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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이라크 대통령
5대
6대
7대
사담 후세인
이름
사담 후세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
생몰년
출생지
이라크 왕국 티그리티
사망지
이라크 바그다드
신체
186cm
정당
이라크 바트당
종교
배우자
사지다 탈파
사미라 샤반다르
니달 알함다니
이냐시오 라모네[1] : 사담 후세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피델 카스트로 :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재앙이죠.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정계입문2.3. 부통령 후세인2.4. 대통령 후세인2.5. 이란-이라크 전쟁2.6. 극악한 독재자2.7. 걸프전2.8. 이라크 전쟁2.9. 최후2.10. 후세인 정권의 말로
3. 가족4. 기타5. 평가6. 미디어

1. 개요[편집]

이라크의 전직 독재자 겸 전쟁 범죄자로 부통령이었을때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이라크를 부강하게 만든 인물이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판단력을 잃어가며 서서히 파멸의 길로 달려든 인물이다.

이름이 하필 '후세인'이라서, 국내에서 이를 잘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後世人 =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또 널리 알려지니 '이름에 후세인이 들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아랍계'라는 말이 널리 퍼졌는데, 재미있게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풀 네임에 '후세인(Hussein)'이 들어간다.(…) 이걸 알았을때 충격먹은 사람들이 적잖이 있었던 모양.미국발 뉴스에 그 나라에서도 가끔 그걸로 구설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니까

후세인(حسین)이란 이름 자체는 ‘멋진, 아름다운’의 의미를 지니는데,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아랍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이라면 많이 사용하는 이름 중 하나로 후세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우마이야 가문이 시도하던 칼리프의 세습제 전환에 반대하며 저항하다가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죽임을 맞은 인물로, 키케로정몽주 비슷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고인을 능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기 들릴의 굿모닝 예루살렘을 보면, 자기 아이를 집에 태워준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극우 유대인이 당연히 이번 선거는 존 맥케인을 찍어야 한다고 설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떻게 감히 우리 위대한 유대인들에게 저 더러운 아랍인들과 공존할 것을 요구하면서 우릴 비판하는 거지?'라면서 버락 오바마에 대한 개드립 비난을 퍼부어대더니, '오바마의 진짜 이름이 후세인인 거 아슈? 그 새끼 아랍인들과 한패임. 절대 찍으면 안 됨!'하고 한참을 욕하며 가버리는 일화가 나온다.

2. 생애[편집]

2.1. 젊은 시절[편집]

나무파일:external/s18.postimg.org/saddam24_gallery_283x400.jpg
1947년의 후세인

이라크 티크리트의 수니파 무슬림 중에서 하층민 출신이었다. 어려서는 재혼한 어머니의 의붓아버지[2]와의 불화로 어려서부터 집을 나가, 사촌인 하이랄라 탈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젊어서부터 친척인 하이랄라 탈파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아랍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도인 미셸 아플라크가 창설한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즉 바트당(부흥당)[3]에 가입하여 초급 당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나무파일:external/s18.postimg.org/photo.jpg
1960년의 후세인

이때 당시 이라크의 수상이었던 압둘카림 카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아랍통일주의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에 성공한 이라크의 카심이 아랍통일을 등한시하고, 서구와 협력하여 이라크 내정 발전을 꾀했기 때문에, 후세인이 몸담고 있던 바트당은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바트당은 카심 암살을 기획하였으나, 사담 후세인이 포함된 암살팀이 작전의 허술함으로 실패, 사담 후세인과 동료들은 부상을 입은 채로 시리아로 탈출하여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아플라크의 눈에 들어 바트당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나세르 정권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에서 학교에 다니며 망명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곳 카이로의 카스르 알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공부에 열중했다.

2.2. 정계입문[편집]

그리고 1963년의 이라크 군부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되고, 압둘살람 아리프 정권이 들어서자 바트당과 후세인은 이라크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아리프 정권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내부 갈등 봉합 실패로, 바트당과 시아파 등 내부 세력과 대립국면에 들어갔으며, 이때 사담 후세인은 체포, 수감되었다. 후에 어렵지 않게 탈출하고 군부를 설득하여, 196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압둘 라흐만 아리프(전 대통령인 아리프의 형)에 대한 쿠데타를 결행, 바트당 정권이 집권하였다. 허나 이때만 해도, 사담 후세인은 그가 존경하던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아랍 특유의 피의 복수[4] 관습을 의식하여, 치안첩보를 전담하는 '일반 사무국'의 수장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5] 그때 사담 후세인이 '악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일하겠다'고 공언하여, 그가 일반 사무국, 즉 첩보치안기구의 수장이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호랑이에게 이빨과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이 또한 스탈린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혁명 자금책(=은행, 열차 강도)을 맡아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후일 후세인이 비상식적인 짓을 하면서도 대책 없는 낙관에 빠져 있었던 이유가 이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2.3. 부통령 후세인[편집]

나무파일:attachment/사담 후세인/Saddam_Hussein_and_Hassan_al-Bakr_1978.jpg

바크르와 후세인

이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을 비롯해, 군부의 수장이 된 하이랄라 탈파흐와는 친척 관계였던 사담 후세인은 첩보기구의 능력을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정적들의 약점을 잡아두기 시작했고, 내각 요인들 중에서 위협이 되거나 그리 판단되는 사람을 처형하거나 암살하는 작업을 통하여 바트당의 독재 권력을 강화시켜 나아갔다. 안으로는 바크르의 신임을 받으며,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두고 정권 수뇌부와의 연대를 더욱 키워 나아갔으며, 이리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부통령 자리에 오른다.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그의 업적이 하나 둘 이루어진다. 가장 큰 업적은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서,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서방국가의 반발을 각오하고 IPC의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이나 폴란드 등의 공산국가들, 프랑스 등의 일부 국가를 새로운 수출고객으로 준비해놓고, 서구의 위협에 대응하여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고 다방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문가들조차도 놀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유조합의 국유화는 후세인의 의도대로 성공하였으며, 기존의 고객과 새로운 고객이 더하여 수출처는 늘어났고, 파리만 날리던 이라크 국고는 70년대 고유가 정세를 타고 황금으로 가득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의 근대화를 개시하였다. 대표적인 정책은 문맹퇴치, 고속도로와 전기사업, 전화보급, 여성의 사회참여 강화, 의무교육 확대, 과학기술 발전, 사막화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는 거대 프로젝트,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우선보급을 통한 이라크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서방세계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고, 이라크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의무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아랍에서 문맹률이 최저인 국가가 되었고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바크르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부통령의 뛰어난 성과, 자신을 깍듯이 모시는 그의 예의바른 행동 등을 통해 후세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후세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측근들의 불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른 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라크의 분열된 바트당 통합과 국가통일에 대해 바르그 대통령이 시리아와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바크르는 대통령이라는 대표성으로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차후 통일국가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3인자로 끌어내리되,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제1인자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논의하였다. 그런데 알 아사드와 후세인 모두 실질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아사드 대통령은 이라크가 강대한 국력과 인구수로 시리아를 집어삼킬 것이라 생각했으며, 사담은 바크르와 아사드가 전면에 나선다면, 자신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버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이에 개입하여 결국 통일논의는 결렬되었다.

사담은 자신에 대한 바크르의 견제가 확실해지자 결국 바크르에게 퇴임을 강요했고,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마저 사담을 지지했다. 때문에 바크르는 표면적으로 건강과 가족들의 죽음 등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부통령 사담 후세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하며 정권을 내놓고 하야한다. 순순히 대통령 자리를 내준 바크르는 1982년까지 살다 68세를 일기로 조용히 죽었다.

2.4. 대통령 후세인[편집]

대통령이 된 사담 후세인은 전 정권에서 일했던 관료를 비롯해, 하급 공무원에까지 이르는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며, 이전부터 공고화되었던 국민감시체제를 한층 강화했다. 이렇게 숙청된 사람들 중에는 사담 후세인의 경제개발계획을 함께 이끌어왔던 유능한 관료들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혁명평의회의 주요 임원 가운데 반역자로 지목된 의원들의 머리를 동료 의원들이 직접 총으로 쏴죽이게 해서, 거대한 공범 의식을 만들어내어 아랍의 보복 정서를 봉쇄하는 치밀한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심복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이며, 후세인 집권을 도운 절친한 친구, 아드난 함다니를 이유도 없이 총살시켰는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의 논리는 이러했다. 가장 친한 친구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약점이 없다. 스탈린 코스프레[6]
그러나 누구도 이런 사람에게 진심으로 신뢰, 충성하기 힘들게 된다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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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알 카다피와 함께

그러나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정작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통령 시절의 치밀하고 심사숙고하며 예의바른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권위적이며 즉흥적이고 앞뒤 생각 없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후세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갑자기 맛이 간 것도 아니기에,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태인데, IPC국영화 시절에 보여주었던 그의 모습과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2.5. 이란-이라크 전쟁[편집]

이란-이라크 전쟁은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에 가해지던 시아파 혁명 선동과 그에 따르는 온건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의 반정부 항쟁 등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치안첩보의 강화를 통해 대처함과 동시에, 혁명 선동의 본거지인 이란에 대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 외교적 우위를 명백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행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분명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추진한 것이기는 했다. 당시 이라크는 약소국이었기에 이란이 일방적으로 특정 사안을 밀어붙이면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 강제로라도 이란의 국력을 끌어내릴 필요가 있었고, 그 방법은 전쟁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메이니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치명타를 입으면 국민들의 상태가 영 아니니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을 거라고 기대하였다. 즉 초반에 이란의 기를 꺾어서 불리한 상황을 대등한 상황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란군의 혼란 상황이나 어느 정도 준비된 이라크군의 상황을 감안하면 비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만들어진 국가의 통치자인 후세인의 오판이었다. 국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국가에서 통치를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상대도 그럴 거라고 착각을 심하게 한 것이다. 전쟁 전에는 이란군을 제대로 두들기면 국민 여론 때문에 알아서 협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란은 사실상 페르시안 민족 국가에 가까웠기에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했고, 호메이니는 초기의 열세에 기가 꺾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게다가 이란과 이라크는 기본적인 규모가 달랐다. 이라크군은 초기 전역에서만 성과를 보였을 뿐 얼마 가지 않아 이란군의 반격에 밀려나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흐르게 되었고, 결국 수니파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후세인과 당시 이슬람혁명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 되고 특히 전쟁 말기에 벌어졌던 도시간 탄도미사일 공방전에서의 열세로 인해[8]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바닥난 이란과의 이해타산이 맞으면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2.6. 극악한 독재자[편집]

1980년대의 후세인은 극도로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보였는데,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그가 말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고,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총으로 사살해버렸다. 그러자 국회는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겁에 질린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박수소리가 이어지자, 후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의 이복동생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그리티도 이즈음에 후세인 카멜 알 마지드에게 밀려서 숙청되었다. 원래 후세인의 어머니 수브하 툴하는 바르잔의 아들과 후세인의 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결집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세인은 어머니의 유언을 씹고 자신의 딸을 후세인 카멜과 결혼시킨 다음에, 바르잔의 권력을 빼앗고 이라크에서 추방한다. 바르잔은 후세인이 자신을 숙청할 것을 눈치 채고 다시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발악했는데, 그 중 하나가 1982년의 두자일 학살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서 그는 쫓겨났고, 2003년에 이라크가 붕괴되자 체포되어 두자일 학살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79년에 살해된 의원들만 60명이었고, 집권 이후 3천명 이상의 정치가들이 처형당했다. 이러니 천하의 개쌍놈.

훗날 이라크가 개발살나고 2003년부터 이라크 곳곳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묻혀있는 대량무덤들이 발견되고 발굴되었는데 시체가 너무도 많았다고 한다.

사담 후세인은 1991년 걸프전 후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봉기하자 이를 탄압하며 약 10만명의 시아파인들을 죽였다. 게다가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군대를 바그다드 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시아파 마을에 들어가게 해 시아파 성인 남자, 여자 및 아이들을 체포한 후 벌판에서 무차별 사격 살해 후 땅에 파묻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대량무덤들이 이라크 곳곳에서 300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한 대량무덤에서는 수천구의 시체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북한처럼 흔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대항하거나 잘못 보인 자들의 가족까지 죽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두자일 사건이다. 두자일 사건은 1982년 사담 후세인이 두자일이란 마을 옆을 지나가다 암살 미수가 발생하자 그 책임을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서 마을 전체를 통째로 파괴해 버리고 무려 148명을 학살했으며 400여명이 쫓겨난 일이다. 살해된 148명 중 46명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연대책임 쩌네

또한 1980년에는 이란을 공격하여 10년간의 전쟁에서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만들었고, 1988년에는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하다보니 분노한 쿠르드인이 일으킨 반란에 대해서도 독가스와 화학무기로 진압했는데, 무려 5,000명의 쿠르드인이 학살당했다. 게다가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점령하며 걸프전을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이때 미국에 찍혀 자기무덤을 파게 된다.

우상화도 하여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강요했으며 만약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로 간주해 처벌했다.[9] 특히 아라크 곳곳에 비밀경찰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반정부 인사들을 색출, 체포, 고문했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경고로 사람들의 귀를 베고 전기로 지지고, 거꾸로 매달아 뼈가 부러지도록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이라크 내에서 고문이 합법적이어서 이라크 경찰서에는 강간실까지 두고 사람들을 고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영동 공분실 이라크 버전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담 후세인 재임 기간 중 살해당한 사람은 적어도 50만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런 공포 정치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 많은 이라크 인들이 미군을 환영한 이유로 꼽힌다.

2.7. 걸프전[편집]

이라크는 막대한 전쟁비용에다 저유가로 인한 국고수입 저하까지 더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런 와중에 이란-이라크전이 종전되면서 더 이상 이라크를 지원할 동기가 없어진 쿠웨이트가 전쟁부채 상환을 촉구하자, 전후 남아도는게 군사력이었던 후세인은 또다시 즉흥적인 판단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걸프전이라는 후세인 입장에서는 사상 최악의 실책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방파제로서 국제사회에서 암암리에 용인 되었던 후세인의 지지기반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UN 차원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라크는 결국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 연합군에 그야말로 참패 당했고, 이후 UN결의안에 따른 광범위한 수출입금지 조치까지 당해 ‘가난한 돌의 왕국’이라는 멸칭(蔑稱)으로 불리며,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한다.[10]

하지만 미국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고, 정전 협정만 맺고 신속히 철수했기 때문에, 후세인은 간신히 권력을 지킬 수 있었으나, 반기를 든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학살하다가 비행금지구역 제재를 당하고, 그 보복으로 UN무기사찰단 등을 추방했다가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스스로 만들었고[11], 게다가 전직 미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등 대미관계든 국제관계든 내정이든 온갖 어그로를 끌면서 폭정에 실정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2.8. 이라크 전쟁[편집]

90년대 동안 후세인은 국제적으로 꾸준히 어그로를 끌던 와중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이후 2001년, 어떤 미친놈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들이받는 미친짓을 하면서 보복대상을 찾고 있던 미국에게, 후세인은 "신의 천벌을 받았구나 ㅋㅋㅋ"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후세인 본인도 아차 싶었던지, "우리 이라크도 테러로 고생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물밑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미 어그로는 끌 대로 끌어댄 상황. 어차피 9.11 테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해 골치 아픈 후세인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2003년 벌인 2차전에서도 수도인 바그다드가 불과 1달 만에 함락 당하면서 도피행각에 오르게 된다.[12]

이후 후세인은 지하 저항세력으로 전환하여 도피행각을 이어갔지만, 실권을 잃은 상태에서 더 이상 권력을 회복할 가망은 없었고, 두 아들까지 폭사하는 등 계속 궁지에 몰리고 최후의 순간에는 어느 민가의 지하 땅굴에 숨어 있다가, 레드 던 작전(Operation Red Dawn) 때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13] 기소되었다.

2.9. 최후[편집]

나무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ddamSpiderHole.jpg

위의 사진은 이라크계 미국인인 미 육군 통역병 사미르에게 잡혀서 끌려나오는 장면이다.[14] 이 작전을 지휘했던 미 육군 제4보병사단장 레이먼드 오디에어노 장군은 이후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 미 육군참모총장까지 영전하였다. 이 당시 지하 비밀장소에서 후세인은 난로 및 가스 오븐 전문 업체인 한국 《파세코》 제품인 한국산 난로로 서늘한 지하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파세코 대표이사의 《월간 신동아》에 인터뷰에 따르면, 이 소식을 듣고 농담조로 이를 활용해 자사 홍보를 할까 우스갯소리를 했다가, 후세인이 별로 듣기 좋은 소리 못 들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간부들이 진지하게 말한 바 있었다 한다.

사담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담의 두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는 미 육군 공수부대원들의 공격으로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 전사했으며, 미군은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시신을 다 짜 맞추고 봉합수술까지 해야 했다. 이후 봉합된 시신은 티크리트로 보내져 장례를 치렀다.

재판 과정에서 후세인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자신을 굉장히 잘 변호했다. 그의 말만 들으면, 서방(西方)과 특히 미국, 영국은 천하의 개자식이자, 아랍의 독립을 두고 못 보는 제국주의자였다.[15]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이러한 자들의 방해공작에 맞서 이라크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희생된 불우한 처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죽인 사람들의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거나, "그들은 반역자이고 이란인들"[16]이라고 주장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나는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억울한 피해자를 피하라고 항상 강조하였다."라고 하거나, "당신들 중 누가 도둑이자 반역자들인 이란인들에게 물어보았는가?"라며 책임소재에서 벗어나려 들거나, 증언 자체가 허위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그의 학살명령으로 온 식구를 잃은 쿠르드인 노인이 법정에 나와 진술한 적이 있는데, 그가 울면서 후세인에게 대놓고 분노할 때, 후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꼬박꼬박 논리적으로 반론을 하여, 그 노인은 기가 막혀서 이후 인터뷰에서 말하길, "뻔뻔하면서도 논리적인 말발이 쎈 놈이다."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물론 후세인이 처형당했을 때 굉장히 기뻐했지만.

1년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받았는데, 주된 공판 내용은 두자일 학살을 비롯하여 이라크인에게 저지른 학살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시아파 정부는 그의 모든 혐의를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이슬람의 율법이 문제였다. 70세 이상인 범죄자에게는 사형집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인의 나이가 70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사형을 시키려면, 단기간 내에 사형이 가능한 혐의를 유죄로 입증해야 했으므로, 일단 두자일 학살 등 몇 가지로 국한시켜 기소했고,[17]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감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의 나약한 독재자들의 최후와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사형을 당할 때도 용수[18]를 거부[19]를 하는 등, 비교적 의젓한 자세로 최후를 맞았다.

후세인은 세속주의자이면서도, 정작 재판정에는 코란을 들고 나와서 신앙인임을 강조하면서, 판사와의 싸움이 격해지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몰고 나아갔고[20] 때문에 사담을 재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자기가 항상 잘했거나, 아니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지 멋대로 굴었다는 식이었고, 또 이러한 논리가 완전 허위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피고를 굴복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정도였다.

이에 분노한 이라크 민중들이 이에 사담 측 변호인들을 사살하거나 할 정도였는데, 결국 사담 후세인이 변호인단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단 한 명뿐인 이라크 대통령이며, 지금의 대통령은 가짜이고 이라크 정책의 모든 책임자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재판부는 후세인 유죄 입증의 가닥을 잡았고,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검사 측의 사형 구형이 낭독되는 때에는 이복동생인 바르잔과 함께 썩소를 지으며 같잖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댔고,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에도 사담 후세인은 종교적 구호를 외치고, 재판정과 부시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큰소리를 치며,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포섭하여 이후 후세인 지지세력의 저항을 예방하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를 보내서 후세인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후세인은 럼즈펠드를 비웃으며, "죽은 국민들 목숨을 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라고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럼즈펠드에게 "대량살상무기는 찾았냐?"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사실 대량살상무기는 후세인이라 카더라 1급 광역 발암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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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하는 후세인

이후 항소했지만 기각되고, 눈엣가시 같았던 후세인에게 이라크 정부는 항소를 기각한 다음 고작 3일만인 2006년 12월 30일에 사형을 집행해 버렸다. 31일에 집행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세인은 죽기 전 이란을 믿지 말라는 것과 종파적인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듯 무리하며 급히 사형 집행을 한 이유는 뭘까? 보통 미국이 사주했다고 알려져 있거나, 그렇게 믿으라고 선동하는 족속들이 여전히 있긴 해도,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연히 후세인을 급하게 처형하면, 이라크 반군들에 의해 후세인이 성자(聖者)로 추앙받게 될 게 분명하다는 걸 미국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라크 내부에서조차 그나마 이성적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후세인을 처형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미국은 빠른 사형 집행을 반대했고, 오히려 후세인이 교도소에서 일생을 마치기를 원했다. 이라크의 당시 정치고문인 무와파크 알 루와이에도 후세인을 처형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이라크인들의 의지이며, 미국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천명(闡明)했다.

차우셰스쿠와는 달리, 후세인의 경우는 죽는 그 시점까지도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이 명백히 나눠져 있는 데다, 그의 업적과 과오 모두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후세인을 죽여 봐야 득은 적고, 오히려 작금의 현실과 같이 손해만 많을 뿐이다.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전략은, 과도정부에 후세인의 신병을 인도해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며, 후세인을 적당히 무기징역이나 미결수로 남겨놓아, 그의 초라한 몰락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과오와 악행을 보다 자세히, 널리 선전하여 민중들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세인이 죽은 뒤에 감성적인 윤색이나 선동이 끼어들 여지를 최소화시킨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평가를 하면 가장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정부에 신병을 넘기고 얼마 안돼서, 그런 점들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인지, 감정적으로만 행동한 것인지, 후세인 반대파들이 성급하게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해 버린 것. 쉽게 말해 전후처리 전략이 완전히 빗나가 버린 대표적 사례 중 하나.

사형 집행을 그렇게 빨리 한 진짜 이유는,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후세인이 밀어주던 수니파철천지 원쑤 시아파.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초강경파들이었기 때문이다.[21] 이 사람들은 안 그래도 폭정에 엄청나게 시달렸었기에 후세인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데다, 전술(前述)했듯이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해서 빨리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 법 때문에 못 죽이기 때문에 저질러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일이 12월 30일이었고, 이틀 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31일에 집행하는 건 시아파 입장에서 봐도 지나치게 가혹한 데다 꼼수 쓰는 게 눈에 보이니, 확실히 그 당시에 후세인을 죽일 수 있던 시간은 30일. 그것도 30일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사형을 시키지 않고 쿠르드족 학살 같은 다른 재판으로 넘어가면, 후세인에게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은 무기징역까지였고, 게다가 후세인이 사형을 받지 않게 되어 버리면, 수괴(首魁)가 사형이 아닌데, 그 수하들이었던 그의 측근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니, 측근들도 죽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형할 놈들 다 처형하고 싶으면 후세인부터 일단 처형해야 했다. 아니면 그들을 모두 다 살려줘야 했으니까. 시아파는 전자(前者)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시아파 정부가 감정만 앞세워서 망쳐버린 일이 한두개가 아니며 이라크 군대와 정보부의 해산도 시아파 망명자들의 바람잡이로 이뤄졌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라크인들이 치르고 있다.

심지어 후세인의 처형 동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다만 이를 시아파 정부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조금 곤란하다. 사실 후세인의 사형 집행 과정은 그들의 법률을 준수했다. 실상은 사형 집행인들이 멋대로 한 것으로, 원래 집행리(執行吏)들이 후세인을 데리고 나와 교수대에 세우고 유언도 물어보고 용수를 씌우는 것까지는 공개되었다. 하지만 곧 용수를 도로 벗기고[22] 처형한 후, 사망한 후세인 얼굴까지 나오는 충격적인 동영상이 나돌았고, 이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수사결과 당시 처형 감독관의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고, 관련자들은 무더기로 처벌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서 후세인의 처형 목적을 정의라기보다는 복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물론 '정의의 복수'란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는 후세인의 죽음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선전하고 또 활용하려는 세력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시아파가 다수인 도시에선 주민들이 축포를 쏘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차분하게, 그리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후세인의 고향인 티그리트에서 후세인은 순교자가 되었다고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8년 후, ISIL에 가담함으로써 시아파 정부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물론 그 IS가 시아파 정부보다 더 미쳤다는 건 그땐 몰랐지만.

이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막 취임한 후였는데, 이 일을 크게 비판했다.

그리고 사형당하기 전 후세인이 마지막으로 한 경고대로, 이라크는 각종 반군 단체 및 과격파 종교 단체들의 무장 봉기 및 테러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최악의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후세인은 평소 체제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빠지는 상황을 극히 경계했는데 결국 권력의 구심점이었던 후세인이 제거되면서 이라크 전체가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 셈이 되었다.
다만 이는 후세인 자신도 하등의 도움을 준 바가 없었던 부분으로 후세인은 바로 그 세속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세속적으로 수니파를 우대하고 세속적으로 출신부족을 우대하면서 종교갈등에 더해 부족갈등을 오히려 더 부추긴 장본인이다. 즉 후세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 자신의 권좌유지를 부족과 종파에 우선시한다는 의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지 부족과 종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세속주의가 아니었다는 것. 애초에 후세인이 종파와 부족화합에 힘쓰는 지도자 였다면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침략주의에 의해 자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14년 6월, 사담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반군 수니파에게 잡혀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라오프 압둘 라흐만 판사는 6월 12일, ISIL의 위협이 닥쳐오자, 수도 바그바드에 위치한 거주 지역에서 변장한 채 탈출하다 붙잡혔으며, 이틀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특히 그의 처형 사유는,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다.#

2.10. 후세인 정권의 말로[편집]

후세인의 동생 바르잔 이브라힘은 2007년에 사형 당했는데 목이 잘려서 참혹하게 죽었다.

독가스로 사람을 하도 죽여대고, 할리브자에서만 5천명 이상을 죽인 후세인의 사촌,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 마지드는 2010년 1월에 처형당했다. 원래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진 직후, 영국군은 자신들이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죽였으며 시체도 확인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서 체포되어 2010년 사형에 처해졌다.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은 2005년에 체포되어, 처음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에서 사형으로 뒤집혀서 처형당했다.

외무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냈고, 후세인 정권의 유일한 기독교도였으며, 후세인이 가족이라고 불렀던 타리크 아지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에 체포되었는데, 워낙에 순순히 붙잡혀서 후세인을 배신하여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고, 지금은 201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6월 5일 옥사했다. 사형이 확정되는 대로 바로 바로 처형을 하던 이라크 정부였기에, 뭔가 사정이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

후세인의 경호실장이자 비서실장을 지냈고, 쿠사이 후세인과 함께 공안기구의 담당자였던[23]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에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당했다.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전 혁명평의회 부의장은 현재 잔존하는 후세인 충성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며, 후세인의 측근들이 줄줄이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잡히지 않다가, 2014년, 이라크 내전에서 양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그의 세력은 다에쉬랑 손을 잡고 이라크군을 조지고 있다. 다만 2015년 4월 경 티크리트 공방전에서의 사망설이 돌았으나, 2016년 4월에 비디오에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비디오에서 이자트 이브라힘은 수니파 국민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가 제안하여 구성된 '테러 대항을 위한 이슬람 군사동맹'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여, IS와 사실상 결별하였음을 시사하였다. 2016년 10월 모술 대공세에서 후세인 충성파가 이라크 정부군과 협력하여(...) 다에시와 교전하였다.

후세인의 아들 둘은 죽었지만, 그보다 수가 훨씬 많은 딸들도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다에시 지지를 천명한 상황이다. 특히 집안의 장녀인 라기드 후세인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다에시에게,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퍼다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라크 지역에서의 다에쉬 세력 확장은 사실상 이들의 공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 미국이 후세인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들 꼴리는 대로 마구 저지른 대가를, 이라크 정부는 지금 몇 곱절로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에게 독설을 여러 차례 날려 유명해진 공보장관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함락된 뒤 잠적했다가 미군에게 체포됐다. 자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포로로 잡히고 얼마 뒤 석방되어 현재 자기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3. 가족[편집]

가족으로는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 그리고 알리 후세인이 있으며, 나머지는 죄다 딸들이다. 그리고 손자로 무스타파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다이와 쿠사이는 사담이 잡히기 전에 미군과 교전 중 포격을 맞아 죽었고, 무스타파는 항복을 거부하고 교전을 계속하다가 미군에게 사살되었다. 이때 우다이는 향년 40세, 쿠사이는 향년 38세, 무스타파는 향년 15세였다.

오사마 빈 라덴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장신으로 유명하다. 오사마 빈 라덴의 신장이 194cm에서 198cm 쯤이고, 팔레스타인 출신의 어머니도 2m가 넘는 걸로 유명한데, 사담 후세인도 188cm이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큰 걸로 유명하다. 문제는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사실이 문제다.
  • 사담 후세인 : 이라크 전직 대통령(1937~2006). 어렸을 때 양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산 기억 때문에 아들에게 손찌검은 커녕 거의 방치 수준으로 놓아 기를 정도로 아들을 사랑하며(물론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딸들 결혼도 손수 챙겨주는 등 자상한 남자. 그러나 한편으론 이미 유부녀(!)였던 여자를 꼬셔 둘째 마누라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 뒷통수를 쳤다고 두 사위를 살해하는데 사주를 하고, 뇌내망상으로 쿠웨이트를 점령했다가 나라를 통째로 말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걸프전 당시 뒷통수를 쳤다고 쿠르드족 씨를 말려버리는 등 막장 독재자(...) 결국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권좌에서 축출당했고 2007년 약 10여개의 인륜범죄 유죄 판결을 받고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 사지다 탈파 : 사담 후세인의 첫번째 아내. 1963년 사담 후세인과 맞선으로 결혼했다. 힘 있는 바트당 수뇌부 가문 출신이라 사담이 권좌에 오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아줌마도 만만치 않아서 우다이가 카멜 한나를 증오하다 못해 살해하게 된 것도 사지다가 옆에서 계속 원수를 갚아달라고 충동질한 탓. 그 외에 자기 정적들을 고문하라고 지시하는 등 이쪽도 심히 무시무시한 아줌마. 2003년 이후 행적을 감추었다. 현재 이라크 반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다(미국이 침공할 당시 이라크 중앙은행 금고를 싹싹 긁어갔다고 한다. 흠좀무).
  • 우다이 후세인 : 사담 후세인의 장남. 진성 돌아이. 임해군의 아랍인 버젼.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천장에 총질하는 건 기본. 아버지의 둘째 아내를 소개시켜줬다며 파티장(그것도 이집트 대통령 영부인까지 참석한 파티서)에서 자기 아버지 최측근 카멜 한나를 지팡이로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팬 다음 죽어가는 카멜 한나를 전동식 음식 자르는 칼로 숨통을 끊어버렸으며(말이 좋아 음식 자르는 칼이지 전동식 나이프였단다. 그 정도면 반쯤 전기톱 수준이다) 이라크 올림픽 위원회장 시절에는 경기에서 진 선수들 고문하는 게 취미였다고(축구선수들에게 맨발로 몇 시간씩 콘크리트 축구공을 차라고 했단다. 흠좀무). 거기다가 자기 집 지하에 감옥을 만들곤 정치범들을 수시로 고문하였으며 반송장이 된 수감자를 바로 옆의 개인 동물원 표범들에게 던져주며 즐거워한 진성 사이코패스.
    어찌나 견공자제분짓을 해댔는지 참다 못한 아버지 사담이 카멜 한나 사건 때는 개인 감옥에 4년 처박은 후(그나마도 죽이겠다고 펄펄 뛰는 걸 아내 사지다와 요르단 국왕이 뜯어말려서 참았다고 한다) 스위스 대사관 직원으로 쫓아버렸다. 물론 우다이는 얼마 후 어느 레스토랑 직원을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한 죄로 재송환당했다(...) 결국은 1996년 총알을 한 다발 얻어맞고는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동생 쿠사이와 함께 도피생활 도중 발각, 치열한 교전 중 미군이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사망. 끝도 지저분해서 죽은 후 미군은 죽은 우다이와 동생 쿠사이 후세인의 시체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전세계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흠좀무.
  • 쿠사이 후세인 : 사담 후세인의 차남. 그나마 이 콩가루 집안에선 가장 제정신인 사람. 여자를 매일 갈아치운 데다 부인과도 이혼한 우다이와는 달리 결혼생활도 나름 평온했고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잔학성 자체는 만만치 않아서 1991년 걸프전 직후 벌어진 시아파 반란 분쇄와 남부 습지대 파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언젠가는 감옥이 꽉 들어찼다고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빈 공간 만들려고 쓸어버리는 짓을 감행한 적도 있다. 역시 2003년 우다이와 함께 도피 중 폭사. 당시 14살(!)이었던 아들 무스타파도 아버지와 같이 미군을 향해 AK를 난사하다가 그때 같이 죽었다.
  • 후세인 카멜 & 사담 카멜 형제 : 사담 후세인의 사위들이자 먼 친척. 각자 사담의 삼녀 라그하드 후세인, 그리고 사녀 라나 후세인과 1986년 결혼했다. 우다이를 바보라며 멸시하고 우다이도 벼락출세한 이 둘(특히 이라크 무기 개발 책임자가 된 후세인)을 "골든 보이" 라고 부르며 이죽대긴 했어도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지만 88년 카멜 한나 사건 당시 후세인이 카멜 한나 사건과 그 이전에 우다이가 벌인 기행을 죄다 일러바치면서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다.
    그 후에는 우다이가 사사건건 후세인에게 총을 들이대는 등 목숨이 위험해지자 1996년 전격적으로 아내들을 데리고 요르단으로 망명했다. 미국에게 이라크 무기개발 정보를 넘겨주고 CIA의 도움을 받아 사담 대신 권좌를 차지하려는 속셈. 그러나 그 후 사태가 꼬이면서(정확히 말하자면 사담이 무기개발 혐의를 죄다 카멜 형제에게 넘기면서 제대로 역관광을 태워버렸다) 오갈 데가 없어지자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는 사담의 꼬임에 넘어가 다시 이라크로 돌아왔다. 그 직후 강제로 이혼당했으며 얼마 후 같은 집안 사람들이 "배신자를 처단하러 왔다" 며 총을 난사하며 그들의 집에 쳐들어와(...) 둘을 살해했다.(그런데 이거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내용인데? '무솔리니' 내용 참조) 사담 본인은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 죽일 수 없으니 '같은 집안 사람이 너희 명예에 똥칠을 했으니 너희가 처리해라' 며 둘의 가문인 알-마지드 가문을 협박한 것.
  • 라가드 후세인 : 사담 후세인의 장녀 2007년 수니파 무장세력에게 재정지원 혐의로 이라크 내무장관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며 현재 인터폴의 적색 리스트에 올라 있으며 현재까지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라가드 후세인은 2015년 1월에는 요르단의 한 보석 팸플릿에 반지, 팔찌, 귀걸이, 펜던트 등을 소개하면서 이를 판매한 돈으로 IS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가격은 펜던트는 1,000파운드(164만원) 정도이고 청록색 10피스 팔찌는 1,320파운드(217만원)라고... 그녀는 현재도 구찌 등 명품을 사는데 수백만달러를 사용하는 등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한 측근은 “신발을 살 때에는 아예 자루를 들고 간다” “핸드백과 부츠를 사면서 달러를 물 쓰듯이 뿌린다”라고 증언했드. 또 성형수술을 위해 요르단의 최고 성형외과의사가 항상 대기를 한다고 하며 아버지 사담 후세인이 생포된 후 당시미국 법무장관인 존 애슈크로프트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가 살던 왕궁에서 나온 현금과 보석은 나에게 달라”고 요구해 병신 인증을 했다.

4. 기타[편집]

실제로 신전을 짓기도 했다. 후세인은 고대 바빌론 왕국의 2대 국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궐 유적터 위에 자신의 여름 별장을 지었는데 이에 고고학자들은 매우 기뻐했다. ?!

이 건물을 간략하게 묘사하면 네부카드네자르를 칭송하는 고대 상형문자가 새겨진 2~3피트 높이의 옛 벽돌 유적 위에는 6000만개가 넘는 모래 벽돌이 새로 올려졌고, 그 벽돌에는 "이라크의 수호자, 사담 후세인이 바빌론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지구라트 모양으로 지어진 사담 후세인의 별장은 축구 경기장 5개를 합친 크기였는데, 이를 위해 마을 주민 1000여명이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4층 높이의 건물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궁궐과 똑같이 600개의 방이 있었으며,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넓이만 수만㎡에 달했다. 벽의 사면에는 고대 바빌론과 바빌론탑을 그린 벽화가 새겨졌고, 화장실에는 금으로 만든 변기가 놓여졌을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하지만 이 별장은 그가 지은 수십개의 궁궐 중 하나일 뿐이고 사담 후세인은 이곳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돈을 퍼붓고도 말이다. 이 건물은 말 그대로 그가 바빌론 왕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치적용 궁궐을 짓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이 건물 짓기 위해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 썼다.

이라크 전쟁 당시 그의 현상금은 자그마치 한화로 25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서 아무도 250억을 받지 못했다.

5. 평가[편집]

중동권 국가들이라도 지역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진다.

독립 직후부터 이라크의 끊임없는 영유권 주장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이라크에게 침략, 강제합병까지 당한 쿠웨이트는 사담 후세인을 당연히 매우 증오한다.

종파적으로도 다르고 이라크와의 8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된 이란의 입장에서 후세인은 그야말로 악마, 사탄. 애초에 전쟁 자체가 이라크의 기습으로 시작된 데다가, 사망자가 너무 많아 지금도 이란-이라크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시아파 교단 입장에서는, 시아파 이슬람 혁명 수출을 좌절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싫어할 수밖에 없다. 다만 후세인이 죽은 뒤, 다에시라는 희대의 또라이 집단이 날뛰는 걸 보면서, 심경이 많이 복잡해진 상황.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의 왕정 국가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에 대항하는 대리전을 후세인 당시 이라크에게 사주하고 치르게 한 장본인들이지만, 그 결과로 이라크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채무 상환을 독촉하며 전쟁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은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이라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자신들을 배신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여기는 수준. 당연히 이라크 측은 이뭐병 취급. 이라크가 전통적 앙숙관계인 이란과 쿠웨이트 못지 않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24] 심지어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지 수년 뒤인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리비아 등 이슬람 수니파 계열의 아랍 산유국들과 이집트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던 카타르에 대해 단교 보복 조치를 가하자 사우디와 기타 아랍 산유국, 이집트 주도의 카타르 단교 보복에 동참하지 않으며 카타르와의 정식 수교 관계를 유지하여 사우디등 아랍 주요국들의 단교, 무역 보복을 맞고 힘들어하던 카타르를 편 들어주기도 했었다.

시리아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사담 후세인을 반대한다. 바트당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점도 있고, 물밑으로는 첩보전을 비롯해 대립관계가 심각했기 때문. 그래서 이란-이라크전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중간 상인 역할을 수행했고,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 서방 주도의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라크가 무너진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난민을 수용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첩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리아 국민들은 반미정서가 매우 강한 편이어서, 사담 후세인을 어느 정도 동정하는 정서[25]가 있으며, 사담 후세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그를 사칭하는 저항방송(…)을 송신했을 정도였다.

이집트모로코에서도 반(反) 후세인 정서가 크다. 이들도 역시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으로 참전했다.

심지어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 국가들에서도 독재자, 전쟁 범죄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다만 후세인이 죽은 뒤 이라크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그의 통치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스리랑카에는 사담 후세인 마을이 있다. 지역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이 마을은 1978년 홍수피해를 입었을 때 이라크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사담 후세인이 통크게 재건을 해줘서 사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극소수인 무슬림들은 대다수인 불교도나 2번째로 수가 많은 힌두교도 타밀족과도 사이가 나뻐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못한 터에 이런 은혜를 입었기에 당연히 이 마을 주민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크게 비난하였다. 이전 항목에선 충격적이라고 했으나 이들은 은혜를 입었기에 특별할 건 없다. 후세인 이상으로 악랄하던 폴 포트조차도 아직도 신성시하던 소수 민족들이 있듯이 지원을 받고 큰 도움이 되어 존경하던 이들도 있듯이.

비록 한국이나 이외 다른 나라에선 후세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서 서방이나 아랍권보다는 악감정은 덜하지만, 이쪽에서도 엄연히 멀쩡한 나라를 전쟁, 가난으로 말아먹은 독재자인 이상 평판은 영 좋지 않다.[26] 특히 한국에선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후 전국적 반미 분위기로 인해, 후세인을 옹호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을 초월하는 최악의 독재꼴통집단 북한과 휴전, 대립하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객관적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후세인을 적극 옹호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고 정신병자 취급 받기 십상이다. 국내 언론도 이랬지만 조선일보같은 경우에는 월간조선을 통해 대대적으로 후세인 과오만을 보도하며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데 노골적이었기에 한겨레로부터 후세인이야 당연히 악랄하지만 그런 후세인을 이득에 따라서라고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던 건 쏙 빼먹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우습게도 미국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편을 들어줬고,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손수 이라크로 가서 후세인과 반갑게 악수하면서 우애를 과시하던 적도 있다. 물론,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사진이나 영상은 이라크 전쟁 당시 럼즈펠드를 비난하는 측에서 쓰면서 실컷 럼즈펠드를 놀렸다.

하지만, 후세인이 죽고, 이라크에 남은 기독교 같은 소수 종교인들이나 집시들은 지금은 애절하게 후세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이 따르기만 하면,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경제적 기초나 치안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인이 죽은 뒤, 미국은 여러 계산과 입장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고, 이라크 과도정부는 이들에게 일절 무관심이라서, 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온갖 집단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는 등 여러 끔찍한 일들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자들이 일관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알 아사드도 기독교도와 알라위파를 비롯한 소수 종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바라크, 사다트 등의 이집트의 독재자들도 콥트 교도들을 보호했다. 아랍은 아니지만, 이란의 팔라비 국왕도 조로아스터 교도, 유대인, 아르메니아 인들을 우대했고, 이후 호메이니 시대까지 그게 이어진다.[27]

그리고 후세인 사형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히 기술(記述)하자면, 후세인은 사형 선고 후, 겨우 4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앞뒤 다 자르고 말하자면,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시아파였기 때문(…). 일단 이 사람들은 후세인 죽이고 싶어서 벼르는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이목과 상관없이 2일 뒤에는 사형 못 시키니까 순식간에 처리해 버렸다는 게 이유라고 한다. 참고로 사형 집행일은 12월 30일이었고, 그 이틀 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 하루 더 시간이 있었지만, 31일에 처형하는 것은 시아파들이 봐도 지나치게 가혹하니[28] 그 전날로 결정한 셈. 하루건 이틀이건 충분히 가혹하다.

한마디로 후세인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도망 다녔거나 최소한 재판 절차를 잘 이용했으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 본인이 이를 포기하고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잃은 후세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약화시키고 수니파를 결집시키려 했다는 추론도 있다. 권력도 잃고, 대를 이을 아들도 다 죽고, 측근들도 사형장 직행이 예정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작자들은 다 배신자들이고, 남은 가족들의 삶을 그나마 지키자면 누군가의 후원이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한때 권력을 잡았던 폭군답게 당당하게 죽어서 영웅으로 남자고 스스로 죽음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살아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가 한 악행에 비해 이라크 정부가 관용을 베푼 게 되어, 그만큼 후세인에 대한 동정론도 옅어지지만, 덜컥 죽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악행이 대부분 잊히고, 오직 시아파 보복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후세인을 빠르게 사형시킨 게 미국의 사주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오히려 미국은 후세인을 죽여 버리면 그가 '성자'가 될 거라면서 반대했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렇게 죽고 나서 영웅으로 남는 걸 수없이 봐온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태도. 그리고 후세인을 죽이고 나서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후세인은 영웅이 되었고, 수니파들은 그의 기치를 내세워 이후 시아파를 상대로 한 내전에 돌입했다. 다만 이익은 수니파도, 시아파도 아닌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이끄는 어떤 천하의 개쌍놈 사이비 종교 군벌 테러리스트 집단의 몫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라크는 후세인이 예측한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다에쉬도 최근 이라크 정부군의 반격으로 많이 세력이 약화되고 있는데다가 과거보다 나라 상태가 호전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어 일단은 지켜봐야할 부분이다.

6. 미디어[편집]

걸프전 이후, 10여 년간 미디어에서 '아랍의 독재자' 이미지로서 수도 없이 후세인을 자신,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죽은 뒤에는 관심이 줄어든 편이다.
  • BBCHBO의 합작 4부작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이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 사람 가정은 알고 보면 콩가루 집안이다. 유대계 이라크 배우 이갈 나오르가 후세인 역을 맡았다.
  • 우다이 후세인의 대역인 라티프 야히아를 다룬 영화인 《데블스 더블》에선 필립 쿼스트가 후세인 역을 맡았는데, 이갈 나오르만큼의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 2011년 10월 6일 AVGN의 "다크캐슬" 에피소드에서는 고인드립은 당했다. 액션52에도 땅딸막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크메르 루쥬와 후세인의 국경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폴 포트의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밀려 버리지만, 크메르 루쥬 대원을 뒤치기 해서 죽이고, 그 시체에 자신의 상의를 입히는 훼이크로 폴 포트를 낚아 사살해서 승리한다. 메리야스 입고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모습이 은근히 패기 넘친다(…). 여기 1. 여기 2.
  • 사우스 파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캐나다를 계속 정복하려 하다가, 결국 생화학 무기에 질식사 했다. 극장판에서는 지옥에서 사탄과 함께 지옥을 정복한다고 나와 있는데, 사탄과 섹스만 하려는 사담 후세인이 지구를 혼자 정복하려 하다가, 사탄이 결국 사담 후세인을 죽여 버리고 지옥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도 다시 지옥으로 돌아와 있어서[29] 사탄이 하느님과 얘기한 후에, 사담 후세인은 천국으로 추방당한다.[30] 하지만 사담은 천국에서도 무기 공장을 만들면서 다시 캐나다를 정복할 기회를 노린다. 나중에 천국에서 탈출하고, 캐나다의 새로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이상한 법들을 적용하다가, 결국에는 사담 후세인이었단 것이 들통 나서 처형됐다. 이후로는 소식이 없지만, 다시 지옥으로 돌아간 걸로 추정된다.
  • SNL에서 《사담과 오사마》라는 풍자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다. 여러모로 약빤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
  • 사자나 여러 동물들을 애완동물로 키웠다. 그리고, 후세인 몰락과 같이 이 동물들은 총살당하거나 동물원으로 끌려가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1] Ignacio Ramonet. 스페인 출신 언론인. 1991년부터 2008년까지 프랑스의 유명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장을 맡았다. 위키피디아 링크[2] 거짓말쟁이 하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유는 이 사람이 무슬림으로서 성지 메카를 순례해야만 받을 수 있던 명예로운 칭호인 '하지'라는 칭호를, 순례도 안하고 자처하고 다녔기 때문.[3] 아랍어로는 حزب البعث(Ḥizb Al-Ba‘ath)라 하는데 아랍어 발음은 '바트'보다는 '바스'에 가깝다.[4] 부족사회인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부족의 구성원이 살해당하면 그 살해범에게 반드시 보복을 해야만 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다는 관습이 굳건했다. 이런 보복을 면하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든지, 사죄와 보상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5] 카심, 아리프 정권은 정보기구를 이용하여 반정부 세력을 잡아들이거나 죽였고, 당연히 그 수장은 피의 복수 규율에 의해 나날이 생명 위협에 시달리는 처지였다. 또한 국민감정도 그런 기구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아랍인으로서의 사회 규율이나, 개인적인 보신 차원에서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맡는 순간 수천 수만 명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었다.[6] 사실 그 스탈린조차 자기 절친을 이유없이 죽인 적은 없다. 스탈린의 절친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라면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니콜라이 부하린 정도일텐데, 일단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대놓고 대들어도 무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고 당연히 숙청당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스탈린보다 더 오래 살았다. 부하린의 경우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 것은 맞지만 당시 서로가 중화학공업에 대해 이견을 보이면서 동지가 아닌 정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는 점, 그 대원수가 부하린의 회고록 원고와 처형 직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는 죽을때까지 집무실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통해 최소한 사담 후세인처럼 단순히 과시를 위해 혹은 일순간의 변덕 때문에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7] 그런데 독재자가 권력을 얻은 뒤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충신들을 숙청하는 일은 역사에서도 매우 빈번하다. 필요가 없어진 입을 줄이고 잠제적 라이벌을 제거하며 동시에 이제는 자신의 휘하에 거느려야 할 어제의 라이벌들을 포섭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8] 당시 이란은 탄도미사일 공격에서 열세에 처했으며 거기에 후세인이 탄도미사일에 핵이나 화학무기를 탑재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공포로 인해 혁명의 수도 테헤란이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였다.[9] 이때문에 후세인이 몰락하자마자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의 동상들을 파괴하고 사진들도 모조리 태웠다.[10] 참고로 쿠바 역시 미국에 의한 경제봉쇄를 당하여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했는 의견이 있지만 이는 극히 일부만 맞는 이야기이다. 냉전기간 동안의 국제무역은 주로 공산권 국가 내에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자유진영 경제권의 경제봉쇄 여부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11] 예를 들어 어느 날 한국 정부가 국내에 있는 IAEA사찰단을 모두 추방시킨 후 "한국은 핵개발을 안할 것이다." 라는 성명을 발표한다고 해 보자. 국제사회의 어느 누구가 그걸 믿겠는가?[12] 후세인도 조지 부시의 침공 의도를 명확히 인지한 시점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몇 년 전에 추방했던 UN의 무기사찰을 다시 허용한 것. UN의 사찰에 의해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인증까지 받아내었고 그로 인해 이라크전쟁이 UN차원의 국제적 지지를 얻지는 못하는 성과까지는 만들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이었다.[13] 후세인 소재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미군이 공식발표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첫마디는, "Ladies and gentlemen, we got him!(신사숙녀 여러분, 드디어 그를 잡았습니다!)" 이 표현은 영문위키백과의 공식 항목인 http://en.wikipedia.org/wiki/Operation_Red_Dawn에도 병기되어 있다. 미군의 선전효과와 쇼맨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14] 통역병 사미르는 아버지가 후세인 부하들에게 고문을 당했고 친척들은 살해당했다며 자신의 상관에게 후세인 체포 증명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상관은 거절했으나 마지못해 허락했다고. 이 통역병은 이후 백악관에 초청받기도 했다.[15] 후세인이라는 인간의 잔혹성과는 별개로 이라크 전쟁만 놓고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쿠웨이트를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자행한 시점에서 아랍의 독립 운운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라크전 이후 알아낸 대량살상무기 부재가 이라크전쟁의 정당성을 훼손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부터 화학무기와 탄도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해 왔던 전과자가 다름 아닌 후세인이다. 게다가 전후 알아낸 사실은 후세인이 착해서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90년대에 지속되었던 UN의 경제제재가 생각 외로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후세인의 많은 무기개발 계획들이 페이퍼플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6] 단 두자일 학살이 아닌,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벌어진 쿠르드족 학살은 이란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7] 나머지 학살극은 나중에 다른 측근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증거로 사용되었다.[18] 교수형 집행 때 사형수 머리에 씌우는 일종의 두건이다.[19] 대신 목에 천을 감았다고 한다.[20] 판사든 검사든 어차피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 그에 대놓고 일침을 놓거나 반대하기가 곤란해지는 정서가 있다. 사실 법정 소란이 일어나거나 하면, 판사들이 쿠란의 구절을 인용하거나 해서 피고들을 진정시키는 방법도 자주 쓰이던 거라 사담 후세인만 탓할 수는 없다. 특히 쿠르드 판사 라우프 압델 라흐만은 이 방식으로 소란을 막아보려다, 사담이 오히려 신은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쳐 조용히 수긍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21] 수니파와 시아파는 천년을 아득히 넘은 원쑤 관계라 공공의 적이 있어도 그냥 각자 해결하려고 하지, 서로 힘을 합치는 일 자체가 없고 오히려 한쪽이 상대방 엿먹으라는 심리로 그 적이랑 손잡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사이가 정말정말 나쁘다.(...)[22] 다만 사형집행인들이 처음부터 용수를 씌우지 않고 멋대로 집행한 것은 아니다. 후세인 본인이 용수를 쓰는 것을 거부하여 그냥 안 씌운 채로 했다고 한다.[23] 한때 국가 서열 4위였는데, 후세인, 쿠사이, 우다이 다음이었다.[24] 사실 사우디와 이라크가 사이가 나쁜 이유는 걸프전쟁의 영향도 있긴 하지만 지금의 이라크 지역이 아랍, 이슬람화 되기 이전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등 지금의 사우디 일대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과는 서로 다른 상이한 정체성과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문화적 측면도 한 몪한다. 자세한건 이웃나라/안 좋은 사이 문서 참조.[25] 사담 후세인의 성급한 처형과, 그의 처형 동영상 유출이 이를 부채질했다는 비판도 꽤 있다.[26] 사실, 후세인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이라크 역시 군부의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서 정권이 뒤엎어지고 바뀌는 등 그다지 멀쩡한 나라는 아니었다.[27] 다만 무바라크가 시위로 쫓겨나갈 당시, 콥트 교도 다수가 되레 시위에 참여하며 지지했는데, 무바라크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이들도 차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팔라비 왕이 퇴위당하여 추방당할 때 되레 아르메니아인들이 호메이니를 지지하던 것 같이, 소수파들도 이득에 따라 갈라지기야 하지만.[28] 다음날 집행이면 살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보자.[29] 이때 사담이 "내가 어디로 갔을 거 같았어, 디트로이트?"라고 말한다(…).[30] 참고로 《사우스 파크》의 천국은 몰몬교 교도인들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