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 산 수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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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초대 국가고문
အောင်ဆန်းစုကြည်
အောင်ဆန်းစုကြည်[1]
Aung San Suu Kyi
아웅 산 수 치
출생
국적
재임기간
초대 국가고문
학력
지저스 & 메리 고등학교[2] (졸업)
델리 대학교 (정치학 / B.A) (1961-1964년)
옥스포드 대학교 세인트 휴스 칼리지 (경제학 / M.A) (-1968년)
런던 대학교 (사회과학 / Ph.D) (-1985년)
신체
가족
母: 킨 치
배우자 마이클 에어리스
슬하 2남
약력
미얀마 하원의원
국민민주연맹 지도자 (1989년 ~ )
미얀마 에너지부장관
미얀마 교육부장관
미얀마 대통령실 장관
미얀마 외무부장관
미얀마 초대 국가고문 (2016년 ~ 2021년)
정당
직업
정치인
종교
별명
공작새, 철의 난초
서명
SNS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초기3.2. 민주화 운동3.3. 영향력3.4. 총선 승리와 우려3.5. 대통령 배출과 군부의 압박3.6.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
4. 비판5. 대중 문화에서6. 기타7.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딸이다.

2. 상세[편집]

2016년부터 미얀마의 실질적 국가원수[3]인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이자 소속 정당인 국민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의장 겸 사무총장을 지냈다. 실질적인 권력을 여전히 군부가 장악해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 사건 등을 소극적으로 지지하게 되며 국제사회에게 비판을 받았다. 2020년 총선에서 국민민주연맹이 거대 의석을 가지게 되자 반발한 군부에 의해 2021년 2월 1일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3. 생애[편집]

3.1. 초기[편집]

버마(現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현재 국부로 숭상받는 아웅 산의 딸이다. 델리 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휴스 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유학 시절에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났다. 결혼 후엔 아들 둘을 낳고 교수 일을 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영국 옥스포드에서 가정 주부로 살았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과 관련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3.2. 민주화 운동[편집]

그러다 1988년에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귀국한 후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집회(통칭 8888 항쟁)에 참여하면서, 영국의 가정주부에서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만큼 버마의 대중에게 아버지 아웅 산이라는 존재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수지는 버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계획 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버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망라한 국민민주연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수지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 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지는 1989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미얀마[4]의 군사 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당시 수지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수지의 인기에 힘입어 총선 결과는 수지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집권당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을 누르고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을 투옥시켰고 2010년에 이르기까지 정권 이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탄압을 가해왔다.

1991년 수지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노벨상 수상식에 대리 참석한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와 두 아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지는 가택연금에서 6년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의 여행을 금지 당했다.

2000년 9월부터 유엔 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지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지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고, 그녀는 서방국가의 미얀마 원조와 관광중단, 단교 등을 촉구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고,[5]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수지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해 수지를 다시 구금했다.

3.3. 영향력[편집]

2010년 11월 13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미얀마 군정은 수지의 가택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의 손발을 묶어 야당이 보이콧을 선언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여당은 25%의 자동의석을 더하여 75%의 의석을 차지했다. 여당이 사회주의 경제를 풀고 경제개발 정책시늉을 한 것도 있고.

굳이 여기까지 안 보더라도 수지가 그야말로 미얀마 군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가택연금 조치에 그친 것은 국제 사회의 눈초리를 껄끄럽게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미얀마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아웅 산 장군의 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 만일 수지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경우 미얀마 군부는 그 날로 국부인 아웅 산 장군을 부정해버린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동요가 발생해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하는게 결코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수지의 가택연금 시절 미얀마에 입국해서 몰래 인터뷰했던 미국 언론인 안나 후살스키가 밝힌 바에 따르면, 결국 취재 활동을 미얀마 정부가 눈치채는 바람에 국외 추방 명령이 떨어져 공항으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한 여경이 작은 목소리로 수지의 안부를 물었다고. 즉 독재정권의 지탱에 가장 중요한 기반 중 하나인 군이나 경찰 내에도 수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6]

2012년 4월 1일에 치러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야말로 몰표 또한 NLD는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만 아직까지는 친군부계 통합단결발전 당(USDP)이나 정부군 소속 땃마도(Tatmadaw)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어떠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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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2012년에 첫 해외 순방을 했다.

2013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관련 기사. 2013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막식에서 연설한 후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지난 2004년에 5.18 재단에서 수상자로 결정했으나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광주인권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또한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고 5.18 국립묘지에 참배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념식수를 했다. 이 외에 전남대학교서울대학교에서 강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12월 광주인권상을 박탈당했다. 박탈의 이유로는 미얀마내 소수민족인 로힝자족에 대한 학살을 방조했다고 지목했다.5·18기념재단 아웅산 수지 ‘광주인권상’ 박탈…"로힝자족 학살 방조"

3.4. 총선 승리와 우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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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각 2015년 11월 10일 오전 기준, 총선에서 수지가 이끄는 야당의 압승이 확정됐다고 한다. 선거 의석(전체 의석의 75%. 나머지 25%는 군부 몫의 직능 비례대표) 중에 88%를 쓸어담으며 단독 정부 수립(전체 의석 중에 67% 이상)에 성공한 것이다. 53년간 이어져온 미얀마의 군부 독재가 종식 될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1990년 총선 때처럼 군부가 또 불복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고, 미얀마의 현행 헌법은 외국인 배우자 혹은 자녀를 둔 국민이 대통령 후보로써 입후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영국 국적의 자녀가 있는 수지는 대통령을 출마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일각에서는 수지가 이제껏 정국을 운영해 온 경험이 없기에 독재를 종식한 이후, 그녀가 과연 독재의 허울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미얀마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제 여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가 미얀마의 정국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2015년 11월 11일, 미얀마의 야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끄는 수지가 차기 정권이 수립되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게 되었다.# 또 대통령은 축하 의전만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앞서 적었다시피 외국인 배우자, 혹은 자녀를 둔 국민이 대통령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대통령은 될 수 없고 총리에 오르는 것이 한계다.[7]

미얀마에서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단독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현재의 '미얀마'라는 국호가 1989년 이전의 '버마'로 회귀할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마는 본래 '브라만'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나라 이름인데 19세기, 영국이 버마를 식민 통치하면서[8] 영국인들이 '버마'라고 발음하고, 현지인들은 '미얀마'라고 발음하는데서 각각의 표기가 굳어졌다. 당시 군부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며 이를 두고 "식민지 시절의 서구적인 색채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비슷한 이유에서 수도 '랑군'을 '양곤'으로 개명했다. 이는 유엔도 승인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를 두고 수지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개명 조치에 대해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뒤 집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둘러댄 허울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며 '버마'와 '랑군'이라는 이름을 고수해왔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방 세력 또한 미얀마 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버마'와 '랑군'의 표기를 사용해왔다.[9]

그러나 민주주의민족동맹(NLD)가 단독 집권하더라도 버마로의 국호 환원은 당장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성원 부산 외국어대 아시아 대학 학장은 "1988년, 정치 입문 때의 혈기 넘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아웅산수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견제해 온 군부의 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노회한 정치인이 되었다. 순조로운 집권을 이루기 위해 군부를 자극하는 일을 최대한 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본래 미얀마에는 주류인 버마족[10]을 제외하고 샨족[11], 카렌족[12], 중국계와 인도계[13], 그리고 몬족[14] 등이 같이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연 주류인 버마족의 이름만을 내세운 국명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3.5. 대통령 배출과 군부의 압박[편집]

2016년 3월 15일 수지가 이끄는 NLD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틴초 대통령이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자 수지는 외무부 장관과 대통령 대변인을 겸직하게 된다. 수지는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가진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 조항 때문에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다. 수지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것으로 보였지만 여전히 막강한 군부의 권력과 이중적 권력 체제 때문에 미얀마에서 정치불안과 쿠데타 우려는 상존해왔다. 사실 치안 및 안보, 국방 관련 등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군부가 쥐고 있었다. 미얀마에서는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15] 미얀마 군부는 정치가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할 때 마다 쿠데타 위협을 가하여 정부를 하수인 삼아왔다. 기사

수지는 중국 외교부장(외무장관) 왕이와 제일 먼저 회담해 미얀마에 급격한 외교 노선의 변화가 없을 것임을 보였다. 그 외에 수지는 수감된 학생운동가들의 석방을 추진하고 차별이 우려되었던 소수민족에 자리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로힝야족 탄압 방관으로 비판받았다. 미얀마 여론이 로힝야족 축출에 호의적인데다, 군부가 미얀마 정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로힝야족에 대한 군부 주도의 조처를 수지도 정면으로 반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여론까지 생겼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노벨재단이 미얀마 실권자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 겸 외무장관의 행보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수여한 노벨평화상을 박탈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노벨 재단 “아웅산 수지 행동은 유감, 노벨상 박탈은 않을 것”

로힝야족 탄압 방관에 실망한 영국의 옥스퍼드시, 아일랜드의 더블린시에서 항의의 의미로 명예시민권을 박탈하였다. 아웅산 수지의 굴욕… 더블린, 명예시민권 박탈

국제엠네스티의 '양심대사상'과 광주시에서 선정하는 광주인권상까지 철회되었다. 유럽의회에서도 인권상 행사에 더 이상 수 치 여사를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 한때 동남아 민주화 운동의 대모로 평가받던 수 치가 이제 국제 사회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한 것.

로힝야족 탄압 관련으로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에 직접 출석하여# 나름의 항변을 했지만, 오히려 거센 반발만 받고 말았다.

2020년 벨라루스 시위에서는 알략산드르 루카셴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2020년 미얀마 총선에서 NLD가 압승하자 군부에서는 반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부는 대법원에 대통령, 선관위원장 자격을 무효화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군 대변인 자우 민 툰 소장은 기자회견에서 “군부가 정권을 잡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정권을 잡지 않을 것이라고도 역시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 쿠데타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군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이 이미 선거 때에 “부정직과 불공정”을 지적했다며 압박의 강도를 높혔다.

군 책임자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특정 상황에서는 헌법이 폐지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논란을 빚었다. 또 군부와 연계된 제1야당 통합단결발전당(USDP) 지지자들이 지난달 29일 수도 네피도에서 군부의 요구를 지지하는 거리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UN 등 국제사회는 군부의 이러한 막장 행보에 우려를 표명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미얀마의 최근 상황에 대해 ‘심대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이 전했다. 미국유럽연합(EU), 영국 등 17개 미얀마 주재 대사관도 공동성명을 내고 “우리는 내달 1일 평화로운 의회 개회 및 대통령 선출을 고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국 군부는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웅산 수지는 다시 연금되었다.

3.6. 2021년 미얀마 쿠데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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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와 미얀마 국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 총선에 반발한 채 아웅 산 수 치를 겨냥하며 실권을 흔들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군부가 그동안 대부분의 실권을 강하게 쥐고 있었다는 것을 외국인들이 알게 되고 수지의 이전 행보를 이해하게 되었다.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 협박 등으로 대부분의 권력을 쥐고 정권을 하수인으로 삼았으며 수지는 거기에 소극적 저항을 하고 있었던 것. 실제로 쿠데타 사유 중 하나가 군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미얀마군의 상태를 봤을 때 아웅산 수지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면 훨씬 빨리 쿠데타가 일어나 진작에 쫒겨났을 것이다.

미얀마군은 문민통제는 커녕 되려 자국군 통수권자를 자신들이 지명하고, 현역 군인들이 개헌저지를 위해 현역 의원으로 들어가 있는 등 사실상 정부의 통제가 불가능한 집단이었다. 아웅산 수 치도 국부이자 미얀마 독립의 영웅인 아웅 산 장군의 딸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할 뿐이지 미얀마에서는 군부를 비판했다가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아웅산 수지의 집권 시기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2021년 2월 1일 새벽, 전년도 총선에서의 국민민주연맹의 승리에 반발하던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윈 민 대통령과 함께 군에 의해 구금되었다.#

2021년 2월 2일 현재 아직도 관저에서 구금 중이며 끼니를 챙겨먹거나 산책을 하는 등 건강한 상태라고 한다.

군부가 수 치를 수출입법 위반 명목으로 기소하고 오는 15일까지 구금하기로 했다# 수출입법 위반 혐의에 대한 구금 기간이 만료되자 국가재난법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해 구금 기간을 연장했다.## UN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 등 국제 사회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수 치 전 고문을 풀어줄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4. 비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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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 문화에서[편집]

  • 아일랜드의 록 밴드 U2가 2000년에 발표한 곡 《Walk On》은 아웅산 수지에게 헌정된 곡이다. 2017년 U2의 리더 보노(U2)가 로힝야족 관련으로 아웅산 수지를 향해 "역겨움이 느껴진다"며 국가자문역 사퇴를 촉구했다. 기사
  • 2011년 프랑스의 뤽 베송 감독이 수 치의 전기 영화인 'The Lady'를 제작했다. 수 치 역할은 미얀마의 이웃 나라인 말레이시아의 여배우 양자경이 맡았다. 양자경은 깡마른 수 치와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5kg을 감량하는 등 상당히 노력했다고.[16] 영화 후반부쯤 가면 반독재운동가로서의 모습보다는 남편과의 애절한 장거리 연애가 부각되는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미얀마 군부정부의 패악이 잘 드러나 있다. 다만 양자경은 화교이기 때문에 미스캐스팅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일:external/www.foreignpolicyi.org/the-lady-movie-poster-3.jpg
    파일:external/images.movieplayer.it/the-lady-michelle-yeoh-e-aung-san-suu-kyi-in-una-significativa-scena-del-film-233752.jpg
  • 이보다 앞선 1995년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비욘드 랭군>에서도 초반 단역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웅산 수 치가 처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1988년 8월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총을 겨누는 계엄군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이 인상적. 한스 짐머가 작곡한 배경 음악까지 더해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준다.
  • 위에 언급된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선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한국의 기획자 이수만도 참석해서 둘이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이 맞다. 이 기묘한 인연은 이수만이 한국에서 출국하는 힐러리에게 영화 'The Lady'의 DVD를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한류의 인기가 대단히 높은 편이며 한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도 매우 높다.

6. 기타[편집]

  • 외래어 표기법 기준으로는 버마어 이름이므로 음절 단위로 끊어서 '아웅 산 수 치'로 표기하는 것이 옳으나(국립국어원 답변) 한국 내에서는 '아웅산 수지'라는 표기가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아웅산 수치'라는 표기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수지 본인은 이쪽이 본래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므로 '아웅 산 수 치'[17]로 표기해 달라고 2013년 1월에 요청했다. 다만 2013년 3월에는 띄어쓰기 없이 '아웅산수찌'로 표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정확히 본인이 원하는 한글 표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어 단어에서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듣고 불쾌해 했으며, 본인 이름의 원래 발음에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로[18] '수치'라고 표기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버마식 이름은 성씨라는 게 따로 없으며 개인별로 이름만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보통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하는 때 바꾼다고 한다. 아웅 산 수 치의 경우엔 아버지의 이름인 '아웅 산'에 수 치를 붙여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아웅 산'을 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냥 전체가 이름인 것이다. 영국 유학 등으로 인해 성씨가 필요해서 아버지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힝야 인종청소 사태가 벌어지자 '수지'의 요청을 무시하고 기존 표기인 '수치'로 표기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수지'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취재한 기자들을 구속하는 것을 방조하는 등 말 그대로 '이름값'(羞恥)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 '아웅산'이 '산(山)'을 연상케 하는 탓에 이름의 일부가 지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19] 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어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처음 접하면 "아웅산에 있는 묘소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인가?"라고 오해를 하게 된다. 또한 '수지' 도 'Susie'나 한국인 인명으로 익숙한 '수지' 와 헷갈리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관련이 없다.
  • 힐러리가 국무장관 시절 대놓고 그녀와 친목질을 했다. 힐러리가 공식일정으로 직접 자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었으며 이후에도 2012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뤽 배송의 수 치 전기 영화 미국 시사회 때에도 참가해 배우, 감독과 사진을 찍었다. 일단 힐러리 개인적으로도 여성 지도력을 강조하여 같은 여성 정치인으로써 이미지 개선을 노리는 점도 있겠지만 현재 미얀마는 중국의 자라나는 영향권을 견제하기 위한 요충지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경제 지원 등의 당근으로 미얀마를 자국 쪽으로 끌어들이면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 정도를 제외한 주변국이 모두 중국에 적대적인 모양이 나온다. 중국도 이를 경계하여서 아웅산 수 치가 집권한 후 첫 외교 회담을 위해 왕이 외교부장이 미얀마를 방문했다.#
  • 어린 시절 거의 영국에서 자랐고 영국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자식까지 둘이나 두어 거의 영국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공격 받고 있다. 때문에 미얀마 군부가 자꾸 영국인이 아니냐며 공격하는 것에 대해 수 치는 "나는 한 번도 영국 국적을 얻은 적이 없는 완전한 버마인"이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는 티베트 불교의 권위자이다. 이른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발탁되기도 했다. 수 치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부터는 수 치 쪽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사실 그 이전엔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뤘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할 정도로 티베트 불교에선 나름 정통했다. 동남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그의 무덤은 영국에 있지만 특이하게도 동남아 불탑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 오랜 가택연금 생활은 두 아들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수 치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고 가택 연금을 당했던 1988년 당시, 장남 알렉산더는 15살이었고 차남 킴은 11살이었다. 민감한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과 나중에는 아버지마저도 사망해서 정신적 버팀목이 사라진 것 때문에 아들들이 무척 힘들어 했다. 더구나 아버지가 사망할 때 어머니를 무척 보고싶어 했지만, 어머니가 영국으로 출국하면 다시는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찾아오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한 모양. 현재 미국에서 살고있는 장남은 어머니가 가족 대신 정치를 선택한 것 때문에 수 치와 절연을 한 상태라고 한다. 그래도 영국에서 사는 차남은 어머니를 이해하는 편이라 연락도 하고 가끔 만나기도 한다고.
  •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 중에 미얀마 방문이 있어 수 치를 공식적으로 방문했고 다음날엔 수지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묘지에 참배하였다. 아웅산 묘소 참배와 관련해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문서를 참조할 것.
  • 군사독재정권이 한창 극성일 때 미얀마에 자연재해가 생기거나 하면 정부의 행정 능력상 어쩔 수 없이 원조를 받아야 하는데 수 치는 오히려 외국 언론들이나 정부에게 "절대 원조해주지도 말고, 오히려 외면해라. 당신들이 버마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오히려 군부를 도와주는 꼴이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버마에 여행 오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돈을 뿌리는 건 군부의 배를 채워준다는 이유로 오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
  • 아직 군사독재정권에 탄압당하던 시절에 인권단체에서 일하던 젊은 미얀마 이민자 출신 인권운동가가 평소 영웅으로 믿고 있던 아웅산 수 치와 만나 대화한 후 울었다고 한다.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인권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독설을 퍼붓는 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7. 같이 보기[편집]

[1] 버마어 표기를 그대로 쓰면 "아웅찬쭈끄라니"(aung hcan: cu. krany) 정도가 되지만, 버마어의 경우 영어처럼 철자와 발음간 괴리가 있는 편이라 실제 발음은 아웅산수지가 된다.[2] Convent of Jesus and Mary School.[3] 미얀마는 헌법으로 인해 외국인 배우자를 둔 사람은 대통령에 오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수지는 대통령을 지내지 못했고,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군부가 장악했다. 군부는 항상 쿠데타를 시사하고 협박하며 실권을 장악했다. 군부의 입김이 들어갔던 미얀마의 헌법 상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명령을 가할 수 없기 때문.[4] 1989년 이후 군부는 버마의 국명을 미얀마로 변경했다.[5] 2006년에 이원복 교수가 만든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서 가로와 세로가 "그렇다면 민주화가 되기 이전에 국민들이 다 굶어 죽을텐데", "민주주의와 국민생활, 뭐가 더 중요할까?"라는 대사를 나눈다. 실제로 1998년 이후 미얀마는 해외 원조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지만, 군부정권은 호락호락하게 물러나지 않았으며 국민들은 오히려 가난하게 살고 에이즈까지 창궐하는 등의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6] 영화 <더 레이디>를 보면, 민주화 운동 중인 수지에게 총을 겨누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던 병사를 독재자가 친히 쏴 죽이면서 "수지를 순교자로 만들면 안 된다"고 막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7] 다만 현재의 군부가 과거 네윈 장군 시절에 비하면 비교적 유연한 편이기 때문에 NLD와 군부간의 개헌 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져 수지의 대통령 등극이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되면 군사정권 시절 만행에 대한 사법처리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될 지도...[8] 19세기의 버마를 이끌고 있었던 꼰바웅 왕조는 영국과 3차례의 전쟁 끝에 1853년,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이르러 독립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미얀마/역사 참고.[9] 현재 한국에 망명온 미얀마 민주화운동권 인사나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일하러온 사람들은 전부 '버마'로 불러주길 원하고있다.[10] 전체 인구의 68%, 이하 인구의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96%80%EB%A7%88[11] 전체 인구의 9%[12] 전체 인구의 7%[13] 각각 전체 인구의 3%와 2%[14] 전체 인구의 2%[15] 개헌을 막기 위해 개헌저지선 수준의 의석이 군부에 할당되어 있다.[16] 배우들, 특히 여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앞두고 체중 감량하는게 일반적이다 보니 5Kg 정도 뺀 게 뭐가 대단한가 싶겠지만, 양자경은 원래도 상당히 마른 몸매인데다가 다른 여배우들처럼 그냥 마른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꾸준히 발레로 몸을 다져서 전신에 잔근육이 붙어 있는 몸이다. 즉, 이미 뺄 살은 다 빼서 몸이 완성된 상태라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는 감량하기 힘든 상태인데도 감량한 것.[17] 버마어 표기법에 따라 음절별로 띄어 쓰는 것이 맞다. 아웅산 수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띄어쓰기이므로 지양해야 한다.[18] 버마어 발음을 IPA로 적으면 'àʊɴ sʰáɴ sṵ tɕì'이다. 버마어 자음은 유기음-무성음-유성음 3개로 구분되는데 이를 비슷하게 자음을 구분하는 태국어나 베트남어의 외래어 표기법 식으로 구분해서 적으면 '아웅 상 쑤 찌' 정도가 된다.[19] 2017년 6월 1일 외래어 표기법 개정 이전에는 외래어 산 이름의 경우 띄어쓰기를 하였고, 그 이후에는 띄어쓰기 조항이 없어졌다. 때문에 '아웅산'이라고 쓰든 '아웅 산'이라고 쓰든 오해를 부르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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