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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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﨑みやざき 駿はやお
Hayao Miyazaki
이름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Hayao Miyazaki)
국적
출생
학력
직업
배우자
아케미 오타
자녀
미야자키 고로
미야자키 게이스케
활동
서명

1. 개요2. 이력
2.1. 유년기와 학창 시절2.2.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2.3.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활약2.4. 스튜디오 지브리 시절2.5.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 공식 은퇴와 그 번복
3. 성향
3.1. 작품 스타일3.2. 토미노와의 관계3.3. 픽사와의 관계3.4. 한국과의 관계3.5. 오덕까
4. 논란
4.1. 좌우 성향 논란4.2. 영토 분할, 공동소유 주장 논란4.3. 기술자 옹호, 제로센 찬양 논란4.4. 아이패드 비난 논란4.5. 반지의 제왕 비난 논란
5. 포스트 미야자키6. 경력7. 기타

1. 개요[편집]

In stature, in influence, and the range and quality of his body of work, there will never be another to rival him.
위상, 영향, 그리고 자질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미야자키 씨와 어깨를 견줄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하야오 감독은 그만큼 거대한 존재입니다.


애니메이션을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최고의 애니메이터 중 한명.
수 많은 명작들을 탄생시킨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2. 이력[편집]

2.1. 유년기와 학창 시절[편집]

1941년 1월 5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둘째 아들.

유년기는 3살 때 전란(戰亂)을 피해 우츠노미야 시로 피난을 가서, 소학교 3학년 때까지 생활했다. 1950년에 도쿄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일가가 경영하는 '미야자키 항공흥학(宮崎航空興学)'[3]의 공장장이었다. 이 회사는 나카지마 비행기(中島飛行機)사의 하청으로 군용기의 부품을 생산 조립했는데 나카지마사는 제로센을 만들기도 했다. 미야자키는 어릴 적 기억에 제로센의 날개 등을 조립하는 광경을 봤다고 말했다.

전후에는 나라 전체에 물자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업종을 전환하고, 상당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전후에 벌린 사업이 실패해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글도 있다. 어디가 맞는지는 확인 불가. 전쟁 중과 전쟁이 끝나고 일본 경제가 붕괴된 시절에도, 남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는데도, 하야오는 언제나 삼시 세끼 흰쌀밥을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적어도 어린 시절은 유복하게 자란 것은 사실이다. 우츠노미야 시에서 살던 집도 마당이 넓고 정원이 있는 2층 단독 저택이었다.

1945년 4살 때, 우츠노미야 시는 미군의 공습을 받았다. 일가는 피난을 떠나야 했고, 큰아버지가 소형 트럭으로 데리러 왔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조수석에, 미야자키와 형과 아버지는 뒷짐칸에 타고 출발하려는데, 아기를 안은 여인이 "제발, 태워주세요."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트럭은 비행기 공장이 있던 옆도시 카누마 시로 향했다. 그때 하야오는 그들을 태워주라고 말하지 못한 것이 평생 마음에 걸렸다. 훗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영화를 만들려고 마음먹었다.

주변에 고급 기술자와 군인 출신이 득시글대는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이런 배경이 작품세계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군인 출신 기술자들은 일본이 나라에서 무슨 을 하며 다녔는지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 어릴 적부터 일본이 싫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노래가 부르기 싫어 러시아 민요를 부르고 다녔을 정도라고.설마 카츄샤는 아니겠...

아버지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전쟁에는 반대하는 반전주의자였는데도, 전쟁 특수(特需)로 돈을 잘 벌던 그 시절을 태연하게 떠벌리기도 했는데, 대학생이 되고 좌익 사상에 빠진 미야자키는 "아버지는 전쟁부역자(戰爭附逆者)잖아요!"라고 따져서, 대판 말싸움을 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점령군(미군)과 친구가 되어 그를 집에 데려왔을 때에는, 미야자키는 일장기가 달린 비행기 장난감을 서둘러서 감춰야 했다.

어머니는 미야자키가 6살때 결핵균이 척추까지 감염돼, 오랫동안 누워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결핵균이 전염될까 어머니 곁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책읽는 것을 좋아했고 여장부 스타일로 씩씩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미야자키는 어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어머니를 모티브로 하는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어머니가 누워지내서, 어릴 적에는 식모가 집안일을 도와주었지만, 이후에는 미야자키 형제들은 스스로 밥을 짓고 가사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며 자랐다.

소학생 시절, 체격도 작고 몸이 약해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 달리기 경주를 하면 꼴찌였고 열등감에 시달렸다, 대신 방안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기와 독서에 열중했다. (맏형은 이런 동생을 걱정했다고 한다.) 데즈카 오사무, 스기우라 시게루 만화를 좋아했고, 특히 그림이야기 사막의 마왕의 열렬한 팬이었다. 이 사막의 마왕에는 사람이 하늘을 날게 하는 비행석이 등장한다.

우츠노미야 시의 소학교 등하교길에는 대장간이 있어서 자주 들려서 구경을 하곤 했다. 어릴 때는 대장간 일을 직업으로 삼으려 한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는 대장간이 자주 묘사된다.

1953년 중학교 입학. 매주 영화를 보러 다녔다. 중학교에 근무하던 프랑스 유학파 미술 선생님에게서 뎃생의 기초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다. 1956년 고등학교 입학하고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만화는 중학생이 되면서 안 보게 되었고 고등학생 때도 용돈이 있어도 만화를 사는 것이 부끄러워서 남동생에게도 심부름을 시키지도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어렴풋이 만화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습작했는데 폴 세잔인상파 화가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야오의 어머니가 추억하기로는 어릴 적부터 매일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그림은 다락방에 한가득 던져넣고는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형의 말에 의하면 어릴 적에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그리는데, 채색화가 아닌 연필로 인물보다는 주로 탱크같은 것을 그렸다고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밀리터리 잡지에 투고한 글@이 훗날 발굴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생에 걸친 미야자키의 밀리터리 매니아 취향은, 어린 시절 본 비행기 부품 제조 공장의 기억과, 미군 통치가 끝난 후, 반동(反動)처럼 몰아닥친 태평양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우익 성향의 아동 잡지의 기사들(제로센, 전함 야마토 찬양)의 영향을 받았다. '몇 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훌륭한 '군국 소년'으로 자랐을 것'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토에이 동화의 《백사전》(1958)을 보고 여주인공에게 심쿵하고(3일 연속 극장을 찾았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라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홀딱 반했버렸다. 그전에도 디즈니 작품이나 미국 애니메이션은 많이 봤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이 작품이다. 만화가가 되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 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이 낯간지러운 멜로 드라마 영화를 보고 자신이 이런 것을 엄청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끄럽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 다음에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대학은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정치경제학)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기간 당시 일본은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나, 가쿠슈인은 대표적 부르주아 교육기관(귀족학교)이라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다. 미야자키도 처음에는 철없는 학생이었지만, 1960년 안보투쟁에는 주간지 <아사히 클럽> 6월 임시증간호에 실린 사진(경찰이 대학생을 유혈진압)을 보고 충격을 받고 뒤늦게 데모에 참여했다. [4]

대학 재학 시, 학교에 만화 서클이 없었기에(당시 만화의 사회적 지위는 낮아서 대학에 만화 동아리라는 것이 생긴 것은 한참 훗날이다)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아동문화 연구회(児童文化研究会)에 소속한다. 본인의 말로는 막상 들어가 보니 아동문화는 뒷전으로 그냥 친목 모임으로 성실하게 서클 활동을 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실망하고 인형극 몇 편을 연출하려다 제대로 안 됐던 경험뿐이라고 회상했다.

이 시기, 몇 편의 사회주의 혁명을 그린 만화 원고를 들고 출판사에 찾아갔지만, "우리 회사는 시대극은 안 받습니다." 라며 편집자한테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

만화가와 애니메이터라는 진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극화의 세계와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어디가 표현방법으로 뛰어날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애니메이션이 뛰어나다고 결론을 내린다.

2.2. 토에이 동화 재직 시절[편집]

우측의 사진에서 드러 누워 있는 사람은 타카하타 이사오
애니메이터로는 초 일류였죠. 유령선 장면도 좋아하지만, 토에이에서 "여기 굉장하네!"라는 장면의 원화는 거의 미야 상이 그렸더라구요. - 안노 히데아키

1963년, 대학을 졸업하고 토에이 동화에 정기채용으로 입사했다. 동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 생활을 시작했지만, 토에이 동화가 만들고 있던 작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도 싫어서 저녁 5시가 되면 칼퇴근하는 불성실한 직원이었다고 한다. 동화맨 주제에 선배가 그린 원화가 마음에 안든다고 불만을 표출해서 싸우기도 하고, 만화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입사 1년 뒤 회사내에서 열린 상영회에서 보게 된 소련의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애니메이션을 자신의 평생의 직업으로 삼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말로 어떤 생각이나 마음을 전하려고, 심플하고 정성들여 만들면 애니메이션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영화는 한 번밖에 안 봤지만(VCR라는 것이 없던 시절), 아는 사람에게 구한 눈의 여왕의 소리만 녹음한 음향 테잎 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테잎이 늘어지도록 들었다.

입사 1년차 신입 동화맨였던 미야자키는 걸리버의 우주여행(1965)의 라스트 씬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서 선배들을 놀라게 했다. 선배였던 오오츠카 야스오코타베 요이치는 그의 연출가 재능에 감탄했다. 미야자키가 평생의 '전우'라 불렀던 야스다 미치요[5]는 "대단한 놈이 들어왔다."고 회사내에서 소문이 났다고 회상했다.

1964년, 토에이 동화의 환경과 처우문제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미야자키도 노조에 가입하고 제2대 서기장으로 선출됐다. 이를 계기로 노조의 간부였던 입사 4년 선배인 타카하타 이사오와 친해졌다. 노조의 임원이 되고 나니 엄청난 업무와 함께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느끼고 있을 때, "자네, 그것도 모르나?"라며 도와줬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일생의 절친이자 라이벌 콤비가 되었다.

1965년, 같은 직장 동료인 연상의 여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 어머니도 연상 커플이어서 아들의 결혼에 반대를 못했다고 한다. 아들 2명을 낳았다.(장남이 미야자키 고로)

1965년부터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 주도로 제작을 시작한 타카하타 이사오 첫 극장용 영화 연출작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에서는, 미야자키는 아직 신인이면서도 장면설계과 원화로 참가, 바위 거인같은 캐럭터부터, 그릇·잡기·집게·활·무기·건물의 투시도 등등 방대한 설정 그림을 그려서 타카하타가 연출하려는 작품 세계 전부를 실체화했다. 하지만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막대한 예산(1억 3천만 엔)과 시간(3년)을 투입하고도 상업적으로 참패, 토에이 동화가 망할 뻔할 정도로 휘청했고, 호루스 제작팀은 회사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다음 작픔 장화신은 고양이(1969)는 지금도 명액션 장면으로 회자되는 오오츠카 야스오 작화 장면와, 타고난 공간 감각을 이용한 종횡무진으로 펼쳐지는 스릴과 유머가 가미된 액션 장면을 그린 미야자키의 작화 장면이 돋보이는 클라이맥스의 추격전은 어린이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흥행에도 대성공해서 후속편이 2편이나 만들어졌다. 주인공 고양이 페로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미야자키는 영화 선전을 위해 만화판을 그려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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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시기 1969년 9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일본 공산당의 청소년지 "소년소녀신문"에 필명을 사용하여 "사막의 백성(砂漠の民)"(총 26회)#이라는 만화를 게재하기도 했다. 11세기 말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실크로드를 둘러싼 민족분쟁과 노예 반란을 주동하는 소년 주인공을 그린 작품으로, 슈나의 여행(만화 단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원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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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에 성공한 장화신은 고양이의 차기작 하늘을 나는 유령선(1969)#에서는 거대로봇 고렘이 빌딩을 파괴하는 씬과 탱크가 폭주하는 씬 등의 명장면의 원화를 그렸고,[6] 동물 보물섬(1971년 3월 20일 개봉)#에서도 여주인공이 남자 못지 않는 액션을 펼치는 장면의 원화를 그렸고, 알리바바와 40마리의 도적에서 원화로 참가한 것이 토에이 동화에서의 마지막 작업이었다.

2.3.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활약[편집]

토에이 동화는 노조탄압을 시작했고, 회사는 이들을 희망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나가 달라며 내쫓았다. 제작비와 제작기간을 초과하고 흥행 실적은 막대한 적자를 불러 들인 타카하타 이사오에 대한 징벌 처분이었다. 타카하타는 호루스의 흥행 실패 이후 TVA 연출직에서 끌어 내려져 연출을 못 하게 되는 등, 토에이 동화에서 찬밥 신세가 되었고, 그의 동료 미야자키도 원화나 그리게 해서, 토에이에서 그가 연출을 맡을 수 있는 기회는 요원(遙遠)했다.

1971년, 타카하타 이사오,코타베 요이치 선배와 함께 미야자키 3인방은 토에이 동화를 떠나, 토에이의 선배 오오츠카 야스오가 먼저 이적해 있던 A 프로덕션(현재의 신에이 동화)로 이적했다. 오오츠카 선배가 작화감독으로 활약한 무민을 보고, 여기라면 우리들이 만들고 싶어하는 작품을 마음껏 만들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리라는 착각 희망을 품었다. 말괄량이 삐삐TVA 애니화하려고 사전에 많은 준비 작업을 하고, 스웨덴까지 가서 원작자를 만나서 부탁했지만, 애니메이션화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기획은 좌초됐다. 이때 A 프로덕션의 원청 회사였던 도쿄 무비의 사장 후지오카 유타카가 부탁해서 낮은 시청률 때문에 방송국의 높은 분한테 꾸중을 들은 감독이 홧김에 제작 현장을 내팽개치고 떠나버려서 난리가 난 상태인 루팡 3세(1기 TV시리즈)에 긴급 투입해서 연출을 맡았다.
1972년 10월 28일 중국에서 선물로 보낸 판다가 인기를 얻으면서, 영화화 이야기가 나돌았다. 미야자키는 타카하타와 상담하고 기획이 엎어진 삐삐의 설정과 캐릭터를 살려서 각본을 쓰고 판다 아기 판다(1972)#라는 극장용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이 무렵 미야자키도 타카하타도 나이가 어린 자식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다. 미야자키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마음으로 만든 첫 작품이었다고 고백했다. 원안·각본·화면설정·원화를 맡은 이 작품은 관객 수는 적었지만, 극장에 온 어린이들이 보는 내내 깔깔거리며 즐거워하고 엔딩에서는 주제가를 대합창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만든 영화는 극장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돌아다니면서 집중을 안했는데, 정말로 아이들 편에 서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면 이렇게 집중해서 본다는 것을 그 동안 이론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직접 실감하고, 스텝들은 만든 보람이 있었다라며 행복감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화면 속에 자극적인 장면이 없어도 어린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만들면 된다는 체험은 다음 작품인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기초가 되었다. <판다 아기 판다>는 좋은 반응 덕분에 속편 <비오는 서커스 편>도 만들어졌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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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이 오오츠카 야스오의 추천으로 타카하타 이사오를 감독으로 발탁하여, 함께 즈이요 영상으로 이적, 세계명작극장 시리즈가 되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에서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을 맡았다. 장면설정과 레이아웃이란 화면에 보이는 모든 그림의 (건물이나 소품을 비롯한) 설정과 구도의 설계도인데,이런 작업은 보통의 애니메이터는 하루 10컷 정도 그리는 것이 기껏인데, 하야오는 하루에 50컷 이상, 한 에피스드 당 300컷 이상을 그려서, 하이디 전52화 전 컷을 혼자서 해치웠다.
평균 20%가 넘는 고시청률을 얻고, 아이들과 함께 보고 있다는 동창생의 격려 엽서도 받고, "세상 한 구석에서 찌그러져 일하고 있던 기분이었는데, 돌연 세상과 만난 기분이었다."라고 충실한 달성감을 맛보았다. 그런데 방송국은 한번 히트하니까 같은 노선으로 같은 퀄리티로 쭈~~~욱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해왔다.

차기작《엄마찾아 삼만리》에서도 전 에피소드 전 컷의 장면 설정, 레이아웃을 담당했는데, 주제가 가사처럼 '산도 계곡도 없는' 전개에 50화가 되도록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적당히 좀 해라!"며, "마르코도 힘들었겠지만 자신도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 힘들었다"고 푸념했다. 시리즈 다음작 미국너구리 라스칼에선 원화로 참여했다.

1977년, 일본에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의 극장판 편집 영화의 히트와 스타 워즈의 영향으로 아니메SF 붐이 일었다. NHK도 이런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고자 유소년과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연속극을 방영하기로 기획하고 스폰서(물주)로 나섰다.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로 인기를 얻고 있는 닛폰 애니메이션에게 실제작을 의뢰했다. 프로듀서의 추천으로 미야자키는 감독으로 발탁됐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생애 처음으로 연출(감독)을 맡은 TVA 연속 시리즈(총 26화)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 혼자서 10인분을 하는 대활약을 펼쳤다. 타카하타와 함께 두 편의 TVA 시리즈의 전 컷의 레이아웃과 화면설정을 한 경험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은 것이다. 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는 "말도 안 되는 괴물(빠케모노)이 돼서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기발한 연출을 연발하니까 오오츠카는 어떻게 이런 것을 착상했냐고 물으니, 미야자키는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저절로 나오니 어쩔 수 없다고 대답했다. 코난은 첫 방송에서는 시청률이 높지 않았지만(평균 9%) 재방송을 하면서 작품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회자하는 고전 명작이 되었다. 미래소년 코난을 보고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후배들의 고백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일본 최정상급의 애니메이터인 이노우에 토시유키가 있다.

1979년에는 타카하타 팀으로 복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빨강머리 앤에서 참가했지만, 앤이 총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는 그림을 그려서 벽에 거는 등 따분한 일상극에 욕구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즈음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가 도쿄무비신사가 제작하는 극장용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감독직 의뢰를 받고 고민한다는 전화를 받고 "내가 할게!"라며 달려들었다. 칼리오스토르의 성은 인기리에 방영 중이었던 루팡 3세(2기 TV시리즈)안티테제적인 작품이었고, 3억 엔의 제작비를 들여 걷어 들인 돈은 1억 5천만 엔으로 흥행에서 참패했다. 이 시기 일본은 공전의 SF 붐이었고 이 작품은 유행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나중에 명작이라는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극 중에 루팡이 내뱉은 "로리콘 백작!"은 나중에 로리콘이라는 단어를 퍼트린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인터뷰를 받은 적이 있다.(로리콘 문서 참조)

혼신의 힘을 쏟아 붓은 '칼리오스트로'의 흥행 참패는 극장 영화로 데뷔한 39살의 미야자키에게는 정신적 데미지가 컸다. 다시는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 애니메이터도 그만두고 만화가가 되든지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든지, 인생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이후 도쿄무비신사의 산하 실제작사인 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에서 이탈리아와의 합작 TVA 명탐정 홈즈 6편을 연출하고, 도쿄무비신사가 세계 시장 진출을 노린 야심 찬 대작 리틀 네모 제작을 위해 타카하타 이사오, 오오츠카 야스오와 함께 미국 LA에서 장기간 체류하면서 준비했지만, 기획에 대한 의문을 품고 도중하차, 회사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된다.
이 시절 기획이 훗날 토토로, 나우시카,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로 실현됐다.
프리랜서가 된 후, 여러 편의 영화 기획을 내밀어보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원작이 없다는 이유로 기획이 연거푸 문전박대를 당하자, 아니메쥬의 편집장이었던 스즈키 토시오는 원작이 될만한 만화를 그리라고 권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영화를 만들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싫었기에, 영상화는 염두에 두지 않고 평소 자신의 철학과 취향을 살린, 만화라는 표현 매체에 맞는 작품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아니메쥬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나우시카는 아니메쥬에서 그럭저럭 인기를 얻었고, 단행본 1권이 발행되자, 1시간 분량의 OVA로 제작하자는 소리가 나왔다. 미야자키는 이왕이면 장편 극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결과, 영상사업에 의욕이 있었던 당시 도쿠마 서점의 사장을 아니메쥬 초대 편집장 오가타 히데오와 2대 편집장 스즈키 토시오가 설득하고, 미야자키의 남동생이 근무하는 광고대리점이 공동투자를 하기로 해서 영화화가 결정, 프로젝트팀(제작위원회)이 결성됐다. 톱크래프트를 제작 거점으로 제작팀을 꾸려, 1984년 3월 11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극장 공개했다. 관객동원 수는 약 91만 5천 명으로, 대박을 터트린 정도로 히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야자키는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가 또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안심했다. 운이 좋았다.'고 평했다.

나우시카는 그 해 아니메 그랑프리, 일본 아니메 대상에서 상을 타고, 영화잡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문 칼럼에서도 주제의식과 작품성에 대해 절찬했고, 다음 해 TV 방영이 되면서 호평을 얻고, 비디오 판매와 렌탈 수입으로 높은 매상을 기록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우시카 작품 자체의 평가는 필름 원본을 불태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제작 스텝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인력난에 긴박한 제작 기간이 겹쳐, 원하는 퀄리티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영상화를 고려하지 않고 그린 작품이라 이제까지의 그림을 움직이기 쉬운 단순한 캐릭터와 메카가 아니라, 복장이나 총, 비행선, 하나 하나가 손이 많이 가는 작화였다. 스토리도 영화는 만화 원작의 프롤로그 소개 수준에 억지로 만든 결말을 덧붙인 미완성작이었다. 라스트 씬도 애초의 콘티에는 나우시카는 오무와 서로 마주 서는 장면으로 끝났다. 미야자키는 오무를 한 마리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결말지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즈키 토시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두 사람이 카페에서 8시간을 토론한 끝에, 이대로라면 영화의 결말이 매듭짓지 않는다며 3가지 결말을 제시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화를 내며 오무를 "죽이면 돼!". 그래서 택한 것이 지금의 엔딩이었다.[8] 하지만 이 결말에 대해 오시이 마모루특공이라는 둥의 비판을 하고, 나우시카가 부활하는 장면은 종교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도 생겼다. 원래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평을 들은 미야자키는 만화판에서 그 비판을 뒤짚어 엎는 전개를 펼친다.

나우시카가 잘 팔린 덕분으로 미야자키에게도 원작자 지분의 저작권 로얄티로 꽤 많은 돈(본인 표현으로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이 들어왔다. 애니메이터는 가난한 직업이라 이 돈을 혼자서 갖는다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이 돈을 타카하타 선배를 위해 쓰기로 했다. 나우시카를 만들 때 프로듀서를 맡아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이 타카하타의 작품의 프로듀서가 되어, 그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지원했다. 그런데, 타카하타 이사오 특유의 느긋하고 돈 먹는 하마 스타일대로, 강과 인간의 관계, 썩어가던 강을 청소해서 살린 공무원과 주민들을 그린 문화 다큐멘터리 영화는 절반도 완성되기 전에 제작비가 바닥이 나버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미야자키에게 스즈키 토시오가 "이렇다면 영화 한 편을 더 만들어서 돈을 벌 수밖에 없겠네요." 그 말을 들은 미야자키는 곧 한 편의 기획서를 꺼내들었다. 리틀 네모NHK TVA 기획을 위해 제안한 기획서였다. 이 기획서는 천공의 성 라퓨타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고,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이 붙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탄생했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히트치기 전까지 미야자키는 항상 스폰서들의 압박 속에서 작업에 임해야 했다. 스즈키 토시오에게 언제나 감사한다고 말했다.

2.4. 스튜디오 지브리 시절[편집]

1985년, 도쿠마 서점의 출자로, 나우시카의 제작거점이었던 톱크래프트를 해산, 재창립하는 형식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설립됐다.

천공의 성 라퓨타》(86)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첫 작품으로 타카하타 이사오가 프로듀서를 맡아주었다. 19세기 후반 "기계가 아직 기계의 즐거움을 가진 시대, 과학이 반드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기지 않은 시대'를 무대로 한 소년 소녀의 모험활극으로 미야자키 취향의 모험 활극론을 펼친 작품이다. 미야자키는 이 시대에 모험 활극을 만들기가 어려워졌는데 그래도 자신이 어릴 적 읽고 자란 모험 활극에 담긴 것을 후대에 전해주고 싶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에게 모험 활극이란 소년이 일련의 사건을 통해 자립해가는, 어른이 돼가는 체험으로, 언젠가는 부모한테서 떨어져나와 자신의 인생을 열어나가는, 비록 힘들어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였다. 지브리는 프로듀서로 스즈키 토시오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영화 선전 활동에는 무심했고, 관객동원 수는 약 77만 명으로 전작인 나우시카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재방송에서 고시청률을 기록하고, '바루스 현상'이 생길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작이 되었다.
라퓨타를 마치고, 미야자키는 일본을 무대로 한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 쌓인 빚을 갚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일본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런 자신에게 너는 실은 네가 모르는 사이에 꽤 많은 것을 물려받지 않았는가"라는 자각이 생겼다. 70년대 후반부터 조각조각 이미지 파편으로 구상해 온 《이웃집 토토로》 기획서를 스즈키 토시오가 도쿠마 쇼텐에 건의를 했으나 쇼와 30년대(1950년대)의 도깨비 이야기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말을 듣고 거절당한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타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와 두 편을 동시상영을 하는 것이었다. 도쿠마 쇼텐 측은 이 건의를 듣고 진짜 화가 났다. 도깨비도 모자라서 묘지라니...그러다 원작 소설을 출판한 신초샤에서 "반딧불이의 묘"의 출자를 결정하자 도쿠마 쇼텐 역시 토토로 제작을 결심했다. 유행하는 것을 쫓아가지 않겠다는 것이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작가로서의 자존심이었다.[9]

지브리는 토토로팀과 반딧불팀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듯 1년간 죽어라 일하게 된다. 원래는 60분짜리 두 편 동시개봉 예정이었는데, 타카하타 감독의 반딧불이의 묘가 60분으로는 원작을 다 못 담는다면서 상영시간을 90분으로 늘려버리자, 미야자키도 경쟁심이 발동해서 한 명의 소녀가 주인공이었던 것을 자매로 바꿔서 80분의 장편으로 만들었다. 상영시간이 늘어나면서 제작환경은 더더욱 힘들어져서 실컷 고생한 다음에 마침내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 더구나 반딧불이의 묘는 개봉일을 못 맞춰서 몇 장면은 채색이 안 되어 하얀 화면에 선화(線畵)만 움직이는 미완성 상태였다. 미야자키는 '어차피 손님이 안 올거라며 만들었는데, 정말로 손님이 없었다'라고 자조했듯이, 영화는 선전에도 신경 쓰지 않아 흥행은 참패에 가까웠다. 지브리는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이웃집 토토로는 일본영화잡지 <키네마 준보>가 뽑은 그해 일본영화 베스트 1위가 되고, TV 방영되면서(1989년 4월 28일) 21.4% 고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영화 선전을 위해 만들었던 토토로의 봉제 인형이 인기를 얻고 많이 팔렸다. 토토로는 지브리를 먹여 살리는 효자 상품이 되었고, 지브리의 마스코트 캐릭터가 되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우리 얘가 토토로를 너무 좋아해서 60번을 봤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고 자책하기도 했다. 토토로를 본 계기로 아이들이 자연으로 가서 직접 시각·청각·후각·촉각으로 즐기고 뛰어놀기를 바라는데, 집에 앉아서 시각과 청각으로만 느끼는 화면 안의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면 어쩌냐는 염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부터 제작을 시작한《마녀 배달부 키키》(1989)는 젊은 감독(카타부치 스나오)을 데려와서, 지브리의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실력 향상을 위한 기획으로 만들어졌으나, 어른들의 사정(스폰서의 압력으로) 원래는 프로듀서를 맡기로 한 미야자키가 감독도 맡은 작품이다. 80년대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당연시되고, 거품경제로 일본은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주체못하고 엔고로 세계여행이 보편화하고, 줄리아나 도쿄로 대표되듯 일본 전체가 흥청망청하던 시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3살의 소녀를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해서 혼자서 자립하고 살아가는 여성으로 대입했다. 키키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법은 자동차 운전을 하는 정도의 능력이다. 사회에 나와서 비록 힘든 일이 있고, 때론 좌절하더라도 인생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라는 용기를 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 영화는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고 인생작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작품부터 여주인공을 그리는 태도가 달라지는데, 주인공 키키는 이제까지 미야자키가 바라는 이상형을 투영한 공주님 스타일이 아니라, 화장실에서 볼일도 보는 현실적인 모습이다. 지브리의 여성 직원들의 의견(미야자키 작품 속의 여성은 공주 스타일이라서 화장실도 안갈 것 같다는)을 받아들였고, 1993년까지 13년간 나우시카 만화를 연재해 가면서, 자연과 인간, 불결(汚れ)과 정화(淨化)의 관계를 궁리하다, 자연이 더러움(인간이 자연을 오염시키는 짓)을 포용하기도 하지만, 자연은 잔인하다며 서로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10]

흥행 면에서도 1989년에 미야자키의 권유로 지브리에 입사한 스즈키 토시오가 수완을 발휘해서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 활동을 펼쳤다. 스폰서였던 야마토 운수에서도 각종 캠페인을 벌여 광고 활동을 했다. (다만, 이 작품 전부터 TV로 방송된 지브리 작품이 높은 시청률을 얻고 시청자들에게는 이미 지브리와 미야자키라는 이름이 익숙한 상태였다.) 대대적인 선전 효과 덕분에 크게 히트해서 관객동원 수 나우시카 91만 5천 명, 라퓨타 77만 5천 명, 토토로/반딧불의 묘가 62만 2천 명으로 점점 내려앉던 것이, 마녀 배달부 키키는 26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작품이 성공한 덕분에 지브리는 정사원제와 월급제를 도입해서 열악한 애니메이터들의 고용 환경을 개선했다. 토에이 동화 시절 노조 투쟁으로 이루려 했던 목표를 성취한 것이다.

하지만, 정사원제와 월급제를 채택한 결과, 지브리는 자전거 페달을 쉬지 않고 밟아야 쓰러지지 않듯이, 쉬지 않고 연속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원제 아이디어를 꺼내든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인데 가장 큰 부담을 느끼게 된 것도 미야자키 자신이었다. 타카하타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1991)이 제작을 마치기 전에 다음 작품을 기획하고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추억의 방울방울은 제작 준비 기간이 늘어나고, 작화팀의 베테랑 메인 스태프가 전원 몰려가 매달린 상황이었다. "붉은 돼지는 나 혼자 만들라는 건가." 추억은 방울방울이 완성해도, 지친 베테랑 스태프에게 연속으로 체력적인 부담을 줄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메인 스태프를 쇄신해서 여성 애니메이터를 중심으로 하는 간단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11] 밀리터리 모델 잡지에 게재한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붉은 돼지(1992)는 15분짜리 단편으로 JAL 여객기 내에서만 상영할 소품으로 기획되었다. 머리도 식힐 겸 평소 좋아하는 비행기와 비행사 이야기라면 배경은 텅빈 하늘에 구름과 바다만 그리면 되고, 조종석에 앉아 있는 장면은 하반신은 그릴 필요가 없으니 달린다든가 하는 동화매수가 많이 필요한 장면도 적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다.

붉은 돼지는 포르코 룻소가 공적에게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는 이야기로 끝나는 단편이었다. 콘티를 읽은 스즈키 토시오는 '엥? 이걸루 끝인가요? 왜 돼지가 되었느냐'라고 물으니, 미야자키는 '일본영화는 원인과 결과를 밝히려 든다. 결과만으로도 좋잖아.'라고 화를 냈다. 그래도 관객이 납득을 못할 거라고 하니 내놓은 것이 미망인 지나의 등장과 마법을 걸려 돼지가 되었다는 설정의 30분짜리 콘티였다. 스즈키가 다시 이걸루 끝이냐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자 미야자키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점점 내용이 덧붙여져서 결국 장편으로 늘어나서 극장 개봉되었다. 미야자키는 '자신의 취미를 위해 영화 만들면 안 되는데,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라고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고 이제까지 어린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왜 이런 것을 만들어버렸는지 후회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스튜디오 지브리 영화는 나올 때마다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미야자키는 흥행보증수표가 되었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설계한 신사옥(제1 스튜디오)을 짓고, 지금의 장소로 이사했다.

다음 작품으로 작은 벌레의 모험 이야기나 81년에 구상했던 동화 모노노케 히메 기획에서 출발한 일본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 액션 활극을 만들까 선택에 고민하는 상태에서,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는 이제 미야자키도 나이도 있고, 더 나이를 먹으면 액션 대작을 만들 수 없고, 지브리도 설립하고 10년이 되어 사원들도 30대 초반으로 체력도 있고 실력도 올랐으니 이번에 전력투구해서 화끈하고 화려한 작품을 하나 터트려보자고 조언했다. 하야오는 이번 작품이 마지막 감독작으로 생각하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철학과 모든 기술과 노하우를 담아내고, (이번에 흥행에 실패하면 망해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기둥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약 22억 엔의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하고, 이제까지 다른 작품이 4만에서 8만 장의 동화매수였던 것에 비해 무려 14만 장의 동화를 사용한 대작이 완성됐다.

이즈음 지브리는 타카하타 감독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콘도 요시후미의 귀를 기울이면(1995)을 개봉한다. 미야자키는 자신들의 영화가 시대의 전환기에 대응하지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세상은 천안문 사태(젊은 시절 미야자키는 문화대혁명에 찬동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소련 해체로 변하고 있었고, 내전과 전쟁과 학살은 여전히 도처에서 일어났다 . 일본 국내에서도 거품 경제는 꺼지고, 고베 대지진옴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 가스 사건이 발생, 한국에서도 다미선교회휴거 소등이 일어나는 등, 세기말 현상으로 사회는 혼란한 분위기였다. 미야자키는 "간단히 사람을 미워하게 된 시대"가 되었다며, 그런 것을 외면하고 태평스럽게 어린이에게 '오늘은 즐겁고 씩씩하게 삽시다'라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사로잡혔다. 이제까지 어린이에게 희망을 가지고 밝고 건강하게 살라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왔는데, 실제로 어린이들이 마주치는 현실 세계는 응원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다루지 않고는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있는가 하면 해결 불능의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해결 가능한 문제에 한해서, 숙제를 클리어한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그런 식으로는 현대에 우리에게 부딪친 문제에는 길항(拮抗)할 수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해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해답이 없는 채로 작품으로 내놓기로 했다. 모노노케 히메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마음의 문제[12], 부조리한 사회와 차별 문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서로 증오하고 살육하는 인간 관계의 문제[13] 등의 복잡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오락 영화로 만들어야 했다.
시대극은 히트하지 못할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모노노케 히메》(1997)는 약 190억엔을 벌어들이고 총 1450만명을 동원, 일본 박스오피스 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14] 지브리라는 브랜드 인기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이자 은퇴작이라는 화제성으로 의무적으로 봐 줘야 한다는 사회적 현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은 그 난해한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라는 해설서와 연구서가 출판됐다. 게다가 영화를 만든 장본인 미야자키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소화를 다 못하고 있습니다."(1997,10, 30일 일본 배급수익 신기록 수립 기념 기자회견에서) "역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떤 테마를 주장하고 싶다면, 자신이 그 테마를 소화해야 하지만, 식물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따위의 테마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거고, 이 만큼 스토리를 만들었으니 영화를 보면 다들 이해할 겁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어떻하지라고 생각합니다만. (웃음)"라며 관객에게 알아서 해답을 찾으라고 화두를 던진 영화였다. 선배이자 라이벌 타카하타 이사오는 "이 영화을 본다고 해서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안된다,"며 신랄한 비판을 했다. [15][16]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의 은퇴작으로 알려졌지만, 은퇴설의 진실에 관해서는 TV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다음 작품은 무엇을 할 겁니까?"라고 물으니 "다음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렇게 되어버렸다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이라고 하면 쭈욱 감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데, 일선에서 조금 벗어나서 이선에서 다른 하고 싶은 일(자신의 스튜디오 건설, 작은 소품 영화)을 하고 싶다. 이 체력이나 여러 면을 고려하면 계속 일선에서 있는 것은 노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순위로 해야 할 일 리스트에서 감독직을 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니 가수 은퇴선언처럼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라며 부풀려진 면이 있다고 밝혔다.[17]

아무튼 세간에는 은퇴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동안 장편 제작에 매달리느라 못했던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개인 스튜디오(제2 스튜디오)를 건축했고, 지브리 미술관을 설계해서 2001년에 개관했다. 1998년 1월에는 20년이상 작화면에서 오른팔 역할을 해주던 동료 콘도 요시후미가 사망하는 슬픈 일도 겪었다. 같은 해 가장 좋아하는 책 [인간의 대지]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발자취를 따라 남프랑스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비행 여행을 하기도 했다.

97년부터 지브리의 차기작에 대한 구상에 들어갔다. 은퇴를 했다고 해서 작품 제작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고, 귀를 기울이면처럼 각본과 그림콘티(스토리 보드)는 미야자키가,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몇 편의 원작이 후보로 올랐지만, 스토리를 대거 뜯어 고쳐서 각색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1년간 구상하고 이미지 보드를 만든 예정작은 여주인공이 요즘 시대 사람같지 않다는 주위의 평을 듣고 뒤짚어엎었다. 그때 지인들을 자신의 별장에 초대해서 소풍을 갔을때 일어났던 해프닝에서 착상을 얻고, 지인의 10살난 딸을 주인공으로 그 소녀를 위한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한 어린 소녀가 스튜디오 지브리같은 세계에 흘러들어와 온갖 이상한 일을 경험하고,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용기와 힘을 발휘한다는 내용이었다. 감독은 31살의 유망주 안도 마사시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안도는 미야자키의 각본과 그림콘티로 감독을 하는 것을 거절했다. 안도는 리얼리즘 지향으로 미야자키와는 만들고자하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어쩔 수 없이 미야자키 본인이 감독으로 복귀하고, 안도에게는 작화감독을 맡겼다. 미야자키와 다른 감독이 다른 점은 원화 체크는 원래 작화감독이 하는 일인데, 미야자키는 작화감독이 해야 할 원화체크도 혼자서 다 해버려서 작화감독이 하는 일은 미야자키가 체크한 원화를 깨끗하게 다시 그리는 정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체력을 고려해서, 작화팀을 총괄하고 작화를 책임지는 모든 공정을 작화감독인 안도 마사시가 전담하기로 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나중에 서로 반목하게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는 2001년 7월에 개봉됐다. 온국민이 기다리는 기대작이었다. 일본 안에서만 최종 흥행수입 308억 엔[18], 총 관객수 2350만 명으로, 역대 일본 극장 개봉 영화 기록을 새로 갈아치웠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공동수상했다.(또 하나는 《블러디 선데이》) 2003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도 수상했다. 미야자키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등극했다.

신인 감독을 데려 와 동시 상영작으로 추진했던 고양이의 보은(2002)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고양이의 보은은 무사히 완성돼서 단독작으로 개봉했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제작 과정에서 트러블이 생겨서 제작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호소다 마모루를 발탁해서 각본과 감독을 맡기로 한《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은 2002년에 제작이 중단되었다. 호소다 판 하울이 왜 중단되었는지는, 지브리 측이나 호소다 본인도 말을 꺼내는 것을 꺼려하고 있어서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선택한 원작 소설이었기에, 기획을 이어받아 다시 처음부터 각본을 쓰고 작품을 완성했다. 신년 휴가까지 포기하고 만든 이 작품은 이전까지의 미야자키의 작품보다 질이 떨어진다는 등 호평보다는 악평을 더 많이 받았다. 그래도 미야자키+기무라 타쿠야의 네임 파워가 있었는지, 제작비 24억 엔, 흥행수입 190억엔, 관객동원 수 1600만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미야자키는 "원작 소설의 덪에 걸린 작품이다. 원작의 모티브에 매료되어 시작했지만, 원작의 작가는 소설 속의 마법의 원리라든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가 힘들었다."고 자평했다, 마음 속에 가시처럼 남는 작품이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한편, 어스시 연대기의 원작자 어슐러 K. 르 귄은 오래 전부터 미야자키의 애니화 희망을 거절했었지만, 일본어판 번역자의 소개로 미야자키의 작품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다는 뜻을 스튜디오 지브리에게 전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미 어스시 연대기를 영상화 할 의욕이 사라진 지 오래여서 감독직을 거부했다. 이에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미야자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에게 하야오가 만든 계획안과 원안을 주고는 스토리 보드를 그려보라는 요청을 했고, 고로의 스토리 보드를 본 스즈키 프로듀서가 고로가 감독을 맡아야 한다고 추천했다고 한다. 이 때 미야자키와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 전까지 영화 제작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고로가 감독을 맡아 게드전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흥행은 어느정도 했지만 실망스런 완성도, 특히 원작파괴로 비난을 받았다.

이 때 상업 제작사인 지브리를 자신을 정점으로 한 개인 기업화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족벌 체제구축을 위해 문외한인 아들에게 연출을 맡기는 무리수를 두다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타카하타 이사오가 99년 이래로 11년간 단 한편의 신작도 연출하지 못했던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는 시각이 있다.), 인터뷰 등을 보면 고로더러 감독하라고 한 건 미야자키가 아니라 스즈키 프로듀서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나름대로 후계자 양성에 적극적이었고, 고양이의 보은 등을 젊은 감독에게 맡겨 후계자를 양성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한 편이다. 오히려 스폰서 측에서 미야자키라는 흥행보증수표의 이름값 때문에 감독을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2007년에는 지브리 사원을 위한 보육원을 만들었다.

2008년 《벼랑 위의 포뇨》를 개봉했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 하울로 갈수록 스토리가 복잡해지는데 자질구레한 설명은 안하기로 했더니, 관객의 절반은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하울의 평가는 미야자키를 화나게 했다.[19] 그래서 방향성을 바꿔서 눈높이를 낮추어 어린이 관객을 대상으로 한 단순명쾌한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제작에 들어가면 특유의 스타일대로, 원작도 각본도 없이 그때 그때 머리 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나열하는 스토리 보드(그림 콘티)에 스토리를 짜맞춰서 만들다 보니, 다시 기승전결은 없고, 세계관의 설명도 없고, 복선의 수습도 없고, 관객은 그저 화면에 펼쳐지는 스토리를 따라가기에도 급급한 난해한 작품이 탄생했다. 주요 타겟이었던 어린이 관객도 기대한 만큼의 좋은 반응이 아니었다. (스튜디오 지브리 사원들의 자식들과 근처 유아원의 아이들을 초대해서 가진 자체 시사회에서 보인 어린 관객들은 영화 내용을 이해 못하고 지루해하는 반응을 보였고, 흥행에 대한 적신호가 켜졌고, 관계자들은 불안함을 가졌다. 일본의 영화 평론가 우타마루는 포뇨를 평하면서, 입장 전에는 관객들이 포뇨 포뇨 주제가를 신나게 노래했는데, 영화가 끝날 쯤에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이 극장 전체가 싸했졌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후배 오시이 마모루는 이건 영화가 아니라, 미야자키의 망상 덩어리라며, 스즈키타카하타는 왜 말리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들었다. 사실 그동안 미야자키 작품은 타카하타와 스즈키가 스토리를 확인하고 조언을 주었는데, 모노노케부터는 타카하타는 작품에 간섭하지 않았다.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를 그리는 내내, 스토리가 치히로의 시점만으로 흘러가는 것에 '이러면 파쿠상(타카하타의 애칭)한테 혼나는데'라며 중얼거렸다.

최종 흥행 수입은 155억 엔으로 선전(善戰)했지만, 제작비 34억 엔을 쏟아붓고, 손으로 그린 동화매수 17만 장이 넘는 대작치고는 기대 이하의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미야자키는 "'포뇨의 세계'를 좋아하고, 이거야 말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애니메이션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만들고 보니 세상의 물결과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았다. 하나의 장르는 파도처럼 흥망성쇠가 있는데 이제는 상당히 곤란한 시기가 왔다. 포뇨는 어찌보면 결론같은 작품이다. 우리는 포뇨로 마침표를 찍었다."라고 씁쓸한 심정을 자평했다. 포뇨를 만들 때만 해도 체력의 한계로 이번 작이 마지막 장편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 상태로 은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장편 영화를 한 편 더 만들 거라고 말을 꺼내들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에게 72세에 죽으려고 하는데 이제 5년 남았으니 앞으로 하나 정도 밖에 못 만들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브리는 후계자 양성과 세대교체를 준비중으로 3년 내에 2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내놓을 구상을 발표했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감독 데뷔작 마루 밑 아리에티(2010)와 미야자키 고로의 두 번째 감독작 코쿠리코 언덕에서(2011)가 극장 개봉했다. 두 작품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을 썼고, 아리에티는 총 프로듀서를 맡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2013년에 극장용 장편은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바람이 분다를 공개했다.

2.5.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 공식 은퇴와 그 번복[편집]

그리고 2013년 9월 1일 공식은퇴 발표가 떴다. 9월 6일 베니스 국제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은퇴의 이유로 나이를 들었다. 벼랑위의 포뇨에서 바람이 분다가 나올때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더이상 작품을 만들기가 버거워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몇번 은퇴선언 후 번복하긴 했지만 이번엔 진심이다라고 주장했다(...) 은퇴 이후에는 운전이 가능할 때까지 매일 지브리 미술관에 다니면서 쉴 예정이라고. 하지만 후계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2014년 연초부터 은퇴 번복의 기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12월 31일 도쿄FM 라디오 인터뷰에서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 감독이 "자원봉사 차원이라면 영화를 만들어도 좋다"고 밝혔다. 진행자가 은퇴 철회를 시사하는거냐고 묻자, 스즈키 프로듀서가 애매한 한마디를 던진다. 원래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자유롭게 산다고 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자유도 있다. 일각에서는 미야자키의 은퇴 선언이 지브리 경영자들과 충분한 교감 없이 내지른 것이거나, 혹은 미야자키 은퇴 후 구도에 대한 우려때문에 은퇴 번복에 대한 압박이 나오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일단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그가 복귀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듯 하다.

2014년 7월에 지브리 해체설이 불거지고 추억의 마니가 최악의 시작을 보이면서 결국 미야자키가 은퇴 번복하고 다시 돌아오는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슬금슬금 나왔다.

그런데 미야자키가 추억의 마니 제작진들에게 이것저것 제안하기도 했다는데 제작진이 이번에는 미야자키에서 벗어나서 우리끼리 해보자라고 했다고.# 은퇴했다는 양반이 저러는걸 두고 젊은 사람들 못믿고 간섭하려드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014년 말경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 부문은 해체됐다.

2015년 7월. 지브리 박물관에서 상영할 10분 분량의 단편을 제작 중이라고 한다. 털벌레가 주인공이며 3D와 CG 작업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 #

2015년 8월 30일. 오키나와 현 구메지마 삼림공원에 약 1만 평 규모의 생태체험시설을 조성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내년 4월 착공해 2018년 완공을 목표로 하며 해당 기초자치단체에 기증될 예정이라고 한다. #

레드 터틀 제작보고회에서 조건부 복귀를 내비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다만 본래 은퇴 발표를 했을때도 업계에서 완전 은퇴하는게 아니라 장편 영화 제작에서 은퇴한다는 이야기였다.

2016년 10월, 미야자키가 '평생의 전우'라고 불렀던 토에이 동화 시절부터 동료였던 야스다 미치요가 암으로 사망하고 상심한다. 미치요는 입버릇처럼 이대로 은퇴하지 말고 한 편 더 만들라고 말했는데, 미야자키는 미치요가 (건강을 되찾아서) 같이 만든다면 만들겠다고 대답했는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2016년 11월 13일 방송한 일본 NHK 스페셜 다큐멘터리 <끝나지 않은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에 출연해 은퇴를 번복했다. 현재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애벌레 보로>를 제작 중이고, 새로운 극장용 장편 영화를 만들 의향을 비췄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전까지 제작을 끝내고 개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그때면 연세가 무려 80세가 되시니 정말로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스즈키 토시오에 의하면#, 아일랜드 작가 존 코널리잃어버린 것들의 책을 원안으로 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오리지널 장편 기획이 진행중이다. 2017년 여름에는 작화작업에 들어가서 2019년에 완성 예정으로 작화감독은 스튜디오 카라 소속의 혼다 다케시가 담당한다. 4월 30일발 소식으론 그림콘티(스토리 보드)는 20분 분량이 완성됐고, 2019년 개봉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2017년 5월 28일, 일본의 한 시사&예능 방송 프로그램(ワイドナショー 2017年5月28日)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 선언 발언이라면서, 일본의 트윗터 유저가 장난 삼아 올린 글을 마치 미야자키 감독이 실제로 한 발언으로 소개하며, 은퇴 철회 발언을 비웃으며 놀려대는 방송을 내보냈다. 결국 진위가 밝혀지면서 잘못된 자료를 인용해서 방송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다. 그렇다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전부터 극장용 영화 감독직을 몇 번이고 그만하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조작이라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본인이 인터뷰와 직접 쓴 글에서 몇 번이나 감독직은 힘들어서 그만 두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 선언을 한 것은 바람이 분다를 만들고 나서이다. 비화를 들어보면, "나 은퇴 할거야!"라고 하면서 공표하지 않으면 못지킬거니까 기자를 불러달라고 해서, 스즈키 토시오는 공식 은퇴 기자회견 중계까지 마련했는데, 그 직전 타카하타 이사오와 만난 자리에서는 "정말로 은퇴할 거야?"라고 물어보니, 미야자키는 "그것은 스즈키 씨의 음모에요."라고 말해서 스즈키가 벙벙했다든가, 은퇴 기자회견을 앞두고, 완전 은퇴에서 "나는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직에서만 은퇴할 거고 단편 작품은 계속 만들거야."라고 말을 돌렸다라든가, 2017년 시점에서 은퇴 번복을 하고 장편 영화를 만들려고 의욕적이라는 소식을 보면, 한 작품을 만들고 나서 체력이나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푸념처럼 은퇴 발언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창작 의욕이 생기면 은퇴를 번복하는 패턴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은퇴 사기꾼'으로 조롱을 받고 있다.

3. 성향[편집]

3.1. 작품 스타일[편집]


미야자키가 그린 원화는 미국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만화적인 과장을 허용한 표현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 황당무계하거나 비현실적인 표현은 거의 없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토에이 동화 출신답게 동화(動畵)매수를 풍부하게 사용한 캐릭터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작풍을 보여준다.

일단 그가 감독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특유의 동화풍 그림체가 눈에 띄는데, 감정표현에서 입이 굉장히 커지거나 눈동자가 작아지는 다채로운 변화가 특징. 특히 특유의 몽글몽글 꿀렁꿀렁거리는 실감나는 액체 질감표현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면 센과 치히로의 오물신 이라던가 가오나시 광폭화 라던가.

성장 환경 덕에 상당한 수준의 비행기 덕후로 그의 상당수의 작품들에는 비행기와 비행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거 말고 그의 그러한 성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 바로 붉은 돼지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작중 등장하는 비행기를 전부 그가 디자인했다.

마찬가지로 성장 환경 덕인지 모노노케 히메 같은 옛이야기풍 내지는 포뇨같은 정말 동화같은 배경이 아니면 작품에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무장이나 차량을 모델로 한 병기들이 자주 보여진다.

이탈리아 관련된 것들이 상당히 자주 나온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의 장교인 모우로와 군인들은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군과 많이 유사하며, 붉은 돼지는 아예 배경이 이탈리아다. FIAT제 트럭과 군대, 공간적 배경 등 아무리 봐도 이탈리아. On Your Mark의 결말 중 탈출에 성공해 지상으로 나가는 결말에서 타는 노란색 컨버터블도 알파 로메오 차량이다.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부터가 이탈리아어인 Ghibli, 모래폭풍이라는 뜻. 이외에도 어딘가 모르게 이탈리아 냄새 나는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어딘가 모자란 군인들이라던지

또한 페미니스트로서[20] 주인공을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요 여성 등장인물들은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 등 여러 대중매체에서 등장하는 고정적 성 역할의 전형적 여성 등장인물과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다. 이러한 여성 등장인물의 강인하고 주체적 성격은 다음 자료 나무파일:external/24.media.tumblr.com/tumblr_m97egt086h1qik1x0o2_1280.png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작품 특성에 대하여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의 많은 작품들에는 강인한 여성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용감하고 의존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구나 조력자가 필요할 수는 있으나 구원자는 절대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여성은 어느 남성과 같이 영웅이 될 역량이 있다. (Many of my movies have strong female leads - brave, self-sufficient girls that don't think twice about fighting for what they believe in with all their heart. They'll need a friend, or a supporter, but never a saviour. Any woman is just as capable of being a hero as any man.)', 소피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는 '남성으로부터 정복당해온 여성과 문명으로부터 고통 받는 자연이 닮았다고 믿기 때문'이며 '남자 주인공으로는 그냥 악과 맞서 싸우는 관습적인 이야기밖에 만들 수 없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또 주인공의 조력자나 조언자 포지션에 있는 할머니 캐릭터 역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천공의 성 라퓨타의 도라와 시타의 친할머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니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켄타의 할머니, 마녀 배달부 키키의 빵 만드는 할머니, 모노노케 히메의 무녀 히이사마 등.

1957년에 만든 소련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보고 주연인 게르다보단 조연인 이름없는 산적 소녀에 매료되어 그의 여자 캐릭터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이지만 칼을 뽑고 맹활약하며 겁이 없는 그리고 얀데레/하드, 진짜 이 문서에 이 소녀가 있다 이 소녀는 종전 애니메이션에서 나약하던 여성 이미지와 상반되어서 잊을 수가 없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사람이 달리는 장면을 그릴 때 진짜 빠르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동작에서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 달려도 페이스가 느려지지 않는다! 미래소년 코난같은 작품이야 만화적 과장이라고 치더라도, 바람이 분다같은 작품에서조차 100미터 10초 끊을 기세로 달린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가 평지도 아니고 험난한 산을 들개와 맞먹는 속도로 달려내려가는 장면을 보면 이건 아주 그냥 인간의 한계를 이미 초월한 달리기다. 아시타카는 스튜디오 지브리 세계관의 주인공들 중에서도 무술 만렙을 찍은 초인 중 하나니 이상할 건 없을지도 모른다. 손으로 칼을 구부리는데 달리기 쯤이야 그보단 멧돼지 가죽을 쓰고도 멧돼지만큼 빨리 달리는 병사들이 더 대단하다... 적은 프레임으로 빠른 속도감을 보여줄 수 있고 해당 테이크를 빠르게 넘길 수 있으니 애용하는 노하우인 듯.


그리고 음식을 맛있게 그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음식,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음식 등 미야자키가 감독한 만화영화의 음식은 죄다 위꼴사 수준. 음식의 찰짐이 느껴진다. 상기한 특유의 액체표현도 이것의 연장선상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식성은 매우 검소한 편이다. 스튜디오 직원들이 근처 식당이 맛있니 맛없니 하는 것을 들으면, 인간은 살기 위해 먹지, 맛있는가 맛없는가로 먹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는다. 매일 부인이 싸 준 검소한 도시락 하나로 하루 두 끼를 때우고, 비싸고 호화로운 음식은 일 년에 서너 차례나 먹을까 말까라고 한다. 그래서 스즈키 토시오 말로는 가끔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정말로 기뻐한다고 한다. 그런 면이 있으니까 감성이 둔해지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밝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는 그의 젊은 시절의 세계명작동화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고 악한 캐릭터라고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악당을 그린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구제불능의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라살 칼리오스트로, 코난의 레프카, 라퓨타의 무스카가 그러하다. 다만 이 셋은 사실상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성이 일치한다. 일단 사각턱 미야자키의 악역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캐릭터는 시대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지론이 있다. 그래서 캐릭터가 인기가 있다 해서 사자에상 시공에서 무한 반복으로 사골처럼 우려먹지 않는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면 메이와 사츠키는 결혼해서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다고 대답한다. 등장하는 캐릭터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당시의 시대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상을 반영하되, 그렇다고 시대의 유행에 영합하지 않는다.

작업 스타일은 대단히 독특한데 시나리오가 없이 미야자키 감독이 직접 기획서를 쓰고 콘티를 짜며 그 콘티를 바탕으로 미야자키 감독 본인이 레이아웃까지 잡은 원화까지 그리는 스타일이라 거의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다 만드는 별종이라고 불린다. 사실 이래서 체력에 한계가 있는 노년으로 갈수록 힘들어질 것 같다. 무한시간과 강철체력이 주어졌다면 동화에 각종 이펙트도 혼자 다 해먹었을 기세 현대카드 컬쳐프로젝트 일환으로 유치된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전에선 미야자키 감독의 진짜 레이아웃을 가져다 전시했는데, 작화지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사물들은 작화지 3-4장을 테잎으로 고정하여 통으로 사용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거대한 레이아웃 작품도 일부 있다. 일본에서 콘티집을 시중에 발매한 최초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미야자키라고 하니 말 다한 듯. 이렇게 자세하게 서술하는 타입인데도 작품을 제작할 때 "대충 적어놔서 미안합니다"라고 할때도 있다고 한다.

위대한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이며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헐리웃 감독들의 존경도 받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이들의 추천으로 공로상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출발점, 반환점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들먹이며 스필버그를 대차게 깠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 스타일 때문에 후계자를 키우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긴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 당시 참여했던 안노 히데아키미야자키가 다 해먹어서 난 할일 없었어여라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미야자키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스타일이라서 젊은 스탭들이 참여해서 기량을 성장시킬 여지가 부족한 게 아닐까 싶다.너무 천재여도 문제 콘티와 레이아웃을 디테일하게 그리는 것도 그러한데, 사실 작화가들에게 선택권과 기회를 많이 부여하려면 어느정도 콘티를 느슨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 적당히 테두리만 쓱쓱 그려놓거나 심하게는 '액션'이라고만 적어놓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3.2. 토미노와의 관계[편집]

미야자키와 가장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은 역시 토미노 요시유키로 봐야 할 것 같다.

토미노는 안노 히데아키와의 대담에서 "그 인간은 자기가 로리콘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해야 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로리콘 취미[21]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로리콘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 여기서 안노는 "토미노 선생님의 작품은 토미노 선생님께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x를 덜렁거리며 춤을 추는 느낌이라 존경한다. 하지만 미야자키 선생님의 작품은 '나 지금 벌거벗었다~'라고 외치면서도 하반신에는 멋드러진 팬티를 입고 있는 느낌"이라고 비유했다(…). 역시 안노는 변태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면서 멋부리고 있는 느낌이라 꼴불견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대담에서만큼은 안노가 폭주하며 미야자키를 까고 토미노는 오히려 미야자키를 옹호하는 느낌이었다. 동년배인만큼 그 기분만큼은 전부 이해를 한다고. 오히려 머리도 좋고 기술도 있으며 센스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기까지. 로리콘 취향에 관한 부분만 빼고(…). 물론 토미노가 정상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토미노 요시유키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것 같다. 실제로 몇몇 작품에서 함께 일한 적도 있다.[22] 어떤 강연에서 토미노가 미야자키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미야자키 본인에게 말해도 괜찮다. 아는 사이이므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토미노가 미야자키와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서는 이유에 대해선 미야자키가 테즈카 오사무 사후 한 인터뷰에서 테즈카로 인해서 리미티드 기법이 유행했고 낮은 제작비가 관행이 되었다고 비판한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23]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원화는 별로 줄지 않은 것에 비해 동화는 팍 줄어버린 셈이 되어 타격을 받았긴 했다. 그 외의 파트들은 이에 별 상관없이 먹고는 산다. 허나 이것이 동화가들을 영세하게 만든게 아니라 제일 중요한 이유는 제작회사의 마인드다. 현재 한국 동화 단가가 1000원이 평균인데, 1500~2000원대로만 진입해도 회사는 적자는 면하면서도 동화가들을 살릴 수 있는 셈이 된다.

3.3. 픽사와의 관계[편집]



미야자키 하야오는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의 막대한 존경을 받고있다. 존 라세터는 미야자키야말로 월트 디즈니와 함께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라며 찬사했다. 애니메이터였던 시절, 존 라세터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용이다'라는 평가에 상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야자키의 첫 영화인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보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 작품을 본 라세터는 애니메이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심지어 청혼하기 전에, 아내가 자신의 소울 메이트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루팡을 같이 봤다고 했을 정도로 라세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라세터는 미야자키의 모든 영화는 하나도 빠짐 없이 명작이고 한 사람이 이걸 다 상상하고 스토리 보드를 손수 그렸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는 라세터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때문에 에머리빌에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의 작품의 영어 더빙 감독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와 그의 동료와 제자 감독들이 맡기도 했다. 참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깡총거리며 뛰는 전등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픽사의 룩소 주니어오마주라고 한다. 한편 그에 대한 보답인지 2010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 3에서는 토토로 인형이 나오기도 했다.

3.4. 한국과의 관계[편집]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종주의자에 한국을 싫어한다는 루머가 90년대에 하이텔 애니동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동호회에 계속 돌면서 전설처럼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런 내용이 온라인을 넘어서 퍼져가는 데는 모 밀리터리 소설에서 쓴 부분도 한몫을 했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며, 당시 일본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만들어진 헛소문이다.

미야자키가 한국을 싫어한다는 말은 예전에 한국 쪽에 하청을 줬다가 그 완성도에 실망했었던 일에 대한 표현이 완전 과장되면서 생긴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혐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 쪽에 하청 주는 걸 꺼리는 것도 이젠 예전 이야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작하던 시기에 스튜디오 지브리는 촉박한 스케줄 속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한국의 DR무비 쪽에 하청을 넘겼는데, DR에서 만든 결과물에는 미야자키도 크게 만족을 표현했다고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제작에 참여한 직원들만을 초청해 한국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시사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는 DR무비 관계자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다. 그가 혐한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 이후 DR무비는 고양이의 보은 등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10억 받고 하청했다는데, 자세한 사항은 내부 기밀이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10억은 많이 받은 게 아니다. 32분 정도면 5만컷 정도가 동화로 들어가는데, 애니메이션은 동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후에 클린업, 채색, 이펙트, 디지털 CG 등도 포함되기에 최종적으로 분배되는 단가는 그리 많지 않다.

여담으로 벼랑 위의 포뇨에서 직접 한글 로고를 쓰기도 했다. 이는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한 것이라고.

3.5. 오덕까[편집]

나무파일:external/pbs.twimg.com/CDweHlpUkAAMxPI.jpg[24]

오타쿠모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타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자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팬들은 세간 사람들에게 오타쿠 취급을 받지 않고 있다.

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실망하거나 적대적인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립을 벌인 적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찬사를 받는 명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지만, 예술가로서의 고집이 굉장히 강한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발언들은 각자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그가 오타쿠나 모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오타쿠에 대한 미야자키의 다른 발언을 첨가하자면,
"이런 건 말야 실제로 어린애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그런 관찰 못하면 못 그리지[25]. 이걸 안하고 아무것도 못 보고, 자기 자아밖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일상생활만 보내고 있고. 인간관찰을 싫어하는 인간이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타쿠 소굴이 되는 거지."
"난 정열도 인생 경험도 없는 오타쿠를 고용할 생각은 없다. 불을 표현하려면 불을 접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군가의 작품을 따라 만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애니메이션은 맡길 수 없다"

분명한 건 타인이 오덕을 자처하는 언동을 싫어한다는 점으로 이는 지브리 작품에 참여한 적이 있는 안노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려져 있고, 아소 타로 전 총리의 오덕 행적에 대한 질문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본인은 상당한 실력의 모델러이자 중증 밀덕후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만드는 프라모델이나 모형지 "모델 그래픽스"를 통한 단편 만화들의 주인공들은 창작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추축국 병기들이다. 이 때문에 이 양반도 마츠모토 레이지처럼 그 시절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쟁이나 혹은 무기 등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과거의 도시화/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동경에 가깝다. 출생 대목을 다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릴 때부터 비행기나 군인들을 많이 보면서 자란 탓에 무기나 군인 복장 등을 그리게 되면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보아 익숙한 양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유년의 향수처럼 드러나게 되는듯하다.

4. 논란[편집]

4.1. 좌우 성향 논란[편집]

인종차별자라든가 혐한론자라는 의혹과 상반되게, 노조 활동이나 공산당 신문의 연재 이력 때문인지 무정부주의 좌파라는 얘기도 듣고있는데, 그런 색깔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으로는 반파시즘적인 색깔이 확연한 붉은 돼지, 반전 메시지가 강한 미래소년 코난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있다.

그리고 가쿠슈인 대학 재학 중에 직접 공산당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좌익을 지지하는 글을 투고했다고도 한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좌익세력은 일관되게 군국주의와 천황제에 반대하는 세력이었고, 극좌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적군파와는 전혀 노선이 다르다는 점이다.

정치적 발언의 기피로 우익이라는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우익성향을 나타냈다기보다는 정치적으로 파장을 부를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을 삼갔다고 보는게 맞다. "나우시카" 개봉 당시 영화잡지 '키네마준보'에 나우시카가 은연중에 가미가제 특공을 미화하고 있다는 비평이 게재되었을 때 이에 반론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 발언을 해도 좌익과 우익에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예 민감한 대답을 피한 것이다. 이 일은 1980년대에 있었던 일인데, 그 당시조차 일본의 참전자 단체나 우익야쿠자들이 공공연히 백주에 테러를 저지르던 시기였기때문.

마찬가지로 그가 한국을 2000년대 초반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당시 이슈가 되고 있던 위안부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그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고 대답한 바가 있는데, 이것도 한국 네티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바로 그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근친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덕분에 역시 좌파 운동권 출신의 오시이 마모루에게는 두고두고 까인다. 안노 히데아키 또한 비슷한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고 심지어 미야자키의 작품은 "데이트 무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극언을 붉은 돼지 공개 직후 한 적도 있다.(인터뷰집 스키조 에반게리온 참조)

하지만, 나우시카 이외에 미야자키의 작품에서 우익 논란이 있었던 작품은 거의 없으며, 그의 대부분의 작품 성향으로 볼 때, 서구적 좌파가 그의 지향점으로 생각된다. 다만,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과 같이, 공산주의 사상이 동양에 들어오면 민족주의와 묘하게 결합하는 경향이 있으며, 서구에서는 민족주의가 자본가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악용된 반면, 동양에서는 자본가에게 맞서 싸울 노동계층을 결집시키는 이념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강해(대개의 동양 국가들이 외세의 침략과 수탈을 받았으니...), 동양에서는 우익=민족주의/좌익=공산주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게 되는 점이 있으며, 미야자키의 경우 초기에는 일본적 전통 및 일본적 민족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됨에 따라, 좌파적 색채와 서구적 묘사가 공존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노노케 히메 이후로는 그가 확실히 일본적 전통을 긍정하게됨에 따라, 초기의 좌파/서구 지향의 색채가 등장인물의 생김새 외에는 거의 사라졌다.

또한 이러한 우익적으로 보이는 연출이 미야자키 본인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었을 가능성도 높다. 키네마준보에서 지적한 카미카제 논란에 대해서는, 미야자키 본인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가 정곡을 찔려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비슷한 예로, 홍콩의 오우삼 감독이 본인의 대표작인 "영웅본색" 시리즈와 "첩혈쌍웅"에서 남자 주인공들의 관계가 동성애적 코드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미국 평론가의 지적에 대해 "나는 그렇게 의도하고 연출한 것이 아니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도 보인다."라고 수긍한 적이 있다. 작품이 작가의 구속에서 탈출한다고도 하는데 이런 경우로 보는 쪽이 타당할 듯.

그런데 애니판의 논란과 달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코믹스의 경우 우익 논란 따위는 쏙 들어가버리게 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정부주의적이고 반(反)전체주의적인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미야자키의 최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나우시카 코믹스를 보면, 미야자키는 일단 좌익 쪽에 기울어져 있지만 현실에서 나타난 공산주의 체제의 모습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이며 특히 좌우파를 막론하고 나타난 전체주의(스탈린주의와 파시즘 양쪽 다)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좌익 논란을 떠나서, 적어도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한 관심을 가진 건 틀림없어 보이며, 그런 경향의 작품으로는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벼랑위의 포뇨 등등이 있다.

그런데 바람이 분다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시놉시스가 루리웹에서 논란을 불렀다(참고). '신화로 변한 제로센의 탄생'이란 표현이 문제시되는 부분. 다만 해당 작품에서 전쟁묘사나 사상관련의 이야기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정말로 호리코시 지로와 제로센에 관한 이야기 밖에 묘사되지 않는다고.

2013년 7월에 미야자키가 쓴 칼럼이 공개됐는데, 미야자키가 본인의 사상적인 문제에 대해 이렇게 분명히 밝힌 적은 여태껏 없는 일이었던지라 화제가 되었다. 참고.

해당 칼럼에서는 '일본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주변국들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논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어째서 이런 글러먹은 나라에서 태어나버린 것일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다고. 30대가 되어서 일본을 좋아하게 되긴 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로서가 아닌 '일본이라는 섬'으로 좋아하게 됐다는듯. '일본은 인간만 없으면 정말로 아름다운 땅이다'라며, 일본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안고 있으며, 아베 정부의 헌법9조 개정 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아베노믹스도 조만간 망할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 내에서도 바람이 분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영화 개봉 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일본 문화과학부 문화부장 출신 프로듀서 데라와키 켄은 2013년 8월 13일 기자회견에서 "한마디로 말해 미야자키 감독은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그런 반응이 있건 말건 개의치 않고 2014년 2월 TBS 라디오에서 방송된 인터뷰에서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은 지배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 자신들이 제국주의를 흉내냈다. 결과적으로 3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전쟁을 했고, 원폭이 두 번이나 떨어지는 일을 당했다. 주변국의 원한은 없어지지 않는다. 법적으로 해결한다 해도 감정이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다."라며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주변국들에게 피해를 줬으며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해도 주변국들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며 일본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 라는 소신 발언을 그치지 않았다. 또한 단세포적인 아베 총리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사참조 정치 성향을 떠나서 아베를 싫어하는건 확실하다.

4.2. 영토 분할, 공동소유 주장 논란[편집]

독도, 센카쿠 열도, 쿠릴 열도등의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에 대해서는 반으로 나누든가 공동관리를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조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양국간의 견해차를 좁히는게 중요하다는 입장이라는 옹호도 있으나, 일본과 영토문제를 겪고 있는 한, 중, 러 국민들은 물론 일본인 입장에서도 좋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발언이다. (참고) 다만, 일본 민주당 의원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 주장했다가 자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도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발언임을 참작해야 할 것이다.

4.3. 기술자 옹호, 제로센 찬양 논란[편집]

(이하 내용은 바람이 분다의 '일제 미화 논란' 부분도 함께 참조 바람)

일본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제로센은 상당히 호감가는 위치에 있고, 특히 일본 밀덕에게는 중심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위에서의 링크도 일본인에게서의 제로센의 위치에 한 문단 전부를 길게 할애하고 있다. 현대에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워낙 위치가 확고하여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제로센은 전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로망'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로센이 한참 로망을 달리던 시기를 청춘으로 보내고, 성장했기에 제로센에 대해서 양면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참고) 이 부분은 위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난다.

'Q : 전쟁을 비판하는 한편으로, 제로센이라는 무기에 애착은 갖는다. 모순되지 않습니까?
A : 모순 덩어립니다.'

이런 면에서 미야자키의 말을 살펴보아야 된다.

제로센 관련으로 악명높은 카미카제 자살특공대를 '그들은 구식이라 별 역할을 한 게 없다' 라고 표현한 것을 지적하여 제로센 찬양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원문은 (카미카제 피해자인 한국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호리코시 지로가 만든 제로센이란 전투기는 구식이라 가미가제 특공대가 활동할 때 유용하게 쓰이진 않았다. 그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다.'로, 제로센은 구식이라고 까는 내용이다. 이를 제로센과 관련된 것은 미화하거나 옹호, 축소하려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4.4. 아이패드 비난 논란[편집]

관련 기사

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열풍' 2010년 7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그 게임기 같은 것을 이상한 손놀림으로 문지르는 행동은 나에게는 어색할 뿐이며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혐오감만 줄 뿐이죠. 전철 안에서 이상한 손놀림으로 자위행위를 하는 것처럼 (아이패드를) 문지르는 사람들이 늘겠죠."라는 말로 아이패드를 비판했다.

한국 네티즌들 반응은 대체로 "그럴 수도 있다.", "아직 아이패드의 활용성을 잘 모르셨을뿐..."이거나 일부에서는 "타블렛과 어도비 포토샵 왜 안 까는가?"로 논리 빈약을 문제 삼았지만 뭐 대충은 공감이 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자국인 일본 네티즌들은 뼈가 가루가 되도록 깠다. 중에는 신상품 하나 들고 있다고 스스로 창조적인 사람이나 된듯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고 반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창조적인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오만한 발언"이라거나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는 옛 사람 고집"이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죄다 앱등이뿐이군

이는 일본 웹에선 애플 유저의 발언력도 크기때문이다. 일본에서 애플 제품 쓰는 사람들은 주로 올드비가 많기 때문에 2ch등지에서도 많이 서식하는 편.

4.5. 반지의 제왕 비난 논란[편집]

2002년에 한 반지의 제왕이 인종차별이 담겨진것[26]이라고 한 논평(인터뷰)가 15년후인 2017년에 논란이 되고 있다. ##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아프리카인"은 내용상 하라드림을 지칭하는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반지의 제왕에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있는것 아닌가라는 논란이 존재했었다.[27] 그러나 당시 영국인으로써의 시각의 한계가 존재할뿐만 아니라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톨킨은 인종차별 자체를 혐오하는듯한 시각을 여러번 보여줬다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 항목에 이러한 논란과 반박이 서술되어 있다.

다만 같이 깐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경우는 실제 인종차별에 관한 비판이 많이 존재한다. 당장 영화 내용만 해도 "작중에 나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는 한없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결국 그들의 보물은 영웅적인 활약을 한 백인 남성이 구해내고 이후 서양의 박물관에 장식된다는 결말" 이라는 내용이니. 실제로 2편의 경우 인도의 음식이 지옥의 음식이라며 비하한탓에 인도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다.

요컨대 미야자키 하야오가 헐리웃 영화의 백인우월주의적 성향[28]과 인종차별 논란을 비판한거 까지는 그럴수 있지만 그 대상이 반지의 제왕 이란건 공감하기가 어려운 내용이다. 다만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경우 실제로 인종차별적 논란이 존재하니 틀린 비판은 아니라고 볼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터뷰에 대한 논란은 2017년에 터졌지만, 이 발언이 나온 인터뷰는 그 보다도 15년 전2002년 때 이뤄진 것이었다. 즉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반지원정대가 개봉된 지 1년이 지난 뒤다.(...) 저게 왜 이제서야 이슈가 된 거지?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구미 세계에 대한 비판" 이란 내용으로 꽤나 오래 전부터 서술되어 있던 내용인데 나중에서야 마토메 블로그 등지에서 논란이 된거라고 한다.

5. 포스트 미야자키[편집]

존 라세터의 말대로,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 미야자키 하야오 급의 영향력을 보여준 감독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은 100억 엔은 기본으로 흥행했지만 2016년 너의 이름은.이 개봉할때까지 이 100억엔을 넘은 작품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을 제외하곤 단 한 작품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지브리 스튜디오 뿐만이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전체에서도 꽤 큰 고민으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그의 후계자가 나오지 않는 건 점점 대중적인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위치가 아슬아슬해진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의 수준에는 아직 확실히 도달했다고 보기 힘들지만 그 희망이 보이는 감독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건 아래 2명 정도이다.

5.1. 호소다 마모루[편집]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 가장 꾸준하게 대중 극장판 애니메이션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인물.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시작으로 썸머 워즈, 늑대아이, 괴물의 아이가 연이어 히트하고 흥행 성적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최신작인 괴물의 아이의 최종흥행성적은 59억 엔으로 2015년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가장 근접한 흥행을 기록하였다.

작품성도 매우 좋고 많은 관객에게 어필하는 데 성공한 대중적인 작품들이 많은데다가, 무엇보다 이 감독은 꾸준하게 좋은 작품들을 뽑아내고 있어 미래가 매우 기대된다.

다만 아직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역에 완벽하게 들어섰다고 할 만한 흥행기록을 가진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이대로 이름값을 올린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호소다 마모루 본인은 '포스트 미야자키'라는 말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되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류 작품같은 것은 미야자키씨가 하면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는 장래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 미야자키 감독의 영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었고, 스튜디오 지브리 연수생 시험에도 응모했다가 불합격한 경험이 있는 그는 '미야자키씨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최근작은 별로고 초기작에 한해서'라고 밝혔다. 미야자키 감독작에서는 이웃집 토토로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5.2. 신카이 마코토[편집]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 유일하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흥행영역에 들어서는 데 성공한 감독.

이전부터 호소다 마모루와 함께 유망한 포스트 미야자키 후보로 떠올랐던 천재 감독이었지만, 예술성[29]이나 영상미는 좋아도 스토리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 많아 그 만큼의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해 계속 뒤쳐지는 인상이었다. "영상미는 몰라도 감독 그 자체로써의 능력은 호소다 마모루보다 떨어진다"라는 것이 2016년 이전의 보편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다가 2016년에 개봉한 너의 이름은. 단 한 작품이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을 다 합친 것보다 게다가 본인의 작품들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흥행을 기록하는 대박을 터트리고 지브리 이외에서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 중 유일하게 100억 엔이 넘는 흥행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고도 흥행가도는 멈추지 않고 2016년 10월 23일 기준 164억엔을 기록하며 155억 엔의 벼랑 위의 포뇨를 뛰어넘었고, 200억 엔을 넘길 가능성도 높아져 모노노케 히메(193억 엔)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196억 엔)까지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그리고 개봉 102일 차인 12월 5일에 드디어 입장수익 200억엔을 돌파하였고,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제치고 역대 일본 흥행 수입 4위에 위치하였다. 흥행 뿐만이 아니라 평가도 역대 애니메이션 중 최고 수준을 기록하여 호소다 마모루보다 떨어진다는 평가는 옛날 말이 되어버렸다.

신카이의 문제는 호소다와 정 반대다. 앞서 말했듯 지금까지 신카이의 작품은 하나같이 예술성은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스토리가 빈약하거나 대중적이지 못해 대박을 터트린 작품은 없었다. 호소다와는 달리 신카이는 앞으로도 꾸준하게 이런 흥행가도를 달릴 것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이는 신카이 마코토 본인조차도 흥행 100억 엔을 넘기는 것이 무섭다고 밝혔을 정도로 부담이 큰 부분. 물론 이번 작품으로 이름은 널리 알리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흥행하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꾸준하게 이 정도 대박을 터트릴지는 지켜봐야 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이 흥행에 성공한 것은 감독 때문이 아니라 제작팀[30]덕분이라고 말하고,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불리는 것에는 '어느 나라에 가도 그런 질문을 받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상과 이름을 나란히 하는 것은 과대평가, 같은 방향으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다른 것을 목표로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6. 경력[편집]

6.1. 스튜디오 지브리[편집]

  • 현재 제작중인 미상의 작품. 2020년 초 개봉예정

6.2. 그 외[편집]

  • 소년 닌자 바람의 후지 마루 (1964) - 원화
  • 레인보우 전대 로빈 (1966) - 원화
  • 정글 쿠로베 (1973)[36] - 캐릭터 원안
  • 사무라이 자이언츠 (1973) - 원화
  • 너구리 라스칼 (1977) - 원화
  • 미래소년 코난 (1978) - 감독·캐릭터 디자인·메카닉 디자인·총콘티·연출·장면 설정

7. 기타[편집]

미야자키는 토에이 동화에 왜 입사했느냐는 질문에 "미제국주의 디즈니에 맞설 애니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가이낙스의 오카다 토시오가 쓴 책 <오타쿠학 입문>에서 나온 말로 입사지원서에 그런 식으로 썼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또 미야자키가 데즈카 오사무를 싫어하는 이유는 데즈카가 '디즈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것도 루머에 가깝고 미야자키가 데즈카를 비판한 적은 있어도 싫어한다고 직접 말한 적은 없다. 어릴 적 그의 만화를 읽고 자랐고 데즈카의 그림체를 흉내낸 만화를 그린 적도 있었는데 독창성이 없다고 여겨서 부끄럽다고 그 그림들을 불태운 적은 있었다.
그리고 미야자키가 디즈니를 디스하고 부정한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미야자키가 초기에 연출한 장면들을 보면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인용을 한 대목이 많다. 하나만 예를 들면,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초반에 카지노를 털고 달아나면서 다리를 벌리고 뽕뽕 튀는 장면은 토에이의 장화신은 고양이에서도 나오지만, 원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디즈니의 실사 합성 단편 Alice in cartoonland에서 인용이다. 재밌게도 현재 지브리 작품의 미국 배급은 디즈니 산하의 '브에나비스타'가 맡고 있다. 그리고 존 라세터와 친구 먹는다

미야자키는 그의 강연에서, 자신은 비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이랬으면 좋겠는데"라는 것을 늘 만들고 싶어하며, 그런 것밖에는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인한 바 있다.

한편 그는 일본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고통을 일본이 한국과 중국, 필리핀,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저지른 여러 학살 및 갖가지 일들과 비교하면 역시 일본인 전체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이상주의는 전쟁의 본질속에 작가 자신이 말해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미래적 희망들의 동화적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인가 작가의 작품 중에는 그런 모습들을 풍자적으로 희화해 더없는 웃음과 유쾌함을 보여주는 때가 많았다.

그래도 지금같이 후덕한(?) 애니들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미야자키나 토미노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들의 업적은 이후 안노 히데아키오시이 마모루가 이어받는다.

오시이나 안노 등과 같이 거론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시이와는 서로 자신의 의견을 두고서 티격태격 하면서도 인정하는 사이인듯 하다. 안노 히데아키의 경우 같이 해외 여행을 다녔다든가, 안노 모요코와 결혼할때 중매를 하고 결혼식에서는 주빈이었다든가 하는 얘기들을 보면 좋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게임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이 게임의 내용이 나우시카가 건십에 탑승하여 벌레들을 학살하는 내용의 게임이었던지라 게임이라는 존재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는 도시전설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으나, 해당 게임은 평화적인 교섭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벌레는 피해다녀야지 죽이면 감점을 받거나 게임이 일찍 끝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문서를 참조. 참고로 미야자키는 80년대에 이미 애니메이션은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으며 미래에는 비디오게임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라는 칼럼을 쓴 바 있다.

코라의 전설의 백합 엔딩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것은 마코(코라의 전설) 3번 항목 참조.

고등학생 시절 밀덕 잡지에 기고한 글이 발굴되기도 했다.

오너캐는 흔히 안경돼지로 나온다. 메인 작품에선 등장하지 않지만 사내 엽서 등에서 나오며, 모 단편 애니메이션에서는 하야오 본인이 해설역으로 나온 이 캐릭터의 성우를 맡았다.

극단적인 여성주의 시각이 있는 트위터 등에서는 "키키는 너무 성적 상품화되는 경우가 많아 애정을 주기 힘들다" 라는 내용의 짤이 떠돌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 의 내용을 9gag에서 조작한것으로, 실제 내용은 결혼과 관련되서 "어째서 아내분을 선택하신거에요?" 라는 질문에 "어째서라뇨 그냥 결혼해달라고 했으니 결혼한거죠, 무를수는 없잖아요" 와 같은 말을 주고 받는 장면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구세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페미니즘를 많이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 애니메이터이다.[37] 여성 캐릭터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등 여성 스태프를 대하는 태도도 진지하기로 유명하다.[38]

1989년 발매된 ova 애니메이션 발튜스티아의 빛은 지브리식 그림체의 캐릭터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와는 전혀 관련성 없는 별개의 작품이다.[39]

90년대 초반, 국내 영화잡지에서는 그의 이름을 미야자키 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와 창작 방식을 더 알고 싶다면 황의용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창작한다!>는 책을 추천한다. 절판된책이므로 도서관에서 찾아야하겠지만.

[1] 공식 은퇴 선언[2] 복귀기사가 났다 2017년 5월 20일 #[3] 하야오의 큰아버지가 사장, 직원이 천 명에 가까운, 꽤나 큰 공장이었다[4] 미소 냉전체제하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시기였다. 1989년 소련 해체 이후 사상적으로 크게 흔들렸다.[5] 1939년-2016. 1958년에 토에이 동화 입사, 이후 미야자키의 작품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모든 작품의 색채설계를 담당#.[6] 이 장면을 본 카나다 요시노리가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7] 일상적인 삶을 착실하게 보여주고, 그런 중에 발생한 비일상적인 환타지와 아빠 판다 캐릭터는 훗날 이웃집 토토로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비오는 서커스 편에서 홍수로 세상이 물로 가득찬 세계는 벼랑 위의 포뇨의 원형이 되었다.[8] ぼくは『ナウシカ』の最後の大ラストのところで絵コンテが進まなくなっちゃって。なぜ進まないかっていったらね、王蟲を1匹も殺したくないんですよね。もう殺したくない!って。でパクさんに「殺しゃあいいんだ!」って怒鳴られてね「じゃあ殺す」って、それであっという間に絵コンテできたんですよね。[9] 流行りものを作りたいと思わないというのは、パクさんと僕は東映動画時代からそうでした。僕らのそういう傾向が『となりのトトロ』や『火垂るの墓』を作らせたと思います。それが後には、ある意味ジブリ作品の傾向にもなっていった感じがしますね。[10] '내가 13살 때는 바보같은 짓만 했다고 생각한다. 50을 눈 앞에 둔 나이가 되서야 그런 것을 허(許)하게 되었고, 그런 것을 용서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은 행동을 인정하자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20대는 그 굴욕을 참을 수 없어서 "우와와" 분노의 고함을 지른 적도 있었죠.'[11] 작중에서 비행기 공장에서 여성들이 일을 하는 모습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일하는 여성 사원들의 모습이다. 여담으로 피콜로 영감이 "여자들은 일 잘한다."는 대사를 치는데, 지브리 여성 직원들은 그 대사를 듣고 기분나빠했다는 후일담이 있다.[12] 사카키바라 사건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는가. 그날 이후 TV도 신문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20년전 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어른들은 여전히 대응을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13] 나는, 모노노케 히메를 인간불신을 조장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좋은 것이라는 시점도 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 안에는 어리석음도 현명함도 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私は、『もののけ姫』を、人間不信を助長するような映画にはしたくなかったんです。かといって、人間はいいものだという視点も捨てました。一人の人間の中には愚かさもあれば賢さもある。それが人間なんです。[14] 이 기록은 6개월만에 《타이타닉》이 깼다. 하지만 또그리고 다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깨버렸다. 참고로 모노노케 히메와 같은 날 개봉한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쥬라기 공원2》 였고, 센과 치히로와 같은 개봉한 영화가 스필버그가 제작한 《쥬라기 공원2》였다.[15] 영화 평론가 마치야마 토모히로는 미야자키의 영화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만화판 나우시카가 완결된 후인 1994년부터라면서 이후 미야자키의 작품에서는 권선징악이니 어디가 선이고 어디가 악이니하는 구별이 사라졌다.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어디를 응원해야 할 지 관객들은 당황한다. 만화판 나우시카에서 미야자키는 생명이란 빛과 어둠 모두가 생명이다. 함께 공존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야마는 모노노케 히메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그래서 이 영화가 뭘 말하는 것인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린다면서, 모노노케 이후 극장에 관객이 몰리지만, 감독과 관객 사이의 괴리감을 지적했다. 모노노케 히메부터 미야자키는 관객은 내팽겨치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라는 브랜드 이름만으로 영화를 보고 온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며 소화불량(消化不良)에 시달려야 했다. [16] 타카하타 이사오의 비판에 대해서, 미야자키도 이웃집 야마다군같은 영화는 자신은 만들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면서, 타카하타와는 판타지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그 주제로 말을 꺼내면 서로 싸우게 되니까 아예 말을 안꺼낸다고 말했다.[17] 출전 : トップランナー アニメ監督 宮崎駿 (1997年).[18] 200억 엔을 넘긴 작품은 몇 작품 있으나, 300억 엔을 돌파한 건 일본 영화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19] 하울의 평가에는 화가 납니다. 굉장히! 설명하기 위한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나는 설명 안 해!라는 것을 했더니, 역시나 절반쯤의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이것은 몹시도 불쾌한 현실이었어요.『ハウル』の評価には怒ってますよ、ものすごく! 説明するための映画は作らないと決めた以上、俺は説明しない!っていうことでやったら、やっぱり半分ぐらいの人はわからないみたいなんですよね。これはきわめて不愉快な現実でしたね。[20] 하야오가 직접 발언한 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이 같은 성향이 잘 드러나며 스즈키 토시오도 그를 페미니스트라고 칭한 바 있다.[21] 오시이 마모루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분명히 로리콘이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술자리에서 '12살짜리 어린애랑 연애를 하는게 뭐가 잘못이라는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봤기 내문이라고(…).[22] 두 사람의 마지막 공동작업은 미래소년 코난 21화였다고 한다.[23] 하지만 테즈카 오사무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미야자키 또한 미래소년 코난 등의 작품을 리미티드 기법으로 제작한 바 있다.[24] "꿈과 광기의 왕국" 이란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인데 앞에 잘려나간 부분을 보자면 "저도 제가 제로센을 좋아하는걸 좋아하진 않아요. 왜냐면 그건 오타쿠의 영역이니까요" 라는 언급을 한다. 맥락상 역사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는 오타쿠들을 까는 것이라 볼 수 있다.[25] 실제로 스튜디오 지브리 바로 근처에 유치원이 하나 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침 저녁으로 이 유치원을 드나드는 어린애들을 관찰하는 모양이다. 일반인이 이러고 있으면 보통 신고받고 잡혀간다(…).[26] 정확히는 당시 헐리웃 영화들을 전부 깟다.[27] 이 논란은 하라드림뿐 아니라 오르크까지 포함되는 논란이였다.[28] 요즘은 덜해졌는데? 라고 할지 몰라도 논평이 올라온건 15년전인 2002년이며 요즘의 헐리웃 또한 화이트 왁싱 논란에서 자유로운것은 아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커진건 어디까지나 흑인이지 아시아계가 아니다. 아시아계는 아직도 주인공 받쳐주는 조역 아니면 중국시장 노리고 끼워넣은 덤이다.[29] 독립적 희소가치의 예술성이 아닌 미적 기술을 다룬 예술성.[30] 안도 마사시, 오키우라 히로유키[31] 정확히는 지브리 설립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므로 지브리 최초의 작품은 아니지만, 지브리 작품으로 반쯤 공인받고 있다. 실제로 지브리 DVD 컬렉션에 라인업되어있을 정도.[32] 첫번째 은퇴작.[33] 두번째 은퇴작.[34] 선배 오오츠카 야스오가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찾아와서, 그림 콘티를 툭 던지면서 이거 급한 거니까 그려놓으라고 해서 어떤 부분을 그렸는지 지금은 잊어버렸다고 한다.[35] 타카하타 이사오와 공동.[36] 후지코 F. 후지오 원작 만화로 인종차별 논란 때문에 한때 흑역사화되었다. 주인공인 흑인을 무슨 인간과 다른 생물체인 것처럼 그려놨다. 그러다가 토에이비디오에서 본 작품을 DVD로 발표.[37] 특히 에코 페미니즘.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관련 저널, 관련 KCI 등재 학술지 [38] #서적 [39] 관련된 여담으로 지브리 스탭 중 일부가 몰래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를 해서 이를 뒤늦게 알아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들을 모두 해고시켜버렸단 루머가 있다.(자료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