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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업가 이철호
1.1. 생애1.2. 관련서적1.3. 관련된 이야기
2. 탈북자

1. 기업가 이철호[편집]

나무파일:external/news.chosun.com/2007051400006_0.jpg

노르웨이에서 '노르웨이 라면왕'으로 유명한 요리사 겸 식품 수입업 기업가. 2003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때 노르웨이 사람들은 김대중을 '라면왕이 태어난 나라의 대통령'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1.1. 생애[편집]

1937년 2월 23일 한국 충청남도 천안시 출생. 한국전쟁 중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채 주한미군에서 구두닦이 등의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큰 부상을 입어 노르웨이군 야전병원에 실려갔으며, 한국 내에서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해병대 사단장 월터 슈나이더 장군이 신문광고를 내어 노르웨이에 전쟁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난민으로 갈 수 있었다. 1954년 4월 노르웨이로 가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노르웨이에 첫번째로 건너간 한국인이라고 한다. 병원에서 3개월만에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까지 노르웨이어를 배웠다고 한다.

이 시기 그의 고행은 상상할수도 없는 것으로, 화장실 비우는 일[1]을 하기도 하고 폴케테트렛 극장에서 일본인 단역 배우, 벨보이, 신문배달부 등의 잡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았다. 배가 고파서 모이용 을 사다가 에 불려 먹기도 했으며 영양실조로 쓰러져 실려가기도 했다고 한다. 1955년 11월에는 이미 노르웨이어가 능숙해져, 신문기사에서 하콘 왕의 위독 소식을 듣고 위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슬로의 포스 김나지움(Foss videregående skole)에서 영어로 수업을 받고 졸업했다.

노르웨이는 선진국인데다 복지국가인데 왜 상식과 맞지 않는 고생을 했느냐면, 1954년 당시에는 2차 대전 직후라서 노르웨이도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난했던 나라였으며 복지제도고 뭐고 없었다. 그 당시 노르웨이인들은 감자를 감자살이 벗겨지는 게 아까워서 깎지 않고 그냥 먹을 정도로 가난했었다. 노르웨이가 현대에 우리가 아는 부유한 사민주의 국가로 거듭난 건 이철호씨가 성인이 된 후인 1960년대 후반에 북해 유전이 터지면서 선진국이 되었지, 이철호씨가 한창 이민 초기에 고생했을 때는 노르웨이 자체도 원래부터 비옥하다고 부르기 힘든 지리에 2차 대전의 참화까지 더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처음부터 요리사가 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배가 고파도 식당에서 일하면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홀멘콜렌 호텔에 식당 청소부로 들어갔다. 청소를 잘하니까 주방장이 요리를 공짜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홀멘콜렌 호텔 측에서 장학금을 줘서 1950년대 후반 오슬로엘베바켄 상업학교에서 4년간 공부해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엘베바켄 상업학교 측에서는 약 700만원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주었고, 프랑스로 가서 공부할 것을 추천했다. 하지만 스위스로 가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면서 요리 공부를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독일 뒤셀도르프 지방에서 노르웨이식 뷔페 식당을 열어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으며 주요 고객 중에는 독일 총리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스타방에르(Stavenger)에서 호텔조리 관련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 면허도 땄다. 노르웨이에서는 1968년까지 홀멘콜렌 호텔블롬 식당에서 일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는 묄하우젠(Møllhausen)에서 중간관리직으로 일했다. 이 회사는 식당 체인점으로, 첫번째 점포를 맡으면서 일을 시작했지만 20년간 15개로 불려놓았다. 하지만 이 기업은 1987년 덴마크의 한 기업에 매각되었고, 이철호 역시 일을 그만두었다. 이 시기 1970년대 이철호는 인삼차 수입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날려먹고 (...) 그 가루를 빵에다 더해서 'Mr.Lee의 인삼빵'을 만들어 손실을 최소화했다. 그 외에도 몇 번의 사업 실패를 겪었는데, '발가락 양말'을 수입했다가 수천개의 재고만 남게 되었다.

퇴직 이후 50세 즈음 라면 사업에 대해 구상한 뒤 3년 동안 개고생을 했는데, 한 식품기업에서 3년만에 그 맛을 인정하고 대규모 주문을 넣으면서 라면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미스터 리(Mr.Lee) 라면은 이 시기 탄생했으며, 그의 나이 52세때였다.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전 노르웨이의 '라면왕'으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미스터 리(Mr.lee) 라면은 노르웨이 현지 시장에서 95%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2007년 기준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간 2,500만 봉지의 라면이 팔리고 있다. 20년 이상 라면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 리'가 '라면'을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철호씨가 라면을 알게 된 것은 1971년의 일이다. 당시 스웨덴 정부는 한국 출장을 요청했다. 이 때 처음으로 라면을 먹어보았는데 정말 맛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방부제 등 성분검사를 통과하고 통관 절차를 거치는 데 3년 이상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또, 노르웨이인 입맛에 한국 라면이 맞지 않았다. 너무 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철호는 노르웨이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스를 가지고 한국의 유명 라면회사 연구소를 방문해서 연구진과 함께 스프를 개발했다. 요리사로 일한 경험을 되돌아 보니 나라마다 독특한 소스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소스를 먼저 알아놓은 다음 거기에 맞추도록 노력했다. 처음에 한국 라면을 그대로 도입했을 때는 망했지만, 매운맛을 빼고 기름진 맛을 더해서 출시하자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마케팅에 엄청난 신경을 썼다. 벌어들인 수익은 필요 경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홍보 비용으로 투입했다. 신문 방송에 광고를 내고, 한국 여행 경품을 걸었다. 또 라면 표지에 한글을 적어놓아 한국에 호기심을 갖게 했다. TV 광고에는 자기가 직접 나와서 한국식 명언을 말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1989년 Rieber & Søn에 브랜드를 매각하고 상품 개발에 전념하였다. 이씨는 "내가 100살도 못 살 텐데 내가 없어도 '미스터 리' 라면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며 "동양 사람들이 자기 묻힐 묘를 만들고 죽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Rieber & Søn는 2012년 노르웨이 최대의 식품업체인 Orkla 그룹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Mr.Lee 브랜드도 Orkla가 소유하고 있다.

2004년에는 한국 전쟁 참전 노르웨이 군인들을 위한 공로로 '노르웨이 왕 훈장'을 수여받았다.

http://www.klikk.no/incoming/img-1150113/BINARY/original/Mr.%20Lee_legg2_s2_019.jpg
가족관계는 독일여성 안네리제 비테(Anneliese Witte)와 1964년 결혼해 딸 세 명을 낳았으며 6명의 손자녀를 두고 있다. 아내는 독일 Leichilingen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펜팔을 통해 서로 4년간 알고 지내다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2] 1984년 암으로 사별했다. 자신의 성씨를 남기지 못하는 것 때문에 딸을 낳는 것에 대해 대놓고 실망했으며, 이로 인해 독일의 장인 장모와 갈등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다른 서양 국가들과는 달리 여자가 결혼한 후에도 아버지 쪽 성을 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런 남아선호사상을 포기하고 만족했다. 이철호씨의 뜻대로 셋 모두 결혼 후에도 Lee 성을 쓰고 있다.
사별 3년 후 한국인 여성 '이해정'과 재혼했다.

한국 시장에 진출할 계획도 세웠는데, Kongsnegl이라 불리는 식용 달팽이를 한국에 수출할 계획이었다.

2006년에 잠깐 한국시장에도 진출했으나(세븐일레븐에서 위탁판매) 노르웨이 입맛에 맞게 개조한 스타일이 한국 사람 입맛에는 안맞았는지 이내 철수하고 말았다. 다만 미스터 리(Mr.lee) 라면의 자재는 농심그룹에서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국내 관련 행사에는 농심이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1.2. 관련서적[편집]

과거 '노르웨이 라면왕 미스터 리 이야기 Be Happy!'라는 책이 국내에 발매되었지만, 이 책의 경우 이철호나 관련 인물들이 직접 쓴 책이 아니며, 본인이 말하기를 유령작가가 대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은 위의 책이 발간되고 난후 얼마 후에 공식적으로 책의 출간 정지를 요청했으며, 더이상 팔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해외에 있고,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는 이상 저작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책이 계속해서 팔리고 있다고 한다. 독자가 손해볼 일은 없으니 보고 싶으면 봐도 된다.

그리고 이철호 씨의 셋째딸이자 노르웨이 현지 기자인 이리나 리 씨가 저술한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마'라는 책도 있다. 그의 삶에 대한 "공식적인" 첫번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 4월 말에 공식 출간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 16일 이철호 씨가 방한하여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마> 출간을 기념하여 독자와 만남을 가진다고 한다.

노르웨이어 뉴스기사에서 몇 개의 사진을 볼 수 있다. [3]
자유아시아방송 인터뷰

1.3. 관련된 이야기[편집]

전쟁으로 헤어진 후 한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전쟁의 아픔이 실감나는 대목인데, 개인적인 어려움과 고국의 사정이 겹치면서 부모님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는 52세에 시작한 라면 사업이 대박이 났고, 그는 75세의 나이에도 일을 계속하며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외에 MBC 네버엔딩스토리, <성공시대>, KBS <한민족 리포트> 등에도 출연한 바 있다. 가히 노르웨이와 한국을 잇는 가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덕인지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에서도 대접이 융숭하다고 한다.

2011년 5월 자서전 출간 기념과 사업관계로 방한하였다. 5월 16일 인터파크 독자강연회, 5월 18일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 기자간담회, 5월 19일 교보문고 독자강연회 등의 행사를 진행했고, 저자이자 딸인 이리나도 동행했다. 일간지 및 방송국과 활발한 인터뷰를 하고 있다. KBS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5월 31일자 9시 뉴스에도 나오는 위엄을 보였다. 5월말 공식 일정을 끝으로 출국했다.

실제 모습이 궁금한 사람은 여기에서 영상을 보자.(강연회 영상)


강남스타일도 춤도 추셨다!

2. 탈북자[편집]

나무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2101700269_0.jpg

조선인민군 육군 중위로, 2군단 보위부 근무 중 2008년 4월 27일 노크귀순을 통해 탈북하였다.



차마 구할 수 없는 북한 식재료 대신 질 좋은 남한 식재료를 대용으로 쓴 인민군 짬밥 재현 영상 속의 인물로 유명하다.



그 전에도 GP에서의 감시장비 식별문제를 정확하게 증언해서 지적해준 사람이기도 했다.[4]

허나 여느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생활에 부적응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기 나름대로 북한 관련 실상을 알리는데 노력했지만, 사실 그 분야가 돈 안되는 분야 중 하나인지라 한국 사회가 크게 알아주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그나마 탈북자 단체의 도움으로 취직을 해도 직장 생활에 적응을 못했고 방송출연에만 매달린 나머지 회사생활을 소홀히하여 해고당하기까지 했다. 그만큼의 개인 경제적 문제에 더해 가정불화까지 겹치면서 불행한 일만 연달아 생겼다.

결국 아내와 불화가 심해져 살인미수 혐의로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에게도 이혼소송과 절차가 진행중이라 이혼당하는것이 시간 문제다.
[1] 당시 노르웨이 화장실들은 구조상 변기에서 떨어진 배설물들이 관을 타고 지하실의 양동이에 떨어져 고이는 구조로, 어느 정도 차면 이걸 치워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와서 비우는 구조였다.[2] 딸 이리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것이 감동적이었으며, 항공우편이 큰 상자에 쌓일 만큼 주고받았다'고 한다.[3] 내용은 이미 번역되어 나무위키에 추가되었다.[4] 물론 그의 증언은 한국군에서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