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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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프로게이머2. 대한민국의 배우3.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4. 대한민국의 영화감독5.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관료

1. 대한민국프로게이머[편집]

2. 대한민국의 배우[편집]

배우 이종석(배우) 항목 참고.

3.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편집]

4. 대한민국의 영화감독[편집]

영화감독 L.잭슨 이종석(영화감독) 항목 참고.

5.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관료[편집]

나무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111021181210_V.jpg

1958년 경기도 남양주에서 출생했다. 1984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북한지도집단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 <조선노동당의 지도사상과 구조변화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각각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종석은 이미 대학원 재학 시절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논문이 포함될 정도로 북한 연구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김일성 가짜설을 반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1] 을 담당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세종연구소에 본격적으로 북한 관련 연구에 나섰으며, 특히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꾸준히 주장하면서 햇볕정책의 당위성을 옹호하는 대표적 인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수행원의 일원에 포함되기도 했다.

2003년 출범한 참여정부에서 외교안보분야의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외교통일안보 분과 인수위원에 포함된 것을 시작으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의 사무차장으로 재직했다. 외견상으로는 NSC의 2인자였지만, 실제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의 수립, 집행을 실질적으로 설계 및 주도한 주역이었다는 것이 대내외의 중론. 문정인 교수와 함께 동북아균형자론 같은 참여정부의 외교안보분야 큰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2]

이라크 전쟁 추가파병 규모를 3천명 이내로 제한, 대북 포용정책의 옹호, 수평적 한미관계에 입각한 대미 자주외교 등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논란의 한가운데에 위치했으며, '자주파 대 동맹파'에서 자주파의 간판주자로 알려져 왔다. 참여정부에서는 실체가 없는 구도라고 반박했지만, 대부분의 언론에선 믿지 않는다(...). 실제 양쪽이 반목했었다는 얘기는 이런저런 소스들을 통해 제법 나온 편. 대략 소속을 통해 나눌 수 있는데, 보통 이종석을 위시해서 학자 출신 청와대 외교 안보 라인이 자주파, 윤영관, 반기문, 송민순을 위시한 친미성향의 외교부 관료들이 동맹파로 분류되었다. 때문에 보수 진영에서는 '대표적인 친북/반미인사'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어왔다. 아무튼 파병 규모까지 최종 확정된 후 노무현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신중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갖춘 관료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며,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아니었으면, 이라크 파병 규모를 3,000명으로 줄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당시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관료들은 7,000명 규모를 지지했는데, 개인 성향대로라면, 파병을 반대했을 사람(이종석)이 미국 측 관리들과 적극 협상에 나서 파병 규모를 3,000명으로 줄이는 데 애썼다는 것. 이 파병 규모 협상으로 대통령의 큰 신뢰를 얻은 이종석은 2006년에는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외교안보 정책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부시 정부가 2005년, BDA(Banco Delta Asia) 제재라는 역대 제일 수준의 대북(對北) 제재를 실시하자[3], 북한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이듬해(2006년) 6자 회담을 깨트리고 동년 7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 10월에는 첫 핵실험을 강행하는 초강수를 두며 미국을 압박한다. 이 북한 핵실험으로, 우리나라가 한반도 내에서 유지하고 있는 군사적인 우위구도에 변화가 생기면서[4], "남-북 경제협력(개성공단) 자금이 북핵개발자금으로 전용되었다."는 보수 층의 의혹제기와 함께 거센 비난의 화살이 이종석 통일부 장관에게 쏟아졌다.[5] 결국 그 해 12월,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의미로 외교, 국방장관과 함께 교체되어 공직에서 물러난다.

현재는 세종연구소로 복귀하여 연구활동에 전념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북한 문제에 대해 언론에 글을 기고하거나 인터뷰, 조언을 구하는 정치인들에게 자문을 하는 모습이 종종 언론에 노출되고 있다.


[1] 김일성에 관해서는 크게 3가지 학설이 제시되어있다. 김일성가짜론과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되 그것이 과장되어있다는 김일성왜소론, 그리고 항일무장투쟁과정에서 김일성의 지도적 권위를 인정하는 김일성인정론이 있다. 이종석은 바로 이 김일성인정론을 견지했다.[2] 문정인 교수는 여러차례 직책을 제안받았으나, 외부에서 조언만 해주는 학자로 남았다는게 차이.[3] 쉽게 말해, 북한과 금융거래를 하는 개인·단체는 미국과 금융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과 거래를 못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금융기관은 사실상 전 세계에 없다. 따라서 각국 금융기관은 이를 피하기 위해 북한과 거래를 끊게 되고 이 같은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 효과로 북한은 국제 금융네트워크를 이용할 수 없어 돈줄이 마르게 된다.[4] 우리나라의 군사적 우위는 변함없지만, 북한이 최후의 순간에 쓸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카드가 생김[5] 사실 98년 ~ 07년 사이의 북한은 무기를 구매해줄 사담 후세인, 무아마르 가다피 같은 고객이 건재했기 때문에, 2006년 무렵에만 연 10억달러의 무기판매 수익을(맨 밑에서 7번 째 문단) 올렸다. 즉, 남-북 경협자금을 전용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무기개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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