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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熱河日記

1. 개요2. 내용3. 번역4. 여담
4.1. 윤가전의 문자옥
5. 구성6. 바깥고리

1. 개요[편집]

정조 4년(1780) 연암 박지원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온 일을 적은 여행기. 사실 당시 박지원은 공식적인 벼슬이 없는 평범한 선비였다. 그럼에도 박지원이 사절단으로 갈 수 있던 것은 당시 사절단의 수장인 정사가 삼종형(8촌 지간)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1]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 군관(일종의 개인 수행원)[2] 자격으로 사절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본디 목적지는 연경(燕京)[3]이었으나 당시 건륭제가 열하[4]피서 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열하까지 여정이 계속되었다. 여름의 베이징은 너무 덥기 때문에[5] 장성 너머 북쪽에 황제 전용 여름 별장인 피서 산장이 있다. 실제로 가보면 상당히 크고 아름답다. 베이징의 자금성이 웅장하다면, 피서 산장 역시 중국 스케일이기 때문에 크긴 한데 나름 정원과 나무에 아기자기한 면이 있고 궁전보다는 이화원의 느낌에 가깝다. 현대에도 현지 중국인들이 여름에 많이 와서 노닐고 있다. 허베이성 북부의 지급시인 청더에 남아있는 그 이궁과 티베트 불교 사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황제를 따라 열하까지 간 덕에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여졌다. 조선 사신단은 건륭제가 연경에 없다는 소식을 듣자 그냥 연경에서 구색만 맞추다 돌아가려 했지만 아직 조선 사신은 한 명도 가본 적이 없다는 말에 결국 열하까지 갔고, 일정이 촉박해 상당히 하드코어한 여행을 하게 된다. 이 때의 고생은 박지원의 산문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6]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7]에 생생하게 실려 있다.

박지원이 직접 집필한 초고본은 행계잡록(杏溪雜錄)을 비롯한 문집으로 되어 있으며, 이 초고본은 단국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외의 필사본과 근대 이후의 인쇄본 등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열하일기는 생전에 출간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하다가 1932년에야 연암집으로 활자화 되었다. 초고본부터 문체반정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로 너무 적나라한 표현등은 삭제되거나 표현을 달리하였고 지동설이나 천주교에 관한 언급은 문단째 삭제되었다가 나중에 나온 필사본에는 다시 복원되기도 하고 필사가에 따라 원문에 없는 명에 대한 극존칭을 더하거나 문체를 제각각으로 바꾸는 등 정본이 없어 아쉬운점이 있다.

2. 내용[편집]


내용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해학적이고 재미있는 묘사가 많다. 야간에 숙소에서 나가는 게 금지된 상황에서 하인에게 "나 찾으면 뒷간 갔다고 말해라!!"고 시킨 뒤에 밤새도록 놀다 새벽에야 돌아오는 장면(성경잡지 7월 11일),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 타짜(도강록 7월 2일), 사신단이 아래에 언급할 판첸 라마의 접견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일이 꼬이면 귀양가겠는데... 잘 됐다! 귀양 가면 중국 여기저기 구경하겠네!' 같은 생각을 하는 등(태학유관록 8월 10일), 여러모로 웃기는 구절이 많다.

길을 가다가 본 가게들의 간판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친분을 쌓은 다른 상인들의 휘호에 그 문구를 써줬다가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 박지원이 본 문구는 기상새설(欺霜賽雪, 직역하면 '서리와도 같고 눈보다 더 희다')로, 박지원은 이를 보고 '마음이 깨끗하여 서리같고 눈보다 더 희다'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진짜 뜻은 '눈처럼 하얀 국수'이었다. 조선에서 온 문인이 그럴듯한 글을 하나 써준다기에 기대를 했는데 정작 써준 글이라는 게 국수집 간판이었으니 청나라 상인들이 이상하게 여긴 것도 당연하다.

또 말을 타고 가는 도중에 졸다 깨고는 그 사이 하인이 낙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음번에 신기한 게 보이면 주저하지 말고 나를 깨우라"고 채근 징징대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성경잡지 7월 12일), 심지어는 박지원이 어느 주점에 들어갔다가, 현대로 치면 조폭들이 자주 드나드는 엄한(?) 곳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 처음 나온 작은 술잔을 치워 버리곤 큰 그릇에 담긴 독주를 그대로 원샷하는 호기를 부렸다. 그러자 주점에 있던 사내들이 "어이쿠 어르신!!" 하며 술을 대접하고 설설 기는 장면도 있다.(태학유관록 8월 11일) 원문에서는 "술집에 몽골인과 회회인(위구르계로 추정) 패거리들이 앉아 있었다. 오랑캐들의 모습이 더럽고 사나워 주점에 올라온 것을 후회했으나, 이미 술을 시킨 뒤라 그냥 앉았다"라고 나온다. 중원판 이태원동? 박지원 항목에 나와 있는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박지원은 거구에 부리부리한 눈 등으로 딱 봐도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들이 일삼던 험한 음주풍토가 북방 유목민족들에게는 사내의 호방함과 건강함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했으니까 설설 기는 게 이해될 법하다. 게다가 하필 당시 조선의 임금부터 맥주 피쳐에 증류식 소주를 가득 붓고 원샷하라고 강요해댄걸로 악명높은 정조였으니. 물론 박지원도 속으론 꽤 겁을 냈다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중국술에 대한 체험담도 있다. 독한 것 같지만 마시고 일어서면 모두 깬다고..

박지원의 실학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명작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벌레가 우글거릴 수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청나라의 경우 일반 백성도 벽돌로 2층 집을 지어 튼튼해서 문만 닫으면 금고가 되어 도둑도 방지한다는 감탄이 있다. 당시 박지원이 받았을 컬쳐쇼크를 엿볼 수 있다. 대부분 청나라의 좋은 점을 들면서 아직도 상공업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모습을 비판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의 우수한 기술도 이어받지 못하여 결함투성이로 전락한 조선 후기 온돌의 현실을 지적하고, 이로 인한 낭비와 비합리성을 대차게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실용적 학문과 기술의 연구에 소홀했던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도 자신들을 명나라의 후계로 자처하며 실학을 멸시하고 북벌론이라는 허상에 빠져 있는 당시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부분이 많다. 특히 관내정사나 이제묘기(夷齊廟記)[8] 등에서 이러한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조선 뿐만 아니라 한족 여성들의 전족 같은 불합리한 풍습과, 청나라에 대한 아부로 점철된 한족 지식인들의 현실 역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호질>에서 범[9]과 그에 아첨하는 선비 북곽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조선의 소중화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중화주의의 허상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오랑캐이며 되려 중화에 비판적인 내용인 것.

또한 전체적으로 한족보다 만주족에 호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다. 예를 들면 사기나 뒤통수를 치는 건 대부분 한족이라든가, 그 외에 청나라인들조차도 되놈이란 단어를 알고 있었다는 장면도 있다. 청나라 사람이 스스로를 "'도이노음'이요(擣伊鹵音爾么)"라고 소개하는데, 이건 "되놈"을 한자로 음차한 것.

한편으로는 한족 관료들과 만주족 정부 인물들에 대한 알력도 다루고 있는데, 한족 대신들이 만주족 관료들을 욕하는 모습도 상세히 그려놓았다.

박지원의 코끼리 구경[10]이나 마술 관람 등도 재미있는 부분. 데이빗 커퍼필드 귀싸대기를 날릴 마술들 20개가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는 티베트법황(판첸 라마)을 만난 이야기까지 실려 있다. 당시 건륭제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는데, 조선 사신단을 기쁘게 맞이한 건륭제는 조선 사신단에게 법황을 소개해 주었다. 법황은 달라이 라마 바로 아래 지위인 판첸 라마만주어로는 판천 어르더니(班禪 額爾德尼, pancen erdeni)[11]라고 하였다. 작중에서는 주로 '활불(活佛, 살아있는 부처)'이라고 표현된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활불은 조선 사신단을 만나보고 불상 등 여러 선물을 주었는데, 사신(문관)들은 더럽다고(...) 역관에게 준다. 그러나 역관들도 역시 이것을 쓸 수 없다며, 팔아서 은 70냥을 만들어 마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불상 개불쌍. 그러나 마부들조차도 '이것으론 술 한잔 사 마실 수 없다'(...)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오래된 숭유억불 정책이 어떤 식으로 고착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처음엔 활불과의 면담 자체도 어떻게 천한 중놈과 만날 수 있냐며 고집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황상께서 열받으시면 큰일난다"는 판단에 형식적으로 만난 것. 또한 황제 및 법황에게 절을 해야할 순서가 오자, 조선 사신단은 숭유억불에 대해 말하면서 법황에게 절을 못하겠다고 버틴다. 여기에 빡친 건륭제는 수도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조선 사신단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는다. 눈치껏 좀 행동하지.

박지원조차도 여기엔 "우리 나라에선 원래 선비로서 불교와 한번 인연이 있고 보면 평생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 장하긴 하지." 그런데 너 활불이 황제한테 이르면 어쩔래? 라고 했다. 조선의 숭유 억불 사상은 이 정도로 심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하자면, 여기서 판첸 라마에게 절을 했다는 것이 조선에 알려지면 유생들 사이에서 '얼레리꼴레리~ 아무개는~ 중놈에게~ 절했대요~!' 라는 소문이 나면서 탄핵당해 벼슬길이 끊어지고 심하면 파직당하고 유생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되어 매장당하기까지 할 수도 있다는 것. 말하자면, 눈치가 없어서 건륭제 비위를 거스른 것이 아니라 조선 내에서의 입장과 건륭제에 대한 입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 거스르지 않기 위해, 즉 건륭제가 노골적으로 화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교와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눈치를 본 것이다.

법황이 선물한 불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은데, 조선에 그대로 가져가면 유생들에게 비난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청나라 황제가 존대하는 자가 준 선물을 함부로 다루면 황제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모르니 사신단이 알아서 몰래 처리한 모양이다. 열하일기에 직접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전통적(...)으로 쓰던 방법은, 조선 땅도 아니요 청나라 땅도 아닌 국경 압록강에다가 몰래몰래 띄워서 버렸다고.

그런데 일성록에는 정조와 박명원이 사행길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황제가 줬다는 불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정조가 불상의 처분에 대해 묻자, 박명원은 "평안북도 영변의 모 절에 봉안했다"고 답한다. 이 불상이 판첸 라마가 선물로 준 그 불상인지, 아니면 판첸 라마의 것과는 별도로 건륭제가 따로 하사한 불상인지는 불분명하다.

박지원은 여기서 중국 인사들과 만나 며칠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필담으로. 음악, 예절, 역사, 문헌고증, 시문, 과학[12]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필담을 교환한다. 자세한 필담의 내용은 북한 학자 리상호가 번역한 열하일기나, 김혈조 선생께서 번역한 돌베개판 열하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참고할 것.

박지원과 일행이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읊은 단상 '한 번 울어볼 만한 대지'(호곡장론好哭場論이라는 제목)는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있기도 하다.

박지원의 작품 중 호질이나 허생전은 원래 열하일기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각각 관내정사(關內程史)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다. 박지원은 필화(그러니까 검열)를 피하기 위해 호질의 경우는 '이거 내가 쓴 거 아니고 중국 여관 벽에 있던 거 퍼옴 베껴옴'이라고 둘러대고, 허생전같은 경우는 윤영이라는 가상의 이야기꾼[13]이 해주었던 변승업 이야기의 딸림 이야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지원의 창작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정설.

그 당시 사람들의 (현대와 많이 다른) 가치관을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가만히 지나가던 몽골 사신단 하인을 조선 마부가 갑자기 급습(...)해서 파운딩을 하고 흙을 먹인다거나. 이유는 '심심해서'(!). 그래 놓고 조선 측이나 몽골 측이나 서로 웃으며(...)하인이야 개취급만도 못했으니 잘만 제 갈 길 간다. 우리 나라 대외 관계가 의외로 개방적인 면이 있었던 듯. 중국인들이 길거리에 잔뜩 늘어서서 '조선에서 왔다구요? 청심환 하나만 주셈'이라고 하도 졸라대서 조선 사신단은 가짜 청심환을 잔뜩 준비해 갔다는 장면이 있다. 진짜는 높으신 분들용 뇌물.

다른 일화도 있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골동품에 관해 필담을 하면서 나중에 덧붙인 말에, '대개 중국 골동품은 그 연대와 시기를 아주 교묘하게 속이는 것들이 많아, 어수룩한 사람은 물론이고 좀 안다 하는 사람도 사기를 당해 비싼 값을 주고 사기 십상이다'라고 하며 리스트를 적어주었다. 물론 이 리스트도 열하일기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과연 메이드 인 차이나의 위용은 200년 세월을 뛰어넘는다.

당대의 유명한 번화가인 연경의 유리창(琉璃廠)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유리창은 단순한 번화가가 아니라 세계 각지의 서적과 그림, 골동품들이 돌아다니는 문화의 거리여서 청나라를 방문하는 사절단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현대에도 이 유리창 거리가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배청 사상이 강했던 유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연호 대신 청나라 건륭제의 연호로 날짜를 표기한 것. 명나라에 매달려있던 많은 유생들이 박지원을 비판하였으나, 박지원은 "이미 망한 지가 100년도 넘은 명나라 연호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라며 이들의 비판을 쿨하게 씹었다.[14]

단 박지원의 말처럼 조선은 수레도 못끌고 바퀴도 못 만들었다는 국가로 오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조선은 엄연히 수레를 굴렸고 함경도에는 수레이용이 활발했다[15]. 당장 조선왕조실록만 뒤져보아도 알수 있다.

다만 조선의 수레는 청나라의 그것만큼 기술적으로 발전하지 않아서 험한 길에서 사용하기도 어렵고 무게 중량도 청나라 수레보다 적었을 뿐이다. 수레라고 무시하면 안된다. 바퀴의 크기와 무게, 수레의 형태 등에 따라서 성능에 큰 차이가 난다.

3. 번역[편집]

최초의 번역은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이 1948년 ~ 1950년 내놓은 번역본인데 김성칠이 도중에 피살[16]되어 3분의 1 가량만 번역되었다. 1955년 ~ 1957년 북한에서 리상호에 의해 첫 완역본이 발간되었으며, 1966년 ~ 1973년 이가원의 <국역 열하일기>와 1982년 ~ 1984년 윤재영의 박영문고본 완역 등이 주요한 번역으로 꼽힌다. 2009년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김혈조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4. 여담[편집]

하마터면 잿더미로 사라질 뻔한 적이 있었다. 손자뻘 되는 후손인 박남수[17]가 책을 불태우려다가 다른 식구들과 친척들이 막아서 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다른 가족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열하일기를 못 볼 뻔했다. 숨겨진 한국 문학사의 공로자들. 열하일기에서 조선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내용이 자칫하면 집안을 거덜낼 수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에는 일부 사람들이 조선을 비판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조선은 빈민국이었고 중국과 일본은 전통적 부국이었다"라는 주장을 펼 때 악용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당시 사신단은 상대국의 상황을 본국에 전달하는 스파이 역할도 했기 때문에 중국 측에서는 정보 노출을 막기 위해 사신단 일행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이동에 제약을 두었고 그래서 조선은 청에 대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박지원은 밤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고, 그 덕분에 단편적으로만 알아왔던 청의 다양한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는 청을 오랑캐로만 치부하고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는데, 박지원이 열하일기로 조선이 몰랐던 청의 발전된 모습을 소개하자 수많은 학자들과 선비들도 충격을 받았고, 오랑캐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는 풍조가 생겼다. 게다가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박지원의 맛깔난 글솜씨 덕분에 열하일기는 지식인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선비들이 필사해갔다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구어체 한문으로 썼는데, 당시 임금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원래 조선에서는 성리학 경전에서 사용하던 고문체 위주였는데 정조시대 들어서서 다양한 문체가 유행하였고 열하일기가 그 선두주자였다.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나아가 국가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서 정조는 조선시대 문학 탄압인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박지원에게도 고문체로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박지원은 자신의 죄가 너무 크다고 해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배째라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정작 그 정조 본인이 편지에서 금지한 여러 언어적 필체와 형식들을 다 구사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4.1. 윤가전의 문자옥[편집]

한편 박지원과 친분을 쌓고 열하일기 안에서도 필담이 상세하게 기록된 인물 중 가장 거물급 인사는, 70세의 전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18]이란 인물이었다. 짧은 기간임에도 박지원과 매우 두터운 교분을 나눠, 열하일기 곳곳에 박지원을 아끼고 후하게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작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또한, 박지원에 따르면 북경에 돌아와 당대 중국 명사들에게 묻자 이 사람을 백거이에 비하고 있다더라고 전할 정도로 거물급 명사 중의 명사였는데.....

박지원이 열하에서 돌아온 바로 이듬해인 1781년에 건륭제문자옥[19]에 걸려들어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열하일기 속에 기록된 윤가전은 박식하면서도[20] 다정하고 소탈한 위인[21]이긴 한데, 어딘가 주책스럽고 공명심을 내세우는 면모도 있긴 하다.[22]

그래서일까, 이듬해에 지나치게 오버한 나머지 건륭제의 분노를 샀으니, 자기 아버지[23]에게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올려달라고 상소한 것. 특히 건륭이 이 문제로 극대노한 까닭은, 청조가 들어선지 150년 동안 만주 - 한족 이중 정치 체제 속에서 문묘에 오른 자가 전무했는데 자식이 직접 자기 아버지를 문묘에 추증해달라 요구한 것이 매우 건방지게 여겨졌기 때문.[24] 또, 윤가전의 상소문에서 윤가전이 자기 자신을 고희(古稀)(칠십 세)로 지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황제 본인이 고희를 맞아 "내가 고희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윤가전 또한 건방지게 황제와 같은 표현을 썼다는 것. 이 X끼가 어디서 친구 먹으려 들어?

사실 윤가전은 건륭과 동갑의 나이로 무탈하게 고희에 이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인지, 황제가 본인을 아낀다거나 동갑내기 친구로 생각한다고 이방인인 조선인 박지원에게까지 자랑을 내비추기도 했고, 박지원에게 적어준 시의 말미에 '윤가전 70세'라고 서명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꼬투리 잡힐 줄은 몰랐을 테니 윤가전 입장에선 그야말로 날벼락(..). 그래도 딴에는 한때 아꼈던 사람이라고 건륭이 막판에 형을 낮춰 그 가족은 방면해주고 처벌 수위는 능지형에서 교형으로 감해 주었다고 한다.

5. 구성[편집]

열하일기의 구성(김혈조[25] 번역본 기준)[26]
  •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
  • 심양의 이모저모(성경잡지):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에 대한 필담 중심의 기록.
  • 말을 빠르게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일신수필) :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에 이르는 9일간의 일을 쓴 기록.
  • 신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관내정사):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는 11일간의 기록. 여기서 호질이 나온다.
  •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막북행정록): 북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 태학관에 머물며(태학유관록): 열하에 도착해서 그곳 태학관에 머무는 15일간의 기록.
  •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환연도중록):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
  • 열하에서 만난 중국 친구들(경개록):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이력과 면면을 묘사한 일종의 스케치.
  • 라마교(티베트 불교)에 대한 문답(황교문답): 중국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대화를 쓴 기록.
  • 반선의 내력(반선시말): 반선과 청나라에 전파된 라마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
  • 반선을 만나다(찰십륜포) : 라마승과 반선의 모습, 조선사신들이 판첸 라마를 만난 일 등을 적은 기록.
  • 사행과 관현된 문건들(행재잡록) : 조선과 청나라 황실 사이에 주고 받던 외교 문서와 외교 문서를 쓴 내력을 옮겨적은 기록.
  • 양고기 맛을 잊은 음악 이야기(망양록) : 중국 지식인들과 필담 형식으로 주고 받은 음악 이야기.
  • 천하의 대세를 살피다(심세편) : 박지원 스스로가 본 당시 중국의 형세와 이를 면밀히 보는 법을 적은 기록.
  • 곡정과 나눈 필담(곡정필담) : 중국 지식인들 중 하나인 곡정과 장장 16시간 동안 벌인 과학, 역사, 철학, 시문 등의 필담을 정리한 기록.
  • 피서 산장의 기행문들(산장잡기) : 열하(熱河)의 피서 산장에서 쓴 9편의 기행록을 엮은 기록.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 : 象記)가 여기서 나온다.
  • 요술놀이 이야기(환희기) : 중국에서 본 마술에 대해 묘사한 기록.
  • 피서 산장에서 쓴 시화(피서록) : 중국에서 본 시들에 대해 기록하고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
  • 장성 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구외이문) : 열하에서 들은 이야기나, 박지원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을 짧은 잡기 형식으로 모아놓은 기록.
  • 옥갑에서의 밤 이야기(옥갑야화) : 사신들과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27]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 여기에서 그 유명한 허생전이 나온다.
  • 북경의 이곳저곳(황도기략) : 북경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과 묘사를 엮은 기록. 성당과 서양화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알성퇴술) : 북경의 유교 명승지를 둘러보고 쓴 기록.
  • 적바림[28] 모음 (앙엽기) : 북경 안의 기타 종교 유적들을 둘러 보고 쓴 기록.
  • 동란재에서 쓰다(동란섭필) : 주로 중국과 조선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암의 의견이나, 중국의 견해를 짧은 글 형식으로 쓴 기록.
  • 의약 처방 기록(금료소초) : 중국 의서에서 본 치료 요법이나, 자신이 가장 효험을 본 민간 요법을 적은 기록.

6. 바깥고리[편집]

[1] 영조부마로,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2] 당시에는 사신들이 자신을 호위할 군관을 지정할 수 있었는데 정사는 4명을, 부사는 3명, 서장관은 1명의 군관을 동반할 수 있었다. 잘 알고 지내던 무관을 지명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친척들 가운데 전도 유망한 선비를 지명하는 것도 가능했기에, 박지원이 사신단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 이들은 공식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활동의 제약이 적어서, 중국 선비들과 교류하거나 유람을 하거나 서적 등을 구입하기도 하였다.[3] 오늘날의 베이징[4] 현재의 허베이성(하북성) 청더(승덕)[5] + 수도인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몽골족 같은 북방민족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6] 말 그대로 하룻밤에 강을 9번 건넜다인데 여기서 아홉이라는 건 많다라는 뜻으로 죽도록 고생하기 정도로 해석한다.[7] 고북구는 장성이 지나는 마을의 이름이다. 박지원은 야밤에 장성을 지나며 술로 먹을 갈아 '박지원 지나감'이라고 썼다고 한다. 구한 말의 뛰어난 한학자이자, 1900년에 연암집을 발간한 김택영이 이 글을 가리키며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8] 충절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 관람기[9] 짐승으로서 중국과 조선 지식인 입장에서의 청나라를 은유함.[10] 박지원은 그 당시 황제의 진상품으로 나온 침팬지나, 타조의 모습도 상세히 적어놓았다![11] 번역하면 '존귀하신 판첸 라마 님' 정도 된다.[12] 지동설도 있다![13] 윤영이란 이 이야기꾼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하게 서술해놨다.[14]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반청 감정 때문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숭정 연호를 알음알음 사용했다. 세월이 갈수록 그냥 청나라 연호를 사용한 이들도 많아졌지만, 고지식하게 숭정 연호를 고집하는 유학자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있었다. 숭정 연호로 연도를 보통 4가지 방법으로 표현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숭정 항목 참조. 도강록 서두에 "어째서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했는가."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후삼경자'란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자년(1780)이란 뜻.[15] https://m.blog.naver.com/lord2345/50133189397[16] 지금까지도 왜 죽었는지 모른다. 고향 영천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던 길에 괴한에게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당시에는 알다시피 6.25 와중이라 강도에게 대충 살해되었다는 투로 처리되었다.[17] 박지원은 박남수의 삼종조(할아버지의 육촌 형제)이다.[18] 열하일기에서는 대체로 윤형산(尹亨山)으로 적었는데 형산은 그의 자(字)이다.[19] 서책이나 시구 등에 나온 문구나 단어를 이유로 탄압하는 공포정치의 일환. 복명사상가를 거르기 위한 목적이었다.[20] 특히 열하일기 중 망양록 부분이 윤가전과 박지원이 나눈 음률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내용이다.[21] 고관대작이면서도 아무 벼슬이 없는 박지원과 신분을 개의치 않고 교류하였으며, 직접 자필시를 적어주거나 헤어지면서도 박지원의 건강을 염려하여 신신당부하는 등 박지원을 챙겨주는 내용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22] 박지원이 윤가전의 인물됨을 직접 평가하진 않았으나, 좋게 좋게 적는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윤가전의 일화를 기록하여 윤가전에게 허영심이 있음을 은근히 내비췄다.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백성들이 선정비를 지어주지 않자 윤가전 본인이 남몰래 비석을 세웠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일화이다.[23] 윤회일(尹会一)이라는 인물로 나름 당대 명성을 떨친 관료이자 학자이다.[24] 건륭제는 통치가 말년으로 갈수록 긴장이 풀려 나태해진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성격은 젊을 때부터 꾸준히(...) 독선적이고 권위적이었다. 강희 시절부터 고생하고 옹정 연간에 하드코어한 군기처 노동까지 견뎌내자 옹정제가 크게 신임하여 너 죽으면 태묘에 배향할거라고까지 호언장담을 했던 원로 대신인 장정옥은, 건륭제에게 "저 죽을 날도 머지 않았는데 태묘 갈 수 있죠?" 물었다가 어디 선황의 유지 운운하며 김칫국부터 들이키냐는 건륭제의 불쾌한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건륭제는 이후로도 다시 허락해줬다가도 "야 니가 그러고도 태묘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같은 투로 거절하는 등의 밀당(...)을 벌였고, 어느새 장정옥은 일가족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되니 건강은 나락으로... 결국 강건성세의 손꼽히는 권신이자 명신임에도 장정옥은 태묘 배향을 확언받지 못함에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고향에서 세상을 하직했는데, 막상 죽으니 안쓰러운지 건륭제는 그제서야 장정옥을 태묘에 올려줬다. 마찬가지로 옹정제의 총신이자 고명대신이었지만 말년에 장정옥과의 암투로 분란을 일으켰던 시린기오로 오르타이는 사후에 거짓부렁이로 만주의 기상을 더럽혔다는 트집을 잡혀 탈탈 털리면서 후손들도 깨강정이 되고 장정옥과 마찬가지로 선제에게 약조받아 배향되었음에도 태묘에서 쫓겨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25]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출신으로 박지원 저작 전문가이다.[26] 명작이니만큼 번역본이 많은데, 2009년에 김혈조 교수가 새 번역본을 발간하였다. 기본적으로 박영철본을 따르되, 부분마다 다른 판본을 참고한 것이 있다. 괄호 안은 원 제목이다.[27] 정확히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28]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간단히 적어둠, 또는 그런 기록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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