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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본명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Лев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éйн)
국적
출생
1879년 11월 7일, 러시아 제국 키로보흐라드
사망
1940년 8월 20일 (60세), 멕시코 코요야칸
직업
정치인, 외교관, 사상가, 노동운동가
정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스위스 사회민주당
소련 공산당
제4인터내셔널
종교
없음 (무신론)
신체
174cm
배우자
알렉산드라 소콜롭스카야
나탈리아 세도바
자녀
지나이다 볼코바
니나 네벨손
네프 세도프
세르게이 세도프
서명

1. 소개2. 생애
2.1. 초기 이력2.2. 혁명가2.3. 10월 혁명2.4. 전성기
2.4.1. 혁명을 사수하라! : 붉은 군대의 건설자2.4.2. 내전 전후 경제정책2.4.3. 내전 이후의 권력투쟁2.4.4. 일국사회주의론 VS 연속혁명론
2.5. 몰락
2.5.1. 제2의 망명생활2.5.2. 대숙청2.5.3. 암살
3. 유언4.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후예5. 현대의 평가6. 대표 저작7. 이야기거리8. 대중문화

1. 소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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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1]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2]

무장한 예언가[3]

소련정도전[4]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가. 1879년[5] 11월 7일 ~ 1940년 8월 20일

10월 혁명의 주역이자, 붉은 군대의 창시자로서 소련을 창시하는 데 단연코 독보적인 공적을 세웠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후계자로 유력했으나, 동갑내기 앙숙인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뒤 당에서 제명되고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트로츠키는 굴하지 않고 망명지를 옮겨 다니며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다가, 결국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됐다.

2. 생애 [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우크라이나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야노프카 출신. 독일계 유대인[6]이었다.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Лев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ейн, Lev Davidovich Bronshtein). 서양에서는 레온(Leon) 트로츠키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글을 기고할 때 쓰던 필명이자 레프의 영어식 이름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트로츠키가 9살이 되던 해 그를 오데사로 보내 독일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모어인 러시아어는 물론 독일어에도 능하게 되었다. 오데사는 여러 인종이 살던 국제도시였으므로 트로츠키는 국제주의에 눈뜨게 되었다. 이는 후에 철저히 러시아 민족주의를 외친 스탈린과 대비되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수석 졸업을 할 정도로 학업성적이 우수했으며, 모어격인 러시아어와 독일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에도 유창했다.[7]

당시 러시아는 차르의 전제정치 하에 있었고, 입헌정치는 물론 의회도 없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에는 여러 사상적 배경을 가진 혁명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조금이라도 지성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혁명사상에 물들고 있었다. 수학을 전공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러시아 전통사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보자는 인민주의자[8]였으나, 후에 서유럽에서 막 수입된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었다.[9]

그리하여 그는 학생의 신분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니콜라예프에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조직 능력은 두각을 나타내었다. 게다가 연설실력도 출중해서 2월 혁명 이후 반혁명적인 장군인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부대가 수도에 진입하자 트로츠키는 이들을 막아서서 쿠데타 부대에 일장연설을 했고, 그의 연설만 듣고도 쿠데타 부대는 자진 해산해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실패하게 된다. 필력도 출중하여 레닌이 후에 "그 사람의 글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너무 문체가 화려하다"고 깔 정도였다.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 가입해서 혁명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때 첫 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소코롭스카야와 만나게 되었다.

2.2. 혁명가[편집]

그러나 차르 치하에서 혁명운동은 곧 감옥행이었고, 결국 트로츠키도 감옥에 간다. 이후 1900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으며, 1902년 시베리아에서 탈출하여[10]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감옥 생활을 할 때의 간수의 이름을 자신의 가명으로 썼다. 그래서 트로츠키라고 불리게 되었다.

국외에서 트로츠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출신 망명객인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여러 혁명가들을 만나고 당 기관지인 "이스크라"의 편집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이스크라 지상에서는 필명 페로(перо: "펜"이라는 뜻)를 썼고, 눈부신 필력으로 이스크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자 중 한 명이자 7인의 책임편집위원 중 하나가 되었다.[11][12] 이때 파리에서 두 번째 아내[13] 나탈리아 세도바를 만났다.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는 당의 노선을 두고 레닌과 줄리어스 마르토프가 대립하고 있었다. 레닌은 당이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들의 전위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르토프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참여하는 대중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둘의 대립은 결국 분당사태로 이어졌고, 레닌 일파는 볼셰비키(문자적으로 "다수파"), 마르토프의 일파를 멘셰비키("소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레닌은 자신의 세력을 다수파라고 불렀고, 마르토프를 소수파라고 했지만 실제로 두 세력은 비슷했다. 그러나 "다수파"의 의미를 가지고 있던 볼셰비키는 심리적인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양 계파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사안에 따라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보충해서 설명하자면,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을 주도하는 조직은 당 기관지인 '이스크라' 였다. 즉 이스크라의 책임편집위원이 됨으로써 트로츠키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볼셰비키에 약간 가깝긴 하지만 사안에 따라 멘셰비키의 편도 들 수 있는 독립적 지도자로써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트로츠키의 입장은 그를 추천했던 레닌과 그 추천을 받아들인 마르토프가 예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트로츠키는 독자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쌓아올리기 시작했고, 이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까지 트로츠키의 정치적 입장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후 1905년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자, 비밀리에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을 조직하려 한 트로츠키는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진다. 1907년, 트로츠키는 다시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이후 프랑스, 스위스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혁명활동에 펼쳤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종군기자로 전선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고,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군 포로를 학살하는 연합국의 일원인 불가리아군의 만행을 보도했다가 프랑스 당국의 신경을 거슬렀다. 이러한 반전적인 논조 때문에 프랑스 당국에 의해 국외 추방되었다. 이후 스페인은 그를 입국시키는 것을 거부했고(정확하게 말하면 입국을 거부당한 것이 아니라, 일단 입국한 뒤에 신분이 드러나 추방당한 것이다) 이 과정에 대해 자서전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1. 당시 스페인 경찰은 트로츠키를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체포했지만, 그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가 시치미를 떼고 대체 왜 자신이 체포당한 것이냐고 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여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거나(당시 러시아의 행정에는 오류나 실수가 많았으므로) 혹시 스페인 내의 아나키즘 활동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거나(당시 스페인 내에는 아나키즘 운동이 크게 성행했으므로)는 등의 가능성을 두서없이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2. 이런 설명에 대해 트로츠키가 "하지만 내가 우리나라 정부와 당신네 나라 아나키스트에 대해 한꺼번에 책임질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자, 경찰들은 우리는 그저 짐작해서 예를 든 것 뿐이지, 정말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고 허둥지둥 트로츠키를 달랬다(...). 결국, 왜 자신들이 이 사람을 체포한 것인지 한참 고민하던 경찰서장은 트로츠키의 정치적 신조에 대해 물어봤고, 트로츠키가 가능한 한 간단하고 알기 쉽게 자신의 정치신조를 설명하자 박수를 쳤다. 아! 이제 왜 체포되신 건지 아셨겠군요!(...)
3. 그 후 조서 작성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일체의 진술과 수사협조를 거부했고, 결국 경찰은 조서에 트로츠키의 지장을 찍기 위해 직접 트로츠키의 손을 붙잡고 지문을 하나하나 손으로 눌러(...) 찍어 줄 수 밖에 없었다.
4. 그 뒤, 국외 추방이 결정되고, 트로츠키는 추방될 국가로 미국을 선택했다. 그래서 미국행 여객선이 출항하는 카디스까지 경찰에 의해 호송되었는데... 트로츠키를 호송하던 경찰은 카디스행 기차에 타자마자 동승한 다른 승객들에게 선언했다. 여러분! 이 분은 훌륭한 신사분이지 사기꾼이나 위조지폐범이 아닙니다. 다만, 부적절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신 탓에 이런 재난을 겪게 되신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승객들은 카디스는 기후가 좋은 곳이니 가 보시면 마음에 드실 거라면서(...) 트로츠키를 위로했다.
5. 카디스에서 미국행 배가 출항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행동이 허가되었는데, 이 때 트로츠키를 감시하던 경찰은 길거리 행상에게 삶은 새우를 사 먹는 트로츠키가 바가지를 쓰게 되자 멀뚱한 트로츠키 대신 격분해서(...) 행상에게 호통을 쳤다.
6. 그야말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찍어낸 것 같은(...) 이 사례를 봄으로, 1차 세계대전까지의 유럽이 얼마나 훈훈하고 좋은 시절이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14]

결국 이래저래 해서 미국뉴욕으로 갔다. 직후인 1917년 2월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차르는 퇴위하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트로츠키는 수배령이 풀리자 5월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2.3. 10월 혁명[편집]

귀국 후 트로츠키는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에 가담하게 된다. 당시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와 상관없이 사회가 사회주의로 이행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 따라 일단 부르주아 정부가 수립된 후에 자본주의가 발달해야 사회주의 체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2월 혁명 직후, 여러 정파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레닌은 취리히에서 스위스 공산주의자였던 프리츠 플라텐(Fritz Platten)의 도움을 받아 독일 정부의 허가를 얻고 독일 국경을 통과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거쳐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임시정부는 러시아의 국력이 이미 소진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병크를 범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를 이용해 "빵과 평화"를 외치며 즉각 강화를 요구하면서 임시정부 전복 공작을 시작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제정 시절 만들어진 의회인 두마로부터 만들어졌으나, 당시 다른 곳에서는 전선을 탈주한 병사들과 노동자들에 의한 평의회(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물론 소비에트에서는 볼셰비키를 비롯한 좌파 정당의 입김이 더욱 강했다.

이런 공작 때문에 레닌은 다시 임시정부에 의한 수배령이 떨어져 핀란드로 도피했고, 트로츠키가 이런 배경 하에서 볼셰비키를 지도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으며 은밀히 무력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평화를 요구하던 러시아인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고, 이 틈을 이용하여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의 지배적 정당으로 나섰다. 임시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었음을 파악한 레닌과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에서 1917년 11월 7일 당시 볼셰비키의 무력이었던 적위대[15]를 이용해 임시정부를 무혈로 전복하였다. 이것은 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에 벌어진 일이라서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처음에 이들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했던 이유는 볼셰비키가 두마에서 과반수도 차지하지 못했고, 이래저래 두마 안의 좌파정당은 볼셰비키 단독정부에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다. 볼세비키 내에서도 두마 안의 다른 좌파정당과 권력을 분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를 거부하면서 볼셰비키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좌파정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하고 두마마저도 해산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볼세비키에 참여한지 1년도 안 되어 2인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 내에 트로츠키의 세력은 매우 미약했다.[16]

참고로, 볼셰비키와 완전히 남남은 아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트로츠키가 단숨에 레닌의 뒤를 이은 볼셰비키의 2인자로 부상한 계기는 아주 간단했다. 10월 혁명에서 적위대를 동원해서 임시정부를 전복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사실상 레닌과 트로츠키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적위대는 병력이나 무력 모두 그리 충실하다고 말하기 힘든 상태였으며, 일단 제정 러시아의 군대를 계승한 임시정부를 상대로 싸워 이길것을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고, 또한 2월 혁명으로 제정을 전복시키고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또 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긴 대부분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무장봉기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레닌이 핀란드로 도피하자 러시아 내에서 레닌의 무장봉기 주장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지도자는 사실상 트로츠키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트로츠키가 특유의 카리스마로 적위대를 동원하여 임시정부를 공격하자 임시정부는 무기력하게 붕괴하고 말았다. 아직까지 제정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남은 러시아군은 볼셰비키 당을 지지하지는 않을지언정 임시정부를 보호할 의사도 없었고, 대중 역시 임시정부에 큰 실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장봉기를 통해 볼셰비키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이를 주도한 트로츠키의 입지 역시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특히 볼셰비키의 최고지도자인 레닌의 계획을 다른 지도자들도 반대하는 상황에서 지지하고 동참하였으며, 완벽하게 성공시키기까지 하였고 더구나 레닌이 국외에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봉기를 주도하여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레닌을 맞이하는 형국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10월 혁명 이후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다.

한편 볼셰비키는 공약대로 독일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트로츠키를 대표단으로 한 볼셰비키 대표들은 독일과 협상을 하게 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은 거대한 영토를 할양하기를 원했다. 이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하기란 무리였다. 레닌은 일단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면 서유럽에서 연속혁명이 발발하여 구체제는 쓰러질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토를 주고, 일단 내전에서 승리하려고 했다. 결국 러시아는 엄청난 땅을 떼어주고 독일과 강화를 맺었다. 레닌의 예상대로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한 후, 레닌의 말처럼 핀란드나 발트 3국, 폴란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볼셰비키 러시아가 되찾게 되었다.

2.4. 전성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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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를 악마로 묘사한 반(反) 볼셰비키의 포스터(왼쪽)
반혁명세력(용)을 잡는 성 조지로 묘사한 볼셰비키측 포스터(오른쪽)

같은 시기에 같은 인물에 대한 관점이 저렇게 악마와 성인으로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2.4.1. 혁명을 사수하라! : 붉은 군대의 건설자[편집]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완벽한 군대를 건설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소."
- 레닌, 붉은 군대를 조직한 트로츠키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하며
"제국주의자들과 반동세력들을 분쇄한 것은 모두 트로츠키 동지의 노고 덕입니다."
-스탈린, 내전 승리 후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를 찬양하며
볼셰비키 당은 대중 다수의 지지를 받은 봉기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각지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이 일어났다.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것은 왕당파나 임시정부파뿐만 아니라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같은 좌익정당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여러 소수민족들도 이 틈을 타서 독립하려고 했고, 이들은 좌우익 상관없이 러시아인이라면 무조건 증오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다자간의 내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적백내전이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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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을 선동하는 트로츠키.

볼셰비키 당은 적위대로 임시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으나, 지휘관이 투표로 임명되던 오합지졸 적위대는 형편없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각지의 반란군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여기에 단독강화를 반대하는 영국-프랑스-일본과 같은 연합국뿐만 아니라 강화 후에는 독일과 같은 동맹국마저도 반혁명군을 지원하면서 볼셰비키 정권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이자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된 트로츠키는 이전까지 군대 경험은 전혀 없는 서생 혁명가에 불과했지만, 더 이상 반혁명세력에 밀리다가는 혁명이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적위대를 개편하여 붉은 군대(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로 재편하였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트로츠키의 군사(軍師)적 능력은 트로츠키 자신이 중무장한 정예병력보다는 대중을 무장시킨 민병대에 의한 게릴라식 전술을 더 선호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전략-전술에 대한 군사적 식견 자체에서 다른 혁명가들보다 더 나을것도 없었다.[17] 하지만 군문에 관한 트로츠키의 역량은 '정치인으로서의 군부, 특히 장교라는 전문가 집단을 통제하여 높은 효율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능력'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개혁의 핵심은 반동적이라고 여겨졌던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서 적위대의 지휘관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성향이 의심스러운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정치장교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몽상적인 주장에 대해 "닥쳐!" 라고 일갈하고 "전쟁은 검증된 전술을 써야 이긴다." 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이를 통해 1차대전 이후 실업자가 된 러시아군 장교들이 붉은 군대에 입대하였고, 붉은 군대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반혁명군에 참여할 수 있는 러시아군 장교들을 볼셰비키 측에 잡아두는 효과도 있었다. 트로츠키의 이런 단호한 태도는 1918년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에게 그가 하달한 명령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귀하들에게 경고한다. 만약 어떤 부대라도 허가 없이 전선을 이탈할 경우, 첫째. 부대의 정치장교는 처형될 것이다. 둘째. 지휘관도 처형될 것이다. 그리고 용맹한 병사들이 지휘관으로 임명될 것이다. 겁쟁이, 이기주의자, 반역자들은 총알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선동과 조직 부분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전략적 안목도 탁월했기 때문에 처음에 밀리던 볼셰비키는 결국 승기를 잡고 대부분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이 즈음에서 트로츠키는 권력과 영광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적백내전이 한창일 때, 새로 건국된 폴란드국가 막장 테크를 달리던 러시아[18]를 침공해왔다(소비에트-폴란드 전쟁).[19] 폴란드군은 붉은 군대의 반격으로 역관광당했고, 붉은 군대는 폴란드군을 추격하여 바르샤바까지 진격하였다. 바르샤바 침공을 지휘하던 투하쳅스키의 전략적 실수와 조국을 수호하려는 폴란드인들의 맹렬한 저항으로 폴란드군을 추격하던 붉은 군대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대패하면서 다시 재역관광을 당했고, 폴란드군은 다시 우크라이나까지 진격하였다. 소련은 다른 곳이 더 급했기 때문에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의 반을 떼어주고 급히 강화를 맺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남서부 정치장교이던 스탈린이 제때 병력을 보내지 않은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트로츠키의 억지로 당시 스탈린에게 책임이 없던 것은 아니나 그의 책임은 아주 작다고 봐야 한다. 자세한 것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문서 참조.

2.4.2. 내전 전후 경제정책[편집]

1917년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볼셰비키는 붕괴된 유통-공급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농촌을 극단적으로 쥐어짜는 정책을 실시했다. 총칼의 위협으로 농촌 수확물의 거의 대부분을 공출해 간 것이다. 이를 전시공산주의 체제라고 한다. 이때문에 도시민들은 대규모 아사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으나, 농촌에서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런 농촌의 반란을 가차없이 진압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밀어붙였다. 참고로 당시 러시아 농촌의 분위기는 "볼셰비키가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망할 놈의 공산당놈들이 와서 곡물을 빼앗아갔다"라는 식. 대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라 볼셰비키와 공산당이 같은 정치세력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자 1921년 2월, 이제는 농촌출신이 많은 혁명 지지세력(탈주병으로 구성된 병사 소비에트)조차 볼세비키에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발트 함대의 본부였던 크론슈타트 기지에서 벌어진 해군 수병의 반란은 볼셰비키 지도부를 대경실색하게 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예전부터 골수 볼셰비키 지지자로 간주되고 있었고,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것도 포템킨의 수병 반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위기감에 휩싸였고 이를 빨리 진압해야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트로츠키가 감독하고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한 진압군은 3월에 이 반란을 진압했으나, 어떤 학자는 이때문에 트로츠키가 이후 몰락 크리를 맞게 되는 등 제살을 잘라먹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봉기자들은 잠재적인 트로츠키 지지자였는데, 이들을 깡끄리 진압함으로써 자기 세력을 날려버린 상황이 되었다는 것.[20]

볼셰비키에 대한 반란에는 이렇게 가차없는 강경책을 펼쳤지만 레닌은 유화책도 병행했다. 이후 신경제정책 (네프, NEP)을 제안하여 통제경제를 완화하고 어느정도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레닌은 이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옹호했고,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이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런 경제 정책의 도입이 사회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레닌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며 이를 옹호하였다.

훗날 스탈린은 권력을 잡자 1928년부터 자신의 입장을 180도 수정하여 트로츠키처럼 "모든 생산물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배분"을 주장하게 된다. 이전에 트로츠키를 몽상주의자라고 깐건 도대체 왜그랬소? 이후 소련에서는 무자비한 산업화가 이루어진다.

2.4.3. 내전 이후의 권력투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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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에 승리한 후 붉은 광장에서 기념 행진을 하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트로츠키.

기본적으로 트로츠키는 정통 볼셰비키라기보다는 볼셰비키와 연합한 독립적인 분파 수장의 위치였다. "이스크라" 지상에서 혁명노선을 둘러싸고 펼쳐지던 키배에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줄리어스 마르토프등의 전설적인 혁명가들과 어깨를 겨루며 화려한 배틀력을 보여주던 트로츠키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레닌과 거의 동급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멘셰비키와 같은 거대 파벌은 아니었지만 독립적인 독자 파벌을 거느리고 있다고 보여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삼국지 관도대전시 원소 진영에 참여한 유비같은 존재였다.[21] 그러므로 수십 년간 레닌을 따르던 정통 볼셰비키 세력이 겨우 1년 남짓 볼셰비키에 참여한 트로츠키가 레닌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2]

결정적으로 트로츠키가 권력을 잡을 수 없었던 건 당내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서였다. 트로츠키는 군사 정책이나 경제 정책에서 국가를 다스리기보다는 혁명적 이념에 근거하여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자주 주장했고, 트로츠키의 의견을 받아들였던 몇몇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당 일반은 트로츠키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틈에 행정을 장악한 스탈린은 제정시대부터 내려오는 관료들을 포섭하여 점점 자신의 권력을 늘리면서 트로츠키를 고립시켰다.

또한 레닌은 스탈린을 당무를 총괄하는 서기장으로 임명했지만[23], 스탈린의 비정한 인간성을 알았을 때는 이미 스탈린이 당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후였다.[24]

원래 서기장은 형식상 당내에서 가장 높은 직위였으나, 실권은 별로 없는 자리였다.[25] 지금으로는 믿기 힘든 소리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스탈린은 러시아어도 어눌하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프레오브라젠스키, 부하린, 릐코프 등 볼셰비키를 지도하던 쟁쟁한 이론가들에 비하면 말빨이나 카리스마 등 모든 면에서 딸려 당 내에서 조금 어리숙한 친구 취급을 받았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트로츠키의 주된 라이벌은 모스크바 당 조직을 기반으로 둔 카메네프-지노비예프 커플이었다. 이 때 스탈린에게 서기국을 맡게 된 것은 저런 잘나신 볼셰비키 이론가들이 "우리 같이 머리 좋고 똑똑한 양반들이 서기국 같은 시시콜콜한 관료일이나 잡고 있을 수는 없지! 그러니 머리는 좀 딸려도 성실하고 사람 좋은 스탈린 동지에게 맡기자!"라는 식의 이유가 컸다.[26]

스탈린은 당시 잔인한 성격과 권력에 대한 의지를 감추고 그저 묵묵히 일만 했다. 많은 혁명가들에게 있어 스탈린은 과묵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 많고, 잘난 체하던 트로츠키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비쳤다. 특히 원래부터 불규칙하고 니트한 생활을 즐기던 혁명가들은 하루 종일 책상머리에 앉아서 문서와 씨름해야 하는 행정과 같은 관료적 사무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이고 별다른 야심이 없이 일만 할 것 같은 스탈린에게 이를 떠밀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자의반 타의반 계속 떠맡게 되면서 스탈린의 권력은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레닌은 1919년 뇌일혈로 병석에서 요양 중이었으며, 스탈린은 권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무력화된 볼셰비키 당은 트로츠키를 제외하면 고만고만한 혁명가들밖에 없었다.

트로츠키는 "젊은 독수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영웅주의적인 성격이 있엇으나, "고독한 늑대"이라는 다른 별명만큼이나 자신의 세력이 없었다. 이는 볼셰비키에 늦게 참여한 탓도 있고, 지나치게 "잘난 척하는" 그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27][28]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국방장관이라는 자리는 군권을 휘어잡은 자리였기 때문에,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트로츠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군사독재자가 되어 혁명을 퇴색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많았다. 그래서 여러 지도자급 인사들은 힘을 합쳐 트로츠키를 견제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에게 지도자급 동료는 거의 없었고, "반대 좌파(Left Opposition)"라는 분파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들은 주류가 아니었다.[29][30]

레닌은 뇌일혈을 못 이기고 결국 1924년 사망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당내의 차세대 투 톱으로 보았으나 그러면서도 유언장을 통해 둘 다 디스해버렸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스탈린 동지는 너무 성격이 급하고 잔인하다. 그를 서기장에서 해임하라." 고 써놨으나, 트로츠키에 대해서도 "그의 능력은 대단하기는 하지만, 너무 오만하고 잘난 체를 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디스했다. 이 밖에도 후계구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군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단점만을 써놨다. 이래서는 후계자 문제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위 내용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레닌의 유언장 내용을 분석하자면, 거론된 인물은 트로츠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의 5명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단점만 써 놓은 것은 아니다. 장점도 써 놓긴 했다. 특히,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의 3명에 대해서는 칭찬을 더 많이 했다. 다만, 칭찬을 실컷 한 뒤에, 레닌의 후계자로서 당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이유를 딱 하나씩만 제시했을 뿐이다.
예시: 부하린 동지는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다. 당 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인망이 높은 지도자는 없다. 이러저러한 점에서 정말 부하린 동지는 뛰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충실하지는 못하므로[31] 최고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에 비해 스탈린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디스와 악평으로 가득하며, 결국 명시적으로 "모든 책임있는 지위에서 해임해야 한다." 고 까지 이야기하고 있고,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당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만하고 독단적인 면이 강하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부분을 바로잡아줘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보면 후계구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서 트로츠키가 밀려났다는 대중의 오해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레닌의 유언장이 트로츠키를 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하고 있고, 다른 당원들에게는 그의 단점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견제하면서 도와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 다섯 명을 평가하면서 '최고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평을 받지 않은 인물이 딱 하나 있다면, 현실적으로 레닌이 그 인물을 후계자로 지지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레닌은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지목하되 트로츠키의 거만함을 경계하며 나머지 인물들이 그를 보좌하고 때에 따라선 비판, 견제해 주는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레닌의 진짜 실수는 가장 분명해야 할 사항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32],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을 때 위험인물로 찍은 스탈린을 최고권력에서 물러나게 하지 않은 것이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서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를 순수하게 관리하는 측면에 몰두하는 경향[33]이 있다.
-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34]
결국 정치국원들은 레닌의 유언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레닌이 자신들을 디스했다는 것을 대중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둘째로는 공개되면 스탈린이 사임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트로츠키에게 서기장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래서 레닌의 유언을 비공개로 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가 되어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정치국원이었지만 여기에 대해 침묵했는데, 결국 이것은 훗날 그에게 있어서 치명타가 되었다.

사실 정치국원들의 결정을 트로츠키의 언변으로 뒤집을 힘이 없던 건 아니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거나, 스탈린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35] 당시의 트로츠키의 행동들은 스탈린 정도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쫓아낼 수 있으며, 스탈린이 뭘 해봤자 자신을 능가할 수 있겠냐는 오만함이 철철 넘쳐난다. 만약 볼셰비키에 가담한지 얼마 안되는 자신이 지도자가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는 자기 세력을 불렸어야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지나치게 영웅주의적인데다가 오만해서 주위에 사람을 모으지 못했으며,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눌수 있는 정적을 얕잡아봤기 때문에 군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스탈린의 정치공세에 무력하게 당했다.

또 레닌이 사망했을 때 트로츠키는 지방 순방 중이었는데,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축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레닌의 장례식 일자를 일부러 잘못 알려주어 트로츠키의 불참을 유도한 후, 나중에 이것을 가지고 반레닌주의자로 몰았다. 이미 그 전부터 모든 군인, 관료, 정치인들이 스탈린의 편으로 접수된 이후여서 대세에는 큰 영향이 없긴 했지만, 트로츠키의 불참은 대중에게 트로츠키와 레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다.

결국 트로츠키가 행동을 취하지 않고 꾸물대는 사이 여기저기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등의 여러 인물들[36]에게 손을 뻗친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트로츠키를 조지려고 마각을 드러낸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하필 모스크바 근교에 오리 사냥 나갔다가 앓아누웠다. 몸져누운 트로츠키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우리는 혁명이나 전쟁을 예측할 수 있지만, 오리 사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회상했을 정도.

레닌의 사망후에도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겸 국방장관[37]으로서 군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이런 트로츠키에게 위협을 느낀 스탈린은 휘하의 꼬붕들을 동원해 트로츠키가 내전 시절 범한 과오를 들춰내게 했고, 이들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결국 군직에서 사임했다. 후임은 미하일 프룬제. 이로써 트로츠키는 마지막으로 손에 쥔 무기인 군권마저도 영원히 상실했다.[38]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지만[39] 교활한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킨 뒤 자신의 연속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40][41][42] 이런저런 조크에 가까운 우스운 핑계[43]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결국 트로츠키는 갈수록 위험한 입장으로 몰렸고, 빠르게, 그리고 잔인하게 권력기관을 접수한 스탈린의 패거리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는 걸 본 3인방이 후회하고 트로츠키를 지지해서 스탈린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이미 소비에트는 스탈린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과거에는 그 전설적인 선동과 연설, 웅변의 힘으로 군중을 휘어잡을 힘이 있던 트로츠키였지만, 이제는 그가 가서 스탈린을 반대하는 연설을 좀 하려고 하면 스탈린의 패거리들이 몰려와 야유를 퍼붓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형편이었다. 트로츠키는 궁지에 몰린 끝에 마침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아예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트로츠키에 거부감을 가진 것은 어디까지나 지도층일 뿐이었고 소련 성립 과정에서 트로츠키의 민중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유배 과정에서도 '트로츠키가 유배된다더라' -> '그거 헛소문이라더라' -> '트로츠키가 진짜 유배된다더라' 하는 식의 소문을 반복적으로 퍼뜨리는 과정을 통해 트로츠키가 유배된다는 빅 뉴스의 충격을 줄이려는 꼼수를 썼을 정도.

결국 트로츠키가 암살되기 한참 전에 지노비예프, 부하린, 카메네프 등의 3인방은 잘못된 인간을 지지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러야만 했고, 트로츠키와 약간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찍혀나가기 시작했다. 거만한 트로츠키를 밀어줬다간 그가 황제 같은 절대권력자로 등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겸손하고 분쟁 조정능력이 탁월한 중재자라고 인식되던 스탈린을 밀었지만, 스탈린이 조정한 것은 갈등이나 분쟁이 아니라 그들의 수명이었다.

2.4.4. 일국사회주의론 VS 연속혁명론[편집]

기대를 모았던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멀어진 1920년대 중반, 소련 지도층은 국가 운영방향을 놓고 두 패로 갈라졌다.

첫 번째로 스탈린 등이 제창한 일국사회주의론[44]이 있었다. 이는 서유럽의 혁명에 관계없이 소련의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면,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갈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므로 소련 공산당은 다른 나라의 혁명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소련의 발전에 중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념보다는 빵을 원하는 러시아인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특히 제정 시절부터 내려오던 관료집단과 군 고급장교들의 성향에도 잘 맞았다. 이는 러시아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러시아 국수주의라고도 볼 수 있었다.

반면 트로츠키는 일국사회주의론과 대비되는 '영구혁명론' 혹은 '연속혁명론'을 주장했다.[45] 이는 러시아 홀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가 없으므로, 공산당의 정책은 서유럽의 혁명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유럽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관점은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적 성격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으로 트로츠키가 혼자 만들고 주장한 독특한 것은 아니다.

레닌의 사상에는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일국사회주의론과 국제주의적인 연속혁명론 두 가지 성격이 모두 있었는데,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그 중 하나만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소련이 나아갈 길을 두고 다툰 것이었다.

이 항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소련이 처한 상황에서 일국사회주의론과 연속혁명론의 입장 차이를 간단히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국제혁명론, 즉 소련을 근거지로 삼아 전 세계를 공산화시켜야(또는 "해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은 양측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경한 일국사회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국제혁명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46] 무엇보다도, 기존의 국민국가가 해체되고 국경을 넘은 공산주의적 공동체가 이를 대체할 것이라고 보았던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
  • 이러한 전제 하에서, 일국사회주의론의 입장은 적백내전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다른 나라에 혁명의 영향력을 전파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일단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써 내실을 다진 후에 국제혁명, 즉 연속혁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당시 소련이 처해있던 총체적, 특히 경제적 난국과 기대에 훨씬 못 미친 서유럽 혁명의 성과를 비추어 볼 때 현실적으로 소련에게 혁명을 수출할 역량이 없었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가진다. (이는 냉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 물론 연속혁명론 역시 나름의 정당성은 있다. 연속혁명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존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두 체제는 본질적으로 서로를 부정하고, 따라서 두 체제는 상시적으로 갈등과 분쟁을 벌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즉, 전쟁에서 아군이 승리해서 적군을 밀어내거나, 아니면 패전해서 밀려나는 것이 가능할 뿐이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당장 적백내전 당시부터 열강들은 소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소련 내 반정부세력을 후원했으며,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크게 확장한 후에는 냉전의 형태로 대립했으니 공존 불가의 측면에선 연속혁명론도 일리는 있다. 다만 이후로 냉전이 완화되었고 소련이 국제연합 상임이사국으로 세계의 일원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미소 양국이 서로 무역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 흥미로운 점은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세워 전쟁에 지친 대중의 지지를 얻어냈지만, 정작 집권 이후 스탈린이 추진한 중공업 우선주의는 오히려 연속혁명론의 경제정책에 가깝다는 것이다.[47] 일국사회주의론이 중시한 경제모델은 농업과 경공업을 중심으로 당장 대중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었고, 중공업은 과시성이 강한 특성상 연속혁명론 지지자들이 선호하는 분야였다. 중공업 투자가 없이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독일의 침공을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본다면, 능동적인 세력 과시가 없다면 소련은 주변국가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연속혁명론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 다만, 연속혁명론은 거시성을 제외하고는 현실과 애시당초 거리가 멀었다. 당장 자본주의도 거치지 않은 봉건제를 갓 벗어난 러시아에서 사람들이 춥고 배고파서 못 견디겠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은 현실이었다. 살기 힘들어 죽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이제부터 전 세계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를 가져다 주자!' 라면서 또 싸우자고 외치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다(...) 게다가 1차대전 종료 후 서유럽 국가들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무산된 이상, 중공업화나 세력 과시를 위한 자원을 내부 착취 이외의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결국 연속혁명론이란 "공산주의 국가란 전세계적인 혁명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라는 논지로, 소련은 80여년 만에 스스로 멸망함으로서(...) 이 논지를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본격 논지가 자기파괴 물론 1920년대의 정세로 봤을 때,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연속혁명을 계속 고집했더라면 러시아 혁명이 내부의 스탈린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분쇄되고, 소련이라는 국가 자체가 더 일찍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혁명관이 다르기 때문에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국내-국제정책 모두 번번히 의견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다수파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소련의 정치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에게 트로츠키를 체포해서 처형하자고 말했으나 이때의 스탈린은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결국 동지의 처형으로 이어졌음을 상기하며 "오늘 한 명의 동지의 목을 치면, 내일 다시 한 명을 쳐야 하고,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러면 몇 명의 동지가 남아있을 수 있을까?" 라고 말했다. 이때만 해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처형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대숙청 일으킬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왠지 위화감이 드는 건 기분 탓.

스탈린은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질투하는 볼셰비키의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이후 트로츠키가 실권을 잃어버리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버리고 부하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그리고 카메네프는 결국 1927년 당에서 추방되었고, 트로츠키 추종자들도 추방되었다. 이후 많은 트로츠키 추종자들은 자신의 과오를 자아비판하고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겨우 복당되었다.[48]

여기서 좀더 첨언해야 할 것은, 스탈린이 음흉한 술수로 당을 장악해 트로츠키파를 추방한 것은 맞지만, 트로츠키가 단순히 순진한 피해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당시 트로츠키는 인격적 문제로 당내 인망이 별로 없었고[49], 레닌을 1800년대 말부터 따라온 대부분의 볼셰비키당 중앙위원들은 트로츠키를 문자 그대로 "증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실각한 근본적인 이유는 단순히 스탈린의 권모술수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 인민들의 국가적 요구에 스탈린이 더 맞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이념보다 빵과 평화를 원하는 당시 러시아인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당초 10월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내건 구호가 "즉각평화"였고, 독일측에 유럽러시아의 반을 내주는 사실상의 "항복문서"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조인하는 무리수를 둔 것도 바로 "즉각적인 평화"를 바라는 러시아인의 의도를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50] 일단 "네이밍"에서 실수를 했는데, "영구혁명"이라는 말은 당시 1차대전과 내전으로 수천만이 죽어나간 러시아에서 다시 전세계 노동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전쟁에 염증을 느낀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외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20년대 중반이후의 소련은 서방각국 열강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정상국가로 되돌아오고 있었는데, 만약에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국가적 모토가 되어 혁명수출을 계속했다면 소련은 열강들의 공적이 되어 패망을 자초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테러리스트를 적극 지원했다가 미군 주도의 서방연합국에 붕괴된 아프가니스탄탈레반 정권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51] 이런 점에서 트로츠키가 러시아 국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인 일반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는 점은 자명했다.

트로츠키가 권력으로부터 거의 밀려났을 때, 아직 트로츠키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던 붉은 군대의 추종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스탈린 일당을 몰아내자고 제의했다.[52]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를 거부했는데, 말로는 "나는 폭력에 호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10월 혁명은 폭력 아닌감?고 했지만, 실제로는 트로츠키의 소심함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오만하고 영웅주의적이면서도 소심한 것은 트로츠키가 가진 모순적인 양면성이었다. 이것이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53]

2.5. 몰락[편집]

2.5.1. 제2의 망명생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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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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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정면사진. 초로 시절
샌더스 대령 콜라에 얼음은 안넣어드립니다

결국 1929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소련에서 추방하였고, 터키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는 소련의 눈치를 봐서 트로츠키를 받아주었다. 스탈린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트로츠키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지만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무기인 남겨진 펜을 가지고 스탈린을 디스하는 글을 써대기 시작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비판하며 만드는 잡지인 <반대파 통신>은 비밀리에 소련에 배포되어 많은 공산당원들이 읽었으며, 심지어는 스탈린조차도 계속 이것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동지들이 터키로 와서 트로츠키를 만났고,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감소하지 않았다.[54] 이에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만나고 온 체카 요원인 블룸킨을 처형하는 것으로 트로츠키와 접촉할 만한 당원들에게 경고를 했다.

이후 프랑스에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프랑스로 옮겨가려고 했으나 이것은 좌절되고 1935년 노르웨이로 망명지를 옮겼다. 1937년 노르웨이 정부는 트로츠키를 추방했고, 트로츠키는 보다 안전한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런 "거물 빨갱이"의 망명 허가를 거부했고, 할 수 없이 유일하게 망명을 받아주는 멕시코로 발길을 돌렸다. 이 망명은 멕시코의 유명 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주선해준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망명 후 디에고 리베라와 그 아내인 프리다 칼로와 친하게 지냈고, 특히 도시전설에 의하면 프리다와 트로츠키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디에고 앞에서 영어로 애정어린 대화를 하기까지 했다고 할 정도로 로맨틱한 관계였다고 한다.

단, 이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의 연애설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디에고 리베라의 바람을 계속 용서하던 프리다 칼로였지만, 자신의 친동생에게까지 손을 대자 그에 대한 반동으로 트로츠키와 사귀게 되었다'는 것은 2002년작 영화 <프리다>의 내용이고, 이 사건이 영화의 극적 연출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근거가 제시된 바 없다(정확한 근거 제시나 사실확인 요망). 프리다 칼로와 트로츠키 모두 여러 편의 전기가 제작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인데, 정작 이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자료에서는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라는 주장이 제시된 바 없는 것이다(찾으신 분 있으면 수정 요망).
특히 이 부분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이 소문이 퍼진 형태인데, 영화 <프리다>의 내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 이 소문이 처음 퍼진 형태는 '트로츠키가 자기 동지인 화가의 부인과 바람이 났었다'는 것이었다가 트로츠키의 동지였던 화가가 디에고 리베라라는 지적이 있은 후에 '트로츠키가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과 바람이 났었다'는 것으로 변하고,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 프리다 칼로라는 지적을 받음으로써 최종적으로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가 바람이 났었다'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점에서 현 시대에는 디에고 리베라보다 프리다 칼로의 지명도가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이 '디에고 리베라의 부인'이라는 형태로 퍼진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차라리 1930년대 당시라면 디에고 리베라의 지명도가 더 높았으니 이런 식의 소문이 퍼질 수 있었겠지만, 이 소문이 퍼진 시기를 생각하면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 대립하는 국제 트로츠키주의자 연합인 제4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이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황을 자처하는 스탈린의 심기를 매우 건드렸다. 이 제4인터내셔날의 포스터는 디에고 리베라가 그렸다.

그러나 디에고 리베라와 멕시코 혁명에 관한 견해 차이로 결별하고, 트로츠키는 리베라가 마련해준 거처를 떠났다.

2.5.2. 대숙청[편집]

한편 트로츠키가 떠난 소련에서는 1930년대 중반부터 대숙청이 벌어졌다. 이는 사실 스탈린이 추진한 무리한 중공업화의 후유증이 엄청나자[55], 스탈린은 이를 책임을 회피하려고 이 모든 것을 트로츠키파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우면서 벌어진 것이다. 스탈린은 모든 트로츠키의 좋은 정책, 특히 소비에트를 부농 중심의 농업국가에서 노동자 중심의 산업국가로 이행시키기 위한 중공업 정책을 흡수해서 아주 잔인한 그의 스타일로 밀어붙였고 그에 거슬리는 요소는 마구 쳐냈다.[56]

직접적인 계기는 레닌그라드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면서 비롯되었다. 키로프는 당의 차세대 주자로 각광을 받고 있었는데, 석연찮은 정황에 의해 암살되었고[57], 스탈린은 이 암살의 배후에 "파시스트 및 트로츠키 추종자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광범위한 체포가 뒤따른 것이다. 이렇게 잡힌 "암살의 배후"들은 간단히 "트로츠키주의 테러분자"로 기소되었다. 실제로는 이것은 마구잡이 체포였으나, 단순한 지각이나 실수조차도 "트로츠키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혐의가 돌아갔다.

사보타지나 테러 모의 혐의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스탈린에 반대한 경력이 있거나 혹은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인물들이었다. 스탈린에 반대했던 경력이 있는 자는 물론, 한때 트로츠키파였으나 후에 자아비판을 하고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맹세를 한 자들도 예외없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체포 후 심한 고문을 받고 거짓 자술서에 서명을 했고, 공개재판정에서 "저는 트로츠키의 명령을 받고 소련에 반역행위를 했습니다." 라고 자백했다. 고위급은 거의 예외없이 사형 선고가 내려져서 그날로 처형되었고, 하급직들은 운이 좋으면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1920년대 스탈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켰던 지노비예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트로츠키파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고, 처형 직전에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러시아에 남아 있던 트로츠키의 첫 번째 처 알렉산드라와 자식마저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첫번째 처는 트로츠키와 이혼한지 2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번째 처의 큰 아들 네프는 파리에서 암살, 둘째 아들 세르게이는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물론 둘째 처의 첫 아들은 파리에서 열심히 아버지의 활동을 지원한 것 때문에 암살당했지만 둘째 아들은 러시아 모스크바 공대에서 공학 교수를 하며 정치적으로는 인연이 없었는데도 공장 노동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신빙성 제로에 가까운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는 공산국가에서 악당의 대명사가 되었다.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국가전복 기도혐의와 나치 독일의 스파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측에서는 존 듀이[58]를 위원장으로 한 사문위원회를 위촉해 독립적인 조사를 부탁했고, 이 위원회는 조사 끝에 모스크바 재판의 트로츠키에 관한 혐의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그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간위원회일 뿐이었다.

2.5.3. 암살[편집]

망명지에서 여러 번 트로츠키에 대한 암살이나 테러 음모가 있었으나, 트로츠키는 여러번 죽을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았다.

마지막에는 멕시코에서 철통같이 방비한 자택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모면했지만, 결국 1940년 8월 19일,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가 찾아왔다. 메르카데르는 스페인인으로 NKVD에 포섭되어 트로츠키 암살의 특명을 받았다. 그는 트로츠키의 여비서이자 신봉자인 실비아 엥겔로프 (Sylvia Ageloff/1910~1995)에게 캐나다 출신인 프랭크 잭슨이란 가명으로 위장해서 먼저 접근해 1년 넘게 그녀와 사귀었으며 결국 애인이 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렇게 트로츠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를 자객이라고는 생각 못 한 트로츠키는 그날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메르카데르는 준비해 둔 등산용 피켈[59]로 뒤에서 머리를 찍었다. 트로츠키는 비명을 질렀고 다른 방에 있던 비서들이 메르카데르를 체포했다. 트로츠키는 머리를 가격당한 직후 얼마간 의식이 있었으나 곧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튿날 사망했다.[60]

스탈린은 그의 죽음을 두고 '난 몰라~' 하며 부정하고 모른 체했다. 그러나 메르카데르의 어머니에게 "훌륭한 어머니"라고 직접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메르카데르는 잡혀서 심문을 받았는데, 자신이 트로츠키와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죽였다고만 말할 뿐, 죽을 때까지 스탈린이나 소련과 연관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20년형을 언도받았기에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지 못 하고 스탈린이 죽고 나서인 1960년에 석방되면서 받게 되었다. 라몬은 석방된 다음 소련으로 건너갔는데, 스탈린을 디스했던 니키타 흐루쇼프조차 트로츠키는 "악당"이라고 생각했는지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내리고 거액의 포상금을 내렸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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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데르 늘그막 사진.

결국 메르카데르는 훈장도 받고 연금도 받으면서 늘그막을 평온하게 살다가 1978년 삶을 마감했다. 한편, 이전 항목에서는 비서 실비아가 존경하는 트로츠키를 죽게 한 것이 자기 탓이라고 하여 음독자살했다고 나왔으나 사실 그녀는 1995년까지 천수를 누렸다.

3. 유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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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2월 27일, 죽음을 직감했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남겼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62]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온 트로츠키

4.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후예[편집]

한국에서는 운동권 조직 노동자연대(구 다함께)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쪽은 절대 본인들을 트로츠키주의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로츠키의 구 소련 사회에 대한 관점을 갖다가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트로츠키의 공과를 확실히 구분하는 편. 본인들을 정체화하기로는 그냥 마르크스주의라 그러고, 굳이 무슨무슨 분파에 드느냐고 묻는다면, 이쪽은 '토니 클리프주의'라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운동권 주류인 민족해방파(NL)나, 민중민주파(PD)에 끼지 못하는 비주류다.[63] 이들은 2000년대 이전에는 국제사회주의자들(IS: International Socialists)라고 불렸다. [64]

오히려 진짜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쪽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추구하면서 트로츠키의 입장을 거의 교조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따르는 볼셰비키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쪽만큼 교조적이지는 않지만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현장 투쟁 위원회(노건투)도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한다. 다만 얘네는 조직이 노동자연대만큼 크지가 않고, 집회장에서 눈에 띄게 활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는 매우 낮다. 운동판에서 좀 굴러 본 사람 아니면 존재 자체를 모를 것이다. 정통 트로츠키주의도 아니고, 본인들을 트로츠키주의라 정체화하지도 않는 IST 조직이 대중들에게 트로츠키주의로 오해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에서 정통 트로츠키주의의 입지가 약하다는 것을 뜻한다.[65]

이러한 이유로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볼셰비키 그룹은 다함께-노동자연대가 트로츠키주의를 표방[66]하는 걸 갖다가 가루가 되도록 깐다. 트로츠키 사상의 양대산맥은 '미완성 상태에서 이상하게 변질되어 버린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그 변질의 주범이자 사회주의적 생산 양식에 기생하는 기생충과도 같은 관료집단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 혁명을 지지하는 것'인데,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을 방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짝퉁(...)이자 트로츠키주의의 아류(...)라 할 수 있는 IST 노선이 유독 남한에서는 이렇게 원조 트로츠키주의를 몰아내고 트로츠키주의의 대표주자 행세를 하고 있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북조선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형성된 냉전 반공주의의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IST가 IBT보다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전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후자의 경우 IST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90년이었는데, IBT는 먼저 들어온 IST가 한참 신문도 발행하고 학습 모임도 열고 그러다가 국가보안법 탄압에 직면해서 최일붕 씨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던 시점인 1995년에야 들어왔다. 이는 마치 한국에 인스턴트 커피가 먼저 들어오는 바람에 나중에 들어온 드립 커피아메리카노를 갖다가 커피를 커피라 하지 못하고 '원두' 커피라 부르게 된 상황과 유사하다(...)

사회변혁노동자당도 트로츠키주의를 추구하는 당원들이 일부 섞여 있다. 여기는 온건한 트로츠키주의+유로코뮤니즘+온건한 스탈린주의의 연합체이다. 애초에 출범 과정부터 다양한 단위들의 연합체로서 시작되었고...

국제적인 조직으로는 IS 이외에 제4인터내셔널 재건을 추구하는 IBT가 있다.[67] 한국에서는 기존 좌파세력 [68]들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혐오가 그다지 없는 편이라서 저명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주류 운동권(PD 세력)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강연 오기도 했다.[69] 좌익세력의 연합체인 독일의 좌파당 (Die Linke)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참여하려고 했으나 주류 사회주의자들이 그들의 참여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구 좌익세력 중에서도 주류는 아니지만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좀 된다.

종종 트로츠키주의자를 극소수라거나,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트로츠키주의자들 자신의 피해의식이거나, 아니면 오해다. 실질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세력 규모는 주류 중 가장 비주류, 또는 비주류 중 가장 주류 정도는 된다. 세계 각지에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결사가 있고, 이들의 국제연대조직까지 있는 세력을 극소수 비주류라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정통 사회주의자들과 극히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옛날 이야기다. 일단 트로츠키주의와 불구대천의 원수인 스탈린주의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상태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싫어할 만한 정통 사회주의자의 정체성 자체가 모호하다(...). 지금 각 국의 공산주의 당이나 사회주의 당[70]이 트로츠키주의 당과 사이가 나쁜 것은 솔직히 말하면 그냥 딴 당 차리고 있으니까 습관적으로 싸우는 것에 가깝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소련의 주도권이 살아있던 당시의 서슬 퍼런 증오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정통 사회주의의 정체성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승에서 찾는다면 오히려 트로츠키주의가 정통 사회주의의 계승자가 되고, 탈 레닌주의화된 각국 공산당, 사회당들[71]이 캐주얼(...) 사회주의 당이 되는 수도 있다.

정통 사회주의자들은 트로츠키주의를 "극좌모험주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것은 사이비 혹은 프락치의 딱지였다. 중국-소련 간에 사이가 나빠지자, 니키타 흐루쇼프마오쩌둥이 서로를 "저 새끼 트로츠키주의자임!"이라고 비난한 건 유명한 일화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첨언하자면 공산주의/사회주의 정당이 야당인 서구권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개념은 확실히 '극좌모험주의'의 의미로 쓰이는데, 이는 공산당이나 사회당이 제도권 정치에 편입된 서유럽이나 일본등에서 트로츠키를 표방하는 정당들이 주로 탈 제도권적인 극좌노선을 표방했기 때문이다.

반면, 공산당에 의한 일당독재가 이뤄진 구 동구권 국가들에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사실 이념이나 정치노선과는 별로 상관없는 범용 욕설이다.[72] 내부의 적, 프락치, 배신자, 사이비 등 모두 통틀어서, 그냥 무지무지 나쁘고 싫어서 때려죽이고 싶은 놈인데 파시스트!부르주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상대는 트로츠키스트! 라고 부르면 되는 거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전자는 대놓고 다른 진영을 욕할 때, 후자는 같은 좌파를 팀킬할 때 쓰는 단어라 생각하면 되겠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상대를 '이 개X끼야!' 라고 부르는 것이 정치 사상과 별로 상관없는 것과 비슷하다는 이야기. 거의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욕먹는 인물이 되었다. 이게 다 트로츠키 때문이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놓고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논쟁했다. 잘못한 것은 누구인가?
1. 흐루쇼프
2. 마오쩌둥
3. 집에서 잠자던 트로츠키

이 정도는 그나마 양반이고, 더 심하면 이렇다.

공장 노동자 보리스는 지각이 잦고, 농민 표트르의 집에서 기르는 암닭은 알을 별로 낳지 못한다. 이유는 무엇인가?
1. 보리스와 표트르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노오력이 부족하다
2. 보리스가 출근할 때 타는 버스는 30분에 한 대 밖에 오지 않고, 표트르의 닭은 알을 많이 낳는 품종이 아니다. 즉, 인푸라의 부족 떄문이다.
3. 소련을 붕괴시키려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음모 떄문이다!
일본을 공격한다

하지만 스탈린주의가 거의 찌그러져 버리다시피 한 한국에서는 노정협이나 노사과연에서 차분하게 노동자연대/볼셰비키 그룹/노건투/변혁당 일부 등등 범 트로츠키주의 단위들의 입장을 비판하는 정도이다. 중요한 떡밥이 투하되거나 정세상 중요한 터닝포인트다 싶을 때면 트로츠키주의고 스탈린주의고 따질 것 없이 연합으로 노동자 집회를 주관하는 경우도 있다. 트로츠키주의자와 스탈린주의자가 같이 마르크스주의 학습 모임을 갖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한국에서 트로츠키주의를 갖다가 심하게 까는 쪽은 메갈이나 워마드 따위 사이비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신좌파 계열과, 그따위 쓰레기 사상을 갖다가 마르크스주의에 혼합을 시키고자 하는 신마르크스주의 계열[73] 이 대부분이다. 그 결과 신좌파 계열과 범 트로츠키주의 계열 운동권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충공깽하게도 미국극우네오콘들의 상당수가 1960-70년대의 트로츠키주의 운동권 출신이다. 이들의 공격적 성향은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미국국수주의로 번안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5. 현대의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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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사람은 드레퓌스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이다. 왜 드레퓌스를 트로츠키와 합성?

트로츠키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혁명의 영웅'과 '빨갱이 악마'로 갈린 것처럼, 현대의 평가 역시 두 갈래로 크게 갈려 논란중에 있다.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트로츠키를 둡체크티토 등과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으로 내세우지만,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반공주의자들은 스탈린이라는 악마와 싸우다 죽었기에 비판에서 벗어난 또 다른 악마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아이작 도이처는 3부작 전기 "무장한 예언자", "무장해제된 예언자", "추방된 예언자"를 저술해 '잔인한 스탈린에게 쫓겨난 착한 사회주의자'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이는 이후 서구 좌파의 트로츠키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로버트 서비스의 전기(한국에도 나와 있다)는 트로츠키를 그저 권력을 잡지 못한 또다른 스탈린 쯤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트로츠키주의자가 서비스의 전기에 항의했고, 반박서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 소책자를 국내에서도 번역하여 노동자연대에서 출판했다. 제목은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스탈린이 10월 혁명을 배반하고 과거 레닌주의와 단절하였다는 60년대의 수정주의는[74] 이미 80년대 아치 게티, 피츠패트릭 등의 2세대 수정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미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고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계승자, 트로츠키의 본질 역시 스탈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기존 인식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연구는 활발히 나오고 있다. 서비스의 성향을 운운하며 공화당 측의 후버 연구소 소속이라 의심스럽다는 지적도 있지만 실증적인 사료 선택, 분석 관련 비판이 아니라 우익이라 못 믿겠다는 인신공격류의 비난은 귀담아 들을 것이 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세간의 평가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 역시 상당히 흥미롭다. 소련 내부의 강압적 실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극소수의 고립된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하면 트로츠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련의 실상이 조금씩 드러날수록 트로츠키에 대한 관심도 늘어가고, 바르샤바 조약군의 프라하 침공에 반발한 서유럽의 좌파 대학생들이 대거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하면서 소련과 스탈린주의의 대안으로써의 트로츠키주의,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인 트로츠키주의가 탄생하였고[75], 이후 정치세력화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도화된 기존의 공산주의/사회주의 정당과는 차별화된 나름의 노선을 걸어왔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이전까지 스탈린주의의 반대항으로써 받아들여지던 트로츠키주의가 오히려 스탈린주의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좌파 중에서도 생겨나고 있지만 우파들 중에서도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주적을 찾으려는 시도의 결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소련 붕괴의 영향으로 근본적 사회 변화를 고민하는 사람들 중 트로츠키주의자가 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니 소련 붕괴 이후 각국의 제대로 된 레닌주의 정파들은 전부 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차지했다. 공산당 이름을 달고 있는 정당들은 개혁주의 정당으로 우경화했고, 스탈린주의를 추구하는 정파들은 남한의 노동자 정치 협의회나 노동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보듯이 스탈린주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매니아층 정도다.

6. 대표 저작[편집]

7. 이야기거리[편집]

유대인이지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의식은 눈꼽만큼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트로츠키는 민족주의를 경계했고, 공산주의 사회가 완성되면 민족주의 역시 자연스레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볼셰비키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자치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자, 그들을 맹렬하게 까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을 데꿀멍하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대부분 코셔 식단을 따르는데, 트로츠키는 러시아식 돼지고기 햄을 즐겨 먹었으며, 새우하고 게도 먹는 등[76] 정말로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 같다. 트로츠키의 부모님부터가 딱히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으며, 집에서 종교적인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부유한 농부였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고 현실세계에 눈 뜨게 되었다고 한다. [77] 어쨌든 부유한 환경 덕분에 트로츠키는 먼 곳에서 유학을 할 수도 있었고 대학교를 갈 수도 있었다. 1905년 망명 이후 미국에서 꽤나 오랫동안 있었기에,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러시아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 동네에 머무는 것으로 설정되기도 한다.

트로츠키의 학생 시절, 마침 공산주의자가 된 트로츠키가 집안에서 불온한 발언을 하자 자식의 장래가 걱정된 아버지는 "이 나라는 앞으로 천년은 더 갈거다." 그러니까 공부해서 취직할 준비나 해라 라고 경고하듯 말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혁명에 성공한 후, 다시 아버지를 만난 트로츠키가 "아버지는 차르의 러시아가 천년은 갈 거라고 하셨죠?" 라고 놀리듯이 말하자 아버지는 웃으며 "그럼 이젠 새로 세운 나라가 그만큼 오래가도록 하려무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트로츠키의 영원한 반대항인 스탈린에게도 비슷하지만 정반대인 일화가 있다는 점이다.
어린 스탈린은 초등교육을 받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신부가 되길 원했다. 스탈린은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 그루지야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었는데 정치에 대해 잘 모르던 그녀는 스탈린에게 "너 요즘 뭐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어머니! 차르 아시죠? 전 차르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탈린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그래? 유감이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는게 어떠니?"라고 말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스탈린의 어머니가 세속적인 정치권력보다 종교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면, 그 또한 존경받을만한 삶의 태도겠지만, 혁명가이자 정치가로써 살기로 결심한 자식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트로츠키의 아버지가 스탈린의 어머니보다 훨씬 더 자식을 잘 이해했던 셈이다. 두 일화가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듯 중세적인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스탈린에 비해 트로츠키는 근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이었다.

트로츠키는 젊을 적에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대학생 시절에 정치 모임에서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라며 깠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 공산주의자 하기로 했음!"이라고 선언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맹렬하게 공산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뒤통수 치기 돋네 그와 비슷하게 역시 공산주의자로서도 레닌을 초기에만 지지하다가 이후 결별하고 강력한 멘셰비키의 옹호자였으나, 1917년 갑자기 돌변해 레닌의 철두철미한 지지자가 된다(...). 그래서 별명이 "레닌의 곤봉". 1905년에 레닌을 만난 곳도 러시아가 아닌 망명지인 런던. 말 그대로 세계를 누빈 사람이다.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직후, 학생 신분으로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노동자와 학생으로 구성된 소규모 비밀결사를 만들어 지도자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이 때 사용했던 가명은 '리보프'. 주 활동은 서유럽에서 들여온 사회주의 관련 소책자들을 번역하여 돌려읽거나, 주변의 친구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조직원으로 포섭하는 것이었고, 공공 도서관의 이용요금 인상 반대운동처럼 유익한 활동도 했다고 한다. 결국 차르의 정치경찰에 검거되기는 했는데 경찰 쪽에서는 이 조직의 활동내역을 포착하고서도 고작 학생 주제에 결사를 만들어서 운영한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배후에 분명히 거물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그 거물을 찾아내기 위해 한동안 내버려뒀다고... 결국 이 사건으로 잠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권을 잡은 후 리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동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과거 함께 활동하던 시절에 중년 노동자였던 이 동지는 트로츠키와 다시 만난 1920년 무렵에는 노인이 되어 있었지만, 비밀결사가 해산되고 트로츠키와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열성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해왔고, 혁명기에도 상당한 활동을 해서 공산당원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제는, 이 양반이 젊은 시절의 벗 리보프 동지도 기억하고,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 동지도 존경하고 있었지만 둘이 동일인물인줄은 몰랐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이 이야기를 남긴 후 "그리고 그 동지는 나중에 트로츠키가 반혁명분자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라고 뒷맛 씁쓸한 농담을 남겼다.

말싸움에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공격적인 논객이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토론은 커녕 러시아어도 서투른 수준이었지만,[78] 트로츠키는 공격적이고 논리적인 어조로 상대방을 자주 데꿀멍시켰다. 그 똑똑한 레닌도 트로츠키의 공격에 어버버하며 당황한 적이 있을 정도. 1905년 파업 때는 자기가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못 배운 노동자들도 쉬운 말로 선동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집이 엄청나게 세서, 한번 확신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집어린 성격은 훗날 트로츠키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잃은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애초에 레닌도 트로츠키의 이런 점을 굉장히 문제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 눈에 트로츠키는 아마도 '매우 똑똑하지만 지나치게 오만해서 더 재수없는 놈' 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그나마 존경을 표시한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레닌이라는 점이 함정.

다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데 크게 거리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군사최고인민위원(국방장관)으로써 트로츠키는 '전쟁은 군사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는 입장을 확고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이유가, 히틀러의 경우 다행스럽게도 몰락할 때 까지 군사작전에 끊임없이 집적거리면서 전쟁을 말아먹었고, 스탈린도 2차대전 초반에 몇번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는데 비해 트로츠키는 적백내전 시기부터 특별히 사고치지 않고도 군사작전은 전문 지휘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역시 똑똑한 놈인 건 확실하다 그 대신, 적백내전기에 트로츠키가 담당한 역할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전선들 돌아다니면서 군대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일종의 최선임 정치장교[79]였다. 장갑열차를 타고 수천킬로미터에 걸쳐 뻗은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각 부대에 들려 연설하고, 기차에서 직접 신문을 제작해서 부대마다 배포하고 다녔다고. 사실 이것도 장관급 요인이 전선에 너무 접근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솔선수범으로써 당시 붉은 군대 내에서는 평판이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80]

그가 권력을 잃은 후부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수정주의자, 반동주의자를 의미하는 가장 심한 욕이자 한번 얻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등 과거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되는 과정에서도 트로츠키는 결국 복권되지 못하였으며 소련과 별로 인연이 없던 중국이나 북한 등에서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심한 욕설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잘 묘사되어 있다.

8. 대중문화[편집]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돼지 스노볼(snowball)에 비유되며, 같은 작가의 작품인 1984에서는 작중의 배경인 가공의 나라 오세아니아의 배반자 골드슈타인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81]

미국의 소설가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Joe Steele>에서는 트로츠키가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중에서 트로츠키그라드 전투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루지야의 인간백정미합중국대통령이 되었다는 것![82] 본격 염소 수염 서기장 동무 VS 강철 대통령 각하

만화 스머프가 공산주의 사회를 묘사했다는 음모론에 따르면, "똘똘이 스머프"의 모델이 트로츠키라고 한다. 굉장히 똑똑하기는 하지만 심하게 잘난 체를 하다가 왕따가 되는데 바로 이 모델이 트로츠키. 이 음모론에 따르면 스탈린의 모델은 투덜 스머프라고 한다. 파파 스머프가 마르크스라는 이야기도 있고...

어쌔신 크리드 크로니클즈 러시아 편에서는 블라디미르 레닌처럼 암살단원 니콜라이 오렐로프와 뜻을 함께한 동지였다고 나오나(암살단원은 아님) 아나스타시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를 인민의 적이니 처단한답시고 니콜라이와 아나스타샤를 템플 기사단에게 밀고하는 통수를 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만화인 무지갯빛 트로츠키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트로츠키는 주변인물이다.


[1] 사진은 권위있는 트로츠키 연구서로 꼽히는 아이작 도이처의 '예언자' 3부작 중 마지막인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의 영문판 표지이다[2]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례프 데비도비치 뜨로츠키 (레프의 영어식 이름을 따와 Leon Trotsky라고도 불린다)[3] Prophet armed, 트로츠키에 관한 저서, 관련작품 중에서 지금까지도 최고로 추앙 받는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에서 그를 표현한 문구이다. 의미심장하게도 트로츠키가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망명 시절을 두고는 "무장해제 당한 예언가 (Prophet disarmed)라고 표현했다".[4] 둘 다 정치적인 부분 말고도 철학적인 부분에서 조예가 깊었다. 또한, 초대 건국자(이성계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이은 사실상 2인자로서 건국을 주도한 점. 그리고 그 나라의 시스템을 건설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점. 건국 이후 종사한 영역이 주로 군 관련 계통이었다는 점. 지나치게 과격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적을 많이 만들었고, 종국에는 그로 인해 후계자(이방원과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밀려나 비명횡사한 점. 자신의 조국(조선과 소련)이 존속한 기간 거의 내내 그 존재가 부정되다시피 한 점 등 공통점이 많다. 존재는 부정되었지만, 여러모로 그 흔적을 부정당한 체제에 남긴 것도 유사하다.[5] 1990년 초반만 해도 여러 학습용 서적(금성출판사나 삼성당 같은 곳에서 낸)에선 1877년 생으로 나오기도 했다.[6] 그래서 스탈린이 그리도 트로츠키를 죽이려고 한 게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적 두려움에 빠져 그랬다는 주장까지 있다. 우습게도 스탈린의 몇몇 충신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다. 그런데 스탈린 손에 죽어나간 무수한 정적 중에 유대인의 비율은 얼마 안 된다. 그런 상황에서 최대의 정적이자 잠재적 위협인 트로츠키가 유대인이 아니었다고 해서 스탈린이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을까? 유럽의 반유대주의를 비꼬는 이야기 중에 '부자들은 유대인 혁명가가 두려워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어하고, 빈자들은 유대인 자본가가 두려워서 유대인을 몰아내고 싶어한다'는 것이 있다. 소련 및 동구권에서도 이런 이중성에 의하여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의 반유대주의(및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를 소리높여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자국 내부에서 반유대주의적 차별행위를 벌인 사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형태의 체제가 정착된 2차대전 한참 뒤의 일이고, 사실 초기의 소련 공산당은 상당히 명확한 '반유대주의 반대'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냉전기 동구권의 반유대주의라고 하기에도 뭣한 게 이건 대전 후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중동 문제가 본격적인 미소 대결의 대리 전장 중 하나가 되면서 시오니즘 반대 노선을 타게 된거지, 공식적, 민족적 차원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박해한 적은 없다. 스탈린 생전 최후의 숙청이었던 유대인 의사 사건도 마침 본격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떠 오르려고 하던 이스라엘 중심의 시오니즘 운동의 싹을 미리 자르려고 한 정치적인 숙청이었지, 인종적 의미에서 유대인을 박해한게 아니다.[7] 그런데 트로츠키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학 능력이 평범하다고 이야기했고, 특히 영어는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참고하자. 글 잘 쓰는 사람의 언어능력기준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도 참고하자 사실 트로츠키의 영어 연설을 보면 발음이 어색할 뿐, 문장 만드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니 트로츠키 자신이 영어가 별볼일 없다고 한건 그냥 겸손한 척 한 것 같다. 근데 트로츠키는 제 잘난 맛에 사는 걸로 유명한 사람 아닌가[8] 나로드니키, 여기서 그 유명한 브 나로드(В Народу:인민 속으로)라는 말이 나왔다.[9]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가 보수주의자에서 인민주의자, 다시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화는 과정이 워낙 빨라서, 혁명 사상에 물든 자기 자식들에게 트로츠키를 성실한 학생의 모범사례로 소개한 하숙집 주인이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한탄했다거나, 일부 지인들이 급속한 좌경화 때문에 겁에 질려 절교를 선언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10] 유명한 러시아 혁명가 치고 시베리아 유형 한 번 안 간 사람은 없는데, 또 탈출을 시도해서 실패한 사람도 거의 없다. 실패한 사람들은 대부분 무명으로 죽었거든.[11] 당시 20대의 젊은이였던 트로츠키가 이스크라의 책임편집위원이 된 것은 대단히 신선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이 전격적인 발탁에는 편집위원회에 젊은 피를 좀 집어넣어봐야겠다는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짝수인 6명으로 구성되어 의사결정과정에서 가부동수가 자주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을 위원을 하나 늘려서 해결하자는 정치적인 고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두번째 고려 사항은 얼핏 보면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농담이 아닌 것이, 당시 이스크라의 책임편집위원 6명은 레닌파 3명과 마르토프파 3명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사사건건 가부동수 무효표결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레닌은 일단 노골적으로 자신의 파벌에 속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마르토프파의 동의도 이끌어 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많은 경우에 자신과 비슷한 입장을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강경파인 트로츠키의 책임편집위원 발탁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이다.[12] 약간 실수가 있는데 트로츠키는 편집위원에 임명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당시 싸우고 있었던 것은 레닌파와 마르토프 파가 아니라 레닌 + 마르토프 + 포트레소프의 소장파와 베라 자술리치 + 악셀로드 + 플레하노프의 노장파였다. 마르토프가 때로는 선배들의 요구에 굴복하기도 했지만 당시 이스크라의 편집회의 투표에서 기본적으로 레닌과 마르토프는 같은 편이었다. 이런 3대3의 교착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레닌은 트로츠키를 추천했고 마르토프 등 대다수의 위원들도 찬성했다. 유일하게 반대한 것이 노장파의 플레하노프였고(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등은 트로츠키를 좋아했다) 이 덕분에 트로츠키는 편집위원이 되지 못하였다. 아랫쪽 각주에도 실수가 있는데 트로츠키가 레닌의 곤봉으로 불린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일로 그가 경제주의자들의 주장을 무자비하게 반박하면서 생긴 별명이다. 그럼 왜 트로츠키는 자기를 승진시키려던 레닌과 결별했으며 레닌의 동지였던 마르토프는 또 왜 레닌의 반대파가 되었는가 하면 트로츠키를 추가시키려다 실패한 레닌이 훗날 이스크라 편집진에서 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포트레소프를 제외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등과 친밀했던 트로츠키는 이 제안을 듣고 경악해서 레닌을 비판하고 레닌이 편집진에 남기고자 했던 마르토프도 레닌이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그렇게 사이가 벌어지더니 나중에는 당의 구성을 둘러싼 의견차이가 생기고 점점 과격해지더니 결국 마르토프와 레닌이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트로츠키는 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등과 친하고 플레하노프와는 사이가 끔찍했는데 레닌이 자기와 친밀한 동료들을 내치려고 하면서 사이가 안 좋은 플레하노프와 연합하자 당연히 마르토프의 편에 서게 된다. 레닌은 애초에 트로츠키를 영입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트로츠키를 설득하고 회유하지만 트로츠키는 레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로부터 10여년간 트로츠키와 레닌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트로츠키는 이에 대해 후일 크게 후회하고 스스로 멍청했다고 자책한다.[13] 러시아에 남아 있던 첫 번째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시작했으니 법적으로는 아내가 아니다.[14] 이 좋은 시절을 프랑스어로 하면 벨 에포크라고 한다. 19세기 중후반까지 피비린내나는 혁명을 겪은 서유럽 각국은 프랑스어로 똘레랑스라고 하는 정치적 관용주의가 어느정도 자리잡아서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경제와 과학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인류의 앞날은 진보만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된다. 물론 20세기가 들어오자마자 1차대전으로 이런 낙관적 세계관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위의 사건의 배경이 된 스페인만 해도 프란시스코 프랑코 집권 당시에는 1970년대까지 공산주의자로 몰린 반정부세력을 숱하게 처형하던 나라였다.[15] Red guard, 중국 문화대혁명 때 중국 사회를 헬게이트로 몰아넣었던 홍위병은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16] 당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당의 최고지도자인 레닌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공격에 직면할 정도였다. 이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 트로츠키주의라는 표현이 가지게 된 의미를 생각하면 굉장히 웃기는 상황이지만, 당시의 정국에서 트로츠키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당 내에서 트로츠키의 지지기반이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또한,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이 사상적으로 레닌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간주된 데 비해 트로츠키가 독립적인 이론적 분파의 지도자로 여겨졌다는 증거이기도 하고.[17] 물론 해당 지역에 친숙한 대중을 무장시킨 민병대에 의한 게릴라 전술은 상당히 무섭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각국의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과 중국 혁명 과정에서 증명되었고, 포코 이론역시 이런 게릴라식 전술의 유용성을 기반으로 성립된 교리이며, 미국베트남, 소련아프가니스탄에서 처절한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며 증명된 것이기도하다.(더구나, 항공기와 전차가 대규모로 사용된 베트남 전쟁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는 달리, 소총과 기관총, 야포 정도가 최신 군사장비이던 적백내전 시기라면 해당 지역에 익숙하고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는 민병대 게릴라고 정규군을 상대하는 것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당시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중무장 정예병력보다 노동자 민병대를 선호하던 가장 큰 이유는 위와 같은 전략전술적 고려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이상(마르크스 자신이 기존의 국가와 그 폭력조직인 기존의 군대는 해체되고, 필요하다면 무장한 노동자들이 그 역할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이었다는 것.[18] 당시는 아직 소련의 창립 전이었고, 정확히 말하면 우크라이나.[19] 본격적인 전쟁 전에 소비에트 러시아군과 폴란드군이 국경부분에서 잦은 충돌이 있었으나, 먼저 월경하여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한 쪽은 엄연히 폴란드였다. (자꾸 이항목에서 폴란드를 옹호하기 위해 소련이 먼저 건드렸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마치 6.25전쟁 전에 남북한이 38선 부근에서 잦은 교전을 한 것을 가지고 북한의 남침을 물타기하려는 일부 종북세력의 주장처럼 무리한 것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침략적 의도를 가지고 전쟁을 시작한 것은 분명히 폴란드였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군은 동부에서 여러 하얀군대등의 반란군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서쪽에 공세를 시작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 이는 막 독립한 폴란드측의 많은 지도자들이 폴란드인이 사는 영역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까지 아울러 대폴란드국을 건설하려는 대폴란드 국수주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폴란드는 역공을 먹이면서 빌뉴스민스크, 서우크라이나키예프까지 점령하면서 승승장구했다. 문제는 해당 전선의 소비에트군이 강화되면서 미하일 투하쳅스키, 세묜 부됸늬를 비롯한 다른 명장들이 키예프에서 폴란드군을 개털었다는 거지만... 거기다 폴란드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공격한 것과 별개로 러시아도 폴란드를 넘어 당시 혁명이 진행되던 독일로 나아갈 의향이 충만했다.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트로츠키가 그랬다. 폴란드가 괜히 러시아를 공격한 게 아니라는 것.[20] 물론 진압 당시에는 이러한 봉기자들이 트로츠키의 잠재적 지지자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었다. 다만, 어쨌건 스탈린과의 정권투쟁에서 열세에 빠지게 되었을 때 트로츠키와 연대한 세력 중 상당수가 이 때 트로츠키가 미처 다 못 밟은 봉기자들이긴 했다.[21] 다만, 10월 혁명에서 트로츠키의 역할까지 생각한다면... 대략 곽도, 저수, 전풍, 심배, 봉기 등이 모두 조조와 화평하자고 제안하는 상황에서 유비가 원소군을 이끌고 출전해서 조조 목을 치고 천하를 원소 품에 안겨준 상황쯤 된다. 볼셰비키를 위해 세운 공이 워낙 막대해서 아예 남이라고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던 것.[22] 레닌과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 등과 권력을 분점했던 시기에는 비 볼셰비키 파벌이 레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즉, 볼셰비키 외부에서도 트로츠키를 레닌파 볼셰비키 세력과는 별개의 정파 지도자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23] 임명했다기보다는 적극 추천해서 중앙위원회의 투표에서 많은 표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24] 기본적으로 트로츠키는 사람들을 접대하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면모보다 연설가, 문필가서의 활동이 더 많았다. 때문에 정치력으로는 스탈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25] 사실, 당시에 서기장이 당내에서 가장 높은 직위였다고 볼 근거도 없다. 서기장이 당의 최고지도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스탈린 집권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는 어떤 직위가 당의 최고 지도자인지에 대한 명시적인 규정은 없었고, 관습적으로 당의 정치적 행보를 결정하는 정치국이 최고 의결기관으로 여겨졌으며 그 의장이 지도자로 여겨지는 정도였다. 즉, 스탈린이 서기장이 될 당시에는 서기장은 최고 간부 중 하나로서 당 내의 사무를 총괄하는 자리였을 뿐, 당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직위는 아니었다.[26] 역시 지금으로는 믿기 힘든 소리지만 스탈린은 되려 이러한 자신의 평판을 역으로 이용하여 각 계파들의 주장을 경청하고 갈등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 볼셰비키 지도부 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인식도 좀 어눌하지만 사람은 곱고 순진한 친구로 자리잡았던 것. 이런 연기 뒤의 스탈린의 본질을 레닌은 꿰뚫어보았지만 (죽기 직전에 쓴 편지에서 '주어진 권력을 잘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평하며, 스탈린을 당장 해임시킬 것을 건의한다) 미처 손을 쓰지 못한채 죽고 만다.[27] "똘똘이 스머프"가 트로츠키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8] 개인적으로 모욕당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그런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할 정도.[29] 반대 좌파, 또는 좌익 반대파는 사실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분파가 아니다. 좌익 반대파는 노동조합을 정부의 완전한 통제와 지배하에 두려는 시도를 우파적 독재로 보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탄생한 것인데, 문제는 노동조합을 정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정책을 처음 추진하던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익 반대파가 성립된 직후에는 오히려 트로츠키가 그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다만, 스탈린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정부와 당의 권력을 확대하는 노선을 취하자 같은 적을 둔 동지라는 식으로 연합한 것에 가깝다(대신, 트로츠키가 완전히 실각할때까지 이 공조노선이 유지되기는 했다). 물론, 명불허전 스탈린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을 정부에 복속시키려는 트로츠키는 독재자 워너비라고 까고, 동시에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를 부정하는 좌익 반대파는 무정부주의자, 아마추어, 좌파 모험주의자라고 까는 정도의 자기모순은 별로 문제될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30] 앞 주석의 연장선상에서, 결국 트로츠키에는 개인적 지지자들도 있었고,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도 상당히 있었지만 당 내에 자기 계파는 전혀 없었던 셈이 된다. 즉, 트로츠키파는 트로츠키 이외에는 네임드급 정치인이 사실상 없는 일종의 1인 정당으로서 주류 볼셰비키라는 대형 정당과 연립상태였던 셈.[31] 일단 부하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아닌 기계론자였고, 당시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던 인물이어서 그랬는지 경제 분야에서도 시장경제적 요소를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독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NEP 추진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했던 '부자 되세요' 발언 등이 좋은 예. NEP를 먼저 추진하기 시작한 레닌이 이걸 가지고 부하린을 까는 건 좀 뻔뻔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NEP를 위기 극복을 위한 임시방편 정도로 여기던 레닌에 비해 부하린이 좀 더 과감하게(또는 지나치게) NEP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32] 이래저래 따져보니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던 것 같다는 것하고,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명확히 지목한 것은 천지차이이지 않은가?[33] 이 부분은 사실 당시 혁명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을 모르면 오독하기 쉽다. 얼핏 보면 트로츠키가 관료주의적이었나보다 하고 읽기 쉬운데, 사실 관료주의는 (트로츠키가 경멸해 마지 않는) 서기장 스탈린의 특성이고, '문제를 순수하게 관리한다'는 표현은 당시 볼셰비키 당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원인에서부터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기술적으로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테러리즘을 은유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개념을 트로츠키의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트로츠키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반대파가 나올 경우 차근차근 대화와 토론을 거쳐 의견차를 줄이고 공감대와 합의점을 찾아서 반대파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문필과 언변으로 상대를 압도해서 닥치게 만들거나(키보드 배틀이건 아가리 배틀이건 볼셰비키당 최강의 논객이니까) 군대를 끌고 가서 조져버림으로써(붉은 군대의 창설자니까) 반대파가 말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는 비판이다. 이런 특성은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똑똑한 내가 당연히 옳은데 왜 멍청한 쟤들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는거임?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나름대로 낭비를 피하고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한 짓이라는 것이 후세의 평가.[34] 일주일 정도 뒤에 작성한 서한에서는 스탈린을 훨씬 가혹하게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조금 뒤에 작성한 서한에서는 스탈린을 제르진스키와 함께 소수민족 문제 담당으로 남겨둘 것을 요구했다.[35] 사실 혁명 과정에서 보여준 업적만으로 따지면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비해 잉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용의주도함이나 권력의지는 트로츠키가 과소평가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쫓겨난 후에 쓴 스탈린의 전기에서도 잘 나타난다(이 전기에서는 심지어 스탈린을 매독 환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트로츠키의 개인적 원한에 의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스탈린의 실체를 보기보다는 스탈린의 이런저런 약점만을 보면서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 확실히 드러난다).[36] 3인방 또는 트로이카로 표현된다.[37] 정확히 말하면 육해군 인민위원.[38] 물론 그는 자신의 선동력과 문필력을 스스로의 가장 큰 무기이자 장점으로 꼽았다. 그래서 이걸 제대로 사용한다면 무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어눌한 스탈린을 몰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탈린이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았다.[39] 당시 독일 공산당에서는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고, 그 중에서도 화려한 문필을 자랑하는 트로츠키의 명성은 대단해서(다른 정치적 행동들의 영향력이 제한적인 데 비해, 논설은 널리 퍼지기가 쉬우니까) 독일 공산당의 가두행진에 트로츠키의 초상화가 자주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니 소련에서 트로츠키가 필요없다면 독일 혁명에 보탬이 되도록 보내 달라고 했던 것.[40] 물론 외국인인 트로츠키가 독일 공산당의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알 수 없고, 트로츠키가 있었다고 해서 독일 공산당이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현재로써든 당시로써든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당시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커져가면서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가능성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 트로츠키가 독일 혁명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해낸다면? 그러면 트로츠키는 두 나라의 혁명을 성공시킨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버리고 스탈린으로서는 무슨 짓을 하건 트로츠키를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이었다.[41] 다른 견해로는, 스탈린은 원래부터 타국의 혁명에 무관심했고, "일국사회주의론"도 결국은 서유럽과 담쌓고 지내자는 건데, 트로츠키를 독일로 보낸다는 것은 독일의 정치에 소련이 간섭한다는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고 이는 서유럽 각국의 어그로를 끌 수 있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유럽의 적화보다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스탈린의 성향상, 트로츠키가 소련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서약했어도 아마 곱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42] 사실 앞 두 주석이 주장하는 바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 다 옳다고 보는 쪽이 가장 정확하다. 즉, 고립주의적인 성향을 견지했던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트로츠키를 독일에 보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이 거의 없었고, 만약 트로츠키를 독일로 보냈다가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그곳에서도 트로츠키가 성공할 경우 감당해야 했던 정치적 후폭풍은 무지막지했던 것(독일로 내보내면서 두 번 다시 소련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서약 같은걸 받았다고 하더라도 스탈린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 즉 트로츠키가 독일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독일을 공산화하여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런 서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독일 소비에트 공화국 역시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일부임을 천명하면 그걸 거부할 명분은 전혀 없고, 그 경우 독일과 러시아 양대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낸 트로츠키가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걸 부정할 명분도 전혀 없다시피 하니까).[43] 트로츠키가 회의석상에서 독일 혁명을 돕기 위해 기꺼이 가겠다고 발언하자 당시 스탈린과 결탁한 상태였던 지노비예프가 벌떡 일어나서 현재의 소련에는 트로츠키 동지의 탁월한 재능이 반드시 필요하니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외치고, 그 뒤를 따라 명성이나 활약상 면에서 트로츠키는 커녕 지노비예프와도 비교가 안 되는 스탈린파의 쪼렙 정치국원들이 줄줄이 따라 일어나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아우성쳐댔다고 한다. 니들이 간다고 반가워하기나 한다냐? 그렇게 어중이 떠중이가 죄다 나대니 자기도 거기 끼어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아서 트로츠키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고(...). 사실, 당시 스탈린으로서는 외국 공산당의 지원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절하기는 부담이 커서 이런 개드립을 쳤던 것.[44] 영어로는 Socialism in one country라고 하며 일부에서 "국가사회주의"로 오역을 하는데, 국가사회주의는 나치의 사상을 말한다.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니 주의하기 바란다.[45] 영구혁명이란 permanent revolution의 번역인데, permanent는 영구적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무엇인가에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지칭하기도 한다.[46] 소련이라는 국가의 명칭 자체가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이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점 때문에 당시 소련의 지지자들은 소련이 영토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의 연합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국민국가는 그 나라 국민에게만 조국이지만 소련은 전 세계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것. 결국, 국제혁명을 부인한다는 것은 당시 소련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런 명명은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거듭나서 이 연합체에 합류하도록 이끌어 나가는 것을 국가의 기본적인 방침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2차대전 이후 위성국가 형성을 통해 보인 소련의 확장욕조차 원론적인 면에서는 건국 초기의 확장욕에 비하면 많이 온건해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47] 이는 소설 동물농장에서도 원래 스노볼의 아이디어였던 풍차를 나폴레옹이 건축하자고 나서는 것으로 패러디 된다.[48] 그리고 물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실각한 뒤에는 부하린도 스탈린에 의해 실각하고, 당에서 추방된 데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처형이 1936년, 부하린의 처형이 1938년인 것을 생각해 보면, 트로츠키는 이 세명보다 더 오래 산데다가, 죽음의 형태도 처형이 아니라 암살이었다. 결국, 스탈린과 협력해서 트로츠키를 몰아낸 세 사람이 오히려 트로츠키보다 일찍,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은 셈.[49] 붉은 군대 내에는 추종자들이 좀 있었지만, 그들은 사실 전문적인 군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은 트로츠키 자신처럼 혁명 후 군문에 진입하여 군인들을 감독하고 사상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군내에서 승진해온 인사들이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군부 내 트로츠키 추종자인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오브셴코는 혁명 이전에는 군 경력이 전혀 없었다. 90년대 들어 대숙청이 (40대 전문지휘관들의 약진을 불러와) 붉은 군대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나왔는데, 바로 이렇게 대숙청에서 날라간 인간들이 상당수 트로츠키파로 분류되었던 당료형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숙청으로 유능한 군인도 많이 날라갔지만, 군에 동맥경화를 일으키던 똥별들을 모조리 날려벼렸다는 점) 여담이지만 오브셴코는 후에 스탈린에 충성을 맹세하고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외교관으로 파견되었으나, 대숙청 기간후 체포, 처형되었다.[50] 위의 부연설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사실상 영구혁명론의 초기 단계는 생산수단의 예외없는 국유화와 급속한 공업화의 추진 등,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51] 레닌 집권 당시 소련이 시도했던 혁명수출이 요즘 식으로 말하면 테러리스트에 대한 적극적 지원인 것은 사실이다. 단, 이 부분에 대해 현대적 감성으로 '테러 지원 행위' 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의 예에서 보듯, 제국주의의 전성기이던 당시 소련은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 계열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즉, (이러한 지원활동이 서방 국가들과 관계를 회복하여 국제 정치외교 무대에 복귀하려던 소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별개로)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도덕적 당위성 자체는 상당했다는 것.[52] 이들은 대숙청 기간중 모조리 처형된다.[53] 자서전이나 여러 자료를 볼 때, 트로츠키에게 오만하고 영웅주의적인 성격과 소심한 성격이 공존했다는 관점에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다만, '말로는 폭력에 호소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소심해서 쿠데타를 일으킬 배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부분은 짐작의 영역일 뿐이지, 학문적으로 규명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속마음이니까) 그리고, 폭력에 호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트로츠키의 발언에 대해 10월 혁명 자체가 폭력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이율배반임을 주장하는 관점 역시 '자신이 반대한 체제에 대한 폭력적 전복'과 '그 성립에 자신이 참여하여 크게 일조한 체제에 대한 폭력적 전복'을 그저 폭력행사라는 점에서 똑같이 보고 있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비슷한 예로 폭력적인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을 옹호하는 사람 중에 부패한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 안에서의 혁명을 반대하는 사람을 찾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54] 추방 이후에도 소련 내에 트로츠키의 영향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는 점은, 트로츠키의 암살이 1940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이 시기는 스탈린과 손잡고 트로츠키를 몰아낸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까지 모두 처형되고, 소련 내에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규모의 대규모 숙청이 마무리 된 이후인데, 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런 대규모 숙청으로 국내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트로츠키를 제거하기 껄끄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55] 성과는 그런대로 있었다. 그래서 소련은 1930년대의 후반에는 어쨌든 세계 2위의 공업국이 된다. 대신에 인민들을 갈아넣었지만...[56] 이것 때문에 엄청난 희생과 대기근을 겪었지만 반대로 이것 덕분에 나치 독일과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항상 논란의 대상이다. 공과 과가 양쪽 다 엄청나서 어느 한쪽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57] 흐루쇼프는 이 암살이 차세대 주자를 제거하기 위한 스탈린의 음모였다고 주장하였고 한때 키로프는 스탈린이 죽였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현재는 정황상 허술한 이론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대숙청에서 스탈린의 주도적인 역할에 대해서 배제하였던 아치 게티 류의 수정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통설 자체가 기존의 스탈린 배후설은 이론의 여지가 매우 많다고 본다. 다만 스탈린이 키로프 암살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키로프 암살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2차 수정주의 연구도 나오고 있긴 하다.[58] 이 사람은 유명한 교육철학자로서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고 좌파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미국의 비교적 온건한 계통의 민주사회주의자였다.[59] #, 그 이전엔 얼음깨기용 망치 또는 얼음깨기용 송곳 또는 도끼를 트로츠키 암살에 썼다고 국내 교련 교과서나 신문에까지 다양하게 썼다. 이원복도 만화에서 얼음송곳으로 암살했다고 그렸으며 1990년대 국방부 정신교육 책자에선 도끼로 나왔다. 물론 반공 이념으로 써먹은 것뿐, 트로츠키의 사상은 일절 거론 안 했다.[60] 메르카데르가 피켈로 트로츠키의 머리에 1차로 상처를 입히고 다시 휘두르려는 순간 트로츠키는 안간힘을 다해 메르카데르의 손과 팔을 잡고 그 손을 물어 피켈을 놓치게 하려고 했다. 그러고는 거실로 나가 도움을 청했다. 수명의 경호원이 달려와 메르카데르를 짓누르고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아직 의식이 있는 트로츠키에게 죽여도 되냐며 지시를 청하자 트로츠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죽여서는 안된다. 자백을... 시켜야... 한다." 라고.[61] 많은 대숙청 희생자와는 달리 트로츠키는 소련을 근본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에 사후에도 복권되지 않았단 주장도 있는데, 이 주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아주 크다. 트로츠키 사후, 트로츠키의 직접적인 영향 없이 자생적으로 나타난 트로츠키주의자들(IS 계열)이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에 근거한 국가'라는 식으로 근본적으로 부정한 데 비해, 트로츠키는 최후까지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간주했다. 즉, 소련과 스탈린 정권을 강경하게 비판하면서도 노동자 국가라는 정체성은 최후까지 부정하지 못한 셈이다. 물론,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정통성은 철저히 부정했고, 이 점에서 아무리 스탈린을 디스했더라도 스탈린의 정치적 후계자인 흐루쇼프나 아무리 개혁파라고 하더라도 스탈린으로부터 이어져 온 소련 권력 전통의 계승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다른 대숙청 희생자들을 복권시키면서도 트로츠키를 복권시키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현대의 기준에서 트로츠키가 소련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62] 이탈리아의 걸작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Life is Beautiful)의 제목은 여기서 비롯되었다.[63] 그나마 PD파와 좀 가까운 편이고, 얼마간의 교류가 있기는 하다. PD파는 아니라도 PD를 중심으로 한 범좌파를 따질 때면 노동자연대도 넣어주는 편. 대신, 싸움질은 보통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NL-다함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점점이 조금은 있는 PD-다함께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이후에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긴 했는데, 이건 딱히 NL하고 마음이 맞아서라기보다는 자기 당을 만들 수 없기에 가장 세력이 큰 민주노동당에 남은 것이다. 그 후에 통합진보당까지 지지하긴 했는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고 나서는 그나마도 지지 철회하고 허공에 떠 있는 상태. 현재는 당에 소속되지는 않은 상태로, 은근히 정의당을 밀고 있는 분위기이다.[64]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ISSK)는 1990년에 창립된 비합법 지하조직이다. 국가보안법을 내세운 국가 탄압으로 인해 수 차례 대규모 구속 사태에 직면한 바 있고, 1999년에 공식적으로 조직을 해소하였다. 이후 지하조직 노선을 청산하고 대중 노선으로 전환하여 2000년에 민주노동당 학생그룹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하여 다함께(2001~2012)-노동자연대다함께(2012~2014)-노동자연대(2014~)로 이어지고 있다.[65] 근데 꼭 트로츠키주의뿐만이 아니라, 한국 운동판에서 레닌주의의 입지 자체가 아주 좁다.[66] 예를 들어 노동자연대 가판에서 파는 소책자에는 '삐딱이들을 위한 트로츠키 가이드'가 있고, 이 조직의 실질적인 지도자 격인 최일붕 씨는 한동안 '한국 최초의 트로츠키주의자'로 소개된 바 있다.[67] 제 4 인터내셔널의 경우 트로츠키 자신이 창설한 조직이고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보는 데 비해, IS(또는 IST)는 트로츠키 사후 자생적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으로써 소련이 애초부터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68] 영국, 프랑스, 독일 같은 경우 기존 진보-좌파세력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매우 혐오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주류 진보정당인 노동당과 비주류 트로츠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 (Socialist Workers Party)은 원수지간이며, 다른 나라도 거의 마찬가지다.[69] 예를 들어 운동권의 학습서인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쓴 영국의 알렉스 켈리니코스 같은 사람은 한국에 여러 차례 강연을 왔다.[70] 당이 없는 경우에는 운동 단위가 된다. 한국에 이러한 운동 단위로는 스탈린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 정치 협의회(노정협)와 노동사회과학 연구소(노사과연)이 있다. 실제로 노정협에서 발간하는 노동자 정치 신문을 보면 가장 많이 까이는 단체 1위가 노동자연대고, 2위가 변혁당이다.[71] 이것을 유로코뮤니즘이라 하는데, 이미 1970년대부터 서유럽 공산당들 사이에서 시작된 풍조이다. 현재 한국의 NL도 이쪽으로 가고 있는 듯.[72] 위에 예시로 나온 흐루쇼프와 마오쩌둥 간의 논쟁을 보더라도,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을 극좌모험주의자라고 불렀고,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우파수정주의자라고 받아쳤다. 그런데 양쪽 다 상대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다. 대체 트로츠키의 정체가 뭐길래?[73] 전국학생행진과 사회진보연대, 변혁당 중앙당과 학생위원회에서 이런 흐름이 심각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연대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세상을 위한 연대(구 변혁재장전)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74] 사실 미국과 유럽의 1960년대 자체가 68운동의 영항으로 사상적 혼란이 크게 일어난 만큼 트로츠키 동정론이 힘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마오쩌둥, 호치민처럼 현대 기준으로는 절대 옹호받을 수 없는 독재자들도 찬양받던 시기니.[75] 물론, 공정하게 말한다면 이 당시의 학생들이 이상화한 트로츠키주의가 실제 트로츠키의 이념과 같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76] 스페인 체제 당시 노점상에서 일부러 삶은 새우를 사 먹었다는 이야기를 자서전에 남길 정도였다.[77] 그의 회고록에선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 아버지는 적백내전 당시 당신의 아들이 트로츠키란 이유로 백군에게 탄압당하셨고 적군에게는 부농이란 이유로 비판당하셨다."[78] 스탈린은 그루지야 출신이었고 러시아어를 그리 잘 하지 못해서 러시아어로 말을 할 때면 되도록 짧게 했다고 한다.[79] 통상적인 정치장교의 역할에서 감시역할을 뺀 것.[80] 트로츠키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트로츠키가 들린 부대마다 종점의 기적에 필적하는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 같지만 물론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래도 다른 기록들을 보면 당시 붉은 군대의 병사들은 최전선까지 찾아와서 자신들을 격려하고 가는 국방장관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관님 온다고 환영행사 준비는 안 시켰나 보지 아닌게 아니라, 이때만 해도 볼셰비키나 다른 혁명 조직이나 아직은 청년들의 지하 혁명 조직 시절의 낭만주의적 자유로움은 조직 내부적으로나마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어서, 레닌을 비롯한 당 최고 지도층도 부각은 철저히 되었을 망정 개인적 언행에서 막무가네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고, 병사들도 아무래도 구 일본군 마냥 썩을대로 썩은 봉건적 문화가 그대로 남은 제정 군대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나왔다 보니 오히려 계급간의 관계는 자유분방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혁명전쟁 시기를 통해 볼셰비키 조직 자체가 싸그리 갈리고 새로 교체되면서 새로운 관료제적 권위주의가 곧 들어앉게 되지만...[81] 체제의 배반자, 염소 수염, 안경, 유대인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82] 스탈린이 어렸을 때 스탈린의 부모가 그루지야에서 일어나는 탄압을 피하고자 그루지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Joe Steele'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