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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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대원대몽고국
ᠳᠠᠢ ᠦᠨ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大元大蒙古國
파일:Yuan_ch.png
1271년 ~ 136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이칭
예케 몽골 울루스(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다이 유완 구룬(ᡩᠠᡳ ᠶᡠᠸᠠᠨ ᡤᡠᡵᡠᠨ), 대원(大元)
위치
동북아시아
대도(大都) / 상도(上都)[1] (1271년 ~ 1368년)
정치 체제
국가원수
카안(ᠬᠠᠭᠠᠨ)(황제)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주요 카안
중세 몽골어, 중세 중국어, 티베트어
종족
통화
교초(交鈔) 등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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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년 칭기즈 칸, 몽골 통일
1227년 서하 멸망시킴
1234년 금나라 멸망시킴
1260년 쿠빌라이 칸, 개평부에서 즉위
1260 ~ 1264년 아리크부카의 반란
1262년 이단의 반란
1267년 대도 건설
1267 ~ 1273년 양양 공방전
1269년 탈라스 회맹
1271년 건국
1274, 1281년 일본 원정
1275 ~ 1295년 마르코 폴로, 원 체류
1276 ~ 1282년 시리기[2]의 반란
1279년 남송 멸망, 천하 통일
1280년 곽수경, 수시력 편찬
1284 ~ 1287년 안남 (베트남) 원정
1285 ~ 1301년 카이두의 반란
1287년 나얀의 반란
1292 ~ 1293년 자바 (인도네시아) 원정
1307년 화림행성 설치
1310년 오고타이 칸국 해체
1314년 과거제 실시
1323년 남파의 변
1328년 양도전쟁
1329년 천력의 변, 문종 즉위
1351년 홍건적의 봉기 시작
1368년 멸망
1388년 북원 멸망

1. 개요2. 상세
2.1. 사회2.2. 행정2.3. 문화
3. 황실
3.1. 역대 황제3.2. 계보도3.3. 추존 황제
4. 미디어에서5. 여담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를 말한다. 수도는 대도(칸발릭).

2. 상세[편집]

아시아의 역대 국가 중 가장 넓다.청나라의 영토보다 더 넓다고 보기도 한다. 참조 하지만 넓이와는 달리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애초에 군사력만으로 세워진 나라여서 과거 고대 로마나 중화 제국과는 달리 소프트파워가 부족했고 황제들이 대부분 문맹이었으며,[3]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애시당초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러고도 97년을 버틴 게 대단한 거다.[4]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는 현재도 후신을 자칭하는 민족이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다[5] 요나라 및 금나라나청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의 중국몽골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정부가 중심이 되어 막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은 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이라고 보고 있다. 차라리 쿠빌라이 칸을 중화영웅으로 떠받들지[6] 한편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은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로 본다.[7]

몽골 제국의 제5대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대재건원 만물질시(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8]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었고, 서역의 4대 칸국[9]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

중세 몽골어로 다이운 여커 몽골 울루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었다. 황성은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와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쩐흥다오의 전략에 말려들어 물러났으며 잘 안 알려졌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이어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졌다. 북원은 겨우 3대에 천원제가 대칸위를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하였는데, 이때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몽골"로서는 이후 한참 더 존속하다가 청나라에게 내•외몽골이 차례로 복속되었다.

한족을 정복 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10][11]으로 강제 편입시킨 건 이 왕조가 유일하며 또한 역대 중국 통일 왕조 중 한반도 전체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했던 왕조이기도 하다.

종교는 티베트 불교였는데 라마교라고도 불리웠다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였고, 탄트라 좌도 밀교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였는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계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하였고 원나라가 사라지자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도 사라졌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몽골인과 티베트인이 중요한 대접을 받았보니 다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가 활성화되었다.

2.1. 사회[편집]

정복활동 초기, 몽골은 한때 실제로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중국 쪽에 있긴 한데,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인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었다.[12]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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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하였다.[13]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와 투하호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었으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나라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외에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노예를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하였다.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으로,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14]
  •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15]은 몽골 병사의 몫이었다. 중국 민속학 개척자인 주작인 같은 학자는 절강성 규방 풍습을 논하면서 초야권과 연결짓기도 하였다.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16].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그 재산은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노예인 한족에 한해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 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중팔.
  •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계급별로 할당량을 정해두어 최하계급인 남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 《몽올아사기》에서도 4등인제가 언급되고, 서방 수도사 오도릭의 글에도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적인 도구인 보갑제가 등장한다.

또한 직종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다. 관리, 아전, 도사, 승려, 의사, 기술자, 목공, 창녀, 유생, 거지가 그 순서다.[17] 또 원대 중기부터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유학적 지식보다 실무 행정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실무 중시 경향은 원나라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신법 이후의 송나라에서도 그랬다.[18]

《진여록》(燼餘錄)에 의하면, '원나라가 개국한 뒤에 20가구를 ‘갑’으로 개편하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갑주’로 하였으며 의복, 음식을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였다. 동자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경록》에 의하면 '몽골인과 색목인의 포로 중 남자는 '노'라 하였고 여자는 '비'라 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구라 하였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에 의하면 원나라때 거의 모든 한인이 노예였고 외족(몽골/색목인등)에 의한 한족 여성 수탈은 전 중국에 두루 퍼졌다고 한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의 책에서 초야권에 대한 글이 나온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중국학자 신력건도 초야권을 말하고 있다. 신력건의 원조에 대한 글

일부 중국 학자들에 의하면 초야권이라는 법령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카안들은 오히려 순결을 강력하게 장려했다고 한다. 당시 중원 지역에 온 몽골인은 겨우 30만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주로 군인인지라 편제 유지에 집중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지역으로 흩어진 몽골인들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초야권에 대한 중국측 논의1 초야권에 대한 중국측 논의2

강남 지역에서는 남송대부터 터를 잡은 일부 지주층들이 원대에 그 기득권을 인정받아 자치를 행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은 관할 구역 내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몽골 정부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민을 농업 생산이나 산업 일꾼으로 부리는 한편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원말 한족 군웅으로 궐기하여 원나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의 영어권 권위자인 미카엘 딜런 교수에 의하면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족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수백만명의 몽골인 남성들과 색목인 남성들을(Israeli, Raphael (2002). Islam in China.) 한족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BwuSpFiOFfYC&pg=PA31&redir_esc=y&hl=ko 반대로 몽골인 여성들과 색목인 여성들 또한 한족 남성과 강제결혼을 당했다.

서울대학교 김호동 교수의 논문 《팍스 몽골리카와 중국》에 의하면 일본학자 舩田善之가 '색목인'이라는 명칭을 연구하면서 색목인이라는 명칭은 한족을 차별하기 위한 구분이 아닌 구별을 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나아가 4등인제에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동 교수는 이 설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러한 견해는 이제까지 색목인에 대한 이해가 몽골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민족 차별을 위해서 도입된 분류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인이나 남인에 비해 색목인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한족이 차별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원말,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손해가 되었는데, 농민 반란군 중 무장 상태가 농민이 아니신 분들도 생겼다.# 각종 화기를 다루는 자칭 농민 반란군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색목인 수백만, 한인 1000만, 남인 6000만 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6000만명을 지배한다는건 너무 힘든 일이라 제 3계급인 한인을 활용했다. 고려인은 3계급에서 우대받은 편이라(처음부터 우대받은 건 아니었고, 고려가 부마국이 되고난 뒤 세월이 지날수록 지위가 나아졌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뽑는 과거제도(괴과-魁科)를 시행하기도 했고, 여기서 장원급제한 전원발[19] 같은 경우는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이곡, 최해 같은 이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인 관리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 외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지역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 확정이었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몽골인 쪽이 밀리는데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 원나라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20]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영웅은 공부 따윈 안 한다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으니 일반화는 다소 위험하다.

한편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21]

2.2. 행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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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중 가장 영토가 넓었지만 행정력이 가장 취약했다. 그야말로 군현제를 1,000년전 봉건제로, 근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중세 봉건제도로 되돌린 수준이었다. 허구한 날 주나라 시절 봉건제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유학자들의 꿈 실현 사실 이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지방 행정 제도는 중서성이 승상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22],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23]에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 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나라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가 되어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었어도 통치는 사실상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징세, 징병, 행정력 행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힘들어 중앙집권보다 봉건제에 가까웠다.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자치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의 영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 도만호부,[24]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 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 만호부[25]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행정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 가 죄다 군벌화되었다.

황실 직할군은 시위 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었다. 여기에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특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다.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만 행정이 미비했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정보 연결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강남의 한족 부호층은 천자만 열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감히 열고 여기에 서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몽골 지배층은 이걸 그냥 일종의 유치한 코스프레쯤으로 인식했기에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가주는 대범함도 있었다. 걍퍅한 훗날의 청나라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이런 과감한 관용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보는 엉뚱한 시각도 있으나, 청말[26]과는 달리 원말 때는 유학적 사고로 무장하여 원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도 생각보다 많았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27]

2.3. 문화[편집]

근본적으로 몽골 지상주의였으나 청나라처럼 한족의 문화를 탄압하지 않았기에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 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서만 강제했다는 말이 있으나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한족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다.[28]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했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나라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9] 물론 그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 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30]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수병 빵모같이 생긴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소소하지만 휴지 문화 또한 원나라 때에 생겼다. 원나라 이전에는 일을 본 뒤 얇게 가공한 나무 조각으로 닦았다고...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 통치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또한 원은 훗날의 명, 청과는 달리 기록 문화 자체에 관심이 적었기에 적어도 문자옥 같은 무시무시한 일은 자행한 바 없었다.[31]

3. 황실[편집]

3.1. 역대 황제[편집]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칸들은 몽골 제국이나 북원 항목을 참고. 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7년(1271-1368) 중 첫 번째 쿠빌라이(25년)와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를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막장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26년간 8명에 1대에 3년.
대수
묘호
시호/연호
칸호
연호
재위기간
비고
1대
세조
성덕신공문무황제
세첸 칸
중통(中統, 1260~1264)
지원(至元, 1264~1294)
1260~1294
5대 대칸
2대
흠명광효황제
올제이투 칸
테무르
원정(元貞, 1295~1297)
대덕(大德, 1297~1307)
1294~1307
6대 대칸
3대
인혜선효황제
퀼뤼그 칸
카이샨
지대(至大, 1308~1311)
1308~1311
7대 대칸
4대
성문흠효황제
부얀투 칸
아유르바르바다
황경(皇慶, 1312~1313)
연우(延祐, 1314~1320)
1311~1320
8대 대칸
5대
영종
(英宗)
예성문효황제
게게엔 칸
시디발라
지치(至治, 1321~1323)
1320~1323
9대 대칸
6대
흠인대효황제
예순테무르 칸
예순테무르
태정(泰定, 1321~1328)
치화(致和, 1328)
1323~1328
10대 대칸
7대
-
라기바흐 칸
라기바흐
천순(天順, 1328)
1328
11대 대칸
8대
성명원효황제
자야아투 칸
투그테무르
천력(天曆, 1328~1329)
1328~1329
12대 대칸
9대
익헌경효황제
후투그투 칸
쿠살라
천력(天曆) : 1329년
1329
13대 대칸
복위
문종
성명원효황제
자야아투 칸
투그테무르
지순(至順, 1330~1332)
1329~1332
복위
10대
영종
(寧宗)
충성사효황제
린칠반 칸
린칠반
지순(至順) : 1332년
1332~1333
14대 대칸
11대
선인보효황제 /
순황제[33]
우카아투 칸
토곤테무르
원통(元統, 1333~1335)
지원(至元, 1335~1340,
1368~1370)
지정(至正, 1341~1368)
1333~1368
15대 대칸

3.2. 계보도[편집]

3.3. 추존 황제[편집]

묘호
시호
성명
비고
희조(熙祖)
의현황제(毅玄皇帝)
보돈차르(孛瑞察兒)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10대조
선조(宣祖)
공철황제(功哲皇帝)
카불(合不勒)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증조부
열조(烈祖)
신원황제(神元皇帝)
예수게이(也速該)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생부
목종(穆宗)
도녕황제(道寧皇帝)
주치(朮赤)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장남
성종(聖宗)
충무황제(忠武皇帝)
차가타이(察合台)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차남
예종(睿宗)
인성경양황제(仁聖景襄皇帝)
툴루이(拖雷)
세조 추숭, 칭기즈 칸의 4남
유종(裕宗)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친킴(眞金)
성종 추숭, 세조의 차남
순종(順宗)
소성연효황제(昭聖衍孝皇帝)
다르마발라(答剌麻八剌)
무종 추숭, 무종의 부친
현종(顯宗)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
카말라(甘麻剌)
진종 추숭, 진종의 부친

4. 미디어에서[편집]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이 나올 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거나, 전성기인 쿠빌라이 칸 시대에 활발한 해외원정에 딸려서 언급되거나, 말기에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상황이 나오거나다. 한국의 경우 대몽항쟁기의 사건이 사극 등에 자주 나온다.

신의(드라마)에서는 공민왕 때까지의 고려왕들이 전부 줄줄이 무능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려고 했다.

기황후(드라마)에서는 기황후, 고려의 가상왕 왕유, 토곤 테무르(혜종)의 관계를 초반에 가상적으로 설정한 스토리로 시작하여 이후 원나라에서의 스토리를 다룬다.

중국 드라마인 건원풍운(국내명은 칭기즈 칸의 후예)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해 다루었다.

김용의 문학작품인 의천도룡기에서 원나라의 말기의 주원장을 비롯한 대대적인 한족들의 대몽 항쟁이 그려진다.

미국 드라마 마르코 폴로(드라마)도 이 시대가 배경. 다만, 실제 역사와 안 맞는 부분이 많으니 드라마 내용을 사실로 판단하지는 말자.

5. 여담[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대도는 겨울 수도, 상도는 여름 수도로 기능하였다[2] 몽케 칸의 아들[3] 물론 중국의 한족 기준에서. 당연히 그들의 모어인 몽골어는 읽고 쓸 줄 알았다.[4] 원나라보다 단명한 세 왕조는 존속시간이 고작 10여년~30여년 수준으로 급이 다르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무주나 왕망의 신나라는 너무 단명해서 아예 왕조로 쳐주지도 않는다.[5]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 내몽골중국, 부랴티아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다. 단 내몽골인 역시 국적이 중국인일 뿐, 만주족처럼 언어와 풍습을 완전히 잃는 정도로 동화되지는 않았다.[6]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몽골 제국이 본격적으로 중국화되긴 했지만, 쿠빌라이 칸 본인은 비록 자신을 중화 황제라 자칭한 적은 있어도 정작 한족 문화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중국어 한마디 할 줄도 몰랐으므로 이 역시 영 아스트랄한 건 마찬가지.[7]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국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인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8] 비슷한 이유로 북위를 세운 탁발씨도 한화 개혁을 추진할 때 황족의 성을 원씨로 선택했다.[9]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10] 다만 의외로 원명 교체기에 원나라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한인 사족들이 굉장히 많았다. 중앙의 조정이 몽골인과 색목인 위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사실 원나라의 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향촌 자치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즉, 자신들에게 바칠 것을 바치면 향촌 세력가들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향촌을 어찌 다스리든지 방관하는 자유방임적인 통치체제였던 것이다. 향촌의 사족들이 사실상 동네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초원으로 후퇴한 시점에서도 끝까지 따라가서 충절을 지킨 한인 관료들이 많았고 원나라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족들이 많았다.[11] 다만 그것보다는 의외로 몽골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든 사람들에겐 대우를 해줘서 그렇다. 그래서 뭔가를 받은 인간들은 의외로(?) 충성했다.
【고려사 세가 기사 】
원(元)에서 양중신(楊仲信)을 파견하여 폐백(幣帛)을 가지고 와서 귀부군(歸附軍)(몽골에 귀부한 남송군) 500인의 아내를 구하게 하였다. 왕이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인 정랑(正郞), 김응문(金應文) 등 5인을 여러 도(道)로 파견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ㅡ
몽골은 고작 병졸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추고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뀐다.
[12] 칭기즈 칸은 생전에 몽골인이 아닌 이민족이라도 자신을 따른다면 관대하게 받아주었다. 이는 단순히 창업군주로서의 비범함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 국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야율초재가 칭기스칸에게 임관했을 때에는 엄연히 남송이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을 모두 죽이고 비옥한 농토를 목초지로 바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알아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몽골인들은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13] 여진인이나 고려인은 한인 계급으로 분류되었다.[14] 이 갑주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연히 최우선적으로 즉결 처분되었다.[15] 여자 노예가 결혼할 경우 영주가 먼저 여자와 동침하는 권리.[16] 중국 요리들 중에서,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칼로 조금씩 잘라가면서 나온 조각을 삶아서 면을 만드는 방식인 도삭면이 이때 처음 나왔다. 요리용이라도 함부로 칼을 소지했다가는 목이 달아났으므로, 굴러다니는 쇳조각으로 밀가루 반죽을 잘라서 면을 만들어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17] 이것은 정사초의 《대의략서》란 글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정사초가 반몽감정을 아주 강하게 가졌던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라 《대의략서》란 글 자체에 차별주의적인 논조가 스며들어있어 단지 제색호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 사회적 신분의 서열로 탈바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출처: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김호동).[18] 잡과 등이 이에 해당한다.[19]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귀국할 때 당시 황제인 순제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고려의 공물을 줄여달라고 답했고, 황제가 이를 들어주어 고려의 공물 상납이 크게 줄어들었다.[20] 당장 중국의 후대 유목민계 왕조인 청나라도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적극적으로 학문을 연구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과 유럽 및 중동의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였으며, 원나라가 특이한 케이스였다.[21] https://books.google.co.kr/books?id=SQWW7QgUH4gC&pg=PA492&redir_esc=y#v=onepage&q&f=true[22] 사실 중앙의 중서성은 지방의 행성들과 동일하게 수도 인근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던 곳으로 원칙상 중서성의 승상과 행중서성의 승상은 '동렬'에 위치했다. 그러나 울루스의 수장인 '카안'을 바로 옆에서 보좌하기에 어느 정도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23] 한국사에서 나타나는 '정동행성'을 말한다. 정동행성은 일본 정벌을 위해 설치한 기관이었지만 2차례의 일본 정벌이 무산된 이후에도 존치되어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이름에서 보이듯이 이 기관은 원나라의 지방 관청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가 원나라의 영토였는지 아니면 고려가 그대로 존속했으되 심하게 간섭만 받았는지 여부를 논할 때 정동행성의 성격은 매우 중요하게 거론된다.[24] 만호들을 총괄하는 군단급. '몽골'이란 이름이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몽골인이었다. 병력 정수 60,000~70,000명.[25] 1익 = 만호. 단, 사이 사이에 '상만호'라는 도만호부의 절반 수준의 크기를 가진 부대도 있었다. '한군'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계급상 3번째인 한인으로 구성되었다. 원나라는 남인들을 경계하여 군대에서 이들을 철저히 배제했다.[26] 물론 이때도 청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은 엄연히 존재했다. 단지 원나라만큼은 아니었을 뿐... 청나라도 원나라와는 다른 쪽에서 한족들에게 관용을 베푼 측면이 있으며, 특히 청나라 말기에는 청나라 황실이 외세를 막기 위해 한족들을 고위직에 대거 등용하여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한족들을 늘려나갔기 때문이다.[27] 애당초 원나라의 지배층은 자기들이 원하는 이익만 챙기면 남방의 한족들이 자기들끼리 뭘 어쩌고 지내든 별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야말로 자유방임적인 향촌 자치가 보장되었던 것. 이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이갑제를 도입해서 향촌을 강력하게 통제하려들었던 것과 비교해보라.[28] 다만 훗날의 청나라는 강남의 한족들까지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고 안 하면 참수까지 시킬 정도로 의무화했고 이를 멸망할 때까지 유지했다. 그러다 보니 태평천국 운동 때는 한족들이 변발을 잘랐으나 한인 전통머리인 속발을 몰라서 산발을 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29] 물론...... 원나라의 황실 가문인 보르지긴씨800년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카더라....[30] 정확히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몽골의 복식이었으며 이것도 명나라 홍치제 시기에 그의 선포로 한족 복식이 전통적인 한푸로 바뀌게 된다(15세기 후반).[31] 원은 훗날 쿠빌라이 칸에 의해 파스파 문자를 새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기록 문화가 약했다.[32] 북원이 내린 묘호. 말그대로 묘호이기 때문에 묘가 없는 명나라에서는 따로 묘호가 없다.[33] 선인보효황제는 북원이 내린 시호이며, 태조 주원장은 하늘의 순리대로 몽골로 물러가면서 자신에게 황위를 양위했다며, 순황제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원순제가 바로 이 시호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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