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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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 계통의 종교 내 개념
1.1. 힌두교 윤회의 문제점
1.1.1. 불교의 윤회론에 대한 오해와 진실
1.2. 윤회의 의의1.3. 타 계통 종교에서의 인식1.4. 불교의 윤회(환생) 부정?1.5. 대중매체 속 윤회
1.5.1. 철권에 등장하는 데빌 진의 기술
2. 인명

1. 인도 계통의 종교 내 개념[편집]

輪廻 / संसार(saṃsāra)
무릇 중생들은 여덟 번 다시 태어난 다음에야 반드시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확신을 얻었으며

그러나 사천하의 네 배, 세 배, 두 배 티끌 수에 해당하는 보살들은 각기 네 번, 세 번, 두 번 더 태어난 다음에야 반드시 성불(成佛)하리라는 확신을 얻었고

혹 사천하 그 만큼의 티끌 수에 해당하는 보살들만큼은 한 번만 더 태어나게 되면 반드시 일체지(一切智)를 이룬다는 확신을 얻었으니

- 분별공덕품 17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의 종교 용어. 산스크리트어로 (세상을) 둥그렇게 돈다는 뜻이다.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었다가 죽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마치 바퀴가 돌듯이 세상을 도는 듯하다고 붙인 단어로, 이를 한자로 번역하여 바퀴 륜(輪)을 써서 윤회(輪廻)라 하였다. 영어권에서는 흔히 Reincarnation이라고 하지만 이 단어는 윤회와는 의미가 다르다.

어원을 살펴보면, '윤회'의 원어인 Samsara는 산스크리트어로 '정처 없이 헤매다, 빙글빙글 돈다.'는 뜻에서 나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하여 윤회(輪廻)라 한 것이다. 그에 반해서 Reincarnation은 Re(재再)+incarnation(육체화肉體化)의 합성어로, 죽은 생명체가 다시 육신을 얻는 것을 뜻한다. 윤회라는 말에는 '끝없이 반복한다.'는 의미가 있는 반면, Reincarnation은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 환생을 한 번만 하는지 끝없이 하는지는 신경 안 쓰는 것.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산스크리트어를 로마자로 써서 Samsara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윤회란 구체적으로는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듯, 중생이 번뇌와 때문에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세계를 멈추지 않고 돌고 도는 것을 뜻한다. 즉 나 자신이 사망한 뒤 영혼이 되었다가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친 뒤 다시 영혼이 되어 또 태어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1] 이러한 윤회의 흐름은 일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몇 겁, 또는 몇억 겁 세월에 걸쳐 계속된다.

카스트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연관되는 경우, 선업을 쌓으면 내세에는 더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악업을 쌓으면 내세에는 더 비천한 신분, 또는 짐승이나 아귀로 태어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축생으로 여겨져 인간보다 못한 환생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지의법사(智義法師)는 이 말을 듣고 "용이란 축생의 업보인데 어찌 그것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즉 용이라 해도 결국 축생이므로, 불교식 윤회관으로 봐서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만 못하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되더라도 감수하겠다고 밝히고 왕 중 최초로 동해 바다 대왕암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 신문왕감은사를 바다와 연결되는 수로 구조로 지어 바다의 용이 된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반면에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힌두교의 윤회론을 반박하며 지금 고귀한 계급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반드시 전생에 큰 공덕을 쌓은 것은 아니라고 설파했다. 생명이 윤회를 거듭하는 한 여태까지 쌓은 공덕과 업보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생에서 고귀하고 천하고는 이전에 쌓았던 공덕과 업보가 돌아온 것일 뿐이니 이에 따른 차별을 금하고 공덕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표했다.
흔히 말하는 천상세계도, 불교의 관점에서는 윤회에 속박된 상태에 불과하다. 삼계 육도(三界六道). 천상세계에 다시 태어나도, 거기서 해탈하지 못하는 한 언젠가는 다시 죽어 환생할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번뇌와 업을 끊었기 때문이다. 번뇌와 업의 힘으로 윤회가 되는데, 그걸 끊었으니 더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 십이연기는 이 원리를 담은 불교 교리이다. 그리고 해탈하여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 사람을 깨달은 자. 다른 말로 부처라고 한다.[2]

불교적 이타행의 이상인 보살은 윤회를 이미 벗어났음에도 중생에 대한 크나큰 자비심으로 윤회세계에 들어와 화신으로서 활동한다고 한다. 서브컬처에서 ~보살의 화신이라는 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과거에 보살로서 억겁[3]의 세월 동안 수많은 세계에서 윤회하여,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인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한다. 본생담이라고 불리는 이 윤회 전생담에는, 이솝우화 등의 모티브가 된 각종 우화들이 포함된다. 여기서 보살이었던 전생의 석가모니는 사슴, 용 등의 다양한 축생으로도 태어난다.

비슷한 말로는 생사윤회ㆍ윤전ㆍ윤회생사ㆍ윤회전생ㆍ육도윤회 등이 있다.

윤회를 정치용어로 사용할 때에는 국가의 발전 단계에 인간의 성장 시기를 결부하여 설명하는 이론을 뜻한다.

1.1. 힌두교 윤회의 문제점[편집]

윤회설의 문제는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힌두교같이 전생의 업이 다음 생에 환생하는 계층을 결정짓는 종교인 경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윤회설의 부정적인 면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예시로는 카스트 제도를 들 수 있다.

물론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힌두교 같은 경우 지금 살면서 내가 전생에 좋은 선업을 많이 쌓아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른 생명이나 자기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을 괴롭히거나 하면 악업이 쌓여 그 과보로 다음 생에서 좋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회적인 차별과 지금 현재의 현시창스러운 상황과 대우를 당사자 본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쉬움도 사실이다. 가뜩이나 전생에 죄가 기억도 안 나는데 나쁜 환경에서 태어나면 이번 생에도 또 죄를 짓게 되고 결국 다음 생에도 더 나쁘게 태어나기를 반복할 확률만 높아진다. 이쯤되면 그냥 계속 죄짓고 살고 계속 나쁘게 태어나게 만드는 시스템과 뭐가 다른가?

윤회설 역시 피해자들을 전생의 업보라며 고인드립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아니나다를까 2015년에 발생한 네팔 대지진 때 그 재난 속에서 산모가 가까스로 구출되어 아이를 낳아 소중한 생명이라고 미담기사로 실렸는데, 많은 비공감을 받은 댓글이 '너네들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 저렇게 태어난다'라는 어그로성 댓글(...). 악플러는 장난으로 썼을 수 있으나, 사실 윤회설에 따르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게 문제(...). 과거 사이비과학인 우생학이 철저하게 금기시된 것은 약자나 약한 민족을 차별하고 탄압할 우려가 있기 때문인데, 환생설 역시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자아나 기억의 윤회는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기억나지도 않고 뭔지도 모르는 전생의 죄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인정한다는 게 될 수 있다. 전생과 전생의 죄가 기억난다면 "내가 벌을 받아 이렇게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하고 참회라도 하면서 살겠지만, 기억도 안 나는데 그럴리가 있나. 어찌보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

환생 개념 및 윤회설은 과학계에선 인간의 공정 심리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식량과 같은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해야 생존에 유리하므로, 인간은 불공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않은 상황을 납득하려면 반드시 그 이유, 명확한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계층을 분화시키고 소수자를 탄압하고 결과적으로 생산물을 불공정하게 분배하게 된 원인은 타고난 육체능력이나 지능, 부모의 지위와 같이 그저 태어날 때 랜덤으로 선택되는 것들이었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불공정의 원인이 고작 운이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이 공정하다고 납득하기 위해(또는 지배층이 피지배층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사실 내가 이런 부모 밑에서 이렇게 태어난 건 뽑기처럼 돌린 게 아니라 내가 과거에 한 선행과 악행의 결과다.'라는 논리를 만들어 단순한 확률에 인과관계를 끼워맞췄던 것이다. 그 결과 불공정을 불공정이라 인식하지 못하게 돼 차별 타파를 위한 노력의지가 약화되는 부작용도 생겨났다.

1.1.1. 불교의 윤회론에 대한 오해와 진실[편집]

단순히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과 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업설'은 구분하여 서술할 필요가 있다. 환생에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되는 불교나 힌두교 등의 윤회환생설 외에도 업과 상관 없이 무작위적으로 내생이 결정되는 환생 또한 포함된다.

업에 의한 윤회환생설만으로 논의를 한정짓는다 하여도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는 힌두교의 환생과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의 환생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불교의 업설에 의거하여 오해하기 쉬운 점들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다?

불교의 업설은 과거에 지은 업 외에도 현재에 지은 업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자신이 지었던 업이 있더라도 현재 본인의 의지에 의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즉 불교의 업설 혹은 인과응보설은 과거 업의 영향을 부정하지 않으나 현재 행위에 따라 과거 업 종자(種子)의 발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자유의지설과 숙명론(결정론) 모두를 배격한다.

만일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불변하는 숙명이 있다면 이것은 불교의 인과나 연기설에 위배된다. 때문에 석가모니는 출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계급을 인정하지 않고 행위에 따라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견해를 기반으로 하여 불교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승가 구성원의 평등을 보장하였다.
이름이나 가계는
세상에서 다만 정하여 쓰는 것일 뿐,
관습에서 생겨서 여기저기 쓰인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릇된 견해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알지 못하고 그들은 단언한다.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된다.’고.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출생에 의해 브라흐민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 브라흐민이 되기도 하고
행위에 의해 브라흐민이 안 되기도 한다.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고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하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고
행위에 의해 제관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제왕이 된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는
이처럼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다.

- 맛지마니까야 : 98 와셋타경, Vasettha sutta

2. 불교의 업설이 지배층의 권력강화, 신분차별, 약자와 동물 학대 등을 정당화한다?

불교의 업설을 오해하여 전생에 죄가 많은 탓에 이번 생에 약자나 동물 등으로 태어났으니 차별이나 학대를 당하여도 상관이 없다는 식의 착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업설이 때로 왕즉불 사상과 같이 지배층의 권력강화와 신분차별을 정당화하는데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의 자의적인 왜곡이지 불교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서술하였듯 불교의 업설은 숙명론이 아니며 현재 행위에 따라 업보가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평등을 천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대승 불교의 불성, 여래장 사상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여래장 사상에 기반을 둔 선종이 평민이나 지방 호족에게 각광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종교이며, 신분차별과 무관한 불교의 업설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리를 왜곡한 지배층을 비판해야 한다. 지배층에 의한 자의적인 왜곡은 비단 불교 뿐 아니라 유교, 기독교나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같은 거의 모든 종교나 사상, 이념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업설이 약자나 동물을 학대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업설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에 해당한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그 과보를 받는 자작자수(自作自受)가 원칙이기에 자신의 과보는 타인과 무관하다. 따라서 업보와 관련없는 타인이 업보를 빌미삼아 차별하거나 학대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를 수 없으며, 그러한 악행의 과보는 고스란히 악행을 행한 당사자가 지게 된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수없는 윤회환생을 거치며 모든 중생이 나의 부모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므로 부모였던 중생에게 자애와 연민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또한 수없는 윤회환생 중에 나 역시 고통받는 다른 중생처럼 괴로움을 겪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우월감이나 자만심을 갖지 말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친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
- 어머니의 경 (Mātusutta, S15:14)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 불행의 경 (Duggatasutta)

3. 불교의 선악 기준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없다?

혹자는 선악의 기준이 특정 종교에만 해당되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보편적일 수 없고, 따라서 선악에 따른 과보도 정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준은 특정 개인이나 종교 교리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리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참으로 애호(愛護)할 만한 안온한 과보를 초래하며 유정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선업(혹은 복업福業)이라 하고, 이와 반대되는 업을 불선업(혹은 비복업)"이라고 한다. 즉, 행위의 대상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여부로 선악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교의 업설은 특정 종교에만 해당하는 교리가 아니라 종교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4. 업보(과보)를 내생에만 받고 현생에는 받지 않는다?

흔히 현생에 지은 업의 과보를 마치 내생에서만 받는 것으로 착각하나 이는 불교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억측에 불과하다. 아비달마에 의거한 불교학자 권오민의 설명에 따르면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그것을 낳게 하는 인연에 따라 각기 다르다.

한 나무에 맺힌 씨앗이라 할지라도 견실하고 열등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한 시간에 싹트지 않으며, 설사 그 같은 차이가 없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조건, 이를테면 습도나 온도에 따라 일찍 싹트기도 하고 늦게 싹트기도 하는 것이다. 혹은 아마(亞麻)는 심은 지 세 달 반이면 그 결실을 맺지만, 보리는 여섯 달이 지나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 업도 그 성질에 따라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업에는 그 과보를 낳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그렇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다. 이를테면 무거운 번뇌나 맑고 깨끗한 마음에 의해 일어난 업, 즉 극악과 극선의 마음에 의해 조작된 업이나 습관적으로 행해진 업, 불·법·승이나 번뇌를 끊은 성자 등에 대해 일으킨 업, 그리고 부모를 해코지하는 등의 업이 정업이다.

그리고 부정업은 강력한 세력의 업이 아니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시기뿐만 아니라 이숙과의 내용도 결정되지 않은 업으로서, 이는 전적으로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유동적인 업이다.

정업에는 다시 그 과보가 현생에 바로 나타나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 또는 順現業)과, 다음 생에 나타나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 또는 順生業)과, 다음 생 이후에 나타나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 또는 順後業)의 세 가지가 있다. 금강경을 비롯한 일부 경전에서는 이런 순차생수업이나 순후차수업으로 발현될 나쁜 업이라도 경전을 읽거나 수행을 함으로써 현생에 미리 발현되게 할 수 있다고 설한다. 또한 이를 근거로, 경을 읽었는데도 인생에 고통이 많다고 해서 경 읽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럴수록 열심히 독송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5. 하나의 업만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업보도 하나뿐이다?

오직 하나의 업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왜 업은 하나인데 과보는 다면적인지(예를 들어 가난한데 외모는 출중하거나 건강이 안 좋은데 부유한 경우 등)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이란 '의도적 행위'를 지칭한다. 즉 신체, 언어, 정신으로 지은 모든 의도적 행위들을 업이라고 정의하며 따라서 지을 수 있는 업도 무수히 많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한다.
중생은 의도를 가지고 몸(kayena)과 말(vacaya)과 마음(manasa)으로 업을 짓는다.
- 업의 논의 (Kamma-Katha)

수많은 업들은 서로 내적인 직접적 원인(인, 因)과 외적인 간접적 조건(연, 緣)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여 다양한 과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에 의하면 위에서 예로 든 경우처럼 다면적인 존재로 환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6. 윤회하는 자아나 주체가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자아가 있다고 보지 않으며, 윤회란 그저 자성이 없는 업의 과보일 뿐이라고 본다. 다만 윤회의 자세한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부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
  • 상좌부 불교의 논서인 아비담마에서는 죽기 직전의 마음인 사몰심[4]이 먼저 일어나고, 죽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찰나 동안 일어나는 재생연결식을 거쳐, 바로 이어서 다음 생의 잠재의식(바왕가 찟따, bhavangga-citta)이 일어난다고 본다. 이 일련의 과정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연달아 일어난다고 한다. 주의할 점은, 사몰심이든 재생연결식이든 잠재의식이든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 티베트 불교를 포함한 대승 불교에서는 새로운 육체를 갖지 않은 중간 상태로서 바르도(bardo, antarabhava, 중음/중유)라는 단계가 있음을 설한다.[5] 죽을 때의 마지막 의식에 이어,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생전 육체와 똑같이 생긴 정기(精氣) 형태의 신체인 중음신이 생겨나고 그 신체에서의 의식이 일어난다.[6] 중음신은 중음 세계에서 최대 49일간 머무르며 다음 환생처를 찾아 여정을 떠난다. 이때는 다양한 표상들이 보이며, 생전의 업에 따라 성스러운 표상이 보일 수도 공포스러운 표상이 보일 수도 있다. 이때 만약 중음신이 인간 남녀가 성교하는 표상을 보게 되어[7] 음욕을 일으키면, 중음신의 의식은 아버지의 정(정자)과 어머니의 피(난자)와 감응하고, 이때 수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감응한 중음신의 업에 따라, 모체는 물론 집안 분위기가 좋거나 나쁜 방향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고 본다.

윤회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식의 생멸은 명상이나 경전 독송, 염불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냥' 알아지기도 하고, 오온의 흐름을 역순으로 관하는 수행을 통해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되짚어 관할 수도 있다. 불교 문헌에서 '전생과 내생을 안다'라고 하면 대개 이런 체험의 영역에 해당한다. 수행자는 이를 있는 그대로 체험해서 알 뿐, 이런 전생이나 내생 역시 '나'가 아님을 알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1.2. 윤회의 의의[편집]

  • 부정 측 입장
    윤회가 실제로 존재한다 한들 현생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즉, 윤회가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현생을 살아가는데 영향력 0%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뜻.[8]

    내가 전생에 누구였는지, 어떤 업보 때문에 현생이 누구로 태어났는지는 전생에 자신이 행한 일을 알아야만 의미가 있다. 현생의 업보에 따라 죽어서 극락 혹은 지옥을 가는 것은 행동에 관한 보상심리가 적용된다. 하지만 전생은 내가 아무리 착한 일은 많이 했어도 그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생 내내 고생만 하다가 다음 생애 금수저로 태어난다고 해도 결국 새롭게 태어난 당신에게 전생의 당신은 남일 뿐이다. 가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 테세우스의 배 얘기를 꺼내면서 영혼은 같고 신체만 달라졌을 뿐인데 완전히 다를 수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어찌됐든 전생이 현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전생과 현생은 별개의 삶일 뿐이다.[9]

    다만 생각하기에 따라 완전한 소멸보다 다른 생을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환생이 좋을 수도 있다. 결국 믿느냐 안 믿느냐는 자기 자유. 다만 그걸 남에게 납득시키려고 강요하지는 말자. 어느 정도는 사후세계에 대한 환상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 긍정 측 입장
    부정 측 주장대로 만일 기억과 감정에 의해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혹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는 완전히 동일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억, 감정과 같은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는 시간이 흐르면서 끊임 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만일 기억과 감정만으로 '나'라는 존재를 정의한다면 어느 한 순간에도 동일한 '나'는 없다.

    그렇다면 현생에서도 매 순간 동일한 '나'는 없기 때문에, 부정 측 주장대로라면 미래의 다른 '나'를 위해 입시 준비, 취업 준비, 노후 대비처럼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준비를 하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다. 그저 (적어도 현생에서는)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가 같다는 착각 속에서 고생할 뿐이다.

    환생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도 정신과 물질은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고정불변한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무아(無我) 사상을 역설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체는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고 착각하며 끊임 없이 윤회한다. 이렇듯 끊임 없이 변하는 '나'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없다는 불교의 관점에 대하여 부정 측 또한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정 측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비록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모두 다른 '나'이지만, 어떤 '나'이든 상관없이 생명체는 항상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전생의 기억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생명체가 고통을 멀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록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1년 후의 '나', 10년 후의 '나', 노년의 '나', 다음 생의 '나'가 모두 동일하지 않은 존재라 할지라도 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이렇듯 언제나 행복을 추구하는 생명체에게 윤회 환생과 인과의 원리는 행복을 얻고 고통을 피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윤회와 인과의 원리를 알게 되면 지금 순간의 행복만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미래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된다. 따라서 윤회와 인과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인과율에 따라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멀리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게 되고, 그 결과 이번 생과 다음 생까지 좋은 과보를 얻어 부, 명예, 건강, 장수 등 세속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행복 또한 조건 따라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불행해질 수 있다. 때문에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근원인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본래 '나'라는 고정불변한 존재는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달아 궁극적인 행복을 얻고자 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들에게 윤회와 인과의 가르침은 좋은 과보를 얻어 수행에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조건 [10]을 갖추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윤회의 끝없는 고통을 상기시킴으로써, 수행의 목표가 일시적인 행복과 평안이 아닌 윤회로부터의 해탈임을 명확히 인지하게 한다. 그리고 수행자 본인처럼 윤회의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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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타 계통 종교에서의 인식[편집]

인도 계통 종교에서의 개념이기 때문에, 다른 계통의 종교들에서는 생소한 편. 특히 내세에 그런거 없이 천국과 지옥이 있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와 명백히 대비를 이룬다. 한편 피타고라스 등 몇몇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역시 환생을 믿었고,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지주의 일파에서도 일부는 환생을 이야기했다.
놀랍게도 이슬람에 속한 소수종파중 환생에 대해 언급하는 종파가 있는데 바로 시리아의 주류 종파중 하나인 알라위파이다. 알라위파의 경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다만 알라위파는 교리의 특이성때문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류종파인 수니파는 물론 다른 이슬람 종파의 핍박을 받아오다시피했다.

1.4. 불교의 윤회(환생) 부정?[편집]

흔히 윤회라 하면 죽고 난 뒤 다시 태어나는 것, 또 이승에서 죄를 지으면 다음 생에서 개나 돼지로 환생하므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 근거 중 하나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성과 합리성에 매료됐던 사람들은 이 윤회 사상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며, 게다가 축생으로까지 환생한다고? 이 윤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해인사 주지인 현응 스님이 펴낸 ‘깨달음과 역사’(해인사 출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스님은 우선 사람들이 윤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윤회란 말은 본래 불교 언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윤회의 개념은 불교 이전 고대 인도 종교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가 살던 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은 한 번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이 재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한다.

먹을거리와 일용품이 부족한 빈곤하고 불평등한 사회체계에서는 삶이란 괴로움의 연속이므로 삶의 재생,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을 낳았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해탈 사상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이런 해탈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고행이나 제사 같은 종교적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 삶이란, 존재란 변화와 관계를 통해 이뤄나가는 것이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위배된다. 현재 삶에 대한 불만족이나 고통은 단지 빈곤이나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떤 도달해야 할 ‘절대’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 사고방식이다. 이런 이들에게 현재의 삶이란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에 탈피해야 하고 따라서 해탈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현응 스님은 윤회가 아니라 ‘연기’적 삶을 강조한다. 연기적 삶은 ‘나’ 혹은 ‘내 삶’에 얽매임 없이 변화와 관계로서의 열린 자세로 자유롭게 역사를 꾸려가는 것이다. 윤회가 현실에 두려움을 갖고 죽고 태어나는 일에 얽매이는 것이라 하면, 연기는 삶을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의 원처럼 연속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다시 스님의 말이다.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이니 하루에도 수만 번 나고 죽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윤회의 실상 아니겠는가. 곧 윤회란 변화를 뜻하는 말이며 그 내용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다. …현 상태에서의 안주와 좌절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뜨거운 윤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11][12]

1.5. 대중매체 속 윤회[편집]

1.5.1. 철권에 등장하는 데빌 진의 기술[편집]

철권 6 BR에서 데빌 진에게 추가된 기술. 커맨드는 8RK. 8입력을 유지해서 비공자세로 파생가능하다. 이전작 철권 6에서 데빌 진에게 추가된 연옥에서 3타를 단독으로 쓰는 기술.

점프 스테이터스 기술이기 때문에 하단과 낮은 중단기술을 피하는데다가 상단회피까지 있는 미친 기술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윤회-비공이행-아마라(비공자세에서 LK)-(바운드)-콤보 를 넣지만, 비공자세에 위험이 크기 때문에 비공자세로 가지 않는 윤회로 상대방이 헛치도록 하는 낚시도 존재한다. 거기다가, 전술한대로 미친 수준의 회피성능 때문에 막판 딸피싸움에서 조커카드로 사용하기도 한다.

철권 태그 토너먼트 2에서는 오우거에게도 윤회가 생겼다. 커맨드도 같고, 역시 비공자세로 이행이 가능하다. [14] 오우거의 윤회는 오우거 몸집이 너무 크다보니 상단회피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조금 특이한 상황에서 벽콤으로 쓰는 경우가 있다. 파트너의 태그 어설트 이후에 윤회(비공이행)으로 높은 벽꽝[15]-마르픽(비공자세에서 RP, 지상 및 공중에 있는 상대를 잡는 풀기불가능 잡기)으로 벽콤이 가능하다.

2. 인명[편집]

  • 조선 세종 때의 문신(文臣) 윤회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윤회

[1] 영혼이 된다는 것이 대중적인 윤회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불교 심층교리에서는 무아설(자아가 없다는 것)과 윤회설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윤회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고유한 개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에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윤회와 무아가 충돌하므로, 영혼에 자아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2]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 저지른 업의 결과는 피할 수가 없다고 한다.[3] 삼아승지겁이라고 한다.[4] 이때 자신이 태어날 다음 생의 모습이 표상으로 보인다고 한다.[5] 이러한 관점은 부파 불교의 설일체유부로부터 이어진 것이다. 상좌부에서는 바르도를 인정하지 않으나, 이런 사후체험 자체는 인정한다. 다만 짧은 시간 동안 아귀도에 태어났다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두고 중음의 단계라고 착각할 뿐이라고 본다.[6] 중음신이 생겨나는 시점은 신체적 죽음 이후 사나흘 뒤로 본다.[7] 이때 인간 남녀의 표상이 보였다고 해서 무조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생전의 불선업에 따라 동물으로 태어나기 전에 이런 표상을 볼 수도 있다.[8] 예컨대 카스트제도를 기준으로 보면 브라만은 공덕을 많이 쌓아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고 수드라는 악을 많이 행해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브라만은 모두 선량하고 수드라는 모두 악하던가?[9] 다만 종교가 곧 삶이자 생활이던 현대 이전의 시기에는 윤회는 일종의 정당성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개념이었다. 쉽게 말해 비록 밑바닥 인생이라고 해도 환생하여 부귀한 삶을 살 수 있고, 부귀하게 태어난 자는 선행을 쌓은 대가라는 얘기다.[10] 이를 불교에서는 '유가구족(有暇具足)'이라 한다[11] 윤해의 오해와 진실[12] 제314회 전생과 윤회에 대하여(윤회를 완전히 부정하는것은 아니나 일부 부정)[13] 인도의 신들 대부분을 흡수한 아르주나 얼터가 세계의 윤회를 가속시킨 이문대.[14] 윤회와 비공은 두 캐릭터의 기술이 같으나, 비공자세에서 파싱되는 기술들은 다르다.[15] 이미 벽꽝이 된 상태거나, 낮은 벽꽝이 되어버리면 뒤의 마르픽이 안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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