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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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6대 국왕
인조 | 仁祖
파일:파주 장릉.jpg인조의 시신이 안치된 파주 장릉 파일:조선 인조.jpg인조 동상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열조(烈祖) → 인조(仁祖)
개천조운정기선덕
(開天肇運正紀宣德)[1]
조선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장목(莊穆)
출생
1595년 12월 7일 (음력 11월 7일)
즉위
1623년 4월 13일 (음력 3월 14일)
사망
1649년 6월 17일 유시 (음력 5월 8일)
(53년 6개월 / 1만 9,541일)
장릉(長陵)
재위
조선 국왕
1623년 4월 13일 ~ 1649년 6월 17일
(음력 1623년 3월 14일 ~ 1649년 5월 8일)
(26년 2개월 5일 / 9,56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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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종(倧)
천윤(天胤) / 화백(和伯)
능양군(綾陽君)[3]
영사전(永思殿)
부모
부친 원종[4], 모친 인헌왕후[5]
부인
1. 개요2. 묘호 "인조"3. 일대기
3.1. 출생 및 초기
3.1.1. 동생의 자살3.1.2. 인조반정과 집권
3.2. 책봉 문제
3.2.1. 정명공주와의 관계
3.3. 이괄의 난3.4. 정묘호란3.5. 병자호란3.6. 말년
4. 치세와 정책의 영향5. 총체적 평가
5.1. 비판
5.1.1. 이중외교의 파탄5.1.2. 두 번의 호란과 굴욕5.1.3. 인정을 상실한 비정한 군주
5.2. 긍정
5.2.1. 보론: 인터넷 인조 인식 비판
6. 인조의 능7. 인조 외모8. 인조 어필9. 동상10. 대중매체에서11.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조선의 제16대 임금. 본명은 이종. 조선왕조의 네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으로[6] 백부 광해군과 지지세력인 북인(대북파) 일파를 축출하여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선조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 구씨다. 선조는 또 다른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광해군을 낳았고, 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정명공주영창대군을 낳았다. 따라서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은 인조의 삼촌, 정명공주는 인조의 고모가 된다.[7]

정원군연주군부인 구씨장남[8]으로 태어나 능양군[9]으로 책봉되었다. 원래 인조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 과정을 통해서 왕위에 오른다.

왕비는 두 명으로, 능양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仁烈王后)와, 그녀가 1635년 늦둥이를 낳다가 사망하고 3년 후인 1638년에 간택된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로 불렸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 어렸다.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인조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으로 평가된다. 조선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10]까지 모두 인조의 후손들이다. 다만 인조의 직계는 헌종-철종에서 끊겼으며, 고종은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의 후손이다.[11]

처음으로 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왕조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중국과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의 정치를 이어갔다.[12][13]

2. 묘호 "인조"[편집]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결정되어 있었다.
"오대십국시대 남당의 임금 서지고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大行)[14]에게 이 글자를 쓰는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이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대행 대왕의 공덕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世宗)과 세조(世祖)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하건대 이미 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仁)'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자로 고치소서."[15]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을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을 지켜 업을 높였다"이다. 실록에선 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에 부합된다고 적었다.

시법에서 인(仁)은 유교에서 추앙하는 최고/최상의 덕으로, "인조"라는 묘호는 성군 중의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 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16]"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17] 이후 사대부들에게 세종(조선)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18] 그리고 조(祖)는 보통 재조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아주 영예로운 묘호로, 조(祖)나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래도 조를 종보다 더 높게 치는 일이 많았다.[19]

즉,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이라는, 거의 요순급의 이상적인 초월 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사뿐만 아니라 5000년 한국사를 통틀어 현종대왕이나 세종대왕 정도만이 어울릴 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즉, 암군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그런 수준의 묘호다. [20]

3. 일대기[편집]

3.1. 출생 및 초기 [편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연주군부인 구씨가 그곳에서 능양군인 인조를 출산한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 보고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왕을 돋보이기 위한 덧붙인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이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행장(行葬) 특유의 과장으로 보인다.

3.1.1. 동생의 자살[편집]

선조 때 능양군(綾陽君)으로 봉해졌다. 정치 감각이 빼어났던 할머니 인빈 김씨가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후 입장을 바꿔 자신의 조카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여러모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초기 때까지는 대우가 좋았다. 그의 아버지 정원군은 왕실 종친의 어른으로서 광해군이 옥사를 일으킬 때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역할 정도만 하면서 유유자적 지냈다. 하지만 살벌한 공안정국은 이들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위 중반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심각해진 광해군은 역모 고변만 있으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옥사를 일으키고 혈육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1615년 8월, 이른바 '능창군 추대 사건'이 발생한다. 전라도 익산의 진사 소명국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수안군수 신경희[21]와 친했지만 어떠한 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신경희는 소명국을 죽이려고 윤길과 (신경희의 숙부 신할(申硈)의 사위였다) 모의해 소명국을 음행(淫行)을 고발했다 옥에 갇힌 소명국은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뜬금없이 신경희가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 등이 신경희의 사촌 누이의 양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을 했다 그러면서 이 반역의 결과로 추대될 왕족으로 신경희의 사촌 누이의 양아들 능창군을 지목했다. 그 근거라는 게 신경희 일당이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를 내보였다는 증명 불가능한 주장이었다.[22]

신경희는 대북파의 일원으로 정인홍의 제자이자[23]이이첨의 사람이었기에[24] 평소 대북파는 역적 토죄를 일삼았기 때문에 유희분과 박승종을 비롯한 소북 세력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추관이 된 박승종은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이첨까지 옭아매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희는 자신은 정인홍의 고제(高弟)이자 이이첨과 마음을 통하는 벗이며 대북(大北) 사람들은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역적질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어찌 신이 하였겠습니까[25] 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명국은 교활하고 구변이 있어기에 소명국과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쩔쩔매었기에 신경희의 역모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분노한 광해군은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신경희와 윤길, 양시진은 극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봉산군수 윤공과 백령첨사 윤숙이 인성군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했다. 윤공, 윤숙, 인성군은 유배를 가고 신경희는 형신하는 동안에 다섯 번이나 역변(逆變)을 고해 죽음을 늦추고자 하였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윤길(尹趌)·양시진(楊時晉) 역시 신문을 받다가 죽었으나 끝내 자복한 자가 없었고 소명국(蘇鳴國)은 보방(保放)되었다 능창군 역시 이때 잡혀와 창덕궁 인정문 뜰에서 광해군에게 직접 심문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후 옥에 갇힌 뒤 강화도 교동군으로 귀양을 떠났다. 유배지에서 칼을 찬채 석회수로 지은 밥을 받아 먹으며 비참하게 살던 능창군은 견디지 못하고 모멸감과 수치심 때문에 스스로 목을 맸다.

광해군의 장기가 상황 조성은 다해놓고 일이 벌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슬쩍 물러나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능창군을 죽이는 것보다 비참한 신세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야 약과 의원을 보낸다, 자살을 병사로 보고한 지방관들을 처분한다 부산을 떨었지만 애시당초 근거도 없는 고변을 그대로 믿고 그 상황을 만든 사람이 누구던가? 평범한 왕족 능양군은 이때부터 복수의 칼을 갈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인조는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오른 중종과는 달랐는데 엄연히 반정을 주도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중종에 비하면 자기 목소리를 냈다.[26]

다만 종친이 정사에 관여하는 길이 막히기 이전 사람이며 반정 이전 한 정파의 수장이었던 태종, 세조와 달리 평범한 왕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처럼 자기 세력을 완벽하게 쥐는 장악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걸 인조 개인의 역량 문제로 몰아가는 악의적인 기술을 했는데 태종, 세조 때는 종친이 조정에서 요직을 차지하는데 장애가 없었다.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왕자들에게 병권을 부여해서 친위 세력으로 삼으려 했고 세종은 태종 시절 짝짓기로 수를 불린 특권층을 견제하고 자기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왕자들을 키웠다. 덕분에 정안군과 수양대군은 가장 강한 정파는 아니었지만 한 정파를 이끄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왕의 의중에 따른 관제데모나 사신 접대, 제사 같은 소일을 제외하면 종친의 정치 참여가 아예 막힌 시대에 태어난 인조가 그들처럼 되는건 능력과 별도로 불가능했다.[27]

3.1.2. 인조반정과 집권[편집]

그럼에도 인조는 신경진, 구굉과 함께 초기부터 반정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명백한 주역이었으며 심지어 인조 정권에 반기를 든 반란 세력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인조 정권 수립 직후 있었던 북인 잔당의 반란 기도에서 거론된 명분이 인조의 즉위 과정에 대한 반발이었는데 그 내용이 마땅히 먼저 소성대비를 받든 다음 그 명에 따라 임금을 정해야 하는데 금상(今上)은 스스로 왕위를 취했으니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29]

광해군의 폐위에 명분이 없다는 광해군 옹호론의 주장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폐모살제와 영건 사업으로 인한 민생 파탄은 현대 대중들이 생각하는 그런 가벼운 게 아니었다. 광해군 재임기 15년간 조선의 민생은 이미 한계를 넘겨 파탄 직전에 있었다. 광해군을 죽이지 않은건 그가 한때 왕이었고 여전히 왕족이었기 때문이지, 인조반정 명분이 부족해서라고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조선에서 왕과 왕족은 엄연히 사대부들 위의 특권 계층이었고 아무리 죄가 커도 왕족을 함부로 죽이려드는 왕은 없었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후(인목왕후)를 폐하고 형제(임해군, 영창대군)를 죽인 암군을 징죄함을 명분으로 삼은 임금이 폐주라 하나 자기 삼촌을 죽이면 명분이 살겠는가? 인조 즉위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광해군은 건강해야 했다.

3.2. 책봉 문제[편집]

명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국왕은 충순(忠順)한데 왜 폐위시켰냐는 반응을 보였다.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 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 것도 방해받았다.

어렵사리 북경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곱지 않은 명나라 대신들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으며, 당시 명 황제는 조선왕을 시해했다는 소문은 물론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까지 듣고있어서, 조선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 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 동안 책봉 고명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인조 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완전한 도움은 아니었다. 이때 인조가 명에 쓴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쓴 은의 총량을 능가했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계기가 된다.[30]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지 2년 뒤, 햇수로 즉위 3년째 되어서야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왕에 책봉된다. 광해군이 친명배금 정책을 따르지 않고 금수와도 같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니 폐위시켜야 한다는 서인들의 논리를 도리어 명나라가 깨버린 셈이었다.[31]

3.2.1. 정명공주와의 관계[편집]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인조와 정명공주와 대립 관계를 나타내지만, 당시 소성대비, 정명공주 모녀는 유폐되어있었기 때문에, 살벌한 공안정국 아래 서로 만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정명공주를 옹주로 강등하고, 폐서인으로 만들려고 한 측은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다. 그리고 이 대북파를 지원한 사람이 광해군이다.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사람 역시 광해군이다. 기록에는 이이첨이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건 광해군이 분위기 조성까지 다 해놓고 슬쩍 빠지는 술수를 썼기 때문이다. 소성대비정명공주 모녀를 바로 궁궐로 복위시키고, 막대한 전답을 내려준 사람은 인조다. 광해군이 계속 즉위했다면 절대 광명은 없었을 테니, 정명공주로서는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이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인조는 할머니 소성대비와 고모 정명공주를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감시를 하였다. 이는 공주의 어머니 소성대비가 정치적 식견이나 처세에 능하지 못한 인물이었던 데 원인이 있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인 인물이었던 소성대비는, 공주와 사위에게 주기 위해 지속적으로 땅과 재물을 요구하고, 왕만 탈 수 있는 어구마를 사위에게 내려주며 인조의 권위를 슬슬 긁었다. 광해군 폐위 명분 중 하나가 폐모살제이고, 인조의 왕위를 인정해준 사람이라 일단 숙여야 하는 입장이다보니 겉으로는 늘 숙였지만, 인조라고 그런 행동들이 기꺼울 리가 없었다. 결국 소성대비 사후 공주에게 화살이 날아가게 된다.[32]

1632년(인조 10년) 인목왕후가 죽은 지 얼마 뒤 인조는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정명공주가 저주 굿으로 왕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날부터 정명공주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다. 옛날 사람이라 미신을 잘 믿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기물 몇개 묻는 걸로 간단히 조작할 수 있는 굿과 저주는 왕실의 여인들을 역모에 엮어 넣을 때 가장 손쉽게 쓰이는 방법이다. 광해군 시기 대북이 소성대비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칠서의 옥을 꾸몄을 때 그러했고, 뒷날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를 제거할 때도 그랬다.

인조는 자신의 병의 원인으로 정명공주로 지목했으나,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서 안 된다고 주장해서 위기를 넘겼으나, 인조가 죽을 때까지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고, 여염집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숙이고 지냈다.

이 숨 막히는 감시는 1649년 인조가 죽으면서 비로소 풀어졌으나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효종도 정명공주를 견제했고, 심지어 그녀의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정명공주가 위협 없이 온전히 어른으로 대접 받은 것은 정통성으로는 누구도 비길 바가 없었던 숙종대에 이르러서 였다. 정명공주가 시집간 풍산 홍씨 가문은 홍봉한, 혜경궁 홍씨, 홍국영영조정조 때 권력의 실세가 된다.

3.3. 이괄의 난[편집]

인조 정권은 초장부터 불안했다. 집권 직후에 대북을 갈아버렸고, 반정의 명분이었던 폐모론에 소극적이었던 소북도 조금이나마 숙청했다. 비록 대북 숙청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서인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소북 숙청은 이뤄졌고, 게다가 인조 반정에 협조적이었던 북인 잔당(중북)들도 벼락을 맞게 된다. 이 배경에는 서인 김류 주도설과 인조 주도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라도 이원익이 한탄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다.
  • 이 소북 숙청에는 인조 자신의 복수라는 의견도 있다. 능창군의 죽음 당시 능양군이 소북의 영수인 유희분에게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얻어 가며 뇌물을 바쳐 동생을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유희분은 능양군의 말을 무시했고(유희분이 뇌물을 먹고 입을 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동생이 죽자 복수를 맹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 중북 숙청 과정에서 반정 공신 이괄에 대한 혐의가 공신들의 내분으로 이어져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 혐의로 하옥하려고 하자 화가 폭발한다. 문제는 당시 이괄이 부원수로, 조선의 북방 군대를 사실상 전담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 하다 못해 이괄의 군권이라도 빼앗고서 숙청을 해야할 것인데 정작 군권은 그대로 놔둔 채 숙청을 시도했고, 그 결과 이괄은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살해한 뒤 후금을 막기 위해 훈련받은 군사 1만을 끌고 남하하여 안주, 평양, 황주, 개성전격전의 속도로 함락하고 수도 한성까지 점령한다. 내부 반란으로 한성을 점령당한 조선 시대의 반란은 이 반란이 유일무이하다.[33]

인조는 파천하여 의자왕이 그랬던 것처럼 공주목공산성으로 피신하였으며 이괄은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반란군은 무악재(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자신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인조는 이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괄의 잔당에 의한 기습을 우려해 공산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괄의 목을 국왕에게 바치는 헌괵례를 거행한 뒤에야 공주를 떠났다. 5일 동안 공주에 머물면서 인조는 문무과를 치러 공주의 인재를 뽑았고 충청관찰사와 병사, 공주목사의 품계를 올려줬다. 무사히 반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그가 머물던 곳에 있던 두 그루 나무에게 정3품 품계를 내렸고 그 옆에 이를 기념한 쌍수정(雙樹亭)이라는 누정이 세워졌다. 쌍수정 옆에는 인조가 공주에 머문 사실을 기록한 사적비와 비각이 있는데 인조를 수행한 우의정 신흠이 글을 지었고,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이로 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체계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후에 이괄의 부하들은 청군에 편입되어 수도까지의 지름길을 알려줘 국방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게 된다. 결국 인조의 허술한 숙청은 북방군 체계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핵심 인력들을 반란군&청으로 이탈시켜 조선을 공격하게 만드는 대가를 치른다.

참고로 인조가 피신했던 공산성은 백제의 두 번째 수도 웅진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후에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온조왕이 꿈에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줬다는 설화와 관련지어 보면 이래저래 백제와 인연이 있는 모양새다.

3.4. 정묘호란[편집]

서인 정권은 흔히 '친명 배금' 정책을 고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반정공신들은 주화론자였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정권이 (후대의 효종 같은 경우와 비교해) 적극적인 반청 정책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 있다. 광해군 대의 외교 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내부적으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일반 백성들에게 친명 배금을 표방한 것은 당연한 문제였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사대하겠다고 말하면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결론은, 결국 이런 친명 배금 정책 덕분에 인조 5년에 또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 인물인 이귀나 최명길 등은 주화파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중에도 그런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도 숫제 매국노 취급이었다. 이렇게 반정을 일으킨 서인 멤버들을 특별히 공서(훈서)라 하는데, 광해군 시절의 북인(특히 대북)들보다 더 현실주의적인 세력들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인 외교 방법을 논한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34]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척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후금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35]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버리지 못했다. 광해군 때부터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동일한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이 엎어진 건 병자호란 이후 더이상 명나라를 도울 수도 없고, 명이 청의 공격도 아닌 농민반란으로 망해 실망을 금치 못한 뒤이다.

전쟁의 원인은 천명제 누르하치와 숭덕제 홍타이지 시절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와 정치적 원인이 컸다. 청은 기세등등했으나 산해관조차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경제력이 홍타이지 때 즈음에는 고갈되는 중이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1626년까지 만주에 2년 ~ 3년 연속의 대기근이 닥치면서, 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점에서 청은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과 명나라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으나, 점점 비굴해져가는 상황이었다. 1627년에는 식량값이 8배로 뛰어 군대를 유지하기도 벅찬 지경에 이르면서, 홍타이지에게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또한 광해군 대의 조선은 이미 광해군과 박승종의 명을 받은 정충신이 후금의 정보를 캐내고, 홍타이지를 집중적으로 경계해 그가 후계자가 되기 이전부터 주목하며 철통 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기에, 홍타이지는 조선을 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36]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이중외교를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했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 것으로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인조는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로 이중외교만 어느정도 유지했고,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강경파였던 후금의 홍타이지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고, 이괄의 난으로 인해 방비는 아작났는데, 광해군 때의 방비의 절반만 복구해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정충신이 평가하고 인조를 설득했음에도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된다. 당시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 정권의 타도를 기치로 내건 후금은, 빠른 기동전으로 성을 피해 바로 수도를 공략했다. 이에 조선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을 담당하는 방어군이 무너진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37] 당시 서인 정권들도 전략 수립에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전력 공백과 반란군 진압시 병력 피해 등도 알고 있었기에 병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38]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급격히 약화된 서북 지역의 군사력 으로 인해, 인조반정 이후 계획된 후금에 대한 군사 전략은 그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또한 이괄의 난 이후 강화된 기찰은, 북방 무관들이 제대로 된 훈련조차 맘놓고 못하게 만들었다. 정묘호란 중 자폭하면서까지 분전한 영변부사 남이흥은, 유언을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남기기도 했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국왕은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를 마시지 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정묘화약).

그러나 후금은 어거지로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조공 자체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또 가도모문룡을 함께 토벌하기도 했다. 후금에 세폐를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징발하는 통에 애꿎은 조선 백성들만 허리가 휘었지만, 조정에서는 대충 넘어가며 8년이 흘렀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의 목전에서 여전히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의 태도에 앙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정권은 전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 단절까지 생각하게 된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전쟁나면 큰일난다고 막긴 했지만, 결국 둘은 인조의 눈 밖에 나 유배를 간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도원수가 바로 김자점이었다.[39]

3.5. 병자호란[편집]

정묘호란 8년 뒤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가 사망했다.[40] 이에 후금은 조문단을 보냈는데, 이와 함께 홍타이지를 황제로 함께 추대하자는 의견도 함께 보냈다. 표면상으로야 조선이 형제국이니 함께 의논하자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이제 자신들을 상국으로서 모시라는 압박이었고, 인조는 논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물러가는 후금의 사신단에게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홍타이지는 격분하게 된다. 인조 14년에 또다시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41]

형제관계와 달리, 칭제인정은 명의 속국으로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 사대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신앙적으로 명을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있었다.[42] 오히려 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명이 부모의 나라에다가, 임진왜란 때의 재조지은까지 있어, 그 신앙이 크게 강화되었기에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43] 이는 명에 대한 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정권을 쥔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은 이중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조선을 설득하길 포기한 홍 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으로 바꾸었다. 예전부터 조선에 강경파였던 홍 타이지는, 칭제인정을 거부하고 초강경 국서를 투하, 동시에 팔도에 교서를 내려 방비를 분부하는 인조정권에 분개한다. 최명길의 반박상소에 곧 다시 화친으로 정책을 바꿨지만, 사신이 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한다.[44]. 음력 병자년 12월로, 양력(그레고리력)으로 1637년 1월 되는 해였다.

결국 인조는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강화도도 못 가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 만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 농성으로 버텼지만, 전쟁 전에 식량을 바깥으로 빼놓았기 때문에 결국 물자가 바닥났다. 이때 백제 온조왕과의 인연으로 온조왕사(溫祚王祠)를 건립하게 되는데 자세한 설화는 남한산성 항목 참조. 온조왕사는 후에 정조(조선) 대에 팔전 중 하나인 숭렬전으로 격상된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인조를 구하기 위해 출발한 각지의 근왕군(속오군)들은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쌍령전투 등으로 청군에게 각개격파 혹은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압도적인 수적 우세에서도 청의 기동 전술에 휘말려 흩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도망친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는 과정도 일이고, 재조직해 다시 공격을 할 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일부 승전을 거둔 근왕군들도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 때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자점의 주력 함경도 근왕군은 한번 털린 이후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45]

이괄의 난의 영향으로 중요지점에는 중앙의 측근들만 기용하고 국내 감시가 너무 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병자호란 때도 도원수 김자점과 중요한 요충지인 강화도의 장신, 김경징 같은 무책임과 무능력자들을 임명했는데, 최소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인조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사령관을 잘못 임명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군이 집단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한 것도 있다. 이괄의 난 이후 기찰(감시와 통제)이 심각해졌고, 군 지휘관들도 본인들 안위를 위해서 군 훈련 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몽골 침입 때도 굳건했던 강화도마저 함락당해 강화도에 주둔하던 왕자들까지 포로로 붙잡히는 꼴을 연출하게 된다[46]. 물론 몽골군과 달리 청군은 수전을 피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차이 또한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이미 명나라를 버리고 튄 모문룡의 수하들로부터 대량의 수군과 군수품을 지원받은 사례가 있다. 즉, 몽골과는 달리 수군 전투력이 강했다는 말이다.

3.5.1. 삼전도의 굴욕[편집]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0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각개격파되어 더이상 희망이 없자 김류, 최명길 등이 "피폐(皮幣),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자, 결국 주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하여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이는 한국사에서 왕이 몸소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린 최대의 굴욕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굴욕으로 인하여 왕권이 바닥을 쳤다.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기사를 보면 삼전도 굴욕 후 창경궁으로 환궁하기 위하여 한강 소파진에서 배를 타는데 신하들이 먼저 타려고 인조의 옷을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올랐다. 이렇게 망신을 당했는데도 인조는 처벌하지 못했다.[47]

청은 왕에게 굴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후세에 길이 남기도록 비를 세우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줄여서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48] 다시 말해 조선을 침략한 적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스스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현대까지도 남아있는 이 비석은 당시 유교 국가이자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해온 조선의 입장에서 실로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내내 두고두고 조선의 수치를 상징하는 표시로 남았으며, 한국사의 흑역사로 치부되어 현대까지 수난을 겪었다. 청의 국력이 약해진 구한 말부터는 당연히 보복의 대상이 되어[49] 훼손의 운명을 겪었다. 고종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바로 삼전도비를 파묻었고, 일제가 이를 다시 복구했으나 이번에는 1956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당시 문교부에서 치욕의 상징이라며 또 파묻었다. 1963년 이걸 또 꺼내서 다시 훼손하지 못하게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이번에는 2007년 2월 3일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 국가적 치욕이 버젓이 서 있는걸 볼 수 없다며 페인트로 훼손을 가했다.[50]

훼손된 삼전도비는 정부에서 정성껏 복구해 조선 시대의 원위치로 옮겨 세워놨다. 관련 기사 허나 아무리 반면교사적 가치가 있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좀 안타깝다. 하지만 비록 치욕의 역사라고 해도 역사는 역사라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들 또한 이를 통해 후세가 교훈을 얻을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것이다.

어찌되었던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지만 조선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3.6. 말년[편집]

병자호란의 패배는 인조가 개판을 친 것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군 자체가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을 겪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탓에 막장이었던 것도 있어서, 그나마 실드를 쳐줄 구석이 약간은 있다.[51] 하지만 소현세자 문제로 인간으로서도 비정하다고 욕을 먹는다. 또한 궁궐 뒷부분에 연못을 파고 잔치를 자주 벌였으며, 궁녀들이 들고있는 가마에 타고 놀았고, 그 가마에 떨어져 다친적도 있었다.

하지만 큰며느리 강빈마저 비정하게 죽였던 인조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고 4년 뒤 인조는, 날씨가 한창 더워진 인조 27년인 1649년 6월 어느 날,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학질 증세로 사망한다. 실록에는 며칠 전부터 감풍 등의 증세가 있어 계속 침을 맞았던 왕이 갑자기 두드러기오한이 났고, 의원이 진찰한 결과 학질증세가 있다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수명 40세임을 감안하면, 55세까지 살았던 인조가 조선 시대 왕 중에서 단명했다 말하긴 힘들지만.

4. 치세와 정책의 영향[편집]

조정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고,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 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때문에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었고,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딱하게 여겼는지 환속 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조 본인부터가 불탄 한양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문제를 인식하고 바꿀 생각은 안 했던 인간인지라...[52][53] 다만 이건 당대 기득권층 대부분이 비슷하긴 했다. 백성들이 불쌍하긴 한데, 내 기득권은 내주기 싫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 회복된 것은 효종 - 현종기를 거치면서였다.

이후 소현세자를 박대하고, 급기야 아예 후계를 세손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바꿔버리면서 왕권이 약해지게 된다. 당장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로도 신하들에게 책 잡힐 행동은 하지 못했으며, 죽은 다음에도 예송논쟁에서 보듯 계속 시비에 시달렸다. 정통성 문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진 현종도 클 대로 큰 산당을 제어하는 데 고생을 했고, 결국 숙종 대에 가서야 왕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정작 인조 본인은 즉위 자체가 서인 정권의 정당성과 연결되어 있었던 데다, 명이 멸망한 후 청은 조선이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54], 죽을 때까지 나름 강한 왕권을 누리고 갔다. 물론 그 왕권으로 그가 한 것은 전쟁 피해를 조금 복구한 정도고, 그나마도 아들과 손자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노력하다가 차례로 과로사해야 했다.[55] 여러모로 무책임한 왕.

더구나 인조가 모문룡이 죽을 때까지 가도에 보낸 군량미가 매년 3만 석이며, 이마저도 모자라면 모문룡이 주변 조선인들을 약탈한지라, 병자호란 시기까지 인조 정권에서 낭비한 세수는 26만 8천 7백여 석(= 약 5만 톤가량)으로, 당시 조선의 세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양을 모문룡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긴 힘든 게, 모문룡이 명을 뒷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병자호란 직후 조선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가도에 주둔한 명군(정규군이 아닌 모문룡 잔당)을 쓸어버렸던 일이다. 이 때만큼은 조선도 쌓인게 많아서인지 확실하게 쓸어버렸다.

그나마 인조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1. 양전의 실시, 2. 기존 경대동의 문제점 파악 및 추후 시행책 논의, 3. 공물변통론과 대동법 논의, 4. 인조 말기 흉년기의 임시방편적 구휼제도를 시행 등이 있다. 그러나 제도의 정착을 위해 왕실의 희생을 감수할 의지는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법 제도의 시행' 영역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실무자들을 방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즉위 직후 시행한 삼도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그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양전이 미비하여 토지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에 방납업자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산림 등에서도 대동법에 대한 이견이 많았으며, 대동법을 주창했던 이원익까지 그만두자고 주청하자 강원도 외에서는 폐지하고 만다. 요약하자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논의와 몇 번의 시범 실시[56]가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

결국 교과서상에는 '대동법을 시작했다'는 타이틀만 달고 있는 광해군[57]에, 학자들 사이에선 '진정한 대동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효종(정확히는 이때 정국을 주도해 대동법을 정착시킨 김육)과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기'인 현종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 조도사를 뜯어고친 것도 반정으로 싸늘해진 민심 수습을 위해 내세운 것이었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지만 이건 사실 법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것이라 어차피 해야 했던 일이다. 게다가 최명길이 올린 상차에서 양전을 다시 해야 한다며 '선왕 때 새로 경작된 땅은 전안에 들지 않았고 묵은 것만 전안에 들었다'라고 발언한 점에 비추면,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양전 사업마저도 불완전한 요소가 있었다.

인조 대 새로 실시된 '영정법'(영정 과율법) 역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기존의 등급을 나누어 징수하던 전세를 일괄적으로 고정해 걷는 것으로, 대부분의 전답을 최하등급 하하전으로 지정해 최저 세인 4말을 걷기로 한 것이다. 대충 보면 취지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남의 밭을 가는 대다수의 소작농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영정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세금과 수수료를 추가로 때려서 농민의 허리를 더 심히 휘게 만들었다.[58] 이러다 보니 민중의 원성이 너무 커서 결국 숙종 때엔 영정법의 허점을 보완할 비총법을 만들어 가혹한 징세를 완화했고, 영조 때 법제화했다.

다만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다. 영정법은 전세 징수에 있어 관행화된 지 오래였던 걸 법제화하며 정리한 것으로, 당연히 거기에 추가 징수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원래 조세 수입의 대부분은 공납이었고(광해군이 궁궐을 짓겠다고 평소의 몇 배에서 몇 십 배에 이르는 물자를 징수해대던 그 공납), 영정법이 규정한 전세 따위는 공납과 군포, 나중에 등장하는 환곡 등에 비하면 원래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나중에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다. 그걸 소작농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고 트집 잡고, 후대의 왕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늘어난 대동법으로 징수된 대동미와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한 결작 등 공납과 군포 대신 받는 쌀들을 영정법과 상관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건 기만적인 주장이라는 것이다.

사실 인조 때부터 회복세에 들어선 조선 경제는 경신대기근이라는 전지구적 대재앙이 발생하게 전 몇 십 년간 잘 나갔다. 요즘 백성들이 사치를 과시할 수단으로 실생활에 불편할 정도로 옷자락이 길게 늘리고 아무리 열심히 절약을 강조해도 비싼 것만 소비하는 풍조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툴툴거릴 정도.

5. 총체적 평가[편집]

조선의 왕들 중 호불호가 갈리는 왕들은 많다. 그 연산군조차도 초창기에는 나름대로 좋은 모습을 보였었다는 건덕지가 있다. 그러나 인조의 경우는 그냥 긍정적으로 평가할 건덕지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59][60] 당장 그가 몰아낸 광해군은 가히 암군으로 불릴만하지만 세자 시절의 후광과 (논란은 많지만)외치에 대한 긍정적인 평, 아버지 선조에게 핍박을 받아 성격이 삐뚤어졌다는 동정 의식[61] 등으로 세간의 인식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편이다. 마찬가지로 외세의 침략을 겪었던 선조는 적어도 임진왜란을 직접 유발하지는 않았다.[62] 허나 인조는 병자호란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병크를 본인 스스로가 저질러 평가가 최악을 달리는 것을 넘어 왕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선조가 머리는 좋았는데 그걸 지나치게 자기 자신의 안위를 신경써서 민폐를 끼친 케이스라면 인조는 그냥 멍청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선임인 선조광해군의 재평가가 늘어난 것 외에도 한국사 역대 최악의 암군 중 하나임에도 자기 보신 능력은 나쁘지 않아서 너무 편하게 살다간 것 역시 후손들의 엄청난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요소. 다른 암군으로 평가받는 임금들의 경우 피부병에 시달리고 자식들이 요절하는 비운을 맞거나, 쫓겨나서 쓸쓸히 요절하거나, 아내가 암살당하고 종국에는 본인마저 어두운 상황에서 쓸쓸히 승하하는 등 비참한 삶을 보냈었다. 그러나 이 쪽은 전쟁 뒤에도 며느리와 손자들을 죽이고 둘째 아들의 정통성을 박살내며 편하게 살다 승하했다. 차라리 이런 쪽으로도 멍청했더라면 쫓겨나기라도 했을텐데,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만한 일을 그만큼 겪고도 재위 26년 간 질기게 왕좌를 사수했다. 게다가 그가 받은 묘호인 인조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 묘호이다. 사실 그마저도 더 높은 가치를 가진 열조에서 바뀐것이다. 바뀐 이유도 역대 열조라는 묘호를 가진 군주들이 한결같이 망국의 군주였다는 신하들의 태클로....

좀 더 극단적으로 보자면 조선 중후반기의 대부분 암울한 사건들은 이 임금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태반이다. 그야말로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에 가장 잘 부합한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도 이 양반과 똑같은 인물이 나온다. 차이점이라면 생포당한 이후의 처우인데 이 양반은 숭덕제로부터 용서를 받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그 사람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것 하나 정도밖에 없다.

5.1. 비판[편집]

직접 쿠데타 과정에 참여했을 만큼, 능력은 어느 정도 갖추었을수도 있으나,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비전 자체가 부족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가닥을 못 잡았다.

게다가 인조는 무능하고 부패한 공신들을 끝까지 감싸고 갔다. 인조 시대의 인재풀은 쿠데타로 집권한 태종, 세조[63], 중종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빈약했다.[64] 국정 경력에서도 공신 가운데 고작 김류만이 그나마도 비실무직인 청요직을 역임했을 뿐이며, 그 가운데는 후대에 매국노로 잡혀 죽은 김자점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졸전과 직무유기에 결국 죽은 장신, 김경징까지 있을 정도다. 기축옥사 직후 정철의 실각 이래 서인의 오랜 실각으로 그야말로 유생과 불평분자, 지역 수령이 모인 아마추어 당파가 서인이었으니... 어떻게 저기에 최명길이나마 끼어 있었는 지가 미스테리인 수준

그나마 이 부족한 인재풀이라도 제대로 썼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괄의 난때 보여준 이괄의 허술한 숙청 과정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숫자는 부족할 지언정 김육, 최명길 같은 뛰어난 신료들도 있었지만[65], 그마저도 인조가 능력을 인정해서 뽑은 게 아니라 반정에 가담한 무리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등용한 것이며,[66] 능력이나 업적에 비하면 오히려 박대를 받았다

왕이 된 후에도 김자점처럼 무능한 인물도 아부 잘한다고 권신이 될 정도로 주변에 예스맨들만 채우려 하는 모습에, 신하들이 반대하는 추숭에 매달릴 정도로 권력에 처절히 집착해놓고, 정작 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썼을 뿐이었다. 결국 외적으로는 두 차례의 호란을 초래했고, 가정적으로는 아들 소현세자를 박대한 데다, 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손수 죽였으며, 손자들을 "그 개새끼 같은 것들을 왜 신경 써야 되냐"라고 욕하며 죽이고 일가까지 박살내는 등 반성을 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두고 두고 까인다.

긍정 항목에서 길게 쓰고 있는 '여민휴식'이니 국방 강화 등의 것도 반란의 후속 조치 아니면 자기 잘못으로 초래한 파탄적 상황의 사후 수습책에 불과하다. 인조 정권은 정작 그렇게 힘을 길러서 한 번 써먹어야 할 때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는 인조 정권의 '컨트롤 타워'로서 한계가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비판자들로 하여금 "애초에 옹호론자들의 주장대로 힘이 길러지긴 길러졌나?", "국가를 재정비해서 뭘 했다느니 하는 게 전부 허울만 그럴싸한 조치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이기도 하다.

경제 쪽에 대해서 살펴보면, 광해군 때의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망가지던 민생경제를 인조 정권이 살렸다는 주장에서 사치근절 주장을 기록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사치근절 기록은 광해군 집권기에도[67], 인조 즉위 직후에도[68] 있었던 기록이다. 심지어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박살난 직후[69]나, 조선 최악의 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때도 사치가 심하다는 주장이 나온다.[70] 결국 사치기록이 있으니 조선 경제가 나아졌던 거라는 주장은 끼워맞추기도 안 되는 주장이다.

오히려 민생경제 문제와 제대로 된 인과관계가 없는 사치기록과 달리, 오히려 당시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만한 일은 많이 일어났다.
아, 너희 훈신들아

스스로 뽐내지 말라

그의 집에 살면서

그의 전토를 점유하고

그의 말을 타며

그의 일을 행한다면

너희들과 그 사람이

다를 게 뭐가 있나

- 상시가(傷時歌), 인조실록 1625년 6월 기사에서 발췌

당대 집권자들이 광해군 시기와 똑같이 백성들을 수탈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음을 풍자하는 시이다. 인조반정의 공신들의 수탈 때문에 집권 3년차에 이미 민심이 돌아서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 중 하나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어진 덕화로 다스리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했고, 시행하고 다스리는 방도는 형정(刑政)의 말단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두서가 없이 어지러워도 가닥을 찾아 다스리지 못하며, 번다하고 과중한 부역이 중첩으로 나오는 것은 대체로 백성들의 신의를 잃은 데서 나온 처사로써, 천심(天心)을 어기고 인심에 거슬린 것이 많으니, 위란(危亂)의 조짐일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과 어진 명예를 지니셨지만 선왕의 도와 정사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은혜를 베푸는 방도가 넓지 못하고 아래에서 덕화를 이어받아 널리 교화하는 일을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신은, 전하께서 마음의 천리를 다 밝히지 못하시고 위임한 신하가 혹은 적임자가 아니기도 해서 치도(治道)의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여깁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대중을 잃고서 오래도록 국가의 번영을 누린 경우는 없었으니, 이괄의 역변 때에도 조금은 증험이 되었습니다.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던 날 따르는 백성이 없었으니, 어찌 백성들만의 죄이겠습니까. 삼가 비교하건대, 백성은 창자이고 나라는 몸통입니다. 창자가 병들면 몸통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고, 외부로부터의 병의 감염이 바로 그러한 때를 타게 되는 것은 형세나 사리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 인조실록 1626년 12월 기사, 사어 강학년의 상소 중 일부

이 상소가 나온 것이 인조의 집권 4년차의 일인데, 이때도 민생 안정은 커녕 민심을 못 잡으니 나라 사정이 형편없어지고 이괄의 난 때도 왕 따라 나서는 백성이 없지 않았냐고 신하가 상소를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공신들의 수탈 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있다. 모문룡에게 매년 가져다 바친 군량미로 인한 경제적 피해. 정묘호란 1년 전인 1626년, 실록에는 남한산성 군량미가 모자라니 대책을 논의하자는 기사가 나온다. 근데 비변사에서는 이때 이미 '모문룡의 군량 보급으로 조선의 물력이 바닥났다'라며 일반적인 대책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보고하고 있다. 실제로 인조 본인이 직접 초래했던 일은 아닌 모문룡에게 보급한 군량미와 인조의 직접적인 잘못인 훈신들의 부귀영화 중 어느쪽이 더 악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명이지만, 어쨌든 두 차례 호란이 벌어지기 전에도 이미 조선의 경제 상황이 그닥 녹록치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사다. 두차례 호란이 발발한 이후야 뭐 말할 것조차 없고 말이다.

더불어 긍정측에서 주장하는 인조반정 직후 폐지한 도감 가운데는 화약무기를 만드는 화기 도감이 있었다. 사르후 전투로 조명연합군이 날아간게 인조반정 기준으로 겨우 4년전 이야기로 2년뒤인 영원성 전투전까지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만주와 요동을 쓸고 다니는 상황이었고, 이것 때문에 광해군도 화기도감에 엄청난 자원을 쏟아가며 화기를 만드는 상황이었는데 인조는 집권하자마자 이걸 날려버린 것이다.

전반적인 치세가 치욕으로 점철되어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문제가 많은 군주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인조는 운이 좋았다. 백성 수 만이 요동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도, 자식들이 볼모로 끌려 갔어도, 국내외에 인조가 가진 권력 탈취를 도모하는 세력은 없었다.[71] 다만 최측근 공신이 역모를 꾸밀 정도였다면 역시나 본인 행적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맞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옹호해줘야 할 공신이 배반할 정도라면 뭐...

비판자로서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인조가 단순한 무능력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정을 주도해서 성공시킨 재능도 능력이거니와, 그렇게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데도 권력을 지키기에만 급급했으니 전형적인 암군이라고 볼 수 있다. 암군은 능력이 없는 것보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책임하게 회피한다는 데 그 특성이 있다. 이러한 인조의 우유부단함은 단연 외교와 국방 부문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아래 옹호측에서는 인조가 추진력이 없었을 뿐이라고 변명하는데, 정작 자기 아버지 추숭할 때는 추숭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고 반대한 신하들을 유배까지 보내가며 강행하고 며느리와 손자들을 몰살 시킬 때는 주변의 비판과 견제를 다 씹고 오만 무리수를 둬가며 죽여버릴 정도의 무서운 추진력을 보였다. 즉 국가 운영에는 추진력이 없으면서 정작 자기 안위에는 엄청난 추진력을 보여주는데, 결국 인조는 국가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심각하게 부족한 작자라는 것이다.

거기에 인조의 실정으로 인한 피해는 인조 하나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당장 삼전도의 굴욕의 영향으로 아들과 손자는 청나라에 저자세로 굴며 손자는 무릎까지 꿇어야 했으며, 며느리와 손자를 누명을 씌워가며 살해한 결과 양반층 대다수가 조선정부에 등을 돌려 아들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들에게 기어야 했으며, 그래도 후유증이 남아 손자대에는 소현세자와 효종의 정통성을 두고 엄청난 정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때 악화된 당파간의 갈등은 증손자 때 유혈사태로 격화되고, 최종적으로는 세도정치라는 조선멸망의 불씨를 만들어낸다.

5.1.1. 이중외교의 파탄[편집]

인조는 반정 명분 중 하나는 명에 대해 충효스럽지 못했던 '광해군의 망은배덕[光海忘恩背德]'이었다. "…중 하나" 정도가 아니라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교서에서 광해군 이혼의 부덕함을 질책한 분량의 절반가량이 대명 사대 소홀과 친후금 정책을 성토하는 내용이었을 정도다.[72] 일부 현실적인 주화파들이 중립외교를 주장했다고는 해도 이들을 인조 정권이 이를 거국적으로 밀어주기는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랑캐의 추장은 한낱 하찮은 자일 뿐이다. 우리 나라 수천 리의 지방에 어찌 적을 제어할 만한 사람이 없으랴마는, 찾는 데에 정성스럽지 못하므로 쉽게 얻지 못할 뿐이다. 지금 장신(將臣)들이 모두 들어가 지킨다는 것으로 말하면서 출전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이는 정충신, 남이흥 같은 당대 명장들과 국방 정책을 논의했을 때 인조가 한 말이다. 그때 조선의 국방력은 안주 같은 북방의 주요 군사 거점을 지키는 것도 버거워 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 조·명 연합군을 궤멸시킨 후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명나라 군대를 박살내고 있던,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 무신들이 그런 점을 기껏 알아듣게 설명해 줬더니, 인조란 자는 "어째서 고위 장성이란 자들이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먼저 나가서 적을 치겠다고 하는 패기가 없냐"고 나무랐던 것이다. 그만큼 인조 정권은 대 명/후금 문제에 관한 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때 조선의 집권 세력도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했다느니 하는 말은 저러한 사료들을 죄다 무시하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물론 저것은 집권 초기의 일로, 나중에는 인조도 현실을 파악하고 저런 정신나간 주장을 하지 않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러한 발언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이, 이는 대내적으로 후금에 대한 적개심을 반복·강조해야 정당성이 확보되는 인조 정권의 태생적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런 정권이니만큼 실제로 전쟁으로 맞붙어 참패하는 일을 겪지 않고서는 후금 중심의 질서에 결코 순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집권 세력이 후금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거나 할 정도로 미쳐돌아간 것은 아니었고, 상대의 강대함에 밀려 개시(開市) 요구 등을 들어주긴 했으나, 누가 봐도 하기 싫어하는 티 팍팍 내며 최소한의 성의만을 보이는 정도였지, 적극적인 화친 정책을 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명나라에게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인조 반정 소식을 접했을 당시 명나라는 "광해군은 우리한테 협조적인데 왜 내쫓았냐?"는 반응이었다[73][74]. 이 때문에 조선은 동아시아 3각 외교에서 거의 호구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엄청난 뇌물을 바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백성들 고통은 심해졌다. 이렇게 명나라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정통성을 위해서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아버지 정원군대원군이 아니라 아예 왕으로 추존한다.

후금이 청으로 재탄생한 이후의 북방 외교는 더 심각했다. 물론 조선에서 전쟁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차피 조선이 명의 속국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청나라는 침공할 것이 뻔했고, 설사 전쟁을 하지 않아도 막대한 공물과 군사를 요청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전쟁이 필연적이라 해도,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조선에겐 전쟁을 늦출수록 유리했다. 그런 이유로 이귀, 최명길, 박로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적대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인조는 결정적인 상황일 때마다 결단을 내리지 않고 뒤로 빠졌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이는 선조와 매우 다른 점이다. 선조가 졸렬함을 드러낸 건 임진왜란 도중 이몽학의 난 이후였다. 그 이후로도 의주 파천을 단행하고 진주성 함락을 필연으로 보는 등, 전황 판단도 나쁘지 않다. 원래 이순신을 직접 발탁한 이가 선조였고, 임진왜란 이후의 군사 전략과 복구 정책을 봐도, 선조는 국가운영만큼은 뛰어난 군주였다.[75][76]

결국 인조는 주화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중외교보다는 친명배금 정책을 취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정묘호란이 터지고, 이괄의 난으로 약체화된 조선군은 계속 밀려서 정묘화약을 맺기에 이른다.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을 이기지 못한다는게 판명되었으나, 이는 인조 정권이 그 나라에 대해 적극적인 화친을 모색하는 계기가 전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로 인해 후금에 대한 적개심만을 키웠을 뿐이었다. 정묘호란 발생 9년 후에는 인조 정권이 조선을 방문한 잉굴다이, 마푸타 이하 청 사신단을 박대해서 발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렇게 귀국하는 사신단에 분노한 백성들이 돌을 던지는 일이 발생했는데도, 인조는 잉굴다이 등을 달래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바로 그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렇게 사신단을 박대한 것만으로도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치명적인 실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조는 이를 뛰어넘는 강경책을 일삼았으니, 제일 대표적인 것이 조선의 비타협적 태도에 불만을 표시하는 청 태종에게 협박장에 가까운 국서를 보낸 것이다.
지금 명나라는 곧 2백여 년간 중국을 통일해 다스려온 주인인데 우리 나라가 어떻게 한번 요동과 심양 한쪽 땅을 잃었다 하여 문득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귀국이 하는 바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옛날 왜구가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 중국을 범하고자 했으나 우리 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하고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단서가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구는 우리 나라 팔도를 함락하고 우리 백성을 잔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계책을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얼마 뒤에 수길(秀吉)[77]이 죽자 그 뒤로 자중지란이 일어나 죽은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는데, 머리가 떨어져 죽은 자들은 모두 전날에 우리에게 독기를 부렸던 장사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원씨(源氏)평씨(平氏)를 축출하여 멸망시키고 우리 나라와 통호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성한 것이 평수길(平秀吉)의 시대보다 배나 됩니다. 천도(天道)가 전쟁을 싫어하며 선을 돕고 악을 벌한다는 것이,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중략)
그리고 천심이 매인 바는 실로 백성에게 있는 것이니, 설사 우리 나라가 의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어 그 병화가 비록 참혹하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반드시 떠나지 않고 국명도 혹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78] 지금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모두 긁어가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면, 민심이 반드시 떠나가고 나라가 따라서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접한 것으로 어둡지도 민멸하지도 않을 도리로서, 서생(書生) 소자(小子)가 간책 위에서 주워온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이 국서 전달을 인조 정권의 전쟁 회피 노력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당장 위의 문면만 봐도 "전쟁이 나면 났지 니들 말 들어 주나 봐라." 하는 식으로 나오고 있는데 무슨 놈의 전쟁 회피란 말인가. 회피가 아닌 정도를 넘어서, 조선과 전쟁을 벌인 이후 멸문당했던 도요토미 가문을 들고 온 시점에서 저 글은 사실상 협박 문서라고 하는 것이 맞는다. 협박도 우월한 입장에서 해야 협박이지, 약한 입장에서 벌이는 협박은 그냥 도발이다. 실수였다는 변명도 안 통하는 게, 인조는 이 문서를 격문[檄]이라고 칭했는데, 토황소격문을 비롯한 역사상의 격문들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적대 진영에게 보내는 격문은 항전의 의지를 적극 표명하는 사실상의 선전포고다. 결국 인조는 청나라와 한판 붙을 생각으로 문서를 작성한 것이고, 실제로 6개월 뒤에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넘는다.

자신이 도화선이 되어 청의 침공이 가시화 되었음에도 인조는 자기 합리화와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주화파들이 적극적으로 청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아무 것도 안 한 채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보고만 있었다. 한마디로 무책임의 표본이었다.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는 문제는 인조의 결정 회피로 7개월이나 끌게 되었다. 결국 박로가 직접 사신으로 출발했으나, 박로가 압록강을 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터지고 만다.

"조선 측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더라도 청이 대내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을 쳤을 것"이라는 주장은 조금도 인조의 책임을 덜어 주지 못한다. 청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런 때에 명분을 제공해서 침공을 앞당긴 인조 정권의 실정은 더욱 엄중하게 질타를 받아야 할 부분이다. 조선이 홍타이지에게 두 번째로 유린당한 병자년(1636년)은, 후금 사신단에 대한 조선 정부의 푸대접 및 조선 민중의 공격, 조선 사신단의 홍타이지 황제 즉위식 참가 거부 및 국서 유기 사태, 인조의 도발적인 국서 전달 등 유난히 후금 / 청에 대한 적대 행위가 집중되었던 해다. 오랫 동안 밖으로는 명의 무역 봉쇄, 안으로는 기근과 반란에 시달렸던 청이 하필 그해에 조선을 침공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긴 힘들다. 청의 입장에서 인조 정권이 보인 행태는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격이었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일에 정묘년(1627년)에 쥐어터지고 무릎꿇은 조선 따위가 참견한 자격이 없음은 현실적으로 보나 명분론적으로 보나 당연한 이치다. 홍타이지가 황제임을 천명한 이상, 신속(臣屬)을 거부하고 있는 조선은 천자로서 토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논리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조선의 관료들이었다. 즉, 당시 조선의 집권 세력은 전쟁을 각오하고 군신 관계를 거부했던 것이다. 만약 인조 정권이 '진정한 천조는 명나라밖에 없기 때문에' 청은 그런 명분을 앞세워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야말로 아이 같은 순진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물론 인조 이하 조선의 관료들이 그렇게 어리석었을 리는 없다.

21세기 현재의 한국사 오타쿠들이 온갖 현란한 수사와 논리를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달리, 호란을 겪은 조선인들은 인조 정권의 대 후금 강경 노선이 병화를 불러들였다는 데에는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백성·사대부 모두가 말이다.
김류가 아뢰기를,

"불가합니다. 지금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는데, 지금 어떻게 섬과 통하여 다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김류가 도체찰사 임무를 담당하여 만약 국가의 병력으로는 그들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면, 어찌 그때에 기미책을 극력 주장하지 않고서 국가가 망하고 난 뒤에야 ‘백성들이 모두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린다.’고 말을 하는가. 아, 당시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이 과연 누구였던가. 신진 인사들이 국가의 대사를 경솔하게 논의한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주장을 취사 선택한 자는 또 누구였던가.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9일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북방 방어군의 역량의 심각하게 훼손되는 바람에 두 번의 전쟁에서 밀린 거라고 하지만, 본인도 군대로 왕을 쫒아내고 즉위한 인간이 군대를 그렇게 허술하게 숙청했다가 군사반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괄의 난은 '인조의 불운'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닌, 인조가 뿌린 씨앗에서 열린 열매에 가깝다. 조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나라에게 온건 외교를 이어가고 있던 군주를 내쫓아 후금의 경계심을 샀으며, 호란을 일으킬 명분까지 줄 뻔했다. 거기다 내부적으로도 후금에 대한 적대 여론을 자극하는 여건을 조성해서 그 지배층으로 하여금 '조선=적성 국가'라는 인식을 굳히게 만들고, 종국에는 아예 선전포고문까지 먼저 써서 보낸 정치적 격변의 주인공이 다른 이가 아닌 인조 본인이었던만큼, 당시 인조가 처한 외교적인 난제가 '남이 준 불행'이 아닌 것이다. 결국 후금 내부 사정 문제를 제외한다면, 어떤 점을 강조하더라도 호란에 있어 만악의 근원은 인조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5.1.2. 두 번의 호란과 굴욕[편집]

인조의 군사적 무능은 두 번의 호란, 특히 병자호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저지른 주요 군사적 실책은 다음과 같다.
  • 청군의 병력 이동에 대한 관측 / 예측에 실패해서 더 안전한 남쪽 변방이나 강화도가 아닌 애매한 곳에 중앙정부가 피신하게 됨
  • 피신처인 남한산성에 군량이 부족한 탓에 장기 농성이 불가능했음
  • 군대의 요직을 김자점, 장신, 김경징과 같은 무능한 이들이 차지한 결과[79] 청군이 쾌속 진군하고 두 왕자가 피신 중이던 강화도가 함락됨
  • 전반적으로 방어군이 지휘 체계 문제보급 미비 등으로 전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함

이 가운데 인조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이러한 인조 정권의 삽질들에 대해서 옹호 측은 이를 도리어 인조를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청군의 빠른 진군 속도를 예상하지 못했고, '하필이면' 도원수 김자점이 무능한 자였고, '불운하게도' 남한산성에 군량미가 없어서 인조가 굴욕을 당했다는 식이다. [80]

물론 병자호란에서 조선 정부와 군대가 보였던 모든 추태, 졸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조 못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개별 전투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직접 참여한 각급 지휘관들에게 우선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최종 인사권자이자 군 통수권자인 인조가 책임을 면할 수 없음도 당연하다. 특히 '도원수 김자점'과 같은 최고위급 직책에 대한 잘못된 인사가 불러온 참극엔, 참극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만큼이나 인조의 책임이 무겁다[81].

인조 정권이 군정에서 보인 한심함은, 병자년 9월에 인조가 비변사 당상관들을 인견(引見)했을 때 영의정 김류와 주고받은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金瑬曰, 義州舊[缺][82]頃日筵中, 聖敎痛責其失。蓋義州形勢, 今則與前不同, [缺]迫事之後, 人民稍集, 守備[缺]器械, 庶有拮据之路。元帥柳琳[缺]皆如臣意矣。上曰, 下三道赴西之[缺]義州農軍, 亦在減去之中, [缺]當何以繼兵也? 予非禁[缺]今事勢, 多有難便者, 今欲[缺][83]勢稍振, 年穀稍豐, 然後[缺]擧行矣。金瑬曰, 臣等亦不敢保[缺], 但今事機, 庶有可爲, 故敢達矣。[缺]義州修築之擧, 姑爲停寢以俟, [缺]今番出身, 亦不令趁卽赴防, 待後日修築義州之時, 始許赴防, 亦似宜當矣。

김류가 말했다.

"의주의 옛 (빠짐)에 대해서는 지난날 경연(經筵)에서 성교(聖敎)로써 아프게 실패를 질책하셨습니다. 무릇 의주의 형세는 지금 예전과 같지 않은데, (빠짐)박한 일이 벌어진 다음에 인민들이 어느 정도 모여들어서 수비 (빠짐) 기계를 어렵게 마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수 유림 (빠짐) 신의 뜻과 같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하삼도에서 서북으로 근무하러 하는 (빠짐) 의주의 농군(農軍)들이나 모두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군대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길 수 없는 것이 (빠짐) 지금의 상황에서 불편함이 많은 것이니, 지금 (빠짐)세를 일으키려고 한다면 어느 정도 풍년이 든 다음에 (빠짐) 거행해야 할 것이다.

김류가 말했다.

"신들도 보장할 수는 없지만(빠짐), 다만 지금 일의 기틀은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빠짐) 의주에 성 고쳐 쌓는 일을 잠시 그만두고 기다려야 하며, (빠짐) 이번 출신(出身 : 무과 급제자)들도 곧장 근무를 시킬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의주에 성을 지을 때 근무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역시 마땅할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53책 (탈초본 3책) 인조 14년 9월 4일 을사 8/29 기사
[84]

빠진 글자가 많은데다가 즉석에서 한 발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서 이해가 쉽지 않을 텐데, 풀어 쓰자면 이런 얘기다
김류: 알다시피, 의주의 상황은 예전과는 달리 지킬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혹시 전쟁이 터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병력과 물자가 채워질지도 모르겠어요.

인조 : 후방에서 올려보내는 병력이나 의주 자체의 병력이나 모두 줄어들고 있으니 지금은 의주의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같은 식으로는 안 될 거 같고, 풍년이 들어서 여유가 생겨야 그곳의 전력 강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다.

김류: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어차피 지킬 수도 없으니) 의주성 보수 공사 멈추고 정예 병력도 보내지 말고 (여력이 생겨서 의주를 확실히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되어) 보수 공사가 재개되면 그때 병력을 올려 보내면 되지않을까요?


즉, 의주를 포기하자고 하고 있는 거다[85].
포기한다는 게 의주의 수비군을 아예 해체시키거나 뒤로 물린다는 것은 아니고, 중앙정부로서는 해줄 것이 없으니 당분간 니들끼리 알아서 버티라는 정도지만, 그것만 해도 충분히 황당한 얘기다. 의주는 당시 조선의 최전방 요충지로서 오늘날의 한국에 비교하자면 파주철원과 같은 북부 전선의 거점이었다.[86] 그런 곳을 지키는 부대들을 완편 상태로 유지하지도 못하고 망가진 성책을 수리하는 것조차 손을 떼려고 했던 것이 인조 정권이었던 것이다.

의주성 가까운 곳에 성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고, 고려강감찬이 쌓은 것을 1628년 이후에 고쳐 쌓은 백마산성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언제 적이 쳐들어 올지 모르는 때에 최전방에 방어 거점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있는 것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포기하네 마네 소리가 나오는 것은 제대로 된 국방이라 볼 수 없다.[87]

병자년 11월 중순, 그야말로 병자호란 코앞의 시점에서도 인조 정권은 여전히 그렇게 의주를 버려 두고 있었다.[88] 설사 나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성 수리와 병력 공급이 재개되었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충실히 방어 시설을 구축하며 군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겠는가. 의주 같은 곳이 그 지경이었으니 그 전쟁에서 조선의 3도가 유린당했던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결코 '운'의 문제가 아니라 말이다.

의주 수비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기록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 인조 정권의 전반적인 전쟁 준비 상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주강에 《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동지경연 이성구(李聖求)가 나아가 아뢰기를,

"돌아온 호역(胡譯)의 말을 들으면 저 도적이 군대를 동원시킬 낌새가 있다 하니, 외방(外方)의 병마(兵馬)를 국경에 불러모아 몇 달 동안 변고에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역이 어떻게 오랑캐의 실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구가 아뢰기를,

"이미 병화를 입을 것을 분명하게 알면서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니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어할 준비를 하고자 하면 형세가 이와 같고 기미(覊縻)할 방책을 세우고자 하면 명사(名士)의 무리가 모두 불가하다고 한다. 적은 오고야 말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12일 임자 2번째 기사

먼저 당시 병조 판서였던 동지경연사 이성구가 귀국한 호역(여진어 통역관)의 말을 빌려 전쟁에 임박했음을 경고하는데, 인조가 호역 따위가 무슨 남의 나라 실정을 제대로 알겠냐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이성구는 기가 막혔는지 청의 침략이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전쟁이 안 일어날 것처럼 구는 게 쪽팔리지 않느냐고 나무란다.

그러자 인조도 쪽팔린 건 알았는지, 더이상 침략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고, 방어할 준비를 하는데 형세가 이와 같고(이성구 말대로 국방 역량 강화에 다들 무관심하고) 입만 산 선비란 놈들은 화친을 결사반대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정곡을 찌른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제대로 된 전쟁 준비도 적극적인 유화책도 마련하지 못한 정부의 총책임자가 누구인가? 인조의 일침은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인 셈이다.[89][90]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적절한 대비를 하지 않는 건 웬만큼 무능한 지도자가 다스리던 시대가 아닌 이상 한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가 힘든 수준이다. 고려 현종이나 선조랑 비교하는 건 저 둘에 대한 모욕 수준이고, 심지어 여몽전쟁 당시 졸렬한 행태로 비판받는 최씨 정권만도 못한 행태였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 천도 이후 잔치질로 호의호식하고 재물을 모으는 등 전시상황에서도 사리사욕을 채워서 비판을 듣는 거지, 1차 침입 이후 몽골에 전면 야전으로 대항하는 게 어렵다고 판단되자 바로 천도를 강행하고 각 전간기마다 공을 세운 사람들과 배신자들에게 신상필벌을 하는 등[91] 자기들 안위 챙기기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판단력은 있었다. 인조 정권처럼 이미 한차례 깨지고 다음 전란이 다가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지는 않았다.

보통 병자호란 당시 보인 조선군의 지리멸렬한 모습에 대해 인조 옹호 측은 흔히 이괄의 난에 북방의 정예 병력이 쓸려나가서 어쩔 수 없었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괄의 난이 남 탓인가는 넘어가더라도, 그때 훼손된 전력을 10년 동안 복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조가 군사 문제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서툴렀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병자호란 때 황해도에 2만이 넘는 정예군이 있었고, 이밖에 8만 가까운 속오군이 구성되어 있었다지만, 이들이 정말 건실한 군대였다면 삼전도의 굴욕을 맞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조는 그나마 있던 인재풀도 못 써먹는 바보였다. 인재를 더 양성해도 이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운 판국에 있는 인재도 못 써먹는 바보인데 정예 병력이 있는들 제대로 싸우긴 할 수 있겠는가?

인조대 조선 군대가 무기력했던 가장 큰 원인은 기강해이 때문이었는데, 그 근본 원인을 제공한 이는 다름 아닌 인조 자신이다.
신이 생각건대, 온 나라의 정병과 무사가 모두 여러 대장의 수하에 모여 있는데, 일이 없으면 농장을 감독하는 역사를 하고 일이 있으면 호위(扈衛)로서 편안함을 취하는 곳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묘 호란에 강도로 피란갔던 일에 대해서는 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슴아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날쌘 군사를 모아 섬속에서 늙히면서 한 명의 병사나 한 마리의 말을 싸움터에 내보내지 않고 수백 보 밖에서 적의 기병을 엿보면서, 내란(內亂)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켜 그것으로 자기네의 목숨을 보전하는 바탕으로 삼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라와 휴척을 함께 할 훈신들은 부귀가 이미 극도에 이르러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써 지킬 계획은 없는 것이 으레 이와 같으니, 급한 때에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 3월 2일 정미 2번째 기사

이는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과 더불어 양대 척화파 거두였던 부제학 정온이 위의 용골대 귀국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인조에게 올린 상소다. 정온은 훈신(勳臣) 즉 공신 세력이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으로 부리며 야전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현실을 규탄하고 있는데, 그 훈신들 뒤에 누가 있는지는 말 안 해도 다들 알 것이다.[92][93]

그때 사헌부도 훈국(訓局) 즉 훈련도감에서 양성한 정예 병력들이 야전을 회피한다며 비슷한 지적을 했는데, 이에 대한 인조의 반응은 한 마디로 "니들은 나대지 말라"는 거였다.

인조는 그러는 주제에 군대 인사에서도 한심한 면모를 보였다. 특히 최고위급 장수들을 하나같이 형편없는 인물들로 채웠다. 인조가 도원수, 부원수 급으로 선임한 장수가 장만, 이괄, 김자점 등인데, 이 중에서 유능하다고 할 만한 자는 이괄 정도였으나 그나마도 관리에 실패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94]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노먼 다이크 중위마냥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 청군이 국경을 넘은 지 단 7일 만에 한성에 도달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구축해 둔 2만 정예병을 전장에서 이탈시켜 전력 보존만을 꾀했던 것이다. 게다가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전시 수도 격인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강도유수 장신은 뭔가 결정을 내리긴 했는데, 그게 싸우자는 게 아니라 도망가자는 거였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 싸우기라도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원래대로라면 강화도 수비에 책임조차 없었을 충청수사 강진흔. 허나 33척의 대함대를 지닌 장신이 도망가던 마당에 고작 7척만을 지휘하던 강진흔이 전세를 뒤집는 건 역부족이었다. 하다못해 이 상황에서 봉림대군 일행이 남쪽으로 도망칠 시간이라도 제대로 벌렸다면 조선은 계속 항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하필 그 임무를 맡았던 건 가족마저 찌질하게 버리고 도망친 김경징이었다. 이 두놈의 기가 막힌 활약 때문에 청군이 강화도에 상륙해서 봉림대군, 인평대군, 세자빈 강씨, 원손 등 왕실의 핵심 인물들과 여러 대신들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중앙정부는 항전 의지가 완전히 꺾여서 성 밖으로 나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광해군이 외적 방비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국경에 집중시키고도 국가 예산을 궁궐 짓는 데 낭비해서 국방 강화를 스스로 방해했고[95][96], 인사 관리에 실패해서 훈련도감 장수들이 능양군과 내통하게 만들어 끝내 권력을 잃은 것처럼, 인조 역시 청의 침략에 대비해 뭔가 이것저것 하긴 했는데 본인이 실토한 바와 같이 전투 준비 태세 수준은 형편없었고, 결정적으로 자질이 없는 인물들을 중요 직책에 임명해서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따위로 형편없는 인사는 심지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김경징과 장신은 사약으로 죽게 해주는 자비를 줘놓고, 정작 진짜로 부족한 전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싸웠던 충청수사 강진흔은 갑곶 수비를 맡았던 변이척이라는 장수와 함께 참수형으로 처형해버렸다. 강진흔이 저 둘과 달리 반정공신과 별다른 인맥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유야 뻔하다. 그 이유가 인조 본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이건, 이따위 전후처리는 신상필벌에 완전히 실패한 행태로써 난세에 최악의 인재 운용 방식이었다. 도망간 놈들은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해주고, 사력을 다해 싸운 애국자는 잔혹하게 처형해버리는데 이런 놈을 누가 군주랍시고 옹위해주고 싶을까?

이러한 인사 실패는 단순히 '인조가 인재 보는 눈이 없음'을 탓할 일이 아니다. 사실 인조는 저 작자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철저히 인조가 자신에게 왕위를 선사하고 보전해 준 사람들에게 베푼 '보은 인사'였다.[97] 위에서 언급한 정예 병력의 야전 회피 문제도 결국 훈신들의 군대 사유화가 빚어낸 것이었다. 결국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보인 한심함은 인조 반정으로 형성된 공신 세력이 과도한 특권을 누리는 '구조적 문제'의 결과물이었다.

그러한 공신 세력을 만든 인조 반정이 누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특권을 보장한 이가 누구인가?

병자호란 당시 인조 '개인'이 휘하의 대신들에 비해 특별히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남다른 혜안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12월 13일에 청군이 안주에 이르렀다는 김자점의 장계를 받고도 적이 깊숙이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강화도 파천을 유보한 것, 대신들이 청하는 세자 분조를 거절한 것 은 분명한 실책이었다.

광해군과 비교되어 옹호되기도 하나, 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광해군 수준의 공적은 커녕 하다못해 눈에 띄는 행적이라고 불릴 만한 것조차 없다. 1삼궤구고두·2패전·3몽진에 빛나는 인조에 비하면, 0삼궤구고두·0패전·0몽진의 광해군이 적어도 국방에서는 우수한 지도자였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98] 이때 "광해군은 운이 좋았을 뿐, 정권을 오래 유지했다면 반드시 인조가 겪었던 것과 같은 참화를 겪었을 것이고 결과는 더욱 참담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거기에 중요한 것은 애초 광해군이 몇 년만 정권을 유지했다면 북방 방비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장수들도 인조에 의해 숙청당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테니 결과가 크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5.1.3. 인정을 상실한 비정한 군주[편집]

인조의 아들로는 요절한 소현세자와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 3남 인평대군이 잘 알려져 있다.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이유의 5대손 이채중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후사 없이 일찍 요절한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고 이구로 개명했으며 남연군이 되었다. 그리고 남연군의 막내아들이 바로 흥선대원군.[99]

만약 인조에게 다른 아들이 없었거나 소현세자가 원손이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살았다면 싫어도 데려가야 했겠지만 소현세자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요절했고 인조에겐 무술연마를 즐겨하는 신체 건강한 차남 봉림대군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 의료사고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은 뒤 인조는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운다.[100] 이는 종법 질서에[101] 맞지 않는 일이라서 논란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주의적으로 생각하면[102] 충분히 신하와 선비들을 설득해볼만한 사안이었는데, 인조는 설득은 시도도 하지 않고[103]오로지 왕의 권위와 모략으로 반발을 찍어 눌렀다.

당장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 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린 다음[104][105] 이시백, 이시방 형제와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다. 시류를 잘 읽는 현실주의자 면모가 강했던 김류는 이러한 인조의 의중을 짐작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이며[106] 김자점은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쓰려고 인조가 남겨 중용한 인물이었다. 인조가 원손에게 후사를 잇게 할 수 없다고 강변하자 김류는 양녕대군을 거론하고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냐는 반박을 받았다.10살도 안된 어린애를 폐세자 당시 20대였던 양녕대군과 비교하면 안되지 인조가 재차 원손이 총명하지 못하다고 하자 김육은 자신이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다며[107]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나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지위로 눌러 끝끝내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전위대 역할로 조정의 여론을 흔들어 봉림대군이 세자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운 뒤 인조는 소현세자 일가가 봉림대군에게 걸림돌이 될 거라 스스로 단정짓고[108] 소현세자 일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김육 말마따나 어린 원손은 뚜렷한 책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표로 삼은 게 원손의 어머니 강빈이었다. 강빈의 품성이 문제라기 보다는 원손이 어려 트집잡을 게 없으니 대신 어머니를 타겟으로 노린 것이다. 그리고 인조는 광해와 대북이 소성대비영창대군을 궁지에 몰때 써먹었던 저주를 자신이 활용했다. 뒤숭숭한 궁안에 소용 조씨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고, 조씨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조의 사주아래 행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09] 인조는 즉시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으나 궁녀들이 목숨으로 상전을 지켜 인조는 강빈을 제거하지 못한다.

살엄음판 같은 정국이 이어지는 가운데 1646년 1월에는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인조의 대처는 이상했는데 1월 3일 인조는 왕의 독살이라는 대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이 일을 신하들에게 알리거나 의금부나 형조에서 조사하지 않고 궁궐 내에서 내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다. 여기까지도 수상한데 여기에 조사 과정에서 수라를 만드는 왕의 궁녀들보다 세자빈 강씨의 궁녀들을 더 많이 잡아 조사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신하들은 이 사실을 알고 공식 조사를 하자고 요청했지만 인조가 이를 거부하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1월 11일에 뜻을 꺾고 의금부에서 공식 조사를 시작한다.[110] 이쯤 되면 거의 강씨를 노리고 한 조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의금부가 한 달 동안 조사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세자빈의 궁녀를 포함한 용의자들은 자백하지 않아서 열명 중 일곱명이 고문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조사했는데도 증거가 없자 인조는 권위로 누르기로 작정 하고 행동에 나섰다. 음력 2월 3일에 인조는 비방기를 통해서 조사를 하던 신하들은 압박한다. 이에 같은 날 신하들이 사죄 겸 용의자들을 고문해도 나오는게 없다고 항변을 하자 인조는 아예 강빈을 직접 언급해가며 누명을 씌우는데, 인조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은 심양에 왕위를 도모하면서 있을 때 홍금적의(용포)를 만들고 내전(內殿)의 칭호(왕과 왕비 칭호)를 마음대로 사용했고[111] 작년 가을에는 성내는 일이 많았으며 요즘은 문안을 안한다. 이것으로 봤을 때 최근의 저주 사건과 지금의 독살 시도 모두 강빈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강빈을 사형시키라'고 인조는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강빈은 저주사건으로 감금되어 있어서 문안인사도 문안인사지만 독살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12] 결국 이 주장은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철저하게 권위를 활용한 찍어누르기였다.[113] 당연히 신하들이 쉽게 수긍할 리가 없어 이시백은 인조의 홍금적의 주장은 그저 비단을 사들인 것이지 역모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김류이경석 같은 신하들도 수긍했다.[114] 무엇보다 설령 이게 다 사실이더라도 화 좀 내고 문안 인사 좀 안 온게 어떻게 저주와 독살의 근거가 되는지는 아무도 수긍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조의 억지가 너무 심해 신하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강빈을 유죄로 만들되 옛 성현들처럼 자비롭게 처리하자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무시한다. 다음날에도 김류 등은 당태종과 태자 승건의 사례를 들어가며 강빈을 살려 줄 것을 청했지만 인조는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빈은 내 자식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신하들의 간청을 무시한다. 여기에 사간원의 심로 등이 다시 '강빈이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嬪)으로 있을 때는 소현(昭顯)의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윗전을 모욕했다며 조선 역사상 역대급으로 부적절한 언행이 담긴 하교를 내렸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인조실록》 24년 2월 9일[115][116] [117]

결국 1646년 3월 15일, 35세의 강빈은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의 누명과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자신을 못 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외친 죄목 등으로 인조의 명령으로 사형을 당했다.

음력 3월 23일 강씨가 죽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강빈의 사형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까면서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118]과 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인조가 홀로 주장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정식 조사[119]를 요청했다. 만약 이 강빈 혈서가 사실이라면 인조 입장에서는 강빈 사건에 대한 완벽한 전환점이 되고 문제많던 강빈 숙청도 역모 처단으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 강빈 혈서를 주장한 인조는 이유서사건이 알려지는게 강빈의 목적이라며(?) 이 조사 요청을 무시했다. 이를 두고 허계가 "궁중의 일을 외부 사람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초에 대간의 무리가 목숨을 살려 주자는 청을 한 것입니다."라며 이번사건의 공론화를 주장하자 인조는 분노하며 "이것은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의 말을 어찌 감히 믿을 수 없다고 하는가."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인조가 이런식으로 땡깡을 부리자 신하들도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120]

그리고 1646년 5월 신빙성이고 뭐고 인조가 주장했고, 인조의 강짜로 조사조차 못한 강빈의 혈서를 근거로 강빈과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버린다. 때문에 학자들은 인조가 왕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자 청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스스로 단정지어버리[121]고 소현세자와 갈등을 빚어가던 상황에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혈서설은 마지막으로 남은 강씨의 아들들(이자 자기 손자들)까지 완전 처리하기 위한 자작극으로 추정된다. 강씨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그 곳에서 풍토병에 걸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2년 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결국 강씨의 아들 중에는 3남 경안군 이석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힘겹게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 게다가 이 손자 둘의 죽음도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소현세자가 죽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들도 유배된 후 용골대 등이 사신으로 왔는데 이때 용골대를 맞이한 것은 김자점, 그런데 용골대가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찌 되었는가 묻고 소현세자 사건이 드러나면 안 되었기에 김자점은 소현세자의 장남과 차남이 죽었다고 뻥카를 치는데 문제는 용골대가 그 살아남은 막내를 자기네들이 키우고 싶다고 말한 거였다. 이후 김자점은 이 일을 인조에게 보고하며 셋 다 죽었다고 보고했어야 했다고 말했고 인조도 난감해했다. 그러자 김자점이 이제 와 보여줄 수도 셋 다 죽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했는데 인조는 그냥 막내도 죽었다고 말하자고 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장남과 차남이 죽어버린 것이다.

간추리면 인조의 소현세자 제거는 세자와 청의 관계성이 크게 작용한 사건으로 철저하게 정치적인 고려로 행해진 행동이었다. 봉림대군이 후계로 정해진 이상 그의 정통성을 위해 소현세자 가계는 배제되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신하들의 반대를 권위로 찍어누르는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해석해서 인조의 인격적 결함에서 원인을 찾는 주장이 많은데 모든건 철저하게 짜여진 각본이었다.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의 후계자 선정과 소현세자 가계 제거 과정을 보면 우선 인조의 권위가 일반인들이 생각과는 달리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조의 양팔이 되어 실행조 노릇을 한 사람들이 보인다. 김자점소용 조씨. 둘은 각각 봉림대군의 후계자 선정 과정과 강빈 제거에서 실행조를 맡아 인조의 의도를 성사시켰다. 그 반동으로 왕을 직접 비판할 수 없는 왕조국가 특성상 미운털이 모조리 이 둘에게 박혔고 정적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총애하던 인조가 죽으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었는 상황에 놓여버린다.

실록에서는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상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독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라고 쓰고 있다.'는 사관평이 남아있는데 강빈 죽음 관련해 어그로가 전부 조씨에게 몰렸음을 알 수 있다.

인조는 그래도 자신의 개 역할을 충실히 해준 이 둘을 어여삐 여겨주었지만 효종은 그럴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아버지 때문에 자기 정통성이 박살난 상황에서 이 둘을 한시라도 빨리 숙청해야 했다. 김자점은 효종 즉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선왕이 훙했는데 눈물 안 흘린다는 얼토당토 않은 죄목으로 축출되었다가 반역 혐의로 제거되고 조씨는 장렬왕후와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했다는 죄몫으로 사사되었다. 그나마 조씨는그녀의 자녀들을 잘 대해주고 많이 도와주라는 인조의 유언 덕분에 자녀들의 목숨은 건졌다.[122][123]

한편 아래 혈육핍박을 단순히 마키아벨리즘적으로 인식해서 변호를 해주는데 물론 권력관계 특히 절대군주제같은 절대권력관계에서는 비인간적인 행보가 자주나오는 것도 현실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이 모든 사람들이 따르는 절대적인 이론이 아닌만큼 인권적 반론도 나오는게 현실이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키아벨리도 그 악행으로 인한 피해보다 이득이 있어야 마키아벨리즘적으로 변호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인조의 이 행보는 마키아벨리즘처럼 냉혹하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득은 거의 없고 피해가 엄청났다.

아주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인조가 소현세자와 그 아들들을 제거해 청의 영향력을 배제했다고 주장하지만, 우선 청이 조선을 통합하려 했으면 이미 병자호란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에 원나라 때처럼 허수아비 왕을 파견하려 했다면 장자세습의 전통이 없던 청나라 입장에서는 봉림대군도 국왕후보였다. 당장 홍타이지도 장자가 아닌데 황제가 되었고, 인조에게 협박편지에서도 세자 외에도 봉림대군을 따로 아들이라고 명시해 협박했는데 이 말은 소현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을 왕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실제 항복문서에서도 유사시 인조를 교체할 인물로 소현세자가 아닌 그냥 (끌려간) 아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소현이 죽을때 봉림은 아직 청에 있었는데 원도 그랬지만 보통 왕을 갈아치울 때는 본토에 있는 사람에게 군대를 같이 들려보내 왕을 갈아치우는게 현실적이다. 이미 소현의 가족까지 모두 조선땅에 있는데 청이 굳이 소현세자나 그 가족들을 선택할 이유가 거의 없다. 물론 소현세자나 그 가족을 청에서 왕으로 세울 확률이 아주 없는 것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봉림쪽이 그 가능성이 더 높았고 정확히는 안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은 상황이었다. 결국 인조는 가능성도 거의 없는 위협을 두고 소현세자에 대한 악감정으로 오판해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더불어 이 패륜 짓거리가 그나마 옹호라도 받으려면 결과라도 좋아야하는데 그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최악으로 돌아왔다. 아마 인조는 자신이 저지른 막장 짓거리로 봉림대군의 계승 구도가 탄탄해졌다고 자기합리화나 해댔겠지만, 정작 이 전무후무한 패륜으로 효종의 정통성에 큰 흠집이 났고, 사림들 대다수는 인조와 조선 정부에 등을 돌려 산림이 되어 버렸고, 결국 계승 구도가 탄탄해지기는 커녕 효종은 성종, 영조와[124][125] 더불어 조선왕조 최악의 계승구도를 가지게 된다. 그 결과 아들 효종은 무리수임을 알고 있음에도 사림들 전체가 그나마 호응해줄 만한 북벌을 반 억지에 가깝게 자신의 집권 목표로 들며[126], 산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송시열에게 거의 평생을 저자세로 기어야했고,[127] 그런데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송시열 등 서인 산당 강경파는 아예 효종의 승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여기에 반발하는 남인과 심각한 정쟁을 벌인다. 다행히 현종의 조율로 유혈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서인과 남인의 갈등의 골은 지독해져 바로 다음 왕인 숙종 때부터는 왕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환국이라는 극단적 파벌 정치로 악화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극단적 파벌 정치는 후대로 갈수록 격화되어 최종적으로는 세도정치라는 괴물을 낳아 결국 조선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집어넣었다.

정리하자면 인조의 패륜으로 아들부터 증손자까지 3대가 정통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왕권에 큰 타격을 입었으며,[128]

더불어 환국과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붕당 정치의 과격화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간이 인조다.[129] 아무리 마키아벨리즘으로 해석해 변호해주려고 해도 이런 결과물을 낳은 이상 도대체 변호를 해줄 수가 없는 패악질이다.[130]

강빈을 몰아내기 위해 집안을 멸문지화시키는 와중에 시조이자 고려의 충신 및 구국 영웅이 되는 강감찬의 묘가 실전되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이후 전개에서 한국 공군과의 기묘한 악연을 생각한다면 거짓말이기를 바라는 심보만 나온다. 강감찬이 활약했던 시대에 존재했던 현종과 비슷한 위기를 격었지만 능력과 인성이 대칭이동된 것인지 전쟁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었고 역사가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렸다고 할 수 있다.

5.2. 긍정[편집]

인조에 대한 재평가를 대중에게 처음 알린 것은 오항녕 교수의 평가로 알려져 있지만 오항녕 교수가 아니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인조 시기 치세에 대한 연구는 다른 학자들 역시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학자 하나의 연구결과로만 이런 재평가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건 오산이다. 특히 인조 치세에 대한 연구나 평가를 단순히 까가 빠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보는 건 대단히 편협한 시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과는 달리 인조 본인의 판단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인조 본인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정작 뚝심있게 결정을 내려야할때는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즉, 어떻게든 시행하려는 추진력과 비전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악평의 대부분은 광해군이 남긴 뒷처리까지 인조가 뒤집어쓴다는 주장이 있다. 광해군 때 이미 외교와 정책을 이끌어야할 행정부의 능력이 이전 왕(광해군)이 주도한 물갈이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평가처럼, 만약 인조가 정말로 능력이 없었다면 여러 차례에 호란과 반란을 단순 운이 좋아서 견디며 계속 권좌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말이 정말 안 된다.

권력의 쟁취와 안정 면에서 인조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이 벌여놓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모두 배척 받았다. 토목 공사를 중단시키고, 대동법 확대(즉위 초년에 강원도 확대)등 나름 능력을 발휘했다.[131]

소현세자의 박대건도 실상 단순히 소현을 미워했다는 개인적인 호오 이전에 청의 영향력이 소현세자에게 너무 큰 문제가 있었다. 강빈을 사사한 것도 이게 봉림대군을 위한 행동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지만, 만약 인조가 딱히 개입하지 않았다면 강빈 사사 자체는 후계자에 걸림돌이 되는 전 세자 세력에게 무자비한 숙청을 가한 것이 된다. [132]

봉림대군이 옹립 될 당시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힘을 너무 키워주어 나중에 효종이 그들을 내쫓을 때 나라가 한바탕 난리가 난게 흠이라면 흠인데 이것도 효종이 즉위 후에 김자점을 순식간에 개박살내는 거 보면 과연 인조가 김자점에게 얼마나 권세를 몰아줬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뭐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입장에서는 토사구팽으로 보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 단순히 무능한 왕도 아니다. 스스로 반정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고, 인목대비의 명분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원익, 최명길, 정충신 같은 중요 인사들도 보호해주었다.[133] 국가운영 면에서는 광해군보다 확실히 나았다. 자기가 친 사고를 보며 통곡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도 가져서, 1623년 즉위 초의 대동법 개정, 1633년 상평통보 발행과, 1634년 3남 일대 양전, 군사개혁 같은 업적을 남겼다.[134] 대외정세에 대해서도 신하들보다는 인조의 판단력이 그나마 우월한 수준이었다.[135]

당시 승정원일기에는 인조와 신료들이 명의 사정을 의논하는 대화들이 있다. 인조가 중국에서 환관이 권세를 부리고 있다며 중국을 침략하려 하는 후금의 발호를 걱정하자, 이정귀는 후금 외에 중국 내에서도 반드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중국 내의 광범위한 부패에 대해 이야기한 뒤, 최내길은 중국은 반드시 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627년 5월 중국에 다녀온 김상헌은 명나라는 후금을 토벌할 기세가 없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김지수는 심지어 중국인들이 명나라는 천명이 다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지수의 이 말에 인조는 "천조의 일은 역시 한심스럽다"라고 답했다. 이후 인조는 명나라에 조공하는 나라들의 숫자가 줄었는지 물었고, 김상헌은 이에 "지금은 조공하는 자들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인조실록에는 모두 첨삭되어 있는 이 기록들에서 볼 수 있듯, 인조와 신료들은 부패와 내란으로 쇠락하고 있는 명나라의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런 명나라의 편에 서서 후금과 전쟁할 생각이 없었다.[136] 이후에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전쟁이 난건 인조 책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인지부조화

현대의 인식이나 미디어에선 광해군 이미지까지 뒤집어 쓰는 왕이기도 하다. 하지만 광해군은 행정이나 경제 분야에 밝지 못하여, 선조의 중신들을 죽이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상황을 인조 말기가 되어서야 회복될 정도로 악화시켰다, 일례로 광해군이 궁궐 예산을 메우기 위해서 매관매직을 허락한 결과, 궁핍한 백성들끼리 좋은 수령이 쫓겨나지 못하도록 돈을 모으는 등 전후복구와는 동떨어진 방향에서 국정이 엉망이었다.

광해군은 백날천날 첩보원 보내서 홍타이지에 대해 문제의식 가지기만 했지 가장 중요한 국방비는 궁궐공사에 쏟아부었다. 정보수집을 해놓고도 국방에 쓸 화약까지 궁궐 기와 굽는데 쏟아부었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으니 실드라도 칠 수 있지 홍타이지가 위협이 되는것도 다 알고 후금이 분명 훗날에 조선을 쳐들어올 수 있단것도 다 알면서도 쌀이고 돈이고 화약이고 궁궐에 쏟아부었으니 답이 안나오는거다. 국방의 기본은 일단 침략당하지 않을만큼 힘을 키우는것이 알파이자 오메가요, 외교로 전쟁피하는건 그 후인데 광해군은 외교만으로 신하들에게 청나라 못 막는다고 징징거리기만 했지 제대로 막으려고 했다면 내치를 그렇게 엉망으로 해선 안되었다.

전후복구도 광해군은 그 흔해빠진 양전조차 실시할까 실시할까 하다가 결국 실시안해서 인조대에 양전을 다시 실시했고 대동법은 주구장창 반대만 했다. 광해군이 전후복구라는 개념이 있었으면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나라에 궁궐을 뚝딱뚝딱 지어올리는 짓은 안했을 것이다. 정충신이나 장만같은 인물들 뽑아서 북쪽에 올려놓아봤자 정작 한양에서는 북쪽으로 올려보내야 할 물자와 인력을 착실히 갉아먹고 있고 또 그렇다면 적어도 북쪽에 올려보내는 물자와 병사를 줄이던가 아니면 궁궐공사를 중단하든가 둘 중 하나를 했어야 하는데 광해군은 둘 다 실시해서 백성을 고혈을 갉아먹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북부의 정예군 1만 3천을 개죽음을 당하도록 파병한다. 이후 청나라는 광해군의 파병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수도에는 병사가 3천명도 없어서 인조반정을 막지 못한다. 당시 수도에 병사가 수천명도 안 되니 광해군이 미쳤다는 욕이 떠돌았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만약에 북쪽에서 전투 한번 패배하면 그대로 국가멸망인게 광해군의 군사배치였다. 인조는 약한 군대라도 10만명 가까이 유지하도록 보급개선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민생이나 지방산업의 복구까지 뒤따랐는데, 광해군은 수도권의 병사들을 북쪽에 돌려막은게 그 군대육성의 진실이다. 전체 군사력은 제자리걸음이었고, 궁궐공사에 보급물자를 빼돌리기도 한다. 보급제도와 군대규모는 오히려 인조시절이 더 나았고, 광해군은 화약을 빼돌려서 기왓장이나 구워댔으니 생각보다 군사력에 집중한 적은 없다.

한 마디로 인조 시절의 조선이 왜 국가안정화에만 신경을 썼는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광해군 말기의 실정까지 인조 탓으로 덮어씌우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삽질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살피고 김육, 이원익 등의 실무자들을 방해하지는 않아, 정말 필요한 개혁 자체는 그럭저럭 진행한 왕이기도 하다.[137] 덕분에 말년에는 국정 실패를 만회했고, 아들 효종부터는 암군들의 역사를 끝내고 그럭저럭 국가가 돌아가는 기틀을 물려주었다. 죽기 전에는 효종(세자) - 현종(세손)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후계자들을 깔끔히 했고 광해군의 실패와 청나라 태종에게 털린 뒤 왕조의 재건에 성공했고, "여민휴식與民休息" 정책을 통해서 경제와 민생을 모두 재건해낸다. 즉 외치나 인사 관리로 따지면 암군의 칭호를 절대 피하기 어려우나, 유명하지 않은 후반기에는 수십년간 이어진 암군들과 전쟁의 여파를 막아내면서 숨을 돌릴 기회를 주었다.

당장 인조는 반정한 바로 그날에 영건, 나례, 화기 등 12개 도감을 폐지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던 조도사 6명과 제주 목사의 처형을 명했다.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정치적 과장이 있기는 하겠지만, 민의 고통에 대한 반정세력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띠었다. 극심한 흉년으로 재정난이 예측되는 시점에 광해군의 조도성책을 불살랐던 것, 조도관이 민간에 흩어져 비축해둔 미, 포를 백성들에게 나눠주도록 지시했던 것도 그 연속선에 있는 조치였다. 또한 인조는 즉위 후 6개월 만에 민에게서 거둘 예정이었던 원곡 11만 수천 석을 삭감했다. 이 원곡은 진헌, 제향, 어공에 쓰일 예정이었는데, 광해군 13년 이전의 미납 공물이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인조 말년 공식적인 공물가 원곡의 총량이 5만 석이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때 삭감된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 대로 이런 조치를 통해서나마 광해군대의 '일탈' 을 '정상화' 해야 했다.[138]

광해군 대는 국가 재정 수요가 폭증하면서 납세자들의 납세 부담이 급증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공물 납부 및 징수 과정에서의 구조적 폐단으로 존재했던 방납(防納)이 다시금 부활했고, 궁궐 공사가 과도하게 연이어 추진되면서 수많은 백성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왕실을 최정점으로 한 지배층의 사치 및 낭비 풍조가 만연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광해군 치세 3기인 광해군 10년 ~ 15년(1618년 ~ 1623)의 5년 동안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조정이 '여민휴식'의 기치 아래 국가 재정 규모의 감축, 긴축재정의 실시, 세금 부담의 완화와 같은 개혁적 움직임을 추진해왔음을 고려해보면, 광해군 정권의 일탈적 양상은 바로 그 '여민휴식' 정책의 '부작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예컨대 중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인 1640년대를 소빙기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670년 ~ 1700년 무렵이었다. 중국 역사학계가 1640년대를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시기로 이해하는 까닭은 바로 이 무렵 왕조 교체를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 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139] 반면 같은 수준의 이상 저온의 충격을 받은 1640년대 즈음의 조선은 도리어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이는 인조 정권이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긴축 재정, 세금 부담의 완화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위해 매진했던 덕분이다.[140] 임진왜란 이후 조선 조정은 여민휴식을 국정 운영 모토로 하여 국가재정 규모 감축, 긴축 재정, 세금 부담 완화 등의 조치를 시행한다. 그리고 광해군 대에 완전히 180도 돌아서 일탈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국정을 운영한다. 덕분에 중국이 왕조 교체라는 격변으로 이상 저온의 충격을 가장 강하게 받은 1640년대를 무사히 넘기고 제도사적으로 의미있는 논의들이 이뤄진다. 아무리 효종이 명군이라도 처음부터 기반없이 좋은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운 법이고 인조는 꽤 의미있는 성과들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여민휴식이라는것은 본래 중국 전한의 황로학파가 내세운 사상으로서 전한 초기 문제와 경제의 정책이었다. 여민휴식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으며 이는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다. 선조는 임란 이후 이 정책을 실행했고 이 정책은 인조가 계승하여 효과를 거두게 된다. 인조 - 효종기의 국가 사정은 오늘날의 생각보다 상당히 나은 것이었고 이런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만주족의 두 차례 침공(1627, 1636)은 임진왜란에 비해 조선 사회에 그다지 큰 충격을 주지 않았다. 두 차례의 침공이 모두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다는 점, 임란 이후 고조되었던 대외적·군사적 긴장으로 인해 조선 정부가 계속해서 ‘여민휴식 정책’의 고삐를 조이고 있었다는 점 등이 그러한 충격을 흡수한 요인들이었다. 다만 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을 몸소 겪은 인조가 그의 재위 기간(1623~1649) 동안 준전시체제 아래의 정부 정책인 '여민휴식 정책'을 더 한층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호란 또한 17세기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순기능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진짜 사실에 가깝다. 부정론에서 광해군때나 경신대기근때도 사치 기록이 있었다며 인조시기부터 경신대기근 시기 전까지 경제발전에 대해 억지로 부정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논문에서 이 시기 조선의 경제가 개선되고 농지가 개간되고, 인구가 순조롭게 늘어나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못한다.

인조~효종 대에는 대동법이 경기도 이하 5도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대동법이 확대 실시된 1630~40년대를 기준으로 농민들의 부세 부담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추정해보도록 하자. 당시 농민들은 전세, 대동세를 기본세로 양역(良役)이나 신공(身貢), 그리고 기타 잡다한 노역세(勞役稅) 등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전세는 기본 전세와 추가 전세(삼수미, 당량미), 그리고 운송비용 등을 모두 포함하여 토지 1결당 미 16두 남짓이었고, 대동세는 미 13~16두 정도였다. 양민의 군역이나 노비 신공은 면포 2필(미 12두) 남짓이었다. 경상도 선산의 경우 전세를 제외한 나머지 부세 가운데 노비 신공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양민의 군역이나 노비의 신공 세액을 토지 1결당 과세 기준으로 환산하면 미 4~5두 정도 되었다.

토지 1결당 부세 총량을 이렇게 추산해보면, 신역이 면제된 사족은 미 29~32두(전세+대동세), 신역을 부담하는 양민과 노비들은 33~37두 정도를 납부했다고 여겨진다(전세+대동세+신역세). 이 정도의 납세액을 토지 1결의 생산량(조 600두=미 240두)과 대비하면, 사족은 생산량 대비 12.1%~13.3%, 상민은 13.8~15.4% 정도를 납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술하겠지만 양안이 당시 실제 경작되던 토지의 절반 이하를 등록한 수세대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납세액은 위 추정치의 절반에 불과했다. 여기에 각 관청에 납부하는 각종 수수료와 징세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 잡세를 모두 합치더라도, 농민들의 납세 총액은 생산량 대비 10%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병자호란 이후부터 경신대기근 이전까지 장기간의 정치적 안정이 인구 증가와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생산의 증대를 초래했다. 그 과정에서 개간과 이앙법이 더욱 확산되었고, 조선 조정은 여민휴식을 위해 양전사업에서 백성들의 토지를 모두 시기전(時起田, 현재 경작지)으로 등록해 부세를 매기기보다는 진황잡탈전(陳荒雜頉田)이라는 별도의 면세전으로 규정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면제해주었다. 제도 개혁을 위해 전쟁의 참상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던 유학자들조차 1650년대 이르면 하삼도의 인구 증가, 토지 증가가 임진왜란 이전과 비교해서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라고 평할 정도로 인구와 농업기술의 발전이 진전된다. 부정론에선 광해군때의 사치 풍조와 인조 시기를 비교하면서 그놈이 그놈이라는 이상한 논지를 펴고 있는데 경제를 땅바닥으로 처박아버리고 백성들의 수탈에 열중했던 광해군 시기의 사치와 경제지표를 지속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던 인조 시기의 사치는 그 결이 다르다는걸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인조부터 현종 시기는 임란의 전후 복구 사업이 활발했던 시기로서 조선만이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3국이 각자의 방향대로 해결해나가던 과제였으며, 17세기 무렵, 일본의 은과 청나라의 백사, 필단 등 생사를 이용한 교역에 참여하여 막대한 재부가 유입되게 된다. 즉, 인조 시기에는 광해군때 민간의 부를 빼앗아 그것으로 사치 풍조가 일어난 것과 달리 전반적인 사회 전체의 부의 축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항상 수반되는 사치와 향락 풍조는 인조 치세 이후 1650년대 중앙의 고관뿐만 아니라 지방 사족, 수도의 상층 양인들에게까지 확산되었으며, 1670년 경신대기근이 나타나기 불과 6년 전까지 전반적인 사치스러운 사회 풍조를 비판하는 상소가 나타날 정도로 상업적, 경제적 번영이 진전되는 흐름인 것이다.

이런 정책은 현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점차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사회 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현종 말기부터 숙종 시대에 이르는 소빙기로 인한 기근의 연속은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것은 숙종, 영조, 정조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데.이는 한나라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호족이나 지주 계급이 성장했고 이로 인한 사회 양극화로 인해 한무제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 주도, 국가의 사회 경제 개입과 법가적인 통치책을 쓴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또한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인조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놀랍게도 병자호란 이전까지 광해군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해보자. 의리를 떠나서 이익 관계로 생각해도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인조이든 광해군이든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친명 정책을 유지하되, 청(후금) 자극은 자제'이다. 이는 과거 고려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유지했던 노선과 똑같다. 왜냐하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그 순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막혀있었고, 정말 심각한 내분으로 명나라가 자폭하지 않는한 자력으로 청나라는 도저히 명나라를 끝장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과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대체적으로 청나라에게 밀리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송나라는 그보다 더 심하게 털리면서도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요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대세가 청나라이니 실리를 위해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결국 후대의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141], 조선의 입장에서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명나라의 멸망은 이자성의 난 때문이므로[142] 청나라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어렵다고 본 조선의 판단은 들어맞았다. 이 반란의 성공은 청군 때문에 명의 전력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지만, 어쨌거나 청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서 오삼계에게 막혀있었다. 더군다나 명나라는 남송으로 살아남은 송나라 때의 교훈을 살려 강남에 많은 물자와 지방군으로 이민족이나 반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문제는 이렇게 세워진 남명이 숭정제의 대책없는 자살과 후계의 불안정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망해버렸다.[143] 따라서 조선이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유사한 상황에 있었던 고려의 대응책이 된다.[144]

결국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가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는, 기본적인 외교 노선이 아니라 구체적인 외교 스킬의 문제다. 선조 때 이황을 비롯한 원론주의 성리학자들의 득세로 광해군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성리학자들이 실무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문제를 보였으나, 광해군의 경우 스스로 전쟁에서 분조를 이끌었던 경험으로 군주 자신의 외교적 감각이 있어서 대외관계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완고한 신하들을 설득하는 입장이었으며 인조는 시종일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장, 단기적인 계획을 짜지 않았으므로 외교능력이라는 것이 없다고 봐야한다.

물론 이괄의 난은 밑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부정론에서 인조 잘못인거 마냥 책임을 돌리는 것과는 달리 실제론 인간적으로 인조의 신뢰를 완전히 역심으로 갚은 이괄의 잘못이 너무 크긴 하니 인조에게 무조건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이괄만 아니었다면 정예군이 배치되었던 북쪽지역 방어가 허술하게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북지역 군관들은 이괄의 난 이후로 역적으로 몰릴까봐 진법 훈련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자만 그렇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태에서 서북지역 군관들을 인조더러 무조건 믿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인조도 이괄의 난으로 전략 예비군이 통째로 날아가버린 상황에서 아예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다시 군적을 정비하고 중앙군을 증강했다. 5군영 중에 선조 대에 창설된 훈련 도감, 숙종 대에 창설된 금위영을 제외한 어영청(1624년), 총융청(1624년), 수어청(1626년)이 인조 대의 작품이며 금위영의 모태가 되는 정초청도 인조 대에(1636년) 신설된다.[145] 그리고 이괄의 난의 교훈을 받아들여 광해군 대에 내버리다시피했던[146] 기병 전력과 근접전 능력의 배양이 이뤄졌다. 다만 중앙군의 증강은 이괄의 난이라는 도성이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친위대를 형성한 것일뿐 정작 심상치않았던 북방에 대한 방비는 없었다.

여기에 하필이면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남한 산성에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인조가 본인이 벌인 짓이었으니 재수가 없다는 것이 아닌 본인의 실책이며 누구의 옹호도 받을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이괄의 난으로 북방 지휘관 상당수가 날아가고 장만과 정충신도 병사해 호란 당시 인조 정권에는 믿고 맡길 국방 전문가가 없었다. 이렇게 보면 물자가 거의 고갈되기 직전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며 10만 대군을 막아서던 인조가 왜 강화도가 함락되자마자 바로 항복을 했는지도 답이 나온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왕이 들어갈 때는 죽음도 불사하겠다고했으나 전세가 불리해지고 세자를 요구하자 세자를 내주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하며 비굴한 태도를 보인다. 호란이 발발한 그 시점에서 인조는 분조를 만들어야한다는 신하들의 요청도 거부하고, 심지어 얼른 피해야한다는 것도 거부하며 청나라가 북방만 공격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여유를 부리다가 남한산성에 갇혀버린 시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셈. 물론 이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부린 인조의 자업자득이긴 하다.

이 시점에서 다른 이야기지만 병자호란 자체는 조선이 무조건 잘못해서 발발한 전쟁이 아니다. 세폐에 형제관계까지 조선은 명과 단교하고 (산해관도 못뚫던) 청과 군신관계를 맺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제외하며 어떻게든 들어주려 했다. 만약 병자호란 이전에 조선이 청에 대한 두려움으로 급하게 명과 단교하고 청의 조공국이 되었다면, 청태종은 '명과의 관계를 끊고도 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것 같다.', '정말로 명과 단교한 게 맞는지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진심으로 우리의 조공국이 되려는 게 아니라 일종의 기만작전처럼 보인다.', '명색이 우리의 조공국인데 조공을 너무 성의없게 하는 것 같다.' 등의 다른 명분을 내세워 병자호란을 일으키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어떤 명분도 없이 병자호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당시 대세가 청나라였으니 병자호란을 막으려면 빨리 명과의 군신관계를 끊고 청의 조공국이 되어야 했다는 대중적인 역사 인식은 당시 청나라의 경제가 완전히 파탄난 점, 명과 단교하고 자신들의 조공국이 되라는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 아닌 다른 명분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간과한 근시안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인조는 고려 고종과 달리 나름 실권을 쥐려고 했으며, 그 나름대로 왕권을 공고히 하니 그 나름대로 업적이 있으나 고려 고종이 외치에서 업적을 닦은 것과 달리 내정에선 고려 고종과 달리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는 또 나름 칭찬이 가능하다. 앞전에 왕이 폐위가 되었는데 고려 고종은 스스로 오른 것이 아니라 권신들 손에 올랐고, 반대로 조선의 인조는 스스로 올랐다는 점에서는 높은 평을 받는다. 본시 앞전에 왕이 폐위가 되면 실권을 잃는 경우가 허다한데 조선 인조는 실권을 얻었다는 점에서 내치에 신경을 썼다는 점에서 높은 평을 받는다. 대체로 조선 인조가 욕을 먹는 것은 외치에서의 비판이지 내정에선 그런대로 괜찮은 왕이었다. 반대로 고려 고종의 경우는 외치에서 많이 극찬받아도 내치에선 장기간 재위에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권신들에게 휘둘렸다.

또한 혈육 핍박에 대한 변명을 해 보자면,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147] 왕조 국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식으로 정적이 되는 사례는 고대부터 무척 흔하고 초성왕의 예처럼 둘 중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예도 적지않다.

소현세자의 경우에는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원 간섭기 고려가 타국 역사학계에선 원의 속국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왕조 국가에서 왕이 원의 의중에 따라 갈아치워지고 원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청이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킨다면,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사후 승인에 머물렀던 명의 책봉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조선 왕실에 가해진다.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조선 왕이 탄생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은 당연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의 행보는 그런 위기의식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만들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을 잊었는가? 짐은 나한테 무릎 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는가 하면, 항복 조건에 "유고시 (자기네 손아귀에 있는)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굳이 넣었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쯤엔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있었다.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으로 인조의 권위가 떨어진 상황에서 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정론자들이 이말은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준다는 말도 되지만 같이간 봉림대군(효종)에게도 해당되는 소리고 항복할때부터 양위 내용에는 세자가 아닌 아들로 명시되어 있으며 이후 협박문서에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같이 두고 협박을 했다며 봉림대군은 왜 왕위 계승자가 되었느냐고 까긴 하는데 까놓고 말하면 물론 봉림대군도, 소현세자도 둘 다 잘못은 없다. 단지 그래도 청나라와 어느정도 거리감을 두었던 봉림대군에 비해 소현세자가 너무 청나라 고위층과 친했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까놓고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 용골대가 대놓고 찾아와서 세자 소생 데려다 키우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소현세자는 청나라 지배층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인조가 그 말에 당황해서 괜히 소현세자 소생은 죽었다고 둘러댄 게 아닌게 당연히 그 상태에서 장손이 살아있다고 말하고 청나라에 자기 장손들 키우게 해주면 나중에 청나라가 청나라인으로 키워진 소현세자 소생으로 왕권을 넘기라고 압박하기도 쉬워지고 이러면 정말로 원 강점기와 뭐가 다르냐 소리가 안 나올수가 없는데 부정론자들이 이 점을 너무 간과하는 면이 있다.

당장 인조 시절 당시에는 오랑캐에게 항복한 조정에 출사하는 것은 선비로서 할 짓이 아니다라는 소리까지 산림에서 나오는 마당이었다. 효종이 북벌을 외친것도 이런 산림 세력에 대한 회유의 성격도 있었던 게 사실이고. 물론 산림은 항상 소현세자 계 왕족들에게 동정적이었지만 과연 청나라의 간섭을 통해 왕권을 확립한 왕족, 심하면 대놓고 청나라인 정체성 가진 왕족들에게도 동정적일 수 있을까를 고려하면 이건 회의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물론 인조가 아들에 대해 악감정이 가득했던 건 며느리에 대한 처분에서도 드러나지만 대놓고 청나라가 손을 대려고 시도하는 장손들에게 왕권을 넘기면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핑계로 옳다구나 하고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게 뻔해진 상황에서 장손들의 처우에 대해 인조에게 딱히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손자들을 유배는 보냈지만 죽이진 않았기도 했고.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148]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5.2.1. 보론: 인터넷 인조 인식 비판[편집]

좀 더 극단적으로 보자면 조선 중후반기의 대부분 암울한 사건들은 이 임금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태반이다. 그야말로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에 가장 잘 부합한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알파위키 인조 평가 문단의 일부

보통 인조 관련 글들은 광해군과 함께 옹호와 까가 상당히 분명히 갈려서 문제인 케이스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광해군은 지지자들로 인해 어떻게든 그 과오에 대한 학계 연구를 설명해도 옹호가 붙기가 일수고 인조의 경우엔 그 반대로 잘한게 분명히 있다는 학계 연구 서술을 설명해도 어떻게든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당장 2000년대 초 만해도 광해군은 '비운의 성군', 인조는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인조에 대해선 원색적인 욕으로 도배되기 일쑤였다. 물론 지금도 알파위키 문서에서 인용했듯이 조선의 모든 죄악은 다 인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평가가 아주 당연할 정도로 여전히 인조는 볼 것도 없는 암군 취급이다. 다행히 광해군쪽은 럭키 연산군이라고 본인 원래 평가 좀 맞게 찾아가고 있긴 하다. 물론 그놈의 중립외교 타령은 그것까지 버리면 광해군 평가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못 버리고 있고 광해군 빠들이 억지로 극과 극으로 갈린다고 물타기를 하려고 하는 건 여전히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비단 알파위키만이 아니라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의 외정 책임론과 삼전도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민족적인 굴욕을 주었다는 이유로 대중적으로나 인터넷에서나 인조는 아주 즐겁게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까여왔고 2020년대 들어와서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아무리 들이대어도 인조는 무조건 암군이라고 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인조를 까기 위해서라면 역사 왜곡도 서슴치 않았는데 대표적인 인조를 까기 위한 역사왜곡으로는 '충직한 군인 이괄을 냉대하고 정예군을 스스로 말아먹었으며 간신 김자점을 도원수 같은 중요한 자리에 두어서 나라를 청나라에게 패배하게 만들었다'는 식의 서술이다. 그런데 실상은 정 반대다.

일단 '이괄을 괄시해 이괄의 난을 불러서 조선의 정예 국방력을 알아서 날려먹은 암군 인조'라는 얘기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실제로는 오히려 그 정반대로 인조는 이괄을 상당히 우대했고 나름대로 많이 아꼈다. 굳이 인조가 욕을 먹어야 한다면 정치적 스킬 부족. 이괄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고위직을 안겨주어도 그가 만족할 인물이 아니라는걸 눈치채지 못했고 이렇게 문제 많은 인물을 주요 정예병이 있는곳에 부임시킨 것도 모자라 금부도사에서 아들의 반란혐의를 설명하게 하고 본인에게는 해가 가지 않을거라고 약속하는 것으로 최대한 인조 나름대로는 이괄에게 선의를 베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당연히 이게 먹힐리가 없었고 결국 이괄의 난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광해군과 인조의 공통점이 뭐냐면 아버지, 할아버지인 선조의 정치력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는 건데 즉위 직후 인조가 딱 그런 종류의 실수를 한 셈이다. 병자호란도 사실 이런 인조의 정치적 스킬 문제가 컸고...그러나 어쨌거나 인조 스스로는 이괄을 신뢰했고 적어도 이괄을 무조건 냉대해서 꼭지가 돌게 만든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괄의 아들이 역적행위로 고발되었음에도 가솔들을 보호하고 금부도사를 보내서 상황 설명을 하려 했을 정도면 '내가 이렇게 잘해줬는데 이괄도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면 이해해주겠지'라는 순진한 사고방식으로 접근했다가 된통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물론 이 부분은 인조의 잘못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조가 정말 여러가지로 배려해주는 걸 눈치도 못 채고[149]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의 안위도 무시한 채 반란이라는 길로 스스로 들어간 이괄의 잘못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나라에게 굴욕을 당한 결정적인 이유라는 걸 생각하면 인조는 이괄에게 '내가 너를 그렇게 믿었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낼 여지도 충분하다. 그나마 재위 기간이 길어 질수록 나름대로 인조의 정차적 스킬이 성장해서 이런 삽질은 조금씩 줄었고 결국 백부 꼴은 안 당하고 왕으로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백부보다야 왕의 자질이 있었다고 해야겠다. 그게 좀 일찍 터졌으면 인조 자신에게나 조선의 역사 입장에서 좋았겠지만 말이다.

김자점의 예도 그러한데 김자점은 후세의 일로 간신이라고 까이기는 하나 병자호란 당시에는 본인 문서에도 나오지만 정말 자기 능력내에서 할만큼 했고 이괄의 개트롤링으로 망가진 조선의 국방력을 회복하고 병자호란을 대비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한 사람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청나라군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워서 본인이 중상이 입기도 했다. 적어도 인조가 당시 김자점을 기용한 것은 김자점이 국방정책에 관련해서 그 부분에서는 나름대로 믿음직한 사람이었기에 기용한 것이지 인조가 멍청하거나 간신의 세치 혀놀림에 휘둘려서 기용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 김자점이 후일 매국노 짓을 했다는 이유로 인조는 무능한 간신 김자점에게 휘둘려 나라 망친 암군 취급이다. 이런 시각이 적나라하게 반영된 것이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같은 사극이다. 물론 병자호란 문제에서 인조가 잘못을 안 한 점이 없는것은 분명 아니고 최고 권력자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건 맞지만 이렇게 본인 잘못이 아닌 부분에서 사실왜곡까지 당하면서 까여야 할 이유는 없다.

또, 모문룡에게 세폐 바쳤다고 까는데 우선 모문룡이 광해군 시기부터 가도에 주둔한지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나 인조나 사실 둘 다 딱히 모문룡을 내쫒을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까놓고 그 상황에서는 조선에서 딱히 모문룡을 내쫒을 방법이 없었다. 막말로 그렇다고 해서 모문룡을 내쫒으면 아직 세력 멀쩡한 명나라에게 오히려 얻어맞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까놓고 인조도 이 부분에서 할말이 없는게 아닌게 인조 역시 명나라가 무너져 간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다고 예언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억지로 모문룡 쫒아내서 명나라에 대책없이 두들겨 맞으라는 말인가? 인조 초기 당시 모문룡이 살아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명나라는 원숭환을 중심으로 청나라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런 명나라를 상대로 그것도 즉위한지 1년도 안 되어 이괄의 난이라는 희대의 통수를 당해 서북방 정예병력이 송두리째 날아간 상황에서 인조가 어떤 방법을 써야했단 말인지 이 사람들은 대안 제시를 못한다.

또한 인조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성리학적인 흐름을 강화시켜 나라를 유교 탈레반으로 만든 암군으로도 해석된다. 그런데 물론 성리학이 시대가 지나면서 교조화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게 인조만의 잘못이냐면 의문을 제시할 국내 학자들이 수두룩하게 많을 것이다. 그건 오히려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서 그렇지 인조만의 잘못이 아닌데도 조선을 유교 탈레반 국가로 만든것은 무조건 인조 잘못이라고 기술한다. 까놓고 조선의 유교 탈레반을 가속시킨 걸로 따지면 인조는 문체반정, 서체반정 일으키고 송시열을 송자라 추숭하고 막 싹이 트고 있던 자유로운 사상들을 억압한 성리학 반동주의자 후손 정조에 비해 정말로 세발의 피에 불과하다.저승에서 이걸 박지원이 들었으면 낄낄 웃을 일이다 그런데 인조는 유교 탈레반 암군이고 정조는 개혁군주 성군이라고 칭송받는다는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150] 진실을 따져보면 인조부터 현종 사이의 기간은 왜란과 호란, 그리고 광해군의 잘못된 치세를 겪으며 지배층 사이에서 '아, 이대로라면 정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가 망하겠다'라고 생각해 기존까지의 잘못된 태도를 지배층들이 반성하는 기간에 가까웠다. 그런 측면에서 대동법 같은 개혁이 추진될 수 있었던 측면도 있고. 개인적인 면모로 따져도 인조는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의 주장에 동감하며, 몸값을 내어 끌려간 여성들을 데려오는데 힘썼다. 이미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뒤라 지켜지지가 않아서 문제였으나, 남편들이 아내를 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명을 내리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환향녀 문서에서 나온것처럼 인조는 최명길과 함께 상식인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다. 물론 인조가 했던 의도는 좋았던 많은 문제 해결책처럼 잘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내정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 문서 긍정론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인조부터 현종까지의 기간은 광해가 헤벌레 하며 궁궐공사나 하고 내팽겨쳤던 선조의 전후 복구정책을 다시 이어 받아 경제를 개선시키고 세부적인 지표를 대폭 상승시킨 시대로서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가난하고 암담한 시대가 결코 아니었다. 다들 잘 살아보자고 민간에서 경제부흥 일으킨 시기였고 실제 지표상으로도 경제가 상승국면이었다는 건 통계상으로도 다 나오고 당시 증언을 봐도 그렇다. 보통 이러면 다른 군주들의 경우엔 외정의 암군이었지만 내정에서는 명군이었다라던가 적어도 국정을 돌보려는 마음가짐은 있었고 의도는 좋았다라는 립서비스라도 해주는데 인조는 그런거 없고, 무조건 나라 살림을 말아먹은 암군 취급이다.

또 인조 초기에 훈신들이 다 해먹다는 소리가 퍼진건 사실이다. 확실히 이 부분은 인조의 잘못일 것이다. 근데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직후에 이런 노래가 대중에 퍼졌다고 가정해보자. 인조반정 때 처럼 저런 노래가 대놓고 떠돌았다면 그 노래 작사자는 발본색원 되어서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직후에 한 자리들 단단히 차지했던 훈신들에게 목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반정에서는 어떻게든 솔직히 훈신들이 뭘 한자리 안 해먹을 수가 없는게 사실이고 아직 집권 초기에 이괄의 난 같은 것도 겪고 뭘 보여준것도 제대로 없으니 백성들이 광해군 정권이나 인조 정권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까도 뭐 내세울게 없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적어도 반정 직후에 이런 얘기를 사관들이 공공연하게 사초에 적을 정도였다면 당시 인조 정권에 있어서 반대파를 찍어 누르는게 급선무가 아니었다는 증거도 된다. 중종반정 한참 이후에 나온 중종반정 비판물인 설공찬전은 아예 대놓고 금서 처분에 철저하게 해당 출간물 유포를 찍어 눌러서 2000년대까지 사실상 내용이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또 즉위 4년에 올려진 상소를 가지고 이괄의 난때 민심을 못 잡은게 민생을 못 잡은 증거라는데 그 시기에 인조는 이괄의 통수[151] 수습하고 모문룡한테 세폐 바치고 광해군이 개판친거 수습하는데 만도 힘들었다. 오히려 그런 재위 초기 어려운 상황에서 결국 후계자 효종에게 어떻게든 꽤 괜찮은 나라를 만들어서 넘겨준 것만해도 능력이 절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반증이다.

정리하자면 현재 인터넷이나 대중적 인식에서 인조는 모든면에서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규정되었고 까야 제맛이라며 매도되었으며 무슨 긍정적인 사료나 연구가 나와도 무시당해야 마땅하다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답정너를 당하는 상태다. 근데 실상은 조선 중기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이 까이는 선조, 광해군, 인조를 나열해 봤을때 학계에서는 선조보다야 못할지언정 광해군보다는 조선에 나은 임금이었다고 거의 무조건 높게 친다. 적어도 2020년대 연구 동향을 살펴 보면 그렇다.

실제 인조는 분명 많은 실책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여러가지 정책적 성과나 공을 인정받을 만한 군주는 된다. 다만 병자호란이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일단 이 사람을 암군으로 몰아세워서 민족적인 치욕과 당시의 모든 잘못을 다 이 사람 탓으로 덮어 씌우자는 심리가 이런 평가를 고의적으로 막아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조는 무조건 암군 취급하는 입장에서도 이런 연구가 있는거 모르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근데 인조만 없었더라면, 인조가 반정을 안했더라면 병자호란 같은 치욕은 안 당했을거라인조시대의 조선이 겪은 군사적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와 역사왜곡까지 하면서 취해버린 유사역사학적인 환상이 이것을 막고 있다.

물론 아예 학계의 연구나 실제 역사적 사실이 이런 인식에 합당하게 부합한다면 물론 그렇게 몰아붙여도 상관은 없다. 문제는 인조의 경우에는 사실 엄밀하게 따져서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까놓고 냉정하게 말해보자 일제의 고의적인 만선 식민사관으로 광해군이 오늘날까지 과대평가의 수혜를 받지 않았다면 인조가 이렇게까지 욕을 먹었을까? 이런 평가는 중국에서의 조조와 조위 재평가나 유비와 촉한 격하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즉 전근대 시기에 평가는 전근대가 잘못 평가한 것이고 지금 우리의 평가, 근대적인 평가가 무조건 옳다는 그 오만한 역사의식 말이다. 당장 조선시대에 실제로 조선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봐도 광해군은 인조라도 나서서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답없는 인간말종 암군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래서 그 오만한 역사 의식을 내세워 폭군 광해를 희대의 명군으로 띄우고 반대급부로 인조를 희대의 암군으로 만든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 다음에 학계에서 다시 돌이켜보니까 결과가 뭐였나? 우리가 잘못 생각했고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지금 그 우리네 조상들의 인식이 다시 맞았던 것으로 밝혀지는 상황에서 평가해 보자면 인조보다 더 답이 없었던 국방정책을 펼치고 인조가 등용한 인간들보다 더 노답인 인간들로 조정을 가득 채운 광해군이 그대로 호란 당시 임금 자리에 있었다면 광해군이 십중팔구는 인조와 똑같은 욕을 먹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광해군의 암군 짓을 생각하면 더 욕을 먹었을테지만 말이다. 광해군은 나라의 역량 자체를 그야말로 개박살을 내놨기 때문에 그래도 총이라도 쏴보고 진 인조와 달리 총도 못 쏴보고 졌을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다.아닌거 같다고? 그럼 화약 만들 염초 전부를 기왓장에다가 몽땅 들이붓는데 그런 생각 안들겠나?광해군은 정말 여러가지로 쫒겨날 시기까지도 운이 좋았던 럭키 연산군이 맞고 인조는 여러모로 지나치게 두들겨 맞는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상에서 작성되는 무조건 비하를 목적으로 하는 인조에 대한 평가가 정말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고려할 여지는 충분히 있고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 인조의 능[편집]

파일:Jangneung_Joseon_Royal_Tomb_Article_01.jpg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릉(長陵). 인조 능,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능도 장릉(章陵)인데 이 둘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장릉(章陵)은 김포에 있다. 첫 왕비 인열왕후 한씨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삼전도비 테러범이 다음 표적으로 타겟팅한 물망에 오른 곳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장된 이후 조선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엄청난 수난을 당했다.

이 능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장릉 참고.

7. 인조 외모[편집]

실록에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인조실록 1권, 인조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과연 제2왕조 창건자에 걸맞는 탄생 설화 분칠

재위 초반에 옥체가 점점 수척해지고 용안이 검게 변하는 증상이 나타나자 신하들이 걱정하는 부분이 언급되는데 인조는 자기 자신은 아무런 질병이 없다고 발뺌한다.(인조실록 13권, 인조 4년 7월 7일 정축 4번째기사) 또 재위 후반에 들어서는 인조의 배가 크게 부푼 증상이 일어났다.(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8월 2일 갑오 1번째기사)

실록에서 인조 외모에 대해 뛰어났다고 언급한 부분은 탄강할때 그 외모과 비범했었다는 내용뿐이다. 오히려 재위 초반에 들어서 수척해지고 얼굴이 검게변하는 증상이 나타났고 후반에 들어서는 배가 부푸는 증상까지 나타났었다는 점에서 외모가 많이 망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8. 인조 어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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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어필로, 행서체로 적혀 있다. 대대로 필체가 반듯한 조선 왕가의 특질은 계승된 듯.[152] 다만 필체를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시들에게 베끼게 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9. 동상[편집]

송파도서관에 있는 서흔남 동상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송파도서관에 세워진 일종의 미담 동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인조를 업고 피신한 나무꾼 서흔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서흔남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실존 인물로 대장장이나무꾼일을 하는 낮은 신분이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남한 산성 외부의 근왕군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로로 양반이 되고 벼슬까지 제수받았다. 인조를 업고 피신시켰다는 전설이 가장 유명하며 인조가 피난 당시 입던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전설도 있다.

10. 대중매체에서[편집]

병자호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치를 야기한 국왕이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갖은 실정과 떨어지는 인간성까지 더하여 인조는 대한민국 매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인조가 매체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아둔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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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같이보기[편집]

[1] 고종 37년[2] 당시는 왜란 중이라 왕실 거처가 모두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정정옹주가 태어나기도 하였다.[3] 나중에 정원군의 국왕 추숭 이후 능양대군으로 소급 적용되었다.[4] 인조반정 후 왕으로 추숭[5] 인조반정 후 아버지를 추숭 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추숭하여 인조는 종묘 영녕전에 아버지, 어머니의 신위를 모시게 된다.[6] 1차 왕자의 난(태종 1398년), 계유정난(세조 1453년), 중종반정(중종 1506년), 인조반정(인조 1623년)[7] 다만 선조와 인목왕후의 나이 차이가 하도 많아서(32년), 고모 정명공주와 삼촌 영창대군은 능양군보다 더 어렸다. 그리고 명목상 할머니인 인목왕후는 능양군보다 고작 11살 위였다.[8] 태어난 순서로만 보면 장남이자 적자는 인조, 차남이자 서자인 능풍군, 그리고 3남이자 적자인 능원대군, 그 다음이 4남이자 적자인 능창대군이다.[9] 작호는 친어머니의 본관인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고을인 '능주(綾州, 현 능주면 등 화순군 서남부)'에서 유래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10] 순종은 인조의 10대손이자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9대손이다.[11] 일단 형식적인 양자관계를 따지면 왕통은 계속 이어지는 걸로 여긴다.[12] 예시로 조선왕조실록의 표제를 살펴 보면 선조실록까지는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선조실록처럼 조선의 묘호 뒤에 명의 시호를 붙이는 방식으로 사용해 왔지만 인조실록부터는 청의 시호를 빼고 '인조대왕실록'과 같은 형식으로 조선의 묘호만 제목에서 쓰게 된다.[13] 명의 시호를 받았지만 청에 복속한 뒤에 묘호가 주어진 정종실록도 앞표지에 '정종공정대왕실록'이라 안 쓰이고 '정종대왕실록'으로 쓰였다.[14] 승하 후, 아직 시호(묘호)가 정해지지 않은 군주를 임시로 칭하는 호칭.[15] 이상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 5월 23일 신사 1번째기사[16] 연산군일기 2권, 연산 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17] 굳이 성종으로 하자면 大자를 붙여서 대성종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18] 다만 이때는 명나라에도 인종이라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봐서 성종으로 정해졌으며, 연산군이 통감에 나온 중국 송나라송인종을 들어 성종이라는 묘호가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조선 성종은 한국사 순위권 암군인 인조 따위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인 명군이다.[19] 사실 원래 祖라는묘호가 들어가는 군주는 1명 혹은 2~3명 정도만 있어야 하는데, 조선 世祖가 자신이 혼란한 국가를 다시 일으켰다는 명목으로 붙이기 시작하면서 이놈, 저놈이 단지 멸망 직전에 있었던 당시 조선의 왕이라는 명목으로 祖라는 묘호가 붙여지면서 상대적인 가치가 낮아졌다.(영조-정조-순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개창하면서 5대조를 추존하는 명목이 고려되었다.)[20] 현종은 태묘악장이나 기타 서적에 성조(聖祖) 열조(烈祖)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묘호에서 알 수 있듯이 업적과 덕이 높았다 왕이 되기전 불우한 인생을 보내었고 왕이 되어서 인조와 같은 아니 더 어려운 난관들을 격었지만 모두 이겨내고 전성기의 토대를 닦았다 실제로도 이미 당대에 요순에 비유되며 주변 국가 군주들에게도 인정 받을 정도로 훌륭한 군주였다. 세종은 4군 6진의 개척을 이유로 세(世)를 묘호로 하였다. 왜 조가 아니라 종이었냐면 개국을 한 태조 외엔 조 자를 쓴 예가 이전까지 없었으므로.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 태조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朱世珍).[21] 신립의 형 신잡의 아들.[22] 그런데 사실 이 고변이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렇게 강하게 처리되었냐는 것은 능창군이 누구의 양자인가를 봐야한다. 능창군은 생부가 정원군으로 정원군의 동복형 신성군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신성군은 임진왜란 직전까지 광해군과 세자 자리를 두고 다투던 인물이였다. 당시까지 적자가 없었던 선조에게 서장남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여서 제외되었고 서자이자 둘째인 광해군과 넷째 신성군이 다음 세자 자리를 다툴 수 있었다. 신성군의 동복형인 셋째는 어려서 죽었다.(신성군의 어미 인빈 김씨는 당시 선조의 총애를 최고조로 받고 있었고 장인이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난 신립으로 갑작스러운 전란만 아니었다면 신성군이 세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다툼 속에서 기축옥사 이후 좌의정으로 승승장구하던 송강 정철(서인 영수)이 실각하게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광해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과 자신의 동복형이자 서장남 임해군 다음으로 처리해야 될 인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능창군이였다.[23] 이 때문에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인홍은 자신의 제자인 신경희를 구하기 위해 평번(平反피의 사실을 거듭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거나 혹은 신중히 조사하여 죄를 가볍게 해 주는 것을 말한다)을 주장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9011_001[24] 인조 실록의 기록에 신경희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의금부가 수색하러 오자 거절하고 내놓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9_004[25] 이 말에 광해군이 어이가 없었는지 "대북 사람 중에 노예가 된 자가 누구인가?" 라고 따지자, 신경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9007_00[26] 이를 두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미신 때문에 능창군을 죽이고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었다고 사관의 평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작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능창군이 죽은 것은 광해군 7년의 일이고 정원군의 옛집인 새문동에 서별궁(경희궁)을 지은 것은 광해군 9년, 정원군이 죽은 것은 광해군 11년 말의 일이다. 화병으로 죽었다기에는 자식이 죽은지 5년, 땅을 빼앗긴지 3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오히려 아들이 죽은 다음 해에도 정원군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며 아부하기 바빴고 광해군도 정원군의 장례식에 특별 대우를 해준다. 정원군의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아들과 달리 겉으로는 아무런 한도 드러내지 않았다.[27] 그렇다고 해서 인조가 아무런 세력적 지원 없이 단지 정의감으로 뭉쳐서 된 반정 조직의 추대로 왕이 된 것은 아니다. 반정의 중심 세력들은 당파로는 서인인데 가장 핵심적인 사람들이 외가인 능성 구씨, 인조의 백부 신성군의 장인 신립의 아들인 신경진,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전사한 김여물의 아들 김류 등 인조와 직간접적인 연계성이 있는 인물들이였다. 그리고 선조의 아들들이 다수 생존해 있는 당시에 선조의 손자, 그것도 적손도 장손도 아닌 서자의 아들 따위가 보위에 오른다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28][28]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를 제외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건 능양군이었다. 그리고 선조의 손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즉 선조의 첫 손자이다.[29] 1623년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유전(柳湔) 역모 사건에 대한 유응형(柳應泂)의 고변. 『인조실록』 권2, 인조1년 7월 27일 을묘(乙卯)[30] 다만 책봉을 받지 못한 인조 정권이 행정권과 사법권, 군사권이 갑자기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31] 이것은 당시 광해군이 외교전술이 제법 잘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의 활동은 명나라에서 우호적인 태도를 만들기에 충분하였고, 그런대로 명나라의 요구에 잘 반응해주었다.(광해군시기인 누르하치와 인조시기에 홍타이지는 父子간임에도 정책적인 방향이 많이 달랐는데, 누르하치가 조선에 대하여 그런대로 유화적이고, 평화적으로 한 것명나라의 주력군이 집중된 요동 정벌에 집중과는 달리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넘어서 들어가기 위한 거의 마지막 단계에 있어서 후방을 정리할 필요성이 높아졌다.)(명나라는 광해군에게 약간의 빚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전란기 광해군의 활동에 우호적인 것과는 달리 세자 책봉에서는 많은 수의 관료들이 소극적이였다. 왜냐하면 당시 명나라에서도 태자자리를 두고 황제와 관료들 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의 세자책봉과 연계되면서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사실을 선조 역시 광해군을 위협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기에 광해군의 위치는 위태로웠다.)[32] 조선의 법도에서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로 정실이였고, 정명공주는 그녀의 딸로 嫡女였다. 광해군도 그렇지만, 그보다 더 정통성에서 취약한 인조로서는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선조의 적자는 상당히 위협적이였다. 광해군은 전란 위기 상황에서 후계자로써의 역할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된 것이고, 능양군은 아비인 정원군으로 따져도 광해군보다 더더욱 정통성을 논할 위치가 전혀 아니였다.[33] 조선 중기의 무신 이괄은 인조 반정 때 군사적으로 지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총애를 받던 김류와 이귀처럼 다른 공신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2등 공신으로 밖에 배정을 받지 못해서 벌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권력 다툼이었다.[34] 이들을 청서라고 일컬었다[35] 인조반정의 중심인 이귀 역시 고려 때처럼 송나라(남송)와 금나라를 동시에 섬겼는데 조선도 그러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문제는 요나라 - 북송 때도 그랬다.) 문제는 명나라가 송나라와 달리 갑자기 무너졌다는 것이다. 사실 영원성 전투를 봐도,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다. 조선에 근접한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고 명나라가 바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36] 조선에 우호적이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을 칠 여력이 없던 것이다. 당장 정묘호란에서 후금이 동원한 군사는 3만밖에 안 되었고, 조선은 북방 방어선이 아작이 나있는 상태에 후금군은 안내꾼들까지 데리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강화를 맺고 물러나야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37] 정묘호란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홍타이지에게 조선을 치는 것은 안 그래도 유지하기 힘든 군대를 완전히 말아먹어 후금이라는 나라를 멸망에 몰아넣는 삽질이 될 것이었기에, 조선을 칠 생각은 상황상 못했을 것이다.[38] 인조 정권 초반 조선은 후금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서북 방면의 거점 방어를 최우선시 하였고 그에 따라 방어 체계도 수립됐다. 그러나 이괄의 난 으로 인해 약화된 서북 지역 방어 대신, 임진강, 한강, 강화도 방어를 가장 중요시하는 수도권 방어 체계가 중심이 된다. 수도권 방위를 위해 총 2만 4천에 달하는 병력을 부랴부랴 증강시키기도 하고, 수세적 방어 전략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후금의 진격 루트를 1. 의주 - 용천 - 철산 - 정주 - 안주 2. 벽동 - 창성 - 삭주 - 귀성 - 태천 - 영변 - 안주 두 가지로 예상하고, 방어 진지와 산성 정비 등 방어 태세를 강화하여 중앙군인 훈련도감의 병력 250명과 충청 / 전라 / 경상도 = 하삼도 병력 5,000명을 서북 지역에 이동시키며, 함경보 남부 병력 2,000명을 평안도로 배치하는 등, 이괄의 난으로 인해 1만 미만(8,500명)이던 변경 수비 병력을 16,000명으로 증강하였다.[39] 인조가 김자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애당초 여러 논의를 할 때 자신이 김자점의 허접한 전쟁 대처 논리를 박살내 놓은 바 있다. 하지만 결국 김자점을 도원수로 기용하지 않나, 김자점 외에 도원수에 어울릴 만한 인재들을 배제하지 않나... 병자호란에서 수수방관했는데도 용서할 정도였다. 최소한 선조원균을 잘못봤을 때처럼, 큰 사고를 안 치니 평범한 장수는 되는 걸로 오인한 것이 아니다. 인조 본인이 딱히 김자점의 군사적 능력을 과대평가했다기보다는 김자점이 무능할지언정 최소한 이괄처럼 자신에게 반역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괄의 난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이괄처럼 유능한 인재에게 군사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가 그 인재가 제2의 이괄이 되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훗날 반역을 시도했다가 발각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비록 인조 사후 효종 대에 일어난 일이지만) 인조의 인재 등용 능력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쯤 되면 국방이나 자식의 미래보다는 인조 본인의 권력 유지를 더 중요시한 것 같다[40] 아이러니하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터지기 직전에 인조의 가족들이 사망한다. 정묘호란 직전에는 인조의 친모인 계운궁이, 병자호란 직전에는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승하한다. 게다가 인열왕후가 승하하기 전에는 대왕대비 인목왕후가 승하한 직후여서 사적으로 복잡한 상황이기도 했다.[41] 다만 병자호란의 경우에는 일부 역사학자들이 원인을 조선이 아니라 청에서 잡고 있다.오수창 교수 또한 그러하였으며, 한명기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인 역사평설 병자호란에서 그렇게 주장한 바 있다.[42] 명이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건 이자성이 들고 일어난 1639년 이후의 일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다만 수차례 화북을 대대적으로 약탈하여 조선에서 약탈한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축을 노획하였다. 이자성이 중요한 것은 이자성으로 인해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삼계는 만리장성의 책임자였다.[43] 광해군 때 이중외교는 오직 광해군 혼자 했다. 집권당인 대북파는 대명의리를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이 앞장서서 대명의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0만 대군을 출병시키고, 기근의 허덕이는 조선 백성을 위해 100만 톤가량의 곡식을 보냈다. 물론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독단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국운이 쇠하고 있던 명에도 크게 부담이 되었으며 만력제는 '고려천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었다. 참고로 슬쩍 발을 빼려는 명나라를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44] 방비 분부의 경우 상당히 감정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국서 투하 이전에 청 사신들이 돌아가자 바로 다음 날부터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조정에서 나오게 된다.[45]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이다. 원래 김류가 군을 지휘해야 하지만, 김류는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도원수로 군을 통솔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패했다고 해도 계속 청나라를 압박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가 수도를 포위한 것은 장기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자점을 임명한 사람이 바로 인조다. 장만은 비록 능력은 부족해도, 능력있는 부하에게 지휘를 맡기거나, 부하를 보호하는 등 개념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러지 않았다.[46]강화도 함락 상황이 걸작인데, 당시 인조의 지휘관 인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자세한 것은 김경징 문서 참조.[47] 그렇다고 인조가 계속 왕권을 회복 못하고 허수아비가 된 것은 아니다. 후에 인조가 소현세자의 아내 민회빈 강씨를 ‘개새끼(狗雛)’라고 부르며 없는 죄를 만들어 죽이고, 소현세자 쪽 손자들을 유배 보낼 때는 온 조정 신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뜻대로 밀어부쳤다.[48] 삼전도비는 이 사진에 나온 위치에 있지 않고 2010년에 석촌호수 공원으로 옮겨놓았다. 고증에 따르면 정확한 위치가 석촌호수 물속이라고 하며(당연히 조선 시대에 물 속에 세운 게 아니라, 원래 삼전도비를 세운 위치에 석촌호수의 물이 찼다는 의미다.) 물속에 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공원 내부에 세웠다고 한다.#[49] 실제로 이 시기부터 반중 감정이 엄청 강해져 나중에 만보산 사건 같은 일도 벌어지게 된다. 문제는 그 대안으로 택한 나라가...[50] 그는 동학 운동을 촉발케 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선정비도 공격한 이력이 있으며, 국가적 치욕의 장본인인 인조의 사당도 공격 타겟에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 남자는 2012년 12월노태우 생가 방화 용의자로 붙잡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정의 실천 행동당이라는 진보 단체 소속으로 밝혔으며, 방화 현장에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 편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51] 그러나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책임은 인조가 지고 있다.[52] 박시백은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만큼 신하들이 반발하면, 그 이상은 문책하려 하지 않았다.[53] 설사 인조가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더라도 병자호란으로 인해 왕권이 맨틀을 뚫고 들어간 상황인지라, 신하들 때문에 제대로 정책을 시행할 수도 없었다. 당시 인조의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예로 들자면, 삼전도의 굴욕 이후 한양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신하들이 자기가 먼저 배를 타겠다고 인조를 밀치면서 탈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임금을 밀치고 자기가 먼저 배를 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역죄였다.대체 반정 왜 했냐[54] 물론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라든지 군사적으로 불온해보이는 움직임 등을 감시하는 등의 간섭은 있었지만, 그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이는 중원 정복에 집중하느라 조선에 대한 간섭에 한계가 있었던 것에 가깝다. 만약 당시 청나라가 중원을 공격하면서도 조선에 대해 온갖 간섭을 했다면 조선에 간섭하는 데 집중하다가 중원 정복에 차질이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일어났을 것이다. 청나라는 여몽전쟁 당시의 몽골 제국과 달리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운좋게 한민족을 굴복시키고 중원 정복도 운좋게 해낸 것에 가까우니 말이다.[55] 이 때문에 현종 사후 당시 세자였던 숙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56] 흉년이 심할 때 공물가를 쌀로 대신 내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57] 광해군대동법에 회의적이었고 재위 초엔 대동법 확대 요청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이는 교과서상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58] 이 같은 제도상의 폐해는 고교 한국사 과목에서도 비중있게 가르칠 정도다. 시험에서도 영정법의 취지만을 설명해서 마치 실제로 괜찮았던 제도마냥 낚는 페이크성 출제가 많다. 게다가 세수 보충을 위해 궁전 경비용으로 쓰는 땅인 궁방전, 관청 경비용 토지인 관둔전을 대폭 증가시켰는데, 이 토지에서 걷는 세금들은 호조 주관의 중앙 재정에 편입되는 세금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조 입장에서는 면세지가 잔뜩 늘어난 셈이고, 실질적으로 국가 재정 증대 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정설.[59] 웹툰 조선왕조실톡 단행본의 해설을 맡은 이한은, 인조를 본인이 생각하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군주로 뽑았다.[60] 조선최악의 왕으로 평가가 짙어서 능양군으로 부르고자하는 움직임도 있다.[61]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나 먼 후손 사도세자의 고평가 이유와 비슷하다.[62] 게다가 선조는 임진왜란 이전 25년만 본다면 명군의 반열에 들어도 모자라지 않은 임금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명으로 도주하려던 것과 이순신이나 곽재우 등 명장들을 멀리하고 원균이나 유영경 같은 아첨꾼을 총애한 것, 아들 광해군을 핍박하여 반미치광이로 만든 것만 제외한다면 훌륭한 임금이었단 것이다. 다만 이 세 개가 전부 엄청난 실책이었다.[63] 인조와 세조를 1대1로 비교해보면, 인조는 세조에 비해 쿠데타의 명분은 충분했으나, 인재풀은 취약한 공신 관리로 비판받는 세조보다도 빈약했다.[64] 중종의 경우는 인조와 반대로 인재풀이 너무 넘쳐 고민이었다. 무슨 소리냐면 연산군 시절 인물들이 그대로 이어져 이런저런 폐단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공신을 정리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조광조 때 제기된 일이지만, 실은 즉위 초에도 이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65] 최명길은 조선 시대에 유일하게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한해에 모두 급제한 괴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초시생이 한 번에 합격한 셈. 인조 정권에서 군계일학의 현실주의자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청의 파병 요청을 극렬 반대하여 부결시켰으며, 명나라와 몰래 연락을 취해서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환향녀 박대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도 반대하는 등 종종 인조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결국은 축출당했기에, 박시백의 조선 왕조 실록 인조 편에선 유일하게 동정과 옹호를 받는 인물이다. 최명길 외에 비판 안 받는 인물은 이귀 정도?(이쪽은 인조 10년에 죽어 별 책임이 없어서 그런지 옹호도 비판도 없다.)[66] 당장 정충신, 남이흥에 대한 인조의 대우를 보면 결코 인조가 능력을 알아봐서 최명길을 써 준게 아님을 알 수 있다.[67]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7017_001[68]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26_001[69]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806021_001[70] http://sillok.history.go.kr/id/kra_11105012_002[71] 이는 당파적으로 봐도 그런 면이 강한데 북인은 애초 인조반정 이후 싹 쓸려나가서 비중이 공기가 되었고 남인은 그냥 서인 눈치보기 바빴다.[72] 반면에 인터넷 역덕 커뮤니티의 광해군까들이 인조 반정의 결정적인 원인인 양 부각시키는 궁궐 공사를 비판한 내용은 스무 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산 상태에 이르러 10년이 훨씬 지난 후인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전쟁 수행 능력에까지 심각한 지장을 주었다, 그러니까 양 호란의 졸전도 인조 잘못이 아니라 광해군 탓이다'(이런 얘기는 인조 정권의 인사들도 한 적이 없다)라는 몇몇 네티즌들의 주장과 달리, '국가 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지적한 내용은 전무하고, 민가를 다수 철거했다는 것과 공사를 제때 마치지 못했다는 것을 문제삼았을 뿐이다. 문서 나머지에서도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를 강조했을지언정, 정부 재정의 위기를 암시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오항녕이 광해군대 궁궐 영건 비용을 국가 재정의 20% 이상으로 본 것은 당대의 명확한 통계 수치를 인용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추론에 불과하며, 설사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이를 '국가 재정 파탄'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적어도 반정 세력은 그러한 '재정 파탄'을 —그런 게 있었다는 증거도 없지만,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최우선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73] 광해군의 이중외교는 그 자체에 의의가 있지만, 조선이 명의 속국이라는 점에서 당연히 내부적으로는 명나라를 돕고 있었다. 광해군 당시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 정벌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약조를 받은 뒤부터는 대대적으로 위협이 되는 후금을 견제해왔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 당시에도 징병칙서로 인해 지원군을 보냈으며, 겉으로는 청나라와 친하는 척만 했지 후방에서 계속 칼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북방에 군사들을 배치시키고 각종 군사 기지를 설치하는 등, 대외적으로 우호를 천명하면서도 후금을 견제하고 압박하는 등의 노력을 한 덕분에, 명나라는 차차 후금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74] 또한, 청나라에게도 조선과 굳이 전쟁할 명분조차도 없었다. 광해군을 서자 취급을 해도 엄연히 선조에게 인정받은 왕이며, 명나라에게도 인정을 받았었다. 거기다 이중외교에 군사들을 보냈어도 자국의 사신들에게 무례하게 대하지도 않고, 군사 동원도 명나라의 요구로 간 것이기에 이를 무마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정변으로 구실을 만들어 놓았으니, 어떻게 보면 조선이 스스로 일을 만든 셈이다[75] 선조는 임진왜란 때나 광해군에 대한 문제를 빼면 특별히 실정이라고 부를만한 정책이 없는 양호한 왕이다. 당장에 왜란 전후 처리를 보면 과연 이 인물이 멍청하다고 왜곡되는 선조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절한 외교 정책과 복구 정책을 펼쳤다. 심지어 여진족의 강성을 우려해 여러 번에 걸쳐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적당히 여진족을 예우하는, 등거리 외교의 시초를 세운 것이 선조다. 그래서 그 당시 선비들이 선조는 일본을 막아내지 못하지만, 여진족은 잘 대처했다고 한다.[76] 사실, 역사학자들도 선조가 임진왜란이 아니었다면 조선의 명군주라고 평가할 정도로 그나마 평타치던 왕이었다고 평가했었다. 무엇보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순신을 살려준 적이 있었다. 녹둔도 전투 당시에 이순신이 이일이 뒤집어씌운 누명으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선조와 대신들은 전투가 일어나기 전의 상황을 꼼꼼히 조사해 이순신이 불리했음에도 호민들을 구출해왔음을 알아냈고, 이에 "이순신은 명백히 적과 싸워서 이긴 장수인데 사형은 좀 심하지 않나?"하고 백의종군으로 마무리 지었으며, 나중에 끝나고 주변인물들의 추천에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더불어 이순신과 같이 싸워 같이 이기고 같이 이일의 모함을 당해 같이 백의종군한 이경록은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둘 다 굉장한 고위직이다. 비록, 몽진과 나라를 버리고 가려는 것 때문에 욕을 먹어 졸렬해지기는 했지만,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한 것도 선조이고, 전쟁이 끝나고 광해군에게 여진족에 대한 대처법을 마련해 놓은 것도 선조이다.[77] 도요토미 히데요시[78] 이 부분 때문인지 청은 조선을 침공한 후 조선 백성들에게 보낸 포고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온 것은 다 너네 임금 때문이다.' 라는 내용을 적는다. 즉, 이 당시인조가 보낸 도발성 격문을 읽고 그대로 받아쳐준 셈.[79] 이괄의 난의 원인이다. 이괄을 2등으로 밀고 1등에 앉힐 사람이라면 임경업쯤 되는 재원이어야 했지만 문제는 이괄보다 못한 놈들에게 이괄보다 높은 계급장을 쥐어준 것이며 이괄은 그게 빡쳐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80] 저 논리들도 반박이 가능한 게, 이미 광해군 시기에 적들이 성을 놔두고 바로 수도로 직행하면 어쩌냐며 비변사에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한 적이 있던 것, 도원수 김자점의 헛소리를 인조 본인이 박살낸 적 있으니 무능한 자인 걸 인지하지 못할 리 없다는 것, 남한산성 군량미 부족을 야기한 한명욱이 다름 아닌 인조 때 광주목사에 임명된 인물이라는 것 등으로 반박이 가능하다. 특히 김자점 직전에 있던 이들은 유능한 이들이었으므로 더 비판 받을 만하다.[81] 덧붙여 위에 옹호한 저 세 가지도 인조의 책임으로 반박이 가능한데, 첫 번째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는 데도 각 성에 군량미를 쌓아두지 않았다는 것. 두 번째는 강화도에 왕자들이 피난을 가면 그만큼 인망이 깊은 사람들로 심의 있게 뽑아야 하지만 그냥 이름으로 뽑았다는 것. 세 번째는 전쟁을 초래 했으면서도, 인조 본인이 지휘 체계 문제나 보급 미비 같은 병과 관련된 것을 많이 축소한 탓에 문제가 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런 문제가 많았는데도 인조는 청나라에게 무례한 교서를 보내 전쟁하자는 이상한 배짱을 보였던 것.[82] 城 자로 추정됨.[83] 軍 또는 兵 자로 추정됨.[84] 참고로 이 대화 앞에는 안주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이 대화 다음에는 최명길이 "기어이 척화를 하려거든 의주를 어떻게든 사수해야지 북방 방어 거점이 안주 하나여서는 안 된다. 기왕이면 정부가 의주까지 나가서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투 태세를 취하자."는 요지의 진언을 올렸다. 최명길의 말에 인조는 깜놀해서 "너님이 의주를 반드시 지키자는 건 너무 막나가는 말 같다[卿之必守義州之言, 似乎過矣]"고 했다.[85] 당장 의주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보자. 바로 압록강과 최고로 근접한 위치고 도하하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는 곳이다.[86] 다른 말로 하자면 적군이 공격해온다면 공격당할 첫 번째 지역이 된다는것이다. 그런곳을 방치 수준에 가까운 방임을 하자는 것이다. 적어도 임진왜란의 선조는 그정도 판단을 하진 않았다. 선조가 전쟁에 대비해 많이 공을 들은 지역은 일본군의 공격 제1, 2순위가 될 수 있는 경상, 전라였기 때문 이중에 경상도 방면은 실패했지만 전라도에서는 성공해서 임진왜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선조만도 못한 짓을 한 셈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쳤으니 더 못한거 아니냐 싶겠지만 선조떄는 '만일 일본이 한양까지 점령한다면?' 에 대응할만한 메뉴얼 자체가 없었다. 반면 인조는 청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나 남한산성으로 도망치자는 메뉴얼대로 한 거다.[87] 해당 회의 기록은 실록에도 실려 있는데, 백마성의 병력과 물자를 옮기면 의주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김류의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식 대책에, 인조가 "지금 대책을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면서 말로는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거 아니냐[今不能預加措備, 而徒曰可守, 豈不異乎]"며 황당해 하는 반응으로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1. 의주를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대책도 없으면서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건 "이상하다"와 2. 의주를 지킬 수 있는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니 지키는 거 일단 "포기하자" 둘 중에 어떤 것이 저 회의의 결론에 가까운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88]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1월 15일 을묘 1번째 기사, 2번째 기사 참조.[89] 이는 인조정권의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광해군은 정통성 있게 왕위를 물려받은지라 나름대로 중립정책을 할 수 있었다지만 인조는 광해군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했고 그 '찬탈'한 명분은 폐모살제와 재조지은이었다. 문제는 폐모살제는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서 대충 실천에 옮겼는데 재조지은은 명나라에 도움이 되어야 이행할 수 있는 조건인것 인조나 인조정권의 수뇌부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괜히 후금-청을 건드렸다가는 우리나라만 망할 거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청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또 재조지은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일이다. 결국 인조정권 성립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인조정권이 그렇게나 청을 건드리진 않으려고 했음에도 인조정권 자체가 청나라에 호의적이진 않은건 청이나 명이나 다 알았다.[90] 다만, 그럼에도 이것은 후대에도 평가가 좋게 받기가 어려운데 다름 아닌 인조가 나라를 위해 정권을 잡았다기 보다는 권력을 위해 정권을 잡았다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태생적인 한계여도 누가 보든 간에 청나라를 간섭하지 않고 이것은 명과 청의 싸움으로 두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거기다 광해군의 정책처럼 자신들은 그냥 청에게 잘해주는 척, 명을 도와 청을 위협하는 정도로 정책을 나아갔어야하는데 인조는 그저 정치적 명분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그냥 친명배금 정책을 펼쳤다가 나라에 전운을 감돌게 한 것이다.[91] 물론 최씨 정권이 유능한 자들은 아닌 만큼 정쟁 중 김경손을 처형해버리는 등(...) 이 과정에서 병크가 상당수 터지기도 했다.[92] 실제로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 등 반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4명은 군관을 각각 400명씩 거느릴 수 있었다. 당시 이귀야 죽고 없었지만 아직 나머지 셋은 살아있던 데서 보면(이후 이서는 병자호란 도중 사망) 무려 12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사병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는거다.[93] 전쟁에서든 군대에서든 야전은 필히 중요한 것 중 하나다. 성웅 이순신도 야전이나 정찰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를 소홀히하면 곤장을 때렸다는 기록도 있었다. 거기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야전군 중 한 명이 보초를 서다가 졸자 자신이 대신 서서 그 병사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듯이 야전과 정찰 및 보초는 전장에서 제일 중요하다.[94] 이괄 역모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인조는 자기 사람인 이괄을 보호하기 위해 그 아들을 붙잡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아들을 역적으로 만들어 놓고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지휘하는 아버지가 가만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인조가 비밀리에 이괄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이괄의 난은 반쯤 인조가 일으킨 사건인 셈이다. 믿을 거면 확실히 믿고 내칠거면 확실히 내쳐야 했는데 어설프게 행동해놓고 자기가 바라는대로 되게 해달라고 한 셈[95] 하지만 국방 강화를 이때 얕볼 수 없는 것이 정충신이 광해군 대의 절반만 해도 후금의 방비를 막을 정도라고 최소한의 조건의 2배 이상의 방어를 해둔 상태였다. 즉 수비전에 필요한 전력은 충분하다못해 넘치도록 해둔 상황이었다.[96] 하지만, 이 공사는 어떻게 보면 왕권강화를 위한 시각도 있는데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을 보면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두고 있었다. 즉, 신하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것이 어떻게 보면 서서히 강해지는 왕권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서 인조를 추대한 것이고 인조는 자신을 왕으로 올려준 사람들에게 계속 작위를 퍼주다 보니 이 꼴이 난 것일 수도 있다.[97] 패전의 결정적인 요인을 만든 작자들 중 보은인사라고 보기 힘든 건 광주목사 한명욱 정도인데, 이 인간이 내린 멍청한 결정을 보면 그마저도 능력을 보고 뽑았다고 보긴 힘들다.[9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선조하고 비교한다. 여기서 선조와 인조가 같은 장면에 나와서 선조는 "폐세자 희망 파천 1회" 라고 말하고 인조는 "폐세자 실현 파천 3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조의 말이 압권 "2:0 니가 이겼어"[99]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형은 흥인군만 알고 있지만 그 위에 흥녕군흥완군이란 형이 두 명 더 있었다.[100] 후술하겠지만 청나라는 장자세습의 전통이 없었다. 오히려 소현세자 일가가 귀국한 시점에서는 심양에 남아있던 봉림대군이 청나라 영향권에 가장 근접한 왕족이었고 이런 경향은 홍타이지가 인조에게 보낸 협박문서에 세자와 봉림대군을 동격으로 놓고 인조를 협박 한 것으로 확인된다.[101] 종법 질서에 따르면 만일 장자가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고 죽으면 차자가 잇는게 아니라 장자의 장자 즉 장손이 뒤를 잇는다.[102] 인조와 세손의 나이차, 혼란스러운 대외 상황등[103] 아주 설득을 안하려고 한것은 아니고, 원손이 왕노릇하기엔 부족해보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다가 김육 등의 반발로 안먹히자 뒤늦게 원손의 나이를 핑계댄다. 물론 이후에 소현세자 일가에게 했던 잔혹한 처사를 볼때 딱히 진정성은 없어보인다.[104] 물론 이들 중 일부는 너무 일찍 올려서 누가 봐도 넌씨눈 소리를 들을 짓을 했기는 했지만 내용 자체는 맞는 말이다.[105]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보고 있었다면 당연히 이런 류의 상소는 승계권을 손보려했던 인조의 의중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신하들이 이런 내막까지 알았을 리는 없지만...[106] 다만 이후 강빈 사사만은 반대했다. 참고로 김자점은 이때도 영합했다.[107] 당시 김육은 원손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108] 물론 계승권이 강한 사람의 존재는 왕위 계승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숙청은 앞의 요소보다 왕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박살내는 행동이며 실제 왕위 계승권과는 동떨어진 본인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큰아버지무차별적 숙청도 한몫했다. 실제로 후술하겠지만 오히려 소현세자 일가를 숙청한것 때문에 봉림대군은 평생동안 정통성에 책을 잡히게 되고 증손자까지 그 피해를 보게 된다.[109] 실제로 추측의 단서가 있는게 강빈의 궁녀들 중 강빈을 배신하고 살아남은 신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신생이 강빈이 저주물을 묻은 곳을 안다며 궁궐 곳곳에서 발굴 작업을 하게 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어? 그럼 인조에게도 정당성이 있는거 아니야?" 싶겠지만 옥사 직후에 이 일을 한 것이 아니고 옥사가 끝나고 1년 후에 한 것이다. 당시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인조 입장에서 명분이 취약한 상황인데 며느리가 저주 행위를 했는게 드러났으니 이걸 명분삼아 강빈을 제거할 수 있었을 테고 숨길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당시도 아니고 1년 후에야 꺼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110] 출처 : 승정원일기[111] 사관은 내전의 칭호를 사용한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마저도 강빈이 시켜서 한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112] 애초 인조는 당시 강빈을 감금한 뒤 문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음식을 넣어주라는 다시 말해 옥살이 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인조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빈도 강빈이지만 감시하던 사람들도 조져야 할 일이다. 문안은 말할 것도 없고[11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비망기의 내용 하나하나를 반박하며 "논술, 이렇게 하면 망합니다." 라며 대차게 깠다.[114] 김류는 봉림대군 승계를 지지한 몇 없는 대신이였다. 이런 인물마저 임금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보면 김자점을 제외한 나머지 대신들이야 더더욱 반대했을 것이다.[115] 인조 47권, 24년(1646년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2월 7일(갑신) 2번째 기사, 2월 8일(을유) 3번째 기사, 2월 9일(병술) 1번째 기사[116] 다만 이 말 자체는 역대급이라 하기 어렵다. 조선 왕들도 사람이고 조선 왕들 중에서는 성깔 더러운 왕들도 간혹 있었기에 입이 더럽고 험한 왕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관 된 입장으로서 왕의 욕을 그대로 싣는건 영 어니올시다였기에 대게는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하였다.' 등으로 필터링을 한다. 고로 이런 류의 내용이 나오면 왕이 표현 그대로 '차마 듣지 못할 말'을 했다고 보면 된다. 역대급이라 꼽히는 이유는 따로 있는데, 앞에서 말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케이스이기 때문. 실록 전체를 뒤져봐도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쌍욕을 그대로 써놓은 대목은 단 두개밖에 없다.[117] '개새끼' 라는 표현 역시 실록에서 순화를 해서 이 정도였지 실제로는 더 심했을 것이다. 즉 인조의 이 하교는 가히 역대급이었다고 하겠다.[118] 작은 도련님을 뜻하는 것으로, 인평대군을 지칭하는 것이며 인조 또한 인평대군을 말하는 듯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봉림대군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119] 당시 강빈 사건은 철저히 인조가 궁궐안에서 독단적으로 조사했으며, 의금부 등 정부조직이나 신하들을 통한 정식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20] 왕이 신하의 도리 운운하는 상황에서 잘못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려 죽기 십상이다[121] 후술하겠지만 청의 영향력&왕위 위협은 소현도 해당되었지만 봉림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122] 그리고 사실 효종 입장에서는 김자점 건은 억울한 일인데 먼저 김자점은 인조가 죽자마자 산림 세력을 중심으로 한 이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았는데 그래도 효종은 김자점을 냅뒀는데(여기에는 인조가 김자점과 이시백은 잘 대우하라는 말을 생전에 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자점이 청나라에 자기가 이 꼴이 된 것을 알리는 등 자책골을 넣었고 이거 때문에 유배당했고 얼마 안가 김자점의 아들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고변이 올라와 결국 김자점이 제거된 것이다. 효종도 나름 배려해줄만큼은 해준 셈[123] 그런데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고 조씨의 아들 숭선군은 효종 기간 내내 영 불미스러운 일이 뒤따랐다. 본인이 아내 때려치고 어머니가 붙여준 첩과 노닥거리다가 여기에 화가 난 아내가 대비를 찾아간 일이(친척지간이었다.) 김자점의 옥사로 이어지고 김자점의 옥사 때는 왕으로 추대되려고 했었지를 않나 아내를 박대한 사실이 들키지를 않나 심지어 유배지에서는 "내가 만일 왕이 되면..." 식의 망언을 했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다.(이때는 그 말을 들은 노비들만 죽었다.)[124] 성종의 경우 부족한 정통성 때문에 한평생 훈구와 사림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였고 영조는 선왕 암살 의혹 때문에 아예 대규모 반란까지 벌어진다.[125] 그래도 영조의 경우 본인이 머리를 잘 써서 즉위 후반기에는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다.[126] 효종 본인도 청나라에 볼모로 가서 8년동안이나 청나라에 머물렀다. 그러고도 북벌이 진짜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면 효종은 심각하게 현실감각이 결여된 것이다.[127] 더 안습인 것은 성종은 세조가 붙여준 권신인 장인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훈구파, 영조는 노론이라는 명백한 지지세력이라도 있었는데 효종은 그것도 없었다. 이완이 있었지만 이완은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라 효종 개인 안전이면 몰라도 조정내 정쟁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128] 다만 숙종은 환국을 역으로 기회로 만들어 강한 왕권을 행사한데다 조부 효종의 정통성에 시비를 걸었던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려 죽이기까지 하는 등 왕권을 아주 강하게 행사했다. 사실 집권 산당도 현종이나 숙종 대에서는 정통성 문제로 크게 태클걸지는 않았다. 송시열이 숙종대에 이르러 효종과의 독대 내용을 공개해 효종에 대한 충심을 입증하려 한 것만 봐도 그렇고 왕위가 현종으로 넘어간버린 시점에 아무리 정통성 운운해도 막상 대안도 없는 상황에선 송시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긴듯. 물론 효종의 정통성이 현종과 숙종에게 이어지므로 효종의 정통성 부정 자체가 이들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는 있다.[129] 정작 즉위 기간 내내 붕당을 경계했다. 경연 도중 이귀가 붕당 운운하자 크게 화를 냈다는 기록도 있을정도.[130] 정치를 떠나 자신의 친손주들과 며느리를 제거하려고 바득바득 기를 쓴 것만 봐도 그냥 패륜이다. 며느리야 혈연관계가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손주들은 엄연한 자신의 핏줄인데...[131] 물론 확대했던 대부분의 지방은 1년 만에 강원도를 제외하고 취소했기에 강원도만 확대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동법을 확대하기도 쉽지 않았다.[132] 다만 이 숙청으로 정작 봉림대군은 본인뿐만 아니라 아들 손자까지 정통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남기게 된다[133] 단, 최명길은 조선과 인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도 믿지 않았으며, 정충신의 경우는 광해군 시절 군사첩보의 핵심 인력이었지만 인조 시대에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정충신은 염탐과 행정, 군사배치 등이 특기인 인물로 외교사절로도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짜 외교사절보다는 홍타이지를 회유를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후금의 군사 배치 등 여러 정보들을 염탐하기 위해 광해군이 밀명을 내린 것이었다. 현장요원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이괄 같은 맹장을 좋아해서 그런 인재를 썩혀둔 것이 문제였고, 후기에는 그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다가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그리고 임경업은 국문을 당하다가 죽었다.[134] 물론 이 모든 업적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흐지부지되어 제몫을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135] 다만 즉위 초기에는 조명연합군을 박살낸 후금의 역량을 무시해 오랑캐 집단정도로 치부하거나, 병자호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선전포고 격문을 인조의 강짜로 보내는 등 판단력이 우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136] 조일수 (2017). 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 역사비평, 343-371-[137] 그러나 군사 쪽으로 정충신과 남이흥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괄의 난 직후 후금에 대비해 방비책을 제시하는 둘을 면전에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남이흥은 사실상 소모품 취급으로 사지로 몰아넣기까지 했다.[138]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139] 조영헌, 「'17세기 위기론'과 중국의 사회 변화 - 명조 멸망에 대한 지구사적 검토」, 『역사비평』107, 2014년, pp.183 ~ 192.[140] 김성우.「光海君 치세 3기(1618년 ~ 1623년) 국가 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 경제의 붕괴」(『大邱史學』118, 2015년[141] 엄밀히 말하자면 청나라가 천하를 제패한 상태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난 게 아니라, 반대로 천하를 제패할 수 있을지 없을지 미래가 불투명했던 청나라가 병자호란에서의 승리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 천하를 제패한 것에 가깝다.[142] 청나라가 멸망시킨 건 통일제국 명나라가 아니라 그 명나라의 망명왕조인 남명이었다.[143] 남명이 빠르게 정권을 안정시키고 온전히 살아남아 중원을 양분 했다면 조선과 남명의 연합으로 청나라가 역관광을 타거나 적절한 힘의 균형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흘러갔을 수 도 있다.[144] 여기에 대해서는 '고려는 군사력이 충분했지만, 조선은 아니었잖아?'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삼전도급 굴욕은 아니었어도 2차 여요전쟁에서 상당한 위기를 격었다. 정묘호란의 경우는, 서희의 외교 담판 급은 아니더라도, 조선 입장에서는 출혈을 최소화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도 성공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고려는 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을 박살낼 기회가 있었고, 조선은 기회가 없었다는 차이가 있지만.[145] 정초청에 현종 대(1669년) 신설된 훈련 별대를 1682년 통합하여 만들어진게 금위영이다.[146] 목장 관리는 고사하고 감목 관직조차 광해군 대에 없어졌다가 인조 대에 복구된다.[147] 그래도 제법 정략이 늘었던 제위 후반의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 이후 후반기의 정국을 철저히 자기 뜻대로 끌고 나가며, 민회빈 강씨를 사사해 소현세자 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세자(효종)는 물론 세손(현종)으로까지 이어지는 후계구도까지 완성시켜놓고 죽는다.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 같은 이들이 대중매체에서 인조를 쌈싸먹는 인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이들은 그저 인조의 장기말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인조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이들은 싱겁게 제거된다.[148] 물론 차이는 있다.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승계시켰고 선조는 광해군을 마음에 안들어했을지언정 결국 교체하지 못하고 광해군의 승계를 인정했다.[149] 이괄이 인조에게 전혀 괄시 받지 않았음은 이괄 문서를 보면 된다. 이 정도로 배려해 줬는데 끝까지 왕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한 이괄이라는 인물도 한심하기는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150] 사실 정조 문서 자체도 코미디인게 인용된 학술연구들이 죄다 '정조야말로 조선의 정치제도를 극적으로 망가뜨린 세도정치의 주범'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정작 문서 본문에는 '17세기부터 이어졌던 외척 참여의 흐름을 정조가 막으려다가 어쩔수 없이 김조순 같은 외척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쓰고 자빠졌다.[151] 상소에서 인조가 인심을 못 잡은 증거로 이괄의 난 때 백성들이 따라가지 않은 걸 언급한 걸 가지고 인심을 못잡았으니 민생도 못잡았다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인조는 반정 일으킨지 1년도 안 되어 이괄한테 통수를 맞았다. 광해군의 난정을 수습하기도 힘들고 아직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걸 어필하기도 힘들었던 인조를 따를 백성이 없는게 전혀 이상한게 아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수습하려면 그건 관중, 소하, 제갈량 급 재상급은 아니더라도 그걸 따라할만한 인재풀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재는 이미 이전에 광해군이 옥사로 대부분 다 갈아드셨다. 거기에 상소 내용도 결국 그러니까 잘하라는 소리로 쓴 거지 인조가 무능력한 병신이라고 까는게 아니다. 오히려 인조에겐 이 상황을 수습할 능력은 있는데 아직 옛 임금들처럼 군주로서 능력이 완전히 발휘된거 같지 않으니 분발하라는 소리다.[152] 영조의 경우는 필체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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