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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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 20대 때 모습으로 우리가 야인시대서 잘 아는 그 모습.[1]
우측 : 중년기 때 모습으로 동양극장의 모습.
본명
심재설(沈載卨)
다른 이름
아오키 진에이(靑木沈影; 창씨개명)
출생
사망
국적
본관
청송 심씨(靑松 沈氏) 안효공파(安孝公派)[2]
학력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연기에 입문을 하다2.3. 광복 이후
3. 각종 창작물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심영3.2. 그 외의 작품
4. 기타

1. 개요[편집]

친일, 월북, 그리고 배신고자의 아이콘.[4]

북한고자 배우. 심영이라는 이름은 예명이다.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며, 아오키 진에이(일본어: 靑木 沈影 あおき じんえい)는 창씨개명한 이름이다. 아버지는 철원군수를 지낸 심완섭(沈琬燮)이며[5], 어머니는 강릉 김씨(江陵 金氏)이다. 본관은 청송 심씨(靑松 沈氏)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6][7].

어떻게 보면 인터넷에서 이호성[8]빌리 헤링턴[9]보다 더한 인간 쓰레기의 숨겨진 다크 호스. 굳이 비교하자면 같은 인간 쓰레기지만 필수요소로서 쓰이는 몰락의 히틀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쪽도 나치즘을 찬양하는 게 절대 아니고 유머 요소로서 써먹히는 중이다. 연기한 사람이 필수요소가 된 덕에 유명해진 점도 비슷하다.

덧붙여서 초기 한국의 영화, 연극계를 후퇴시키는데 한몫한 작자로써 6.25 전쟁 중 수많은 예술가들과 배우들을 강제로 납북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광복 이후 행적에서 후술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심영은 전위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남한의 배우들을 북으로 끌고 갔다. 이런 만행만으로도 남한의 예술을 후퇴시키는데 꽤 많은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강원도 철원군에서 출생하였다. 월북하기 전까지 경성부에서 거주하였다.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무용에 관심을 가지다가 학교의 승인 없이 연극 활동과 사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고, 토월회(土月會)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는 166cm로 크지 않은 편이었고[10], 몸무게는 63.7kg으로 살짝 뚱뚱한 편이었다. 1937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운동을 안 하면 살이 쪄서 취미농구와 하이킹을 한다고 밝힌 바 있고[11], 연애에 대한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는 이미 결혼하였고, 가정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심영의 아내에 대해서는 성씨가 이씨(李氏)라는 사실 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12] 집은 재동 46번지에 있었다고 한다[13][14].

2.2. 연기에 입문을 하다[편집]

학창시절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어서, 그 쪽 계열에 기웃거리다가 배우 일을 시작했다. '연기 초승달'과 '즐거운 인생'에서 데뷔했는데, 대사도 없는 엑스트라 역을 맡았다.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1929년 11월 14일에서 16일에 걸쳐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간난이의 설움'이다. 당시 토월회는 심영의 연기에 대해 크게 호평하며 분발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심영은 같은 해 11월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아리랑 고개에 출연하면서 확실하게 데뷔를 하게 됐다. 1930년 1월 12일, 심영은 남경의 거리 1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관계자들 대부분이 반대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이 연극으로 심영은 극단의 간판스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연기력에 대해선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는 등 꽤 호평을 받았지만[15], 인민배우 황철이 등장하면서부터 그에게 밀려서 활동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야인시대에서는 심영이 주도권을 잡고 황철을 소개한다. 아마 암살미수를 당하는 주체가 이쪽인 만큼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그런 듯 하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 연극 단체인 극단 고협(高協)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여러 연극 단체들이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서 친일 연극 단체 조선연극문화협회를 결성했을 때에 심영은 이 단체의 간부를 맡았다. 그리고 심영이 간부로 지낸 고협은 태평양 전쟁이 진행하는 중에도 극작가 임선규의 작품인 '빙하', '상아탑에서'와 송영의 작품인 '해당화 피는 섬'과 김태진의 작품인 '아름다운 고향' 등 다수의 친일 연극을 공연하였다. 심영은 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 일제가 개최한 제2회 연극경연대회(演劇競演大會)에서 일본어 연극 부문에 개인 연기상을 수상했고, 친일 영화 '너와 나', '망루의 결사대'에도 출연했다. 이와 같은 친일 연극과 영화에 많이 출연하여서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3. 광복 이후[편집]

미군정 시기에는 좌익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3월에 좌익 선전극 (박영호 극작가)[16]을 마치고, 부인과 부인의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던중 미행해 온 김두한에게 광통교[17]에서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김두한은 심영이 입원 중인 병원에 찾아가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 했으나, 아들을 살려달라는 그의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협박만 하고 목숨은 살려주었다.[18] 심영 피습사건 당시 기사. 심영은 이후 1947년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피검되었고, 그 해 말에 심영은 월북을 했다.[19] 이 과정에서 심영은 최은희를 납치해서 북으로 같이 데려갔다.

당시 해방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제강점기 내내 2등 국민이자, 그 사이에서도 천대받는 광대의 위치였던 연예인들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 북한에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많은 숫자가 자진 월북을 했다. 최승희, 문예봉같은 인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저 '만인이 평등'이라는 슬로건은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그 자체였고, 실제로 북한은 김일성인 자와 김일성이 아닌 자의 차별이 극에 달한 신분제 국가였다. 실제로 월북한 연예인 과반수가 숙청으로 생을 마감했고, 당시 지식인 대다수는 사회주의자였다. 해방 전에 월북한 사람들은 순전히 운이 없었다고 쳐도, 심영은 전쟁 기간 중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시키는데 앞장섰다. 이 부분은 쉴드를 칠래야 칠 수 없다.

월북 이후에는 여러편의 선전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가 출연한 작품은 '내고향'(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정찰병'(1953),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다시 찾은 이름'(1963) 등이 있는데, 대부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

앞서 언급한 황철과 함께 북한 예술사에서 이름을 날린다. 여튼 최은희의 말에 의하면 6.25 전쟁 당시 심영이 조선인민군 군복을 입고 와서는 영화인, 연극인들을 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한다. 최은희도 이 때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최은희 기사

1952년에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 및 북한의 국립 연극극장 배우가 되었다. 1959년에 조선연극인동맹 부총장을 맡았다. 1961년에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겸 조선문화예술인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같은 해에 북한의 영화대표단 단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을 역임했으며, 1957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1964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말년에는 숙청되었다가 복권되어 남조선로동당 숙청 때 걸려들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또한 한설야가 숙청된 때는 다시 사상검토를 받았다. 1971년, 결국 다시 숙청되어 평양에 소재한 삼신탄광 광부로 떨어졌다고 한다. 광부로서 고생하다가 1971년폐결핵으로 사망했는데, “이 다음에 남북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가져다 묻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20]. 신불출처럼 수용소에 감금당해 개고생하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북, 탈북 수기에서는 심영이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밀려나 쓸쓸하게 지내긴 했어도 고운 말년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그들 부부가 직접 보지 않고, 북한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책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다. 실제로 이들 부부의 수기에는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그 내용들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21] 다만 이 수기에 언급된 심영의 경우에는, 최은희가 북에서 직접 만났었던 김연실, 문예봉, 문정복은 심영과 절친한 사이였고, 심영과 동시대에 활동했었던 사람들이다. 특히 문정복은 심영과 같은 극단에서 같이 연기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그 기록의 출처가 이들의 증언이라면 신빙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닌지라 사실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친일인명사전에는 실제로 심영이 1966년부터 평양 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했다가 아오키 교수? 1971년 7월 24일에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22]

3. 각종 창작물에서[편집]

3.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심영[편집]

3.2. 그 외의 작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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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서울 1945에서 김일성 역을 맡던 중견배우 박철호가 연기했다.

4. 기타[편집]

친일 연극을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인지 퇴계 이황율곡 이이를 매우 싫어하고 까내렸으며, 그 사이에서도 이황이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리며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영은 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월북한 이후, 그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 가운데 '술만 마시면 이이, 이황을 욕하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

1942년 당시에 스타였던 박향림[23]과 음반을 녹음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대사 파트를 맡았다.들어보자.

[1] # 1937년,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2] 청송 심씨 25세손 '載'자 항렬이다.[3] 현재의 경복고등학교.[4] 그가 저지른 만행이 많았기 때문에 청송 심씨 인터넷 족보에서조차 그의 이름 옆에 그의 행적에 대해 '庚戌生'(경술생)이라고 달랑 적혀있는 게 전부이다(...). 그나마 족보에서 삭제되지 않은 것이 용하다.[5] 개그맨 심현섭과 같은 항렬이다. 즉 심영은 심현섭의 조카 뻘이다. 잘만 하면 소스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6]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7] 따라서 배우 심영소설가 심훈보다 아홉 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조카뻘이다.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보면 둘 사이는 먼 친척이다. 실제로 배우 심영소설가 심훈의 17촌 조카이다.[8] 이 사람은 해태 왕조를 이끌었던 사람이었으나, 선수 시절에 후배들을 빠따로 두들겨 팼고, 은퇴 후에 사업과 무리한 사업 확장을 시작하면서 조폭 1명이 이호성이랑 만난 이후 행방불명되기도 했으며, 사기죄에도 한번 연루된 적이 있다. 사업 실패 이후에는 자기 내연녀와 그 내연녀의 딸 3자매를 살해하고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자 자살하고 끝냈으나, 심영은 월북을 했고, 게다가 해방 전에는 친일 연극을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을 간접적으로 몰아내어 죽게 한 죄가 있다.[9] 이쪽은 친일파가 아닌 와패니즈이며, 그냥 SNS에 올린 자신이 몰라서 생긴 역사적 문제인 글을 사과 안 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인 도발적 태도를 보인 게 문제이지만, 심영은 자기 본업,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본업을 악용하여 친일행위를 하여 잘못된 전쟁인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징용, 징집 대상자들을 전쟁의 전투나 열약한 시설을 가진 탄광 등으로 몰아넣어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인 정신 나간 짓을 몸소 독려하였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가 죄질이 훨씬 더 안 좋다. 피해 규모도 남다른데, 전자는 특정 사람들만 즐기던 한국 붕탁계를 몰락시키는 정도로만 끝났지만, 후자는 그릇된 전쟁을 독려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이끌려 실제 현장에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와패니즈 사건이 터져도 아직까지 그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얼마 전에 열린 국제적 남고제 창시자가 한국인인 걸 감안하면(...).[10] 당시에는 보통 키였지만, 1935년에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였으니, 현재의 176cm 정도.[11] 당시에 살이 찔 정도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배우로써 벌어들이는 돈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12] 이 부분은 심영 피격사건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부인 이씨와 함께 귀가하던 중'이라는 언급이 있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두한에 따르면 당시 심영의 아내가 종각에서 다방을 운영했다고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확인된 바가 없다.[13] 당시에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권문세가들의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14] 참고로 배우 심영의 직계 6대조는 호조정랑을 지낸 심건지(沈健之)로, 예조판서를 지낸 심풍지(沈豊之)의 친형이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틀을 마련한 김조순사위이다.[15] 드라마 '동양극장' 1회에서 "심영씨는 탑스타라 잘 알겠는데, 차홍녀, 황철은 누구죠?"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이니 당시 연극계에서 심영의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16] 일부에서 좌익 선전극 등 창작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친일파이자 좌익 극작가 박영호의 작품이다.[17] 김두한은 동아방송 대담 노변야화에서 종로경찰서, 중부경찰서 등에 애매한 관할점을 이용해 광교까지 미행했다고 한다.김두한의 육성과 고자라니와의 절묘한 싱크! 실제 광교는 청계천을 경계로 종로구중구 사이에 위치해 있다. 광교라고 수지-수원 경계의 그 광교라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정식명칭은 광통교. 현대에는 옛 조흥은행 본사인 광교영업부가 있는 곳.[18] 이 부분은 김두한증언이다. 습격한 본인의 증언이니 진실인지 아닌지는 저 너머에. 어쨌든 야인시대의 해당 에피소드는 이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19] 드라마 야인시대의 영향으로 흔히 심영이 피격 직후 곧바로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심영은 피격 후에도 1년 이상 남한에 남아있었다. 1947년 말 월북했다.[20] 참고로 김용균이라는 탈북자가 쓴 '시효인간' 이라는 책이 출처라고는 하지만, 이 책은 100%의 사실성까진 확인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걸러서 듣도록 하자. 참고.[21] 예를 들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가 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에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22] 반면에 문예봉은 친일인명사전에는 '1967년 안주협동농장으로 추방당했다가 1980년 복권되었다'라고 숙청 및 복권 사실이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23]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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