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에 마지막으로 수정됐습니다.

Ernest Hemingway
본명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국적
출생
미국 일리노이 오크 파크
사망
1961년 7월 2일 (향년 61세)
학력
오크 파크 앤 리버 포레스트 하이스쿨 (졸업) (1913-1917년)
직업
대표작
부모
어머니 그레이스 헤밍웨이
아버지 클래런스 헤밍웨이
배우자
엘리자베스 해이들리 리처드슨
폴린 피에프
마사 젤호른
매리 웰쉬 헤밍웨이
자녀
잭, 패트릭, 글로리아(그레고리)
서명
1. 개요2. 일대기
2.1. 사생활
3. 사진들4. 문체와 집필 스타일5. 각종 일화들
5.1. 도시전설 (아기 신발)
6. 작품 목록7. 어록8.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편집]

미국의 참전용사, 종군기자 그리고 문호.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저자다. 영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 역사상 허무주의하면 빠질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2]

마찬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작가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등장 이후,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로, 유럽문학의 주도권을 사실상 미국에 넘겨준 거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다.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중 대표 3인방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중 가장 중요한 대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강인한 남성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20세기에는 헤밍웨이가 꼽힌다.

쿠바에서 몇 년간 생활을 했고, 말년에는 피델 카스트로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2. 일대기[편집]

의사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둘 다 인종차별주의자 출신이었고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당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3]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어머니와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 헤밍웨이의 생일에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을 소포로 보냈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권총(그것도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것)이 들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냥꾼/모험가 기질이었으나 쇠락한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서로 종종 싸웠고, 헤밍웨이는 위의 언급처럼 강인하고 조용한 남자의 표본인 아버지를 따랐다. 헤밍웨이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운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헤밍웨이와 어머니의 악연은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헤밍웨이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에 어머니가 죽자,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 라는 식으로 가볍게 무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ErnestHemingwayBabyPicture.jpg
어릴 적 사진. 보시다시피 여아용 옷을 입고 있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헤밍웨이는 무척 짜증냈다고 한다.

처음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해 종군기자로도 활약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으며[4] 무훈을 세웠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5], 《무기여 잘 있거라》 등등에서 발현된다. 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 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등의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무명이지만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 준 사람이다. 이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고, 이 인연 덕분에 피카소는 헤밍웨이와 지인이 된다. 참고로 남동생 리오 스타인은 시인 겸 평론가.

이들처럼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하며,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6] 하지만 막상 파리의 프랑스인 지성인들은, 전후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넘치는 달러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열렬히 환호하는 척 하지만, 실제론 프랑스어도 배우지 않고 수박 겉핥기로 껍데기 문화만 섭취하는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고급쓰레기. 헤밍웨이는 물론 그들의 퇴폐적인 위선을 증오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 당시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탐닉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흑역사로 여겼다.

헤밍웨이가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함께 파리 생활을 돌이키며 썼던 회상록을, 4번째 부인인 메리 헤밍웨이(본명은 메리 웰시)가 헤밍웨이 사후 출판한 《이동 축제일(Movable Feast)》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유래가 나온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맡겼는데, 젊은 직원이 빨리 고치지 못하자 정비소 사장이 "너희들은 전부 '허탕 치는 세대'야." 라고 호통 쳤다. 거트루드는 이를 나중에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덧붙였다. "자네도 그래. 자네는 물론… 전쟁을 겪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이 잃어버린 세대들아." lost에는 '길을 잃은' 뜻만이 아니라 '타락한'이란 뜻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 타락한/인생 헛산 세대들아! 라는 일갈이 위에서 설명한 상황에 더 적절하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국내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총 한 방 안 쏘고 도시에서 아무런 일 없이 노닥거리다 판타지로 가득한 글줄을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간혹 떠도는데, 애초에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였다. 그리고 그는 1차 세계 대전의 참전 용사였던 만큼 그런 비겁자도 아니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안 쐈다는 이야기는, 당대에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열렬하게 싸웠다"는 과장된 신화가 퍼지고 그게 헤밍웨이의 명성에 일조했다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건 자체가 워낙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스트 성향 지식인, 문화인들이 주목했던 사건이니 조지 오웰, 앙드레 말로 같은 실재로 참전하여 전장에서 싸웠던 다른 네임드 문필가들에 일방적으로 비교당한 면도 있다.

이때 만난 국민당 장군들에 대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다' 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초의 호칭은 우리말로 "아부지"에 해당하는 '파파'였다. 본인도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고. (1899년생이니 노르망디면 40대 중반이다. 당시는 징병제시대였으므로 병사들은 대부분 20대 초.) 참고로 파리 해방 이후 파리에서 당시 군인이었던 J. D. 샐린저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4번째 아내이자 당시 특파원으로 런던에 있던 메리 웰시와 만나서 1946년에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1차대전 당시 저승가기 직전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커졌다고. 그 때문에 더욱 사냥 같은 취미에 몰두하다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게 놔둔 채, 엽총을 입에 물고 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늘그막에 작품이 지지부진한 점으로도 고민해 온 점도 자살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글을 쓰다가 계속 찢고 쓰던 걸 던지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고, 6월 28일,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

2.1. 사생활[편집]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진정한 마초로 살았다. 그는 6피트(183cm)가 넘는 거구였으며 항상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꽤 잘했다는 등 자신의 강인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정식 복싱 대결을 붙여주자 슬그머니 도망갔다고 언급한 지인도 있다. 1943년에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샘 우드(1883~1949)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시사회에서 영화화 수준에 불만을 품고[7] 감독을 주먹으로 패서 코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가 있다.[8] 이 자신을 자기를 세상에 과시하는 것도 매우 즐겼으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같이 자신의 화려한 사생활을 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자살한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 늙어 세상의 관심이 멀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여자를 밝혔으며 사생활도 문란해 여러 차례 결혼이혼을 반복하고, 결혼 중에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며 지냈다. 일단 그의 아내들을 정리해 보면…
  • 엘리자베스 해들리 리처드슨(1891~1979) - 1921~27년까지 결혼.[9]
  • 폴린 파이퍼(1895~1951) - 1927~40년.
  • 마사 겔혼(1908~1998) - 1940~45년.[10]
  • 메리 웰시 헤밍웨이(1908~1986) - 1946~61년까지 가장 오래 같이 살았으며 그의 장례식도 그녀가 치렀다.

위의 셋은 헤밍웨이의 주체할 수 없는 막장행보에 질렸거나 그와 마찬가지로 막장으로 놀다 떠나갔고, 마지막 아내인 메리가 헤밍웨이와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사회적 페르소나를 다룰 때 자주 나오는 사례들 중 하나이다. 한 친구의 증언을 인용해보자. 그의 사망 뒤에 친구가 저건 그의 성격이 아니며, 실제로는 겁쟁이에 울보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먼저 떠난 친구의 생전 소망 내지는 생전에 그토록 열심히 쌓아둔 것을 부수거나 흔들려는 훌륭한 친구.

어느 날 호텔에 머물면서 어느 영국인이 '에릭 블레어'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기에 퉁명스레 답했더니, 그 사람이 "아, 그리고 조지 오웰이라고도 합니다." 라고 해서 헤밍웨이가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위 스페인 내전에 반 프랑코 파에 섰던 경력, 그리고 쿠바아바나에 살았던 것과 관련해서, 그가 실제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다 할 확증은 없는 상황이며, 거꾸로 미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까지 제기되어 실은 이중 스파이가 아니었냐는 의혹도 있었다.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모스크바바티칸 시국에서도 그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던 손녀 마고 헤밍웨이(1954-1996)[11]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상술했듯 말년에 정신질환이 심해져[12] 자신이 도청과 계속되는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당시 정말 FBI 측에서 1940년대에 쿠바에 거주한 등의 과거력을 이유로 그의 주소 변동을 예의주시하였고 1950년대에는 존 에드거 후버가 인정했듯 실제로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만 헤밍웨이가 정말 이 사실을 알아서 피해를 주장한 것인지, 아니면 정신질환 때문에 생긴 편집증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각에서는 이때 병원에서 전기 충격 요법을 받고 정신상태가 더 악화되었다는 기록을 들어 "사실 헤밍웨이는 누군가에 의해 폐인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라는 음모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의료행위전두엽 절제술, 뇌량 절단술 등 상당히 미개한 방식의 수술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우울장애에 대한 전기충격요법은 상당히 일반적인 처방이었다. 그의 후손들이 비슷한 질환과 최후를 겪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전적으로 정신적인 질환에 상당히 취약한 체질이었던 것도 사실이라, 정신질환에 비정상적인 환경까지 합쳐진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그를 괴롭게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3. 사진들[편집]

파일:external/pbs.twimg.com/CrjaXeqXEAUTe_M.jpg

1923년 여권사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nest_Hemingway_in_Milan_1918_retouched_3.jpg

1918년(19세), 적십자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호사루타 전선에 엠뷸런스 기사로 있을 무렵의 사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nestHemingway.jpg

1939년, 소설을 집필 중.

파일:2314123.jpg

노년기의 모습. 인물 포토그래프의 거장 유서프 카쉬의 작품.

4. 문체와 집필 스타일[편집]

It seems she had one haemorrhage after another. They couldn’t stop it. I went into the room and stayed with Catherine until she died. She was unconscious all the time, and it did not take her very long to die.
캐서린은 계속해서 출혈을 하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그것을 멎게 하지 못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캐서린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었다. 캐서린은 줄곧 의식이 없었고, 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 《무기여 잘있거라》 中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Hard-Boiled Style)이라고 부른다. 이 문체는 잡다한 수식이 없고 간결하다. 또한 제3자의 시각으로 사실만 무덤덤하게 나열한다. 위 예시처럼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던 사람의 죽음마저 차갑게 묘사한다. 인물들의 감정묘사를 거의 하지 않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복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헤밍웨이 같은 거물급 작가가 왜 이렇게 화려한 수식어구 없이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문체가 쉽다 하더라도 그 문체가 담고 있는 작품의 분위기나 내용의 깊이, 작가의 의도 등이 상당히 깊다.

그의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에 익숙했고, 당시 유행하던 하드보일드 대중소설들(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자신의 마초적인 성격과도 부합했다.

이런 이유로 영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 혹은 영문학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꼽힌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대단하지 않아도 쉽게 읽힌다. 윌리엄 포크너 같은 난해하고 복잡한 작품을 읽다가 헤밍웨이를 펴면 무슨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아주 잠깐' 든다.[13][14] 흥미롭게도 포크너와 헤밍웨이는 둘 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를 두고 포크너는 "헤밍웨이의 책에서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고, 헤밍웨이는 "어려운 단어를 써야만 감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단순한 단어와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읽기 쉬운 글은 가장 쓰기 어렵다" 라는 너새니얼 호손의 말대로, 헤밍웨이는 스스로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첫 부분을 적어도 50번은 고쳐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도 39번이나 고쳐썼다.[15]

이러한 문체 때문인지 일부 평론가들은 헤밍웨이의 진가는 장편이 아닌 중·단편소설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장편은 비판하면서 단편에는 격찬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관심이 간다면 인디언 부락,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살인자들, 킬리만자로의 눈 등의 소설들을 한 번 읽어보자. 단편이라지만 손바닥소설 급으로 짧은 소설들도 아주 많다.

5. 각종 일화들[편집]

  • 모히또 칵테일과 고양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모히또 문서 참고. 헤밍웨이는 30여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으며, 이들의 후손은 헤밍웨이의 사후 기념관이 된 자택에서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생전 기른 고양이 중에 다지증 고양이가 있어서, 다지증 고양이를 헤밍웨이 고양이라고 하게 되었다.
  • 어린 시절에 사격실력이 뛰었났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는 여동생과 새를 많이 잡고 돌아가던 중 친구들이 '집에 가서 공부나 하지 뭔 사냥을 하냐'며 시비를 걸었고 이내 그는 자기가 잡았다고 하니까 그들은 '거짓말 마라, 우리 아빠도 그렇게 많이는 못 잡는다'라며 헤밍웨이를 집단구타를 했고 이후 그는 권투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그때 헤밍웨이를 구타한 친구들은 이 사실을 알더니 그를 피해다녔다고 한다.
  • 거장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해밍웨이를 방문했을 때는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카쉬는 해밍웨이가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할까봐 해밍웨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를 만나자마자 술을 좋아하는 걸로 알려진 해밍웨이에게 대접하기 위해 독주를 주문했는데 그걸 본 해밍웨이가 이 시간부터?라고 굉장히 당황하여 카쉬도 덩달아 당황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그날 사진촬영은 잘 진행됐다고.
  • 의외일수도 있지만,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일으킨 이후로 소련에서도 대단한 인기인이 되었다. 혁명가도 아닌 해밍웨이가 왜 인기인이 되었냐면 당시 소련에 몰아닥친 쿠바 열풍 때문에 소련 사람들이 쿠바에 관련된 인물은 화제가 되었는데 허밍웨이도 그 가운데서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1960년 2월 쿠바를 방문했던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공식 일정에도 없는 해밍웨이 방문 의사를 타진할 정도였다. 거기에 쿠바로 가는 내내 해밍웨이 소설을 읽으면서 보냈다고.
  • 헤밍웨이의 마초적 성격, 혹은 무모함은 그가 종군기자로써 활동한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전 5월 25일 밤의 런던에서는 등화관제 탓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완벽한 어둠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물탱크를 들이받는 사고를 내지 않나, 이로 인해 뇌진탕에 걸려 병원에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상황에서 이 작전에 빠질 수 없다며 나흘 만에 병원을 몰래 탈출하질 않나, 자신이 동행 취재하는 소대가[16] 제일 먼저 상륙해 제일 먼저 노르망디에 발을 딛는 부대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겨 해당 소대를 지휘하는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고, 총을 소지 불가능한 종군기자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멋대로 무기를 챙겨 독일군 여럿을 잡는 비범한 짓거리도 했다. 이 외에도 상당히 무모한 짓을 여럿 하였으나, 가장 압권은 건물 내에서 포격받는 와중, 다른 사람들은 전부 납작 웅크려 포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만 포격받는 와중에도 건물 내부를 돌아다녀서 다른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사례일 것이다. 이 언급된 사례 외에도 사고를 자주 쳐서 사람 여럿 골때리게 만들었다고. 그런데 흥미롭게도 전장에 있을 때는 술에 젖어 괴팍한 성미를 나타내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육체와 정신이 최고의 상태를 유지했으며,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니 일종의 PTSD 증세가 아니었나 싶다.
  • 쿠바에 살던 시절 지인인 어부가 있었는데 바로 소설 노인과 바다의 실제 모델이다. 이 어부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글이 바로 노인과 바다. 당시 그 어부는 그 대가로 그냥 밥 한끼에 술 한잔 사주면 된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소설이 크게 성공한 뒤 헤밍웨이가 보답이라며 2만 달러라는 거액을 어부에게 주었다고 한다.

5.1. 도시전설 (아기 신발)[편집]

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헤밍웨이 문체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유명 도시전설6단어 소설. 친구들이 단어 6개로 자신들을 울릴 만한 소설을 써 보라고 장난삼아 내기를 걸자 즉석에서 이 글을 지어냈다는 내용이다.

비록 6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을 울려버릴 만한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사용한 적 없는 아기 신발을 판다는 뜻은 아이가 유산 혹은 사산되었거나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요절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걸 팔아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실 이는 헤밍웨이가 쓴 적 없다는 설이 유력하다. 문체는 전형적 헤밍웨이 스타일이지만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라고. 영어 위키백과 참조.

워낙 유명한 이야기다보니 진위 여부는 제쳐두고 그 자체로도 수없이 회자된다. 게다가 문장이 너무나 간결하다보니 패러디를 만들어내기엔 더없이 좋은 소재. 토비 폭스는 이를 두고 "아기가 새로 사준 신발을 싫어했다니 정말이지 슬픈 이야기"라는 드립을 날렸다.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로 나왔다.

6. 작품 목록[편집]

6.1. 소설[편집]

  • 《The Torrents of Spring》 (봄의 급류 - 1926)[17]: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과 제목이 같다.
  • 《The Sun Also Rises》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 1926)
  • 《A Farewell to Arms》 (무기여 잘 있거라 -1929)
  • 《To Have and Have Not》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 1937)
  • 《For Whom the Bell Tolls》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1940)
  •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 (강을 건너 숲속으로 - 1950)[18]
  • 《The Old Man and the Sea》 (노인과 바다 - 1952)
  • 《Islands in the Stream》 (개울 속의 섬들- 1970)[19]: 이 작품들부터는 헤밍웨이 사후 그의 아내인 메리 웰시 헤밍웨이가 출간시켰다.
  • 《The Garden of Eden》 (에덴의 정원 - 1986)
  • 《True at First Light》[20] - 1999

6.2. 논픽션[편집]

6.3. 단편[편집]

  • 《킬리만자로의 눈》[21]

7. 어록[편집]

정말 재미있는 책을 쓰려면 수많은 강타를 맞아봐야 한다.(punishment는 권투에서 "강펀치"를 뜻하기도 한다)
- 1981년, 카를로스 베이커가 편집하고 헤밍웨이가 자비로 출판(…)한 《1917~1961년에 엄선된 편지들》 중 1924년 12월 6일에 썼던 "편지"에서. 위에서 봤겠지만 헤밍웨이는 다른 작가들이 탁자 앞에 앉아서 토론이니 뭐니 하며 시간을 까먹자, 권투 글러브 끼고 체육관으로 갔다고 한다.
책에 있는 좋은 부분들이란 작가가 운 좋게 주워듣거나 그의 일생 동안 실패한 것들뿐이다. 그래도 전자는 후자만큼 귀중하다.[22]
-위에서 언급한 같은 책 중 1929년 9월 4일에 스콧 피츠제럴드에게 썼던 편지에서.
그 가을, 전쟁은 그곳에 항상 있었지만 우리는 더이상 그곳으로 가지 못한다.
- 1927년, 《여자 없는 남자들》 중 《다른 나라에서》에서.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
The world breaks everyone and afterward many are strong at the broken places. But those that will not break it kills. It kills the very good and the very gentle and the very brave impartially. If you are none of these you can be sure it will kill you too but there will be no special hurry.
해석: 세상은 모두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는 사람들을 죽인다. 아주 선하거나, 상냥하거나, 용감한 이들을 세상은 무자비하게 죽이고 만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아도 죽이겠지만, 딱히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식 글쓰기도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 1935년,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들》에서.
여기서 이길 수 있다면 어디서나 이길 수 있다. 세상은 괜찮은 곳이자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며, 여길 떠나는 게 무척 싫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 그저 하루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날들에 벌어지는 일은 네가 오늘 뭘 하냐에 달려 있다. 올해 내내 그랬다. 너무 많이 그랬다. 모든 전쟁도 그런 식이다.
-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 1926년,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23]
- 1952년,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거장'이 될 수 없는 길드에 속한 실습생들이다.
- 1961년 7월 11일, 《뉴욕 저널-아메리칸》에서.
난 파리의 지붕 위에 서서 내다보며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라. 넌 예전에도 항상 썼었고, 지금에도 쓸 수 있다. 네가 해야 되는 것은 진실한 글을 쓰는 것뿐이다.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글을 써라."
- 1964년, 《이동 축제일》(몇째 주 무슨 요일 하는 식으로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축제일. 좋은 예로 부활절이 있다)에서.
네 운은 스스로 만들렴, 지그. 무엇이 훌륭한 패배자를 만드는지 아니? 연습이야.
- 1976년, 헤밍웨이의 딸인 글로리아 헤밍웨이가 쓴 《파파의 개인적인 언행록》에서 글로리아가 어렸을 적에 들은 말.
그대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건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대가 그걸 위해 태어났음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라.
- 1984년, 아놀드 새뮤얼슨이 쓴 《헤밍웨이와 함께》에서 헤밍웨이가 작가 생활 2년차일 때 그 동안 쓴 원고가 전부 담긴 가방을 잃어버린 일에 대해 언급할 때.
문학 좆까. (Fuck literature.) (...)
- 1924년, 에즈라 파운드에게의 편지에서
"현대의 전쟁에서는 더 이상 아름답거나 조화로운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아무 이유 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
But in modern war there is nothing sweet nor fitting in you dying. You will die like a dog for no good reason.

<Notes on the next war : A serious topical letter>, Esquire Magazine v.IV: no.3, 1935년 9월 1일 기고문 중

8.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부분에서 주인공급의 대접을 받았으며 영국령 캐나다 진공작전에 의무대로 참가했다가 부상을 입어서 고자가 되었다. 이후 고스트 라이터로 살면서 남자다움을 자랑했지만, 신체상의 문제로 관계를 가지던 여자를 살해하고 자살하게 된다. 이 여자는 1차 대전 마지막 날 남부연합의 공격으로 침몰한 북부 군함의 승무원의 아내로 나중에 그 잠수함 함장을 총으로 사살하게 된다. 헤밍웨이는 바로 그녀의 회고록의 고스트라이터였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시리즈에서는 전설의 사냥꾼 헤멧 네싱워리무법항의 노인 헤밍 등으로 패러디되어 있다.

1996년작 헐리웃 영화 <러브 앤 워>에서 크리스 오도넬이 헤밍웨이 역으로 출연했다. 1차 대전 당시 종군 중에 부상으로 이탈리아에서 치료를 받던 헤밍웨이와 간호사(샌드라 블록 분) 사이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연애담을 다룬 것. 스토리 자체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마초스러운 모습으로 등장. 코리 스톨이 연기했으며 그의 대표 배역이 되었는데, 배우의 평소 모습과는 달리 머리털이고 수염이고 풍성하게 나온다….

루팡 3세 헤밍웨이 페이퍼의 수수께끼》에서는 말년에 자살이 아닌 타살로 언급되었고, 죽기 직전 그가 발견한 보물을 기록한 유작을 통해 루팡이 코르카카 섬으로 향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가 찾은 것은 대량의 우라늄이었다.

This War of Mine》에서는 게임 실행 시 그의 어록 중 하나인 "현대전에서는 당신은 별 이유없이 개처럼 죽을 것이다" 가 나온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현장 수술 키트가 유물로 등장한다.
[1] 육군 예비역 상사이다.[2] 그의 작품에 허무주의적인 문체가 대체로 잘 드러나 있다.[3] 사실 당시 아기들에게 성별에 관계없이 여자 옷을 입히는 일이 잦긴 했다. 다만 헤밍웨이의 마초기질을 생각하면 관습이야 어쨌건 몹시 불쾌한 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일종의 정신적 아동학대이기 때문이다.[4] 폭발이 바로 곁에서 터져 정말로 죽을 뻔했는데 다리에서만 90개가 넘는 온갖 파편이 나왔으며 몇 년 동안 목발에 의존하여 걸어야 했다.[5] For Whom The Bell Tolls 미국의 메탈 밴드 메탈리카가 이 작품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기도 했으며, 2집 Ride the Lightning에 수록되었다.[6] 이러한 세대 풍조는 2차 세계 대전 후 냉전이 끝나고 혼란했던 과도기문학도 배경적 비슷하다.[7] 90년 초반에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에 나온 일화로는 이 영화 여주인공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중에 헤밍웨이를 만나 이 영화보셨냐고 질문했는데 헤밍웨이는 "극장에서 6번 봤지."라고 대답했다. 버그만이 그만큼 재미있었나요? 라고 하자 "아니야, 보다가 마음에 안들어서 포기하고 마저 보느라고 다시 보고 그렇게 해서 6번을 본 끝에 겨우 다 봤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미국에서만 제작비 3.5배가 넘는 가까운 흥행을 거둬들이며 그럭저럭 흥행에 성공하자 헤밍웨이는 더 언짢아했다고 한다.[8] 심지어 일제 강점기 조선에도 "헤밍웨이가 사람 팼다"는 기사가 동아일보에 실린 적이 있는데 피해자는 미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맥스 이스트먼(Max Forrester Eastman, 1883 ~ 1969)과 배우(기사에서는 법률가로 나와 있다) 에드워드 채프먼(Edward Chapman, 1901 ~ 1977). 둘 다 헤밍웨이의 가슴털을 보고 놀린 게 화근이었다(...). 이스트먼은 헤밍웨이더러 "자네 가슴털은 진짜 털인가 아니면 붙인 건가?"라고, 채프먼은 "완고한 자식마냥 가슴털 하고는"하고 헤밍웨이의 얼굴을 건드리자 격분해서 턱을 날려버렸다나....출처: 동아일보 1939년 4월 2일 기사 조정래는 본인의 <황홀한 글감옥>에서도 이 일화를 인용하며, “어떤 작품이 영화화되거나 무대에 각색되어 오를 때에 거기에 지나치게 원작자가 개입하면 오히려 그 결과물은 산으로 가버린다”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2차 창작에 굉장히 관대한 자세를 보인다.[9] 그녀는 1922년에 파리의 기차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가 담긴 여행 가방을 분실한 일이 있었다. 이 원고는 90년이 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이걸 다룬 소설도 여럿 나왔다. 다이앤 길버트 매드슨이 쓰고 국내에서도 정발된 《잃어버린 헤밍웨이를 찾아서》도 이걸 다룬 소설이다.[10] 2012년 HBO에서 이 두 사람을 소재로 한 TV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헤밍웨이와 겔혼(Hemingway & Gellhorn)》. 클라이브 오웬이 헤밍웨이를, 니콜 키드먼이 겔혼을 연기했다. 드라마의 평은 썩 좋은 편은 아니다.[11] Margot Louise " Margaux " Hemingway. 첫 번째 부인이었던 엘리자베스 해이들리 리처드슨 사이에서 낳은 잭 헤밍웨이(1923-2000)의 딸. 연예계 데뷔전이었던 10대 시절부터 이미 알코올 중독, 우울증 등을 앓았다고 전해지며, 사인도 약물과다 복용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여담이지만, 마고의 막내동생인 마리엘 헤밍웨이(1961-)는 2013년 언니인 마고와 작은 언니 마르고(Margot)가 아버지 잭과 계모 안젤라에게 갖은 학대와 성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해 파문이 인 적도 있었다.[12] 1959년에는 글이 도저히 써지지가 않는다고 호치너(A. E. Hotchner)라는 작가를 불러서 글을 쓰는 데 도움을 받았는데, 호치너가 이때 본 헤밍웨이의 모습을 재현하길 시력 악화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으며 정신 상태도 매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보였다고 한다.[13] 그의 만년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의 일부가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에 실린 적 있다.[14] 하지만 무슨 말이지 아는 것과 이에 담긴 의미를 아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헤밍웨이는 함축적이기 때문에 그 안에 수많은 메시지들이 들어가 있다는 평을 받는다.[15] 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판(김욱동 옮김)에 따르면, 《무기여 잘 있거라》의 '있거라'는 사실 오역이다. '있어라'(구어) 내지는 '있으라'(문어)가 맞다. '-거라'라는 어미는 '가-' 어간에만 붙는 어미이기 때문('거라' 불규칙 활용). 그러나 '가거라' 외의 '먹거라', '잡거라' 등이 이미 자연스러워졌다고 판단했는지 현행 교육 과정에서는 '거라' 불규칙 활용을 가르치지 않는다. 즉 이제는 오역이라 보기 힘들다.[16] 조지 패튼의 사단 소속이였다.[17] 국내 정발 안 됨.[18] 국내 정발 안 됨.[19] 국내 정발 안 됨.[20] 국내 정발 안됨.[21] 아직 항목이 개설되지 않았는데, 조용필의 노래 제목(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이 글에서 일부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일단 초반에 표범의 얼어붙은 시체가 나오기는 한다. 청소년에게는 추천하지 않는다.[22]노인과 바다》는 정말로 주워들은 걸 토대로 썼다고 한다. 문서 참고.[23]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Contents are available under the CC BY-NC-SA 2.0 KR; There could be exceptions if specified or metioned. theseed-skin-buma by LiteHell, the seed engine by thesee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