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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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의 지식인2. 유목민 집단3. 다른 뜻
3.1.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3.2. 은어로서의 선비

1. 조선시대의 지식인[편집]

예(禮, 올바른 삶의 길)가 아닌 것에는 눈길도 보내지 말고, 예가 아닌 말은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입에 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마라.
- 논어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
- 을파소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조선시대 지식인들을 이르는 말.
본래 선비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신분의 차이와 상관 없이 도덕적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였다.[1] 그러던 중 고려시대 말기에 신진 사대부가 조선을 세우면서 유학을 나라에 널리 장려하려고 하자 선비를 '유학을 공부하는 유생들'이라 해석하게 되었다.[2] 따라서 선비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과,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당시 유학을 공부하던 사람은 대부분 양반들이었기에 점차 양반 계급(사족)을 의미하게 되었다. 때문에 유교적 선비는 고려시대때 다소 생소한 것이었지만 명나라의 제도를 많이 들여온 조선시대로 한반도에서도 보편적인 계층과 전통이 되었고 조선 선비만의 이미지(?)도 형성하게 된다.

선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벼슬 없이 연구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조선시대 사회지도층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대개 양반과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공부 안 하고 놀고 먹는 놈들은 그 당시에도 선비라고 불러주지도 않았다. 현대 한국에서도 선비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 일단 놀고먹는 백수라는 인식이 없는데다 평생 피똥싸며 공부한 계층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니까. 이처럼 지식인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유럽의 기사도 정신,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처럼 선비 정신을 우리나라 지성인의 덕목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다. 화랑도 정신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한자로 사()는 춘추전국시대군주귀족에게 고용된 관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때문에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士를 우리말로 해석할 때 선비라 하지 않고 '됴사(朝士)' 즉,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하는 선비라고 칭했다. 한편 같이 선비를 뜻하는 한자인 유()는 조선 전기부터 선비라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도덕을 지키고 학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한편 예부터 士는 공, 후, 백, 자, 남과 같은 제후나, 대부(大夫)와는 달리 영지를 받지 않고 봉급으로만 먹고 사는 계층이었다. 중세유럽식으로 말하자면 제후나 대부는 자기 영지를 다스리는 봉건영주같은 것이고, 士는 그 밑에서 일하는 기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공자가 가르친 인재들이 모두 나중에 士가 되었는데, 공자가 가르치던 자들이 누군지 생각하면,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사람들도 얼마든지 학문을 통하여 士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자 그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야합(野合)을 통하여 공자를 낳았으므로 士란 혈통에 의한 것도 있으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3]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士는 전시에는 장수가 되어 싸웠다. 과거에는 문무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선비는 춘추전국의 사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학자형 인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싸움이 잦던 전국시대가 끝나고 안정적인 통일국가가 자리잡아 가며 지금과 같은 문무의 구분이 생긴 것. 한자인 士자 자체가 도끼의 모양에서 따온 상형문자라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이순신 같이 학식이 높지만 직업이 군인인 사람도 얼마든지 선비의 범주에 포함된다.[4] 이들의 경우 말 그대로 무사(武士)라고 할 수 있다.[5]

조선시대 때는 사족(士族) 혹은 사대부(士大夫)로 칭해지기도 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양천제(良賤制)라 하여 천민이 아니면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으나 이들 사족(士族)들은 과전 등의 토지를 국가에서 지급받아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농공상민과는 다르게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을 통과해 사회 지도층을 거의 다 독점하였고 차츰 우리가 잘 아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으로 분화되게 된다. 조선 시대에 비양반 계층의 과거 합격 및 관직 진출 비율이 타 문화권에 비해 매우 높았던 것은 맞으나, 이들 상민층 합격자들도 대부분 자식을 공부에 매진시킬 수 있는 부농이나 대상 집안 출신이었다.

선비들은 토론을 주요한 의사결정 방식으로 꾸준하게 사용했다. 논어(論語)의 헌문(憲問) 편에 있는 “비심이 초창(初創)하고, 세숙이 토론(討論)하며, 자우가 수식(修飾)하고, 자산이 윤색(潤色)한다”는 구절은 선비들 글쓰기의 금과옥조였다. 토론은 선비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논리와 이치를 바루는 데 썼던 진리 탐구의 대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토론이 글을 짓는 데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토론은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최선의 해법을 찾는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왕 앞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두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견해를 개진하고 상대방 주장의 잘못을 논파했다. 『세종실록』에 그 좋은 예가 있다.

세종 14년, 세종은 원묘를 새롭게 만들 것을 논의하게 한다. 원묘란 공식적 종묘 외에 따로 세운 실묘를 말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조상을 산 것처럼 모시려는 효성의 상징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세종은 그때까지 문소전과 광효전으로 나뉘어 있던 원묘를 한 군데로 모으고자 했다. 이 자리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놓고 조정에서 토론을 벌인다. 고중안과 최양선은 도성 북쪽 자리가 불가하다고 하고, 안숭선과 이양달은 가하다고 주장한다. 토론이 끝나자 왕은 이튿날 아침에 하교하겠노라고 말한다(1월 15일).

이러한 방식으로 토론은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문화가 제도화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경연이다. 이 경연이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나 정조가 다스리던 시기에는 활발했고, 폭군이라 불린 연산군 시기에는 폐지되었던 것을 보면 토론이 선비들의 소양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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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쏘기가 교양과목이었기 때문에 활쏘기를 익힌 선비들이 많았다. 이는 본래 한반도 특유의 수성(守城) 문화, 즉 성 위에서 활을 쏘고 적을 견제하는 방법을 주로 쓰던 것이 활쏘기 문화로서 이어지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유교가 들어와 정착하는데, 아래 후술하겠지만 유교에서도 활쏘기를 중용한 덕에 크게 성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공자 이래로 士의 교육과목은 6예(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였는데, 구체적으로 예禮는 단순 매너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의례(儀禮)절차를 배우는 것이고, 악樂도 그냥 음악만 말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의례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포함하는 것이다. 대충 매너 좋고 시 좀 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사射와 어御는 전차를 타고 활을 쏘는 춘추시대의 군사훈련을 의미한다. 전차가 퇴화된 후에는 말타기로 바뀌었다. 서書와 수數도 단순 글짓기와 산수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세금이나 국가재정을 계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6]

그러니까 선비, 즉 士라는 건 관료가 되기 위해 특화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비를 놀고 먹는 한량과 혼동하지 말자. 또한 실제로 조선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의병들은 거의 모두가 선비들이 일으킨 것이다. 평범한 마을에서도 선비들은 지역의 지도자와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반 평민들을 제대로 결속시킬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선비밖에 없었다. 이는 선비들 중 전투 및 지휘에도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곽재우나 고경명, 조헌 등의 인물들이 있으며 안중근 의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다 알고 보면 선비적 소양을 닦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7]

따라서 정리하면, 선비는 과거에는 신분과는 관계 없이 '인격적인 훌륭함'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한국 특유의 활쏘기 문화와 조선 이후 중국에서 들어온 유가 사상으로 인해 현재의 유교적이고 문을 중시하며 활을 잘 쏘는 선비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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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설화에서 선비들의 활쏨씨를 묘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아주 대충 서술하고 넘어가서 그렇지 사실은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실력이다. 실제로는 그냥 잘 쏘는 수준이었다고. 조선시대에는 웬만한 남자들은 활쏘기를 연마하면서 놀았다고 하니...

어쨌든 '활 쏘는 선비' 란 한반도의 풍속과 지식 계층으로서의 선비가 조합된, 중국에서도 활 쏘는 북방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조선만의 참 독특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칼 헬턴트?

설화나 전설이나 민담에서는 킹왕짱 먼치킨으로 나와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거나, 구렁이화살로 쏘아잡는 신궁의 능력을 보여주거나 귀신들을 페로몬으로(?) 홀리거나 귀신들이 자진해서 선비에게 접근하는 등 엄친아 같은 모습도 보여주지만, 어떤 경우는 도적에게 그냥 털리기도 한다. 괜히 한국에서 이고깽이 많이 나오는게 아니다.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는 가끔 용왕에게 붙들려가서 축문을 써준다거나[8], 염라대왕의 후계자가 된다거나 하는 등.[9] 선계에도 관여하는듯 하다. 이런 식으로 도교불교의 신화와 얽히는 선비들은 퇴계율곡 이전의 고려시대의 느낌이 남아있는 지식인들이다. 원래 고려시대 때는 불교사찰이 학문의 중심지였고, 조선전기에도 공부를 하러 사찰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라고 다 같은 선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선비는 을 쓰는데,흥선 대원군치하에 선비들의 사치풍조를 줄인다며 갓의 크기를 줄였다.원래 갓의 크기는 폭이 1m정도 였다.

유교적 선비라면 괴력난신과 얽히지 않는게 맞다.[10]

블리자드사에서 2014년 만우절 장난으로 디아블로 3의 신 직업으로 선비를 공개했다. 무슨지거리야!말티엘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성역에 선비가 등장합니다 "이리오너라, 이 미천한 악마 놈들아!" 오오 지나가던 선비 포스 오오 활을 안 쏜다? 활들면 오버밸런스라 안드는 거다 주소의 상태가... bbung

일부 사람들은 일본에 사무라이가 있듯이 한국에는 선비가 있다는 식으로 한국의 브랜드화 홍보를 하자는 의견도 있다. 현대 한국인들은 끝이 좋지 않았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그것도 지배계층인 선비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 자국 내에서는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대외에 어필할 수 있는 한국적인 요소인 건 또 사실이다. 조선 왕조는 대중들에게 한반도 왕조 중 가장 친숙한 왕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비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면 조선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2015년경부터 선비에서 파생된 비속어 씹선비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선비라는 단어의 인식도 덩달아 나빠진 상황. 유머를 모르고 진지병에 걸린 인간군상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된다.

2. 유목민 집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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鮮卑. 위의 조선시대 선비와는 전혀 관련없다.
선비족 문서 참조.

3. 다른 뜻[편집]

3.1.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일컫는 말[편집]

살아계신 어머니는 자친 또는 모친이라 한다

3.2. 은어로서의 선비[편집]

흔히들 진지충, 씹선비라고도 부르며 장난을 장난으로 못받아들이는 부류를 두고 선비라고 부르기도한다. 선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조선시대의 선비들처럼 고지식하고 꽉막혀있을것 같은 느낌이 들기때문.
장난을 심하게 치는사람도 분명 문제가 있지만 어느정도의 장난은 재밌게 넘어가는것도 본인과 학급 또는 집단의 분위기 차원에서 좋을듯하다.
최근에는 지나치게 착해빠지고 정의만을 강조하여 보는 이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캐릭터들도 선비들이라고 하며 이들이 하는 정의파 행동을을 선비질이라고 한다. 씹노비들의 지랄 광기 열폭 ㅋ
[1] 이러한 인식은 현재에도 남아 국어사전의 정의에도 나오게 된다. "3.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2] 이러한 해석은 용비어천가에 실려있다.[3] 서양의 Knight도 혈통에 의한 신분 계승과 자기 자신의 수련을 통하여 된 경우도 많으므로(나이트 베츌러) Knight의 동아시아 번역어가 騎士인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할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士는 그야말로 '문무겸전 관리'라는 이미지가 크고 knight는 '무인이자 영지의 관리자'라는 이미지가 크다.[4] 이순신이 직접 기술한 난중일기에서 사용된 어휘를 보면 이순신의 학식이 보통 이상의 성취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문체들이 군인답게 무미건조하고 행정, 사무에 관련된 용어들이 다수이기는 하나 스스로와 나라가 위급한 순간이었던 명량해전이나 어머니와 아들의 사망에 대한 기록 등을 보면 학문적 성취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공문서를 다루는 관리로서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들 역시도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열두 척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등의 기록에서 보다시피 명문장이 많다.[5] 보통 바다 건너편 애니메이션이나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자객이나 사무라이만 무사인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사의 뜻은 글자 그대로 무예에 종사하는 선비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크게 되려면 어느 정도는 유학적 소양이나 행정 실무 능력은 갖춰야 했고, 막부 중후반기로 갈수록 이들에게 요구되는 학식과 교양, 행정 실무 능력이 늘고 무예의 비중이 줄며 아예 칼은 장식으로만 차고 다니면서 정작 쓸 줄은 모르는, 사실상 문관인 사무라이들이 수두룩해졌다.[6] 이중 한국은 문무 중 문에 특화된 유교적 선비가 士를 대표하게 되었고, 일본은 무에 특화된 사무라이가 士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7]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인 '도마' 라는 세례명이 있으나 남겨진 유묵의 내용이나 유년 시절 받았을 한학교육을 고려하면 천주교 신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교적인 선비에 가깝다.[8]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9]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10] 논어 술이편에 '공자는 괴력난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라는 서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