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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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독일어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러시아어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로마노바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Романова)
출생
사망
재위
배우자
표트르 3세
(1745년 결혼 / 1762년 사망)
자녀
아버지
어머니
형제
서명

1. 개요2. 즉위 전
2.1. 어린 시절2.2. 파탄난 결혼 생활
3. 재위기간
3.1. 제위를 계승 중이야, 여보3.2. 계몽전제군주3.3. 업적3.4. 사망
4. 남성 편력과 개인사5. 일본에서의 기록6. 대중 문화
6.1. 드라마6.2. 게임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황제. 예카테리나 대제(예카체리나 빌리카야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라고도 불린다.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女帝)이기도 하다.[1] 영어로는 캐서린 대제(Catherine the Great).

차르 대신 차르의 여성형인 차리사, 차리나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동양의 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둘 다 거대한 제국의 여제였고, 황후의 자리에서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2]

2. 즉위 전[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원래는 독일인이었다.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요안나 엘리자베트[3]의 딸로, 본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세력이 미약한 귀족[4]의 딸이었다. 다만 시골 생활에 진저리를 내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2.2. 파탄난 결혼 생활[편집]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Catherine-The-Great-1729-96-And-Prince-Petr-Fedorovich-1728-62.jpg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옐리자베타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홀슈타인 공작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참고로 선대인 예카테리나 1세는 리투아니아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표트르 1세의 정부에서 황후가 되어 결국 여제의 자리까지 오를 만큼 남편에게 사랑받던 것에 비해, 소피아(독일식으로 조피)는 표트르 1세와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개명한 이름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감금된 누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의 이름이다. 아마도 이를 의식하고 이름을 바꾼 듯 하다. 종교도 루터파 개신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바꾸었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진다. 게다가 남편인 표트르는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머리 나쁜 위인인데다가 심각한 성불구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관계가 없었고 부부 모두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다.[5]

3. 재위기간[편집]

3.1. 제위를 계승 중이야, 여보[편집]

결혼해서 열심히 러시아어문화를 공부하고, 종교까지 러시아 정교개종한 아내와 달리 표트르 3세독일풍과 개신교를 계속 고집했기에 러시아 안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762년 옐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병크를 일으키고 만다!! 무시무시한 프리드리히 2세 빠돌이였던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을 다 몰아붙였는데도 7년전쟁에서 이탈했다. 이게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다. 당연히 표트르 3세의 말도 안되는 처사는 러시아 귀족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처사에 크게 반발한다.

러시아인들 사이에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3.2. 계몽전제군주[편집]

국민이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군주 정치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타고난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선에 이르도록 그들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주의에 대한 서적들을 상당히 좋아했고, 몽테스키외, 볼테르와도 서신 교환을 여러번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여기에 감명을 받아 계몽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상황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고 법전을 제정하고자 했으나 2년 만에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만다. 각 계층의 반대가 너무 심했던 것이다. 특히 지주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제한될까 봐 더욱 심하게 반대하였다.

1764년에는 정부 중 한 명인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를 폴란드 왕의 자리에 올렸다. 이것으로 폴란드에 예카테리나 2세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을 숙적이라고 생각했고, 1768년부터 오스만과 전쟁을 시작한다. 이때의 오스만은 쇠퇴중이지만 국력은 여전히 강해서 러시아로서도 이기는게 쉽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던 1773년, 푸가초프라는 농민이 반란을 일으켰다. 푸가초프는 자신을 '표트르 3세'라 칭하며 엄청난 위세로 반란 범위를 넓혀나갔다. 이 난을 푸가초프의 난(1773~1775)이라 부른다. 하지만 진압군에 의해 이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농노의 의무는 늘리고 귀족들의 권리를 강화하며 농민들을 억압했다. 종종 국유지를 귀족들에게 상으로 하사할 때도 많았는데, 이런 경우 해당 지역의 자영농들은 졸지에 농노로 전락했다.(...)

사실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군주를 자처했고, 꿈꿨던 이상은 그 당시의 유럽 군주들보다도 더 급진적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지지계층이 지주 중심의 귀족들이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현실은 시궁창. 물론 이것도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제멋대로 급진적인 이상을 추진한 예카테리나의 잘못이기도 했다. 게다가 푸가초프의 난 이후 농노제를 개악시키고 민중을 억압한 것 때문에 계몽사상가들에겐 폭군으로 비난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러시아 민중들에게 증오를 받았다. 물론 민중 입장에선 빼도박도 못하는 폭군이 맞지만.

3.3. 업적[편집]

그래도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며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업적을 거뒀다.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퍼져있는 그림, 조각들을 수집, 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원래 예카테리나 2세가 휴식을 취하던 일종의 별궁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러시아인들은 물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녀가 사들인 미술품들도 굉장히 많다. 현재에는 한 작품당 1분씩만 감상을 해도 8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리미아와 카프카스를 할양받아 영토를 넓혔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이것으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크림 칸국은 멸망했다.

1788년 사촌동생인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가 1721년 뉘스타드 조약, 1743년 오보 조약으로 상실한 핀란드의 카리알라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발트 함대의 주력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위해 흑해로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방했으나 1790년 7월 스벤스크순드[6] 해역에서 구스타프 3세가 친정한 스웨덴군에게 완패하여 베렐레 조약을 체결해 스웨덴에 대한 내정간섭은 더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위기를 느낀 예카테리나 2세는 더욱더 보수적 정책을 펼쳤다.[7] 이후 3차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마쳤다. 이로써 1611년 모스크바 함락으로 러시아에 굴욕을 준 폴란드를 멸망시켰다.

또한 크림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우크라이나 동부에 코사크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볼가 강 남부 유역과 키스피해 연안에 칼미크인들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대규모의 독일계 이민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인신 매매와 약탈을 일삼던 크림 타타르족이 토벌되면서 농업이 안정화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산 밀은 러시아의 주력 수출 품목이 되었다.

3.4. 사망[편집]

1796년 11월 17일에 6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외아들인 파벨과 사이가 나빴고, 이 때문에 파벨의 장남 알렉산드르를 후계자로서 키웠다고 한다. 또한 사망하기 전에 손자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는데, 알렉산드르가 거절했다는 말이 있다(결국 그는 아버지 파벨이 사망한 후 즉위했다). 사망하기 몇달 전에 손녀(파벨 1세의 장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스웨덴구스타프 4세 아돌프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종교 문제로 거절받자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4. 남성 편력과 개인사[편집]

남자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미 60세가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몇 년에 한 번씩 정부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헤어진 정부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이를 두고 정치적 계산이 숨어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귀족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유능한 신하들과 교류(...)를 하는 한편 적지 않은 보상을 통해 그들을 완전히 자신의 수족과 같은 심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 비단 젊고 잘생긴 귀족 청년들뿐만 아니라 실력있고 명망 높은 장군과 신하들도 정부로 두곤 했다.

애인을 선발할 때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는데, 우선 의사가 건강검진을 하고 합격한 후보자는 지적 능력과 황제를 즐겁게 해 줄 만한 소양을 갖추었는지 검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측근과 시험적인 합방을 거친 후에 실전 테스트 충분하다고 판정되면 그때서야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막판엔 교양이고 지식이고 상관없이 크고 아름다운 잘생기고 젊은 미남이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의 제도, 일명 '하렘'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하렘의 목적은 술탄의 후계자 양성을 위해 하렘에 소속되어 있는 여성들의 아들들이 경쟁하게 만들어, 제위에 오를 자가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게 하려는 목적이 첫번째. 외척이 두고두고 술탄의 정실부인 자리를 꿰차 국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두번째. 술탄의 연애는 한참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하렘에 소속시키는 것은 술탄도 할 수 있었지만, 술탄은 그의 모후 '발리데 술탄'이 지어주는 여성하고만 잠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여성이 하렘을 가지는 건 그냥 쓸데가 없다(...)
애인을 선발할 때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는데, 우선 의사가 건강검진을 하고 합격한 후보자는 지적 능력과 황제를 즐겁게 해 줄 만한 소양을 갖추었는지 검사를 받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측근과 시험적인 합방을 거친 후에 실전 테스트 충분하다고 판정되면 그때서야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막판엔 교양이고 지식이고 상관없이 크고 아름다운 잘생기고 젊은 미남이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들어갔다고 한다. 마치 오스만 제국하렘과 비슷했던 것이다.

황제의 수많은 애인 중에 유명한 이를 몇명 꼽자면 세르게이 살티코프 공작, 포템킨 공작, 주보프, 알렉산드르 란스코이, 그레고리 오를로프 정도가 있다. 오를로프는 군인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외모로 단숨에 황제를 사로잡았다. 결정적으로 오를로프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황제가 남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황제의 정부였고 아들도 두었다. 폴란드의 마지막 왕이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의 원수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의 숙부였던 스타니스와프 2세와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8]

포템킨 공작은 황제보다 10살 연하로 평범한 외모였지만 크고 아름다운 그것과 빼어난 능력으로 12년간 황제의 정부 노릇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총애가 점점 예전만 못하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며 황제의 애인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황제의 남성 편력 때문에 사후에 황제가 하다가 깔려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별로 없다.

이처럼 여러 남성과의 연애를 즐기면서 아이들까지 낳았기 때문인지, 막상 유일한 적자, 파벨과는 평생동안 소원한 관계였다. 일단 남편과의 사이가 매우 나빴던 데다, 파벨이 태어나자마자 당시 황제였던 옐리자베타가 아이를 빼앗아 자신이 양육했기에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줄 수가 없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파벨은 생김새와 성격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 그래도 파벨에게 정이 없는 건 아니라 며느리 간택 때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에 돈을 펑펑 쓰게도 해주는 등 나름대로 아들과의 관계회복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을 쏙 빼닮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며느리가 시어머니인 자신에게 반기를 들며 사사건건 남편 파벨의 편만 들면서 모자관계와 고부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달았다. 이처럼 어머니와의 사이가 나빴던 파벨은 차기 황제가 될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궁정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데다 공공연히 무시당했다고 한다. 장손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던 생각도 이런 연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10]

5. 일본에서의 기록[편집]

파일:external/www.vidania.ru/ekaterina_ii_1-2.jpg
파일:external/cccpcamera.photo-web.cc/ekate.jpg

일본에서 표류하여 러시아까지 방문했던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가 가져 온 그녀의 초상화를 히다야(飛騨屋)가 모사한 바 있다. 원본으로 생각되는 초상화와 비교해 보자.

고다유의 귀국 후 당시 난학(네덜란드학) 연구자인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편찬한 '북사문략(北槎聞略)'에서는 링크와 같이 묘사되었다.

6. 대중 문화[편집]

6.1. 드라마[편집]

6.2. 게임[편집]

  • 도미네이션즈에서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문명 시리즈에선 문명 2 이후 문명 5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명의 군주로 개근했다. 실제 초상을 가져다 쓴 문명 2를 제외하면 매 작품마다 이미지가 상이하게 다른 것이 특징으로, 문명 3에서는 나이 든 할머니로, 문명 4에는 군복을 입고 남장을 한 모습으로, 문명 5에서는 젊고 예쁜 모습으로 나왔다. 문명 6에서는 표트르 대제가 대신 나오는 바람에 아직까지 등장하지 못했으나, 문명 4에서처럼 문명 하나당 지도자가 둘 이상이므로 앞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능력치가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6,6,5인 군주로 나온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11].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러시아 에피소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조피라는 독일 출신 황태자비 후보가 이 사람이다. 여기서는 본인을 쫓아내려는 러시아 귀족들의 음모에 휘말려서 고생하는 역할로 등장. 에피소드 퀘스트를 깨면 대부호 전직증을 주는데 이 대부호란 직업 전직증없이 전직하는데만 2억 두캇(...)이 드는 직업이다. 역시 독일의 왕족이자 러시아 황태자비... 여기에선 흑발 히메컷의 소녀 모습으로 등장한다.

[1]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아들 파벨 1세어머니의 트라우마 때문에 즉위 후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했다.[2] 엄밀히 말하면 측천무후는 황제 즉위 시점에 황태후였다.[3] 오빠인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나중에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으며 예카테리나 2세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스웨덴 왕 구스타프 3세칼 13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외사촌 동생들이다.[4] 다만 귀족으로서의 세력이 미약했다는 이야기지 예법상 안할트 가문은 독일에서 엄연한 통치가문으로 타국에서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일례로 먼 친척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부인 안할트-데사우 공작 레오폴트 1세는 1703년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27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겸 장군을 맡았다.[5] 하지만 아들인 파벨을 보면 성격이나 생김새나 남편과 붕어빵이다. 풍문은 풍문일 뿐.[6] 현재의 핀란드 코트카(Kotka) 앞바다[7] 이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료들이나 귀족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의 내용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편지 중에 한 구절에는 '농민들이 지식을 쌓고 자유를 얻는다면, 그것이 바로 곧 러시아 왕가의 종말이 될 것이다'라고 쓰기도 하였다.[8] 아직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의 왕으로 당선되기 전 그의 정치 스승이던 찰스 윌리엄스 경[9]의 소개로 아직은 대공비의 신분이었던 예카테리나를 소개 받았다고 한다. 이후 스타니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에 당선된 뒤 이미 남편을 제거하고 제위에 오른 예카테리나에게 청혼했으나 예카테리나는 거절한다.[9] 영국인으로 당시 베를린에 대사로 파견되어 있었다. 스타니스와프는 당시 치료를 위해 베를린에서 거주하고 있었다고.[10] 당시 러시아는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를 직접 선정하는 지명제였기 때문에 장남을 건너뛰고 바로 장손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능했다. 어쨌든 차기 제위 계승자를 지명하던 탓에 러시아에서는 쿠데타가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유럽에선 러시아의 야만성을 대놓고 비웃었다. 심지어 예카테리나와 서신까지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볼테르조차 러시아 황태자 자리는 지명이 아니라 점령하는 것이 아니냐며 대놓고 조롱했다. 이후 러시아의 황태자 점령제 지명제는 파벨이 즉위한 뒤 살리카 법을 도입하면서 폐지된다.[11] 6,5,5인 세종대왕보다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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