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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파일:attachment/이란-이라크 전쟁/iran-iraq.jpg

전쟁 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도.

나무파일:Chemical_weapon1.jpg

방독면을 쓰고 화학전을 치르는 이란군 병사.

1. 개요2. 배경3. 경과
3.1. 개전 (1980년 9월), 이라크의 기습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
4. 뒷이야기
4.1. 전쟁 당사국들
4.1.1. 이라크4.1.2. 이란
4.2. 국제적 여파4.3. 한국에 미친 영향4.4. 대중 문화

1. 개요[편집]

이란-이라크 전쟁, 혹은 이라크-이란 전쟁이라고 한다.

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80년대를 관통하며 8년여에 걸쳐[1] 이란이라크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1980년 9월 이라크의 침공으로 시작되어, 이란의 반격으로 장기화 되었고, UN의 중재로 휴전이라는 형태로 끝났다. 이후 걸프전이라크전을 거쳐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최종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영향은 중동권의 불씨로 남아있다.

역사상 마지막 국민국가 간의 총력전이다.(2017년 기준)
이게 마지막 총력전이 되기를 바란다, 아니 돼야 한다. 그런데 최악의 경우 안될 수도 있다.

2. 배경[편집]

이란과 이라크는 비록 오랜 앙숙으로써 군사정치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으나 모두 소규모 국경분쟁에 지나지 않았고 70년대 후반에는 사트 알 아랍 수로를 비롯한 국경문제에 합의를 도출하고 군사정치적 충돌을 일단락함으로써 (1975년 조약) 우호적인 관계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었다.

그러나 이란에서 1979년 민중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의 이슬람 신정체제가 등장하자 상황이 일변하였다.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은 사담 후세인의 경제발전과 이라크 국가주의 교육의 실시로 종파별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는데 호메이니가 이라크 내부의 시아파들에게 반란을 촉구하며 아랍 전체에 이슬람 혁명을 수출하고자 하는 공작을 개시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아파 소수국민과 순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유혈사태가 발발하고,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지역에서도 소요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란은 사트 알 아랍 강을 비롯한 군사정치적 합의를 모조리 깨고 일방적인 주장을 계속하였다.

사담 후세인을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아파 준동을 극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으며, 그 배경에는 이란이 있다고 보았고 이란을 격파하면 시아파 준동을 막고 군사정치적 위협을 배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 특히 사담 후세인은 근대국가 이라크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으며 쿠르드족, 수니파, 시아파라는 국내 갈등을 통합해 이라크 국민으로써 자신에게 복종하는 의식을 재편시키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오랜 숙원을 망가트리는 호메이니의 준동을 간과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또한 후세인은 샤트 알 아랍 강 국경 분쟁이랑 더불어 바르드 알딘 하산, 시트 알 후슨 섬과 범아랍주의의 영향으로 이란의 아랍인 거주구역인 후지스탄을 아라비스탄, 호람샤르를 모하마라라 탐내면서 이라크의 영토로 주장했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이란 내부의 문제도 전쟁 발발에 한몫을 하였는데, 이란은 팔라비 왕조 시절 친미,친서방 국가로써 중동 최대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부는 국내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모조리 숙청함과 동시에 군부 내의 미국 유학장교, 첨단 미제무기 조종사들을 모두 친미세력으로 보고 숙청해버렸다. 프랑스 혁명이냐 그 공백을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혁명수비대로 채워버리면서 자연히 이란의 군사적 자질은 심각한 저하를 겪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일세

더불어 사담 후세인은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속전속결로 크게 이긴 이스라엘군의 전략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이라크의 국력이 이란보다 뒤떨어지지만, 이러한 이란의 군사적 문제점과 전성기를 달리던 당시 이라크의 군사 수준을 고려하면 전격전을 통해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면서 이란이 자연히 협상 테이블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시아파 준동의 배경인 이란의 위협을 소멸시키고 대국인 이란과의 장기전이라는 위험요소를 떠안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사담 후세인은 비슷한 입장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의 아랍국가들에게 지원 약속을 받아내었으며, 이러한 배경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란-이라크전의 개전을 결정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해 왕조 하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본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UAE 등 걸프만 주변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라크를 지원하였다. 특히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아예 무기를 사다가 이라크에 대여해 주어서 이란을 박살내려고 노력했다.[2] 당시 이라크가 아랍연맹 가맹국들에 빌린 돈만 당시 돈으로도 무려 1,000억 달러를 넘었다.

3. 경과[편집]

3.1. 개전 (1980년 9월), 이라크의 기습[편집]

전쟁은 이라크 측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11일 전까지만 해도 "이란의 파괴나 점령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가 1980년 9월 17일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고 9월 22일부터는 바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표면적 목적은 1950년대부터 영유권 분쟁을 계속해온 샤트알아랍 강의 회복. 여기에 시아파의 확산을 우려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UAE 등 걸프만 연안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의 지원이 더해졌다.

전쟁 초반, 이슬람 혁명 이후 구 팔레비 왕조에 충성하던 군부에 대한 대규모 숙청[3]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있던 이란군[4]은 패배를 거듭했고 이라크군의 대규모 공세가 있을 때마다 수천 단위로 전사자가 발생했다. 따라서 전쟁은 일방적으로 끝나리라 예상되었다. 특히 이란은 알토란 같은 항공전력을 조종사가 없어서 놀릴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순식간에 호람샤르와 아바단을 비롯해서 이란의 주요 공업도시들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독소전쟁삘

3.2. 이란의 반격 (1980년 말 ~ 1983년 초)[편집]

그러나 이라크군 또한 이란군의 약화만을 믿고 즉흥적으로 시작한 싸움이었기에 곧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도 1980년 말부터 바로 말이다. 사담은 애초에 "히트 앤드 런"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전쟁 발발 직후 이루어진 유엔 안보리의 중재를 바로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개전 당시부터 애시당초 이란의 인구와 국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5] 휴전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전쟁에서 승리해 이라크를 굴복시키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상황이었다. 사담은 전쟁이 1년 이상 길어지는건 생각도 안해봤는데 말이다.

심지어 전쟁 발발 한달만인 1980년 10월, 전략요충지이자 석유산업의 중심지인 아바단을 둘러싼 아바단 공방전에서 이라크군은 전차 600대, 병력 2만을 동원하고도 5천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반격에 패주하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당하는걸 후세인이 꺼려했기 때문인데, 도리어 그 때문에 우월한 전력을 가지고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발목만 안 잡혔을 뿐.

호메이니는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이라크를 보고 11월부터 바로 반격에 나섰다. 호메이니는 금지되었던 팔라비 왕조국가(國歌)까지 다시 허용하면서 애국심과 단결을 고취시켰고 여기에 사상문제로 수감되거나 퇴출당했던 구 왕조시대 군인들을 사면하여 이란군에 복귀하면서 팔라비 왕조 시대에 쌓아두었던 서방제 무기들이 제 성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이라크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역시 매 앞에 장사 없다. 근본주의에 빠져 탈서구화를 부르짖던 인간이 궁지에 몰리자 다시 서방제 무기를 꺼내쓰는 모습이라니 물론 이란은 서방과 소련, 아랍 국가들의 경제제재로 가동률이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렇다 해도 팔레비 왕조가 쌓아왔던 견실한 국력과 인구구조, 기술력, 경제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결국 팔레비 왕조를 타도했던 혁명세력의 광신적 투지와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던 국력의 차이가 전쟁을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다. 특히 국가를 다시 허용하고 구 왕조의 군인들을 사면한 것이 의외의 전과를 올렸는데 호메이니의 정부보단 차라리 사담 후세인이 낫다고 전장보단 감옥에 있길 고집하던 공군 조종사들이 사면받자마자 대거 군으로 복귀한 것이다.

이후 전쟁은 이란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1982년 5월에는 대반격 속에 이란군이 1만명이나 되는 이라크군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이라크 군에 비해 열세인 지상전에 비해 제공권은 이란 공군이 확고하게 잡아서 개전 초기에는 이라크 공군이 이란 영공으로 침투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이란 공군이 바그다드를 포함하여 이라크를 공습하였고 1981년 4월 3일에는 747 조기경보통제기, 707 공중급유기, F-4, F-14를 총망라한 "스트라이크 패키지"[6]를 구성하여 이라크 국경을 돌아 시리아 국경과 인접한 이라크 공군의 H-3 비행장을 공습하여 30~50기의 전투기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1981년 6월 7일에 있었던 이스라엘 공군의 이라크 오시라크의 타무즈 원자로 폭격사건에 놀란 후세인이 공군 주력을 빼서 이스라엘 국경 방어에 돌리는 바람에 이라크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여하튼 전황은 이라크군이 이란군의 주요 루트를 점거하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빠진다.

호람샤르 시는 이란과 이라크가 몇번이나 번갈아 점령하는 격전지 중의 격전지였다. 네번째로 호람샤르 시를 점령했다가 다시 빼앗긴 이라크는 평화회담을 제안했고 이라크의 물주인 사우디아라비아도 파괴된 호람샤르 시를 비롯한 이란의 폐허를 재건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구슬렸지만 이란은 완강했다. 이란은 소위 시아파의 메카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르발라'를 비롯한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들을 죄다 점령하기 전까진 '거짓된 평화'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한마디로 이라크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이때 안먹었더니 30여년뒤 다에시 놈들이 다 때려부수고 있긴 하다 참다 못한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사브라 샤틸라 학살 사건을 일으키자 같은 무슬림들끼리 싸워서 되겠냐면서 전쟁을 멈추고 이스라엘을 조지자고 제안했으나 호메이니는 너네를 조진 다음에 우리가 이스라엘까지 진군하겠다고 씹었다.(...)

3.3. 끝없는 소모전 (1983년 ~ 1988년)[편집]

그러나 팔레비 왕조의 서방제 무기들도 지속적인 관리가 힘들어지고 잦은 전투로 파괴되자 갈수록 도태되기 시작했다. 치프틴 전차의 업그레이드형이었던 전차가 스펙상 모든 면에서 열세이던 T-62와 각각 250대씩 펼친 대규모 기갑전에서 무참하게 참패하거나 [7] F-14 톰캣 7대[8]MiG-21미라지에 의해 손실 되는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9] 그 밖에도 이 전쟁에선 이란의 AH-1J 코브라 헬기가 이라크의 MiG-21한대를 격추시켰다거나, 이라크의 하인드 헬기가 이란의 F-4E 팬텀을 격추시켰다거나 하는 괴이한 기록들이 많다. 심지어 이란군이 피닉스 미사일 한 발로 이라크 전투기 3대를 격추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경제사정이 나쁘다보니 항공전력과 해상전력까지 총동원한 총력전을 장기간 수행할 여력은 없었으므로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공군과 해군은 꼭 필요할 때만 출격시키고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심지어 지상전력조차 전차를 함부로 놀리지 못해서 보병 위주로만 굴리면서 전쟁은 전장에서 전차와 비행기를 찾아보기 힘든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케케묵은 인해전술까지 동원되는 상황이 되었다.[10] 본래대로라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 이란이 쉽게 이라크를 제압해야 정상이지만 이란을 싫어하는 미국과 아랍권 국가들이 필사적으로 이라크를 지원했기에 이라크는 대등하게 싸우며 이란의 공세에도 꺽이지 않았고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을 반복하는 교착상태로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란의 반격으로 이라크는 점령지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자라 강을 건너 이라크 본토까지 쳐들어온 이란에게 누르 알 딘 알리 및 아니스 알 쟈리스 섬과도 같은 자국 영토까지 뺏기는 수모를 겪었으며 기세등등해진 이란은 후세인 정권 축출을 외치며 이라크의 석유 파이프 라인과 항구를 봉쇄한다.

다급해진 이라크는 이란군에게 독가스를 사용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보지 못하자 스커드 미사일로 이란군과 이란의 민간인 지역을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빡친 이란도 그 보복으로 중국과 북한제 스커드를 수입해 이라크를 향해 쏴대기 시작했다.[11]

또한 전쟁은 이에는 이, 에는 피를 부르는 보복전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유전들이 우선 공격목표가 되었다. 그러다 상대방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공격을 받았고 1984년에 들어서는 공격은 주변국 항구를 출발하는 유조선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나중에는 기뢰까지 닥치는대로 뿌려대는 통에 페르시아 만은 물반 기뢰반이 되어갔다. 이에 미 해군 함대가 해로 수호를 명목으로 페르시아 만에 고정 배치되게 되었고 이는 결국 USS 빈센스 함 사건 같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

이라크는 이란 내 반이슬람 인사들에게 선전활동을 펼쳐 팔레비 출신 이란 파일럿들을 항공기 8대와 함께 투항시킨다. 그러자 이란도 가만있지 않고 쿠르드족의 독립을 제시하여 이라크에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12] 격분한 후세인은 1987년 사촌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시켜 화학무기로 수천명의 쿠르드족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50만명을 강제로 수용소에 수감시켜 쿠르드인을 제압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다룬 영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에서 종전 이후에 이 사건을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부총리 겸 외무장관인 타리크 아지즈가 "국제연합에서 우리가 쿠르드족을 학살한 것을 가지고 말이 많다."고 넌지시 경고하자 알리 하산 알 마지드[13]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전쟁 중에 뭘 바란 거요? 우리가 놈들에게 꽃이라도 보내줄 줄 알았나?"라고 코웃음을 친다. 물론 안 보내준 대가로 20여년 뒤 셋 모두 교수대로 끌려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14]

다시 이라크군은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각종 잡다한(EE9, PT-76[15]) 기갑장비들을 모아 초유의 반격을 성공시키며 여러 영토를 탈환하고 다시 이란의 주요 요충지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때 활약한 군이 후에 이라크의 공화국 수비대가 되어 후세인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라크나 이란이나 이득본것은 하나도 없고 국력만 피폐해졌다. 게다가 이라크의 천문학적인 전비를 감당못해 이라크 측 스폰서인 사우디와 쿠웨이트마저 발을 빼는 상황이 오게된다. 국력이 압도적이던 이란 측은 이제 승리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얼씨구나 하며 좋아했지만 쪽박을 차게 된 후세인은 약이 오른 나머지 사우디와 외교 단절까지 해버렸다.

하지만 1988년 2월부터 이라크 측이 "도시전쟁작전"으로 반격을 시작했는데 스커드B 미사일 폭격(2개월 동안 150회)을 감행해 이란 수도 테헤란을 쑥밭으로 만들고 1988년 5월 이란에 다시 쳐들어가는 등 마지막 발악으로 이란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벌인 공세가 바로 알파우 반도 및 미즈노 군도에서의 작전인데, 여기서 이라크군은 이란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다. 이라크군의 역량을 우습게 본 이란군은 다시금 큰 피해를 입고 이라크 영토 전역에서 쫓겨나게 된다. 여기에 국제적 고립 상황에서 피해만 본터라 이라크 정복은 일단 어렵고 나중에 다시 추진하자고 판단한 이란은 결국 이라크와 전쟁 전 상태로 돌아가는 정전협정을 통해 전쟁을 끝냈다. 물론 완전히 끝난 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나서다.

8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정규군, 시민군, 민간인을 합쳐 이란 측이 30만~80만, 이라크 측이 20만~50만 정도로 추정된다. 군병력만 따져도 이란 25만. 이라크 10만이 희생되었다. 부상자는 최소 100만 이상, 최대 200여 만 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낸 것이다. 또한 이란과 이라크 각각 5,000억$ 이상의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어 한동안 경제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라크는 이후 쿠웨이트 침공에 따른 걸프전과 이라크전, 그 이후의 대혼란 속에서 후진국으로 추락했고 이란 역시 전쟁 피해를 복구하긴 했으나 정권의 한계로 인해 국제 제재에 시달리며 중진국에 머물고 있다. 특히 이란은 최근에 경제난과 물부족으로 골머리를 않고 있다.

4. 뒷이야기[편집]

4.1. 전쟁 당사국들[편집]

4.1.1. 이라크[편집]

이 전쟁에서 막대한 돈을 전비로 낭비한 사담 후세인은 막판에 전비를 끊고 이라크에 꾸준히 딴지를 놓던 쿠웨이트를 침공하게 되어 걸프전의 계기가 되었다. 한때 사담의 비공식 후원자였던 미국이 걸프전과 이라크전으로 이라크를 무너뜨리고 후세인을 사형시킨 것이 지금 보면 아이러니.

4.1.2. 이란[편집]

한편 이란은 이후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지 않은 채 전쟁 피해를 빠르게 복구했으나 정권의 기본적인 속성은 변하지 않은데다 핵개발까지 추진하면서[16] 이웃 나라들의 욕과(...) 국제 제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진국을 유지하는 정도에 머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쟁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광신주의랑 소년병 문제도 국제사회에 충격을 준 논란거리였다. 이란에서 동원된 소년병들은 9살에서 12살정도의 어린 아이들이 많았고, 대부분 이란의 가난한 시아파 시골 지역 출신으로 처음엔 가족들이 광신적인 신앙심으로 자원시키거나 스스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쟁 말기가 되어갈수록 이란군의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이란 정부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었다. 심지어 도망 못가도록 줄에 묶인 채로 전방으로 내몰렸고, 순교자를 상징하는 흰옷과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목에는 천국의 열쇠를 걸고다니기도 했다. 소년병들은 거의 무장조차도 하지 못했고 그들의 용도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혁명수비대 진격 전에 앞장서서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돌진하면서 인간 지뢰제거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17]중동의 북한군 때문에 전투가 끝난 곳마다 전장은 이란 아이들의 시체로 가득했고, 이모습을 보고 경악한 이라크군 장교들도 많았다. 이란 이슬람정권의 이런 악랄한 인권탄압과 소년병동원은 페르세폴리스 등의 고발만화에도 나와있다.

이란은 당시 이란 내 아르메니아인 부유층들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군비로 썼기에 아르메니아계는 이후에 이란에서 더 큰 신앙의 자유 및 여러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이전과 달리 자국 내 소수 종교인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18] 어느 정도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완화하여 국민여론을 달래는 등 최소한의 개혁도 수행하였다.[19] 승리를 자신하던 호메이니는 예상이 빗나가 막대한 피해만 입고 이라크 점령도 실패한탓에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다. 게다가 반대파와 정적들의 공세와 지병까지 악화되어 은퇴를 고려할 정도로 실의에 빠지게 된다. 결국 전쟁 끝난지 얼마 안되어 1989년에 사망했다.

4.2. 국제적 여파[편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제적인 대리전 양상으로 번져갔다.

이란의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에 놀란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국가들이 이라크의 후원자로 나선 것은 위에도 설명했지만, 그 외에도 전 세계 곳곳의 온갖 국가들이 이 전쟁에 끼어들었다.

중동의 가장 강력했던 친미우방 팔레비 왕조를 상실한 미국은 당연히 이라크 편에 섰다. 하지만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실제로는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

여기에 중동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기도하던 소련도 이라크의 편에 섰다. 그리고 소련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던 중국은 이란에 붙어서 스커드 미사일과 각종 군수품을 팔았다. 그러나 중국도 실제로는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다.

1977년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체결로 아랍연맹 국가들과 관계가 멀어졌던 이집트는 아랍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위해서 이라크를 지지했다. 중동에 새로운 맹주 그것도 뼛속깊히 반미, 반이스라엘을 외치는 이슬람 근본주의 특히 시아파 세력이 나타나자 불안해진 이스라엘과 터키도 전쟁에 끼어들었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위상이 실추되자, 이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광분하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들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이라크에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서 돈을 두둑히 벌었다.

이러자 그냥 돈이 벌고 싶었던(...) 브라질, 덴마크, 체코, 포르투갈, 유고슬라비아 같은 국가들도 끼어들어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그리고 반미정권이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북한과 리비아가 이란을 지원했고, 북한이 끼어드니 덩달아 한국까지 개입하였다.

그야말로 동네방네 다 끼어들어서 국제적인 대리전 양상을 띄면서 전쟁은 더더욱 꼬여갔다.

사실 국제적인 대리전이라고 해도 북한, 시리아, 리비아, 포르투갈을 빼곤 이란 편이 없었다. 미국, 소련, 유럽, 터키, 중국, 이집트, 사우디, 기타 아랍국 가들이 한마음으로 이라크를 지원했기 때문에다만 미국과 중국 한국은 양다리 반극단주의로 대동단결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집권한 이슬람 정권이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반미/반소 노선을 걸으면서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한 결과였다. 혁명과 동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미국 및 서방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를 내세워서 이란의 문화와 제도를 중세 이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시아파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이슬람혁명 수출을 공공연히 떠벌이니 여타 이슬람 국가들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또한 외세는 다 필요없다는 영감님의 막장 외교술도 한몫하였다.

때문에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이라크의 민간인 학살과 화학무기 사용도 묵인했다. 이라크는 이란 민간인을 상대로 사린, 타분, VX 등을 사용하여 최소 5,000여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약 7,000~10,000여 명의 중독자를 내어 영구적인 장애를 야기했다. 사린, 타분 가스는 화학 구조만 다를 뿐 물리적 화학적 성상이 비슷하며 이 세 화학무기는 모두 신호 전달 매개(아세틸콜린)의 억제 효소인 아세틸콜린 에스테라제의 활성을 억제하며 최종적으로 호흡근육 마비에 의한 사망을 야기한다. 또한 이라크는 쿠르드족에게도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약 30,000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서방은 당시 이란의 이미지 때문에 이 모두를 묵인했다. 출처 : John Pitchel, Terrorism and WMD, p.46

이 전쟁으로 가장 많은 득을 본 건 미국, 유럽과 이집트, 브라질, 그리고 몇 아랍 부국들 및 수출국가 등 외세였다. 이들은 피묻은 돈이란 돈은 모두 벌어제껴 배를 불렸음에도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거의 지지 않았다.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라크에 원자로를 시작으로 전투기, 헬리콥터, 미사일, 자주포 등 소련 다음으로 많은 양의 무기를 팔아먹어[20] 피묻은 돈과 석유로 배를 불렸으면서도 나중에 악역은 미국에게 떠맡길 수 있었기에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로 손꼽힌다. 당장 이탈리아만 봐도 돈도 받았으면서 전쟁을 핑계로 이라크에서 주문한 호위함 5대를 인도하지 않고 자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독일(서독동독 둘 다)과 이집트, 스위스MP5나 잉여 Mi-8같은 자국 총기와 헬기를 엄청 팔아먹었고, 덴마크터키도 이라크에 의약품과 무기류를 팔았다. 아르헨티나는 이란측에 우라늄을 거래하기도 하였다. 가장 큰 스폰서였던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는 말할 것도 없다. 소련중국, 브라질도 한마음으로 이라크에게 무기를 팔아먹었다.

영국페니실린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는데, 이라크의 부정부패로 유통기한이 지난 페니실린을 수입해 수십명이나 죽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격분한 후세인은 1982년 3월 각료회의 도중 보건장관 리야드 이브라힘을 옆방으로 불러내어 직접 총살하였다.ㅎㄷㄷ

포르투갈 또한 카네이션 혁명으로 해외 식민지가 대폭 줄어들자 남아도는 잉여 물자들을 이란에 갖다 팔아먹었다.

그러다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압박으로 소련의 원조가 줄어들자 후세인은 미국에 러브콜을 보냈고 때마침 이란-콘트라 사건이 뽀록나 눈에 뵈는 것이 없던 레이건 행정부는 옳다구나 싶어서 이란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 지원을 시작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보통 석유 가격이 올라가고, 전쟁 초기에는 이란/이라크의 공급 중단이 영향을 끼쳤으나, 주변 OPEC 국가들의 공급여력이 충분하여 폭등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석유를 헐값에 팔아 유가가 오히려 하락하였다. 이는 두 나라 재정 악화에 더욱 영향을 미쳤고 특히 상대적으로 국력이 견실했던 이란보다는 이라크의 타격이 더 컸다. 또한 상대 국가의 유전을 전략적으로 파괴함에 따라 해양 석유 오염도 심각했다.

한편 OPEC의 유가 합의가 무너지고 저유가가 계속되자 이것이 대한민국 경제에 큰 호재로 작용하였다. 당시 저유가에 저달러, 저금리까지 맞물리면서 단군 이래 최고라던 대한민국의 3저호황이 시작된 것이다.

4.3. 한국에 미친 영향[편집]

대한민국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이라크에선 건설공사를 하면서, 이란에는 F-5, F-4 전투기, KH-179 곡사포 등의 무기 부품을 팔아먹었다. 중동 석유에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에 산유국인 두 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원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란군은 팔레비 왕조 시절 미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반미노선을 타면서 무기 유지 부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미, 반서방 외교를 표방하니 미국과 대부분의 친미국가들은 대이란 무기금수조치를 취했는데,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이란의 석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란과 무역을 계속한 것이다. 특히 전쟁기간 내내 미제 무기 부품의 중계무역으로 상당한 이득을 취했으며, 미국도 특별히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21] 동시에 이라크에서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모두 철수하는 와중에 끝까지 버티면서 건설공사를 진행했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두 나라와 우호 관계이다. 이란은 끝내주는 친북국가임에도. 당시 안기부국군정보사령부에서 이 둘을 이용 북한의 장사정포와 각종 무기를 비밀리에 입수하여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분석했다.

한국이 이란을 지원한 것은 미국1984년까지 사실상 이란-이라크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레바논에서 쌍코피가 터진 판(베이루트 미 해병대 막사 폭파사건)에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이란에 약점 잡힌 상태이기도 한 탓에 겨우 애꿏은 그레나다에나 화풀이할 정도였고, 레이건은 호메이니보다는 리비아카다피를 더욱 미워했다.

전쟁 당시 한국은 교전 지역에서 아래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
  • 1982년 8월 9일 이란 호메이니 항에서 화물을 내려놓고 출항하던 삼보 베너 호가 이라크군의 포격과 함포사격에 침몰, 9명의 선원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다.
  • 1984년 7월 1일 같은 장소에서 입항하던 원진 호가 이라크군 공습을 받아 침몰하였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같은 해 9월 16일에는 쿠웨이트를 출발한 유조선 로열 콜롬보 호가 스틱스 공격을 받았으나, 다행히 불발이라 함교에 미그기 만한 불발탄이 박힌 채로 국내 귀환하였다.
  • 1988년 7월 1일에는 이란 캉간에서 가스정유소를 건설하던 한국 대림산업 공사현장이 이라크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한국인 근로자 13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의 대책을 펼쳤지만 애시당초 전쟁중인 국가에서는 감수해야 할 리스크라는 결론만 얻었을 뿐이다.

당시 한국은 친미국가 중 군수용품을 이란에 판매한 유일한 국가였기에, 이 전쟁으로 인해 이란과 한국간의 관계는 오히려 돈독해졌다.

당시 김포국제공항민항기인 이란 항공 보잉 747 카고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부품(주로 F-4 팬텀 부품)을 담고 이란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때아닌 중계 무역으로 나름 짭짤하게 돈도 만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아무래도 이란이나 이라크 모두 손 대기 껄끄러운 미국의 방조 탓도 있었겠지만, 가장 확실한 배경은 북한이 이란에 무기 판매를 시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가로막기 위해 청와대가 나선 것이었다.[22] 당시 팔아먹은 무기가 꽤 많았는데 2011년에는 이란이 KH179 155mm 곡사포로 차륜형 자주포를 만든 것까지 확인되었다.

전쟁 중 다른 국가의 건설회사들은 안전에 대한 우려로 모조리 철수하는 상황에서 국내 건설회사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텼으며, 그 결과 1988년 위에 기록한 공습에 의해 인명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완료했다. 폭탄 맞아가며 버티는 한국 건설회사들을 보며 이란 지도부가 감동받아 이후로도 거래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5공화국 초기의 경제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1979년 일어난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은 커다란 경제 위기에 봉착했고, 1979년~1981년의 커다란 정치적 변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란에 대한 군수품 판매대금을 이용한 경제발전으로의 극복(?)과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란-이라크전으로 잡을 수 있었다. 전쟁 당시의 우호적 관계 덕분에 이란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좋은 편이어서, 호메이니가 치를 떠는 왕조 시대에 명명된 테헤란의 서울로는 이슬람 공화국인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이라크에게 적대적 입장을 취했냐면 그것도 아닌게, 전쟁 와중에도 한국과 이라크 간의 교역은 정상적으로 지속해 나갔다. 전쟁 와중인 1982년에 방콕, 쿠웨이트를 경유하는 바그다드-김포 노선을 대한항공에서 취항했고[23], 바스라에서 현대건설 직원들이 말 그대로 공사 현장에 포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가 대피한 사례까지 있었다.

북한은 이 전쟁 때 이란천마호, 곡산 자주포를 판매하고 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서 북한 - 이란관계가 긴밀해지게 된 계기가 된 반면 1968년부터 북한과 단독수교를 맺어왔던 이라크는 북한이 적대국인 이란을 지원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1980년 북한과 단교하였다. 양다리를 타려면 잘해야

4.4. 대중 문화[편집]

팝 메탈 밴드인 화이트 라이온은 이 전쟁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When the Children Cry라는 곡을 발표하여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기도 했다. 팝 메탈 및 LA 메탈이 항상 놀자판이고 사회적인 성찰이 없다는 의견에 반론으로 제시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1] 말이야 좋아 8년여지 8년동안 소강상태 없이 전쟁이 전면적으로 계속되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다만 상대편의 전쟁 수행 기반에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중한 지휘관들이 주도하는 전선 공방전이 장기화되고, 양측이 모두 어느 정도의 경제 규모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렇게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당장 한국전쟁도 초반 11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2년 2개월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2] 특히 이때 이라크군은 중동에서 10위권 내에 들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3] 설상가상으로 고위장성들이 쿠데타를 준비하다가 들통이 나면서, 호메이니는 장군들뿐만 아니라 장교, 서방제 무기를 점검하던 엔지니어들까지 이단이라며 모조리 감옥에 처넣었다.[4] 호메이니가 주도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소령부터 대령까지 고급 장교의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000명이 살해되거나 감옥에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란 전력의 상당수는 혁명수비대 및 이슬람 광신에 가득찼지만 전투 능력은 매우 떨어지는 자원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5] 이란 영토는 이라크의 4배이고 1980년 개전 당시 인구는 3배였다 (3900만 vs 1300만).[6] Strike Package. 적의 지상 목표를 공격하기 위한 공군의 기체 조합. 실제 전쟁에서 공군의 지상공격은 헐리웃 영화마냥 그냥 전투기가 혼자 날아가서 폭탄 떨구고 오는게 아니다. 예를 들어 적의 후방지역에 위치한 발전소를 폭격한다고 가정하면 우선 정찰기, 인공위성, 특수부대 등을 동원해서 발전소와 주변 지역의 방공망(레이더, 대공미사일, 대공포)을 정찰한다. 그 다음에 정찰자료를 바탕으로 침입항로와 퇴각항로를 계획한다. 실제 작전에 들어가면 조기경보통제기를 높이 띄어서 적군의 공군력을 감시하고 아군에 유용한 전술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한다. 당연히 조기경보기에는 호위전투기가 따라 붙는다. 그리고 전자전 기체들이 출동해서 강력한 ECM으로 적군의 레이더를 교란한다. 바로 와일드 위즐 기체들이 저공으로 침투해서 침입항로 상에 있는 적군의 방공망(레이더,대공미사일,대공포)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SEAD작전을 실행한다. 그리고 와일드 위즐 부대가 개척한 침입로를 따라서 지상공격기들이 고속이동해서 발전소를 폭격한다. 동시에 공중전에 특화된 공중우세전투기들이 이들을 계속해서 호위하며 적군 전투기들의 공격을 저지한다. 지상공격기 부대가 사전에 계확한 퇴각로를 따라서 철수한다. 역시 공중전투기의 호위가 따라 붙는다. 만일 목표지점이 멀 경우에는 사전에 약속된 지점에서 공중급유기가 공중보급을 실시한다. 그리고 폭격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정찰기가 발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조기경보통제가가 실시간으로 통제. 즉 한번의 발전소 폭격을 위해서 정찰기, 조기경보기(+경보기 호위 전투기 부대), 전자전기, 방공망 제압 공격기(와일드 위즐), 지상공격기, 공중호위전투기, 공중급유기까지 다양한 기체가 패기지로 동원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조합을 스트라이크(폭격) 패키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제 이 정도 수준의 스트라키크 패키지를 구성할 수 있는 공군은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다. 당장 한국공군만 해도 예산부족을 핑계로 정찰/조기경보/전자전/공중급유 같은 지원세력을 등한시 해서 상당히 기형적인 구조이다. 이란 공군이 이런 스트라이크 패키지를 통해서 장거리 폭격을 성사시킨 것은 미국이 훈련시켜준 팔레비 왕조시절의 이란 공군의 장교, 조종사, 지원인력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이다.[7] T-62들이 습지에서 훨씬 우세한 험지주파능력을 이용해 접근전을 벌였다고한다.[8] 이라크 주장으론 10대가 넘는다지만 특유의 뻥카는 어딜가나 있으니…. 이란 공군의 F-14는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44대가 작전 가능한 상태로 남았는데 초기 작전 가능 기체가 60대라는 걸 생각하면 손실된 16대가 부품 부족에 의한 비전투 손실 및 동류전환이 아닌 전부 격추되었다고 해도 교전비율은 1대 10이다. 이라크 공군의 주장 수준이면 1대 22~3 이며 이란 공군의 공식 주장인 격추 및 추락 3대라고 가정하면 1대 50의 비율이다.[9] 물론 이란은 개전 2일만에 F-14로 12기를 격추하였으며 이라크 항공기들의 이란 영공 침입 시도 자체를 막아버림과 동시에 이란 공군의 이라크 공습 작전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F-14 전투기 운용이 어려워지면서(그 유명한 미군도 정비 등의 어려움을 이유로 F-18로 대체했다) 20~30대 만이 작전 가능 상태가 되자 이란의 핵심 시설을 방어 하는 임무로 전환되었다. 그럼에도 F-14는 전쟁 기간 동안 160대의 이라크 전투기를 격추하였고 이라크 공군은 초기 F-14에 의한 혹독한 피해로 F-14가 등장만 해도 이라크 조종사들은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가기 일쑤였기에 이라크 공군은 F-14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10] 심지어 이란은 고아들이나 정치범 수용자, 그 식구들까지 지뢰 제거에 썼다. 물론 이라크도 쿠르드족 포로들이나 정치범을 똑같이 써먹었기에 둘 다 국제적으로 욕 먹었다.[11] 이 와중에 북한은 이란과 비밀리에 군사관계를 맺고 이란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라크군이 날린 미사일의 잔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소련에 그토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스커드 C형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12] 물론 자국의 쿠르드인의 독립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탄압했다.[13] 그 유명한 케미컬 알리.[14] 단, 타리크 아지즈는 셋 중 유일하게 '그나마' 평안한 죽음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사담과 케미컬 알리는 진짜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아지즈는 사형 선고를 받고 실질적으로는 무기수로 살다가 2015년 옥사했기 때문. 게다가 알리는 한 수 더 떠서 중간에 교수형 과정이 심각하게 잘못되서 목이 잘려나가버렸다.[15] 심지어 2차 대전 유물급 전차로 몇몇 국가에 치장물자로 남아있었던 M36 잭슨, T-34-85, M4 셔먼, 처칠 전차 이탈리아제 소형 전차 L3 탱캣 등까지 이 당시 사모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굴러갈 수 있는 기갑장비는 다 사들여!? 어떻게 전쟁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옛날 무기가 텨나오나? 이라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중 티크리트 인근에서 버려진 이들 구형전차들이 미군에게 발견되었다. 이런 잡다한 장비들은 대부분 돈 없이 신용거래로 사온 것이라 전후 이라크 경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라크가 나중에 쿠웨이트를 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6] 다만 북한처럼 핵 선제타격 권리니 핵탄두 소형화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이용을 내세운다. 괜히 드러내놓고 추진해봐야 미국이 전면 개입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17] 조셉 커민스, <The War Chronicles> 2권, 409P.[18] 하지만 100% 관대한것은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와 바하이교의 경우 심각한 탄압을 받고 있으며 이란 내 기독교도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는 처지다.[19] 이란의 산아제한 정책도 시행된것도 이시기였는데 1970년대 이란의 출산율은 6명대 수준을 기록하였고, 이슬람 혁명 성공이후에 출산율이 더욱더 높아졌고 자연히 엄청난 속도로 인구가 폭증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세속화된 이라크나 요르단 같은 국가들도 사정이 다른건 아니긴 하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병원이 부족해지자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이란 정부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고, 그 덕택에 빠른속도로 출산율이 하락하여서 1980년대 초반에 6명대였던 출산율이 2000년대 들어서 1명대로 진입하는데 성공을 거두었고, 덕택에 2010년대 들어서는 산아제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출산장려정책을 펴고있는게 현실이다. 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사정이 낮다. 그래도 출산율이 1.8명대[20] 대표적으로 쉬페르 에탕다르 전폭기와 엑조세 대함 미사일. 후세인은 중동전쟁 경험으로 소련제 항공기에 대한 불신감이 강했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 이전부터 비행기들만큼은 유럽제를 사들였다. 분노한 이란은 프랑스가 이라크에 무기를 공급할 경우 서방국가 원유 수송로의 중추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라크는 이란의 항만 지역에 기뢰를 부설했다고 발표했다. 위에서 언급된 기뢰가 이때 나온 이야기다.[21] 나중에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드러나지만 미국의 레이건 정권도 이란과 이런저런 뒷거래를 하고 있었다.[22]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은 제 3세계에 대한 외교 경쟁 또한 치열하게 전개했다.[23] 그 유명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바그다드-방콕-서울(김포) 노선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