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별 명칭 | |
圣公会 | |
성공회 (聖公會/Sungkonghoe) | |
聖公会(Sei Ko Kai) | |
Anglikana Eklezio Episkopa Eklezio |
1966년, 교황 바오로 6세(좌측)와 마이클 램지 캔터베리 대주교(우측)의 만남. |
Robin Williams - Top Ten Reasons For Being An Episcopalian.
10. No snake handling.
09. You can believe in dinosaurs.
08. Male and female, God created them; male and female, we ordain them.
07. You don't have to check your brains at the door.
06. Pew aerobics.
05. Church year is color coded!
04. Free wine on Sunday.
03. All of the pageantry, none of the guilt.
02. You don't have to know how to swim to get baptized.
And the number one reason for being an Episcopalian:
01. No matter what you believe, there's bound to be at least one other Episcopalian who agrees with you.
10. 뱀을 취급하지 않는다.[84]
09. 공룡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85]
08.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 성공회에서는 사제가 될 수 있다.[86]
07. 교회 문 앞에 뇌를 두고 오지 않아도 된다.[87]
06. 신자석에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에어로빅을 할 수 있다.[88]
05. 교회력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89]
04. 주일에는 공짜로 포도주를 즐길 수 있다.[90]
03. 화려한 구경거리가 있다, 하지만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91]
02. 세례를 받기 위해서 수영을 배울 필요가 없다.[92]
그리고 마지막 첫 번째 이유
01. 당신이 무엇을 믿든지 간에, 적어도 한사람의 성공회 신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의 생각에 동의해 준다.[93]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쪽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으로써의 긍지 때문인 걸까, 아니면 하이랜드의 성격 때문인 걸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잠깐이었다. 윈필 왕국은 지난 3년간 성무가 중지되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는가.
(중략)
『음.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 있다. 속어로 번역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을 들고 있는 성직자가 다스리는 교회말이다. 비리나 악폐습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체 해온 것,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그 온천장에서, 무의미한 삶을 보내는 고위 성직자가 아닌, 그대에게 말을 건 것은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다. 기만도, 거짓도 없는 세계를.』늑대와 양피지 1권 中
[
성ː인]
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으며, '어른'이라는 의미의 '성인(成人)'은 단음으로 [
성인]
으로 발음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장단음의 구별이 많이 사라졌지만…[5] '보편적'이라는 뜻으로 현대 사전에 따르면 '공변된'이 더 적합하다. '공번되다'는 북한어로 사전에 실려있다. 하지만 번역된 때에는 남북이 나뉘기 전이기에 '공번된'으로 표시하였다. 물론 이제는 이런 용어가 아니라 그냥 쉽게 '보편적인'이라고 한다.[6] 성공회라는 한자 표현을 영어로 직역하면 Holy Catholic Church가 되어버린다.[7] 반(反) 가톨릭 성향이 강한 일부 개신교인은 성공회를 천주교에 물든 '천주교 2중대' 비슷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 그들은 천주교를 이단으로 보기 때문에 성공회를 보는 눈도 고울 리가 없다.[8] (교의적)고교회파의 경우 얘기가 달라지는데, 성공회 (교의적)고교회파의 경우 스스로도 개신교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학술적으로도 개신교와는 다르게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이쪽의 경우 성모공경·성상공경·화체설 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형식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개신교보다는 카톨릭에 훨씬 가까우니 당연한 일이다. 이쪽 분파의 경우 스스로도 개신교로 보지 않으며, 로마 카톨릭과 여러모로 훨씬 친연성을 띈다. 심지어 성공회 소속이면서 교황수위권까지도 인정하는 소수도 있다. 이쯤 되면 스스로의 인식이나 타 개신교 교파 모두 개신교의 일원으로 인정하기는 매우 어렵다.[9] 어떤 천주교 일반 신자들은 성공회 = 영국 가톨릭(영국의 천주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10] 그러나 루터회와 성공회가 외형상 유사점이 많은건 사실이긴 하나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꽤나 다르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우선 유래부터가 신학적, 신앙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반발해 분리되었고, 종교개혁의 시발점인 루터교와 신학적 노선차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가톨릭과 분리된 측면이 강한 성공회는 차이점이 있으며, 루터회의 경우 모든 개신교 교파가 동의하는 개신교 기본 원칙인 '다섯 솔라'등을 강조하고 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 등을 주로 사용하며, 목회자의 명칭도 '목사'인 점 등 개신교적인 정체성이 상당히 강한 반면, 보편교회론을 인정하고 국내의 경우 앵글로-가톨릭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 가톨릭적 양식이 두드러지는 성공회의 차이는 무시 못할 정도로 크다[11] 대략 1800만명으로 추산된다.[12] 이쪽은 주로 영국계와 영국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원주민과 컬러드들이 믿고 있다. 그리고 아파르트 헤이트 저항 운동에 남아프리카 성공회가 나름 활발히 참여했기 때문에 명망이 높다.[13] episcopal은 '주교(들)의, 감독 교회의'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14] 이 Episcopal church라는 표현은 보통은 '성공회'를 가리키지만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등을 아우르는 주교제 교회 전반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15]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를 담당하는 성공회[16] 사실 홍콩은 광동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지만 표준중국어 발음을 웨이드 자일스 표기법(성조 표기는 삭제)대로 적은 Sheng Kung Hui로 적었다. 참고로 한어병음식이라면 Shenggonghui로 적어야 하며, 광동어 발음대로 적을 거면 Sing Gong Wui(발음을 로마자로 정확히 옮기고자 할 경우)나 Sing Kong Wui(관행적인 로마자 표기) 정도가 돼야 한다.[17] 헨리 8세는 형수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고,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면책을 받았다. 혼인무효이니 이혼이니 하는 용어는 별로 중요치 않다. 혼인 무효는 이혼급으로 자주 이용이 되었기 때문...애를 못 낳는다던가 동맹이 풀린다던가...새 장가 가고 싶거나 하면 유럽 군주들은 교회법학자들을 동원하여 무효 사유를 열심히 잘 찾아냈고 교회에선 거의 대부분 들어주었다. 대부분의 사유는 근친혼인데 앞서 헨리 8세의 경우처럼 근친혼으로 결혼하며 면책받았다가(유럽 왕족들은 신분에 맞춰 근친혼이 성행했기에 교회에선 기독교 군주의 결합을 대의로 인정하여 허용하는 추세였다.) 이혼하고 싶으면 근친혼...이라며 무효를 주장...[18] 물론 표면적인 이유가 헨리 8세의 혼인 무효 문제였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복잡한 사정보다 그 시기의 스캔들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19] 다만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국교회 정책이 과연 민중의 반발이 적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Peter Marshall에 의하면 "잉글랜드인의 종교적 DNA가 아니라 여왕(메리)의 때 이른 죽음 때문(Peter Marshall,「The Reformation」) "으로 설명되고, Ronald Hutton는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음을 지적한다.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이 교황청과 어떤 갈등을 일으키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성공회의 출발이 영국인들이 가진 어떤 필연성 때문이라는 견해는 학계에서 부정되어가는 추세다. 메리와 엘리자베스 중 누구의 박해가 심했는지에 대해서도, Marshall이 지적하듯 엘리자베스는 도덕적 우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단죄보다는 반역죄로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했기에'구체적 수치를 계산하기 어렵다.[20] 이전의 로마 교황과 8세기까지 후임 교황들은 세속적으론 동로마제국의 봉신이며,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수위권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전승에서 내려오듯 온전한 교회수위권 같은 것은 누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선 침략자들의 방어하고 협상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신경 쓸 겨를이 더 없었다. 그레고리오 1세 시절엔 동로마제국서 파견한 라벤나 총독에게도 무시당할 정도.[21]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 시절은 왕이 죽을때마다 분할상속으로 나뉘어졌다 서로 싸우고 죽고 병림픽으로 합쳐졌다의 반복이었다. 네우스트리아는 파리와 북 프랑스지역[22] 서고트족 출신임에도 프랑크계통 왕국에 시집와서 아리우스파에서 가톨릭으로 자발적으로 개종함.[23] 앞서 언급했듯이 전근대 서유럽에서는 의외로 세속군주가 교황에게 엿을 먹이고 해당 국가 성직자들이 군주 편을 드는 사례가 많다. 당장 아비뇽 유수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세는 교황이 세속 정치에 영향을 끼치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통신과 교통 수단의 미발달로 인해 의외로 가톨릭 교회가 각국 주교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느낌으로 결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통일된 미사 경본이 나온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기존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왕국 의 세속 군주는 교황청을 왕의 권한아래나 보조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교회권력을 이용했다면, 헨리 8세는 영국 교회 자체를 로마에서 분리 시켰다는 점에 있다.[24]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선 가톨릭 교회에서 교리로 주장하는 변화설(화체설)을 공식적으로 부인한다.[25] 1380년부터 교황청이 분열되어 2~3명의 대립교황이 난립했기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415년에야 해결된다.[26] 사실 제국내에서 독자적인 권한보다는 세속군주와 협조적인 관계였고, 강력한 황제가 출현할 때마다 실제적인 힘이 없는 교황청은 세속권력 공백시기가 아니면 거의 항상 '신앙심이 약한 군주들'에게 무너졌다.[27] 프랑스의 경우 프랑수아 1세 시절 볼로냐 조약으로 9개 대주교를 비롯한 주교,수도원, 수녀원장 직위 600여개 임명권은 프랑스왕이 교황청 대신 직접 행사하고, 수입도 프랑스왕이 차지하기로 교황청과 합의 했다. 대신 교회 분열기 공의회에서 프랑스측이 인정하지 않던 교리를 사후 추인하는 소소한 양보정도로 답례[28] 옥스퍼드대 위클리프홀을 거쳐 킹스칼리지에서 재임하다 현재 다시 옥스퍼드 대학 '과학과 종교'강좌 석좌교수[29] 정식 명칭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교리와 학식(the necessary Doctrine Erudition for Any Christian Man)' 라는 장문의 제목이다. 혼자 공의회, 교황 노릇을 하며 교리를 정해준다는 교조적인 서적이다.[30] 아예 금지는 아닌데 불가타를 직역한 것만 허용하고, 헬라어(고전 그리스어)를 배워서 에라스무스의 헬라어-라틴어 비교 성경을 보는건 허용했다. 당연히 불가타 직역본은 번역상태가 거의 사망수준이고, 헬라어 원전 신약성서는 학자급이나 학식이 아니면 접근 불가능. 왕께서 친히 펴낸 교리 설명용 소책자를 보는건 적극 권장했다. 당연히 아부꾼들이 비위 맞추려 몇부 본거 빼곤 가톨릭이고 개신교 신앙 가진 양측에선 거의 무시했다.[31] 헨리 8세는 교황은 '로마의 주교일뿐'이라며 국내 간섭을 거부 한것이지 교황청의 모든 권위에 대해서 적극 부인한것이 아니다.[32]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가 요구한 혼인의 적법성, 후계자의 계승 순위 수도원을 작살낸것 같은 소소한 이유는 마지 못해 찬성했고, 로마교회 수위권만 거부하지 않았다.[33] 드라마 <튜더스>에서도 당시 모습이 나오는데, 당시 사형이 면제된 여성까지도 이단이라서 화형시키는 모습이 나온다.[34] 《기독교의 역사》p508, 폴 존슨[35] 공도문이라고도 하고 영어로 축약 표현 할 때는 BCP라고 적는다. 이 책자도 영국 내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과 함께 Crown Copyright을 적용받는 저작물이다.[36] 한국의 ‘성공회 기도서’도 ‘공동기도문’이라고 하기도 했었는데, 개정하면서 ‘성공회 기도서’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37] 사실상 감리교나 온건파 장로교나 다름 없는 극단적 저교회파(복음주의파)부터 '교황 없는 천주교' 수준의 극단적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까지. + 거기에 후기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광교회파 추가.[38] 왕당파라서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된다.[39] 이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한국과 미국 장로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생겨났다. 이 당시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성공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40] 청교도 중에서도 국교회에서 내부 개혁에 회의적 입장으로 다수인 장로파와 대립. 신학적으로 회중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에 회중파로도 불린다.[41] 당연히 39개 신조에 위배되는 가톨릭과 유니테리언은 제외였다.[42] 훗날 가톨릭으로 회심하여 추기경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사후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 시기에 복자로 시복되었다.[43] 다만 이들 모두 공동기도문을 사용한다는 것은 동일하다.[44] 옥스포드 운동 이전까지 영국 성공회에서 매 주일예배가 성찬예배인 경우는 드물었다[45] 존 스토트 사제, 톰 라이트 주교, 앨리스터 맥그래스 등 성공회가 배출한 걸출한 복음주의자들은 이쪽 계열이다.[46] 이들른 전례적 요소를 채택하지 않는 것을 넘어 이것들을 중세교회의 적폐로 여겨 부정하였다.[47] 일반적인 주일 낮 예배는 성무일과의 조도(아침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저녁 예배는 노래로 만도(저녁기도)를 바치는 형태였다. 이런 교회는 오늘날에도 영국이나 북미 지역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다.[48] 심지어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로마 중심의 일치를 추구하는 교황주의자들 역시 공개적으로 존재한다.[49] 이들 중 상당수는 성공회 내 동성애자 사제, 동성결혼 인정 문제, 여성사제 문제에 반발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했다.[50] 성 십자가회. 막대한 규모를 가진 '앵글로 가톨릭'주의 사제들의 단체이다.[51] 복되신 성체성사 형제회.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예수님의 몸으로 변화함)을 따르며 신심행위를 하는 신자단체[52] 어떤 성공회 신자는 진정으로 교회일치가 이루어져 성공회가 사라진다 해도 크게 아쉬울 것 없다는 말을 했다 카더라. 그 정도로 에큐메니즘이 강한 종파라는 의미.[53] 가톨릭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면 가톨릭이 성공회 신자들에게 가톨릭 영성체 참여를 허용안한 것에 대해 성공회 측에서 서운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가톨릭 성향의 보수 개신교 같았으면 가톨릭 영성체 개방문제는 아오안이었을테니.[54] 헨리 8세 수장령 이전, 메리1세 시절 가톨릭 산하의 영국교회, 종교개혁이후 영국국교회 포함[55] 칼뱅주의에 충실한 섭정들이 다스린 에드워드 6세 시절만 하더라도 재세례파들을 처형했고 사실 처형자로만 보면 메리 1세때 5년간 개신교 화형자가 17세기 까지 가톨릭 순교자보다 많다. 헨리 8세만 하더라도 가톨릭 교도보다 대륙신학에 영향받은 개신교도들을 더 많이 처형한건 함정... 그게 사실은 영국 국교회 입장에서 가톨릭은 반역자, 복음주의 개신교는 이단 취급이었기 때문.[56] 구 가톨릭교회도 여성의 서품으로 가톨릭이 아니라는 비판을 들었다.[57]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으나, 영국에서 성공회의 탄생과 정착으로 인해 이후 대륙에서 겪게 되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나 30년 전쟁같은 끔찍한 종교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58] 자기 교단/교파의 독특한 교리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59]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성공회 교회에서 성찬례를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60] 교단, 개교회에 따라 출교 및 성만찬 제한이 될 수 있을 정도로[61] 특히 가톨릭, 정교회 등의 보편교회와의 일치문제[62] 개신교는 '성서'를 강조하고, 가톨릭은 '성서'와 '전통'을 강조한다.[63] 이것과 비슷하게 보는 입장이 복음주의파(저교회파)이다.[64] 엄밀히 말하면 성공회대학교 내에 진보적 인사가 많고, 대학교에서 이들의 언행에 별로 제제를 안가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성공회대학교 자체가 진보적인 성향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65] 가톨릭의 경우 성경이나 교리 해석을 교황청이 독점하며 시시콜콜한 것(예: 자위행위 문제)까지 교리서로 정리해주지만, 성공회는 큰 틀에서만 교리로 정리해두고 나머지는 신자의 개인의사에 맡긴다.[66]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대한성공회 교회법에 주일 성수의 의무가 규정되어 있긴 하다. 다만 가톨릭 교회법과 달리 단지 사실상 선언적/원론적인 규정일 뿐이라. 사실 성공회 교회법 자체가 가톨릭 교회법을 계수한 것이기도 하고.[67] 고해성사, 고백성사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나, 준성사 또는 성사적 예식이라고 해서 성공회 기도서에는 고백예식이라고 표현한다.[68] 여기서는 장로교, 한국 감리교, 성결교회, 침례교, 오순절교회(순복음교회). 성공회보다 개신교의 정체성이 강한 교단들을 일컫는다.[69] 루터 본인부터가 마리아나 성인 공경을 가톨릭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70] 다만 사실상 가톨릭 수준의 성모 신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묵인하는 성공회와 달리, 루터교에서는 가톨릭식 성모 공경과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경향이 강하며, 특히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더욱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다만 루터교 역시 에큐메니컬 운동을 상당히 중시하는 교단들 일각에서는 상당히 가톨릭에 가까운 관점을 취하는 경우도 꽤 있다.[71] 또한 십자고상, 성모상과 같은 성물은 사제에 의한 축복식을 받아야 한다.[72] 다만 교단 차원에서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사나 평신도 중에서는 전자 입장도 꽤 있는 듯하긴 하다.[73] 소죄의 경우 성체를 영하는 것으로 사해진다.[74]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기록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75] 단 위급한 상황의 동방정교 신자도 영할 수 있다.[76] 역시 자유를 바라기에 개인적으로 빵이 성체로 변화한다는 믿음을 말리지 않는다. 일부 고교회파 사제, 평신도들이 화체설을 따르는 경우도 있다.[77] 특히 감리교가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파인 점을 들어서 감리교식 구원관도 성공회의 전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78] 세례로써 모든 죄가 씻겨짐을 믿고, 고해로써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하여야 구원받는다는 관념. 그러나 성공회 일부 고교회파의 구원관과 천주교 구원관은 상당히 유사할 수 있어도 동일할 수는 없다. 천주교는 천주교회 안에 들어와야 구원 받는다는 교회관과 결부시키는데, 천주교를 제외한 나머지 교파들은 그 구원관은 거부하기 때문.[79] 이건 루터교도 마찬가지이다.[80] 가톨릭 신자, 사제라 해도 열린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개신교 성경 활용(어디까지나 보조적 용도에 한하여)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극단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금지에 가까운 권면을 하기도 한다.[81] 이는 다른 개신교단도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시기 때부터 가톨릭 세례도 인정하고 재세례는 부정한다.[82] 서울주교좌성당 소속 사제와의 이메일 문답[83] 개신교 세례는 무시하는 경향이 강한 한국 천주교의 모습을 고려한다면, 한국 그리스도교 교단 중 재세례 문제에 가장 민감한 교단이라 할 수 있다.[84] 미국의 근본주의 교회중에 뱀을 잡는 의식을 치르는 곳이 있다.[85] 과학과 이성을 존중[86] 남녀 평등 추구. 다만 이는 로반 윌리엄스가 미국 성공회 신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성공회공동체 소속 관구 중에는 여성 사제를 반대하는 관구도 많다. 그리고 여성 사제를 허용한 곳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의식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여성 사제를 좋아하지 않는 신자들도 있다.[87]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해도 된다는 얘기[88] 전례적 교회[89] 전례적 교회[90] 성사적 교회. 매 감사성찬례마다 성체성사를 한다.[91] 죄의식을 가지는 것보다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92] 침례가 아님. 물론 이 역시도 관구나 교회(주임신부 개인성향)에 따라서 침례를 주는 경우가 있다. 또한, 침례를 안주는 경우에도 침례가 더 성서에 부합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93] 여러 성향의 신자 구성 및 다양성 존중[94] '겉은 가톨릭, 속은 개신교'로 비유될만한 부류들[95] 여성 사제 서품은 고교회파 내 보수파가 가장 반발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2000년대에 고교회파 내 보수파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독자적인 교단으로 떨어져나가는 등의 대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저교회파의 경우 보수 복음주의 개신교 교파에도 여성 목회자가 더러 있는 것으로 보면 고교회파 내 보수파만큼의 반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96] 가톨릭 내 일부 진보파와 유사점을 공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97] 우리나라식으로 얘기하면 예장통합과 비슷한 신앙관을 가진 부류.[98] 일부 고교회파는 가톨릭 묵주를 성공회식으로 변형한 성공회 묵주가 아닌 가톨릭 묵주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99] 자유주의적 고교회파는 낙태, 이혼, 동성애 등에서 가톨릭[100]과 사회교리를 달리하기도 한다.[100] 진보파나 극보수파의 해석이 아닌 교도권 해석 기준[101] 이는 성공회 전반의 경향이긴 하지만, 특히 광교회파가 이러한 특징을 강하게 보인다.[102] 우리나라 성공회 내 저교회파 예배당에 가더라도 예전성은 영미권의 광교회파 예배에 가깝다.[103] 한국 천주교의 주일 저녁 청년미사의 예전성과 비슷하다. 한국에서 성공회 광교회파 예배를 접하려면 서울주교좌성당 영어예배에 가보면 된다.[104] 쉽게 예를 들자면,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보적 신학이나 의견을 '자유주의'로 매도하는 것.[105] 이런 분위기로 인해, 어떤 교인의 의견이 선을 너무 넘어 가지만 않는다면 왠만하면 교회 안에서 수용해준다. 수용해준다는 의미는 그것을 당장 교회의 주요(main) 의견으로 삼는다는 뜻이 아니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견이며, 더 나아가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그에 따라 변하면서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의 의견들이 그랬듯이) 언젠가는 그 의견이 우리 교회의 주요 의견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해준다는 의미이다.[106] 성공회는 신앙고백 상으로는 세례와 성찬 2개만을 성사로 인정하며, 나머지 5개는 성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5개를 완전히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성사적 행위 또는 준성사로 보고 있다. 다만 동방정교와 가톨릭과는 달리 신앙생활의 필수요소로 보지는 않는다. 이 부분에서 개혁주의 개신교와 다른 점은 개혁주의 개신교는 이 5개를 비성경적이라 하여 배척하는 반면에 성공회는 교회의 전통으로서 존중해준다는 것이다.[107] 존 녹스는 감독제(주교제) 제도 자체를 반대해서 사양했다.[108]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를 수립하여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완성한 사람으로 장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09] 39개 신조가 사문화 되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시대에 흐름에 따라 사문화 된 조항도 있기도 하고, 영국 외의 성공회에 구속력이 없지만, 램베스 회의등에서 새로운 판단을 내릴 때 주요 참고 대상이다. 다른 곳의 성공회에나 역사신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역사적으로 그 시절엔 이런 신앙이 있었고, 가톨릭이나 여타 대륙 신학과의 갈등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에 대한 좋은 연구 자료로 보고 있다.[110] 이전 버전의 문서 등을 보면 오해하는 것이 천주교의 4대교리를 성공회가 부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서분열 이전의 공의회에 있었던 테오토코스는 분명히 4대 교리 중 하나이나 성공회의 교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111] 그렇다고 성모신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주류 개신교에 비해서 성모신심이 강하다. 애초에 성공회 기도서의 예식을 보면 성모송도 있는 것도 있고, 묵주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112] 성찬전례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공동 기도회, 공동 예배는 될 수 있으나 공동 미사, 공동 성찬례가 될 수 없다.[113] 현대의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 39개조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그 시대에 저런 교리가 필요했다고 볼 뿐이다. 다만, 성공회의 신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방향은 잡을 수 있는 문서이다. 애초에 성공회는 진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찾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시기나 대상에 따라 교회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114] 다만 가톨릭, 정교회와는 다르게 본명(本名)이라고 하지 않고, 신명(信名)이라고 한다.[115] 이런 이유로 한국 천주교 한정으로 가톨릭에서는 성공회 사제가 베푼 세례는 아무 이의 없이 인정한다고 공칙된 바가 있다. 다만 가톨릭으로 옮기는 그 성공회 신자가 당초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은 경우가 아닌, 성공회 입교 이전에 타 개신교 교단 출신이어서 성공회 입교 당시에 세례를 생략한 경우라면 그 사람이 가톨릭으로 옮길 때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게 되어 있다. 또한, 세례는 다시 주지 않더라도 다른 예비신자들과 같이 6개월 이상의 예비자 교리 교육을 받은 다음 일치예식은 받아야 한다. 참고로 영미권 천주교는 한국 천주교와 다르게 개신교 세례는 웬만하면 인정해 준다.[116] 참고로 가톨릭에서는, 선의를 가진 정교회 교인은 누구든 가톨릭에서 성사를 받는 것을 허용한다. 단지 정교 측이나 가톨릭 측이나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하지 않을 뿐이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법에는 정말 급한 사정이 아니면 가톨릭 신자가, 정교나 성공회에서 영성체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117] 이건 정교나 가톨릭이 개신교에서 옮긴 사람을 세례 받았는지 판단할 때도 동일하게 사용되는 기준이다. 진중세례도 적법한 세례라 하면서 재세례를 거부한다.[118] 다만 적법하게 세례를 받은 자라면, 개신교, 동방정교, 가톨릭 어느 곳의 신자라도 성공회의 감사성찬례에서 영성체를 할 수 있다. 이게 감리회나 장로회와 공동예배할 수 있는 이유.[119] 캔터베리 대주교와 일치하는 각 국가 성공회와 일치하지 않은 분파 포함[120] 혹은 트리엔트 미사가 제정되기 이전의 중세 전례[121] 장엄전례로 감사성찬례를 드리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앵글로-가톨릭 성공회 교회에서 드리는 감사성찬례는 일반적인 가톨릭 미사에 비해서 장엄하다는 평을 받는다.[122] 현대 가톨릭 미사(특별 장엄미사, 대축일미사가 아닌 일반 연중미사 기준)의 전례성은 성공회 고교회파 예배보다는 성공회 광교회파 예배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123] 과거 미국 성공회가 지금보다 보수적이었을 때는 이런 인테리어가 흔했다.[124] 성체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교리[125] 다만 성체를 물리적으로 훼손하거나 악의를 품고 영한 경우가 아니면 파문에 이르는 죄 정도까지는 아니다.[126] 가톨릭과 정교회는 서로를 '교회'로 인정한다. 정통, 보편이란 개념은 정교회 가톨릭 모두 사용하는데 분열 이후 스스로 혼자 보편 정통임을 공표하기 위해서다.[127] 다만 성공회가 보편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교회에서도 가톨릭처럼 성공회가 교회가 아니라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128] 1552년의 성공회 서품 예식서에서 성찬례 집전권에 대한 부분이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다만, 1662년 예식서에서는 이 부분이 개정되었으나, 이미 1552년 예식서대로 서품을 주었기에 이후에 바르게 고쳐졌다고 해도 교황 레오 13세는 그전에 사도계승이 단절되었다고 보았다.[129] 이 부분에 대해선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존 헨리 뉴먼 등 고교회파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영국내에서 가톨릭 교회가 확산되고 있고 흡수가 가능하다고 오판한 보고 덕에[130] 실제로 정교회와는 사도 전승 인정에 관한 논의가 잘 진행되다가 이로 인해 정교회 측이 반발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131] 이거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와 성공회 성직자가 친할 경우에는, 그런 소재로 농담도 한다고 한다.[132] 기혼자도 정교회에서 주교가 될 수 있지만, 이는 미혼 사제가 없는 경우에 한하고 주교가 되면 별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133] 물론 세계 성공회 공동체는 여러 관구로 이루어져 있고, 관구별로 자율성을 존중하기에 관구에 따라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거나, 여성 사제는 인정하나 여성 주교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134] 이 역시도 관구별로 자율성을 존중하기에 관구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135] 동성애자라는 점보다 동성애에 관한 성경적 관점을 따를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