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신토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동시에 해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계승된 요소도 많다. 다시 말해 전후의 신토는 새로운 체제를 형성했지만, 그것은 국가신토를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
국가신토는
메이지 정부의 주도에 의해 급속히 형성되었고, 그 해체는
GHQ의 정책 즉 외압에 의해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GHQ의 신토 정책 중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신토와 국가의 연관성을 끊어버리고 법적으로 신토를 다른 종교와 동렬에 세운 점이다. 1945년 종교법인령이 공포되었고 다음해에 그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신토는 종교법인이 되어
불교나
그리스도교 각 종파 등과 법적으로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 공포된 현행 법규의 종교법인법도 이를 답습했다. 바로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 신사본청(神社本庁, 진쟈혼쵸)이었다.
신사본청은 1946년에 신기원이 폐지된 직후에, 황전강구소, 대일본신기회, 신궁봉재회의 세 기관을 모체로 하여 조직되었다. 1996년 현재 전국 7만9천여 개소의 신사 중 99%가 신사본청 솔하에 들어와 있으며,
이세신궁이 그 본종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신사본청은 솔하 신사의 사무, 교학, 연수 등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각 도도부현에 있는 신사청은 신사본청의 지부조직으로 기능한다. 신사본청은 신사신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며 솔하 신사의 기본적인 활동방침을 결정하지만, 개개 신사의 독자성은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사본청은 각 신사들의 연합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원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변화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미군의 점령시대가 끝나자 일각에서는 국가신토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와 일본 황실의 관련성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한편 일부 신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민속신앙적 측면의 강화를 들 수 있다. 예전과는 달리 국가의 관리를 받지 않게 된 전후 신사의 활동은 매우 자유롭다. 그리하여 많은 신사가 액년의 액땜,
결혼식, 자동차 정화의식, 지진제 등을 적극적으로 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신장제를 행하는 신사도 있다. 이런 의례는 매년 1차례의 대제와 월례제에 비해 잡제로 자리매김되어 있었는데, 어떤 신사의 경우에는 이런 잡제가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전후의 사회변동 속에서 기업이 점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신사를 모신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과 신사의 관계는 의로 밀접한데, 가령 빌딩 건설 때 반드시 지진제를 거행한다. 또한 사내에 작은 사당이나 카미다나를 모신 풍경도 결코 낯설지 않다.
현대
일본인의 생활에
신사가 얼마만큼 밀착되어 있는가는 무엇보다 정월초에 행해지는 풍속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가령 정초에 많은 일본인들은 현관에 ‘가도마쓰(門松)’라는
소나무 장식을 하고 시메나와(注連繩)라 불리는 금줄을 걸어 카미를 맞이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하쓰모우데(初詣)라 해서 정초에 신사를 참배하면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 정해진 관례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새해가 되면 그해에 길하다고 여겨지는 방각의 신사나 사찰을 참배한다. 원래 전통적인 일본인들은 섣달 그믐날부터 각자의 우지카미 신사에서 보내면서 지난 1년 동안의 부정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화되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가족 전체가 동네의 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하쓰모우데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국민적 행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황 중이다. 그래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메이지신궁(明治神宮)과 같은 저명한 신사에는 정월의 사흘 동안만 수백만 명이 참배하는 등, 매년 일본 국민의 70% 이상이 하쓰모우데에 참여한다고 한다. 나아가 세쓰분(節分)이라 불리는 입춘 전날에도 사람들은 액풀이를 위해 신사를 참배한다.
이밖에 오늘날
일본에서
장례식은 통상
불교식으로 하지만,
성인식과
결혼식은 신토식으로 거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인생의 중요한 매듭마다 신사를 참배한다. 가령 아이가 태어나면 일정 기간(통상 남아는 32일, 여아는 33일)이 지난 다음 모친과 조모가 아기를 안고 신사를 참배하여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한다. 이를 ‘오미야마이리(御宮參)’라 한다. 또한 아이가 3세(남녀 공통), 5세(남아), 7세(여아)가 되는 해의 11월 15일에도 신사를 참배하는데, 이런 관례를 ‘
시치고산(七五三)’ 축하연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다음
남자 25세와 42세 때, 그리고
여자 19세와 33세 때 액땜을 위해 신사를 참배하는 민속적 신토 신앙도 아직 널리 행해지고 있다. 나아가 많은 일본인의 가정에는 신단(神棚, 카미다나)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통상 각 신사에서 배포하는 오후다(御札)가 봉안되어 있다.
나무파일:external/richriver.sakura.ne.jp/90f4c50af4a59d6fec743ae0269828ff.jpg일본 신사문화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오후다는 일종의
부적으로서 명백히
도교적 습속의 흔적에 해당된다.
오마모리(御守)라고도 불리는 이 오후다에는 해당 신사의 이름과 함께 가내안전, 화재안전, 교통안전, 입시합격, 장사번창, 치병, 기타 취직이라든가 연인 혹은 운수라든가 복과 장수 등을 기원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일본인들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오후다를 사다가 그것을 몸에 지니거나 또는 전술했듯이 집안의 신단에 안치한다든가 문 입구나 기둥 같은 곳에 붙여 놓기를 좋아한다. 그럼으로써 카미의 가호를 입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신단 앞에 정좌하여 가미와 조상신에게 감사인사를 올리고 하루의 안녕을 기원드린다. 그 밖에 입학, 진학, 졸업, 취직, 환갑 등의 날에 신단 앞에서 감사와 축하의 기원을 올리기도 한다.
개개인의 사적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공장, 고층빌딩 및 주택과 점포 등을 건축할 때 공사 안전과 무사 완공을 천신지기에게 기원하는 의식인 지진제(地鎭祭) 또한 신도식으로 거행함이 관례로 굳어졌다. 또한 신도는 건축, 정원, 회화, 조각, 노(能), 가부키, 차(茶道)문화, 꽃꽂이, 칠기공예 등 일본문화의 저류에 흐르면서 일본인의 정신생활의 심층에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현대 일본인들이 신토를 종교가 아닌 '문화'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과 (위에서도 언급한) 폐불훼석 등을 거치면서
국가신토를 (식민지 조선까지 포함하여) 메이지 정부가 한 주장이다.
메이지 헌법에서는 서양의 영향으로 정교분리를 규정했다. 그런데 또한 온 국민에게 국가신토를 강요한다면, 이는 헌법의 정교분리 조항을 정면으로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를 피하고자 메이지 정부는 "신토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온 일본의 문화이며 초종교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어떤 종교를 믿든, 혹은 믿지 않은 일본인이라면 당연히 국가신토를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신토는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이 여기서 나왔다. 그 결과, 신토는 분명히 종교인데도 지금까지도 많은 일본인들은 신토를 종교가 아닌 문화라고 여기며,
종교라는 말을 오직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종교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협소하게 파악한다. 일본인들의 이런 사고방식을 따를 경우, 우리나라에서 전통민속이나 신앙을 따르는 노인들도 종교인이 아니며, 세계각지의 여러 오래된 토착종교도 종교가 아니다.
아무튼 이러한 일본 신토의 정신성에 의하면, 진리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상적 현실 그 자체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는 현실을 넘어선 어떤 추상적 이념이라든가 보편적 법칙 혹은 불변성이나 영원성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릴 여지가 별로 없다. 다만 ‘지금 이곳’만이 그 자체로 진리일 뿐이다. 그래서 신토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토는 “바로 지금 현재 속의 신대(神代)”를 뜻하는 일본의 전통적 시간관념 즉 ‘영원한 지금(中今, 나카이마)’을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불교중심적으로 신불습합이 되어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신토는 불교와 다른 내세관을 제대로 구축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사후세계는 철저하게 불교에 맡겼고, 따라서 사찰과 승려들이 장례식을 전담하게 되었다. 살아있을 때에는 불보살들과 그 화신인 신토의 신들의 도움을 받고, 죽어서는 불보살의 힘으로 극락왕생을 바랐으니, 신불분리 이전까지 일본인들의 삶과 죽음, 그 어느쪽이든 불교의 영향력이 짙게 배었으며, 신토는 불교 안에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갑자기 정부 주도로 신불분리가 되자 신토에서는 불교와 차별화된 삶과 죽음의 가치를 제대로 제시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 아닌, 정부의 정치적 의도로 국민들의 종교전통을 깨뜨린 결과 일본인들의 종교관념은 이상하게 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