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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성공회
Anglican Church|Episcopal Church
주요 인물
헨리 8세[1]
엘리자베스 1세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형성 시기
1534년[2], 2세기[3]
교세
약 8,500만 명[4]
계통
종교
분류
제105대 저스틴 웰비
언어별
명칭
성공회(聖公會)
Anglican church잉글랜드와 거의 모든 나라
Episcopal church스코틀랜드와 미국[5]

Anglican Rose라고도 불리는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상징. 그리스어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6][7]라고 적혀 있다. 세계성공회공동체 홈페이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대 제대(The Great Altar).

1. 개요2. 역사(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2.1. 성공회의 기원2.2. 종교개혁 이전
2.2.1. 대륙 교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입장2.2.2.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
2.3. 헨리 8세 이전, 로마 교회와의 갈등2.4. 헨리 8세의 종교개혁2.5. 헨리 8세 이후
3. 특징
3.1. 성공회의 세 부류3.2. 다른 개신교 교파와의 비교3.3. 천주교와 비교3.4. 감사성찬례
4. 조직
4.1. 갈등
5. 세계 성공회
5.1. 캔터베리 대주교5.2. 영국 및 아일랜드의 성공회
5.2.1. 잉글랜드 국교회5.2.2. 웨일스 성공회5.2.3. 스코틀랜드 성공회5.2.4. 아일랜드 성공회
5.3. 미국 성공회5.4. 나이지리아 성공회5.5. 우간다 성공회5.6. 남아프리카 성공회5.7. 호주 성공회5.8. 싱가포르 성공회5.9. 홍콩마카오의 성공회5.10. 일본 성공회5.11. 한국 성공회
6. 기타7. 창작물에서의 성공회8. 성공회 성직자 및 평신도
8.1. 가상 인물8.2. 실존 인물
8.2.1. 성직자8.2.2. 일반 신자

1. 개요[편집]

성공회()는 영국잉글랜드에서 기원한 전통적 개신교 교회이다. 성공회 교리에는 종교개혁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165개국에 걸쳐 약 8,500만 명의 교인이 있으며, 기독교 중에서 가톨릭, 정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교세가 큰 교단이다. 잉글랜드국교라서, 잉글랜드의 성공회는 잉글랜드 교회(The Church of England)라고도 부른다. 헨리 8세 이래 모든 영국 국왕은 '신앙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지니는데,[8] 이 호칭은 '잉글랜드 교회의 보호자'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Anglican Church가 가장 일반적인 명칭이며, 미국이나 스코틀랜드와 같이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에 반감이 있던 지역에서는 Episcopal Church라는 이름을 쓴다[9]. 한자문화권인 대한민국·일본·중국에서는 '聖公會'라는 한자어를 각자의 한자 읽는 방식으로 읽는다. 성공회(聖公會)라는 말은 '거룩하고(聖) 보편적인(公) 교회(會)'라는 의미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聖)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公會)' 및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하고(聖) 보편된(公) 교회(會)'[10] / '거룩한(聖) 공교회(公會)'[11]를 한자어로 조합해서 만든 명칭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교단답게 과거 대영제국의 일원이던 영연방 국가들에 널리 퍼져 있다. 대영제국에 속했던 식민지 중에서 힌두교이슬람이 이미 토착 종교로 깊이 뿌리 박혀 선교가 잘 안 된 곳들 즉 인도, 파키스탄, 이집트 정도를 제외하면 옛날 영국이 있었던 곳에는 성공회의 발자취가 크다. 잉글랜드의 국교이고, 영국에서 주류 종교이며, 나이지리아에서는 신자 약 1,800만명으로 가장 큰 기독교 교단이다. 호주·뉴질랜드에서는 천주교 다음으로 큰 그리스도교 교단이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6번째로 큰 기독교 교단이다. 미국에서는 그리스도교 교단 중 제일 많은 12명의 대통령을 배출했고[12] 워싱턴 D.C.에는 국립 성공회 대성당이 있는 등 현재도 교세에 비해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한 때 미국의 주류 개신교 교단이었기 때문에 메인라인(Main-line)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에도 적잖은 많은 신자들이 소속되어 있다. 홍콩에서는 신자 수 약 2만 9,000여 명으로, 교세가 크지는 않으나 가장 역사가 오래된 그리스도교 교단이다. 구 하와이 왕국메리나 왕국의 국교였다.

아래 명칭 항목에도 나오겠지만, 세계 각국 성공회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해외 지부가 아니라 '해당 국가 성공회'로 불리며,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다. 즉 잉글랜드 성공회 바깥에 관구와 교구가 캔터베리 대주교의 치리를 받을 일은 없다. 물론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바깥의 성공회에 사목적 권고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호주 성공회 교회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호주지부가 아닌, '호주 성공회'로 불리는 식. 한국의 성공회 또한 한국이라는 지역 단위로 단일 관구를 이루며 대한성공회라 한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발간한 책자에 따르면, 성공회를 다른 교단과 연관지어 말한다면 '개혁된 천주교'(Reformed Catholic), '교황 없는 천주교', '교리에 너그러운 정교회', '천주교 전통을 유지하는 개신교' 등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국외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브릿지 교회(Bridge Church)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역사(잉글랜드 교회의 역사)[편집]

2.1. 성공회의 기원[편집]

전승에 의하면 기원후 39년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한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로부터 전해졌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바울로가 예수의 72 제자 중 하나인 제베대오를 잉글랜드로 파송했고, 이후 제베대오는 61년에 잉글랜드의 초대 주교서품되었다고 전해진다. 고고학적 발견으로 밝혀진 잉글랜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세기 중반 이집트에티오피아 사막의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 잉글랜드에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후 선교가 활발해지면서 314년 프랑스에서 열린 아를르 공의회와 325년 동로마 제국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 잉글랜드의 주교와 많은 성직자들이 참석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져나갔다. 이때 성 패트릭와 성 골롬바 등 헌신적인 성직자 등이 잉글랜드의 토속적인 켈트 신앙과 전통적인 잉글랜드 문화와 결합하면서 잉글랜드만의 독자적인 켈트 교회로 성장해 나갔다.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자면, 16세기 잉글랜드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내의 모든 교회는 로마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고, 국왕을 구심점으로 한[13] 잉글랜드 국교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의 루터나 칼뱅이 신앙과 교리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다루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것과 매우 다른 양상으로 생겨났는데, 잉글랜드에서는 특별히 헨리 8세의 권력행사의 결과물로 나타났다. 절대군주의 이혼 사건에서 불거진 문제에 힘입어, 정치와 종교에 모두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싶어한 잉글랜드 국왕이 가톨릭 교리를 개혁하여 국왕 중심으로 새로 교회를 만들어냈다.

2.2. 종교개혁 이전[편집]

2.2.1. 대륙 교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입장[편집]

From the days of George Buchanan, supplying the initial propaganda for the makers of the Scottish Kirk, until a startlingly recent date, there was warrant for an anti-Roman, anti-episcopal and, in the nineteenth century, anti-establishment stance in the Columban or "Celtic" Church. ... The idea that there was a "Celtic Church" in something of a post-Reformation sense is still maddeningly ineradicable from the minds of students.
스코틀랜드 국교회[14] 창설자들을 위한 초기 프로파간다를 제공하고자, George Buchanan의 시대부터 놀랍게도 최근까지, 반로마, 반주교제, 그리고 19세기에는 반국교 스탠스를 위한 보증이 콜룸바누스 혹은 "켈트" 교회에 있어왔다 ... 켈트 교회가 종교 개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은 학생들 생각 속에서 여전히 미치도록 뿌리깊다.

-Patrick Wormald, 'Bede and the 'Church of the English', in The Times of Bede, p. 207.
One of the common misconceptions is that there was a 'Roman Church' to which the 'Celtic' was nationally opposed.
'켈트' 교회가 '로마 교회'와 대립각을 세웠다는 것은 오개념이다.

Patrick Wormald, 같은 책
Ask many people browsing through popular books on Celtic Christianity to describe the Celtic Church and several well-known ideas will probably emerge. They might stae, for instance, that the Celtic Church did not acknowledge papal authority and was less authoritarian and bureaucratic than the Roman Church because it was guided by holy abbots, rather than bishops. Depending on their interests, they might add that it allowd women more power than was customary at the time, it was environmentally friendly, it was continually influenced by native pananism, or that the Irish had a special link with the spiritual realm. Simply stated, most would agree that the Roman and Celtic Churches were inherently dissimilar and in confilict throughout the Middle Ages until the Roman Church conquered and suppressed the Celtic tradition.
켈트 그리스도교에 관한 대중 서적들을 읽는 다수 사람들에게 켈트 교회를 묘사해달라고 요청해보라. 그러면 각각의 잘 알려진 생각들이 아마도 출현할 것이다. 그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켈트 교회는 주교들보다는 거룩한 수도원장들에 의해 인도되었기에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로마 교회보다 덜 권위적이였고 덜 관료적이였다고 말이다. 그들의 흥미에 의존하며, 그들은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른다. 켈트 교회는 당시의 관습보다 여성들에게 더 많은 파워를 허용했다거나, 더 친환경적이였다거나, 계속적으로 토착 신앙에 영향 받았다거나, 아일랜드인들이 영적 영역에 더 잘 연결된다거나. 간단히 말해, 대다수는 로마와 켈트 교회가 본질적으로 다르며 로마의 정복 및 억압 때까지 다툼 속에 있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Ask most medievalists who specialize in the churches of the Celtic-speaking lands from the sixth through eighth centuries this same question and a remarkably different picture emerges. While there were powerful and influential aboots in the Irish Church, there were also important bishops. In addition, the churches in the British Kindoms―usually an area included in the term "Celtic Church"―were organized on an episcopal model closely resembling that used elsewhere in Europe. Those in Celtic-speaking regions acknowledged and respected the papacy as much as any area did at this time and the Irish and British were no more pro-women, pro-environment, or even spritual than the rest of the Church.
6~8세기 켈트어권 교회들에 전문화된 중세 연구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라. 그러면 두드러지게 다른 그림이 출현한다. 아일랜드 교회에 파워풀하고 영향력 있는 수도원장들이 있는 동안, 또한 중요한 주교들이 있었다. 게다가, ―"켈트 교회"라는 용어에 보통 포함되는 지역인 ― 브리튼 왕국들의 교회들은 타 유럽에서 사용되는 것에 가깝도록 유사한 주교제 모델로 형성되었다. 켈트어권의 그들은 당시의 어떠한 지역만큼이나 교황직을 인식하고 존중했으며 아일랜드인들과 브리튼인들은 교회의 나머지보다 친여성적이고 친환경적이고 더 영적이지는 않았다.

Contrary to popular opinion, research suggests that the churches in the Celtic-speaking lands were not united in opposition to the "Roman" Church. The early medieval Church was very diverse. Liturgies, monastic rules, and other issue of interest to Christians were not monolithic, but varied regionally. Just as there are recognizable difference in the Catholic Church in America and France today, not all the traditions in Ireland, Meovingian Gaul, and Visigothic Spain were identical. There were, to use modern terms, "local theologies" or "micro-Christendoms."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Christians identified themselves as members of a Church seperate from and in opposition to Rome; it is simply a reflection of the diversity of local practices throughout Europe at this time.
대중적 의견과 반대로, 연구는 켈트어권 교회들이 로마 교회에 반대하며 결속한 건 아니라고 제안한다. 초기 중세 교회는 매우 다양했다. 전례, 수도원 규칙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 있는 다른 논쟁들은 하나의 바위 덩어리 같은게 아니라 지역적으로 다양했다. 오늘날 미국과 프랑스의 천주교 교회에 인정되는 차이가 있듯, 아일랜드와 메로빙거 갈리아와 서고트 스페인의 전통 모두가 같은 건 아니었다. 현대 용어를 쓰자면, "지역 신학" 혹은 "초소형 그리스도교국"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로마에서 반대쪽으로 분리된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했다는 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당시 유럽 도처에 있던 지역 의식들 다양성의 반영이다.

Corning, Caitlin (2006). The Celtic and Roman Traditions: Conflict and Consensus in the Early Medieval Church. Palgrave Macmillan. ISBN 1-4039-7299-0.
주류 역사학계와 가톨릭의 입장에 가깝다. 브리튼 지방에 전통적인 켈트 교회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 켈트 교회는 대륙 교회들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부활절 날짜의 차이 등은 켈트 교회의 독특한 전례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어도, 켈트 교회가 대륙 교회와 분리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주교들은 그의 수도 공동체들이 행하던 제례 의식의 형식 때문에, 특히 그가 대륙식 달력이 아닌 아일랜드식 달력에 따라 부활절을 지낸다는 사실 때문에 반감을 가졌다. 그러나 더 중요했던 것은 그의 수도원과 주교들 간의 관계였다. 갈리아의 수도원은 지역의 주교에게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전통에 따라 콜룸바누스는 수도원을 자신의 철저한 통제 하에 두었다. 그가 부르고뉴의 주교들에게 바랐던 것은 자신과 자신의 수도승들을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교의 권위에 고개를 숙이는 대신, 콜룸바누스는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 재위)에게 자신과 자신의 수도승들이 켈트적 전통을 간섭받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패트릭 기어리, 『메로빙거 세계』

그러므로 영국의 종교개혁의 원인으로는, 종교개혁 당시의 정치적/종교적 지형이 개신교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는 설명[15]이 훨씬 객관성있고 합리적인 주장으로 인정받는다.
학자들은 각자의 문화적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객관화하여 잉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승리는 불가피했고, 1550년대에 반전을 꾀한 메리 튜더의 시도는 역사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치려는, 실패하기 마련인 시도였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메리의 치세에 장기적으로 가톨릭교를 되살릴 토대가 놓였다는 주장, 잉글랜드가 훗날 개신교 국가가 된 것은 잉글랜드인의 종교적 DNA가 아니라 여왕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널리 인정받고 있다.

-피터 마셜(Peter Marshall), 『종교개혁』

영국 교회의 고유성을 강조하려고 길게 써놓은 군주와 교황의 갈등 사례만 하더라도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중세 내내 있어온 문제다. 이러한 갈등은 천주교 신심이 각별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이를 영국인종교개혁 기질로 연결시키는 것은 결과론적 오류이다. 14세기에 종교개혁적 원류로 평가받는 위클리프를 배출하기 전까지는 잉글랜드 교회가 유럽 대륙의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과 의미 있는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위클리프의 주장마저도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서 주류가 아니었으며,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또한 헨리 8세엘리자베스 1세 부녀의 종교 정책에 민중의 반발도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헨리 8세의 경우는 대규모 봉기인 '은총의 순례'에 직면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도 1569년에 천주교도들의 대규모 봉기를 맞이했다.

결국 성공회는 종교개혁 당시 잉글랜드 내의 천주교 교회가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국교화하는 정치적인 상황 가운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다.

2.2.2. 독자성을 강조하는 입장[편집]

성공회의 공식 입장에 가깝다.[16] 콘스탄티누스기독교 공인 이전인 2세기부터 잉글랜드에는 이미 기독교가 전파되어 켈트 교회(Celtic Church)로 정착되어 있었고,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되어 기존 켈트 교회가 로마 가톨릭 휘하로 들어가게 된 후에도 독자성을 유지하다가, 먼 훗날 헨리 8세캐서린 왕비의 혼인무효 문제로 인해서 이 켈트 교회가 다시 분리된 것이 현대의 성공회라는 입장이다. 즉, 성공회는 스스로 초대교회 시기부터 잉글랜드 지역에 있었던 켈트 교회를 잇는다고 본다.

기독교는 1세기에 탄생하여 로마 제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빠르게 로마 제국에서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세기 경에는 로마의 서쪽 끝 브리튼 섬까지 전파돠어 그곳에 살던 켈트인들 사이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17] 4세기에 들어서 상당한 발전을 보여, 314년의 아를 시노드(Synod of Arles)와 359년의 아리미눔 교회회의(Council of Ariminum)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특히 켈트 교회의 주교들이 314년 아를 시노드에 참가한 것은 천주교의 공식 문헌에 남아있는 기록으로서,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의 켈트인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절 날짜를 독자적으로 계산하는 등,[18] 기존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이나 로마인 기독교 신자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성공회 신자들이 대륙 교회와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의 성배 전승이 있다. 예수 사후에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꿈에 나타난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배를 가지고 당시 로마 제국의 서쪽 끝이었던 브리타니아에 와서 성배를 숨겨두었다는 것.[19] 아서왕 이야기를 비롯한 켈트족의 전설들은 이 전승을 기반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전승에서 한발 더 들어가, 천주교가 사도 베드로로부터 이어내려오는 교회이고, 정교회사도 안드레아스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이듯이, 성공회도 아리마태아의 요셉으로부터 내려오는 교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2.3. 헨리 8세 이전, 로마 교회와의 갈등[편집]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 섬을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속주를 세운 이래로 브리튼 섬은 로마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자연스레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로마가 410년 모든 군대를 철수시킨 후의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가 완전히 깨지게 되고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게 된다.[20] 이 때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브리튼섬 공략을 감행했다.[21][22] 그 결과,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의 (현재 스코틀랜드웨일즈 지역을 제외한) 중부와 남부에 자리잡게 되었고[23], 켈트족은 브리타니아 섬의 변방 산악지대로 밀려나게 되면서, 영국 역사의 주역은 켈트족에서 앵글로색슨족으로 바뀌게 된다.

597년 대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시기[24] 로마 태생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주교로 서품되어 잉글랜드로 건너가 당시 켄트 왕국의 왕 에텔버트(Ethelbert)[25]에게 잉글랜드 군주 중에 최초로 세례를 주었다.[26] 에텔버트의 왕비 베르타는 프랑크 왕국 계열의 네우스트리아 왕국[27]의 공주로 하리베르트 1세의 딸이며, 앞서 프랑크 왕국은 이미 대륙에서 5세기 클로비스 1세 시절 천주교로 개종했었고, 열렬한 기독교도로 알려진 브륀힐트 여왕의 조카였기 때문에[28] 대륙에서 시집 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로마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켄트 지방에 안전하게 상륙하고, 포교할 수 있었다. 이를 보아 잉글랜드의 지배계층에 이미 기독교인이 상당수 세를 얻고 있었으며, 다른 지배층 또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개종에 거리감이 없었다는걸 보여준다.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과 에텔버트 왕의 세례 사이 시기와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를 떠나있었을 시기에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천주교서유럽에 퍼지는 과정은 이러한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각지에서 기독교화된 로마인들이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성당을 세우고 그곳 유력자들을 주교로 삼아 이민족 침략자에게 맞서 재산을 기부하여 보호하였고, 각지의 교구에서 서유럽 교회의 중심지인 로마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수위권을 인정한 것이 대략적인 서유럽 교회의 성립사이다. 한편 서로마 제국은 망했어도 도시 로마는 여전히 부유했기 때문에 각지에 자금을 지원해 주면서 영향력을 키워갔고, 서로마 권역을 벗어난 동방 시리아까지 로마 교회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 헨리 2세는 교회 재산과 성직자 신분에 대한 이견으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였다. 성직자의 범죄를 로마 교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던 것. 그러던 중에 왕의 기사들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을 암살했고,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교회와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다.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해 회개하고 교황에게 용서받는 과정 중에, 교회 재산 관리권과 같은 이권이 어느정도 국왕에게 오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3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쓸 군자금이 필요하니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더 걷으라"는 요청을 받는다. 로마 교회는 이런 무리한 과세 요청에 한 술 더 떠서,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거두었음에도 만족할만한 모금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헨리 3세에게 예비 파문을 내린다.[29] 이를 고깝게 본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오히려 국왕의 편을 들었다.[30]

14-15세기 백년전쟁 시절에는 천주교 교황청로마아비뇽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시절 잉글랜드 왕국은 로마 교황 쪽으로 줄을 서서[31], 아비뇽 교황을 대놓고 무시하였으며, 대포로 위협하여 도리어 교황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잉글랜드 교회는 종교개혁적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존 위클리프를 이미 14세기에 배출하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그를 따르는 무리인 롤라드(Lollady)파와 함께 천주교회의 전통주의, 중세의 스콜라 철학, 그리고 성인, 성유물, 성해에 대한 공경을 성경에서 서술을 찾아볼 수 없고 성서상 기독교 교리와도 충돌하는 미신으로 보아 비판하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주장했고 이를 강조하려 성경영어로 번역했고[32] 성체성사의 성변화(화체설)[33], 교황의 수위권 등 교회제도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었다. 이는 후대 얀 후스종교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 교회에서는 1378년 당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에게 위클리프를 체포하여 정죄할 것을 요구했으나, 리처드 2세는 이 요구를 무시했다. 이에 로마에선 다시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에게 위클리프 처벌을 지시했지만, 리처드 2세는 이에 앞서 옥스퍼드 부총장을 처벌했다.

2.4. 헨리 8세의 종교개혁[편집]

  • 헨리 8세의 아들낳기 염원과 이혼 문제는 헨리 8세와 연관 항목을 참조하면 될 것이고, 이하 종교개혁과 관련된 내용을 설명한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교리나 신앙을 체계적으로 바꾼다기보다는, (잉글랜드 내에서) 교회 조직의 수장을 국왕으로 바꾼다고 선언한 것에 가까웠다.[34] 교황이 명목상으론 서방 교회 전체를 주관하는 권한이 있긴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신성로마제국을 제외하면[35] 세속 군주에게 교회 조직의 운영을 위임했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36]와 같은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이고 대주교고 간에 멀리 있는 교황보다 왕의 신하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성직자들은 평신도인 왕이 재판할 수 없는 신분으로 이론상으로는 중세 시기 왕이 마음대로 재판할 권한이 없었고, 교회에 조직에 관한, 그리고 교회에서 주관하는 관혼상제는 성직자들이 왕에게 이견이 있을 경우 교황에게 항소할 수 있었는데, 거의 사문화 되었던 로마 교회의 이 성직자 신분에 대한 재판 관할권, 잉글랜드 교회에 관한 처분을 잉글랜드 외 다른 조직에 대한 상소권을 반역으로 선언한 것... 이것이 곧 수장령 (Acts of Supremacy, 首長令)이다.

헨리 8세는 수장령과 이의 후속 법령인 반역법(Treasons Act)를 근거로 토마스 모어와 존 피셔를 처형시켰다.[37]

잉글랜드에서도 종교개혁이 본격화되자, 도처에서 성직자를 중심으로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다. 성직자들의 반발에는 신앙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성직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주요 이유는 정부의 개혁 정책으로 여러 교구들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38]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국왕의 이혼을 위해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했으니, 당연히 반발이 극심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의 원래 의도는 어디까지나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해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간섭 받지 않는 교회 조직을 만드는 것이지, 잉글랜드 교회 체제 전체를 전복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개혁을 움직인 성직자들도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잉글랜드 교회만의 독자적인 신학을 정립하려는 의도였기에 초기 성공회는 천주교적인 외적 요소들에 루터회장로회의 교리를 조금 첨가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 헨리 8세 이후[편집]

헨리 8세 사망 이후 잉글랜드 교회는 한동안 혼란을 겪게 된다.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 시절 에드워드의 외가를 비롯한 대륙의 복음주의 성향 신하들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시 헨리 8세 시절 천주교로 거의 회귀한 잉글랜드 교회를 대륙에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에드워드가 요절하고 이혼의 원인이 된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인 메리 1세 시대가 열렸다.

메리 1세는 개신교에 대한 박해 때문에 전통적으로 '블러디 메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잘 알려져있다. 메리가 국교를 가톨릭으로 되돌린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스른 것이었으며, 또한 펠리페 2세와의 부부동군연합은 스페인의 광신적 신앙에 잉글랜드를 무방비로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으로 영국 사학계를 지배한 휘그 사관(Whig History)에 기반해있다. 휘그 사관은 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개인의 자유를 위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영국 역사를 바라보며 이의 원동력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학계에서 메리 1세에 대한 휘그 사관적 해석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의 기반이 된 휘그 사관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비판으로 사실상 학계에서 퇴출되었으며, 현재 학계에서 결정론적 사관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인다. 메리가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보다 더 광신적이였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메리를 역사 앞의 반동으로 보는 시각은 근래의 사학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고 보는 견해는 16-17세기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의 즉위 당시 아일랜드가톨릭, 잉글랜드런던은 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런던에서도 대략 3분의 1로 추정되며 식자층이든 도시인이든 프로테스탄트는 분명히 소수였다. 켄트 지역에서도 개신교의 위치는 잘해야 상당한 규모의 소수파(significant minority)였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인클로저 운동의 진행으로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메리 1세 즉위 당시의 잉글랜드는 가톨릭 국가였다는게 현 학계의 중론이라는 점이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교회가 필연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39]

그리고 블러디 메리론을 미는 쪽에서는 종교를 이유로 처형당한 숫자가 엘리자베스가 훨씬 적다면서 옹호하는데, 당대 잉글랜드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평가이다.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도들은 가톨릭 신자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다만 신앙 때문에 고통받는 개신교 신자들의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단'보다는 '반역죄'를 공식적인 처형 이유로 들곤 했다. Ronald Hutton이 지적하듯, 메리 1세는 그 치세 중 종교를 정면에 내건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던 유일한 튜더 군주였다.[40] 즉 '공식적인' 이단혐의로 몇명이 처형받았는지, '공식적인' 종교 슬로건으로 몇 건의 반란이 일어났는지를 거론하며, 군주의 광신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실질적으로 군주들의 신앙에 몇 명이 이단 혐의로 처형되었는지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메리가 엘리자베스보다 더 광신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근거는 없다. 오히러 Hutton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처형당한 가톨릭 신자의 대다수는 단지 가톨릭 신앙을 지속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음을 지적한다.[41]

엘리자베스 1세가 가톨릭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즉위 초창기'에 국한되었던 일이다. 재위 10년쯤이 넘었을때, 가톨릭 세가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서 가톨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엘리자베스는 대대적인 학살로 답한다. 문제는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그 지역 민중들에게까지 가혹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인데, 최소한 700명 이상이 처형당했고, 당시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교수형당한 시체가 걸리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엘리자베스가 메리보다 종교적 이유로 사형을 덜 시켰다'는 주장은 이런 학살의 희생자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주장이다(K. Kesserling, Northern Rebellion, 2007).

또한 엘리자베스는 라틴어 미사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교수척장분지형을 허가하고, 가톨릭 사제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요크의 가톨릭 신자 여성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등[42] 처형의 잔인성 면에서는 메리 시대의 화형보다 하등 나을게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시기 추진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다. Peter Cunich는[43]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과 옛 전례에 대한 향수, 영적 공허감이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교리와 예정설 등으로 채워지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지적한다. 잉글랜드의 개신교화는 대단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메리는 단명하고 엘리자베스는 장수한 것이 잉글랜드가 성공회 국가가 된 주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초기에는 가톨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냈다. 그녀 역시 잉글랜드 성공회 교도들의 소망과는 달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스페인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1558년 2차 수장령을 내려서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직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이로 인해 엘리자베스 1세는 1570년까지 12년 넘게 가톨릭교회에서 파문을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신교 탄압 성향과 이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던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였다. 이것은 정치적 고려도 작용했지만, 교황청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 정책을 보고 잉글랜드 국교회가 언제든지 가톨릭으로 복귀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가톨릭 탄압은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잉글랜드 침략으로 유발되었다. 열성적인 성공회 교도들은 가톨릭 사제들의 축출을 시도했고, '가톨릭교도는 매국노이며 외세의 앞잡이다'라는 식의 중상모략으로 가톨릭교도들을 공격했다.

1570년 교황은 엘리자베스 1세와 잉글랜드 왕국이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그녀를 파문한다. 스페인의 침공이 임박하자, 엘리자베스 1세는 이에 대응하여 헨리 8세 시절처럼 1584년 종교적인 일로 로마 교황청에 상소(上訴)하는 법을 폐지하고, 가톨릭교회의 사제를 반역자로 정죄하고 벌한다는 법을 제정하며 가톨릭 탄압 국면으로 전환했다.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는 청교도가 권력을 잡게 되어[44] 보수적인 장로회 문화로 주교제가 폐지되고 칼뱅주의에 영향받게 된다.

왕정 복고 이후로는 독립파 청교도[45]들이 숙청되고 찰스 2세~제임스 2세 시기 천주교 용인 정책으로 다시 기존 국교회 성향과와 개혁파 복음주의 성향 신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윌리엄 3세의 관용 조치로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에 위배되지 않는 이상 국교회를 제외한 다른 개신교 교파에 대해서 불이익을 폐지하게 된다.[46] 사실상 청교도들에 대한 조치였으나 이미 청교도들은 왕정 복고 시기 네덜란드나 신대륙으로 많이 이민을 가서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인 차별 정책은 19세기까지 지속된다.

3. 특징[편집]

한마디로 'Via Media'(중용의 길)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위에 기술한 역사적 배경처럼 잉글랜드 교회가 종교개혁을 바탕으로 국가교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최소한의 선은 지키되 [47] 최대한의 질서정리와 평화 유지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은총'이니 '섭리'니, 손가락 몇 개를 가지고 성호를 그어야 하는지, 예수는 사람이자 하느님이시기는 하지만 인성과 신성이 정확히 어떻게 공존하는지, 성모 마리아의 순결이 어떠하며 성체와 성혈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하시는지, 세례는 어떻게 주어야 적법한지 등을 가지고 교조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 성공회의 탄생은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독자적이고 극단적인 교리보다는 기존 종파에서 좋은 것을 취해서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교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던 탓에 성공회는 개신교 종파 중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교단으로 자리잡았다고 평가받는다.

성공회는 신앙의 3가지 기준으로 '성서', '전통', '이성'을 제시한다. 성공회 역시 종교 개혁의 후폭풍으로 탄생한 만큼 '성서'의 권위를 가장 중요시한다. 또한 교회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고 판단하는 '이성'이 전통보다 앞선다고 본다. 성서에 대한 이성적 작업으로 축적된 신앙의 결과물이 '전통'이라고 본다.

성공회는 신앙의 3가지 기준인 성서와 이성과 전통의 상호 보완과 긴장 관계를 통해 극단적인 주장과 오류를 경계하는 '중용'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중점을 둔다. 이러한 이유로, 성공회는 타 개신교에 비해 성모 마리아에 대해 더 유화적인 시각을 보이는 등, 가톨릭 전통을 더 많이 물려받은 경향을 보인다.

3.1. 성공회의 세 부류[편집]

성공회 내에는 크게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 저교회파(복음주의), 광교회파(자유주의)라는 세 가지의 흐름(분파)가 있다. 혹자는 앵글로-가톨릭(Anglo-Catholic), 고교회파(High Church), 저교회파(Evangelical), 광교회파(Broad Chruch)로 나누기도 한다.[48] 개신교 신학자인 존 웨스터호프는 앵글로-가톨릭, 복음주의, 자유주의, 광교회파로 나누었다.[49] 본 문서에 나온 구분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편의상 나눈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주교제 하에서 일치된 교회의 권위와 성사와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천주교나 정교회와 같은 유산을 공유하고자 하는 고교회파, 주교의 권위나 교회의 전통보다 다섯 솔라(Five Solas)에 기초한 성서와 믿음을 강조하며 일반적인 개신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흐름은 저교회파, 고교회파와 저교회파의 유산을 골고루 받아 들이는 한편 사회구원과 진보 신학 성향을 보이며 자유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흐름은 광교회파이다. 이를 앞에 성공회의 신앙에 대한 관점(성서, 전통, 이성)을 통해서 고교회파는 전통의 눈으로 성서와 이성을 보고, 저교회파는 성서의 눈으로 전통과 이성을 보고, 광교회파는 이성의 눈으로 성서와 전통을 본다고 흔히들 표현한다.[50]

18세기, 경직되었던 영국 성공회에 존 웨슬리 등을 필두로 한 복음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당시 천주교적인 형식과 보편교회로서의 전통을 고수하던 부류에서 '우리가 고교회(High Church)고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너희들은 저교회(Low Church)다.'라며 만든 용어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당시 존 웨슬리의 신학이나 조지 휫필드 등의 청교도 복음주의의 영향을 받은 성공회 신자들 중에 성공회에 남은 부류가 이전부터 성공회 내 개신교 신앙을 강조해오던 저교회파에 합류했고, 성공회를 나간 부류가 감리회를 세우게 된다. 당대에 웨슬리는 그 스스로가 고교회파로 출발했으며, 성공회 내 주류 복음주의(특히 칼뱅주의)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한 인물이다. 웨슬리와 감리회 신학의 발흥은 기존의 저교회파 복음주의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자생적인 개신교 신앙 운동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또한 20세기 들어 성공회 내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부류가 생겼는데, 이들을 광교회파(Broad Church)라 한다.

물론 다른 개신교 교파와 마찬가지로, 교회마다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로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는 경우는 드물다. 어떤 성공회 교회도 "우리는 고교회파요." 혹은 "우리는 저교회파요." 하지는 않는다. 한 교회 안에 고교회파와 저교회파가 공존할 수 있고, 관할사제는 고교회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저교회파적인 신앙을 가진 신자가 다수인 교회도 있을 수 있다.[51] 혹은 어떤 사람은 전례와 의식을 대단히 중요시해서 고교회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신앙관은 저교회파일 수도 있다. 사실상 대한성공회에는 이러한 부류의 신자들이 많은 편인데 아마도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성공회 성향을 테스트 해볼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 https://www.gotoquiz.com/what_kind_of_episcopalian_are_you 영어주의.
파파고로 번역시 오역이 심하니 주의할 것.

3.2. 다른 개신교 교파와의 비교[편집]

성공회 역시 가톨릭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개신교 교파에 속한다. 성공회가 가톨릭처럼 주교제를 실시하므로 다른 개신교파와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교회 제도와 개신교인지 여부는 별개이다. 루터교회 역시 형식은 구교와 비슷해 주교가 있는 교단도 있으며[52][53] 감리회 감독도 원래는 주교직이다[54]. 목사는 감독의 수하로 교회를 아무데나 못 짓는다는 데서 칼뱅주의파인 침례회, 장로회 등과는 다르다.

앞서 이야기한 성공회 특유의 정신인 'Via Media'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용'의 자세를 중시해 가톨릭칼뱅주의 개신교를 포함한 여타 개신교나 정교회 간 균형점을 추구하고, 모든 기독교 종파에 대한 관용을 추구한다. 교리 해석에 있어서도 다른 개신교 종파에 비해 온건한 경향을 보인다.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는, 천주교,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무교회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 있다. 성공회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속하는 것을 신자의 의무로 보기에 다른 개신교 종파에 비해 이에 대해서 더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

사도전승에 대해서도 성공회와 개신교의 입장이 갈린다. 성공회는 주교제에 따른 사도전승을 인정하고 주장하는 반면, 루터교 일부를 제외한 개신교는 사도전승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천주교정교회와는 달리, 성공회는 7성사세례성사성체성사를 제외한 5성사를 신앙생활의 필수요소로 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는 이 5성사를 비성경적이라고 보아 거부하여 교회 예식으로만 남겨놓고, 성공회는 교회의 전통으로서 이를 존중하되, 신앙 생활의 핵심으로 보지는 않는다.

구원론에서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온건한 예정설을 받아들인다. 이 부분에서는 장로회와 교리를 공유하는 셈. 다만 이는 역사적으로 성공회 신학의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지 아래 성모마리아와 관련된 교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관구와 신자들이 믿어야 할 교리라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대한성공회를 비롯한 많은 성공회 공동체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별세자들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인정하며 권장한다. 이는 전통적인 주류 복음주의자들과 미묘하게 다른 점이다.

루터교회와 함께, 공식적으로 성모마리아 공경을 인정하는 개신교 종파에 속한다. 성공회는 옥스포드 운동 이후 가톨릭식 관습을 대거 복구시켰고 성모 마리아를 위대한 신앙의 모본으로 보며 신앙을 본받는 차원에서 고대 및 중세로부터 이어져 온 성모축일들을 지키지만, 천주교처럼 성모 마리아를 특별한 기도나 중보(전구)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은 희박한 편이다. 천주교의 핵심 마리아론인 성모평생동정, 성모무염시태, 성모몽소승천도 정식 교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개별 차원에서의 해당 교리에 대한 믿음 내지 신심 표명을 막지는 않는다. 심지어 영미권의 소수 관구에서는 로마 가톨릭처럼 교회력에 성모안식축일을 '몽소승천(Assumption)'이라고 표기한 곳도 있다. 로완 윌리엄스 전 캔터베리 대주교의 경우, 로마 가톨릭의 성모발현 성지로 유명한 루르드를 순례한 후 <Ponder these things : Praying with icons of the Virgin>이라는 짧은 수필 겸 에세이를 저술하기도 했다.[55]

대부분의 개신교와 달리, 신자들이 세례명(성공회 내부에서의 표현은 '신명')을 가진다.

대한민국의 경우, 한국의 개신교의 보수교단들이 근본주의 색깔이 강한 것과 대조적으로 성공회는 기장이나 감리교등과 같이 성향이 비교적 온건하다고 평가받는다.

3.3. 천주교와 비교[편집]

다른 개신교 교파들보다 천주교와 공유하는 전통이 많다.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세례명을 가지는 것이 대표적.

그러나 성공회 역시 엄연한 개신교 종파인 만큼, 천주교회처럼 하나의 구심점 아래 계서적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천주교와 분명히 구분된다.

교리 측면에서 볼 때, 장로회가 기존의 천주교적인 요소들 가운데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것들을 모두 폐지한 데 반해, 성공회는 성경과 충돌되지 않는 것들은 유지를 시켰다. 다만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관구처럼 성공회 주류 복음주의와 다르게 전통적인 청교도에 가까운 하드코어한 정통 칼뱅주의를 표방하는 곳도 있기는 하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아예 '시드니 성공회(Sydney Anglicanism)'이라는 문서가 따로 개설되었을 정도. 다만 성공회 내에서 교황의 지상수위권 및 치리 권한을 받아들이고 전례도 현대 천주교식으로 하는 '성공회 교황주의(Aglican Papalist)'처럼 성공회 내에서는 아주 극소수에 속한다. 참고로 이곳도 여성 사제를 서품하지 않는다.

기독교 내에서 성공회의 포지션은 약간 미묘한 면이 있어서 사람들마다 인식이 제각각 조금씩 다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교리상으로 성공회를 개신교로 간주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다른 개신교 교파의 신자들 사이에서도 성공회 교인들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받아들이는 데에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성공회는 전례상 옛 가톨릭식 요소를 유지하고 있어서, 반(反) 천주교 혹은 반 에큐메니컬 성향이 짙은 극우 개신교인은 성공회를 천주교에 물든 '천주교 2중대' 비슷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 그들은 천주교를 아예 다른 종교로 보기 때문에 성공회를 보는 눈도 고울 리가 없다.

천주교 신자들 중에는 형식적인 면이 닮아있기 때문에 다른 개신교보다 성공회에 친근함을 느껴서 교황이 없는 가톨릭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56] 어떤 가톨릭 신자들은 성공회 = 영국 천주교로 착각하기도 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공회를 그저 '천주교와 그나마 비슷한 개신교'라고 생각한다. 교파 간 교류에 무관심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있는 독립된 종파'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천주교개신교의 전통을 고루 받아들이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성공회는 성공회다."라고 생각하는 부류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성공회 신자들 중에서도 이유가 뭐든 자신들의 교회를 그렇게 정의하는(혹은 그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이러한 경향은 성공회가 루터교를 비롯한 대륙 개신교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특성과 역사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20세기 이래로 일부 종교 통계 및 종교학 및 신학계에서는 성공회를 개신교와 따로 구분해왔다. 천주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공식적으로 그 독자성을 인정해 온 데다가 성공회가 자신들을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든가 '비성경적인 교회'라고 음해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있어 마음이 놓이는 편이다.

성상을 용인하는 것도 가톨릭과 비슷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39개조 신조에서부터 성상이나 묵주성인 공경 등에 대해 부정하는 조항이 있지만, 앞의 주석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39개 신조는 옥스퍼드 운동을 거치면서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 되었기에 성공회 성당에 가면 십자고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저 신조를 철저하게 지켜서 십자가에 촛대만 올려놓는 등의 간단한 인테리어를 가진 교회도 볼 수 있긴 하나[57] 전체적으로 고교회파, 광교회파 성향이 강해진 현대에는 흔하지 않다.물론 성모상이나 성인들의 성상은 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고 외국 큰 성당을 가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 성인들의 모습을 그려 넣거나 성당에 이콘을 비치하는 경우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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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의 일부 고교회파에서 치루는 성모상 행렬.

성공회는 보편교회임을 주장하지만, 천주교 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58] 교황 레오 13세는 성공회 사도계승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이는 현재까지도 철회되지 않은 상태다.

천주교과 대비되는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들이 혼인 가능하다. 그리고 혼인한 성직자는 주교도 될 수 있다. 예컨대 2015년 현재 세계성공회의 수석 주교이며, 영국 성공회의 대표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저스틴 웰비는 결혼했고 아이도 6명이나 있다. # 참조. 그러나 성공회 역시 수도자의 혼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수도자신부인 경우에도 마찬가지.

파일:external/i.cbc.ca/anglican-church-priest-allison-courey.jpg

지역에 따라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는 곳이 있는 것도 천주교의 차이점이다. 비슷한 경우로 일부 국가에는 커밍아웃동성애자 사제를 인정하기도 한다.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성공회는 하나의 구심점 아래 위치한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 입장이 다르다. 관구에 따라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거나, 여성 사제는 인정하나 여성 주교는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동성애자 사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성공회는 천주교처럼 성직자 직제를 인정하면서도 만인사제론을 부정하지 않으므로 평신도-사제, 사제-주교 간 '순명권'의 개념이 천주교에 비해 약한 편이다. 또한 성공회 교회법은 천주교 교회법[59]에 비해 짧고, 덜 치밀한 편이다.[60]

개신교 목사가 천주교로 옮기면 천주교의 사제가 될 수 없고 그저 평신도만 되지만[61], 성공회 신부주교가 천주교로 개종하고 사제 서품을 다시 받으면 천주교의 신부가 될 수 있다. 성공회의 성직자 중 남성 기혼자, 남성 미혼자가 천주교로 개종해도 사제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특례를 받고 있다.[62] 당연하겠지만 여기에는 성공회 여성 성직자 출신 개종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이러한 특례는 교황의 사목적 배려와 그동안의 천주교-성공회 간 교류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천주교로 옮긴 성공회인 중 가장 유명한 존 헨리 뉴먼(성공회 주교 출신)은 이후 추기경에 서임됐고, 사후 시성됐다.

반대로, 가톨릭이나 정교회 등 사도전승을 계승받았다고 주장하고, 역사적 주교제도를 유지해온 교단 출신 성직자들이 성공회로 옮길 때 성공회에서는 그 성직을 인정한다.

사회 문제 참여, 정치 참여 문제에서 천주교와 사뭇 다른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천주교회는 성직자가 세속 권력을 얻는 것(의회 진출 등)을 제한하지만(교황의 승인을 요함),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애초에 캔터베리 대주교 등 영국 성공회 내 특정 고위성직자들은 영국 상원의원을 겸직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재정 신부가 성직자의 세속 정치 참여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정치계에 진출한 성공회 성직자의 성직은 휴직 처리된다.

위와 같이 성공회는 겉으로는 천주교와 닮은 점이 꽤 보이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 개신교에서는 보수적인 입장[63]의 신자일수록 성공회를 (부정적인 의미로) 천주교에 가깝게 본다.

정리하자면, 성공회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종파 중에서 가톨릭과 가장 비슷한 교회라고 볼 수 있다.

3.4. 감사성찬례[편집]

다른 개신교 교파에 예배가 있고, 천주교에는 미사가 있고, 정교회에는 성찬예배가 있다면 성공회에는 감사성찬례가 존재한다.

이전 기도서에는 미사라고 언급되어왔기에 나이 지긋하신 교우분들이나, 모태신앙인 교우들은 미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른 개신교에서 건너온 이들 중에는 예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한성공회 기도서(2015)에서 나온 명칭은 감사성찬례이다.

사실상 성찬례, 미사, 예배 모든 용어들이 함께 쓰이고 있다.

4. 조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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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에 있는 안경 낀 백인은 로완 윌리엄스 전 캔터베리 대주교이고, 맨 오른쪽의 아시아인은 박경조 프란시스 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주교이다.

천주교와 비슷한 하드웨어 때문에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64]가 성공회의 수위권을 지닌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다른 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성공회 교회들은 모두 상호병렬적 수평 관계이다.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 대표성을 지닌 점을 빼놓고는, 어디까지나 '잉글랜드교회' 역시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일부이다.

간혹 천주교 신자들이 세속적인 정치체제로는 자국에 충성하나 신앙적으로는 바티칸 아래 있는 것처럼, 성공회도 잉글랜드 국교회 수장인 영국 왕실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16세기 헨리 8세 시절 수장령 선포 후 잉글랜드 교회를 국가교회화시켜 영국 내에서의 교황의 지위를 왕에게 귀속시킨 사건 이후 이후 역사에 대해 잘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회를 믿으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신처럼) 섬기냐라는 농담을 듣기도 한다고. 가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성공회도 평범한 그리스도교 교회일 뿐이며 영국 국왕을 숭배하지 않는다. 천주교교황이나 이탈리아 총리를 숭배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성공회가 영국만의 국가교회라는 영국 국교회라는 명칭도 1846년부터 보편교회를 추구하는 성공회로 바뀌었다. 그리고 앞서 서술하다시피 잉글랜드 성공회는 여타 다른 성공회와 수평 관계이며 수위권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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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왕은 성공회의 수장이 아니며, 잉글랜드 성공회의 수장조차도 아니다. 영국 군주가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직을 포기한 것은 비교적 최근도 아니고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절부터이다. 교황 수위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천주교 교리[65]를 지지한 헨리 8세 시절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내려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首長, Supreme Head)임을 선언했는데, 이는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위한 정치적인 행위에 불과했다.[66]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이어오는 주교에 의해서 치리(治理) 되는 지역/국가별로 독립적인 성공회 관구들이 공통의 신앙을 가지고 연대한 조직으로 이를 통해 성공회는 스스로를 보편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공회의 출발점이자 지금도 영국 성공회의 정신적 수장인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전체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정신적인 지주로 수석 주교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체 성공회 입장을 조정한다. 이런 점 때문에 운영방식은 10개의 독립교회를 중심으로 각 교회의 최고 주교가 각 지역에서만 자치권을 행사하며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동방정교회의 운영과 매우 흡사하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특별히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노력의 의무를 지녀 10년마다 전체 성공회 주교들의 회합인 '람베스 회의'를 주관한다. 어디까지나 의장주교이며 정신적인 수장을 맡는다는 점에서 수많은 지역 성공회들에 권고와 자문 정도만 할 뿐이지 그 역시 캔터베리 관구를 제외한 다른 성공회들의 신학, 조직, 재정 등의 문제를 치리할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관구가 하나의 독립교회로 역할하기 때문에, 비록 10개로 나누어져 있다곤 해도 어느 정도 계층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동방정교회에 비해 지역 교회에 독립성이 더 크며 이론적으로 같은 나라에 있어도 관구가 다르면, 다른 지역 교회와 별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며 나아가 다른 성공회 공동체와 교제를 단절할 수도 있다. 애초에 람베스 회의의 결정사항도 권고사항이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4.1. 갈등[편집]

2002년 캐나다 성공회의 교구들이 교회 내 동성결혼 집전을 허가하고, 2003년 미국 성공회가 동성애자 신부 진 로빈슨(Gene Robinson)[67]을 뉴햄프셔 교구 주교로 서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교회의 오래된 교리나 전통은 물론이고, 동성애 및 동성결혼에 대한 반대를 선언한 1998년 람베스 회의 결의안에 위배되는 사건이었다.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에서는 이에 반발한 보수적인 교구나 본당들이 잇따라 관구를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고, 아프리카 지역의 성공회 관구로 편입되거나 새 관구 혹은 새 교단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후 있었던 람베스 회의에서도 많은 보수적인 관구나 교구가 불참을 선언하는 일이 빚어졌다. 이는 전술한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유연성이 빚어낸 일로, 교구-관구-교황청 순으로 계층적 제도를 이루는 천주교에서 일개 교구가 교회를 탈퇴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세계 성공회 내부의 보수적인 관구 및 교구들은 1994년부터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는 모임을 마련해 정기적으로 대회를 가지고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세계 성공회의 41개 관구 중 26개 관구와 여러 교구 및 미국 성공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북미 성공회(Anglican Church of North America)와 브라질 성공회(Anglican Episcopal Church of Brazil)로부터 떨어져 나간 신생 브라질 성공회(Anglican Church in Brazil)가 참가하는 큰 모임으로 전체 8,500만 성공회 신자 중 약 75%를 대표한다. 이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으로 보수주의 및 복음주의를 상당히 강하게 지향하며, 특히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해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서 집단적으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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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적극적인 움직임은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성공회 미래 회의(GAFCON, Global Anglican Future Conference)로, 보수적인 성공회 지도자들이 람베스 회의에 대한 일종의 '대안'으로 조직한 협의체이다.[68] 개프콘은 2008년 이후로 정기적으로 대회를 가지면서 세계 성공회에 북미 성공회의 정식 인정 및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의 세계 성공회 공동체로부터의 배제를 요구하고 있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및 람베스 회의와 세계 성공회 협의체(Anglican Consultative Council)가 동성애 및 자유주의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2018년 예루살렘 대회에는 성직자 993명과 평신도 지도자 973명을 합한 1966명의 대표자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개프콘에 대해서는 글로벌 사우스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어서, 예컨대 글로벌 사우스에 소속되어 있는 예루살렘 및 중동 관구(Episcopal Church in Jerusalem and the Middle East)의 관구장 주교와 예루살렘 교구 주교는 그 자신이 보수적임에도 개프콘이 성공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며 비판적으로 보고 개프콘에 참여하지 않았다. 같은 관구에서도 개프콘에 대한 입장이 갈려서, 가령 호주 성공회의 뉴캐슬 교구 주교[69]는 개프콘에 비판적인 반면 시드니 교구 주교는 개프콘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70] 캔터베리 대주교는 말할 것도 없이 로완 윌리암스와 저스틴 윌비는 개프콘에 대한 자제를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분권화 경향에 진보파인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세계 성공회 공동체 계약서'를 전 관구에 배부하여 이를 승인하여 공통적인 신앙과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이 성공회 계약서는 성향에 관계없이 많은 관구들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온건보수파인 저스틴 웰비 대주교는 2020년 람베스 회의에 동성결혼에 대한 논의를 위해 동성과 결혼한 상태인 주교를 초청하면서도 그 파트너의 초청은 불허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외려 미국성공회를 위주로 한 진보파와 개프콘을 위주로 한 보수파 모두에게 반감과 비판을 샀다.[71]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 성공회의 수장으로 종교개혁으로 잉태된 종파로서 갖는 필연적인 분열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 된 교회로서의 성공회를 지켜나가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지속하고 있지만, 동성애와 동성결혼 문제로 촉발된 세계 성공회의 분열은 쉬이 진정될 기미를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5. 세계 성공회[편집]

5.1. 캔터베리 대주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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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요, 전 세계 성공회의 일치의 상징으로서,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대표한다. 잉글랜드 교회를 치리하고, 세계 성공회의 주교 회의인 람베스 회의(the Lambeth Conferences)를 주최하며, 잉글랜드 밖 성공회에 사목적 권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캔터베리 대주교는 천주교교황처럼 교회의 수장(Supremacy) 노릇을 하지는 않는다. 애시당초 성공회 역시 다른 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교황과 같은 특정인이 교회의 수장을 맡는 시스템을 부정하며 창설됐기 때문이다.
  • 켄터베리의 어거스틴: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라 알려진 교부시대 히포의 어거스틴과는 다른 인물이다. 로마 출신으로 서기 597년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에 파송된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605년에 선종하였다.
  • 아엘프라이: 앵글로색슨 족 지배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1012년 바이킹의 침략 때 포로로 잡혔으나, 자신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이 세금을 내게 할 수 없다면서 몸값을 내는 것을 거부, 결국 바이킹들에게 소뼈로 돌팔매질을 당한 뒤 도끼자루로 맞아 죽었다. 바이킹들은 거룩한 이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불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 토머스 베케트: 1118년 태어나 1170년 살해당한 주교이자 종교재판관. 헨리 2세 시절 국왕이 원하는 것보다 죄인들에게 온건한 처벌을 내려 왕의 심기를 건드렸고, (국왕의 직접 명령인지 아니면 수하들의 과잉 충성의 결과인지는 불확실하지만)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한다. 사후 즉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천주교와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본다. 이후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관계를 단절하는 등 파격적 행보를 보이던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헨리 8세가 노린대로) 죽은 베케트가 법정에 출두하는 일은 당연히 없었고(...) 30일 뒤 개최된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모셔지던 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T.S. 엘리어트의 "대성당의 살인"에도 등장한다.
  • 토마스 브래드워딘: 아우구스티누스학파 신학자로 대주교에 재임한 건 겨우 38일에 불과하다(흑사병으로 별세). 사실 천주교 시대에 재임하기는 하였으나, 존 위클리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마르틴 루터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반펠라기우스주의[72]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 신학계에 맞서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290년 태어나서 1349년 선종하였다.
  • 토마스 크랜머: 전례 개혁자, 종교개혁 순교자. 성공회 기도서 편찬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공회의 성인이라서 순교일인 3월 21일을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는 축일로, 대한성공회에서는 기념일로 지낸다. 물론 토마스 크랜머를 세례명으로 쓸 수도 있다. 1489년 태어나서 1556년 사망하였다.
  • 레지널드 폴 추기경[73]: 마지막 로마 가톨릭측 캔터베리 대주교.
  • 매슈 파커: 개혁 신학에 따른 성공회 39개 신조를 작성하였다. 1504년 출생하여 1575년 사망하였다.
  • 윌리엄 로드: 고교회파(Anglo-Catholic)로서 성공회(당시 잉글랜드교회)에 가톨릭적 전례와 제의를 다시 도입하여, 청교도들의 집중 타겟이 되었고, 결국 처형당한다. 1573년에 태어나서 1645년에 사망하였는데, 훗날 찰스 디킨스는 "영국사 산책"에서 로드를 포악한 인물이라고 혹평한 바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영국에서 유행하던 휘그 사관의 영향이며, 현재 영국 사학계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청교도측의 과도한 배타성이 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윌리엄 템플: 노동운동과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당시 비단 성공회 신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1881년에 출생하여 1944년 선종하였는데 최초로 화장된 캔터베리 대주교이기도 하다.
  • 지오프리 피셔: 방한하여 대학로교회(당시 성 베다 교회) 성당을 축성하였다. 세계교회협의회 총장을 맡기도 했다. 때문에 세계교회협의회를 반대하는 일부 개신교인들이, 피셔 대주교가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낭설을 유포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74]
  • 마이클 램지: 가톨릭 교황 바오로 6세와 교회일치운동에 관해 대화를 한적이 있다. 1973년 방한한 이력이 있다. 방한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예방하고 동국대학교에 가서 불교계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 도널드 코건: 1909년에 출생하여 2000년에 선종하였다. NEB 성경(The New English Bible) 번역에 참여하였다.
  • 로버트 런치: 1921년 태어나 2000년 선종하였다. 자유주의적 고교회파(Liberal Anglo-Catholic)로서 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하였다.
  • 조지 캐리: 1935년생이다. 캐리 대주교 때에 잉글랜드 교회에서 처음으로 여성 사제를 서품하였다.
  • 로완 윌리엄스: 웨일스 사람이다. 장로교 출신으로, 자유주의적 고교회파(Liberal Anglo-Catholic)다.[75] 104대 캔터베리 대주교.
  • 저스틴 웰비: 런던 사람이다. 이튼 칼리지[76] ,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성직 입문 전에는 정유회사 임원으로 일했다. 현임 캔터베리 대주교(105대).

5.2. 영국 및 아일랜드의 성공회[편집]

5.2.1. 잉글랜드 국교회[77][편집]

파일:잉글랜드 성공회 로고.svg
Church of England.
홈페이지
잉글랜드 국교회 주교회의 인준 성경 목록


105대 캔터베리 대주교인 저스틴 웰비 주교 서품 및 교구장 승좌식 주요 장면 (2013년 영국 BBC 생중계)

성공회의 모체로 간주되는 교회.

이름대로 잉글랜드를 담당하는데 잉글랜드 이외에도 웨일스 일부 지역[78], 영국 왕실령맨 섬채널 제도, 유럽 대륙[79]모로코를 직접 관할한다. 아무래도 유럽 본토에는 성공회 신자가 적다 보니 이렇게 관할 범위가 넓어진 것.[80] 대한성공회도 1993년 정식으로 한국 관구(province)가 성립되어 독립하기 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캔터베리 관구 소속이었다.

관구(province)는 캔터베리와 요크 둘이 있다. 캔터베리 관구는 잉글랜드 남부, 웨일스 일부, 채널 제도, 유럽 대륙·모로코(지브롤터 교구 관할)를 커버하며 30개의 교구(diocese)가 있다. 대한성공회의 경우 한국 관구가 독자적으로 설치되기 전까지는 캔터베리 관구 직할 구역이었다. 요크 관구는 잉글랜드 북부와 맨 섬을 담당하며 12개의 교구가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지도자이면서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 명목상 지도자로 간주된다. 잉글랜드 내 성공회 교구들은 원래는 천주교 산하 교구였지만[81], 잉글랜드 국교회가 형성되면서 천주교에서 떨어져나갔고 영국 천주교는 교구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고역을 겪기도 했다. 천주교 교구의 복설은 천주교 금지가 풀린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종교개혁기에 런던 교구가 성공회로 넘어가면서 천주교 측에서는 런던 지역을 관할하는 웨스트민스터 교구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는 것.
영국 법률적으로도 아예 잉글랜드 국교회가 잉글랜드의 국교(established church)로 지정돼 있다. 그래서 의회 귀족원(상원)에 아예 캔터베리 대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이 의원으로 임명된다. 이런 성직자들을 성직귀족(Lord(s) Spiritual)이라고 부르며 2015년 현재 총 26명이 있다. 당연히 성직자가 정치인처럼 의석을 갖는 데에 대한 비판 여론은 존재한다. 하지만 귀족원의 의석이 800석이 넘을 정도로 워낙 많아[82] 이들의 의석 비중이 적다. 그리고 현대 영국에서는 귀족원이 평민원(하원)의 보조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83] 성직귀족들이 정치 현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구조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 있다는 정도지 여론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여론의 격렬한 반발이 있었으면 예전에 이들의 의석이 폐지되었을 것이다. 다만 상원 개혁론이나 폐지론이 계속 있기 때문에 이 의석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미지수이다. 만약 상원의 모든 의석을 선거로 뽑는 식으로 바꾸거나 아예 폐지한다면 성직귀족 의석 또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상원 개혁을 하더라도 선거로 뽑지 않는 소수의 의석을 남겨놓는다면 이들의 의석이 남을 수는 있겠다.[84]

여담으로 잉글랜드 국교회에서는 KJV, RSV, NRSV, NIV, REB, NJB, ESV 성경을 전례용으로 인정하고 있다.출처(잉글랜드 국교회 주교회의 2002년도글) 일반적인 전례용으로는 NRSV 영국버전이 많이 쓰이고, 국가적인 의전 행사에는 KJV가 쓰인다.

전체 잉글랜드에서만 2011년 기준 전체 기독교인 인구는 59.4%이다. 세례교인수로만 보면 성공회 신자는 약 2,500만, 천주교 신자는 960만 정도라곤 하는데, 잉글랜드-웨일즈[85]에서 성공회 교도수가 50% 정도여야 하나, 둘 다 세례만 받고 실제로는 무종교이거나 냉담자 인구가 많아서 실제 신자는 더 적다. 천주교에선 성공회와 인구가 비슷하다고 주장하나 실제론 영국 전체로나 잉글랜드로만 보나 8% 정도이다. 실제 조사로만 보면 영국 전체의 성공회 신자 수는 860만, 천주교는 400만 정도이다. 전체 영국 전체 센서스 통계를 보면 영국 전체 인구에서 성공회 신자는 2015년 기준으로 17% 정도이다.

참고로 2009년 기록과 비교해 볼 때 영국 전체에서 성공회(19.9→17%)와 천주교 인구(8.6%→8%)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런데 개신교 타교파(14%→17%)와 이슬람은 늘었는데 특히 이슬람 인구는 2배 이상 늘어나는 추세고(2.4%→5%) 무종교 인구는 의외로(?) 정체 내지 약간 감소 추세.(50.7%→49%)



또한, 영국 성공회에서도 세속화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 영국 내의 새로운 선교적 교회 운동을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이라고 명하여 젊은층을 교회로 끌어들기 위한 각종 시도를 하고 있다. 교회의 새로운 표현들은 과거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비신자들의 편의와 변화하는 문화, 지역사회 선교를 고려한 새로운 교회 형태다. 여기에는 카페 교회, 청소년회관 교회, 길거리 교회, 숲 교회, 술집 교회 등이 있다.

2019년 2월 21일, 영국 성공회가 총회를 열어 일요일 예배 의무를 규정한 1603년 교회법 조항을 '모든 교회'에서 '성직자 담당 구역에서 최소 1개 교회만'으로 완화하는 내용으로 수정했다.기사 성직자와 신자 숫자가 줄어들어 소수의 성직자가 다수의 교구와 교회를 담당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반영한 것.

5.2.2. 웨일스 성공회[편집]

파일:웨일스 성공회 로고1.jpg
영어: Church in Wales
웨일스어: Yr Eglwys yng Nghymru
홈페이지

웨일스 대부분을 담당하는 성공회 조직. 웨일스 성공회에서 관할하지 않는 일부 지역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캔터베리 관구에 속해 있다. 웨일스 성공회 산하의 교구는 6개가 있다.

웨일스가 잉글랜드의 지배를 오래 받았던 탓에 웨일스만의 성공회 조직이 원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에 별도의 교회로 분리되었다. 이때부터 웨일스는 국교로 지정된 종교가 없다.

5.2.3. 스코틀랜드 성공회[편집]

파일:스코틀랜드 성공회 로고.jpg
영어: Scottish Episcopal Church
스코틀랜드 게일어: Eaglais Easbaigeach na h-Alba
홈페이지

스코틀랜드를 담당하는 성공회 조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동군연합 단계를 넘어서 완전히 한 나라로 합병한 시기의 군주였던 앤 여왕이 공식 설립자로 되어 있다.[86] 산하 교구는 7개가 있다.

참고로 Church of Scotland는 여기가 아니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장로회.

최근 다양성이 너무 지나쳐서 물의를 빚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한 교회 주일 감사성찬례에서 꾸란 낭독을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내용이라서 영국 내 보수적 성공회 인사들이 비판했다. 일단 보도에 의하면 성당 주임신부 허락으로 했는지는 확인해주지 않았고, 잉글랜드 성공회 측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꾸란을 낭독한 사실을 옹호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선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성공회는 물론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난민이나 기타 이슬람 교인에게 평일에 교회를 빌려주는 경우는 있지만, 아무리 상대 종교를 이해하려는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예배 중에 기독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게 내버려 두진 않는다. 만일 저런 사건이 일어난 곳이 천주교나 정교회였다면 주임신부는 중징계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파문당할 가능성도 충분했을 것이다.

람베스궁 대변인은 스코틀랜드 성 마리아 교회를 고소하겠다고 밝혔으나, 해당 교회는 "우리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관할권 밖에 있기 때문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말대로 잉글랜드 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분리되어있어 실질적 조치를 할 수 없다.

5.2.4. 아일랜드 성공회[편집]

영어: Chuch of Ireland
아일랜드어: Eaglais na hÉireann
홈페이지

아일랜드 섬 전체, 즉 독립국인 아일랜드 공화국과 영국령 북아일랜드 모두를 담당하는 성공회 교단이다[87]. 성공회를 세운 헨리 8세에 의해 성립되었다. 본래 잉글랜드 국교회 산하에 있었다가 1869년 완전히 분리된다.

2016년 아일랜드 종교 통계(Religions in the Republic of Ireland, 2016)[88]에 의하면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천주교에 이어 2번째로 신자가 많은 교단이다[89]. 북아일랜드에서는 천주교, 아일랜드 장로회[90]에 이어 3번째로 신자가 많은 교단이다[91].

아일랜드 기독교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아마(Armagh) 교구가 아일랜드에서 가장 으뜸가는 주교좌의 위치를 갖으며, 이는 천주교와 성공회 둘다 해당한다. 그래서 아마 천주교 대주교는 아일랜드 천주교를 관할하며, 아마 아일랜드 성공회 대주교는 아일랜드 성공회를 대표하는 식. 하지만 아마가 잉글랜드의 켄터베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촌동네인데다 현재 북아일랜드에 속해있기 때문에, 두번째 자리인 더블린 대주교들이 사실상 아일랜드 공화국의 천주교와 개신교를 대표하고 있다.

성공회가 오랫동안 영국에 의해 강제로 아일랜드의 국교였던 탓에, 아일랜드 내에서 천주교가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몇몇 오랜 역사를 가진 주요 성당은 아일랜드 성공회 소속이다. 예를 들어 아마의 성 패트릭 대성당도,[92] 더블린 시내에 있는 가장 오래된 크라이스트 대성당과 성 패트릭 대성당[93]도, 킬케니의 성 캐니스 대성당도 아일랜드 성공회 소속이다. 물론 성공회 형성 전에는 천주교 소속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웃기게도 천주교 더블린 대주교는 주교좌성당(대성당) 대신 임시 대성당만 존재한다[94]. 지금도 바티칸을 비롯한 아일랜드 천주교계는 크라이스트 대성당이 더블린 카톨릭 대주교의 정당한 교주좌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근미래에 천주교계가 해당 교회들의 재산권을 되찾을 가능성보다는 전체적인 기독교 신자인구의 감소로 결국 정부가 교회 재산들을 취합하여 문화재로 관리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5.3. 미국 성공회[편집]


미국 국립 워싱턴 성당의 부활주일 장엄 예배

Protestant Episcopal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ECUSA 또는 ECUSA)[95]
홈페이지
미국 성공회 공식 인준 성경 목록

미국 성공회[96]의 경우 신자의 수도 많고 메이저 교단에 속했었다. 미국 독립 혁명 당시엔 미국 개신교 최다 교파였기에 WASP로 불리는 백인 주류가 믿는 종교라는 인식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기타 교파들보다 지리적으로 남부에 강세를 보였으며 현대와 비교하면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97] 그러나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를 전후해서 진보적이고 광교회 성향으로 급격하게 선회했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백인 신자 수가 많이 감소해서 200만명 미만으로 감소했으며 동성애자트랜스젠더 주교 임명 문제로 보수 성향 성공회 교회와 신자들이 적잖이 탈퇴했다. 현재 미국 성공회는 온건파 리버럴 교단의 하나로 인식된다.

남부에서 강세를 보이고 보수적이었다는 이야기가 현대 기준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 그 시대의 흔적으로 버지니아 주에 성공회 성당이 많이 남아있다. 건축적으로도 알렉산드리아 시에 위치한 그리스도 성당의 사례처럼 달리 장식적인 요소가 없거나 적고 제단에도 단순한 십자가 틀만 세워놓았다는 것이 특징.

한때 미국 내 최다 기독교 교단의 위상을 차지했던 역사는, 워싱턴D.C.에 국립[98] 성공회 성당이 있는 것이나 역대 미국 대통령을 기독교 교파 중 제일 많은 12명이나 배출한 사실 등에서 옅볼 수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 성공회 신자이거나 신자였던 사람[99]들이 대부분이다. 근대 미국 사회의 엘리트들도 성공회 신자였던 경우가 많다.참조 부시 가문도 아버지 부시(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까지는 대대로 성공회였다. 아들 부시도 부정적 인식과 달리 종교면에서만 보자면 이슬람을 비롯한 미국 소수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았고[100] 성공회였다가 전 영부인을 따라 연합감리회[101]로 개종한 사례이다.참고1, 참고2

미국 대통령 배출로만 보면 존 F. 케네디조 바이든 두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메인라인(Mainline) 개신교 교단 소속이다. 그렇지만 바이블벨트에서는 남침례회 등 보수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 교단이 가장 교세가 강하고 이탈리아아일랜드 공화국 출신 이민자가 많은 북동부에서는 천주교 교세가 강하며 플로리다멕시코 접경지역 역시 히스패닉 인구 증가로 천주교가 강세이다.

미국에서 현재 숫적으로 가장 많고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큰 교단은 천주교과 함께 보수적 침례교와 보수적 오순절교회다.[102] 20세기 들어 남침례회 등 보수 복음주의 성향 교단이나 오순절교회나 기존 교단에서 분리된 흑인 교단[103] 등의 교세가 성장한 대신 성공회를 포함한 '메인라인’[104] 교단들은 교세가 많이 감소해서[105] 숫자상 'Main'이라고 지칭할 수 없다.[106] 대체로 메인라인(Mainline) 교단들의 교세가 집중된 미국 동북부와 중서부의 경우 남부와 정반대로 미국에서 교회 출석률이 가장 낮다. 현재 연합감리교(United Methodist Church)를 제외한 나머지 메인라인(Mainline) 교단들은 교인 수가 급속한 감소세에 있고 미국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는 이미 타 교단보다 교세가 많이 줄어든데다가 특히 동성결혼, 동성애자 주교 허용, 낙태 용인 등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또 다시 교단 내에서 이탈자가 많아졌기 때문에 200년전 최대 기독교 교단 지위와 대비되게 교세가 많이 줄어들었다. 20여년전 360만의 신자 수를 기록했으나 현재는 180만 정도이다. 인구대비로 보면 한국과 다를 게 없다.

물론 좀 나이드신 분들은 성공회 하면 드레스 셔츠넥타이 매고 네이비색 블레이저와 카키색 드레스 팬츠를 입은 WASP 이미지를 강하게 떠올리는 편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미국의 젊은 세대는 성공회가 한때 미국에서 거의 국교와도 같은 위상을 가졌다는 것은커녕 성공회가 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다. 미국의 경우 75%가 기독교인이라 대답하지만, 젊은 세대는 결혼식 또는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나 가는 경우가 많은 문화적 전통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1960년대 이후 미국도 세속화가 이뤄져서 특히 도시지역에선 교회에 안 다니더라도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아직도 농촌지역에선 교회의 지역 사회 영향력이 큰데, 이런 곳에서는 사회문화적 성향이 보수적이라 주류교단들의 사회적 위치와 안 맞아 근본주의, 복음주의 성향 교회로 떨어져 나간 경우가 많다. 이래 저래 전통적인 신앙 인구인 중도, 진보적 성향 해안 도시 백인들은 근대화를 겪으며 아예 세속화, 비종교화가 되 버렸고, 남아 있는 내륙, 농촌에선 더 근본주의적 성향 교회들의 자극적인 대중성을 따라 갈 수 없는 여러모로 안습한 구도이다.

전례/신학의 경우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미국 북동부와 서부의 경우 도시에 성공회 소속 성당 5개가 있다면 그중 4개는 앵글로-천주교고 1개는 광교회파[107]라 보면 된다. 이들의 전례는 미국 천주교 신자 주류[108]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전통적인 편이다.[109] 신학 또한 천주교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는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공회신학교인 General Theological Seminary는 미국 독립 직후에 설립되었음에도 하드코어 앵글로-천주교이다.[110]

하지만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111] 교단들이 특별히 강세를 보이는 지역인 남부나 중부 등에서는 복음주의파가 다수거나 못해도 광교회파가 많은 편이다. 이쪽 지역에도 전통적인 모습을 보이며 예배의식을 Holy Communion, 즉 감사성찬례(Eucharist)가 아니라 미사라 부르는 교구들도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남부에 있는 신학교는 거의 광교회파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 성공회의 전례/신학 문제가 복잡해 보이지만 세세한 교리의 경우 신자에게 상당한 믿음의 자유를 주는 편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화체설 관련 믿음 등. 즉 앵글로-천주교/복음주의/광교회 문제의 경우 자기 취향에 맞는 교구를 다니면 되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다. 더 나아가 앵글로-천주교 교회 내에서도 예배드릴 때 전통적으로 성호를 그어야 하는 부분에서 천주교처럼 성호를 긋는 사람들[112]과 신경도 안 쓰는 사람들로 나뉠 정도.

이는 80년대 이후 미국 성공회의 문화 자체가 아주 기본적인 교리[113]만 믿고 성공회 기도서만 잘 따라 하면 무엇을 믿든, 무엇을 하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아주 개방적인 문화로 바뀌었기 때문이다.[114] 얼마나 개방적인가 하면 무신론자와 결혼한 신부님도 있을 정도. 신자 구성 자체도 단순한 WASP 상류층 위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과 소수 인종 및 성소수자들 유입으로 조금씩 바뀌어 가는 편이다.

북미 지역에는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온 또 다른 분파인 북미성공회(Anglican Church of North America)가 있다. ACNA의 관구장 주교는 2016년 1월 11~15일에 있었던 관구장 회의에는 참석하였으나, 세계성공회공동체의 가입여부는 2016년 4월 8~20일에 열리는 세계 성공회 협의회(ACC)에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미국성공회가 동성결혼에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 것이 문제되어 세계성공회공동체에 분열을 야기한점을 문제삼아 2016 관구장회의에서 미국성공회의 의결권을 3년간 정지하기로 결정하였다.BBC 기사 동성애 문제를 둘러싼 보수 성향의 아프리카 지역 성공회 관구들의 강력 반발로 인한 성공회 분열 위기를 의식한 결정으로 보인다.[115] 사실 로완 웰리엄스 전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진보파라면, 저스틴 웰비 현임 캔터베리 대주교는 중도보수파[116]다. 이 결정에 또다시 동성결혼 지지파인 스코틀랜드 성공회, 잉글랜드 성공회 산하 요크 대교구 등이 반발하면서 언론은 성공회가 심한 내부 긴장관계에 접어들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관구장회의는 세계성공회공동체의 다른 기구나 회의에 비해 아프리카 성공회 관구들의 발언권이 강한 편이며 구미지역 성공회 관구들의 진보적 변화를 견제하는 구실을 해왔다.

뉴스앤조이가 미국성공회와 미국 연합감리교와 완전한 상통에 이뤘다는 보도를 했는데 명백한 오보다. 완전한 상통을 하는 합의문 작성을 잘못 해석했다. 미국성공회(The Episcopal Church)와 달리 미국 연합감리교(United Methodist Church)는 내부 진보파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9년 2월 총회에서 동성결혼과 동성애자 목사 안수에 대하여 한층 더 보수적이고 강경한 입장을 가결한 바 있는 등 미국성공회와 달리 보수파 영향력이 훨씬 더 강하다.

대한성공회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성공회의 전례·신학 변화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진보적 사회참여와 전례[117] 쇄신에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한성공회 내 광교회 및 저교회 성향 확대도 미국성공회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5.4. 나이지리아 성공회[편집]

나이지리아 성공회는 신자 수 약 1,800만 명, 14개 관구(Metropolitical Province) 산하 161개 교구로 구성되어 규모로만 따지면 세계 성공회의 최대 관구(Ecclesiastical Province)다.[118] 선교 자체는 1840년대에 잉글랜드 성공회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에 나이지리아 독립 관구가 설립된 이후 1990년대에 신자와 교구가 굉장히 빠르게 늘었기 때문에 성공회 역사에서 가장 급격하게 성장한 관구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는 세계 성공회의 다른 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 관구들과 마찬가지로 강한 복음주의 및 보수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의 동성애자 및 트랜스젠더 주교 및 사제 서품에 가장 민감하고 강력하게 반발했으며,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로부터 받고 있던 선교 지원금이 상당했음에도 현재 두 관구와 상통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한 상태다. 더욱이 성공회 내부의 동성애와 동성결혼 문제를 둘러싼 캔터베리 대주교의 소극적이고 애매한 태도를 이유로 교회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좌와의 온전한 상통" 문구를 삭제하고 "유일하고 거룩한 보편·사도적 교회의 모든 성공회, 대교구, 관구와의 온전한 상통"이라고 수정해버렸다.

나이지리아 성공회는 세계 성공회의 보수주의 및 복음주의적인 관구로 구성된 글로벌 사우스 및 개프콘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실제로 개프콘 회의 때마다 가장 많은 대표자 및 참가자를 보내고 있다. 나이지리아 성공회를 위시로 한 글로벌 사우스 및 개프콘의 목적은 "사도적인 신앙과 성서의 말씀에 따른 올바른 성공회 전통의 재건"으로, 미국 성공회와 캐나다 성공회를 지속적으로 제재하는 한편 북미 성공회를 세계 성공회의 정식적인 관구로 인정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나이지리아 성공회는 미국성공회와 상통 관계를 단절하고 북미성공회와 상통 관계를 맺고 있다.

한편 나이지리아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매우 심각한데, 나이지리아 성공회 또한 종종 여기에 휘말리며 아주 최근인 2020년에도 이슬람 극단주의 과격파에 의해 성공회 신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5. 우간다 성공회[편집]

우간다 성공회는 신자 수 약 1,100만 명, 37개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 가장 강경한 보수주의 입장에 있는 관구이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대한 반대와 개프콘 참가는 물론이고,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과 국회가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동성애자 처벌법'에 천주교와 함께 지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간다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 에이즈에 대한 혐오감, 우간다 기독교의 복음주의적 성향, 그리고 잉글랜드 성공회가 우간다에 선교를 시작했을 당시 우간다의 왕이자 동성애자였던 카바카 므왕가 2세가 천주교와 성공회 등의 기독교인들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순교자도 나왔기 때문이라고 일컬어진다.

우간다에서 이디 아민이 집권하고 있던 때에 이디 아민의 잔혹한 독재에 저항했으며, 이때문에 관구 대주교인 자나니 루움(Janani Jakaliya Luwum, 1922-1977) 대주교가 처형당하기도 했다. 루움 대주교는 1998년 잉글랜드 성공회가 지정한 '20세기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5.6. 남아프리카 성공회[편집]

남아프리카공화국 성공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 투쟁해온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로 유명하다.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본인이 성소수자에 진보적 입장을 취했으며, 남아프리카 성공회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에 동참하며 백인 사회 내 성소수자 인권운동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어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성공회 관구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성결혼 등 성소수자 문제에 적대적이지 않으며 토론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우간다 성공회가 배후에서 무가베 정권의 반동성애 정책을 지지·원호하는 것에 비하면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미국성공회 등 다른 관구처럼 동성결혼을 인정하지는 않으며, 몇몇 유력 인사들은 글로벌 사우스 및 개프콘에 참가하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중에도 보어인의 주된 종교인 네덜란드 개혁교회와는 신학·사회적 입장 차가 상당했다고 한다.

5.7. 호주 성공회[편집]

호주는 영국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는 만큼, 성공회도 호주에서 교세가 상당하다. 호주 인구 중 약 53%가 기독교인인데, 그 중 천주교가 22.6%, 성공회가 13.3%이다. 현재 호주 성공회의 대표자는 필립 프레이어 멜버른 대주교[119]이고, 23개 교구가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보다 2배 더 많았고, 70~80년대까지는 비슷했으나, 이후 교세가 많이 줄어들었다. 더군다나 교인들도 노령화가 상당하다. 다만 이는 성공회만의 문제는 아니며 천주교의 처지도 비슷하다. 두 교회는 나란히 매년 교세가 대폭 줄고 있지만[120] 두 교단에 속하지 않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인 이슬람교, 인도계 종교(힌두교, 불교, 시크교)는 유지내지 늘어나는 추세이다.[121] 인구 구성으로만 본다면 호주 성공회의 미래는 존립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상당히 암울하다고 볼 수 있다. 근래 30여년 간 신자 비율은 반토막이 났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신자들의 노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한편 이는 신학적 진보와 연관되기도 한다. 호주 성공회에서는 교회 안팎의 다른 중요한 문제는 제쳐놓고 오로지 세속적 인권가치, 그것도 동성애 문제 하나만 신경을 쓰냐는 비판과 함께 보수적인 신자들이 천주교(주로 고교회파 출신)나 다른 개신교 교파(주로 저교회파 출신)로 이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성애 및 동성결혼 문제로 인해 관구 내에서 갈등이 굉장히 첨예해, 뉴캐슬 교구나 왕가라타 교구 같은 진보적인 교구에서는 교회에서의 동성결혼을 전폭적으로 허가하고 독려하는 반면에 시드니 교구[122]나 멜버른 교구 같은 보수적인 교구에서는 동성결혼 불허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전통적 영향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큰 편이긴 한데 가령 시드니와 멜버른의 유서 깊은 교회 건축물들 대다수는 성공회이거나 천주교 교회 건물이다. 사회복지나 구호단체도 성공회 소속이 많다. 이들 활동은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받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공무원급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사립 초등학교~고등학교는 천주교와 더불어 성공회 계열 미션스쿨들이 많다. 호주 학부모들은 공립학교에 대해 불신이 많은 편인데, 천주교나 성공회 계열 사립학교는 엄격한 교칙 때문에 인기가 많다.

5.8. 싱가포르 성공회[편집]

정식 명칭은 성공회 동남아시아 관구(Church of the Province of South East Asia)로, 해당 관구는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말레이시아·브루나이·인도네시아·캄보디아·태국 등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각지에서 성공회 사목을 담당한다. 싱가포르가 속해 있는 싱가포르 교구는 동남아시아 관구의 선교 중심 기지이다.

싱가포르에서는 불과 20여 년 전까지 '개신교는 곧 성공회'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성공회의 교세와 개신교 내 비중이 컸던 나라이다. 지금은 오순절교회와 보수 복음주의 성향 독립교회 성장으로 개신교 내 비중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개신교 내 최대 교파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성향은 복음주의 선교 단체인 LMS(London Missionary Society)로부터 선교가 되었기 때문에 복음주의 및 보수주의가 강하다. 현재 세계성공회의 복음주의 및 보수주의 관구의 연합체인 개프콘에 참가하고 있다.

5.9. 홍콩마카오의 성공회[편집]

홍콩영국이 식민지배했던 중국 남부 섬 홍콩 섬과 본토 쪽에 붙어있는 육지 부분인 구룡반도·신계 그리고 200개가 넘는 유/무인 도서로 이루어진 도서지방으로 현재는 1국가 2체제에 의해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들어선 상태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이 직접 통치하는 중국 대륙과 달리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당연히 성공회 교구도 정상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린다.

홍콩성공회 역사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 섬 센트럴에 영국군 장교들이 세운 성 요한 성당이 바로 그때 만든 교회로 현재도 신자 수가 많으며 홍콩인 신자들의 신심도 매우 깊은 편.

홍콩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회 강세인 곳으로 본토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보수 복음주의 교회 혹은 오순절 교회 성향을 가진 것과 달리[123] 홍콩은 성공회가 주요 교단 중 하나이다. 2016년 연감에 따르면 홍콩 개신교인 50만 명 중 2만 9,000여 명이 홍콩 성공회 교인이다. 나머지는 장로회·감리회·침례회 등으로 모두 영국인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영국이 건설한 선교기지 중 하나가 홍콩으로 현재 홍콩성공회가 전 동아시아를 혼자 담당하는데 다른 동아시아 국가는 성공회 신자가 없다시피 해서 그렇다. 개신교인이 전체 인구 중의 15% 이상인 한국조차 성공회는 1%도 되지 않는 극소수 교파다. 그리고 북한·일본은 성공회는커녕 그리스도교인 자체가 없다시피하거나 극소수이다.

홍콩 성공회는 한때 홍콩에서 최대 교단의 위상을 차지했고 지금도 여전히 주류 교단의 하나이지만, 1950년대부터 천주교 및 다른 개신교 교파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해서 현재는 기독교 내 비중이 높지 않다. 참고로, 홍콩에서 가장 교세가 많은 개신교 교파는 감리교·성공회·장로회가 있으며 근래에는 침례교·오순절교회·독립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홍콩성공회는 정치·사회적으로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 침례교·오순절교회·독립교회 같이 근래에 비교적 빠르게 성장하는 교파들은 신학·사회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124]

영국에서 유학하거나 성공회/천주교계 사립학교[125]를 다닌 젊은 층이 서구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며 이때 대개 천주교감리회 그리고 성공회를 고른다. 홍콩은 영어로만 수업하는 사립 중등학교 선호도가 매우 높은 곳이라서, 부모 세대는 불교를 믿지만 본인은 천주교나 성공회 혹은 기타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참고로 1944년 성공회 최초의 여성신부가 서품된 곳이기도 하다.

마카오포르투갈 식민지였기 때문에 반대로 기독교는 천주교를 의미하고 성공회는 원래 소수였다. 그러나 현재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성공회 교세가 증가하고 있다.

5.10. 일본 성공회[편집]

성공회가 일본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는 에도 막부 시대 말기인 1859년이었다. 대한성공회가 USPG라는 영국성공회 앵글로-가톨릭 선교 단체에게서 단일 계통으로 전래받은 것과 다르게 일본성공회는 도쿄요코하마 등 관동 지역은 미국성공회, 나고야 등 중부 지역은 캐나다성공회, 오사카 등 관서 지역은 영국성공회에게서 전래받았다. 현재는 북으로 홋카이도 교구부터 남으로 오키나와 교구까지 11개의 교구가 모두 일본 성공회로 한 관구를 이루고 있으며, 신자 수는 약 5만 명 정도이고 300여개의 교회가 있다.[126] 현재 일본 성공회 관구장 주교[127]는 우에마츠 마코토(나타나엘) 홋카이도 교구장 주교다.

신자 수가 많다고 하기는 어려운 규모이지만, 애초에 일본은 기독교인이 다 합해봐야 100만명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128] 일본 기독교계에서 성공회 입지는 꽤 크다.

성직자에 대한 호칭은 일반적으로 '신부'보다는 '목사', 혹은 '사제'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주교-사제-부제인 삼성직을 주교-목사-집사(혹은 부목사, 목사보)로 칭하는 경우가 잦다.

성향은 교구마다 다양하다. 규슈교구에서는 성소수자를 위해 사목하는 교회가 존재하고, 도쿄교구는 전반적으로 성소수자에 대해 친화적인 편이다. 반면 일본성공회에서는 관구 차원에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고 있는데 아직 11개 교구 중 3개 교구는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성공회에서 여성 사제를 허용할 때 몇몇 신자와 성직자는 천주교로 회심하거나 천주교 소속 성공회 성직자치단으로 소속을 옮겼다.

성공회는 사회 선교를 중요시하게 생각하는데, 일본성공회에서는 그 일환으로 교회에 보육원과 유치원을 만들어서 사회복지에 기여하고 있어, 성당에 보육원이나 유치원이 딸려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미션스쿨로 여러 중·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릿쿄대학이나 모모야마대학 같은 고등교육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전술했다시피 도쿄 소재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릿쿄대학이 일본 성공회 재단이다.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 시절 다녔던 대학으로, 릿쿄대학 유학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릿쿄대학 대학성당(채플)에서는 윤동주와 관련된 행사를 자주 개최한다.

일본성공회와 대한성공회는 매우 긴밀히 교류하고 있으며, 양국 간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29][130]

5.11. 한국 성공회[편집]

대한성공회 항목 참조.

대한성공회는 선교 자체가 영국성공회의 앵글로-가톨릭 선교 단체인 USPG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앵글로-가톨릭의 색채가 강했고 현재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람베스 회의의 에큐메니컬적인 결의안 및 미국 성공회의 전례·신학상 변화 등의 바람이 대한성공회에도 불어닥치면서 전례상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여기에 타 개신교 교단에서 전입한 평신도와 성직자가 늘어나면서 신학적으로도 광교회파와 저교회파 영향이 강해졌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례는 앵글로-가톨릭의 영향이 남아있으면서도 현행 천주교 바오로 6세 전례와 유사하며, 신학적으로는 광교회파적 진보 성향이 강해졌다는 평을 받는다. 게다가 보수적인 사제나 진보적인 사제나 고교회파 혹은 저교회파 성향을 띠고, 여기에 보수적 사제는 복음주의 성향을 가지고 진보적 사제는 진보 성향을 가지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에, 현재 대한성공회를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로 분류하는 것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분석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대한성공회는 복음주의와 진보 성향으로 나눠서 분류하는 것이 실정에 맞을 것이다.

6. 기타[편집]

영어권 성공회에서는 일부 보수적 고교회파에서는 KJV, 광교회파와 일부 고교회파에서는 NRSV, 저교회파에서는 ESV, NIV 등이 쓰인다. 다만 국가적인 의전 행사인 경우에는 거의 KJV가 쓰이는 편이다.

영국에서는 역사적 이유로 기득권, 중산층 이상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별명도 '기도하는 보수당'. 교회의 성향 자체는 영국의 가톨릭교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지만 2014년 조사에 따르면 성공회 신자들은 보수당 지지세가 강했다. 주기적으로 성공회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일수록 보수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고, 가톨릭교도는 참석 회수에 상관없이 노동당을 선호했다. BBC기사

아무래도 다른 개신교 교파[131]와는 달리 루터교회처럼[132] 천주교적 전례가 상당부분 남아 있다는 점 때문에, 옛날부터 천주교와 다시 하나로 합치자는 얘기가 일부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몇 차례 긍정적 합의를 보기도 했으나, 앞서 말한 대로 정교회와 일치하지 못하게 된 이유와 비슷하게 여성 사제 등 여러 가지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시 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천주교 측에서 일단 '결혼한 성공회 남성 신부를 조건부 인정한다'는 전제를 파격적으로 내세운지라[133] 다시 적극적인 논의가 되고 있지만, 대한성공회는 이러한 의사를 부인하고 있고 거의 나라별로 분권화가 이루어져 있으며[134] 영국 감리회 주류 교단은 현재 성공회와 일치를 이루었다.[135] 앞서 말했듯 천주교 사제[136]가 성공회로 가거나 반대로 성공회의 보수적 사제들이 천주교로 가는 사례는 외국에 매우 많았고 국내에서도 없지 않다. 현재 의화 부분에서 루터교, 천주교, 성공회, 감리회가 합의를 보았다.[137]

이렇기에 천주교와 합치자거나 유사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국내 성공회 신자들에게는 크게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편이다. 천주교에서 기혼 남성 사제는 인정한다 해도 여성 사제를 인정할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한 데다가, 국내 성공회 신자 중에는 진보적 관점의 신학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이것도 역시 천주교 주류와 잘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교파/교단 중 재세례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가장 민감한 교단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물로써 세례를 받았다는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138]되었으면 재세례는 절대 없다는 입장. 천주교도 재세례는 원칙적으로는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한국 천주교의 경우 종교개혁적 세례를 받은 뒤에 천주교로 옮긴 이들이 천주교에서 세례를 다시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7. 창작물에서의 성공회[편집]

  • 한국에서는 대중적인 기독교 종파가 아니라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 종파의 존재를 유럽사 서적에서나 처음 접한다. 그러다 보니 존재감이 미약하여 창작물에서 다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특정 나라에서는 국교의 레벨이라는 점, 그 나라가 꽤 잘나가는 서구 국가 중 하나인 영국이라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앗! 저 사람은 영국 직속의 A 신부!!" 같은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간혹 창작물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쪽 방면의 작품으로는 헬싱,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139]이 있다.
  • 영국 문학, 특히 추리소설에서는 무지하게 자주 나온다. 특히 존 딕슨 카의 작품에서는 반드시 나온다.
  • 파이널 판타지 11에 등장하는 산도리아 국교회가 성공회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기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여신 신앙을 일개 국가 내에서 특별한 형태로만 인정하고, 다른 종류의 여신 신앙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 늑대와 양피지에서는 성공회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지만, 영국처럼 섬나라인 윈필왕국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교의 교황과의 다툼으로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로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140] 늑대와 양피지/고증 항목 참조.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쪽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족으로써의 긍지 때문인 걸까, 아니면 하이랜드의 성격 때문인 걸까.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은 잠깐이었다. 윈필 왕국은 지난 3년간 성무가 중지되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는가.
    (중략)
    『음.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교회를 만들 수 있다. 속어로 번역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경전을 들고 있는 성직자가 다스리는 교회말이다. 비리나 악폐습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체 해온 것,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말이지. 내가 그 온천장에서, 무의미한 삶을 보내는 고위 성직자가 아닌, 그대에게 말을 건 것은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다. 기만도, 거짓도 없는 세계를.』

8. 성공회 성직자 및 평신도[편집]

8.1. 가상 인물[편집]

8.2. 실존 인물[편집]

8.2.1. 성직자[142][편집]

  • 데스몬드 투투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성공회 대주교.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
  • 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대학 교수, 성공회 신부이며 신학자. 기독교 복음주의 계통의 저명한 저술가로 국내에도 많은 서적이 번역되었다.
  • 크리스토퍼 존 보델-리 - '영국남자' 채널의 유튜버인 조슈아 대럴 캐럿의 친구이자 런던의 세인트 세이비어 성공회 교회(St. Saviour's Church)의 신부님.[143] 아마 유튜브 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제일 유명한 성공회 신부님이 아닐까 싶다.
  • 이재정 - 대한민국정치인이자 성공회 신부이며 성공회대학교 총장, 참여정부 하에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2014년 6월 4일 경기도 교육감으로 선출되었다.
  • 존 스토트 - 복음주의의 지평을 연 신학자.
  • 존 웨슬리 - 성공회 신부이자 감리회의 창시자.
  • 토마스 맬서스 - 인구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 탁지웅 - 기독교 이단 연구가 탁명환 소장의 3남. 현재 일본성공회 도쿄교구 신부. 작은형(탁명환 소장의 2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하고있는 국제종교문제연구소 탁지원 소장이고, 큰형(탁명환 소장의 1남)은 부산장신대학교 탁지일 교수다.
기타 다른 사제들은 대한성공회 문서 참조

8.2.2. 일반 신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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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잉글랜드 국교회, 즉 성공회의 창시자이다.[2]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한 때.[3] 성공회 일부에서는 성공회를 고대 켈트 교회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고 그 연원을 2세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로만 브리튼 시대에 형성된 교회는 중간에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서 단절되었고(웨일스 지역에는 남아있었다.) 그 후의 캔터베리 대주교좌 자체가 로마 교황청 및 대륙 가톨릭교회의 선교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주장이다.[4] 세계 그리스도교 통계 및 이에 대한 설명(영문)##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 전통세계성공회공동체(Traditional Anglican Communion) 그리고 성공회 교리와 직제를 공유하는 교단(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 Reformed Evangelical Anglican Church of South Africa 등) 신자 수의 합이 8,400-8,500만 명이다.
[5] 미국 독립 후 Anglican이라는 말이 영국 왕당파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Anglican 대신 Episcopal로 바꿔 쓴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대부분의 성공회 성직자는 중립을 지켰지만, 일부 왕당파 성공회 성직자는 박해를 당했다. 또한 스코틀랜드는 Church of Scotland가 성공회가 아닌 장로회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주교회인 Episcopal이라는 단어를 쓴다.[6] Η ΑΛΗΘΕΙΑ ΕΛΕΥΘΕΡΩΣΕΙ ΥΜΑΣ(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hē alētheia eleutherōsei hymas). 요한의 복음서 8장 32절 중.[7] 연세대학교를 비롯 수많은 대학들의 교훈으로 쓰이는 그 문구 맞다.[8] 'Defensor Fidei'. 영어로는 'Defender of the faith'. 놀랍게도 당시 교황이 헨리 8세에게 직접 붙여준 칭호이다. 사실 헨리 8세가 첫 아내 캐서린 왕비와 이혼 문제로 교황과 틀어지기 전까지는, 마르틴 루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등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9] 사실 미국에서 "I am an Anglican." 하면 "나는 영국 성공회 신자입니다."하는 뜻으로, "I am an Episcopalian." 하면 "나는 미국 성공회 신자입니다." 라는 뜻으로 통한다.[10] 천주교 번역판.[11] 성공회 번역판, 개신교 번역판[12] 초대 미국 대통령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성공회 교인이 많았다. 우리에게도 인지도가 꽤 높은 루즈벨트아버지 부시도 성공회 교인. 참고로 역대 미국 대통령을 교파별로 분류하면 성공회가 12명, 장로회가 래이건/해리슨/잭슨/트럼프 등 8명, 침례회가 클린턴/카터 등 4명, 감리회아들 부시/맥킨리 등 4명, 천주교가 존 F 케네디 1명 등이다. 물론 역대 대통령 중 성공회 신자가 몇 명이었느냐로 현재 성공회의 사회적 위상을 파악할 수는 없다. 현재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파를 꼽으라면 초교파 복음주의자들과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그리고 가톨릭 정도이다.[13] 1534년에 있었던 헨리 8세수장령이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국왕이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은 헨리 8세의 차녀인 엘리자베스 1세 때의 일로, 1558년 2차 수장령이었다.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국왕이 수장이었던 기간은 고작 24년 간이었고, 그 이후로 현재까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을 맡아왔다.[14] 엄밀히 말하면 스코틀랜드 국교회는 성공회 관구가 아니고 장로교이다. 그러나 '켈트 교회'를 '반로마'의 효시로 보는 스탠스는 성공회도 공유한다.[15] 예를 들어, 메리 1세 여왕은 단명한 반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장수했다거나, 예수회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암살 기도나 천주교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의 제임스 1세 시해 시도가 여론을 악화시키는 등[16]개신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성공회는 분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따라서 교리와 전통에 대한 견해 또한 통일되어 있지 않다.[17] 켈트 교회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2세기 경 로마 또는 골(Gaul)에서 파견된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8] 섬에 들어간 종교가 원류와 다르게 변형되는 것은 일본불교카쿠레키리시탄,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무슬림 계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꽤 흔하게 관찰되는 문화 인류학적 현상이다.[19] 스톤헨지가 위치한 솔즈베리 지역 인근에 묻었다는 떡밥이 자주 등장한다.[20]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아서왕 전설'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한다.[21] 브리튼섬을 침공하기 전 앵글로색슨족의 북유럽에서의 상황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22]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이 지은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 의하면 앵글로색슨족의 본격적인 침입은 449년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앵글로색슨 침입(Alglo-Saxon invasion)이라 부른다. 특히 언어학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일부가 브리튼섬으로 넘어오면서 게르만어족 중 한 지류인 영어가 시작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23] 이때 형성된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까지도 브리튼 섬의 패권을 쥐고 있다.[24] 이전의 교황과 8세기까지 후임 교황들은 세속적으론 동로마제국의 봉신이며, 황제에게 수위권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전승에서 내려오듯 온전한 수위권 같은 것은 누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선 침략자들의 방어하고 협상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신경 쓸 겨를이 더 없었다. 그레고리오 1세 시절엔 동로마제국에서 파견한 라벤나 총독에게도 무시당할 정도.[25] 560-616년[26] 이는 잉글랜드(당시 단어로는 앙글로란드)의 기독교화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게르만족들이 브리튼섬으로 넘어와 켈트족을 몰아낼 때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북구 신화였기 때문. 영국 역사학자들은 597년 에텔버트 왕의 세례가 앵글로색슨족 기독교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449년의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 이후 약 150년간 로마 교회의 영향력 밖에 있던 잉글랜드가 다시 로마 교회로 돌아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이 룬문자를 버리고 로마 문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고대 영문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27] 프랑크 왕국메로빙거 왕조 시절은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상속으로 나뉘어졌다가 서로 싸우고 죽고 병림픽으로 합쳐졌다의 반복이었다. 네우스트리아는 파리와 프랑스 북부 지역이었다.[28] 서고트족 출신임에도 프랑크 계통 왕국에 시집 와서 아리우스파에서 천주교로 자발적으로 개종함.[29] 세금을 확실히 잘 걷으라는 협박의 의미가 컸었다.[30] 앞서 언급했듯이 전근대 서유럽에서는 의외로 세속 군주가 교황에게 엿을 먹이고 해당 국가의 성직자들이 군주 편을 드는 사례가 많다. 당장 아비뇽 유수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세는 교황이 세속 정치에 영향을 끼치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통신과 교통 수단의 미발달로 인해 의외로 천주교가 각국 주교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느낌으로 결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통일된 미사 경본이 나온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기존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왕국의 세속 군주는 교황을 자기 아래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교회 권력을 이용했다면,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 자체를 로마에서 분리시켰다는 점에 있다.[31] 아비뇽 교황을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 여겼다.[32] 마르틴 루터보다 200년 앞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번역의 수준은 라틴어영어로 단순히 직역한 정도였다. 이로부터 2세기 후에 번역된 킹 제임스 성경(KJV)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 견줄 정도로 영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33]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선 천주교 교회에서 교리로 주장하는 실체 변화(성변화)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34]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만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신임 캔터베리 대주교로 하여금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화답한다.[35] 제국 내에서 독자적인 권한보다는 세속 군주와 협조적인 관계였고, 강력한 황제가 출현할 때마다 실제적인 힘이 없는 교황은 세속 권력 공백 시기가 아니면 거의 항상 '신앙심이 약한 군주들'에게 무너졌다.[36] 프랑수아 1세 시절 볼로냐 조약으로 9개 대주교 직위를 비롯한 주교, 수도원장, 수녀원장 직위 600여개 임명권은 프랑스 왕이 교황 대신 직접 행사하고, 수입도 프랑스 왕이 차지하기로 교황과 합의했다. 대신 교회 분열기 공의회에서 프랑스 측이 인정하지 않던 교리를 사후 추인하는 소소한 양보 정도로 답례[37]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무효를 승인하지 않는 교황을 두고 '로마의 주교일 뿐'이라며 국내 간섭을 거부한 것이지, 기존 기독교의 체계를 갈아엎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38] 가톨릭 전례를 상당부분 유지했다고 해도 대중 신심 행위의 상당부분이 폐지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짧지만 급진적인 개신교화 정책의 영향도 컸다.[39] J.J. Scarisbrick, Henry VIII (1997).[40] 와이어트 반란은 프로테스탄트가 중심이 되었으나, 종교를 직접적인 명분으로 내걸지는 않았다.[41] Ronald Hutton, A Brief History of Britain 1485-1660 (London, 2010).[42] 이 여성의 집은 현재 '순교자의 집'으로 지정되어 있어, 요크에 갈 경우 방문이 가능하다.[43] Peter Cunich, "The Dissolutions and their Aftermath", in A Companion to Tudor Britain.[44] 이 시기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한국과 미국 장로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조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생겨났다. 이 당시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성공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45] 청교도 중에서도 국교회에서 내부 개혁에 회의적 입장으로 다수인 장로파와 대립. 신학적으로 회중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에 회중파로도 불린다.[46] 당연히 39개 신조에 위배되는 천주교와 유니테리언은 제외였다.[47] 삼위일체론,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공존,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 세례는 한 번만으로도 유효[48] 본래 앵글로-가톨릭이란 성공회의 고교회파 내에서도 특별히 천주교적인 전례와 전통과 신심행위를 강조하는 분파를 일컬으며 고교회파와 완전히 동일시되지는 않는다.[49] 본래 광교회의 의미는 고교회, 저교회, 자유주의 모두를 수용한다는 의미였다.[50] 단, 여기서 자유주의(Liberal)와 광교회파를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자유주의가 이성의 눈으로 성서와 전통을 보는 것이고, 광교회파의 경우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광교회파와 자유주의를 동일하게 본다.[51] 실제로 이런 경우에는, 다른 교파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일반적으로 사제나 신자 모두 이런 상황도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서로를 배려하며 지낸다. 성공회에서는 교회 안에서 다른 신자들의 믿음의 방식을 두고 비판하기 보다는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떼고 한 몸을 이룬다'는 고백을 하는 데에 익숙하다.[52] 수정 전에는 모든 루터회 교단이 주교제를 실시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었으나, 오히려 장로회와 유사한 구조의 교단도 있고, 심지어 몆몆 교단은 회중제를 실시하는 곳도 있어서 성공회와 구조가 크게 다른 교단도 존재한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한 교단이라도 전부 다 주교제를 실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역교회(Landeskirche)라는 개념을 중시하기 때문에 교회 구조가 크게 중시되는 분위기는 아니다. 당장 한국 루터교회만 해도 주교제가 아니다. 장로회침례회보단 중앙집권적 성격이 많이 강하긴 해도.[53] 그리고 심지어 주교제가 실시되는 경우에도 개교회의 자치와 개성을 존중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며, 이건 주교제를 실시하고 있는 북유럽 루터교회 주류 교단들 역시 마찬가지라 교회별로 예배 양식이나 인테리어 등이 꽤나 차이가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더불어 주교제를 실시하더라도 회중교회적 요소도 같이 받아들이는 교단들도 있어서, 개교회의 권한이 성공회보다 더 강한 경우가 일반적이다.[54]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신부는 주교제를 그닥 좋게 보지 않았다. 이는 존 웨슬리가 부흥 운동을 하면서 영국 국교회 주교들에게 많이 시달린 탓이다. 웨슬리는 감독제의 폐해를 알고, 미국 감리회를 형성하면서 절대 감독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나중에 은근슬쩍 감독 호칭을 쓰게 되긴 했지만. 그리고 감리회 역시 성공회보다 개교회의 권한이 강하다.[55] 한국은 '가톨릭성모 마리아를 믿는 잘못된 종교'라는 중상모략을 일삼는 일부 극우 개신교개독교 목사먹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들의 성모 마리아 신심에 대한 인식이 유달리 좋지 않은 국가다. 한국 루터회 역시 성모 공경은 인정하나, 성모송은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대한성공회는 기존 가톨릭 신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성모신심에 더욱 유화적인 관점을 보인다.[56] 사실 상당수 성공회 신자 및 신학자들도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을 이렇게 규정한다.[57] 과거 미국 성공회가 지금보다 보수적이었을 때는 이런 인테리어가 흔했다.[58] 한국에서 천주교의 이미지가 무척 좋은 편이여서 흔히들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천주교는 매우 보수적인 종교다.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간 개신교를 대하는 시각은 더욱 그러하다. [59] 사실 이쪽이 교회법의 끝판왕이긴 하다.[60] 천주교 교회법과 비교할 때는 그렇다 치지만, 대한성공회 교회법과 장로회 교회법(예: 예장통합 교회법 - 장로회에서는 '헌법'이라 부름)을 비교해보면 성공회 쪽이 대략 안습. 참고로 장로회 교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이 통째로 들어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한국기독교장로회 모두.[61] 천주교 개종 1~2년만에 천주교 신부로 서품받을 수 있는 성공회 신부 출신과 달리, 개신교 목사 출신은 천주교 신부가 되려면 처음부터 수년간의 신부 양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62] 다만 기혼 주교는 주교품을 받을 수 없다.[63] 즉 개신교를 강경하게 대변하는 입장, 예장고신, 대신, 침례교 등[64] 엄밀히 말해서 영국UK이 아닌 잉글랜드의 국교이다.[65] 7성사, 성직자수도자의 독신, 실체 변화, 루터 신학에 영향받은 윌리엄 틴틀이 번역한 영어 성경 소지 금지 등[66] 이때 헨리 8세의 수위권을 부인한 토머스 모어는 반역죄로 목이 잘렸다.[67] 아이러니하게도 진 로빈슨은 은퇴 이후 동성애자 파트너와 이혼했다.[68] 물론 개프콘에 참가하는 성공회 인사들이 전부 람베스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아니다.[69] 호주 성공회의 뉴캐슬 교구는 왕가라타 교구와 함께 성직자의 동성결혼 집례를 허가하고 동성애자의 성직자 서품을 인정하고 있다.[70] 호주 성공회 시드니 교구는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이며, 현 뉴 사우스 웨일스 관구 겸 시드니 교구 주교인 글렌 데이비스 대주교는 설교 때 호주 성공회 내부의 동성결혼 지지자들에게 "교회에서 나가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한 인사이다.[71] 2020년 람베스 회의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잠정 연기되었다.[72] Semi-Pelagianism, 구원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그 은총에 인간선행으로 응답하여야만 완성된다는 주장이다.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73] 메리 1세 시절 영국이 천주교로 복귀했던 때. 성공회에는 '추기경'이라고 하는 직위는 없다.[74] 어떤 사람들은 프리메이슨이 음지에서 암약하며 세계를 입맛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은 실제로는 이신론 신봉자의 사교 단체에 불과하며 어떠한 정치적 실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75] 의외로 개신교에서 성공회로 옮아 온 사람들이 전례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76] 이튼 칼리지는 이튼 스쿨이라고도 하는데, 한국의 국제중학교와 비슷하게 주로 부유층 자제들이 진학하는 학교다. 웰비 대주교는 이튼 칼리지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여,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77] 한국에서는 '영국 국교회'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영국은 보통 연합왕국(United Kingdom)을 가리키므로 혼란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다. 물론 영국(英國)이라는 용어 자체가 원래는 잉글랜드를 가리키다가 연합왕국을 가리키는 말로 와전된 것이 굳어진 것이라 애초에 문제가 있는 표현이지만... 그리고 사실 잉글랜드 '국교회'도 아니고 그냥 '잉글랜드 교회'가 직역명으로 더 정확하다. 다만 국교회라고 부르는 건 잉글랜드에서 형식적으로 국교(established church) 지위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의역한 것이다.[78]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부 접경 지역에 한정. 웨일스 대부분은 잉글랜드 국교회 산하에 있다가 분리된 웨일스 성공회(Church in Wales)가 관할한다.[79] 터키 및 구 소련 국가들도 포함한다.[80] 미국 성공회도 유럽 일부 지역을 관할한다.[81] 캔터베리 대주교(직책)도 성공회 형성 이전에는 천주교 소속이었다. 애초에 종교개혁 이전 시기의 잉글랜드 국교회의 역사는 잉글랜드 천주교의 역사이기도 하다.[82] 세계에서 유일하게 하원보다 의석이 많은 상원이다. 2015년 11월 현재 하원인 평민원은 650석인 데 반해 귀족원은 자그마치 822석이다. 참고로 귀족원은 의원의 정수를 따로 정해 놓지 않는다.[83] 귀족원은 국민들의 선거로 뽑히는 조직이 아니다 보니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자연스레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다른 민주 국가들을 보아도 상원과 하원의 실권이 대등한 경우는 있어도(예: 미국) 상원이 하원을 압도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하원이 상원을 압도하고 상원은 단지 하원을 보조하거나 가끔씩 견제하는 정도인 경우가 더 많다.[84] 실제로 보수당·자민당 연립 정권(2010년 5월~2015년 5월)하에서 자민당 주도로 추진했던 상원 개혁안에서도 이들의 의석은 남겨놓게 되어 있었다. 자민당의 개혁안은 귀족원 의석의 정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축소하고, 대부분의 의석을 선거로 뽑게 하였다. 그리고 선거로 뽑히지 않는 의석은 의원 정수의 20%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서 선거로 뽑히지 않는 20% 중에 성직귀족 의석을 포함시켜서 존속시키게 했다. 사실 자민당의 자유주의 취향대로라면 성직귀족의 의석도 없애는 게 맞다. 하지만 보수당과의 연립정부를 꾸린 상황이므로 타협을 위해 성직 귀족의 의석을 남기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수당 내에는 상원 개혁 자체에 반발하는 의원들이 많아 개혁안 자체가 폐기돼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85] 영국 센서스에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따로 집계하나 웨일즈잉글랜드와 통합. 그런데 웨일즈 인구가 적어서 별 차이 안 난다.[86] 설립 당시 스코틀랜드 일각에서 한 나라로 합병되는 것에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물론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음) 만약 스코틀랜드에서 Anglican Church라는 용어를 쓰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 종교적으로까지 침투하려 한다는 적대적인 반응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태를 우려한 탓인지 스코틀랜드 성공회 이름에는 Episcopal을 집어 넣었다. 다만 현재 홈페이지 주소는 scotland.anglican.org 식이라 도메인에 anglican이 들어가 있다.[87] 아일랜드 섬에서 활동하는 많은 조직들이 아일랜드 섬 전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히려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를 따로 관할하는 조직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88] https://www.cso.ie/en/media/csoie/census/census2016/2016censusforms/65995_English_Household_2016_New_Version_Do_Not_Complete.pdf#page=4 [89] 천주교 78.3%, 성공회 2.6%, 정교회 1.3%.[90] 북아일랜드 신교도 중 적지 않은 수가 스코틀랜드 이주민의 후손이다. 따라서 이들의 후손들 중에 장로회 신자가 많다.[91] 그렇지만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를 다 합치면 천주교 신자보다 수가 많다. 성공회와 장로회 신자가 북아일랜드 신교도 대부분을 반분하고 거기에 소수의 감리회 신자가 존재하는 식이다.[92] 물론 천추교 측에서 맞은편 언덕에 성 패트릭 대성당을 다시 새로 세웠다.[93] 참고로 두 성공회 성당은 마주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서로 거리가 가깝다. 도보로 3-4분 거리.[94] 1932년부터 1948년까지 에이먼 데 발레라 총리 재임 시절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는 특별히 강하게 유착하고 있었고, 이 당시 천주교 우익 및 보수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성 파트리치오 대성당 몰수 및 반환 주장이 일었다. 이 주장은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95] 보통 The Episcopal Church(TEC/EC)로만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96] 미국 성공회 관구의 관할 지역은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 나아가 대만까지 포함된다. 여기서는 주로 미국 내의 성공회에 대해서 다룬다.[97] 정치적으로도 Paul Kleppener(1979)에 따르면 19세기 말 성공회 교도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던 비율은 전체 인구의 45%였으며 공화당을 지지하던 비율은 55%였다.(이 당시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포지션이 정반대였다.)[98] 정확히 얘기하자면 워싱턴 국립 성공회 성당 건립을 미 연방 의회가 의결한 것.[99] 이들 중 상당수가 이신론자이긴 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기독교식 세계관에는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종교 성향은 아니었다. 당시 이신론자들은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칼뱅주의 윤리관과 정치론에 공감했다. 그래서 이신론 성향임에도 성공회 신자를 자처했으며 성공회 신자로서 큰 무리 없는 신앙생활 했던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이신론자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의 경우도 대통령 취임식 마치고 바로 성공회 성당에서 열린 추수감사절 감사성찬례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이들이 정말 기독교인이냐 아니냐에 대한 말들이 많긴 하지만 그들에 의해 정립된 천부인권 등의 건국이념이 기독교에 근거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100] 도널드 트럼프 이후에 재평가 받았다.[101] 연합감리교(UMC)는 메인라인 개신교(Mainline Protestant) 계열이라고 인정받아왔으나 다른 메인라인 교단과는 달리 최근에 보수파의 입김이 꽤 강해졌다.[102] 1950년대부터 오순절교회와 신학적으로 비슷한 보수적 독립교회들도 미국에서 크게 성장했다. 이들의 대사회적 입장 또한 다른 보수 개신교 교단과 비슷하다.[103] 흑인 교단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단이 있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교단이 있다.[104] 보통 Mainline 대신 Old Line 으로도 불리는데 역사적으론 18~19세기 당시 백인 주류 WASP 다수가 믿었던 개신교 교단들이다.[105]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106] 일각에서는 메인라인(Mainline) 교단이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감리교, 성공회 등 몇몇 교파의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인 것처럼 이해하지만 이는 틀린 이해다.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장로교 교단이나 루터교 교단이라고 해서 다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장로교 교단 중에서도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나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등 교단 성향이 대체로 보수적이면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 않고 '보수'나 '복음주의' 교단으로 분류된다. 이는 루터교도 마찬가지어서 '루터교 미주리시노드' 교단이나 '루터교 위스콘신시노드' 교단도 '복음주의 루터교' 교단과 달리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를 탈퇴한 북미성공회(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도 '메인라인(Mainline)' 교단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메인라인(Mainline)' 교단이라 함은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회중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교파 중 특정 교단을 의미하는 개념이다.#[107] 쉽게 말해 앵글로-천주교와 복음주의 사이의 중도파. 광교회파를 자유주의를 따른다고 보기도 한다.[10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을 충실히 받아들인 천주교인 대다수.[109] 예를 들어 천주교 성당은 오르간 대신 풍금을 배치한 경우도 상당하지만, 성공회 성당은 되도록 반드시 오르간을 배치한다. 하지만 미국은 프랑스와 함께 전통 천주교 운동 발원지인데다가 그 운동이 가장 활발한 나라 중 하나이다. 미 전역에 전통 천주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성당이 있으며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의 대도시에는 그런 성당이 몇 곳이나 있다. 때문에 미국 천주교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자들은 굳이 성공회 전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성공회가 천주교를 흉내냈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110] 한국의 성공회는 미국의 성공회보다 천주교와 더 비슷했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한국의 성공회는 전례/신학 양 측면에서 광교회파와 저교회파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면서 현재는 미국과 한국의 성공회 어느쪽이 더 천주교에 가깝느냐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111] 남침례회는 교인 수가 1,400만이 넘는 미국 내 최대 개신교 교단이다. 이에 비하면 미국성공회는 미국 개신교 내 비중이 2%도 되지 않는다.[112] 실은 이렇게 성호를 그리는 경우 천주교의 현대 미사형식인 바오로 미사보다 전통적인 미사 형식인 트리엔트 미사와 비슷한 경우가 많다. 즉, 현대 천주교보다 더 많이 긋는다.[113] 삼위일체론성체성사세례성사 관련 믿음 등. 쉽게 말하자면, 주류 기독교 종파들의 공통분모들.[114] 이는 미국 성공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성공회의 문화 자체가 그렇다.[115] 의외로 남동부 아프리카의 성공회 교회들이 규모가 큰 편이다. 미국 성공회 신자수를 다 합해도 케냐 성공회 신자수에 못 미친다.[116] 성공회 내 복음주의파. 동성결혼과 동성커플에 관한 혼인성사에는 반대하지만 호모포비아적 태도를 배격하고 여성 신부 문제에는 호의적인 입장. 그러나 2016년 후반기 이후에는 동성결혼에 대해 사실상 찬성입장으로 돌아선 듯하다.[117] 현 천주교 바오로 6세 전례와 비슷한 전례로[118] 신자 수로만 따지면 영국성공회가 2,500만 명으로 최대 관구지만, 영국성공회는 2개 관구 42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일 감사성찬례 평균 참석자 수가 100만 명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이다.[119] 이는 천주교도 마찬가지로 멜버른 대주교가 호주 교회를 대표한다. 현직 천주교 멜버른 대주교는 데니스 하트이다.[120] 천주교 신자도 2011년에는 25.3%였으나 5년 후인 2016년에는 22.6%로 거의 3%나 폭락했다. 사실 이전의 천주교회의 선방(?)도 천주교 세가 강한 아일랜드나 남미 이민자의 효과 덕이었다.[121] 이슬람은 레바논을 비롯한 중동 이민자, 인도계 종교도 인도계 이민자의 영향이며 동남아 화교 출신 이민자나 한국계 이민자는 개신교가 많은 편이다.[122] 시드니 교구는 저교회적인 요소를 상당히 지니고 있어 삼성직의 의미가 크게 와해되었고, 기도서대로 예배를 하지 않는 저교회파 교회가 많으며, 제의를 착용하지 않고 예배를 집전하는 성직자들이 적잖다.[123] 공식 통계로는 천주교가 0.3%, 개신교가 2.0% 정도이나 둘 다 최소 2배에서 4배 정도로 추산된다. 왜냐하면 중국 공산당 통제 하의 어용교회만이 공인교회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신학자 차원에서는 다양한 신학 성향이 있지만 이신칭의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선 비공인교회는 특히 보수 신학의 영향력이 강하다.[124] 그래서 이들은 동성결혼성소수자 문제에 꽤나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125] 홍콩 사립학교의 70%는 기독교 미션스쿨이다. 특히 성공회가 제일 비중이 크다. 그 이유는 성공회가 사회선교를 중요시해서이다.[126] 대한성공회가 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 3개의 교구로 한 관구를 이루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많이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잘게 나눠진 데는 여러 섬으로 나뉜 지리적 환경과 여러 계통으로부터 전래를 받은 역사적 상황이 관련이 있다.[127] 수좌주교라고 함.[128] 천주교가 약 50만 명, 정교회는 약 1만 명, 개신교가 약 50만 명으로 집계된다.[129] 한일 성공회, 한일합방 사죄 성명서 발표키로[130] 참회로 日 성공회 거듭나…화해는 이벤트 아닌 영원한 과정[131] 특히 칼뱅주의파. 개신교라고 해도 루터파와 칼뱅파는 완전히 다르다. 근본주의는 아예 루터교회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있다.[132] 그러나 일반적으로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적 원조라는 정체성 때문인지 프로테스탄트다운 정체성이 성공회보다 더 강하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천주교나 성공회랑 차이가 큰 부분도 있다. 일단 보편교회론을 부정한다는 점부터가 차이가 있다.[133] 천주교은 성공회 출신으로서 천주교로 개종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한 사목적 지침까지 마련한 상태이며, 별도의 성직자치단까지 마련한 경우도 있다. 이 성직자치단은 성공회 전례를 유지할 수 있는 특례도 적용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천주교와 성공회의 일치가 아니라, 천주교의 성공회 흡수이기에 반발하는 성공회 인사들도 꽤 많다.[134] 천주교의 바티칸과 달리 캔터베리로 대표되는 영국 성공회가 세계 성공회를 통제하지 못하고 대개 나라별로 설정되는 관구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특성이 가장 근본적 장애가 될 확률도 높다. 그래서 10년마다 전세계의 주교들이 모이는 람베스 회의에 불참한다는 식의 행동이 가능하다.[135] 감리회는 성공회에서 갈라져 나왔다.[136] 주로 진보주의자[137] 그러나 루터교회, 감리회 등 이 합의를 인정하지 않는 교단도 적지 않다.[138] 도유 여부 등은 따지지도 않는다.[139] 금서목록에서는 '영국 청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서 나온다. 이름은 실제 역사상의 청교를 연상시키지만, 작중 묘사는 영락없이 성공회이다.[140] 단,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토트 콜의 모델이 마르틴 루터라는 점에서 루터교회가 연상될 수도 있다.[141] 팬들이 천주교나 성공회 신자로 추정하고 있다.[142] 성공회는 흔히 개신교로 분류되지만, '주교, 신부, 부제'라는 3성직을 인정하는 교파다.[143] https://saintsaviours.net/message-from-our-vicar[144] 김종철, 김종희, 김종식 등 일가가 신앙을 공유하며 특히 어머니와 아내가 독실한 신자로 유명하다. 김승연 본인도 소년 시절에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참고기사 성공회대 대학본부 건물 '승연관'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145] 연합감리교 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