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상으로
황제의 아래이면서
대공의 위.
봉건제도의 영토 위주 국가 시스템에서 계약직의 최고봉이라 할만 한 자리다.
중국은 진시황은 절대왕권을 유지하려고 신하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자식이자 후계자에게도 분봉하지 않았다. 한나라 이래로 황제가 가장 높은 지배자의 명칭으로 굳어진 한자문화권에서 왕은
작위의 일종으로도 활용되었는데, 이를 왕작이라 한다.
유명한 공후백자남의 오등작도 춘추전국시대의 난리판을 거치며 유사한 과정을 통해 왕의 아랫칸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찌어찌 한 시스템에서 위아래로 배치된 계급 비슷하게 되었지만, 이 명칭들은 본래 서로 다른 집단에서 각자들 칭해 쓰던 군주의 다른 말이었다. 고조선만 해도 연나라의 칭왕에 맞서기 전 까지는 대외적인 군주의 명칭이 후(侯)였다.
그 이전까지는 왕 아래 제후(公)가 있는 봉건제 국가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칭왕하는 것은 중원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즉 이 시기의 왕은 진 이후의 황제와 같은 위치였다. 이후 황제가 등장하기까지 대왕, 태왕, 패왕 등 왕과 차별화하기위한 명칭들도 나타났었다.
왕을 대신해 황제가 등장한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대공 작위를 거의 준 적이 없으므로 작위로서의 왕은 유럽에서 말하는
대공을 대신해서, 위계상
황제와
공작의 사이에 위치했다. 보통 황제의 가까운 황족을
친왕(親王)(황제의 직계 혈족에게 주로)의 작을 줬다. 또, 황제와 혈통상으로는 다소 멀더라도 공적이 높거나 세력이 강성할 경우 경우 군왕(郡王)에 봉했다. 군(郡)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의미인데 현대 한국에서야 군하면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별거없는 그냥 시골 땅뙈기지만, 중국으로 옮겨가면 넓이로나 위상으로나 국(國)에 버금가는 큰 단위였다. 요즘식으로 비유한다면 자치구나 자치령 정도의 느낌. 단 청나라 시절 친왕과 군왕은 황제의 친자라도 공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방계라도 공을 세우면 가능했다.
물론 한나라 이후 통일제국의 봉건제도는 유교 윤리상 주나라 제도를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분봉받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절대왕정 시대 유럽의 공작이나 백작들처럼 작위명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한족 왕조의 경우 황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아들들, 즉 후계에서 제외된 친자들은 장성하기 전에 각 지역으로 분봉했다. 예외적으로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은 일찍 낙양으로 분봉 받았으나 거의 예외적으로 장성해서도 임지로 보내지 않고 북경에서 끼고 살았다. 만력제가
태창제를 제끼고 황태자로 삼고 싶어한 데서 비롯한다. 이런 예외 이외에는 황자를 분봉했는데 황태자의 저위(儲位)를 방해하지 않고 중앙정계에서 후계다툼을 미리 방지하려고 한것이다.
반면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 시기에는 모든 황족은 북경성 안에서 살아야 했다.
[4] 한편 한자문화권의 제국에서는
프린스의 의미와 어느 정도 일치하므로 보통 작위로서의 왕은 영어로 king 대신 prince로 번역한다.
조선의 경우에는 군주의 호칭이 왕이였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기 때문에 식민지 혹은 식민지에 가까운 속국 정도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왕은 중국의 "
작위로서의 왕"인 사람들과는 달리, 엄연한 "
군주로서의 왕"이였다.
대장금 같은 사극의 중국어 자막을 보면, 조선의 왕을 황제라고 표현해 놓았다. 즉, 중국인들의 인식 속에서도 조선은 엄연한 '독립국'이다. 그러니 조선 왕은 Prince가 아닌 King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청과 일본 사이에서 시달리면서 왕 칭호가 중국의 작위라는 청나라의 생떼에 맞서기 위해
갑오개혁을 통해 "왕"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도입했고 이 때의 외교문서를 보면 다른 나라 '국왕'도 모조리 "대군주"로 바꾸어 호칭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제국 수립으로 황제 칭호를 쓰게 된다.
대한제국 이전의 한국의 왕조에서 작위로서의 "왕"이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이 있다.
고조선의 얼마 안되는 사료에서 "비왕(裨王)"이라는 왕작이 나온다. 고구려에서는 갈사왕을 봉한 사례가 있으며, 백제에서는 면중왕, 도한왕, 좌·우현왕
흉노? 등 왕작을 한 사례가 중국 기록에 적혀 있다. 신라의 대표적인 왕작은 "갈문왕"으로 대체적으로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에게 주는 칭호였지만 다르게 사용된 경우도 있기에 지금도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삼국통일 시기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에게 "보덕국 국왕"이란 작위를 주어 복속된 고구려유민을 관리하게 하였다. 또한 원성왕 시대에 진골 귀족 김주원에게 "명주군왕"이라는 작위를 줘서 명주군을 다스리게 했다.
발해의 경우에는 함화 4년명 불비상에 허왕부라는 관청이 기록되어 있는 걸로 보아 '허왕'이라는 왕작이 있던 걸로 추측되고 있다.
사족으로
백제는
칠지도의 명문에서 왜나라의 왕을 "후왕(侯王)"이라고 칭해서 왜왕을 자국의 제후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5][6]작위인 경우의 '왕'에 경우 일단 다른 모든 신하들보다 작위는 높지만 예우상은 아니다. 분봉받은 왕의 경우 어디까지나 신하이기 때문에 천자의 조정에서의 신하들과 군신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 예법의 기준인 주나라 예법은 경대부(천자-제후-대부-사 중에서 천자를 모시는 대부) 중에 삼공의 지위는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과 동급 대우 였고 이하의 벼슬도 직위에 따라 제후들과 매치 되었기 때문에 이후 왕조에서 황제가 분봉할때 작위가 공작 등에서 왕으로 격상되었어도 이같은 예법은 그대로 이어진다.
실질적으로 황제의 친자식이면 신하들보다 끝발은 쎄겠지만 오래된 종친이나 변방의 왕이라면 이하 서술되는 조선 국왕의 안습시대 경우처럼 별 듣보잡한테도 개무시 당할수 있다. 또한 중앙 관제에 속한다고 지방직은 경대부는 아니고 당나라때 절도사나 명청 시대 순무나 총독들은 제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순무는 1개 성(省)의 행정관이고
총독은 1~2개 성의 지방행정과 군권까지 주어진다.
유럽에서는 왕이 작위로 나올 경우가 거의 없다. 왕보다 높게 쳐주는 황제가
동로마 제국과
신성로마제국에만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황제는 동양처럼 힘이 있으면 그 어느 누구라도 황제를 칭하고 인정받는 등 자신의 힘의 총량이 아닌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증명된 연계를 통한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즉
한 지역의 지배자가 아닌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작위로서 왕을 많이 쓴 편이었다. 일단 다음 황제로 선출된 자에겐
로마왕이란 작위를 주었고 황제를 선출할 권한이 있는 선제후들 중 한 명은 보헤미아왕이었다. 보헤미아 왕은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지만 신성로마제국과는 이질적인 독립된 지방이 신성로마제국에 복속되어 보헤미아 공작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황제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때문에 작위로서의 왕과 군주로서의 왕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계승은 동로마의 마지막 황녀와 결혼한 러시아의 차르가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서유럽에선 무관심이었다. 한 지역의 왕이 황제를 주장하는 꼴이기 때문. 특히 러시아의 경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크림 반도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로마의 강역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이 당시는 러시아가 서구화를 외치며 유럽 세계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국에서도 대영
제국이라지만 유럽 최강국으로 올라서도 왕국에 여러 작위를 합친 군주였고 황제 드립은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 황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서 나왔다. 이때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하였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황제는 자신의 힘의 총량이 아닌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증명된 연계를 통한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처했을 때 전 유럽에서 광역 어그로를 먹었다.
이 사람이 어그로 먹인게 한두 개는 아니지만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외칠 수 있던 것도 독일 역사에서 독일 1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왕조의 초대 황제가 오토 1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그 강한 국력을 가졌을 때에도 황제 드립을 나폴레옹 이전까지는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왕은 자기 나라 내에서는 황제와 같다 같은 정신승리적 발언을 했던 것. 이것을 나폴레옹이 깨트리면서 그 때부터 기존 유럽세계의 질서를 깨트리는 흉악한 간웅이라고 생각한 각국과 더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장기 중세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중세의 마지막의 절정기가 바로 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라고(태동기는 프랑스 혁명, 완성은 1848년의 각국에서 벌어진 운동) 할 정도로 나폴레옹의 행동은 유럽 세계에 속한 국가들에게 기본 질서와 공식, 의식 공격을 하는 초 광역 어그로를 끈 셈.
그런데 유럽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지만 King(왕)을 작위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군주가
여왕일 경우 남편에게 주어지는 칭호인데 정식명칭은 King consort다. 유럽에서
여왕과
왕비를 구분할 때 왕비에게는 Queen뒤에 consort를 붙이는 것과 똑같다. 여왕은 Queen regnant. 사실 군주인 왕도 엄밀히 따지면 King regnant인데 남성인 왕이 워낙 많아서 짧게 King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 쪽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였던
메리 스튜어트의 남편인 헨리 스튜어트 단리의 예처럼 타국에서도 사용되었다. 다른 나라의 여왕의 부군의 경우는 호칭에 인색한 관계로 그냥 Prince consort의 작위를 주었다. 여자 왕의 남편은 한국에서는 부군/국서(國壻)로 번역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부군은 여왕의 남편 뿐만 아니라 남의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국서는 여왕의 남편/
부마(왕의 사위)의 뜻으로 한정.
일본에서는 덴노의 3세손(증손자)(1947년 이전에는 5세손) 이하의 남자 자손은 왕(王), 여자 자손은 여왕(女王)이라 하며, 중국의 군왕(郡王)과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1947년 신헌법 시행 이후로는 "왕"은 한 명도 태어나지 않고 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40개 이상의 도시를 차지하면 얻는 칭호이긴 하지만,
삼국지 7의 경우는 개나소나 다는 듯하다. '''일단 한명이 왕을 칭하기 시작하면 심지어 도시가 2~3개밖에 안되는 군주들도 너도나도 왕을 칭한다. 더욱 황당한 건 도시 10개가 넘는 강대국일 때는 왕을 칭하지 않다가 도시가 2개 정도로 쪼그라 든 뒤에 왕을 자칭하는 군주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시나리오 후반부엔 그야말로 왕들의 전쟁(...). 게다가 2년 쯤 지나면 이번엔 개나소나
황제를 칭하기 시작해서 한층 더 막장으로 치닫는다.'''실제 중국 난세와 비교해보면 사실적인 전개이다. 삼국지에서는 명목상이나마
헌제가 있었기 때문에 칭호 인플레가 덜했지만, 난세가 닥치면 보통 군웅들이 서로 자존심을 세우려고 "니가 왕이면 나는 황제다!"라는 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