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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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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4대 임금
세종|世宗
파일:세종대왕 어진.png
김기창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 (1975년)[1]
생몰년
1397년~1450년
재위
제 4대 국왕
1418년~1450년
조선 왕세자
1418년
이도
군호
충녕대군
영릉
가족관계
배우자 소헌왕후 심씨
자녀 18남4녀(문종,세조,안평대군)
부모 태종(부) 원경왕후 민씨(모)
형제 양녕대군[2], 효령대군[3], 성녕대군[4]

1. 개요2. 생애
2.1. 치세이전2.2. 치세
2.2.1. 말년
3. 평가

1. 개요[편집]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조선의 4대 국왕으로 태평성대를 이끈 임금.

2. 생애[편집]

2.1. 치세이전[편집]

1397년 훗날 태종이 되는 정안군 이방원의 삼남으로 태어난다.1398년 아버지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정종이 왕이 되었고, 얼마 안 가 정종이 이방원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대군이 되었다. 이후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이 세자가 되었으나 자질이 되질 못하여 영민한 셋제인 충녕대군(세종)을 세자 자리에 앉친다. 이후 태종이 왕위를 양위하고 1418년 세종의 치세가 시작된다.

2.2. 치세[편집]

세종은 처음 4년간은 아버지 태종이 보위를 물렸다 그러나 시련이 닥친다. 아버지 태종이 명문가인 씨가문의 권세를 누르려하는데, 하필 그게 자기의 부인 소헌왕후 씨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중전의 아버지 심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15세이상 남자들은 참형을 당하고 아녀자들은 관노로 전락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행히도 소헌왕후는 왕후 자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5]

업적으로는 집현전을 만들어 당대의 학문을 정비하는데 편찬하였다. 대표적인 책이 농사직설,삼강행실도 등이다. 또 다른 업적으로는 휴가를 내면 집에서 책을읽게 하는 사가독서제이다. 세종이 악덕 사장처럼 표현되는 것과는 반대인 업적. 또한 장영실같은 관노 출신 기술자를 초빙해 자격루, 해시계 등을 만들었고 정인지등을 초빙해 지리와 천문을 정비했다. 세종의 노력으로 15세기 조선은 명나라 못지않게 좋은 학문이 있었다.

또 군사부문에서는 화포에 관심을 가져서 여러 화포를 개량해서 천자총통같이 홋날 임진왜란때 큰도움을 주는 화포를 만들었고, 영토확장의 일환으로 김종서,최윤덕등을 보낸 4군 6진을 진행했다 이 4군 6진은 원성이 자자 했는데, 그 이유는 따뜻한 지방에 사는 남도의 백성들을 혹한의 북방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업적들은 세종의 아들 세조에 의해 모두 리셋되었다.

또한 세종초기에 대마도 정벌을 파뜨릴수도 없는데, 때는 세종 초기. (1419년)에 왜구들이 자꾸 약탈을 해오자, 조정 안에서는 정벌을할까 의견이 갈렸는데 당시 상왕인 태종이 직접 거들어서 이종무등을 편성해 정벌에 들어갔다. 정벌의 결과는 처음에는 대성공이었지만 무능한 수뇌부에서 한부대만 산속으로 들어가자, 해서 죄다 몰살 당했다. 그래도 결과는 좋았는데 조선인 포로와 약탈하지 않겠다는 대마도주의 맹세를 받고 귀환했다. 물론 이는 세종의 혼자의 업적이라기보단 세종과 상왕 태종의 공동 업적이라 보는 것이 옳다.

그의 업적의 절정이 있는데 빠지면 이 문서에 의미가 없는 훈민정음이다. 1446년 세종이 반포한 문자인데 처음에는 반대가 있었으나 수많은 학문을 섭렵한 세종의 말에 결국 수그라들었다. 집현전 학자들하고 같이 작업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없다. 무조건 중국(명나라) 만이 옳다고 믿으며,한자가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것은 오랑캐와 같다고 믿던 조선의 학자들이 세종을 따라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을 것인가? 심지어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박팽년이라는 집현전 관리가 반대했었다. 다음 주장은 왕자, 공주들이 작업을 도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효가 제일이던 조선에서 아버지를 따랐을 왕자, 공주이니 위의 집현전 학자 설보다는 신빙성이 있다.

2.2.1. 말년[편집]

야인[6]왜인을 유심히 살펴야 할것이다 이들을 살피지 않으면 100년뒤에 조선을 위협하러 올것이다.

세종이 죽기전에 남긴 유언

말년에 이르어 그는 과로로 인해 몸 상태가 최악이 되고 만다.평소에도 몸이 안좋던 그는 더욱 심해져 결국 병석에 누웠는데, 병석에서도 깨어나기만 하면 일을 했다. 이 상태여서 세자인 이향(홋날 문종)이 대리 청정을 맏게 된다. 이 사이 훈민정음이 탄생된다. 또한 세종에게 슬픔이 닥친다 바로 조강지처 소헌왕후 심씨도 1446년 향년 52세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결국 세종도 4년뒤 1450년, 승하한다. 여담으로 세종이라는 묘호는 원래 문종이 되려했는데, 아들인 문종에 의하여 세종이 되었다.

3. 평가[편집]

한국사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다. 정조와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도 부정적인 점이 있다면 노비종모법, 사회의 보수화, 무리한 화폐도입 정도가 있다.
[1] 김기창 자신의 얼굴을 본뜬거라는 주장도 있다[2] 세종의 맏형. 본래 세종 대신 태종의 뒤를 이은 임금이 되야했으나, 갖은 만행들로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었다.[3] 세종의 작은 형. 불교에 영향을 끼쳤다.[4] 세종의 동생. 일직 요절하였다.[5] 물론 이후에도 소헌왕후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하였다.[6] 병자호란을 일으킨 만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