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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나이웨이
芮乃偉 / Rui Naiwei
직업
소속
생년월일
국적
출신지
학력
입단
단급
九단

1. 개요[편집]

20년 이상 세계 최강으로 군림한 여자바둑계의 절대자이자 세계 정상급의 남자선수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바둑역사상 유일한 여류기사. 또한, 세계 여자바둑계의 스승.
루이나이웨이(芮乃偉:예내위). 1963년 12월 28일 생. 별명은 철녀. 혹은 반상(盤上)의 마녀.[1] 다만 성격 자첸 착하고 잘 웃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좋아하는건 오직 바둑이라고 한다. 1985년 입단하고 바로 그 해 연말에 七단에 오르고 1988년에 九단이 된다.

이창호 프로가 16년 동안 1위를 한 것으로 유명한 goratings ELO 랭킹에서 루이나이웨이는 1983년부터 2013년까지 무려 30년간 여류기사 1위였으며, 전성기라 볼 수 있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남녀 기사를 모두 포함한 전체 랭킹에서 20위 이내에 들었다. 2016년 현재 200위 내에 여자기사가 단 뿐이며, 그 두 명도 두 자리와 세 자리 순위를 오가는 것을 보면 루이나이웨이가 얼마나 대단한 족적을 남긴 전무후무한 최강의 여류기사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커리어도 압도적인데, 루이의 커리어와 비교했을 시 절반은 커녕 1/3에도 미치는 여성기사가 드물 정도. 당대엔 장쉔, 조혜연 정도가 루이의 경쟁상대로 꼽혔으나 냉정하게 따져 엄청난 격차가 있었고, 현재 루이를 제치고 여류기사 세계 최고를 두고 경쟁중인 위즈잉과 최정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쉽게 말해서, 남자바둑에서 역대 최고의 기사가 누구냐를 묻는다면 이창호와 오청원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두어명의 기사가 더 언급될 수 있겠으나 여자바둑은 그런 거 없다. 그냥 이론의 여지 없이 이 사람 하나면 끝.

2. 프로필[편집]

바둑 중국 상하이기원 소속. 원래 1985년 입단하고 중국기원 소속이었으나, 중국 바둑계의 남녀차별과 당시 중국 바둑계 1인자였던 녜웨이핑과의 트러블[2] 등으로 결국 중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 등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999년 한국으로 옮겨 한국기원 소속이 되었고, 2012년에는 중국으로 돌아가 상하이기원 소속이 되었다.[3] 아마도 이 이후로 한국기원 은퇴기사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바둑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칭위엔(吳淸源) 九단의 제자이다. 말하자면 우칭위엔 사범의 사제인 조훈현 사범은 루이 九단의 사숙이 되는 셈.

1980년도부터 중국 국가대표로 활약했을 정도로(참고로 프로입단 전이다.) 그 실력은 어렸을때부터 세계구급 수준이었으며, 1988년 여성 최초로 九단으로 승단했다. 그러다가 연인인 장주주 九단이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 벌어지자 베이징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를 하는 바람에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 둘 모두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은 베이징에서 홍콩, 대만,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사랑의 도피 망명하였다.[4] 1993년 제2회 응씨배에서 주최자 잉창치가 이들의 출전을 허용하면서 중국측 기사들이 전원 불참하여 흥행이 우려되었으나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이창호(당시 五단)를 꺾으면서 바둑계의 일대 충격을 안겼고, 승승장구해서 4강까지 진출, '마녀'[5]란 별명을 얻게 된다.[6] 당시 2년 동안 프로레벨의 바둑을 두지 못한 그녀는 4강에서 지고 나자 울었다고 한다. 패한게 분해서 운게 아니고 2년 동안 바둑에 굶주려있다가 원없이 둔 후에 더이상 바둑을 둘 수 없다는게 서러워서 울었다고. 그리고 제2회 응씨배가 열렸던 도쿄에서 장 九단과 결혼을 하였고, 그때부터 망명생활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옮기게 되고 중국 이외의 기원에서 객원기사로써의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게 된다.

처음에는 일본기원 소속으로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일본기원은 거절. 중국과의 관계를 생각한 일본의 소극적인 태도였다는 이유도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기원 소속 여류기사들의 반대가 심한게 가장 큰 이유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기원 차원에서 기사들을 불러모아 기사회 투표를 해서 결정되는게 일반적인데 여류기사들의 반대로 무산된 셈.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낸 한국기원으로 장주주 九단과 함께 오게 되었다.[7] 러브콜한 이유는 루이나이웨이라는 거물이 오면 한국여류기사들의 실력이 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고. 암튼 10년만에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서 한국기원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들어올때 기사회 투표가 있었는데 일본 여류 기사는 다수가 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안받았는데 한국 여류 기사들은 와도 좋다라고 동의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윗 문장에선 일본은 기사회 투표 안했다메 이것은 한국 여류 기사들의 대담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결국 루이에게 단련된 한국 여류기사들은 이후 세계여류바둑대회에서 10회의 우승을 기록함. 당시 한국 여류바둑계의 에이스였던 박지은 九단이 적극적으로 루이 한국행 찬성을 밀어붙였다는 후문이다.

전세계에서 여류기사로서는 당시 적수가 없었으며, 2000년 국수전에서는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창호 九단을, 도전기에서 국수 조훈현 九단을 연파하고 여류기사로서 최초로 타이틀을 따내 큰 충격을 안겼다. 특히 전신(戰神)이라고 불리는 조훈현 九단을 난전에서 제압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야말로 당시 세계최강바둑국가인 한국의 가장 권위있는 타이틀을, 여류기사가 이창호와 조훈현이라는 거대산을 넘어서 우승한 불후의 업적. 1992년 잉씨배 4강과 함께 루이나이웨이 바둑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금자탑이며 바둑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이다.[8] 게다가 3전 2선승제에서 첫판을 패한 뒤 두 판 연속 불계로 역전승을 이뤄냈다. 도전1국에서 163수만에 돌을 던진 터라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을텐데도 그 다음 2국에서는 155수만에 불계승, 그 다음 마지막 3국에서는 199수만에 불계승으로 국수위를 쟁취했다. 말하자면 3.3혁명과도 같은 사건인 셈. 사실 루이 九단의 말로는 조국수를 이겼을 때보다 이 九단을 꺾고 도전기에 진출했던 순간이 더욱 기뻤다고. 실제 이창호 九단과의 대결에서는 155수보다 더 빠른 147수만에 불계를 얻어냈다. 흠좀무.

재미있는 기록으로, 2003년 맥심배 입신최강전 준우승이 있다. 이 기록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 대회 우승자가 남편인 장주주 九단이었기 때문. 세계 바둑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부부 결승전이었다.

또한 다음 대회인 2004년 맥심배 입신최강전[9]에서 우승한 것 역시 바둑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으로 꼽히는데 여성기사가 남성기사를 꺾고 우승한 또 하나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당시 결승전 상대는 유창혁 九단.[10]

다만 그 후 한국에 온지 3년만에 조혜연 九단에게 무너지며, 하락세를 타는 것 아니냐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훼이크였다, 바로 타이틀을 되찾는 등 여제의 위상을 맘껏 과시했으며, 이 외에도 각종 여류 기전을 휩쓸며 여류바둑의 최강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여제이자 한국 여류기사들이 넘어야할 거대한 산. 놀라운 것은 바둑이 발전함에 따라 신예 기사들의 기본기가 탄탄해지면서 과거와는 달리 20대~30대 초반까지를 바둑기사의 전성기로 보는데, 루이나이웨이는 그 나이를 20년 이상 넘겼지만 아직도 정상권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루이가 홀로 고고한 세계 최고의 여자바둑기사라고 볼 수는 없으나, 루이를 기력으로 압도한다고 볼 수 있는 여자기사도 아직은 나오지 않고 있다. 2016년 기준 우리 나이로 무려 54세임에도. 다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매년 조금씩 후배들에게 밀려나는 모습은 안타깝게 여겨진다. goratings 랭킹에서는 50대가 되어서야 여자기사 1위를 내어줬다. 루이와 띠동갑인 이창호가 더이상은 정상급 기사라 불릴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루이의 위대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루이는 최전성기를 누려야 할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를 제대로 바둑을 두지 못하며 보냈다는 것이다. 3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 루이가 보여준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저 시기에 공백 없이 대회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위대한 기록을 쌓아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단지 여자기사 중에서 최고인 수준을 넘어, 정말로 역대급 남자기사들에 비교될 만한 커리어를 쌓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루이는 이창호에게 유난히 강한 기사로, 상대전적이 6:2인 시절도 있었다. 스포츠에 만약은 없다지만, 정치 문제로 희생양이 된 부분은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 없다.

루이나이웨이의 압도적인 실력과 훌륭한 인성 덕에 한국 바둑팬들도 그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원체 압도적인 실력이다보니 한국선수들을 압살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툴툴거림도 있었다. 덕분에(?) 묶여서 많이 까이는 선수가 바로 위에 언급한 조혜연 九단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루이나이웨이를 몇 번 이기며 그야말로 미래의 대항마로 꼽히던 조혜연 九단이었건만, 대학생이 되어 바둑에 올인하는 대신 인문학을 공부하고, 종교활동 하면서 종교상의 이유로 일요일에는 절대 대회를 안나갔기 때문에 바둑에 올인 안한다고 까이기도 했다.니들이 두던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종교상의 이유로 일요일에 하는 페어전은 안나가겠다고 해서 엄청 까였다. 오죽하면 새로운 취미로 클래식 감상이 생기자 그것마저 까이기도.(...)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중국대표로 정관장배에서 중국을 두차례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루이 9단의 재미있는 점은 리즈 시절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하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앞서 말했듯이 이창호, 조훈현 등 당대의 강자들도 이기고 다녔지만 정작 세계대회 예선전 같은 곳에서는 인지도 없는 듣보잡(...)급 기사들에게 져서 광탈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했다.[11]

2010년 아시안 게임 중국대표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보스놀이 하겠지 했는데, 예상과 달리 결승전에서 맞붙은 한국의 이민진에게 시종일관 앞서다 끝내기에서 1집반 역전패를 당해서, 금메달을 한국 여자 대표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50세가 되는 2012년부터는 13년간 활동해 온 한국 기원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문에 아쉽게도 도전기인 여류명인전 2011년 타이틀은 반납하게 됐다. 한국 여자 기사들의 실력을 진일보 시켜준 최대 공신이자, 한 시대의 상징. 중국으로 떠나긴 했지만 국제기전엔 꾸준히 참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LG배나 삼성화재배 기전 땐 한국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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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여자바둑리그 승리 세리머니.

중국 생활이 안정된 2016년부턴 다시 한국여자바둑리그에 참가중이다.(경기 SG골프팀) 그리고 나이가 쉰을 넘어서 이제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대만 출신 셰이민 六단(경기 호반건설), 중국 출신 위즈잉 五단(서울 부광탁스) 등과 함께 여전히 여류바둑기사들의 보스놀이(...)를 하고 있다.한국기원 내 DB에서는 은퇴기사로 기록되어 있지만

3. 수상경력[편집]

1988년 : 九단.
1986, 87, 88,89년 : 전국개인전 여자부 우승
1992년 : 제2회 응씨배 4강
1994년 : 제1회 보해배 우승.
1996년 : 제3회 보해배 우승.
1997년 : 제4회 보해배 우승.

1999년
00.00 3월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한국 활동 시작.
00.00 제4회 삼성화재배 본선.
07.00 제6기 프로여류국수전 우승

2000년
00.00 제43기 국수전 우승.
08.00 여류프로국수전 우승.
00.00 동팡항공배 우승.
00.00 바둑문화상 '여류기사상' 수상.

2001년
00.00 LG정유배 준우승
02.00 여류명인전 우승
00.00 흥창배 우승

2002년
01.00 제8기 여류국수전 우승.
00.00 제4회 맥심배 준우승.[12]
00.00 바둑문화상 '여류기사상' 수상.
10.00 여류국수전 우승

2003년
02.00 제4기 여류명인전 우승(3연패 달성).
00.00 제1회 정관장배 우승 주역.(통산 세계여류대회 7연패 달성)

2004년
제23기 KBS바둑왕전 본선.
제9기 박카스배 천원전 8강진출.
제5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대 유창혁).
2004한국바둑리그 본선(한국얀센 2장).
제1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백호부 우승.

2005년
01.04 제6회 여류명인전 우승(대 조혜연. 타이틀 탈환 성공)
00.00 2005 중국을조리그 출전.

2006년
01.27 제7기 여류명인전 우승 (대 조혜연 2-1, 대회 2연패)
02.15 제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주작부 우승(대 조혜연)
03.20 제11기 여류국수전 우승 (대 조혜연 2-0)
11.16 제1기 여류기성전 우승(국내여자기전 전관왕)

2007년
01.26 여류명인전 우승(대 이다혜 2:0, 대회 3연패)
03.15 여류국수전 우승(대 조혜연 2:0, 22번째 타이틀 획득)
00.00 KB국민은행 2007한국바둑리그 출전(전남 대방노블랜드)
00.00 제3회 원익배 십단전 본선
11.22 제2기 여류기성전 우승(대 김혜민 五단 1:0)

2008년
01.18 제1회 원양부동산배 준우승(대 박지은 八단 1:2)
01.21 제9회 여류명인전 우승(대 조혜연 七단 2:0)
08.02 제13회 삼성화재배 본선진출
09.26 제3기 여류기성전 우승(대 김윤영 初단 1:0)-생애 통산 25번째 우승

2009년
01.21 제10기 여류명인전 우승(대 조혜연 八단 2:1)
03.09 제14기 여류국수전 우승(대 이하진 2:0)
04.29 제3기 지지옥션배 본선 진출

2010년
02.08 제11기 여류명인전 우승(대 조혜연 八단 2:1)
03.24 제12기 여류국수전 우승(대 조혜연 八단 2:0)
06.30 제4기 지지옥션배 본선 진출

2011년
02.18 제11기 STX배 여류명인전 우승(대 조혜연 八단 2:1)
03.08 제16기 가그린배 여류국수전 우승(대 김윤영 三단 2:0)
10.02 제5기 부안 여류기성전 우승(대 최정 初단 1:0)

정식기전외
광저우아시안게임 여자단체전 은메달(대 한국)

이후 타이틀 획득시마다 수상내역들을 추가바람

4. 어록[편집]

Q : 바둑은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여자가 더 잘하는데 바둑에선 왜 여자가 남자보다 약할까요.
A : “(여자가 남자보다) 감성적이고 이성적 힘이 부족하고 시야가 좁은 것 같아요. 두뇌가 다른 게 아닌가 싶어요. 여자가 남자를 이기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어요. 여자가 남자를 이기면 “여자 아니다”고 말하는 거죠. 또 여자 스스로 남자한테는 안 된다는 자격지심도 있고요.”
- 전 여류 최강자 루이나이웨이 九단(2011년) 기사
[1] 한국생활 당시, 당사자가 '마녀'란 표현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 알려진 후로 한국기자들도 이 표현을 자제한다. 즉, 원래 별명이 마녀였는데 철녀로 바꿔줬다.[2] 녜웨이핑과의 바둑에서 루이가 이긴 적이 있었는데, 녜웨이핑이 '내가 새로운 수를 시험삼아 두다 졌다'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했는데 기자에게서 그 질문을 들은 루이가 '신수 같은거 없었는데요?' 라고 대답을 해서 녜웨이핑이 개망신을 당했고(...), 이후 중국바둑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녜웨이핑에게 밉보이게 되었단 평이 많다.[3] 소속기원을 기준으로 하는 국제기전에서는 일본기원 소속 조치훈 九단이 일본대표로 나오는 것처럼, 루이나이웨이 九단도 한국기원 소속일때는 한국대표로 출전하였다. 반대로 정관장배 같은 국가대항에서는 중국대표로 나온다.[4]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을 거쳐가는 상황에서 장주주 9단이 중국 공산당 측에 의해 잡힐 뻔 하기도 했다. 지독한 넘들[5] 마녀? 철녀? 맨 위 참조.[6] 당시 우승은 서봉수 九단이 하였다.[7] 이때 루이 九단과 장 九단을 한국기원에 소개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드라마 올인의 모델이었던 차민수 四단이었으며, 사숙인 조훈현 九단의 도움도 컸다고.[8] 당시 김대중 대통령 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가 여성으로서의 업적을 치하하며 축전까지 보냈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장주주와 루이나이웨이가 같이 귀국했을 때도 수배가 해제되지 않은 장주주를 체포하지 않았다.(...)[9] 프로 九단들만 참여할 수 있는 제한기전. 제한기전이기는 하나 나이제한이나 성별제한과는 달리 단수 제한, 그것도 저단자 대회가 아닌 고단자 대회이므로 사실상 도전기 우승과 동급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역대 우승자가 유창혁,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박정환 등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10] 2016년 현재까지 루이웨이나이를 제외하면 남성기사를 꺾고 기원 주관대회에서 우승한 여류기사는 루이 9단이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한 위즈잉이 유일. 하지만 제한 기전이었기 때문에 임팩트가 좀 떨어진다. 위즈잉이 우승한 대회는 신인왕전으로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입신최강전보다는 확실히 격이 떨어지는 대회이다.[11] 실제로 저때 당시 국내 바둑잡지에서 이런 점을 아예 대놓고 만화로 그려서 내놓기도 했다.[12] 우승은 남편이 했다. 부부가 결승에서 맞붙은 진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