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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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대
125대
126대
아키히토 덴노(헤이세이)
나루히토 덴노(레이와)
아키히토 덴노 (明仁天皇)
아키히토 (明仁)
어칭호
쓰구노미야 (継宮)
출생일
1933년 12월 23일 (만 86세)
출생지
신체
165cm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자녀
재위기간
즉위식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황태자 책봉과 결혼2.3. 덴노 즉위2.4.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2.5. 생전 퇴위 발표
3. 가족관계4. 한국 관련 발언5. 평화주의자6.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제125대 덴노. 연호는 헤이세이(平成). 1933년 12월 23일생으로 쇼와 덴노고준황후의 2남 5녀 중 장남이자 5번째다. 1989년 1월 7일 쇼와 덴노의 사망으로 일본 제125대 덴노에 즉위하였으며, 이듬해 11월 12일 도쿄 고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 아명의 일종인 어칭호(御称号)는 쓰구노미야(継宮). 사후에는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로 불리게 된다. 현재 재위하고 있으므로 킨조 덴노(今上天皇, 금상천황), 줄여서 킨조(금상)로 불린다. 현재 세계의 군주 중에서 유일하게 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
평화주의자로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발언으로 꼽히는 대부분의 말이 평화를 지향하는 말들이다. 덕분에 식민지들을 비롯한 과거 일본 제국의 피해자들에게도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일본 국내외에서 모두 지지를 받는 인물. 물론 여기는 빼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자신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2016년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 발표를 하였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퇴위특례법이 통과되어 2018년 12월 31일 정식으로 퇴위 예정이다. 그럼 물러나면 황위는 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세습되고, 자신은 상황[2]이 된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33년 12월 23일[3],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고준황후(나가코)의 2남 5녀 중 장남이자 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간 나가코 황후는 결혼 후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아 '온나바라(女腹, 딸만 낳는 여자)'라며 곳곳으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있었으며, 신하들이 쇼와 덴노에게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시라"며 구체적으로 후궁 후보들까지 알아보고 있었다.[4] 그만큼 일본 정부, 일본 황실, 궁내성 등에서 다음 덴노직을 계승할 후사(남자)의 탄생을 갈망하고 있던 끝에 태어난 아키히토 친왕이니, 그가 얼마나 귀하고도 귀한 아들이었을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아키히토 친왕은 고작 2살 때인 1936년부터 부모와 떨어져 동궁에서 지냈다. 본래 일본 황족의 자녀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5], 너무도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관례를 깬 것이었다. 참고로 아키히토 덴노의 자녀들(2남 1녀)은 어릴 때부터 쭉 부모와 함께 지냈다. 이는 '최초의 평민 출신 비(妃)'인 아내 미치코 황후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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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누나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여동생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참고로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들은, 막내 타카코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반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6]

본래는 왼손잡이였는데 어렸을 때 양손잡이로 교정했다. 1945년 당시 13살 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쿄(도쿄 대공습 참조)를 보면서 평화를 다짐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 피난처에서 전황을 설명받던 중 카미카제에 대해 "그저 병력을 소모하는 것 뿐 아닙니까?"라고 되물어 담당 장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패전 이후에는 서양의 사상과 생활 방식을 배우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미국 태생의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7]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청소년기를 보냈다. 참고로 그녀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퀘이커[8] 교도 중 하나로, 퀘이커 교도와의 친분은 쇼와 덴노 때부터 전통이었다.

사실 바이닝 부인은 청소년기의 아키히토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일본에선 평가받는다. 그 둘의 일화 중 하나로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의 영어 수업 시간에 외국 친구들을 부르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게 하기 위해 황태자가 아닌 '지미'란 애칭으로 아키히토를 부르려 했는데, 이때 아키히토가 "No, I'm prince."라고 반발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이닝 부인이 "이 수업에서는 '지미'라고 불려야 한다"고 설득하자, 결국 바이닝 부인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또 바이닝 부인은 혼자서 무언가를 할 일이 거의 없는 아키히토가[9] 수동적인 사람이 될까 우려하여 여러모로 능동적인 사고를 갖추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아키히토도 그런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는지 훗날 결혼식에 바이닝 부인을 주요 하객으로 초대했으며[10], 그녀가 미국에 간 이후에도 주미일본대사관을 통해 생일이면 항상 카드와 꽃다발을 보내줬다고 한다.

1952년 가쿠슈인 대학교에 진학하여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그 후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하여 어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참고로 아키히토는 실제 수십편의 논문을 일본 국내 및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학자이기도 하다. 아버지 쇼와 덴노와 첫째 누나 히가시쿠니 시게코생물학에 관심이 많았고, 남동생 마사히토 친왕도 대학원에서 동물학을 공부했다. 차남 후미히토 친왕도 메기 등을 연구했고, 막내 구로다 사야코조류 연구소에서 근무했고, 맏손주 마코 공주도 동물에 관심이 많아 첫 공무[11]를 동물원 관련 행사로 했다. 이를 보아, 생물학에 대한 관심은 집안 내력인 듯하다.

2.2. 황태자 책봉과 결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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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의상을 입고 찍은 결혼사진. 사진 속에서 아키히토가 입은 옷은 소쿠타이이고 미치코 황태자비가 입은 옷은 쥬니히토에라고 한다.

1952년 11월 10일 성년식과 함께 황태자 책봉식이 거행되어 정식 황태자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아버지 히로히토 덴노를 대리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반년에 걸쳐 14개국을 순방했다.

1957년 가루이자와에서 테니스를 치던 도중 평민 쇼다 미치코와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어,[12] 어머니, 숙모들, 여러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959년 결혼하여 화제가 되었다. 오랜 전통을 깨고 최초로 평민 출신을 황실 신붓감으로 맞아들인 결혼이었기 때문. 참고로 아키히토의 형제들은 모두 황족 내지는 옛 화족 가문[13]의 자제와 결혼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 당시로는 고가의 첨단 기계인 텔레비전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백 TV로 중계되는 결혼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앞다투어 TV를 구입했기 때문. 100만대를 돌파했다고 하는데, 1가구 1대 이상의 지금에 비교하자면 이 당시 TV는 있는 사람이나 소유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또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준 스포츠인 테니스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미치코 황후는 사진에서 보듯 미인으로 매우 유명했지만, 엄청난 시집살이에 시달린 바람에 황후가 되었을 때는 남편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14] 미치코도 말이 평민이지 실은 대 재벌가의 딸[15]에 외가는 옛 화족 가문[16]이었는데도 황실 내부에서의 대접이 이랬다는 것이 더 흠좀무다.

나가코 황후신적강하된 황족 여인네들은 입방아를 찧다 못해 집단 괴롭힘에 나섰다. 쇼다 미치코와 아키히토 황태자가 사귈 때부터 달라붙어 둘의 사이를 훼방놓았으며, 그들의 결혼을 극우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결혼했음에도 끝내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시종일관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공식석상에서의 집단따돌림 행위도 일삼았다니 흠좀무. 나가코 황후를 포함한 나머지들은 신분의 벽 운운하기엔 너무나 품위없는 행동으로 며느리를 괴롭힌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치코 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문서를 참조.

지금이야 다 나이 먹은 할아버지, 할머니.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인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 모두 평민과 결혼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사코 황태자비. 이와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는 아키히토/가족관계 참조 바람.

2.3. 덴노 즉위[편집]

1989년 1월 7일 장기 투병 중이던 아버지 쇼와 덴노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 역사상 2번째로 고령인 55세에 즉위해 헤이세이로 개원했다. 1999년과 2009년 각각 즉위 10주년과 20주년 축하 행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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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6일, 임시 국회 개회식에서 개회 선언을 하는 모습.

2.4.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편집]

2011년 11월 폐렴으로 입원해 19일만에 퇴원했고 그동안의 공식 업무는 장남나루히토 황태자가 대신했다. 아키히토 덴노가 77세의 고령이지만 현행 황실전범상 양위하고 상황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효심 높은 걸로 유명한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덴노 정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2012년, 1년 전에 발견된 관상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약물요법을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고 증세가 악화됨에 따라 2월 18일에 바이패스 수술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다시 공식 업무에 복귀했다.

2.5. 생전 퇴위 발표[편집]

하지만 고령인 만큼 힘이 부침은 사실인지, 2016년 7월 13일엔 생전에 덴노의 자리를 아들에게 양위하고 본인은 퇴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역사에서 생전에 퇴위한 덴노는 매우 많으나, 근대로 오면 119대 고카쿠 덴노(光格天皇)[17]가 1817년에 아들 닌코 덴노에게 양위한 이후 200년간은 사례가 없었다. 만일 퇴위하고 선양한다면 차기 덴노는 아키히토의 장남이자 현 황태자인 나루히토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일본 언론은 이것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에 맞서 아키히토 덴노가 던지는 초강력 승부수일 수도 있다고 분석하였다.# 하지만 일본 궁내청 장관은 생전양위를 할 수도 있다는 언론 기사를 사실상 부인하였다.# 반대로 아베 신조 총리가 양위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개헌에 대한 반감을 줄이기 위해 황실전범 개정에 관한 논의를 먼저 꺼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일본 내부적으로는 아키히토 덴노의 뜻을 관철하는 여론 조작을 위해 반대 의견을 내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궁내청과 다르게, 아베 신조 총리를 위시로 하는 정부 인사들은 명확하게 '황실전범 관련 개정 의사는 없으며 논의된 것 또한 없다'고 딱 잘라 놓은 상태여서, 일본 정부궁내청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참고로 일본 총리는 원래 총리가 되면 덴노의 초청을 받아 사석에서 식사를 한번 함께 하는 게 관례인데, 아베 신조는 총리가 되고 나서 2017년 현재까지 한번도 식사 초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 여론의 설문조사에서 85%가 생전 퇴위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8월 8일 퇴위 의사를 밝힌다는 기사가 떴다.(!) 이에 아베 신조 총리는 생전 퇴위 의향을 밝히면 바로 이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힐 방침이라고 한다. 그리고 8월 8일 오후 3시 자신의 입장을 비디오 형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발표 날짜를 두고 고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 6일과 9일은 각각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날이고 15일은 패전의 날이다. 궁내청은 각종 기념일과 황실 행사를 피할 수 있는 8일 오후 3시로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8월 8일 오후 3시, 공식적으로 생전 퇴위 발표를 하였다. 사전에 녹화된 10분 분량의 메세지로, 직접적으로 퇴위를 표현한 것은 아니고 "점차 진행된 신체적 쇠약을 고려할 때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며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였고, 일본 언론에서는 이를 "기분 표명(お気持ち表明)"이라고 보도했다.[18] 더불어 아베 신조 정권이 추진 중인 나루히토의 섭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19] 생전 퇴위는 규정이 없어, 법 개정을 거쳐야 하므로, 실제 퇴위는 최소 6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퇴위하게 된다면 상황(上皇)으로 불릴 것으로 보인다.[20]인세이가 실현될까?

참고로 아키히토 본인은 만 55세의 나이에 덴노로 즉위하였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현재 만 56세다. 본인이 역사상 2번째로 고령에 즉위했다는 점이 고려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하면 2번째 고령으로 즉위한다.[21] 최고령 즉위 덴노는 만 61세에 즉위한 49대 덴노 코닌 덴노다.

그 동안 생전 퇴위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규정에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 1984년 궁내청의 야마모토 사토루 차장은 국회 답변에서 “상황이나 법황이란 존재가 폐해를 불러올 우려가 있고, 덴노의 자유의사에 근거하지 않은 퇴위 강제, 덴노에 의한 자의적 퇴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아래는 메세지 전문 번역이다. 출처 정치 개입이 불가능해 우회적인 표현들로 이루어졌다. 이에 해당 부분에 대한 부연 설명을 덧붙인다.
전후 70년이라는 큰 시기적 고비를 넘기고 2년 뒤에는 헤이세이 30년을 맞는다. 나도 80세를 지나면서 체력 등의 면에서 여러가지 제약을 느끼곤 한다. 최근 수 년 간 덴노로서 스스로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고 앞으로 자신의 할 바와 책무에 관해 생각했다.

오늘은 사회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하는 속에서 덴노도 이제 고령이 된 경우 무엇이 바람직한 처신일지, 덴노라는 입장에서 현행 황실 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일은 삼가면서, 나 개인으로서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을 말하고 싶다. (해설: 정치에 개입할 수 없어서 정부에 법 개정을 구체적으로 요구는 못하겠고, 우회적으로 말하겠다.)

즉위 이래 나는 국사 행위를 하면서 일본국 헌법 하에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덴노의 바람직한 위상이 어때야 할 지를 날마다 생각해왔다. 전통의 계승자로서 이를 계속 수호한다는 책임을 깊게 인식하고, 날로 새로워지는 일본과 세계 속에서 일본 황실이 어떻게 전통을 현대 속에 살려나가며 생생히 사회에 스며듦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운데 몇 년 전에 2차례 외과 수술을 받았고, 고령에 따른 체력 저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앞으로 종전처럼 무거운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곤란해질 경우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국가에, 국민에게, 또한 내 뒤를 이을 황족에게 좋을지를 생각하게 됐다. 벌써 80세를 넘기고, 다행히 건강하기는 하지만 점차 신체 쇠약이 진행하는 것을 감안할 때 지금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으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해설: 아직은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많아 완벽한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것 같으니 양위를 해야겠다. 그게 국가, 국민,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좋은 일이다.)

내가 덴노의 직위에 오른 이래 거의 28년, 그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많은 기쁨과 슬픔을 국민과 함께 했다. 나는 이제까지 덴노의 책무로서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 옆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동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해설: 28년 간 열심히 잘했으니, 이제는 퇴위해서 사람들 옆에서 귀 기울이며 살고 싶다.)

덴노가 상징인 동시에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덴노가 국민에게 덴노라는 상징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구하는 한편 덴노도 스스로를 깊이 이해하고 항상 국민과 함께 한다는 자각을 자신의 몸 안에 키울 필요를 느껴왔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각 지역, 특히 멀리 떨어진 지방과 섬을 여행하는 것도 나는 덴노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중요하다고 느껴왔다. 황태자 시절을 포함해 지금까지 나는 황후와 함께 거의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으며, 어디에도 지역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떠받치는 서민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덴노로서 소중한, 국민을 생각하고 국민을 위해 기원한다는 책무를,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애를 별다른 준비 없이 받은 것은 행복이었다.

덴노의 고령화에 따른 대응으로 국사 행위와 그 상징으로서 행위를 한정 없이 축소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덴노가 미성년자이거나 중병 등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덴노의 행위를 대신할 섭정을 두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덴노가 충분히 그 위치에서 요구하는 책무를 수행하지 않은 채,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계속 덴노로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해설: 덴노의 권한을 줄이거나 일본 정부가 추진 중인 나루히토 황태자의 섭정은 대책이 아니다. 생전에 퇴위를 하고 싶다.)

덴노가 건강을 해쳐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경우 이제껏 보았듯이 사회가 정체하고 국민 생활에도 다양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 더욱이 지금까지 황실 관례로서 덴노의 죽음을 맞이하면 엄중한 장례 절차가 거의 2개월 동안 이어지고, 그 후에도 장례에 관한 행사가 1년 간 계속된다. 그처럼 번거로운 행사와 새 시대에 관한 갖가지 행사가 동시에 진행함에 따라 행사 관계자, 특히 유족은 대단히 힘든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이 같은 사태를 피할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에 남아있다. (해설: 사후승계가 되면 내 장례식과 나루히토 황태자의 즉위식이 동시에 치뤄진다. 행사가 동시에 이뤄지면 여러 사람들에게 힘들다. 그러나, 생전에 퇴위하면 그럴 일 없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국 헌법상 덴노는 국정에 관한 권능이 없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우리나라의 유구한 덴노 역사를 새삼스럽게 돌아보면서 앞으로도 황실이 항상 국민과 함께 하고, 서로 힘을 합쳐 이 나라의 미래를 쌓도록 그리고 상징적 존재인 덴노의 공무가 언제라도 중단 없이 안정적으로 이어져 나갈 것을 충심으로 염원하며 이렇듯 나의 심경을 토로한다. (해설: 덴노는 국정에 개입할 수 없으므로, 일본 정부가 법을 고쳐서 내가 생전에 퇴위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본 정부에서는 아키히토의 생전퇴위 의사 표명과 관련해 이달 말이나 내달 초 전문가 회의를 구성해 대응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 9월 23일. 천황의 공무 부담 경감 등에 관한 유식자(有識者·전문가) 회의를 설치하며, 내달 중순 첫 회의를 가진다. 또, 호칭에 관해서 특별법 명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문가 사이에서도 크게 엇갈리고 있다.#

산케이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법 정비가 내년에 이뤄질 것이며, 나루히토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례인 '다이조사이(大嘗祭)'[22]를 2018년 11월 여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고 냈다.# 전문가 회의는 내년 초까지 대책을 논의한 뒤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재위 30주년인 2018년에 퇴위하는 쪽으로 가닥잡히고 있다.# 그리고 2019년 1월 1일에 양위 전망 기사가 나왔다.# 또, 아키히토의 퇴위 시기를 85세 생일을 맞는 2018년 12월 23일로 검토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전문가 공청회에서 퇴위에 대해서 찬성 9 : 반대 7이며, 찬성파 중 '특별법 제정'vs'전범 개정' 가지고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후, 전문가 공청회는 현 덴노에 한해 허용하는 특례법을 주요 방안으로 제시할 방침이라고 보고있다.#

아키히토 생일을 맞아 한 언론이 죽마고우인 친구와 인터뷰에서 특별법이 아닌 황실전범(皇室典範·왕위 계승 방식을 규정한 법률) 개정을 통한 생전 퇴위 등 ▲ 섭정(攝政) 반대 등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생전 퇴위 이후 칭호와 관련해 '상황'(上皇)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하지만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를 통과한 "천황의 양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특례법"에서 상황(上皇)의 칭호를 사용할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번 '상황' 칭호는 예전 상황들의 정식 칭호인 '태상천황'의 줄임말이 아니라 해당 법 제3조에 규정된 칭호 자체가 그냥 상황이다.[23]

퇴위한 뒤에는 마음이 변해도 다시 즉위하지 못하도록 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덴노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하는 섭정(攝政)도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 2017년 5월 19일. 일본 정부가 현재의 덴노만을 대상으로 생전 퇴위를 인정하는 내용의 특례법 정부안을 확정했다.# 2017년 6월 2일 일본국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했고 6월 9일 참의원 본회의 역시 통과했다. 남은 건 각의의 승인이지만 아베 신조 스스로 덴노의 뜻에 반하지 않겠다고 표명한 만큼 양위에 관한 사실상의 절차는 이제 끝났다. 2018년 12월 31일 퇴위하고 다음날인 2019년 1월 1일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로 즉위할 예정이다. 그와 동시에 새 연호가 발표되며, 헤이세이 시대는 막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3. 가족관계[편집]

4. 한국 관련 발언[편집]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의 대화 때 "저의 가계를 살펴보면 모계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2001년 12월 23일, 68세의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키히토 덴노는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아키히토가 언급한 간무왕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를 연 성군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닌으로 할아버지 대에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하여 왕위 계승이 어려웠던 인물이다. 그때 만난 여인의 이름은 화신립(和新笠) 또는 고야신립(高野新笠)으로 백제 무령왕의 10대손으로 멸망한 백제 왕실의 후손이었다. 62세에 일왕이 된 고닌은 화신립을 정실로 삼고 이들 사이에 난 아들 간무를 왕세자로 삼는다. 789년 화신립이 세상을 떠나자 간무왕은 어머니를 태황태후로 추증하고 히라노 신사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냈다. 간무왕은 즉위 동안 백제 왕족의 후손들을 찾아가 제사 지내고 이들에게 5위 이상의 관위를 내리거나 중앙과 지방의 중요 관직에 임용하였다.#

간무가 편찬한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24]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일본의 보수 위주의 언론들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아키히토가 언급한 한국과의 혈연관계 대목은 쏙 빼놓았다[25]. ‘아사히신문’ 등 좌익 진보 언론에서 아키히토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2013년 나라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도 같은 발언을 한다“‘속일본기’에 의하면 간무덴노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을 선조로 여기는 백제 도래인(渡來人)의 자손이다.”

2005년 사이판 방문 때 '태평양한국인평화탑'에 참배했다. 궁내청 관계자들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고 했다.#

2017년 9월 20일 사이타마현 히다카 시에 있는 고마신사를 방문했다.[26] 고마신사는 1300여년전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의 보장왕의 아들이자 도래인인 약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사인데 신사를 둘러보던 아키히토가 "고구려는 몇 년에 멸망했습니까?"라고 신사 관리자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5. 평화주의자[편집]

역사관, 정치관은 밑에 쓰여있는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반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과거 침략을 부인하거나 미화하는 짓은 하지 않으며, 평화헌법의 가치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

대표적인 발언으로는...
"우리 국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깊은 반성과 평화국가가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1992년 10월, 중국 수교 20주년차 방문 때)
"한때 우리 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이 항상 내 기억 속에 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
“제국헌법 시대의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아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
(일본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 (2013년 12월 23일 팔순을 맞아 발표한 인사말 중에서)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2015년 1월 1일 궁내청을 통한 신년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란 말도 아키히토가 한 말이다.[27] [28] 특히 아키히토는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참배한 일이 없다. 극우 세력 일각에서는 꾸준히 참배를 권유하고 있지만, 아키히토는 이에 대해 일체 함구 중.

결국 위 발언들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지위를 의식해 표현을 다소 완곡하게 했을 뿐이지 실제 아키히토 덴노의 성향은 반(反)극우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 어린 시절 생생히 겪은 전쟁의 기억 때문인 듯 하다.[29]

2011년 3월 15일 토호쿠 대지진과 관련한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방송되는 도중 긴급 뉴스가 발생하면 메시지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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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왼쪽에 아베 신조 총리가 보인다.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주도하여 '주권 회복의 날' 을 정부 행사로 격상하였다. 이는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군정 체제를 벗어난 것을 기념함과 동시에, 미군정 때 만들어진 현행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행사인만큼 내각이 참석을 요청하면 덴노로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 참석한 아키히토는 행사 내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 폐막 직후 퇴장하는 도중 참석자들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뭇 당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일본 황실까지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건 둘째치고서라도, 과거 히로히토조차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하며 이후로는 근처에도 안 갔다는 사실[30]을 감안하면 내심 평화헌법을 유지하려는 아키히토 입장에서 이 날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덴노 헤이카 반자이'도 얼핏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를 내세워 본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간신배들의 속셈이 뻔한데 아키히토 입장에서 유쾌할 리가 없다.

위와 같은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아베 신조 총리와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덴노는 신임 총리가 취임하면, 공무 외에도 개인적으로 황궁(고쿄)에 초청해서 만찬을 여는 전통이 있는데, 아베는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어도, 사적으로는 아베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인다.

사실 일본 내 극좌파들도 덴노 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심심하면 주장하지만, 아키히토 개인의 인격에 대해선 비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히로히토조차 전범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말이다.

야마모토 타로원자력 발전소 관련 문제 등으로 황거에서 열린 행사에서 편지를 건넨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의 안전을 위해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장에게 넘겼다. 만약 읽었으면 야마모토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상징이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극도로 제한된 일본 덴노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 덴노가 왜 편지를 즉석에서 보거나 자신이 갖지 않고 시종장에게 편지를 넘긴게 현명한 판단인지는 야마모토 타로 참조.

거기에 더해 패전 70년을 맞이해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녹음(옥음방송) 원판 사진과 고음질 디지털 녹음본을 2015년 8월 1일에 전격 공개했다.#(일본어) mp3 덴노 일가의 굴욕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항복 녹음을 디지털로 세심하게 복원해 공개한 것은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반대하는 아키히토 덴노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반성하자는 것. 참고로 이 원본을 이용한 디지털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의 항복 선언 녹음본은 음질이 매우 열악했다! 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를 참고할 것.

6. 기타[편집]

아버지 쇼와 덴노처럼 어류학자로서 일본 어류학회 회원이기도 하고, 사이언스네이처 논문을 포함한 2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31][32]. 오랫동안 망둥어 연구를 한 것을 기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종이 2개나 있다. Platygobiopsis akihitoExyrias akihito가 그것. 실험이 예상했던 것처럼 안 되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경험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

외국 방문이 3차례(미국, 영국, 네덜란드[33]) 뿐이었던 히로히토와 달리 해외순방이나 지방순례, 지진현장 방문도 흔해서 인기가 높은 편이라고. 참고로 2003년에 이르러 일본의 도도부현을 모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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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방일 당시 악수를 청했다 무시당한 적이 있다. 사실은 아키히토 덴노가 더 들어가라고 손짓한 걸 김대중 대통령이 못 본 거다. 애초에 두 사람이 저기서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밖에서 만난 후에 같이 들어온데다, 일반적으로 악수는 오른손으로 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절 교육 다 받았을 아키히토 덴노가 악수를 왼손으로 청할 리가... "김대중 대통령님, 더 들어가시죠. 아니, 더 들어가셔야... 그냥 제가 들어가죠."[34]

2015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 순방을 검토 중에 있다고 NHK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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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차로는 2세대 토요타 센추리 로얄을 탄다.[35][36] 덴노의 차량 탑승시 덴노의 위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이다. 즉 인도와 가까운 쪽 자리에는 앉지 않는다. 이 자리는 황후의 자리가 된다. 이유는 테러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다.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1991년식 혼다 인테그라 4도어 세단 모델을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 부부가 테니스 치러 갈 때 직접 운전한다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사용중이다.[37] 참고로 황태자 시절에는 노란색 비틀을 몰았다.

미국의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시즌 10 23화에서 심슨 가족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스모 경기장에서 등장했는데[38][39] 그를 스모 선수로 착각한 호머 심슨에게 집어던져져 마와시(샅바) 담는 통에 쳐박혔다. 당연히 호머 심슨은 일본인 관객들에게 쓰레기 세례를 받았고, 일본 경찰에게 예절교육을 받다가 마지가 보석금을 내서 석방된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군주들조차도 호머와 엮이면 무사할 수가 없다.[40] 일설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는 일본에서 방영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세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추가바람

소설 원작인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서도 등장한다. 직접적인 이름 언급은 없고 그저 황태자, 전하라고만 언급이 된다. 일본에게 병합된 태평양 연안 미주 지방을 방문하게 된다. 황실은 이미 군부의 꼭두각시가 되고 독일과 벌어지는 격차를 걱정하며 평화를 주장하는 이미지로 나온다.[41] 위험을 무릅쓰고 태평양 연안의 자국민들에게 연설을 하다가 저격을 당하고 중태에 빠진다. 이후 수술은 무사히 마쳤지만, 중태에 빠졌다는 언급만 나온다.

퇴위 발표 이후에 덴노의 생일과 신년에 궁중에서 이뤄지는 일반인의 축하 행사에 참가하는 관광상품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JR 히가시니혼이 관리하는 황실 전용 특별열차[42]가 있고 이를 위한 덴노 전용 시설이 도쿄역, 하라주쿠역에 있는데 정작 본인은 이를 사용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걸 사용하려면 각종 준비를 해야 하는데[43] 이 과정에서 다이어가 망가져 시민들이 불편을 겪을 것을 안 좋아해서라고. 하기야 하라주쿠역은 사이쿄선 다니니까 행차하시면 반쯤 헬게이트 될듯

그 외에 일본의 역대 덴노 중 여성 덴노와 '요절한 덴노'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수염을 기르지 않은(면도한) 덴노이기도 하다.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가 일본 사이타마 현에 위치한 고구려 신사인 고마신사에 참배한다. 고마신사 관계자는 덴노 부부가 20일 신사를 방문할 예정이라며 역대 덴노 가운데 고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아키히토 덴노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아키히토 덴노가 퇴위하기 전에 일본 내에서 한반도의 옛 왕조인 고구려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는 고마신사를 방문함으로써 한국에게 반성과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20일 아키히토 덴노는 고마신사를 방문해 신사 참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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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쇼와 덴노까지는 교토고쇼에서 진행했다. 즉, 도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사상 첫 덴노인 셈이다.[2] 무신들이 막부로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일본도 천황의 권력이 막강한 편이어서 황위 다툼이 심해 일찍 양위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상황이 되고 불교에 귀의해 출가한 상태라면 법황이라고 한다,[3] 증조할아버지 메이지 덴노후궁소노 사치코와 생일이 같다.[4]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않았다.[5] 쇼와 덴노는 생후 70일부터 친부모와 떨어져 시종들에 의해 양육되었다.[6] 일찍 죽거나, 병을 앓거나, 자녀를 낳지 못하거나, 과부가 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등등.[7] 자식은 없고 남편과는 사별했다고 한다.[8] 개신교 종파 중 하나. 평화주의, 전쟁반대가 주요 모토 중 하나인 교파로 양심적 병역거부도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9] 혼자서 목욕물 받는 걸, 청소년 때 처음 해봤다고 한다. 그것도 바이닝 부인이 아키히토와 별장으로 휴가를 가서 주변인들을 물리쳤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10] 1959년 결혼식 당시의 기록영상. 1분 17초부터 바이닝 부인이 나온다.[11]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2학년이던 2008년.[12] 세간에 공식적으로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는 식의 낭만적인 이야기로만 포장되어 알려졌지만, 사실 두 사람의 만남 뒤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계획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미치코 황후/결혼 전 문서를 참조.[13] 1947년의 신적강하 이후로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은 모두 평민이 되었으나, 신적강하 이후로도 이들의 콧대는 높았다.[14] 특히 시어머니나가코 황후는 큰며느리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며 괴롭혔고, 2000년에 죽기 전까지 큰며느리를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총 42년간 시집살이를 한 셈. 그 때문에 1993년 10월 20일, 미치코 황후가 만 59살 되던 해에 실어증에 걸려 고생을 했을 정도이다. 이 탓인지 본인은 두 며느리와 대체로 사이가 좋은 듯하다. 다만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와는 태어나지 않는 손자 문제로 고부 갈등이 있었으며, 이 영향으로 한동안 황태자 부부와 덴노 부부 사이가 엄청 악화되었던 적이 있다. 여기를 참조.[15] 닛신제분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 회장의 장녀. 중국계 이민이 창업한 라면 메이커 닛신식품과는 다른 기업이다.[16] 소에지마(副島) 백작 가문.[17] 아키히토의 6대조이며, 첫 간인노미야 궁가 출신 덴노. 118대 고모모조노 덴노(後桃園天皇)가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숨을 거두자 일본 조정은 망자의 7촌 아저씨(재종숙부)가 되는 고카쿠 덴노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에, 고모모조노 덴노는 아키히토에게는 직계조상이 아니다.[18] 이는 덴노들의 특유의 표현이다. 옥음방송 참고. 물론 이 이유에서 뿐만은 아니고, 덴노가 직접적으로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덴노의 퇴위 규정이 황실전범에 없으니 황실전범 개정을 해 달라는 얘기로 해석될 수 있고, 이는 나아가서 덴노의 정치개입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인 점도 있다.[19] 아베 신조 정부는 몸에 큰 무리가 없더라도 섭정을 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20] 호칭은 법황(法皇)도 있지만 상황(上皇)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전의 덴노들이 인(院), 또는 법황(法皇)이라 불린 이유는 양위 이후에 불교에 입문하는, 한 마디로 출가하여 불교를 이끄는 입장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출가한 덴노 소생의 왕자들을 법친왕(法親王)이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똑같이 덴노에서 퇴위해도 일반인이면 상황, 승려 신분이 되면 법황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담이지만 일본에서 불교의 입지란 전직 덴노의 호칭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21] 후술에 나오는 전망에 따르면 2019년 1월1일에 양위하게 되는데, 그렇게 된다면 나루히토 황태자의 나이는 만으로 58세이며, 그 해 황태자의 생일인 2월 23일이 지나면 만 59세가 된다.[22] 황위 즉위 후 처음 여는 일종의 추수감사 제사[23] 특례법 제 3조."前条の規定により退位した天皇は、上皇とする。"[24] 백제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25] 당연한게 한국과 관련된 언급만 해도 펄쩍뒤는 이들이 일본의 존재 그 자체인 '텐노'가 한국과 혈연이 있다는 내용을 내놓는 것은 한국으로 치면 '친일파가 이룬 대한민국'정도의 충격이기 때문.[26] 주변에는 세이부 철도코마역이 있으며 역전에 장승이 있다.[27] 그런데 이른바 "통일운동가"라는 정경모는 이것을 백제아신왕에게 광개토대왕이 쓴 표현이란 이유로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라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설령 이게 사실이라도 직역 자체는 "유감이다"로 해석되는 것으로 보아 아키히토가 영토 수복의 의미를 쓴 건 아닌 것 같다(정경모도 세지마 류조씨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애초에 아키히토의 평상시 발언만 봐도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란 뉘앙스랑은 좀 안 맞는다.[28] 애초에 이런 시각이 일본의 극우적인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게 아신왕은 고구려와 전쟁을 한 결과 졌고, 패배자의 입장에서 승자에게 한 말이다. 일본은 한국과 싸움을 했다고 생각조차 안 한다.[29] 게다가 아키히토는 츠지 마사노부 같은 똥별들의 뻘짓과 임팔 작전에서의 참패 등등 당시 일본 군부가 저지르는 미친 짓거리들과 각종 뻘짓들을 직접 눈으로 봤던 사람이다. 당연히 극우들이 주장하는 말들이 얼마나 헛된 소리인지를 직접 느끼고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 카미카제에 핵직구를 날렸었다.[30] 히로히토 본인이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전쟁의 결과 히로히토가 제위에서 물러날 뻔한 과거를 겪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반응이 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고.[31] 그런데 저 사이언스 논문은 과학 연구논문이라기보다는 일본 과학사에 관련된 에세이에 가깝고, 네이처 논문은 런던 린네 학회(분류학회)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His Majesty the Emperor of Japan'. 오히려 일본 어류 백과사전에 350페이지 가량을 투고한 것이 학문적인 기여에 가깝다. #[32] 2008년에는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사이좋게 1, 2저자를 먹으며 논문을 냈다.# 저자 목록을 살펴보면, Akihito, Fumihito A et al.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의 황실은 성(姓)이 없기 때문에, 저자 목록에 그의 '이름'만 올라가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궁호(宮號)인 '아키시노노미야'를 '성'으로 등재. 참고로 저자 주소는 Imperial Residence.[33] 사실 중국도 방문하고자 희망했지만 중국 내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방중하지 못했다. 다만 대만에는 방문한 사실이 있다.[34] 여담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9살 더 많았다. 1924년생.[35] 덴노 전용 리무진 센추리가 있는데 왜 사진에는 그냥 센추리인지 이유 추가바람.[36] 뒤에 따라오는 검은 승용차는 렉서스 LS430의 형제차인 도요타 셀시오. 저 모델을 마지막으로 셀시오는 사라지고 LS만 나온다.[37] 잘 보면 시동 걸고 달릴 때 엔진음도 속도도 장난 아니게 나오지만, 원래는 어느 정도 조작된 동영상이다. 실제로는 30km/h 정도로 운전한다고. 후반부 방향표시등이 깜빡이는 모습을 보면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38] 물론 성우는 아키히토 본인은 아니고 호머 심슨의 댄 카스텔라네타의 성대모사로 나왔다.[39] EBS판에서는 바로 옆 나라의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인지 도쿄 시장으로 바뀌어서 나왔다. 하지만 투니버스판에서는 그대로 천황으로 나온다.[40] 시즌 16에서는 영국에 가서 엘리자베스 2세의 마차를 차로 들이받아서 뒤엎어버렸다가 근위병들에게 구타당한 적도 있었다.[41] 그러한 불편한 심기가 얼굴에 드러내자 아내가 위로하는 말에 "우리는 원양 어선을 띄우는데 독일은 로켓을 날린다"라고 불안해 한다.[42] E655계 전동차로, 교직겸용차이다.[43] 열차 준비, 직원 교육, 경찰 배치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