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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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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어: Cuộc kháng chiến chống Mỹ
영어: Vietnam War
에스페란토: Vjetnama milito
베트남 전쟁
날짜
1955년 11월 1일 ~ 1975년 4월 30일
(19년 5개월 4주 1일)
장소
결과
북베트남의 승리
교전국
지휘관
병력
총 병력 200만 명
width=23 남베트남군 140만 명
width=23 미군 54만 명
width=23 한국군 5만 5,000 명[1]
width=23 태국군 2만 2,000 명
width=23 호주군 7,500명
width=23 뉴질랜드군 400~534명
width=23 대만군 31명
width=23 스페인군 13명
총 병력 126만 명
width=23 북베트남군 28만 명[2]
width=23 베트콩 80만 명
width=23 중국군 17만 명
width=23 소련군 3,000 명
width=23 북한군 200명
피해규모
width=23 남베트남군 22만~31만명 전사
width=23 미군 58,000명 전사
width=23 한국군 5,099명 전사 11,232명 부상
width=23 width=23 베트남군&베트콩 44만~110만명 전사
width=23 중국군 1,100명 전사
width=23 북한군 14명[3]

1. 개요2. 상세3. 배경4. 베트남 전쟁의 개전5.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
5.1.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6. 전개
6.1.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6.2. 북베트남 공격 금지6.3. 전쟁을 끝낼 수 없는 상황6.4. 미국의 막장 상황6.5. 낭비
7. 구정 공세와 수렁8. 케산 전투
8.1. 전개8.2. 케산 전투와 구정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
9. 전쟁의 종결과 남베트남의 멸망
9.1. 미국 정치 정세의 변화9.2. 끝없는 전쟁과 미국의 철수9.3. 미군이 떠난 남베트남의 혼란9.4. 남베트남의 정권교체와 베트남의 통일
10. 전후
10.1. 미국에 끼친 영향10.2. 한국에 끼친 영향10.3. 고엽제 문제10.4. 한장의 사진10.5. 베트남전의 전쟁범죄/민간인 학살10.6. 전후 베트남의 사정
11. 베트남 전쟁의 교훈?12. 전쟁 중 사용한 장비 목록13. 베트남 전쟁을 다룬 창작물
13.1. 소설13.2. 드라마13.3. 영화13.4. 뮤지컬13.5. 만화13.6. 게임13.7. 노래
1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베트콩 대원을 발로 차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
베트콩 게릴라 수색대원과 미 육군 헬리콥터

베트남에 파견된 대한민국 육군 제9보병사단M113
주월한국군사령관 육군소장 채명신 장군과 베트남군사원조사령관[4] 미 육군대장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미국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당시 대한민국에서 썼던 명칭은 월남전(越南戰)이며 지금도 국군에서 만든 자료에서 월남전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의 실상은 소녀의 절규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더러운 전쟁(Dirty War).

1956년~1975년까지[6]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

2. 상세[편집]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산하의 무장단체를 이르는 말인데,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와는 다른 조직으로서 기존 남베트남의 친미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통일시키는것이 목표였다. 참고로,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운 베트민(Viet minh)과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다.

베트남 전쟁의 배경은 길게는 19세기부터, 짧게는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은 사실 상당히 긴 시기 동안 발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남베트남에 첫 원조를 시작하고부터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진 거의 10여년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우리가 미국 쳐들어가서 전쟁 일으켰냐면서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베트남 가서 사귄 친구들이나 관광가이드들이 왜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냐고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보인 경우가 꽤 있다. 어느 미국인들도 여럿 있던 관광단에서 베트남인끼리 싸우는 전쟁에 통킹만 사건으로 멋대로 들어와 전쟁에 끼어든 미국은 뭐냐고 비웃듯이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걸 보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미국인 관광객들은 입다물고 이런 비판을 애써 모른 척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물론 미국의 시선에서)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쟁, 남오세티야 전쟁, 그리고 우리나라 6.25 전쟁을 영어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듯이 지명에서 명칭을 따오는 용법도 흔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게 틀린 건 아니다. 전쟁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아닌 월남전이라고 했으며 지금도 국군의 자료에 월남전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얻을 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해서 The Quagmire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이 단어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맨발의 민병들이 미군의 첨단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났으며 상당한 재정적자를 일으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선언하게 만든 전쟁이다.

'출구 전략(Exit Strategy)'도 베트남 전쟁에서 나온 말이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도, 지속하기도 애매해진 미국이 굴욕적이지 않으면서도 별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고 빠져 나오기 위해 찾던 전략을 출구 전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참고로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을 한국 한자음대로 월남으로 표기했는데, 특히 남베트남을 정통으로 보았으므로 남베트남 정권을 그냥 월남, 또는 자유 월남이라고 했다. 북베트남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월맹)의 불법정권으로 취급해 그냥 월맹이라고 불렀다. 비슷하게 대한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중국 공산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중공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불렀었다. 대만에서도 과거에는 같은 용법으로 중국 본토를 중공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를 다룬 한국군의 각종 자료에서도 이 용법을 현재까지 변경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이후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자유 월남)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뒤에 세워진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부터 '베트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7] 이에 따라 마치 이전의 '월남'과 단절된 신생 국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3. 배경[편집]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 이번엔 미국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끼어들었다. 미국은 이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8], 남베트남을 보호하는데 적극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예견은 도리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9] 물론 나름 자유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그건 미국 입장이고,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구 식민세력을 아무 생각없이[10] 지원한 또 다른 적이다.

덧붙여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찌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11] 호찌민은 일찍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년 10월 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이런 막장성으로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도로 악화되고 국민들이 등을 돌리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는 공산당의 세력화를 불러온다. 1960년 12월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되어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 명의 정부군이 200여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4. 베트남 전쟁의 개전[편집]



당시 전쟁 녹음본

나무파일:attachment/79552-050-5B7249FA.jpg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와중에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은 이 사건에 없던 사실을 끼워넣고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전쟁을 시작한다. 미 해군 구축함이 공격받은건 사실이나, 날조된 사건이 덧붙여져 크게 부풀려졌다. 더구나 이 과정도 웃기지도 않았는데, 이 사건을 들은 린든 존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즉시 북폭을 지시했다. 즉 북베트남을 직접 공격하라는 것. 이 때가 1964년 8월 5일 오전 11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의회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통고도 없이 벌인 행동이었다. 한순간에 직접 전쟁의 늪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12] 얘들의 개념이랑 똑같은 수준의 개념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 1964년 8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한 것이다. 이때 북베트남 해군의 대공포에 미국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2기가 격추되면서 험난한 미래를 예고하게 된다. 그리고 북폭 실시 2일 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된다. 선조치 후보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해 11월 1일에는 미국 공군 기지가 베트콩에게 기습을 받아 B-57 폭격기 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다. 당연히 다시 미국의 보복이 있었는데, 바로 배럴 롤 작전.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찌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물론 당연히 다시 보복이 있어서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미군 장교 막사가 폭파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듬해인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미국 육군의 푸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8명을 전사시키고 헬기 7대를 파괴했다. 순서대로 때리는 것이 틀어지자 분노한 존슨은 같은 날 30대의 미국 공군 전투기(A-1, F-100)를 동원해서 북베트남군 병영을 공습한다. 플레이밍 다트 작전 1. 2월 10일 베트콩은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23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다시 미군은 11일과 19일 공습으로 보복을...(플레이밍 다트 작전 2) 그리고 3월 2일 마침내 대규모 북폭인 롤링썬더 작전이 시작된다. 원래는 2월 20일에 남베트남 공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남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4차례로 작전이 연기되는 막장 상황이 이어져서 작전의 시작이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때까진 대규모 지상전투 수준으론 확산되지 않았으나, 결정적으로 1965년 3월 30일에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폭파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미국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베트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5.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편집]

1965년부터 베트남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미군의 대규모 증강이 이루어지며, 호주, 뉴질랜드, 한국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다른 국가들은 비전투병 등을 파병하였다.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도 무기원조[13]나 유격대 등으로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베트콩(+ 북베트남, 소련, 중국을 비롯한 비공식 몇몇 국가[14])
VS
미국 + 남베트남(+대한민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대만 기타 연합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런 구도의 대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과 기타 저항세력들이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으로 베트콩에 의한 기습+북베트남군의 공격이 벌어지는 양상이 베트남전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거의 내전 양상을 보였다고 보면 된다.(무기야 북베트남이 제공했겠지만) 물론 이런 행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백한 북-남 베트남간 휴전협정 위반. 하지만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남베트남 측이 제네바 회담에서 약조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의 이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일인데.

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뭔가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가 생각나지 말입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을 얕보고 우습게 보는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

5.1.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편집]

미국의 동맹국으로써, 한국도 전투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 참조바람.

한국군대한민국 육군제9보병사단 백마부대와 수도 사단 맹호부대,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주축이었다.

6. 전개[편집]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국 공군의 1966년 6월 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월 17일에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각종 전쟁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6년 1월에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지원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때부터 진짜로 엄청난 물자와 장비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으나,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 공동성명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6.1.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편집]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아무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그래서 이 정글 숲의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다.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몰래 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찌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중국, 소련 등은 주변국가인 캄보디아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베트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찌민 루트를 타격한 흔적이 보이지만, 정규적 공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캄보디아라오스는 막을 능력도 없고, 자기들한테 크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묵인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폴 포트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주로 공세를 펼치는 세력은 북베트남군이라기보다는 남쪽에서 양산된 베트콩이다. 물론, 북베트남에서 지원병력이나 지도를 위한 간부, 싸움을 위한 물자를 계속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니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던 셈이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북베트남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6.2. 북베트남 공격 금지[편집]

전투 대상이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 세력이었고, 미군의 신분 역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인도적 원조군>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었고 "북베트남을 직접 침공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짐!" 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북베트남 영토로 지상군이 쳐들어가지는 못하게 못이 박힌 상태였다.[15]

물론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는 잘만 들어갔지만 특수부대는 성격상 절대로 주공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숫자도 적어서 국지전에서는 강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다.[16] 대신에 Operation Rolling Thunder 등의 북폭이라 불리는 항공 공세 작전은 수차례 했지만, 결정적으로 밀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몇십 년이 걸려도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군사력으로 통일할 목표를 세운 상태에서, 미국이 뭔 짓을 해도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북폭이 하노이를 비롯한 북베트남 대도시에 B-52를 동원해 융단 폭격을 가한 작전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기도 아닌 대형 전략폭격기의 작전은 불가능했다.[17] 흔히 생각하는 융단폭격은 어디까지나 밀림지대, 특히 호찌민 루트 제압을 목적으로 행해졌을 뿐, 도시와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어디까지나 군수공장이나 철도망 같은 전략목표에 대한 조준 폭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폭이나 부수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북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당장 베트남 전쟁동안 미국 공군/해군 항공대의 교환비는 역대 최악이었던 것으로 이름 높기도 하고... 이는 F-4로 대표되는 미국 공군의 병크, 즉 미사일 만능주의로 달렸던 결과였다. 이 착각은 심각해서 한국전쟁 시기 12대 1까지 벌어졌던 교전비는 베트남 전쟁 3 대 1, 2 대 1을 거쳐서 MIG-21이 등장할 때에는 0.85 대 1. 즉 오히려 밀리는 상황까지 진행된 것이다.

더구나 베트남의 북부 영토는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폭 시 중국을 폭격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북부 국경지대는 애초에 폭격 불가. 이래서야 중국 국경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자 지원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 외에 하이퐁 등 북베트남의 주요 항구에 대규모로 기뢰를 살포했고 이 자체는 효과를 보긴 했지만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 즉 폭격을 통해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능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6.3. 전쟁을 끝낼 수 없는 상황[편집]

처음부터 이 전쟁은 미국이 스스로 전쟁을 포기하기 전에는 끝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호찌민 루트의 존재, 남베트남의 막장 상황, 북베트남 침공 금지 등 발목을 잡힌 상황에서 미국은 북베트남군의 실질 전력도, 전쟁수행 능력도 제대로 손상시키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했다.

남은 것은 수행의지의 약화, 즉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북베트남이 전쟁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을 요구하거나, 혹은 북베트남인들이 전쟁 피해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이것이 반정부 활동으로 이어져서 내부 혼란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전쟁을 포기하는 쪽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마져도 실패했다.

위에서 언급한 호찌민의 발언처럼 북베트남의 적화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고, 전면 침공이 아닌 간헐적인 공중 폭격만으로 정부 수뇌부들의 수행 의지를 꺾기는 힘들었다. 북베트남 정부의 내부 통제 능력 또한 남베트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미군은 특수부대를 이용해서 북베트남 내의 반공 세력이나 소수 민족 세력을 포섭, 북베트남 정부에 대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남베트남 지역에서의 베트콩 게릴라들의 일방적인 게릴라전으로 흘러갔고, 미군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6.4. 미국의 막장 상황[편집]

게다가 미국에서도 반전운동 여파와 여러가지 부정적인 일들도 크게 퍼져버리면서 프래깅(하극상)이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으로까지 언급되어버렸다. 1967년만 해도 공식적으로 800건이 넘는 프래깅이 적발될 정도[18]였으니, 미군 장교들은 적군보다 뒤에 부하들을 무서워해야 했다.

일례로 1967년 11월 미군 헌병이 입수한 어느 포스터에는 베트남어와 영어로 어느 미군 대위 이름과 여러가지 신상명세, 심지어 주둔지 정보까지 써있고 적군들에게 "이 놈 죽이면 1,500달러 포상금을 선물하겠다"라는 말까지 쓰여있었다. 미군 측이 난리가 난 건 물론이다. 하지만, 헌병들 수사에도 결국 이걸 만든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얼마 뒤 그 중대장은 기관총에 벌집이 된 시체로 발견된다. 헌병들은 미군 기지 안에서 등 뒤에 M-16 총알로 벌집이 된 점을 주목했으나 부대원 전원이 적군 공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터라[19] 결국 전사로 처리되었다. 군대라는 닫힌 사회의 전형적인 폐해(...).

게다가 징집된 장병들은 당시에는 개념조차 없었던 PTSD로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징집을 거부하며 반전운동 시위, 징집영장 불태우기, 전쟁규탄 시위까지 터지면서 미국은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아예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 간 젊은이들도 많았다. 사이버펑크 시초인 뉴로맨서 작가 윌리엄 깁슨도 이 당시, 미국에서 태어나 전쟁반대를 외치며 캐나다로 이민 간 경우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서 나온 것을 보면 이 전쟁 당시 벌어진 어느 실화에서 얼마나 미군이 개판인지 알 수 있다. 한밤중에 술에 질펀하게 취한 연대장이 휘하 소대장에게 "찰리(베트콩) 몇 놈 잡아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것도 오밤중에 밀림 깊숙히 들어가서. 그러면 미군들만 죽어나가는 게 뻔하지만, 명령은 명령. 결국 소대장 브로일스 중위는 부하들을 불러와서 웃기게도 연극을 했단다. 나뭇가지도 꺾어오고, 물도 그릇에 떠와서 무전기나무를 밟는 소리를 내고, 나뭇가지를 꺾으며 숲을 지나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물을 첨벙첨벙 치면서 강물도 건넌다고 무전기로 뻥을 쳐가면서 1시간 넘게 보고했다. 당연히 취한 연대장은 속아 넘어갔고 나중에 그냥 잠을 자버렸는데, 다음 날 그 연대장은 그런 명령을 내린 걸 전혀 기억 못하더란다. 이런 어처구니 없지만 실제로 벌어진 뻘짓 이야기들은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던 상황 속에서 미군들은 말 그대로 미쳐갔다. 상급 장교들은 사이공의 장교 클럽에서 휴가를 즐기고 더운 한낮의 땡볕을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보냈는데 이 판국에 하급 장교, 부사관, 사병들이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헬기 조종사들은 맥주에 절어 있었고[20] 다른 장병들은 마약까지 손을 댔다. 징집되어 베트남에서 싸우던 올리버 스톤도 이 당시, 마약에 빠져 제대 후에도 갱생하느라 고생해야 했고, 이 경험으로 이라크 전쟁이라든지 걸프전에 미군 파병을 부정적으로 대했다.

당연히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에 환각제 사용자는 5%에서 14%로, 헤로인 복용자는 2%에서 22%로 폭증했다. 더구나 이는 상원위원회의 보고서로, 실상은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21] 덕분에 1971년 미군 야전병원에는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가 5천명도 되지 않던 상황에서 마약문제로 입원한 환자는 2만명이 넘었다"라는 엽기적 기록이 남아있다.

미국 내부의 상황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래 부병제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징병제와는 국민의 군 복무를 법으로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으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는 방식이다. 미국의 부병제는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는 미혼 남성을 동원 목록 최상위에 두고, 자식이 없는 기혼 남성을 그 밑에, 그리고 자식을 둔 기혼 남성을 목록의 가장 하위에 둔다는 원칙을 줄곧 고수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한 이후 수많은 남성들이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섣불리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 발생하자, 1965년 8월 26일 오후 5시, 린든 존슨 대통령 본인이 "오는 자정부터 결혼 여부 및 자녀 유무를 군 복무 관련으로 전혀 법적 반영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또한 미국의 경우, 부병제가 있던 당시에는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오지로 동원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주 방위군(National Guard)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가 복무하는 일이 잦았는데, 미국 정부는 60년대 후반 즈음이 되면 이마저도 주 방위군 소속 부대 일부를 베트남으로 파병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2차대전 당시에도 병력을 대규모로 동원했을 뿐 이런 식으로 정부 맘대로 원칙을 깨는 일은 없었다.

이 따위 상황이니 당연히 열심히 싸우겠다는 의욕이 있을리가 없다. 1969년 전투기피로 기소된 건만 117건, 1970년에는 131건 등 꾸준히 증가추세였다. 종전이 다 되어가던 1972년에는 탈영한 이들만 무려 7.3%나 되었고, 미군 기준의 그 여유롭고 느슨한[22] 무단이탈은 무려 17.6%나 되었다. 이렇게 탈영한 근성이 강한 이들은 북베트남을 거쳐서 중국이나 소련까지 넘어가서 미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당시 기항지였던 일본에서 탈영하여 유럽으로 망명한 사례도 있었다. 이 당시 망명한 탈주 미군들에 관해서는 베헤이렌 문서 참조.

그리고 반전 운동 측에서도 흑역사에 가까운 뻘짓이 저질러 젔던 적이 있는데, 헨리 폰다의 딸인 제인 폰다는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베트남을 방문해서는 아예 북베트남의 선전 방송에 출연하는 나팔수 매국노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하노이 제인" 으로, 반전운동의 선을 넘어 이적행위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3]

6.5. 낭비[편집]

미군의 낭비는 개념을 상실한 상태였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은 모두 미군들 보급 나오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지금 기준으로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의 물량 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전쟁 시기 베트콩 하나 잡겠다고 평균적으로 들어간 비용이 무려 1명당 33만 2천 달러였다. 애초에 포병들은 하루 평균 1만발을 쏘아대었고, 소총수들은 새로 등장한 M16을 맹신한 채 자동으로 놓고 갈기기가 일쑤였다.

여기에 압권은 B-52 폭격기였다. B-52 폭격기가 호찌민 루트의 베트콩 하나 잡는데 필요한 폭탄량은 무려...100톤. 실제로 B-52는 한참 심할 때는 연간 20억 달러를 폭격으로 소모했고, 그 결과 약 1,500명을 사살했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에 그 100배의 숫자가 남파되었다라는 것이다. 20억 달러 들여서 평균적으로 100명 중 1명 잡았던 셈이다.

B-52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앞서 언급한 북폭 역시 돈 많이 들어가고 효율 없기는 돈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평균적으로 10억 달러를 북폭에 소모했는데, 그 타격이 평균 1억 달러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B-52보다는 무려 효율이 10배 이정도는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금방 복구되었다.

이 돈 때문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1971년에 의회의 동의 없이 금본위제도를 폐지하기까지 했다.

물론 정규전에 한정해서, 물량으로 적을 깔아뭉개는 건 효율적인 판단이기는 하다...[24]

하지만 이 전쟁은 그게 아니잖아!?

7. 구정 공세와 수렁[편집]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기간에 미리 잠입한 병력을 통해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다발적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베트남어로는 Sự kiện Tết Mậu Thân, 영어로 Tet Offensive이기 때문에 테트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이 구정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가른 사건이었는데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 대사관 등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중계가 되었고, 이것이 미국인들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 반전여론이 고조된 이유 중 하나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8. 케산 전투[편집]

8.1. 전개[편집]

케 산 요새
포위 전개
1968년 1월에 벌어진 포위전투로 시작 자체는 구정 공세보다 일렀던 전투다. 디엔 비엔 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군의 요새였던 케산(Khe Sahn)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이 케산을 미군이 아니라 북베트남군이 포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즉 케산에 주둔한 미국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동원된 사단이 디엔 비엔 푸에 참전했던 사단이었고,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을 지휘했던 보응우옌잡이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25] 이 전투의 재현이 가까웠다.
케산 포위망 격퇴 작전인 오퍼레이션 페가수스
하지만 하루 평균 300회라는 어처구니 없는 미군의 공중지원[26]덕에 결국 케산은 77일의 포위를 버텨내고 북베트남군이 스스로 철수하게 만든다.

8.2. 케산 전투와 구정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편집]

케산 공세는 대놓고 디엔 비엔 푸를 흉내낸 것에 알 수 있듯이 미군에 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고, 그것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매스컴들은 구정 공세로 불타는 대사관 만큼이나 포위된 케산이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게릴라전이나 벌이던 북베트남군이 이제는 미군을 포위 섬멸하는 시도를 할 정도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은 핵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사령관에게 부탁하고, 사령관인 웨스티모얼랜드는 케산과 디엔 비엔 푸는 다르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구정 공세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애초에 구정 공세와 케산 전투는 모두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왜 같은 시기에 시도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시기에 있다. 1968년. 이는 바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를 엿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보 구엔 지압이 말한 우리는 전투에는 몇 번 진 적이 있지만 전쟁에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라는 말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실행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완벽한 기습을 당한 것은 미국 내 언론과 여론, 그리고 남베트남의 여론이었다. 미국은 당시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으며, 우리의 승리가 확실하다"라고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불타는 미국 대사관과 포위된 케산요새는 대단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500여명의 사망자와 2,500여 부상자는 그 10배가 넘었던 베트남쪽 희생자보다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희생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는 명분도 포함되는데, 북베트남 입장에서야 이건 독립과 통일전쟁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개막장 남베트남을 도와주는 우호전쟁이었던 것이 컸다. 이 때문에 기존 베트남 전쟁 찬성측마저도 구정 공세기간에 20% 가량이 반대로 돌아서는 등 전쟁혐오와 반전은 미국 전체를 거세게 몰아갔다.

그리고 린든 존슨이 대통령 재선 불출마[27]와 함께 북폭의 중단을 선언하고 북베트남측에 협상을 요구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지루한 타협협상과 전쟁의 마지막 진창으로 넘어가게 된다.

9. 전쟁의 종결과 남베트남의 멸망[편집]

9.1. 미국 정치 정세의 변화[편집]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베트남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한국과 북한에서도 긴장이 흐르게 되어 각각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 대립하는 노선에서 선회하여 친중국적인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핑퐁 외교)

1969년 9월 2일에는 북베트남 주석 호찌민이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호찌민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주언, 똔득탕 등 그의 뒤를 이은 북베트남의 2세대 지도부들도 전쟁을 계속 수행하면서 베트남 전은 호찌민 사후에도 이어졌다.

9.2. 끝없는 전쟁과 미국의 철수[편집]

미국의 동맹국들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을 포함해서 다른 친했던 나라들이 파병을 일부 하긴 해도 전투병은 잘 안보낸다든가 하는 식으로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한국. 미국 다음으로 전투병 숫자가 많았다.

아무튼 미국은 단계적 철수 발표 이후로는 희망도 없는 전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이어져 나간다. 미군의 철수는 19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들이 떠났다. 큰 전투도, 목표도, 뚜렷한 적도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듯한 전쟁이 수 년간 이어진다. 그리고 도와주려고 했던 놈(남베트남)까지 막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1971년이 끝날무렵에는 지상전투부대의 대부분은 떠나며 1972년 3월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가 일어날 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나가게한다.

1972년에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결국 1973년에 북베트남과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완전 철수하게 된다. 한국군도 이때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 때도 보기 좋은 철수를 위해서 핵 협박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 바로 출구전략으로, 핵 협박을 통해서 덜 쪽팔리는 퇴각을 이뤄낸 인물이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이다. 물론 소련도 핵을 가진 상황이었고, 전쟁을 끝내려는 마당에 핵전쟁을 벌리기는 싫었으므로 일단 위협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 사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1949년이었으므로, 애초에 프랑스에 제의하던 시기에는 이미 소련도 핵은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핵 협박은 핵을 쏘지 않기 때문, 혹은 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애초에 상대도 핵 보유국이 아닌한 핵 협박 자체는 그 다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9.3. 미군이 떠난 남베트남의 혼란[편집]

그래도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좀 찝찝했는지, 미군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했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 1975년에 북베트남군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대패했고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갖다준 무기를 빼앗아 노획하여 남베트남군을 역공격하는 사태까지 갔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은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전투기 조종사 중에도 위장 잠입한 사람이 있어서, 공습 명령을 받자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북베트남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뇌물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까지 날아가서 태국말레이시아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 공군참모총장이자 전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 흠좀무. 이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태국이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

보병들은 미군 따라서 싸운 기억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년 3월 초에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자충수가 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 정부는 의회에 9억 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지원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밖에 지휘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무엇보다도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가, 북베트남군의 대공세에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철수 작전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도 사령관은 그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 게다가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도 레민다오[28] 준장이 지휘하는 6천명 남짓의 18사단은 쑤엔록에서 4만여명 규모의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1주일간이나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하던 반티엔둥 장군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1개 사단의 분투가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게다가 18사단의 분투는 대세가 기울어진 후 이야기. 따라서 재배치를 틈타서 호찌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내리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9.4. 남베트남의 정권교체와 베트남의 통일[편집]

1975년 4월 30일 대통령 독립궁으로 진격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전차.[29]
결국 1975년 3월 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 4월 21일에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바로 탈출한 이후에 4월 30일에는 결국 사이공까지 함락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의 지도부들은 최소 2년이 걸릴 것 같던 미군 철수 이후의 남베트남 점령작전이 55일만에 끝난것에 대해 매우 놀랐다고 한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국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파리협정」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패망과 아비규환에 빠진 남베트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물론 남베트남이 망한 뒤 보복이라는 걸 해주긴 했지만 문제가 좀 있었다.

하나는 크메르 루주라는 집단을 지원했다. 이는 오히려 베트남 공산 정권의 정당성만 보태 주는 꼴이 되었다. 나머지 또 하나는 이전부터 하던 경제제재라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부적절한 게, 리처드 닉슨데탕트를 주장하던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그도 워터게이트로 물먹으면서 제럴드 포드가 올랐다. 닉슨은 자신의 집권기였으면 당연히 군사를 파견했을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하간 참 절묘한 타이밍. 전쟁의 막바지에서 공산화되는 베트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남았다.

미국을 비롯한 한국 등 동맹국가에서는 베트남전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입안했다.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세운 작전의 일환인데, 흔히 프리퀀트 윈드 작전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작전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최종 탈출작전인 옵션 4이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로 구성되었다.

옵션 1은 탄손누트 공군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30]
옵션 2 : 군용기로 공중수송.
옵션 3 :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수송.
옵션 4 : 최종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수송.

일단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편 및 배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LST 2척을 파견하였다.[31] 그러나 긴 전쟁기간 동안 나름대로 베트남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민간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놓고 떠나기를 주저했고, 설상가상으로 4월 28일 탄손누트 공군기지가 폭격당한 후에는 비행기편을 통한 탈출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4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사비 지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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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제개발청 직원 숙소 옥상 LZ로 몰려드는 사람들. 미국 대사관으로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32] 아래 나오는 영상에도 이 장면이 마치 그레이엄 대사의 탈출 장면처럼 나와있다.

4월 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단계인 옵션 4가 발동, 탄손누트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33]

4월 30일 새벽 5시, 헬기편으로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국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탈출헬기에 오르며 미군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이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 추가로 탈출한 사람들까지 합쳐 보트피플로 전락했고 이 작전으로 인해 약 13만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탈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베트남은 베트콩이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1976년 북베트남과의 통일을 선언하고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전 문서에는 탈출을 위해 대량의 헬기를 동원했기에 헬기를 바다에 버려야 했다고 기재되어 있었는데, 미국 해군이 동원한 헬기는 총 78대에 불과했고, 버려지는 헬기들은 남베트남군 헬기 조종사들이 가족들을 태우고 바다로 탈출한 헬기들이다. [34] [35] 미군에 구조된 민간인 대다수는 배를 이용해 바다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예상처럼, 또는 의도와는 반대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행을 위해 캄보디아라오스의 국정에 혼란을 초래해 버린 결과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 당시 미국이 우려했던 바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나는 태국도 공산화 되는 일은 없었다. 단 태국의 경우는 원래 막장국가급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태국은 한국보다 잘 살았다. 다른 것으로는 미국이 악몽스럽게 생각했던 인도의 공산화도 일어나지 않았다.[36] 인도는 친소련이지만 반중적인 입장이 된다.

그리고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교민 100여명과 중앙정보부출신 이대용 공사 등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이후 식량부족과 납북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북베트남은 한국 교민들 대부분을 조건 없이 석방했지만 이대용 공사와 2명을 북한의 요구로 체포. 5년 간 억류했다. 한국 정부는 원조 등을 조건으로 이대용 공사 등 3인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과의 관계를 이유로 대답을 하지 않다가 1979년 중월전쟁이 터지고 북한이 중국 편을 드는 한편, 이대용 공사 등 3인이 북한의 전향 권유를 끝까지 거부하자 한국 측이 원조를 어느 정도 하는 조건으로 석방하기로 합의. 1980년에 석방되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10. 전후[편집]

10.1. 미국에 끼친 영향[편집]

당시 초강대국미국이 겪은 역사상 최악의 굴욕.
I had a brother at Khe Sahn{케산 전투에 내 남동생이 있었지}
Fighting off the Viet Cong{베트공과 전투중이었고}
They're still there; he's all gone{그들은 살아남았지만 남동생은 전사했어.}
He had a woman he loved in Saigon{사이공에 걔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I got a picture of him in her arms, now{지금은 그녀의 품안에 안겨 찍힌 걔의 사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 미국의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Born In The USA' 가사 중에서

1차대전당시 미군 사상자 수를 뛰어넘는 이 전쟁으로 인해 전사자 및 유족처리, 미국 사회에 다수의 상이병사,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사회 부적응 등으로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한, 미국은 전쟁하느라 엄청난 돈을 부은 데다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지독한 정치, 경제위기를 겪고 사회적으로는 염세주의와 마약의 확산과 무엇보다 여지껏 전쟁에서 져본적 없다던 미국의 첫 패배라는 굴욕 등 얻은 것은 거의 없고 잃기만 한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있다.

물론 베트남 전쟁 참전전우회에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같은 연합국이 진게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잡혀 고문 끝에 두 팔을 다쳐 후유증으로 지금도 두 팔을 높이 못 드는 존 매케인2000년 베트남 전쟁이 왜 미국이 졌는지 열불난다는 연설을 했다가 베트남 측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들이 국민들에게 살인자라는 소리를 듣는 등의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고,[37] PTSD등에 의해 마약을 복용하는 사례도 있게 되면서 미국 사회도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38] 뉴욕은 전쟁을 전후로 20년을 낙서와의 전쟁으로 골머리를 썩였다. 히피문화에 등장하는 '피스{Peace}'심볼이 맹위를 떨쳤던 때도 이때였으며, 박정희 정권때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널리 불려지던 것과 같이 이 당시 대학가나 특히 우드스탁같은 기간에 상당수 반전주의 가수들이 등장 반전가요를 불렀을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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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68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사위이자 미국 해병대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찰스 로브 대위의 전황 음성기록을 듣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39]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중 하나가 람보 1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 후 귀국한 람보가 겪는 PTSD와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람보의 동료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다. 게다가 람보 외에도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만화와 영화들 때문에 지금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병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디엔비엔푸 같은 만화 등도 있으니.

거기다 당연히 실상을 알던 사람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으로 찍히고, 냉전이 끝난 1990년대를 넘어서야 그런 인식이 좀 잠잠해진다. 심지어 1980년대 독재정권 하에서도 유시민은 그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골리앗을 구원한 다윗으로 표현하였고, 진보 지식인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북베트남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하간,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패배병크라고 할 수 있다.

10.2. 한국에 끼친 영향[편집]

한국은 이 전쟁에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 참전의 대가로 어마어마한 외화를 벌여들였고, 비록 패배한 전쟁이긴 하나 남베트남의 패망은 유신정권에 엄청난 행운이었는데, 6.25 전쟁을 겪은 지 30년이 채 안 된 상황에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공산화당한 것이 마치 데자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박정희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쁘게 손을 썼지만 남베트남 패망 후에는 유신에 대한 저항이 싹 사라졌고, 긴급조치 9호 발령에도 별 저항이 없었다.

앞서 말했 듯, 대한민국 국군도 미국 편에 서서 파병해 참전했다. 그러나 한국군이 아무리 잘 싸웠다 해도 파병으로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에 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큰 영향이 없었는지 궁금하다면, 글을 위로 올려서 다시 읽어보자. 아무리 잘 싸워본들 전쟁의 주체들이 그 모양이니...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한국군이 방어하고 안정화 시킨 지역이 1번 국도를 타는 지역들이었다. 안정화 작전덕에 인구도 유입증가가 될 정도로 안정화 지역이었는데, 한국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이 제대로 싸우거나 방어도 못하고 북베트남군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분명 한국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구정공세 이후 유일하게 선전했던 전투 지역은 맹호부대의 안케패스지역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치 소강 상태였던 것에 반해 한국군만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경보병, 즉 알보병 위주의 파병과 규모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기도 하다.

또한 한국 해병대가 크게 패배한 짜빈박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국 해병대가 애용한, 짜빈동 전투로 그 위력을 입증했던 중대 전술기지가 당대에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또 다시 입증해준 셈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한국 해병대가 미처 철거하지 않고 넘어간 걸 북베트남군이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남베트남 멸망시에 한국 해군은 자국민과 라이따이한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피난을 도왔고 실제로 한국에 정착하게 해주었다. 공산권에서 한국을 겨냥해 특별히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술했듯이 애시당초 베트남 전쟁 자체가 심각하게 막장이라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뭘 어떻게 하건 전쟁의 흐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도 하고.

그러나 경제적 이익만으로 정리하고 넘어가기에는 역시나 한국의 참전용사들도 후유증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유신헌법에 군인 및 군무원, 경찰공무원에 대한 이중배상금지 규정이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국가가 군인이나 경찰에게 진짜로 보상을 하면[40] 국가재정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사법부가 사법 파동까지 일으킨 것을 무시하고 헌법에 집어넣어 버렸다. 2000년대까지 와서도 전상 및 공상자가 푼돈이나 받게 된 것의 배경이 된다.[41] 실제로 공상 당한 사람은 자기가 다친 이유가 업무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42] 입증하려고 할 정도이니 말 다했지.[43]

10.3. 고엽제 문제[편집]

전쟁 중 미군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들의 전투 패턴이었던 게릴라전에 용이한 밀림지역에 타격을 주기 위하여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들을 항공 작전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포하는 고엽작전을 벌였고 이 고엽제들은 본래 목적이었던 베트남의 산림과 농업까지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이옥신등의 성분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으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나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후세대까지 지금까지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엄청난 후유증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10.4. 한장의 사진[편집]

북베트남의 구정 공세 당시 사진가 에디 애덤스(Eddie Adams)가 사이공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바로 "General Nguyen Ngoc Loan executing a Viet Cong prisoner in Saigon". 일명 '사이공식 처형'이라고 알려진 사진이다.

나무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guyen.jpg

시가전 중 사로잡힌 베트콩 장교로 추정되는 응우옌 반 램(Nguyễn Văn Lem)을 남베트남 경찰서장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 즉시 자신의 권총으로 사살한다. 경찰서장과 같이 있던 AP통신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와 NBC 취재팀이 그 현장을 취재했다.[44]

구정공세는 전술적으로 북베트남의 완벽한 실패였다. 남베트남군만이라도 단독 북진했다면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북진 통일이 가능했을 정도로 북베트남군 주력부대와 베트콩의 병력손실은 심각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고, 미국이 미적거리는 사이에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던 북베트남이 기사회생할 시간을 주었다.

이 사진을 촬영한 에디 애덤스는 1969년 퓰리쳐상을 받았지만 얼마 안가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서장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서장을 내 카메라로 죽였다. 아직도 카메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무기다. 사람들은 사진들을 믿지만 사진들은 거짓말 한다, 조작되지 않은 사진들도 말이다. 사진은 오직 진실의 절반을 묘사할 뿐이다. 내 사진이 당신들에게 전달하지 않은 질문이 있다. "무더운 날씨에, 온 사방에서 혼란스러운 전투가 진행 중일때, 소위 '나쁜놈'이 미군 두세명을 죽이고 당신 앞에 잡혀왔다면, 당신은 무엇을 했을까?"
란 글을 기고했고, 로안 서장과 그의 가족들에게 그들의 명예를 훼손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로안 서장이 암에 걸려 죽었을 때 에디 애덤스는 이런 말을 남긴다.
그는 영웅이였다. 미국은 그의 죽음을 슬퍼해야 한다. 미국인들이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게 너무 싫다.

남베트남 측에 의하면, 로안에 의해 사살당한 자는 북베트남 암살단의 지도자였으며 그날의 목표는 경찰, 안되면 경찰 가족들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 자는 최소 7명의 경찰 가족의 시체가 포함된 학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사진이 촬영되고 몇 개월 후, 로안 서장은 적 기관총에 의해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1975년 사이공 함락 당시 로안은 남베트남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고 워싱턴 D.C에서 조그만 피자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1998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67세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다. 그가 죽은후 그에 대해 좀 더 많이 알려지게 됐는데 전쟁 당시 미국이 남베트남 몰래 벌였던 작전등을 꽤 많이 누설하고 미국의 비밀 작전등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정부는 로안을 "Trouble-maker" 라며 싫어했다고 한다.

응우옌 로안은 국가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매우 어렵고 복잡했던 사이공 치안 문제를 많이 개선했다고 한다. 또한 능숙한 조종사로써 직접 베트콩을 대상으로 지상타격임무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도 빨갱이 사냥에 광분한 사람이라 항상 옳지만은 않았다는 것. 구정 공세 문서 참조.

10.5. 베트남전의 전쟁범죄/민간인 학살[편집]

    • 쩌우독 학살 사건
    • 후에 학살 사건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학살이 존재했다. 1969년에 김종수 소위가 군사법원에서 학살을 벌인 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이후 15년형으로 감형된 것이 기록상 유일한 사례다.

1999년 한겨례 21의 보도 이후 '파월 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다. 현지인들의 무수한 증언을 깡그리 무시하고 학살이 없었다고 일방적으로 강변하는 것도, 반대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료를 가지고 무조건 엄청난 규모의 학살이 있었다고 매도하는 것도 모두 지양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실관계는 철저히 밝히되, 만약 잘못된 과거가 있다면 겸허히 반성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 당시 베트남 측에서 과거사는 묻지 않겠다고 양해하였으며,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당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인권유린 면에서 더 주목받는 것은 국내에선 고엽제, 베트남 현지에서 라이따이한 문제다. 두 문제 모두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지만,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일은 드물다. 그나마 고엽제 문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론화가 되었으며 피해보상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라이따이한은 양측 정부와 언론, 시민사회 모두의 무관심 속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다.

10.6. 전후 베트남의 사정[편집]

전후 북베트남의 전쟁수행을 지원했던 베트콩과 간첩, 좌파 인사들이 전후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주요 인물들은 일망타진 된 상황이었고, 그 빈자리는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요원남파간첩들이 메꾸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베트남 공화국 문서 참조.

여러 목적으로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은 약 6만 5천명 ~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잘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통계가 좀 과장되어 알려진 측면이 있다. 베트콩 정부가 들어선 뒤, 남베트남 정부 관련인사, 고위 포로, 고위층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베트남이 통일되기까지 1년의 기간 동안 남베트남 경제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하던 화교들과 태국인들, 남베트남 정권의 수뇌부에 기생하고 있던 부패관료들, 반공주의자들은 종전 후 많은 숫자가 망명을 하거나 보트피플이 되어 남베트남을 탈출했다. 쉽게 말해 숙청도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상황. 물론 무재판 처형'만' 6만 5천에서 10만이라는 숫자를 적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릴 부분. 그리고 보트 피플 과정에서 질병이나 기근 혹은 해적 등으로 인해 많은 숫자가 사망(숫자에 관한 항목은 베트남 공화국 참조)해 간접적으로 숙청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등은 사상개조 학습 명분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다.[45]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숙청에 대한 논지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제각각인데 확실한 것은 남베트남 관련 고위직(100만명)의 재교육을 위한 캠프는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서의 대접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삼청교육대 수준이 실상인데 그런 이유로 그런 재교육 캠프를 비판하는 의견과 별거 아니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46] 여기에 수용된 사람은 약 1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에서의 숙청 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대규모 보트피플이 발생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80만 명이나 되었다. 특히 보트피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것은 1978년 이후로 종전한지 3년이 지난 뒤였다. 괜히 한국의 친일파를 예를 들어 이들이 지주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라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해 빠져나갔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진짜 기득권 세력은 미국이 철수한 1973년부터 남베트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진작에 베트남을 빠져나갔고, 1978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선생님, 의사, 상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트 피플의 또다른 경우는 1979년 2월~3월까지 진행된 중국-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탄압을 받을 위기에 있었던 중국계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의 친일파와는 맥을 달리 한다.

다만 대규모 보트피플이 상당 기간 이어졌던것은 단순히 보복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이 10여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에 전후 복구에 쓸 돈을 전쟁으로 써야했던 판인지라 전후복구가 지지부진하여 한 동안 경제상황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인 영향도 컸다. 당시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봐야 푼 돈밖에 손에 못쥐고 물가 상승 문제도 심각했던지라 공장에서 일을 해서 먹고살아봐야 생활에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배타고 외국으로 돈을 벌려고 나갔던 이들도 많았던 것. 물론 이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추방된건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로 외국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상당수가 난민 수용소 같은데서 살거나 막노동을 하다가 거금을 손에 쥐고[47] 베트남으로 돌아오기는 했다. 한편으로 중국과의 전쟁으로 화교에 대한 추방도 이어지면서 육로로 중국으로 추방된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보트피플로 치지는 않으나 배를 타고 별 수 없이 다른 나라로 떠났던 화교들은 보트피플로 분류된다. 의외로 베트남 당국에서는 이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막을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는데 당장 전쟁 때문에 전후복구가 지지부진해서 먹여살리기 빠듯했던데다가 크메르 루주와는 달라야한다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초기에는 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간첩질을 하지 말자거나 우익이 부패하지 말자라는 걸 모토로 했고 한국보다 우익이 개판인 베트남은 망해도 싸지만 한국은 든든하다라는 걸 강조했다. 반면, 북한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의 굴욕을 갚기 위해서 북침을 감행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후 했다는 연설인 "전쟁이 벌어지면 잃을 것은 철조망이요.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다"라는 말은 전쟁하자라는 말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일으키면 우리는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48]

다만, 1980년대 군사정권 하에 벌어진 학생 시위나 광주 민주화 운동 등에 대한 흑색선전으로서 베트남의 막장화와 도시 게릴라들에 대한 공포감을 부풀린 면도 있었다. 이대용 공사의 수기를 극화한 사이공 억류기가 고 김무생 주연으로 극화 되었다. 일명 한국판 킬링필드인데 엽기적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 시대가 시대인지라 재방은 어렵다[49]

1980년대 베트남 수용소라는 엄한 제목으로 출간된 고백수기가 있는데 이 책은 전직 학생운동 지도자가 통일된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사실 절반 정도는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어떤 사람이고 사이공 티우 정권에 대한 투쟁을 얼마나 잘했으며, 절반 정도는 무식하고 말 안 통하는 북쪽 동무들에 대한 비난, 나머지 절반은 그래서 체포 되었을 때의 일이다.[50]

여담이지만 현재 베트남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평가는 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 남베트남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따라서 평가가 엇갈리는데 반해서 북부 지역에서는 혼란 상태에 빠진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것이 대부분의 평가다. 물론 현대에는 남부 지역이 상대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남부 지역이 북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11. 베트남 전쟁의 교훈?[편집]

한국에서는 인터넷 뿐만 아니라 군대 및 예비군훈련에서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예로 들면서 한국의 상황과 접목시켜 안보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베트남의 역사 및 전쟁의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의 일부 과정과 결과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색하여 팩트를 왜곡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베트남의 당시 상황을 무리하게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도 큰 문제

광복이 된 이후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후견자로 둔 채 분단이 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대규모 침략을 당해 정당성 및 명분이 한국 측에 있으며 UN군 참전국가들이 일방적으로 한국을 도왔던 한국전쟁 상황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위의 전쟁 배경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남베트남 및 미국의 정당성과 명분이 대단히 희박했다. 하지만 일부 극우들은 남베트남 및 미국의 정당성과 명분이 희박해지자 자동으로 베트남 전쟁에 같이 참전한 한국 또한 명분없는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라는 인식을 견디질 못해서 어떻게든 베트남 전쟁에 명분을 더하고자 헛된 시도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팩트 왜곡은 베트남 전쟁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 사람들에게 도리어 엄청난 불신감만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당시 한국은 베트남 현지의 정치 현황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으며 그마저도 한국군의 첫 원정이며 공산세력에 맞서는 미국을 지원하는 전쟁이였던 만큼 정당성을 더욱 높이고자 부족했던 정보까지도 전부 차단되었던 상황이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전체적인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일부 과정과 결과만을 엮은 잘못된 안보교육은 베트남에 대한 역사 왜곡을 불러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 대베트남 외교에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베트남인 앞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극우들이 올린 베트남 관련 안보 꾸준글이나 군대 정훈 교육 당시 배웠던 사실관계가 왜곡된 교육 내용들을 말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하자. 더군다나 베트남은 도이머이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중국과 비슷한 경제정책을 펴고 있는 국가이다.

몇몇 한국인들은 베트남이 공산정권 하에 적화통일 되어 심각한 경제적 빈곤과 독재정권의 압제 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베트남인들에게 있어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개소리일 뿐이다.[51] 잘못하면 왜곡되고 수박 겉핡기식의 빈약한 지식으로 인해 타국과 타인들에 대해 비하한다는 것은 한국인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인식이 나빠지게 할 뿐이다.

베트남 관광청 홈페이지에선 '남베트남의 자유화'라 한다. 흠좀무. 만약 "외국 사람이 6.25 전쟁보고 "그니깐 에... '남조선 민족해방전쟁'말이죠. 그거 실패한 게 1953년이던가요?"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베트남 전쟁은 1차의 경우는 베트콩과 북베트남 측에 명분이 있고, 2차의 경우는 (좀 복잡하긴 하지만)[53] 역시 어느 정도의 명분이 보장되는 점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므로[54][55][56] 최소한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베트남인 눈치보는거 이전에 역사학적 중립성 차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냥 '베트남 전쟁' 이라는 표현이 보편적 표현이다.

12. 전쟁 중 사용한 장비 목록[편집]

13. 베트남 전쟁을 다룬 창작물[편집]

창작물에서 배트남 전쟁 자체는 등장하지 않아도 중년 캐릭터, 즉 194,50년대 출생 등장인물이 경험했던 전쟁으로 언급되는 일이 많다.

13.1. 소설[편집]

13.2. 드라마[편집]

13.3. 영화[편집]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중에 반전 메시지를 담은 걸작 전쟁 영화들이 많다.

특히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1960년대를 상징하는 사건이기에 1960년대를 다루는 할리우드 작품이라면 거의 반드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 대개 전쟁이 한 인격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가에 대한 고찰이 담긴 내용이 많기 때문에 전쟁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명작들이 많다.
  • 7월 4일생[58](미국, 올리버 스톤[59] 월남전 영화 전문 감독)
  • 국제시장(영화)
    가수 남진의 베트남 전쟁 경험담이 각색되어 들어가 있다. 실제로 남진은 해병대에 복무하던 중 베트남 전쟁에 파견되었는데 전쟁 과정에서 몇 차례 죽을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웬수같은 완폐아 고모부 때문에 급전이 필요해져 베트남에 사업하러 간 주인공 윤덕수와 친구 천달구가 남진을 만나고, 현지 주민들을 구출하여 철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여기서 윤덕수는 과거 한국전쟁 시절에 겪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이는 2번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데, 첫 번째는 어쩌다가 얻은 초콜릿을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은 끝에 뺏기고 우는 소년, 2번째는 전쟁의 위협에서 탈출하려던 마을 주민들을 베트콩이 습격하면서 생이별의 위기에 처한 한 남매다. 전자는 윤덕수가 초콜릿을 건네주자 그걸 받아들고 그냥 가나 싶더니 베트콩의 미군 건물 테러를 눈치채고 윤덕수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서 윤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끝났고(그 소년은 결국 테러에 휘말려 사망), 후자는 남매를 구출하기 위해 강에 몸을 던졌다가 베트콩에 의해 총상을 입은 채 귀국하며, 천달구는 자기가 구출한 현지 주민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에 이르게 된다. 참고로 윤덕수가 남진의 팬이 된 이유가 바로 이 때 남진이 자신을 구해주었기 때문.
  • 대특명 시리즈 (미국) : 척 노리스 주연의 B급 액션물. 3편 오프닝이 사이공 함락 씬인데, 의외로 당시 상황을 잘 그려냈다.
  • 라스페기(프랑스)[61]
  • 람보 : 베트남 전쟁 중의 람보 활약에 관한 내용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고, 1편부터 4편까지 전부 베트남 전쟁에 관한 내용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람보는 1편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후,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고, 3편은 아프가니스탄, 4편은 미얀마에서 싸우는 내용이다. 즉 람보 시리즈에는 1, 3, 4편에는 베트남이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특히 람보 1편은 베트남인들을 죽이는 내용이라는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베트남 전쟁으로 사회 부적응자가 된 참전용사의 이야기로 오히려 반전영화에 좀 더 가깝다.
  • 알 포인트 (한국, 공수창)
  •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베트남 전쟁에 뮤턴트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부대가 참전한 것으로 묘사되며, 미스틱은 자신의 동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사이공 미군기지에 잠입한다. 또한 중반에 미국의 패전 이후 파리에서 열린 평화 협정이 주요 무대이자 분기점이 된다.
  • 영구람보(한국)
이쪽도 장르는 액션, 로맨스. 다만 감독인 서극이 베트남 출신이어서 그런지 사이공의 함락 직전을 다루고 있지만 첩혈가두와 다르게 그다지 헬게이트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남베트남 패망 직전인 1975년으로 설정한 것은 당시 중국 반환 직전에 놓여있던 홍콩의 사회적 불안심리를 빗댄 것이란 해석이 많다.
여기서는 초월적 존재인 닥터 맨하탄덕분에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다. 일종의 대체역사인 셈. 극중 베트남에서 코미디언닥터 맨하탄 사이에 있던 일이, 닥터 맨하탄의 중후반 행적의 복선이 된다.
베트남 소녀를 강간한 부대 동료들을 고발한 주인공이 도리어 왕따당하고 동료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스토리. 백 투 더 퓨쳐 시리즈로 유명한 마이클.J.폭스 주연. 참고로 감독인 브라이언 드 팔마는 이라크 전쟁에서의 강간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13.4. 뮤지컬[편집]

13.5. 만화[편집]

13.6. 게임[편집]

13.7. 노래[편집]

  • 아시나요ㅔ* 웃기게도 위키피디아에 베트남 전쟁 관련 노래라고 실려있다. 뮤직비디오 형태를 베트남 전쟁이란 배경만 불러와 옮긴 것이지 노랫가사는 베트남 전쟁과는 전혀 상관없음에도 말이다.]
  • Good Morning Vietnam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14. 관련 문서[편집]

[1] 누계 38만 명[2] 1968년의 병력[3] North Korea fought in Vietnam War [4] 주월미군의 최고선임자다.[주의] 영상 중간과 끝부분에 틱광둑 스님소신공양 영상이 나오니 시청에 주의 바람.[6] 미군이 철수시작한 시점까지만 치면 1973년까지다.[7] 남베트남 패망 직후에 이 조치가 취해졌다.[8]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이때는 6.25 전쟁이 정전으로 마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6.25 전쟁은 종전도 아닌 정전으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땐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었는데 이때 베트남이 등장한 것이다.[9] 이때 지원한 물량이 전차 1,400대, 비행기 340대, 정찰보트 350대, 소총 24만 정에 탄약이 1,500만 발 등 사실상 사람 빼고는 미국이 전쟁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유야 물론 2차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전쟁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0] 다만 후일의 베트남도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식민지 해방전쟁과 동급으로 여기진 않고 남베트남 통일전쟁의 일환으로 해석한 걸 보면 미국과 프랑스는 확실히 구분한 듯하다.[11] 이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중증이다시피한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었다. 당연한게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화가 확산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늘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이전에 매카시즘의 광풍에 휘말려 공산주의의 '공'자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니 당연히 공산주의를 지향한 호찌민 정권에 협조적일 이유가 없었다.[12] 이 것은 전임자인 존 F. 케네디의 암살에 대한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상원의원 시절 베트남을 찾았던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3] 이 때 소련2차대전 중 대량으로 노획했던 독일제 무기를 뿌려주기도 했다.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이 뜬금 없이 독일제 화기인 MG-34MP-40을 들고 다닌 게 이 때문.[14] 여기에 북한도 포함된다.[15] Cat Shit One에서도 베크위스 소령이 "이건 뭐 트럭은 박살내도 되지만 트럭 공장은 박살내지 말라는 소리냐?"라며 이걸 깐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방어는 하되 공격은 하지 말라는 소리다. 공격이 되어야 상대방의 공격하는 힘의 근원을 부술텐데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다.[16] 북한의 특수부대에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북한은 특수부대를 보낼 능력도 없지만.[17] 다만 라인벡커2 작전기간 중 정치적 효과를 노리고 B-52가 하노이를 강행폭격한 적은 있다. B-52의 강력한 ECM 능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수의 폭격기를 손실. 물론 이 때에도 조준폭격이었지 융단폭격을 하지는 않았다.[18] 기간은 다르지만 좀 더 온건하고 확정적인 상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총 790회 발생하였고, 그 결과로 사망한 장교가 83명이나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발적 사고를 포함하겠으나 수류탄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애초에 프래깅의 원 뜻도 수류탄을 사용한 상관 살해이다.[19] M16조차도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하다가 빼돌려 팔아버린 경우가 많아서 이것만으로 아군에게 죽었다고 할 증거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등뒤에서 총알을 맞았다고 해도 전투 도중 늘 앞만 보는 게 아니라 뒤돌아보던 터에 당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오니 이것도 증거가 못된다.[20] 80년대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 장군이 쓴 <그날>이란 책자에서도 일화가 나와 있다. 한국군 지원 미군 헬기 조종사가 거나하게 취한 채로 와서 한국군들도 경악한 일화가 나와 있다. 어찌 영어로 "왜 술을 먹냐??"고 하자 그 조종사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이런 외국에서 개죽음 당하러 왔는데 맨정신으로 버티라구? 이 쓰발것들아. 네놈들은 여기서 죽는 게 좋냐? 좋아?" 라고 소리치는 통에 그 장군(당시 장교)도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고 회고했다.[21] 단적으로 1981년 미국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실제로 싸웠던 군인의 25%가 마약류 범죄로 체포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22] 이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시기 미군의 무단이탈이라는 것이 자신의 근무지에서 30일 이내로 사라진 상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23] 포로에게 가족에게 전해달라면서 받은 쪽지를 북베트남군에게 넘겨서 포로들(F-4 파일런 래리 캐링턴(Larry Carrington))이 죽게 만든 짓을 했다는 썰(...)이 있긴 하나, 이건 나중에 루머로 판명 났다. 그렇다고 해도 베트남에 파병가서 개고생 하고 있는 군인들 입장에서는, 전쟁은 고사하고 미국에서 고생 없이 안락하게 살던 주제에 갑자기 베트남으로 건너가서 그 적들의 나팔수 짓을 하고 있는 위엄찬 행동이 좋게 보일 리는 만무하다.[24] 실제로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의 물량빨이다. 게다가 육군항공대가 꾸준히 폭탄을 독일에 뿌려댔으니.[25] 이에 대해 지압은 "우리는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참가설을 일축했다.[26] 케산기지는 하루에 최소 115톤의 물자가 필요했다고 한다. 원래는 비행장 착륙후 지상 하역이었으나 북베트남군들이 수송기가 이착륙 할때를 노려 포격을 해대서 활주로 착륙후 달리는 상태로 화물만 던지고(...) 그대로 이륙하는 걸로 바뀌었으나 이마저도 피해가 커지자 공중투하로 변경되었다. 당시 자료화면들을 보면 거지꼴의 미군들 벙커에서 튀어나와 이 화물들을 줍고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벙커로 도망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27] 사실 로버트 케네디와 같은 강력한 경선 경쟁자들 때문에 경선 낙선 이야기가 많았다.[28] Lê Minh Đảo 1933~ .남베트남군의 몇 안되는 유능하고 청렴한 지휘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느니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이 끝난 뒤 북베트남군에 체포되어 16년 동안 복역했다가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했다.[29] 보통은, 이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의 논객들이 이렇게 북한 주석궁에 한국군 탱크가 진격해야만 진정한 남북통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사진 자체를 비난하면서 정반대가 되어야 했다면서 말이다.[30] 한국의 LST 탈출 작전이 끝나고 한국 대사관 직원 15명들은 미국의 군용기를 기다리며 대사관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으로 금일 비행기 탈출 계획은 취소 됐으니 내일로 연기된다고 통하가 온다. 그러자 어린 직원 한명이 지금부터 각개약진을 할 때이니 나 혼자 민항기 타고 도망가겠다고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가는 길에 내 골프채 태국 대사관에 갖다 주게"라고 말하며 보내준다. 이 직원 비행기를 탈려고 기다리는데 북베트남군이 공황 활주로에 폭격을 하기 시작한다. 이때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그 직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탄손누트 공군기지는 활주로의 파괴로 이용하지 못핬다.[31] 공식적으로는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이였다. 그래서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르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상황이 안좋아 지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져도 LST선만큼은 탈출시키라고 시간 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LST 함대사령관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교민들 중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한 불법 체류자였다는 것. 그런데 남베트남 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주면 비자 검사 안 하고 한국인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동의하고 수송작전을 시작하였다. 한국 교민들은 왠만큼 다 태웠는데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안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한밤중에 그냥 출발하였는데 먼저 출발한 수송선은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두고 베트남인들을 전부 위에 올려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북베트남군들이 장악한 수로를 통과하여 나왔고 3시간뒤에 출발한 2번째 수송선은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플래시 하나로 물길을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 측에서는 VIP를 다 안태웠다고 정선하라! 안 그러면 나포하겠다! 하며 협박하는 상황이였다. 이들이 출발한 항구는 다음날 폭격 당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15명은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남았다.[32] 이곳이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배정된 시큐리티 포인트 3이었다.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시큐리티 포인트 3으로 탈출하라는 미국 대사관의 지시를 받고 건물로 진입을 시도 하였지만, 입구에서 한국인들을 태워 가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문을 안 열어 주었다. 결국 급박한 상황 속에 직원들은 그냥 조금 더 내려가면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강행했다. 하지만 조금 늦게 도착하여 문 두들기다가 실패한 이대용 공사등 2명은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갔고, 이후 이들은 그대로 베트남에 억류되어 기나긴 포로 생활을 한다. 아마도 너무나 혼란스러워 미국 대사관과 시큐리티 포인트3 사이에 연락이 안된 듯 하다. 마지막으로 나타나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가 실패한 한국일보 특파원 안병찬 기자에 의하면 "만약 들어갔어도 내 차례가 와서 헬기를 탈수 있을지 의문이었다"고.[33] 이때의 상황은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써 4월 30일 새벽 5시 마지막 헬기편으로 탈출한 안병찬 기자의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를 보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1990년대 드라마인 머나먼 쏭바강에서도 사이공 함락 이후 주인공이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하는 과정을 아주 정확히 묘사해 놓았다. 말 그대로 난장판 그 자체.[34] 개중엔 남베트남군 치누크 조종사들이 가족들을 태우고 바다로 탈출하던 중 발견한 미국 해군 전함에 접근했는데, 치누크의 크기에 비해 전함의 착륙장의 크기가 작아 사람들을 착륙장에 뛰어내리게 한다음 조종사는 치누크를 바다에 불시착 시켜 탈출한 경우도 있었다.[35] 미군이 바다에 투기한 헬기는 미군헬기가 맞으며, 월남장교및 그 가족들을 태운 경비행기가 착륙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미군 함장이 결단을 내린것이다. 이 문서가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누가 정리좀 해주기를 바란다.[36] 오히려 인도는 인도 국민 회의 등 비공산 계열 정당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며 민주적 정체를 유지하던 나라였다.[37] 말이 안 되는 소리로 느껴지겠지만 당시 베트남 전쟁 귀환자를 욕하는 단어로 Babykiller라는 신조어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는 현대어 사전 사이트인 Urban Dictionary에도 있다.[38] 안타깝게도 이때 참전했던 상당수의 장병들이 사회부적격자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범죄자로 타락하는 등의 비극을 겪었다. 물론 대부분은 정상적인 생활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정신질환을 겪고 사는 사람도 있는 등 참으로 여러모로 미국에게 있어서는 괴로웠던 전쟁이었다.[39] 이 사위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뒤 훗날 정계에 입문하여 버지니아주에서 주지사, 상원의원을 지낸다. 존슨이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열어줄 정도로 사랑해 마지 않았던 사위라고... 2010년대에는 정계에서 은퇴했다.[40] 군법에 의한 보상액은 엄청나게 낮게 유지할 수 있다. 이는 다른 국가보상규정도 비슷한데, 대신 이 헌법에 다루는 대상을 제외하면 다른 방법으로 추가적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41] 이 때문에 실질적 후원은 배상이 아닌 연금이나 보험, 동료의 모금 등으로 해결한다.[42] 이중배상은 근무시간 중에 업무상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여기 해당하지 않으면 국가배상소송으로 더 많은 배상을 받을 수 있다.[43] 나중에 6.29 선언 이후 6공화국 수립 때 헌법을 개정해서 넣을 기회는 있었지만 그 당시 헌법 개정을 주도했던측이 경찰과 군사정권을 증오하던 민주화 인사들이라서 경찰, 군대를 엿먹이기 위해 이중배상금지 규정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카더라가 있다.[44] 참고로 응우옌 응옥 로안은 1998년 6월 14일 67세의 나이로 죽었다.[45] 물론 그들이 남베트남 정권에 대한 부역자이고 북베트남 입장에서는 침략자들에게 빌붙어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며 민중들을 탄압했던 존재이므로 그들의 사상을 청소하고 싶었을 수 있다. 사상을 개조한다는 것은 폭력이긴 한데 그렇다고 위쪽 동네강철의 대원수처럼 생명을 청소해버리는 것은 더 심각한 인권침해니깐(...) 사실 북한과 통일한다고 가정했을 때, 북한의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집단에게 사상개조 안할거냐? 라고 반문하면 사실 답이 없다. 이들을 모조리 그대로 기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실업자로 만들 수도 없고.[46] 이런 재교육 캠프에서 갖은 학대를 받은 사람중에 대한민국 공사 이대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소속 무관이었고 예비역 장성이었기 때문에 외교특권을 박탈당하고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귀환한다. 이 사람이 당했던 이야기를 본다면 베트남에서 인권탄압이 없었다거나 견딜 만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47] 미화로 수 백 달러에서 수 천 달러 가량 되는 돈인데 미국이나 호주같은 나라들 기준으로 한다면 한 달치 봉급도 안되는 수준이지만 베트남 기준으로 1년을 거뜬히 먹고살고도 남을 돈이었다.[48] 사실 중-소 분쟁도 어느 정도 정리되고 북한도 주체사상으로 고립되었던터라 이전과 같은 원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 심지어 노골적으로 도움을 거절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49] 이대용 공사는 당시 한국 정부를 미국의 괴뢰 정부로 인식하고 있던 공산권의 시각 때문에 더 가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근데 괴뢰까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극단적 친미 정권이었던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가끔 대들기도 했지만 안습... 쉽게 말하면 미국의 간첩 취급을 받은것. 저 한국인은 위험한 한국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대용 공사는 당신 같은 고위직이 무사히 살아온걸 보면 전향했을거라는 의심으로 곤욕을 치른다. 심지어 이수근(북한)이 간첩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월간조선에 했다가 욕을 무척 먹었다. [50] 여담으로 저자는 외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북베트남 정부의 출국허가를 받아 미국에서 살았다.[51] 베트남은 쿠바와 함께 일당독재정권 가운데서는 그나마 국민들의 선거권이 보장되는 축에 속한다. 베트남은 국회의원 선거에선 한 선거구에 1명만 나가서 당선되는 식이 아니라 여려명이 나와서 그나마 선택권은 보장되긴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얘기는 아니며[52] 그냥 여타 일당독재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라는 얘기.[52] 일단 제도적으로 다당제가 아니라 일당제라서 야당의 선거 참여가 봉쇄되어있고, 무소속 후보들은 선거에 나올 수는 있으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해서 그 수가 적다. 그러니까 계파별로 뽑는 것만 가능한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53] 애당초 미국이 보는 베트남과 프랑스가 보는 베트남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미국 입장에서 베트남의 식민지화 같은 건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문제였고 본질적으로는 동남아 공산화를 막기 위한 첨병에 불과했다. 물론 호찌민과 손잡지 않은 건 실책이었다고 평가되지만 이것도 호찌민이 순수한 공산주의자라고만 판단한 오판의 결과물이다. 이 점은 베트남 측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당장 프랑스, 중국, 일본 등과 달리 미국에 대해서는 베트남도 별다른 원한이 없다.[54] 북베트남의 전신이 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세기 말~1910년대 까지 걸쳐졌던 근왕주의, 성리학적 향촌에 기반한 독립 운동이 전멸 당하고, 다른 좌익 계열 독립 단체였던 VNQDD 또한 망한 이후 베트남 국내외에서 거의 유일하게 거대 조직화 된 체계적인 독립 운동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 주축으로 터진 1930년의 응에 안 소비에트 봉기는 베트남 국체가 프랑스에게 넘어 간 이후 유일하게 베트남인들이 식민 당국을 일년의 짦은 기간이나마 직접 몰아내고 해방구를 성립해 본 경험이었다. 프랑스 식민 정권 아래 가열찬 탄압을 받으면서도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30년대와 2차대전 시기, 그리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를 들어 총력전을 벌이는 동시에 전국의 자신들이 손이 닫는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토지 개혁, 빈농 구제, 교육 사업, 행정 체계 건설을 통해 가시적인 건국 활동을 주도했다. 2차대전 직후 베트남의 해방조차 연합군 손에서 이루어진게 아니라 일제 패망 직전 낌세를 눈치 챈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8월 혁명이라는 봉기를 일으켜 일본을 몰아냈다. 그리고 이 8월 독립 혁명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고도 하노이의 탕롱궁에서 프랑스의 식민 괴뢰 왕정의 마지막 왕이었던 바오다이에게 공식적인 건국식을 치루며 "짐은 오늘부로 평범한 베트남 시민으로 돌아 갈 것이며, 신정부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결코 구 왕실이 신정부의 건국 사업에 어떤 방식으로도 훼방 놓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라는 발표와 함께 옥쇄와 왕검을 정식 이양 받았다. 말하자면 제도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이력으로도, 의례적으로도, 대중의 시선으로도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민족 해방 운동의 유일무이한 주도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어찌 재해석의 여지가 없다.[55] 진짜 평등한 민주적 자유 선거가 벌어졌다면 공산당이 완승했을 거라는 것은 이념에 편향된 좌파만의 평가가 아니다. 당장 그 시절 당시 남베트남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응오 딘 지엠을 미국으로 대려와 정계/학계와 커넥션을 깔아 주어 미국이 그를 간택하게 만들고 이후 케네디, 존슨 정부가 대대적으로 베트남에 미국이 개입하도록 여론을 주도한 미시건 주립대학교 베트남 고문단의 윌리엄 피셸 교수, 당시 주월 미국 해병대 특수부대 고문으로 있었으며 현대 베트남 전쟁사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마를 비롯한 고위 군인들도 만장일치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양쪽 모두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은 베트남의 민주화 운운하면서도 약속된 1956년 전국 총선을 일방적으로 불이행하도록 조치하였고, 북베트남은 그 약속을 믿고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신들에게 접촉 하기를 기다리다가 총선을 전혀 해줄 생각이 없었던 디엠 정권 아래 개박살나고 있는 남부 당원들이 제발 무장투쟁 좀 하게 해 달라고 하도 사정복걸해서 아래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개전 지시를 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실 왜곡이 자주 발생하는데 한국의 경우 북한이 총선을 거부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이 총선을 거부한 것이다. 출처: 남베트남 유민 출신 미국의 여성 역사학자이며, 전쟁 당시 사이공의 베트콩 포로 심문관으로 일했던 쯔엉 판 마이 엘리엇이 번역한 포로들의 베트콩 지원 동기 모음집.[56] 심지어 1950년대 후반, 양쪽 정권 둘 다 방금 수립 되었고, 북베트남이 토지 개혁 문제와 코민테른의 제제로 제대로 남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두 정권 다 내정에 치중했던 시기, 남반부의 디엠 정권도 나름은 토지 개혁을 해 본다고 농촌에 관료들을 파견 했을 때 분단 정권 수립 이전 이미 북베트남 치하에 토지 재분배가 다 이루어져서 몇몇 관료들은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그 상태를 방치했고, 다른 관료들은 이미 빈농들에게 나누어 진 토지를 지주에게 다시 돌려 주고 사이공 정권의 입맛 대로 재처분 하려다가 지역 베트콩 요원들에게 암살 당하는 경우 또한 있었다.[57] 애초에 남베트남은 1960년대 중반 북베트남이 남반부 해방 전쟁의 개전을 공포하고 베트콩의 무장 봉기를 허락하자 얼마 되지도 않아 수도권 바로 앞에서 벌어진 동호이 전투에서 개박살나고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 걸 미군의 지상군 투입으로 그나마 10년 생명연장 된거였다. 응오딘지엠의 통치 아래서는 최소한의 자주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국정 운영을 하였으나, 지엠 정권 이후 권력의 핵심 자체가 아수라장에 빠지는 동시에 전쟁 상황은 더욱더 긴박해 지자 아예 제대로 된 북베트남 측과의 교섭 과정은 물론, 갈수록 남베트남의 일상적 통치 구조 또한 미국의 관리에 넘어 가며 남베트남은 역설적으로 지엠 축출 이후로는 의미 없는 종이 위의 정부가 되어 갔다. 출처: J. Race, “War Comes to Long An”, from War Comes to Long An: Revolutionary Conflict in a Vietnamese Province, (Berkeley: 2010) [57] 응오딘지엠이 엎어진 이유가 이 짓거리를 하는 걸 미국과 남베트남 군부가 참지를 못해서였다. 농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판에 오히려 멍청한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않을 수가 있나.[58]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후 반전운동가가 된 론 코빅이 쓴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59] 미국의 미덕이라 불리는 가치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가 감독한 또 하나의 작품인 Wall Street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관한 내용의 지금의 상황에 대입해서 본다면 훌륭한 작품이다.[60]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다.[61] 앞부분에 디엔비엔푸 전투가 묘사된다.[62] 베트남에서 실종(나중에 불에 타 죽은 것으로 밝혀짐)된 애인을 그리워해서 타락해가는 여교수의 심리를 그렸다. 파월용사 옷이 예비군 동대 옷인건 넘어가자 [63] 베트남 전쟁을 최초로 극의 주제에 넣은 작품, 참전용사가 전쟁 후유증으로 고뇌하다 창녀를 만나서 치유해간다는 영화이다. 국내 촬영 베트남 전쟁은 완전히 동네 뒷산 병정놀이.[64] 1편은 그나마 전쟁의 참상을 구현한 스토리와 연출로 호평받았는데, 2편에서 뜬금없이 게임을 좀비 호러물로 바꿔버림으로써 망했다(...). 어색한 타격감이나 납득 안가는 스토리는 덤. 특히 evac 미션 시작할때 뜬금없이 헬기 조종사를 팀킬해서 탈출 기회를 지 손으로 없애 버리는 미친 놈이 등장하는 시점에서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참고로 2편 제작사가 스나이퍼 엘리트 시리즈 빼고 다른 게임들은 내는 족족 말아먹기로 유명한(...) 리벨리온이다.[65] 동유럽 게임 개발사 프테로돈에서 제작한 FPS게임으로 싱글플레이어와 코옵으로써 가장 베트남 전쟁을 잘 구현했다는 게임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베트공의 터널 기지에 침투하는 임무는 폐쇄 공포증을 느끼게 할 정도. 다만 속편은 망했다.[66]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 게임 시스템상 공중 급유가 구현되어 있지 않아서 지도가 약간 작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 당시 미군 조종사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참전했던 분들도 이 게임을 가끔 하신다고 한다. 어떤 분은 자신이 실전에서 가져온 건 카메라 영상과 F-100 켐페인 화면을 영상 편집해서 올리기도 하셨다. http://vimeo.com/27102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