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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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
𐎧𐏁𐏂
흐샤싸
(고대 페르시아어)
존속기간
기원전 550년 ~ 기원전 330년
위치
바빌론 (주 행정 수도)
파사르가다에, 페르세폴리스 (의례 수도)
수사 (왕실 주 거처, 겨울 수도)
엑바타나 (여름 수도)
국가원수
주요 군주
아람어 (공식, 주 공용어)
고대 페르시아어 (왕실, 귀족)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그 외 다수의 지방 언어
종족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지배층)
그 외 다수의 지방 민족
통화
아케메네스 왕조 금화 ('다릭')
아케메네스 왕조 은화 ('시글로스')
성립 이전
멸망 이후
1. 개요2. 역사
2.1. 키루스 대제
2.1.1. 메디아 흡수2.1.2. 리디아 정복2.1.3. 바빌로니아 정복
2.2. 캄비세스 2세: 이집트 정복
2.2.1. 직계의 단절
2.3. 다리우스 대제
2.3.1. 영토 확장 (트란스옥시아나)2.3.2. 왕의 길과 사트라프 체제 구축2.3.3. 1차 그리스 침공2.3.4. 2차 그리스 침공
2.4. 크세르크세스 1세
2.4.1. 페르시아 전쟁 (3차 침공)2.4.2. 정치적 혼란
2.5.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2.6. 더 큰 혼란기로 접어들다2.7. 이집트의 독립과 재편입2.8.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
3. 관용 정책4. 조로아스터교5. 민족성6. 엄청난 경제적 풍요7. 역대 샤한샤8. 역사보기 틀

1. 개요[편집]

고대 페르시아어: 𐎧𐏁𐏂 (Xšassa, 제국), 𐎱𐎠𐎼𐎿 (Pārsa, 제국의 발상지인 파르스 지방)
페르시아어: امپراتوری هخامنشی‎
그리스어: 'Ακεμενιδαι Περσια
영어: Achaemenid Empire

최초로 오리엔트 문명권 전체를 통일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제국으로 기원전 550년부터 기원전 330년까지 220년간 존속한 이란의 고대 왕조다. 현대 이란, 아프가니스탄(북부 한정), 타지키스탄의 시조가 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리우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이모탈 등으로 유명하다. (흔히 '페르시아'라면 이 왕조가 가장 많이 떠오른다.)

오늘날 부르는 아케메네스 왕조라는 이름은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2세의 가문 시조의 이름인 하하마니쉬(𐏃𐎧𐎠𐎶𐎴𐎡𐏁, Hakhāmaniš)를 고대 그리스어로 음차한 아카이메네스(Ἀχαιμένης, Achaimenēs)에서 유래했다.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하허마네쉬라고 한다.

페르시아 제국의 예상 인구수는 보통 다 그렇듯이 학자마다 달라서 1000만 명부터 8000만 명까지 나뉜다.[5] 보통 정설은 2000만~30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동쪽으로는 북인도,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유럽의 끝자락인 그리스까지 달하였으며 북아프리카 이집트에도 달하였던 대제국이다. 로마 제국 보다도 면적이 넓었다.

2. 역사[편집]

왕조의 명칭이기도 한 창시자 아케메네스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에티오피아공주 안드로메다의 아들로 제우스의 손자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그리스 작가들의 창작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며 다리우스 왕의 대에 이르러 창작된 내용이라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6]애초에 시대도 한참 다르다.

왕조의 최초 발상지는 이란 서남부의 '파르사' 지방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가 말하는 '페르시아'가 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페르시아 문서를 참조하자.

2.1. 키루스 대제[편집]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기록에 파르스 지방의 부족이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부터 부족사회를 이루었다고 추정된다.

같은 이란계인 메디아가 칼데아와 손잡고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후에는 메디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홀라당 삼켜버렸다. 이어 신바빌로니아, 리디아를 정복하고 팔레스타인까지 차지하며 사실상 오리엔트 최강국으로 급부상한다.

2.1.1. 메디아 흡수[편집]

기원전 552년, 메디아의 속국이었던 이란 남부의 파르스 지방에서 키루스 2세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건국된다. 그는 메디아의 마지막 군주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고, 그가 하르파고스의 도움으로 외조부를 꺾고 이란의 군주가 되는 과정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상술되어 있다. 그리고 메디아는 비록 수도 엑바타나가 함락되며 페르시아에 흡수되었지만, (기원전 549년) 제국 내에서 파르스 인과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되며 페르시아 인과 동화된다. 두 민족은 모두 아리아 계였고, 따라서 그들이 사는 자그로스 산맥부터의 고원 지대는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이란으로 불리게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2.1.2. 리디아 정복[편집]

한편, 아나톨리아 서부의 리디아 왕국은 크로이소스의 통치 하에서 번영하고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으며, 세계 최초의 금화인 리디아 금화를 주조하였는데, 영토 확장을 노리던 크로이소스는 델포이 신탁의 모호성(크로이소스가 전쟁을 한다면 크로이소스는 큰 제국을 멸망시키리라)에 만족하고 키루스의 쿠데타를 구실로 아나톨리아 동부의 원래는 메디아 령이었던 페르시아의 도시 프테이라를 공격한다.(기원전 547년)

키루스 대왕은 다국적으로 구성된 리디아 군대를 맞아 프테이라를 구원하고, 팀브라 전투에서 낙타 부대의 활약으로 승리한 후, 사르디스를 포위한 끝에 리디아를 정복하였다.(기원전 546년) 그 후 키루스는 크로이소스를 용서하하여 심복으로 삼았고, 관용에 감복한 크로이소스는 후에 일어난 사르디스의 반란을 스스로 진압하였다.[7]

2.1.3. 바빌로니아 정복[편집]

키루스 2세는 오리엔트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서 바빌론으로 눈길을 돌린다. 메디아와 리디아를 정복함으로써 국력 자체는 신 바빌로니아보다 페르시아가 커졌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농토와 막대한 재물, 바빌론을 방어하는 거대한 바빌론의 문과 성벽, 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유프라테스 강은 키루스 대왕조차 애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돌려 수위가 낮아진 틈을 타서 바빌론을 기습했다. 결국 변변한 싸움도 없이 그냥 함락.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서는 바빌로니아 최후의 왕 벨사자르가 연회를 즐기다가 연회가 끝남과 함께 바빌론이 함락되고 자신의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벨사자르는 부왕 나보니두스의 장남으로, 대신 바빌론을 대리통치하던 공동 통치자 같은 인물이었고 공식적 군주인 나보니두스 본인은 출격했다가 키루스에게 패배하고 보르시파라는 곳으로 도망갔다가 이후 바빌론이 함락되자 키루스에게 항복하였다.

2.2. 캄비세스 2세: 이집트 정복[편집]

키루스 2세는 흑해 북안의 마사게타이(스키타이) 원정 중에 서거하고 아들 캄비세스가 즉위한다.(기원전 529년) 그는, 부왕이 이루지 못한 이집트 원정을 감행하여 펠루시움 전투에서 부왕 아마시스 2세의 뒤를 이은지 얼마 안 되는 이집트 26왕조의 그리스계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였다.(기원전 525년) 사모스의 참주 폴리크라테스와 이집트의 그리스 용병대장 할리키나르소스의 파네스가 페르시아 편으로 넘어간 것이 이집트에게는 크나큰 타격이었다. 또한 페르시아의 동맹이 된 아랍 부족의 낙타 부대도 맹활약하였다. 펠루시움 전투에 이은 멤피스 함락으로 프삼티크 3세는 사로잡혀 처형되었고, 샤한샤가 파라오 직위를 겸하게 되었다.

캄비세스 2세는 나일 강 유역을 넘어 북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고자 하였고, 이집트 서부의 오아시스 도시들에 원정군을 파견하고 쿠시 지방(이집트 남부 – 수단 북부)도 공격하나, 극심한 더위에 군사들이 적응하지 못하여 모두 실패한다. 또한, 카르타고에 대한 해상 원정은 페니키아의 비협조로 무산된다.[8] 캄비세스는 키루스와 달리 관용이 부족하였고, 이집트 정복 후 그곳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던 아피스의 소를 죽이는 등의 실책을 범하며 제국이 분열될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집트 원정 전 이해할 수 없는 실책을 저지르는데. 동생 바르디야에게 반역을 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워 처형한 것이다. 키루스의 교육에서 보듯이 키루스 2세는 형제 간의 우애를 매우 강조했고 바르디야 역시 표면적으로는 캄비세스 2세에게 복종한 데다 캄비세스 2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자신이 원정을 떠난 동안 찬탈의 염려가 있다고 해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행동. 가우마타라는 성직자가 자신을 바르디야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캄비세스는 사망했다.(기원전 522년)

2.2.1. 직계의 단절[편집]

캄비세스 말년에 정신병으로 통치가 엉망이 되었고 이집트에서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정치적 분쟁과 반란이 연달아 터지며 큰 혼란이 일었다.그런 사이 키루스의 직계 혈통이 끊기게 된다. 그러나 난을 일으킨 가우마타는 메디아 인이어서 페르시아 인들의 반감을 샀다.

이에 귀족들과 종친들이 봉기하여 가우마타를 죽였는데, 그중 혈연적으로 왕가와 제일 가까웠던 키루스의 사위인 다리우스(다레이오스)가 꾀를 써서 샤한샤(왕중왕)로 즉위한다.(기원전 521년)

2.3. 다리우스 대제[편집]

파일:b6245ab1ae.jpg

키루스 2세의 사위 출신인 다리우스 1세[9]는 혼란을 수습하고 제국을 재정비 하였다.

2.3.1. 영토 확장 (트란스옥시아나)[편집]

다레이오스는 소그디아나(트란스옥시아나) 지방과 인도 서북부(펀자브)까지 원정(기원전 518 – 510)하여 제국의 강역을 중국과 인도의 접경 지대까지 넓혔고,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였으며 흑해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 정착지인 이오니아도 제국의 강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후 일어난 그리스와의 전쟁 원인이 되었다.

2.3.2. 왕의 길과 사트라프 체제 구축[편집]

그는 왕의 길 (사르디스-바빌론-수사) 을 건설하여 제국의 교통을 원활히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중심으로 행정망, 교통망을 구축하고 관료제도를 정비해 황권을 크게 강화했다.

다리우스는 그 외에도 율령,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조로아스터 교를 장려하였으며, 사트라프 제도를 제정하여 항복한 지역의 유력자들을 총독 (사트라프) 으로 임명하였고, 지방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왕의 귀, 왕의 눈이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부정 부패나 비리를 축소시킨 명군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이후의 샤한샤들은 풍족하고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아 별 노력 없이도 태평성대를 유지시켰다. 이 시기의 페르시아는 말 그대로 오리엔트를 넘어 세계 최강국으로 꼽아도 지나치지 않는다. [10]

2.3.3. 1차 그리스 침공[편집]

유럽의 트라키아(불가리아)를 점령하고 북방의 스키타이의 침입도 격퇴한 다리우스 1세는, 이후 소아시아 서해안의 그리스 식민지역(이오니아)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들이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오니아 반란 기원전 499 – 493년) 아테네 등의 그리스 국가들이 이를 지원한 것을 빌미로 3차에 걸친 페르시아 전쟁이 그의 치세에 시작된다.

1차는 다리우스의 사위 마르도니우스 지휘의 원정대였는데, 아토스 산 (테살로니키 인근) 에서 폭풍을 맞아 수군이 궤멸되면서 실패한다. (기원전 492/1년) 다만 이때에 알렉산드로스 1세의 [11]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키고 그리스와 육상으로도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2.3.4. 2차 그리스 침공[편집]

그 후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항복 권유를 위해 파견한 사절들이 모두 처형되자, 격노한 다리우스는 곧바로 2차 원정군을 파견한다. (기원전 490년) 이번에는 저번 원정을 반면교사하여 에게 해 북부를 돌아가는 루트 대신 곧바로 아테네 방면으로 함대를 보내어 풍랑을 피하였다. 에우보이아 섬 일대를 응징한 원정군은 아테네 동북쪽 37km 떨어진 아티카 지방의 마라톤에서 아테네 팔랑크스와 격돌하였으나, 패배하고 철수하였다. (마라톤 전투) 이때에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탈진한 병사를 기려 마라톤 종목이 생긴 것은 유명하다. 이후 다리우스는 복수를 맹세하지만, 캄비세스의 실책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을 하기 위해 미루었고 곧 사망하였다. (기원전 486년)

2.4. 크세르크세스 1세[편집]

제위를 이어받은 다리우스 대제의 아들이자 키루스 대제의 외손자인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리우스 사후 일어난 바빌론과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왕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 정복을 위하여 3차 그리스 원정대를 파견하기로 결심하였다.

2.4.1. 페르시아 전쟁 (3차 침공)[편집]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친정을 감행, 대군[12]을 일으켜 재침하였다. 페르시아의 육군은 그리스 북부 테살리아 지방을 거쳐 그리스의 핵심부인 보이오티아/아티카/펠로폰네소스로 진출하였는데, 그 해안길의 관문인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결사대와 조우하여 힘겹게 그들을 패배시키고 테베로 진격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측에 샛길을 알려준 에피알테스는 지금도 그리스어로 악몽이다 ..

그러나 결사대가 번 시간을 이용한 아테네는, 도시를 포기하고 함대 조직에 모든 국력을 집중하여 살리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포위 섬멸하였다. 이미 아테네 시가지는 이오니아 전쟁 당시의 사르디스[13]의 방화에 대한 복수로 잿더미가 되었으나, 해군의 괴멸로 적지에서 보급이 힘들어진 페르시아 육군을 그리스 연합군이 플라타이아이 전투 (기원전 479년)에서 괴멸시키자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14]

페르시아가 패배한 이유로는 다인종의 대군으로 인한 통솔문제[15], 보급문제, 바빌로니아, 이집트에서의 반란과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인해 주력은 퇴각.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잔존병력이 그리스 군에게 대패하면서 페르시아 전쟁은 끝을 맺는다.

페르시아 전쟁의 종결로 아테네는 매우 강력해졌으며,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의 제국화에 일조하는 기구로 전락하였다. 이후 아테네는 에게 해의 제해권을 확립하고 이오니아를 재독립시켰으며, 이집트의 반란을 돕고 키프로스가 페르시아에게서 독립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477년) 또한, 페르시아가 해군을 재건하려 하자 눈치채고 이를 습격하여 (에우리메돈 전투, 기원전 469년) 저지하였다. 이에 실의에 빠진 크세르크세스는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고 말아 페르세폴리스에 지은 새 궁전에서 하렘에 빠져 왕비를 바꾸는 등 나태하게 지내다가 신하들의 정변으로 암살되고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옹립된다. (기원전 465년)

페르시아는 그 후에도 그리스와 27년간 티격태격하며 대립하다 기원전 460년 아테네의 이집트 침공이 대패로 끝나면서 양국의 대립은 종식된다.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어 그리스는 대부분의 도시국가의 연합체제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형국이 되었으나, 페르시아는 아테네에게 불만을 품은 스파르타를 뒤에서 부추기고 지원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게 하여 아테네를 몰락시켰다. 그리고 사분오열된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이익을 챙기는 듯했으나 기원전 4세기 들어 페르시아 역시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2.4.2. 정치적 혼란[편집]

크세르크세스 1세는 치세 말년에 하렘의 궁녀들과 향락에 빠져살다가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한다. 아르타바누스는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를 옹립해 꼭두각시로 만들고는 실세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성인이 되고나서 아르타바누스를 죽여서 왕권을 되찾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2.5.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편집]

그의 치세에 이집트가 그리스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키자 (기원전 460 - 454년) 기원전 460년에 아테네 상륙군을 나일 강 하구에서 궤멸시키고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였다. 마침 터진 (스파르타에 대한 페르시아의 속삭임과 함께)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59 – 446년) 으로 아테네가 양쪽 전선의 유지가 힘들어지자,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를 압박하여 키프로스를 되돌려 받게 되는 칼리아스 평화조약 (기원전 449/8년)을 통하여 국력을 회복하였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중흥군주로서, 장기 제위하며 아케메네스 제국을 안정시킨 후 사망하였다. (기원전 424년)

상술하였듯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테네와의 화평에 힘썼다. 그의 치세에는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동방으로 전하기도 하여 동서 문화교류로 왕의 치세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였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치세인 기원전 448년 키프로스 섬 앞바다에서 페르시아군이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게 패하여 페르시아는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했고 그 이후에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라는 별명이 있다.

2.6. 더 큰 혼란기로 접어들다[편집]

게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말년에 그의 아들 소그디아노스에게 암살당했다. 곧이어 소그디아노스가 즉위했으나, 머지 않아 그의 이복동생이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서자 다리우스 2세가 소그디아노스를 죽이고 즉위했다. 하지만 정복지에는 반란이 빈발하여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 2세도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채 병사했다. 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치세에는 쿠낙사 전투가 있었는데 이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이자 소아시아 총독이던 키루스 왕자가 형의 제위를 뺏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전투로, 이때 키루스 왕자는 적국 그리스에서 1만 명의 팔랑크스를 모집할 정도였다. 이들 그리스인 팔랑크스가 패전 후 귀국하는 이야기가 크세노폰아나바시스로 남아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대 그리스 정책으로는 융화정책으로 좋은 성과를 얻었으나, 후일 이집트를 비롯한 서방 여러 주 총독들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렸다. 여담이지만 후일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2세가 그를 파르티아 아르사케스 왕가의 선조로 모셨다.

2.7. 이집트의 독립과 재편입[편집]

기원전 404년 이집트는 제26왕조의 후예였던 아미르타이오스의 영도하에 독립에 성공함으로써 제28왕조가 세워졌다. 아미르타이오스는 프삼티크 3세의 아들인 이나로스와 함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절 때부터 대항한 반란 지도자였다. 이처럼 애초에 이집트는 제26왕조가 멸망한 후 페르시아에 대한 반감이 크다보니[16] 프삼티크 3세의 자손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지속하였다.[17]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시절부터 제국 내의 반란은 극에 달했고 페르시아 내부의 내란 때문에 이미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파일:Persepolis_-_Tomb_of_Artaxerxes_III_02.jpg
마지막 중흥을 이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무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즉위했다. 그는 이집트와 내통한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시돈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이집트도 공격하여 기원전 341 제30왕조의 넥타네보 2세를 추방하고 멸망시켜 이집트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잇딴 제위 다툼과 넓은 영토로 인해 발생하는 소수민족 문제[18], 지방 총독들의 반란[19] 등 내분으로 아케메네스 왕조는 나날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특히 말기가 되자 마치 중국의 후한, 당나라, 명나라처럼 환관의 발호가 심해졌다.

2.8.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편집]

환관 우두머리인 바고아스는 실권을 쥐기 위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독살하고 그의 아들 아르세스를 꼭두각시 황제로 삼아 제국의 실세가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아르세스가 그를 제거하고 친정하려 하자 바고아스는 알아차리고 아르세스까지 살해하여 방계 황족인 다리우스 3세를 옹립하였다.

다리우스 3세의 아버지 아르사메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조카였으므로 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친척이었다. 더불어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딸이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여동생 시시감비스였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는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없었기에 조용히 힘을 길러 바고아스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으나, 막 바고아스를 처단하고 내분을 수습할 찰나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을 받았다. 이수스 전투에서 패전한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평화 사절을 보내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전역을 지배할 생각이었으므로 협상을 거절한다.

이때는 아직 다리우스에게도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아나톨리아 지역과 이집트를 상실했다해도 제국의 유프라테스 강 동쪽 지역과 제국 제1의 도시이자 행정수도 바빌론, 2의 도시이자 겨울수도 수사, 3의 도시이자 여름수도 엑바타나, 4의 도시이자 왕도페르세폴리스가 모두 건재했으며 군자금 역시 페르세폴리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보물들로 충분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수스 전투에서 상실한 정예병들의 부재가 컸는데, 이는 당시 페르시아가 가진 군제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페르시아는 너무 큰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각지의 지방관인 사트라프를 파견하되 반란을 방지하고자 그들에게 경비병력 정도만 맡기고 본격적인 군권은 주지 않았으며 감찰관들을 파견해 감시했다. 외적의 침입 때는 국경 지방에서 용병을 고용해 시간을 끈 다음 중앙에서 정예병력을 동원해 상대하는 방식이었는데 친위대 이모탈을 비롯한 정예병력이 이수스 전투에서 소멸해버린 것. 이로 인해 전체 병력 중 절반 이상은 징집한 농민들에게 창과 방패 쥐여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연달아 패전을 거듭하며 쫒겨다니던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에서 사트라프였던 베수스에게 피살당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라서 후계자가 없었고 그녀들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래서 베수스는 스스로 왕으로 즉위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라고 칭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고 추격해온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패하여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결국 페르시아 제국은 모든 영토가 모두 그에게 정복당하면서 멸망한다.

3. 관용 정책[편집]

만화,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나는 관대하다" 라고 하는데 실제로 페르시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했던 아시리아나 신 바빌로니아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대한 이민족 정책[20]과 잘 짜여진 법령 체제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과 존속의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관용 정책의 다른 예시로 제국의 공용어 설정에 있는데, 기존 이란인들의 페르시아어가 아닌 (인구가 많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를 채택한 것이다. 물론 공문서나 종교 문서에서는 페르시아어가 병기되곤 하였다.

세계 최초의 다민족 국가(제국)였던 아시리아는 폭압적인 통치 때문에 타민족들의 분노를 사서 멸망하였다. 하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다민족 국가를 건립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관용을 중시해서 다양한 민족들의 포섭에 성공하였기에 아시리아보다 오래 갔다. 그래서 후에 등장한 다민족 국가들의 성공적인 롤모델로 평가된다.

4. 조로아스터교[편집]

페르시아에서 널리 신봉된 조로아스터교는 후대 선악신앙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종교이기도 하다. 후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국교로 지정된다.

5. 민족성[편집]

그리스인들에게 사치스럽고 겁쟁이(바지를 입었다고 우습게 봤다고 한다)라고 까였지만 페르시아인들은 화려하고 쾌활하며 상무적인 민족이었다. 다만 군사력에 비해서는 그리스를 상대로는 군사적 성과가 다소 딸리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은 무장 측면에서나 당시의 페르시아가 그리스 지역을 잘 몰랐다는 것으로 조금 변호가 가능하다. 페르시아가 일단은 대제국인 것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닌 것은 확실하나 문제점은 그리스와 같이 중무장 보병이 없었고, 무엇보다 산지로 가득한 그리스의 지리정보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 말기에는 정치적 혼란이었기에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했긴 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고전할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는 기록을 보면 대제국의 명성이 그렇게 헛된 것이 아니다.

형이자 황제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황자 퀴로스는 자신이 고용한 그리스인 용병 1만 명한테 "그리스인들이여, 나는 병사들이 모자라서 당신들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이 페르시아의 수많은 종족들보다 강인하고 용맹하다고 여겨서 데리고 오게 한 것입니다.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 즉 페르시아의 백성들은 여러분에 비하면 형편없는 겁쟁이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나라의 군대보다 그리스인들이 더 강력하고 용감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21]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회의를 할 때 술에 취한 상태와 맨정신 상태에서 두 번 한 뒤 결정을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인들은 술을 몹시 좋아하지만 남이 보는 앞에서 구토나 방뇨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들은 엄격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안건을 술에 취해 토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다음 날 술이 깨면, 회의장으로 사용된 집의 주인이 그 건을 다시 상정한다. 그리고 술이 깨어서도 동의하면 결정된 바를 실행에 옮기고, 그렇지 않을 경우 폐기한다. 또한 맑은 정신으로 미리 상의한 것은 술취한 상태에서 다시 논의한다.

6. 엄청난 경제적 풍요[편집]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지만, 아케메네스 왕조가 누린 경제적 풍요와 부는 실로 엄청났다. 왜냐하면, 당시 곡창지역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야, 이집트 삼각주, 이란 지역을 다 먹었기 때문.

한 예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겨울수도인 수사를 점령했을 때는 5만 탈렌트 어치의 은괴를[22], 페르시아 제국의 의례적, 종교적 수도인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는 수도가 여러 곳이었다. 행정수도 바빌론, 겨울수도 수사, 여름수도 엑바타나, 왕도 페르세폴리스가 있었다.)를 점령하고 나서는 12만 탈렌트 어치의 금화를 차지했다. 12만 탈렌트는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의 1년 재정보다 무려 300배나 많은 수치였다.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페르세폴리스가 갖고 있었던 경제력은 그리스 전체를 합친 규모보다 훨씬 거대했던 것이다.
여기서 1탈렌트의 가치가 얼마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그리스인들끼리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에 1탈렌트의 금화는 200명이 탑승하는 군함인 3단 노선 1척을 1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시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보다 약 70년 이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물가의 가치가 달라졌다고 해도 12만 탈렌트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페르시아 제국이 가진 부는 그리스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발행했던 다릭 금화의 위상은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화와 같았다. 그처럼 다릭 금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리스인들은 다릭 금화를 갖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 군대에 복무하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23]
그에 반해 그리스는 스파르타 왕 데마라토스가 페르시아 황제인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말했듯이, "본래부터 가난을 타고 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늘 풍요로운 지역인 아시아를 정복하겠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인 <역사>에서 “만약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를 점령한다면, 얻을 수 있는 부는 감히 제우스신과도 견줄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에는 금과 은과 구리, 곱고 아름다운 직물, 노예와 곡물과 가축 등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휘 아래, 아예 페르시아 제국을 통째로 정복해서 다릭 금화들을 완전히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었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원정에 동참했던 그리스인 데마라투스는 “오늘 이전에 죽은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왕좌에 앉는 모습을 못 보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모른 채 죽었구나!”라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24]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리다가 당시의 세계 최강대국을 정복하여 그 엄청난 부를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리라.

7. 역대 샤한샤[편집]

순서
이름
고대 페르시아어
재위기간
특이사항
초대
아케메네스
Haxāmaniš
기원전 680~기원전 655
왕조의 시조
2대
테이스페스
Cišpiš
기원전 655~기원전 640
3대
키루스 1세
Kūruš
기원전 640~기원전 580
4대
캄비세스 1세
Kambūǰiya
기원전 580~기원전 559
5대
Kūruš
기원전 559~기원전 530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자, 키루스 대왕, 메시아[25][26]
6대
Kambūjiya
기원전 530~기원전 522
7대
Dārayava(h)uš
기원전 522~기원전 486
8대
Xšayaṛša
기원전 486~기원전 465
9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šaça
기원전 465~기원전 424
10대
크세르크세스 2세
Xšayaṛša
기원전 424
11대
소그디아누스
-
기원전 424~기원전 423
12대
Dārayava(h)uš
기원전 423~기원전 404
13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Artaxšaça
기원전 404~기원전 358
14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Artaxšaça
기원전 358~기원전 338
15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아르세스
Artaxšaça Aršaka
기원전 338~기원전 336
16대
Dārayava(h)uš
기원전 336~기원전 330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8. 역사보기 틀[편집]

인더스 문명
상고대
외세 지배기
마가다
그리스 헬레니즘 - 스키타이 - 파르티아
대월지
P
T
J
L
H
M
C
M
S
K
M
Q
B
쿠샨 제국
사산 / 굽타 / 후나 제국
분열기
이슬람 도래
이란계 왕조들
가즈니 제국
K
P
T
J
L
H
M
C
M
S
K
M
Q
B
K
R
P
J
L
H
M
C
M
Q
B
M
S
K
※ K는 카슈미르, P는 페샤와르, L은 라호르, M은 물탄, P는 펀자브 남부, S는 신드 지방, Q는 퀘타, B는 발루치스탄, M은 마크란
※ A는 북부 암몬 일대, M는 중부 메데바 일대, P는 남부 페트라, S는 시리아 사막일대

[1]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 2세 때부터 날개를 펼친 수리를 왕중왕의 군기로 썼다. 위 그림의 문양은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타일 유물에서 따온 것이고, 색상은 다리우스 3세가 붉은 바탕에 황금색 수리가 그려진 군기를 썼다는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기록과 폼페이의 '알렉산더 모자이크' 유물의 색상을 따른 것이다. 저거 같은데...[2] 𐎧𐏁𐎠𐎹𐎰𐎡𐎹𐏐𐎧𐏁𐎠𐎹𐎰𐎡𐎹𐎠𐎴𐎠𐎶 (xšāyaθiya / xšāyaθiyānām / 흐샤야시야 흐샤야시야남)[3] 트라키아, 스키티아, 호라즘, 소그디아, 마사게타이, 박트리아, 사카, 간다라 등[4] 비티니아 왕국, 폰토스 왕국, 카파도키아 왕국, 아르메니아 왕국, 콜키스, 이베리아 왕국, 아트로파테네, 다하, 마우리아 왕조[5] While estimates for the Achaemenid Empire range from 10–80+ million. Prevas (2009, p. 14) estimates 10. Langer (2001, p. 40) estimates around 16. McEvedy and Jones (1978, p. 125) estimates 13.5. Strauss (2004, p. 37) estimates about 20. Ward (2009, p. 16) estimates at 20. Aperghis (2007, p. 311) estimates 32. Scheidel (2009, p. 99) estimates 35. Zeinert (1996, p. 32) estimates 40. Rawlinson and Schauffler (1898, p. 270) estimates possibly 50. Astor (1899, p. 56) estimates almost 50. Lissner (1961, p. 111) estimates probably 50. Milns (1968, p. 51) estimates some 50. Hershlag (1980, p. 140) estimates nearly 50. Daniel (2001, p. 41) estimates at 50. Meyer and Andreades (2004, p. 58) estimates to 50. Pollack (2004, p. 7) estimates about 50. Jones (2004, p. 8) estimates over 50. Safire (2007, p. 627) estimates in 50. Dougherty (2009, p. 6) estimates about 70. Richard (2008, p. 34) estimates nearly 70. Mitchell (2004, p. 16) estimates over 70. Hanson (2001, p. 32) estimates almost 75. West (1913, p. 85) estimates about 75. Zenos (1889, p. 2) estimates exactly 75. Cowley (1999 and 2001, p. 17) estimates possibly 80. Cook (1904, p. 277) estimates exactly 80.[6] 사실이었다면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오니아를 점령하려던 당시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되자 사자를 보내어 그들의 나라를 조사하라는 명까지 있는 것을 보면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그놈의 오리엔탈리즘... 애초에 그리스인들은 다른 문화권의 나라들을 거의 자기네 세계관에 끼워맞춰 이해하려 들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7] 하지만 몇몇 기록에는 키루스가 크로이소스를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다.[8] 페니키아는 카르타고의 모체이고, 원정 시 반란을 일으키겠다고까지 선언하였다.[9]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와 결혼했다.[10] 당시 오리엔트 지역과 함께 문명의 한 축을 구성한 중국과 인도 지역은 각각 춘추전국시대, '십육대국 시대'라 하여 소국들로 분열된 혼란기였기 때문이다.[11]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라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8대조부[12] 헤로도토스는 수륙 500만이라 서술한다. 하지만 현대의 추측으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만을 넘지 않으며 17만으로 추정된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이었음을 기억하자.[13] 리디아 왕국의 옛 수도이자 페르시아의 아나톨리아 사트라프의 중심지[14] 물론 바빌론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영향도 적지 않다. 페르시아의 중앙부가 독립하면 서부를 포기하게 되니 말이다[15] 문화도 다른 데다 언어까지 달라 통역을 쓸 정도니 통솔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특히 비페르시아인이 대다수이다보니 통솔이 더 어려울 수밖에.[16] 특히 이집트는 페르시아와는 민족은 물론 문화와 언어까지 틀렸다.[17]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파라오를 칭했는데 이 시기를 제27왕조라고 한다. 이 왕조는 이집트가 독립에 성공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때까지 지속되었다.[18] 페르시아가 약해졌다 싶으면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려고 했다.[19] 제위 다툼이 심해지다보니 지방 총독들에 대한 통제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20] 특히 피지배민족의 종교적 자유 같은 면[21]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22] 탈렌트는 무게의 단위로 60파운드=960온스에 해당한다. 즉 5만 탈렌트는 2020-07-27 현재의 가치로 11억 7624만 USD에 해당한다. 고대의 경우 은의 가치가 현재보다 10배 정도 높았음을 감안하면 금액은 더욱 커진다.[23] 심지어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 망해가던 다리우스 3세 시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쫓겨다니던 다리우스 3세의 곁에 최후까지 있으며 그를 경호한 상대는 페르시아에 복무하던 2천 명의 그리스인 용병들이었다. 그밖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한테 복수를 하겠다며 페르시아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른 그리스인들보다 그에 맞서서 페르시아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24] 출처: 전장을 지배한 무기전 전세를 뒤바꾼 보급전/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25] 메디아는 기원전 550년, 리디아는 기원전 547년, 바빌론은 기원전 539년에 정복했다. 실질적인 초대 군주는 바로 이 키루스 대왕이다.[26] 왜 메시아라고 불렸냐면 유대인들을 풀어줘서 유대인들이 저사람이 신이 보낸 구원자 중 하나다라고 메시아라고 붙혀줬다.[27] 기원전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 시점부터 샤한샤가 파라오를 겸직한다.[28] 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인 기원전 404년, 이집트가 독립하면서 파라오 겸임도 끊어졌는데, 기원전 525년부터 기원전 404년의 이 시기가 이집트 27왕조이며 페르시아의 1차 정복시대이다.[29] 기원전 343년 이집트를 재정복했다. 그래서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32년은 페르시아의 2차 정복시대로도 불리며, 이집트 31왕조로도 불린다. 그리고 이집트 32왕조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 셈이니 기원전 343년 시점에서 이미 이집트의 자주성은 사라져버린 셈이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헬레니즘 - 로마(+비잔티움) - 아랍 - 투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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