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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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쿠란에 등장하는 예언자2. 상기 예언자의 예언서
2.1. 이스라엘의 회복2.2. 외계인을 목격한 에제키엘?2.3. 종말의 예언?2.4. 김회권 교수의 강해2.5. 인신공양 떡밥2.6. 에제키엘서의 신학

1. 성경쿠란에 등장하는 예언자[편집]

자신 앞에 나타난 천사를 바라보는 에제키엘

기원전 6세기 경의 유대인 예언자이자 사제. 구약성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슬람 쿠란의 둘키플(ذو الكف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현대 히브리어로는 '예헤즈켈(יחזקאל, yekhezkel)'이며 '하느님이 강하게 한다'는 뜻이다. 영미권에서 쓰이는 이름 중 하나로서 발음은 '이지키얼(/izí:kiəl/)', 애칭은 지크(Zeke)이다. 한국 개신교에서 널리 쓰는 개역한글판에는 '에스겔'로 나온다.

에제키엘은 예언자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환시(幻視)를 체험한 인물이며, BC 597년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 중 사제 출신으로 신앙 지도자로서 정신적 지주였다. 에제키엘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의 강가에 있다가 하느님의 영광스런 환상을 보고 예언자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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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예언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점이지만, 예언자로서 말보다 퍼포먼스로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내가 죽어도 곡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 몸의 털을 절반씩 밀어버리는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 머리털이나 수염은 남성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라 그것을 밀어버리는 것은 권위를 상실하고 수치를 당한다는 의미인데, 에제키엘이 몸의 털 절반을 밀어버린 것은 남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게 수치를 당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다.

2. 상기 예언자의 예언서[편집]

성경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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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성경은 일부 시서와 지혜서를 제외하고는 서(書)/기(記)를 붙여 표기하는 것을 표준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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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히브리어
סֵפֶר יְחֶזְקֵאל‬ (Séfer Y'khezkél)
그리스어
Ἰεζεκιήλ (Iezekiíl)
라틴어
Prophetia Ezechielis
영어
Book of Ezekiel
한자(한국어)
에제키엘書
중국어
厄則克耳
일본어
エゼキエル書 (エゼキエルしょ)
기본 정보
저자
에제키엘
기록 연대
B.C. 500년대
분량
48장
주요인물
에제키엘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을 것이다. 그들과 맺은 이 계약은 영원히 깨지지 아니하리라. 나는 그들을 불어나게 하고 나의 성소를 영원히 그들 가운데 둘 것이다. 나는 나의 집을 그들 가운데 둘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에제키엘 37장 26~27절(공동번역)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채택하는 성경의 일부. 저자는 부지의 아들 에제키엘. 개신교 성경에서는 부시의 아들 에스겔, 가톨릭 성경에서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이라고 부른다.

2.1. 이스라엘의 회복[편집]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에서 해골들이 일어나 살아 있는 병사가 되는 환상을 보고(37장 1~14절) 예전의 예루살렘 대신전과는 다른 새로운 신전의 환상을 보는데(40~48장),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한다고 한다.

37장 15~2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나무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써라. 또 다른 나무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이 둘을 붙여서 한 막대리고 만들어라. 둘이 하나가 되게 잡고 있어라.

네 겨레가 너에게 막대기가 저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려달라고 묻거든 이렇게 일러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에브라임 수중에 있는 요셉과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를 유다의 이름을 쓴 나무 막대기에 붙여 한 막대기로 만들리라. 둘이 하나가 되게 내가 잡고 있으리라.'

네 손으로 이름을 쓴 그 나무 막대기들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들고, 사람들에게 일러주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 이제 뭇 민족들 가운데서 이끌어내리라. 사방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오리라. 그들을 나의 땅 이스라엘 산악 지대에서 한 민족으로 묶고 한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하리니, 다시는 두 민족으로 갈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반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제키엘 37:15-22(공동번역)

남북으로 분열되어 강대국들에게 짓밟히고 사방으로 분열되어 흩어져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모여 통일된 나라를 회복하고 다시는 분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계시하는 대목으로, 역시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의 현실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많은 기독교 통일 운동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시오니즘의 재앙을 예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도 있으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구약성서의 예언서에 대한 오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예언서들은 당면한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함께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20세기에 벌어질 일들까지 구체적으로 예언하는 종류의 책들이 아니다.

2.2. 외계인을 목격한 에제키엘?[편집]

『아이작 아시모프의 천문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UFO와 관련된 과거 기록에 대해 말하면서 에제키엘의 초반 부분에 나오는 존재들을 우주복을 입은 외계인으로 바꿔서 그린 그림을 내놓기도 했다(...). 무슨 짓거리야! 에제키엘 1장에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소명을 내리는 장면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빛을 내뿜는 바퀴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을 UFO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이다.
바퀴들은 넷 다 같은 모양으로 감람석처럼 빛났고 바퀴 속에 또 바퀴가 있어서 돌아가듯 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사방 어디로 가든지 떠날 때 돌지 않고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네 바퀴마다 불쑥 솟은 데가 있고 그 둘레에는 이 하나 가득 박혀 있었다. 그 짐승들이 움직이면 옆에 있던 바퀴도 움직이고 짐승들이 에서 떠오르면 바퀴도 떠올랐다.
에제키엘 1장 16~19절(공동번역)[2]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고대 근동에서 신적 존재를 묘사할때 쓰인 흔한 이미지다.

2.3. 종말의 예언?[편집]

또한 38~39장에서는 회복된 이스라엘을 상대로 여러 나라가 침략해오는 대 전쟁을 예언했는데, 구 소련 붕괴 이전까지 제3차 세계대전의 좋은 떡밥거리였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다시 옛 땅에 정착해 평화롭게 번영하는데 이를 시기한 '마곡' 땅의 '로스'와 '메섹'과 '투발'의 군주인 '곡'이라는 왕이 페르시아, 에티오피아, 풋, 고메르, 북쪽 끝 나라 '벳 토가르마' 등의 군대와 연합하여 온 땅을 덮을 만한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성벽도 없고 빗장도 없고 문짝도 없이' 살 정도로 평화를 누리고 있던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이 된다.

이스라엘에 우호적이던 '스바(예멘)', '드단', '타르시스[3]'의 상인들과 용사들도 곡의 침략 행위에 대해 말로만 비난할 뿐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은 못할 정도로 곡의 침공은 압도적이었지만, 하느님의 심판으로 곡의 군대는 이스라엘 산악 지방에서 전멸하고 마곡 땅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린다.

곡의 군대가 버린 무기가 얼마나 많은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7년 동안이나 땔감을 해올 필요 없이 곡 군대의 창과 몽둥이를 땔감으로 쓰고, 곡 군대의 시신을 매장하는 데 7개월이나 걸릴 것이며, 세상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우러러볼 것이라는 결말이다.

종말론자나 오컬트 애호가들은 이 내용에서 메섹을 모스크바로, 서울 강서구 마곡을 소련으로 해석하고, 스바, 드단, 타르시스는 미국서유럽으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미래에 소련이 이란 등 이스라엘을 증오하는 아랍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하르마게돈 전쟁이 터지고 그 결말은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전면 핵전쟁'으로 끝날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소련이 해체된 후에 묻힌 떡밥이 되었다가 중동 정세가 험악해질때마다 여전히 기어나오곤 한다. 곡이 블라디미르 푸틴이란 식으로(...)

가장 압권은 47장.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격렬한 전투가 끝난 후, 예루살렘에는 새 성전이 지어지고, 그 성전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47장을 보면 그 성전에서 생명의 물이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든다. 동쪽으로 흐른 생명의 물은 완전히 말라붙은 사막 지대인 아라바 광야와 사해로 흘러들면서 생명력을 잃어버린 땅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강물에는 물고기가 우글거리고, 엔게디에서 엔 에네글라임까지는 그물을 펼쳐 말리는 곳이 되며, 물가에는 1달에 1번씩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라게 된다.

이러한 47장은 '생명의 강'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미래에 열리게 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2.4. 김회권 교수의 강해[편집]

김회권 교수가 심도 있게 강해한 바 있다. 김회권 교수의 대표작인 <김회권 목사의 청년 설교 1>을 보면 1장, 37장, 47장을 강해했다. 그에 따르면, 1장에서 에스겔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난 살아 있다'라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당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자 사람들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여호와도 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고 살아 있으며 영원히 다스리고 있다는 것. 김회권은 이를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주권자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독자들(청년층을 염두에 두고 썼다)을 향해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본문에 의하면 에스겔은 30살의 나이에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중략)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장소와 무대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 입니다. "사로잡힌 자"라는 말은 당시의 역사를 볼 때 전문용어에 가까운 표현으로,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수용소 같은 집단 거주지에 살던 유다의 포로들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에스겔은 사로잡힌 자의 공동체 일원이었습니다. 부자유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중략) 그런 에스겔에서 "하늘이 열리는" 사건은 자유와 해방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중략)
에스겔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하늘 열림, 곧 새로운 역사 해석 시점을 획득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그발 강가입니다. 그발 강가는 유다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그 위치는 아마도 텔아비브(에스겔 3장 15절)이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역사 기록에 의하면, 유다의 포로들은 유프라테스 강의 지류 정도였을 그발 강의 운하공사 현장에 투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략)
에스겔이 거주하던 그발 강가에서 이처럼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그발 강가에서, 그토록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한가운데 멸망당한 조국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제사장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중략) 공동체의 절망은 그 구성원의 개인적 절망 안에서 극에 달합니다. 에스겔은 그런 절망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늘의 열림"을 경험함으로써 땅의 절망을 초극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잃고 하늘에서 얻습니다. 이것을 어설픈 형이상학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는 땅의 절망을 포섭하고 용해시켜 버릴 만큼 강력한 희망과 신앙에 눈을 뜸으로써, 땅의 흑암을 돌파한 자가 된 것입니다.
(중략) 청년 여러분, 지금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까? 이 절망을 돌파하는 신앙을 갖는 것이, 세속적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중략) 지금 한국은 신자유주의라는 무한 경쟁의 살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국제 자본의 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만들어 기업들의 자유 경쟁을 부추기는, 거의 무한 경쟁의 경제 논리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 공동체의 안녕과 복지, 배려와 절제를 도외시한 채 달려가는, 인간의 경쟁심과 탐욕을 무제한으로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거대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폭발 직전의 용암처럼 절망적 탄식이 끓고 있습니다. (중략) 답답한 그발 강가의 포로수용소 같은 전방위적 스트레스가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청년들도 이미 그발 강가와 같은 현실과 마주해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이런 현실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히 강한 자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패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인생 설계대로 진행되지 않은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재기할 수 있는 복원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겠습니까? 후자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 알찬 것은, 자신의 인생을 파산, 상실, 절망의 코드로만 읽지 않고, 창조적 해체,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대한 새로운 눈뜸, 자신의 새로운 사명 발견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불전차 보좌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망해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보좌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스라엘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중략)
에스겔이 발견한 새 세계는 절대적인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행복의 근원입니다. 만인을 동시에 기쁘게 하고 만인에게 경쟁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고 부요한 자원을 누리도록 하는 복음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는 자원이요, 다툴 필요가 없는 영토입니다. 희소성의 원칙을 완전히 극복하는 엄청난 대생명의 자원, 이것이 에스겔이 발견한 뉴 프론티어입니다. 하나님의 불전차 보좌에서 바라본 유다의 역사 안에는 희망과 소생의 여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중략)
에스겔을 사로잡은 하늘의 불전차 보좌는 폭풍과 화염 속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입니다. (중략) 에스겔보다 먼저 온 이스라엘 사람으로, 폭풍과 큰 구름을 동반하면서 강림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그들은 폭풍의 구름전차를 타신 하나님, 세계 속에서 종횡무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에 매이지 않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사실, 고대 근동 문명에서 신학은 정치학의 부속 학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가 섬기던 신도 망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망하면 앗수르의 신도 더 이상 기억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이 망하면 바벨론 신도 그날로 시효가 끝납니다. 그래서 주변 나라들은 유다가 망하자 야웨 하나님도 소멸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유다가 멸망하자마자 하나님은 더욱 찬란한 불전차 보좌를 타고 세계 속에 종횡무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매이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중략)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과는 전혀 다른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비록 유다 왕의 보좌가 텅 비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좌 위에 "앉아 계신다"라는 말은 정상적으로 통치 행위를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략) 따라서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우주적인 평안을 보증하는 말입니다. 보좌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것을 본 에스겔은 우주적인 평화를 맛봅니다.(중략)
에스겔은 확실히 유다 왕위와 상관없이, 네 생물들의 그 신속한 순종을 담보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하나님의 불전차를 보았습니다. 거룩한 전차요 신속하게 이동하는 전차를 본 것입니다. 유다라는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를 종횡무진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 여전히 세계를 다스리고 계신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중략)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복입니다.[4]

37장의 경우 위에서는 뒷부분, 그러니까 남북 이스라엘이 통일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 반면, 김회권은 앞부분, 그러니까 골짜기에 잔뜩 쌓인 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를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암울한 절망 가운데 빠져 있던 사람들이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죽음의 상태에 있지만(오랜 포로생활로 절망하고 무덤과 같은 상황에 있는 백성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영적으로 소생할 것입니다. 소생된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스겔 37장). 에스겔 37장 1~14절은 마른 뼈들의 절망 언어와 하나님의 부활 언어를 생생하게 대조시킵니다. 대언자를 통해 마른 뼈들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에너지 그 자체입니다. 무덤 속의 부활은 분열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상적인 다윗 왕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막대기로 대표되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은 통일과 연합의 언약이자 하나님의 주도 하에 갱신되는 언약입니다(에스겔 37장 15~28절). 마른 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른 골짜기에서 부활할 것이며 무덤에서 뛰쳐나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 왕과 같은 이상왕의 주도 아래, 열방 중에 흩어진 마른 뼈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할 것입니다.(중략)
이처럼 에스겔 36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갱신과 민족적 부활을 예언하는 보다 큰 예언 단락의 중심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아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인 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중략)
에스겔에게 하나님 백성의 부활은 다음의 네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미래를 의미합니다. 첫째, 유다와 이스라엘 포로들의 고토 복귀입니다. 둘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통일과 연합입니다. 셋째, 고토에서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번영과 안전 확보와 평화 및 민족적 화해의 경험입니다. 넷째, 다윗 왕과 같은 이상왕에 의한 계약 공동체성의 회복이었습니다. (중략)
요셉 지파의 이름을 쓴 막대기와 유다 지파의 이름을 쓴 막대기의 결합은 두 지파의 정치적, 인적 통합을 의미합니다. 야웨 하나님의 손안에서 두 막대기로 대표되는 왕국이 합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통일된다는 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상왕 다윗의 영도력 아래 남북 왕국이 통일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략)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는 다윗 왕의 다스림 아래 전례 없는 번영과 평화를 누리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중략) 에스겔이 고취한 미래 비전에 의하면, 가나안 고토로 복귀한 후에 분열과 적대심으로 찢겨졌던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의 손안에서, 그리고 이상적인 다윗 왕 계열의 현실 정치적 군주의 지도력 아래서 통일과 연합을 성취할 것입니다. (중략) 가나안 땅은 엄청난 번영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5]

가장 압권인 것은 47장 강해. 김회권은 '아라바 광야와 사해'를 '암울하고 절망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사회 체제', 구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해석하고, 이러한 현실에 하나님의 생명의 물보드카가 아니다이 유입되어 생명의 원리일반생물학 책 이름이 아니다가 구현되어야 하며, 그 역할을 교회가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스겔 47장은 에스겔의 영적 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중략) 에스겔의 성전 비전의 완성판입니다. (중략) 성전에서 스며 나오는 생명의 보좌, 그 생명수는 왜 동쪽으로 흘러야 합니까?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 죽음의 바다(사해)가 동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에 죽음의 바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수 강물이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수라면 이 생명수는 어디로 흘러야 합니까? 아라바 광야를 거쳐 죽음의 바다로 흘러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전은 생명수 강물을 흘려보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하나님의 통치 보좌가 있는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죽음의 땅, 불모의 땅을 생명의 옥토로 변화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위부대인 교회의 존재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성전 문지방은 하나님의 보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서 생명의 강줄기가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하나님 보좌를 받치는 문지방 역할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생명수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목회자나 장로, 신부나 사제들이 지배하는 격리된 분파가 된다면, 하나님의 생명수는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이 세상에 생명수 강물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님의 보좌 대신 목회자의 왕국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현상입니다. 중세 교황급의 권위주의적인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그 같은 교황급 목회자, 심지어 세습을 시도하는 목회자들이 단기간에는 온유하고 민주적인 목회자들보다 큰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략) 그러나 길게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체하거나 대적하는 목회자의 다스림은 죽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재정 비리, 성 스캔들, 세습 등 온갖 비리들이 그 같은 교회에 생겨납니다. (중략)
이런 점에서, 성전 문지방에서 하나님의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 나라 신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몸과 인격을 통해 생명수가 흘러나오듯이,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곳, 곧 성전 문지방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는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교회가 된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략)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문지방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는 사람들의 현실을 변혁하고, 그 현실을 비옥하게 적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중략)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아라바 광야와 죽음의 바다 같지 않습니까? 지금 많은 모순이 보입니까? 양극화, 분단 의식,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비인간화를 촉진시키는 교육 경쟁... 이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생명수가 유입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가치관과 복음적인 대안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강이 스며드는 길만이 이 땅과 이 겨레의 죽음의 바다를 소생케 할 수 있습니다.[6]

이 부분은 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오는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와 상당히 유사한 해석이며, 동시에 김회권의 '하느님 나라 신학'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볼 수도 있다. 이것을 요약하자면 '낡은 가죽부대=아라바 광야와 사해=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 체제, 새 포도주=생명의 물=낡은 체제를 뒤집어엎고 '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대안적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하느님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청년 설교 1>의 나머지 부분을 참조 바람.

전반적으로 에스겔의 메시지는 다른 예언서들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 핍박과 착취 → 심판과 징벌 → 회복 → 새로운 세상'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현재의 암울하고 불의하며 절망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심판을 경고하는 한편, 미래에 열리게 될 '대안적 세계질서' 로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모든 예언서들의 메시지인데, 에스겔도 이 구도를 따르고 있다.

2.5. 인신공양 떡밥[편집]

해당 항목에서도 확인되지만 오늘날 많은 독자들이 당황할 부분은 20장 25~32절이며, 특히 26절, 31절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예물을 우상에게 바쳤다. 제 속에서 나온 첫 새끼까지 바쳤다. 내가 그들을 이런 것으로 부정하게 만들어 벌을 내린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내가 야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에제키엘 20장 26절(공동번역)
바로 지금도 너희는 예물을 바치고 자식들을 불에 살라 바치면서 모든 우상들과 어울려 몸을 더럽히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물음에 대답해 줄 것 같으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의 문의를 받아주지 않으리라.
에제키엘 20장 31절(공동번역)

성서 주석학적으로 본문이 1차적으로 의도하는 것을 살펴보자.

분명히, 성경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지른 인신공양의 예가 수없이 많이 담겨 있으며, 아브라함이나 입다를 제외하더라도 에제키엘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을 참조해 볼 때, 당대에는 심지어 하느님을 섬기는 방식으로서 인신공양이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생각 역시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이건 하느님이 인신공양을 요구했다는 말과는 문장 수준에서 의미 자체가 다른 말이다! 혼동하지 말자. 당시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인신공양을 좋아했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거의 대다수의 그리스도교 사제나 신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신공양을 행했다는 것, 그리고 성경에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고 있다. # 따라서 적어도 그 주제에서만큼은 더 이상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이 인산공양을 긍정적으로 보는지 여부를 살펴보자. 일단 본문에서는 인신공양이 야훼의 명으로 나오지만, 또한 분명하게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에제키엘에서 하느님은 인신제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런 일을 한 이스라엘 족속을 버려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에제키엘에서는 인신제사에 대해 하느님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게 확실하다. 인신공양이 이렇게 묘사되는 이유는 히브리 성경의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기근이나 질병, 전쟁과 같은 온갖 재앙들도 모두 하느님께서 직접 또는 사자使者를 통해서 주시는 것으로 믿었다. 사람이나 가축에게 생긴 질병이나 장애도 하느님이 보내신 것이라 설명한다(시편 106,15). 예를 들어 불임인 한나를 두고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다고 한다(1사무 1,5).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을 거부했을 때에는 하느님꼐서 몸소 이집트인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보내신다. 가축병과 사람에게 내린 종기(탈출 9장), 맏배의 죽음(탈출 12장)이 모두 하느님께서 내리신 질병과 죽음이다. 주님께서 질병과 장애도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믿었기에 엘리사는 주님꼐 기도하여 적군의 눈을 멀게 하였고(2열왕 6,18), 주님의 천사는 소돔에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창세 19,11). 8세기 예언자 아모수는 아시리아의 침공을 예견하며 이렇게 외쳤다.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아모스 3,6)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신 분은 하느님이지 아시리아 군대가 아니다. 아시리아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축복과 저주, 상과 벌의 근원이시다(아모 3,12-15 참조).
이와 같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이 주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조차 하느님께서 섭리하신 일로 표현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 "하느님이 그의 손에 걸리게" 하셨다고 설명한다(탈출 21,13).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가겠다는 모세의 청을 완고하게 거부한 이유도 주님에게서 찾는다{{{-2 (탈출 4,21; 7,3; 9,12; 10,20.27; 11,20; 14,8.17 등). 곧 이런 식이다.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내보내지 않았다"(탈출 10,20).


간단히 말해서, 히브리 성경의 말하기 방식에 의하면,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그의 손에 걸리게"(탈출 21,13) 하신 것이고, 불임은 "주님께서 그의 태를 닫아 놓으셨"기 때문이며(1사무 1,5), 풍년이든 흉년이든, 나라의 부강이든 쇠망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모두가 야훼에게 돌려진다. 따라서 인신공양이라는 재앙의 원인은 당연하게 야훼에게 돌려진다. 물론 야훼가 의도하지 않는 악행을 백성이 저지른다는 이야기는 히브리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재앙이 터졌을때 그 원인을 야훼에게 돌리는 것은 히브리 성경의 관점에서 이상하지 않은 말하기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불임의 원인이 야훼라고 해서 불임이 긍정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듯이, 에제키엘서 본문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1차적인 의미는, 인신공양을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음은 가톨릭 주석이다:
25 나는 또 그들에게 좋지 않은 규정들과 지켜도 살지 못하는 법규들을 주었다.27) 26 그리하여 그들이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아들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면서 나에게 바친 그 제물들로, 나는 그들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28)이는 그들을 질겁하게 하여,29) 내가 주님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27) 이스라엘이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 율법을 거부하므로, 주님은 그들 성향에 맞추어 그것을 죽음의 율법으로 바꾸어 주셨다(그린버그). 이는 생명의 율법을 거부하는 백성에게 죽음의 율법을 대신 내리고 질겁하게 하시어(26ㄴ절 참조) 하느님 율법의 소중함을 깨우치게 하시려는 목적이다. 우상숭배자와 타협한 예언자가 혹시라도 우상숭배자에게 하느님 이름으로 신탁을 내려주게 되면, 그건 주님이 그에게 거짓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그를 거짓 예언자로 만들어 징벌하시기 위함이다. 또는 본 절을 시편 81,12-13의 기록처럼, 고집스러운 이스라엘을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28) 앞 절에 언급된 죽음의 율법이 인신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태를 맨 먼저 열거 나온 아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말은 '맏배 봉헌 규정'을 떠올리게 한다. 본디 사람의 맏아들은 짐승의 맏배와 달리 대속해야 했다(탈출 13,14). 그런데 여기서는 죽음의 율법에 맞게 하느님이 맏아들을 희생시키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신다. 모세오경에는 광야 유랑 동안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없지만, 본 신탁은 초창기부터 이어진 백성의 탈선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적 정확성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29)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런 잔인한 관습을 허락하신 이유는 반항만 하는 백성을 벌하시려는 데 있다. "그들을 질겁하게 하여" 생명의 율법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하시련느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이집트를 벌하신 다음(탈출 11,9-10)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신 일과 유사하다(그린버그).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거부하자 그의 마음을 더욱 완고하게 만드신 다음 그 버로 이집트 맏배를 치셨듯이, 생명의 율법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도 맏아들을 잃는 벌을 받게 하신다. 또는 25절 주해에 제시된 두 번째 해석에 따라 풀이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이 생명의 율법을 거부하므로,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음을 자초하고 그 죽음에 질겁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다음은 개신교 주석이다:
하나님께서 장자를 예물로 드리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더럽히신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것은 그들로 멸망케 하여 하나님을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2) 즉 그들로 하여금 가증스럽고 잔인한 행위를 하도록 방임하심으로써 스스로 파멸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3)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되시며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성경연구시리즈 9: 예레미야~에스겔》, 강병도, 기독지혜사, 1997, p.476
여기에는 여호와의 법에 대한 에스겔의 독특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가 나온다. 즉 형벌을 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볼 때 그에게 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녀를 제물로 바치도록 오도하는 악을 직접 부추기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그것과 똑같은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계약책의 한 대목 곧 출애굽기 34장 19~20절이 상정되고 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즉 "모태를 깨고 나오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암컷의 첫새끼, 곧 만물은 나의 것이다" 가 그것이다.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절대적인 것처럼 들리는 이 규정은 그것의 실행을 위해 소와 양의 맏배만이 제물로 바쳐질 수 있고... ( 중략 ) ...장자도 대체동물을 바침으로써 꼭 같이 몸값을 치루어야 한다.
 
비록 현재 형태의 이 세부규정이 나중에 비로소 법률 본문에 삽입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본 규정에 대한 유효한 해석으로 효력이 있었다는 것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약성서는 바로 장자에 대한 자랑과 기쁨을 보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9장 3절이 그러한 경우이다. ( 구약성서의 인신제사에 대해서는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I, S, 88~90 을 참조하라 ! )
 
그런데 만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한 이 절대적인 것 같은 본 규정이 예컨대 출애굽기 22장 28절에는 "너는 너의 장자를 나에게 바쳐야 한다" 로 되어 있을 뿐 세부 규정에 의해 보충되고 있지 않은데, 특정한 상황에서 인간 장자를 제물로 바칠 필요가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 이처럼 그 규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라고 촉구할 수 있었다는 것도 꼭 같이 납득이 된다. 가나안의 관념에 따르면 예컨대 전쟁에서 극도의 위기에 빠진 것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 ( 중략 )
 
그러나 이와 같은 가나안의 관념은 주전 8~7세기에 아시리아 지배하에서 혼합주의가 점점 더 만연해짐에 따라 야훼 예배와 바알 종교의 자연숭배가 상당한 정도로 동화되기 시작하던 그 때에 비로소 이스라엘에게는 위험스러운 유혹이 되었다. 이방 군주에 의한 착취와 농민의 전반적인 빈곤화로 인해 극심한 압력을 받을 때 인간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성난 신을 달래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 중략 )
 
이 당시에 사람들은 예레미야 2장 34절, 3장 24절, 7장 31절, 32장 25절에도 언급되는 이 끔찍한 제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듯한 법규정을 증거로 끌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에스겔도 이와 같은 법의 오용을 알고 있었다. ( 중략 ) 하나님은 그의 법 자체 내에 걸림돌을 두었다. 전도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 걸림돌로 인해 제사에서 경건한 행함을 식별해낼 수 있다고 믿게 되지만, 이 제사는 무섭기 짝없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지 않는 무익한 계명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길을 잃었을 때 그 법에 걸려 찢기우고 상처를 입으며, 이로써 자연숭배는 생명에 전적으로 적대적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이 계명을 끌어대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응이 복종하지 않는 백성에게서 이 계명을 통해 구체화되었다는 판단만을 얻을 뿐이다.
 
《국제성서주석 에스겔, Walter Eichrodt, 한국신학연구소, 1994, pp.321~323》
에스겔은 선치 못한 율례와 능히 살게 하지 못할 규례와 그들로 멸망케 하는 율법의 예로 구체적으로 장자를 화제로 불살라 바치라고 한다. 같은 책망이 이스라엘 역사를 알레고리로 말하는 16장과 23장에 또 나타난다. ( 중략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에 근거한다. (출애굽기 13장 1~2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장자 대신에 우양의 제물로 대속하라고 가르치셨다. (출애굽기 13장 11~13절, 34장 20절, 민수기 18장 15~17절) 특히 제사 전통에서는 레위인을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초태생 대신으로 취하신다고 말한다 (민수기 3장 12절, 8장 14~19절) 성경에서는 사람을 화제로 제사드리는 것을 철저히 금하신다. (신명기 18장 10절, 12장 20~32절, 레위기 18장 21절, 20장 1~5절)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아들을 불살라 화제로 드리는 풍속을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 주변 국가에서 배우게 된다. ( 하략 )
 
《에스겔의 예언과 신학 연구》, 권오현, 한마음세계선교회 출판부, 2007, p.344

이에 따르면, 여호와는 이미 창세기 및 출애굽기 때부터 초태생에 대한 자랑과 기쁨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으며, 그리고 권오현에 따르면, 이에 더하여 초태생을 대신하여 드려질 우양의 제물을 통한 대리적 제사 ㅡ 즉 인신공양이 아닌 대리제물 ㅡ 그리고 근본적으로 초태생을 대신할 존재인 "레위인" 을 배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즉 "장자를 드리라" 라는 애매모호한 명령은,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법령들에 의해 부연되고 있으나, 종교혼합주의가 당연시되는 소위 "타락한" 환경에서는 이것이 무시되고 문자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기존의 율법에 가나안의 사고관이 융합되어 인신공양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는 것. 이것이 곧 "여호와가 자기 법 내에 걸림돌을 두는" 방식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이 대목에 대한 Eichrodt의 이해이다.

더불어, 강병도에 따르면 여호와가 "시켰다" 고 표현하는 것들은 사실 "방치, 방임" 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결국 강병도는 이것이 여호와가 적극적으로 "명령했다, 하도록 하였다" 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2.6. 에제키엘서의 신학[편집]

에제키엘은 사제계 신학의 아버지다.

이 사실은 표현 방식(시기 언급·제의법의 통합·역사에 대한 관심·신비적 요소들의 동원)과 개별적 논증[예: 1,26의 하느님에 대한 묘사('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와 창세 1,26의 하느님의 모상 언명의 관련성]에 해당된다. 성전과 그 제도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중심에 자리 잡는다. 제의 전승들이 뚜렷이 드러난다; 특히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거룩함의 관념이다; 사제인 에제키엘 자신의 정결에 대한 염려가 표명된다(4,14); 부정不淨이 시종일관 비난의 원인이 된다(예: 22장; 24,1 이하); 야훼 영광의 현현은 유배지에서 인간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을 피하신다(3, 12-15.22-23); 야훼의 영광은 부정하게 되어 버린 거룩한 영역을 떠나고(8-11장), 새 성전으로 비로소 다시 돌아오며(40-43장), 거룩한 것은 주변의 죄스러운 사람들로부터 단호히 분리된다(43,7 이하). 하느님 행동의 핵심 동기는 하느님 이름의 성화였고, 지금도 그렇다(20,5 이하; 36,16 이하). 에제키엘에게서 원칙적으로 그어진 연결선들이 제자들의 후속 작업에서 체계적으로 강화되었다. 40-48장의 사제계 신학은 "차독계" 경향을 띤다. 이 신학은 야훼의 거룩함을 내세운 각별한 엄격함과 엄숙주의로 특징지어진다.

-프랑크로타르 호스펠트Frank-Lothar Hossfeld, "에제키엘서",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870-871쪽
[1]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2] 영화 노잉에서 이 기록과 흡사하게 재현하였다.[3] 에스파냐 또는 페니키아로 추정[4]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청년 설교 1, 복 있는 사람, 2009, pp.57-91[5] Ibid. pp.99-100, 118-122[6] Ibid. pp. 150-159[7] 하지만 '우상'숭배도 같이 언급되는 걸로 봐선 당시의 이스라엘 지경 내의 이방 신들에게 자식을 바쳤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 왕.[8] 저자인 김명숙 박사는 라삐 모셰 그린버그(Moshe Greenberg)가 강의한 히브리대학교(예루살렘)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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