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파일:alpha1.png   이 인물을 소재로 한 SBS 대하사극에 대해서는 연개소문(드라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경극 독목관 대본 표지. 설인귀(좌)와 연개소문(우)
대막리지(大莫離支)
연(淵)
개소문(蓋蘇文)
아들
배우자
미상
아버지
어머니
미상
생몰년도
614년? ~ 666년[1][2]
1. 개요2. 연개소문의 이름 표기 문제3. 생애
3.1. 출신과 계보
3.1.1. 출생3.1.2. 가계에 대하여3.1.3. 탄생 설화
3.2. 초기일생
3.2.1. 외모와 성품3.2.2.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다
3.3. 정변을 일으키다
3.3.1. 연개소문의 위기3.3.2. 10월의 유혈 쿠데타3.3.3.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가
3.4. 정권을 장악하다
3.4.1. 중앙 정계의 장악3.4.2. 지방 세력의 반발
3.5. 김춘추와의 회담
3.5.1. 회담의 결렬3.5.2. 김춘추를 풀어주다3.5.3. 왜 회담이 결렬되었는가
3.6. 당나라와의 대립
3.6.1. 당태종의 분노3.6.2. 도교를 받아들이다3.6.3. 신라를 공격하다
3.7. 고구려-당 전쟁3.8. 죽음과 사후
4. 평가
4.1. 과거의 평가4.2. 현대의 평가4.3. 고구려 멸망의 책임
5. 그 외에6.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편집]

연개소문은 (一) 고구려의 9백 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二)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三) 그리하여 국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


淵蓋蘇文
연개소문[3]

고구려의 권신이자 마지막 불꽃

동부 대인[4]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 동부 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후에 정변을 일으켜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옥좌에 앉혔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정권을 휘둘렀다. 이후 연개소문이 당나라ᆞ신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ᆞ당나라 사이에는 수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오늘날에 이르어서는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막아낸 구국의 영웅 혹은 전횡을 일삼고 후계구도를 명확히 해두지 않아 수백 년 역사 고구려를 망하게 한 독재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대체로 과거,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나라를 쇠망하게 한 대역죄인으로 취급받았지만 근대에 이르어서는 당나라와 대립한 일로 인하여 민족주의적 영웅으로 재평가를 받아 추앙받기도 한다. 현대 북한에서는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으나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부정적으로 보는 쪽은 고구려판 이오시프 스탈린, 사담 후세인, 최충헌, 동탁, 사마의로 평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고구려판 윈스턴 처칠로 평한다. 그러나 세 명의 아들 관리를 제대로 못해 그의 사후 장남과 차남, 삼남이 정권 주도권을 놓고 싸우다가 장남과 동생, 이외 측근들이 당나라와 신라로 투항, 귀순하고 당나라와 신라등 외부의 적을 끌어들여 나라가 패망한 점에 있어선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말기 상황과 원소, 유표 와도 유사하다.

2. 연개소문의 이름 표기 문제[편집]

우선 연개소문의 성이 연(淵)씨라고 언급한 직접적인 기록은 하나도 없다.
  • 삼국사기》의 연개소문 열전에서는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문'을 '쇠 금'자로 가차하여 음이 아니라 뜻으로 읽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개소문과 개금 중 어느 것이 진짜 이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래 그 이름을 한자로 표기할때는 개금이라 했으나 고구려말로 읽는 발음으로는 개소(쇠)문이라 했는데, 이 발음이 또다른 이름 표기가 되어버렸다는 설이 있다.[5]
  • 일본서기》에는 이리카스미(伊梨柯須彌)라는 음차로 추측되는 표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본래 한자로 된 성이 아니라 고구려 고유어로 된 이름이 진짜 본명에 가깝고, '연(淵)'이라는 성씨 역시 단지 샘, 못 등의 뜻을 가진 고유어 성씨를 한자로 나타낸 일화적인 표기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어 국학자 안정복이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처음 주장한 것이다. 안정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과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정토는 소문(개소문)의 아우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그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과 글씨가 겹치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피휘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8] 이는 오늘날 한국사학계에 거의 정설로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하게 된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의 개소문열전에서 이를 아무 비판없이 받아들인 것 때문에 아직도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천개소문이라 표기하던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나마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어느 정도 줄어든 듯 하다.

임병준 씨의 경북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고구려말의 차자표기 연구'에 따르면 淵(연)은 훈독으로 읽는 게 아니라 泉(천)이 가지고 있는 뜻인 '샘'을 음차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9] 이 논문에서는 성인 淵(연)의 원래 발음[10]에 대해서만 분석했다. 이름의 경우, 蓋蘇文과 柯須彌의 발음이 일치하지 않아서 추정에 난점이 있다. 정확히는 蓋와 柯는 '가'로 읽혔다는 게 거의 확실한데 뒤의 두 글자는 ㅅ, ㅁ이라는 자음은 확실하지만 모음이 불확실하다.[11]

종합해 보면 '연개소문(=천개소문)=연개금=이리카스미'가 되는데, 우선 '연못 연(淵)'과 '샘 천(泉)'은 각각 뜻이 통하고 이것이 '이리'라는 음가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고구려 고유어로 '연못'을 뜻하는 '이리' 비슷한 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늘 그렇듯이 고대 언어 자료의 태부족(...)으로 인해 확신할 수는 없다.[12] 그리고 '개소문'과 '카스미'는 음이 통하고 이것이 뒷글자를 뜻으로 읽은 '개금'에 해당됨을 보아, '쇠'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유어 '소문(스미)', 혹은 '소(스)'가 있었음을 추측 가능하다. 이 경우는 현대어 '쇠'와도 대충 비슷해 보이긴 한다.

3. 생애[편집]

3.1. 출신과 계보[편집]

3.1.1. 출생[편집]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隤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13]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14]를 가리고(혹은 적시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15]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16]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천남생 묘지명 中

삼국사기 및 구,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동부 대인(혹은 서부 대인)이었던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서부와 동부 중 정확히 어느 쪽 출신인지는 알기 힘들지만 동부 대인이었다는 표기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동부 출신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출생연도는 직접적인 기록에 남아있지않아 정확히 알기 힘드나,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이 634년생이었으니, 연개소문이 20세를 전후하여 연남생을 낳았다고 가정해보면 대략 614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연개소문이 614년경에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의 출생연도를 595년 경으로 추측했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록에 연개소문은 자신이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주위 사람들을 미혹시켰다고 하는데수중분만 이는 연씨 가문의 시조가 물(泉 혹은 淵)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3.1.2. 가계에 대하여[편집]

연자유
(淵子遊)
연태조
(淵太祚)
연개소문
(淵蓋蘇文)
연정토
(淵淨土)
연남생
(淵男生)
연남건
(淵男建)
연남산
(淵男産)
연헌충
(淵獻忠)
연헌성
(淵獻誠)
연광부
(淵光富)
연현은
(淵玄隱)
연현정
(淵玄靜)
연현일
(淵玄逸)
연비
(淵毖)

연개소문의 상세한 가계도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뤄양에서 발굴된 연남생묘지에 연개소문의 가계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발견되어 마침내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연남생 묘지명에 나타난 연씨 가문의 내력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가문의 시조는 천(泉), 즉 샘물에서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연자유, 아버지인 연태조 등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서 나라의 군권과 권세를 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개소문의 가문은 연자유, 연태조의 2대에 걸쳐서 고구려 최고위직인 막리지 직위를 역임하였다고 하였다.[17]

대개 고구려의 유서깊은 귀족들의 묘지명[18]을 보면 '우리 선조는 동명성왕이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울때 부터 함께하며 공을 세워 높은 지위에 올랐다.'라는 구절로 시작하기 마련인데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의 묘비명에 "우리 고조(연개소문의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병사를 잘 훈련시켜서 가업을 이어온 가문이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있는 등, 선조에 관련된 독자적인 설화를 가지고 있고, 우리 선조는 쇠와 활을 잘 다루었다라는 구절로 보건데 나름대로 강한 무력을 지녔던 가문이 었음을 추측할수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연개소문 가문은 전통 있는 귀족 가문이 아닌, 시조와 관련된 출생 설화를 지니고 있으며 독자적인 무력으로 나라의 권세를 쥐게 된 신흥 귀족 세력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연개소문의 선대인 조부 연자유와 아버지 연태조가 2대에 걸쳐 고구려 최고위직을 역임했다는 것은 당시 연씨 가문의 세력이 매우 강성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더불어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의 대인(욕살)이었다고 하니 그 위세가 대단하였을 것이다. 연개소문도 처음부터 최고의 권력 중 하나인 막리지로 정계에 등장하는데, 이는 부친인 연태조의 직위를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즉 한 가문이 3대에 걸쳐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계승하였다는 뜻이다.

3.1.3. 탄생 설화[편집]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연개소문 가문의 시조는 우물(井) 또는 물(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연개소문의 연(淵)이라는 성씨는 이 설화와 관련이 있는 걸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와 당서의 기록에도 연개소문이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실상은 자신의 시조의 출생 설화를 자랑하고 다닌 것으로 보인다.

한국 쪽의 관련 기록으로는 조선 숙종 때의 사람인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쓴 강도지(江都誌)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강화도의 고려산(高麗山)에 연개소문의 옛 집터가 있고 그 고려산에는 다섯 개의 우물(五井)이 있었으며 그 다섯 우물에선 항상 깨끗한 물이 흘러나왔다. 연개소문은 언제나 이 우물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연개소문과 이 다섯 우물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몇백 년이 지나 몽골의 고려 지배기에 몽골의 사신이 고려산의 다섯 우물을 찾아보았고, 그곳의 지맥을 누르기 위하여 이 다섯 우물에 쇠말뚝을 박아 지맥을 끊어버렸다. 그 후부터는 넘쳐 흐르던 물이 말라버렸지만, 아직도 그 연못의 자취는 남아 전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강화도에서도 해당 지역을 연개소문의 출생지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중.

한편 삼국유사에서도 연개소문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본기라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서의 기록을 인용한 것인데, 612년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배하고 돌아갔을 적에 그의 신하였던 우상(右相) 양명(羊皿)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죽어서 훗날 고구려의 대신으로 태어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였고 이후 614년에 수 양제가 죽자 자신이 말했던 대로 고구려에서 다시 태어나 그 성씨를 양(羊)과 명(皿)을 합친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는데 그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었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개소문이 불교를 억압하고 당나라에서 도교를 들여오자 이에 반발한 고구려의 승려들이 남긴 악의적인 기록으로 여겨지며, 삼국유사의 저자였던 승려 일연이 그대로 수용해 삼국유사에 기록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인듯 하다. 다만 이 기록은 사실과 많이 다를 뿐더러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역시 삼국유사에 해당 기록을 실으면서도 기록의 비현설성을 크게 비판한 바 있다.

3.2. 초기일생[편집]

3.2.1. 외모와 성품[편집]

구당서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수염과 얼굴이 매우 준수하며 체격이 걸출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신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비록 성격은 포악하고 잔인하나 용모가 걸출하고 준수하며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그 외모가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외모 하나는 상당히 준수하고 위풍당당했던 것 같다.

한편 구당서,신당서와 삼국사기의 개소문열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 성격은 포악하고 잔인하면서도 용맹하고 호방하여 호걸다웠다고 하는 등 왠지 이중적인 기록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런 기록과는 상관없이, 쿠데타를 일으켰을때의 모습과 중앙 정계를 장악할 당시에 연개소문이 보여줬던 모습을 보면 필요할때는 상당히 과단성있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으며, 또한 적에게는 자비없이 잔혹하면서도 계획을 짤 때에는 상당히 냉정하고 치밀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악의가 담긴 중국 측의 기록과 비교해도 어느정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3.2.2.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다[편집]

이후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동부 대인 대대로(大對盧) 연태조가 사망하자[19] 연개소문이 그 뒤를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연개소문을 성격이 포악하다면서 미워하였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직위를 계승함에 반대하였다. 때문에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할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이는 그만큼 평소에 연개소문의 반대파들이 많았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연개소문의 가문은 할아버지인 연자유 때부터 3대에 걸쳐 동부의 군사를 장악하고 고구려 최고위직을 연임하고 있는 막강한 신흥 세력이었기에, 기존의 권력층이었던 구세대 귀족 세력들과 왕실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기록에 나와있는 것 처럼 단순히 연개소문의 성격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동부 대인 지위의 세습에 반대가 많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한편 벼슬길이 끊길 위기에 처한 연개소문은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며 만약 자신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한 후에도 포악한 짓을 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을 동부 대인의 직위에서 폐하여도 좋다고 간청하였다. 그 꼴이 오죽 불쌍하게 보였는지(...) 연개소문을 미워하던 사람들조차도 마음을 바꿔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20]

3.3. 정변을 일으키다[편집]

3.3.1. 연개소문의 위기[편집]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 대인의 직위를 계승한 연개소문은 이후 642년 1월에 영류왕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받고 고구려의 북쪽 국경 지대로 파견되었다. 이는 6세기 이래의 고구려의 귀족연립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연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개소문은 동부 대인이 된 이후에도 흉포하고 잔인무도한 행동을 계속 하였다고 하며 또한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권을 범하려 했다고도 한다. 이는 당시 고구려 내에서 강성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연씨 가문과 영류왕, 귀족들간의 정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영류왕까지 포함된 연개소문 제거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연개소문의 가문의 힘은 고구려의 왕위까지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게 성장해 있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암살 모의도 이미 고구려 조정 깊숙히 세력을 심어두었던 연개소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모든 고위 대신, 심지어 왕마저 자신을 죽이려하는 가운데 연개소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바로 유혈 쿠데타였다.

3.3.2. 10월의 유혈 쿠데타[편집]

冬十月 蓋蘇文 弑王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 제20권 고구려본기 제8 三國史記 卷第二十 髙句麗本紀 第八[21]

임진일, 고려의 사신이 나니와진(難波津)[22]에 다다랐다.
정미일, 여러 대부들을 나니와부(難波郡)에 보내어 고려국에서 바치는 금,은 등과 아울러 물건을 살피게 하였다. 사신이 물건을 바치고는 “지난해 6월 아우 왕자[23]가 죽고 가을 9월에 대신 이리가수미(大臣 伊梨柯須彌)가 대왕이리거세사(伊梨渠世事) 등 180여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아우 왕자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 자기와 같은 성씨(姓氏)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大臣)으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서기 권24, 고교쿠 덴노 2년

642년 10월, 왕과 대신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과감하게도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꾸몄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24]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서열식 중에 연개소문이 관할하는 동부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이때 살해당한 대신들은 무려 100여 명에 이르었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대신들을 어육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구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서열식을 하던 중에 갑자기 동부의 군사를 휘몰아쳐 대신들을 죽였다고 하였으나 신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군사들을 숨겨두었다가 대신들이 도착하는 족족 하나씩 죽여 없애버렸다고 하였다.

의문점이 있다면 왜 하필이면, 고위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적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사열하는 행사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그랬는지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아무래도 그 행사가 보통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참석해야 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행사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지위를 내놓는 이임식 행사나, 혹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위해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베푼 송별식일 가능성이 크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제거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기 위해 궁궐로 쳐들어갔다. 다른 4부의 군사들이 저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왕을 죽이고 궁성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궁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일부러 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는 수도 경비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비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창고로 달려가는 동안 연개소문의 사병들은 큰 저항없이 왕이 거처하는 안학궁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위해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계략을 짜놓았고, 이를 신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난입한 연개소문은 마침내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그 시체를 토막내서 시궁창에 내팽겨 쳐버렸다. 사실이라면 아마도 최대 정적이었던 왕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대적한 자는 왕이라도 이리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남기기 위해 이런 행위를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25]

일본서기의 기록도 이와 유사하다. 아니, 이쪽은 더욱 스산하게 기록되어 있다. 642년 9월에 대신 이리가수미(연개소문)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대왕을 시해하고 이리거세사 등을 비롯한 180여 명의 사람들을 죽였으며 이어서 왕의 어린 조카(보장왕)를 왕으로 세우고 동성(同性)인 도수류금류를 대신으로 삼았다고 하였다.[26]

3.3.3.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가[편집]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집권층 귀족들을 도륙내고[27] 보장왕을 옹립하였으며 자신의 세력들을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연개소문이 왜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첫 번째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 개소문열전에 기록되어있듯이 영류왕과 당시의 집권층 귀족들과 연개소문 사이에 일어난 권력 다툼의 결과라는 설인데, 사실상 정설이라고 할 수 있는 설이다. 위에서도 여러번 설명하였듯이 연개소문의 가문은 이미 할아버지대인 연자유 때부터 2대에 걸쳐 막리지 직위를 역임하였으며, 강력한 무력과 동부대인의 지위를 바탕으로 당대 고구려의 막강한 신흥 귀족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고구려 왕실과 기존 권력층은 연개소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동부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한편 천리장성 건축의 감독을 맡긴다는 핑계로 변방으로 몰아내려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씨 가문의 힘이 꺾이지 않자 결국 연개소문을 죽이려는 시도를 하려다가 연개소문이 이를 먼저 알고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왕과 집권층을 갈아 엎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과 결탁하였다는 설이다. 영류왕은 사실 선왕인 영양왕의 배다른 아우였으나 여수전쟁 당시에 큰 전공을 세웠으며 또한 영양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영양왕의 또다른 아우였던 태양(太陽)과 그의 아들인 보장왕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그들 또한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에 불타 당시 영류왕과 대립하던 연개소문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자 보장왕이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별로 믿을만한 설은 아니다.[28]
  • 세 번째는 근대에 들어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한 대당외교 문제와 관련된 설이다. 당시 영류왕은 당나라에 대해 온건하고 저자세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대당강경파이자 신흥귀족 세력의 대표였던 연개소문이 이에 반대하며 영류왕과 충돌한 끝에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29] 이 설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그 근거로 영류왕과는 달리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을 들고 있다. 물론 연개소문의 대당외교는 유연한 편이었다.

3.4. 정권을 장악하다[편집]

3.4.1. 중앙 정계의 장악[편집]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아우인 태양(太陽)의 아들 보장을 불러와 왕위에 앉히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 King Guarantee King Security 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는 직책을 가졌다. 막리지라는 직책은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나라의 군사력과 궁중의 행정을 모두 맡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력과 궁중의 권력을 모두 장악해 버린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김유신열전이나 연남생의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의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하였는데 정권을 일으킨 이후 어느정도 세력이 안정되자 고구려 귀족회의의 장인 대대로 직위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30]

또한 일본서기에서 연개소문이 대신 이리거세사 등을 죽이고 도수류금류 등을 대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연개소문이 쿠데타로 중앙정계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학살한 후에 자신의 사람들로 그 자리를 메꾸는 등 대대적인 인사개혁을 단행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은 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부리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의 고구려사를 기록한 보장왕본기는 사실상 연개소문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후로 연개소문은 그 권위적인 성격을 마음껏 과시하고 다녔다(...).

구/신당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관복을 금으로 장식하였으며 평소에도 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며 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 삼았다고 묘사하였다.[31] 또한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고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때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고 한다.

3.4.2. 지방 세력의 반발[편집]

일단 도읍인 평양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반대파를 제압하고 보장왕을 옹립하기는 하였으나 저항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듯 하다.[32] 당태종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양만춘(楊萬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까지 하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주는 이를 잘 막아내었고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33] 다만 이후의 정황으로 보건데 지방에 반대파들이 남아있었다 하여도 중앙정계를 장악한 연개소문에게 끝까지 대항하지는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당과의 전쟁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만을 시작해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에서 15만명, 명확히 알 수 없지만 667년 금산에서 20만명을 동원하는 등 이 전력을 백제와 신라에다가 들이 부었으면 과연 두 국가가 버틸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량을 들이부었을 정도로 국가통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국을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5. 김춘추와의 회담[편집]

3.5.1. 회담의 결렬[편집]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딸과 사위, 손주들을 잃은 신라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 조정에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청하였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왕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34]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하였으나 다음날에 김춘추가 보장왕과 만나 논의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보장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요구하였다. 이 지역은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이후 나제동맹이 결성되었을 당시에 신라가 이를 빼앗아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던 터였다.

비록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던 김춘추라고는하나 이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다. 그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되고 고구려에게 신라로 통하는 진격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보장왕이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뜻이 되는데, 보장왕의 뜻은 사실상 실권을 움켜쥐고 있던 연개소문의 뜻이었다.

3.5.2. 김춘추를 풀어주다[편집]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그를 가두어 억류해버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고, 곧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 지대로 나아가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에서는 곧 김춘추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풀려나 귀국하게 된 사연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에 나타나 무력 시위를 벌이자 보장왕이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보장왕의 측근이었던 선도해가 김유신에게 뇌물을 받고는 '토끼의 간'에 대한 이야기[35]를 들려주며 꾀를 내주자 김춘추가 이를 받아들여 보장왕에게 땅을 내어주기로 약조하고는 정작 국경에 이르자 이를 어기고 달아났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도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으로 군사를 끌고가 무력시위를 벌였다고 하였다.[36]

3.5.3. 왜 회담이 결렬되었는가[편집]

연개소문이 어찌하여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하고 신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적대관계를 초래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연개소문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빚어내 군사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연개소문이 애초부터 신라를 전혀 믿지 않았으며 후방의 신라 정도는 백제나 왜를 이용해 견제할 수 있다는 연개소문의 자만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보다는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욱 유리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제의를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무왕, 의자왕의 2대에 걸쳐 신라를 압박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며 더욱이 의자왕은 신라의 대야성을 쳐서 빼앗은 이후로 고구려와는 화친을 맺고 있었다. 고구려측의 입장에서는 한창 신라를 씽나게 몰아붙이던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견제하여 후방을 안전하게 만들고 곧 닥쳐올 당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료중 백제의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김춘추가 제의하러 왔을때 맞춰 글을 보냈는데 만약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당과 손을 잡고 그렇게 되면 당은 고구려에 진격할 길과 자원을 쉽게 공급받아 앞뒤로 압박 받게 된다는 것이 있다.[37]

즉,성충이 연개소문을 협박 한 것이다.이때문에 연개소문은 옛 장수왕때 영토반환이란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거절 했다는 것이다.[38][39]

어찌 되었든간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일어났던 회담 결렬의 결과는 매우 큰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고립된 처지가 된 신라는 이후로 당나라에 필사적으로 메달렸고 결국 이는 신라와 당의 연계 작전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3.6. 당나라와의 대립[편집]

3.6.1. 당태종의 분노[편집]

이토록 권위적인 성격의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력자가 된 이후로 당나라고구려의 관계는 차츰 악화되었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기 전에 고구려를 다스렸던 영류왕은 당나라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런 영류왕을 처참하게 죽여 놓았으니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분노할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당태종은 당시 내부적으로 태자교체의 후유증으로 인해 상당히 통치력이 감소해 있었고,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외척의 힘이 강대해져 한참 어지러웠던 시대였다. 심지어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에게 환속해서 자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정치적 어려움이 심각했다. 또한 동시에 고구려에 대해 그닥 좋은 감정은 가지지 않았던 것이 당태종이기 때문에(대표적인 게 진대덕 귀국 후 고구려 공격 의사를 내비친 것) 고구려에 대한 공격도 정국 타개를 위해 고려할만한 옵션이었다. 게다가 당태종은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군사적 역량을 지닌 명장이기도 하니 고구려 정복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당태종 자신과 막 세운 태자의 권위를 세우고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태종에게는 말 그대로 딱 들어맞는 대의명분인 것.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을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역적이라 일컫으며 고구려를 칠 것을 계획하였으나, 측근이었던 장손무기가 아직 방비가 단단하니 상황을 지켜봐야 옳다고 만류하자 계획을 보류하였다.

3.6.2. 도교를 받아들이다[편집]

643년 3월,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에는 유교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라면서 보장왕에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전해주도록 하였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사실 당시 고구려에서는 도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류왕본기에도 당시의 고구려에 도교가 번창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즈음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이전에 불교적 색체가 짙었던 것과는 달리 도교적인 요소가 매우 늘어났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연개소문이 새삼스럽게 당나라에 도교 전파를 요청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 황실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무척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이 당나라 조정이 받드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에 대한 유화책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도사들에게 절을 숙소로 내준 것은 불교에 대한 탄압책으로 여겨진다.[40] 보장왕 본기에는 650년 6월에 변룡사의 승려인 보덕화상이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한다 하여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불교는 왕실을 보위하는 호국불교라는 점을 생각하면 왕실의 친위세력인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켜 왕의 위상 자체도 떨어뜨리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스님들은 귀족가문의 출신들도 많았고 학문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였으며 스님들이 숙식하는 사찰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의 숙식을 해결할수 있는 군사적 기능도 하였기에 그 대항마로 도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당시 엘리트 였던 스님과 불교세력들이 연개소문의 친도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신라나 백제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3.6.3. 신라를 공격하다[편집]

한편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643년 9월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신라의 40여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뱃길을 끊어 버렸다'라면서 도움을 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었다.

644년 정월에 당태종은 고구려 조정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여 2개의 성을 격파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보장왕이 사자를 보내 부르자 그제서야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리현장은 개소문에게 신라를 치지 말것을 설유하였으나 개소문은 지난날 수나라와 싸우는 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땅을 빼앗아갔으므로 이를 되찾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이에 당태종은 고구려를 정벌할 뜻을 밝히고는 사신 장엄을 보내 재차 연개소문을 나무랐다. 그러나 개소문은 당태종의 조서를 받들지 않고 도리어 장엄을 협박하고는 굴방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크게 노한 당태종은 644년 7월에 고구려 정벌을 괴하였다.

한편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백금을 보내었으나 당나라의 대신인 저수량은 이를 고구려 측이 보낸 뇌물이라 주장하였으므로 당태종은 이를 받지 않았다. 또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보낸 50여 명의 사신들을 가리켜서 '왕을 죽인 막리지를 섬기는 죄인들'이라 하며 잡아 처벌하였다.

3.7. 고구려-당 전쟁[편집]


645년, 마침내 진노한 당태종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다. 당 태종이 친히 지휘하던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요동성 그 밖에 백암성 등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고연수가 이끄는 15만 대군을 기세좋게 무찌르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당태종은 안시성 공격에 나섰다가 안시성주의 분전으로 인하여 결국 패배하고 돌아갔다. 이후로도 당태종은 군사를 보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연개소문의 사수 대첩 기록화

한편 그 뒤를 이은 당고종 역시 수차례 고구려를 침략해왔으며, 싸움중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마저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662년에는 연개소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수에서 당나라 장수인 방효태와 싸워서 방효태 지휘의 옥저도행군을 몰살시키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을 모두 죽임으로써 평양 앞까지 당도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당 전쟁 항목을 참고하기를.

3.8. 죽음과 사후[편집]

여당전쟁중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을 수차례 격퇴했으나, 당나라의 막강한 군세와 수차례 충돌한 결과 고구려의 힘은 쇠약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전쟁 초기에는 요동이나 북방에서 승부를 냈지만, 연개소문이 사수에서 방효태를 무찔렀을 때에는 전선이 평양 근처까지 밀려나 있었는데 사실 고구려 자체의 군사력 약화는 크게 보이지 않지만 당나라가 주요방어선을 우회해서 수도 인근을 타격하는 전략을 구사함에 따라 상황은 심각해졌다. 더구나 고구려 동맹국이던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후방도 매우 위험해졌다.

이러한 시기에 연개소문은 건봉 원년(666년)에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였다. 이는 구당서와 신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642년 겨울에 난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지 24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한편 천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665년에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했다고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연개소문이 이미 665년에 죽었거나 혹은 그때에 큰 병이 들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미리 연남생에게 직위를 넘겨주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일본서기 천지천황 3년 10월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664년에 죽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며 죽었는데 죽으면서도 아들들이 서로 분쟁하여 나라를 분열시킬까봐 두려웠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 달에 고려(高麗)의 대신 개금(蓋金, 개소문의 다른 이름)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漁水)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27 천지천황 3년 10월
그러나 결국 웃음거리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이 막리지의 직위를 계승하였으며, 남생의 두 아우였던 연남건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이들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이간질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결국 맏아들 연남생의 마음이 흔들려 남건과 남산에게 첩자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남생을 의심하여 왕명을 칭하여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미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연남생을 더욱 의심하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급기야 남생의 아들인 연헌충을 살해하였고, 이후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무리들과 거란, 말갈병 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는 20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던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버려 그렇지 않아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고구려는 더이상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 졌다. 결국 668년에 당고종신라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4. 평가[편집]

4.1. 과거의 평가[편집]

사실 근대 즈음에 하여 연개소문이 '민족적 영웅'으로 재평가되기까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대역죄라는 프레임이 강하게 작용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은 왕을 제멋대로 갈아치우며 전횡을 일삼은 포악한 역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당시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그 능력에 관한 평가는 그렇게 박하지는 않고 요약하자면 '제법 대단한데 역적놈'정도 되겠다.

662년 당시 일본의 평가를 보자면 '신라에는 김유신, 백제에는 성충, 당나라에 위징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라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 황손의 언급이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연개소문 열전에는 송나라신종왕안석[41]와 함께 연개소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신종이 당 태종이 끝내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던 이유를 묻었는데, 이에 왕안석은 "개소문은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또한 당나라의 명장 이정(李靖)은 병사를 아는 연개소문의 면모를 소개하기도 한다. [42] 이를 보면 중국에서도 당나라의 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낸 연개소문의 능력을 꽤 높게 평가해준 듯하다. [43]

이를 두고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은 연개소문에 대하여 '재주는 뛰어나지만, 나라를 올바르게 받들지 못했고 성질이 더러워서 끝내 대역죄까지 저지른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일단 나라를 구한 공은 높이 쳐주었지만, 함부로 임금을 죽이고 오만하고 잔인한 행동을 한 데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깠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그나마 병들어 천수를 누리다 간 것도 반역자 치고는 운이 좋은 최후였다고 사론에 적기도 하였다.

특히 삼국유사에는 연개소문을 엄청나게 깠다. '고려고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사서를 인용하여, 수양제의 신하가 고구려를 멸망시켜 양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환생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전설을 실어 놓았을 정도. 또한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도입함으로써 고구려를 쇠망하게 만들었다는 기록까지 실어놓았다. 물론 이건 친불교적 관점에서 도교를 도입한 연개소문을 욕하는 내용의 설화이기는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책이 당시 고구려, 특히 불교계에 있어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다는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4]

한편 연개소문과는 별개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등은 그냥 대놓고 반역죄인이라고 까였던 것 같다. 김부식도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나라 말아먹은 것들이라고 대놓고 적어 놓았으니(...).

하지만 '안시성 하나로 천하의 대병을 당해내었다', '역적이지만 무적의 효웅, 당태종이 꼽은 천하의 7대 웅걸' 등의 이야기도 있는 것을 보면 수십년간 당나라와 맞선 능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안시성의 승리 역시 연개소문의 공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안시성만 믿고 그냥 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주필산 전투의 대군 말고도 고구려 각지의 병력을 규합해서 당군과 싸웠고 설연타 등과 연계하려는 등 이런저런 노력을 했으며 이후에도 당나라의 다양한 대고구려(對高句麗) 전략에 맞서 파해법을 내놓아 막아낸 것이 높게 평가받았을 것이다.

4.2. 현대의 평가[편집]

현대에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보다 복합적이다. 고구려 멸망에 주요한 책임이 있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반역을 저지르고 함부로 대신들을 해쳐서 나라의 기반을 무너뜨린 역적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당과의 외교에서 자주적이었으며 전쟁에서 끝내 이겨내 훌륭한 리더쉽을 가진 지도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편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구원하는 영웅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을 막아냈다는 긍정적인 점이 얽혀 이런 이미지가 조성되었다. 실제로 대륙을 통일한 직후인 당의 군사력을 버텨냈다는 점과 연개소문이 통치하는 고구려가 토해낸 물량은 고구려가 당시 무시할 수 없는 국가였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대전쟁을 지휘, 통제하는 연개소문의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영류왕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지만 대부분은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파로 영류왕은 어느정도 유능하지만 화친정책으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내어준 사람이라고 판단한다.[45]

4.3. 고구려 멸망의 책임[편집]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세아들과 각기 그들 밑에 분산된 귀족세력들의 대립으로 고구려는 자멸하고 말았다.유교적 교훈을 강조하는 삼국사기는 세아들이 아버지의 유언을 듣지않아 그렇게 된것처럼 적었다. 그러나 실제이유는 연개소문정권이 개혁정치를 해서가 아니라 사적권력의 기반을 강화하는데 주력했기때문이다.그렇게 되자 권력의 속성상 기득권층은 연개소문의 아들들 밑으로 줄서기를 했다.이런 경우 지배층중에서도 몰염치하고 이기적인 인문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권력운영도 상식을 벗어난다,이전의 권력배분 방식을 파괴했지만,새로운 질서도 세우지 못했기때문에 남은 질서는 보스정치와 승리한 집단이 모든것을 독식한 탐욕스러운 대결방식뿐이었다.그 결과 외침이 끊이지않는판에 고구려의 지배층은 무책임한 내란으로 치닫고 말았다.이것이 연개소문 정권이 역사에 남긴 유산이다.

임용한. 전쟁과 역사 1삼국편 中

그는 7세기 고구려는 한계 상황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명장,혁명가,정치가로 만족해야 했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권신의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솔한 것은 이점보다는 폐해가 많았다. 그의 라이벌로 지칭되는 이세민과 김춘추는 모두 일국의 왕이었다. 따라서 정적 제거나 권력 강화에서 연개소문은 이들보다 명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권력 강화는 무리한 독재권력, 세습정권의 폐해로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비정상적인 권력구조는 고구려 정치권의 비효율성으로 드러나기도 했다.(중략)그가 죽은 후에 빚어진 카리스마의 공백은 곧 고구려의 내분과 더 나아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가 권력을 다시 왕에게 돌려주었거나, 혹은 후계자 선정을 제대로 했더라면 고구려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었다. 후계자 선정에서의 잘못이란 문제 하나만으로도 연개소문은 고구려 멸망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연개소문은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중략) 당나라의 경우에서 보듯 비록 후계자가 자신보다 부족한 면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좌하는 정치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이 고구려가 실패한 더 큰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대단히 뛰어난 군사지휘자의 능력을 지녔지만, 국가의 총체적 국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활용해야 하는 국가 최고경영자의 능력 면에서는 여러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중략) 연개소문은 고구려 국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중간에 전쟁을 중지시킬 만큼 유연하지 못했다. 더욱이 상대인 당나라는 수나라와 달리 돌궐을 복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당의 용병으로 활용했으며,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은 설연타마저 멸망시켰으며,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힘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중략)무엇보다 연개소문이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에는 주변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주적인 당나라는 새롭게 성장하는 신흥 강대국이었다. 반면 고구려는 전성기를 지난 노쇠한 대국이었다. 성장 에너지란 측면에서 고구려는 당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중략) 전통귀족들이 여전히 권력의 한 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도는 낡았고, 혁신은 뒤늦었다.(중략)연개소문은 1차 고-당 전쟁과 2차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전투에만 승리했을 뿐 전쟁의 성과물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비록 위대한 전략가, 고구려의 위신을 드높인 영웅이라고 칭송될 수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한계를 지닌 지도자였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은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해, 고구려의 시대를 새롭게 열지는 못했던 것이다.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中

고구려를 말아먹은 책임이 흔히 그의 세 아들들 탓으로 간주되지만, 거대한 적 당나라를 상대함에 앞서 국가적으로 단합을 해도 겨우 막아낼까 말까 하는 상황에 내부에서 이렇게 분열해대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려 할애비라도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연개소문 본인이 집권했던 시기에는 어떻게든 본인의 능력으로 해나갔다 쳐도 미리 후계구도 처리를 제대로 못 해둬 고구려가 자멸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에게 고구려 멸망의 책임은 매우 크다 하겠다.

쿠데타로 집권하긴 했지만 유연한 대당외교를 펼쳤다.[46] 당과의 전쟁 시 당군 지휘관들이 워낙 먼치킨들이라서 준비한 방어선도 우회로 무용지물이 되고 비사성같은 천연의 요새에서는 기습공격에 패하는 등 줄창 깨져나갔다. 그러나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만을 시작해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에서 15만명, 명확히 알 수 없지만 667년 금산에서 20만명을 동원하는 등 이 전력을 백제와 신라에다가 들이 부었으면 과연 두 국가가 버틸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량을 들이부었을 정도로 국가통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47] 원한다면 백제처럼 면종복배, 구밀복검을 할 수 있는데도 너무 심하게 강경하게 나간 것도 문제였다. 특히 백제와 신라에 비해 막대한 물자와 군비를 생산하던 고구려였지만 당나라는 고구려보다 더 많은 물자와 군비를 지속적으로 생산할수 있었고 전쟁이 주로 고구려 영토안에서 벌어진 점 , 그리고 고구려의 필승법인 청야전술도 장기적으로는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그나마 앞에서 애기한대로 연개소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이를 커버하였지만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만한 지도자가 없었던 고구려는 멸망하고 만다.

5. 그 외에[편집]

  • 연개소문이 평소에 차고 다녔다는 5자루의 칼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허나 중국 쪽의 기록에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나 칼을 5자루씩 가지고 다닌다는 기록도 있다. 혹은 이것이 사냥용, 가죽 다듬기용 등의 크고 작은 칼을 차고 다닌 것이 와전된 것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실제로 환두대도에는 큰 칼과 작은 칼 6개가 붙어 있는 유물도 있다.[48]
  • 중국 경극에서는 연개소문이 비도술(飛刀術)에 능통한 것으로 묘사된다. 중국의 민간 설화에서는 칼이 5자루가 아닌 7자루로 묘사되며, 이것으로 당태종을 뒤쫓다 설인귀가 창으로 이것을 막아내어 연개소문의 추격을 막아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한편, 스펀지에서는 중국의 유명한 경극(중국 전통무용)중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내용이 있다고 해서 화제를 모았다. 그것도 상당히 비중있는 역할로 꽤나 용맹스럽고 카리스마 있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경극 팬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과 고구려 사람인 것까지 알고 있다고 할 정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의 힘을 가진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패퇴시키고 뒤쫓지만, 최후에는 당 태종을 구하러온 설인귀와 싸우다 패하는 내용으로 끝난다.[49]
  • 중국 옛 무협지에 나오는 규염이라는 남자[50]가 연개소문이라는 애기도 상당수 있다. 만화 천랑열전과 해당 작품의 설정상의 인물인 규염 역시 거기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

6. 대중 매체에서의 모습[편집]

비도술을 시전하는 천개소문

사실 유명세에 비해 관련 기록도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있는 기록마저 생전 자신의 적들이었던 당나라와 신라의 기록이기에 부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나오나 고구려 말기를 다루는 만화소설 등에 왠지 자주 나오는 인물로, 대개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온다.

본래 정변 당시 30을 전후한 나이로 추정됨에도 김유신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 위해 같은 또래로 만들거나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는 노회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그럼 경대승은? 대중매체에서는 항상 중년 내지 노년으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스펀지에서 비도술과 엮이어 등장해주셨다.

중국 드라마 설인귀전기에서는 철세문이라는 적 최종보스로 나오는데 모티브는 연개소문이 거의 확실하다.[51] 왕을 협박하고 실권을 찬탈한 악역으로 나오지만 그 카리스마는 엄청나게 나오고 오히려 적인 당태종 이세민이 찌질하고 권력욕에 찌든 음흉한 황제로 나온다.[52] 물론 드라마의 주인공은 설인귀인만큼, 그에게는 발리지만 일단 설인귀를 제외하면 개인적 무력 같은 것도 작중 최강 레벨이다.[53]

6.1. 삼한지[편집]

삼국시대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인 김정산의 삼한지에서도 등장하는데 용맹하고 호탕하며 의기로운 모습과 잔인하고 포악하며 적에게는 인정사정없는 모습을 모두 드러내며 이중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다만 행적에는 문제가 많은 편인데 실제 역사와 다른 면이 많다. 아직 어린 시절에 여수전쟁 이후 정계에서 축출당한 을지문덕을 스승으로 삼아 중국을 여행하고 심지어는 훗날 당태종이 되는 이세민, 그리고 당시 당나라에 와있었던 김춘추 등과 사귀어 호형호제 할정도로 친해진다(...).[54] 훗날 고구려에 귀국해서는 을지문덕의 양자인 을지유자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작가가 창작하여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꽤 많다.

이후 당나라에 굽신거리는 영류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중에 아버지 연태조가 사망해 그 뒤를 이어 동부대인이 된 이후로 나라를 갈아 엎을 계획을 세워 결국 영류왕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다. 영류왕을 죽인 직후의 묘사가 실로 압권이라 할 수 있는데, 다음 후계자로 영류왕의 동생인 대양의 아들 장을 낙점하고는 곧바로 대양의 집으로 달려가 "왕이 죽고 없는 지금 아무나 빈 궁궐에 입성하면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어찌 왕좌를 탐내겠습니까."라며 장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비는 장면은 작중 연개소문의 이중성을 극단적으로 나타낸다.[55]

이후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태종과 싸우게 되었는데 주필산에서 고연수가 15만 대군을 날려먹은 소식을 듣고도 별로 신경쓰지 않다가 당태종이 안시성주에게 패하여 물러날 때를 노려 퇴로를 막아서고 당태종과 대면한다. 이때 당태종을 '형님'이라 부르면서도 부드럽게 협박하는 장면이 일품(...). 그러나 당태종이 죽고 나서도 당나라가 반드시 복수하려 할 것이라 생각하여 당태종을 죽이지 않고 놓아 보낸다.

작중에는 키가 작은 추남으로 묘사되는데, 얼마나 키가 작은지 특유의 덥수룩한 수염이 없으면 다들 어린아이로 착각할 정도라고 묘사해놓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신기에 가까운 무술 실력과 지략을 지니고 있는데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태종을 농락하는 모습도 보여주며 작중 주인공이자 먼치킨에 가까운 실력을 자랑하는 김유신마저도 겁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분량 문제도 있고 하다보니 그리 등장이 많지 않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며 고구려를 침략해온 당태종을 무찌르는 6~7권 까지는 거의 주인공 행세를 하지만 이후로 등장도 거의 없이 간간히 얼굴만 비추다가 9권에서 그냥 늙어 죽는다(..).

6.2. 삼국기[편집]

KBS 사극삼국기에서는 중견 배우 조경환이 연기하였다. 사실상 최로로 영상물에 재현된 연개소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작중에는 호탕하면서도 잔인한 이중적인 모습으로 그려닌다.

조경환의 하차로 중간에 배역이 변경되었다. 그야말로 드라마 사상 초유의 사태(...). 결국 연개소문은 이전에 죽고 그의 카게무샤가 활동한다는 실로 어설픈 전개로 이어졌다.

6.3. 연개소문[편집]


나무파일:external/thumb.mtstarnews.com/2006060717064440984_1.jpg

청년기는 이태곤, 중-장년기는 유동근이 열연하였다. 드라마의 분위기 자체가 미화를 넘어서서 거의 신격화(...)하는 수준으로 연개소문을 띄워준다. 다만 연개소문의 청년기의 기록은 부실하기 때문에 상당부분은 창작으로 메꿨는데, 연개소문이 청년기에 수나라를 돌아다닌다는 꽤 황당한 설정이었다. 수나라를 돌아다니며 당태종 이세민이랑 친구 먹기도(...) 하는등 활약하긴 하였지만 아무래도 창작만으론 한계가 있어서인지 청년기엔 수양제 쪽 비중이 더 높다. 페이크 주인공인셈. 후반기엔 유동근이 나오면서 좀 달라지긴 했지만 역시 당나라의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 연개소문을 신격화 혹은 메리수급 먼치킨으로 다루다보니 정작 연개소문의 인간적인 면모는 잘 다루지 못하였다. 게다가 드라마 자체가 워낙 병맛이라 유동근 특유의 중후함과 카리스마도 빛을 많이 잃었다는 평. 특히 비도술로 쓰리쿠션을 날리지 않나, 설인귀가 쏜 화살을 연개소문이 단검을 던져 막아내는 실로 황당무계한 장면이 유명하다(...).[56] 게다가 고증은 완전히 무시하고 연개소문이 고구려가 멸망할 때 까지 살아있는 것 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죽는 장면에서는 삼족오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다. 이쯤되면 사극이 아닌 판타지 드라마 수준.

6.4. 대조영[편집]

나무파일:external/images.sportskhan.net/6a1183a-center.jpg

드라마 연개소문과 비슷한 시기에 KBS에서 방영하였던 사극 대조영에서는 김진태가 분하였다. 1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전멸시키면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는데 천하의 당태종마저 겁을 먹고 급하게 후퇴를 할 정도였다. 대체적으로 호탕하고 그릇이 넓은 호걸로 묘사되긴 하지만, 한편으로 독선적인 독재자의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다[57] 말년에 이르러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2차 고당전쟁 당시 설인귀에게 부상을 당한 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고선 무작정 당나라를 정벌할려는 계획을 세운다. 작중 설정상 몇년간 가뭄이든데다, 최 전선인 요동은 방어병력이 부족한 마당에 다짜고짜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다고 하니, 원래부터 연개소문에 적대적인 5부가의 대신들은 물론, 심지어 연개소문의 부하들마저도 연개소문의 의견에 반대할 정도. 이때 연개소문은 막나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연개소문에 우호적인 양만춘 및 요동세력이 정벌에 반대하자 다짜고짜 요동세력을 적으로 규정해 버릴 정도였다. 이러한 갈등은 대조영의 진심어린 설득으로 간신히 끝났으나, 이 정벌 계획으로 인한 갈등요소는 연개소문 사후에도 남았고, 이후 갈등 전개의 요소중 하나가 되었다.

호탕하면서도 교활한 모습으로 묘사되며, 처음에는 대중상의 아들에게 왕의 상이 있다고 죽이려 하지만 양만춘의 설득으로 죽이진 않고 노비로 삼아 자기가 키운다.[58] 초기에는 대조영을 끊임없이 견제하지만 점점 마음을 열면서 끝내는 조력자가 된다. 작중에서 대조영은 특유의 연기본능을 십분 발휘하여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아버지" 타령으로 친아들마저 버림받게 한다. 죽기 전에는 자식 연남생보다 대조영을 총애하고, "누가 뭐래도 난 네 아비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대중상[59]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며 심지어는 최종화까지 나온다. 뭐 어쨌든 배우의 연기에 이중적인 캐릭터성에 힘입어 설인귀, 양만춘과 함께 극 초반의 시청률을 책임졌다. 결국에는 설인귀가 쏜 화살에 맞아 중병에 걸렸으나 이를 끝까지 숨기다가 결국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담으로 극중에서는 어째선지 대막리지가 아니라 합하라고 불린다.

거친 성격이지만 의외로 자식교육에 있어선 따스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편. 대조영(개동이)를 철저히 종놈으로 키우고자 했으나 한편으로 개동이를 은근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 개동이가 식사를 거부하자 직접 개동이에게 밥을 떠 먹여줄 정도. 장남인 연남생이 2차 고당전쟁당시 전투에 패하자 처음엔 연남생을 역적이라고 칭하며 극노한 모습을 보였으나, 고당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후 나중에 연남생이 돌아오자 연남생을 꾸짖기보다는 이를 교훈으로 삼으라며 연남생을 다독거린다. 연남생 말로는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했을때 따끔하게 혼을 낸뒤, 따스하게 다독거렸다고 한다.

연개소문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초반부의 주역인 만큼, 등장기간 자체는 그리 길지는 못하다. 하지만 연개소문(드라마)의 연개소문에 비하면 어느정도 균형잡힌 캐릭터성에, 김진태의 명연기가 더해진 결과, 오히려 유동근의 연개소문보다도 더 낫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덕분에 배우 김진태는 연말 연기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6.5. 황산벌[편집]

영화 황산벌에서는 이원종이 역할을 맡아 인트로에서 구수한 서북 방언으로 연기했다. 여기서 당나라한테 개기는 역할로 나오면서
보라우. 니 아바디 당태종이가 형제들 처죽이고 황제된 것도 하늘이 정해준 질서네?(…) (김춘추가 정권의 철학적 정통성을 거론하자) 정통성? 기래. 내레 쿠데타 일으켜서 정권잡았다. 와? 김춘추 너레 반쪽자리 왕족 주제[60]김유신이랑 짝짜꿍해서리 정권잡디 않았서? 의자왕, 니 아바이도 서자디?[61] 여기 정통성 있는 놈이래 누구래 있어야?! 전쟁은 정통성 없는 것들이, 정통성 세울려고 하는 기라야!

라는 나름 명대사를 남기기도 했다.이후 황산벌의 후속편격인 평양성의 앞부분에 짤막히 등장해,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며 사망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6.6. 대왕의 꿈[편집]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F%AC%B0%B3%BC%D2%B9%AE_%C3%D6%B5%BF%C1%D8.jpg
배우 최동준이 맡아 연기했다. 역사서 중 정사의 기록들인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등을 보면 연개소문의 성격과 외모에 대해 성격은 '거칠고 잔인하면서도 동시에 용맹스럽고 호탕하며 대범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외모에 대해서는 '얼굴이 잘생겼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수염이 아름답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동준이 맡은 연개소문은 역덕후들에게 역대 연개소문 배역중에서도 가장 역사적기록에 근접한 외모와 인상과 느낌을 잘 묘사주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최동준은 전작인 광개토태왕에서 고구려 왕실의 전복을 획책했던 악역인 국상 개연수 역을 맡았다가 본작에서 연개소문으로 환생복귀함으로써 드디어 수세기만에 꿈☆을 이루게 됐다(사실 그는 무인시대에서도 반역자 조위총 역이었다). 더욱이 서동요에서 그의 배역은 다름아닌 진평왕이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기 직전 당시 국제 정세를 설명하는 나레이션에서 정변을 일으키고 철퇴로 영류왕을 쳐죽이는 장면이 나왔으며, 이후 고구려의 대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총괄한다.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2076715.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2080194.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2081403.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2097597.jpg

그 후,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기 위해 사신으로 온 김춘추를 시험해 보기 위해 처음에 칼을 들고 협박했으나 쫄지 않는 김춘추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며 회담을 가지게 된다.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3070855.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3077375.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7_%C8%AD-High.MP4_003108712.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38_%C8%AD-High.MP4_000210397.jpg

그러나 김춘추와의 합의점을 찾지는 못하고 회담 결렬. 이후 당을 끌어들이려는 김춘추의 움직임을 포착하고는 김춘추에게 크게 실망해서 그를 제거하기 위해 계속 움직인다. 김춘추가 즉위한 후 김유신이 김춘추의 친당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노리고 김춘추와 김유신의 사이를 갈라 놓기 위해 계책을 꾸민다.

일단은 드라마 중후반의 보스 포지션인데, 작중에서 고구려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등장이 많지는 않다. 가끔 보장왕과 함께 있으면서 국제정세와 함께 고구려의 대응책을 논의하는 정도.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55_%C8%AD-High.MP4_001283351.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55_%C8%AD-High.MP4_001292289.jpg

여타 매체에서 무인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지만 여기서는 고구려의 실권자답게 정치인으로서의 묘사를 더 중시했다.

실제로는 보장왕과의 관계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보장왕이 연개소문을 많이 의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55_%C8%AD-High.MP4_001342462.jpg

나무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4%EB%BF%D5%C0%C7_%B2%DE_55_%C8%AD-High.MP4_001363631.jpg

6.7. 칼과 꽃[편집]


나무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600710_STD.jpg
나무파일:external/www.sisapress.com/64311_80292_5027.jpg
나무파일:external/pds.joins.com/201307251607222510_1.jpg

최민수가 연기한다. 대부분의 고구려 사극이 연개소문을 영웅처럼 묘사하는거에 반해 이 드라마는 악역같은 느낌이 든다.[62]최민수 본인이 분장을 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기른 머리와 수염(덤으로 화장도 안한 생얼)으로 출연해서인지 카리스마 넘치는 연개소문이 나왔는데, 심지어 연개소문이 주인공인 위의 드라마보다도 포스가 넘친다. 드라마의 미장센이 워낙 독특하고 대사가 적다(...)마는 이것이 도리어 그의 눈빛 연기를 부각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사실 말 많은 악당 캐릭터가 도리어 카리스마를 해치게 되니 오히려 입체적인 악역 포스엔 과묵한 설정이 더 어울렸다. 거기에 더불어 역대 최고의 카리스마 있는 영류왕을 연기한 김영철과 함께 뒤통수를 치고 받는 정쟁을 벌이는 모습이 극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로 평가되었다. 가만, 주인공은 이 사람들이 아닌데? 특히 영류왕을 직접 찔러 죽이고 나서 피를 뒤집어쓰고 드러나는 광기에 찬 눈빛은 그 어느 연개소문보다도 연개소문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백미.

6.8. 천랑열전[편집]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언급만 된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연개소문인게 확실한게 아니라, 정황상 연개소문으로 '추정'된다. 주인공인 연오랑의 스승이라고 언급되며, '사신무'의 창시자'라고 나온다. 자세한 설명은 규염 항목 참고.

6.9. 영걸전 시리즈[편집]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고대 무장 데이터가 존재함이 확인되었다. 병종은 중기병.

[1] 맨 앞에 있는 연도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기술한 것, 삼국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614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대 이 설에 부정적인 쪽에선 기록 자체에 허구성이 짙기 때문에 믿기 힘들다고 한다. 신채호조선상고사를 인용해 601년이라 주장했지만 어떤 근거를 두고 이렇게 주장한 것인지 상고하기 힘들기 때문에 실제로 믿기는 힘들다. 일단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던 642년 당시에 맏아들 연남생의 나이가 불과 9세 정도였으므로 삼국유사 쪽의 기록이 좀 더 신뢰가 간다.[2] 연개소문의 사망년도에 대한 기록으로는 구당서,신당서 및 삼국사기의 666년 6월 사망기록과 일본서기의 664년 사망기록이 있다.[3] 성이 '연개(淵蓋)'씨가 아니라 '연(淵)'씨다. 후술할 아들들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4] 혹은 서부 대인이라고도 한다.[5] "善化公主主隱"을 "선화공주님은"이라고 읽는 통일 신라의 향찰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6]삼국사기》에서 이걸 생각 없이 따라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전형적인 복사 붙여 넣기의 폐해(...).[7] 신채호는 '갓쉰둥전'의 갓쉰둥이 바로 연개소문이며, 그 부친 연태조가 50세에 낳아 '갓쉰둥'이라고 부른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근거가 부족하기에 정설로 평가받지는 못한다.[8] 다만 연남생 등 당나라에 들어간 아들들은 당고조 이연의 이름을 피휘하여 천(泉)을 성씨로 삼았을 것이므로, 개명(개성)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9] 다만 淵(연)과 가까운 뜻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의미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어서 일종의 훈독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냥 단순한 훈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0] 으리 혹은 이리. 연개소문이라는 이름에 쓸 때는 이리.[11] 蓋蘇文을 따르면 가소문이라 읽을 수도 있고, 柯須彌를 따르면 가스미, 가수미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아래 아 같은 사라진 발음까지 합쳐서 추정하면 더더욱 미궁에 빠진다.[12] 충남 방언에서 '은하수'를 '이리내'로 부르는 데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겠으나, 이는 제주 방언형인 '미리내(미르(용)+내)'와의 연관선상에서 볼 수도 있는지라 역시 진실은 저 너머에.[13] 霍光의 고사가 있을 것 같으나 未詳.[14] 군주의 大權?[15] 군주의 영화를 의미?, 典故 未詳.[16] 바탕[17] 실은 막리지 직위가 아닌 대대로 직위를 역임했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대대로 벼슬을 지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18] 대표적으로 고구려 귀족인 고자와 모두루의 묘비를 보면 "우리 조상님은 주몽님하고 같이 북쪽에서 내려왔구염, 우리 선조님이 광개토대왕님 때 후연하고 존나 잘 싸우셔서 우리 집안을 일으킨 덕분에 우리 집안이 잘 나감요"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19] 연씨 가문 유민들의 묘비명에는 막리지로 나와있다.[20] 그러나 연개소문의 직책이 동부대인이 아닌 서부대인이라는 기록도 있다.[21] 고구려본기에는 이렇게 기록이 간략하지만 삼국사기의 개소문열전과 구당서, 신당서 등에 보다 상세한 기록이 있다.[22] 현재의 오사카시에 위치한 난바(難波) 인근을 의미한다.[23] 영류왕의 동생이자 보장왕의 아버지인 고태양[24] 정확히 어느 성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추정된다.[25] SBS에서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방영한 연개소문(드라마)에선 나레이션에서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것이 연개소문에 대해 원한이 많아서 연개소문을 악하게 묘사하려는 중국기록의 왜곡이라고 본다고 나오고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는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함께 구하기위해 뜻을 함께하려했지만 영류왕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연개소문에게 고구려를 부탁한다며 자살하는걸로 나온다. 때문에 연개소문에 대한 미화가 너무 지나치다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26] 그런데 이 기록도 골 때리는게, 연개소문은 일본서기에 이리가수미로 기록되어 있다. 직관적으로 봐도 도수류금류보다 이리거세사쪽이 연개소문과 동성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을 도수류금류와 이리거세사를 반대로 오기한거라는 학설도 있지만, 연씨 가문 내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거나 동성(同性)을 같은 부(部) 소속의 인물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고대 일본에서는 性과 氏를 분리해서 구분했다.) 해석이 확립되어 있지는 않다.[27] 연개소문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이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귀족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고구려의 군사,행정,정치,법,농사,외교를 담당한 엘리트들로 이들을 학살하면서 고구려의 국력이 약해졌다고 보는 역사학자도 있다.[28] 다만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대왕의 꿈이나 칼과 꽃 등에서는 이 설을 바탕으로 한 내용전개가 펼쳐진다.[29] 특히 S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연개소문(드라마)나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 등에서는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30] 막리지는 1. 제일 높은 관직인 대대로와 같은 관직이라는 설 2.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태대형과 같은 관직이라는 설 3. 연개소문의 정변 이후 신설된 관직이라는 설이 있다.[31] 대조영 이 어린시절 연개소문 이 말을 탈때 달려와 엎드리는 묘사 도 드라마 에 있다. 다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실제로 대조영 일 가능성은 없다.[32] 연개소문이 죽인 중앙 귀족들 중에는 지방과의 커넥션을 가진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33] 훗날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의 공격을 막아낸 무시무시한 우주방어력으로 희대의 먼치킨 당태종까지 막아내는 위엄을 선보인다(...).[34] 해당기록에는 연개소문을 태대대로 개금이라 표기하였다.[35]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궁가와 같은 이야기이다.[36] 세간에는 연개소문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김춘추를 가둔 것은 보장왕이고,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것은 신원미상의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연개소문이 실권자인 상황에서 보장왕이 마음대로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딱히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일려고 했다는 것은 증거가 없는 셈.[37] 지도만 보면 한강쪽은 신라땅에 가로막히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당시 신라는 아주 위급했고 뭣보다 자원 공급 쪽으로 가면 신라보다 백제쪽이 훨씬 빠르고 수월했다.[38] 사실 이말대로라면 둘중 택하라면 백제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 맞았다.만약 신라와 손을 잡았다면 백제와 당의 손에 신라나 고구려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39] 또한 연개소문이 죽령 서북 땅이란 무리한 요구 또한 납득이 되는데 완곡히 신라와 결렬하는 이유로도 충분하고 만에 하나지만 수락이 되어 백제와 척이 진다 해도 이정도의 땅을 가진다면 당이 수로를 통해 오는 것도 어느정도 대처 가능한 이점을 가질수 있기 때문이다.그래도 득보단 손해가 많으니 거절할걸 노려 요구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40] 실제로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유기에서는 도교의 도사들을 극악한 무리인 양 묘사한다.[41] 삼국사기에서는 '왕개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였다.[42] 이는 당 태종과 이정의 군사학 토론에서 유래한 병법서인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의 내용이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병법을 아는 것을 믿고 토벌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내게 3만 군사를 주면 그를 사로잡겠다.'라는 것인데 전체적으로는 스스로와 이세민을 띄우는 발언이지만 병법가로서 연개소문의 면모를 파편적으로나마 드러내주는 대목[43] 당태종과 관련된 민담과 소설에선 거의 최종보스급의 위엄을 자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설인귀가 주인공인 설인귀정사략. 심지어 강소성에까지 그런 형태의 연개소문 전설이 있다고 한다.[44] 연개소문의 이러한 시도는 도교를 수용해서 기존의 불교를 견제하거나 억압하려 한 의도였다고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고구려 승려들이 고구려를 이탈한다.[45] 연개소문 드라마에서도 그런 식으로 나왔다.[46] 집권 초기 연개소문은 당나라에서 도교를 받아들이는 당나라에게 온건적이었다. 물론 이는 안시성으로 대표되는 세력들이 연개소문의 부정적인 것과 한몫 했을 것 이다.[47] 고구려의 경우 농업기술이 중국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고 주요 곡물 생산지대가 송화강유역, 두만강유역, 함흥평야, 요동평야, 대동강유역, 황해도의 6곳이기 때문에 저 물량이 터져나올 수 있었다,[48]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었기는 하지만 여하튼 많은 칼이 위엄과 관계된 문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49] 연개소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 설인귀에게 패한 것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사실 경극을 만든 중국인들이 그들이 존경하는 당태종이나 설인귀를 미화했으면 미화했지 연개소문을 미화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지만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50] 규염객전과 그 주인공을 의미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규염객전이 사실상 최초의 무협지라는 것은 차처하고, 내용상 규염객이 당의 건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런 설정이 2번 항목의 드라마에 영향을 준 듯하다.[51] 국제적 분쟁을 회피하려는 의도인지, 적국도 고구려가 아닌 '발요'라는 가상의 국가로 나온다.[52] 당장 철세문의 입으로 이세민의 골육상잔 흑역사인 현무문의 변을 까기도 하고, 발요 원정이 끝나자 공신들을 홀대하는 바람에 울지경덕이 사석에서 "폐하는 천하가 평정되자 우리 공신들을 버리셨다."고 불평, 이세적은 "너 간덩이가 부었냐?"며 사색이 되어서 말린다. 심지어 태자에게 후사를 맡길 때 공신들에 대한 경계와 견제를 대놓고 밝힌다.[53] 원작 소설의 경우, 안전보라는 장수가 연개소문보다도 더 강하다는 설정인데, 드라마에서는 철세문에게 발린다.[54] 그래서 7권에서 고구려에 쳐들어온 당태종과 만나서는 '형님'이라 부른다.[55] 작중 대양도 연개소문의 말을 듣고는 "이 자는 대체 충신인가, 역신인가.."라며 혼란스러워 한다.[56] 일명 '만렙 연개소문', '고구려의 뮤탈리스크'라고 부른다.[57] 자신에게 반하는 남부 욕살 부기원을 궁궐의 전각을 잇는 한 통로에 데려와서는 내게 칼 맞은 영류왕이 피를 흘리며 이 길로 도망쳤다, 그 때 내 손에 죽은 신하가 수백이다.며 제대로 협박을 하는데 그 포스가 후덜덜하다. 마지막 대사는 "나이를 먹고 힘만 없어지는 게 아니야. '참을 인'자도 없어졌어."인데 그야말로 소름 돋는다.[58] 주로 쓰는 용도는 말 탈때 발 받침대...[59] 당나라 사서 중엔 '걸걸중상'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것이 있다는데(그 사서가 극 중에 등장했다.) 어차피 그 '걸걸'이 '크다.'라는 뜻이라고 해서 대중상이라고 부르는 것. 실제로 사극 대조영에서 그 사서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걸걸중상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대중상이라고 읽었다. 하긴 이건 그 드라마에서 해당 인물의 이름을 대중상으로 쓰고 있으니까 그런 거긴 한데.[60] 성골 출신이 아닌 진골 출신 왕.[61] 무왕의 출신이 불확실한 것을 반영한 대사인 듯.[62] 고당전쟁이 나오는 드라마 중에서 당나라와의 전쟁을 달갑게 보지 않는 몇 안 되는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