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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대기
2.1. 출생 당시 환경
2.1.1. 부족2.1.2. 메카의 상황
2.2. 어린 시절2.3. 청년기2.4. 각성2.5. 헤지라(聖遷, 이슬람 기원)2.6. 지하드(聖戰)2.7. 귀환2.8. 정복 이후 죽음까지2.9. 사후
3. 이름 표기4. 비판
4.1. 사생활4.2.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4.3. 유대인 문제
5. 이야깃거리6. 아랍 남성 이름

1. 개요[편집]

رسول الله
주(알라)께서 보내신 자[1]

이슬람의 창시자로, 풀 네임은 '아부 알-까심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라 이븐 압드 알-무탈립 이븐 하심 빈 압드 마나프 알-꾸라이시'이다.

이슬람을 타 종교로 보는 비무슬림 입장에서야 쉽게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이슬람 기준으로는 무함마드가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므로 무슬림들은 결코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이 우주가 창조될 때부터 있었으나, 잘못된 방법으로 인류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신이 무함마드를 내려 보냈다고 가르친다.[2]

생몰년월은 서력 570년 4월 22일?~ 632년 6월 8일? 정도로 보인다. 무함마드의 실제 생몰년월의 정확한 서력/양력 날짜는 제대로 장담할 수 없다. 수니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코끼리의 해 라비 알아우알달[3] 12일에 태어났다고 하고 시아파 전승에서는 동년 동월 17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코끼리의 해를 보통 서기 570년이라고 보지만, 568년이나 569년, 혹은 571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라비 알아우알 달 12일을 환산한 날짜도 4월 20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22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수니파 내부에서도 무함마드의 생일이 라비 알 아우알달의 12일이 아닌 다른 날짜라는 주장이 있다.

무함마드의 정확한 사망일자도 확언할 수 없지만 사망년도가 632년임은 분명하다.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에게 아부 바크르가 "선지자께서 돌아가신 날짜가 언제인가?"하고 묻자, 아이샤가 "월요일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아이샤조차 월요일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날짜는 몰랐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일단 무함마드가 죽은 날이 이슬람력으로 라비 알아우알 달이었다고 말한다. 대중적으로는 라비 알 아우알 달 12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역시 수니파 전승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다고 말하는 날이다. 대중적인 속설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무함마드는 자기 생일에 죽은 셈이다. 그러나 라이 알 아우알 달의 다른 날짜를 지목하는 이슬람 학자들도 많으며, 시아파는 아예 라비 알아우알달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무함마드가 양력으로 6월 8일에 죽었다는 설명은 수니파의 대중적인 통설에 따라 서기 632년의 라비 알 아우알달 12일에 죽었다고 가정하여 환산한 것이다.

이슬람 기준으로 알라의 25번째 예언자이자 14번째 사도이다. 쿠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예언자나 사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예언자와 사도는 혼용되어서 쓰이고 있지만 그 둘의 의미는 다르다. 사도가 예언자보다 더 좁은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그냥 예언자로만 일컬어지는 인물들보다 사도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이 더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예언자는 이전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면 사도는 예언자의 역할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경우 무사(موسى, 모세)의 구약, 다우드(داود, 다윗)의 시편, 이사(عيسى, 예수)의 신약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서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쿠란을 계시받아 전달함으로서 사도의 역할을 다했다.

'코끼리의 해' 에 탄생하였다고 하며[4] 태어난 해의 별명인 '코끼리의 해' 는 코끼리 부대의 침공을 받아서 코끼리해라고 한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태어난 해는 그의 친할아버지도 모른다고 한다(...) 저쪽 사람들 문화 자체가 태어난 해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쓰는 기준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두자.

오래 전만 하더라도 이슬람권에 대한 무지로 서구식 표기인 마호메트라고 표기하기도 하고 국립국어원에서도 두 가지 표기를 다 인정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마호메트'라는 표현에는 그를 악마(Mahound)로 여기는 서구의 경멸적 시각이 담겨있다고 여긴다. 유럽 쪽의 악마 바포메트가 무함마드의 이름이 약간 변형된 것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가 보기엔 그게 그거일 수도 있겠으나 무슬림에게는 굉장히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이해가 개미 눈꼽만큼 진전된 지금에는 '무함마드'라는 표기가 더 자주 보인다.

이슬람을 숭상하는 모든 문화권에서는 무함마드의 초상화나 그의 동상 같은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위 그림과 같이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그림이더라도 얼굴은 묘사되지 않는다. 사실 위의 그림도 무함마드의 형상화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시아파를 국교로 삼은 페르시아(사파비 왕조)였기에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지 않는 선에서 타협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 수니파 지역이였다면 얄짤없었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우상 숭배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영화를 보아도 무함마드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대기 영화인 The Message[5]에서는 카메라맨이 무함마드인 것 같은 연출을 사용하여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는 방식을 사용한다FPS. 화면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 식으로 연기한다. 무함마드의 우상숭배를 금지한다고 하지만,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쿠란 4:80절을 보면, '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 곧 알라에게 순종하는 자이거늘' 라고 한다.

2. 일대기[편집]

2.1. 출생 당시 환경[편집]

2.1.1. 부족[편집]

아랍 역사에서 개인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부족이다. 아랍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족(부족)에 속하게 되며 이에 속하지 못하면 보호받지 못한다.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혼자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무함마드는 상어를 토템으로 삼은 꾸라이시 부족의 하심 씨족으로 태어났다. 가계도는... 하심이 압둘 무탈립(압드-알 무탈립)를 낳고 무탈립이 압둘라(압드-알라)를 낳고 압둘라가 무함마드를 낳았다. 가계도대로라면 무함마드는 하심의 적통 증손자이지만, 이슬람 자료에서 전하는 무함마드의 가계도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메카의 으뜸가는 미남이었다고 하며, 아미나와 결혼하여 무함마드를 낳았다. 이 외모를 무함마드가 이어받은 듯하다. 그러나 아버지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한 지 3개월만에 여행 중 사망한다. 안습. 미인박명도 아니고 그리고 '아미나' 가 빛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빛으로 태어나는 건 예언가의 필수요소인 듯 싶다. 예수를 두고 라틴어로 lumen de lumine(빛에서의 빛), nata lux de lumine(빛에서 난 빛)이라 일컫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슬람 자료에 따르면 아미나는 평생 동안 남자라고는 압둘라만 만나 무함마드만을 낳았다. 그러나 아미나가 했다고 전하는 말에는 "무함마드를 임신했을 때는 다른 어떤 임신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라고 하여, 다른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는 투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도 있다. 압둘라가 아미나와 결혼하는 바로 그날, 할아버지 무탈립이 아미나의 사촌누이 할라와 결혼하여 함자라는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압둘라가 결혼한 지 3개월만에 죽었다고 하므로, 압둘라 부부와 같은 날에 결혼한 무탈립-할라 사이에서 태어난 함자는 무함마드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어려야 한다. 그런데 함자는 무함마드보다 4살이 많다고 전한다. 무함마드가 아예 압둘라의 핏줄이 아닐 가능성마저 있는 것이다. 이슬람계에서는 이 문제를 피하고자 여자의 임신기간이 최대 4년, 혹은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 아미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린 아기 무함마드를 베두인족에게 보내 키워달라고 하였다. 아미나의 행동은 당시 아랍 기준에서도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현대의 우리로서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무함마드는 베두인족 유모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 2년 뒤 베두인족은 무함마드를 돌려보내지만 아미나는 다시 보내었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6살이 되었을 때 아미나마저 사망했다. 아미나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에 있는 아브와(Abwa)라는 지역에 묻혔다.[6]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립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11살에 할아버지가 죽고 압둘 미나프(무함마드의 숙부. 후에 아부 탈립로 불린다[7])' 가 족장이 된다.

이슬람 측에선 무함마드를 이스마일의 후손으로 여긴다. 사실 무함마드 뿐만 아니라 당시 아라비아 반도 중부에 살고 있던 아랍 씨족들도 다 이스마일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이에 따라 무슬림들은 이스마일아브라함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이들이 옛날의 선지자들과 무함마드를 연결해주는 고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무함마드가 다윗의 멀고 먼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예수와 멀고 먼 사촌이란 이야기. 물론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도 없고 거짓이라고도 증명할 수도 없다.(...) 아브라함교 신자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2.1.2. 메카의 상황[편집]

당시 메카의 인구구조는 소수의 거상과 절대다수의 노예(...)로 구성되었다. 해방노예라도 사실상 주인이 있는 어쨌거나 노예인 자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장사 혹은 용병 일 등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방문한 기독교인(외국인), (가난한)장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 있었다.

한마디로 거상과 그지들밖에 없단 소리다. 그리고 이 틈을 타 몇몇 여성들이 상업활동에 뛰어들어 거상이 되었다.

2.2. 어린 시절[편집]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결혼한 지 3개월만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도 전에 여행길에서 죽었다. 무함마드는 어머니 아미나(Aminah)의 뜻에 따라 태어난 지 7일만에 사막으로 보내져, 베두인 여인 할리마(Halima)의 손에서 자랐다.[8]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2세 때에 할리마의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뛰어와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함마드를 눕혀 배를 가르고 엎드리게 했다”는 말을 할리마에게 전했다. 할리마와 남편은 무함마드가 신들린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무함마드는 6세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함마드의 어머니 아미나는 그를 데리고 메디나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병이 들어 아브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9] 그 후 무함마드는 조부(Abu al-Mutalik)와 함께 살았으나, 80세가 된 조부마저 그가 8세 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가난한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2.3. 청년기[편집]

가난한 고아인 무함마드는 나이가 무려 25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대단한 노총각이었다. 사촌누이에게 청혼한 적이 있지만 그 아버지(즉 삼촌)에게 퇴짜맞았다. 사촌간 결혼이 당시 기준에는 이상적인 결혼이라, 무함마드도 나름대로 자기가 결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퇴짜를 맞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상단의 주인 카디자와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카디자는 부유한 미망인이었으나 40대라 무함마드와 워낙 나이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카디자의 집안을 포함하여 아무도 이 결혼을 추천하지 않았지만, 결국 누님 카디자의 적극적인 구혼과 공작 ...에 힘입어 가까스로 두 남녀는 결혼할 수 있었다. 이때 카디자는 자기 아버지가 결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골어떨어지게 한 뒤 헤롱거리고 있을 때 번개같이 무함마드와 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카디자의 아버지는 술이 깬 뒤 사실을 알고 불같이 분노했으나, 결국 결혼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때가 서기 595년쯤, 무함마드 나이 25세 무렵일 때였다.

이에 대해 카디자의 나이가 40세보다는 좀 더 젊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녀는 무함마드와 금슬이 좋아 6남매를 두었는데 40대 여성이 아이를 6명이나 낳기란 절대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6명씩이나 자식을 낳았다는 말 자체가 과장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무함마드가 나중에 젊은 아내들을 많이 들였을 때에는 자식을 1명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얻은 아들 한 명도 무함마드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으니 말 다했다. 또한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포교하던 시절 '고자'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어, 과연 카디자가 낳은 6 자녀가 과연 무함마드의 자식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중동 문화에서 40이라는 숫자가 '완성' 완벽'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카디자의 나이가 40세로 알려진 것도 이 부분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슬람 자료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무함마드가 메카 사람들에게 존경받은 사람인 듯이 묘사한다. 하지만 삼촌에게 결혼을 허락받지 못하고, 카디자와 결혼할 때에도 카디자의 아버지가 극렬하게 결혼을 반대했음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전혀 인망이 없는, 천시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함마드는 꾸라이시는 물론 하심 씨족에게서마저 "우리 집안 혈통이 아니다"라며 비꼬는 소리, 혹은 시(詩)를 들었고, 이는 두고 두고 컴플렉스가 되어 자기 혈통을 의심하는 말을 들을 때면 극도로 분노했다. 이 때 무함마드를 비하하며 지은 시들도 100년 넘게 전해졌으나, 선지자에게 불경한 짓이라 하여 이슬람 역사가들이 이런 시를 없앴기 때문에 지금은 한 수도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간접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을지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카디자와 결혼한 후 무함마드의 인생은 고속도로를 탄다. 다만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아들을 낳긴 했지만 일찍 죽었다) 대신 양자를 들여 잇게 했다고 한다.

2.4. 각성[편집]

무함마드는 부유한 여자상인 카디자의 3번째 남편으로 십수 년간 무탈하게 살았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610년부터 뜬금없이 바위가 자기에게 인사를 했다는 둥 이상한 증세를 보인다.[10] 결국 카디자의 공인 아래 무함마드는 다른 일에서 손을 떼고 메카 북쪽 교외 자발룬 누르[11] 산에 있는 히라 암혈[12]에 머물며 기도하고 명상하는 등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그해 라마단 달의 어느 날 밤, 무함마드가 히라 암혈에서 혼자 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나더니 뜬금없이 외쳤다.
"읽어라!"[13]

무함마드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면서 대답하였다.

"읽을 수 없습니다."[14]

그러자 남자는 무서운 힘으로 무함마드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꽉 껴안았다가 풀어주더니 다시 외쳤다.

"읽어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다시 무함마드를 강하게 껴안았다가 풀어주더니 스스로 말하였다.

"읽어라, 삼라만상을 지으시고 응혈(凝血)[15]한 방울로 인간을 만드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주님께서는 관대하시고 그분은 깃털(펜)로 가르치셨으며, 인간에게 그들이 모르는 것도 가르쳐주셨노라."

이 남자가 한 말은 훗날 쿠란 96장(알라끄)의 첫 5 구절로 정리되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무함마드조차 몰랐으나, 나중에 메디나에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나무파일:external/mz-mz.net/CxYsK53WEAAAKlp.jpg
오늘날 히라 암혈의 모습.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생활할 만한 좁고 불편한 공간이나, 무슬림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곤 한다.


무함마드가 처음 히라 암혈에서 지브릴을 만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라마단 달의 하순이었다고만 전할 뿐이다.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라마단 달 21일부터 29일까지 홀숫날 중 어느 날이라고 한다. 인터넷상에서는 율리우스력/그레고리력이슬람력간 날짜 변환을 해주는 사이트들도 있으나, 헤지라 이전의 아랍 역법에는 이슬람력과 달리 윤달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력을 그대로 헤지라 이전 시대로 확장하여 환산할 수는 없다.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때는 서양의 역법으로는 7-8월 중 언젠가였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천문학자 이마드 앗딘 아흐마드(Imad-Ad-Dean Ahmad) 박사는 저서 천상의 표징들(Signs in the Heavens, 1992년 초판발행)에서 호킨스 등의 선행연구를 인용하여,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때가 서기 610년 (율리우스력) 7월 23일(그레고리력으로는 7월 26일) 목요일 일출 전 새벽이라고 주장하였다. 박사가 쓴 다른 논문에서도 다른 학자의 논문에서 발췌한 이미지를 실었는데, 그것에 따르면 그날 메카 시간으로 오전 4시 반 동쪽 하늘에 그믐달과 금성이 보였다. 아마 당시의 아랍 역법으로는 라마단 달 25일일 거라고...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은 그 밤을 이슬람에서는 라일라툴 까드르(권능의 밤)라고 부른다. 지금도 라마단이 되면, 특히 라일라툴 까드르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하게 보내면 그 보상이 매우 각별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므로, 그냥 라마단 하순 전체를 그날인 것처럼 생각하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자기가 보고 겪은 것에 대하여 매우 놀라 자신이 사탄에게 홀렸을지 모른다고 몹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였다. 무함마드가 자신에게 절망하여 산의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천사가 무함마드를 설득하며 막았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불안과 공포에 휩쌓여 집으로 돌아가 아내 카디자와 상담하였다. 카디자는 남편의 말을 듣고 놀랐지만, 무함마드에게 다시 그 남자가 나타나면 자기를 부르라고 말하였다.

무함마드가 얼마 뒤 다시 그 남자가 나타났다면서 카디자를 부르자, 카디자는 무함마드를 자기 무릎 이쪽 저쪽에 앉게 하면서 그 남자가 계속 보이냐고 물었다. 무함마드가 계속 보인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카디자가 옷을 벗었다. 무함마드가 그제서야 그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카디자는 아마 그 남자는 천사였을 것이며, 당신은 정말로 알라의 사도가 된 것이리라고 설명하며 무함마드를 안심시켰다. 카디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남자가 사탄이었다면 자기가 옷을 벗어도 전혀 피하려 들지 않았겠지만, 천사였으니까 여자가 옷을 벗은 모습을 보고 피했으리라는 것이었다.[16] 카디자는 남편 일에 대하여 자기 친척이며 그리스도교 수도사인 와라까(Waraqa)에게 상담하였는데, 와라까 역시 카디자와 마찬가지로 무함마드가 선지자라고 동의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3년 뒤인 613년부터 비로소 공개적인 포교활동에 뛰어들었다.[17] 나이 43살 아저씨가 되고 난 뒤에. 우선 아내인 카디자(58세), 두 양아들, 친구 아부 바크르 등 우선 가까운 사람부터 포교했다. 포교활동은 부자, 명문가의 딸, 가난뱅이 등 가리지 않았으나 노력에 비하면 거둔 성과는 미미했다. 게다가 메카의 주류세력인 꾸라이시는 노골적으로 무함마드의 주장을 거부하고 배척하여. 포교하지 않으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숙부 아부 탈립 역시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으나 그래도 키운 정인지 무함마드를 씨족 단위로 지켜주었다. 사람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려고 할 때마다 '니네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 하심 가문이 단체로 일어설 거임!' 라고 무함마드를 커버해줬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이야기하는 동안 공공의 적이 되어 아내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보이콧 대상이 되어 파산하였다. 당시 순례는 상인들의 짭짤한 소위 대박상품이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우상 숭배를 금하면서 당시 성행하고 있던 수많은 다른 종교의 우상숭배와 순례행위를 규탄했으니 당연히 이슬람은 탄압대상일 수밖에.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설파하자 사람들이 무함마드에게 침을 뱉고 흙을 뿌리며 욕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마드가 기도 중에 우크바 이븐 아비 무이드라는 자가 다가와서 무함마드의 목을 졸라 죽이려다가 아부 바크르의 제지로 실패한 적도 있었다.

거기에 파산의 영향으로 619년, 무함마드가 50세이던 때에 아내 카디자가 향년 65세로 죽고 이틀 후 숙부 아부 탈립이 죽었다. 즉 무함마드는 3일 동안 강력한 후원자 2명을 잃어버린 셈. 그리고 아브 라합이 족장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무함마드를 비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무함마드는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기준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카디자가 없는 상태로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 타이프라는 마을로 가서 포교를 시도했으나, 사람들에게 돌을 얻어맞는 등 처참한 대우를 받고 몹시 실망한 채 메카로 돌아왔다.

무함마드는 카디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부 바크르의 6살 난 딸 아이샤와 결혼하였다.

621년(52세)쯤의 어느날 밤, 알라의 권능으로 메카에서 멀리 떨어진 사원으로 옮겨진 뒤 하늘로 올라가 알라의 명령과 역대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메카로 돌아왔다고 한다. 먼저 가브리엘이 나타나 잠자는 무함마드의 가슴을 열고 잠잠 샘물로 심장을 씻은 뒤 믿음과 지혜를 넣고 봉했다. 그 뒤 무함마드를 깨워 카바 신전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부라끄(Buraq)라는 노새보다는 작지만 당나귀보다는 크고 얼굴은 사람처럼 생겼지만 날개가 달린 하얀 네발짐승이 있었다.[18] 처음에 부라끄는 무함마드를 등에 태우길 거부하였으나, 가브리엘이 부라끄를 달래며 "알라의 종에 네 등 위에 타기는 무함마드가 처음이다. 네가 이러는 것은 큰 실례다"라고 말하자 순순히 등에 태웠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부라끄를 타고 멀리 떨어진 사원으로 갔는데 여기까지를 이스라Isra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그곳에서 하늘로 승천하여 다른 선지자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네들보다 더 높은 하늘로 올라가 알라의 명령을 듣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미라즈Miraj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직 잠자리가 따뜻했다고 한다.

흔히들 말하는 무함마드의 승천 이야기가 바로 이스라와 미라즈를 뜻한다. 보통은 서기 621년에 있었다고 하지만 620년이라고 쓴 책도 있다. 혹은 헤지라 6개월 전에 있었다는 말도 있다. 또한 미라즈는 헤지라 5년(626)쯤에 있었는데 나중에 마치 하룻밤에 있었던 이야기인 양 합쳤다는 주장도 있다.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무함마드가 알라의 권능으로 옮겨진 '메카에서 멀리 떨어진 사원'은 예루살렘 성전 터, 오늘날 아크사 사원(황금사원)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초기 이슬람 자료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을 말하지 않고 그저 '멀리 있는 사원'이라고만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터로 특정된 때는 무함마드가 죽은 지 100년은 지난 뒤였다.

2.5. 헤지라(聖遷[19], 이슬람 기원)[편집]

야스립이라 불리는 땅이 있다. 비옥하고 기름진 이 땅은 아라비아에 토착한 히브리인, 아라비아 부족 등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당장 내일을 보장할 치안이 없었다. 당장 같은 아랍 부족들끼리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 끝에 이슬람의 무함마드를 중재자로 선택하였고 그를 초대했다.

출발날 당일 밤에 무함마드의 침대가 습격받았지만 무함마드 측은 이미 이를 예상해 무함마드를 대피시킨 상태였다. 습격 당시 침대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양자인 알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신 누워 있었다. 습격자들은 낚였음을 알고 분노했지만 알리를 죽이진 않았다.

알리의 희생과 여러 동료들 덕분에 무함마드는 야스립의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낚시를 했으나 메카인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그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숨은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쳐준 거미, 그들이 숨은 곳에 둥지를 튼 비둘기 등의 여러 기적 덕에 메카인들로부터 간신히 탈출해 야스립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야스립의 이름은 '마디나트 안 나비(선지자의 성읍)'로 바뀌었는데 영어로는 메디나라고 불리는 도시가 바로 이곳이다.

이것이 헤지라(성천聖遷)이다. 헤지라는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난 날이 아니라 마디나에 도착한 날을 기준으로 하며, 이 날은 서기로는 622년 7월 16일이었고 훗날 이슬람력의 이슬람 기원[20] 원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때 타고 입성한 낙타의 이름인 까스와(Qaswa, 뜻은 '귀의 1/4이 잘린')'까지 역사에 남았다.

그곳에서의 삶도 험난했는데 무슬림인 척하는 위선자들(무나피꾼) 등이 여러가지 암적 요소로 작용했다.

2.6. 지하드(聖戰)[편집]

무함마드는 메디나로 갈 때부터 메카를 공격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랍 부족들은 무함마드가 자기 소속 부족인 꾸라이시를 공격하겠다는 것을 패륜적인 행위로 여겨 손을 잡기를 거부했고, 무함마드는 결국 사막의 도적떼와 손을 잡고 동맹관계를 맺었다. 메디나의 유태인들은 어느 아랍 부족과 원한을 지는 것을 걱정하여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비록 메카로부터 탈출해 땅을 얻었으나 원주민들에게도 갑자기 증가한 인구는 부담이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갑자기 줄 땅이 땅에서 솟아날 리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굶어야 했다. 결국 선지자 무함마드는 정신나간 약탈 명령을 내렸다. 지하드의 시작이었다. 또한 유태인 남자와 무슬림간 충돌을 빌미로 삼아 해당 유태인 부족을 메디나에서 축출하고 빈 집을 자기 편에게 돌렸다.

곧 메카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625년 봄 병력 3천여 명을 이끌고 원정온 것이다. 메디나 근처 오호드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무함마드는 병력 천 명 남짓으로 대항했다. 그러던 중 위선자 3백 명이 탈영해 버렸지만 기세로 메카인들을 몰아넣었다. 그러나 재물에 눈이 팔려 진영이 무너졌고 역공당해 패배했다.

결국 메디나에서의 입지까지 위험해져 버렸다. 유대인, 위선자, 이민족 등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시인은 메카에 항복하고 무함마드의 목을 팔자고 대놓고 말하기까지 했다. 무함마드는 이번에는 천사의 계시로 유태인이 자기를 암살하려는 의도를 알게 되었다면서 역시 아직 메디나에 있던 유태인 유태인 부족 중 하나를 축출하고 재산과 집을 압류하였다. 압류된 재산은 무슬림들에게 돌렸다.

627년 메디나를 향해 온 메카의 원정부대 1만 명과 무함마드의 부대 3천 명이 참호전을 펼쳤고 우연한 모래바람 덕분에 승전했다.

그리고 적대세력의 청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 중 메카의 편을 든유대인 천여 명, 메카에 항복하자고 말한 시인 등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전에는 축출하는 정도로 끝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남자들의 목을 베고 여자들을 노예로 삼았다.

628년엔 도망간 유대인들을 추격하여 카이바르에서 이들을 학살하고 조공을 받게 된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과거엔 베두인족에게 바치던 것을 무슬림들에게 바친 걸 볼 때 이거나 저거나 큰 차이는 없었던 모양.

2.7. 귀환[편집]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에 '순례'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꾸라이시 부족과 협상한 끝에 3일간 메카에 체류할 수 있다고 허락받았다. 그 다음해인 629년엔 자신의 씨족과 화해하였고(아브 라합이 죽은 터라 수월하였다) 630년엔 무슬림의 죽음을 이유로 1만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무혈 정복하였다. 메카에 들어 오면서 "진리가 이제 왔으니 거짓은 무너졌도다!"라고 외쳤던 일화가 유명하다. 그 후 모든 우상을 파괴하고 카바 성전을 이슬람의 성소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그는 통치자가 되었다.

2.8. 정복 이후 죽음까지[편집]

귀족들에게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귀족 자리도 없다고 협박한 끝에 귀족들이 모두 무슬림이 되었고 소위 이슬람 법전이라 할 만한 신앙고백, 기도, 지즈야, 순례, 금식 등 이슬람 기본 5개조를 포함한 규칙을 공포했다.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한 뒤 처음으로 어머니 아미나의 묘소를 찾아가 어머니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알라는 무함마드가 어머니 묘소를 찾아감은 허락하였으나, 죄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거부하며, 아미나는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하였다. 이 일화는 무슬림들이 이교도 친지들을 위해 알라에게 용서해달라고 기도함을 금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슬람계에서는 '아미나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무함마드가 직접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어야 했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상숭배의 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미나는 무함마드가 소년 시절에 죽었으니 이슬람을 받아들이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무함마드의 부모가 살아나서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죽어서 낙원에 갔다고 설명하거나, 무함마드가 실은 자기 어머니 아미나에게 원래부터 분노하는 감정이 있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었다.

무함마드에 대해서 근대 서구에서는 탐욕스럽고 호색한이며 편협하고 잔인한 혹세무민의 정복자 정도로 폄하하였다. 현대에 들어서는 사회개혁 운동가로서의 면모와 박애주의,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을 겸비한 인격자라고 일각에서 재평가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재평가가 잘못이며 근본적인 인격 자체에 문제가 많다는 반론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무함마드는 검소하기로 유명했는데 통치자가 되고 나서도 거친 깔개 위에서 잠을 청했고 한 되도 안되는 보리와 물, 약간의 대추야자로 끼니를 때웠으며 그가 죽고 나서 남은 것은 생전에 끌고 다니던 당나귀 한 마리와 죽고 나서 기부하기 위해 남겨놓은 약간의 땅밖에 없었다고 한다. 뒤에 2대 칼리프가 되는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이런 생활상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로마페르시아의 황제[21]들은 현세를 즐기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도이신 당신께서는 이런 보잘 것 없는 것들만 가지고 계신다' 라고 말하자 '그들이 누리는 것들은 보잘 것 없는 현세의 향락의 일부일 뿐이다. 내세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특별한 것들이니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답게 독선적이 면은 있어서 유대인들과의 종교논쟁에서 여러 번 논파당하자 예루살렘을 향해 절하던 규칙을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다. 무함마드는 유대교 교리에 그다지 박식하지는 않았고, 유대인 율법학자들 시선에선 '웬 아랍인이 요상하게 변형한 유대교'를 상대하느라 좀 잔인하게 찍어눌렀을 것으로 보인다. 논쟁 전까지는 꾸란에서 유태인들이나 그리스도교인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반면, 이 시점을 계기로 꾸란에서는 유태인들과 이교도를 사악한 자들이라고 서술하며 투쟁을 명령한다. 이런 꾸란 구절은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반유대주의의 종교적 근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이슬람 호교론자들이 이슬람을 방어하며 드는 꾸란 구절은 대게 무함마드가 약자였던 메카 시절의 계시이며, 반대로 이슬람을 공격하는 자들이 예로 드는 꾸란 구절은 무함마드가 강자가 된 헤지라 이후의 계시이다.

그는 자신이 공포한 규칙과 법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으나, 집행에서는 이중잣대를 보였다.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정한 원칙에 따라 가차없이 형벌을 집행하였으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혹은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에게는 명백히 사형, 혹은 중형을 선고받아야 할 경우에도 아무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무함마드는 명백히 권력적이고, 실용주의자였다.

그 후 632년 마지막 메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뒤 고열에 시달리며 목숨이 위태롭더니 무함마드는 처음에는 자기가 곧 쾌차하리라 생각한 듯하지만 병세가 위중해지자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하디스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이때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유언장을 쓸 테니 종이와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말했으나[22] 우마르는 "알라의 선지자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라고 하며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결국 자택에서 애처 아이샤가 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남긴 말은 "주(알라)여, 나의 사투에 함께 하소서."였다.

무함마드의 사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기 전에 유대인 여자(노예로 추정된다)가 준 상한 양고기 음식(혹은 독을 탄 음식)을 먹고 몸이 몹시 괴롭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https://wikiislam.net/wiki/Qur'an,_Hadith_and_Scholars:Muhammad's_Death 그런데 문제는 무함마드가 그 음식을 받아먹은 때가 죽기 3년 전인 카이바르에서였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말이라고 전하는 하디스를 곧이 믿기 힘들다. 무함마드를 직접 보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무함마드가 살해당했다고 확신했으며, 시아파는 범인이 무함마드의 애처 아이샤와 그 아버지 아부 바크르라고 믿는다. 무함마드가 알리를 공동체의 지도자로 내세울까 걱정되어 알라의 곁으로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무함마드 사후에 아이샤는 하디스를 2천 개가 넘게 증언하며, 아버지 아부 바크르에게 뭔가 종교적 정당성이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하디스를 제공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시신을 아야사 집에 내둔 채 당시 무슬림 공동체의 주요인사들이 모여 누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칼리파로서 공동체를 이끌지 싸움을 벌였다. 싸움은 결국 아부 바크르알리의 양자대결로 수렴하였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결국 알리는 반강제로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수니파 전승에서는 다툼이 있었던 정도라고만 설명하지만, 시아파 전승에 따르면 아부 바크르는 칼을 빼들고 알리에게 "네 집에 불을 지르겠다!"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예수처럼 사흘만에 부활할지 모른다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무함마드가 죽자마자 칼리파 직위를 두고 싸움이 벌어졌음을 생각하면, 무함마드를 가까이 보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시신은 관에 넣어 본인이 사망한 그 자리, 즉 아이샤의 집에 봉안하였다. 그 자리가 오늘날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의 초록색 돔 아래이다. 훗날 1대, 2대 정통 칼리파이자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아부 바크르, 우마르의 관도 무함마드의 왼편에 안치하고, 무덤을 보호하고자 삼중으로 벽을 쌓았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예언자의 모스크로 가서 무함마드의 무덤에 참배해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관이 안치된 공간을 둘러싼 벽뿐이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예수가 언젠가 다시 온 뒤에 이 무덤 안에 같이 안치되리라 기대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무함마드의 최후에 관하여 '죽었을 때 승천했다'라는 잘못된 정보가 있다. 승천 전설(미라즈)은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도움으로 메카에서 예루살렘의 알 아크사 사원(바위의 돔)을 경유하여 천국에 승천한 뒤 여러 옛 예언자들을 본 후 계시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말하는데, 아내 카디자가 죽고 메디나로 도망치기 전인 620년, 혹은 621년의 일이다.

2.9. 사후[편집]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제국이 중세 최고의 제국이 될 줄. 그의 사후 이슬람칼리프 통치 체제가 되었고 우스만 이븐 아판의 사후엔 시아파수니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무함마드는 고작 20여 년만에 그 방대한 아라비아 반도를 손에 넣었고 이것은 전설이 되었다. 그 손에 의해 중세 최고의 제국이 태동하였다.

알리의 사후엔 무함마드의 후손에게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며 무함마드의 혈족 하심 가도 이를 주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오스만 제국 이후에도 이들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근대에 영국에 의해 세워진 이라크, 요르단의 국왕은 하심 가의 일원이다.

3. 이름 표기[편집]

아랍어, 페르시아어, 우르두어 : محمد
영어 : Muhammad, Mohamad, Mohamed, Mohammad, Mohammed, Muhamad, Muhamed, Muhamet, Muhammed, Muhammet, Mahammad
라틴어 : Mahometus, Machometus
히브리어 : מוחמד
아람어 : ܡܘܚܡܕ
아제르바이잔어 : Məhəmməd, Məmməd
아르메니아어 : Մուհամմեդ
보스니아어 : Muhammed, Muhamed, Mehmed
알바니아어 : Muhammedi, Muhamet, Mehmet
불가리아어 : Мохамед
벵골어 : মুহাম্মাদ
힌디어 : मुहम्मद
디베히어 : މުޙައްމަދުގެފާނު، މުހައްމަދު
풀라어 : Muhammadu, Mamadou
소말리어 : Maxamed, Muxamed
쿠르드어 : Mihemed
터키어 : Muhammed, Muhammet, Mehmet
바시키르어 : Мөхәммәт
타타르어 : Мөхәммәт
카자흐어 : Мұхаммед
키르기즈어 : Мухаммед
타지크어 : Муҳаммад
카라칼파크어 : Muxammed
투르크멘어 : Muhammet
우즈베크어 : Mohammad, Muhammad
위구르어 : مۇھەممەد
러시아어 : Мухаммед, Магомед
일본어 : ムハンマド
중국어 : 穆罕默德
에스페란토 : Mohamedo

4. 비판[편집]

4.1. 사생활[편집]

몇몇 아내들을 개인의 탐욕과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결혼했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9번째 아내인 사피야 빈트 후야이는 본디 유대인 부족인 카이바르의 부족장인 케나나 이븐 알-라비(Kenana ibn al-Rabi)의 아내였으나, 정복전쟁의 일환으로 카이바르를 점령한 무함마드는 케나나를 고문해서 살해하고 가장 젊은 아내인 사피야와 결혼한다. 무함마드에 의해 가족들이 몰살된 샤피아는 자기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냥 노예로 삼으라고 했지만 무함마드는 그녀의 말을 씹고 강제로 결혼한다.

무함마드가 사피야와 첫날밤을 보내고 나와 보니 웬 남자가 천막 앞에 서 있었다. 무함마드가 깜짝 놀라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저 여자가 선지자께 해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여 있었습니다. 선지자께서 저 여자의 가족친지들을 다 죽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사피야가 자기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한 듯하다. 이슬람에서는 사피야가 무함마드의 신앙을 보고 단 하룻밤만에 무함마드 편으로 전향해 이슬람을 받아들였고, 자유의사로 무함마드와 부부가 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스톡홀름 신드롬같은게 아닌 이상 객관적으로 봐도 믿기 어렵고, 무함마드의 범죄행각까지 어떻게든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후대 무슬림들의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23]

자이납 빈트 자흐시도 양자의 부인에게 성욕을 품고 결혼한 경우인데, 무슬림들은 자이납과 결혼함을 '가장 선한 인간' 무함마드가 저지른 '사소한' 실수 중 가장 커다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함마드가 의붓아들 자이드가 없을 때 집을 방문했다가 옷을 갈아입는 자이납을 보고 은근히 그녀를 취하고 싶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의붓아들 자이드는 이를 눈치채고 아내와 이혼하기로 했다고 하자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체면상 일단 거절하는데, 눈치 빠른 자이납은 이후 남편에게 대놓고 개기며 순종하지 않았고, 이혼당한 뒤 무함마드에게로 바로 가서 결혼한다. 여기서 뜬금없이 알라가 계시를 내리는데 무슬림이라면 양자의 며느리와 결혼해도 옳다는 계시. 이 사건은 무함마드의 모든 행위를(종교 지도자로서의 면이나 정치능력과 별개로 그의 범죄행위마저도) 옳다고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보는 이슬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다.

또한 9살의 아내 아이샤와 결혼했는데, 이 때문에 소아성애자라는 의심을 받는다. 이는 첫째 아내인 카디자가 죽자마자 한 결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무함마드의 정략적 의도라고 하는 논자도 있다. 아이샤의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에게서 알라의 계시를 받아온 직후에 개종해 무슬림이 된 인물이자 무함마드 사후 초대 정통 칼리파로써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게 되는 아부 바크르인데, 이슬람의 전파에 그의 재력과 인맥이 크게 도움이 되었던, 무함마드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지지하던 아내와 부족장 삼촌이 이틀 간격으로 죽고 새로 부족장이 된 사람은 사이가 안 좋아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무함마드로써는 현실적으로도 기댈 데가 아부 바크르밖에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근대의 유럽이나 중동에서는 정략결혼을 통한 결혼동맹을 구축하는 것이 상류층 사이에서 일반화되어 있었다. 아이샤가 최측근인 아부 바크르의 딸이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로서는 매우 불안한 위치에 있던 이슬람 교단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적녀인 파티마[24]알리에게 시집보냈고, 반대로 자신도 여러 친척들이나 기타 유력자들의 딸과 혼인한 것이다. 봉건제적인 경향이 강한 곳이라면 이런 현상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아동이라고 해서 금기시되지 않았다. 전근대나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아동과의 결혼이 금기시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코란에서는 아내를 구타해도 된다고 하고 (쿠란 4:34) 어린이의 결혼을 허용하는 구절도 있다. (쿠란 65:4). 그나마 아동의 인권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아동을 결혼시키는 것이 금기시되어가던 유럽이나 아메리카와는 달리, 중동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인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진지한 논의가 있지 않았다. 때문에 설령 무함마드와 그가 이끈 이슬람교 교단이 아동의 결혼을 엄금했다고 해서 오늘날 중동에서 조혼 풍습이 사라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이슬람권에서 조혼 풍습이 21세기까지도 기승을 부리는 가장 큰 이유는 무슬림 당사자들의 조혼풍습이 쿠란에도 나와있는 예언자의 모범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어린 신부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서구식 관념을 이교도 보듯이 배척하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인것도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이슬람 국가 정부에서는 어린이를 결혼 대상으로 삼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긴 하지만 이론적으로만 있는 법제도와 개선의 여지가 안보이는(그리고 '선지자의 모범' 운운하는 궤변으로 조혼을 합리화하는) 이슬람권 국민 상당수의 후진적인 인식은 별개의 문제다.

4.2. 메카 거주민들에 대한 습격과 학살[편집]

메디나에 있던 시절, 초기 무슬림들은 타 부족에 비해 생계 유지가 어려웠는데, 이를 본 무함마드는 메카인들을 습격해서 약탈하고, 시리아를 오가는 무역 대상들의 상품을 습격해서 강도하는 것으로 재산을 축적했다. 또 무함마드는 이슬람화 되기 이전의 메카에 있는 꾸라이시 부족과 싸워 승리한 후 꾸라이시 부족과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어가는 이웃 부족민들에게 꾸라이시 부족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는데, 그는 다 죽이라는 말을 했고, 무함마드는 이를 알라의 판결이라며 옳다고 칭송한 뒤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에 대해서는 꾸라이시 부족 때문에 다 죽게 된 사람들 보고 "얘들 죽일까, 살릴까?"라고 물어본 자체는 마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지를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학살도 어느정도 정당하다는 식의 반론이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학살이 야만적인 부족문화에서 기인된 범죄행위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가족 내지 부족 단위로 무언가 피해를 당하면 이에 대해 대를 물려서라도 보복하는 미개한 아랍 전통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인권이 확립되지 못한 전근대 문화권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수준의 복수를 당연시하는 풍조는 중근동 문화권부터 멀리보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았다. 다만 무함마드와 이슬람 문화권이 타 문명과 다른 점은 타 문화권에서는 최소한 자신들의 신조를 번복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무함마드는 본인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복수법을 금지했으면서 그 말을 당사자 자신이 어겼다.

4.3. 유대인 문제[편집]

메디나에 있던 시절 유대인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 유대 부족인 바니 카이누카 지역에서 유대 상인이 유목민 여자를 희롱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과 무슬림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다. 이에 무함마드는 보름 동안의 포위전으로 유대인들을 제압한 뒤 모조리 학살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지역 유지인 압둘라의 중재로 재산 몰수와 추방이라는 벌을 내린다. 또 위의 유대인 부족 살해 및 고문 전적도 있고, 무함마드는 메카 세력과의 후다이비아 조약 이후에도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대인들에게 학살과 약탈, 추방을 자행한 전적이 있는데, 특히 유대인 거주 지역이었던 카르바르 지역으로 가서 그들을 쫓아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도를 넘은 반유대주의 행보가 꾸란과 무함마드의 행적에 근거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5. 이야깃거리[편집]

저서로는 23년간 하나님께 받은 계시들을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책인 쿠란이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쓴 건 아니고 구전되던 내용들을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낸 것.(논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예수가 신약성서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

쿠란의 시적 구조 덕분에 그는 종종 시인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쿠란은 아랍이 낳은 최고의 문학 중 하나라고 한다.

단테신곡에서는 기독교를 분리/내분시켰다는 이유로 지옥에 있다. 기독교 기준으로 이슬람은 뭔가 비슷한 점이 있지만 다른 신흥 종교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류 교파의 신자가 사이비 교파의 신자를 보는 느낌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단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 사기 지옥에 있다는 것. 이런 서술로 볼 때 그 당시에도 이슬람을 기독교의 연장으로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어떤 직위건 히스토리를 볼 수 있는데, 수니파시아파의 칼리프 직위 계보를 보면 다른 칼리프들은 다 그냥 랜덤생성 얼굴이지만 무함마드만은 정말 종교적으로 적절하게 구현되어 있다. 역설사의 역덕 기질이 정말 잘 발휘된 부분.

쿠란의 의하면 아내를 4명만을 두라고 했지만, 무함마드는 계시에 따라 13명을 두었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까지만 한 여자들은 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는 통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애처 아이샤가 "무함마드는 기도향수, 여자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는 하디스가 있다.
  1. 첫 아내 카디자 빈트 후와일리드(خديجة بنت خويلد) : 사이가 좋았던 걸로 유명. 무함마드는 그녀의 생전엔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다.
  2. 사우다 빈트 자마(سودة بنت زمعة)
  3. 아이샤 빈트 아부 바크르(عائشة بنت أبي بكر‎) 무함마드는 아이샤가 6살 때 결혼하고 9살에 부부관계를 맺어, 소아성애자 아동학대범으로 비난받는다.
  4. 하프사 빈트 우마르(حفصة بنت عمر)
  5. 자이나브 빈트 후자이마(حفصة بنت عمر)
  6. 힌드 빈트 아비 우마이야(هند بنت أبي أمية)
  7. 자신의 양아들의 부인, 그러니까 며느리이자 무함마드의 고종사촌 자이납 빈트 자흐시(زينب بنت جحش)
  8. 주와이리야 빈트 알-하리스(جويرية بنت الحارث)
  9. 몇몇 유대인 부족 정복 중 얻은 라이하나 빈트 자이드(ريحانة بنت زيد)
  10. 유대인 여자 사피야 빈트 후야이(صفية بنت حيي) 그녀의 남편이었던 키나나(Kinana)는 재산을 감춰 놓은 곳을 말하지 않아 무함마드는 키나나를 고문하라고 명령했고, 잔인하게 고문 당한 뒤 살해당했다.
  11. 라믈라 빈트 아비 수프얀(رملة بنت أبي سفيان)
  12. 이집트 콥트 정교 신자 마리아 빈트 샤문(مارية بنت شمعون)
  13. 삼촌의 처제 마이무나 빈트 알-하리스(ميمونه بنت الحارث)

이중 일부는 입지적인 의미에서(첫 아내인 사우다나 6살 난 아이샤), 일부는 과부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얻은 아내들도 있고, 개인의 정욕을 따른 결혼도 했다.

그의 아내 사랑은 당시 아랍의 모범이었고 한다. 철저히 평등의 이름 아래 매일 밤 여자 한 명씩과 잤다. 그러나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말도 사실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8번째 아내 마리아 빈트 샤문이 아들을 낳자, 너무 기쁜 나머지 마리아하고만 계속 어울려 다른 부인들의 질투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아이샤가 질투하여 마리아가 이집트 출신 남자 노예와 바람을 피워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하자, 무함마드가 분노하여 마리아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알리가 손수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그 노예가 거세되었음을 알게 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존 아랍의 전통을 깨고 부인을 딱 4명까지만 가지라고 했다. 원래 이슬람은 일부일처제가 원칙인데, 아내들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4명까지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이다.[25] 또한 여성의 유산상속권을 종교적 권위로 재확인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이슬람의 규칙으로 남아있다. 여자의 유산상속권은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무함마드가 규정하기 전에도 이미 보장되는 권리였는데, 무함마드는 이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간음과 여성의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는 시대적 한계의 탓인지 그는 뚜렷한 남성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한 아내가 남편이 바람 피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를 입증하려면 반드시 증인 4명이 필요하고 만약 4명을 못 찾으면 허위사실이라고 해서 채찍 20대를 맞아야 했는데, 남편이 아내가 바람피는 것을 알아낸다면 증인 1명만 있어도 된다는 차별적인 규정을 제정한다거나, 간통을 했다고 돌팔매질로 여자를 죽이는 당시의 관습을 용인하고, 이 점이 쿠란 및 하디스에 기록되게 하여 이후 이슬람권에서 대대로 문제로 남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대단히 심각한데, 여자가 결혼전에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면 샤리아에 입각해 돌팔매로 여자를 죽이는 관습이 아직도 이어져있고, 심지어 이슬람권 보수주의 국가들의 상당수에선 지금도 강간을 당한다 해도 남자가 문제가 아니고 강간을 당한 여자가 문제라고 해서 여자를 죽이거나, 죽이지는 않더라도 여자가 자신이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최소한의 증인 4명을 못 찾아서 되려 억울하게 자신이 처벌당하고도 자기들은 '무함마드가 도입한 훌륭한 이슬람적 법/허용한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잔인한 건 위의 조혼과 관련한 이야기에서의 인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무함마드가 없다고 해도 이런 남성주의적 관습이 고쳐진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무함마드는 생전에 무에자(معزة)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대단히 아꼈다고 한다. 기도를 하던 도중 무에자가 와선 옷자락 위에서 잠이 들자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다며 옷자락을 잘라내곤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향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무슬림들 중 상당수는 고양이를 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고양이가 마시던 물로 손을 씻기도 할 정도이다.

그에 반해서 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하게 생각해서 "개가 있는 집에는 천사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개를 실내에서 키움을 더럽게 여기고, 개가 실내에서 침이라도 흘리면 일곱 번 닦아내야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진다고 본다. 예배를 드리는데 개가 들어오면 무효가 된다고 할 정도이다. 2014년도에는 이란 보수파 의원 32명이, 애완견을 소유하거나 공공장소에서 개를 산책시킨 사람은 태형 74대를 맞고 벌금(한화로 약 35만~350만 원 상당)을 물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표결을 추진하다는 영국 신문 가디언의 기사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같은 경우 오래전, 미국 버스회사 그레이 하운드가 진출하자 회사 상표나 다름없는 개 그림을 지워야 영업을 인정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슬람 나라가 그런 게 아니라 터키아제르바이잔이나 유라시아, 동남아 이슬람 다수 나라들은 얼마든지 개를 키우고 개에 대하여 이런 이질감이 없다.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스탄불을 여행한 안데르센이나 마크 트웨인도 떠돌이 개랑 고양이가 많아서 신기했고 더더욱 신기한 건 이런 동물들을 맡아 관리하는 공무원도 있다는 점을 기록에 남겼다.더불어, 무함마드가 목축견은 예외로 여겨서 유목민 무슬림에겐 유목용 개들은 애완견이랑 다른 가족으로 인정받고 거리낌없이 키우던 경우도 많았다. 하긴 유목민들에겐 개는 귀중한 재산인 가축을 돌보고 지키는 만큼 매우 유용했으며 이는 과 같다.

무함마드는 술을 금기시했지만 대추야자로 만든 술은 즐겼기에 대추야자술은 술이 아닌 음료라고 받아들이던 무슬림도 있었으며 유목민들에게는 가축 젖을 발효시킨 술이 물이나 다를 게 없었기에 이들에게도 술은 금지되던 않던 역사가 있다.

만일 무함마드가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 쪽으로 갔다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있고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비잔티움의 첩자처럼 아랍 세력이 기독교 문화권에 편입되어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중동을 제패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랬더라면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여전히 서로 이단이라며 죽어라 싸우고 있으며 역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을 한다. 어느 유럽 대체역사소설에선 과거로 간 기독교 과학자가 무함마드를 만나 자신이 가브리엘이라고 속여(첨단 기술을 동원) 그가 기독교 교역자가 되게 하는데 미래로 와보니 십자군 전쟁도 그대로 벌어졌으며 아랍 기독교와 유럽 기독교가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 9.11 테러도 아랍 기독교 과격파로 달라졌을 뿐인 탈레반이 일으켰고 여전히 미국이 아랍에 주둔하며 아랍 기독교와 갈등을 빚는다. 결국 무함마드를 개종시키더라도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고 과학자는 절망하며 끝난다.

6. 아랍 남성 이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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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아랍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붙이는 가장 인기 있는 이름인데 덕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한 이름[26]이며 의미 자체는 아랍어로 '찬양함·칭송함'을 의미하는 حمد(ḥammada)에서 온 것으로 '찬양받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27] 보통 장남은 대부분 이 이름이다(...) 아랍 문자로는 محمد라고 쓰며 모음을 붙여 쓰면 مُحَمَّدٌ(/mʊˈħæmmæd/)로 표기된다. '함'으로 표기되는 /ħæm/의 ح 발음은 '무성 인두 마찰음'이라고 하는데 쉽게 예시를 들자면 가래 뱉을 때 내는 '카' 소리를 'ㅋ'이 아닌 'ㅎ'이라고 해보면 안다. 정 모르겠으면 EBS 제2외국어 아랍어를 들어보면 된다.

이 이름으로 유명한 사람은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 무함마드 유누스, 전 복싱 선수 무함마드 알리, 스파이였지만 유능한 학자인 무함마드 깐수(정수일), 셰이크 무함마드 두바이 국왕, 탈레반 최고 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물라' 는 이름이 아니라 이슬람 성직자에게 붙는 칭호다.), 이집트 혁명으로 대통령이 되었다가 군부에 의해 축출당한 전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 등이 있다.

가상의 인물 중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쓰는 인물 중 유명한 케이스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무함마드 압둘이 있다.

2014년 영국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이름 중 가장 많은 수가 바로 무함마드이다. 이는 무함마드Muhammad, 모하메드Mohammed, 모함마드Mohammad 등 영어 표기에 따른 철자 차이를 모두 합한 결과이다. 한겨레 가디언

[1] 아랍어로는 '라술 알라'로 읽으며, 무슬림의 다섯 가지 의무(이슬람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샤하다(신앙고백)이 "주님(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주님(알라)께서 보내신 분이시도다(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라는 것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간단하게 '사도'로 번역하기도 하고, 정수일 선생의 저서에서는 성사(聖使)로 번역되기도 한다.[2] 이슬람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무슬림은 아담(آدم)과 하와(حواء)이다. 성경에 따르면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아담과 하와는 아라비아에 정착했으며 특히 메카는 주요 예언자들이 다녀간 곳으로 여겨진다. 가령 메카 근방에 있는 '잠잠' 이란 샘물은 모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을 때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메카의 중심부인 카바 사원에 있는 검은 돌은 아담과 함께 내려온 운석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이건 아브라함계통의 종교라면 다 마찬가지이긴 하다.[3] 이슬람력으로 3월이다.[4] 570년인지 571년인지 미상이지만 보통은 570년을 유력하게 본다.[5] 한국판 제목은 '예언자 마호메트'. 다만 DVD에선 메세지란 원제로 나왔다. 1976년작으로 사막의 라이온 감독이자 할로윈 시리즈 제작자인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했다.[6] 아브와는 아미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이다. 또한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이 메카라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아브와라는 주장도 있다.[7] 아랍 사람들의 아이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예이다. '아버지' 란 뜻을 가지는 단어의 주격 형태인 아부(ابو) 뒤에 자신의 아들 이름을 넣는다. 즉 '탈립 아범' 이라는 의미.[8] 이슬람 자료에서는 이를 전통이라고 설명하지만,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 무함마드처럼 베두인족 손에서 컸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9] 아브와는 아미나의 친정이 있는 지역이었다. 아미나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전해지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2천 년대 들어 무덤 위에 조성한 돌무더기를 없애버려 아슬아슬하게 흔적만 남았다.[10] 현대의 우리야 자료가 없으니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무함마드의 신상에 이때 알려지지 않은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11] 아랍어로 빛의 산山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산의 이름이 '히라'였지만, 무함마드 이후 '자발룬 누르'로 바뀌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해발 6백여 m짜리 산으로,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12] 보통은 동굴이라고 하지만, 실제 장소를 보면 절대 동굴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산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 틈에 난, 한 사람이 겨우 눕고 일어설 만한 공간에 불과하다. 동굴보다는 암혈(巖穴)이라고 부르는 쪽이 훨씬 정확하다.[13] 보통 '읽어라'라고 번역하지만, '낭송하라' 혹은 '선언하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읽어라'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14] 보통 이 말을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읽으라는 말이냐?'라는 뜻으로 한 대답으로 보기도 한다. 무함마드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일이었을 테니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다. 또한 무함마드의 언행에 대한 기록에서는 무함마드가 글을 읽을 줄 알았음을 보여주는 내용들도 있어서,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주장과 충돌한다.[15] 응결된 피[16] 이후 무함마드는 카디자를 비롯, 어떤 여자와 부부관계를 맺을 때는 계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유일하게 예외인 부인이 한 명 있었는데 (무함마드가 소아성애자 아니냐는 악담을 듣는 이유인) 아이샤였다. 아이샤와 부부관계를 할 때만큼은 천사도 피하지 않고 그냥 계시를 준다고.... 다른 부인들은 아이샤에 대해서 매우 질투했다.[17] 당시 메카에서는 일신교를 믿지는 않을지언정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때문에 알고는 있었고, 종교에 대해서는 굉장히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무함마드가 3년이나 지나서야 공개포교를 했다는 말을 불신하기도 한다. 굳이 3년이나 비밀리에 포교하며 간을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18] 본 항목 위에서 무함마드가 탄 짐승이 부라끄이다. 부라끄란 이름은 '하얗게 빛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19] '성스러운 이동'이라는 뜻으로 중국 등 한자문화권의 무슬림(회교도)은 으레 이렇게 부른다.[20] 예수 탄생을 원년으로 잡는 서기, 단군의 고조선 개국(개천)을 원년으로 삼는 한국의 단기(檀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음력이라서 날짜 계산은 꽤 복잡하다는 것 같다. 아시는 분이 추가바람.[21] 당시 아랍인 관점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나 사산조 페르시아가 세계최강의 강대국이면서 세상의 전부였다. 당나라는 너무 멀었고 프랑크 왕국은 미개인에 불과했다.[22] 무함마드가 문맹이라는 주장과 대치되는 부분이다.[23] 무함마드 평전을 집필했던 하미드 압둘 사미드 같은 무슬림 출신 이슬람 비평가도 이점을 지적한다.[24] 참고로 파티마는 첫째 부인인 카디자의 딸이었다.[25]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어렵기에 이슬람 법학자들은 웬만하면 그냥 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부인을 2명 이상 둔 사람은 약 2%도 되지 않는다. 사실 지참금 문화 때문에 돈을 못 내서 결혼을 못하는 남성들이 이슬람 세계엔 수두룩하다.[26] 참고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가 가진 성씨는 리(李)라고. 이 둘이 합쳐진 무함마드 리는 중국계 회교도나 회족말고는 없을 듯[27] 같은 의미의 이름으로는 그리스어 에파이네토스(Ἐπαίνετος)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