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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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2. 각 국의 상황
2.1. 조선의 쇄국정책2.2.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2.2.1. 쇄국인가?

1. 개요[편집]

鎖國

쇠사슬 쇄(鎖)를 쓴다. 쇠사슬로 걸어잠근 듯이 다른 국가와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뜻. 세간에서의 이미지는 하면 반드시 망하는 거 (...) 적어도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볼 때 이걸 해서 잘 풀린 나라가 없다. 이해가 잘 안 간다면 파주시 바로 를 보면 된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러 장점들이 보여 다시 재평가받기 시작해 역덕은 물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이 많이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 국내의 교육과정에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부르도록 권고받고 있다.

일본의 넷 우익들이 주장하는 현대의 쇄국은 해당 항목 참조.

2. 각 국의 상황[편집]

2.1. 조선의 쇄국정책[편집]

흔히 흥선 대원군을 쇄국정책의 대명사로 알지만, 쇄국이란 단어 자체는 1800년대 일본의 난학자인 시즈키 다다오가 만든 단어로서 당시 조선에는 쇄국이란 용어는 없었다.

조선왕조가 대외무역을 억압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세계 안에서 비교해 보면 일본의 해외출국한 국민의 재입국 금지, 포르투갈 상인 추방과 중국의 공행 무역의 폐쇄성을 비교해보면 조선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편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폐쇄적으로 흘러간 원인부터 찾자면 신라부터 고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일부 국가와 교류가 꾸준히 있었는데, 이 나라들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중국이 개방적인 성향의 당나라, 송나라였던 덕분에 아라비아 상인들이 남중국에 상주하고 바다를 넘는 데 제도적 제약이 적어서 원거리 국가들과의 교류가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는 초기 정화의 원정 이후로 폐쇄적인 농업사회로의 회귀를 지향했고 조선도 거기에 따랐으며 이후 국교가 제한적이라 이에 따라 무역도 그랬을 뿐이다. 서양과 안 교류했냐는 의문이 든다면 세계지도 한 번 살펴봐라. 사방이 막혔고 그나마 뚫린 남중국해도 류큐와 대만이 있다. 아니, 사실 일부러 정책으로 억압할 필요도 별달리 없는데 국내 시장과 상공업이 극히 제한적으로 발달한 나라가 활발한 대외무역이 가능할 리가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청백리로 대표되는, 사치를 멀리하고 검약을 강조한 시대였기에 신라, 고려 때처럼 귀족층의 해외 사치품 수요가 많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대외무역은 더욱 줄었다.

하지만 대외무역을 크게 억압하지 않았다 뿐이지 굳이 하려고 들지도 않았고 겨우겨우 찾아온 이양선(異樣船)[1]의 경우에는 우리는 청의 속국이다 드립까지 치면서 모조리 돌려보냈다.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의 대명사 정도로 잘못 드러났어도 이러한 쇄국정책은 최소 정조, 길게는 하멜이 표류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도 이양선이 오면 그냥 내쫓았다. 네덜란드 상선 드 혼드 호가 우연히 조선에 정박했을 때는 지방 변장들이 36명의 군졸들을 데리고 무력 진압을 시도한 적도 있었고 정조 시절에도 이양선의 출현에 무력 진압을 시도하다가 이양선 선원들의 반격으로 군졸들이 놀라 달아나는 바람에 처참하게 깨지기도 했다.

이후 순조, 헌종, 철종 시대의 이양선의 출입에도 꿋꿋하게 교역할 생각 없다고 뻗댔다. 대원군이 전쟁불사까지 외치면서 강경하게 나간 것도 있지만 대원군 시절의 대표적인 이양선인 제너럴 셔먼 호의 경우에는 다른 이양선들이 가라고 하면 순순히 따랐던 데에 비해서 조선 군관을 억류하는 등 행패를 부리고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며 어그로를 팍팍 끌어서 제 명을 재촉한 격이다. 거기에 자극받은 서양이 줄줄이 개입하면서 일이 커졌고, 결국 그것 때문에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서 조선의 쇄국정책을 가속화했다가, 결국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으로 쇄국정책이 끝나게 된다.

최근에는 쇄국이라는 표현 대신 '통상수교거부'라는 표현을 역사계에서 주로 쓰고자 하는 듯하다.

2.2.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편집]

전국시대일본은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의 유럽의 국가들과 무역을 하고, 일본인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해서 니혼마치(日本町)라 불리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동남아시아 곳곳에 생겼을 정도로 개방적인 국가였다. 특히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는 에스파냐의 침공으로부터 태국을 방어한 공로로 시암 공주와 결혼하고 송탐(ทรงธรรม)국왕으로부터 태국에 자신의 영지를 받아 일본인 거주지의 영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교황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쿠가와 막부가 나오면서 외세와의 교류를 꺼렸다. 그 까닭은 무역으로 부를 쌓고 신무기를 손에 넣은 각지의 지방 영주들이 막부에 대항할 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되자 격노하여 추방령을 선포한다.

본격적인 쇄국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 등 차례차례 관계가 끊어지며 종국에는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국교가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가사키데지마조선 통신사 같은 예외적인 몇몇 사례를 뺀 모든 교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막부말 흑선을 비롯한 열강의 출현으로 조선보다 10년 가량 이른 시기에 개항하였으며, 내전 과정에서 신식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또한 그 동안 네덜란드와 꾸준히 교류를 해 왔기 때문에 해외 사정에 대해 문외한이 아니었고, 특히 청나라나 조선과는 달리 서양의 물질 문명뿐만 아니라 정신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서 결과적으로는 러일전쟁 이후에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했다.

2.2.1. 쇄국인가?[편집]

쇄국(鎖国)이라는 단어에 비해 실제로는 무역량이 축소되고 국가의 엄격한 규제가 추가되었을 뿐, 대부분의 교류 자체는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쇄국이라기보다는 해금 정책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당시 나가사키를 통해서는 청나라, 네덜란드와 교역하였으며 대마도로는 조선, 사쓰마로는 류큐 왕국[2], 마츠마에로는 에조와 무역을 했다. 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이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끊겼을 뿐이지,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은 유지되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규모는 축소되었을지언정 무역 자체는 계속되었다.

특히 에도 시대는 서양 학문에 개방적인 시기라 난학(蘭学)이라 불리는 네덜란드 학문이 유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1776년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소개된 에레키테르(エレキテル)를 이용한 전기 실험에서부터 수소, 산소 등 유럽의 각종 화학적 지식이 수입되기도 했다.

따라서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쇄국이란 말을 지양하고 있으며,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했으나, 기존에 있던 쇄국이란 단어가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퍼진 탓에, 이 둘을 절충한 '쇄국 등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1] 물론 이 이양선들의 목적은 대개 강제개항+불평등 조약 강요였다.뭐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쿠로후네 사건이나 신미양요만 봐도 답이 나온다.[2] 이 시기의 류큐 왕국은 사실상 일본에 점령당한 상태여서 이것을 국제 무역으로 볼 수 있는가가 조금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