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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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al-dawlah al-‘abbāsīyyah),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 (al-khilāfah al-‘abbāsīyyah), العباسيون (al-‘abbāsīyūn)
영어: Abbasid Caliphate

750~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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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세기 경의 최대 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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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의 깃발로 검은색 한 가지로 이루어진 깃발이다.

이슬람 문명의 절대적 전성기이자 황금기를 이룩했던 강력한 왕조

전성기시절 서아시아부터 동유럽근처까지 강대국들을 무찌른 왕조

1. 아바스 왕조의 성립2. 아바스 왕조의 영향3. 아바스 왕조의 계보도4.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계보5. 카이로 아바스 왕조6. 역사보기 틀

1. 아바스 왕조의 성립[편집]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 압바스 왕조라고도 부른다. 국립국어원의 아랍어 표기법 시안을 따르면 '압바스'가 맞다.

우마이야 왕조는 부패와 내전으로 국가 체제가 붕괴 위기에 처해있었으며, 말기에 이르면 지방 영주들도 더 이상 중앙 정부를 따르지 않을 정도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예멘인들은 이슬람 창제 이전에는 에티오피아와 상업로를 틔우며 본격적인 무역 활동에 나섰고,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호라산 지역[1]에 진출하여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한다. 이들은 국고에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아랍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안사르나 하심 계열[2]역시 우마이야 가문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표해왔다. 한편 시아파는 카르발라 참극[3]의 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4]

이에 호라산을 근거지로 둔 아바스 가문과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 가문이 손을 잡았다. 아바스 가문은 튀르크계 유목민과 맹렬한 전투를 벌이며 국경을 확장해왔던 터라, 숙련된 대량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고, 하심 가문은 혈통의 지위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제국 내부에서 동조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이들은 747년 무함마드의 삼촌(백부)이자 아바스의 고손자인 아불 알 아바스를 옹립해 거병한다. 승전을 거듭한 끝에 750년 대(大) 자브 강(江) 전투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를 처형한 후 아바스가 새로운 칼리프로 등극하였다. 그 후 아바스는 친교를 맺는다는 핑게로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을 모두 초대한 후 그들을 몰살시켰다. 이 때 10대 칼리파 히샴의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간신이 살아남았는데 스페인 중부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후퇴해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했다.

기존의 서구 역사가들은 아바스의 반란을 아랍인 주도 왕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반발이라고 해석했으나, 실제로는 시아파 페르시아인 뿐만 아니라 수니파 비 아랍인, 수니파 아랍인, 비무슬림까지 가담한 초종파, 초종교적인 반발이었다. 당시 비무슬림은 공직 진출에 제한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아야 했다. 비무슬림을 구성하던 콥트교인, 앗시리아인, 정교회 신자들은 이슬람 성립 이전부터 로마 제국과 교류하여 부와 지식을 축적한 계층이었는데, 이들의 지원은 아바스 가문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 내 무슬림 비율은 10%가 되지 못했으며, 지배층인 아랍인으로 한정하면 이 비율은 극도로 줄어든다. 그 때문에 신민들은 우마이야 가문이 이슬람의 정통적인 지도자가 아닌, 그저 그들의 귀족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허점을 파고든 아바스 가문은 종교, 민족을 초월한 평등함을 내세우며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마드의 친지들을 내세워 종말론적, 구세주론적인 선전을 체계적으로 펼쳐 환심을 샀다. 당시 적이라면 무조건 때려부수고 보는 아랍인의 관점에서 벗어나 체계적으로 선전 센터를 두고 별도로 담당자를 두었다.

또한 이들은 반란시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다. 우마이야 왕조 기간 내내 일어났던 반란은 왕조의 모순을 지적하며 인기를 얻어온 대중 운동가와 이와 영합한 지방 영주의 반란이 다수로 이들이 세력화되기 전부터 왕조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고, 이는 반란의 실패로 이어졌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아바스 가문은 처음부터 모든 일을 철저한 비밀에 부쳤다. 우마이야 왕조는 하심 가문과 아바스 가문의 야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바스 초대 칼리프가 되는 아불 아바스도 호라산과 아랍의 대다수 지방을 정복하기 전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아부 무슬림 알 투르크마니의 경우도 신원이 철저히 비밀에 있어 현재까지도 실존인물 여부가 논란이 될 정도이다.

2대 칼리프 알 만수르는 알리의 수도 쿠파로 천도하였다가 후에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를 세웠다. 이후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에서 그 영욕을 겪게 된다.

2. 아바스 왕조의 영향[편집]

한 때 하룬 알 라시드와 같은 현제[5]가 등장하여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서쪽의 북아프리카아시나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는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맞붙어 대승리한 탈라스 전투가 유명하다. 또한 정복과 영토 확장에만 골몰했던 우마이야 시대와는 달리 정복사업이 어느정도 정리된 후라 문화, 예술, 과학, 종교 분야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인 8~9세기를 '이슬람의 황금시대' 라 할 정도. 특히 동로마 제국사산 왕조 시대부터 남아 있었던 그리스, 로마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수혜를 톡톡히 받았는데, 이것이 어느정도였느냐 하면 서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중세 말 유럽 대학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고전을 다시 번역해서 교재로 쓸 정도었다.

건축양식이나 의복 및 생활양식이나 궁정의례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바그다드의 궁전은 근처 크테시폰 궁전의 영향을 받았고, 미술양식에서도 동로마와 오리엔트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궁정 의식에서도 장엄한 의식이 강화되고, 고급 직물의 수여와 같은 사산조의 풍습이 수용되었다. 또한 행정체계에서도 수백년동안 거대한 국가를 운영해본 페르시아인들은 아랍인들보다 능력면에서 우월했다.[6] 우마이야 왕조의 미숙한 귀족정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페르시아식 관료체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성립된 국가인 만큼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공평히 등용되고 대우받았다. 특히 종교에 대해 굉장히 이성적이고 관대하여 제국의 백성들은 종교에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였고, 심지어 이슬람을 배교하고 무신론을 선언해도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이슬람 비판가로는 아부 이싸 알 와라끄, 이븐 라완디를 꼽을 수 있다. 제국 내의 이슬람과 타종교는 서로 비난하거나 치열한 논변으로 싸울지언정 사적 제재로 살해당하거나 법에 의해 처벌받을 우려가 없었던 시기였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들과 신자들이 종교에서 타종교와 이슬람 비판가, 무신론자들을 대상으로 악명높은 탄압과 공적, 사적 제재, 증오 범죄를 일삼는 것이 흔한 것을 감안하면 차원이 다르다. 이 당시 유럽의 기독교도 이렇게 관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되고 수많은 무슬림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교리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이슬람이 아랍 민족종교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을 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전의 이슬람 교리는 '그냥 알라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믿으면 됨'의 성격이 강했지만, 학자들은 각종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 교리에 대한 근거를 만들었다. 아바스 왕조 이후에도 수많은 타프씨르[7]가 만들어져 왔지만 아바스 왕조때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이슬람에 접근하려 한 타프씨르를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로 현대의 이슬람 개혁가들의 주장도 아바스 왕조 때의 문헌에 기초한다. 다만 여성의 인권은 오히려 우마이야 왕조때보다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를 구가한 뒤에는 기나긴 몰락과 쇠퇴의 시기가 찾아왔다. 지방에 있던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들은 내전을 일으켰고, 내전에서 승리한 알 마문 또한 타히르 조와 같은 지방 왕조의 대두를 막지 못했다.북아프리카에서는 시아파 세력[8]이 봉기하여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빼앗아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 이란에서도 시아파 세력이 부상하여 지방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고, 마침네 이란계 시아파의 부와이흐 왕조에게 바그다드를 점령당하기까지 하나 (945년) 적절한 호칭을 부여하면서 관계를 정립하여 멸망당하지 않았다.

알 무타심이 도입한 외국인 용병, 특히 투르크 용병들은 이후 자신들의 세를 키워 권력을 휘둘렀고, 칼리프는 이들의 칼끝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 후 동방에서 투르크인들이 세운 셀주크 왕조가 물밀듯이 쳐들어와 중동 전체를 석권하면서 종교적인 권위만 겨우 유지하고 세속 권력은 셀주크 왕조의 술탄에게 모조리 내주게 되었다.

셀주크 왕조가 백 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산산히 분열되자 칼리파들이 재기를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연달아 실패로 끝났고 셀주크 왕조는 이때부터 칼리프를 불신해 아예 아랫것으로 대했다. 셀주크의 횡포는 극에 달해 이런 칼리파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알 무타왁킬노예에게 참수당한 뒤 시신이 거리에 버려졌고 알 문타시르는 음식과 물을 주지 않고 땡볕에 며칠 방치했다가 나중에 억지로 물을 많이 먹여 탈수증로 죽었다. 알 무타즈암살자로 고용한 노예에게 암살당했으며 알 카히르때 까지 거의 대부분의 칼리파들은 독살 등으로 대부분 비명횡사했다. 이 후에도 알 라디는 눈을 찔려 실명당한 뒤 감옥에 갇혀 죽었고 알 무타키는 추방되어 거지가 되어 죽었다.
셀주크 왕조가 호라즘 왕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뒤 잠시 칼리파가 실권을 다시 찾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호라즘 왕조의 침입도 어찌어찌 잘 넘기고 한숨 돌렸는데 이번에는 1258년 몽골 제국이 쳐들어왔다. 이미 몽골군은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고려, 북중국중앙아시아, 동유럽 등등을 싹 쓸었고 몽케 칸의 시대에 들어서 이전에 잠시 지지부진했던 세계정복을 막 재개한 상태였다. 몽골군의 지휘관 훌라구는 항복을 요구했지만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은 처음에는 "마그리브[9]에서 이라크까지 모든 무슬림들이 날 구하러 올 것이다." 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도와줄생각을 안했기에 결국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훌라구에게 몸소 찾아가 부하들과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바그다드는 항복했지만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은 적군에 대한 몽골군의 조치는 늘 그렇듯이 대량학살파괴로 끝났다. 그래도 알 무스타심 본인은 "군주는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관례에 따라 자루에 넣고[10] 달리는 말들의 말발굽에 밟혀 압사시켰다.[11]

이렇게 1258년 알 무스타심이 죽으면서 아바스 왕조는 일단 멸망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용병으로 일하던 맘루크들이 몽골의 침입을 저지하고 아이유브 술탄을 쫓아내 맘루크 왕조를 창건했는데, 정통성이 취약한 이들은 아바스 칼리파의 후예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261년 알 무스타심의 먼 친척[12] 알 무시탄시르 2세를 카이로로 초빙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배려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계보는 부활했다. 이 때부터를 카이로 아바스 왕조[13]라고 하고 이전을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라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술탄에게 있었고 칼리파는 종교적 권위만 있었다. 1517년 카이로 아바스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알 무타와키 3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에게 칼리파 칭호를 넘기면서[14] 공식적으로 왕조가 소멸하였다. 이 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공식적으로 칼리프를 겸하게 된다[15].

고대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로 유명했지만 이미 수천 년에 걸친 관개와 집약적 농업으로 인해 아바스 시대에만 해도 토양의 염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다. 하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은 염도가 높은 편이었고 고온지대라 물의 증발량이 많아 염화가 촉진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현대의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다. [16]

여담으로 대식국(大食國)은 아바스 왕조를 말하는데 넓은 범위로는 아라비아 전체 혹은 한 때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 일부,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했던 우마이야 왕조을 말하기도 한다. 대식국이란 중국 당나라 때 표기된 말인데 다양한 유래가 전한다. 하나는 대식의 중국어 음역 ‘Tashi’가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무역상의 뜻을 가진 ‘Taij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650년 이후 이슬람 세력이 중국의 서부 변방에서 급속하게 영토확장을 해나가자 이를 군사야욕이라 규정한 중국인들이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영토 먹기에 환장한 놈)’라는 모멸감 섞인 말인 대식으로 불렀다는 설, 또다른 하나는 풍족하게 살아서 식사량이 많아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3. 아바스 왕조의 계보도[편집]

4.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계보[편집]

대수
이름
재위기간
1대
750~754
2대
754~775
3대
775~785
4대
785~786
5대
786~809
6대
809~813
7대
813~833
8대
833~842
9대
842~847
10대
847~861
11대
861~862
12대
862~866
13대
866~869
14대
869~870
15대
870~892
16대
892~902
17대
902~908
18대
908~932
19대
932~934
20대
934~940
21대
940~944
22대
944~946
23대
946~974
24대
974~991
25대
991~1031
26대
1031~1075
27대
1075~1094
28대
1094~1118
29대
1118~1135
30대
1135~1136
31대
1136~1160
32대
1160~1170
33대
1170~1180
34대
1180~1225
35대
1225~1226
36대
1226~1242
37대
1242~1258

5. 카이로 아바스 왕조[편집]

대수
이름
재위기간
38대
알 무스탄시르 2세
1261~1262
39대
알 하킴 1세
1262~1302
40대
알 무스탁피 1세
1302~1340
41대
알 와티크 1세
1340~1341
42대
알 하킴 2세
1341~1352
43대
알 무타디드 1세
1352~1362
44대
알 무타와킬 1세
1362~1383
45대
알 무스타심
1377
복위
알 무타와킬 1세
1377~1383
46대
알 와티크 2세
1383~1386
복위
알 무스타심
1386~1389
복위
알 무타와킬 1세
1389~1406
47대
알 무스타인
1406~1414
48대
알 무타디드 2세
1414~1441
49대
알 무스탁피 2세
1441~1451
50대
알 카임
1451~1455
51대
알 무스탄지드
1455~1479
52대
알 무타와킬 2세
1479~1497
53대
알 무스탐식
1497~1508
54대
알 무타와킬 3세
1508~1516
복위
알 무스탐식
1516~1517
복위
알 무타와킬 3세
1517
셀림 1세에게 선양

6. 역사보기 틀[편집]

인더스 문명
상고대
외세 지배기
마가다
그리스 헬레니즘 - 스키타이 - 파르티아
대월지
P
T
J
L
H
M
C
M
S
K
M
Q
B
쿠샨 제국
사산 / 굽타 / 후나 제국
분열기
이슬람 도래
이란계 왕조들
가즈니 제국
K
P
T
J
L
H
M
C
M
S
K
M
Q
B
K
R
P
J
L
H
M
C
M
Q
B
M
S
K
※ K는 카슈미르, P는 페샤와르, L은 라호르, M은 물탄, P는 펀자브 남부, S는 신드 지방, Q는 퀘타, B는 발루치스탄, M은 마크란
※ A는 북부 암몬 일대, M는 중부 메데바 일대, P는 남부 페트라, S는 시리아 사막일대
※ T는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한 동부, A는 서북부의 압하지야, B는 서남부의 바투미 일대, O는 중북부의 오세티야 지역

[1] 현재의 이란-아프간에 해당한다.[2] 안사르는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를 도운 메디나 주민들, 하심은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이다.[3] 680년 우마이야 가문이 무함마드의 손자였던 후세인 빈 알리를 참살한 사건[4] 어느 정도냐면 참극이 발생한지 1400년 가까이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시아파는 이 사건을 공공연히 언급하며 수니를 비난하며, 아슈라의 날이 되면 후세인 빈 알리가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거나 칼집을 내어 얼굴 등을 자해하는 행사가 공공연히 열리기도 한다.[5] 그의 개인적 능력은 평범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들들에게 나라를 분할통치하도록 하여 끝내 내전이 일어나게 된 것을 봐도...그의 시대가 황금기로 부각된 이유는 문학작품의 영향과 함께, 그의 아들 대에서 벌어진 내전 시기와 대비되어 그러하였다는 설명이 존재.[6] 이는 당연한것이 페르시아가 문명을 건설할때 아랍인들은 일개 유목민족에 불과했다. 그러니 문화가 발달할턱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현재 이란에서도 아랍인들을 우리가 문명을 건설할때 얘네들은 야만인이었다며 멸시한다.[7] 꾸란의 주석서를 말한다.[8] 정확히는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9] 지금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말한다.[10] 혹은 양탄자에 말았다고도 한다.[11] 하지만 이렇게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은 몽골식으로 가장 명예로운 사형방식이라고 한다. 만약 오고타이 칸이 죽지 않고 바투의 원정대가 서유럽을 정복했다면 당시 교황도 이렇게 죽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12] 알 무스타심과는 10촌 사이로 항렬로는 알 무스타심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28대 알 무스타지르의 장남이자 29대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증손자가 알 무시탄시르 2세이고 차남이자 31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의 6대손(고손자의 손자)이 알 무스타심이다. 위에 나오는 계보도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13] 또는 후아바스 왕조[14] 오스만 제국은 3대째 술탄인 무라트 1세 이래 계속 칼리프를 자칭하기는 했다. 다만 어느 나라에서나 일개 반란군 수령이 왕을 칭했다고 해서 역사서에 그를 왕으로 기록해주지 않는 것처럼, 셀림 1세 이전까지의 칼리프는 진성 오스만 빠가 아닌 이상은칼리프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아바스 왕조가 몰락한 이후 힘을 좀 키웠다 싶은 이슬람 군주들이 으레 하던 행사(?)가, 칼리프 자칭이었다.[15] 간혹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해 '술탄-칼리프제 성립' 이라는 식의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사실 술탄이 곧 칼리프가 되었다는 말을 어떻게든 간지나게(?)써본 것일 뿐 별 뜻 없다.[16] 사실 이라크의 관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15세기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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