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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기준은 창간일자 순.
정식명칭
(주)동아일보사
영문/한자명칭
THE DONG-A ILBO / 東亞日報社
설립일
1920년 4월 1일(1940년 폐간, 1945년 복간)
창업주
대표자
김재호(동아일보 발행인)
업종명
신문의 발행 및 판매, 도서 잡지의 출판 및 판매
상장유무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본사 소재지


1. 개요2. 사옥3. 역사4. 역대 사주
4.1. 명예회장4.2. 회장4.3. 사장
5. 보수신문 동아일보 6. 로고 및 심벌마크7. 기타8. 관련 회사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東亞日報, Dong-A Ilbo

한국의 조간 일간 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자세한 건 이곳을 참고.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앙 일간지 중에서는 서울신문(1904년 창간), 조선일보(1920년 3월 5일 창간)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 된 일간지다.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 불리며 3대 보수지라고 불린다. 대한민국 언론 삼대장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구독부수가 급속하게 감소하는 추세인데다가[2](2012년 기준으로 발행부수 90만부, 유료부수 70만부)[3] 채널A도 TV조선만큼 화끈하지 않은데다가 물론 선정성은 쌍벽을 이룰수준이라지만 JTBC처럼 개혁적인 논조를 취한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존재감에서 밀리기는 한다. 그러나 사실 80-90년대 조선일보가 급속한 성장세로 구독부수 1위를 기록할 정도가 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일보와 더불어[4] 구독부수에 있어서 1, 2등을 다퉜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신문이었고 대표적인 야당지였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기준으로 유료부수에서 중앙일보를 이기고 2위를 차지했다.

전라도 지역의 만석꾼인 김성수[5]가 설립하였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전라도 사람은 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 본다"는 말도 있었다.[6] 초대 사장은 박영효가 맡았으나 1920년 평양 만세운동 사건조선총독부로부터 기사에 관한 제재를 받게되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김성수가 사장이 되었다. 초대 주간은 장덕수. 후에 송진우가 사장을 맡았다.

2. 사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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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종로 미디어센터 사옥이다.
나무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00310060217067.jpg
건축적으로는 동아일보 미디어센터 빌딩 옆에는 1921년에 지어진 구사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데,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구사옥은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사옥은 없고 신사옥만 번듯한 조선일보, 일찍 폐간되어 농협으로 사용되는 구사옥만 남아있는 조선중앙일보[7]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충정로 사옥이 있다.

3. 역사[편집]

1920년 4월 1일에 전라도 지역의 만석꾼의 아들인 김성수가 설립하였다. 초대 사장은 박영효가 맡았으나 1920년 평양 만세운동 사건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사에 관한 제재를 받게되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김성수가 사장이 되었다. 초대 주간은 장덕수. 후에 송진우가 사장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발행되었던 신문들 중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문이라 한국에서 발행된 신문들 중에서 역사가 긴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던 신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조선일보와 사이좋게 서로 친일신문이라고 싸웠다. 결국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씨가 반협박 비슷하게 중재하면서 일단락.

창간때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는 일제의 문화 통치에 의해 창간된 한국어 신문 3개 중 유일한 민족지 노선이었다.[8]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에 저항하여 맞서기도 하였으나, 1920년대 후반에 가서는 논조가 상당히 온건해진다.

일제강점기의 손기정일장기 말소사건은 (원문) 교과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사건이며,[9]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브나로드 운동[10]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지금은 없어진 박문사(博文寺, 現 장충동 신라호텔 면세점 부지)에서 일제는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을 단죄한다는 목적으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쇼를 벌였는데, 이 만행을 유일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 언론에 별 관심없는 사람들은 동아일보에 대해 무척 호의적인 첫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는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정론지라고 주장하는데 1920년대 후반 이후의 동아일보의 모습을 보았을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주장이다. 일례로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사장 송진우는 '소수 기자들의 실수였으며 이는 사측의 입장과 무관하다.'라며 정간을 해제해달라고 사정하였고, 속간이 되면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 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라며 일장기 말소에 대해 사과하였다.

폐간을 모면한 뒤 송진우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활동을 그만둔채 칩거생활을 지냈다. 1937년 속간된 이후의 동아일보는 친일 어용 기관지로 전락했다. 이를테면 학도병 권유문도 올렸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그와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를 자주 게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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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에 내선일체, 보도보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8월 11일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한국어 신문들은 모조리 폐간당하게 되면서 조선일보와 함께 동아일보도 폐간 당하게 된다

5년뒤인 1945년 12월 1일에 다시 복간되었다. 1945년 12월 말에 동아일보에서 대서특필로 다룬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바꿔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사건이였다. 쉽게 말해서 분단의 시초가 된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좌우익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싸워 결국 찬탁하는 북한과 반탁하는 남한으로 분단되게 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시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를 오보로 시인했고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촉구하다가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이전에, 김일성이 일으킨 보천보 전투를 대대적으로 호외보도하는 바람[11]에 민중들 사이에 김일성 신화가 생기게 만들어 윗동네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나중에 와서 보면 여러모로 씁슬한 흑역사가 있다.(...)[12][13]

1950년대 이후로는 미군정 시절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우익 신문중 경향신문과 함께 대표적인 야당지로 자리매김한다. 반독재를 내걸며 이승만 정권과 맞섰는데, 사실 대한민국 정부 수립당시까지만 해도 이승만에게 우호적이었으나, 실상을 알게된 후로는 민주당을 지지하며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된다.

이러한 행보는 박정희 정권때도 이어지지만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치밀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표적인 탄압이 바로 동아일보 광고 사태.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자 정권의 외압으로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전면 백지화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시민들이 기자들을 지지하며 동아일보에 개인광고를 내주는 등 지원을 했으나 결국 경영진의 굴복으로 기자들은 해직되고 회사도 친 정권적 성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해직된 기자들은 전두환이 물러나 민주화가 된 시점인 1988년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외압과는 그다지 관련은 없지만 서울 지하철을 건설하면서 광화문 사옥이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14],

같은 보수 언론으로 평가받는 조선이 주로 북한같은 안보문제를 다루고, 중앙이 경제문제를 다루는데 비해 동아는 문화 방면을 더 다룬다. 창간 당시 사시(社是)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에 검열이 심하니까 민족주의, 민주주의보다는 문화주의가 강조되어 발행되었다. 딱히 큰 공연 없이도 항상 2면 이상을 문화면에 할애한다.

아예 노선이 확고한 조선일보나 기업들 입장을 대변하는 중앙일보와는 달리 이렇다 할 노선이 없어서 기회주의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4. 역대 사주[편집]

4.1. 명예회장[편집]

4.2. 회장[편집]

  • 고재욱 (1971~1975)
  • 김상만 (1977~1981)
  • 이동욱 (1981~1983)
  • 김상기 (1983~1989)
  • 김병관 (1993~2001)
  • 오명 (2001)
  • 김학준 (2008~2010)

4.3. 사장[편집]

  • 박영효 (1920)
  • 김성수 (1920/1924~1927/1945~1947)
  • 송진우 (1920~1924/1927~1936/1945)
  • 이승훈 (1924)
  • 사장대리 양원모 (1936~1937)
  • 백관수 (1937~1940)
  • 임정엽 (1940)
  • 최두선 (1947~1963)
  • 이희승 (1963~1965)
  • 고재욱 (1965~1971)
  • 김상만 (1971~1977)
  • 이동욱 (1977~1981)
  • 김상기 (1981~1983)
  • 오재경 (1983~1985)
  • 김성열 (1985~1989)
  • 김병관 (1989~1993)
  • 권오기 (1993~1996)
  • 오명 (1996~2001)
  • 김학준 (2001~2008)
  • 김재호 (2008~ )

5. 보수신문 동아일보 [편집]

1974년 기자 해고 사건 이후 성향이 꽤 딱딱해지긴 했어도 2001년 세무조사 사건 이전까지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리즈시절에는 유시민이 동아일보에 기고하기도 했었고, 진보성향의 대표적인 대학교수로 한국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도 역시 10여년 동안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한겨레 신문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 신문 중에서는 가장 정권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유신정권기때 동아일보 소속으로 가장 격렬하게 반 독재 성향을 주도한 기자가 바로 송건호.

한겨레 창간 이후에도 현재의 경향신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고,[15] 심지어 당시 진보적인 신문 기자 지망생들 중에는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다른 신문사의 논조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전국적인 영향력 면에서 동아일보만한 신문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동아일보는 영향력이 방대한 진보적 논조의 신문이었다. 진보적 논조에 암운이 드리워질 1998년쯤에는 얼핏 보면 조선일보 광수생각의 경쟁만화로 착각하기 쉽지만 모두까기 성향을 보였던 풍자만화 대한민국 도날드닭이 짧게나마 연재되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신문 순위를 매기면 동아일보- 한국일보 - 중앙일보 - 조선일보 순이었을 정도였다. 다만 1990년대에도 동아일보는 북한 관련 소식이나 노동조합 소식에는 조선일보에 버금가는 수구적 논조를 보였다

1980년 5.18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5월 19일부터 5일간 전두환 정권의 살육에 저항하는 의미로 사설을 싣지 않았고, 박종철 사건 당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바 있다.

한편 동아일보는 지역기반이 같은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 주었으며[16]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김대중도 동아일보의 창업주였던 김성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었는데, 실제로 김대중은 1980년대 말 고려대학생들이 동아일보의 창업주자 고려대를 인수한 김성수를 친일파라며 규탄했을 때, 김성수를 옹호해주면서 그 고대생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했었고,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라고 말했으며 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라고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를 칭찬하였다. 사실 그래서 김대중이 1990년대 중반에 퇴물론이 나왔을정도로[17] 여러차례 위기에 빠졌음에도 나름대로 굳건하게 영향력을 유지할수있었던데에는 호남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동아일보가 그나마 김대중과 친했기 때문이었다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였다.[18]

하지만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사건[19]과 이를 비관한 당시 회장 부인의 투신자살 사건(한국어 위키백과 참조)으로 당시 새천년민주당과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로 틀어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진보색채가 완전히 사라서 완전한 보수로 돌아섰고,[20] 뉴라이트의 등장 때에도 특집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주었으며,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노선이 상당 부분 강조되고, 노골적인 친 정부 성향을 보이는 등의 횡보로 인해 최근에는 조선일보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물론 굉장히 안좋은 의미로. 그리고 2012년 기사나 사설의 동향을 보면 본격 정부 어용지로 전직한 모양이다. 안철수가 후보 사퇴한 것을 두고 조선일보는 아무 평도 하지 않았고 중앙일보는 칭찬하기 까지 했는데 깎아내리는 것을 보면...

동아일보의 우경화의 배경으로 꼽히는 또 다른 이유는 삼성과의 관계이다. 애초 삼성 계열사에서 시작했던 중앙일보 그 자체의 존재감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삼성생명으로 부터 자금을 끌어온 것부터 시작했고, 결정타는 동아일보 故 김병관 명예회장(김성수의 장손)의 차남인 김재열이 1999년 이건희의 2녀인 이서현과 결혼한 것이다.[21] 그 김재열은 이후 그 제일모직의 사장, 삼성엔지니어링의 경영기획총괄 사장을 거쳐 제일기획의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 된다. 이 때문에 그 중앙일보만큼이나 삼성으로부터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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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종편방송 <채널A>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잘못된 사실로 보도해 큰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문서와 5.18 역사왜곡/채널A 문서로.

그런데 같은 방송국의 프로그램인 박종진의 쾌도난마에서는 5.18 당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았던 인요한씨를 출연시켜서 북한군 개입설이 터무니없다는 방송을 내보냈고 5월 18일과 5월 20일에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북한군 개입설을 일축하는 기사를 내보내 아리송한 행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기묘한 행보는 북한군 개입설을 제기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자 역풍을 피하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다. 거기에다가 동아일보 자체가 호남지방에서 한겨레신문과 1, 2위를 다툴정도로 구독자수가 많다보니 매출감소를 염려한 영향도 있다. 한겨레신문이 지지정당 성향상 압도적인 1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지만 이 신문 영향력도 건재하다. 웬만해서는 동아 다음이 한겨레. 반대의 사례로 충청북도 옥천군의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조선일보가 영 힘을 못쓰는 곳인데도 새누리당 계열의 지지세가 강한 편이다. 애당초 이럴거면 그 따위 짓을 하지나 말던지 조선일보가 북한군 개입설로 인한 여론의 역풍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재빠른 행보이긴 하다. 이 신문이 이렇게 사태파악이 빠를리가...

어쨌든, 채널A의 이런 보도행태로 2013년 6월 10일, 광주시민들이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 조선일보 사옥 두 곳에 계란, 밀가루를 투척했다.

6. 로고 및 심벌마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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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며 타원 속에 한자 東(동녘 동)이 가로 세로로 반복된 형태이며 45도로 기울여 보면 亞자 형태가 드러나는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꽤 복합적이고 모던한 형태의 로고.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심벌마크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각각 C자형 로고J자 로고를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서 조중동 중 유일하게 심벌마크를 폐기하거나 변경한 적이 없는 사례를 가지고 있다.[22]

여담으로, 동해상사고속의 CI도 동아일보의 CI와 너무 유사하다. 차이점이래봐야 바깥 원에 끊어진 부분이 있느냐(동아일보) 없느냐(동해상사고속) 정도일 뿐.

7. 기타[편집]

1926년 이완용 사망 직후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증오하는 명대사를 연달아 날리기도 했다. 그 명대사는 이러하다.
‘구문공신(口文功臣)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신료 이완용이 지옥에 들어갔으니 장래에 지옥마저도 팔아먹을지 걱정된다.)

1926년 2월 12일[23] 동아일보 1면 횡설수설 기사 중.
도 갔다. 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1926년 2월 13일[24] 동아일보 1면 사설 기사 중.[25]

1931년부터 매년 3월에 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는데 이 대회가 국내 대표적인 마라톤 대회 중의 하나인 동아마라톤대회다. 1982년부터는 국제마라톤대회로 확대돼 치러지고 있다.

자매언론인 신동아가 최근 미네르바 낚시사건을 저질러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편, 라디오 방송국이었던 동아방송(DBS)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서울 지하철 1호선시청역~종각역 사이의 드리프트(…)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서울 지하철 1호선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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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경의 사옥 모습. 바로 뒷쪽 큰 건물은 당시의 광화문 우체국이다. 왼쪽에 건물이 헐린 곳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이다.

사실 동아일보 사옥이 헐릴 뻔한게 이때 한번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상 앞부터 시청 뒤편까지 광장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때는 정부로부터 여의도 부지를 받아서 이전할 뻔했다. 물론 계획이 사라지면서 안 헐렸지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심사위원이 예심에서 떨어진 응모작을 표절하여 작품을 써 발표한 희대의 막장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건 동아일보의 문제라기 보단 문단의 문제인데, 문단에선 특유의 친목질, 쉴드를 가동해서 결국 표절한 조경란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조선일보에서 주최하고 이문열, 신경숙 등의 빵빵한 작가들이 심사하는 동인 문학상까지 받았다.

90년대 특종 기사 중 하나를 꼽자면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날려버린 여자화장실 몰카 설치 폭로가 있다. 몰카에 대한 인식을 확립시켜 준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잘나가던 백화점 하나를 그렇게 순식간에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매우 대단했다. 이후 외환위기와 겹쳐 좆망 테크를 탔고, 지금은 현대백화점 신촌점이 되었다.

딱 수능날이던 2010년 11월 18일엔 위키백과를 디스했는데, 위키백과에 북한군들이 주민번호를 도용해서 가입한 뒤 편집한다는 추측[26]을 A5면(!)에 싣는 병크를 저질렀다가 신나게 까였다.

그리고 2011년 7월 16일에 또 위키피디아를 디스했다. 제목은 北 편들고 南 깎아내리는 위키피디아. 게다가 이번에는 조선일보도 가세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전국 경영학도를 대상으로 DBR(Donga Business Review)을 무료배포하고 있다. 한 권에 12,000원이나 하는 책이니 많이 이용하자(...). 경영학 실제 케이스와 연구분석사례들이 나와 있다. 대학에 있는 경영학과 건물에서 배포하는 듯.[27]

페이스북#이 보통 일간지 페이스북과는 컨셉이 조금 다르다. 어설프지만 개드립(...)을 구사해보려고 하는 듯.

대대손손 4대에 걸쳐 회사의 대표이사직을 이어받고 있다.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 김상만의 장남 김병관,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28]

8. 관련 회사[편집]

9. 관련 문서[편집]

[1] 현재 동아일보 홈페이지가 잘 접속되지 않는다. 이점 주의할것. 이에따라 주성하기자의 남북이야기 블로그도 접속이 안되고 있다. 채널A는 잘 되는데 동아일보 홈피만 계속 상태가 오락가락 하며 레이아웃다깨지는 이유 좀 추가바람[2]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 구독부수에서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안났는데 2012년 기준으로 조선일보가 175만부, 중앙일보가 126만부를 기록한데 반해 동아일보는 유료부수. 무료부수 다 합해도 100만부 아래다. 다만 2016년 기준으로는 중앙일보와 큰 차이는 안나고 유료구독부수 기준으로 오히려 중앙일보를 추월한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건 동아일보의 구독자수가 늘어서는 아니고 그냥 중앙일보 구독부수가 빨리 줄어들어서 2위에 올랐을 뿐이다. 사실 조선일보도 증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1위는 1위인지라.[3] 더군다나 이 수치도 이른바 부수 밀어주기 관행으로 인해 상당부분 부풀려졌다는것이 중론이다.[4] 1990년대 초반가지만 해도 한국일보의 위상은 상당해서 1990년대 초반에도 구독부수가 상당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망테크를 타기 시작해서 후발주자인 한겨레 신문보다도 못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5]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이승만 정부시절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지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와 민주국민당 의원을 지내기도 하다. (엄밀히는 보성학원을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한 것이지만.) 때문에, 형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그렇게 서로 밀어주고 당겨줬기 때문에 이 둘의 커넥션은 끈끈한 편.[6] 이 말도 2000년대 이후 동아일보의 논조가 보수 성향으로 바뀌면서 사어가 되었다.[7] 다만, 현재 조중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홍진기 교수의 중앙일보는 중앙일보빌딩(흑갈색건물로 개국 초기 JTBC의 사옥으로도 쓰였던 그 건물) 옆에 구 사옥이 존치중이며, JTBC빌딩(DMCC 타워)가 세워지기 전까지 구 사옥에 임시로 중앙일보가 세들어 사는 케이스는 있긴 있었다.[8] 그 당시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는 친일 노선이었다.[9]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일으킨 신문은 여운형조선중앙일보였다.[10] 브 나로드란 '민중속으로' 정도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다. narod는 영어로 치면 people정도의 의미로, 현 러시아의 유명 웹호스팅 서비스인 나로드 러시아(http://narod.ru)의 이름이기도 하다. [11] 이 보도 나고 당연히 일제에 의해 정간당했다. 그리고 김성수가 조선총독부로 달려가 굽신굽신해서 돈을 상납해서 다시 복간.[12] 물론 이건 당시 동아일보 탓이라긴 보다 해방 직후의 정치권 탓이겠지만.(물론 당연히 김일성도 포함.)[13] 심지어 남북 교류가 활성화 됐을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천보 전투를 호외보도한 기사를 새긴 금판을 기증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급정색했지만.[14]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종각드리프트. 만약 원안대로 추진했으면 아예 철거되어 몇년씩 정간당하는 사태가 생겼을 것이다. 당시 윤전기가 진동에 약했는데 지하철을 그대로 지으면 윤전기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아무리 당시 정권이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충분한 언론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15] 반면, 당시 경향신문은 친정부, 극우 성향이 강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민주화 정국과 1990년 한화그룹 합병이 주 계기가 되어 극우성향을 벗어던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신문시장 경쟁격화와 외환위기로 인한 경영난으로 인해 독립하면서 현재의 성향을 가지게 된다.[16]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아꼈던 기자는 이낙연 현 국무총리인데, 이낙연이 바로 동아일보 소속이었다.[17] 정확기 얘기하자면 15대 대선 이전의 일인데, 이미 두차례 대선에서 물을 먹은데다가 1996년 총선에서 야당의 분열로 여당이 선전했기에 상당수 야권지지층으로부터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았던 상황이었다. 유시민도 97 대선 게임의 법칙이라는 책을 펴내서 조순을 대선후보로 추대하자는 주장을 했을 정도니 말 다한셈[18] 사실 김대중이 실제성향이 좌파적이지 않았음에도 보수언론사로부터 빨갱이라는 공격을 자주받았던에는 기자들과 식사하면서 차비와 식사비를 꼼꼼하게 계산하면서 내주는 습관때문에(...) 기레기 기자들에게 반감을 사서 그랬다는 썰도 있을정도였는데 그나마 김대중과 친했던 신문이 동아일보였다 .[19] 사실 이게 사건씩이나 된 것은 대단히 웃긴 이야기다. 사실 언론사 세무조사는 공소시효 관계로 5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의 군사정부와 김대중 정부 이후의 모든 정부를 막론한 일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한 것이 딱히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문제는 딱 한번 이 정기적인 세무조사가 멈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김영삼 정부 시기, 정확하게는 최초의 문민정부 시기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세무조사라는 조세행정이 군사정부의 언론길들이기로 이해 될 수 있고, 문민정부가 되면서는 그게 중단되었다고 인식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김영삼 정부 시기를 거치고, 김대중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부활시키게 되자 바로 조중동과 김대중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가 두드러지면서 조중동을 다스리려고 한다는 인식과 결부되게 된다. 특히 동아일보는 김대중과의 관계 때문에 자기들은 특별히 잘 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특히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우그룹과 김우중의 경우와 대단히 유사하다.[20] 덕분에 지역주의에 기댄 기사를 써서 욕을 실컷 먹기도 했다. 그 내용을 보면 대구, 부산 시민들 입을 빌려 김대중 정부가 IMF를 기회삼아 대구, 부산 경제를 죽이고 광주와 전라도 경제만 살리려 한다.라는건데... 그러나 기사에 포함된 표를 보면 추석이 없다는 대구, 부산보다 추석이 있는 광주가 실업율과 기업 부도율이 더 높았다. 뭥미...[21] 이는 도날드닭의 연중시기와 일치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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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조선일보는 사명(社名)의 머리글자를 본떠서 만든 로고를 사용했으며, 로고를 자세히 보면 '조선'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20년부터 2010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2010년 창간 90주년에 즈음하여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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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역시 사명의 머리글자를 본뜬 로고를 사용했는데, 한자 中(가운데 중)자가 삼각형으로 모인 형태였다. 이 로고도 자세히 보면 '中央(중앙)'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65년부터 1995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1995년 창간 30주년에 즈음하여 바뀐 것으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이 되겠다.'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인데, 주황색 원은 눈과 입, 알파벳 J자는 귀를 뜻한다.
[23] 이완용이 죽고 난 다음날의 기사다.[24] 희대의 매국노 이완용이 죽고 난 후 이틀 뒤의 기사다.[25] 현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이 기사를 볼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위 사설을 포함해 당시 동아일보의 ‘이완용 비난 부고 기사’들을 모조리 압수하고 이를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26] 위키백과는 실명제가 아니기에 주민번호는 커녕 휴대전화 인증도 필요 없다.[27] 배포처 :건국대학교 - 경영관 2층 경영학과 사무실 앞. 고려대학교 - LG-POSCO 경영관 3층 수당학술정보관. 서울대학교 SK경영관 (58동) 1층. 성균관대학교 - 경영관 4층 경영경제대 행정실. 연세대학교 - 신경영관 4층 경영대학 행정실 앞. 서울시립대학교 - 미래관 5층 경영대학 행정실 내. 간혹 미래관 3층 경영경제전문도서관 대출데스크에 비치하는 경우도 있으나 요즘은 최신호를 잘 안가져다가 놓는듯. 포항공과대학교 - 무은재 기념관 101호 앞, 충남대학교 - 경영학부 사무실(경상관 233호) 앞. 한국외국어대학교 - 경영학부장실 앞. 전국에 있는 경영학도들의 열렬한 추가바람.[28] 동생인 김재열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차녀인 이서현과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