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1. 개요2. 현대의 아시리아인3. 창작물에서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주요역사
건국 : 기원전 25세기 경
키키야 전복 : 기원전 1250
멸망 : 기원전 612년


Assyria

기원전 25세기에서 기원전 612년 사이에 중동 지방에 존재했던 민족 내지는 그들이 세운 국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합하기 직전까지 갔던 제국[1]
세계 최초의 다민족 국가

아시리아인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상인으로서 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며, 바빌로니아히타이트와 동맹을 맺고 후르리인의 미탄니를 무너뜨린 후 오리엔트의 패권을 놓고 히타이트 및 이집트와 경쟁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는 오리엔트의 일반적인 국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청동기시대 말기의 갑작스러운 민족대이동(바다 민족 항목 참조)으로 히타이트가 멸망하고 이집트가 위협받을 때 아시리아도 극도로 위축된 시기를 보냈고, 이 시기 이후 갑자기 완전히 면모를 일신한 군사강국으로 군림하기 시작하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일시적으로 통일하기도 했다. 정복지에 총독을 파견하는 중앙 집권 통치를 실시했고 이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계승된다.

아시리아의 군대가 오리엔트를 석권할 정도로 강력해진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한 원인으로는 히타이트나 이집트 등의 주변의 거대 문명들과 아남 등의 지역 경쟁자들이 모두 멸망하거나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시리아 역시 엄청난 타격을 받고 극도로 위축되었고, 설사 비교적 피해가 덜했다 하더라도 이를 입증할 수 없는 증거가 없으므로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다른 이유로는 전차를 혁신하고 최초로 기병을 체계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력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먼저 아시리아에서 말의 품종을 개량하고 직접 타는 기마술을 고안하기 전에는 기병을 운용하기 어려웠다는 것. 단 아시리아가 정말로 기마술을 직접 고안한 것인지 아니면 유목민족이 고안한 기술을 도입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적어도 아시리아가 싸운 적들 중에 스키타이를 제외하면 아시리아 정도로 기병을 운용한 나라가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다음으로는 아시리아 이전에는 말의 허리 부분이 아닌 엉덩이 부분에 타야 했기 때문에 말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미술품 중에도 기병은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말에 탄 마부 한 명이 자신의 말과 기병의 말 두 마리의 고삐를 동시에 쥐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어 기마술이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무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360538881377e934c3d5bbc6f008b32.jpg
또한 역사에 기록된 군대 중 병참 부대 개념을 실천한 가장 오래된 군대로, 전투 부대만이 아닌 지원부대의 개념을 먼저 깨치고 실행에 옮긴 것 또한 아시리아를 군사 강국으로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
수사,훌륭하고 성스러운 도시,(중략)나는 정복하였다,(중략)나는 수사의 지구라트를 부숴 버렸다.(중략)나는 엘람의 사원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들의 신들과 여신들을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들의 조상과 옛 왕의 무덤을 짓밟았고,(무덤에)햇빛이 들게 하였으며,그들의 뼈를 꺼내 아슈르의 영토를 옮겨 갔다.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이 엘람 왕국을 정복한 것을 문자판에 새긴 내용

그런데 아시리아는 우월의식이 쩔다보니 피지배민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잔혹했다. 구약 성서('앗수르(=아슈르)'라고 표기된 나라가 아시리아)에 공포와 증오를 담아 자세히 묘사되어 있고, 아시리아인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점토판에 기록하고 있듯이[2] 저항한 지역은 사람들의 씨를 말려 해골탑을 쌓고, 항복한 지역도 군주와 귀족들은 짐승처럼 코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엮어 끌고 가 처형하고, 평민들도 먼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고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은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였다[3]- 그 빈 땅에 또 다른 곳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식이었다. 피지배민들에 대한 착취도 굉장히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보니 아시리아에 대한 타민족들의 증오가 굉장해서 틈만나면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점령한 이집트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해 버리는 등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시리아의 인구는 많지않다보니 점령하고도 제대로 된 통치가 힘든 판국이라 영토유지가 더욱 버거울수밖에. 결국 사후에 분열된 서아시아를 재통일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피지배 민족에 대한 관용정책을 실시해서 아시리아보다 오래갈 수 있었다.

앗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군주였던 아슈르바니팔 사후에는 후계자 지위를 놓고 아슈르바니팔의 아들들인 신 샤리 이슈쿤아슈르 에텔 일라니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수석 내시인 신 슈무 리시르의 후원을 받은 아슈르 에텔 일라니가 왕위에 올랐으나 다소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시해와 찬탈 가능성이 높다) 내시인 신 슈무 리시르가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렸던 신 샤리 이슈쿤에게 제거된다. 아슈르바니팔 왕 후반기부터 시작된 제국의 쇠퇴는 내란을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고 계속해서 앗시리아의 뒷목을 잡고있던 바빌로니아 지방은 앗시리아 세력을 완전히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 앗시리아는 본토를 지키는 것도 불가능해질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고 기원전 612년 메디아, 바빌로니아, 스키타이, 킴메르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멸망할 때 마지막 왕 신 샤리 이슈쿤은 온 성에 불을 질렀고, 연합군 역시 아시리아에게 당한 그대로 보복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니네베 함락 이후에도 신 샤리 이쉬쿤의 형제가 하란 지역에서 자립하여 아슈르 우발리트 3세라 칭했으나 기원전 608년 하란이 메디아-바빌로니아 연합군에 함락되는 것으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군사 강국이란 이미지와 잔혹한 지배 정책 때문에 아시리아인=피에 굶주린 전투종족 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생활상 자체는 다른 오리엔트 지역의 주민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한 예로 아시리아의 유적 중 하나인 카네쉬 유적에서 발굴된 편지들을 보면 거래의 독촉에 대한 불만감, 남편에 대한 바가지(...), 혼인을 해야 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 등 평범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지극히 상인스러운 성향을 정복 시기에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기사 시민들이 주고 받는 편지에 폭력적인 이야기가 나올리가 만무하다. 아들아 화살촉이 부족하니 50개만 장만해주고 창 한 자루만 빌려주렴.

아시리아는 굉장히 여러 번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아시리아의 수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건국시의 첫 수도는 나라 이름과 같이 아슈르였으나, 기원전 13세기에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투쿨티-닌우르타로 천도한 뒤 다시 님루드, 코르사바드를 거쳐 멸망할 때의 수도는 니네베였다.

님루드에서 발견된 부조에 달렉을 닮은 공성병기가 등장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2. 현대의 아시리아인[편집]

아시리아 제국은 멸망했지만 아시리아인들은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아시리아인 항목으로.

3. 창작물에서[편집]

4. 둘러보기[편집]


※ A는 북부 암몬 일대, M는 중부 메데바 일대, P는 남부 페트라, S는 시리아 사막일대
[1] 메소포타미아-이집트-시리아를 통합했기에, 소아시아를 제외하고는 당대 오리엔트의 꿀땅이랑 꿀땅은 모두 먹어놓은 셈이다.[2] 저걸 써놓은 인간이 이다. 한 나라를 정복해서 그 나라의 수도의 종교 시설을 파괴하고 도굴한것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는것 자체가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다는것이다.[3] 또한 아시리아의 유적에서 출토된 사르곤왕의 부조를 보면 당시 사르곤왕이 포로에게 행한 잔혹한 행위가 조각되었는데 포로의 턱에 줄을 연결시켜 사르곤왕이 그 줄을 당기면 포로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게하여 왕이 들고있던 창으로 포로의 눈을 꿰뚫어버린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