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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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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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사인 압드 알 마지드 알 티크리티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이름
사담 후사인 압드 알 마지드 알 티크리티
Ṣaddām Ḥusayn ʿAbd al-Maǧīd al-Tikrītī'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출생
파일:이라크 왕국 국기.png 이라크 왕국 티크리트
사망
2006년 12월 30일(향년 69세)
재임 기간
이라크 부통령
이라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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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6cm, 95kg
직업
정당
종교
부모
후세인 압둘 마지드(알 마지드)[1]
수브하 탈파[2]
배우자
사지다 탈파[3]
사미라 샤반다르
니달 알함다니[4]
자녀
슬하 2남 3녀[5]
우다이 후세인 (1964 - 2003)
쿠사이 후세인 (1966 - 2003)
라가드 후세인
라나, 할라
약력
이라크 부통령
제5대 이라크 대통령
복무
최종 계급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 총사령관
주요 참전
기타 이력
이라크 대통령
1. 개요2. 일생3. 가족4. 평가5. 미디어에서6. 여담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라크정치인. 제5대 대통령을 지냈다.

부통령 재직 시절에는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유가부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시켜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을 중상위권 국가로까지 성장시킨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지만[6]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부통령이었을 때와는 정반대의 판단력과 능력을 보이며 이란-이라크 전쟁걸프 전쟁 등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거덜내버렸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7][8] 하지만 후세인이 축출된 이후에 집권한 아흐마드 찰라비나 이야드 알라위, 이브라힘 알 자파리, 누리 알 말리키 같은 이라크의 역대 지도자들이 여러가지 실정과 헛발질들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치안 악화와 IS의 준동과 같은 정치적 혼란들이 증폭되다 보니 이라크 전쟁과 IS 격퇴전 이후로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서도 후세인이나 후세인 이전의 바크르 정권 시기가 더 좋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물론 이라크 국민들도 후세인 정권이 저지른 폭정의 피해자와 그 후손들과 후세인 정권 시기에 극심한 학살과 억압을 당했던 이라크내 쿠르드족들은 그와는 별개로 최소한 후세인을 옹호하지 않고 그를 비난한다.욕해야지. 그럼.

이름이 하필 '후세인'이라서, 국내에서 이를 잘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後世人 =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또 널리 알려지니 '이름에 후세인이 들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아랍계'라는 말이 널리 퍼졌는데, 재미있게도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풀 네임에 '후세인(Hussein)'이 들어간다(…). 2008년 대선 당시에도 이 사실 때문에 오바마를 꺼림칙한 인물로 여긴 사람들도 실제 많이 존재했었다.

후세인(حسین)이란 이름 자체는 후세인의 삼촌인 하산 알 마지드가 지어준 것으로 '멋진, 아름다운'의 의미를 지니는데,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아랍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이라면 많이 사용하는 이름 중 하나로 후세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우마이야 가문이 시도하던 칼리프의 세습제 전환에 반대하며 저항하다가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죽음을 맞은 인물로, 키케로정몽주 비슷한 인물이다.

2. 일생[편집]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담 후세인/일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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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후세인 정권의 말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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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하산 알 마지드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후세인의 경호실장이자 비서실장을 지냈고, 후세인의 신임을 받아 쿠사이 후세인과 함께 공안기구의 담당자였던[9]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에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당했다.

독가스로 사람을 하도 죽여대고, 할리브자에서만 5천명 이상을 죽인 후세인의 사촌,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 마지드2010년 1월에 사형당했다. 원래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진 직후, 영국군은 자신들이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죽였으며 시체도 확인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서 체포되어 2010년 교수대에 섰다.

사담 후세인과 함께 재판을 받은 피고인들은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과 후세인의 이복 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혁명 법원의 전 수석 판사였던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였다. 그 밖에도 시아파 학살에 연루된 압둘라 카젬 루이드와 미즈하르 압둘라 루에이드, 알리 대엠 알리, 그리고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로 이들은 1982년, 두자일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의 고위 관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았다. #
사담 후세인
타하 야신 라마단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
알리 대엠 알리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은 2005년에 체포되어, 처음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에서 사형으로 뒤집혀서 처형당했다. # 후세인의 이복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2007년에 사형 당했는데 목이 잘려서 참혹하게 죽었다. 교수형이었음에도 처형 도중 목이 잘렸는데, 이라크는 다른 중동국가들과 달리 세속 국가들처럼 집행 시작과 동시에 사형이 바로 끝나지만 대신 목뼈가 부러지는 수하식 교수형을 집행하기에 꽤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이라크 혁명 법원의 수석 판사였던 아와드 하메드 알 반다르도 혐의가 모두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바트당의 관료, 압둘라 카젬 루이드미제르 압둘라 루이드 부자는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알리 대엠 알리는 15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외무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냈고, 후세인 정권의 유일한 기독교도였으며, 후세인이 가족이라고 불렀던 타리크 아지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에 체포되었는데, 워낙에 순순히 붙잡혀서 후세인을 배신하여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고, 지금은 201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6월 5일 옥사했다. 사형이 확정되는 대로 바로 바로 처형을 하던 이라크 정부였으나, 70세를 넘긴 상태여서인지 집행되진 않았다.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 쿠사이의 아들인 무스타파 후세인은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모술에서 농성전을 벌이다 결국 2003년 7월 22일 미군과의 전투 중 폭사했다.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전 혁명사령부 위원회 부의장은 현재 잔존하는 후세인 충성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며, 후세인의 측근들이 줄줄이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잡히지 않다가, 2014년, 이라크 내전에서 양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그의 세력은 다에쉬랑 손을 잡고 이라크군을 조지고 있다. 다만 2015년 4월 경 티크리트 공방전에서의 사망설이 돌았으나, 2016년 4월에 비디오에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비디오에서 이자트 이브라힘은 수니파 국민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가 제안하여 구성된 '테러 대항을 위한 이슬람 군사동맹'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여, IS와 사실상 결별하였음을 시사하였다. 2016년 10월 모술 대공세에서 후세인 충성파가 이라크 정부군과 협력하여(...) 다에시와 교전하였다.

후세인의 아들 둘은 죽었지만, 그보다 수가 훨씬 많은 들도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다에시 지지를 천명한 상황이다. 특히 집안의 장녀인 라기드 후세인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다에시에게,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퍼다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라크 지역에서의 다에쉬 세력 확장은 사실상 이들의 공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 미국이 후세인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들 꼴리는 대로 마구 저지른 대가를, 이라크 정부는 지금 몇 곱절로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에게 독설을 여러 차례 날려 유명해진 외무장관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함락된 뒤 잠적했다가 미군에게 자수, 체포됐다. 자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포로로 잡히고 얼마 뒤 석방되어 2008년 3월에 아랍에미리트로 이주해 조용히 살고 있다.# 이 양반은 후세인의 측근 치고는 딱히 전쟁범죄 같은 건 저지른 적도 없는 평범한 외교관 출신인 데다, 유명세를 탄 이유도 서방권에서 케미컬 알리의 패러디인 코미컬 알리로 불리며 개그짤 소재로 쓰일 만큼 허세 쩌는 공보활동 정도가 전부라 죽이거나 빵 보낼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 당시 허세를 부린 이유를 이라크 군에서 잘못된 정보를 줬고 자신은 그걸 토대로 언론에 발표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3. 가족[편집]

중앙의 인물.
왼쪽과 오른쪽 인물은 각각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
자녀로는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딸이다. 그리고 손자로 무스타파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다이와 쿠사이는 사담이 잡히기 전에 미군과 교전 중 험비에 장착된 TOWAH-64 아파치 공격헬기의 AGM-114 헬파이어 세례를 맞아 죽었고,[10] 무스타파는 항복을 거부하고 교전을 계속하다가 미군에게 사살되었다. 이때 우다이는 향년 40세, 쿠사이는 향년 38세, 무스타파는 향년 15세였다.

시리아의 아사드 집안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장신 집안으로 유명하다. 사담 후세인의 키도 약 186cm이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컸다. 문제는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사실...

사담 후세인의 일족들 중에서 남자들은 사위를 포함해 전부 다 죽어서 현재 대가 완전히 끊어졌으며 현재 살아있는 사담 후세인의 집안 사람들은 딸 라가드와 아내 사지다 등 전원 여자들밖에 안 남았다. 그나마 여자 일족들조차 요르단 어딘가에 숨어있을 뿐 정확히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불명이다.
  • 사지다 탈파: 사담 후세인의 아내. 1963년 사담 후세인과 맞선으로 결혼했다. 힘 있는 바트당 수뇌부 가문 출신이지자 사담의 외사촌, 즉 사담을 아들처럼 돌봐준 외삼촌인 하이랄라 탈파의 딸이기도 해서 사담이 권좌에 오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아줌마도 만만치 않아서 우다이가 카멜 한나를 증오하다 못해 살해하게 된 것도 사지다가 옆에서 계속 원수를 갚아달라고 충동질한 탓. 그 외에 자기 정적들을 고문하라고 지시하는 등 이쪽도 심히 무시무시한 아줌마. 2003년 이후 행적을 감추었다. 현재 이라크 반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다[11].
  • 우다이 후세인: 사담 후세인의 장남이다. 임해군, 순화군 수준으로 악행이 심하던 인물.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천장에 총질하는 건 기본. 아버지의 둘째 아내를 소개시켜줬다며 파티장(그것도 이집트 대통령 영부인까지 참석한 파티서)에서 자기 아버지 최측근 카멜 한나를 지팡이로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팬 다음 죽어가는 카멜 한나를 전동식 음식 자르는 칼로 숨통을 끊어버렸으며[12] 이라크 올림픽 위원장 시절에는 경기에서 진 선수들 고문하는 게 취미였다고[13]. 거기다가 자기 집 지하에 감옥을 만들곤 정치범들을 수시로 고문하였으며 반송장이 된 수감자를 바로 옆의 개인 동물원 표범들에게 던져주며 즐거워한 진성 사이코패스였다. 참다 못한 아버지 사담이 카멜 한나 사건 때는 개인 감옥에 4년 처박은 후[14] 스위스 대사관 직원으로 쫓아버렸다. 물론 우다이는 얼마 후 어느 레스토랑 직원을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한 죄로 재송환당했다 결국은 1996년에 테러를 당해 총알을 한 다발 얻어맞고는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동생 쿠사이와 함께 도피생활 도중 발각, 치열한 교전 중 미군이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사망. 끝도 지저분해서 죽은 후 미군은 죽은 우다이와 동생 쿠사이 후세인의 시체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전세계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 쿠사이 후세인: 사담 후세인의 차남. 그나마 이 콩가루 집안에선 가장 제정신인 사람. 여자를 매일 갈아치운 데다 부인과도 이혼한 우다이와는 달리 결혼생활도 나름 평온했고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잔학성 자체는 만만치 않아서 1991년 걸프전 직후 벌어진 시아파 반란 분쇄와 남부 습지대 파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언젠가는 감옥이 꽉 들어찼다고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빈 공간 만들려고 쓸어버리는 짓을 감행한 적도 있다. 역시 2003년 우다이와 함께 도피 중 폭사. 당시 만14살(!)이었던 아들 무스타파도 아버지와 같이 미군을 향해 AK를 난사하다가 그때 같이 죽었다.
  • 후세인 카멜 & 사담 카멜 형제: 사담 후세인의 사위들이자 먼 친척. 각자 사담의 장녀 라가드 후세인, 그리고 차녀 라나 후세인과 1986년 결혼했다. 우다이를 바보라며 멸시하고 우다이도 벼락출세한 이 둘[15]을 "골든 보이" 라고 부르며 이죽대긴 했어도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지만 88년 카멜 한나 사건 당시 후세인이 카멜 한나 사건과 그 이전에 우다이가 벌인 기행을 죄다 일러바치면서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다.
    그 후에는 우다이가 사사건건 후세인에게 총을 들이대는 등 목숨이 위험해지자 1996년 전격적으로 아내들을 데리고 요르단으로 망명했다. 미국에게 이라크 무기개발 정보를 넘겨주고 CIA의 도움을 받아 사담 대신 권좌를 차지하려는 속셈. 그러나 그 후 사담이 무기개발 혐의를 죄다 카멜 형제에게 넘기면서 오갈 데가 없어지자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는 사담의 꼬임에 넘어가 다시 이라크로 돌아왔다. 그 직후 강제로 이혼당했으며 얼마 후 케미컬 알리가 그들의 집에 쳐들어와 둘을 살해했다. 사담 본인은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 죽일 수 없으니 사담의 아들인 쿠사이 후세인이 카멜 형제과 같은 알-마지드 가문이면서 사담 후세인의 심복이었던 케미컬 알리를 보내 살해한 것.
  • 라가드 후세인: 사담 후세인의 장녀. 2007년 수니파 무장세력에게 재정지원 혐의로 이라크 내무장관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며 현재 인터폴의 적색 리스트에 올라 있으며 현재까지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라가드는 2015년 1월에는 요르단의 한 보석 팸플릿에 반지, 팔찌, 귀걸이, 펜던트 등을 소개하면서 이를 판매한 돈으로 IS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짓을 터뜨렸다 가격은 펜던트는 1,000파운드(164만원) 정도이고 청록색 10피스 팔찌는 1,320파운드(217만원)라고... 그녀는 현재도 구찌 등 명품을 사는데 수백만달러를 사용하는 등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한 측근은 “신발을 살 때에는 아예 자루를 들고 간다” “핸드백과 부츠를 사면서 달러를 물 쓰듯이 뿌린다”라고 증언했다. 또 성형수술을 위해 요르단의 최고 성형외과의사가 항상 대기를 한다고 하며 아버지 사담 후세인이 생포된 후 당시미국 법무장관인 존 애슈크로프트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가 살던 왕궁에서 나온 현금과 보석은 나에게 달라”고 요구해 병신 인증을 했다.

4. 평가[편집]

미국이나 서방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별의별 전쟁을 일으키면서 깽판을 쳐댄 덕분에 똑같이 반서방 성향이 강한 중동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안 좋다.

일단 걸프전쟁 당시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고, 이라크에게 강제합병까지 당한 쿠웨이트는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2006년 후세인이 사형당할 당시에 쿠웨이트 정치권과 쿠웨이트 국민들은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다 못해 당연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반면 쿠웨이트 사람들은 걸프 전쟁을 일으킨 사담 후세인은 맹렬하게 증오하는 것과는 달리 후세인 정권 이전과 축출 이후의 이라크 대통령이었던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와 셰이크 가지 알 야워, 잘랄 탈라바니, 바르함 살레 등의 경우 크게 증오하지 않는 편이다.[16] 하지만 사담 후세인이 생전에 저지른 만행들과 별개로 쿠웨이트에서는 역사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므로[17] 후세인 이후의 이라크 대통령들 역시 쿠웨이트인들 앞에서 찬양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그래도 걸프전쟁 일으킨 후세인보다는 걔네들이 더 낫지 않았냐고 말하면 쿠웨이트 사람들도 말 못한다.

똑같이 반미국가였지만 종파가 다르고 이라크와의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해졌던 이란의 입장에서 사담 후세인은 그야말로 절대악, 파괴신 그 자체나 다름없다. 애초에 전쟁 자체가 이라크의 기습으로 시작된 데다가, 군/민간인 사망자가 너무 많아 지금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가족이나 친지를 잃고 자기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이라크를 증오하는 국민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18] 그리고 이란 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하여 현재 이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란 지배층들의 입장에서,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 이슬람 혁명 수출을 좌절시킨 장본인에다가 후세인 집권 시기 8년간이나 이라크와 치뤘던 이란-이라크 전쟁을 겪고 난 후 이란이 현재 미국과 서방 등 국제사회의 반발과 우려에도 핵개발과 핵무기 보유에 집착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19] 사담 후세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06년에 사담 후세인이 사형되었을때도 똑같이 후세인 정권 시기의 이라크와 전쟁을 치뤘던 이라크의 다른 옆나라 쿠웨이트와 같이 당시 이란 여론과 정치권에서 후세인 사형에 대해 찬성하는 반응을 보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같은 수니파 국가였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 사바흐 왕족들은 사우디로 도피했고 이라크군은 사우디에도 포탄을 발사했다. 그리고 사우디는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으로 걸프전에 참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의 왕정 국가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에 대항하는 대리전을 후세인 당시 이라크에게 사주하고 치르게 한 장본인들이지만, 그 결과로 이라크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채무 상환을 독촉하며 전쟁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은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이라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자신들을 배신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여기는 수준. 당연히 이라크 측은 이뭐병 취급. 이라크가 전통적 앙숙관계인 이란과 쿠웨이트 못지않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20] 게다가 심지어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된지 수년 뒤인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바레인, 리비아, 이집트등 아랍의 수니파 국가들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던 카타르[21]에 대해 단교 보복 조치를 가할 때도 이에 동참하지 않고 카타르와의 정식 수교 관계를 유지하여 카타르를 지지했다. 단 2020년에는 사우디와 이라크가 걸프 전 이후에 폐쇄했던 국경검문소를 다시 열며 양국 관계를 개선하고, 이듬해인 2021년에 카타르에 대해 단교 보복을 가하던 사우디가 카타르에 대한 보복 조치를 풀고 재수교를 맺으면서[22] 지금 이들 나라의 관계가 앙숙이던 것도 이제는 옛 말이 되었지만.

국가의 체제가 가장 비슷한 이웃나라이고 똑같이 반미친소국가였던 시리아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사담 후세인을 반대한다. 바트당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점도 있고, 물밑으로는 첩보전을 비롯해 대립관계가 심각했기 때문. 어느 정도냐면 똑같이 바트당 지도자임에도 하페즈 알 아사드 당시 시리아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은 서로 정상회담 한번 한적 없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23]. 그래서 이란-이라크전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중간 상인 역할을 수행했고,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 서방 주도의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라크가 무너진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난민을 수용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첩보를 제공하기도 했다.[24] 하지만 시리아 국민들은 반미정서가 매우 강한 편이어서, 사담 후세인을 어느 정도 동정하는 정서[25]가 있으며, 사담 후세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그를 사칭하는 저항방송(…)을 송신했을 정도였다. 시리아 대다수 국민이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수니파였던 점도 있고...

이집트모로코에서도 반(反) 후세인 정서가 크다. 이들은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과 싸우던 이라크를 지지했으나 1988년에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되고, 이란과의 전쟁이 끝난지 약 2년 뒤인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키자 사담 후세인을 적으로 돌리고, 걸프 전쟁에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으로 참전해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걸프 전 이후에는 사이가 나빠졌다. 그나마 리비아는 똑같이 반미를 외치면서 껄끄러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주변정세가 이라크 왕따였으니 대놓고 친하게 지내지는 못 했다. 한편 다른 북아프리카의 국가인 튀니지알제리의 경우 반미도 친미도 아니었고, 당시 알제리의 대통령이었던 리아민 제루알과 튀니지의 대통령이었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가 한 쪽으로 치우치려고 하지 않으며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와 친하게 지내면서도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와 카다피 정권의 리비아 등 아랍의 반미국가들과도 국교관계를 유지하며, 교류를 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중동정세의 상황이 이라크와 리비아 왕따였던지라 이들도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와는 대놓고 친하게 지내지는 못하였다.

요르단키프로스, 레바논의 경우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과는 대립하지 않았고, 양국간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26] 그래도 걸프 전 이후의 당시 국제정세가 미국의 일방 패권주의 일변도로 거의 돌아가다 보니 이들도 미국의 눈치 덕에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와는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반면 모국인 이라크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후세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우선 직접적으로 후세인과 같은 이슬람 교파 출신이었던 이라크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후세인에게 동정적이거나 우호적인데 비해, 사담 후세인 정권 치하에서 탄압과 학살을 겪었던 이라크내 쿠르드족과 시아파 무슬림 국민들은 후세인을 여지없이 증오하거나 원수취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의 시아파 탄압이 워낙 악랄했다 보니 이라크내 시아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자신들과 교파가 다른 시아파와 앙숙지간인 수니파 출신이었지만 후세인의 전임이자 1970년대 이라크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가 최소 사담 후세인보다는 훨씬 온건했다며 바크르 전 대통령을 고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걸프전 이후로는 주변 국가들에 국경까지 패쇄당하고 여러 각국으로부터 항공 직항편까지 정지당하는 등 그야말로 고립을 당했다. 걸프전 이후 유일하게 정상회담을 한 해외 국가원수는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대통령뿐이었고, 그나마도 유가부양에 협조하려고 권한 수준이었다. 초기에는 친소련 성향이었음에도 당시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자국 내 문제처리에도 바빴으니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당연히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 국가들에서도 독재자, 전쟁 범죄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다만 후세인이 축출 뒤 이라크의 혼란상이 지속되면서, 그의 통치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가 되기도 했다.

스리랑카에는 사담 후세인 마을이 있다. 지역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이 마을은 1978년 홍수피해를 입었을 때 이라크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사담 후세인이 통크게 재건을 해줘서 사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극소수인 무슬림들은 대다수인 불교도나 2번째로 수가 많은 힌두교도 타밀족과도 사이가 나빠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터에 이런 은혜를 입었기에 당연히 이 마을 주민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크게 비난하였다. 후세인 이상으로 악랄하던 폴 포트조차도 지원을 받고 큰 도움이 되어 존경하며 더 나아가 신성시하던 소수 민족들이 있듯이. 이쯤 되면 스리랑카판 폴 포트라고 봐야 할지도?

비록 한국이나 이외 다른 아시아권 나라에선 후세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서 서방이나 아랍권보다는 악감정은 덜하지만, 이쪽에서도 엄연히 멀쩡한 나라를 전쟁, 가난으로 말아먹은 독재자인 이상 평판은 영 좋지 않다.[27] 특히 한국에선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후 전국적 반미 분위기로 인해, 후세인을 옹호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한국은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을 초월하는 최악의 독재꼴통집단 북한과 휴전, 대립하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객관적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후세인을 적극 옹호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고 정신병자 취급 받기 십상이다. 국내 언론도 이랬지만 조선일보월간조선을 통해 대대적으로 후세인 과오만을 보도하며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데 노골적이었기에 한겨레로부터 후세인이야 당연히 악랄하지만, 그런 후세인을 이득에 따라서라고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던 건 쏙 빼먹냐며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한겨레도 후세인의 악랄함을 인정했으니 한국인들도 결과적으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사담 후세인을 욕한 셈이다.

우습게도 미국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편을 들어줬고,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손수 이라크로 가서 후세인과 반갑게 악수하면서 우애를 과시하던 적도 있다. 이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사진이나 영상은 이라크 전쟁 당시 럼즈펠드를 비난하는 측에서 쓰면서 실컷 럼즈펠드를 놀렸다.

하지만, 후세인이 죽고, 이라크에 남은 기독교 같은 소수 종교인들이나 집시들은 지금은 애절하게 후세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이 따르기만 하면,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경제적 기초나 치안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인이 죽은 뒤, 미국은 여러 계산과 입장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고, 현 이라크 정부는 이들에게 일절 무관심이라서, 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온갖 집단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는 등 여러 끔찍한 일들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28] 이는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자들이 일관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알 아사드도 기독교도와 알라위파를 비롯한 소수 종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바라크, 사다트 등의 이집트의 독재자들도 콥트 교도들을 보호했다. 아랍은 아니지만, 이란의 팔라비 국왕도 조로아스터 교도, 유대인, 아르메니아 인들을 우대했고, 이후 호메이니 시대까지 그게 이어진다.[29]

한마디로 후세인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도망 다녔거나 최소한 재판 절차를 잘 이용했으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 본인이 이를 포기하고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잃은 후세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약화시키고 수니파를 결집시키려 했다는 추론도 있다. 권력도 잃고, 대를 이을 아들도 다 죽고, 딸은 옆나라인 요르단으로 도망쳤고, 측근들도 사형장 직행이 예정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작자들은 다 배신자들이고, 남은 가족들의 삶을 그나마 지키자면 누군가의 후원이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한때 권력을 잡았던 폭군답게 당당하게 죽어서 영웅으로 남자고 스스로 죽음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살아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가 한 악행에 비해 이라크 정부가 관용을 베푼 게 되어, 그만큼 후세인에 대한 동정론도 옅어지지만, 덜컥 죽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악행이 대부분 잊히고, 오직 시아파 보복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명성황후와도 어느 정도 비슷한 케이스다.

5. 미디어에서[편집]

걸프전 이후, 10여 년간 미디어에서 '아랍의 독재자' 이미지로서 수도 없이 후세인을 자신,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죽은 뒤에는 관심이 줄어든 편이다.
  • 못말리는 람보》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전작 <못말리는 비행사>에서도 마지막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데, 한가롭게 일광욕을 하던 중 주인공이 떨어뜨린 폭탄이 배 위에 떨어진다...어떻게 살아난 거야?). 병맛 코미디 영화 답게 첫 등장부터 끝까지 정신이 나가 있으며, 그와 대적하는 주인공 및 미국 대통령 역시 단단히 정신 나가 있다. 주인공이 후세인과 일기토에서 밀리자 미국 대통령이 대신 출동해서 스타워즈다스 베이더오비완 케노비 간 결투를 재연하지 않나, 나중에는 애완견과 함께 냉동질소를 뒤집어쓰고 얼었다가 깨졌다가 다시 합쳐지면서 둘이 뒤섞이는 바람에 강아지 인간이 되지 않나...(이 모습을 보고 부하들도 얼이 빠진다).
  • BBCHBO의 합작 4부작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이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 사람 가정은 알고 보면 콩가루 집안이다. 유대계 이라크 배우 이갈 나오르가 후세인 역을 맡았다.
  • 우다이 후세인의 대역인 라티프 야히아를 다룬 영화인 《데블스 더블》에선 필립 쿼스트가 후세인 역을 맡았는데, 이갈 나오르 만큼의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크메르 루주와 후세인의 국경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폴 포트의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밀려 버리지만, 크메르 루쥬 대원을 뒤치기 해서 죽이고, 그 시체에 자신의 상의를 입히는 훼이크로 폴 포트를 낚아 사살해서 승리한다. 메리야스 입고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모습이 은근히 패기 넘친다(…).
  • 사우스 파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캐나다를 계속 정복하려 하다가, 결국 생화학 무기에 질식사 했다. 극장판에서는 최종보스로 나오며, 지옥에서 사탄과 함께 지옥을 정복한다고 나와 있는데, 사탄과 섹스만 하려는 사담 후세인이 지구를 혼자 정복하려 하다가, 사탄이 결국 사담 후세인을 죽여 버리고 지옥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도 다시 지옥으로 돌아와 있어서[30] 사탄이 하느님과 얘기한 후에, 사담 후세인은 천국으로 추방당한다.[31] 하지만 사담은 천국에서도 무기 공장을 만들면서 다시 캐나다를 정복할 기회를 노린다. 나중에 천국에서 탈출하고, 캐나다의 새로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이상한 법들을 적용하다가, 결국에는 사담 후세인이었단 것이 들통 나서 처형됐다. 이후로는 소식이 없지만, 다시 지옥으로 돌아간 걸로 추정된다.
  • SNL에서《사담과 오사마》라는 풍자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다. 여러모로 약빤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
  • 도학위룡에선 주성치가 뜬금포로 대문짝하게 후세인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작중 배경이 걸프전 때문에 무기 수요 폭증해서 이를 노린 삼합회의 무기 밀매를 추적하는 내용이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매우 뜬금포(...).

6. 여담[편집]

  • 실제로 신전을 짓기도 했다. 후세인은 고대 바빌론 왕국의 2대 국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궐 유적터 위에 자신의 여름 별장을 지었는데 이에 고고학자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분노했다. 이 건물을 간략하게 묘사하면 네부카드네자르를 칭송하는 고대 상형문자가 새겨진 2~3피트 높이의 옛 벽돌 유적 위에는 6000만개가 넘는 모래 벽돌이 새로 올려졌고, 그 벽돌에는 "이라크의 수호자, 사담 후세인이 바빌론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지구라트 모양으로 지어진 사담 후세인의 별장은 축구 경기장 5개를 합친 크기였는데, 이를 위해 마을 주민 1000여명이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4층 높이의 건물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궁궐과 똑같이 600개의 방이 있었으며,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넓이만 수만㎡에 달했다. 벽의 사면에는 고대 바빌론과 바빌론탑을 그린 벽화가 새겨졌고, 화장실에는 금으로 만든 변기가 놓였을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하지만 이 별장은 그가 지은 수십개의 궁궐 중 하나일 뿐이고 사담 후세인은 이곳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돈을 퍼붓고도 말이다. 이 건물은 말 그대로 그가 바빌론 왕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치적용 궁궐을 짓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이 건물 짓기 위해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 썼다.
  • 이라크 전쟁 당시 그의 현상금은 자그마치 한화로 25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돼서 아무도 250억을 받지 못했다.
  • 후세인 처형 직후 2007년 1월까지 전세계에서 그의 교수형을 모방하다 죽은 어린이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2007년 1월 9일 기준으로 사망자는 12명에 달했다.
  • 사자나 여러 동물들을 애완동물로 키웠다. 그리고, 후세인 몰락과 같이 이 동물들은 총살당하거나 동물원으로 끌려가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7. 둘러보기[편집]

[1] 아버지[2] 어머니[3] 본처[4] 애인[5] 이들은 본처인 사지다 탈파의 자녀들이고 이 외에 몇 명의 사생아들이 있다.[6] 1980년 당시 세계 평균보다 조금 잘살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04달러였는데 이라크는 3911달러로 4000달러에 육박하여 한국의 2.3배에 달했고, 부의 재분배도 어느정도 이루워져서 사우디 아라비아나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급까지는 아니었지만 국민들은 상당히 윤택한 삶을 살았으며, 이 당시의 이라크는 이대로 가면 오래치 않아 선진국으로 진입할것이라는 전망이 나올정도로 유망했던 국가였다. 괜히 전쟁자금으로 1000억 달러를 빌리고, 미국에게 개박살일 나기 전까지 서아시아/중동에서 군사강군이었던게 아니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개최할때인 1988년이 되어서야 1인당 국민소득 4000달러를 달성하게 된다.[7] 특히 걸프전의 경우 아예 쿠웨이트가 영국이 식민제국주의 시절에 분단시킨 이라크 땅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이라크에 강제합병하는 미친 짓까지 벌였다. 사실 이 주장도 맞지 않는 것이 이 양국은 같은 아랍/이슬람권이라는 점 빼면 역사적으로도 원래 단일 주권 국가로 지내 본 적조차 없는 다른 나라가 맞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 문서 참조.[8] 다만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우 이라크내 시아파들의 반란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개입을 사전에 억제, 예방하겠다는 명분 아래에 후세인이 전쟁을 일으킨 측면도 있었다.[9] 한때 국가 서열 4위였는데, 후세인, 쿠사이, 우다이 다음이었다.[10] 이 당시 이 미사일 세례를 퍼부었던 토우 험비와 아파치 모두 제101공수사단 소속이었다고 한다.[11] 미국이 침공할 당시 이라크 중앙은행 금고를 싹싹 긁어갔다고 한다. 흠좀무[12] 말이 좋아 음식 자르는 칼이지 전동식 나이프였단다. 그 정도면 반쯤 전기톱 수준이다.[13] 축구선수들에게 맨발로 몇 시간씩 콘크리트로 만든 축구공을 차라고 했단다. 흠좀무[14] 그나마도 죽이겠다고 펄펄 뛰는 걸 아내 사지다와 요르단 국왕이 뜯어말려서 참았다고 한다.[15] 특히 이라크 무기 개발 책임자가 된 후세인[16] 한국으로 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극악무도한 침략자로 취급받는 것과 달리 도요토미 이전의 오다 노부나가나 이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 같은 에도 막부 쇼군들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은 것과도 비슷하다. 사담 후세인 및 그 이후의 역대 이라크 대통령과 달리 근세의 경우라서 완전한 비교는 어렵긴 하지만...[17] 대략 캄보디아-베트남, 한국-일본, 멕시코-미국, 과테말라-벨리즈, 파나마-콜롬비아, 그리스-터키 등과 유사하다.[18] 걸프 전쟁 당시 쿠웨이트보다 더 많이 사망했다.[19] 사실상 이란 핵문제도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상대로 일으킨 이란-이라크 전쟁이 원흉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20] 물론 최근에는 두 나라가 외교 관계개선을 펼치면서 후세인 정권기때보다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사실 사우디의 입장에선 이라크를 배척했다가는 레반트 등 중동 북부 지역으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란을 견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란과 인접한 이라크와의 외교관계 개선에 무척 신경쓴다.[21] 헌데 웃긴 건 카타르도 수니파 국가이다.[22] 사실 사우디의 대카타르 외교 관계 개선은 친미 동맹국인 카타르와 사우디 두 나라를 화해시켜 이란을 견제하게 하려는 미국의 외교적 계산과 중재도 작용했다.[23] 단,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70년대 당시 알제리 등 여타 아랍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아사드와 대면한 적은 있었다.[24] 그래서 걸프전 이후 90년대에 하페즈 알 아사드빌 클린턴이 정상회담을 하고 국교 정상화를 하기도 했다. 물론 현재는 시리아 내전으로 도로 단교(...).[25] 사담 후세인의 성급한 처형과, 그의 처형 동영상 유출이 이를 부채질했다는 비판도 꽤 있다.[26] 당시 요르단의 후세인 1세 전 국왕은 걸프 전쟁 당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다 못해 아예 이라크령으로 강제 합병까지 하자 무력사용이 아닌 평화협상으로 중재해서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미국과 서방세계, 주변 아랍 국가들, 아예 국권을 이라크에게 피탈당하고 사우디로 망명한 쿠웨이트의 사바흐 왕가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27] 사실, 후세인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이라크 역시 군부의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서 정권이 뒤엎어지고 바뀌는 등 그다지 멀쩡한 나라는 아니었다.[28] 물론 현 이라크 정부도 최근에는 기독교도 등 소수 종교인과 집시들을 마냥 홀대하는 것도 아니어서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를 제건하고 소수 종교인들에 대해 보호, 경호까지 하고 있다.[29] 다만 무바라크가 시위로 쫓겨나갈 당시, 콥트 정교회 신자 다수가 되레 시위에 참여하며 지지했는데, 무바라크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이들도 차별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샤한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퇴위당하여 추방당할 때 되레 아르메니아인들이 호메이니를 지지하던 것과 같이, 소수파들도 이득에 따라 갈라지기야 하지만.[30] 이때 사담이 "내가 어디로 갔을 거 같았어, 디트로이트?"라고 말한다(…).[31] 《사우스 파크》의 천국은 몰몬교 교도인들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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