정치인들의 일본 핵무장 발언이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가, 2007년 야쿠자 출신 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끝내 사망하기도 했다. 핵을 맞았던 전력이 있는 나가사키극우 성향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극우파들의 정치 테러의 목표가 된 셈이다. 이런 일본 앞에, 천황을 독극물로 암살하려 했던 옴진리교가 목 날아간 꼴이 됐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아키히토 덴노 스스로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라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여진족 신라인설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 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덴노가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현 아키히토 덴노가 외교적 수사[28]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한국 병합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고, 일본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땐 이마저도 큰 의미를 두긴 어려운 것이, 한 국가의 왕실이 다른 국가의 혈통과 섞이는 것쯤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20세기 초 유럽만 봐도 그렇고. 현재는 군주가 먼 옛날 피 좀 섞였다고 다른 나라를 병합할 수 있는 시대가 이니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전혀 의미가 없는 떡밥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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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졸업식에 참석한 마코 공주(왼쪽)와 카코 공주(오른쪽).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카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를 졸업했다.

황족들의 교육에도 조금은 특이한 면이 있다. 가쿠슈인이라고 부르는 에스컬레이터 식 학원을 다닌다. 이 학교는 황족뿐만 아니라 패전 때 신적강하되었던 왕족의 방계나 재벌가의 자녀 등 유수 가문의 자녀들이 재학하여,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다. 본래 황족과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였으나, 패전 후 평민에게도 개방되었고 사립학교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말이 평민이지, 금수저 자제들이 많이 다닌다고.

그러나 가쿠슈인은 이 명성만 믿고 발전이 미비해진다. 가쿠슈인 대학에는 문학부, 이학부, 법학부, 경제학부의 4개 학부가 있는데, 40여 년 동안 새 학부가 개설된 것이 없었다. 가쿠슈인 여자대학에는 학과가 더욱 적다(3개). 그래서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가 아닌 국제기독교대학[29] 교양학부 예술과학과(art-science)에 진학했다. 아키히토 덴노의 5촌 조카딸들 중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 다카마도노미야 아야코 공주는 죠사이(城西) 국제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큰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이는 히사히토 친왕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을 거쳐 동(同) 대학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하는 등, 가쿠슈인의 그 위상이 예전같지 않음은 확실하다.

이에 가쿠슈인위기 의식과 대책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2013년 4월부터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에 교육학과를 신설했다. 이 학과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학과로, 개설된 첫 해에 카코 공주가 입학했다. 외가인 가와시마(川嶋) 가문에 교육자가 많은 영향에, 어머니 키코 비도 교직을 권했으며, 카코 공주 본인도 12살 아래의 남동생 히사히토 친왕을 도맡아 돌보는 등 아이들을 좋아하고 교육에 관심이 많아 지원, 합격했다. 매체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설을 준비하던 학과였는데, 우연히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라는 가쿠슈인 측의 입장과 함께, "우연이라기에는 지나치다!!"는 세간의 반응도 슬쩍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카코 공주도 이듬해 8월 말 가쿠슈인 대학을 중퇴하고, 언니 마코 공주가 졸업한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를 지망하여 합격했다. 카코 공주는 여기에 대해 "황족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불편했고, 유치원부터 쭉 가쿠슈인에만 다녔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서도 공부해 보고 싶었고, 국제기독교대학의 충실한 영어교육과 폭넓은 교양교육(libral arts)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현재 황위 계승서열 1위는 아키히토 덴노의 맏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이며 2위는 차남 후미히토 친왕, 3위는 2006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 친왕.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에 즉위한 이후엔 히사히토 친왕이 차후 덴노로 지목되고 있다. 200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밖에 없는 현 황실을 우려해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대두로 하여 여성 덴노가 가능하도록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개정하려 했다.

그러나 당일 차남인 후미히토 부부가 셋째 임신 중을 언론에 밝혀 무산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는 몇 번씩이나 아들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난 날, 아키히토 덴노는 갓 태어난 손자에게 황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내렸고, 거의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황태자 부부가 아들을 낳지 않는 한 히사히토 친왕이 큰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황통을 이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2011년에 일본 황족 23명 가운데 남자는 7명뿐인 사실을 감안하고 남녀평등의 여론이 불어, 여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마코 공주후미히토 친왕의 큰딸이며, 아키히토 덴노의 손주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마코 공주의 여동생인 카코 공주는 2년간 합숙훈련을 한 끝에 2004년 가쿠슈인 초등과 4학년 재학 중에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열의가 높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1학년이던 2007년에는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대신 실력은 그저 그런데 공주라서 점수를 잘 받았다는 평도 있다. 부친인 후미히토 친왕은 "딸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지지를 하고 있지만, 일본 보수파들은 '어떻게 공주가 저리 망측한 짧은 옷을'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등 카코 공주의 취미생활에 거센 반발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대학생이 된 후로는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키히토 덴노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11월 평민 공무원이자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하여 평민이 되었다.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왕자와 친구로 지낼 정도였다면, 꽤나 좋은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 사야코 공주오타쿠로도 유명하다.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시절부터 가쿠슈인 대학(일어일문학과) 시절까지 쭈욱 아니메 계열 동아리 소속이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라고. 코미케에 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쿄(황거) 근처 서점에서, 시종으로 추정되는 양장 차림의 점잖은 노신사들이 만화책을 구입하러 다녔다는 얘기도 있다.

2013년, 쇼와 덴노의 조카인 故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내 히사코(久子) 비가 IOC 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논란이 일었다.

2013년 10월 31일에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 의원이 덴노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가 정치문제가 되었고 결국 국회에서 사죄해야 했다. 정작 아키히토 덴노는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한다. 덴노가 편지를 읽어 봤자, 전후(戰後) 체제에서 어차피 덴노는 내각이 뻘짓을 하건 국민들을 어떻게 굴리건 진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법률로 금지된 정치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심만 살 수 있고 이 경우 덴노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당 의원은 아예 감히 신성한 덴노에게 멋대로 자신이 쓴 편지를 건넨 놈이라는 보수 극우들의 린치로 참혹한 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덴노는 편지 자체를 안 읽어 봤고, 내용도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실태에 대해 호소하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꼴을 당했다. 만일 덴노가 직접 읽어 봤고 내용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면 더 나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야마모토 참의원은 황실 행사 금지 징계에 극우 단체의 협박 편지까지 받았다. 아키히토 덴노도 해당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읽지 않고 현장에서 그냥 측근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며, 해당 의원의 안위를 염려하기도 했다.

2014년 12월 23일, 아키히토의 생일에 맞춰 트위터에서 덴노합성축제(天皇クソコラ祭り)란 게 퍼지면서 대규모 키배가 터지고 있다.

2017년 5월 21일, 일본 보수인사 측에서의 덴노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아키히토의 생전퇴임을 논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베 신조 수상의 자문위원회 인사들 사이에서 "덴노는 제사에서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그것 말고 무슨 역할이 있는가?", "궁중제사만 계속하면 굳이 퇴위할 필요도 없다" 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궁내청에서도 이에 상당히 격분하며, "그간 국내외를 다니며 국가를 위해 기여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항의했다고 한다. 해당 자문위원회의 인사들이 아베 신조 총리의 측근 인사라는 점을 볼 때, 일본 지도층에서 덴노를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8. 한국과의 관계[편집]

한국 역사에서 일본의 교섭 주체자 내지는 덴노가 처음으로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신라의 8대 군주 아달라 이사금 재위 20년(173)자를 보면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라고 하여 아달라 이사금 때에 왜국과의 교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특히 왜의 여왕 비미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히미코(비미호, 卑彌呼)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일본 내 소국들이 서로 다투던 혼란한 시기에 여왕으로 공립(共立)된 인물로서 경초(景初) 2년(238)과 정시(政始) 4년(243)에는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사의 등장 시기가 173년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238년, 243년과 시간적 차이가 있어 사건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한다. 이 기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미호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게되면 그 수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을 문제 삼아 중국사서에 근거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조작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비미호 기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녀가 왜국왕으로 공립되기 전에 야마타이국(邪馬臺國)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인사를 한 것이며, 그 연대는 신라의 고기록(古記錄)이나 구삼국사(舊三國史)에 기록되어 있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미코의 생몰기간이다. 히미코의 사망연대가 삼국지 위서 왜인전의 기록을 보면 247년경으로 되어 있는데 173년에 야마타이국 여왕으로 즉위했다면 최소한 75년간 재위한 것이 된다. 비미호의 즉위시 연령은 확인할 수 없지만 최소 10세에 즉위하였다고 해도 최소 85세 이상은 생존했던 것이 된다. 만일 이러한 생몰기간이 가능하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기록에 등장하는 비미호 기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히미코는 왜국의 대표로 공립되기 이전에 이미 야마타이국 왕으로 재위해 있었고, 즉위 초년에 즉위 사실을 신라에 알리고 견사하여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도 전하지 않는 신라와 야마타이국 간의 교류를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명목상의 국가 수장으로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특히 덴노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덴노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일본(제국과 덴노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범죄)의 대마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덴노는 한때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에서 해당지 총독을 임명하는 고유권한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덴노가 전쟁 책임은 면책 받을 수 있어도 아시아 식민통치의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총독부의 직속 상관이 덴노가 되므로 총독의 위치가 사실상 총리대신과 비슷했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본국 내각의 수장인 총리대신이 강했겠지만. 물론 1945년 패전 이후 식민지를 모두 상실함에 따라 총독 자체가 사라져 임명권한도 폐지되었다.

한편으로 현재 군주가 존재하지않는 한국에서는 총리를 건너뛰고 덴노를 국가의 대표자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특히 자국에서 대통령이 좋은 술안주 농담거리가 되는 상황에서 보기에, 덴노에 대한 정신적인 충성이 강하게 무장되어 있는 일본의 상황은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특히 한국은 해방 이전부터 어떤 형태였던 간에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뚜렷했던 것을 고려할 때 이 같은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덴노를 공격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의 격한 반응에 당황하거나 적반하장으로 화내는 일이 많은 편이다. 위에서 서술한 배경들을 잘 알고 일본인들의 반응을 이해해야 좀 더 구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사실 이건 일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입헌군주국에 해당되는 일이다. 입헌군주국의 국민들 앞에서 총리라면 모를까 군주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하는건 정말 위험한 일이고, 크게 실례되는 일이다.[30]태국인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본명으로 취했다간...영국이나 일본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8.1. 방한(訪韓) 여부?[편집]

역사적으로나 현재까지도 역대 덴노들은 역대 일본 수상이나 각료들과는 달리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 한 번 방문한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기록이나 사례가 없다. 또다른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에는 쇼와 덴노가 방문한 적이 있으며 아키히토도 1991년과 1992년, 2017년에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등 다른 아시아의 일제 피해국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임진왜란 등을 통해서 일본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침략받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못지 않게 일제 시기의 일본에게 더 큰 피해를 입었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근방(近邦)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이나 각료들을 제외하고 덴노는 물론 덴노 황가 친족 등도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久子) 비 부부가 방한한 것 외에는 방한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예전에 개인적으로 방문한 친족들이 있기는 했다. 1970년 영친왕의 장례식 때나 1989년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가 그 예다.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는 전술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막내)과 유리코(百合子) 비 부부가 조문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기 때문. 영친왕이방자 여사의 차남인 이구의 장례식 때는 주한일본대사가 조문했고,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 명의의 조화가 왔다고 한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 방한을 추진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국민들은 물론 호국 및 애국단체와 독립단체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반일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거나 규탄하고 나섰으며 한국 국민들 대부분도 덴노의 방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한국 정부가 급히 "일왕의 방한 계획은 사실상 없다"라고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도 하였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일왕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발언을 날렸고 이에 우려하는 말이 나오자 해명하였다.

사실 이명박 이전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한국 대통령들도 덴노 방한을 추진하거나 추진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과거사 문제해결과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정서 그리고 반일 및 애국단체들의 반발과 반대, 일본 측의 거부로 인해 모두 실패하였거나 무산된 적이 있다. 게다가 노무현박근혜, 문재인의 경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대일 외교와 관련해 덴노 방한을 아예 언급, 추진하지 않았을 정도였었다.[31] 일본의 상황도 비슷해서, 덴노가 한국에 간다는 것은 또 다시 한국에서 덴노에게 일제강점기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 간 역사 문제와 관련해 사과를 요구할 수도 있는 등 일본 쪽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 자명하기에그냥 속 시원하게 인정해라 방한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상기된 대로 덴노는 정부의 통제를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보다 더 일본과 사이가 안 좋은 중국도 1992년 아키히토 덴노가 중국을 방문한 것처럼, 언젠가는 한국도 방문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중국조차도 1970~80년대 당시 쇼와 덴노가 살아있던 시절까지는 덴노의 방중이 중국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금기시될 정도로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현 아키히토 덴노가 즉위할 때까지 덴노가 중국을 방문하지 못했고, 같은 시기 일제에게 피해를 입었던 피해국이긴 해도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이 놓여 있던 처지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할 때[32] 중국 방문보다 한국 방문이 더 어려울 것이라는 중론도 있다.

만일 성사된다면 대한민국에 방한한 국가원수들의 기념행사(?)인 무궁화훈장 수여가 덴노에게도 이루어 질지도 주목된다. 받는 쪽도 주는 쪽도 꺼림칙

그러나 2016년 아키히토 덴노가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히고 이로 인해 아키히토 덴노의 퇴위 작업이 일본에서 진행되면서 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덴노 직위를 양위한 이후 현직 덴노 신분이 아닌 '상황 신분으로라도 한국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들도 나오고 있다.

2017년 9월 23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하기 전 아키히토 덴노의 한국 방문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9. 논란[편집]

한국에서 덴노에 대한 논란은 덴노 본인보다는 최고존엄식으로 덴노를 지나치게 우상화하고 이에 대한 논란 자체를 터부시하는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의 반응에 중점을 두는 편이다. 실제로도 덴노에 대한 반발심리는 덴노 본인이 자초한 것이 아닌 덴노와 관련된 논란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과 과잉되고 감정에 매몰된 발언들의 여파가 훨씬 크다.[33]

일반적으로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 사이에서 덴노에 대해 비판하거나 행적을 평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된다. 다만 인터넷에선 자유롭게 토론된다. 특히 인터넷에선 덴노에 대한 여론은 굉장히 좋지 못하고,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과 같은 선진국이면서도 왕실이 존재하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유럽의 군주국들만 하더라도 국왕과 왕족들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과 평가가 자유롭기 때문에[34]이러한 일본의 덴노에 대한 논란 자체의 배제 및 언론의 침묵과 덴노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들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 회피는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편이다.[35] 다만 일본에서도 덴노 본인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되는데 반해, 왕자나 공주, 왕자비 등 다른 황족들에 대한 비판은 크게 제약받지 않는다. 덴노인 아키히토는 비판 의견이 없는데 후미히토 친왕이나 키코 비, 마사코 황태자비, 아이코 공주 등을 비판하는 의견들은 그래도 많다.

그밖에도 과거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덴노에 대해 모독발언을 하였다고 생각한[36] 일본에서 집단 반발이 일어나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얼어붙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했을 것이다" 라고 발언했는데 이것에 대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서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 사회의 반응과는 정 딴판으로, 덴노 본인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위해 기꺼이 사과할 뜻이 있음을 예전부터 줄곧 표방해왔다. $$$

10. 기타[편집]

덴노 항목의 이전 리비젼에서는 "일본 황실에서는 일본의 황족어를 옛날과 같이 똑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관련 공문서(일본의 항복 선언이라든지)나 발언은 알아듣기 힘들다."라는 대목이 있었으나, 사실은 공문서 종류의 하나인 조칙(詔勅)일 뿐이고, 또한 국한문혼용체처럼 가타카나와 한자를 섞어서 표기한 문어체일 뿐이다. 그마저도 전후 국어개혁 과정에서 히라가나를 사용한 표기법으로 대폭 변화했다. 이 변화는 조칙의 표기법뿐만 아니라 헌법, 법률, 조약, 조칙 기타 등등 공문서 전반에 걸쳐 발생했고, 민간의 언어 표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당연히 현대 일본어의 표기는 아시다시피 통상적으로 히라가나와 한자를 섞어쓴다. 혹자는 대중에 노출되지 않은 황족 내부의 언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미디어에 노출되는 모습으로 볼 때 천황이나 황족은 일상생활이나 인터뷰, 기자회견 등에서 구어를 사용한다.

친왕제는 중국한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공주를 '내친왕'으로 봉하는 건 일본만의 특징이다. 친왕은 혼인하더라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내친왕은 평민과 결혼할 시 황적을 이탈해 평민으로 강등된다. 사야코 공주가 이에 따라 평민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남자 황족 부족 우려와 맞물려, 앞으로는 이러한 경우에도 황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자는 얘기도 잠깐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자 흐지부지됐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도 어김없이 남존여비의 분위기는 지속되어, 아무리 덴노의 딸인 내친왕이라 할지라도 남편보다 먼저 앞서 걷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구로다 사야코 항목을 참조.

그리고 워누(倭奴)와 더불어 일본귀자같이 일본을 욕하는 말조차도 거침없이 모에화해버리는 21세기 오타쿠들이 절대로 모에선으로 건드리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덴노는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를 모에화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비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하는 황족을 모에화하거나 덴노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다. 미카도니 하는 명칭으로 덴노 비슷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로 빠바박 만든다. 마코 공주는 이것을 무시하고 윤간 임신 동인지를 냈다.

역대 덴노들의 초상화가 대부분 너무 현실성이 없다.
초대 진무 덴노, 근대의 덴노들(메이지,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근대 이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있는 덴노들을 빼고는 다들 초상화의 모습이 그게 그것 같다. 당연히 당대가 아니라 한국 위인 초상화처럼 거의 후대의 어진이다. 유튜브에 역대 일본천황125대 진무 덴노 ~ 헤이세이 덴노(歷代の日本天皇125代[神武天皇 ~ 平成天皇])이라고 치면 덴노들을 그린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부자연스럽다. 특히 2대 ~ 49대 덴노의 경우에는 초상화의 색깔이 없고 단조롭다. 그리고 75대 ~ 93대 덴노 중 81대 안토쿠 덴노를 제외하고는 초상화에 나오는 얼굴이 복사 붙여넣기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2011년 도쿄에서 아키히토 덴노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대국민담화를 할 때 TV 도쿄에서는 대국민담화 방송을 틀지 않고 정규방송을 하는 용자 짓을 하였다. 왜 그런지는 항목참조.

11. 관련 항목[편집]

[1] 국화를 본뜬 문양으로 사실상 일본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소총부터 군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기 혹은 군관련 장비에 문양을 새겨넣고 있고, 여권 표지에도 새겨넣고 있다.[2] 헌법의 맨처음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 '일왕'은 암묵적인 국내 한정 표기명칭일 뿐이다. 공식 명칭이라 함은 한글 표기 및 영문 표기시에 같은 의미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왕과 황제는 한글 표기부터 의미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타 국가들은 황제를 뜻하는 'Imperial'이라 표기하기 때문에(심지어 중국까지도) 우리가 해외의 표기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표기법을 사용할 경우 일본과 발생할 쓸데없는 외교적 마찰을 굳이 조장할 이유가 없다.[4] 정확히는 한국의 정식 일본어 표기법을 따른 표기다. 완전한 일본어 발음이라면 [텐노-]가 맞다.[5] 한자를 따로따로 읽으면 てん(ten)과 おう(ō)이지만, 붙여 읽을 때는 수의적인 연음(連音)현상 때문어 n이 덧난다.[6] 문서에는 황제라고 했다[7] 국립국어원에서의 천황이란 단어에 대한 정의를 '천황: 일본국 왕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여 고유명사 취급이다.[8] 한국인들이 황제란 호칭에 걸맞는 영토대국이라 인식하지 않는 프랑스보다 작다.[9] 덴노의 손자/손녀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내친왕이라 했다.[10] 덴노의 증손자/증손녀부터는 왕/여왕이라 부른다. 단 1947년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에는 5대손부터를 왕/여왕이라 했다.[11] 일본 언론에서는 황태자로 표기하기 때문에, 직계 혈족을 의미하는 Prince/Princess란 명칭도 틀리지 않다. 내친왕이나 친왕과 같은 호칭은 일본 덴노 가문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한 일본 내부의 표기방식이기 때문이다.[12] 만세일계와 같은 말은 우리 민족의 시조라 불리는 단군이 하늘의 신 환웅과 웅녀의 후손이며, 우리나라는 하늘과 곰의 기운을 받은 국가라는 식의 신화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덴노의 정당성을 위한 상징적 단어일 뿐이다.[13] 후에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14] 실제는 섭정을 한 황태자 히로히토[15] 이토 히로부미가 타국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본 황족으로 태어남은 큰 불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절에 얽매여 살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하면서 손으로 마리오네트 다루는 시늉을 하여 지켜보던 외교관들이 당황했었다는 말은 도시전설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는 군주에게 매우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독일 제국 헌법을 모방해서 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메이지 덴노를 존중하고 섬겼다.[16] 아직도 남아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17] 그래서 일본의 역사물을 보면 막부나 번 등에서 '가로'라든지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쇼군이나 번주는 가끔 몇 마디 던지는 정도고,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장은 없이 전무, 상무 등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격.[18] Ikuhiko, Hata, Hirohito: The Showa Emperor in War and Peace, Global Oriental Ltd, 2007, p.24[19] Ikuhiko, p.31[20] 당시 일본에서는 의회가 아닌 덴노만이 조약을 비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은 제네바 의정서는 1925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70년에 했고 제네바 협약은 1929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53년에 했다.[21] Sherman, Christine, War Crimes: Japan's World War II Atrocities, Turner Publishing Company, 2001, p.258[22] Tipton, Elise, The Japanese Police State: Tokko in Interwar Japan, Bloomsbury Academic, 2014, p.22[23] Tipton, p.22-23[24] Harada, Kumao, Saionji-ko to seikyoku, vol.6, Iwanami Shoten, 1951, pp.206[25] 이 조항에는 '덴노가 내각의 조언을 받아 자의로 승인을 한다'는 식으로 해석될 요지도 있지만(주로 극우들이 펼치는 논리다), 잘 보면 마지막에 내각이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있다. 책임을 지는 쪽이 당연히 권한도 갖는 것이다.[26] 물론 일본에서는 "그런데 섭정도 승인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내부의 지적이 있고, 이에 대해선 답이 없다고 한다. 실제 이런 일이 터질 가능성이야 없겠지만, 헌법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는 셈이다. 성문법주의를 채택하고있지만 관습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이기에, 덴노의 일거수일투족에 굳이 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27] 스스로 원하여 황실로 시집 온 키코 비는, 퍽 이례적인 경우이다. 물론 그녀도 호된 시집살이를 겪었으니, 황실에 시집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28] 근거 동영상을 보면 "속일본기에 조상의 어머니가 백제계라 기록되어 있어 인연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과장되어 퍼졌다. [29] 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 ICU라고도 한다. 개신교 계열의 미션스쿨로, 도쿄미타카 시에 있다.[30] 다만 영국에서는 국회의원들 중에도조차 여왕에게 예를 표하는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Her majesty"(여왕 폐하) 보단 오히려 "The Queen(여왕)" 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보편적이다.[31] 노무현은 아키히토 덴노의 한국 방문 대신 아키히토 덴노의 장남인 나루히토 황태자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한국 방문을 제안했을 정도로 덴노 방한에 소극적이었고, 박근혜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자랑할 정도로 당시 고정 새누리당 지지층들로부터 높은 지지율을 보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복무, 부역하는 등 아버지의 친일파 논란과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당시에 일본아베 신조 총리가 군사대국화 등 우경화 정책을 펼치면서 박근혜 정부 시기 초반기에 한국과 외교적으로 대립, 갈등을 빚던 시점이었는지라, 당시 박근혜 본인이 덴노 방한을 추진하고 싶어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문재인은 뭐 아직 정부 출범 초반인지라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32] 한국: 국권과 자치권을 박탈당한 일제의 식민지, 중국: 중일전쟁 당시 일부 지역 점령당하고 일본군에 의한 전쟁 피해를 입긴 했지만 끝내 국가의 주권을 유지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유엔 상임이사국의 반열에 오르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1949년 이래로는 중화인민공화국에 21세기 현재 미국과 함께 세계 정세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이라 전혀 꿀릴 게 없다.[33] 다만 실제로 현 아키히토 덴노만 하더라도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태국 등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게 전쟁 밑 식민지배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에서도 호평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아키히토 덴노 본인도 발언할 때 신중하게 하는 데다 과거사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천황 본인도 일본에서 잘못한 점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고 있음을 줄곧 표방해왔다.[34] 영국만 하더라도, 아예 영국에서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로 개헌하자"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주장하며, 현 영국 여왕엘리자베스 2세를 크게 비판하는 사람들과 시민단체들도 상당히 많으며, 이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군주제 폐지 주장을 사람들에게 잘만 주장하고 다닌다. 그밖에도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에 대한 영국 왕실의 태도에 대해 시민들이 집단으로 분노하여 영국왕실과 함께 여왕과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를 거리낌없이 공개적으로 크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영국뿐만 아니라 스페인,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다른 유럽의 입헌군주국들도 마찬가지다..[35] 덴노 자체를 비판하고 언급한다는 것은 일본 사회의 여론비판과 발언에 따라선 현실에서 린치를 당할 위험을 유포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에서 덴노에 대해 강도높게 언급 했다가는 덴노를 광적으로 숭상하는 우익집단들의 전화를 통해 집단 협박과 테러 위협을 줄곧 쏟아낸다는 것을 생각하면....[36] 문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에선 정작 일본 천황 자체를 모독한 발언은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한국에선 쟤들 왜 저래? 반응이 태반이였다. 빠가 까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