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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상세3. 역사4. 위치5. 물을 어떻게 끌어 올렸나?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공중 정원의 복원 상상도
현재 모습.유력한 추정 지역 중 하나, 공중 정원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연구 중이다.
정원의 길이는 각 박향으로 123 m이다. 진입로는 언덕과 같이 경사지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구조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노천극장을 연상시켰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고대 바빌론에 있었던 거대한 옥상 정원 단지. 이름만 보면 정원이 미지의 초고대문명의 반중력 기술로 붕 떠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아쉽게도(...) 절대 아니다.[2]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그의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건설한 정원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다. 참고로 바빌론을 건설했다고 알려지는 전설 속 여왕 세미라미스가 지은 서궁의 이름 역시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것처럼, 역시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기원전 40년에 작성된 디오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총 7층으로 꼭대기 층은 바빌론의 내부 성벽보다 약 20 m가 더 높았다고 되어 있다. 맨 밑층부터 꼭대기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고, 각 층에는 테라스가 위치해 있었으며, 테라스에는 흙을 덮은 다음 온갖 나무, 풀, 꽃을 심었다고 한다. 각 테라스는 돌기둥으로 된 통로로 이어져 있었으며, 공중정원 내부에는 방 100여 개가 있고 내부 한가운데에는 크기가 엄청난 광장이 있었고, 이 광장에는 목욕탕도 있었다. 또한 천장에는 방수를 위해 두꺼운 납판위에 역청을 바른 다음 두꺼운 갈대를 놓고 그 위에 다시 구운 벽돌과 석회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형태는 아미티스의 고향이었던 메디아 일대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가진 천국의 이미지인 "푸른 나무와 풀로 이루어 져있고 온갖 과일이 열려있으며 꿀과 물이 흐르며 연못이 많다"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3]

3. 역사[편집]

1세기 히브리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정원을 건설했다고 기록하였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긴 했지만, 정이 들었는지 몰라도 그는 아내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었는데, 산과 푸른 초원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고향과는 다른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바빌론의 삶에 지쳐 향수병을 앓았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아내를 위해 아내의 고향을 닮은 정원을 건설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가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는 것.[4]
요세푸스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만들었다고 적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메디아 출신이었고 고향의 산들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위해 이 정원을 지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스 코파니아스. 그리스 아테네대학 고고학 교수. 2015년 EBS 다큐프라임 中

사실 공중정원이 있던 시기, 바빌론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예전에는 온대림 위주의 기름진 땅이었다. 지금처럼 건조한 사막처럼 변한 것은 오랫동안 이루어진 관개 농업으로 인해 지력이 떨어진 것에 더해 몽골의 침공으로 수리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땅이 급속도로 사막화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2015년에 EBS에서 방송한 "위대한 바빌론"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바빌론 건설 당시에도 사막이라고 언급 되어있다. 확실히 아는 분은 추가 바람.

아미티스와의 결혼은 사실 정략결혼이었다. 기원전 612년,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기위해 메디아 제국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메디아의 공주 아미티스와 혼인을 했다. 메디아 제국과 혼인 동맹을 성사시킨 것인데 이 동맹의 힘 덕에 이후 기원전 610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연합군은 아시리아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그가 죽은 지 43년 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바벨탑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4. 위치[편집]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학계는 바그다드 교외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한다. 2013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스테파니 달리 교수는 "공중정원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에 위치해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5]
  • 바빌론 설
    현재의 주류설이다.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데바이가 바빌론 왕궁유적을 발굴하면서 찾았던 것이 바빌론과 바빌론의 공중정원이었다. 당시 그는 바빌론 시의 북동쪽에 있는 남쪽 왕궁 인근에서 지하에 건설된 14개의 아치형 방을 발견했고, 이를 공중정원에서 물을 퍼내는 지하 시설이라고 생각했다. 벽돌에는 방수를 위한 역청이 발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초기에는 설득력을 얻었지만, 발굴 결과 현재는 식량 저장소나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의 감옥으로 추정한다.

    이후 발굴 결과 등을 토대로 학자들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그 이유는 그 많은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강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바빌론에서 사망했을때 사망한 궁궐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고 기록된 파라데이 소스 정원을 그 공중정원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
  • 니네베 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스테파니 달리 교수는 "바빌론이 아니라 바빌론 서북쪽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니네베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우선 바빌론은 성벽들로 가로막혀 있고 왕궁과 강 사이에도 성벽이 나 있기 때문에 왕가의 정원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시리아의 수도이자 거대 도시이기도 했던 니네베 기원전 700여년 경 세나카립이 왕위에 있을때 전성기를 맞이 했는데 이때 제작된 점토판[6]에는 정원 건설 과정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특히 수도교가 정원을 향해 나있는 것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주변 산에서 니네베까지 약 50km에 달하는 수도교를 건설했고 이 물을 통해 정원에 물을 공급했다.

    니네베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학자들은 그리스 사람들이 니네베를 바빌론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세나키립이 니네베 성을 보수할때 성문 이름에 신의 이름을 붙였는데 바빌론 신에게 향하는 문이라는 뜻이 었기 때문에 니네베를 또 하나의 바빌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그런 거 없다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도 있다. 그 근거는 그리스 쪽 기록에만 나타나고 점토판에는 전혀 공중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시인 안티파트로스고대 로마플리니우스박물지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고대 그리스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에는 기록이 전무하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경우는 그리스 측의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결정적으로 발굴을 통해 어느 정도 입증이 되었으며 당시 점토판에서도 바벨탑의 존재 자체가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5. 물을 어떻게 끌어 올렸나?[편집]

일부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이 건축물이 불가사의한 이유로 어떻게 높은 건물 꼭대기 까지 대량의 물을 끌어올려 공급했느냐 하는 점을 든다. 수백년 후에 건설된 베르사유 궁도 수원에서 꽤 높은 곳에 지어져 있어서 물을 끌어들이는 데 애를 먹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8 Km 떨어진 수원지에서 1,400여 개 수차를 동원하여 600 m 위 언덕으로 물을 끌어올린 후 수로를 통해 공급하는 방식. 공중정원도 베르사유 궁전처럼 당시의 백성들을 쥐어짜 사치를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디오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맨 꼭대기 층에 위에서 아래로 난 구멍들이 있으며 여러 도구들을 이용해 물을 끌어올렸다고 한다. 또한 당시 그리스 역사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스트라보가 남긴 글에는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했다는 나선 펌프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
온통 향기로 가득했다. 포도나무처럼 주렁주렁 열린 석류 나무는 잔잔힌 미풍에 향기를 실어보내고 있었다. 폭포수에서 튀는 물방울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수차는 정원 꼭대기에서 부터 내려왔는데 계단과 평행하게 뻗어있다.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하나, 아무도 그 내부를 보지 못했다.

스트라보

[1] Garden이 아니라 Gardens이다.[2] 그렇다고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정원이란 뜻의 공중정원도 아니다. hanging garden이다. 근데 매달려 있지도 않다. 뭐냐고 이게[3] 현재 이란과 이라크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의 이미지와도 비슷하다.[4]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좀 잘나가는 시대의 왕들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는 일이 많았다.[5] 링크가 황색언론인 텔레그레프의 기사라는 점을 감안해야지만, 이후 ebs의 다큐멘터리에서 직접 스테파니 달리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날조기사는 아니다.[6] 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소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