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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현재 존재하는 동유럽의 국가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 알바니아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프라하의 봄을 유혈 진압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로 1968년 9월 13일에 탈퇴.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Republica Socialistă România
[1]
국기
국장
1947년 ~ 1989년
위치
정치체제
국가원수
공산당 서기장
루마니아인
주요사건
1947년 설립
1989년 붕괴
통화
레우
성립 이전
붕괴 이후

1. 개요2. 전후 루마니아의 정치적 변동3. 인민 공화국의 성립4. 루마니아에서의 숙청5. 공업화 정책과 그 좌절6. 탈스탈린주의 운동의 전개7.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주 노선8.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체제의 완성9. 다각 외교의 전망10. 루마니아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

1. 개요[편집]

2차 세계대전 후 생긴 소련의 위성국이었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로는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고 1960년대 후반 이후로는 사실상 갈라서다시피했다. 그래도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코메콘에 계속해서 소속되었기는 했다.

2. 전후 루마니아의 정치적 변동[편집]

1944년 3월 말에 소련군은 루마니아 왕국의 국경을 넘었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는 대외 노선의 전환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었고, 6월에 급진 좌파인 민족 농민당, 자유당, 사회 민주당, 공산당이 '국민 민주 블록'을 결성했다. 그 위에 국왕 미하이 1세와 그의 측근인 군의 수뇌부가 이 블록에 접근하고 8월에 이들 세력이 미하이 안토네스쿠(Mihai Antonescu) 총리를 체포한 후,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직후 근위대 사단장 니콜라에 서너테스쿠(Nicolae Sănătescu) 장군은 국민 민주 블록의 4당을 포함해서 내각을 조직하였으며, 9월 12일에 소련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대독 참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곧 정치적 변혁을 회복하려고 하는 민족 농민당의 지도자와 소련군의 배경으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는 공산당과의 대립이 일어났다. 10월에 공산당은 사회 민주당 농민 전선, 애국자 동맹, 노동 조합 등을 모집하여 국민 민주 전선을 결성했다. 12월에 성립한 친서방파의 미하이 러데스쿠(Mihai Rădescu)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은 우파 신문의 발간 금지와 내무성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1945년 2월에 격심한 정치 위기에 봉착했다. 소련은 뷔신스키(Vysinsky) 외무 차관을 보내어 미하이 1세에게 러데스쿠의 해임을 요구하였다. 3월 6일에 농민 전선의 페트루 그로자(Petru Groza)를 총리로 하는 인민 민주 전선 중심의 신내각이 탄생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의 심한 항의와 국제적 비판이 전개되었고, 한편 국왕과 우파 정당과 그로자 정부와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12월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에서 국제적 타협이 성립되어 민족 농민당과 자유당에서 각각 1명을 그로자 정권에 가입시키게 하였다.

3. 인민 공화국의 성립[편집]

그로자 정권하에서 1946년 11월 19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산당, 사회 민주당, 자유당 분파, 농민 전선, 민족 인민당(애국자 동맹)은 통일 블록을 조직하고 격심한 선거전을 전개했다. 선거 결과에서 통일 블록은 유효 투표의 71.8%, 총 의석 414석 가운데 347석을 획득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민족 농민당은 33석, 자유당은 3석의 의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거 방해가 격심했던 것을 이유로 이 날의 선거 결과는 배척되었다.

제2차 그로자 내각에는 당 서기장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eorgiu- Dej)가 부총리로 임명되고 공산당은 법무장관, 내무장관, 국민경제장관, 상공장관의 자리를 획득했다. 경찰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은 1947년 7월에 민족 농민당의 이울리우 마니우(Iuliu Maniu) 등 지도자를 체제 전복의 지하 활동을 이유로 체포하고, 당을 해산시켰다. 자유당은 브라티아누(Bratianu) 등의 지도자가 연달아 망명해서 해체되었다. 뒤이어 11월에 통일 블록에 참가했던 자유당 분파에도 압력이 가해져 외무부 장관 게오르게 터터레스쿠(George Tătărescu), 이온 기구르투(Ion Gigurtu)를 비롯한 모든 각료가 퇴진하였다. 외무장관의 후임에는 파우겔, 또 재무장관에는 루가, 국방장관에는 보도너러슈가 취임하고, 공산당이 정부의 요직을 모두 장악했다. 1947년 12월 30일 미하이 1세는 정부로부터 퇴위 요구를 받아 그것을 수락한 후에 망명했고, 같은 날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경제 정책면에서 그로자 정권은 성립 직후의 1945년 3월 23일에 전범자와 부재지주의 50㏊ 이상의 농지를 무상으로 몰수하는 농지 개혁법을 실시했다. 145만 ㏊의 토지가 약 80만의 빈농과 농업 노동자에게 분배되었다. 그 밖에 루마니아 산업의 국유화는 '국민 민주 블록'이라는 형태로서 출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동유럽 제 국가에 비교해서 비교적 늦었고, 1946년 12월에는 루마니아 중앙 은행만이 국유화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47년 말까지 우파 정당이 모두 영향력을 잃게 된 후, 1948년 6월이 되어서 광공업, 은행, 보험, 운송의 모든 부문이 국유화되었다. 전후의 루마니아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소련과의 밀접한 관계였다. 1945년 5월 8일에 소련과의 사이에서 경제 협력 협정이 맺어지고, 그것에 따라 소련 - 루마니아의 합병 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합병 회사는 석유, 운송, 가스, 화학, 우라늄, 목재, 보험 등 16개 부문에서 설치되고, 거의 모든 중요한 산업 부문에 걸쳐서 소련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1947년 2월의 파리 강화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3억 달러의 배상을 소련에 지불하게 되었지만, 강화 회의에 대한 미국 대표의 평가에 따르면 1946년 9월까지 10억 달러를 넘는 배상을 소련이 루마니아로부터 징수했다고 되어 있다. 역시 강화 회의에 의해서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를 회수할 수 있었지만 베사라비아(Bessarabia)와 부코비나(Bukovina)는 소련에게, 또 도브루자(Dobruja)는 불가리아에게 할양되었기 때문에 36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잃었다. 인종 구성의 변화로서는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Banat)를 중심으로 전전에 75만 명 이상이었던 독일인 [2]이 독일군과의 후퇴와 피난을 같이하거나 소련 수용소와 산업전선에 보내짐으로써 절반으로 감소했으며, 전전 70만 명 이상을 넘었던 유대인이 20만 명 이하로 격감하였다. 이로써 루마니아에서 인종 문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4. 루마니아에서의 숙청[편집]

1947년 중에 반대당을 거의 다 해산시킨 루마니아 공산당은 1948년 2월에 사회 민주당 좌파를 흡수하여 노동자당이라고 개칭하고, 동시에 그 때까지의 국민 민주 전선을 개조하여 노동자당, 농민 전선, 민족 인민당(1년 후 해산), 헝가리 인민 동맹을 결집한 인민 전선을 조직했다.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한 사회 민주당 우파는 독립 사회당을 결성했지만, 5월에 그 지도자 베토레스쿠(Betorescu)가 체포되자 영향력을 잃었다. 3월 28일에 제헌 의회 선거가 실시되고, 인민 전선이 92%의 표와 414의석 중 405석을 차지하고 재차 대승했다. 4월 13일에 국민 의회는 신헌법을 채택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반대당 추방이 거의 완료된 단계에서 노동자당 내부로 숙청의 화살이 향해진 것이었다. 대숙청의 물결은 2월의 노동자당 결성 대회에서 게오르게스쿠 내무장관이 1944년 쿠데타에서 공산당을 대표하여 활약한 파도러슈커네 법무장관을 "부르주아지의 영향하에 빠졌다."라고 비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파도러슈커네는 법무장관과 중앙 위원회 직에서 추방되고 1954년 4월에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1948년 6월의 코민포름에서의 유고의 추방과 더불어 그 뒤의 '티토주의자' 탄핵은 루마니아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같은 해 11월에는 전후의 대량 입당시에 가입한 '출세주의자'와 '기회주의자'를 제거한다는 결의문이 채택되고, 1950년 5월에 당원 총수의 20%에 해당하는 19만 2천 명이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2년의 대숙청은 당의 중추에도 영향을 끼쳤고, 3월에는 통화 개혁의 실패와 '우익에로 전향'을 이유로 루카와 게오르게스쿠가 재무장관과 내무장관의 지위에서 해임되고, 5월에는 파우겔도 이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당 정치국원에서 해임되었다.

이 모든 숙청 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당 서기장의 당내에서의 지위는 확고해지게 되었다. 6월에 그로자가 대국민 회의의 의장에 취임한 뒤 게오르기우데지는 총리를 겸임하게 되었다. 루카, 게오르게스쿠, 파우겔 등 3인은 공업화 정책이 정지 상태에 빠진 책임을 지게 되어, 7월에 파우겔은 외무장관의 지위에서 추방되고, 루카는 1954년 10월에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 파우겔이 유대인이며, 루카가 헝가리 인이라는 사실에서 숙청에서 인종 문제가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공업화 정책과 그 좌절[편집]

이와 같은 정치적 숙청의 배경에는 다른 동유럽 제국과 함께 루마니아가 착수한 급속도의 공업화 정책과 그것을 떠받쳐 주는 스탈린주의 노선이 있었다. 1948년 6월의 대규모의 국유화에 계속하여 국가 계획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다른 동유럽 제국보다 늦은 1951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었지만, 투자 목표가 공업 부문에 51.4%(생산재 42.1%, 소비재 9.20%), 농업 부문에 10%로 설정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술 수준이 낮은 농업국에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매년 실적은 계획에서 밑돌았다. 무모한 계획을 감행해야 했기 때문에 1949년 이후 지방에 있어서 인민 평의회의 설치, 민병 조직의 도입에 의한 감시망의 완성, 경제범에게 중죄를 적용하는 신형법전의 공표 등 국민 총동원 체제가 이루어졌다. 1952년 9월 2일에는 헌법이 개정되고, 노동자당의 지도적 역할이 명문화되는 등, 1948년 헌법의 온건한 규정이 불식되었다.

농업면에도 1961년에 게오르기우데지가 '부농 공격'이라는 명목으로 그 대부분이 근로 농민이었던 8만 명 이상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루마니아에서도 급속한 공업화와 더불어 스탈린식의 부농 일소와 농업 집단화 정책이 강행되었지만, 농민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집단화가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1951년에 당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자 중공업 위주 정책의 수정을 발표한 말렌코프(Malenkov) 노선이 소련에 등장하였다. 5개년 계획과 농업 정책의 실패가 분명히 드러난 루마니아에도 8월 하순의 당 중앙 위원회에서 서기장 게오르기우데지는 농업, 소비재 생산의 경시, 당과 일반 대중과의 단절에 관해서 심각한 자기 비판을 하고 5개년 계획의 재검토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1955년 12월의 제2차 당 대회에서는 젊은 열성 분자를 활용할 문제와 당의 지도 체제의 재건과 중공업 우선을 특징으로 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채택이 결정되었다.

6. 탈스탈린주의 운동의 전개[편집]

1956년 2월의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키시너프스카와 콘스탄티네스쿠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과거의 책임에 관해서 게오르기우데지를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크루지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헝가리 봉기 직후,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사는 크루지,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의 봉기자에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 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히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의 인상, 콘스탄티네스쿠의 교육장관 임명 등,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이 별로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로서 이런 부분적 양보 정책 외에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인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한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가 강하게 묶여 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의 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파우겔과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 숭배'의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것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키시너프스키와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됨으로써 극단적 자유화 운동은 생겨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짓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그것은 가라츠 제철소 건설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라는 급속한 대규모의 공업화 계획으로서 동유럽 제국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것이 되었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의 소련군의 철수가 발표되었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는 1947년의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 주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으로서, 1955년의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 체결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다. 헝가리 봉기 후 소련은 폴란드(1956년 12월), 동독(1957년 3월), 루마니아(1957년 4월), 헝가리(1957년 5월)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으나, 루마니아만이 끈질긴 교섭 후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이는 그 뒤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7.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주 노선[편집]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전술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1961년 소련의 제22차 당 대회 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쇼프 노선을 따라 '개인 숭배'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없애고,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스탈린 거상(巨像)을 철거했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 어 필수 교육의 폐지,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의 격하 등의 조치를 취하고, 루마니아 해방에 있어서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하여 루마니아 공산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을 배경으로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초국가 기관 창설 계획에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 인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 원칙은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이다."라고 하는 입장이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서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1963년에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발전한 중소 대립에 있어서도 루마니아는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방중(訪中)시키는 등 중소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활약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 제국 중 그 해에 대중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알바니아와의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하여 한때 철수한 주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졌다.

한편, 1964년 5월에 가스통 마린(Gaston 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고, 7월에 마우렐(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한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 제국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다.

8.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체제의 완성[편집]

루마니아에서는 1965년 3월에 게오르기우데지가 죽고 당 제1서기의 후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çescu)가, 국가 평의회 의장의 후임에는 스토이카(Stoica)가 각각 취임했다. 그중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게오르기우데지에게 신임을 받아 1954년에 당 서기에, 다음 해에 정치국원에 임용되고, 수년 동안 당 조직 문제의 책임자로서 지위를 견고히 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독자적 경제 건설, 민족주의적 입장, 신중한 민주화라는 '게오르기우데지 노선'을 계승하면서, 당내와 외교의 양면에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차우셰스쿠 노선을 확립했다.

같은 해 7월에 노동자당 제14차 대회(당명을 공산당으로 고치고 대회도 공산당 제9차 대회라고 함.)가 개최되고, 직명을 제1서기에서 서기장으로 바꾼 차우세스쿠는 "공업화야말로 독립과 국가 주권을 보증하는 결정적 요소이다."라고 강조했다. 대회에서 승인받은 신헌법은 국명을 인민 공화국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고치는 것 외에, 전후 해방 시기에 소련의 역할을 강조한 헌법 전문(前文)을 모두 삭제하고, 1964년의 당 성명의 기조를 채택하였다. 이것은 8월 20일에 대국민 의회에서 채택되고 발표되었다. 또, 이 대회는 국민 총생산을 연평균 10.5% 성장시킨다는 야심적인 신 5개년 계획(1966∼1970)을 채택했다.

1970년대 루마니아의 산업 구조는 큰 변화를 계속하여 전체 근로자 중 농업 종사자의 비율은 1950년의 74.1%에서 1970년에는 49.1%로, 그리고 1973년에는 42%로 감소했다. 또, 1965년 이후에 일찍이 숙청된 사람들의 명예 회복이 시작되고, 1967년 말에는 정치범의 특사가 있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외교적으로 자주 노선을 채택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간섭을 탈피해 왔으나, 국내적으로 민중의 정치적 자유를 헝가리의 경우처럼 대담하게 확대하는 방향으로는 채택하지 않고, 매사에 당의 지도성을 강화하였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다른 동유럽 제국에 비교해서 늦게 시작한 경제 개혁을 1967년 12월에 전국 회의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할 것을 결의하고, 기업의 독립 채산제와 기업 간의 직접 계약을 확대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 대회가 당과 정부 기관의 일원화를 결정한 것이다. 차우셰스쿠 당 서기장이 국가 원수를 겸임한 것 외에 각종 수준에서 당 기관과 국가 기관과의 합병이 계속 진행되었다. 이 조치는 행정의 능률화를 꾀하고, 동시에 당 독점권을 더욱 철저하게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9. 다각 외교의 전망[편집]

차우셰스쿠 정권은 대외 정책에서 전임자보다도 더욱 선명한 자주적 노선을 주창하였다. 코메콘 내부에서의 국가 주권 옹호의 주장은 이번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의해 논의되었다. 1965년 1월의 바르샤바 기구 정치 자문회에 있어서 루마니아는 소련의 상설 위원회 설치 제안에 반대했고, 9월부터 10월에 걸쳐 교섭이 분주히 진행되었다. 1966년 5월 7일에 차우셰스쿠는 당 창립 45주년 기념 식전에서 "루마니아 공산당은 나라의 독립과 루마니아 민족 및 통일, 민족 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한다. · · · · · · 루마니아 국민은 수 세기에 걸친 투쟁의 계승자이다."라고 말하고, 코민테른(Komintern)을 비판함과 동시에 '군사 블록 반대'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 1967년 1월에 루마니아는 동독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독과 국교를 수립하고, 4월 체코에서 열린 유럽 공산당 대회에 불참하였으며, 6월의 중동 전쟁에 관해서 소련 및 동유럽 제국과는 달리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자주 노선의 입장을 단호하게 표명하였다.

중소 대립에 관해서도 루마니아는 소련이 주도한 공산 중국 탄핵을 위한 국제 회의에 반대하는 한편, 서방측 제국과의 정치적, 경제적 접촉은 게오르기우데지 정권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루마니아의 수출입에서 차지하는 소련의 비중은 1960년 40.1%, 1965년 38.8%, 1967년의 28.2%로 해마다 감소되었다. 1968년의 체코에의 군사 개입 때에 당 중앙 위원회와 정부는 즉각 합동 회의를 열어 군사 개입을 '내정 간섭'으로 강력히 비판했으며, 이때에 노동 조국 방위대가 루마니아 국내에서도 결성되었다. 그 후, 소련이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전에 루마니아는 후퇴하여 1969년 봄에 바르샤바 조약 기구 군 합동 훈련에 참가하고, 6월의 세계 공산당 대회에도 대표를 보내어 유보(留保)로서 회의의 문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같은 해 8월에 루마니아는 닉슨 미국 대통령을 초대하여 암암리에 소련을 견제했다. 그 직후에 열린 제10차 공산당 대회에서 차우셰스쿠는 당의 지도권과 당내 민주주주의의 강화, 신 5개년 계획의 요점, 과거 숙청에 대한 게오르기우데지의 책임 등에 관하여 연설하면서 "조국의 방위는 모든 시민의 의무이다."라고 강조했다. 1970년 7월에, 1968년 2월 이후 소멸된 소련과 루마니아의 신 우호 협력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고, 대소 관계는 한때 개선되었다. 차우셰스쿠의 1970년 6월의 방불(訪佛), 10월의 방미(訪美), 1971년 6월의 방중(訪中)에서 보여지는 것같이 루마니아의 다각적 외교 노선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공산주의 동유럽 국가의 다원화의 가능성의 길을 열어 주는 데 어느 의미로 매우 기여하였다.

10. 루마니아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편집]

1996년 당시 인구 2300만을 가진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불가리아의 불안속에 벗어나 루마니아 왕국을 키웠다. 인종적으로 라틴계에 속하며 일부 헝가리인을 포함하고 있는 루마니아는 동부의 베사라비아와 획득했으나 소련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매우 반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왕국이 붕괴되고 1947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인민 공화국으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루마니아는 단 한 번도 민주적 체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1964~1989년 사이 25년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çescu)는 민족적 공산주의와 신 스탈린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루마니아의 전제적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루마니아는 19세기 이래로 민족적, 민중적 반란의 전통이 강한 지역이었는데 1947년 곧장 공산당이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다. 발칸의 다른 지역과 달리 공산 정권 수립 과정이 그처럼 강압적이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불가리아나 유고슬라비아와 달리 루마니아에서는 토착 지배 계급이 매우 강하였고 비교적 서구 지향적인 도시의 중산 계급이 존재하였으며, 강하게 반 러시아적 정치 문화가 존속한 탓이었다.

루마니아는 결코 소련에 충성스러운 체제는 아니었으며 1960년대 내내 소련 공산주의와 대립하였다. 동시에 공산 중국과는 친교하였다. 루마니아의 공산 체제는 차우셰스쿠 지배 동안 매우 인민주의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이었다. 그 이유는 루마니아에서 정치 결정은 차우셰스쿠 개인과 그 가족 및 측근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권력은 이들에게 독점되어 있었고, 법적 절차는 제도가 부재하거나 결핍되었다. 대다수 국민은 제도와 연결되지 못하고 지역적이거나 수동적이며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현상은 차우셰스쿠의 몰락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새 정부하에서도 권위주의적 독재자와 엘리트는 비 계몽된 대중을 동원하거나 직접 접촉함으로써 정치 변화를 일으키고는 하였다.

1980년대 말 루마니아 공산주의 체제가 경제적 위기에 부딪히면서 국내외 불만이 증폭되어 갔다. 차우셰스쿠는 사회주의 체제의 오류와 실수는 사회주의 이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계획의 잘못된 시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루마니아의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하면서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이 사회주의를 팔아먹은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오타 시크(Ota Sik)의 시장 경제 지향의 개혁을 자본주의를 복구하려는 음모라고 비난하였다.

또 그는 다원주의를 원하는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이양해 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공통된 하나의 유형이 존재한다는 교조적 입장에 대항해 루마니아는 투쟁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폴란드의 자유 노조인 '자유 연대'의 형성을 막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국가들이 단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5주일 후 1989년 12월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도시 티미쇼아라(Timişoara)의 시민들은 처음으로 압제국 루마니아의 전통을 깨고 차우체스크 체제를 비판하는 헝가리 출신 라즐로 토케스(Laszlo Tokes) 신부를 비밀 경찰의 체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집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티미쇼아라는 바나트(Banat) 주의 수도로서 여기에서는 특히 인종과 문화가 혼합된 지역이었다. 이 집회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저항 세력 중 약 2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이 저항은 트란실바니아로 확산되면서 서서히 격렬한 전국적 시위로 전환되는 사태로 비화되었다. 티미쇼아라 봉기는 민주주의 열망과 소수 민족의 인권의 존중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작되었으나 수도 부쿠레슈티로 확산되면서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차우셰스쿠는 경제 원조 문제로 이란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12월 21일 수도 부쿠레슈티의 혁명 광장에서 반사회주의적인 반란자를 탄핵하기 위하여 대중 집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군중은 그의 집권에 등을 돌리고 '차우셰스쿠 물러나라!'는 구호와 함께 공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놀란 차우셰스쿠는 건물 발코니에서 후퇴하였고 보안 경찰이 탱크와 진압 가스로 반란자들을 유혈적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곧 혁명 광장에서는 혁명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군중의 시위에 곧 지식인, 청년 세대, 시민들이 발포하는 비밀 경찰과 군대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중심부로 가세 집결하면서 시민의 수는 계속 늘어만 갔다. 정부 청사를 공격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국방장관 바실 밀레아(Vasil Milea) 장군은 서기장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총을 쏘고 자살하였다. 곧 혁명 군중은 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텔레비전 방송국 등 언론 매체를 장악하고 루마니아에서 혁명이 발발했음을 방송하였다. 이어서 7만 5천 명의 보안 군대는 무장한 민병대와 충돌하게 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오히려 혁명 군중에 합류하였다.

루마니아 공산당 중앙 위원회 건물, 왕궁, 국방부 건물과 텔레비전 방송국 센터는 양 세력 간의 격전지로 변하였다. 이 폭동으로 수천 명이 사살되었으나 민중은 오랫동안 증오하던 억압적인 독재 정권을 타도하였다. 이에 놀라 달아나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피신 중에 체포되어 크리스마스 날에 총살 처형되었다. 이로써 1989년 루마니아의 변화는 발칸 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제도적으로도 불안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 루마니아어로는 "로므니아"에 가깝다.[2] 주로 슈바벤이나 체코의 자텍(zatéc)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