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앤드루 잭슨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미합중국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Andrew Jackson
출생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캐롤라이나 식민지
웩스호스[1]
사망
1845년 6월 8일 (향년 78세)
재임기간
제7대 대통령
서명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앤드루 잭슨
어머니 엘리자베스 허친슨
배우자
학력
해당사항 없음
종교
신장
185cm
정당
경력
테네시 주 의원
민주공화당 상원의원
테네시 주 민병대 사령관[2]
1824년 미국 대선후보
미국 제7대 대통령
파일:Andrew_jackson_headFXD.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활동
2.1. 성장기2.2. 미영전쟁과 올드 히커리2.3. 대선 출마2.4. 재임 시기
2.4.1. 엽관제2.4.2. 원주민 추방
2.5. 퇴임 이후
3. 여담
3.1. 앤드루 잭슨과 20달러 지폐
4. 유언 관련5. 미디어에서

1. 개요[편집]

"I Killed The Bank...!"[3]
"내가 은행을 죽였어...!"

그의 유언.[4]
미국의 7대 대통령이자 민주당 출신 대통령으로, 출신으로 보나 걸어간 행보로 보나 미국사에 꽤 특이한 영향을 끼친 대통령이다.

2. 활동[편집]

2.1. 성장기[편집]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쉽게 말해 흙수저. 아버지 앤드루 잭슨은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잭슨을 임신 중일 때 사고로 사망했고,[5] 형 휴 잭슨과 로버트 잭슨, 그리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허친슨 잭슨은 모조리 독립전쟁에서 사망하면서,[6] 앤드루 잭슨은 불과 14살에 전쟁 고아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결과 자수성가변호사도 되고 100여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리는(…) 대농장주도 되었다.

2.2. 미영전쟁과 올드 히커리[편집]

테네시 주 의원에 오르면서 정계에 몸을 담기 시작했고, 이후 6년간 테네시 지방의 판사일도 하다가 민병대 소장이 되었는데 그가 사령관을 하던 1812년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시기 미영전쟁이 벌어진다. 미영전쟁은 결국 양국이 겐트 조약을 맺으며 종료되었지만, 당시 교통사정상 종전 소식이 신속히 전해지지 않아 각지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졌다.

그 중 가장 격전지였던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잭슨은 지형지물과 포대를 활용하여 영국군 2000여명을 죽인 반면 민병대 전사자는 고작 21명에 그치는 엄청난 전과를 거두면서 일약 전쟁영웅으로 떠오른다. 여기에 인디언 토벌전에서도 공을 세우면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까지 겹쳐 올드 히커리(Old Hickory)[7]라는 별명과 함께 인기몰이를 하게 된다.

2.3. 대선 출마[편집]

1824년 처음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는 같은 민주공화당 후보였던[8] 존 퀸시 애덤스에게 패배했는데, 선거에서는 1위를 차지했으나 선거인단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 당시 법 규정에 따라 의회 투표를 치르게 되었는데, 애덤스가 다른 후보인 헨리 클레이에게 공직 자리를 약속하고 연합해 의회 투표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잭슨은 애덤스와 클레이가 야합했다고 비난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민주공화당 내의 잭슨 지지파는 민주당, 반대파는 국민공화당(휘그당과 현 공화당의 전신)으로 갈라서게 된다.[9] 미국의 유서깊은 양당제는 이때부터 시작된 셈.

1828년 대선에서 앤드루 잭슨은 재선을 노리던 존 퀸시 애덤스를 밀어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10] 이전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서민, 아웃사이더 출신도 대통령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인물인 셈.

2.4. 재임 시기[편집]

잭슨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미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대격변을 치른다. 그의 시대에는 산업혁명서부개척이 서서히 이뤄지기 시작하며 엄청난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시기 노동운동은 격화되어 갔고 노예제 문제로 인한 남부와 북부의 대립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또한 잭슨은 관료제 개혁, 시민권 확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내세웠고 이 시대부터 좀 더 대중주의적인 정치가 시작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동시에 관료제 개혁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엽관제의 시작이고, 아메리카 원주민과 노예 문제에는 철저한 인종주의로 대한데다 독불장군적인 모습도 많이 보였던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현대의 리버럴한 민주당을 보고 앤드루 잭슨을 미화하기도 하지만, 작금의 미국 민주당은 되레 잭슨에 거리감을 두고 있고 남부에 남아있는 인종주의적 딕시들이 우상으로 숭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생각해보면 거의 직계 조상이기도 하다(...). 그의 대중선동적인 정치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잭슨은 대통령의 강한 권력을 추구해 사법기관인 법원과 입법기관인 의회의 권한을 무력화하려 하는 등 권력의 견제와 감시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무시하려 했다.[11]

잭슨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자신이 이끌던 연방의 강한 주권(=대통령의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행정부를 중시한 그는 주 사법부의 힘을 빼야겠다고 생각해 상당수 주 헌법을 개정하여 주 법관들의 임기 축소와 직선제 채택, 배심제 강화 등을 통해 권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기존 연방이 주도한 제2중앙은행 출자는 주의 독자성을 떨어뜨린다며 무력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른바 뱅크워(Bank war) 사태. 다만 그 돈을 소위 "애완용 사설 은행(pet banks)"[12]에 넣어놨다가 이 애완 은행들이 '와일드캣 은행'에 잘못 투기했다 돈 회수를 못해서(...) 1837년 공황의 벼락을 맞기도 한다.

이때 잭슨은 관례로 취급되어 잘 쓰이지 않았던 거부권 등 대통령의 권한을 적극 발동하면서 의회와도 대립하였다. 그러면서도 잭슨은 대중주의를 이용해 자신의 지지층들을 계속 끌어안는 지도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재선에서도 무난히 승리하게 된다.

2.4.1. 엽관제[편집]

행정학과나 기타 다른 학과에서 행정학을 공부하다 보면 빠지지 않고 거의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앤드루 잭슨은 취임 후 엽관제를 이용해 자신의 측근과 지지자들을 일선 관료로 대거 등용했다. 물론 반대파들은 이를 무능한 이들의 자리 나눠먹기, 키친 캐비닛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하지만 잭슨과 이른바 잭슨 민주주의파들은 당시 폐쇄적이고 정부 말도 잘 안듣던 혹은 무시하던 엘리트 관료 사회에 변화를 주기 위해 엽관제를 적극 활용했다.

사실 이 부분은 지금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문제이다. 엽관제의 부정적인 면은 이미 현대 들어 많이 부각되어있지만, 옹호론자들은 당시의 관료제 시스템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과 재산이 없으면 관직에 나갈 길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정무직을 선발하는 선거법의 개정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엽관제의 기반이 되는 4년 임기제는 조지 워싱턴 시기부터 존재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왜 앤드루 잭슨 시대에 엽관제가 두드러지냐면, 이전에는 주로 동부의 상류층에서만 관료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연방주의건 공화주의건 결국 동부 지방 상류층이라는 좁은 리그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인재 풀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걸 당시 정계의 아웃사이더로 새로운 지지층이 필요했던 앤드루 잭슨이 서부 개척민들에게 확대한 결과, 선거를 도운 중하류층 출신들도 정계의 중심부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 덕분에 이후 미국 정치의 판도가 동부 중심 일변도를 벗어날 수 있었고, 이런 정치적 기반 때문에 앤드루 잭슨은 퇴임 후에도 상당히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엽관제도 문제점은 있고, 미국의 행정학을 창시했다고 볼 수 있는 우드로 윌슨이 이를 지적하면서[13] 20세기 이후 엽관제는 단점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현재도 정무직 지명직의 자리에는 엽관 임용이 이루어지는 등 필요불가결한 부분도 없지 않다.

파일:앤드루잭슨.jpg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서도 엽관제와 대중주의를 이유로 잭슨을 비판했지만, 잭슨 시대의 엽관제가 가진 순기능 및 시대적 맥락을 아예 무시했다는 점은 아쉬운 점.[14] 현재도 직업공무원제의 기반에 엽관제적 요소를 어떻게 결합시켜서 행정의 민주성을 이룩할 것인가라는 것은 현대 행정에서 여전히 주요한 화두 중 하나다.

2.4.2. 원주민 추방[편집]

초기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원주민 탄압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나, 잭슨은 그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백인우월주의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15] 그는 당시 서부로 진출하기를 원하는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이기도 한) 남서부 미국인들의 지지를 얻어 소위 Indian Removal Act(원주민 제거 법안)을 제정, 46,000명의 원주민을 고향에서 오클라호마 등 먼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미국 정부가 원주민 이주에 아무것도 지원해주지 않았으므로 체로키를 비롯한 원주민들은 도보로 수천km를 이동해야 했으며, 4,000명 가량이 추위, 굶주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후 이 여정은 눈물의 길이라 불린다.

잭슨의 원주민 탄압은 당시 연방대법원의 판결도 무시한 것이었다. 사법부 힘을 뺀 이유? 1831년에 이미 연방대법원은 Cherokee v. Georgia & Worcester v. Georgia에서 주 정부나 미국 정부의 강제 이주 계약에 대해 무효 판결을 내린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원주민 제거령도 무효화되었다. 연방대법원 판결이 잭슨의 손을 들어주지 않은 이유는 문명화된 다섯 부족과 맺은 기존 조약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약 자체도 불공정 조약이었고, 조약 번복도 빈번해서 야금야금 인디언 구역을 갉아먹는 등의 침해는 만연했지만, 잭슨은 그런 조약과 연방대법원 판결조차 무시하고 원주민들을 쫓아냈다. 잭슨 시대 이후의 미국은 원주민을 대하는 데 최소한의 절차와 명분마저도 무시하고, 법으로 명시된 원주민의 권리는 허울조차 지키지 않았다. 이는 후세에도 수많은 미 원주민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즐거운 나의 집 작사자로 유명한 연극 배우이자 극작가인 존 하워드 페인은 이 당시, 체로키 인들을 편들어 권리를 보장하라는 운동을 벌였고 미국 의회에 이를 로비했는데, 잭슨의 이런 탄압에 분노해 탄핵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지 않은 현실에 페인은 조국 미국에 실망했고 미국을 떠나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를 떠돌며 살다가 결국 튀니지에서 죽었다.

잭슨이 원주민 추방을 몰아붙였던 것은 물론 자신의 지지기반인 남서부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치에 발 담그기 이전인 군인 시절부터 그는 백인우월주의자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크릭 족과 체로키 족을 상대로 싸우며 병사들에게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여자와 아이들을 죽일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16] 이런 행적으로 잭슨은 "원주민 살인마", "칼날" 따위 이름으로 불리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소수자 인권 보호를 내세우는 지금의 민주당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창업주였던 셈.[17]

2.5. 퇴임 이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drew_Jackson_Daguerrotype-crop.jpg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의 농장에서 지내다가 1845년 6월 8일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올드 히커리(Old Hickory)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18] 꽤나 투박하고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우한 성장기를 보내서 그런지 그의 무대뽀식 용감한 성격은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3세 잭슨이 어느 날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영국 병사가 구두를 닦으라고 협박조로 명령을 했지만 안 닦겠다고 저항한 일화가 있다.

실제로 생전에 13번의 결투를 치렀을 정도로[19] 다혈질의 사나이였다. 그 중 유명한 게 아내 레이첼과 관련된 것이다. 레이첼은 잭슨과 결혼 전에 이미 결혼했던 적이 있던 이혼녀였는데, 이혼할 때 뒤처리가 이상하게 되었는지 법적으로는 아직 유부녀였던 상황에서 잭슨과 재혼을 하게 되었다. 둘의 금슬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세간에서 불륜이네 뭐네 하며 씹어대는 사람들이 많았고, 순정파였던 잭슨은 이래저래 열이 받아서 비방한 상대를 찾아가 결투를 벌여 죽였다.

아내 관련 문제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서, 대통령 선거 때에도 간통한 자를 리더로 뽑을 수 있냐는 반대파들의 네거티브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하필 잭슨이 대통령 되기 2달여전 아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면서, 잭슨은 당시 이 문제를 네거티브에 활용한 애덤스 측을 증오했다고 한다. 사실 후보간에는 네거티브를 자제하는 편이었으나, 지지자들이 가만있지 않았다.[20] 하여튼 대통령이 된 이후, 잭슨은 백악관에 아내가 생전 좋아한 목련 묘목을 가져와 이른바 '잭슨 목련'을 심고 아내를 그리워했다. 참고로 잭슨은 재혼도 안하고 자식도 없었기에 당선 이후 퍼스트 레이디는 조카가 했다. 잭슨 사후엔 아내와 같이 합장되었다.

잭슨이 생전에 치렀던 몇몇 파란만장한 결투의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803년 테네시 주지사 존 세비어와 결투. 둘 다 다치지 않았음.
  • 1806년 내슈빌의 부호 찰스 디킨슨과 결투. 원인은 위에 언급된 아내 일로 찰스 디킨슨이 지역 신문을 통해 잭슨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잭슨은 디킨슨의 총에 갈비뼈를 다치고 디킨슨은 사망.
  • 1813년 토머스 벤턴, 제시 벤턴 형제와 현피. 왼쪽 팔에 총알을 맞음.

이러한 결투 등으로 잭슨은 재임 기간 내내 몸 속에 총알 2발을 박고 살았는데, 1발은 벤턴 형제와의 결투 중에 맞은 총알이었고, 나머지 1발은 대통령 시절 잭슨을 암살하려던 리처드 로렌스(Richard Lawrence)가 쏜 총알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로렌스는 두 정의 총을 준비했다가 잭슨이 나타나자 첫 번째 총을 그의 등 뒤에서 발사하였는데 불발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두 번째 총을 뽑아 발사했는데 또 다시 불발되었다. 당시 날씨가 좋지 않아 권총 2정이 작동불량을 일으킨 것이 원인이었다.

암살이 실패한 이후, 잭슨은 곧바로 자기 지팡이를 들고 리처드 로런스를 쫓아가 패려고 했다. 아니 이 썩을 넘이 감히 날 암살하려 해?? 다리몽댕이를 그냥!! 당황한 로런스는 도주하다가 얼마 안가 잡혔다고 한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화난 잭슨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애를 쓴 것은 덤이다.#

위에 서술되었다시피, 성격이 굉장히 다혈질이라 입도 험해서 욕을 자주 내뱉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반려동물로 기르던 앵무새 '폴'이 보호자를 보고 배웠다는 것. 얼마나 욕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앤드루 잭슨의 장례식 당일 폴이 욕을 너무한 나머지 장례식 기간동안 격리된 적도 있었다.

재임할 무렵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1828년과 1832년에 제정된 관세법에 반발하여 연방법 집행 거부 사태(Nullification Crisis)를 일으키자, 군대를 파견해 관세법을 집행하는 초강경 대응을 보여주었다. 당시 토머스 하트 벤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에서 찾아온 손님이 잭슨 대통령에게 '친구들에게 전할 말이 있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래 있네. 자네 주에 있는 내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이렇게 전하게. '만약 미합중국의 법에 반대하여 단 1방울의 피라도 뿌려진다면 그러한 반역 행위를 한 자 중 내 손에 닿는 첫 사람을,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나무에다가 매달아 버리겠다.'고 말일세."[21] 이후, 사건이 마무리된 1833년 5월 1일자의 일기에다가 잭슨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관세는 구실일 뿐이며, 진짜 목적은 연방의 해체와 남부연방이다. 다음 구실은 흑인이나, 노예제 문제가 될 것이다.' 그의 예상은 이후 남북전쟁으로 정확히 들어맞았다. 결과적으로, 연방법 집행 거부사태도 남북전쟁으로 가는 사건 중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에게 라틴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자 정적들은 "철자법도 모르는 사람에게 박사 학위라니?"라며 비난했다. 학위 수여식 당시에 잭슨이 몇 마디 아는 라틴어 단어를 뜻도 모르면서 내뱉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는 악의적인 표현. 실제 잭슨은 "라틴어 학위를 받긴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알고 있는 라틴어라곤 E pluribus unum[22] 뿐이오."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한국사에서는 조선시대 순조헌종 교체기가 바로 이 사람의 집권기 무렵이었다.

3.1. 앤드루 잭슨과 20달러 지폐[편집]

파일:external/www.orwelltoday.com/dollarbill20a.jpg
20달러 지폐의 이미지
앤드루 잭슨은 미국 20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앤드루 잭슨이 여기서 빠질 뻔한 적도 있다. 미국 달러 지폐도안이 순 백인 남성 정치인들 뿐이다라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이들 중 일부의 도안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기의 일이다. 해당 도안은 처음에는 10달러 지폐의 알렉산더 해밀턴을 빼자는 안이 선정되었지만, 해밀턴은 미국 경제시스템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사람이라 금융권의 반발이 거세던 차에 알렉산더 해밀턴의 생애를 다룬 해밀턴(뮤지컬)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해밀턴 말고 다른 사람을 고르자는 반응이 강해졌다.

그래서 대상이 된 것이 흑인미국 원주민 탄압이 문제가 된 앤드루 잭슨이었다. 여기에 20달러가 1달러와 100달러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것도 고려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도안 변경 대상은 지하철도를 통해서 남부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던, 노예 출신의 흑인 여성 해리엣 터브맨(Harriet Tubman)이 선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2020년에 앤드루 잭슨의 도안은 뒷면으로 옮겨지고, 해리엇 터브맨의 얼굴이 전면에 실리는 도안이 결정되어서 새로운 20달러 지폐가 발행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지폐 뒷면에도 사람 얼굴 넣는 형태가 되면서 5달러, 10달러 지폐의 뒷면에도 인권운동가들이 들어갈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일은 중지된다. 도널드 트럼프는 공화당 대통령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코드가 맞는 앤드루 잭슨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자기 집무실에 잭슨의 초상화를 걸어놨을 정도였다. 실제로 트럼프는 앤드루 잭슨의 20달러 퇴출을 반대하고, 터브먼은 토머스 제퍼슨이 있는 2달러 지폐 도안으로 하거나 혹은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서 넣어야 한다고 대선 캠페인 기간에 발언하기도 했다. 여기서 핵심은 20달러 지폐와 달리 2달러 지폐는 애물단지 취급 받을 정도로 거의 안 쓰인다는데 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화폐도안 변경안을 실질적으로 폐기했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화폐의 변경은 위조 방지 등의 실질적 목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사실 트럼프가 잭슨빠라 그대로 뒀다는 말이 무성하게 나왔다.

그러나 또다시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조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폐기된 20달러에 잭슨 대신 터브맨을 넣는 도안을 다시 추진중이라고 한다. #

4. 유언 관련[편집]

그의 유언과 관련하여 상술된 "I Killed The Bank(내가 은행을 죽였어)"도 인터넷과 영어권 언중들 사이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다. 미국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존경받는 대통령임에도, 그의 유언이라고 돌아다니는 글들이 분명히 통일되지 않고 각자 다르다. 물론 둘 다 유언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참고바람. 미국 대통령들의 유언을 모은 웹사이트 등지에서는 그의 실제 유언을 다르게 인용하는 사이트들이 많다. 그에 따르면 실제 유언은 아래와 같다.
"(I hope to meet each of you in heaven.) Be good, children, all of you, and strive to be ready when the change comes."

"(나는 여러분들 각자 서로가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잘있어라, 아이들아, 모두들, 변화가 다가올 때 준비하기를 힘써라."

이 문장조차 인용자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I hope to meet each of you in heaven.(나는 여러분들 각자가 서로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이 앞에 첨가된 경우가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한 위처럼 쉼표를 찍은 "Be good, children"이라 했다면 "잘있어라" 정도의 뜻이 되지만, 알려진 일부 인용에서처럼 쉼표를 찍지 않고 "Be good children"이라 했다면 "선한 아이들이 되라"라는 뜻이 되어 의미가 달라진다.

갑자기 "children(아이들)"을 언급하는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잭슨이 기독교 신자라는 점과 앞의 발화에서 천국을 이야기하던 맥락을 고려하면 "Be good children"은 "주님의 선한 아이들이 되라" 정도의 맥락으로 이해가 된다. 눈 앞의 가족 또는 훗날 미국의 아이들에게 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 다양한 형태로 내려오는 구전 덕분에 그의 인종차별적 행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욱 여운이 남는 말이다.

5. 미디어에서[편집]

파일:external/images.fineartamerica.com/king-andrew-the-first-granger.jpg

위에 서술했듯이 앤드루 왕 1세로 묘사되기도 했다. 해당 그림은 당시 만평. 이 만평에서 앤드루 잭슨은 한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셉터를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Veto, 즉 거부권을 들고 있으며 갈기갈기 찢겨진 미국 헌법을 밟고 서있다.

1812년 전쟁을 다룬 웹툰 플린트 락 머스킷뉴올리언스 사령관 소장으로 출연한다. 실제 역사처럼 완고하고 딱딱한 인물로 묘사된다.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에 등장하는 앤드류는 잭슨을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미국내 최대 미 육군 훈련소인 포트 잭슨이 그의 이름에서 땄다.
[1]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 양 주 경계에 위치한다. 양 주 모두 잭슨 대통령의 출생지가 자기 주에 있다고 주장하며 각자 출생기념비도 세워둔 상황...[2] 대령 계급/미영전쟁때 정규군 소장으로 진급[3] 미국 제2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 허가 문제를 놓고 격돌한 이른바 '뱅크워(Bank war)'와 관련된 발언이다. 뱅크워 문제는 영어판 위키백과 참고.[4] 이렇게도 알려져 있으나 다르게 알려진 경우도 있다. 아래의 '유언 관련' 문단 참고.[5] 앤드루 잭슨이 태어나기 불과 3주 전에 죽었다고 한다.[6] 휴 잭슨은 전투에서 열사병으로 죽는다. 이 전투 이후 로버트와 앤드루가 인질로 감금되고, 도중에 천연두에 걸리고 만다. 형제가 석방되자 남은 세 가족은 천연두+집으로 돌아가는 64km의 여정+폭우 콤보를 견뎌야 했는데(폭우는 여정의 마지막 2시간 정도만 내렸다), 이 과정에서 로버트가 쇠약해져 죽는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도 조금 있다가 콜레라로 죽고 만다.[7] 히코리 나무처럼 꺾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한국어의 '옹고집'에 해당하는 별명. 또는 '완고한 늙은이'.[8] 당시 민주공화당과 대립하던 연방당이 세를 잃으면서, 같은 당임에도 민주공화당 소속 후보들이 대선에 여러명 출마했다.[9] 참고로 휘그당은 유래 자체가 영국의 그 휘그당과 같았는데, 영국 휘그당은 "반왕정", "반연방" 성향의 당이었다. 허나 휘그당의 전신인 국민공화당은 창당자 존 퀸시 애덤스의 아버지가 미국 초기 연방주의의 대표자격인 존 애덤스였고, 또 휘그당의 후신인 공화당도 19세기엔 연방주의를 주장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물론 이런 정당의 성향 변신은 미국사에서 제법 흔한 일이긴 하다. 여당이 되면 연방주의를, 야당이 되면 반연방주의를 주장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현대에 와선 민주당 친연방, 공화당 반연방으로 대개 고정되어있긴 하지만. 참고로 이때의 민주당도 지금의 민주당과는 성향이 상당히 달랐다). 휘그당에는 국민공화당 외 별별 잡세력이 다 모였는데, 심지어 반프리메이슨 세력도 있었다.[10] 이때부터 미국은 재산권과 상관없이 (일부 주가 아닌 모든 주에서) 백인 남성 한정 보통선거제가 도입된다. 참고로 미국에서 흑인 남성은 남북전쟁 이후 19세기 중후반 선거권이 부여되나 현실적 제약은 있었으며, 여자까지 포함하는 보통선거제는 1920년 이뤄진다.[11]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분립을 무시했던 앤드루 잭슨의 사상과 정치적 행보는 현대 자유민주공화주의가 아닌 나쁜 의미의 대중주의(포퓰리즘)나, 프로이센 융커들을 반민족적이라고 혐오했던 히틀러의 나치즘과 비슷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잭슨이 당시 미국 (백인) 대중의 일반적인 시각에 따라 흑인이나 원주민들을 열등인간으로 봤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12] pet banks란 정부출자금을 예치받은 은행들을 말한다. 뱅크워 후 잭슨은 미국 제2중앙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에 맡겨놓던 정부 출자금을 빼서 각 주의 공인은행에 예탁했는데, 이 은행들 중 일부가 당시 여당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므로 이런 멸칭이 붙은 것(...).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13] 윌슨은 행정은 정치와는 완전 별개인 '경영(Business)'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한편 이 컷은 앤드루 잭슨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을 대입해 비꼰 것이라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호불호를 떠나 초등생용 만화에 굳이 저자의 정치적 시각을 포함시킬 이유가 있는지부터가 의문. 이후 논란이 되자 저자 본인은 만화로 봐달라며 해명했다.#[15] 이는 퇴임 후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 나선 그의 라이벌 존 퀸시 애덤스와 비교되는 부분이다.[16] 다만 이후 인디언 고아를 돌봤다는 말도 있는거 보면 상당히 아이러니. 자식이 없었던 잭슨은 부모없는 친척 등 여러 고아를 입양해 길렀다.[17] 이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층과 성향이 20세기 들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공화당 대통령 트럼프는 잭슨빠고, 민주당 대통령 오바마는 링컨빠다. 그래서 트럼프는 본인의 집무실에 잭슨의 초상화를 걸 정도였으나, 정작 잭슨이 만든 민주당의 조 바이든이 집권하자 벤자민 프랭클린의 초상화로 교체되었다.#[18] 다만 정적들에게는 '앤드루 왕 1세', '폭군'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모두 거칠고 고집불통인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19] 당시에는 이런 결투가 일부 주에선 합법이었다고 한다(...).[20] 이들 중에는 헨리 클레이도 있었던 모양인데, 오죽하면 나중에 둘이 본격적인 정치 라이벌이 되었을 때, 잭슨은 "클레이를 죽였어야 했는데"(…)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21] Yes I have; please give my compliments to my friends in your State and say to them, that if a single drop of blood shall be shed there in opposition to the laws of the United States, I will hang the first man I can lay my hand on engaged in such treasonable conduct, upon the first tree I can reach.[22] 미국 의회의 표어.'다수로 이루어진 하나'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