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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의 후임인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서기장의 위치가 아니라 소련 장관회의 주석의 자격으로 소련을 통치했다. 흐루쇼프가 서기장 직위를 맡은 뒤 제1서기라는 직위로 개명했다
4중 소비에트연방영웅의 위엄(...)[1]눈썹에만 눈이 간다 마트료시카 아저씨[2]
왼쪽은 소련 원수 복장의 브레즈네프. 독소전쟁 말기에 그는 육군 영관급 정치장교에 불과했으나 절대권력을 확립할 즈음인 1976년 스스로 소련 원수에 취임했다. 젊었을 적부터 유지된 송승헌도 부럽지 않을 송충이 눈썹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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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후임인 유리 안드로포프, 가운데는 동독에리히 호네커, 오른쪽이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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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인자해 보인다. 송해 선생님?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독소전쟁 시절2.3. 권력의 길에 오르다2.4. 최고지도자 시절
2.4.1. 회색의 시대 2.4.2. 의욕적인 군비확장2.4.3. 적극적인 대외개입 2.4.4. 아프간 개입: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2.4.5. 자뻑의 세계로
2.5. 말년
3. 여담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매력이 있으면 당신은 정치적으로 오래 갈 수 있다."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3]
1906년 12월 19일 ~ 1982년 11월 10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제3대 서기장소련 최고회의 의장. 1964년에 전임자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1982년까지 18년간 권좌를 유지했다.

흐루쇼프 시대의 개방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보수주의로 회귀한 서기장으로, 소련의 군비 증강 등도 전부 이 사람 때문. 꽤나 오래 집권했으며 그의 사망 직후 취임한 유리 안드로포프와 그 후임 콘스탄틴 체르넨코도 1년 간격으로 연달아 사망(…)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그 이후 서기장이 된 사람이 미하일 고르바초프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의 그림자를 밟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치세에는 현상유지는 그럭저럭 되었고, 인민 생활도 전 시대에 비해서는 훨씬 좋아지는 등, 여러 긍정적인 면이 많았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체제의 문제점의 조짐을 방관하여 훗날 소련의 해체의 씨를 키웠다는 평가가 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브레즈네프는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에(현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제르진시크)에서 금속공장 노동자였던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레즈네프는 1921년 가족과 함께 쿠르스크로 이사해 15세 때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였다.

1923년에는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참가하였고, 1930년 카멘스코에로 돌아와 다음 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그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 금속 공대에서 금속공학을 배워 1935년 졸업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35년에는 소련군 육군정치장교입대하였으며, 1936년 말에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대학의 교장이 되었다.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다비아 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산업을 조직하였다.

그는 러시아 혁명 전에 성인이 아니었던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원의 첫 세대였고,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의 공산당 주도권 싸움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브레즈네프가 공산당에 입당했을 때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절대적인 지도자였으며,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많은 젊은 공산당원이 순수한 스탈린주의자로서 성장하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면한 사람들은 당 및 주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우크라이나인으로 기재했으나 그가 중앙의 권력에 가까워진 이후 그의 출신은 즉각 러시아인으로 세탁되었다. 이 때문에 소련의 기록물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브레즈네프가 젊은 시절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기재한 문서들을 보며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고 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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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후반의 브레즈네프 부부. 젊었을 때는 꽤 미남

2.2. 독소전쟁 시절[편집]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났고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시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육군의 정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위원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부 방면 군정치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1942년 우크라이나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방면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그는 제18군의 정치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말에 소련군은 주도권을 회복하였다. 이로 인해 소련 육군 제18군은 제1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일부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다시 되찾고 서방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방면군의 상급정치위원은 후에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브레즈네프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제4 우크라이나 방면 군정치지도부 부장으로서 프라하에 들어갔다.

1946년 8월 브레즈네프는 육군 소장 계급을 단 것을 마지막으로 소련군에서 전역했다. 후에는 재건 계획 종사에 힘썼고,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 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에는 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그 해 말에는 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하였다. 1952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최고 회의 간부 회의의 일원이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나 몰도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의 인맥을 후의 권력 강화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들 중에선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2.3. 권력의 길에 오르다[편집]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망 직전 브레즈네프를 중앙정치국의 후보위원으로 임명하는 등 브레즈네프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지만[5] 그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맡기기 전에 그는 1953년 3월에 사망하였고 최고회의 간부회가 폐지되고, 보다 작은 정치국이 재구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브레즈네프는 후보위원 임명은 취소되었다. 해군총정치국에 배속된 브레즈네프는 말렌코프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내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흐루쇼프는 그를 육군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함께 소련군 총정치국장 제1대리로 임명되었다. 브레즈네프는 1955년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어 소비에트 연방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개척 사업을 지도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 회원 후보 겸 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계획,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의 임무를 맡았다. 1957년 6월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반당 그룹의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쇼프와 대치한 당 지도권 싸움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반당 그룹을 배제한 후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1959년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이 되었고, 1960년 의장에 취임해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실제 권력은 당의 제1서기인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의장의 지위는 외국으로의 여행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이때 서방의 비싼 의복이나 자동차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이런 취향은 뒤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튼튼했지만, 그의 건강 악화와 동시에 나타난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진의 신뢰를 무너뜨려 그의 정치 기반이 흔들렸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문제가 한층 더 심화돼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에 충실했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권유로 1963년 흐루쇼프의 추방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 코시긴은 총리에 올랐다.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후임으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상무위원회 의장직을 맡는데, 이 시기까지를 삼두정치 시기라 칭하기도 한다.

2.4. 최고지도자 시절[편집]

2.4.1. 회색의 시대 [편집]

서구 역사가들은 그의 집권기를 회색의 시대, 혹은 침체의 시대(era of stagnation)라고 부른다. 소련 초기처럼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이나 기근, 무자비한 정치적인 탄압도 없었고, 소련 말기부터 해체 이후인 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이어지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휘몰아친 격동적인 혼란과 그 후의 폭망도 없었기 때문. 전체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편안해졌지만, 전체적으로 침체되어 가는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의 모습이라고나 할까[6].

'회색의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브레즈네프는 개혁 조치를 취하지 않은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부 반공적인 논객들처럼 그에게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묻는 건 합당하지 않고, 기껏해야 (건강으로 문제를 일으킨)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 중반까지 최고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 필요한 개혁을 취하지 못했다는 점 정도만을 물을 수 있다.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책임은 브레즈네프보다는 방향은 옳을지 몰라도 비현실적인 개혁을 취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그 덕에 비틀거리던 소련을 완전히 무너뜨린 보리스 옐친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브레즈네프의 집권기는, 경제난도 그 당시에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고, 공포정치도 없었으며, (정작 본인은 자뻑이 심하기는 했지만) 우상화도 없었기에, 혹자의 말에 따르면 “이 가혹한 땅에 문명이 들어선 이래”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았던 시대, 여러가지로 소련 인민들에게는 무난한 시대였다.

브레즈네프는 보수적이었지만 비교적 온건해서 흐루쇼프 때의 분위기 자체는 계속 이어받았기 때문에 대놓고 반정부적인 활동을 벌이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자유는 보장되었고[7], 경제성장의 둔화와 별개로 사람들의 삶의 질 자체는 상당히 나은 편이었다. 게다가 이후에 소련이 골골거리다 해체, 그 후 쪽박을 차게 되면서 자연히 브레즈네프에 대해서 향수가 일고 평가가 급속히 올라가게 된 감도 있다. 여하튼 체제를 뒤흔든 '튀는' 인물이었던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당내 보수파들이 대표로 내세운 게 브레즈네프였으니. 이때 당의 의사결정 구조도 당내 여러 세력간의 합의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로 귀결되었고 과거 같은 1인 독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당내에 팽배했는데, 브레즈네프는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1977년에는 드디어 절대권력자가 되었다. [8] 정작 이 시점부터 건강 문제로 리더십 공백이 생긴 것을 보자면 아이러니한 일.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처럼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지는 않아 미국과의 갈등은 과거 흐루쇼프 시대보다 완화(일명 '데탕트(Détente)')되었으며, 비록 군사력의 증강으로 국방비가 GNP의 12%를 넘었으나, 그렇다고 미국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서방 국가와의 무역 또한 늘어났다[9][10] 그러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성과급제도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기는 하였지만 경제개혁을 전면적으로 단행하지는 않았고, 관료제의 폐해가 적나라해졌으며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이를 막기 위한 대책도 딱히 세우지 않았다[11]. 결국 시대를 잘 탄 암군 정도 되려나.. 앞으로의 파국을 내재한 풍요로움이라는 점에서 청나라의 건륭제 말기가 연상될 정도로 상당히 비슷한 시대였다.

또한 스탈린 시절에 파벌 싸움에서 지면 암살당하든 사형당하든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흐루쇼프 때 이것이 점차 순화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르러서는 파벌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평당원이나 야인으로 강등만 되어 연금을 받으며 집에서 유유자적할 만큼 온건해졌다. 한 역사가는 이를 “정치가들의 파벌 싸움이 피비린내 자욱한, 목숨을 건 치열한 결투에서 신사들끼리의 스포츠 게임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반체제적인 언론이나 출판물은 금지되었고, 의회 민주주의나 다당제를 주장하는 운동가들은 탄압을 받았지만, 스탈린 시철처럼 처형되는게 아니라 감옥에 가거나 유배되거나 혹은 해외추방에 그쳤다. 서방에서는 이런 운동가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소련이 독재국가였어도 외교적 마찰을 각오하고 스탈린 시절처럼 이들을 처단할 수는 없었다.

애플바움의 논픽션 〈굴라그〉에 따르면 이때 당시도 굴라그 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었지만[12] 스탈린 시대처럼 그런 거 없다 등으로 일관하는 게 아니라, 반체제 유명 인사가 굴라그에 수감되거나, 좌천되어 노동현장에 떨어지더라도 서구의 지속적인 관심과 구명 요청 및 생사확인이 가능했던 시대다. 다만 이때는 굴라그 대신에 정신병원에 대신 가둬놓거나 하는 편법도 썼다는 얘기가 있다. 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게 하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집권기에 열심히 까대던 스탈린을 자신이 집권하자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자신의 직함인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는 스탈린주의의 피해자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던 시절이므로 아예 복권하는 짓은 하지 않아서 스탈린 시절에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던 볼고그라드의 명칭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계속 유지되었고, 1977년에 소련 국가의 가사를 다시 제정했을 때 가사에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 또한 미국으로 망명해있던 스탈린의 친딸인 스베틀라나가 회고록 등을 발간하고 다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는 브레즈네프 본인도 스탈린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더 이득으로 여겼기 때문이 크다.

한편 브레즈네프 통치 기간에는 전에 비해서 서기장과 모스크바의 힘이 약해졌다. 스탈린 이래로 흐루쇼프 때까지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전연방을 통제했다면 브레즈네프 시대는 사실상 지방 공화국 또는 주의 서기장들[13]이 봉건영주(...)와 비슷하게 중앙의 눈치를 보지 않고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브레즈네프 본인의 유약함과 서서히 커지던 민족주의의 발흥 때문이였다. 브레즈네프 통치 말년에 이르면 명목상 본인이 당 총서기, 연방 최고회의 의장 등의 직함을 가진 최고권력자였지만 현실은 뒷방 노인네로서 안드로포프, 수슬로프, 체르넨코, 우스티노프 등의 주요 서기국원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2.4.2. 의욕적인 군비확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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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보듯이 브레즈네프 집권 말기인 1970년대 후반에는 국방비가 오히려 미국을 앞서는 위엄을 보였다.

흐루쇼프는 모험주의적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일으켜서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 넣었지만, 신중한 성격의 브레즈네프는 아무래도 국력이 뒤진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여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피해가면서도,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소련의 군비를 확장했다. 그리하여 흐루쇼프 시절에 미국에 비해 열세이던 핵탄두 수는 브레즈네프 시절 소련이 역전했고, 만기가 넘는 탄두에 수백기의 소련 ICBM이 미국 및 서방의 도시들을 겨누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의 최신예 무기에 버금가는 소련제 무기들도 속속 개발되어, 소련군의 전력은 그의 치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미국과 우주에서 돈을 뿌리며 우주 경쟁를 펼치던 우주개발에서도 브레즈네프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아폴로 11호로 달에 미국이 먼저 착륙하자, 브레즈네프는 돈지랄로 간주되던 달착륙 계획을 미련없이 취소하고, 조용하지만 좀더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우주개발에 방향을 틀게 된다. 달 탐험 대신 우주정거장 건설로 방향을 튼 소련은 1971년 살류트 우주정거장을 발사하였고, 우주정거장 운용의 노하우를 축적하여 현재는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다. ISS의 운용 노하우도 상당부분 살류트-미르를 운용해 본 경험이 있던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면을 보면 브레즈네프는 충동적이고 요란하던 흐루쇼프와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집요하게 목표를 추진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2.4.3. 적극적인 대외개입 [편집]

한편, 브레즈네프는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동유럽에서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던 프라하의 봄소련군 탱크로 깔아뭉개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하였고 레흐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 연대노조의 파업도 폴란드 정부를 암묵적으로 협박해서 강경진압을 유도했다.

또한 대외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의 내전에 개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소련의 원조를 받은 북베트남남베트남을 몰아내고 베트남무력 통일했다. 브레즈네프는 북베트남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군이 북위 17도선, 즉 원래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국경선 위로 진격할 경우 소련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 결과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게 되었고, 결국 철수로 이어졌다. 미소 간의 전면핵전쟁으로 전 세계 인류가 함께 망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었기에 미국이 확전을 고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도 몇몇 국가들에서 발생한 사회주의 운동을 쿠바를 통해 지원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앙골라의 MPLA. 포르투갈 본국에서 발생한 쿠데타 덕분에 독립을 쟁취한 앙골라에는 몇 개 게릴라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MPLA는 소련이 밀어주는 게릴라 조직. 독립 후 내전 상태에 들어가자 브레즈네프는 쿠바에게 MPLA를 직접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쿠바군이 내전을 싸악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 소련과 함께 공산권 양대 강대국인 중국과 공산권의 지도자 위치를 놓고 대립하여 중소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강 유역의 다만스키 섬(중국명 전바오 섬)에서 양국 군대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을 참조.

이처럼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공산권의 맹주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재인식시키면서 소련의 위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2.4.4. 아프간 개입:소련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다[편집]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대외개입을 즐겨하여 미국을 여러 차례 골탕먹였으나, 한 가지 거대한 오판으로 자신이 골탕을 먹음은 물론, 나중에 소련 멸망의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에 무력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원래 아프간 정권은 친소 정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아프간에 개입할 이유는 미미했으나, 브레즈네프는 이 친소정권이 이슬람 세력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다고 판단, 아예 소련이 직접 조종하는 괴뢰정권을 세워 아프간 향촌의 이슬람 과격세력을 직접 진압하려고 했다.

이 개입은 사실 정치국에서도 격론이 있었고, (한 표 차로 찬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제정세로 봐서도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정점에 이른 소련군의 전력을 과신한 것이 탈이었다. [14] 결과적으로 8년간 소련군은 악전고투하다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후 철군하게 된다. 그곳을 또 미군이 들어갔다가 동일한 신세가 되었다

2.4.5. 자뻑의 세계로[편집]

그러나 이러한 확고한 대외정책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한 일은 좀 도가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느닷없이 2차대전 때의 전공을 이유로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자신에게 직접 수여하기도 했는데 그 횟수가 무려 네 번(1966, 1976, 1978, 1981)이었다. 장군 중의 장군으로 손꼽히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동급이다! 거기에 그와 비슷한 등급인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1961)까지 더하면 무려 5중 영웅이 되는 셈. 이외에도 재임 기간 18년 동안 총 200여 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브레즈네프의 명예욕을 아는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무차별적인 훈장 수여로 나타났다고 한다. 뭔가 조선 왕들의 존호 올려주기에 비견할 법하다. 스탈린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이런 상훈에 대한 욕심은 전직 서기장들인 스탈린이나 흐루쇼프에 비해 브레즈네프 자신이 전쟁 때 별다른 전공이 없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스탈린은 2차대전 때 당, 정, 군을 망라한 최고 지도자였고, 흐루쇼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드물게 개념인 축에 속한 정치위원으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정치위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흐루쇼프. 물론 브레즈네프도 일선 야전군 정치위원이긴 했지만, 뚜렷한 전공을 세운 적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말년에 갈수록 이러한 훈장부심은 심해지기만 했는데, 생전에도 사후에도 해외뿐 아니라 소련 국내에서까지 비웃음거리가 되어 사미즈다트 같은 지하 출판물에서도 디스했을 정도였다. 죽기 6개월 전에도 키예프 1500주년기념메달을 받고 갔을 정도이고, 1978년에는 2차대전 종전 직후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영웅들에게만 일괄적으로 수여되고 사실상 수훈이 종료되어 있던 전승훈장을 멋대로 부활시켜 수상하는 자뻑 모드를 보여주었다.

전승훈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짓은 자신의 전공을 명실상부 독소전 최강 장군이라든지, 스탈린그라드를 천왕성 작전으로 구원한 어떤 장군이라든지, 막판에 베를린을 두고 주코프랑 레이스까지 한 장군이라든지, 그들을 숙청하지 않아서 전쟁에서 활약하게 해준 강철의 대원수 동지라든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미군 사령관. 빨치산만 끌고 나치 독일을 애먹인 유고슬라비아인,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의 각을 뜬 영국인과 동급으로 놓는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미치고 펄쩍 뛸 일이다.

또한 1979년에는 조악한 수준으로 쓰여진 자신의 회고록이 출판되자마자 레닌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는 등 문학에 대한 능욕까지 해버렸으며, 게오르기 주코프 회고록에 있지도 않은 자신의 전공을 창작해서 쓰라고 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 어째 비슷하게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탄 어느 영국 할아버지와 비슷해 보인다. 뭐, 이 영국 할아버지는 문학상보단 노벨평화상을 원했지만...

결국 이 양반이 죽은 후인 1988년에 소비에트 최고 회의에서 관련 법규를 개정해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든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이든 1회 초과 수상 자체를 금지해 버렸다. 1년 뒤인 1989년에는 억지로 단 전승훈장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망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식 우상화는 실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흐루쇼프에 이어 브레즈네프에 대한 유머가 소련에서 유행할 수 있었다.

2.5. 말년[편집]

브레즈네프는 막상 절대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뒤부터 건강이 나빠졌고, 1979년부터는 주요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정보 통제가 심했던 나라라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사망설, 대역설 등이 심심찮게 제기되었고, 공식사진도 여러차례 포샵처리가 가해졌다. 포샵처리가 안 되거나 어쩌다 찍힌 사진을 보면 눈에 초점도 없고 입도 반쯤 벌리고 축 늘어진 모습이 병색이 완연했다. 사실 이미 1977년 경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는데, 이 즈음부터 연설의 발음이 뭉개지기 시작한다. 1980년 신년사를 보면 더 뭉개지고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아아, 님은 맛이 가셨습니다! 권력을 쥐었는데 왜 유지를 못 하니?

1982년 3월, 브레즈네프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후로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82년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모스크바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해 붉은 광장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여담[편집]

브레즈네프는 다른 공산당 고위층들처럼 화려한 다차(러시아식 별장)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었다.[15] 공산주의 유머로 평생 시골에서 살던 자기 어머니를 불러 다차를 구경시켜주자 어머니는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 좋구나, 레오니트.”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오면 이건 다 어떻게 될까?” 공! 산! 당! 댁 아들이 공산당의 우두머리란 말이외다 영국의 어떤 작가가 저승에서 들으면 내 소설이 들어맞을 줄 알았다고 할 법한 이야기이다(...) 물론 브레즈네프 어머니가 아무리 무식하다고 한들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아들을 모를 리가 없고 유머집 외에 다른 출처도 없다.

또한 명목상 소련의 국가원수인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어 서방 국가에 갔을 때부터 서방의 명품 자동차나 양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권력을 잡고 나서는 서방의 자동차 수집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반동! 반동이다!

나무파일:external/i286.photobucket.com/14-SovietleaderLeonidBrezhnevandEas.jpg
ANG? 옆에서 후후임 서기장이 나중에 자기도 저 짓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불안한 눈으로 보는 것을 보라! 그것보다도 호네커의 손목에 롤렉스 금시계가! 반동!

브레즈네프는 뜨거운 맨 투 맨, 마우스 투 마우스 키스로도 유명하다. you know I'm good at mouth to mouth resuscitation 공산국가의 정치인들과 만나면 키스하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키스는 사실 원래 러시아의 인사법이다. 1960년대 러시아에서 영화나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런 풍습이 공산권으로 들어가서 동지들끼리의 우애의 상징이 되었지만 미국 같이 게이에 대한 터부가 강했고 남자들끼리의 육체적 접촉(서로 잡기, 서로 허그 오래하기)이 금기시되는 나라에서는 굉장히 괴악하게 봤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연출된 뜨거운 키스는 1979년 동독 창건 30주년 기념으로 방독했을 때 에리히 호네커와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모사한 그림이 베를린 장벽의 잔존 구간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남겨져 있다. 충공깽.#그리고 38년 뒤에 대륙 반대편의 모 분단국가어떤 보수정당두 거물급 정치인술자리에서 저걸 시전하였다.#

메모광으로 자신의 정치활동부터 사적인 일까지 모두 개인수첩에 기록해두었다. 덕분에 학자들이 다른지도자들에 비해 연구하기 쉬웠다고 한다. 단 브레즈네프는 배운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서 그가 쓴 글은 문장구조가 기이해 알아보기가 어렵다. 전임 문맹 서기장보단 양호하다 소련의 장군 겸 역사학자인 볼코고노프(Dmitri Volkogonov 1928~1995)는 문법의 기초적인 이해도 없던 사람이라고 브레즈네프를 매우 혹평했다.[16][17]

훗날 그의 후임 서기장들 중 하나가 되는 고르바초프와는 사진을 통해 처음 대면하게 되는데, 청년 공산주의자 대표로 고르바초프가 유력하게 천거되었지만 “이 친구 청년 치곤 머리숱이 너무 적구먼”하고 반려시킨 일화도 있다.뭐라고?? 고르바초프는 이미 그때부터 탈모가 심했던 것 같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살시도도 있었다. 미국 CIA에 의해 일어났다던가 하는 스토리는 아니고 어떤 반체제성향의 시민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다. 범인인 빅토로 일리닌은 소련 각지를 여행하면서 소련TV에서 보여주는 소련의 모습과 현실의 소련간의 괴리감에 상당히 분노하던 시민이었는데 지하자원 판매대금으로 모든 인민들에게 추가적인 봉급을 주자는 자신의 제안을 담은 편지를 크렘림에 내보냈다가 아무런 답장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주장이 주목을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암살시도를 했던것이었다. 이 때 브레즈네프의 자동차는 항상 있던 대열이 아니라 후방에 있어서 운좋게도 브레즈네프는 살았지만 우주비행사 2명이 다치고 운전수 1명이 죽었다.(이 차에는 레오노프와 테레시코바같은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영웅들도 타고 있었지만 둘은 무사했다.) 결국 브레즈네프 암살은 실패했고 과거 정신병 경력으로 인해 정신병으로 감형되서 정신병원에 장기간 수감되었다. 뭐 그래도 굴라그로 끌려가지 않은게 어디냐 싶더만 그 이후 브레즈네프가 죽고 9년 뒤에야 풀려났고 이후로는 소규모 아파트 1채와 연금을 받았으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아직도 살고 있다. 또한 일리닌은 정신병원에서 충분히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이 일이 알려지게 된것은 냉전이 끝나고 나서였으며 냉전 도중에는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은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 거물급 인사를 향해 벌어진 유일무이한 암살(시도)사건으로 손꼽힌다.

4. 매체에서[편집]

70년대 말 80년대 초기 미국의 반공극에서 소련의 높으신 분내지는 최종보스격으로 자주 출연했다. 아예 브레즈네프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경우보다는 주로 브레즈네프 비슷한 높으신 분이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80년대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 시대를 다룬 인기 정치 드라마에 나온 브레즈네프는 의외로 그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고 한다. 느글느글하게 닉슨 행정부를 조종하려고 하는 암흑보스의 이미지가 잘 나왔다는 평.

패러디 영화 〈스파이 하드〉에 나오는 미친 장군 레슬리 렝코가 완벽하게 브레즈네프의 이미지를 채용했다. 그의 이미지를 채용한 렝코 장군은 21세기인 지금 나왔다면 유족의 항의를 받을 정도의 캐릭터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김재규 역을 맡은 백윤식이 박통의 죽음을 감추자는 이유로 “쏘오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 일주일이나 비밀로 감추었어요.”를 서두로 박정희의 죽음을 보안에 부치자고 주장하는데 고증오류다.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살아있었고 크렘린은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사망 하루 만인 1982년 11월 11일에 발표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서 닉슨과 회담하는 브레즈네프가 잠시 나오는데 소련 국가를 배경음악으로 깔면서 마오쩌둥을 미치광이라고 마구 까댄다. 그리고 자신의 보좌관과는 닉슨의 정치적 곤경을 러시아어로 비웃는다. 여담으로 이 영화에선 마오쩌둥도 나온다.

게임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 등장하는 소련의 서기장인 알렉산더 로마노프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생각된다. 외모나 분위기 등도 상당히 흡사한 편.
[1] 정확히는 소비에트연방영웅 3개와 사회주의노력영웅 하나.[2] 브레즈네프의 초상이 들어간 마트료시카가 실제로 기념품으로 팔린다(...).[3] 실제 러시아어 발음으로는 '리아니트 일리치 브례쥬녜프'에 가깝다.[4] <크렘린의 수령들>을 집필한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1928~1997) 장군의 증언.[5] 말년의 스탈린은 브레즈네프 외에도 자신의 후계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구실로 정치적 신인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미코얀, 몰로토프, 흐루쇼프 등 다른 거물 정치인들은 스탈린의 이런 행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반대했으나 스탈린을 거스를 순 없었고 너무 갑작스레 승진하여 얼떨떨한 새 후보위원들을 돕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식으로 간접 저항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신인들의 대다수는 시원찮은 일처리 때문에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 다만 죽는 수준은 아니고 좌천 정도로 끝났다.[6]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도 월남전의 막바지에 이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비슷한 침체기에 있었다. "회색의 시대"라는 표현은 미국의 70년대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7] 게임의 법칙이 적용되어서 공과 사를 구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공적인 상황에는 여전히 공산당과 공산주의 찬양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반공 서적이나 반체제 발언도 어느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갔다. 한국에서는 당시(1960년대 이후) 소련을 현재의 북한과 비슷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현재 중국 정도의 자유도는 가지고 있었다.[8] 원래는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이 같이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코시긴이 추진한 개혁이 1970년대 중반 들어서 실패하자 그를 틈타서 당내 보수파들이 브레즈네프를 바지사장으로 올리기 위해서 코시긴을 사임시켰다. 포드고르니가 맡고 있던 상임위원회 의장직도 브레즈네프에게 넘어간다.[9] 실제로 펩시가 본격적으로 소련에 진출했을 때가 바로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였고 펩시뿐만 아니라 상당수 미국 기업들도 이 시기에 소련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소련TV에 상업광고가 등장한것이 브레즈네프때였기도 했다, 상업광고가 도입된 김에 소련 기업들에게 회사자금의 1%를 광고비로 쓰라는 지시도 내렸기 때문에 생각보다 소련의 광고시장은 커졌기는 했다. 문제는 저급의 제품들이나 심지어 제대로 생산되지도 않은 제품도 광고를 내보냈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에게 광고는 저급한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그래서 광고효과는 떨어졌다는 것,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것은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 시기에 와서부터였다.[10] 그러나 이러한 무역의 상당수는 소련의 석유나 자원과 서방의 소비재를 교환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후진국형 무역 구조였다. 이는 소련의 빈약한 경공업 때문이었는데, 이는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11] 이런 관료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바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고르바초프가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된다.[12] 정작 당시 소련에선 1960년에 이미 흐루쇼프가 “굴라그는 모두 해체되었다”라고 대외적으로 개드립을 친 지 오래였다.[13] 일부는 소련 해체 때 그대로 자리를 이어받아 독재를 일삼고 있다.[14] 여기에 소련이 개입하도록 하는 미국 CIA의 공작도 있었다고 나중에 카터 행정부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밝혔다. [15] 흔히 브레즈네프 개인 별장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런 별장은 흐루쇼프 말기부터 일반인에게도 별장이 배급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의 콘도와 같은 공동소유주택도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산 귀족들만 이런 별장을 가진게 아니라, 땅이 넓으니까 일반인들도 국가로부터 임대료를 내고 보유할 수 있었으며, 브레즈네프의 개인 별장이라기보다는 고위지도자용 지방관저의 개념에 더 가깝다. 이런 식의 별장은 청남대같이 우리나라에도 있었고 서방에도 있다.[16] 볼코고노프는 보리스 옐친의 보좌진을 하던 사람으로, 그가 펴낸 소련 역사서는 옐친 측의 시각이 담긴 역사관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17] 다만 볼코고노프도 반공주의자로 돌변해서 소련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혹평한 사람이긴 하지만, 스탈린이 독소전쟁 승리에 산업화 등을 통해 크게 기여했으며 경험을 통해 전쟁 후반에 어느 정도 전략적 식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다고 인정하는 등 소련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고평가를 남겼기 때문에 정말로 소련을 근본적으로 증오하던 사람들에겐 어줍잖은 회색분자라고 욕을 먹었다.(...) 일단 소련 기밀문서고를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많이 알린 것 자체는 학계적으로 성과라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