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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ages.kurir.rs/kralj-leopold-ii-foto-profimedia-1433342750-672501.jpg
이름
레오폴트 로데베이크 필립스 마리아 빅토르
(Leopold Lodewijk Filips Maria Victor)
레오폴 루이 필리프 마리 빅토르
(Léopold Louis Philippe Marie Victor)
레오폴트 루트비히 필리프 마리아 빅토어
(Leopold Ludwig Philipp Maria Viktor)
출생
사망
재위
벨기에의 왕
콩고 독립국의 주권자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리에트 (1853년 결혼 / 1902년 사망)
카롤린 라크루아 (귀천상혼) (1909년 결혼)
자녀
루이즈, 레오폴드, 스테파니, 클레망틴, 뤼시앵, 필리프
아버지
어머니
형제
루이필리프, 필리프, 샤를로트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까지의 삶2.2. 콩고 독립국의 수립, 착취의 시작2.3. 지옥으로의 첫 걸음2.4. 콩고에서의 수탈과 학살2.5. 드러나는 진실2.6. 최후
3. 평가
3.1. 벨기에에서의 평가
3.1.1. 건설왕
4. 기타5. 참고자료

1. 개요[편집]

벨기에의 2대 국왕. 초대 국왕인 레오폴드 1세오를레앙의 루이즈 마리 사이 왕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국 벨기에에서도 그다지 평이 좋은 왕은 아니었지만, 콩고 일대에 '콩고 독립국'이라는 허울뿐인 식민지를 건설, 사실상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무려 1,500만 명집단살해학살자이다. 또한 세계에서 학살을 두 번째로 많이 한 군주다.[1]

흑인을 비인간 취급하는 인종차별이 일상적이던 19세기아프리카의 콩고 한 지역에서만 이런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유럽 서구 사회는 물론 아시아 외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지금도 인지도는 크게 떨어져서 그렇지, 당장 이 항목 아래의 생애 문단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다 읽어 보면 가히 사탄이 인간으로 현신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상아고무를 채취해 팔아먹기 위해 주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후, 할당량에 못 미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횟수에 따라 신체를 절단하고 죽여버리는 반인륜적인 처벌을 명령하여, 당대 콩고 인구가 극심하게 격감할 정도였다. 당대 인구 조사가 정확하지 않아 레오폴드의 학살 규모에는 이견이 갈리나, 아무리 적어도 수십만 명 이상, 크게는 천만 명 단위의 현지인이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또 분명 자국의 인프라 건설에도 많은 돈을 쓴 건 사실이나, 그만큼 사치도 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브뤼셀파리 스타일을 모방해서 대대적인 재건축 및 재개발한 것과, Louizalaan의 건설이다. 특히 Louizalaan의 경우 순전히 자기 생일선물로 건설을 명한 거리이다. 근처에 있는 브뤼셀 대법원 또한 당시 콩고 수탈의 산물. 또한 당시 실질적으로 투자해야 할 교육이나 의료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생각보다 적으며, 개중에 많은 부분이 특정 도시들로만 몰렸다.

2. 생애[편집]

2.1. 즉위 이전까지의 삶[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Leopold_Duke_of_Brabant.jpg
1844년의 레오폴드 2세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프랑스의 마지막 국왕 루이필리프 1세의 딸 오를레앙의 루이즈 마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인 루이 필리프가 생후 1년 만에 사망해서 차남이지만 사실상 장남 취급을 받게 되었는데, 지리 과목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성적이 별로였다. 물론 이런 지리덕후 성향은 제국주의 성향으로 이어져 나중에 콩고 독립국이라는 결과로 표출된다.

덕분에 어머니 루이즈 마리는 아들이 죽을 것을 걱정하여 건강을 최대한 생각하여 그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면서 키웠다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 레오폴드 1세도 아들에게 "만나려면 알현 신청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고, 레오폴드 1세 스스로도 아들에게 말을 전할 때 시종을 통해서 전달했다.

어머니 루이즈 마리는 원래 몸이 허약했는데, 거기에다 아들의 죽음에 슬픔을 느껴서인지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1850년에 사망한다. 당시 그는 15살이었는데, 그는 어머니와 형이 이렇듯 일찍 죽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서 건강에 집착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ia_Hendrika_of_Belgium%2C_Winterhalter.jpg

그러다가 18살에는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아 헨리에타와 결혼을 하는데,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서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이자 레오폴드의 사촌 형인 앨버트 공에게서 성교육을 받았다.[3] 그런데 뒤늦게 배운 섹스에 맛이 들린 건지 전용 요트를 타고 영국에 건너가 정기적으로 기생관광을 하고 다녀서, 영국 법정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영국 왕세자인 앨버트 왕자도 영국의 창녀촌에 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 사건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습관은 계속 이어져서, 말년에 레오폴드는 성욕을 주체 못했는지 자신의 손녀뻘이 되는 카롤린이라는 창녀를 정부로 선택했다. 다만 이는 굉장한 악수가 되었는데, 국외에서는 콩고인 학살로 욕을 먹었지만 국내에서는 진짜 별것도 아닌 이 불륜 사실이 더 큰 문제가 되었고, 레오폴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벨기에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4] 게다가 자신이 콩고에서 버는 돈은 전부 카롤린에게 또는 건축이나 토목공사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그렇게 카롤린과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는 아들들인 뤼시앵과 필리프가 태어나지만 사생아여서 왕위계승권은 없었다.[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opold2.jpg
왕위에 오를 당시의 레오폴드 2세

어쨌든 레오폴드는 1855년에 벨기에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는 특히 벨기에와 무역을 발전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고, 국회 상원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이미 국회에 있을 때부터 "벨기에의 식민지를 만들고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54년부터 1865년까지, 레오폴드 해외에 광범위하게 여행을 다니거나 방문하며, 인도중국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지중해의 해안과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그의 나이 30세 무렵에 그의 아버지 레오폴드 1세가 1865년 12월 10일에 사망하면서 레오폴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벨기에 왕위에 올랐고 12월 17일 취임 선서를 했다.

2.2. 콩고 독립국의 수립, 착취의 시작[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unch_congo_rubber_cartoon.jpg

대영제국으로 유명한 영국의 잡지 펀치에 실린 레오폴드 2세의 자국 식민지에 대한 폭정을 비판하는 만평. 대놓고 그를 인면독사로 그렸다. 당시 영국이 그를 어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의 시대는 제국주의의 절정기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네덜란드 등의 대다수 서방 국가들이 악랄하게 제국주의적 착취와 학살, 식민지 확장 정책을 취하던 미쳐 돌아가는 시대였다.

하지만 레오폴드 2세는 그런 당시의 기준으로도 다들 학을 떼며 경악할 정도였고, "벨기에는 우리보다 더 나쁜 놈"이라 할 만큼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들에게 지옥을 보여줬다. 덴마크 왕국크리스티안 10세[6]도 원래부터 레오폴드 2세를 싫어했는데, 그가 저지른 악행을 보고는 "그 새끼가 인간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맹렬하게 비난할 정도로 여러 모로 다른 나라들에게 "짐승보다 더한 악질이다."라는 비난을 한 몸에 들었다.[7]

2.3. 지옥으로의 첫 걸음[편집]

레오폴드 2세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식민지를 보유하는 것만이 강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에 비해 후발주자인 벨기에는 아직 마땅히 해외 식민지가 없었고 그는 어떻게든 식민지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벨기에는 경제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식민지 구입을 시도했다. 사실 여기까지였다면 당대에 흔했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 군주의 행보였겠지만, 레오폴드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벨기에 정부에서 돈을 지원받아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구입하려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줄 터가 없었던 스페인 측이 거부 의사를 보이면서 실패했다. 왜냐하면 필리핀은 스페인이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유일한 식민지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할 때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이다.[8]

그 후로도 그는 식민지를 얻기 위해 많은 방법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국왕으로 즉위했던 때는 서구 열강의 세계 식민지 쪼개먹기가 절정에 이르던 때라 후발주자였던 벨기에가 건드려볼 만한 식민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렇게 그의 계획이 차질을 빚던 와중에 당대엔 미개척지[9]였던 콩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1876년 레오폴드는 "아프리카에 벨기에의 근거지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때까지도 콩고의 지배자는 정해지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는 외무부의 아우구스테 램버몬트 남작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서 "아프리카에서 뭔가 일을 해 보고 싶네. 다른 나라의 개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자네는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도 나서서 평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여야 하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걱정거리이자 목표일세."라며 콩고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운다.

1876년 레오폴드는 아프리카를 연구하고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브뤼셀에서 지리학 회담을 개최했다. 물론 레오폴드 2세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진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했다. "여러분들을 브뤼셀로 초대한 것은 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도는 애초부터 전혀 없습니다. 제 나라 벨기에는 자그마한 나라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나라이며, 저에게 많은 면에서 만족을 안겨주는 나라입니다."라며 이야기하자 많은 참가자들이 레오폴드에게 매혹되었고, 그들은 그를 아프리카에 인도주의적인 행동을 취할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1876년 9월 14일 브뤼셀에서의 지리학 회담 이후, 레오폴드 2세는 40여 명의 벨기에인 실업가, 군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콩고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표면적인 목적은 "미개척지의 탐험과 더불어 고통 받는 흑인을 돕는다"는 인도주의였지만, 당연히 실제 목적은 콩고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이었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일기에 "아프리카라는 엄청난 케이크를 얻을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 미국인 탐험가였던 헨리 모턴 스탠리를 보내 콩고 지역을 탐사하도록 했는데, 그는 이 탐사를 "아프리카 흑인을 돕기 위한 박애주의와 학문적 탐사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런데 이 거짓말이 얼마나 그럴 듯 했는지, 레오폴드 2세에게 기부금까지 들어왔다고 한다.[10]

그러는 와중에도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여러 국가들을 구워삶았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콩고 지배를 강대국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미국에 로비를 하는데, 백인우월주의자들은 "콩고에 흑인을 위한 나라가 생기면 귀찮은 미국 흑인들이 다 그쪽으로 건너가서 살겠지?"라는 생각을 해서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일부 미국 흑인들도 "미국에 계속 있어봐야 백인 밑에서 개고생할 뿐이다"라는 생각에 찬성했다. 이에 미국 정부도 "미국인들이 콩고에서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 수 있도록 보장하고, 콩고에서는 미국 상품에 면세 혜택을 주겠다"는 레오폴드 2세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때 콩고의 부족장이 사인했던 조약문 하나를 미국 정부에 보냈는데, 이 문서에 "콩고 협회가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미국 정부도 속아넘어갔다.

그렇게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최초로 콩고 독립국을 승인한다. 그리고 영국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다른 강대국들도 설득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독일 제국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위와 같이 "모든 경제적 이익을 독점한다"는 조항을 빼서 그 권모술수의 달인이라 불리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마저 속였다.[11]

그는 자신을 콩고의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문명화를 하려는 모범적인 이미지로 포장했고, 결국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의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받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때 그가 얼마나 선전과 거짓말을 얼마나 잘 써먹었는지, 그가 콩고의 지배권을 갖게 되자 각 나라의 대표자들이 그라면 콩고와 흑인들에게 잘해줄 거라고 착각해서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서 뛰면서 기립박수를 치며 기뻐했다고 한다.

2.4. 콩고에서의 수탈과 학살[편집]

제 몫의 고무를 채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딸의 잘린 손과 발을 바라보는 아버지. 딸은 5살 어린이였다. (1902년)
하루당 고무 채취량을 충당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벨기에인 감독관은 그 남자(은살라)의 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딸아이의 이름은 보알리였고, 그녀는 5살이었다. 그리고선 그 아이를 죽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그의 아내도 죽였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충분히 잔인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더 확실히 일을 끝마치기 위해... 아이와 엄마의 시신을 먹었다. 그리고서는 은살라에게 토큰을 던져줬는데, 그가 세상 모든 것보다 더욱 사랑했던 그의 딸이 차고 있던, 한때는 살아있었던 그녀의 몸뚱이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노예 생활로 인해 반쯤은 이미 파괴되었겠으나, 이 일이 그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남자가 벌인 일이다. 수천 마일이 넘는 곳에 사는 한 남자, 더욱 거머쥘 부조차도 없는 남자가, 본인의 영달을 위해 이 땅이 자기 것이라 선포하고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만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선포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레오폴드는 이 아프리카의 사람들, 어린이들이 같은 인간이며 형제자매라는, 유럽 왕족을 빚어 만든 하느님이 이 아프리카인들도 같은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He hadn’t made his rubber quota for the day so the Belgian-appointed overseers had cut off his daughter’s hand and foot. Her name was Boali. She was five years old. Then they killed her. But they weren’t finished. Then they killed his wife too. And because that didn’t seem quite cruel enough, quite strong enough to make their case, they cannibalized both Boali and her mother. And they presented Nsala with the tokens, the leftovers from the once living body of his darling child whom he so loved. His life was destroyed. They had partially destroyed it anyway by forcing his servitude but this act finished it for him. All of this filth had occurred because one man, one man who lived thousands of miles across the sea, one man who couldn’t get rich enough, had decreed that this land was his and that these people should serve his own greed. Leopold had not given any thought to the idea that these African children, these men and women, were our fully human brothers, created equally by the same Hand that had created his own lineage of European Royalty.

Judy Pollard Smith(2014), 《Don’t Call Me Lady: The Journey of Lady Alice Seeley Harris》中 발췌 번역. 이 전기는 앨리스 실리 해리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녀는 콩고에 파견된 영국인 선교사로, 그녀가 찍은 사진들과 그녀가 적은 술회담은 콩고 독립국에서 벌어지는 참사를 낱낱이 고발했다.
열강들에게서 콩고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개인 사유령인 콩고 독립국을 창립하고, 헨리 스탠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제안을 했다. 스탠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레오폴드 2세의 지원으로 벨기에의 은행과 합작하여 1878년 '콩고회사'라는 사설 회사를 만들어서 아프리카 진출에 착수했다. 스탠리의 계획은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전 콩고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물하고, 자신이 가지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의 표시를 그리거나 X표를 찍게 했다.

대부분 족장들은 이전에 글로 된 문서를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콩고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호의의 표시로 찍어준 종이는, 훗날 콩고를 침략하는 전면 위임장이 되었다. 콩고 사람들은 "벨기에 사람들이 우리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저러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이 서명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협회[12]에 양도하고, 영토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중략)... 영토의 어느 지역에서든 당 협회가 시행하는 작업, 원정사업에 언제라도 노동력이나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이 나라를 관통하는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료 징수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삼림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이 종이에는 땅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제공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는데, 그 계약은 맨해튼을 양도한 미국인디언들의 조약보다 훨씬 더 악질적이었다.[13][14] 스탠리의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넘겨받은 레오폴드 2세는 500명의 원주민 추장들에게 권리를 넘겨받은 증서를 갖고 있다며, 벨기에의 75배 넓이[15]에 달하는 콩고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는 데 성공한다.

그가 세운 콩고 독립국은 벨기에 정부 소유의 식민지가 아니라 그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는데, 이유가 참 가관이었던 것이 당시 벨기에 의회에서 식민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콩고는 그가 죽기 직전에 국가에 소유권을 반납하고 나서 벨기에령이 되었다. 벨기에 정부는 왕이 뭐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물론 국민들도 애초에 관심이 없었지만,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오폴드 2세 혼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지낼 수 있었던 것.

레오폴드 2세는 콩고 개발에 재산을 쏟아 부었지만 한계가 있었다.[16] 결국 레오폴드 2세는 벨기에 정부에 손을 벌리게 되는데,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할 때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양도한다는 조건으로 벨기에 정부의 돈을 받게 된다. 그는 "콩고 독립국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처음에는 콩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좋은 국왕처럼 보였다.

1889년 거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산들과 정글을 통과하는 근대식 철도를 깔았고, 1889년부터 1890년까지 레오폴드는 브뤼셀에서 노예무역을 없애기 위한 반노예 회의를 열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부의 무슬림들이 노예를 사고 판다"고 비난하면서 영국 시민단체인 원주민 보호협회의 명예회장에 임명되고, 수도 브뤼셀은 반 노예제도 회의장으로 제공해서 인심을 얻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다른 제국의 권력자들이 참가했고, 레오폴드는 그들에게 다양한 지역 곳곳에 요새를 세울 것을 제안했는데, "그러면 '아랍' 노예상인들의 급습을 방지할 수도 있고, 요새를 대륙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운반차들의 거처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콩고에서 이런 노예상인들을 몰아내려면 군대를 쉽게 움직이게 철도 등을 깔아야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콩고에서 수입세를 받겠다"고 제안하자 참가국들이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1891년 레오폴드는 법을 제정하고 1892년 상아고무 무역을 독점해 버렸다. 곧이어 우방이-우엘레(Ubangi-Uele) 강 근처와 숲 속 주변에 살고 있던 콩고인들을 강제로 추방했는데, 이는 고무나무를 수집하고 상아를 위해 코끼리를 사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원주민들은 고무나무 수집과 코끼리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우엘레 마을에서의 모든 무역이 금지되었다. 콩고 원주민들의 생계를 망가뜨리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원주민들은 이미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단 콩고 독립국의 최초의 칙령을 요약하면 콩고 내에 있는 모든 땅은 국가의 소유라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몰수 선언이나 다름 없는 소리다. 그리고 이 땅에서 나오는 수익의 절반 이상이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재산이 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처음에는 장식품으로 수요가 높은 상아를 주 수입원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원주민들을 시켜 코끼리를 사냥해 상아를 수출하였으나, 예상 외로 수입이 변변찮자 레오폴드 2세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는데, 그 대상은 바로 고무였다. 때마침 세계에는 고무 붐이 일어나고 있었고, 콩고에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고무나무가 국토에 절반 정도나 있었던 것이다.

후술할 내용의 이해를 위해, 여기서 왜 고무 붐이 일어났는지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콜롬버스도 서인도 제도에서 고무를 보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고무의 활용 방법을 잘 몰랐다. 18세기 들어서야 고무가 연필 자국을 지우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17], 1823년에는 스코틀랜드의 매킨토시가 옷에 고무를 입혀서 방수복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후 1839년에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18]가 우연히 유황을 고무와 조금 섞으면 고무가 차가울 때 잘 굳어지지 않고, 또 뜨거울 때에도 끈적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혁신적인 발견으로 고무장화나 레인코트의 문제점이 해결되었으며, 드디어 고무의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1890년 영국의 존 던롭에 의해 공기를 채운 고무타이어를 이용한 자전거가 발명되자, 전 유럽에 자전거 열풍이 불어닥쳤다.[19] 이를 시작으로 단 몇 년 만에 고무의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무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해서 타이어뿐만 아니라 호스와 튜브는 물론 전기 와이어 등의 절연 장비의 주재료로 쓸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폭발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던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고무의 수요량이 급증했는데, 기존의 고무 생산량은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서 고무 원자재의 품귀 현상이 발생했고, 고무 가격은 1890년대 내내 천정부지로 급등했던 것이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을 몽땅 투입해서 고무 생산에 콩고의 전 역량을 집중하고,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물론 상아를 비롯한 다른 특산품을 착취하는 것도 여전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원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외부에서는 콩고가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893년 250t도 되지 않았던 콩고 독립국의 고무 수출량은 1901년 6000t으로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전제군주답게 "나의 소유물은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면서 많은 비난을 무시하고 콩고인을 철저하게 착취했다. 콩고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것은 그의 개인적인 돈으로 돌아갔고 콩고에는 조금의 돈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원주민을 시켜서 플랜테이션 산업을 시키고, 결과물을 값싸게 착취하는 것은 그나마 폭정 선에서 머무르는 것이었겠지만, 이 작자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고무는 응고된 수액으로 일명 '눈물 흘리는 나무'에서 채취되는데, 콩고에서 눈물 흘리는 나무는 란돌피아 종으로 고무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칼로 넝쿨의 표면을 벤 다음에 양동이나 항아리를 받쳐서 천천히 떨어지는 수액을 수집해야 한다.

고무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마을 인근의 넝쿨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동이 나 버렸기 때문에, 콩고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의 넓은 지역으로 나가거나 나무 위에 올라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보호장비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원주민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등이나 다리, 팔 등이 부러지는 상황이 속출했다. 게다가 연중 열대성 폭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고무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습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고무 채취는 아무리 힘이 좋은 사람들도 기피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원주민들이 고무 생산을 기피하자, 레오폴드는 고무를 확보하기 위해서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온갖 방법들을 동원했다. 고무 채취 작업은 '검은 용병'이라 하는 주변국 출신 원주민 군인들을 이용하여 이를 강제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흑인 마을에 들어가면 곧바로 여자들을 잡아 감금한 후 가족에게 이를 알렸고, 가족들이 이를 풀어달라고 하면 협상을 했는데, 그 조건은 "고무를 가져와야 여자를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결혼한 여자의 경우 남편이 고무 채취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강간당하거나 사살당했다. 남자들이 정해진 양의 고무를 가져왔다고 해서 그대로 풀어준 것도 아니었다. 여자 1명당 염소 2마리를 추가로 주어야 석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개인별로 생산 할당량을 지정하고는, 이를 맞추지 못한 자들은 손을 절단하는 극악무도한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게다가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을 한 번은 손만 자르고 살려주었지만, 두 번째는 아예 한쪽 팔을 잘라버리고, 거기에 세 번째까지 채우지 못하면 목을 잘랐다. 콩고의 벨기에 관리들은 열심히 일한다는 증거로 잘린 팔이 가득한 바구니를 내세우고 다녔고, 벨기에 군인들은 지급 받은 총알이 낭비되거나 사냥, 혹은 반란에 사용되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보통은 이것을 시신의 오른손으로 증명했는데, 간혹 군인들이 총으로 동물을 사냥하거나 인간들을 빗맞히기라도 하면 아예 살아있는 사람들의 손을 잘라서 바쳤다고 한다. 1896년에 독일에서 발행된 신문에 의하면, 지방 행정관이 단 하루에 잘린 손 1,308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 따위이다 보니 콩고의 원주민들 사이에선 "백인들의 통조림은 흑인의 팔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할당량은 한 사람이 죽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주변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이양되었다. 자신의 몫도 채우기 힘들 판에 남의 몫까지 뒤집어 쓴 자들은 남아날 겨를이 없으니, 결국 전부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처형당한 자의 할당량은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아무튼 이러한 본인만의 만행이 벨기에 왕국에는 안 알려졌을지언정[20] 사기에 속아넘어간 외국에는 알려졌다. 먼저 대영제국 런던에 있는 식민성에 벨기에가 얼마나 잔인하게 아프리카인들을 학대했는지 자세한 기록들과 보고서가 전해졌는데, 대충 요약하면 '채찍질, 고문, 강제 노동, 볼모로 잡아놓기, 쇠사슬에 묶어 감금하기, 강간, 학살 등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하다 보니 할당량을 위해 주민들끼리 돌을 들고 서로 싸우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벌어졌다. 나중에는 아예 연좌제 방식으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전체의 주민을 싸그리 다 죽여버리는 방법까지 사용했다. 이러한 정책에 콩고 민중들이 반항하면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최신식 현대 병기로 무장한 벨기에군에게 원시적인 무장을 갖춘 콩고 원주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벨기에 정부에서 가끔 "콩고 독립국의 재정 상황을 좀 알아보자"라며 자료를 요구하면, 역분식회계주작질을 한 후에 수익을 축소한 자료를 제출했다. 게다가 국채도 마구 발행했는데, 이 국채의 상환 기간이 99년이라 최소한 자기 살아있을 때에는 걱정이 없다 보니 이렇게 모은 돈으로 각종 건물이나 기념물을 지어댔다고 한다. 하는 거 보면 알겠지만, 벨기에 왕국이 미래에 어떻게 되는지 관심도 없던 진짜배기 폭군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가 막대한 부를 쌓게 되자 세계의 창부들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전 유럽에 퍼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85년 영국에서 열린 법정에서 그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알려졌다. 영국 여성 인력의 대륙 유출을 억제하는 단계에서 고급 '매음굴'을 고발해서 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 업소에서 레오폴드 2세의 이름이 나왔다.

증언에서 레오폴드는 젊은 여자들을 꾸준히 공급받는 조건으로 1달에 800파운드를 지불했으며, 여자들 중 일부는 10~15세 가량의 소녀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벌어들인 돈은, 학자들이 현재 돈으로 환산한 결과 약 11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그의 재산은 여러 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레오폴드 2세의 사후 두 딸이 유산을 달라고 벨기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콩고에서 모은 재산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자식인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가 숨겨두었던 대부분의 재산을 찾아내서 국고에 귀속시켰다.

일부 시각을 따르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수법은 벨기에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권에서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관습이었고, 이러한 행위는 현지의 하위 관리자인 흑인들이 자체적으로 행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콩고 전역에 상주하고 있는 벨기에군은 숫자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내치를 위해서는 좋든 싫든 현지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허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가 이러한 야만적인 풍습을 막으려고 하거나, 하다못해 묵인하는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옹호받을 여지가 있으나, 그는 오히려 이용하다 못해 더욱 조장하였기 때문에 크게 비판받아야 함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애초에 이러한 처벌 방식이 관습적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처럼 막 나가는 수준으로 행해진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레오폴드 2세의 이러한 유혈낭자한 압제 정책은 다른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배하던 여러 아프리카 나라로 퍼져나가, 이 나라들이 독립한 뒤 내전에서 반군들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그대로 잘 써먹었다. 이러한 야만적인 방식이 공포감을 확산시키는 것도 있었고, "손이 없으면 서명도 못하고 도장도 못 찍으니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식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21][22] 채취해야 할 목록에 다이아몬드와 희토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극악무도하고 악랄한 폭정에 힘 입어서, 약 25년에 달하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콩고인이 할당량 미달을 명목으로 처형당했다. 다만 당시에 정확한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1924년 이전의 통계 자료가 없기 때문에, 레오폴드의 콩고에서 학살당한 콩고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추정에 따라서 적게는 수만~수십만, 많게는 백만에서 수백만 단위에서 달하는 콩고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통치 당사자인 벨기에에서는 인구의 15%[23] 정도가 죽었다고 추산했으며, 콩고의 인구가 3,000만 명에서 8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추정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폭정과 잔혹함이야 선교사들의 사진 같은 물적 증거가 명백하게 남아있어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천만 이상 단위의 학살이 일어났다는 당대의 추정치 중 하나에 관해서는 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오랫동안 수렵/채집 위주의 부족 체제였다가 15세기에나 콩고 왕국이 등장하고, 제대로 된 대규모 농업의 역사는 더욱 늦어 영역 대부분이 미개간 정글이었던 콩고가 산업혁명으로 인한 식량 생산 폭증의 도움도 없이[24] 이미 3000만의 인구 대국이었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중국에 비하면 늦지만 콩고와는 비교도 안 되는 농업의 역사와 기술을 가진 일본의 인구가 비슷한 시기에 3500만 정도에 불과했고, 이 정도 인구로도 동시기 동남아 전체의 인구와 맞먹는 세계적인 인구 대국이었다.[25] 그런데 콩고가 3000만이라는 건 콩고 독립국의 엄청난 넓이[26]를 감안하여도 비판적으로 봐야 할 수치라 할 수 있다.[27] 당시 콩고의 인구를 추산할 수 있는 명확한 사료 등이 없지만 짧은 농경의 역사, 미개간지가 대부분인 상황, 열대우림 기후 등을 생각해 봤을 때 콩고의 인구수는 3000만은 커녕 1000만조차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조선과 비교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세계적으로도 손 꼽히는 기나긴 농경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만주에서 쌀 농사를 짓는 미친놈들이 있다'며 중국인들이 경악할 정도의 엄청난 농업 노하우를 지녔으며, 어찌됐건 온대지방이라 지정학적 요인 자체도 열대우림인 콩고보다는 농사에 적합한 조선의 인구가 비슷한 시기 1600~1800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콩고가 1000만 인구를 지녔다는 건 신빙성이 매우 낮다. 걸고 넘어지자면 이 정도. 학살이 스코어를 매기는 게임도 아니고, 1000만을 죽였든 100만을 죽였든 10만을 죽였든 콩고의 학살은 세계사의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도 유별날 정도로 경악스러운 것이었으니 굳이 숫자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만약 레오폴드 2세가 식민지인들에게 그냥 생산품을 수탈하고, 안 하면 그냥 감옥에 처넣거나 어느 정도 불이익을 주는 적당히 악랄한 선에서 끝났다면, 세실 로즈 급의 골수 제국주의자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악랄한 놈이지만 적어도 대학살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보단 나았을 것이다.
"백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몇 명의 원주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면서 원주민을 총으로 후려갈기며 '고무를 더 가져와라.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고 위협했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휴대할 식량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숲으로 가려면 왕복 2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왔다. '뭐야,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 하며 몇몇 원주민을 처자식 앞에서 사살했다. 가족들은 울부짖으면서 사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이 '음식을 갖고 있지 않다.' 고 항의하자, 병사들은 '그냥 떠나라.' 고 호통을 쳤다. 불쌍한 원주민들은 모닥불을 피울 부싯돌 하나 없이 맨손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정글로 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밤의 추위로 죽어갔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했다."

영국선교사 스크리워너가 전한 참상.[28]

"예상가(Esanga, 콩고 강의 남쪽)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무 바구니 50개 대신 바구니 49개를 가져온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감금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파수병들이 그들을 찾아왔다고 했다. 예상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끔찍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친척들이 자신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총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숲 속에서 남자들이 고무를 캐내는 동안, 파수병들은 그들의 아내를 유린하고 잔인하게 다뤘으며 고문하기도 했다. 그들이 직접 겪은 고통들을 헤아려보면 그들이 백인 남성들을 바라보는 견해가 부정적이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 선교사들은 가끔 주님을 통한 구원이 이들에게는 조롱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29]

가톨릭 신부는 흑인으로부터 들은 레옹 아킬레 피에베즈(Achille Fievez)라는 악독한 관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는 들판에 죽어 있는 시체들로부터 손을 잘라오게 했다. 군인들은 양동이에 담아온 손의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중략)... 고무를 내놓지 않겠다는 마을은 완전히 싹쓸이 당했다. 나는 젊은 시절 피에베즈의 부하가 원주민 10명을 잡아다가 그물 안에 집어넣고 무거운 돌을 매달아 강물에 던지는 것을 보았다. ...(중략)... 우리는 그 자의 이름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다. 군인들은 젊은이들을 사주하여 그들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죽이거나 강간하게 했다.

1894년 피에베즈는 한 군인에게 자신이 필요한 물자들을 얻기 위해 저지른 행동을 이렇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들과 전쟁을 벌였다. 시범은 한 번만 보여주면 충분했다. 흑인 100명의 머리를 자르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의 말대로 물자를 갖고 왔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다. 내가 100명을 죽였지만 그렇게 해서 500명을 살린 것이다."

2.5. 드러나는 진실[편집]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가 계속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고, 몇 번의 폭로가 있기도 했다. 한 번은 조지 윌리엄스[30]라는 군인 출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레오폴드 2세를 만났다. 그는 레오폴드 2세에게 "콩고에 돈을 많이 투자했으니, 당신은 그 대가로 흑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레오폴드 2세는 "나는 불쌍한 흑인들을 위한 백인으로서 의무감 때문에 그랬다. 투자한 돈을 회수할 생각도 없다"고 발뺌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윌리엄스는 감동 먹고 먼저 같은 흑인 기술자 40명을 콩고에 파견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다가 기술자들을 보내기 전에 먼저 가 보자는 생각에 콩고에 가봤더니, 헬게이트가 따로 없었다. 윌리엄스는 레오폴드 2세와 미국 대통령에게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에 대해서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레오폴드 2세는 윌리엄스가 자신이 미군의 대령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저놈은 사기꾼이에요"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와중에 윌리엄스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 학대 행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일단 덮였다.

그러나 콩고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31]은 원주민들을 대하는 잔인한 벨기에의 만행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독립국 군인들이 원주민들의 집과 소유물들을 약탈한 증거들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마침 아주 큰 범위를 찍을 수 있는 평판 카메라가 발명[32]되었기 때문에, 평판 카메라를 통해 찍힌 콩고의 각종 사진들이 미국유럽의 뉴스를 조금씩 타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점점 명확하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특히 그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명성 있는 더 타임즈가 큰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기도 했다. 헨리 몰튼 스탠리는 레오폴드 2세에게 "영국에서 떠돌고 있는 그 끔찍한 이야기들로 인해 당신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우리 영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오."

그러자 레오폴드는 "만약 콩고에서 그런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뿌리뽑아야 합니다."라며 자기는 몰랐지만 책임자로서 반성하겠다는 가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헨리 스탠리는 콩고 독립국 서기관 에트몬트 판에이트벨더(Edmond van Eetvelde)남작에게 "만약 앞으로도 학대가 지속된다면 콩고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던 중 콩고를 오가는 화물을 독점하는 엘더 데스터라는 회사의 직원인 모렐(E. D. Morel)이라는 사람이 화물을 운반하다가 회사의 무역 기록과 콩고 독립국의 무역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누군가가 콩고에서의 이익을 가로채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로 이익을 빼돌리는 사람이 레오폴드 2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레오폴드 2세를 압박했다. 심지어 레오폴드 2세가 몇몇 문서들을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공문서도 보여주고, 구체적으로 살해당한 원주민들의 명단까지 발표하는 했다. 그는 이전까지의 다른 폭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결국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기자가 되었다.

사실 모렐 또한 인종차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흑인을 열등한 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되어 사회주의와 반전 운동의 길을 걸었고, 훗날 영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평생 콩고 사건을 해명하며 사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33]

이렇게 계속 일이 커지게 되자 영국인 여성 선교사 앨리스 셀리 해리슨(Alice Seely Harrison)이 사진을 찍어 '콩고 개혁 협회'에 사진을 제공했고, 기사를 내면서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들이 세상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해리슨 여사는 콩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렐을 위해서 자기 월급보다도 더 많은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모렐은 이를 바탕으로 콩고개혁협회를 설립했다. 이에 마크 트웨인아서 코난 도일 등의 유명인사들과 영국의 귀족 및 국회의원 등이 합류하며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상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70년 전 인류애적인 동기에서 노예 무역을 폐지한 유럽의 양심이 오늘날 콩고 독립국을 묵인하고 있음은 누가 뭐라 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도덕의 질서라고 하는 시계추가 몇 시간쯤 늦어진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 조지프 콘래드가 1903년 12월에 로저 캐즈먼트에게 보낸 편지 中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콩고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서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영국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1909년에 발표한 《콩고의 범죄》(Crime of Congo)에서 "레오폴드가 식민지인 콩고에서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34] 폴란드계 영국인 작가 조지프 콘래드 또한 자신이 레오폴드의 회사 소속 선장으로 콩고 강에서 배를 몰았던 경험을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이라는 이름의 소설로 출판하여 비판에 가담했다.

훗날 애덤 호크실드(Adam Hochschild)의 1998년 작품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에서는 "레오폴드가 개인 식민지 콩고 독립국에 가한 가혹한 노예 노역을 통한 무자비한 수탈과 살육으로, 1880~1920년 사이에 인구의 약 절반인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쓰고 있으며, 이러한 잔학한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인권 운동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의 소식은 독일에까지 퍼지게 되었고 쾰른 지역 신문 쾰니셰 자이퉁(Die kölnische Zeitung)을 통해 보고되었는데, 이 보고서에서 독립국 보호령인 술탄 제미오의 사령관 아킬레 파이베즈(Achille Fievez)는 1,308번의 수족 절단으로 기소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잔악 행위가 조금 문제된다는 것을 깨닫자 원주민 보호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의 임무는 눈에 띄는 모든 잔악 행위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레오폴드 2세의 연막 작전에 불과했다. 레오폴드는 이미 위원회가 성공적으로 맡은 일을 실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원회 소속이었던 선교사들은 서로 수백 km만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서로가 만나서 연락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위원회의 권한은 대단히 제한적이어서, 위원회의 업무 자체가 정보를 은폐하려는 고위 관리들에 관한 잔악 행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이었음에도, 위원회는 관리들의 잔악 행위를 조사하거나 협조하게 만들 만큼의 권한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원회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위원회의 활동에도 콩고 주민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끊임 없이 진행되었다. 정말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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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콩고에서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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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위에 보이는 맨 오른쪽의 백인[35]영국 영사관 밑에서 일하던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로저 캐즈먼트(Roger Casement)로, 1903년에 콩고로 파견되어서 콩고에서의 잔학행위들을 사진을 찍어서 영국에 보고하여 콩고를 레오폴드 손에서 해방시킨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행한 인물이다. 절대로 벨기에의 학살자가 아니다.>

결국 1903년 영국 정부는 콩고에 대한 공식 조사를 위해 영국 영사관 로저 캐즈먼트를 파견하였다. 비록 사진과 문서 증거물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래도 정리가 잘 되지 않은 파편적인 자료들인 데다 민간인 중심의 폭로와 항의였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여론들은 회의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으며, 특히 많은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캐즈먼트는 현지에서 끔찍한 내용의 탄원서들을 발견했다. "나무에 손을 댄 채 총 끝으로 손을 계속 두들겨 맞았다"는 젊은 청년의 탄원서도 있었고, 다른 마을에서는 "3명의 어린 아이들, 한 청년과 한 노파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갔다"고 쓰여 있었다. 캐즈먼트는 계속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는 대륙 내에 있는 2개의 큰 마을을 방문했다. 나는 마을 인구의 반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몇몇 그룹의 난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왜 그들의 지역에서 도망쳤는지를 묻자 그들은 계속 하소연했다. 그들은 정부 군인들에 의해 잔인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우며 고향에는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고 했다. 일정량의 고무를 갖다 바치지 않으면 군인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군인들에 의해 죽지 않더라도 아사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일을 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캐즈먼트는 콩고의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조사하려 했지만, 그가 콩고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인 1903년 11월경 영국으로 돌아가 외무부에 자신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충분히 들을 만큼 들었고 볼 만큼 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크로머 백작 에버린 바링(Evelyn Baring)은 캐즈먼트와 약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크로머 백작 역시 콩고 독립국을 1903년 방문한 적이 있었고, 1905년에는 영국 조직 위원회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콩고를 방문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먼저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시킨 윌리엄 윌버포스의 증손자도 모렐의 콩고 해방 운동을 지지해주었다. 물론 모렐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는 지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것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를 싫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렐은 영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도 열렸고, 콩고의 실태에 대한 사진전도 열렸으며, 손이 잘린 콩고인들의 모습이 영국 국민들에게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레오폴드 2세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아서,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에게 돈을 뿌려대서 자신을 지지하는 보도를 내보내도록 요구하며 여론을 바꿔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콩고에서 상아 무역을 하던 아일랜드 상인이 콩고에 주둔하는 벨기에군에 의해서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과 처형된 아일랜드인의 사업 기반인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하던 독일에서 들고 일어났다. 백인도 재판 없이 처형하는데 흑인들을 어떻게 대우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궁지에 몰린 레오폴드 2세는 여론 조작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레오폴드 2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각국의 언론들, 특히 돈을 받은 언론들은 레오폴드 2세가 좋은 인간이라며 기사를 썼다. 하지만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던 레오폴드 2세의 변호사가 미국 허스트의 뉴욕 아메리칸지에 레오폴드 2세가 미국에서 뇌물을 뿌려대면서 로비질을 한 것을 폭로해 버렸고, 언론사들은 로비를 받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레오폴드 2세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에 미국영국 같은 국가들이 벨기에 정부에게 콩고를 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결국 벨기에 왕국 정부는 결국 레오폴드 2세에게서 콩고를 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벨기에 정부는 콩고 지배를 마땅찮게 여겨서 레오폴드 2세의 단독 지배령이었고, 그 때문에 그 오만 가지 만행이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2.6. 최후[편집]

이 자의 통치가 얼마나 악랄했는지는 당대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식민지를 점유하고 있던 다른 제국주의 유럽 강대국들이나 또는 식민지와 인연이 없던 그리스와 불가리아, 스위스, 세르비아,[36]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등 유럽 약소국가들의 군주, 총리, 대통령, 외무장관들까지도 "이건 너무 잔인하고, 가혹하다", "식민지배 포기를 못할꺼면 완화라도 해라"며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식민통치를 맹비난했을 지경이었고, 같은 나라의 성직자들까지 "가톨릭계 국가의 수치이다", "지옥에 갈 짓"이라는 비난까지 퍼부었다. 이로 인해 레오폴드 2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비난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과장된 소문도 있으나 콩고에서 잔혹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만든 레오폴드 2세에게 책임이 크다.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야만적인 일들이 콩고에서 자행되었다는 증거들은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고, 콩고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혹사당하고 레오폴드 2세의 이익을 위해서 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학살의 규모는 엄청난 수준이라서, 당시 국회에 보고된 보고서에 따르면 1885년 콩고 독립국이 출범한 이후 콩고의 인구는 3000만에서 900만 명으로 70%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37] 이로써 레오폴드 2세가 수년간 주장한 인도주의적 관계와 문명화의 목적이 드러났고, 콩고 독립국에서 자행된 잔인한 학살과 학대에 대한 기소가 준비되었다.

웃긴 사실은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하며, 자신을 향한 비난이 전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영국의 계략이라고 믿었다는 거다. 그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질투심 때문에 콩고 독립국과 자신의 인생과 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이런 모든 일들을 계획했다는 괴상한 생각을 가졌다. 특히 1903년 캐즈먼트가 콩고로 파견된 것을 보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 영국의 음모라는 생각이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38]

그 때까지 벨기에 정부는 콩고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콩고에서 벌어진 착취와 학살 학대 행위가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벨기에 정부도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레오폴드가 콩고에서의 잔악 행위를 멈추지 않으니 콩고를 벨기에로 합병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국회는 이 방법을 채택했다. 정부는 레오폴드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레오폴드의 식민지인 콩고를 빼앗아 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06년 국회에서 콩고를 완전히 합병시키기 위해서 우선 콩고 합병에 대한 합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이에 대해서 노발대발하며 "콩고에 관한 나의 권력은 절대로 분산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콩고는 나의 노력의 산물이다. 콩고의 적들이 합병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권을 바꾸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그 이익을 챙겨 부자가 되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라고 공표했다. 게다가 벨기에 국회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어느 정도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 나가는 방식을 선택했고,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국회와 정부의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는 폭군 또는 독재자'라는 평가를 얻을 정도로 그에 대한 민심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회는 4개월 후 비슷한 논의를 시작했고, 레오폴드와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1906년 12월 13일, 레오폴드 2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벨기에와 콩고의 합병을 지지하며 합병이 성사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레오폴드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경은 "곧 미국이 콩고 일에 관여할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언제나 미국의 입장을 중요시해서, 자신의 인도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39]과 같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초청했고, 콩고 독립국 중남부에 있는 카사이 강 입구에 10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개발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에 투자를 유치했다.

레오폴드는 이런 개발로 콩고의 외국 회사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 외국 회사들, 특히 미국 회사들에 투자한 자신이 콩고의 통화 공급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만약에 미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의 편을 들어주게 될 경우 이 개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콩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영국독일은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고, 미국인들마저 콩고에서의 잔악 행위로 결국 레오폴드 2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런 지루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906년 12월 14일, 벨기에 총리인 스메트 더 나이여르 남작 파울 요제프는 벨기에와 콩고가 합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레오폴드 2세는 한동안 자신이 아직도 콩고의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지만, 1908년 10월 18일 권리 양도 협정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으면서 그의 환상은 깨졌다. 그리고 콩고는 마침내 레오폴드 2세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레오폴드 2세는 1908년 콩고 독립국을 벨기에 정부 소유로 맡기고 물러났다. 문제는 회계 자료도 안 내놓고 이미 많은 돈을 애인 카롤린에게 주거나 공사하는데 써버려서 벨기에 정부는 1908년 콩고 독립국의 빚까지 부담하면서 인수했고, 이로 인해 벨기에 내에서도 엄청나게 평가가 나빠졌다.

그 이후에 콩고민주공화국 쪽의 상황은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벨기에 정부 소유가 되어도 사람들의 고통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왜냐하면 벨기에 왕국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시켜서 고무를 얻어냈고, 콩고 독립국의 관리들도 전부 레오폴드 2세 밑에 있다가 벨기에 정부 소속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한 번도 콩고에 가보지 않은 레오폴드 2세와는 달리, 새로 왕위에 오른 알베르 1세는 콩고도 방문하고 손이 잘린 사람들도 직접 만나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은 어쨌건 실천이 되긴 했다. 손목 절단도 사라지고 강제노동 대신 세금을 거두었다. 물론 세금 낼 돈 마련하느라 알아서 고무 채취하고 상아 채취를 해야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광산을 개발하면서 조금 나아졌을 뿐, 다시 가족을 인질로 잡고 노동을 시키는 것이 반복되었고, 손은 안 자르지만 채찍으로 두들겨 갈기는 것은 여전했다고 한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르완다 - 부룬디 지역을 할양받으면서 투치족과 후투족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통치했고, 덕택에 벨기에는 후의 르완다 내전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땡땡의 모험 작가인 에르제가 땡땡의 모험 시리즈 중에서 우익 사상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에 그린 <콩고에 간 땡땡>이 이 시절에 그린 작품이었는데, 당대 벨기에 정부의 행태나 강제노동을 묘사하지 않은 채 원주민들을 문명화 교육(을 빙자한 세뇌 교육)시키며 코뿔소 등 야생동물도 잡는다는 식의 내용으로 그려졌다. 후일 작가 자신의 성향이 바뀌고 나서부터는 이 작품을 흑역사로 여기기 시작하여 인종차별주의적인 색채를 빼는 방식으로 수정했기는 했지만, 원 작품 자체의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 보니 현재도 준 흑역사급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가 원하는 대로 힘 있는 국가가 되어 있었지만, 콩고인들을 물론이고 벨기에 정부와 국민, 전 세계적인 여론, 그의 친구와 벨기에의 모든 정부 관료들은 그를 혐오했고, 그의 아내와 3명의 딸 가운데 2명에게서도 외면받았다. 다만 그의 정부인 블란차 들라크루아(Blanche Delacroix)라는 여인만이 그의 편이었다. 그녀는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고 레오폴드 2세는 두 아들의 출생에 기뻐했지만, 벨기에 국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가톨릭 신자들은 교리상 남녀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륜 행각은 자국민들에게까지도 엄청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불륜으로 인해 레오폴드 2세는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자국민들에게도 외면받았고, 특히 그의 가족과 친척에게도 버림받게 되었다.

1909년 12월 초에는 창자까지 막히는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고, 그 어떠한 치료법이나 약도 효과가 없었다. 레오폴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는 쿠린 신부를 불러서 자신의 정부 블란차 들라크루아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드 본 남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었으며, 많은 재산을 카롤린에게 물려주고 며칠 후에 사망했다. 블란차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그가 죽자 대성통곡을 했으나, 한 사람이 레오폴드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그녀를 끌어내 버렸다. 웃긴 사실은 블란차는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한 지 1년만에 재혼했고,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그냥 내팽개쳐두고 살았다는 거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lemn_Funeral_of_the_King.jpg
레오폴드 2세의 장례식

죽기 1달 전, 레오폴드는 자신의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르도록 당부했다. 그는 화려한 장식이나 추모 행렬 등이 없이 간단하게 장례식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할 때, 큰 규모로 거행했다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라한 장례식은 죽은 왕에 대한 모욕으로 보일 수 있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은 조카 알베르와 정부가 끝까지 그를 잔인하게 대우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기에, 그가 국민들에게 실컷 욕먹도록그의 요구를 씹고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레오폴드가 사망한 후 그를 브뤼셀에 있는 궁궐에 이틀 동안 머물게 했고, 그 후에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결국 예상대로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여 "왜 저딴 인간 말종한테 국가의 돈을 들여서 저렇게 화려하고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느냐"는 비난 세례를 퍼부었다. 그래서 추모 행렬을 지켜보다가 그의 관을 실은 행렬이 지나갈 때 온갖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의 관에다가 침을 뱉기도 했다. 그렇게 레오폴드 2세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경멸을 당하며 땅에 묻혔다.

3. 평가[편집]

그 작자가 인간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요!

늑대의 배설물만도 못한 놈 같으니!


학살 혹은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콩고인이 적게는 수십만, 많게는 수백만 단위로 추산된다. 이러한 학살 규모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전근대를 포함해도 인류 역사를 전부 통틀어도 적다[40]. 레오폴드 2세 이상으로 비견될 만한 학살자는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기무라 헤이타로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비견되는 인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가히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학살자들과 비교될 정도로 콩고에서 끔찍한 짓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게르만 민족을 위해 레벤스라움을 건설하려고 다른 민족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나, 대숙청으로 강력한 권력 기반을 이룩하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이오시프 스탈린과는 달리 레오폴드 2세의 학살은 그저 자신의 사유재산을 불리려고 한 짓이라, 국익을 위했다라고 볼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도 불구하고 레오폴드 2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은 편이다. 이는 레오폴드 2세의 학살은 유럽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콩고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당시 유럽의 식민정책 틈바구니에 섞이면서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도 있고, 당시 흑인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인종차별, 백인우월주의 의식과 식민지 수탈이 상식이었던 제국주의 시대라는 시대적인 배경 탓이 크다.

무엇보다 아돌프 히틀러계획적인 유대인 대량 학살이 너무나도 임팩트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묻혔던 점이 크다.[41] 인원 수만 따지면 히틀러와 엇비슷하거나 더 많음에도 이렇게 인지도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히틀러의 학살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탓이 크다.[42] 벨기에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미국, 일본 등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들 역시 나치 독일과 홀로코스트가 악명을 거의 다 가져가버렸고, 홀로코스트 외 나치 독일의 다른 오만 가지 만행들도 다소 덜 알려진 감이 있다.[43]

레오폴드 2세의 본성이 드러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국인들에게 그의 이미지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다. 식민지 수탈도 어느 정도는 용인하던 것이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국민들은 레오폴드 2세의 선전으로 그가 정말로 콩고에서 인도주의적인 정책을 하고 있는 국왕으로 믿고 있었다. 게다가 콩고가 자신의 사유지였음에도 자신의 돈으로 건물을 지어주기도 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기도 했기 때문에, 벨기에 사람들은 그를 대단히 좋아했다. 즉슨 레오폴드 2세는 자국에서 '인도적이고 국민에게 뭔가 베풀어주는 선정한 군주'인 척 했던 것.

하지만 그가 본성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자국인들은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내뱉으며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돌려주지 않으려고 별의별 추태를 다 부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의회를 무시하는 독재자 같은 인간'으로 찍혀서 의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경멸당하게 되었다.

거기다 식민지 착취를 받았던 콩고민주공화국에서도 당연지사겠지만 절대로 그를 대놓고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지옥에서 강림한 대마왕, 원수'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현재 콩고민주공화국 국민들의 레오폴드 2세에 대한 반감은 일본 제국의 이전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메이지 덴노다이쇼 덴노, 쇼와 덴노 등 일본 제국 시기의 일본 역대 덴노[44]에 대해서 이를 가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증오감이 심하다고 한다. 물론 당시 일본한국에 가혹한 식민지 통치를 일삼았지만, 당시 식민지인들을 단기간에 수백만씩 처형하거나 할당량 못 채운다고 손목 자르는 짓까지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레오폴드의 콩고 식민지배는 한 술도 아니고 몇 술은 더 뜨는 수준의 지독한 폭정이었다.

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식민지를 만들고 원주민을 수탈한 이유가 자국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당대의 기준으로 옹호의 여지가 있지만, 사실 수탈은 순전히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는 결론적으로 콩고는 물론 자국인 벨기에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레오폴드 2세가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만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벨기에인들은 물론이고, 극우적인 벨기에 우파들도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을 정도로 자국에서의 여론도 나쁘게 끝나고 말았다. 그의 사후 후술한 것처럼 국민들에게 쌍욕을 바가지로 먹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관에 침세례를 받을 정도였다. 거기다 식민지배 전에는 여자를 밝혀 창녀를 정부로 삼아 자신의 가정을 내팽개치고, 왕비가 죽자마자 그녀와 결혼해서 아들을 2명이나 낳은 부도덕한 인물이었다는 과거사까지 다 뽀록났으니... 이러니 대중들한테 평판이 좋을 수가 있나?

거기다 이 자 하나 때문에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 여러 열강들이 침략해서 아프리카 대륙의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는 점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악명 높은 나비효과가 아닐 수가 없다. 벨기에가 아프리카로 진출했다는 소식을 기점으로 '국제콩고협의회'가 설립되었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등 여러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었기 때문. 더 웃픈 건 이름이 같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까지 동일시되어 덩달아 욕을 먹게 되었다는 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레오폴드 2세의 학살도 잊히면서 벨기에 네오 나치들은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재조명을 하려고 했다. 이러한 학살 사건을 두고서 일부는 이에 대해 "식민지 확장은 어디까지나 시대적 조류에 따라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콩고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거기다 몇몇은 뻔뻔스럽게도 왕의 개인적인 욕심으로 인한 과오로 덮으려는 논리도 있다. 이게 맞다면 벨기에의 강간도 범죄가 아니라는 것도 어느 정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착취나 학살 등만 따지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네덜란드 등 다른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임에도 그렇다.

3.1. 벨기에에서의 평가[편집]

학교, 조직, 교사마다 다르고 오늘날 여러가지 상황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젊은 벨기에인들이 식민지배 역사나 벨기에-콩고간의 관계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45]

대다수의 현대 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드가 그냥 벨기에의 왕이었던 사람 정도 또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 정도로 알고 있다. 학교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나쁜 일을 했는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동상도 세워져 있으며, "학살을 했다고는 해도, 콩고는 왕의 개인 사유지였기 때문에 벨기에라는 나라로서는 별로 신경쓸 일이 아니다"라는 반응도 보인다. 이는 레오폴드 2세가 죽은 이후 이른바 위대한 잊기(Great Forgetting)이라는 운동이 일어난 때문으로, 이 때문에 20세기까지 많은 수의 벨기에 사람들은 레오폴즈가 학살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아프리카 르완다를 여행한 여행자가 쓴 책에서 나오는 일화로, 르완다 학살 문제를 어느 벨기에 관광객이 안타깝다고 하자, 그 자리에 있던 미국인이나 프랑스인들이 코웃음치며 "그 학살의 모든 원인은 바로 너희 벨기에인들이 저지른 일이잖아?"라고 하자 그 벨기에인은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고 한다. 한심해하던 다른 나라 관광객들이 식민지로 삼던 르완다에서 착취와 약탈, 부족 차별로 이간질시킨 게 원인이라면서 "역시 너희 교과서는 숨기나 보군?"이라고 비아냥거렸던 것.

이 문제는 1999년 애덤 호크실드의 <King Leopold's Ghost>라는 책이 미국과 벨기에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떠들썩하게 다루어졌고, 미국에서 호평을 받으며 사학협회에서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벨기에 사회에서 수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 당시 벨기에 전 공무원은 '세상에 히틀러와 스탈린의 공포, 그리고 인도와 태즈매니아와 어보리진의 학살극에 비교할 수 있는 건 없으며, 레오폴드는 영미 학술 사회에 의해 과장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다양한 벨기에에서의 모욕적, 과도한 정의의 사도스런 책의 논조에 불쾌함을 표한 의견도 꽤 표출되었지만, 그 후 2010년대엔 콩고의 만행을 대면하는 전시회가 개최되는 등, 현대 벨기에에서 레오폴드 2세의 다양한 만행이 사회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다.

하지만 벨기에 외무장관이었던 루이 미셸[46]이라는 사람은 2010년에 레오폴드 2세에 대해 영웅이라고 평가하고 '비난을 받을 책임이 없으며 벨기에인들이 콩고를 발전시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 2. 2020년 6월 18일 RTBF의 라디오 방송인 la première에 출연하여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좋은 생각이며, 할 수 있는 곳에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은 연결되어 있다"라고 말하며 과거의 발언을 뒤집었다. 이후 과거의 발언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2020년에는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로 인해 레오폴드 2세의 악행도 다시 사람들의 기억에 올라왔으며, 양심적인 벨기에인들은 그의 동상을 없애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프리카계 벨기에인들, 특히 콩고계 벨기에인들이 이러한 운동을 지지하고 있다.

6월 9일에 안트베르펜 시는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

2020년 6월 12일, 필리프 국왕의 동생인 로랑 왕자는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 가본 적이 없으며 어떻게 착취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레오폴드 2세가 한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했다.

에스메랄다 공주는 RTBF와의 인터뷰에서 "국왕과 정부가 콩고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하였다.

파트릭 더발 연방 하원 의장이 진실과 화해 위원회 설립을 제안했다

왈롱-브뤼셀 연방의 공영방송인 RTBF에서 콩고 독립 6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 페이지를 열었다.

2020년 6월 30일에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은 벨기에가 과거 콩고민주공화국을 식민 통치할 때 저지른 폭력에 대해 매우 깊은 유감(mes plus profonds regrets)을 표했다. #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VRT분석 기사에 의하면 국왕의 서한은 식민지배 문제 해결의 첫 번째 단계를 밟은 것으로 보았다. 이후의 절차는 의회의 조사 후에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7월 1일에는 헨트 시에서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이 철거됐다. #

3.1.1. 건설왕[편집]

앞서 말했듯이 현재 벨기에 국내에서의 평가는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47] 내치를 비교적 잘한 면도 있지만, 콩고에서 착취한 막대한 이익을 건물을 짓는 데 썼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치면 일본 국내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자국의 근대화를 이끌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호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착취와 폭정을 겪어야 했던 대다수의 식민지인들에게는 나쁜 놈이라 할 수 있다.

콩고에서 착취한 돈으로 벨기에에 건물들을 지어서 국민들로부터 "건설왕"(네덜란드어: Koning-Bouwer, 프랑스어: Roi bâtisseur)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로 브뤼셀, 오스텐드, 앤트워프에 지었다. 문제는 이러한 건물을 짓는 것에 거의 대부분의 돈을 투자했고, 콩고에서 갈취한 돈을 가지고 애첩 블란차와 함께 프랑스나 다른 국가로 쇼핑이나 하고 다녔는데, 특히 블란차는 프랑스에서 당시 금액으로 한 번 쇼핑할 때 300만프랑을 사치하는 데 써댔다는 거다. 게다가 벨기에인들의 복지 향상에는 그렇게까지 많은 돈을 추가한 것이 아니었으며[48], 이렇게 벨기에에 지어댄 건물들이 그의 정부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지은 것이라는 점이다.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의 애인이 편하게 길을 다니라고 도로를 만들어주거나 애인을 위한 건물들을 막 지어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건물들을 국가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레오폴드 2세가 건물을 운영하는 비용을 자신의 돈으로 지불하기 싫어서 국가에 맡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들통나자 자국민들에게 오히려 더 비판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지었던 건물들을 현재까지도 잘 써먹고 있어서 현재는 이 건물들 때문에 레오폴드 2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물론 당시 레오폴드 2세에게 무시당했던 벨기에 북부에서는 레오폴드 2세를 여전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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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 집권기에 지어진 브뤼셀 생캉트네르 공원(Parc du Cinquantenaire)의 아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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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뷔런(Tervuren)시의 중앙아프리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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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펀 중앙 철도역

4.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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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 2세의 동상

그의 악랄한 유산은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자이르 내전이나 인종 청소도 모두 그의 악랄한 식민통치가 그 원인인 것이다. 잔혹함으로 치면 전범으로 기소되어도 진짜 할 말 없는 벨기에의 흑역사. 다만 유색인종은 같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당대 서구 사회의 백인우월주의 의식과 식민지 수탈이 상식이었던 제국주의 시대라는 배경이 겹쳐서, 그는 히틀러 급의 학살을 벌였음에도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49]

그래도 싫어한 사람들은 무지하게 싫어했는지라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암살 시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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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는 이탈리아아나키스트인 젠나로 루비노에 의해서 레오폴드 2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그는 레오폴드 2세에게 3번이나 총을 쏘았지만 레오폴드 2세는 맞지 않았다. 그는 그 즉시 체포되었고, 레오폴드 2세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는 죽어서까지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 2008년 당시에는 이 사진처럼 테오 필 드 지로라는 미술가가 레오폴드 동상에다가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참고 자료. 이런 일 외에도 종종 레오폴드 2세의 동상은 페인트칠과 낙서 등의 반달리즘을 당하기도 한다.

콩고 사람들은 그렇게 학살하고 일을 못한다고 손목을 자르거나 일가족을 초토화 시키는 것에 비해서, 웃기게도 자신은 건강염려증 환자였다. 레오폴드 2세는 건강염려증 증세가 있어서 자신의 건강을 지나치게 걱정해서 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 그는 자신의 턱수염을 보호할 방수천을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턱수염이 비에 젖어서 감기에 걸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변에서 누군가가 재채기를 하면 재채기를 통해서 어떤 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공포에 떨기도 해서, 레오폴드 2세의 보좌관들 중 몇몇은 이러한 그의 공포심을 이용하여 휴가를 얻어내기도 했다.

보좌관이 감기에 걸린 척 기침을 하는 행동을 하면 레오폴드는 그를 이유 불문하고 반드시 쉬게 하였고, 하루나 이틀 정도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감기에 걸린 사람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자신이나 궁정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는 다른 전염성 질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건강을 위해 운동에 매달렸고, 전염병을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한다.

벨기에 왕국은 국왕의 권력이 제한되어 있는 입헌군주제였기 때문에, 레오폴드 2세는 자국 내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한 번은 레오폴드 2세와 조카이자 왕세자인 알베르 왕자가 회의를 하다가 왕자가 창문을 여니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는데, 레오폴드 2세가 그것을 주우라고 명령했다. 명색이 왕세자인 알베르 왕자가 서류를 주우려고 하자 신하들이 대신 주우려고 했는데, 레오폴드 2세는 신하들에게 "입헌군주가 되려면 허리를 숙이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왕세자가 줍게 놔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웃긴 사실은 콩고 독립국에서 행한 악행을 보면 레오폴드 2세는 그야말로 전제군주이자 폭군이 따로 없었다는 것이다.[50]

의외로 한국 근대사와도 접점이 있는데, 그의 사망 후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추도 미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이완용이재명 의사가 습격해 척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은근히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고 하며, 가족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확히는 현실판 막장 드라마 그 자체였다. 거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정사가 개판이라서, 우스갯소리로 콩가루 집안의 끝판왕인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사돈으로 엮여서[51]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전임 국왕인 아버지 레오폴드 1세는 자국 국민들을 아끼고 사랑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첫 번째 부인 샬럿 공주가 아들을 사산하고 사망하자 평생 잊지 못할 정도로 금슬이 좋았고, 훗날 재혼한 아내 오를레앙의 루이즈[52] 항상 아내로서 존중하고 함께 하며[53] 가정적으로 별다른 논란을 만들지 않았다.[54] 반면에 그의 아들인 레오폴드 2세는 아내 마리 앙리에타를 싫어하고 무시했으며, 외아들 레오폴드가 죽자 아내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하여 아내와 별거한 다음 죽을 때까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레오폴드 2세에게는 일찍 죽은 아들 하나와 딸 3명이 있었다. 장녀 루이즈는 낭비벽이 심하고 젊은 장교와 바람을 피우다가[55]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러자 이 장교가 정신병원에 갇힌 루이즈 공주를 구해냈다. 문제는 이러고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니라 레오폴드 2세가 루이즈 공주의 낭비벽 때문에 딸을 미워하며 그녀의 재산을 압류해 버렸다.

둘째 딸 스테파니 공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루돌프 황태자와 결혼했지만 성격 차이와 남편의 불륜 때문에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결국 루돌프 황태자가 애인 마리 폰 베체라와 함께 동반자살로 사망하자 스테파니 공주는 친정인 벨기에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스테파니 공주는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와 재혼하면서 레오폴드 2세를 분노케 만들었다.[56] 1912년에 스테파니 공주의 어머니 마리 앙리에타가 사망했을 때 스테파니가 브뤼셀을 방문했으나, 레오폴드는 냉정하게도 추도 예배가 진행되던 채플에서 그녀를 내쫓아버렸고, 스테파니에게 돌아갈 몫의 얼마 되지도 않는 유산까지도 주지 않았다. 셋째 딸 클레망틴 공주는 그나마 레오폴드 2세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공주였고, 언니들과 달리 아버지와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57] 하지만 나폴레옹의 조카의 손자 뻘 되는 보나파르트가의 5대 종손인 빅토르 나폴레옹(나폴레옹 5세)과 사귀고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기 때문에 프랑스 황제위를 주장하는 빅토르 나폴레옹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자신이 사망하는 바람에 클레망틴과 빅토르 나폴레옹의 결혼을 막지 못했다.[58]

이렇게 막내딸을 제외하곤 아내와 딸들과 사이가 안 좋으니, 레오폴드 2세는 현실에서 아주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는 루이즈와 스테파니 공주에게는 재산을 일절 물려주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그녀들은 레오폴드 2세의 정부 카롤린과 법정 다툼까지 벌이려고 했다. 게다가 장남이었던 "브라반트 공작 레오폴드"도 있었지만 물에 빠졌다가 폐렴으로 일찍 사망한다. 한 마디로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그러자 포기를 모르는 레오폴드 2세는 다시 아들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공주들만 태어나자 결국엔 전부 포기하고 조카인 알베르 1세를 왕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콩고인들의 입장에선 업보 그 자체이며, 현대 벨기에 왕실의 입장에선 학살자 레오폴드 2세의 직계 후손이 아니게 된 전화위복인 셈. 레오폴드 2세의 여동생 샤를로트(스페인어로 카를로타. 1840~1927)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의 금슬은 상당히 좋았으나 대공비로 평온하게 살 수 있었던 샤를로트의 삶은 나폴레옹 3세의 오지랖 때문에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추대된 것을 계기로 완전히 꼬여 버린다.

막시밀리아노가 베니토 후아레스의 혁명군에 의해 제정이 무너지자 총살당하자, 남편을 구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호소하던 카를로타는 미쳐 버리고 만다. 레오폴드 2세는 미친 여동생을 마이즈 성에 가둬버렸고, 샤를로트는 1927년에 죽을 때까지 유폐된 채 여생을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벨기에가 을 재배하는 쑥대밭이 되는 가운데에서도, 독일의 우방인 오스트리아 황제의 제수라서 그런지 성은 파괴되지 않고 무사했다.

한글판 아키네이터에는 어째서인지 '벨지언[59] 개새끼'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왕 중에서 저렇게 과격하게 표현된 인물은 레오폴드 2세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5. 참고자료[편집]

  • 아담 호크쉴드. <레오폴드 왕의 유령>(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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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많이 한 사람은 1,900만 명을 죽인 쿠빌라이 칸이다. 공화국의 지도자들까지 계산할 경우 아돌프 히틀러이오시프 스탈린이 2,000만 명 이상을 학살했고, 마오쩌둥7,000만 명을 학살했다.[2] 천만 명 학설은 당시 콩고의 인구상 현실성이 없고, 최대 백만 명 정도로 잡는 것이 현실적인 수치이다. 물론 학살 행위가 많이 죽인 순서대로 스코어를 매기는 게임도 아니거니와 수십 만 명, 혹은 그조차도 안 되는 수만 명 단위었다고 한들 레오폴드 2세의 잔혹함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3] 이후 아내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4] 한 세대 전이었다면 지위 있는 남성이 정부를 두는 것은 (일각의 오해와 같이 '아무 흠도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용납될 법한 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라고 부른 이 시대는 이미 청교도적 부르주아 윤리가 헤게모니를 가져오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정부 문화의 전성기 때도 '신분에 맞는(대체로 자기보다 약간 못한 위치)' 파트너 선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창녀 출신 정부는 예로부터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었다.[5] 둘째 아들 필리프는 한쪽 손이 기형이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를 두고서 "콩고에서 죽어간 영혼들이 저주해서 아이의 손이 기형이 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7살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인 뤼시앵은 78살까지 살았다. 이를 통해 당시 벨기에 사람들이 레오폴드 2세의 콩고 대학살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6] 당시에는 왕세자였다.[7] 사실 이는 정말 순수하게 레오폴드 2세를 비난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어느 정도 정치적 계산이 반영되어있기도 했는데, 레오폴드 2세를 악마화함으로서 ‘그래도 우리가 저딴 새끼보단 낫지 않냐’ 라는 식으로 자국의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미화하여 식민지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의도 역시 다분했다.[8] 여담으로 필리핀미서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미국의 식민지로 넘어간다.[9] 사실 콩고 자체는 이미 15세기부터 유럽인과의 교역으로 라틴 문자와 기독교가 들어온 지역이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당시 주도권을 잡았던 바콩고 왕국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였고, 수십여 개의 국가들이 서로 다투던 형국이었다. 그리고 굳이 종주권을 주장하려는 국가로는 포르투갈네덜란드 정도가 있었는데, 이미 두 나라는 세가 악화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딱히 종주권을 주장할 만한 처지는 안 됐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몇몇 나라들을 겨우겨우 유지하는 판국이었고, 이미 그 시절에도 이런저런 나라들이 독립해나가는 처지였다.[10] 당시에는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일이었지만, 유럽인들이 진심으로 아프리카 현지인들을 위해서 열강의 진출을 도운 자들도 꽤 많았다.[11] 물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조차도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협회와 콩고 부족장들 간의 조약 내용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12] 레오폴드 2세의 관제협회인 "국제 아프리카 협회".[13] 레오폴드 2세의 경우는 계약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인권이 극심하게 침해되었다. 맨해튼과 관련한 미국 드라마 대사들을 보아도 지들이 잘했다고 하진 않는데, 이건 그것과 비교도 안 되는 터라(...)[14] 게다가 맨해튼 지역을 판 원주민 부족이 분쟁을 조장하려고 일부러 다른 부족의 땅을 자기네 땅인 것 마냥 팔았단 설도 있는데, 이 같은 경우엔 오히려 피해자가 네덜란드가 된다.[15] 남한호주에 대입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거의 서유럽 전역에 필적하는 넓이의 땅이다.[16] 투자자를 모집해서 돈을 끌어 모으면 되지만, 그러면 콩고에서 나는 이익을 독식할 수 없어서 모집을 안 했다.[17] 영어에서 고무를 뜻하는 'rubber'라는 단어도 문질러서(rub) 연필 자국을 지울 수 있다는 고무의 특성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래서 영국식 영어에서 'rubber'는 고무라는 뜻뿐만 아니라 지우개라는 뜻도 있다.[18] 미국타이어 회사 굿이어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회사명을 따왔다. 단, 굿이어 본인이 세운 회사는 아니다.[19] 과거 영국에 '던롭'이라는 타이어 회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20] 콩고가 철저히 왕의 소유물이다 보니, 벨기에 정부와 국민들은 왕이 벌이는 일을 알 수 없었다.[21] 특히 시에라리온라이베리아 그리고 우간다신의 저항군이 많이 써먹는다. 이들 반군 중에서는 아예 레오폴드 2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자들까지 있다고 한다.[22] 이것은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 초반에 주인공 중 한 명인 솔로몬 반디의 마을에 반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나온다. 주인공인 솔로몬도 팔이 잘릴 위기에 처했지만, 덩치가 좋은 관계로 팔을 잘리는 것은 면하고, 대신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보내져 뼈 빠지게 노역을 하는 신세가 된다.[23] 원래 가해국들은 자신들의 만행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24] 남미와 동남아, 아프리카의 인구가 폭증한 것은 산업혁명의 힘으로 정글을 밀어버리고 비료를 쓰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 이전에는 인구 밀도가 매우 낮았다. 열대우림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시피 열대우림은 전근대 인류가 농사 짓고 살기에 굉장히 척박한, 사막과 다를 것이 없는 지역이다.[25] 동남아는 최소로 쌀을 재배한 지역 중 하나로 추정될 정도로 쌀 농사의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다 그런데도 동남아 전체가 근대까지 3000만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열대우림 기후 자체가 산업혁명 이전에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다. 수천 년이 넘는 쌀농사 역사를 가진 동남아가 이럴진대 콩고는...[26] 프랑스 본토의 4배이며 일본의 7배, 인도네시아보다도 20% 더 크다.[27] 인구 부양력에 있어서 단순 땅 크기는 상관 없다. '농경지'의 크기가 중요하다. 아무리 광대한 국토여도 고원, 열대우림, 툰드라 지방이어선 인구를 많이 부양할 수 없다. 시베리아티베트 등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28] 출처 : 와타히키 히로시 - 질투하는 문명』[29] 또한 1905년 존 해리슨 목사는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처벌을 받았는지를 묘사하는 기사를 작성했다.[30] 레전드 오브 타잔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무엘 잭슨이 연기했다.[31] 유럽선교사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까지 걸고 식민지 나라들에 가서 선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과거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들 중 이슬람교를 믿는 세력들을 제외하면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이 많은 것. 물론 열강의 지배자들은 그런 그들의 마음조차 이용했다. 바꿔 말하면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와 붙어먹기도 했지만, 쌩까고 자기 할 일도 했다. 선교사쯤 되는 학력이면 유럽 본토에서도 그럭저럭 지식인으로 살 수 있는데, 굳이 만리타향까지 가는 사람들이니까.[32] 초기의 사진기들은 유리필름으로 썼다. 때문에 유리에 남아있는 사진을 크게 인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초기의 사진들은 주로 인물 초상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1년 유리를 아주 크게 키워서 광범위한 범위를 촬영 가능한 광학 카메라가 개발되면서, 이 콩고에서의 헬게이트가 마을 단위로 촬영되기 시작했다.[33] 이 과정에서 아서 코난 도일,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과 친해진다.[34] 웃긴 사실은 아서 코난 도일영국보어전쟁을 지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뭐 보어전쟁에서 영국의 적이었던 보어인들도 대부분 흑인들을 괴롭히던 백인 지주나 농장주들이었지만. 보어인에게 탄압받던 흑인들이 영국군에게 협조하기도 했다. 물론 보어를 때려잡은 후에는... 그리고 코난 도일은 보어전쟁은 지지했지만 아일랜드 독립에 찬성했고 인종차별에 반대한, 당시 제국주의에 찌든 영국인 중에서는 상당히 양심적인 사람이다. 실제로 인종차별 때문에 누명을 쓴 사람을 자신의 추리력으로 구명한 적이 있다.[35] 첫 번째 사진의 인물은 로저 캐즈먼트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다.[36] 이 둘은 아예 바다로 나갈 해안 영토조차 없던 내륙국들이었다.[37] 물론 이 수치는 당시 나온 수치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도 있다. 사실 당대의 인구 통계를 조금만 안다면 신빙성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허무맹랑한 수준의 수치다. 콩고가 당시 인구 3000만, 즉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인구 대국이었다는 건 신빙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대의 통계에서 학살 규모가 허무맹랑한 수준으로 부풀려진 것은 시대상의 한계 때문에 통계 자체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정보 전달 속도도 빠르지도 않았다는 점과, 레오폴드로부터 콩고의 이권을 뺏어오기 위해 레오폴드의 정적들이 레오폴드의 과오를 강조하기 위해 통계를 부풀린 것에서 기인했을 확률이 높다.[38] 이 소리도 망언에 불과한데 정작 영국보다는 덴마크 왕국프레데리크 8세,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레오폴드 2세를 가멸차게 비난했다. 게다가 이 두사람은 평생동안 노예제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군주들보다 명분도 확실했다. 아래 평가 항목에서 나온 "그 작자(레오폴드 2세)가 인간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요!"라는 말도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한 말이다.[39]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자로 유명한 솔로몬 R. 구겐하임과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희생자 중 한 명인 벤자민 구겐하임의 형이다.[40] 여러 가지 물적 증거가 남아있는 학살의 잔인함과 달리, 학살의 규모에 대해서는 앞서 문단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견이 갈리는 편이다. 일단 당대에 인구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인구 규모 자체가 불명이었으며, 영토 대부분이 열대우림 미개척지이고 대규모 개간과 농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콩고의 지리상에 수천만 단위의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콩고보다 훨씬 농업의 역사가 길어 수천 년에 걸쳐 일찍 밀림을 밀어내고 농사를 지어오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인구가 전부 다 합쳐서 4000만도 안 되던 시절이다. 그 정도로 산업 혁명 이전에 열대우림은 인류가 농사지어 먹고 살기에 너무나 척박한 땅이었고, 남미든 동남아든 열대우림 기후에 속한 나라들의 인구가 폭증한 건 비료와 불도저 같은 산업혁명의 힘이었다. 때문에 당시에 콩고가 3000만 단위의 인구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은 추정치이다. 또한 콩고에 배치되었던 벨기에 군인들의 수가 가장 많았을 때 기준으로 2천 명 정도로, 현지의 부족을 동원하여 내치를 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수천만 단위의 인구를 통제하기에는 지나치게 적은 수이다. 일본 제국만 하더라도 그 좁은 조선 땅덩어리에 2개 사단 가량의 병력을 배치했다.[41] 공교롭게도 히틀러가 벨기에를 점령할 때 레오폴드 2세를 들먹이며 "우리랑 같은 길을 가자"면서 합병하자는 개드립을 시전한 적이 있다. 결국 그놈이 그놈.[42] 수탈하겠다고 잔혹하게 대하는 거야 그 방법의 차이 정도지만, 나치 독일이 사용한 방법은 '살인 공장'이라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43] 생체실험, 집시동성애자 대학살 등.[44] 그나마 메이지 덴노와 다이쇼 덴노는 일본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있지만, 쇼와 덴노는 일제의 피해국인 한국 뿐만 아니라 모국인 일본에서도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45] 벨기에는 연방 차원의 교육부가 없다. 각 공동체 정부의 장관이 교육 정책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플란데런 정부의 장관, 벨기에 프랑스어 공동체 정부의 장관, 벨기에 독일어 공동체의 장관 총 셋이다. 그러나 쥘리 모렐의 발언은 이러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벨기에 프랑스어 공동체의 과거사 교육 지침이 부실하여 교사의 재량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기사는 2018년도의 기사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46] 2014년에 38세에 최연소 벨기에 총리가 된 샤를 미셸의 아버지다.[47] 주로 벨기에 남부의 프랑스계 주민들 얘기지만...[48] 후술할 내용대로 벨기에 북부에서 레오폴드 2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이것이다.[49] 하지만 상술한 것처럼 악행이 모두 까발려져 말년에는 자국민을 비롯한 모두에게서 외면당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르기는 했다.[50] 이를 다룬 서적으로는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조해 보실 것.[51] 아래에서 서술하다시피 레오폴드 2세의 딸 스테파니 공주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와 결혼했다.[52]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필리프 1세의 딸이다.[53] 루이즈 역시 아름답고 조용한 여성으로 첫 아내를 잊지 못한 남편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고명딸에게 샬럿 공주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54] 다만 아르카디 클라렛을 비롯한 정부를 들이기도 했다. 아내 루이즈는 남편의 정부를 참을성 있게 견뎠으나 이것이 탈이 되었는지, 아버지 루이 필리프 1세의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고 병에 걸려 결국 사망한다.[55] 원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필리프(앨버트 공의 5촌 조카)와 결혼해서 슬하에 1남 1녀가 있었다. 하지만 루이즈가 불륜과 낭비벽으로 인해 남편과의 관계가 나빠지다 못해 이혼까지 하자, 아버지인 레오폴드 2세도 딸 루이즈를 미워하게 되었다.[56] 스테파니 공주와 재혼한 엘레머 로니아니는 귀족의 지위를 잃은 평민 신분의 남자였다. 이에 레오폴드 2세는 신분이 낮은 평민과 허락도 없이 결혼한 스테파니를 미워하게 된다.[57] 특히 왕비인 어머니가 하던 궁중의 업무를 클레망틴이 하면서 아버지를 보좌했다.[58] 사실 클레망틴이 빅토르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레오폴드 2세가 반대했기에 못하다가 그가 죽고 나서야 결혼할 수 있었다.[59] "벨기에인"이란 뜻으로, 음역이 된 이유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